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0권 순조7년 1807년 10월

싸라리리 2025. 6. 12.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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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기사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희생과 제기(祭器)를 살피고 재숙(齋宿)하였다.

 

10월 2일 경오

태묘의 동향(冬享)을 행하였다.

 

10월 3일 신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의 겨울철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10월 4일 임신

춘당대에 나아가 토역 정시(討逆庭試)의 문과·무과를 설행하여 문과에서 박승현(朴升鉉) 등 4명을, 무과에서는 이세태(李世泰) 등 75명을 뽑았다.

 

10월 5일 계유

소대(召對)하였다.

 

장령 이약수(李若洙)가 상소하여 징토(懲討)할 것을 진달하고, 덧붙여 6조의 시폐(時弊)와 수성(修省)하는 방도를 논하였는데, ‘사치, 염희(恬嬉), 기강의 문란, 백성의 곤췌(困悴), 군정(軍政)의 정비되지 아니함, 적정(籍政)의 분명하지 아니함.’이었다.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 여러 조목들이 모두 시폐의 급무에 관계되니, 그대의 말이 절실함을 알 수 있다. 심히 가상하게 여긴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겠다."
하고, 이어 인재는 멀고 가까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장려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판돈녕부사로, 박종훈(朴宗薰)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조윤대(曹允大)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0월 6일 갑술

소대하였다.

 

헌부에서 전계(前啓)한 신헌조(申獻朝)가 물고(物故)되었으므로 정계(停啓)하였다.

 

10월 8일 병자

소대하였다.

 

예조에서 도(道)의 조사로 인해 효자인 양주(楊州)의 고(故) 동지(同知) 남순하(南舜夏) 및 그의 손자 남박(南璞)의 처 열녀 김씨에게는 정려(旌閭)하고, 효자인 적성(積城)의 고 사인(士人) 유수곤(柳壽坤)과 그의 처 효부 곽씨에게 급복(給復)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9일 정축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10월 10일 무인

하교하기를,
"내 들으니, 하늘의 노여움에 공경하여 감히 놀고 즐김이 없어야 되며 하늘의 이변에 공경하여 감히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무릇 천도(天道)는 아득하고 머나 그 응하는 것이 쉽기 때문에 요사이 혜성(彗星)이 재이(災異)를 고하여 아직도 운관(雲館)에서 연달아 보고하는 바가 있다. 혹시 소자(小子)로 하여금 혁연(赫然)하게 분발하고 힘써서 반푼이나마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는 일이 있다면, 실로 감히 알지는 못하겠다만, 인애(仁愛)하는 하늘이 반드시 이처럼 다시 경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건대, 나 불곡(不穀)이 이제 막 재려(災沴)가 나타남을 겪고도 소멸시켜 그치게 할 방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거니와, 오로지 새롭게 하는 공부와 크게 변화시키는 효로(效勞)에 대한 논의가 아직도 없어 인순(因循)하는 병통과 고식(姑息)의 폐단을 채 능히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과연 어젯밤 비바람이 몰아치던 끝에 먼저 번쩍이는 빛을 보았고 이어 우르르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로 말하자면 입동(立冬)이란 절후(節候)의 날이요, 그달로 말하자면 순음(純陰)으로 거두어 깊이 간직한 달이었다. 아! 스스로 그 까닭을 생각해 보건대, 죄가 먼저 나의 몸에 있도다. 나랏일이 판탕(板蕩)한 것과 기강이 해이해진 것은 오로지 나의 죄이며, 백성들의 곤췌(困悴)함과 풍속이 쇠퇴해짐도 오로지 나의 죄이니, 저 하늘이 어찌 위엄을 보이며 경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도리는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데 힘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기어코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도를 다하고 견고(譴告)하는 부지런함을 잊지 아니하여, 능히 수성(修省)하는 방책을 생각해 인애하는 실효에 답하게 된다면 보응(報應)하는 것이 메아리와 같을 것인데, 어찌 감격하는 이치가 없겠는가? 오늘부터 사흘간 감선(減膳)하여 과궁(寡躬)을 폄손하겠으니, 위로 대관(大官)에서부터 아래로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시수(李時秀)와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연명으로 차자를 올려 진면(陳勉)하고 이어 척퇴(斥退)를 간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에서 의계(議啓)하고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상소하여 진면하니, 모두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10월 11일 기묘

상참(常參)하였다. 좌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며칠 전 청대(靑臺)123)                  의 보고는 단지 천둥만을 말했다고 할 수 없어,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신 등이 바야흐로 인죄(引罪)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우러러 성념(聖念)이 경계하여 두려워하심을 생각하고 또한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외람되게도 보잘것없는 정성을 바쳤다가 삼가 비지(批旨)를 받듦에 미쳐, 허가하고 개납(開納)하심이 보통 때보다 훨씬 더 하시니, 진실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어 또 삼가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하늘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나무라신 뜻이 십행(十行)에 넘쳤습니다. 과연 이 뜻과 같이하여 오랫동안 해이해지지 않는다면, 어찌 재이가 거듭 나타남을 걱정하겠습니까만, 진실로 조금 오래되면점차 해이해져 능히 재이를 만난 처음과 같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신은 오로지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정사(政事)가 잘 수행되지 아니하면 ‘이는 나의 책임이다.’라 하시고, 한 백성이 거소를 잃으면 ‘이는 나의 허물이다.’라고 하시어, 팔역(八域)의 넓은 땅과 만기(萬機)의 번잡한 일에 대해 모두 자기 직분의 일로 여기시며, 두려워하시고 부지런하시어 혹시라도 방홀(放忽)함이 없도록 하신다면 그것이 오랠수록 일상적인 일이 되어서 저절로 다스림의 규례를 이루어 다시는 애써 힘씀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강학(講學)이란 한 가지 일로 말씀드린다 하더라도 오늘날 진언(進言)하는 사람은 말할 때마다 반드시 강학을 일컬으나, 낮의 세 번 강연(講筵)을 그만둔 지 이미 오래입니다.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무슨 어려운 바가 있어 이에 마음을 두시지 않는 것인지요? 강학은 곧 경전(經傳)을 토론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양성(養性)하는 공부입니다. 그 다음은 역대의 치란(治亂)의 사적을 널리 상고해 옛일로 오늘의 일을 증거함으로써 본받는 자료로 삼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자주 신하들을 접하여 조용히 물어보시면, 시정(時政)의 득실과 백성들의 질고를 말씀을 나누시는 사이에 익히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예는 간솔해지고 뜻은 친해져 상하의 정지(情志)가 또 흘러 통하고 서로 성실해질 것이니, 성덕(聖德)에 이익됨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지금 제일의 급무입니다. 어진이와 불초한 사람을 쓰고 버림에 이르러서는 실로 세도(世道)와 나랏일의 치란·오륭(汚隆)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알면 명철(明哲)한 것이니, 요(堯)임금도 그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사람을 안다[知人]’는 두 글자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만, 전하께서 진실로 여기에 마음을 두시어 단지 그 사람이 하는 바 말이 성심(聖心)에 순종하는가 거슬리는가를 가지고 구하신다면, 거의 어긋나고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군(人君)이 자기를 좋아하게 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인군이 기뻐하지 않는 말을 많이 올리는 사람은 그 마음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넘는 경우이며, 인군이 기뻐하는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인군을 사랑하는 마음이 끝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같이 하지 아니한 경우입니다. 신이 일찍이 진강(進講)할 때 대략 이런 뜻으로 부주(附奏)했던 적이 있는데, 성심(聖心)은 아마도 혹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또다시 구언(求言)하시는 자리에서 다시 진언(進言)하니, 오늘의 일은 강학과 용사(用捨)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조금이나마 채납(採納)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변(星變)이 나타난 것이 이미 여러 날에 이르렀고 천둥과 번개의 재이가 또 이처럼 이어 발생하였으니, 모두 소자의 과매(寡昧)한 소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경이 어제 차자를 올린 것과 오늘 연주(筵奏)한 것이 절실하고 충애(忠愛)하는 정성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으니, 감히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신은 전려(田廬)에 엎드려 있으면서 오랫동안 경광(耿光)을 어겼는지라, 감히 성학(聖學)의 성취가 근래에 과연 어떠한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지금 이루어진 공효가 외부에 드러난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윽이 성학이 진취된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이래로 편안히 지내시는 데 익숙해지시어 무릇 모든 일들에 대해 애초부터 일찍이 마음을 두시어 떠맡지 않으셔서, 국계(國計)와 민사(民事)를 더욱 만회할 수 없는 데 이르렀습니다. 아조(我朝)의 입규(立規)는 전적으로 사부(士夫)를 숭상하는데, 지금은 사부들 사이에 염치가 곡상(梏喪)124)                  되어, 안으로는 조경(躁競)125)                  으로 들떠 멈추어 그침이 없는 것 같고 밖으로는 오로지 가렴 주구만을 일삼아 비웃고 욕함을 돌아보지 아니하니, 옛날에 이른바 ‘급급하여 미친 것과 같다.’라고 한 것에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명검(名檢)과 풍절(風節)이 땅을 쓴 듯 남음이 없으니, 나라에 사유(四維)가 없거늘 어떻게 나라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능히 힘쓰게 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으십니다. 백성의 산업은 거꾸로 매달린 듯하고 백성의 뜻은 반환(泮渙)하여 바야흐로 십분의 처지에 있어 조석을 능히 보전하지를 못하는데도, 상하의 계책이 언제 일찍이 한마디라도 백성의 고통에 대한 한 가지 일을 언급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극히 신령한 백성이 무슨 믿을 바가 있어 그 마음을 굳게 맺겠습니까? 국경에 우선 일이 없는 것이 다행이고, 수재와 가뭄이 또 해를 이어 드는 것을 면하였으니, 비록 목전의 일은 버티어 지내겠지만, 만약 한번이라도 사고가 있으면 토붕(土崩)의 근심이 형세상 반드시 이를 것인데, 전하께서는 능히 감싸서 보호하는 데 마음을 두지 않으십니다. 과거(科擧)는 곧 나라를 다스리는 공기(公器)입니다. 그런데 전후의 유사(有司)의 신하가 능히 밝은 명령을 대양(對揚)하지 못하여 매번 한번의 과장(科場)을 거치고 나면 번번이 일층의 인심을 잃고 물정(物情)이 승복하지 않아 팔로(八路)가 해체(解體)되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작은 근심거리이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능히 마음을 기울여 통렬하게 고치지 아니하십니다.
나라에 기강이 있음은 사람에게 혈맥(血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혈맥이 없으면 곧 죽고, 나라에 기강이 없으면 곧 망합니다. 지금의 기강은 일패 도지(一敗塗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는 그 아래를 유지할 수가 없고 아래에서는 그 위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지라, 온갖 법도가 모두 물이 터지고 모래가 무너지듯 궤열(潰裂)되어 위망(危亡)이 눈앞에 닥쳐 손댈 방책이 없는데도, 전하께서는 능히 마음을 기울여 떨쳐 쇄신하지 않으십니다. 그윽이 사륜(絲綸)을 보건대, 제칙(提飭)을 내리심은 의문(儀文)의 말절(末節)에 불과하고, 혹시나마 실지의 큰 문제점에 이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날마다 사륜을 내리시고 날마다 제칙을 번거롭게 하더라도 그 치법(治法)과 정모(政謨)에 조금도 도움이 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대개 전하께서 전학(典學)에 부지런하지 아니하시는 데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전학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시면 뜻을 세움이 높지 않고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여 다스림이 그 요령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손을 대는 데 뜻이 없으시고, 단지 유유 범범(悠悠泛泛)하는 것만을 일삼아 한결같이 날로 위란(危亂)으로 나아가는 데 맡겨 두십니까? 4백 년의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간난한 왕업이 전하께 맡겨져 있으니, 전하께서는 그 근심을 받으신 것이지 그 즐거움을 받으신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것이 근심이 되는 바를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대개 방역(方域) 안의 한 물건 한 가지 일은 모두 전하 자신의 직분 내의 일로서, 한 물건이라도 그 자리를 얻지 못하면 곧 전하의 근심이요 한 가지 일이라도 그 공평을 얻지 못하면 곧 전하의 근심입니다.
만약 근심을 전환시켜 기쁨으로 하고자 하신다면, 학문이 아니고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학문이란 장구(章句)를 읽는 것이 아니라, 곧 성현의 성정(誠正)의 글을 읽는 것이며, 성현의 성정(誠正)의 공효를 본받는 것입니다. ‘성(誠)’이니 ‘정(正)’이니 하는 것이 비록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진실로 성정의 학문이 아니면 어떻게 치평(治平)에 손쓸 바가 있겠습니까? 삼대(三代)126)                  는 아득하니 어찌 바라겠습니까만, 비록 시군(時君)·속주(俗主)로서 일시의 편안함을 노리고자 하는 자도 이 학문에 길을 빌리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학문이 아니면 나라를 다스리는 모양을 만들 수가 없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며 전학에 부지런하지 아니하신지요?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강관(講官)을 친히 접하고 날마다 강연(講筵)을 여신다 하더라도 만약 실심(實心)과 실공(實功)이 없으면, 몸과 마음에 이익됨이 없고 한갓 글은 글일 뿐이다라는 한탄만 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낮에 의례적으로 갖추는 세 번의 강(講)과 더불어 모두 무단히 정지했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들어가 안에 처하시며 하시는 것이 어떤 일인지요? 밖에서는 성색(聲色)과 화리(貨利)가 마음을 기쁘게 하는지요? 앞에서는 치빙(馳騁)과 익렵(弋獵)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지요? 신은 마땅히 이런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강학 한 가지 일을 능히 실심으로 부지런하지 아니하시니,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일전에 좌상이 이것을 누누이 진면(陳勉)했는데, 곁에서 귀를 기울인 것이 여러 날이었습니다만, 한번이라도 법강(法講)을 열었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스스로 성학(聖學)이 이미 고명(高明)한 데 이르러 물어보는 데 의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면 요사이의 강관(講官)이 재주가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여 단지 형식적으로 하는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계옥(啓沃)127)                  의 효과가 없어서입니까?
비록 옛날의 강관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탁월한 학문을 바라겠습니까마는, 성인의 덕은 성인이면서도 스스로 성인인 체하지 아니하여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하려는 마음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마침내 성학(聖學)을 성취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삼가 더군다나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곧 열성조의 가법(家法)입니다. 세종 대왕께서는 예악(禮樂)을 제작하시면서 벼슬을 두고 직임을 나누었는데, 만기(萬機)의 번거로움이 이때와 같은 적이 없었으되, 오히려 또 밤이면 글을 읽고 새벽녘에 옷을 찾았습니다. 상참(常參)을 행하면 또 재추(宰樞)의 신하를 불러 민생(民生)의 질고와 시정(時政)의 득실을 물어보시고 이어 조강·주강·석강의 세 강(講)을 여셨습니다. 또 혹 여가가 있으면 다시 소대(召對)·야대(夜對)가 있어 날마다 일상적인 일로 삼아서 일찍이 혹시라도 폐하지 않으셨습니다. 선묘(宣廟)께서는 임진년128)                  의 파월(播越) 때에도 오히려 날마다 세 번 강(講)을 여시니, 따르는 신하가 ‘창[戈]을 베고도 오히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에 나아갔다[枕戈猶御日三筵].’란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영묘(英廟)께서는 비록 팔순의 게을러지기 쉬운 나이가 된 뒤에도 매번 와내(臥內)에 유신(儒臣)을 불러 접하시고 친히 《소학(小學)》의 편제(篇題)를 외우셨으니, 신이 외람되게도 기주(記注)의 반열에 있으면서 직접 눈으로 본 바입니다. 선조(先朝)께서는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경계하시기를, ‘조용히 거처하면서 글을 읽는 것이 으뜸가는 즐거움이다. 밤이 이슥하도록 글을 읽다가 새벽에 닭이 우는 첫소리를 듣는 것이 곧 이 마음을 환성(喚惺)하는 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일찍이 원중(苑中)에 납시어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봄기운이 바야흐로 가물어 꽃이 싹틀 기미가 없음은 곧 이 마음이 미발(未發)한 것이고, 아침 노을[朝霞]에 처음 피어난 온갖 꽃이 아름다움을 다툼은 곧 이 마음이 이미 발한 것이다. 천 가지 자주빛 만 가지 붉은 빛이 잎사귀마다 모두 같아 하나라도 분변해 볼 때 혹 참치(參差)한 것이 없음에 이르러서는 곧 이 마음이 발하여 모두 중절(中節)한 것이다. 조용히 사물의 이치를 관찰하면 학문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일득록(日得錄)》 가운데 실려 있으며, 신이 받들어 들었던 것입니다. 네 분 성조(聖朝)의 강학에 부지런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시는 공부가 이처럼 지극했던 것이니, 덕업(德業)의 성대함과 치화(治化)의 융성함은 실로 여기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반드시 먼 옛날을 본받으려 하지 마시고 곧 네 분 성조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으신다면, 어찌 군하(群下)가 우러러 진면(陳勉)하는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날마다 즙희(緝熙)의 공부에 나아갈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할 때가 많고 어진 사대부를 접할 때가 적은 것, 이것은 천고의 인군이 마땅히 감계(監戒)해야 할 것이며, 치란과 오륭이 갈라지는 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정자의 말을 전하의 앞에서 진계(陳戒)하는 것처럼 여기신다면, 더욱 어찌 두려워하며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시 삼가 바라건대, 더욱 정신을 기울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아뢴 바는 비단 형식적으로 예를 갖추는 데서 나오지 않은 것일 뿐만이 아니라, 실로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며, 연이어 ‘학문(學問)’ 두 글자로 부연 해석하여, 글자마다 간절하였다. 이제 ‘깊이 유념하겠다.’는 등의 말로 비답을 내릴 것이니, 비록 예삿말과 같겠지만 실은 여기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 감히 복응(服膺)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여덟 글자의 흉언(凶言)을 지어내어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고자 도모한 것은 김한록(金漢祿)의 역적질이고, 《대명률(大明律)》의 한 구절을 따내어 종사와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자 모의한 것은 김귀주(金龜柱)의 역적질입니다. 이미 김귀주·김한록의 흉언과 흉도(凶圖)를 알고서도 난만(爛漫)하게 함께 돌아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서 서로 역적 무리들의 세 소굴이 된 것은 김종수(金鍾秀)의 역적질입니다. 천백 가지 변괴(變怪)가 나오면 나올수록 흉악해져 거의 삼강(三綱)을 망치고 구법(九法)을 무너뜨린 것은,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모두 세 소굴 가운데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 흉적(凶賊)들의 흉도와 역절(逆節)은 전후의 상소와 계사(啓辭)에서 나열되어 남음이 없지만, 가장 나랏사람들이 반드시 죽이고 같이 원수로 삼는 것은, 대개 병신년129)                   이후로 흉언이 나온 곳을 완전히 숨겨 역적질을 하게 된 이유를 덮어버린 채 안으로 한 권역(圈域)을 이루어 밖으로 온 세상을 속이다가 이에 ‘의리’란 두 글자를 제멋대로 쥐고 흔들며 사람을 유혹하고 사람을 협박하는 패병(欛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아! 선조(先朝)께서 지키셨던 의리는 천 사람의 성인보다 탁월하시고, 백세에 물어보아도 영원히 우리 동방의 바뀌지도 소멸되지도 아니할 대경 대법(大經大法)입니다. 일기(日記)를 세초(洗草)하던 때의 예소(睿疏)와 즉위하신 날의 윤음(綸音)이 해와 별보다 환하게 완염(琬琰)130)                  에 실려 있어 팔역의 신민(臣民)들이 사시(四時)처럼 받들었습니다. 더구나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이 복법(伏法)된 이후 한 사람이라도 범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는 또한 이덕사·조재한과 같은 것이니, 무릇 오늘 북면(北面)하는 자라면 누군들 감히 그 사이에 마음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무리들은 도리어 ‘우환의 단서가 조만간에 닥칠 것이니, 저희들이 아니면 막아 호위할 수도 천명(闡明)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여 사사로운 계책을 만들어 빼앗아 자신들의 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것으로 죽이고 살리는 덫을 놓고 주고 빼앗는 문을 세워 그것으로 속여 꾀고 협박하여 을러대니, 어리석은 자는 미혹되고 약한 자는 두려워하며 이익을 즐기는 자는 이롭게 여겨 세도(世道)를 이런 극도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신은 징토(懲討)를 엄히 하여 의리를 밝히고, 못된 붕당을 타파해 세도를 안정시키는 것이 곧 목하의 가장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무릇 이미 등철(登徹)된 상소와 계사 가운데서 아직 마땅한 율을 베풀지 않은 자에게 대해 빨리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각각 그 해당되는 죄를 죄주어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흉역(凶逆)의 근인(根因)과 인귀(人鬼)의 관두(關頭)를 환히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찌 재차 그릇되며 재차 물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징토는 이미 엄하게 행해졌고 못된 붕당은 이미 타파되어, 의리는 거의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고 국세(國勢)는 위태로움을 전환시켜 안정으로 회귀할 것입니다. 인심을 안정시키고 세도를 안정시키는 것은 곧 그 다음의 일일 뿐입니다. 지금 어두운 무리가 이미 쓸려나고 큰 빛이 하늘 가운데서 밝아진 뒤에 전의 그릇되고 유혹에 빠진 자들이 이제 어찌 환하게 마음을 고쳐먹지 않겠습니까? 전에 물들었던 자들이 이제 어찌 별안간 마음을 뉘우치지 않겠습니까? 모두 함께 더불어 유신(維新)의 교화로 들어가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세족(世族)이며 세신(世臣)입니다. 만약 옛날의 잘못을 크게 바꾸어 함께 대도(大道)로 나아간다면, 조정의 다행이자 세신의 복입니다. 오늘날의 선무는 오로지 여기에 있으니, 성명(聖明)께서 더욱 정신을 기울이시는 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천둥의 재이는 곧 요사이 재이를 숨긴 까닭에 불러온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재이를 숨기는 해(害)는 재이보다 심하다.’ 하였으니, 대개 그 임금이 재이를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비록 재이가 있다 하더라도 말하지 아니하면 곧 이른바 재이를 숨기는 것입니다. 대저 일식·월식과 성문(星文)의 빙괴(騁怪)는 천재(天災) 중에서 큰 것이나, 혜성이 가장 큰 것입니다. 이는 마땅히 군신 상하가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허둥지둥해야 할 것인데, 전하의 조정에 어찌 일찍이 재이를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위에서는 측석(側席)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하교가 없고 아래에서는 선도(善導)하며 충성을 바치는 말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운관(雲觀)의 보고는 또한 ‘나타난 별’ 운운하였으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나타난 것이란 어떤 별이었는지요? 만약 상서로운 별과 구름이 오늘 나타났다면, 신은 결단코 소리 높여 축하하는 덕을 찬송하는 글이 날마다 공거(公車)131)                  에 쌓였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와 같으니, 이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바라고 하여 감히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개 근년 이래로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전하께서 듣기 싫어하시는 말을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전하께서는 이 습관을 보는 데 익숙하시어 아래에서 위를 섬김은 본래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나머지 드디어 당연히 여기신 것이고, 아래에서 스스로 처신하는 사람도 또한 말이 없는 것과 구차히 용납되는 것을 하나의 마땅한 규모로 여겨 오늘날 재이를 숨기는 데 이르러 극도에 도달한 것입니다. 월전(月前)의 빈대(賓對) 때 좌상이 별의 재이로 누누이 충성스럽게 고하였으면, 유신(儒臣)으로서 같이 연석(筵席)에 올랐던 사람은 마땅히 이어 진달하는 말이 있어야 할 것인데도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났으니, 신은 실로 개탄하는 바입니다. 청컨대 그날 입시(入侍)했던 옥당(玉堂)을 삭직(削職)하고, 별의 이름을 말하지 아니한 측후관(測候官)을 모두 파직하소서. 그리고 별의 재이가 있고 난 뒤에 말하지 아니한 삼사(三司)를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하(群下)가 입을 봉하고 말하지 아니한 것은 모두 나 소자가 간언(諫言)을 듣기 싫어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군하가 간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겼던 것이고, 접때 입시했던 옥당도 진주(陳奏)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잘못한 바가 있다 하더라도 실은 나의 죄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정언 조종영(趙鐘永)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을 권면하고, 이어 시폐(時弊) 여러 조목을 진달하면서, 선천(選薦)을 분명히 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며 기강을 진작시키고 형옥(刑獄)을 살필 것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으로 가납하였다.

 

장령 김종후(金鍾厚)를 유일(遺逸)에서 삭적(削籍)하고 이어 추탈(追奪)의 법을 시행하라 명하였는데, 양사(兩司)의 합계(合啓)를 따른 것이다.

 

10월 12일 경진

소대(召對)하였다.

 

박서원(朴瑞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14일 임오

소대하였다.

 

10월 16일 갑신

월식(月食)하였다. 【신시(申時) 초에서부터 유시(酉時) 정각까지 2분(分) 33초(秒)동안 월식하였는데, 처음에는 동남쪽이 이지러졌다가 정남쪽이 심하게 월식하였으며, 서남쪽에서 둥글어졌다.】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592면
【분류】과학(科學)

 

차대(次對)하였다.

 

10월 18일 병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문무과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금중(禁中)에서 문신의 응제(應製)를 시행하였다. 획수(劃數)를 세어 수석을 차지한 검교 직각(檢校直閣) 홍석주(洪奭周) 등에게 상을 주었다.

 

10월 19일 정해

주강(晝講)하였다.

 

10월 20일 무자

주강하였다.

 

차대하였다. 좌의정 이시수가 아뢰기를,
"전 판서 이익운(李益運)은 이제 막 복(服)이 끝났습니다. 몇 년 전 사옥(邪獄) 때 남의 말이 있었으나 자신이 범한 바가 없음은 곧 온 조정이 다 아는 바입니다. 또 직임이 중신(重臣)이니, 폐기(廢棄)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차후로 구애됨이 없이 검의(檢擬)토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상에게 물어 본 뒤에 허락하였다.

 

주전소(鑄錢所)에서 새로 돈 30만 냥을 주조하였다고 아뢰었다.

 

양사(兩司)에게 합계(合啓)하여 추탈 죄인(追奪罪人) 김종후(金鍾厚)의 지속(支屬)을 사방으로 흩어 유배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이익(金履翼)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22일 경인

태백성(太白星)이 사지(巳地)에 나타났다. 그후 혹 미지(未地)에 보이다가 11월 9일(병오)에 이르러 소멸되었다.

 

의금부에서 경상 감사 윤광안(尹光顔)의 장계(狀啓)에 ‘죄인 현경(玄慶)은 질핵(質覈)했더니 의심할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한 것을 아룀으로 인하여, 대신(大臣)에게 문의한 뒤 대계(臺啓)가 정지되기를 기다려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효시(梟示)해 사람들에게 경고를 보이라고 명하였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우(祠宇)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판돈녕        이언식(李彦植)과 수원 판관(水原判官)        이희(李爔)를 소견(召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성조(列聖朝)께서 모두 전배(展拜)하셨으되, 작헌(酌獻)은 선조(先朝) 때부터 시행하였는데, 내가 또 계술(繼述)하여 예를 행하니, 더욱 슬프고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 내외 자손 중에 참반(參班)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니, 승지        송지렴(宋知廉)이 말하기를,
"유생(儒生)으로 거안(擧案)132)                  한 사람이 76명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에 어떤 고적(古蹟)이 있는가?"
하니, 이언식이 말하기를,
"내정(內庭)의 돌기둥은 곧 선묘(宣廟)께서 독서하시던 서재(書齋)이고, 앞기둥 뒤의 계단에 있는 회양목[黃楊木]은 대원군께서 손수 심으신 것이며, 총죽(叢竹)은 선묘께서 손수 심으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희귀한 일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참반(參班)한 사람을 인견(引見)하고 싶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주인은 이 뜻을 알아서 나가 전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판돈녕        이언식은 숭록(崇祿)을 더하고, 포목[木布]을 선조(先朝)의 전례에 의거하여 실어다 주도록 하라. 참반한 유생은 전례에 의거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지필묵(紙筆墨)을 제급(題給)하고, 무사(武士)에게는 각각 활과 화살 한 부(部)씩을 사급(賜給)하도록 하라. 수원 판관        이희는 승서(陞敍)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3일 신묘

주강(晝講)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김이영(金履永)이 말하기를,
"소신(小臣)이 외람되게도 운관(雲觀)에 발을 붙이고 있어서 재이(災異)를 목도하였는데, 그 사이에 태백성(太白星)이 나타난 것이 두 차례에 이르렀고, 혜성과 천둥의 재이가 거듭 나타나 보였습니다. 비단 천상(天象)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닙니다. 인사(人事)에 증험해 보아도 또한 그러합니다. 신이 밤에 건문(乾文)을 보고, 낮에 인사를 살피매, 저도 모르게 우려하고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지금 성을 내고 계시니, 그처럼 말많게 떠들기만 하지 말라.[天之方蹶 無然泄泄]’ 하였는데, 오늘날 말만 많은 것이 또한 심합니다. 위에서 구언(求言)하고 아래에서 진언(進言)하는 것을 또한 실상으로 응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만, 신의 구구한 소견으로는 그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는 도리에 있어 그윽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진실로 실정으로써 행하지 않는다면, 비록 진언하는 것이 날마다 공거(公車)에 쌓여 폐단을 말하는 것이 남음이 없다 할지라도 그 폐단을 구제하는 정사에 무슨 이익됨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폐단이 되는 것이 진실로 많습니다만, 오늘날을 위한 도리는 아무 일이든 말할 것 없이 제목(題目)을 먼저 세우고 맡겨서 성효을 책임지우는 것만 같은 것이 없을 것이니, 아마도 크게 변하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요사이의 일로 말할지라도 인정전(仁政殿)의 중건(重建)과 예조의 경영을 전하께서 한결같이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맡기시자 공역(工役)이 드디어 이루어졌습니다. 무릇 일을 해 나가는 것은 실로 집을 짓는 일과 비슷하니, 지금 전하께서 만약 아무 일에 대해 한 가지 제목을 세우시고 대신(大臣)에게 위임하신다면, 대신이 마땅히 도료장(都料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피(斧彼)·거피(鉅彼)의 임무에 있어서는 신 등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또한 마땅히 분주히 힘을 다해 공역의 이루어짐을 책임지겠습니다. 어찌 오늘내일 한갓 폐단만을 말하고 한 번도 그 폐단을 고칠 도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시기로 말한다면, 오늘날이 바로 무엇인가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나라 안에 일이 없으니, 진실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신다면 다시 어떤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장맛비 내리지 않을 때에 미쳐 뽕나무 부리를 가져다가 창과 문을 얽었으니, 누가 감히 나를 업신여기랴?’라고 하였으니, 대저 ‘미친다[迨]’란 글자의 뜻이 진실로 좋습니다. 그리고 《맹자》에서는 ‘이때에 이르러 그 정형(政刑)을 밝힌다.’ 하였으니, 대개 ‘이른다[及]’란 글자의 뜻은 ‘미친다[迨]’는 글자와 그 뜻을 같이합니다. 이제 또한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신다면, 이때에 미쳐 하지 않으렵니까? 그런데 무엇인가를 하는 도리는 먼저 제목을 세워 강구(講究)하는 도리로 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진달한 특진관의 아룀은 더욱 좋다. 마땅히 실심으로 유념하겠다."
하였다.

 

10월 24일 임진

주강하였다. 《논어(論語)》 제5권의 계자연장(季子然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그대의 마음에 거슬리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리에 맞는 말인가 알아보고, 그대의 뜻에 순종하는 말이 있거든 반드시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인가 알아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지극히 마땅하나, 또 혹 귀에 거슬리는 것 가운데에는 선한 것과 선하지 못한 것의 구분이 있고, 뜻에 순종하는 것 가운데에는 마땅한 것과 마땅하지 못한 것의 분별이 있다. 진실로 뜻에 순종하는 말 가운데에는 혹 도리의 마땅한 말이 있는데, 그 뜻에 순종한다 하여 반드시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인가 알아보고, 귀에 거슬리는 가운데에는 혹 도리에 마땅하지 아니한 말이 있는데, 그 귀에 거슬리는 것이라 하여 반드시 도리에 맞는가 알아본다면,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의 사이에 전도(顚倒)되는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귀에 거슬리고 뜻에 순종하는 가운데서 그 공사(公私)·현부(賢否)의 구분을 명백히 판별하여 그것이 도리에 마땅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김계하(金啓河)가 말하기를,
"소인은 정직함을 팔아 혹 귀에 거슬리게 말하는 자가 있고, 군자는 장순(將順)하여 또한 뜻에 순종해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 사람을 쓸 즈음이라면 반드시 먼저 두 가지를 명확하게 분변하되, 말을 듣는 도리에 이르러서는 비록 소인의 말이라 하더라도 말이 좋으면 들어야 합니다. ‘부유하게 되면 어질지 못하고 어질면 부유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양화(陽貨)133)  의 말이지만, 성인(聖人)께서 취하셨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유(仲由)는 허물을 듣기를 좋아하고 또 ‘능히 행하기 전에 듣는 것이 있을까 두렵다.’ 하였으니, 그가 성인의 문하의 고제(高弟)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염구(冉求) 또한 사과(四科)134)  의 반열에 들어갔으니, 또한 고제라 할 만하다. 그런데 염구는 계씨(季氏)의 취렴(聚斂)하는 신하135)  라 하여 부자(夫子)께서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시며 물리쳤고, 중유는 자고(子羔)가 비(費) 땅의 재(宰)가 된 일136)   때문에 부자께서 남의 자식을 해친다고 물리치자 자로(子路)137)  는 또 ‘반드시 글을 읽은 연후에야 배우겠느냐?’는 말이 있었다. 이는 대개 두 사람의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니, 김계하가 말하기를,
"자로는 능히 재택(裁擇)하지 못했고, 염구는 항상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에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도(道)로 임금을 섬기되 불가하면 그만두는 것은 대개 임금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반드시 자기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다. 맹자가 백이(伯夷)와 이윤(伊尹)의 성인(聖人)됨을 논하기를, ‘이윤은 다스려져도 또한 나아가고 어지러워져도 또한 나아갔다.’고 하였는데, 다스려져도 또한 나아갔다는 것은 곧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뜻이나 어지러워져도 또한 나아갔다는 것은 불가하면 그만둔다는 뜻에 다름이 있는 것 같다. 이윤은 현자(賢者)인데, 어찌 이와 같이 하였는가?"
하니, 김계하가 말하기를,
"대개 그 자임(自任)한 뜻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김계락(金啓洛)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0월 27일 을미

주강하였다. 임금이 문의(文義)로 인해 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수령을 쓸 만한 사람을 얻으려면 마땅히 초사(初仕) 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것은 이비(吏批)의 자리이다. 곤수(閫帥)·영장(營將)·우후(虞候)·변장(邊將)도 또한 어찌 나라에 중요하지 않겠는가? 수령도 잘 선택하지 않을 수 없지만, 곤수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또한 이에 매여 있다. 비록 영장으로 말할지라도 이는 외읍(外邑)의 토포사(討捕使)이다. 만약 능히 잘 다스리지 못하여 평민을 도적으로 오인한다면, 또한 어찌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단서가 되지 않겠는가? 병판(兵判)은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아 차후로 위로는 병사(兵使)에서 아래로는 변장에 이르기까지 병비(兵批)로 마땅히 내야 할 것에 대해 언제나 뜻을 두어 정밀히 선택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가 각신(閣臣)과 승사(承史)의 진전(進箋)을 받았다. 며칠 전 임금이 영화당에 나아가 각신과 승사를 불러 배사(陪射)를 명하고 이어 결습(決拾)을 쥐고 연달아 다섯 대를 쏘아 맞혔으며, 각신과 승사는 각각 짝을 지어 쏘았다. 선찬(宣饌)을 명하고 표피(豹皮)와 궁시(弓矢)를 모두에게 내렸으니, 고풍(古風)138)  이었다. 이날 각신과 승사가 진전하여 칭사(稱謝)한 것이다.

 

10월 28일 병신

춘당대에 나아가 용호영(龍虎營)의 중순(中旬)에 입격(入格)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는 것을 행하였다.

 

주강하였다.

 

10월 29일 정유

동지 정사(冬至正使) 남공철(南公轍)과 부사(副使) 임한호(林漢浩), 서장관(書狀官) 김노응(金魯應)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사폐(辭陛)했기 때문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책(書冊) 중에서 만약 구해 올 것이 있으면 구해 오는 것이 옳다."
하니, 남공철이 말하기를,
"이미 언단(言端)을 받들었으니, 감히 이 일을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선조(先朝) 갑인년139)   사행(使行)이 입시(入侍)하였을 때 패관 소설(稗官小說)은 사오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있었습니다만, 곧 한때 폐단을 고치려는 일이었고, 영원히 서책을 사오는 것을 막는 하교는 아니었습니다. 대저 패관 소설은 곧 세도(世道)를 해치는 도구이나, 경사(經史)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좁은 것을 넓히고 긴장된 것을 이완시키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경사의 판본은 본디부터 넓지 아니하니, 만약 좋은 경사로서 볼 만한 것이 있다면 금하지 말고, 패관 소설에 이르러서는 일체 법을 세움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패관 소설과 이단(異端) 외에 경사자집(經史子集) 중에서 우리 나라에 드물게 있는 책자는 사오게 하고, 또 연교(筵敎)라 하여 만부(灣府)에 언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전 판서 박종보(朴宗輔)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증(贈) 영상(領相)140)  의 상사가 난 뒤 나라의 형세가 고단하고 위태로워 내 마음이 마치 의지할 바가 없는 듯하였는데, 1년이 채 못되어 오늘 이런 소식을 또 들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놀랍고 가슴 아프다. 도리어 무슨 말을 하겠는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이 사람을 어찌 심상한 외삼촌과 생질의 사이로 말할 수 있겠는가? 선조(先朝)의 알아주심을 입어 조석으로 좌우에 있었던 것이 10여 년이고, 내가 태어나던 처음부터 지성으로 보호하였으며, 나 또한 매사를 의지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 공을 말한다면 바깥의 사람들이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지난 봄 이래로 몸소 대의(大義)의 천명(闡明)을 책임지고서 분투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태우면서 드나들며 협찬(協贊)해 능히 그 공적을 이루었다. 이미 어두워진 윤상(倫常)으로 하여금 다시 밝히고, 위태로운 나라의 형세를 전환시켜 편안하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이었던가? 아! 단량(端亮)·개제(愷齊)하며 충직(忠直)·자량(慈諒)한 사람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나 어찌 다시 보리오? 더구나 자궁(慈宮)께서 올해 봄 이후로 기력이 늘 쇠약해지시고, 지금 기후(氣候)가 또 미령하신 즈음에 또 이런 슬픔을 당하시니, 장차 무슨 말로 우러러 이해시킬 것인가? 비통한 나머지 더욱 어쩔 줄을 모르겠다. 졸서한 판서 박종보의 집에 동원(東園)의 부판(副板) 한 부(部)를 실어다 주고,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제문은 마땅히 직접 짓겠으니, 해방(該房)의 승지는 알도록 하라."
하였다. 박종보는 판돈녕 박준원(朴準源)의 장자(長子)이다. 임금이 태어난 이후로 오랫동안 근로하였고, 경신년141)   초에는 원구(元舅)의 지친으로서 참여해 듣고 밀물(密勿)하였는데, 성품이 자량(慈諒)하여 자못 유약하다는 말이 있었다. 병인년142)   의리의 처분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가 협찬한 힘이였다.

 

여러 도(道)와 도(都)에 금년의 재해를 입은 2만 9천 8백 95결(結)에 급재(給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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