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묘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대사간 이정운(李貞運)이 상소하여 김달순(金達淳)·이동형(李東馨)에 대한 대계(臺啓)를 속히 윤허할 것을 청하고 계속하여 진달하기를,
"신은 전 도헌(都憲)을 견파(譴罷)시킨다는 명에 대해 더할 수 없이 우려스럽고 개탄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 그날 전석(前席)에서 명색이 수상(首相)이라는 사람이 눈으로 임금을 무시하는 정상을 보고 귀로 부도(不道)스러운 말을 듣고도 성토에 대해 한마디 말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이에 감히 절실하고도 충애(忠愛)롭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중언 부언하면서 성세(聲勢)를 도와 화응(和應)하는 자취가 현저했습니다. 연석에서 물러가고 난 뒤에는 태연히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한 명의 대신(臺臣)이 입시하였던 양사(兩司)를 논척(論斥)한 뒤에야 비로소 차자를 진달하여 인구(引咎)하였습니다만 또한 놀라고 두려워하여 뉘우치는 뜻은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사의(私誼) 때문에 조정의 큰 의리를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 말은 또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는 것인데, 도성을 나갔다가 얼마 안되어 곧바로 태연히 도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허둥지둥 짧은 상소를 올리면서 비로소 하나의 토(討) 자를 발론함으로써 자취를 숨기고 마음을 엄폐하려 했으니, 사람은 비록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이야 속일 수 있겠습니까? 이번 도헌(都憲)의 상소는 진실로 공분(公憤)이 격발된 데서 나온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의당 너그러이 용납하고 가납(嘉納)하여야 할 것인데도 곧바로 우벌(郵罰)048) 을 가하였으니, 성명(聖明)한 세상에 이렇게 중도(中道)에 지나친 거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속히 전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하소서. 그리고 신은 금오(金吾)의 일에 대해 또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기는 점이 있는데 전혀 엄중히 토죄하는 뜻은 없고 도리어 부당하게 비호하는 자취가 있다는 그것입니다. 안치(安置)시키라는 명이 내린 뒤에 이르러서는 기필코 남해(南海)의 좋은 곳으로 마련하여 입계(入啓)하기를 마치 보통의 죄인을 전례에 따라 감죄(勘罪)하여 정배하듯이 하였습니다. 신은 판의금 황승원(黃昇源)에게 견삭(譴削)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 도헌(都憲)에 대한 일은 대신(大臣)이 설령 말하는 사이에 잘못된 것이 있었다고 해도 어찌 곧바로 역적을 비호하는 것으로 단정(斷定)할 수 있단 말인가? 대신을 존경하는 도리에 있어 경칙(警飭)시키는 조처가 없을 수 없었다. 판금오(判金吾)에 대한 일은 나이들어 노쇠한 소치이니, 깊이 탓할 것이 뭐 있겠는가? 추고(推考)만 해도 충분하다."
하였다.
지평 홍시부(洪時溥)가 상소하여 김달순·이동형의 죄를 논핵하고 대언(臺言)을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아! 저 이익모(李翊模)는 사람이 본래 용렬하고 자취도 또 음비(陰秘)스러워 겉으로는 어리석은 것 같지만 마음은 실로 간교하고 음험합니다. 그리하여 좌우를 살펴 농단(壟斷)049) 을 확보하여 이를 빙자해서 속이는 것을 기량(伎倆)으로 삼으며 주야로 지렁이처럼 뭉쳤다가 세리(勢利)를 따라 의귀(依歸)하였는데, 바로 김달순의 흉당(凶黨) 가운데 가장 복심(服心)으로 알려진 자입니다. 이번에 김달순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것은 이들이 난만하고 용의 주도하게 획책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저 장석윤(張錫胤)이란 자는 곧 역적 권유(權裕)의 혈당(血黨)으로 그 이름이 심노현(沈魯賢)의 역초(逆招)에 거론된 것이 단서(丹書)050) 에 환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일세(一世)가 함께 통분스럽게 여기고 전가(銓家)에서 서용을 저지시켜 온 지가 또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방자하게 곧바로 삼전(三銓)051) 의 추천에 의망(擬望)하였으니 그가 흉추(凶醜)들을 편들고 대의(大義)를 원수처럼 여긴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되었습니다.
신은 대사헌 이익모에게 속히 원찬(遠竄)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황승원(黃昇源)이 김달순을 은밀히 비호한 데 이르러서는 어쩌면 무엄한 것이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김달순을 홍주(洪州)에 부처(付處)했을 적에는 그 곳이 곧 그의 옛 고향이었고 길주(吉州)에 원찬시켰을 적에는 그 곳이 곧 그의 문객(門客)이 지주(地主)가 되어 있는 곳이었으며 이른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킬 적에는 마침내 수토(水土)가 좋은 선지(善地)인 남해(南海)에다 정하였습니다. 심지어 이정륜(李廷輪)은 북도(北道) 사람이라는 것으로 북도에 정배하였고 황기천(黃基天)은 용천(龍川)에 정배하였는데 그곳은 곧 황기천의 아비가 체직되어 온 지 오래지 않은 고을이었으니, 그의 돌보아주고 애호(愛護)하여 주는 습성에 대해 또한 버려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당 삭출(削黜)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김달순의 절도(絶島) 안치도 다른 곳으로 옮겨서 정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의필(李義弼)이 상소하여 대신을 논핵한 것은 이 또한 나라에서 말썽이 비등하여 온 지 오랬던 것으로 그가 작은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서 앞장서서 극언(極言)을 하였으니 언책(言責)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개납(開納)하지 않고 도리어 최절(摧折)을 가하였습니다. 신은 이의필에 대한 처분을 특별히 도로 정지시켜 대풍(臺風)을 면려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도헌(都憲)에 대한 일은 의리에 죄를 얻기 전에 서로 친하게 지낸 것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연석에서 아뢴 내용이 난만스럽고 용의 주도한 것이라는 그대의 말은 상세히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닌가? 장석윤을 의망한 일은 그가 옥초(獄招)에서 나왔으나 나도 또한 기억이 나지 않는데, 비록 거론되었다고 하더라도 직접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어찌 검의(檢擬)할 수 없겠는가? 판금오(判金吾)에 대한 일과 전 도헌에 대한 일은 이미 간장(諫長)052) 의 비답에서 하유하였다. 이배(移配)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어찌 그렇다고 기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황기천은 정상이 매우 통분스러우니 절도로 이송(移送)시킬 것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황기천을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로 이배(移配)시켰다.
특지(特旨)로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摸)를 의정부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의 한 통의 상소는 큰 의리를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천명(闡明)시키는 때를 당하여 어찌 특이한 거조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조 참판 조득영(趙得永)을 병조 판서로 제수하라."
하였다.
이호민(李好敏)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2일 경진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하유하기를,
"다시 영의정에 임명하는 뜻을 경이 과연 알고 있는가? 경은 선왕(先王)께서 돌보아 우대하면서 의지하여 온 사람이고 소자(小子) 내가 저사(儲嗣)에 책봉되어 관례(冠禮)를 할 적에 경이 수상(首相)으로서 빈사(賓師)가 되었으며 이어 주청(奏請)하는 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어시(御詩)를 내려 사행(使行)을 영화롭게 하였고 거듭 진중히 빨리 돌아오라는 은언(恩言)으로 당부하였었는데 경이 돌아오기 전에 갑자기 천붕(天崩) 지탁(地坼)053) 의 변을 당하였다. 그 뒤 다시 영의정에 임명했을 적에는 경이 또 급박한 무함을 당하여 떠나게 되었으므로 경이 드디어 지금껏 서로 어긋나게 되었는데, 그때 내가 비록 나이 어렸지만 어찌 아는 것이 없었겠는가? 지금의 이 영의정 임명을 곧 선왕(先王)께서 돌보아 의지했던 성의(聖意)를 추념(追念)해서인 것이다. 경은 비록 오래도록 한지(閒地)에 있었지마는 반드시 보고 알고 있을 것인데 오늘날의 국세(國勢)가 편안한 것이며, 조상(朝象)이 안정된 것인가? 생령(生靈)이 평안하며, 군강(君綱)이 진기되었는가? 그리고 인기(人紀)가 선하여졌는가? 모두가 그렇지 않다면 소자(小子)의 과매(寡昧)함으로 어떻게 위에 외로이 서서 홀로 정치를 운용하여 갈 수 있겠는가? 첫째는 대신의 보필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대신의 정돈(整頓)이 있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보필하고 정돈하는 책임을 경을 버리고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또 누가 경보다 나은 이가 있겠는가? 경은 선왕의 특수한 지우(知遇)에 감격하고 소자의 지극한 정성을 본받아 번연(幡然)히 마음을 돌려 일어나서 나랏일을 크게 구제하여 주기 바란다."
하였다.
2월 3일 신사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부주(附奏)하기를,
"특별히 중서(中書)에 제수하는 명령을 받들게 되니 황공하고 당혹스럽고 떨려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진실로 신에게 조금이나마 나랏일을 크게 구제할 재능이 있다면 정지(情地)를 논할 것도 없고 변통성이 없는 것도 거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러나 가능한가를 시험하여 보고 아무런 공효가 없었던 정상은 선조(先朝)께서 환히 통촉하신 것이고 성명께서도 익히 잘 아시는 것인데, 이렇게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근사하지도 않은 하나의 죄인을 취택하신단 말입니까? 더구나 딱 잘라서 말한 것이 지난 겨울에 있었는데 금년 봄에 곧 명을 받든다면 전후가 모순되고 거조가 전도되는 것이니, 속히 성명(成命)을 정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심복(心腹)을 다 기울여 하유하고 경을 한번 만날 수 있으리라고 여겨 설레이는 마음이었는데 도착한 부주(附奏)에 이에 지난 겨울에 딱 잘라서 말한 것으로써 핑계를 삼으니, 경은 어떻게 그리도 태연하며 경이 어찌 일찍이 딱 잘라서 말한 적이 있단 말인가? 나 소자(小子)가 말하여 보겠다. 경이 지난번 횡액을 당한 것은 참으로 세도(世道)의 큰 변괴였는데 이는 진실로 소자가 나이가 어려 태아검(太阿劒)054) 을 태아검답게 사용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때문이다. 지금 생각건대, 부끄럽고 통분스러움이 마음속에 엇갈리는데 경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지난 겨울 책면(策免)시킨 것은 경을 위하여 한번 정지(情志)를 펴게 해서 나의 존경하는 예(禮)를 극진히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경은 소자의 마음을 양해(諒解)하지 못하고서 다시 지난 일을 거론한단 말인가? 아! 지금이 진실로 어떠한 때인가? 가모(嘉謨)와 가유(嘉猷)가 들리지 않아서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군국(軍國)의 일이 황폐되어 민생(民生)이 날로 곤궁하여지고 있는 탓으로 인심이 해이하여 조상(朝象)이 날로 무너지고 이륜(彛倫)이 땅에 떨어져 군강(君綱)이 날로 비하되고 있다. 이런 상황인데 나라가 평안하겠는가, 위태롭겠는가? 또한 보존되겠는가, 망하겠는가? 나 소자가 위에서 고립(孤立)되어 있으니, 비록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나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의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숙덕(宿德)을 지닌 경을 바라는 것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소자는 선왕의 아들이고 경은 곧 선왕이 30년 동안 돌보아 우대하고 의지하여 온 신하이다. 소자는 비록 훌륭한 일을 할 수가 없지마는 경의 분의에 있어 선왕을 추모하여 이제 보답키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 진력하는 의리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의 몸은 아직도 스스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더구나 자신을 깨끗이 할 것을 생각하여 한가롭게 거처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말을 여기에서 그치겠으니, 바라건대 경은 소자의 심정을 안타깝게 여겨 억지로 인퇴하려는 말과 준례를 갖추려는 사양을 하지 말고 즉시 조정으로 나와서 나 한 사람을 보필하라."
하고, 승지를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부주(附奏)하기를,
"전후 구제하여 준 은혜가 하늘처럼 끝이 없습니다. 이제 이 삼엄(森嚴)한 하교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굽어보니, 감격의 눈물이 흘러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오직 이 잘못된 생각에 대해 더없이 스스로 익히 헤아렸으므로 문자(文字)로 속마음을 진달하고 싶습니다만, 본래 앓고 있던 여러 증세가 추위로 인하여 갑자기 더 심하여졌습니다. 조금 뜸해지기를 기다려 우러러 충정(衷情)을 고하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에게 돈면(敦勉)하니, 한용귀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이 스스로 인책(引責)한 것이 어찌 간서(簡書)055) 를 두려워해서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대방(大防)을 어기기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이 어찌 구차스럽게 요상(僚相)과 거취(去就)를 함께 하려 하겠습니까만 만약 정지(情地)를 말한다면 분수의 여하를 막론하고 두려워 위축되기는 똑같습니다. 이에 요상이 체직되어 돌아간 뒤에 신이 혼자서 태연히 무릅쓰고 있다면 이는 염치를 모두 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존엄한 상부(相府)에 어찌 이런 하나의 비부(鄙夫)를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온갖 방법으로 생가해봐도 어리석은 자가 행동할 길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위벌(威罰)을 내리시어 신하의 분수를 면려시키소서."
하자, 하교하기를,
"경의 일은 갈수록 과매(寡昧)한 내가 이해할 수가 없다. 경은 스스로 전 영상과 같다고 하고 있는데 내가 이에 대해 죄다 말하겠다. 경이 그날 연석에서 주달한 것은 전 영상과 매우 다른 점이 있다. 포증(褒贈)에 대한 일에 이르러서는 애당초 한마디도 가부(可否)한 것이 없었다. 요상(僚相) 사이에서 비록 그 사람을 면대하여 공척하지는 않았지만 이의(異議)를 제기한 의도는 상하의 사람들이 누군들 이를 몰랐겠는가? 따라서 나도 이미 묵묵히 마음속에 기억해 두었고 흠탄하였다. 그뒤 차자와 상소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작은 곡절에 불과한 것인데, 혼자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은 또한 사세가 그런 것이다. 전후 남김없이 환히 밝혀 말했는데도 오히려 다시 깊이 인책하고 있으니, 경이 어찌 나에 대해 의심을 둔단 말인가? 만일 경이 아뢴 것이 전 영상과 다름이 없이 똑같았다면 또 장차 어떻게 처의(處義)해야 했겠는가? 한마디로 총괄하여 말한다면 절대로 부당하고 절대로 부당한 것이다. 내가 이제 죄다 말하였으니 또한 감히 강요하지는 않겠다. 떠나가고 나오는 것은 경이 살펴서 도모하기에 달려 있다."
하였다.
2월 4일 임오
부제학 정동관(鄭東觀), 응교 김계렴(金啓濂), 부응교 여동식(呂東植), 수찬 김상휴(金相休), 부수찬 이면구(李勉求)를 경기(京畿)의 바닷가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관록(館錄)에 대한 명이 내렸는데도 여러날 회좌(會座)하면서 서로 소장(疏章)만 진달한 채 끝내 권점(圈點)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월 5일 계미
양사(兩司) 【장령 안정선(安廷善), 지평 김염(金鎌), 정언 박영재(朴英載)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이익모(李翊摸)는 본디 사납고 간사한 성품으로 음휼(陰譎)한 행동을 행하여 왔으므로 주야로 경영하는 것이 공의(公議)를 배반하고, 사심(私心)을 따르지 않은 것이 없으며 평생의 기량(伎倆)은 모두가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외람스럽게 문예(文藝)의 허명(虛名)을 훔쳐서 스스로 언론의 주장(主張)을 허여하여 왔습니다. 지난 겨울에는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사의(私意)를 멋대로 부려 제마음대로 방자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온 세상이 지목(指目)하였습니다. 아! 저 역적 권유(權裕)의 역절(逆節)과 흉모(凶謀)에 대해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사람들은 그의 살점을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진실로 부분적인 것이라도 역적 권유에 관계된 것이 있고 처지가 역적 권유와 근사한 것이 있으면 비록 의사(疑似)스러운 것일지라도 마땅히 엄중히 공척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회상(李晦祥)의 헤아릴 수 없는 정절(情節)에 대해서는 이미 단안(斷案)이 갖추어져 곧 하나의 머리가 붙어 있는 역적 권유인데도 그가 정사(政事)를 행할 처음에 당하여 제일 먼저 그의 사위를 침랑(寢郞)의 망(望)에 검의(檢擬)했으니, 여기에서 이미 마음의 자취가 환히 드러나서 숨길 수 없습니다. 비록 장석윤(張錫胤)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역적 권유를 편들고 역적 편에 힘을 바친 정상이 심노현(沈魯賢)의 공초(供招)에서 긴요하게 나왔으니, 진실로 조금이나마 공분(公憤)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오래도록 기용을 저지당하여 온 나머지에 천거하려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감히 방자하게 곧바로 삼전(三銓)056) 의 천거에 의망(擬望)하면서 제방(隄防)의 엄함을 돌아보지 않은 채 감히 일찍이 〈임금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계교를 내었으니, 이미 그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김달순(金達淳)의 일이 발론된 뒤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까닭없이 병을 칭탁하면서 두 번이나 상소하여 인입(引入)함으로써 돌아보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자취를 환히 드러내었습니다. 도헌(都憲)에 제수하는 전지(傳旨)가 이에 입궐(入闕)하여 행정(行政)할 적에 있었으니, 이렇게 대론(大論)이 바야흐로 한창일 때를 당하여 앞장 서서 토죄(討罪)하는 것이 의당 다른 사람보다 배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지(舊紙)를 등서(謄書)하여 올림으로써 대충 책임만을 메웠을 뿐이니, 그가 김달순에게 가까이하고 김달순과 속마음이 연결되어 있어 난만하게 서로 체결된 정상이 남김없이 탄로가 났습니다. 청컨대 대사헌 이익모(李翊模)에게 우선 찬배(竄配)시키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6일 갑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징토하는 것은 대의(大義)인 것인데 신은 불충(不忠)하여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언(凶言)을 듣고 눈으로 차마 볼 수 없는 패려(悖戾)한 일을 보고서도 팔짱을 끼고 옆에서 바라만 보고 세월을 보내며 두려워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으려 하여도 하지 못한 이유인 것입니다. 아! 저 김달순은 곧 선왕(先王)을 섬겨 후한 은총을 받고 나간 자이니, 선왕의 병신년057) 상소 내용과 영묘(英廟)의 당일 연교(筵敎)를 어찌 듣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상소 내용 가운데 마음이 아프고 이마에 땀이 흐른다는 글귀와 연교가 있은 뒤에 함께 사고(史庫)에 보관하라고 한 명이 애통하고도 비통하여 일성(日星)처럼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에 선조(先朝)께서 시행하지 않았던 은전(恩典)을 앞서서 먼저 청하였고 또 선조께서 이미 세초(洗草)한 문자를 나중에 바쳤으니, 이런 일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나중에 올린 한장의 상소는 또 군부(君父)와 각승(角勝)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그의 죄가 더더욱 위로 하늘에까지 통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소서.
지금 신이 당하여 있는 정지(情地)는 결단코 하루도 얼굴을 들고 현직(現職)에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체량(體諒)하겠다는 은명(恩命)을 받들지 못하면 끝내 감히 서울에 평안히 거처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지난번 연명한 차자는 단지 사의(私義)에 있어 편안하기 어려움으로 인연하여 견벌(譴罰)을 같이 받기를 바란 것입니다. 신의 그런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습니다만 신의 자취는 저절로 모호한 데로 귀결되어 있으니, 신과 같은 죄로 지금까지 요행히 피하고 있는 것은 조정의 거조(擧措)에 크게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인채(李寅采)·이정륜(李廷輪) 등에게 이미 감단(勘斷)했던 형률(刑律)을 신이 차자를 올려 인책(引責)한 것으로 연유하여 도리어 도로 정지시키는 데로 귀결시켰으니, 이는 사체에 의거 헤아려 보건대 결단코 그대로 둘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이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 될 직임을 삭제하여 신의 불충(不忠)한 죄를 다스림은 물론 이인채 등을 찬배(竄配)시키는 형벌(刑罰)도 전대로 시행하소서. 이동형(李東馨)의 죄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성토(聲討)했는데도 도배(島配)시키는 형벌을 아직도 윤허하지 않고 있어 괴귀(怪鬼)의 무리들이 장차 엿보고 잇달아 일어날 우려가 있어 신은 삼가 두려움을 느낍니다. 다만 그의 상소 내용에서 서형수(徐瀅修)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그가 목견(目見)했는지의 여부를 다른 사람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성비(聖批) 내용의 하교가 참으로 윤당(允當)합니다. 만약 근일 세도(世道)를 괴란시킨 죄를 논한다면 서형수가 어떻게 이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관현직(淸官顯職)을 싸잡고 있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극진했는데도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은 채우기 어려운 것이어서 점점 교활한 수단을 부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숨바꼭질을 하면서 날뛰었으니, 결국 죄인이 주달한 것도 태반은 서형수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곧 십목(十目)이 보고 십수(十手)가 가리키는 것이니, 어찌 이동형의 상소를 기다려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겠습니까? 공분(公憤)이 세상에 넘쳐 흘러 막을 수가 없는데 단지 이동형의 상소만 흉소(凶疏)로 삼을 뿐 아울러 당연히 성토해야 할 서형수에 대해서는 감히 발론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실로 통분스럽게 여깁니다. 또한 원하건대 속히 방류(放流)058) 시키라는 명을 내려 조정을 맑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운운할 필요가 뭐 있는가? 절대로 지나친 일이며 절대로 지나친 일이다. 김달순·이동형에 대한 일은 나도 또한 처벌이 죄범에 합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인채·이정륜의 일은 경의 말이 이미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겠다. 서형수의 일은 경이 이동형을 엄중히 토죄하면서 한 말이 이와 같으니, 일세(一世)의 공의(公議)임을 알 수 있다.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겠으니, 경은 사퇴하지 말고 안심하고 시사(視事)토록 하라."
하였다.
서형수(徐瀅修)를 흥양현(興陽縣)에, 이인채(李寅采)를 명천부(明川府)에, 이정륜(李廷輪)을 희천군(熙川郡)에 정배(定配)하였다.
김이도(金履度)를 경기 관찰사로, 이신경(李身敬)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정언 임업(任㸁)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도헌(都憲) 이의필(李義弼)이 전 영상(領相)에 대해 상소하여 논핵함에 있어 성토한 것이 지극히 엄중하여 죄안(罪案)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흰 머리로 죽지도 않고서 노욕(老慾)을 더욱 방자하게 부렸습니다. 그가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은 곧 그의 조카인 서유순(徐有恂)이 작용(作俑)059) 된 그것입니다. 아! 저 서유순은 학식도 없고 수치심도 없어 권세(權勢)를 의지하여 공갈하고 속이는 등 지극히 추잡하고 지극히 비열한 일들은 붓끝을 더럽힐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한 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는데 그것은 곧 연설(筵說)을 고치려고 도모한 일입니다. 아! 기거주(起居注)의 임무가 중한 것이 어떠합니까? 그리고 당일 연석에서의 대화는 관계가 또 어떠합니까? 그런데도 은밀히 한림(翰林) 서기수(徐淇修)를 사주하여 그로 하여금 구어(句語)를 고쳐 사실을 변환(變幻)시키게 하니, 서기수가 그 일을 기꺼이 맡아서 백방으로 꾀고 위협하였으나 결국 주서(注書)가 굳게 항거하였기 때문에 지극히 비참한 간계(奸計)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찌 이런 변괴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어찌 일개 서유순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여기(戾氣)가 뭉쳐진 서형수(徐瀅修)가 또 중간에서 지휘한 것입니다. 무릇 서형수가 스스로 이들의 모주(謀主)가 되어 크고 작은 일을 함에 있어 수염을 흔들면서 지시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공사(公私)의 문자들을 거개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대찬(代撰)하였습니다. 김달순을 지금의 김달순으로 만든 것은 첫째도 서형수이고 두 번째도 서형수 때문인 것입니다. 김달순이 도성(都城)을 나갔을 적에 마중나가 기영(畿營)의 문전(門前)에서 주접(住接)케 한 다음 몸소 배알하고 악수하며 사업(事業)이라고 핑계대고 밤에 모여 술잔을 나누면서 머리를 맞대고 주밀하게 논의하여 이런 음흉한 계교를 꾸미고나서는 강제로 소본(疏本)을 고치게 했다는 것은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고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차마 했는데 무슨 일을 차마 못하겠습니까? 그가 마음먹고 계획을 세운 것이 아! 또한 요망스럽고도 흉악스럽습니다. 이런데도 엄중히 조처하지 않는다면 국법과 세도(世道)가 다시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서형수·서기수·서유순 등 세 사람은 원도(遠島)에 귀양보내어 영원히 조정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신은 이인채(李寅采)·이정륜(李廷輪)의 일에 대해 혐의를 피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을 지금껏 정배(定配)하지 않고 있으니, 형정(刑政)의 전도(顚倒)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도로 배소(配所)로 출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형수에 관한 일과 이인채 등에 관한 일은 이미 좌상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처분을 내렸다. 연본(筵本)을 고치려 도모했다고 운운한 말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도 또한 전해 들은 이야기이니, 이에 의거하여 곧바로 중률(重律)로 감단(勘斷)할 수는 없다. 서유순·서기수는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다 심문하여 공초(供招)를 받게 하라."
하였다.
2월 7일 을유
〈북경(北京)에서〉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는가?"
하니, 정사(正使)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신은 노둔한 사람으로 나라에서 논할 만한 것을 엿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대략 들은 것에 의거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교비(敎匪)060) 가 과연 이미 평정되었으며, 그곳에도 또한 사옥(邪獄)이 있는데 매우 엄중히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제(皇帝)의 인품이 어떻다고 하던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상모(狀貌)는 살이 많이 쪘고 골격은 작았으며 자못 화기(和氣)가 있었습니다. 정령(政令)에 관한 것은 전하는 말에 의하면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대체로 근검(勤儉)하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궁전(宮殿)이 질박하고 꾸밈새 없는 것이 많은 것을 살펴보면 검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율(紀律)이 상당히 엄하여 사무가 지체되는 것이 없으니, 또한 부지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행사가 구비되기를 요구하게 되니 세밀히 살피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여기며 자그마한 은혜를 인(仁)으로 여기기 때문에 혹 까다롭고 잗단 병통이 있기도 합니다. 신이 연전(年前)에 들어갔을 적에는 오문(午門) 밖에서 반열(班列)을 이루었었으므로 자못 난잡스러움을 깨닫게 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황제의 종손(從孫)인 패자(貝子)라고 일컫는 사람이 반열을 정돈하여 매우 정제되었으니, 여기에서도 또한 단속이 엄중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단속의 엄중함이 건륭(乾隆)061) 때보다 나은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건륭의 초년(初年)은 아마도 반드시 만년(晩年)에 너무 느슨하게 한 것과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지금의 황제는 규모가 대개 엄격한 것을 숭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갑작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일이 의리에 관계되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달순(金達淳)에 관한 일을 경은 반드시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 이런 변괴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도 과연 들었습니다만, 놀랍고 통분스러워 다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연석에서 주달한 내용의 배포(排布)는 매우 음흉하고 참혹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고사(故事)를 모른다는 것으로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멋대로 더없이 중하고도 엄한 의리를 범하였으며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마음대로 방자하게 범하였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이다. 선조(先朝)의 대은(大恩)과 대덕(大德)을 저버린 것이 이와 같으니,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한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마땅히 다 진달하겠습니다. 대저 지나침도 불급함도 없는 것을 의리라고 말하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지나치는 것이 있어도 안 되고 조금이라도 불급함이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는 뛰어난 성인(聖人)으로 지극히 어려운 위치에 처하여 있으면서 지극히 정미(精微)한 큰 의리를 지켜온 것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스러움이 없었으니, 오늘날의 군신 상하(君臣上下)는 오직 일념(一念)으로 준수해야 합니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거론하지 못하는 것 이외에 실로 다시 용납할 만한 의리가 없는 것인데 방자하게 이를 전하의 뜰에서 거론하여 아뢰었으니, 어찌 더없이 통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신이 도중에서 조지(朝紙)를 보니 전후 내리신 윤음(綸音)이 비통하면서도 광명하고 광명하면서도 엄정(嚴正)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선왕이 지켜온 의리에 불급한 것도 이른바 용서없이 죽여야 하고, 선왕이 지켜온 의리에 지나치는 것도 이른바 용서없이 죽여야 한다고 하는 하교는 더욱 더없이 흠앙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선조(先朝)께서 매양 털끝만한 차이가 나중에는 천리만큼 벌어지게 된다는 하교를 하였었는데 실로 선왕(先王)과 전하가 같은 법칙임을 흠앙하여 마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의 거조(擧條) 이외에 상소의 전편(全篇) 내용은 음흉하고 참혹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른바 간언(諫言)을 숨겼다고 한 것은 그 지의(指意)를 따져보면 더욱 마땅히 어떤 데에 귀속시켜야 하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처음 그의 연주(筵奏)를 접하고서 이미 더할 수 없이 놀라웠는데 잇달아 또 그의 상소를 보았는데 이런 등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조정에서 발론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변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가령 내가 그의 말을 따랐다면 무슨 얼굴로 진전(眞殿)을 배알하겠으며 또한 무슨 얼굴로 종묘(宗廟)의 15실(室)을 배알하겠는가? 또한 무슨 얼굴로 경모궁(景慕宮)에 배알할 수 있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성학(聖學)이 고명하신데 어찌 그런 말을 따르실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도 또한 아비가 있고 할아버지가 있는 자인데, 삼조(三朝)062) 의 의리에 관계된 일을 그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간범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간언(諫言)을 숨겼다고 한 한마디는 더욱 마땅히 어떤 데에 귀속시켜야 하겠는가? 먼저 경 등부터 의리를 천명한 연후에야 윤리(倫理)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오늘날 정신(廷臣)이 된 사람은 누군들 눈을 부릅뜨고 용기(勇氣)를 내어 천명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경의 정지(情地)가 전과는 크게 다르니, 다시 시골을 찾지 말고 그대로 경제(京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하였다.
판부사 서매수(徐邁修)를 돈면(敦勉)하여 도성(都城)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서매수가 부주(附奏)하기를,
"신의 죄가 구산(邱山)처럼 쌓였으나 은혜는 하해(河海)처럼 깊습니다. 근신(近臣)이 멀리 와서 성유(聖諭)를 선사(宣賜)하였으므로 신이 경건히 받들어 반도 못 읽어서 저도 모르게 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왔습니다. 신이 그때 막 큰병을 겪고나서 정신이 가물거리므로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말씀이 거듭 자상하였는데도 분명히 듣지를 못하였고 곁에서 아뢴 것이 단서가 많았는데도 또한 이해하지를 못하고서 번번이 입시(入侍)한 승선(承宣)에게 물어보고나서야 대략 줄거리를 알 수 있었다는 것을 성감(聖鑑)께서 굽어 통촉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자(言者)들의 말은 혹은 절실하고 충애(忠愛)스러운 것이라고 자랑하였다고도 하고, 혹은 세도(世道)가 잘못된 것을 우려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된 것을 걱정해서이라고 일컬으면서 이것을 들어다가 저기에 보태고 동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니, 사람이 미덥지 못하기가 어쩌면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의 그날 우러러 아뢴 내용 가운데 좌·우상(左右相)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것이라고 운운한 것에 대해 ‘좌(左)’ 자가 빠진 것은 기주관(記注官)이 착오를 범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령 단지 우상(右相)이 아뢴 것에 대해서만 거론하여 말했다고 하더라도 절실하고 충애스럽다는 등의 말은 곧 처음의 연석에서 이미 비답(批答)을 받든 것이기 때문에 가납(嘉納)하신 성의(聖意)에 대해 신이 진실로 흠앙한다는 뜻에서 아뢴 것입니다. 포증(褒贈)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곧 이날 비답을 받들지 않은 것인데 무슨 가납(嘉納)에 대해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잘못되는 것을 우려하고 의리가 회색(晦塞)되는 것을 걱정한다.’고 한 것은 곧 이우(李㙖)를 아직껏 감죄(勘罪)하지 않고 박하원(朴夏源)을 사유(赦宥)하여 돌아오게 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속히 처분을 내리기 바란 것입니다. 일언 반구도 애당초 포증(褒贈)이란 두 글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미 연설(筵說)이 반하(頒下)되었으니, 신이 스스로 해명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사람들이 누군들 보고서 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사실이 이와 같고 저와 같음은 물어보지도 않고 어세(語勢)가 앞에 속하는 것인지 뒤에 속하는 것인지 궁구하여 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역적을 비호한 것으로 몰아붙이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염치를 무릅쓰고 도성(都城)으로 들어와서 한 장의 소장을 올려 징토(懲討)한 것은 진실로 부주(附奏)에서 다하지 못한 정성을 아뢰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니, 돌아보건대 나 자신의 진퇴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노패(老悖)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여도 중서(中書)063) 는 오랫동안 굳은살이 생기도록 있던 자리인데 무슨 돌아보고 연연할 것이 있다고 이렇게 매진(媒進)할 계책을 세우겠습니까? 도로 경제(京第)로 들어가라는 하교에서 노패(老悖)한 신을 딱하게 여기는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죄가 큰데도 아직 감죄(勘罪)받지 않았으니, 어떻게 감히 한번 견임(見任)에서 체직되었다는 것으로 끝났다고 여겨 무릅쓰고 도성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사관(史官)이 돌아옴에 경의 부주(附奏)를 보건대, 그날의 일에 대해 누누이 말하면서 단락에 따라 변설(卞設)하였다. 경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잗단 거조(擧措)를 하는 것인가? 경이 이른바 정신이 가물거리므로 알아듣지 못함이 더욱 심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제목(題目)이 되는 말로 내가 경을 보호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이제 부주의 내용에 좌·우상(左右相)의 ‘좌(左)’ 자가 누락되었다고 운운한 것에 의거하여 말하건대 그때 내가 경에게 하순(下詢)한 것은 단지 김달순(金達淳)의 거조(擧條)에 관한 일을 거론했었고 좌(左) 자가 누락된 것이 만일 기주관(記注官)의 잘못이었다면 또 경이 대답한 것이 분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가물거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마디로 포괄(包括)하여 말한다면 늙은 소치인 것이니, 이것이 어찌 경의 본심이겠는가? 경을 알고 경을 믿는 것이 이와 같으니, 경은 단지 나만 믿으면 된다. 무슨 다른 이유가 있으며,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은 즉시 도로 들어오라."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윤상규(尹尙奎)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한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1. 근래 한인(漢人)들 가운데 조금 문학(文學)이 있는 사람은 각기 문호(門戶)를 세우고 있는데, 이른바 고거학(攷据學)이란 것은 송유(宋儒)들을 비난하여 배척하고 오로지 주소(註疏)의 학설만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부 상서(禮部尙書) 기균(紀均)이 여기에 우두머리인데, 각로(閣老) 유권지(劉權之) 등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른바 존주학(尊朱學)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오로지 주자(朱子)의 훈고(訓誥)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학사(太學士) 팽원서(彭元瑞)가 우두머리인데 각로 주규(朱珪)와 상서 왕의수(王懿修) 등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곧 일종(一種)의 당론(黨論)이 이루어져 있는데, 건륭(乾隆) 말년에 기균·유권지 등이 서로 잇달아 등용이 되었고 지금의 황제가 등극한 뒤에는 주규·왕의수 등이 일시에 진용(進用)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2월 8일 병술
이시원(李始源)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양사(兩司) 【장령 안정선(安廷善), 지평 홍시부(洪時溥), 김염(金鐮), 헌납 이상우(李尙愚), 정언 박영재(朴英載)이다.】 에서 합계(合啓)한 가운데에 말하기를,
"이익모(李翊模)는 일찍이 임금의 마음을 떠보는 계획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리고 도정(都政)이 있은 뒤에 사직소(辭職疏) 가운데에서 ‘스스로 신(臣)이 매우 두려워한다.’고 한 이하의 두서너 구어(句語)는 지의(旨意)가 흉특(凶慝)하여 불만스럽게 여기는 뜻이 환히 드러나서 각승(角勝)하려는 자취를 숨기기 어려우니, 이것이 이미 그에게 있어 용서할 수 없는 죄인 것입니다. 무릇 김달순(金達淳)의 일이 발론된 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또 까닭없이 병을 핑계하면서 두 번이나 상소하여 인입(引入)하였으니 사세를 관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애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 김달순의 사우(死友)064) 는 이익모이고 김달순의 혈당(血黨)도 또한 이익모입니다. 따라서 공사(公事)의 문자(文字)에 서로 돕지 않는 것이 없고 대소(大小)의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새로 정석(鼎席)065) 에 올라 처음의 연석에서 아뢸 말에 대해 더욱 어찌 낭자하게 화응(和應)하여 설시(設施)에 대한 배포를 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들의 흉역스런 장두(腸肚)가 일관되어 왔다는 것은 십수(十手)가 가리키고 있어 숨기기 어렵고 만구(萬口)가 입을 모아 떠들고 있으니, 이렇게 의리를 간범하고 분수를 무시하며 나라를 배반하고 당여를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하는 부류들은 일각도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왕장(王章)을 가하지 않고 있으므로 여정(輿情)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청컨대 대사헌 이익모에게 우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는 형벌(刑罰)을 시행하소서."
라고 조어(措語)를 고쳤다. 또 아뢰기를,
"서형수(徐瀅修)의 죄는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효경(梟獍)066) 과 같은 종자로서 뱀과 구렁이 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어 온갖 나쁜 것을 다 지니고 있고 여러 가지 요망스러운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적 홍계능(洪啓能)을 아비처럼 섬겨 장인을 만나는 예(禮)를 행하기에 이르렀고 어미의 집을 원수처럼 여겨 끊고 알묘(謁廟)하는 일을 전폐(全廢)하였습니다. 역적 홍계능이 복법(伏法)된 뒤에는 천망(天網)이 너무 넓은 탓으로 왕장(王章)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그가 지금까지 머리를 붙이고 천지 사이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도 이미 천지처럼 살리기 좋아하는 전하의 덕에 의한 것입니다. 그에게 진실로 조금이나마 병이(秉彛)의 성품이 있다면 의당 자취를 감추고 엎드려 있으면서 마음을 고치고 얼굴을 바꾸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이에 도리어 의기 양양하게 아무런 일이 없었던 사람처럼 자처하면서 과제(科第)를 도모하여 점거하고서 명도(名塗)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더러운 찌꺼기가 몸에 가득하여 청명한 조정에 용납되지 못할 줄 알고서 기꺼이 자기 할아비와 등을 돌렸고 숙부(叔父)의 수립(樹立)을 원수처럼 여겼으며 스스로 문예(文藝)에 대해 자부하면서 세도(世道)를 주장하였고 청관(淸官)과 미직(美職)을 오직 마음대로 점유하였습니다.
사람을 해치고 일을 그르쳤으며, 공의(公議)를 빙자하여 사욕(私欲)을 성취시킴으로써 기필코 한정이 없는 욕심을 충족시켜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쳤으며,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날뛰는 습관을 더욱 방자하게 하여 김달순과 체결한 다음 김달순과 부화 뇌동하였습니다. 마침내 김달순이 처음의 연석에서 아뢴 것도 모두가 서형수가 난만히 생각하고 용의 주도하게 계획한 것이니, 대소(臺疏)에서 이른바 김달순이 지금의 김달순으로 된 것은 첫째도 서형수 때문이요 둘째도 서형수 때문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실제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무릇 김달순이 도성에서 달려나갈 때에 이르러서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기영(畿營)으로 극력 초치하여 캄캄한 밤 외로울 때 몸소 만나 본 다음 무릎을 맞대고 앉아서 손을 잡고 이야기했는데 사업(事業)이라고 일컬었고 생사(生死)로 허여하면서 은근히 술잔을 나눈 낭자한 형적은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고 입이 있는 사람은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안팎에서 서로 화응(和應)하고 수미(首尾)가 서로 얽혀 있으니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연본(筵本)을 고치려고 도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그의 단안(斷案)이 되는 진장(眞贓)이니, 더욱 일각이라도 천지 사이에 두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날 빈대(賓對)에 관한 연본(筵本)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대의(大義)를 천명하고 선지(先志)를 준행한 데 대한 하나의 큰 관려(關綟)067) 인 것이니, 더없이 엄중한 데 관계된 것이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그가 감히 벗어나려는 마음이 급급하여 은밀히 패려스러운 조카인 서유순(徐有恂)을 시켜 앞에서 부당한 짓을 하게 만들고서는 요망한 아우 서기수(徐淇修)를 중간에 개입시켜 기필코 그 문자(文字)를 고침으로써 사실을 변환(變幻)시키려 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없이 흉악하고 참혹하며 요망하고 간사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사람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만 사람은 속일 수 없는 것이며,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만 하늘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찬배(竄配)시키는 형벌을 비록 이미 특별히 시행하였습니다만, 그가 계모(計謀)를 세워 함께 악역(惡逆)을 저지른 더없이 흉악한 정절(情節)에 대해서는 다방면으로 핵실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흥양현(興陽縣)에 찬배한 죄인 서형수에 대해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중히 국문하여 통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돈면(敦勉)하는 비답을 내렸다.
2월 9일 정해
홍문록(弘文錄)을 행하였다. 【부제학 이시원(李始源), 응교 홍석주(洪奭周), 부교리 윤상규(尹尙圭)·홍의응(洪義膺)이다.】 삼점(三點)을 받은 사람은 권식(權烒)·홍희준(洪羲俊)·임천상(任天常)·김계하(金啓河)·신재명(申在明)·한긍리(韓兢履)·조양진(趙良鎭)·이태순(李泰淳)·박종신(朴宗臣)·김염(金鐮)·서유망(徐有望)·홍면섭(洪冕燮)·홍대호(洪大浩)·이우재(李愚在)·송익연(宋翼淵)·김노응(金魯應)·김교근(金敎根)·이노익(李魯益)·박대규(朴大圭)이다.
2월 10일 무자
삼사(三司) 【집의 이동면(李東冕), 장령 안정선(安廷善), 지평 홍시부(洪時溥)·김염(金鐮), 헌납 이상우(李尙愚), 부교리 윤상규(尹尙圭)·홍의응(洪義膺), 정언 임업(任㸁)·박영재(朴英載)이다.】 에서 신계(新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서매수(徐邁修)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하겠습니까? 그는 본디 패려하고 간사한 본성(本性)을 지니고 더러운 행실을 이루어 왔는데 겉으로는 궤열(憒劣)스러운 것 같지만 마음은 실로 음험합니다. 그는 한미(寒微)한 처지에서 만년(晩年)에 벼슬하기 시작하여 세리(勢利)를 뚫어 청관 요직(淸官要職)을 두루 점유하였는데 10년을 지나지 않아서 이미 품계가 높은 현직(顯職)에 올랐으므로 온 세상이 비웃으며 손가락질하여 온 지 오직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조금도 두러워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없이 더욱 노패(老悖)스러운 기세를 방자하게 부렸습니다. 비록 전관(銓官)으로 있을 때의 일을 가지고 논하더라도 한정이 없는 욕심을 채울 길이 없어 뇌물을 받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불량한 아들이 나쁜 일을 돕고 패려스러운 조카가 권세를 팔아 추잡한 소문이 길에 가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였습니다. 요직(要職)에 오르고 난 뒤에는 위복(威福)을 멋대로 휘두르고 권병(權柄)을 가지고 농락하면서 조금이라도 뜻을 어기면 논핵하여 파직시키는 것이 뒤따르게 되고 일단 아첨하여 마음에 들어 되면 장점을 들어 추켜 세워서 오직 마음대로 하여주었습니다. 불학 무식하고 염치라고는 하나도 없어 벼슬의 득실(得失)만을 걱정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고 권세와 이익만을 게걸스럽게 탐하여 왔습니다. 수건으로 깨끗이 닦고 죽음을 기다려야 할 나이에 호화로운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으니, 전후의 일을 따져 보면 누군들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특히 그가 정사(政事)068) 를 오로지하여 권세를 휘두르기 때문에 도로(道路)의 사람들이 지목을 하면서도 감히 입을 열어 발론하지 못하여 온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난번 중신(重臣)의 상소에서 거론한 것은 곧 그의 진장(眞贓)이었으니, 진실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직 의당 위축되어 엎드려 잘못을 반성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다시 복상(卜相)된 뒤 또다시 의기 양양하여 전대로 이익을 독점할 자리를 확보하는 습관을 부려 더욱 지렁이처럼 체결(締結)하는 형세를 의지하여 왔는데 정월(正月)에 있었던 빈연(賓筵)의 주대(奏對)에 이르러서 그가 흉역(凶逆)을 도와 극력 애호한 죄가 이제야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아! 저 김달순(金達淳)이 방자하게 흉언(凶言)을 하여 윤재겸(尹在謙)·박치원(朴致遠)의 포증(褒贈)을 청하였는가 하면 감히 거론할 수 없는 것을 감히 하고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차마 한 것은 군신(君臣)의 관계가 생긴 이래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극악(極惡)이요, 대대(大憝)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사람이면 누군들 가슴이 떨리고 뼈가 저려서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는 의리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수상(首相)이 되어 몸소 전석(前席)에 나아가 감히 굽어 하문할 적에 조금도 경동(驚動)하는 뜻이 없이 이에 말이 모두 절실한 것으로 충애(忠愛)스런 정성이 말밖에까지 넘쳐 흐른다고 하면서 허락하고 장려하여 마지않았음은 물론이어서,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깊이 체찰(體察)하라고 하면서 우러러 윤종(允從)할 것을 면려하였습니다. 앞에서 창도하고 뒤에서 호응하며 왼쪽에서 막고 오른쪽에서 저지하면서 화응(和應)한 정상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성심(聖心)이 놀라서 통분스럽게 여기고 사교(辭敎)가 비통함에 이르러서는 누차 신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감히 받들 수 없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그들이 비록 속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성세(聲勢)를 서로 응원하는 처지라고 하더라도 진실로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고 조금이라도 신하의 절개를 지녔다면 즉시 황공하고 위축되어 떨면서 죽기를 구하여도 되지 않은 것처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도리어 거짓 못들은 체하면서 태연히 괴이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오히려 세도(世道)가 잘못되는 것을 걱정하고 의리(義理)가 회색(晦塞)된 것을 우려한다는 등의 이야기로 앞장서서 성세를 도우면서 멋대로 협박하고 버티었으니,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무너진 것이고 신하의 분수가 끊긴 것입니다. 목욕 청토(沐浴請討)069) 하는 의리를 저같은 비부(鄙夫)들에게 요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들이 담당하고 나서서 역적을 비호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장황한 말을 늘어놓은 정상은 춘추(春秋)의 의리에 의거하여 다스린다면 당여(黨與)들까지 죽여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감히 벗어날 마음을 품고 돌아보면서 사세를 관망하는 습관을 드러내어 행하였으며, 이에 간범한 것이 없는 대신(大臣)과 거취(去就)를 같이하려고 금방 도성를 나갔다가 곧바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영호(營護)한 죄를 끝내 사실을 자수하지 않고 있으니, 사람도 속일 수 없는 것인데 하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흉역스런 속마음이 서로 일관되어 왔다는 것을 십수(十手)가 가리키고 있고 십목(十目)이 보고 있습니다. 그의 일전의 부주(附奏) 내용을 살펴보면 음흉하고 간교한 계교가 갈수록 더욱 통분스럽습니다. 아! 그때 주달(奏達)했던 것은 연본(筵本)에 환히 기재되어 있어 상관(上款)과 하관(下款)의 조건(條件)이 같지 않고 전주(前奏)와 후주(後奏)의 어맥(語脈)이 분명했는데 이에 감히 절실하고 충애(忠愛)스런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이미 비답(批答)을 받든 연주(筵奏)에 가져다 붙이고 세도(世道)를 걱정하고 의리를 우려한다는 등의 이야기를 이우(李㙖) 등의 처분에다 붙여 두루뭉실하게 한데 섞어 불분명하게 분소(分疏)하려고 하였으니, 말마다 교악(巧惡)스럽고 절(節)마다 흉휼(凶譎)스러웠습니다. 그가 이른바 기주관(記注官)이 착오를 범했다고 한 것은 더욱 전에 없는 큰 변괴인 것입니다. 대저 그때의 하문은 단지 김달순의 일에만 언급된 성상의 말씀이 분명하여 일성(日星)처럼 환히 게재되어 있는데도 이제 단안(斷案)이 이미 갖추어진 뒤에 갑자기 하나의 ‘좌(左)’ 자를 점출하여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고 하면서 사실을 변환(變幻)시켜 기주관이 빠뜨렸다는 데로 귀결시켰으니, 그 정절(情節)이 헤아릴 수 없고 죄악이 더욱 환히 드러났습니다. 사람이 무엄하고 불경스러운 것이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서유순의 무리들이 연본(筵本)을 고치려고 도모한 음모(陰謀)와 비계(秘計)가 이제 남김없이 모두 탄로가 났으니, 그가 살기를 도모한 계교를 부린 것이 더욱 환히 드러났으며, 함께 나쁜 짓을 한 자취가 이와 같습니다. 나라를 배반하고 당여를 위해 사력(死力)을 다하며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인 부류들을 버려두고 논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판부사 서매수(徐邁修)를 우선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매수의 일은 첫째는 노병(老病)으로 신사(神思)가 원만하지 못했던 소치이고 둘째도 노병으로 신사가 원만하지 못했던 소치이다. 어찌 혹시라도 다른 마음이 있었겠으며 어찌 혹시라도 다른 마음이 있었겠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문무(文武)의 과장(科場)에 난잡한 폐단을 계칙하였다.
김면주(金勉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윤서동(尹序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신현(申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전 영상 서매수(徐邁修)의 부주(附奏)를 살펴보건대, 갑자기 정월 초6일의 연본(筵本)에 대한 일을 거론하여 ‘좌(左)’ 자가 누락된 것이 기주관(記注官)의 착오인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기주관의 사체는 지극히 근엄한 것이고 당일의 연석에서 담화하는 것은 더욱 막중한 데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받은 성교(聖敎)를 주서(注書)에게 신칙시켜 상세히 기록하게 하였으며 신이 또 누차 교검(校檢)하였는데 연석에서 들은 것과 조금도 차이가 나거나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본(原本)을 그대로 봉입(捧入)했던 것이고 곧이어 특교(特敎)에 따라 조지(朝紙)에 반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좌(左)’ 자가 누락되었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근리(近理)하지 않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때 하순(下詢)한 것은 단지 김달순의 일만 거론한 것인데 우러러 답하는 즈음에 어떻게 ‘좌(左)’ 자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잘 알아듣지 못해서 잘못 대답했다고 해도 연본(筵本)을 반포한 것이 빈대(賓對)한 다음날에 있었는데 어찌하여 20여 일이나 오랫동안 한마디도 없다가 이제 비로소 이런 불분명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면 잘못 대답하기 쉬운 것이고 정신이 가물거리면 상세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이러나 저러나 노인이 병을 앓은 끝이라서 정사(精思)가 주편(周徧)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인데 그대가 불분명한 말을 했다고 이야기하니, 이 또한 실정 밖의 책망인 것이다."
하였다.
2월 12일 경인
정원에서 하교로 인하여 하번 한림(下番翰林) 정관수(鄭觀綏)에게 물어서 아뢰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연본(筵本)을 반하한 다음날 서기수(徐淇修)가 예문관에 있으면서 서유순(徐有恂)의 말에 의거하여 가주서(假注書) 정원용(鄭元容)에게 글을 보내기를, ‘영상이 아뢴 내용 가운데 좌·우상(左右相)의 초연(初筵)의 연주(筵奏)에 대해 앙대(仰對)하였는데 이제 반하된 연주를 보건대, 좌(左)자가 누락되었으니, 추후 첨서(添書)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기 때문에 신이 정원용과 같이 앉아서 그 글을 보고서 놀라운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원용이 감히 고칠 수 없다는 뜻으로 답서(答書)를 보냈습니다. 조금 있다가 서기수가 직접 와서 신의 직소(直所)에 앉아서 정원용을 맞이하여다가 다시 그 이야기를 거듭 말하면서 기필코 고치기를 요구했으며 또 말하기를, ‘나의 초책(草冊) 안에도 또한 좌·우상(左右相)의 초연의 연주라고 쓰여 있으니, 이는 의난(疑難)스러운 일이 아니다.’고 운운하니, 정원용이 말하기를, ‘다만 나의 초책 안에도 원래 좌(左) 자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영상이 단지 우상(右相)의 초연의 연주라고 앙주(仰奏)한 말이 분명히 귀에 남아 있는데 어떻게 마음대로 추후에 고칠 수 있겠는가?’ 하니, 서기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일기책(日記冊)을 등서(謄書)할 때 좌·우상(左右相)으로 쓰는 것이 옳겠다.’고 운운하였으며 정원용은 한결같이 앞서의 말과 같이 배척하였습니다. 신도 또한 정원용에게 말하기를, ‘그날 성상(聖上)께서 단지 우상의 초연의 연주(筵奏)를 영상·좌상은 보았는가라고 하교하니, 영상이 좌·우상을 아울러 거론하여 앙대했다고 운운한 것은 더욱 어찌 말이나 맞는 것인가? 이에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고 또 조지(朝紙)를 반하한 뒤에 어떻게 감히 첨가하거나 삭제할 수 있겠는가? 일기책에 이르러서는 소중한 것이 더욱 자별한데 어떻게 감히 마음대로 넣고 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니, 서기수가 다시 말이 없이 일어나서 갔습니다. 그때의 사실은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으며, 가주서(假注書) 정원용(鄭元容)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연설(筵說)을 반포한 뒤 상번 한림(上番翰林) 서기수(徐淇修)가 서유순(徐有恂)의 서한 내용에 의거하여 신에게 글을 보내오기를, ‘영상이 아뢴 내용에는 좌·우상(左右相)이라고 운운했는데 연본(筵本)에는 단지 우상(右相)이라고만 쓴 것은 이는 누락되어 착오된 것 같으니, 다시 좌(左) 자를 첨가하여 쓰라.’고 운운했기 때문에 신이 놀랍고 망령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막중한 연본은 비록 일자 반획(一字半劃)이라도 감히 가감(加減)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리에 의거하여 답하였습니다. 서기수가 또 찾아와서 다시 그 이야기를 제기하였으므로 신이 한결같이 전처럼 말하여 답하기를, ‘좌(左) 자가 누락되었다는 것과 첨서(添書)하라고 운운한 것은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연석에서 들은 것이 이미 분명하고 초책(草冊)에 기록된 것이 또 이렇게 정녕(丁寧)하다. 그리고 그때 성상(聖上)께서 굽어 하순(下詢)할 적에는 단지 우상(右相)의 거조(擧條)에 관한 일만 거론하였을 뿐이었고 잇달아 영상·좌상은 모두 보았는가 하는 하교가 있었는데 영상이 신이 과연 보았다고 앙주(仰奏)했으니, 무릇 보았다고 한 것은 단지 우상의 일에 관한 하문에 대답한 것이다. 다만 어맥(語脈)이 이럴 뿐만이 아니라 기주관(記注官)의 기록한 것도 털끝만큼도 착오된 것이 없다.’ 하니, 서기수가 말하기를, ‘나의 초책(草冊) 안에는 좌(左) 자가 있으니 일기(日記)를 수정할 때에 첨서(添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말하기를, ‘내가 듣고 기록한 것에는 분명히 좌(左) 자가 없으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첨서하라고 운운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한 일이다. 그때의 하번 한림(下番翰林)인 정관수(鄭觀綏)도 또한 곁에서 참여하여 들었다.’고 하면서 불가하다는 정상에 대해 말하니, 서기수가 그대로 거론하지 못한 채 갔습니다. 그때의 사실은 이와 같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였다.
2월 13일 신묘
의금부에서 서유순(徐有恂), 서기수(徐淇修)에게 누차 자세히 캐어 물었으나 서로 미루고 전가하여 평문(平問)070) 으로는 승복(承服)을 받기가 어렵다는 것으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이 공사(供辭)를 살펴보건대, 두 죄수에 대한 일은 이른바 책망할 가치도 없다는 그것이다. 지난밤 하번(下番)과 주서(注書)에게 물어서 아뢰었으므로 그때의 일의 상황이 이미 환히 드러났으니, 이제 다시 신문할 단서가 없다. 모두 찬배(竄配)시키는 형벌(刑罰)을 시행하라."
하였다. 정원 【승지 김회연(金會淵)·유경(柳畊)이다.】 에서 정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비답하기를,
"한마디로 포괄(包括)한다면 몰지각한 것이니 책망할 가치도 없다. 그리고 찬배는 또한 무거운 형벌인 것이며 또 여느 국수(鞫囚)와는 크게 같지 않으니, 다시 논란하는 것도 또한 지나친 것이다. 즉시 반포(頒布)하라."
하였다.
양사(兩司) 【대사헌 김면주(金勉柱) 사간 이원팔(李元八)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예로부터 어찌 이루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서유순(徐有恂)처럼 무엄하고 꺼림없어 더없이 흉악하고 참혹한 자가 있었습니까? 그는 본디 어리석고 외람된 성품으로 흉악하고 음험한 습관을 이루었으므로 평생의 기량(伎倆)이 모두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치는 것이었으며, 주야로 경영(經營)하는 것이 모두 공의(公義)를 등지고 사심(私心)을 따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온 세상이 다같이 분개하여 온 지가 오직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연본(筵本)을 고치기를 도모한 일이 들통나기에 이르러서는 그의 더없이 흉악한 설계(設計)와 그지없이 패려스러운 조모(造謀)에 대해 말을 하면 뼈가 섬뜩하고 들으면 간담이 떨립니다. 아! 기주관(記注官)을 설치한 법의(法意)가 지극히 엄하고도 중한 것이어서 한번 사필(史筆)에 오른 뒤에는 비록 임금의 존엄함으로 그 사이에 첨가하거나 산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날의 연설(筵說)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선지(先志)를 따라 대의(大義)를 천명하는 하나의 큰 관려(關綟)인 것이니, 또 얼마나 지엄 지경(至嚴至敬)하고 막중 막대(莫重莫大)한 것입니까? 그런데도 그가 감히 어구(語句)를 고쳐서 사실을 변환(變幻)시키려는 마음을 품고 이를 글로 써서 왕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실로 이는 천지가 다하고 고금에 걸쳐 있지 않았던 큰 변괴인 것입니다. 서기수(徐淇修)와 서 유순에 이르러서는 몸뚱이는 다르지만 창자는 같고 길은 다르지만 궤철(軌轍)은 같기 때문에 음모(陰謀)는 화응(和應)하지 않은 것이 없고 비계(秘計)는 관통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혹은 은밀히 내용을 고쳐 뭉갤 것을 촉탁하기도 하고 혹은 사주를 받아서 꾀고 협박하기도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청컨대 서유순·서기수를 모두 왕부(王府)071) 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히 신문하고 자세히 사실을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냄으로써 전형(典刑)을 바루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서유순·서기수에 대한 일은 공사(供辭)와 인사를 살펴보건대, 모두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탓이니, 무슨 책망할 가치가 있겠는가? 또한 핵문(覈問)할 단서도 없으니, 찬배시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4일 임진
한용탁(韓用鐸)을 형조 판서로, 김희순(金羲淳)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회방(回榜)072) 노인(老人) 마원린(馬元麟)·최현택(崔賢澤)을 소견(召見)하고 모두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또 회방 노인 박은철(朴銀哲)이 있었는데 이 전례에 따라서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5일 계사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말하기를,
"경이 이제 조정으로 나왔으니, 국사를 위하여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경신년073) 화변(禍變)이 있었을 때에는 경이 수상(首相)으로 국경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경이 그때 있었다면 의당 원상(院相)074) 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상이 비록 국외에 나가 있다고 하여도 좌·우상이 원상이 된 일이 없지 않았는데도 경은 끝내 체직되어 떠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다시 수상(首相)에 제배(除拜)한 뒤에 이르러서는 또 얼마 안되어 김후(金𨩿)의 일이 발론되었는데 이 또한 어찌 일개 김후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이는 모두 내가 어린 나이로 과매(寡昧)하여 국정(國政)을 총람(總攬)할 수 없었던 탓으로 그들에게 무시당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번 김달순(金達淳)의 일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 또한 업신여기고 무시한 데서 나온 것이다. 내가 과연 나이 어리고 과매하여 일을 제대로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날 북면(北面)하여 나를 섬기는 자들이 나를 경멸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이렇게 한다면 머지않아 어떠한 변괴가 나올지 알 수 없다. 설사 그의 말이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미 삼조(三朝)에 죄를 얻은 것이 된다고 하교하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거짓으로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니, 본죄(本罪)는 고사(姑捨)하고라도 이 한 조항이 곧 그에게 있어서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이다. 경이 이미 출사(出仕)하였으니, 몸소 국가의 안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손으로 윤강(倫綱)을 부지하는 것이 모두 경의 책임인 것이다. 경의 몸은 경의 소유가 아니니 모쪼록 옛사람의 온갖 정성을 다하여 국사에 전력한 의리를 생각하기 바란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은 절대로 버티기 어려운 정지(情地)로서 절대로 감당하여 받들 수 없는 직임을 맡았습니다. 전후의 은유(恩諭)가 너무도 간곡하였기 때문에 신이 이제야 내 몸이 나의 소유라는 것을 모르고 염치를 무릅쓰고 왕명에 응할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침 병이 더쳐 즉시 달려 나아가지 못하였으니, 황송스런 마음 더욱 간절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연석에서 헤아려 보고 정실(情實)을 다 아뢰고 체량(體諒)한다는 윤허를 받기를 바랐습니다만, 또 누누이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더구나 국사와 세도(世道)가 어려운 것이 이와 같은 때를 당하여 신처럼 변변치 못한 사람이 더욱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척퇴(斥退)시키고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을 다시 복상(卜相)하소서. 그리하여 신으로 하여금 서울과 시골을 왕래하면서 수시로 기거(起居)를 받들게 하여주는 것이 변변치 못한 사람의 바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것은 절대로 지나친 말이다. 지난번의 돈유(敦諭)에서도 또한 이미 말하였지만 경은 선조(先朝)께서 돌보아 예우(禮遇)하였으며 내가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경의 한몸에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으니, 지금이 어찌 사양할 때이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구제하여 주고 불식(拂拭)시켜 준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감히 준례에 따라 사양하는 체면을 갖추려 하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국가의 안위(安危)는 대신(大臣)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는데, 대신은 몸소 국가의 안위를 맡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적임자가 아닌데도 몸소 안위를 책임지려 자처(自處)할 경우에는 실로 국사를 그르칠 우려가 있습니다. 이는 신이 스스로 신의 몸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 주달하기를,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더없이 정미(精微)한 의리를, 더없이 엄정(嚴正)하게 준행하여 온 것은 자유(子游)·자하(子夏)의 한마디의 도움075) 도 의뢰할 것이 없고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세 마디를 더해준 말076) 도 받아들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대왕의 뜰에서 북면(北面)하여 섬겼던 사람들은 단지 일념(一念)으로 마음에 새겨 행하고 오래도록 머리 속에 기억하여 두고서 감히 그 뜻을 어기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비록 아득한 운향(雲鄕)에 가 계시지만 영령이 환히 오르내리시니, 더욱 묵묵히 정미롭게 한 이유와 엄정하게 준행한 까닭을 이해하여 우리 전하께서 더없이 잘 계술(繼述)하는 효도를 우러러 받들어야 할 뿐입니다. 진실로 자신의 가계(家計)를 위하여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미 인신(人臣)의 분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저 김달순(金達淳)은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치려는 마음으로 은밀히 저것을 빙자하여 이것을 이루려는 계교를 세운 다음 먼저 사설(邪說)을 창도한 뒤 따라서 스스로 화응(和應)하였는가 하면, 스스로 걱정하고 탄식하는 안색을 짓고 스스로 통분해 하는 논의를 선동시키고 미혹시켰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감히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방자하게 발론하여 처음에는 전석(前席)에서 위협하려 했고 나중에는 또 상소로 진달하여 각승(角勝)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두 구어(句語)는 위로 막중한 자리를 핍박하고 있었으므로 곧바로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았고 가슴을 치면서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세도(世道)가 거의 없어질 뻔하였고 인기(人紀)가 거의 멸절될 뻔하였으니, 아! 이 통분스러운 마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그가 선조(先朝) 때에는 계교를 부리지 못하고 있다가 전하의 앞에 불쑥 바친 이유는 과거에는 반드시 거괴(巨魁)로 지목되어 주벌(誅罰) 당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 그러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괴역(鬼蜮)의 정상이 탄로나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니, 이 한 가지 일이 더욱 단안(斷案)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선조(先朝)가 남면(南面)하고 있을 때를 우러러 생각한다면 마음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조처해야 될 바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삼사(三司)의 상소와 계사는 실로 여정(輿情)을 따른 것인데 이배(移配)하고 위리(圍籬)하라는 청이 아직도 윤허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물정(物情)이 어찌 답답해 하지 않겠으며 인심이 또한 어찌 관망(觀望)하는 것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바라건대, 선조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시어 우선 특별히 이배하고 위리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성효(聖孝)를 빛내시고 건단(乾斷)077) 을 보이소서.
이로 인하여 또 우견(愚見)을 올릴 것이 있습니다. 이동형(李東馨)에게 처분(處分)을 내리는 전교(傳敎) 가운데 불급한 것도 용서없이 죽여야 하고 지나친 것도 용서없이 죽여야 한다고 한 하교는 권형(權衡)이 조금도 어긋나지 않고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그 형적(形迹)을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팔방(八方)에서 흠탄하여 만세(萬世)토록 영원히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라건대, 성지(聖志)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천토(天討)를 더욱 엄하게 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들의 뒤를 이어 마구 날뛰는 괴귀(怪鬼)의 무리들이 있으면 이것이든 저것이든을 막론하고 전형(典刑)을 환히 바루어 선대왕의 영전(靈前)에 고하소서. 신이 전에 성교(聖敎)를 우러러 들은 적이 있는데 말씀하시기를 ‘대신은 아침 저녁으로 보필하여 바로잡아 주는 것이 직임이다. 진실로 품은 마음이 있다면 아뢸 만한 때가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초연(初筵)에서 억지로 말을 강요하고 조문(條文)에 응하여 준례에 따라 갖추는 것을 나는 취택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신은 지금껏 이 말을 경건히 외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은 오랫동안 시골에 거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사(世事)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선 감히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우러러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일이 현재의 대의(大義)에 관계되기 때문에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구구한 소망을 굽어 양찰(諒察)하여 주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내용은 명백하고도 엄정하여 혼미한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간범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한 대로 실행하겠다."
하니, 또 말하기를,
"이제 신이 아뢴 것은 곧 국인(國人)의 공공(公共)한 의논인데 성상께서 과감히 결단하셨으니 흠앙(欽仰)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진실로 그의 죄를 따져본다면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가중시키는 형률(刑律)에 이르러서는, 전(傳)에 이르기를, ‘국인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연후에 살펴보아서 죽여야 할 만한 이유를 안 연후에 죽인다.’고 하였는데, 대개 성인(聖人)이 분명히 하고 신중히 하는 뜻인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국인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를 살펴서 죽이는 것은 오직 위에서 처단(處斷)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신이 곧바로 청하지 않는 것은 전하로 하여금 살펴서 처분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만일 인심이 끝내 안정되지 않아 와오(訛誤)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또한 한 사람을 징계하여 백 사람을 면려시키는 정사를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아래에서 또한 마땅히 앙청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유순(徐有恂)·서기수(徐淇修)에 관한 일은 좌(左) 자 하나가 있는 것이 서유순의 숙부(叔父)에게 무슨 이익이 있기에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이렇게 한단 말인가? 대비(臺批)에도 무슨 책망할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말하였다. 지금은 대계(臺啓)가 정지되지 않고 있어서 죄인을 배소(配所)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전번의 홍재민(洪在敏)의 일과 양상이 같은데 언제 이 일이 끝나겠는가? 또 대계에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있는데 국청의 설치가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한림(翰林)·주서(注書)에게 물어서 아뢴 내용을 살펴보면 다시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낼 만한 단서가 없었으므로 책망할 가치가 없다는 과조(科條)에 둔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그들이 비록 시종(侍從) 가운데 지위가 낮은 자들이기는 하지만 그 소위를 살펴보면 큰 변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기(史記)를 명산(名山)의 석실(石室)에다 보관하는 것은 대개 현충(賢忠)과 사역(邪逆)을 혹 당시에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만세(萬世)에 속이기는 어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가치가 없기는 하지만 어찌 사체(史體)가 엄중하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가령 몰랐다고 하더라도 이에 이미 성상(聖上)께 아뢰어진 뒤에도 감히 생판으로 기망하려 했으니, 그 죄가 더욱 마땅히 어떠합니까? 전 영상이 비록 늙었다고 하지만 서유순이 자기의 부형(父兄)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어떻게 군상(君上)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무리들은 몇 차례 형추(刑推)를 가한 뒤에 멀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는 것을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책망할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하교하였으니, 그 성의(聖意)의 소재에 대해 신은 진실로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엄격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뒷사람을 징계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명색이 대관(大官)이기 때문에 비록 대간(臺諫)처럼 허락을 받고서야 그만두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무리들을 편안히 서간(西間)078) 에 거처하게 하는 것은 너무 가볍게 하는 실수(失手)를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국청은 설치하지 않더라도 형추(刑推)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계(臺啓)의 논열(論列)은 얼마나 분명히 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서유순 등에 대한 계사(啓辭)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라느니, 흉모 역절(凶謀逆節)이라느니 하는 등의 말은 절대로 걸맞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을 난신 적자요 흉모 역절이라고 한다면 만일 이보다 더한 것을 간범한 경우에는 계사의 내용을 어떻게 첨가(添加)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내용을 분명히 하고 신중히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경칙(警飭)이 없을 수 없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논단(論斷)하는 데에 혹시라도 남에게 뒤질세라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런 습관은 놀라운 것이다."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선조(先朝)께서도 또한 일찍이 이런 폐단을 엄격히 고치려고 했었습니다. 대개 성토(聲討)할 때를 당하여 실정에 걸맞게 하려고 하면 토죄를 느슨하게 한다는 지목을 받기가 쉽기 때문에 매양 논열하는 즈음에 말을 만드는 것이 너무 합당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두 사람이 하면 충분한 데도 장주(章奏)를 올리기 때문에 그지없이 분운(紛紜)스럽게 되어 결국은 공론(公論)에 흡족하지 못하게 되고 성의(誠意)가 미덥지 못한 데에 귀결되니, 이런 풍습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선조(先朝) 때 밀지(密旨)로 제주(濟州)의 죄인을 내어보내라고 명하였으나 당시 목사(牧使)가 거행하지 않았는데 그 말류(末流)의 습관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대저 군상(君上)의 처분은 비록 혹 과당(過當)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랫사람이 된 도리로서는 굳게 고집하여 극력 간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필경의 조화(造化)는 오직 인주(人主)의 권병(權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청류(淸流)들이 조정에 포열되어 있을 때에 어떻게 기묘년079) 의 제현(諸賢)들이 화(禍)를 당하는 것을 구제하지 못했겠으며, 소인(小人)들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데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어떻게 살아서 해도(海島)를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이동형(李東馨)의 일을 합계(合啓)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돈면(敦勉)한 것은 존경하고 예우하는 뜻에서인 것이다. 이미 말을 했으니, 어찌 한번 체량(體諒)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도 또한 존경하고 예우하는 것이다. 좌의정 한용귀(韓用龜)는 이제 우선 그의 사임(辭任)을 허락하여 앞서 한 말을 실천토록 하라."
하였다.
홍의모(洪義謨)를 공조 판서로, 한용귀를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금오(金吾)에서 김달순(金達淳)을 강진현(康津縣)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하고 위리(圍籬)할 것을 아뢰었다.
2월 16일 갑오
김사목(金思穆)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금오(金吾)에서 이동형(李東馨)을 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에 안치(安置)시킬 것을 아뢰었다.
별시(別試) 문무과(文武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2월 18일 병신
대사헌 김면주(金勉柱)가 상소하여 김달순(金達淳)에게 속히 해당되는 형률(刑律)을 시행할 것을 청하고 이어 말하기를,
"당일 수작하는 즈음에 명색이 요상(僚相)이면서 도리어 그의 성세(聲勢)를 도왔을 뿐 전하를 위하여 그가 능핍(凌逼)하고 침범(侵犯)하여 욕한 자를 공척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니, 청컨대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신지도(薪智島)에 천극(荐棘)시킨 죄인 김달순(金達淳)에게 가극(加棘)하는 형벌(刑罰)을 시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합계하여 금갑도(金甲島)에 안치(安置)시킨 죄인 이동형(李東馨)에게 천극(荐棘)하는 형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 한용귀(韓用龜)가 망측한 횡액을 당했다는 것으로 도성(都城)을 나가 고향으로 향하였다. 하교하기를,
"도헌(都憲)의 상소 내용이 비록 매우 잘 살펴 신중히 하지는 못했으나 이미 전적으로 경을 지적한 말이 없으며, 지난번 이에 대해 환히 밝혀 말하였으므로 다시 남아 있는 미진함이 없다. 그런데 이에 어찌 새로 처의(處義)를 거론하면서 갑자기 이렇게 고향을 향하는 거조(擧措)를 한단 말인가? 이는 더없이 지나친 일이다. 떠나는 것을 만류하는 데에 급급하다 보니 다른 말을 할 겨를이 없다. 경은 즉시 사관(史官)과 함께 도로 들어와서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판부사 한용귀(韓用龜)가 도헌(都憲)의 상소로 인하여 고향을 향하는 거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상소를 가져다 살펴보건대, 비록 이 상신(相臣)의 이름을 지척(指斥)하지는 않았지만 지의(指意)가 구별이 없고 사어(辭語)가 분명치 않으니, 상신이 인의(引義)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 상신은 평소의 지조와 아망(雅望)이 세상에 추허를 받아왔고 조가(朝家)에서 예우(禮遇)하고 묘당(廟堂)에서 의지하여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근일의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해와 달처럼 굽어 밝히심을 받들었고 스스로 조야(朝野)의 공의(公議)가 있으니, 무슨 털끝만큼인들 그 사이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지금 이 도헌(都憲)의 상소는 동서(東西)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의도가 불분명함으로 조정에 있기가 불안스럽게 만들었으니, 신은 참으로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추향(趨向)이 확정되지 않고 조상(朝象)이 분열되어 정지될 데가 없는 상황이니,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그런데도 없는 중에서 있는 것처럼 만들어 이에 도리어 파문을 일으킴으로써 더 큰파문이 일도록 조장하고 있으니, 어찌 크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대사헌 김면주(金勉柱)에게 간삭(刊削)시키는 형벌을 시행하고 속히 상신(相臣)이 떠나가는 것을 만류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 대신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다 통촉하고 있다. 도헌이 필시 글을 보내는 사이에서 잘 살피지 못한 것일 것이다. 어찌 참으로 이 대신을 지적한 것이겠는가? 그러나 사단(事端)이 이미 안정된 뒤에 다시 이렇게 일을 야기시킨 것은 더없이 놀라운 일이다. 청한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2월 19일 정유
화성(華城)에 거둥하였다.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서 주정(晝停)하고 저녁에 화성의 행궁에 행차하였다.
수원부(水原府)의 공화(公貨)에 대한 포흠(逋欠)을 진 사람들을 모두 탕감(蕩減)시켜 주라고 명하였는데, 유수(留守) 조진관(趙鎭寬)의 청을 따른 것이다.
2월 20일 무술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다.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시수(李時秀) 등이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21일 기해
화령전(華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능원관(陵園官)과 화령전 수문장(守門將)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영의정 이병모(李秉模), 판부사 서용보(徐龍輔)를 장남헌(壯南軒)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서용보가 판부사 김관주(金觀柱)와 함께 노차(路次)에서 지영(祗迎)하니 임금이 말을 정지시키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으며, 서용보에게 수가(隨駕)하도록 하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인견(引見)하겠다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 도헌(都憲)의 상소는 매우 사리에 어긋난 것이었으니 한 판부사(韓判府事)가 이 때문에 인의(引義)한 것은 전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대신의 정지(情地)는 전후 달라진 것이 없음은 물론 지난번 죄다 분명히 밝힌 뒤에는 다시 인의로 자처해야 할 단서가 없으니, 돈유(敦諭)를 마땅히 행해야 하겠다. 경 등도 모쪼록 또한 권면하기 바란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김달순(金達淳)의 일에 대해서는 가극(加棘)하는 형벌을 이미 시행하였다. 그러나 오늘 내가 장차 진전(眞殿)에 들어가서 배알(拜謁)할 면목이 없을 것 같다. 그가 이른바 사설(邪說)이라고 한 것은 과연 무엇을 가리킨 것인가? 간언(諫言)을 숨겼다고 한 것은 이것이 나를 가리켜서 한 말인가? 아니면 지난 일을 지척(指斥)한 것인가? 경 등은 모두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이니 의당 선조의 지사(志事)를 우러러 알고 있을 것이다. 선조께서 경모궁(景慕宮)의 아름다운 덕을 천양(闡揚)한 성의(聖意)가 어찌 장차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선조의 지사를 의사(疑似)스런 지경에 둔 것이 어찌 더없이 극심한 흉패가 아니겠는가? 경 등은 그 죄가 살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간언을 숨겼다고 한 것은 전하를 지척(指斥)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는 흉도(凶徒)들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흉도들은 항상 무함하고 핍박하는 말을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숨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흉도들에 대한 제방(隄防)으로 여겨 이 일을 제기하였으나 이 일이 흉도들의 제방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가 사설(邪說)이라고 한 것은 매우 흉패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지켜 온 것이 엄정하였다는 것은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의 처분을 살펴보면 누군들 우러러 알지 못하겠습니까? 비록 오늘날의 신자(臣子)로서 진실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하여 곧바로 그 사람을 거론하여 전형(典刑)을 바룰 것을 청하지 않고서 이에 이렇게 언뜻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이 지난번의 연석(筵席)에서 또한 우러러 아뢴 바 있습니다만, 전(傳)에 이르기를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한 연후에 살펴보아서 죽여야 할 이유를 안 연후에 죽여야 한다.’고 했는데, ‘살핀다’고 한 말은 시종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죄를 논한다면 그가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부사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사차(私次)에서 영상과 함께 또한 성토(聲討)에 대해 말하였었습니다만, 사설(邪說)이라는 두 글자는 몹시 마음을 놀라게 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 아무가 아무 말을 하였다고 하면서 곧바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룰 것을 청하지 않고서 은연중 이것을 들어다가 저것을 막는 것처럼 하였으니, 그의 죄가 더욱 중합니다. 나중에 올린 상소 내용은 죄를 진 데다 죄를 더 보탠 것이었습니다. 사설이니 간언을 숨겼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는 비록 그에게 물어본다고 해도 그가 어떻게 감히 만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 되는 죄를 스스로 해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이병모는 말하기를,
"판부사 는 견해가 매우 명백합니다. 그의 이것을 들어다 저것을 막으려는 의도는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것입니다. 간언을 숨겼다고 한 것은 비록 성상을 지척(指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나 감히 이 일을 거론하여 저것을 막으려 한 것은 이것이 무슨 의도입니까? 이 말을 만일 선왕(先王) 앞에서 발론하였다면 그는 반드시 〈죄를〉 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감히 오늘날에 발론하였으니, 그 죄가 더욱 큽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판부사 는 의당 수가(隨駕)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감히 조금이라도 가식(假飾)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병세(病勢)는 영상이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영(先塋)의 일이 바야흐로 급하게 되었으므로 이제 마땅히 여기에서 돌아가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절(愼節)080) 은 서울 집에 있어도 또한 조리하여 치료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경의 정지(情地)가 갑자년081) 이전과는 크게 다른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계속 인의(引義)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구신(舊臣)들이 모두 물러가려고만 하면 나라에 장차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지난번 환히 밝히신 하교는 신이 자신을 위해 말하게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신이 말하려 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을 전하께서 모두 이미 다 말씀하셨습니다. 신의 몸이 신의 소유가 아니기는 합니다만 신이 자식이 되어 불초(不肖)한 탓으로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또다시 욕보이게 하였으니, 또한 어떻게 감히 무고(無故)한 사람으로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일의 변괴가 대관(大官)에게서 발생되었는데 의리(義理)가 밝혀지지 않아 민지(民志)가 안정되지 않고 있으니, 경의 거취(去就)에는 실로 국사의 휴척(休戚)과 인심의 향배(向背)가 달려 있다. 그리고 경의 거취에 의거하여 마땅히 경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은지 다른지를 알 수 있으니, 경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경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다른 것이 된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시골에 있어도 서울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무릇 국가에 일이 있게 되면 신이 언제나 들어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근일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의리를 천명하는 방도에 있어 어찌 족히 수효를 채울 수도 없는 신같은 자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현재 인심의 향배가 경의 거취에 달려 있다고 말을 하였으니, 경은 모쪼록 다시 말하지 말라."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부모(父母)의 분묘(墳墓)에 일이 있어 가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우러러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근일에 병이 더쳐 과연 가지 못했습니다. 신이 이제 내려가서 역사(役事)를 완료한 다음 병이 낫게 되면 비록 전하의 오늘날과 같은 하교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신이 어떻게 감히 올라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판부사의 친산(親山)에 관한 역사(役事)는 이미 시일을 정해놓은 일이 아닙니다. 비록 정세(情勢)로써 말하더라도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당시에 당한 정세가 전고에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만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서 돈면(敦勉)하는 날 봉승(奉承)하여 수가(隨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저 처해 있는 의리에 경중이 있는 것인데 오늘날 판부사의 분의에 있어서는 마땅히 고두 사례(叩頭謝禮)하는 것이 중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좀전에 인심의 향배가 달려 있고 나의 마음과의 동이(同異)에 대해 말을 했는데도 경이 강력하게 인의(引義)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다시 어떻게 경에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상교(上敎)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판부사는 봉승(奉承)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서용보가 말하기를,
"영상은 신의 사정(私情)을 아직도 상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한식(寒食) 전에 내려가겠다고 말을 했는데 어찌하여 아직 내려가지 않았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이미 경영한 바가 있었으나 그간 병이 더쳐 몸소 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이미 경영하였으나 나중에 역사(役事)를 시작해도 무슨 방해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의 정사(情事)가 더없이 시급합니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모두 하려고 했었으나 공사(公私) 간에 일이 있어 아직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는데, 실로 다시 금년 여름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공사(公事)를 먼저하고 사사(私事)를 뒤에 한다는 의리에 있어 지난번의 말을 수행하지 못한 것과 이번의 하교를 따르지 않는 것이 그 경중이 어떠한가? 그리고 이미 경영한 것이 있다고 했으니, 서울에 들어왔다가 다시 내려가서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또한 무슨 방해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오늘 서울로 들어왔다가 내일 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이미 앞서 한 말과 다르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수가한다는 뜻을 들은 연후에야 환궁(還宮)하도록 하겠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여기에 언급되었으니, 신이 마땅히 물러나가서 명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화령전(華寧殿) 작헌례(酌獻禮)에 판부사도 나아가 참여하겠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이미 여기에 왔으니 구구한 하정(下情) 때문에 어찌 반열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겠습니까마는, 병증(病症)이 있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나아가 참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여기에 와서 나를 만났는데 진전(眞殿)에 배알하지 않는 것이 경의 도리에 있어 합당하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감히 병세(病勢)로 버티기 어려울 뿐만이 아니고 증세가 심하여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아가 참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도 또한 말했는데 경이 수가하지 않으면 나도 또한 환궁하기 어렵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누차 이런 비상한 하교를 받들었으니, 영해(嶺海)에서 부월(鈇鉞)을 기다리는 이외에 다시 앙달(仰達)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간곡함이 이미 이와 같다면 바야흐로 지금 정석(鼎席)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마땅히 경을 정승에 임명하겠다. 경은 숙명(肅命)한 뒤에 오직 마음대로 내려가도록 하라. 경이 이미 수가하려고 하지도 않고 또 만약 정승에 임명한 데 대해 나와서 숙배(肅拜)하지도 않는다면 이는 경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른 것이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의 정상이 황송하고 위축되어 있으니 마땅히 물러가 부월의 주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금 전의 연석(筵席)에서 이미 이 대신의 거취(去就)로 오늘날의 국사를 점치겠다는 것으로 하교하였다. 판중추부사 서용보(徐龍輔)를 의정부 좌의정에 임명한다."
하였다.
이의필(李義弼)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희순(金羲淳)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조금 전의 연석에서 이미 말하였다. 좌상(左相)이 숙명(肅命)한 후에야 마땅히 환궁(還宮)토록 할 것이니, 해방(該房)에서는 알고 있으라."
하였다.
좌의정 서용보(徐龍輔)에게 즉시 숙명(肅命)하라고 하유하고, 하교하기를,
"경의 오늘날 거취에 국가의 휴척(休戚)과 인심의 향배(向背)가 달려 있다는 것을 조금 전에 이미 말하였으니, 경이 이제 나와서 명을 받든 후에야 내가 마땅히 환궁토록 하겠다. 내가 어찌 허언(虛言)을 경에게 말했겠는가? 날이 이미 늦어져가고 백관(百官)과 삼군(三軍)이 장비를 정비하고 있기 때문에 길게 말할 겨를이 없다. 입시(入侍)한 승지(承旨)를 보내어 대강 이런 말을 전하였는데 이제 회주(回奏)하는 말을 듣건대 실로 경에게 기대하던 바가 아니었다. 모쪼록 오늘날의 국세를 살펴보라. 이 어찌 경이 사사(私事)를 말할 수 있는 때이겠는가? 또 이 때문에 서로 버티면서 즉시 회란(回鑾)하지 않는다면 경의 마음에도 편안하겠는가? 경은 즉시 숙명(肅命)하라는 것으로 다시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에게 전유(傳諭)하고 함께 들어오라."
하였다. 승지 엄기(嚴耆)가 서계(書啓)하기를,
"좌의정이 지금 부옥(府獄)의 문밖에서 대명(待命)하고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다른 말은 우선 그만두겠다. 여기가 어떤 곳인가? 진전(眞殿)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경이 어떻게 차마 나를 저버리려 할 수 있겠으며, 내가 어떻게 차마 경을 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계속 서로 버티게 될 경우에는 내가 마땅히 몸소 수레를 몰고 가서 맞이하여 오겠으니, 경은 알고 있으라."
하자, 서용보가 마침내 나와서 숙배(肅拜)하였다.
대가(大駕)가 출발하여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을 향하려 할 적에 약방 도제조 서용보(徐龍輔)가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하찮은 신의 거취 때문에 우러러 수응(酬應)을 번거롭게 하느라고 이렇게 날이 기울게 되었으니, 신은 진실로 황공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시흥까지는 정리(程里)가 상당히 멀어서 거기에 도달할 시간을 계산하여 보건대 의당 밤이 깊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로(沿路)에 횃불을 세우는 것을 이미 제거하라고 명하였으니, 밤에 대가(大駕)가 거둥하는 것은 사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숙사(肅謝)한 뒤에 이런 내용으로 청대(請對)하려 했었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과 삼군이 이미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날이 조금 늦는다고 한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이 조금전 연석에서 이미 숙명(肅命)한 뒤에 내려가도록 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제 신이 이미 염치를 무릅쓰고 나아와서 숙배하였으니 마땅히 이로부터 내려가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는 연석에서와 다른 점이 있으니 경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신은 성교(聖敎)를 우러러 받드는 것을 사시(四時)처럼 미덥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뒷수레에 태우고 간다는 의미에 있어 마땅히 경과 함께 같이 돌아가겠으니, 경은 반드시 수가토록 하라."
하였다.
저녁에 시흥(始興)의 행궁(行宮)에 행차하였다.
2월 22일 경자
환궁하였다. 지나면서 남관왕묘(南關王廟)에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삼사(三司) 【대사간 윤서동(尹序東), 집의 이동면(李東冕), 장령 안정선(安廷善), 지평 김염(金鐮), 헌납 이상우(李尙愚), 교리 조진화(趙晉和), 정언 임업(任㸁)·박영재(朴英載), 수찬 이유명(李惟命)이다.】 에서 합계하기를,
"아! 슬픕니다. 김달순(金達淳)의 죄는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본래 음험하고 간사한 성품과 교활하고 외람스런 습관으로 교묘하게 세상을 살고 헛된 명예를 훔쳐서 자신을 위한 모의에 능통하였으며 명기(名器)를 움켜쥐고는 화관 요직(華官要職)을 두루 거쳐 갑자기 높은 품계에 올랐으므로 온 세상이 지목(指目)하였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하여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바야흐로 그가 정승에 임명된 처음에 〈전하께서〉 돌보아 총애한 것이 어떠했으며 의지한 것이 어떠했습니까? 그런데 보답하기를 도모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처음의 전석(前席)에 나와서 방자하게 흉언(凶言)을 말함으로써 대부도(大不道)·대불경(大不敬)의 진장(眞贓)이 탄로가 났고 역절(逆節)이 환히 드러나 낱낱이 수죄(數罪)하여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정도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25년 동안 고수하여 온 큰의리와 크게 지켜온 것은 그것이 얼마나 정미(精微)하고 얼마나 엄정(嚴正)한 것이었습니까? 그런데도 그가 이에 화심(禍心)을 품고 이를 기화(奇貨)로 삼아서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칠 마음으로 공의(公義)를 배반하고 사심(私心)을 도모하려는 습관을 성취시키는 것을 한낱 자신의 집안을 위한 계교로 자임(自任)하고 나서서 이를 빙자하는 패병(欛柄)으로 사용했으니, 그의 마음먹고 하는 의도를 따져보면 이미 더할 수 없이 흉악하고 참혹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사죄(死罪)인 것입니다. 그가 이른바 사설(邪說)이라고 한 것은 곧 스스로 창도한 것으로 괴이하고 황당한 말을 지어낸 것인데 계속해서 우탄(憂歎)하는 안색으로 암암리에 야유하면서 근거없는 것으로 미혹하여 선동함으로써 기필코 일세(一世)를 속이려 하였는가 하면 조신(朝紳)들을 죄에 얽어 넣음으로써 이름과 권세를 팔 계교로 삼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사죄(死罪)인 것입니다. 무릇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의 포증(褒贈)에 대한 이야기를 차마 발론하기에 이르러서는 곧 수세(手勢)로 간범한 것으로 군상(君上)을 협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조정을 말못하게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선왕의 큰 의리를 간범하고 선왕이 크게 지켜온 것을 괴란시키면서 선왕이 차마 들을 수 없던 말을 전하 앞에서 차마 말을 하였고 선왕이 감히 말할 수 없던 것을 전하의 조정에서 감히 말을 하였으니, 이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도리가 있은 이래 들어보지 못하고 있지도 않았던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큰 변괴인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의 사죄인 것입니다. 아! 후원(喉院)에서 세초(洗草)한 일은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어 말하기에도 피눈물이 흐를 정도이니, 오늘날 신자(臣子)된 사람들은 누군들 감히 심폐(心肺)에 새겨 일념(一念)으로 성심을 다하여 봉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미 세초된 서본(書本)을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정납(呈納)하였으며 또 이 글이 모두 세초에 들어간 줄을 애당초 알지도 못한 것처럼 핑계댐으로써 벗어나기에 급급하여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의 사죄인 것입니다. 무릇 성심(聖心)이 놀라서 떨고 옥음(玉音)은 눈물을 삼키면서 지척인 전연(前筵)에서 누차 신자(臣子)로서는 감히 들을 수 없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러서도 그가 이에 뻔뻔스레 서로 대항하면서 조금도 두려워 위축되는 마음이 없이 사납게 승복하지 않았음은 물론 더욱 각승(角勝)하는 성질을 부렸습니다. 친절히 굽어 하문했는데도 다른 이야기를 인용하여 불분명한 대답을 하였고 사지(辭旨)가 비통하기 그지없었는데도 본래의 일을 버려두고 멋대로 무시하는 말을 하였으니, 당일의 광경은 임금의 기강이 무너져 없어지고 사람의 윤리가 멸절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다섯 번째 사죄입니다. 나중에 올린 한 장의 상소는 갈수록 더욱 흉악하고 참혹하여 임금을 무핍(誣逼)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의리와 배치(背馳)되는 말을 멋대로 하였으니, 뱃속에 가득히 들어있는 것은 경멸하는 마음이 아닌 것이 없었고 극구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야기는 위협하는 뜻을 부리는 것임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느니 간언(諫言)을 숨긴 근저(根抵)라는 등의 이야기를 글에다 써서 방자하게 위로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엄한 지위를 핍박한 데 이르러서는 이것이 또 인신(人臣)의 극죄(極罪)인 것이고 천고의 단안(斷案)인 것이니, 이것이 여섯 번째의 사죄인 것입니다.
인신이 된 자에게 이런 조항이 하나라도 있으면 춘추(春秋)의 필법에는 주토(誅討)하고 왕법(王法)에서는 반드시 주참(誅斬)하는 것이니,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여섯 가지 큰 죄안(罪案)이 모두 한 몸에 모여 있으니, 만 가지로 죽일 수는 있어도 하나도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실은 선대왕(先大王)의 죄인인 것이며 선대왕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곧 우리 영묘(英廟)와 선세자(先世子)의 죄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전고에 없는 흉역(凶逆)으로서 온 나라가 소리를 함께하여 징토(懲討)하고 있는데도 즉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지 않는다면 삼조의 지사(志事)가 이를 연유하여 점점 회색(晦塞)되고 만고의 윤강(倫綱)이 이를 연유하여 멸절(滅絶)될 것이며 난신 적자가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것이 없어 장차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관(大官)이라고 핑계하면서 절차에 따라 가율(加律)하는 것을 지금까지 용서함으로써 머리를 붙이고 숨을 쉬게 한 것은 실로 실형(失刑) 가운데 큰 것입니다. 가극(加棘)하는 형벌을 이제 이미 윤허받았으니, 의당 시행해야 하는 형률(刑律)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여정(輿情)의 울분이 날이 갈수록 더욱 극심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신지도(薪智島)의 가극(加棘) 죄인 김달순(金達淳)을 형률(刑律)에 의거하여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3일 신축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별시(別試) 문과(文科)의 강경(講經)을 설행하였다.
2월 25일 계묘
주강(晝講)하였다.
주강(晝講) 때 대청(臺廳)에 나와 있는 대신(臺臣)은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함께 입시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2월 27일 을사
사학 유생(四學儒生) 이유준(李儒準) 등 2백 5인이 상소하여 김달순(金達淳)·이동형(李東馨)·서형수(徐瀅修)·이익모(李翊模)·서매수(徐邁修)·서유순(徐有恂)·서기수(徐淇修) 등의 일에 대해 논하니, 비답하기를,
"김달순·이동형 이하 여러 사람에 대해서는 조정의 성토가 곧 그대들의 말인 것이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연마하라."
하였다.
2월 28일 병오
신헌조(申獻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9일 정미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난역(亂逆)은 반드시 근와(根窩)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는 방법은 비유하건대 의자(醫者)가 종기를 치료하고 농부(農夫)가 가시덩굴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실로 혹 종기에 배어 있는 독기(毒氣)를 제거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중한 농증(膿症)이 있기에 이르게 되고 얽혀 있는 가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무성하여 퍼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인데 이는 필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지금 이 역적 김달순(金達淳)은 시랑이 같은 성품과 효경(梟獍) 같은 심장을 지니고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화심(禍心)을 마침내 흉악하게 내어 부리고야 말게 된 것은 진실로 하루 아침 하루 저녁에 획책된 일이 아닌 것으로 반드시 독기와 뿌리의 흉악한 와주(窩主)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연전(年前)에 있었던 역적 권유(權裕)의 흉소(凶疏)는 반드시 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때 권병(權柄)을 잡고 있던 신하가 도리어 노신(老臣)의 충애(忠愛)라고 포양(褒揚)하면서 단지 문비(問備)082) 하는 가벼운 벌을 내리기를 청한 것은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렇다면 종기의 독기가 이미 여기에 깊숙이 배어 있는 것이고 가시 덩굴의 뿌리가 이미 여기에 이리 저리 서려 있었던 것인데 이를 즉시 제거하지 않았던 탓으로 세변(世變)이 잇따라 발생하는 상황을 순치시켰고 하나의 흉역인 김달순이 나온 데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는 종기가 이미 곪았고 가시 덩굴이 이미 퍼지게 되었으니, 통분스럽지 않을 수 있으며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하시어 역적 김달순이 새로 범한 극죄(極罪)를 바루시고 이어 역얼(逆孼)들이 연유하여 나오게 된 흉와(凶窩)를 타파함으로써 군강(君綱)을 엄중히 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 대신의 그때 일은 그것이 이와 같고 저와 같음을 논할 것 없이 이미 원상(院相)을 지낸 노고가 있으며 또 고인(古人)이 되었는데, 추후 거론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였다.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상소하여 김달순의 일을 논하고 이어 말하기를,
"천하의 악역은 똑같은 것이어서, 결국은 궤도(軌道)가 달라도 귀결점은 같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악역이 김달순에게서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나 그의 창귀(倀鬼)가 된 것은 서형수(徐瀅修)가 바로 그 사람이고, 죄가 이미 서형수에게서 드러났으나 그의 와주(窩主)가 된 것은 이노춘(李魯春)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 이노춘이란 자는 그의 평생의 출처(出處)를 추적하여 보면 전후 둘로 끊겨 나뉘는 것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계모(計謀)에 공교하여 번복하는 짓을 잘하였는데 특별히 선왕조(先王朝)에서 탕척시킨 은혜를 입어 전의 잘못을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허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위가 숭반(崇班)에 오르고 이름이 사류(士類)에 끼이게 되었으니, 영광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고 분수에 이미 넘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효를 세워 보답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천만 가지로 요악(妖惡)스러운 한 사람의 서형수(徐瀅修)와 서로 결탁하여 형제의 의리를 맺어 하나의 편당을 만들었는데 은밀한 계책을 치밀하게 세웠으므로 그 정적(情迹)이 궤비(詭秘)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어미의 상(喪)을 당하였을 적에 정의(情誼)가 친척이 아닌데도 서형수가 전(奠)을 올리고 곡(哭)하였으며 이노춘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으므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열고 놀라면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김달순이 정승에 임명되기에 이르러서는 이 두 사람이 기회를 노리고 행동하면서 손뼉을 치고 기뻐하였으며 안팎에서 서로 화응(和應)하여 이른바 포증(褒贈)하자는 의논을 창출(倡出)하고 나서 미련하고 무식한 김달순을 종용하였는데, 김달순이 이에 감히 어렵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조정에 건백(建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흉염(凶焰)이 미치는 곳에 군부(君父)를 위협하기까지 한 것은 진실로 그 근와(根窩)를 따져본다면 첫째는 서형수이요 둘째는 이노춘 때문인 것입니다. 대저 그들의 먹은 마음과 세운 계책은 이보다 앞서 전하의 속마음을 떠본 다음 자기의 아비와 할아비에까지 미치게 하려는 것이 불을 보듯이 환하여 십수(十手)가 가리키는 바이고 만구(萬口)가 떠들썩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판서 이노춘(李魯春)에게는 우선 극변(極邊)에 원찬(遠竄)시키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달순의 일을 어찌 반드시 번거롭게 되풀이 하겠는가? 이노춘의 일은 벼슬이 정경(正卿)에 이른 사람이 어찌 이렇게 놀랍고 패려스러운 일을 했겠는가? 혹시 전해 들은 것이 사실과 틀린 것이 아닌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0일 무신
소대(召對)하였다.
주서(注書) 서기수(徐淇修)의 추천을 삭제시켰는데, 정원에서 아뢴 것을 따른 것이다.
양사(兩司) 【장령 이해청(李海淸)·윤윤동(尹允東), 지평 홍시부(洪時溥)·민치재(閔致載), 헌납 이중련(李重蓮), 정언 심후진(沈厚鎭)이다.】 에서 연명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 등이 삼가 대사헌 이의필(李義弼)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내려온 것을 살펴보건대, 가슴이 메어지는 마음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 통분스럽습니다. 김달순이 지금의 김달순으로 된 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일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곧 심환지(沈煥之)가 와주(窩主)가 된 때문인 것입니다. 그는 본디 타고난 성품이 음험하고 사나우며 먹은 마음은 흉악하고 간사하여 뱃속이나 창자에 꽉 메우고 있는 것이 모두가 화심(禍心)이기 때문에 주야로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흉악한 마음 뿐입니다. 아! 통분스럽습니다. 경신년083) 의 화변(禍變)에 대해서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이 무너져 내리고 귀신과 사람이 울부짖으며 통곡했는데 당시 국세의 위태로움이 두렵기가 머리칼 한 올처럼 위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머리털이 허연 늙은 정승으로서 진실로 조금이라도 병이(秉彛)의 천성을 지니고 있었다면 마땅히 충성(忠誠)을 끝까지 다하여 신하로서의 본분(本分)을 다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이런 때를 이용할 수 있다고 여기고 선왕(先王)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위병(威柄)을 훔쳐 농간을 부려 도당(徒黨)을 불러 모은 다음 선왕의 의리를 변모(弁髦)로 여기고 선왕의 전형(典刑)을 훼기(毁棄)하였으니, 천만 가지 죄악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대혼(大婚)을 저지한 데 이르러 극도에 달했는데 진실로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건백(建白)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특별히 명명(明命)을 내려 세번 간택(揀擇)하는 예(禮)를 이루지 않았다면 국가가 오늘날 보존되었을지는 실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 역적 권유(權裕)의 상소는 이것이 얼마나 천고에 없었던 흉소(凶疏)였습니까? 이를 본 사람은 눈자위가 찢어지지 않은 이가 없었고 들은 사람은 간담이 떨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그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노신(老臣)이라고 여기면서 충애(忠愛)스러운 것이라고 포장(褒奬)한단 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와주(窩主)가 되어 사주하여 흉소를 나오게 했다는 것은 이 한 조항만 가지고서도 단안(斷案)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갑자년084) 옥사(獄事)에서 그의 혈당(血黨)과 사우(死友)들이 모두 국정(鞫庭)으로 들어감에 따라 그의 진장(眞贓)이 다 드러났는데 여러 죄인의 공초(供招)에서 원인(援引)하여 증거한 것이 환히 남아 있고 단서(丹書)에 갖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취를 추적하여 그 마음을 따져 본다면 권유와 심환지는 하나이면서 둘로 나뉜 것이고 둘이면서 하나로 합쳐진 것입니다.
대저 우리 팔역(八域)의 생명을 지닌 사람들은 마음이 썩고 뼈가 저려오지 않은 사람이 없어 온 지 이제 6년이나 되었습니다만, 다만 그들의 위세(威勢)에 눌리고 기염(氣焰)에 그을려 온 세상이 거침없이 모두 바람에 쓸리듯 그림자처럼 따르게 되었습니다. 김달순·서매수의 무리들이 그 법을 전수받고 그 정신을 비호하였으며 이익모(李翊模)·서형수(徐瀅修)의 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부익(附翼)했기 때문에 위협하여 말을 못하게 해도 감히 누가 뭐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천토(天討)가 시행되기도 전에 귀주(鬼誅)가 먼저 가해졌으니, 신민(臣民)들의 울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도헌(都憲)의 상소 한 장이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와굴(窩窟)을 타파하였으니, 전하께서 의당 즉시 처분을 내려 대의(大義)를 밝혔어야 하는데도, 이제 이에 원상(院相)으로서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으로 묻지 말라는 과조(科條)에 부쳤습니다. 성명(聖明)한 세상에 이렇게 불분명한 거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대저 이른바 원상(院相)이라는 것은 국가에서 애통 망극한 때를 당하였을 때에 넘어지려는 형세를 붙들고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잡은 공이 있은 후에야 바야흐로 공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이 말할 수 없이 패려스러운 부류들을 명색이 원상이었다는 것 때문에 그가 물고(物故)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전형(典刑)을 분명히 바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처분을 내려 난역의 부리를 뽑아서 세도(世道)를 진정시키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도헌(都憲)의 소장에 대한 비답에서 어찌 헤아린 것이 없이 그렇게 했겠는가?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玉堂) 【교리 조진화(趙晉和), 부교리 이기경(李基慶), 수찬 김계온(金啓溫) 이유명(李惟命), 부수찬 서능보(徐能輔)이다.】 에서 연명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심환지(沈煥之)가 종전에 연석(筵席)에 아뢴 말에 대해 온나라 사람들의 충분(忠憤)이 오랠수록 더욱 격렬하여지고 있습니다만, 그의 여세(餘勢)가 미치는 바에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다행히 도헌(都憲)의 상소가 나와서 여정(輿情)이 비로소 조금쯤 풀 수가 있었습니다. 아! 흉악한 역적 권유(權裕)의 상소를 노신(老臣)의 충애(忠愛)라고 자랑하면서 문비(問備)하는 가벼운 벌로 감단(勘斷)했으니, 이것이 무슨 말이며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아! 이때를 당하여 만일 우리 정순 성모(貞純聖母)께서 으젓하게 먼 앞날을 내다보고서 현혹되지 않고 동요되지 않은 성스러운 덕과 큰 공이 아니었더라면 역적 권유의 계교를 누가 다시 저지하고 억제할 수 있었겠으며, 종국(宗國)에 오늘날이 있을 것을 보장할 수 있었겠습니까? 흰 머리의 원보(元輔)로 유독 권병(權柄)을 잡고서 간맹(奸萌)을 미리 꺾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난역을 은밀히 비호하였는데, 이에 정론(正論)이 발론된뒤 전하께서 원상(院相)의 공로가 있었고 이미 고인(故人)이 되었다는 것으로 부당하게 참작하여 용서하려고 하시니, 그것이 천하 후세의 의논과 일국(一國) 공공(公共)의 분노에 대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 변괴가 잇따라 발생하고 난역들이 뒤를 이어 나오고 있는 것은 진실로 그 근와(根窩)를 따져본다면 유래되어 온 것이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일에 연유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난신(亂臣)을 징계시키고 적자(賊子)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분명한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양사(兩司)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에서 하유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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