8월 1일 신해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을 행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날 조정에 임어한 것은 실로 종사(宗社)를 위하고 성궁(聖躬)을 위해서 만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이다. 심정을 억제하고 슬픔을 참으면서 부득불 마지못해 따르기는 하였으나, 경외(京外)의 공헌(貢獻)에 관한 의절에 이르러서는 어찌 전일과 달리 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주상과 분등(分等)이 없을 수 있겠는가? 경외를 막론하고 전궁(殿宮)의 공상(供上)은 아울러 전대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숭(尊崇)하는 예(禮)는 갑진년057) 의 등록(謄錄)에 의거하여 3년이 지난 뒤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연명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불세출(不世出)의 성자(聖姿)로 큰일을 하려는 성지(聖志)를 지니셨는지라 우뚝히 천성(千聖)의 통서를 집대성(集大成)하시어 그 지위는 군사(軍師)를 겸하였으며 개연(慨然)히 옛날 삼대(三代)의 융성한 정치를 만회하시어 한(漢)·당(唐)의 정치가 비루하게 되었으니, 그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은 사책(史冊)에 이루 기록할 수 없고 큰 규모(規模)와 원대한 모유(謨猷)는 후손에게 넉넉하게 전해주게 되었으며 지치(至治)를 이루고 법제를 정하여 바야흐로 대유(大猷)가 성실히 잘 행해지기를 바랐는데, 신민(臣民)이 복이 없어 황천(皇天)이 가슴을 에는 슬픔을 내렸습니다. 뭇 신하들을 버리신 날에 이르러서도 유택(遺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깊고도 외진 산골에서도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서로 잇따랐으니 무릇 온 동토(東土)에서 생기를 머금고 혈기(血氣)를 지닌 무리와 새와 물고기, 동물과 식물들까지도, 아! 대왕의 덕을 잊을 수 없다고 하지 않을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어린 나이를 당하여 크게 기업(基業)과 통서(統緖)를 이어받으셨는데, 성질(聖質)을 하늘에 타고나셨으므로 예학(睿學)이 일찍 성취되어 춘궁(春宮)에 있을 때부터 영문(令聞)이 밝게 드러났으며, 계승해 보위(寶位)에 오르시니 그 영명(英明)하심이 태양처럼 환히 빛나시어 양암(諒闇)058) 중이어서 말을 하지 않으시어 시조(施措)가 있지 않았어도 천명(天命)의 돌아봄이 바야흐로 새롭고 인심(人心)의 기대가 바야흐로 간절하며, 조종(祖宗)의 부탁이 지극히 중하고 전궁(殿宮)의 자애로운 교훈이 지극히 깊으니, 이는 바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근본을 단정하게 하고 시작을 올바르게 하면 저절로 철명(哲命)을 받게 된다고 한 그런 때인 것입니다. 이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접견할 때를 당하여 어리석은 정성을 바쳐 만에 하나라도 부주(敷奏)하려 생각했습니다만,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 때문에 글을 이룰 수가 없어서 단지 계술(繼沭)이라는 두 글자로 우러러 면려하겠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요(堯)·순(舜)을 본받으려 하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계술이라는 두 글자로 강령(綱領)을 삼았으니 그 뜻을 미루어 부연하여 열 가지로 조목을 나누었습니다.
1 기거(起居)를 조심해야 합니다. 아! 전하(殿下)의 한 몸은 곧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근본인데 바야흐로 어린 나이를 당하여 크게 간대(艱大)한 서업(緖業)을 이어받았습니다. 두렵게도 혈기가 아직 공고하지 못하데다가 거듭 상중(喪中)의 애통함이 마음을 감싸고 있으니, 조호(調護)하고 보양(保養)하는 방법에 대해 더욱 마땅히 평일보다 만 배나 더하게 해야 하고 전하께서도 의당 스스로 보호하시면서 곳에 따라 더 면려하셔야 합니다. 모든 음식(飮食)의 한난(寒暖)의 절차와 복어(服御)의 온량(溫涼)의 마땅함과 흥침(興寢)의 조안(早晏)을 알맞게 하는 일과 일상(日常)의 동작(動作)에 관한 방도에 모두 절도가 있은 연후에야 위로는 전궁(殿宮)께서 오직 병(病)이나 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을 풀어 드릴 수 있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이 거의가 기대하는 소망을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이 점을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2.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하는 일입니다. 아! 옛날 우리 선대왕(先大王)게서는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초빙하고 널리 영준(英俊)들을 선발한 다음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 강학하게 하였으니, 전하에게 기대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갑자기 거창한 상사(喪事)를 당하였으므로 일에 따라 지도하여 주는 가르침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세자(世子)를 가르치는 서연(書筵)을 다시는 열 수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스스로 힘쓰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삼가 열조(列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보건대 일찍이 애모(哀慕)하는 때라고 해서 혹시라도 학문하는 방도에 대해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 공제(公除)한 뒤 곧 소대(召對)를 행하소서.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시고 성학(聖學)이 이미 성취된 때에도 오히려 이렇게 급급히 서둔 것이 저러했는데 더구나 지금은 어린 나이에 사위(嗣位)하셨으니, 배양하여 증익(增益)을 돕는 그 방도를 더더욱 하루라도 조금이나마 완만히 함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3. 선지(先志)를 천명하는 일입니다. 아! 우리 선대왕의 성대한 덕과 큰 공은 진실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만, 천지를 버티고 고금에 끝없이 뻗어갈 대의리(大義理)의 지극히 정미(精微)로운 곳에 이르러서는 금(金)을 저울 눈금으로 달듯이 호홀(毫忽)059) 의 오차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후 흉도(凶徙)들이 곁에서 시기를 엿보면서 교대로 발론하여 현혹시키고 동요시키려고 한 그 계교가 수없이 많았습니다만, 그 확고하기가 뽑혀지지 않는 저 산악(山岳)처럼 30년을 하루같이 하여 왔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자성(慈聖)의 하교에 이르기를, ‘선대왕께서는 하나도 의리이고 둘도 의리이다.’ 하시면서 거듭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환히 하유하신 거조가 있었던 것은 정일(精一)의 심법(心法)이 여기에 있고 만세(萬世)에 기리 의뢰할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신 등은 진실로 마땅히 이 모훈(謨訓)을 받들어 죽음으로써 지켜야 하겠습니다만, 우리 전하께서도 대를 이어 황왕(皇王)을 생각하여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공을 도모할 책임은 오로지 선왕(先王)의 대의(大義)를 본받아서 한결같이 선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시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4. 성헌(成憲)을 준행하는 일입니다. 아! 우리 나라는 성신(聖神)한 임금들이 서로 계승하여 4백 년 동안 석(石)을 통용케 하고 균(鈞)을 공평하게 하여 왕의 부고(府庫)에 두었는데060) , 선왕(先王)에 이르러서는 더욱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덕을 밝히고 사사(祀事)를 신중히 하며, 서옥(庶獄)을 딱하게 여겨 삼가고 치관(治官)을 동정(董正)하며, 선비를 높이고 검소함을 밝히는 교화와 풍속을 돈후하게 하며, 농사에 근면하게 하는 정책에 대한 전장(典章)이 모두 갖추어져 그 과조(科條)가 치밀하였고 용사(用捨)와 거조(擧措)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도 본디 하나의 규모(規模)가 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전하께서 삼가고 두려워하면서 서업(緖業)을 계승하여 완성시키는 방법을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아니라 오직 구장(舊章)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실추시키지 마시고, 크게 우리 선왕께서 후손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남겨준 가모(嘉謨)를 계승하여 가면 되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선왕의 법을 준행하고서 잘못되는 경우는 있지 않다.’고 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5. 정사(正士)를 친근히 하는 일입니다. 정자(程子)의 말에 ‘차라리 하루 종일 책을 읽지 않을 수는 있으나 하루라도 소인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니, 필서(匹庶)도 오히려 이러한데 더구나 군덕(君德)을 성취시키는 방도이겠습니까? 이른바 정사란 반드시 정직하고 미덥고 아는 것이 많으며, 반드시 청수(淸修)하고 준결(峻潔)하여 그 용모(容貌)가 반드시 의젓하고 그 지수(指數)가 반드시 단정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과 날마다 함께 거처하면서 지낸다면 훈도(薰陶)되고 함양(涵養)되는 것이 저절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환첩(宦妾)을 멀리하고 사부(土夫)를 친근히 하여 마치 집안사람들처럼 여겨 아침 저녁으로 늘 함께 하였는데, 이는 전하께서도 우러러 목견(目見)한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바로 숙덕(宿德)061) 을 지닌 이들을 초빙하고 영준(英俊)들을 잘 선발하여 좌우에 두고는 덕을 진전시키고 학업을 닦는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친근히 하고 예우(禮遇)하는 것을 진심으로 할 것이요 외모로만 해서는 안되고, 성실하게 할 것이요 겉치레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을 추술(追述)하는 방법인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6.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는 일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인데 반하여 나아오기를 요구하는 문은 많이 있으며, 임금은 한 마음인데 반하여 투합(投合)하는 단서는 많습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감히 드러내 놓고 직접 말하지는 못하지만 안색(顔色)을 살피면서 망설이고, 감미로운 말로 시험해 보다가 임금의 마음이 한 번 기울어지게 되면 그때는 분분하게 마구 나오고 온갖 방법으로 뚫어 보고 공격하여 다시 기탄함이 없는 것이 소인들의 통상적인 작태인 것이니, 현명한 임금은 의당 잘 살펴야 할 점인 것입니다. 작상(爵賞)이 이 때문에 설만하여지고 위복(威福)이 이 때문에 은밀히 옮겨지게 되면 나라를 좀먹고 정치를 낭패시키게 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조정이 청명(淸明)하고 태아(太阿)가 위에 있어 결단코 이런 무리들에 대한 걱정이 없을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전하께서 어린 나이에 사복(嗣服)하였고 상중(喪中)에 있는 외로운 몸인지라, 모든 사람의 정위(情僞)와 온갖 일의 득실(得失)에 대해 미쳐 두루 알고 분명히 익히지를 못한 점이 있으니, 또한 어찌 신 등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그 우려를 잊고서 일에 앞서 걱정하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7. 궁금(宮禁)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열조(列朝)의 가법(家法)은 전대(前代)보다 뛰어나서 무릇 내외(內外)의 분별을 엄하게 한 것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지금은 국가에 사고가 많고 인심이 안정되지 않은 때이어서 방한(防閑)을 무시하고 추뉴(樞紐)가 해이해지게 되는 것은 사세가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니 정칙(整飭)하고 조속(操束)하는 일을 더욱 평일보다 백배나 더 힘써야 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드나드는 급사(給使)에게도 문적(門籍)062) 을 통용하고 있으니 요행 또는 외람스러움을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되며 왕래하면서 전선(傳宣)하는 일들을 오직 설어(暬御)063) 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니 충근(忠謹)한 자를 가리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여사(廬舍)를 호위하는 군교(軍校)와 궐문(闕門)을 지키는 복례(僕隷)까지도 각기 그 분수를 편안히 여겨 감히 법도를 어기지 못하게 할 것은 물론 무릇 궁성(宮省)과 금액(禁掖) 사이를 출입하는 자에게 모두 사대부(士大夫)를 두려워할 줄 알게 된 연후에야 바야흐로 영구히 선왕의 가법을 지킬 수 있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환히 밝히는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8.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조정이 조정다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것은 기강뿐입니다. 기강이 확립되지 않으면 나라도 따라서 위태로워지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서정(庶政)에 부지런히 힘쓰시어 혹시라도 편안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무릇 큰 진작(振作)과 큰 유위(猷爲)가 있으면 거개 모두 천둥하듯 움직이고 바람불듯 행하여져 환히 빛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말단인 의문(儀文)과 격례(格例)에 대해서도 기강쪽에 관계됨이 있는 일이면 성실을 다해 애쓰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리 전하께서 유신(維新)의 명(命)을 행함에 있어 이를 신명(申明)하여 수거(修擧)하는 방법은 곧 어기지 않고 잊지 않는 것에 불과한 것인즉, 의당 그리 극심하게 걱정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심이란 타성(惰性)에 젖기 쉬운 것이며 조상(朝象)도 따라서 해이하게 되는 법이니, 만약 특별히 진작 쇄신시키는 마음을 더하여 퇴패된 풍속을 경칙(警飭)시키지 않는다면 게으른 습성에 젖은 자들은 더욱 무력하여 줏대없는 데로 나가게 되고 해이하여진 자들은 점점 더 괴리된 데로 나아가게 될까 몹시 두렵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휴식하는 것을 경칙시키고, 위엄으로 동독(董督)하여 이것으로 일세(一世)를 면려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만한 것이 없고, 또한 반드시 상은 공이 있는 이에게 해당시키고 벌은 죄에 걸맞게 한 연후에야 인망(人望)을 충족시키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9. 물정(物情)을 고르게 하는 일입니다. 아! 사물(事物)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사물의 실정입니다만, 또한 위에 있는 이의 거조(擧措)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드넓은 큰 도량을 지니셨으므로 삼무사(三無私)064) 의 마음을 봉행함에 있어 호오(好惡)와 시비(是非)가 한결같이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데에서 나왔으며 30년 동안 고심(苦心)한 것이 오직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국세가 위태롭고 민지(民志)가 판탕된 때를 당하여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쳐 왕실(王室)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쳐 우러러 신복(新服)의 교화를 도울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이는 선왕의 큰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비유컨대, 같은 배를 타고 바람을 만났을 적에는 좌우의 손을 서로 구제하듯 하고 수레를 밀고 갈 적에 화평한 기운을 잃지 않게 한 연후에야 국사를 비로소 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잘 경륜하여 조제(調劑)하는 것은 이것이 신 등의 책임이겠습니다만, 화협하게 하여 안정시키는 것은 실로 성조(聖朝)의 정치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10. 백성의 일을 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아! 백성은 곧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공고해야 나라가 편안해진다고 했습니다만, 무일(無逸)065) 에는 농사짓는 것의 어렵고 고생스러움을 먼저 진달하였고 소고(召誥)066) 에도 또한 천명(天命)이 영구히 갈 것을 비는 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성왕(成王)이 사복(嗣服)한 처음을 당하여 원로(元老)들이 지성으로 고계(告誡)함에 있어 반드시 백성의 일을 중하게 여긴 것은 또한 어찌 이유가 없이 그런 것이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열성(列聖)들께서 점차로 스며나온 은택과 선왕(先王)께서 사랑하고 돌보신 인덕이 살과 뼈에까지 젖어들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 들어가 있습니다. 딱하게도 우리 백성들이 이런 복이 없는 일을 당하였으니, 마치 어린 아기가 중간에 젖이 끊겨 모두들 먹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과 같은 실정입니다. 분명히 방악(方岳)067) 에게 조칙(詔勅)하고 수령을 신중히 가려서 반드시 감싸 보호하여 편안하게 해줄 것이요, 감히 탐오하고 잔악하여 침탈하는 습성을 부리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 오늘날의 급선무이고 선왕께서 다친 사람처럼 여겨 보살핀 덕의(德意)를 몸받는 것이 되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를 깊이 성의(聖意)에 머물러 두소서.
무릇 이 열 가지 조항을 진달하여 고한 것이 그 내용에 있어 진부(陳腐)한 것 같습니다만 또한 짐작하고 헤아려 매우 숙고(熟考)한 것이 있습니다. 대체로 기거(起居)를 신중히 하고 강학(講學)을 부지런히 한다면 근본이 확립될 것이요, 선왕의 의지를 천명하고 성헌(成憲)을 준행한다면 규모가 정해지게 될 것이며, 정사(正士)를 친근하게 요행의 문을 막는다면 조정이 올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궁금(宮禁)을 엄히 하여 안을 다스리고 조강(朝綱)을 정제하여 밖을 다스리며, 물정(物情)을 화평하게 하여 마음과 뜻을 합치도록 도모하기를 힘쓰며, 백성의 일을 중히 여겨 천명이 영구히 이어가기를 비는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기거를 근신하고 강학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 가장 본령(本領)이 되는 공부인 것이며, 선왕의 뜻을 천명하고 성헌을 준행하는 것은 더욱 의리의 관건(關鍵)에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만, 그 대강(大綱)에 이르러서는 계술(繼述)하는 효도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열 가지 조항으로 진계하여 면려한 것은 삼가 띠에 써서 잊지 않도록 하겠다."
하였다.
내각(內閣)에도 오사(五司)의 예(例)에 의거 향(香)을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각신(閣臣)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따른 것이었다.
행 호군(行護軍)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총수(總帥)를 특별히 제수한다는 자교(慈敎)가 갑자기 창황하여 정신이 없는 즈음에 내려진지라 신은 울부짖으며 부신(符信)을 받아 권도(權道)에 의거하여 명에 응하였습니다만 일찍이 며칠되지 않아 장영(壯營)의 직임으로 바뀌었고 겸하여 직숙(直宿)하라는 하유(下諭)를 받들었으니, 이는 자못 위의(危疑)스러운 즈음에 이 사람이 아니면 가당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연소(年少)한 서생(書生)으로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 이 양쪽에 의거할 만한 데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가운데 비상(非常)하게 내린 명을 요행으로 여겨 태연히 그대로 눌러앉아 있으면서 속히 풀려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명(身命)을 점검(點檢)함에 있어 유독 부끄러워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띠고 있는 직임을 환수(還收)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옥당(玉堂)에서 연명으로 차자하여 소대를 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약(藥)을 맛볼 적에 정성을 극진히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인죄(引罪)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삼사(三司) 【대사간 유한녕(兪漢寧), 사간 박서원(朴瑞源), 장령 이경삼(李敬參)·최이형(崔履亨), 지평 이안묵(李安默)·김수신(金秀臣), 헌납 남혜관(南惠寬), 정언 강준흠(姜準欽), 부교리 김희주(金熙周), 부수찬 민사선(閔師宣)이다.】 에서 합계(合啓)하여 다시 내용을 고쳐 말하기를,
"정치달(鄭致達)의 처(妻)068) 는 선조(先朝)께서 저위(儲位)에 계실 때를 당하여 성궁(聖躬)에 위핍(危逼)하고 대책(大策)을 저알(沮遏)한 것은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의 흉모(凶謀)였으나 소굴(巢窟)은 곧 이 역적이고 역적 이찬(李禶)069) 을 추대하여 종사(宗社)를 위태롭게 한 것은 홍상범(洪相範)·홍계능(洪啓能)의 역절(逆節)이었지만 그 근저(根柢)는 이 역적인 것입니다. 당초 선대왕(先大王)께서 차마 법대로 처치하지 못하고서 처음에는 가까운 섬에 안치(安置)시켰다가 다시 기전(畿甸) 가까이로 옮겨 경제(京第)로 들어오게 하기에 이르렀으며 종말에는 죄명(罪名)을 풀어줄 것을 명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의(德意)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지금 우리 전하께서 사복(嗣服)한 처음을 당하여 그 형정(刑政)의 시조(施措)가 유신(維新)에 귀속되는 기회이니, 어찌 이러한 역적 이러한 흉적으로 하여금 편의한 대로 거주(居住)하게 하여 오히려 목숨을 보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의 경우에는 그 일이 성궁(聖躬)에 관계된 것이어서 비록 굽혀서 관대한 용서를 베풀었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부모의 원수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의리에 있으니 더욱 일각(一刻)이라도 삼척률(三尺律)을 완만히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정치달의 처에게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쾌히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아! 선왕조(先王朝)에서 매상(昧爽) 이후의 일을 신금(申禁)토록 명한 것이 비록 천지처럼 살리기 좋아하는 성덕(聖德)과 깊은 인자함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만, 다만 그 더없이 흉참(凶憯)스럽고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된 자는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서하여 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난역(亂逆)의 근본을 뽑아내지 못했으나 오직 이 일단(一段)의 의리가 실가닥처럼 끊기지 않고 있었던 것은 대계(臺啓)가 남아 있는데 힘입은 것입니다. 한 번 금령(禁令)이 있은 이후 전계(傳啓)를 우러러 올리지 못한 지가 지금까지 몇 년이었습니까? 이제 우리 전하께서 사복(嗣服)한 처음을 당하여 그 화란(禍亂)을 막고 의리(義理)를 밝히는 도리에 있어 결단코 일각이라도 완만하게 함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올리지 못했던 대계(臺啓)를 봉입(捧入)하여 조속히 처분(處分)을 내리시어 왕장(王章)이 신명(伸明)되고 난본(亂本)이 뽑히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양사(兩司) 【대사간 유한녕(兪漢寧), 사간 박서원(朴瑞源), 장령 이경삼(李敬參)·최이형(崔履亨), 지평 이안묵(李安默)·김수신(金秀臣), 헌납 남혜관(南惠寬), 정언 강준흠(姜準欽)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물고(物故)된 죄인 강명길(康命吉)에게 속히 노적(孥籍)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게 하소서. 역적 심인(沈鏔)의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는 이미 전계(前啓)에서 모두 아뢰었으니 이제 다시 열거하여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확연히 명쾌한 결단을 내린데 힘입어 도착한 곳에서 격식을 갖추어 엄히 가두어 놓고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군주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어 여정(輿情)의 분노를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명(成命)이 이미 내렸고 공제(公除)가 문득 지났는데도 어떻게 저러한 흉역을 일각인들 천지 사이에 살려둘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엄히 가두어 놓은 죄인 심인에게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쾌히 방형(邦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의관(醫官)에 대한 일은 전에 이미 하유하였는데 명색이 대각(臺閣)으로 감히 지엄한 수교(受敎)를 무너뜨리려 하는가? 심인의 일은 자성(慈聖)께서 의당 처분을 내릴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감히 다시 번독스럽게 하는가?"
하고, 이어 대각에 나온 신하를 간삭(刊削)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에서 아뢰기를,
"송덕상(宋德相)·김상철(金尙喆)·홍국영(洪國榮)·윤구종(尹九宗) 이 네 역적은 극역(極逆)이요 대돈(大憝)으로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데 대각의 전계(傳啓)가 여러 해 누적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유윤(兪允)을 내렸는데 전지(傳旨)를 아직 반하(頒下)하지 않았으니, 지금 새로운 교화를 아름답게 밝히는 때를 당하여 흉얼(凶孼)과 역종(逆種)들로 하여금 잠시라도 천지 사이에 살아 있게 해서는 안되니, 청컨대, 속히 사계(四啓)에 대한 전지(傳旨)를 내려 유사(攸司)로 하여금 조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경외(京外)의 표퇴(漂頹)한 민가와 엄사인(渰死人)에 대해 특별히 휼전(恤典)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영남(嶺南)의 밀양(密陽) 등 고을에 표퇴된 민가(民家)가 7백 호(戶)이고 엄사인이 22명이었으며, 오부(五部)의 표퇴된 민가는 4백 37호였다
김재찬(金載瓚)을 이조 판서로, 민태혁(閔台爀)을 참판으로, 홍낙유(洪樂游)를 참의로 삼았다. 모두 비천(備薦)070) 이었다.
8월 2일 임자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특지(特旨)에 의거하여 김조순(金祖淳)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난번 인산(因山)의 택일(擇日)에 관한 일 때문에 비록 이우형(李宇炯)을 처분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말이 이미 발론된 뒤에는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방도에 있어 그대로 놓아 둘 수 없으니, 병신년071) 의 전례에 의거하여 일관(日官)으로 하여금 다시 택일하게 하라."
하였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빈청(賓廳)에 함께 모여서 산릉(山陵)의 택일을 다시 하는 것 때문에 일관(日官)에게 문의하였더니, ‘10월 안에는 다시 길일(吉日)이 없고 오직 11월 초6일의 진시(辰時)가 대길(大吉)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11월은 예월(禮月)을 넘기는 것이므로 신 등이 감히 성급히 택일하여 들여오지 못했습니다. 삼가 《선원기략(璿源紀略)》을 상고하여 보건대, 영릉(寧陵)의 대상(大喪)이 5월에 있었는데 인산(因山)은 10월에 행하였으니 또한 예월(禮月) 안에는 길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국조(國朝)에서 행한 전례가 있으니 마땅히 아주 완전한 길일로 정해야 되겠기에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여 성재(聖裁)를 내릴 것을 앙청(仰請)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국조의 전례(典禮)가 있으니 10월 안에는 다시 길일이 없다면 달을 넘겨서 택일하여 들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별단(別單)에는, 금정(金井)의 개설(開設)은 9월 18일 묘시(卯時)이고 발인(發靷)은 11월 초3일 축시(丑時)이고 하현궁(下玄宮)은 11월 초6일 진시(辰時)로 하였다.
박준원(朴準源)을 장용 대장(壯勇大將)으로, 신대현(申大顯)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여 사직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전(三銓)072) 에 특별히 제수됐던 때를 당하여 누차 소명(召命)을 어기면서 계속하여 충간(衷懇)을 진달한 결과 문득 곡진히 헤아려 주시는 은혜를 입었고 그 뒤에 연중(筵中)에서 또한 이 때문에 누차 화곤(華袞)073) 의 포장(褒奬)을 받들기도 하였습니다. 신이 명리(名利)가 빛나는 마당에서 스스로 단념하는 것은 천신(賤臣)만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오르내리시는 선왕의 영령께서도 감림(鑑臨)하여 알고 계십니다. 이제 승하[眞遊]하신 지가 오래지 않아 옥음(玉音)이 어젯일처럼 들려오는데 갑자기 이 직임에 나아간다면 그 장차 선왕께서 깊이 알아주어 대우하신 것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삼가 바라건대, 장신(將臣)에 새로 제수한 작질(爵秩)을 속히 삭제시켜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자교(慈敎)로 특별히 제수한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누차 어긴단 말인가? 즉시 들어와서 숙명(肅命)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은 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이 상소하여 선인(先人)의 억울함을 진달했는데 대략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누명(累名)을 입게 된 것은 곧 궁금(宮禁)을 선동했다는 유언(流言) 때문이었는데 그에 대해 운운한 것은 곧 홍상간(洪相簡)과 혼인을 맺어 사경(私逕)을 통하여 칭탁(稱托)했다는 것과 홍인한(洪麟漢)을 빙자하여 끌어들였다는 것은 학남(鶴南)074) 등이 일컬었다는 등의 이야기입니다. 홍지해(洪趾海)·홍상간(洪相簡) 등의 역절(逆節)이 드러나기 전에는 고가(故家)와 세족(世族)이 혼인을 이루어 친분을 맺은 사람이 또한 많이 있었은즉 신의 집 또한 선견 지명(先見之明)이 없었으니 설사 그들과 혼인을 맺었더라도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했다고 운운한 것은 본래 사실과 어긋난 말인 것으로 또한 당시 홍상간의 공초(供招)에서도 징험할 수 있습니다. 홍인한을 빙자하여 끌어들였는지의 여부에 이르러서는 한두 가지 질정하여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 홍인한의 정승이 된 지 1년 사이에 조정의 진신(縉紳)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통제하여 영향권 안에 넣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모두 두루 거론하여 포장(褒奬)하여 아뢰었었습니다만, 신의 아비의 성명은 한 번도 연석(筵席)의 사이에서 거론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후원(喉院)의 기주(記注)를 조사하여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을미년075) 겨울에 이르러 대책(大策)을 저지시키는 거조가 나오자 일종(一種)의 사사로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아첨하는 무리들이 미봉책으로 덮어 감싸고 곡진히 포용하고 비호함을 더하였습니다만, 신의 아비는 대책을 저지 동요시키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통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곧바로 악역(惡逆)으로 단정(斷定)하였었으니 이에 대해서는 이복해(李福海)의 국초(鞫招)를 조사하면 알 수 있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홍상간에게 사경을 통하여 칭탁했다고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또한 한마디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홍지해와 여러 역적들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여 남을 경알(傾軋)하고 공격하였으므로 신의 아비가 여느 때에도 통분스럽게 여기면서 비록 드러내어 공척하여 절교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과 친숙하게 지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문에 신묘년076) 사이에 홍계희(洪啓禧)가 죽었을 적에도 3년 동안 한 번도 가서 조문(弔問)하지 않았었으며 재기(再期)가 되는 저녁에 비로소 언장(諺狀)을 보내어 위문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온 동리(洞里)의 상하가 다함께 알고 있는 것이니 신이 비록 사실을 변환(變幻)시키려 한들 되겠습니까? 그리고 문형(文衡)·이판(吏判)을 점유하려 도모하였다면 반드시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의 권력이 있은 뒤에야 될 수 있는 것이요, 신의 집안처럼 권력이 없는 처지로서는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비록 홍상간을 위하여 도모하려 해도 어떻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학남(鶴南)이라고 운운한 이야기는 천만 통박(痛迫)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과거 임인년077) 사이에 정우량(鄭羽良)의 아비 정수기(鄭壽期)가 당시 대함(臺銜)을 지니고 있으면서 충현(忠賢)을 무고하여 죄에 얽어넣으려는 상소가 있었는데, 그 상소 가운데 기사년078) 흉도(凶徙)들의 구기(口氣)079) 를 답습하여 신의 5대조 고(故) 참판(參判) 신 김익훈(金益勳)에까지 추급(追及)하여 말할 수 없는 무욕(誣辱)을 끝없이 가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드디어 세상이 함께 아는 혐원(嫌怨)이 이루어졌으니 신의 선조(先祖)의 자손이 되어 일분이라도 사람의 도리를 지닌 사람이라면 어떻게 차마 정수기의 아들 정우량 같은 자의 호(號)를 부르면서 스스로 도와주려 하겠습니까? 이의익(李義翊)이 홍계능(洪啓能)을 삭출(削黜)시키기를 청한 계사(啓辭)에 이르러 갑자기 학남(鶴南)이란 두 글자를 삽입(揷入)하여 마구 뒤섞어서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데로 귀결시키려 했으니, 그 과연 말이 되는 것입니까? 오직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천지와 같은 인덕과 일월과 같은 총명함으로 일이 지나고 세월이 오래된 뒤에도 측연(惻然)히 생각하여 주셨습니다. 신축년080) 신의 아비가 사망(死亡)하였을 적에 특명을 내려 유안(流案)에서 삭제시키게 하였으며, 계묘년081) 여름 별세초(別歲抄)082) 때에 이르러 또 특별히 죄명(罪名)을 사유(赦宥)하여 주었습니다. 병진년083) 봄에 이르러 신이 병을 앓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혹 정사(情事)를 폭백(暴白)하지 못한 채 갑자기 먼저 아침 이슬처럼 될까 걱정한 끝에 이에 감히 비고(悲苦)해하는 내용으로 천질(賤疾)에 대해 굽어 순문(詢問)하신 인편(人便)에 우러러 진달하기를, ‘신이 만 번 죽을 각오로 상소하여 선인(先人)의 억울함에 대해 진달하겠습니다.’고 운운했더니,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하라는 하교가 있으셨습니다. 신이 병이 낫자 즉시 진달하려 했으나 이미 성심(聖心)이 남김없이 깨닫고 계시니 정사(情事)가 비록 간절하기는 하지만 급히 서둘 일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곧바로 번독스럽게 하는 것은 또한 황송(惶悚)스러운 데 관계되겠기에 여러 해가 지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금년 봄 나라에 큰 경사(慶事)가 있는 때에 이르러 마침 기회가 난 것을 인하여 이에 신의 아비가 유언(流言)을 받게 된 내력에 대해 지극한 억울함과 분명한 증거가 있다는 정상(情狀)을 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더니, 십행(十行)의 천찰(天札)을 내렸는데 그 성교(聖敎)에 ‘어찌 오늘날에 와서야 기다려 말하는 것을 특별히 새로 앎이 있겠는가? 대저 교동(喬桐)에 외보(外補)한 것은 곧 내가 대리 청정(代理聽政)한 뒤에 시행한 것 가운데 한 가지 일인데 그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면 너무 사연이 길다. 그대의 집안에는 이미 헌가(獻可)084) 의 선견(先見)이 부족한데다가 또 문안(文安)085) 의 특지(特智)에 어두웠던 탓으로 일찍이 손을 떼지 않은 것을 마음속으로 항상 한스럽게 여기고 있다. 지금은 시대도 옮겨졌고 일도 지나가서 흐르는 물과 뜬 구름처럼 되었기 때문에 모든 실정 가운데서 드러낼 수 없는 것에 관계된 것과 자취가 혹 밝히기 어려운 데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하나하나 밝혀 씻어주고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조엄(趙曮)의 집도 이제는 완인(完人)이 되었으니 유독 그대의 집에만 어찌 조엄의 집에 이미 시행한 것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또 천찰(天札)을 내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마땅히 곧 추증(追贈)하는 고명(誥命)을 내려 황각(黃閣)086) 에 두도록 하교하겠다.’고 하교하였으며, 그 뒤 4월 초8일 저녁에 신이 위부(衞府)에 입직(入直)하였었는데, 특별히 진대(進對)할 것을 명하여 또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을 진달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에 또다시 더없이 지극히 원통한 정상을 통렬히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마음속에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몰랐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중립(中立)만 지키면서 잘 주선(周旋)하지 못한 데에 연유된 것이다. 대리 청정할 당초에 기연(畿沿)087) 으로 견벌(譴罰)하여 보낼 때의 나의 뜻을 깨우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던 탓으로 남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와서 조사하여 밝힐 수 있는 것은 이미 대부분 밝혀져서 완인(完人)이 되었다. 따라서 내가 경(卿)의 선인(先人)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시행했던 것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사(台司)의 증직(贈職)과 함께 마땅히 하도록 하겠다. 소장(疏章)을 올려 신리(伸理)하여 줄 것을 청하는 것보다는 위에서 처분(處分)을 내리는 것이 나으니, 잠시 조금 한가하기를 기다리면 마땅히 곧 처분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뒤 5월 그믐에 또 증직(贈職)하는 일로 하교가 있으셨고 장차 성명(成命)을 내리려 했는데 갑자기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러한 은혜로운 말씀을 외우고 이런 천찰(天札)을 받들어서 지하에 돌아가 선신(先臣)을 만나 볼 것 같으면 유명(幽明)의 사이에 다시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여한(餘恨)이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죄없는 사람을 개석(開釋)시켜주는 것은 이야말로 성덕(盛德)의 큰 단서인 것인데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만일 활달하고 광명스러운 처분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면 신의 죄가 저절로 성덕(盛德)을 은폐시키는 죄과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처지에 이르게 되니 신의 사원(私怨)은 도리어 여사(餘事)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선왕(先王)의 성덕을 천명하는 것이 곧 아! 영원히 잊을 수 없어 생각하게 하는 방도인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처분을 내리시어 우러러 선왕의 유의(遺意)를 따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행조(大行朝)의 하교가 일월(日月)처럼 밝은데 경의 집에 대해 무슨 어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증직(贈職)은 오늘의 정사(政事)088) 에서 거행토록 하겠다."
하였다.
신대겸(申大謙)을 총융사(摠戎使)로, 윤동만(尹東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송치규(宋穉圭)를 사재 주부(司宰主簿)로 단부(單付)하였다.
8월 3일 계축
고부 겸 청시 청승습 정사(告訃兼請諡請承襲正使) 구민화(具敏和), 부사(副使) 정대용(鄭大容), 서장관(書狀官) 장지면(張至冕)을 소견(召見)했는데, 사폐(辭陛) 때문이었다. 고부(告訃)하는 주문(奏文)은,
"조선국(朝鮮國) 권서 국사(權署國事) 신(臣) 성모(姓某)는 삼가 고부(告訃)하는 일을 아룁니다. 신의 선부(先父) 신 휘(諱)089) 는 불행히 병을 얻어 의약(醫藥)이 효력이 없더니 금년 6월 26일에 이르러 증세가 더욱 위독하여져 6월 28일 유시(酉時)에 훙서(薨逝)하였습니다. 고부하는 사리(事理)를 연유하여 이에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하였고,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청시 자문(請諡咨文)은,
"조선국 권서 국사(權署國事)는 시호(諡號)를 청합니다. 선부왕(先父王)이 가경(嘉慶)090) 5년 6월 28일 훙서했는데,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보니 모두 시호를 내려 포종(褒終)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이러하므로 배신(陪臣)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와 예조 판서 정대용(鄭大容) 등을 차견하여 삼가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진청(陳請)하게 하였습니다. 이미 역명(易名)091) 을 청하였으면 고거(考據)함에 있어서 의의(擬議)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이어 수찬(修撰)하여 가지고 온 선부왕의 행장(行狀) 1통을 아울러 가지고 가게 하였으며 함하여 이자(移咨)하는 것이니 자문이 이르기를 기다려서 조험(照驗)한 다음 시행해 주도록 청합니다."
하였다. 이상은 예부(禮部)로 보내는 자문(咨文)이다. 【지제교(知製敎) 민사선(閔師宣)이 지었다.】 청시 행장(請諡行狀)이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청승습 주문(請承襲奏文)은,
"조선국(朝鮮國) 장순 왕비(莊順王妃) 첩(妾) 김씨(金氏)는 삼가 승습(承襲)하는 일 때문에 아룁니다. 삼가 생각건대, 손남(孫男)인 선신(先臣) 왕(王) 휘(諱)092) 는 불행히 병을 얻어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더니 금년 6월 26일에 이르러 증세가 더욱 위독하여져 6월 28일에 사자(嗣子) 휘(諱)093) 에게 국사를 부탁하고 이날 유시(酉時)에 훙서(薨逝)하였습니다. 사자 휘(諱)는 어릴 적부터 뛰어나게 영수(英粹)하고 인효(仁孝)가 성대히 드러났으므로 능히 장인(長人)의 덕(德)을 지니게 되었으며 국인(國人)들이 추대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신(先臣) 왕(王)이 저사(儲嗣)로 정하였으며 이미 책문(冊文)을 갖추어 정원(情願)을 건의하였으며 배신(陪臣)을 차임하여 천청(天聽)에 아뢰었던 것인데 은고(恩誥)를 미처 받들기도 전에 갑자기 대상(大喪)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종조(宗祧)의 부탁도 이미 이 사자(嗣子)에게 있고 민심(民心)이 모여 있는 것도 또한 이 사자에게 있는 지라 첩(妾)이 이런 때에 부인(婦人)이라는 것 때문에 혐의하여 피할 수 없는 바가 있기에 삼가 전례(典禮)에 따라 주문(奏文)을 갖추어 사자(嗣子) 휘(諱)에게 국왕을 승습하도록 책봉(冊封)해 줄 것을 흠청(欽請)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상(皇上)게서는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으시니 특별히 해부(該部)로 하여금 크게 고명(誥命)을 내리게 하여 소방(小邦)의 신민(臣民)들로 하여금 총광(寵光)을 얻어 보게 해주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제번(除煩)하고 삼가 기다리면서 기뻐하여 의뢰하는 외에 승습하는 사리에 관계됨으로 이렇게 삼가 갖추어 주문(奏聞)합니다."
하였다.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332면
【분류】인사(人事) /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어문학(語文學)
[註 089] 휘(諱) : 이산(李祘).[註 090] 가경(嘉慶) : 청나라 인종(仁宗)의 연호.[註 091] 역명(易名) : 시호(諡號).[註 092] 휘(諱) : 이산(李祘).[註 093] 휘(諱) : 이공(李玜).
병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 다시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리고 나와서 숙배(肅拜)하라고 재촉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처의(處義)는 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병판의 상소는 실로 이런 때에 의지하려는 뜻을 모르고 있다. 내가 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가지고 정신(廷臣)에게 강박(强迫)094) 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의 처지(處地)에서 어찌 강박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강박하겠는가? 우선 기과(記過)095) 하여 두고 명을 기다리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병판이 생사(生死)가 앞에 놓인 처지를 당하였으니 망설이는 것이 괴이 할 것이 없으나 명을 받드는 것이 또한 옳다. 기과는 분간하겠으니 다시는 망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4일 갑인
대왕 대비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에게 하유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조정 형편의 해이함이 과연 어떠한가? 내가 창황하고 망극한 가운데 이 대신(大臣)을 정석(鼎席)096) 에 발탁 기용한 것은 대개 충정(忠貞)함이 나라를 호위하기에 충분하고 침중(沈重)함이 물정(物情)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스스로 내가 정승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처음 생각에는 이 대신은 나라를 몸처럼 여겨 상례(常例)에 구애되지 않고 보답할 것을 도모할 것으로 마음 먹으리라 예상했었는데, 생각치도 않게 이미 상소하여 진달하고 또 인입(引入)하면서 기필코 심상한 속투(俗套)를 고수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내가 특별히 간선(簡選)한 본의이겠으며, 또 어찌 대행조(大行朝)께서 풍속을 바로잡은 본의이겠는가? 실로 이 대신에게 기대하던 것이 아니어서 내 나름대로 개연(慨然)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들이 총집(叢集)되어 있는 때를 당하여 빈대(賓對)를 하기로 정한 것에는 내가 의도하는 것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대신이 모두 모인 연후에야 인접(引接)할 수 있으니 모쪼록 즉시 조정에 나아와서 국사를 편히 이루어지게 하여 내가 기대하고 있는 뜻을 저버리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상 감사 신기(申耆)가 방미방(放未放)097) 에 대한 순서에서 대행조(大行朝)에서 특교(特敎)로 귀양보낸 김이재(金履載)를 품질(稟秩)에 넣었다. 그때의 처분(處分)이 얼마나 엄절(嚴截)한 것이었으며 그리고 5월 30일의 연교(筵敎)는 문득 이것이 곧 대행조의 말명(末命)이었는데 어찌 이것이 신하의 분수임을 모를 수 있는가? 매우 무엄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경상 감사 신기를 호서(湖西)의 바닷가에 귀양보내야 하니 태안군(泰安郡)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소대(召對)할 때 《맹자(孟子)》를 계속하여 강하라고 명하였다.
호군(護軍) 이서구(李書九)를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이익운(李益運)을 정경(正卿)으로 삼았는데,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제도(諸道)의 가을 조련(操鍊)과 도시(都試)를 정지시켰다. 국휼(國恤)의 졸곡(卒哭) 전이기 때문이었다.
산릉(山陵) 정자각(丁字閣)의 상량문(上樑文)을 고례(古例)에 의거해 지어서 쓰라고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밀양(密陽) 등 고을의 재호(災戶)에 대해 적곡(糴穀)의 수납을 정지하는 것을 병신년098) 의 전례에 의거해 거행하며 금년 가을에 있을 포흠(逋欠)의 징수와 과세(科稅)의 독촉에 관한 정사는 힘써 너그럽게 하는 쪽을 따름으로써 혹시라도 백성을 동요시키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선혜 당상(宣惠堂上) 조진관(趙鎭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제주(濟州)의 민인(民人)들은 선조(先朝) 때의 전례에 의거해 능역(陵役)에 나오지 말게 하라고 명하였다. 유사 당상(有司堂上) 이서구(李書九)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금위(禁衞)의 향군(鄕軍)은 1년을 기한으로 정번(停番)하게 하고 그 요미(料米)와 보전(保錢)을 탁지(度支)에 예속시키게 하였다. 호조 판서 이재학(李在學)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교리 김희채(金熙采)가 학문을 강하고 몸을 닦고 기강을 진기시키고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한다는 네 가지 조항을 가지고 진달하여 면려하였는데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대왕 대비가 특지(特旨)를 내려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판으로, 김조순(金祖淳)을 비변사 제조로 차임하였다.
김이영(金履永)을 경상도 관찰사로, 이서구(李書九)를 형조 판서로, 윤광안(尹光顔)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8월 5일 을묘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김희순(金羲淳)을 참의로 삼았다.
8월 6일 병진
비국(備局)에서 어사(御史)에 가합한 사람으로 김근순(金近淳)·임한호(林漢浩)·박종경(朴宗京)·민기현(閔耆顯)·유경(柳畊)·김계렴(金啓濂)·신귀조(申龜朝)·이중련(李重蓮)을 초계(抄啓)하였다.
8월 7일 정사
주청 정사(奏請正使) 이병모(李秉模), 부사(副使) 이집두(李集斗)가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으로 치계(馳啓)하기를,
"사사(使事)를 이미 끝마쳤으며 칙사(勅使)는 오는 19일에 파견하기로 정하였는데 순망(旬望) 사이에 출발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의해 미루어보면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8월 그믐 전후가 될 것 같고 서울에 들어오는 것은 의당 9월에 있게 될 것입니다. 신 등 일행은 17일에 북경(北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하였다. 주청사가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는 일 때문에 대행조(大行朝)에 명을 받고 금년 4월에 배표(拜表)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 치계가 있게 된 것이었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명위(名位)란 예수(禮數)가 여기에서 연유되어 나오는 것인지라 의당 근엄함을 주로 해야 하는 것이니 털끝만큼이라도 방과(放過)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정 문안(問安)과 약방 계사(啓辭) 가운데 명위의 차제(次第)를 사체에 의거하여 헤아려 보면 끝내 미안스러운 데 가까운 바가 있다. 혜경궁(惠慶宮)099) 은 겸손한 덕을 지녔고 명달(明達)함이 또한 이와 같으니 지금 이후로는 계사(啓辭)의 가운데서 대전(大殿) 문안의 차서는 대왕 대비전·왕대비전·혜경궁·가순궁(嘉順宮)100) 의 순서로 기록하게 하라.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명위의 차서를 밝히고 한편으로는 혜경궁의 겸손한 덕을 드러내게 하라."
하였다.
8월 8일 무오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장령 이태현(李泰賢)이 아뢰기를,
"아! 저 김이재(金履載)의 죄범이 어떠한 것이며 관계되는 것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전 도신(道臣) 신기(申耆)가 그를 품질(稟秩)에 삽입한 것은 또한 무슨 의도입니까? 김이재가 선조(先朝)의 도솔(導率)하는 교화를 등졌기 때문에 대행 대왕께서 그가 시험하여 보려 한 것을 통렬히 지척(指斥)하였던 것입니다. 신기가 교화를 새롭게 하여 계속해서 밝히는 이 때에 마구 날뛰자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그의 무엄함을 분명하게 하유하셨으니, 신은 삼가 흠송(欽誦)하여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리를 천명하는 마당에 그 자취가 교화를 등진 데 관계된 부류들을 가까운 바닷가로 견책하여 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귀양보내게 한 죄인 신기에서 속히 도배(島配)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신기에 관한 일은 자전(慈殿)의 처분이 내려졌으니 어떻게 가율(加律)할 수 있겠는가? 속히 정지하고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노춘(李魯春)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이노춘이 상소하여 면려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법은 모든 일용(日用)의 사위(事爲) 사이에 무엇이든 실천하고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학문과 사위를 나누어 두 가지 공부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의당 먼저 선조(先朝)에서 끝마치지 못한 지업(志業)을 강구(講究)하는 한편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을 친근히 하여 아침 저녁 좌우(左右)에 두고 자문(咨問)하고 아뢰게 한 연후에야 의리를 천명하고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쓰소서."
하니,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8월 9일 기미
홍낙유(洪樂游)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10일 경신
왕대비가 승전색(承傳色)으로써 하교하기를,
"이것이 자궁(慈宮)의 겸양하는 덕을 표양(表揚)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선조(先朝) 때 이미 행한 전례일 뿐만이 아니다. 나의 도리에 있어 자궁보다 먼저 문안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제 이런 뜻으로 자전(慈殿)께 앙품(仰稟)하라. 오늘은 모르고서 이미 문안을 받았지만 이 뒤로는 감히 먼저 받지 못하겠으니, 이런 뜻을 약원(藥院)과 정원은 알고 있으라."
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엄히 가둔 죄인 심인(沈鏔)은 정법(正法)에 처하고 물고(物故)된 죄인 강명길(康命吉)의 아들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서 정배(定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집의 민사선(閔師宣) 등이 아뢰기를,
"강명길의 여러 아들들을 흩어서 정배시키라고 한 처분은 엄정하고 광명한 것이어서 신인(神人)의 분원(憤怨)이 이로부터 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하건대, 강명길은 이미 곧바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노륙(孥戮)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그의 아들들을 흩어서 정배함에 있어는 의당 무겁게 하여야 할 것이요 가볍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강명길의 아들들은 절도(絶島)에 원배(遠配)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심인은 천변(賤弁)인데 대행 대왕이 종후(腫候) 때문에 미령할 때를 당하여 망령되이 연훈방(烟熏方)을 올렸기 때문에 드디어 대점(大漸)에 이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론(國論)이 비등(沸騰)하게 되어 모두들 베어야 한다고 하였다. 대신(大臣) 심환지(沈煥之)는 그의 소원한 친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호하려고 했었는데 그때 어떤 이가 이가작(李可灼)의 일을 인용하면서 뒷날 방종철(方從哲)의 죄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자, 심환지가 크게 깨닫고 드디어 정법에 처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했다고 한다.
윤득규(尹得逵)를 평안도 절도사로, 이광익(李光益)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서영보(徐英輔)를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로 삼았다.
8월 11일 신유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명위(名位)가 중한 것이기 때문에 대전(大殿)을 왕대비의 위에 있게 했는데 이는 영묘조(英廟朝)로부터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다. 왕대비전은 겸덕(謙德) 때문에 의거하여 하교한 것이 있었으나 사체는 반드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선조(先朝) 때에는 왕대비전이 중궁전(中宮殿)으로서 선조에서 수하(手下)가 되기 때문에 자궁(慈宮)이 위에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명위(名位)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사면(事面)에 있어서도 정당하고 또한 평소 혜경궁(惠慶宮)의 현명하고 통달한 식견(識見)과 겸덕(謙德)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왕대비전에서 혜경궁보다 먼저 문안을 받는 것이 불안스러워 이렇게 굳이 사양하고 있는 것이니, 이런 내용을 중외(中外)에 알리는 것이 진실로 좋겠다. 때문에 언교(諺敎)는 반하(頒下)하도록 하되 고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전일의 하교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낙유(洪樂游)를 이조 참의로, 송전(宋銓)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익정공(翼靖公)의 주고(奏藁)는 곧 우리 선대왕께서 직접 손수 편찬하신 것으로 장차 인간(印刊)하여 세상에 반하하려 했었던 것이다.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즉시 인간하여 올리도록 하라. 그리고 인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 책을 가지고 익정공의 사우(祠宇)에 치제(致祭)하게 하라. 이는 바로 대행조(大行朝)의 유의(遺意)를 우러러 몸받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익정공은 곧 고 봉조하(奉朝賀) 홍봉한(洪鳳漢)이었다.
8월 12일 임술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그저께 강명길(康命吉)에 대한 대계(臺啓)를 아뢴 대로 윤허(允許)한 것은 공의(公議)를 신리시키고 여정(輿情)에 부합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추율(追律)101) 을 적용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참작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강명길의 아들들을 여러 곳으로 흩어서 정배(定配)하는 것은 특별히 분간해야 한다."
하였다. 대신(大臣)·승지(承旨)·삼사(三司)가 진계(陳啓)하여 쟁집(爭執)하였으나, 모두 자전(慈殿)의 처분이 내려졌으니 다시 번독스럽게 할 것이 없다는 내용으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3일 계해
신헌조(申獻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14일 갑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외(京外)에서 방물(方物)을 진상하는 일에 대해 지난번 하교한 바가 있었다. 그런데 별단(別單)을 마련한 뒤에 혜경궁이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전일보다 더하는 일이 있기를 바라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감하려고 하기에 이르렀고 가순궁(嘉順宮)의 본의(本意)도 굳이 사양하고 받고 싶어하지 않지만 주상(主上)이 효양(孝養)하는 정성을 어기기 어려워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히 혜경궁이 전일 받았던 진상과 같게 하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또 감등(減等)시켜줄 것을 청하고 있다. 양궁(兩宮)의 겸덕(謙德)이 이와 같으니 사리에 있어 의당 힘써 따라야 한다. 각 전궁(殿宮)에 진상하는 방물은 아울러 감하(減下)하게 하라. 그리고 혹 정봉(停捧)해야 할 물종(物種)이 있으면 유사(攸司)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병정(李秉鼎)·한용귀(韓用龜)를 의정부 좌우 참찬으로 삼았다.
8월 15일 을축
월식(月蝕)하였다. 【묘초(卯初)에서 진초(辰初)까지 2분(分) 27초(抄)의 월식이었다. 처음에는 동북쪽부터 어그러져서 정북(正北)으로 먹어들어 가기를 심하게 하였으며 다시 회복된 때는 서북쪽에서부터 둥글어졌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33면
【분류】과학-천기(天氣)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김재찬(金載瓚), 참의 홍낙유(洪樂游), 병조 판서 김조순(金祖淳)이다.】 대왕 대비의 특교(特敎)로 사재 봉사(司宰奉事) 송흠천(宋欽天)을 도내(道內)의 수령에 차송(差送)하였는데 송흠천은 찬성(贊成) 송환기(宋煥箕)의 손자이다. 남공철(南公轍)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노춘(李魯春)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 데 관한 요점을 진달하니,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8월 16일 병인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으로 나가는 초사인(初仕人)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왕 대비가 백성의 고락(苦樂)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 것인데 이런 망극한 때를 당하여 믿을 사람은 오직 감사와 수령뿐이니 이 뜻을 어기지 말 것과 삼도(三道)는 칙사(勅使)의 지대(支待)가 머지 않았으니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으로 면대하여 칙유(飭諭)를 내렸다. 대신(大臣)이 이어 청하기를,
"오늘 연석(筵席)에 참석한 수령들이 칙교(飭敎)를 어기고 만약 죄과(罪科)를 범할 경우에는 배나 더 무겁게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그래로 따랐다.
비국에서 어사(御史)에 가합한 사람으로 조득영(趙得永)·구득로(具得魯)·이인채(李寅采)를 더 뽑아서 아뢰었다.
가설 감역(加設監役) 홍낙수(洪樂受)·홍낙선(洪樂宣)은 승륙(陞六)102) 시키고 홍서영(洪緖榮)은 초사(初仕)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모두 혜경궁(惠慶宮) 본가(本家)의 사람들이었다.
8월 17일 정묘
조윤대(曹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소대(召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금의 급선무는 주상에게 학문을 권면하는 것보다 지나친 것이 없다. 따라서 경연(經筵)과 소대(召對)를 의당 차제(次第)로 행해야 하겠지만 대내(大內)에서 독서를 권하는 일을 착실하게 한 연후에야 훈도(薰陶)하여 성취시키는데 더욱 실효(實効)가 있게 될 것이다. 공판(工判)을 오래도록 금직(禁直)에 둔 것은 오로지 학문을 권면하게 하기 위한 성의(聖意)에서였던 것이다. 비록 다시 하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전대로 해야 할 것은 물론 그밖에 각신(閣臣)들도 선왕(先王)께서 한 집 사람처럼 여기셨으니, 이들이 어찌 학문을 권면하는 데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학(提學) 김재찬(金載瓚), 검교(檢校) 직제학(直提學) 이만수(李晩秀), 원임 직각(原任直閣) 김조순(金祖淳)·윤행임(尹行恁)·남공철(南公徹)에게 돌아가면서 출입하게 하여 학문을 권면하게 하되 격례(格例)에 구애하지 말고 유선(諭善)과 요속(僚屬)의 예(例)에 따르게 하여 실효가 있게 하라."
하였다.
8월 18일 무진
소대(召對)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공조 판서 박준원(朴準源), 병조 판서 김조순(金祖淳), 유사 당상(有司堂上) 윤행임(尹行恁)을 소견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오늘 경 등을 입시하게 한 것은 오로지 국사(國事)를 공고하게 할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돌아보건대, 지금의 급선무는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의리를 지켜 준행하고 조상(朝象)을 화협(和協)하게 하며 백성을 보호하고 돌보는 방책 이 세 가지에 이르러서는 실로 국가의 안위(安危)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내가 어찌 경 등의 나라를 향한 지극한 정성을 모르겠는가? 예로부터 조정에 비록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국사의 임무를 담당하는 것은 또한 사람마다 모두 책임지우기는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지금처럼 국세가 외로운 때에는 그 의지할 데가 오직 삼대신(三大臣)과 두서너 경재(卿宰)뿐이다. 대저 함께 국사를 해나감에 있어서는 정의(情誼)에 간격이 없는 것이 골육(骨肉)을 함께한 친척과 같은 연후에야 정신(精神)을 모아서 함께 시사(時事)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경 등은 모쪼록 한 마음으로 힘을 합할 것이요, 혹시라도 갈라진 마음이 없게 하여 국사를 크게 성취시키는 유익함이 있게 하고 조상(朝象)을 보합(保合)하게 하는 실효가 있게 하라. 사람들의 소견은 본디 같지 않은 것이어서 성인(聖人)이 아니면 진실로 들쭉날쭉하여 장단(長短)이 고르지 않게 되는 일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를 면려하여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할 것은 물론, 한 사람의 의견대로만 맡기지 말고서 오로지 지극히 공정(公正)하게 해 나갈 것을 바로 경 등에게 바라는 것이다. 대신(大臣)에 이르러서는 백료(百僚)를 통솔해야 하는 자리이므로 체모(體貌)가 자별(自別)하니,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든 사무(事務)를 먼저 대신에게 재결을 얻은 연후에야 시행한다면 조정의 사체(事體)도 또한 상하의 차서(次序)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공판(工判)의 처지는 다른 사람보다는 자별한데, 선조(先朝)에서는 척리(戚里)의 여러 신하들은 비록 기용하지 않았었으나 지금은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 주상(主上)은 어리고 국세는 위태로워 보호(保護)하고 권도(權導)하는 책임이 오로지 그대 한몸에 달려 있으니 척리로 자처하면서 피혐할 계획을 해서는 안된다. 일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국세를 태산(泰山)과 반석(磐石)처럼 편안하게 하여 억만년토록 태평한 기반을 마련한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병판(兵判)은 앞으로 나라와 아름다움을 같이하기를 마땅히 공판(工判)처럼 해야 한다. 더구나 대행조(大行朝)에서 사랑하는 은혜를 치우치게 받았으니, 보답할 것을 도모하는 마음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할 것이다. 공참(工參)은 선조(先朝)의 신임(信任)이 상격(常格)을 훨씬 넘었었기 때문에 지난번 창황중에도 특별히 발탁 승진시킨 것이니, 또한 어찌 마음과 힘을 함께하여 불세(不世)의 은혜를 저버림이 없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오로지 종국(宗國)을 위해 전일한 고성(苦誠)과 혈침(血忱)에서 나온 것이니, 지금 이 하교가 있은 뒤에 연석(筵席)에 입시했던 여러 신하들 가운데 만일 혹 대양(對揚)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는 나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곧 대행조(大行朝)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경 등은 모쪼록 각기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더욱더 힘쓰기 바란다."
하니, 심환지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이 서로 면려함에 있어 일찍이 서로 함께 화합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으로써 일푼이나마 추후하여 보답하는 방도로 삼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교(慈敎)가 또 이처럼 간측(懇惻)하시니, 만일 정성을 다해 대양(對揚)하지 않고 혹 일푼이나마 저버리는 경우가 있다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 우리 대행 대왕을 배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박준원은 말하기를,
"신은 변변찮은 몸으로 외람되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은 지가 10여년인지라 선대왕의 의리(義理)속에 훈자(薰炙)되고 유렴(濡染)된 지도 또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조(先朝) 때 연교(筵敎)를 받든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에, ‘자신을 위한 모계(謀計)를 공교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인신(人臣)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척리(戚里)의 경우에는 이것이 도리어 의리가 되는 것이니 너는 모쪼록 조심하고 삼가서 죄과(罪過)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했습니다. 신은 그 말씀을 받들어 듣고서 감축(感祝)하여 지금도 가슴속에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신이 이미 금직(禁直)하는 자리에 있는 터이라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것으로 일푼이나마 그 은혜에 보답하는 방도로 삼고 있으나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대행조(大行朝)의 지우(知遇)와 신임(信任)을 받았던 사람들이니,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함께하여 위태로움을 전환시켜 편안하게 함에 그 적격자가 없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감히 참여해 들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자교(慈敎)를 받들었으니 만일 국가의 안위에 관계되는 기미가 있으면 신이 어떻게 감히 처지에 혐의가 있다는 것 때문에 성심(誠心)을 다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김조순이 말하기를,
"신은 비록 지식(知識)이 고루하여 백에 하나도 남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한 가닥 병이(秉彝)의 마음은 있습니다. 따라서 비록 오늘 이 자교(慈敎)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동료들과 화합해서 한편으로는 선대왕 25년 동안의 치법(治法)과 정모(政謨)를 지키고, 한편으로는 성궁을 보호하는 방도로 삼지 않겠습니까?"
하고, 윤행임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갑인년103) 겨울 전석(前席)에서 야대(夜對)하고 있을 적에 고 상신(相臣) 김종수(金鍾秀)의 소장이 마침 도착했었습니다. 선대왕께서 그의 상소 가운데, ‘성덕(聖德)을 삼고(三古)104) 에 드높이고 의리를 천추에 밝히겠다.[尊聖德於三古, 明義理於千秋]’고 한 한 구어(句語)를 들어 낭송하시면서 하교하기를, ‘이 사람은 비록 병통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의리를 굳게 지켜 행하려는 고심(苦心)만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 너도 이를 취하여 본보기로 삼으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성교(聖敎)를 받들어 삼가 《일득록(日得錄)》에 기록하여 놓았으니 오늘날 우리 선왕(先王)께 추보(追報)할 수 있는 것은 이 열두글자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교(慈敎)가 또 이렇게 정녕하고도 간곡하시니 삼가 우러러 감탄하는 외에 다시 무엇을 진달하겠습니까?"
하고, 심환지는 말하기를,
"박준원과 신 등은 평일에는 그 성문(聲聞)이 내치지 않았으나 그의 개결(介潔)함이 여유가 있다는 것은 대강 알고 있었는데, 근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가 의리에 엄절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주달하는 말을 들으니 더욱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윤행임은 선조(先朝)에 있을 때부터 신이 그와 함께 국사에 대해 의논했었으므로 신도 쓸 만한 사람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아직은 노련(老鍊)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만, 더욱 다시 넓히고 장차 정진(精進)하기를 마지 않는다면 모든 국사에 무엇을 해 나가지 못하겠습니까? 김조순은 그의 가벌(家閥)이 과연 어떠합니까? 그의 조선(祖先)에서부터 대대로 의리를 지켜 수립(樹立)하여 놓은 것이 우뚝하니 그가 비록 연소하기는 합니다만, 성궁을 보호하고 의리를 천명하는 책임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견줄 정도이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처지는 아직 박준원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조정의 언의(言議)에도 또한 참여해서는 안된다는 혐의가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고 힘을 합쳐 함께 국사를 이루어 간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오늘 삼대신(三大臣)과 세 신하를 특별히 부른 것은 오로지 서로 화협하여 힘을 합쳐 성궁(聖躬)을 보호하면서 국사를 잘 조처해 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나의 이런 고심(苦心)을 본받지 않고 각자 마음을 달리하여 조정이 안정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경 등에게 기대하던 것이겠는가?"
하였다.
박기풍(朴耆豐)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민태혁(閔台爀)을 이조 참판으로, 심상규(沈象奎)를 참의로, 이당(李溏)을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19일 기사
소대(召對)하였다.
조윤대(曹允大)를 이조 참판으로, 김익빈(金益彬)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8월 20일 경오
차대(次對)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홍봉한(洪鳳漢)의 주고(奏稿)를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감인(監印)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홍봉한이 진 죄범에 대해서는 고 집의(執義) 박치륭(朴致隆)의 상소, 초야신(草野臣) 한유(韓鍮)의 상소, 고 재신(宰臣) 김귀주(金龜柱)의 상소, 정이환(鄭履煥)의 상소, 전 부사(府事) 김관주(金觀柱)의 상소에서 이미 죄다 열거하여 논했기 때문에 신 등이 감히 다시 진달하지 않겠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나신 달효(達孝)이십니다만, 의리의 제방(堤防)에 크게 관계되는 곳에 이르러서는 동요되거나 굽힌 적이 없었습니다. 신 등이 이런 때를 당하여 자전(慈殿)의 마음을 위안시켜 드림에 있어 만일 혹 조금이라도 선조(先朝) 때보다 달리하는 것이 있다면 어찌 이런 불충(不忠)하고 무상(無狀)한 신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일에 이르러서는 실로 의리에 관계되는 큰 관건이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누누이 전궁(殿宮)에게 우러러 여쭈어 기어이 정지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신 등의 구구한 소망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고, 대왕 대비는 하교하기를,
"이 일은 곧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유의(留意)하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인출(印出)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급한 일이 아니니 우선 보아가면서 하는 것도 해롭지 않겠다."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조조(朝祖)105) 에 대한 의절(儀節)은 《오례의(五禮儀)》에는 기재되어 있는 것이 없고 《상례보편(喪禮補編)》에는 신백(神帛)으로 행례(行禮)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병신년106) 에 대신(大臣)과 유신(儒臣)들에게 널리 순문한 다음 이미 재궁(梓宮)으로 조조하는 고례(古禮)를 준행할 수 없다면 신백으로 행례(行禮)하는 것은 실당(室堂)으로 반신(返神)한다는 예의(禮意)에 크게 어긋난다고 하교하시고 나서 이어 《오례의》에 의거하여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고금을 참작하여 정미(精微)로움을 극진히 한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이제 와서는 갑자기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대신(大臣)들에게 하문(下問)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의 의논이 모두들 병신년에 이미 행한 전례에 의거하여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병정(李秉鼎)을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성(尼城)의 읍호(邑號)를 노성(魯城)으로, 이성(利城)을 이원(利原)으로 고쳤다. 선조(先朝)의 어휘(御諱)와 글자음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이경일(李敬一)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이조원(李祖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22일 임신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가순궁(嘉順宮)에서 경비(經費)를 염려하여 제도(諸道)의 삭선(朔膳)과 방물(方物)을 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사체에 있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이미 효유(曉諭)하고 우선 전례에 의하여 마련하게 하였었다. 그런데 끝내 굳이 사양하여 마지 않으니, 그 겸양하는 덕과 아름다운 뜻을 내가 어찌 표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뒤에 의당 받도록 권면할 것이나 우선은 그 뜻에 맞추게 하고 제도(諸道)에서 봉진하는 삼명일(三名日)의 방물과 단오절(端午節)의 선유(扇油) 등 물품은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8월 23일 계유
조상진(趙尙鎭)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8월 25일 을해
차대(次對)하였다. 하직(下直)하는 수령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황간 현감(黃澗縣監) 송흠천(宋欽天)에게 말하기를,
"찬성(贊成)이 신절(愼節)107) 이 있어 올라올 수 없다고 했는데, 그간에 쾌차되었는가?"
하니, 송흠천이 말하기를,
"신의 조부(祖父)는 병정(病情)이 아직도 차도가 없기 때문에 아직 달려 올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내려간 뒤에 병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서 즉시 올라오라는 뜻으로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초우제(初虞祭)는 장차 화성 행궁(華城行宮)에서 지내고 재우제(再虞祭)는 반우(返虞)108) 한 뒤에 혼전(魂殿)에서 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초7일은 곧 동지일(冬至日)이고 동지 제향(冬至祭享) 또한 삼헌(三獻)을 갖추게 되어 있어 사체가 우제(虞祭)와 간격이 없습니다. 만일 초7일 새벽에 동지제를 지내고 당일 반우한 뒤에 또 재우제를 지낸다면 하루에 대제(大祭)를 두 번 지내게 되어 일이 매우 미안스럽습니다. 또 동지제와 재우제를 화성 행궁에서 겸하여 행하게 되면 반우한 뒤 삼우(三虞) 전에는 단지 아침 저녁 궤전(饋奠)만 행하게 될 것이니 반우하는 예절에 있어 흠결이 나는 탄식이 있게 될까 우려스럽습니다. 나누어 지내거나 겸하여 지내거나 모두 구애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막중한 예절(禮節)에 관계되니, 청컨대 대신(大臣)과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들에게 문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겸하여 지내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청(啓請)하기를,
"역의(逆醫) 강명길(康命吉)의 아들들을 전의 하교대로 여러 곳으로 흩어서 정배(定配)하게 하고, 법에 의거하여 처형한 죄인 심인(沈鏔)에게는 빨리 노륙(孥戮)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속히 정지하고 번독스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참봉(參奉) 이희(李爔)에게 홍패(紅牌)109) 를 주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희는 일찍이 선조(先朝)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원군(大院君)의 사손(祀孫)은 무직(武職)에 임명할 수 없다는 숙묘(肅廟)의 수교(受敎)가 있었다는 자교(慈敎)로 인하여 음사(蔭仕)에 제수하고, 이 명(命)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정부와 이조에서 김일주(金日柱)를 경연관(經筵官)으로 초선(抄選)하여 아뢰었다. 김일주는 김한록(金漢祿)의 아들이고 김귀주(金龜柱)의 종제(從第)이었다.
영해(寧海) 등 고을의 표퇴(漂頹)된 민가(民家) 7백 27호와 물에 빠지거나 압사된 사람 19명에게 특별히 휼전(恤典)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홍양호(洪良浩)를 판의금부사로 삼고, 김일주(金日柱)를 경연관으로 단부(單付)하였다.
8월 26일 병자
소대(召對)하였다.
8월 27일 정축
윤행임(尹行恁)을 이조 참판으로, 김희순(金羲淳)을 참의로 삼았다.
소대하였다.
8월 28일 무인
유문식(柳文植)을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로 삼았다.
소대(召對)하였다.
8월 29일 기묘
차대(次對)하였다.
서매수(徐邁修)·이경일(李敬一)·이조승(李祖承)을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로 차임하고 경연관 김일주(金日柱)를 6품직으로 승부(陞付)시켰으니,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난번 하교 가운데 각신(閣臣) 5인을 다음 달 초6일에서부터 체례(體例)에 구애없이 매일 2원(員)씩 대내(大內)에 들어와서 권강(勸講)하여 오로지 성취(成就)시키는 것으로 임무를 삼으라."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소대(召對)하였다.
경상 감사 김이영(金履永)이 인동 부사(仁同府使) 이갑회(李甲會)의 첩보(牒報)에 본부(本府)의 적도(賊徒) 장시경(張時景)·장시욱(張時昱)·장시호(張時皡)·장현경(張玄慶) 등이 도당을 모아 변란을 일으킨 정상을 밀계(密啓)하였으므로 시임·원임 대신을 소견하고서 형조 판서 이서구(李書九)를 영남 안핵사(嶺南按覈使)에 차임하여 가서 사핵(査覈)하게 하였다.
대사헌 이직보(李直輔)가 상소하여 이름을 고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직보의 본명은 이성보(李城輔)인데, 성자(姓字)와 연음(連音)이 선조(先朝)의 어휘(御諱)를 범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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