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정사
영화당(映花堂)에 나아가 장신(將臣)·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의 별시사(別試射)를 행하였다.
호조 판서와 각사(各司)의 구임(久任) 낭청(郞廳)을 소견하였다.
11월 2일 무오
소대(召對)하였다. 《시전(詩傳)》의 판장(板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장(章)은 동렬(同列)들이 서로 경계하는 내용이다. 그런데도 깊이 책하고 간절히 경계하는 것이 상장(上章)에 견주어 더욱 더하다. 말장(末章)의 ‘하늘의 노여움을 조심하여 감히 놀거나 장난하는 일이 없으라.[敬天之怒無敢戱豫]’고 한 여덟 글자는 대월(對越)하는 공부에 있어 과연 좋다. 어떻게 하면 대월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여 하늘을 공경하는 도리로 삼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박효성(朴孝成)이 말하기를,
"경외(敬畏)라는 두 글자가 제일의(第一義)가 되는 것인데 이는 임금의 마음 사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장(章)에서 선민(先民)의 말에 꼴베는 사람에게도 물어보라고 한 두 구어(句語)는 과연 매우 좋은 말이다. 대순(大舜)은 성인(聖人)인데도 오히려 남의 의견을 취하여 선한 일을 하였는데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그 사람을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취한 것이 이와 같다. 어떻게 하면 어리석은 자의 말이라도 반드시 가리고 가까운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살펴서 꼴베는 사람에게도 묻는 의리를 극진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검토관 김희화(金熙華)가 말하기를,
"꼴베는 사람의 말은 지극히 천근(淺近)한 것이지만 성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지극한 이치가 그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공손한 자세로 남면(南面)하고 있어도 잘 다스려진다는 정치는 반드시 꼴베는 사람에게 묻는다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11월 3일 기미
소대(召對)하였다.
11월 5일 신유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생기(牲器)를 살펴보았는데, 동향(冬享)이 내일이기 때문이었다.
11월 10일 병인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생·진(生進)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가묘(家廟)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는데, 사손(祀孫)이 사마시(司馬試)의 신방(新榜)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진사(進士) 이경행(李景行), 생원(生員) 이종렬(李鍾烈)에게 특별히 오위 장(五衛將)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나이가 70세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11월 13일 기사
소대하였다.
11월 14일 경오
소대하였다. 《시전(詩傳)》의 억장(抑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에 ‘서인(庶人)이 어리석은 것은 또한 주로 타고난 병통이라.[庶人之愚 亦職維疾]’라고 말하였는데, 비록 서인이라고 할지라도 어찌 다 어리석을 리가 있겠는가? 위(衛)나라 무공(武公)의 현명함으로 의당 서민의 어리석음을 광직(匡直)시켜 날마다 선으로 옮겨가고 악을 고치게 할 수 있는데도 이에 판연(判然)히 현우(賢愚)를 나누어 둘로 하였다. 그러하여 마치 한쪽으로 정하여져 끝내 선으로 옮길 수 없는 것처럼 한 것는 무슨 까닭인가? 억장(抑章)은 이것이 자경(自警)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요, 세상을 경계시키는 말일 경우에는 의당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가?"
하니, 시독관 박종기(朴宗琦)가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철인(哲人)으로서 어리석은 이를 주로하여 한 말이기 때문에 그 뜻이 서인의 경우에는 혹 괴이할 것이 없겠으나, 철인의 경우에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또 이는 자경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런 것이요 만일 세상을 경계시키는 말이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말[言]의 하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그 대의(大意)가 사마(駟馬)로도 말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남용(南容)162) 이 하루에 세 번씩 이 시(詩)를 반복해서 외었으니, 과연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간혹 말만 할뿐 실천은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데 부자(夫子)163) 께서는 어떻게 그가 실제로 말을 삼가는 줄을 알아서 형의 딸로 아내를 삼아주기에 이르렀는가?"
하니, 박종기가 말하기를,
"삼가야 될 것은 오직 말인데 남용이 능히 이 시(詩)의 뜻을 음미하였으므로 그가 삼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공(武公)은 본디 또한 현군(賢君)인데 호천(昊天)이 매우 밝다고 한 이하의 내용을 살펴보면 만년(晩年)에 뉘우치는 말인 것 같다. 기욱시(淇澳詩)에서는 오히려 절차 탁마(切磋琢磨)의 공부를 기다렸으니, 성현(聖賢)의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점이 있는 것이다. 기욱시는 필시 억계(抑戒) 이전에 지은 것일 것인데, 90세 때에 이르러서는 그 덕이 증진되었음을 더욱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기욱시 1편(篇)으로 살펴보건대 문(文)·무(武)·요(堯)·순(舜)일지라도 이에서 더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무공의 그때 공부가 어찌 죄다 시인이 찬미한 내용과 같겠는가? 대저 무공의 공부는 초년(初年)과 만년(晩年)의 다름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이도(金履度)는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1월 15일 신미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노동(尹魯東)이 도해 역관(渡海譯官) 현의순(玄義洵) 등이 가지고 온 서계(書啓)와 별폭(別幅)을 치계(馳啓)하기를,
"일본국(日本國)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습유(拾遺) 평의공(平義功)은 조선(朝鮮)의 예조 대인(禮曹大人) 합하(閤下)께 아룁니다. 성사(星槎)가 글을 가지고 왔기에 살펴보건대 문후(文候)가 가승(佳勝)하다고 하니 위안되는 마음 매우 깊습니다. 불녕(不佞)은 지난번 여가를 얻어서 돌아왔는데 멀리 수고롭게 역사(譯使)가 와서 외람되이 성대한 위문(慰問)을 받았고 또 진귀한 선물도 받았으니, 관호(款好)의 정의(情誼)에 대해 감사한 마음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전번에 본주(本州)에 빙사(聘使)를 보냈던 건(件)은 동무(東武)에서 하명(下命)한 것으로 이미 여러 해가 된 것입니다만, 그간 왕복하면서 서로 지난(持難)한 것은 일이 더없이 중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역사(譯使)가 유시(諭示)한 사정은 누누이 살펴 상세히 알았습니다. 즉시 내시(來示)에 의거 동무(東武)의 관원(官員)과 귀사(貴使)가 면대하여 의논했는데 역지 통빙(通聘)에 관한 한 조항은 진실로 귀국(貴國)의 영락(領諾)을 받들어 교제(交際)하게 되는 것도 더없이 큰 다행인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 사연(事緣)은 이미 전문(轉聞)하였습니다만 서약(誓約)을 결정하는 것은 분명하고도 미덥게 하는 것이 더욱 귀한 것이니, 생각건대 동무(東武)에서도 아름답게 여겨 차탄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지난번 번독스럽게 아뢴 데 대해 귀국에서 다행히 잘 양찰(諒察)하여 주시어 외람되게도 특별한 염려를 내렸으니, 이것이 돈후한 인의(隣誼)가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간절히 고하건대 신사(信使)가 나올 기일을 정하는 데 대해 정의(廷議)가 완만히 해서는 안 되니, 다시 주선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마다 순편(順便)하게 되어 영구한 호의(好意)를 보존시킨다면 불녕(不佞)이 또한 나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더없는 다행이요 기쁨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비품(菲品)을 가지고 간략히 경건한 마음으로 회답하는 뜻을 펴니, 환히 살펴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만 불비례(不備禮)합니다."
하였다.
대마도(對馬島)와의 폐단에 대해 이정(釐正)하는 약조(約條)는 다음과 같다.
1. 중간에 끊긴 5선(船)은 영원히 파기한다.
1. 고환(告還) 차사(差使)는 서계(書契) 세견선(歲遣船) 편에 순부(順付)하되 태수(太守)가 승습(承襲)한 뒤 초차(初次) 환도(還島)에는 단지 일번(一番) 사개(使价)만 보낸다.
1. 공목(公木) 1필(疋)은 공작미(公作米) 10두(斗)로 마련한다.
1. 감동(監董) 연한(年限)은 40년을 기한으로 한다.
1. 감동 물력(監董物力)은 분수(分數)하여 마련한다.
1. 좌우(左右) 연해(沿海)의 표선(漂船)에 대한 급료(給料)는 평목(枰木)으로 시행한다.
1. 화관(和館)의 서방(西方)에 담을 축조하고 문을 설치한다.
이상 일곱 조항은 이번 신사(信使)의 면담(面譚)을 위하여 역관(譯官)이 나올 적에 태수(太守)의 분부를 받아 확실하게 간구(懇扣)하기를 청하여 이와 같이 약조(約條)한 것인데, 그 유래가 으레 그런 것이다. 따라서 한때에 변개(變改)하기 어려운 정황이 있는 것인데 특별히 청하여 온 것을 허락한 것은 성신(誠信)한 마음에 저버리기 어려운 정의(情誼)에서 나온 것이다. 감동 물력(監董物力)은 미리 약정(約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뒷날 상세히 살펴 분수(分數)하여 약속(約束)토록 한다. 세 역관(譯官)이 환국(還國)하는 날 의당 이런 내용을 조정(朝廷)에 진달해야 한다.
1. 각(各) 송사(送使) 때 진상(進上)하는 것과 공무역(公貿易)의 단목(丹木)은 으레 1백 근(觔)을 1칭(稱)으로 하는데 1칭을 결속(結束)하는 고삭(藁索)이 5근이 되는 것은 칭량법(稱量法)에 어긋나고 보기에도 또 놀라운 일이니, 이 뒤로는 고삭을 해거(解法)토록 한다.
1. 각(各) 송사(送使) 때 단삼(單蔘)을 칭량(稱量)할 적에 품질이 열등하다고 하면서 오로지 점퇴(點退)만을 일삼고 있는데, 삼(蔘)의 품질이 조금 좋지 않다고 해도 이렇게 하는 것이 어찌 예단(禮單)의 본의(本意)이겠는가? 이제부터는 전처럼 점퇴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성신(誠信)을 완전하게 한다.
1. 시탄(柴炭)의 지대(支待)는 이미 원정(元定)된 숫자가 있으니, 감히 원정된 숫자 이외에 늑봉(勒捧)하는 일이 없게 하며 각 가식자(家食者)들이 멋대로 탄막(炭幕)으로 나와서 시끄러움을 야기시키는 일이 없게 한다.
1. 화관(和館)에 이미 물화(物貨)가 있으니 매매(賣買)가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잠화(潛貨)와 노부세(路浮稅)를, 이를 엿보아 간계(奸計)를 부리는 것은 과연 성신으로 하는 도리가 아닌 것이니, 이런 내용을 알고 약조(約條)에 의거 엄금한다.
1. 화관(和館)의 수문(守門) 밖에서 매일 조시(朝市)할 때 법의(法意)를 준행하지 않고 난잡하게 매매하여 어채(魚菜)를 부당하게 빼앗는 것을 일체 엄금토록 한다.
1. 화관의 사람들이 대단한 사고(事故)가 없는데도 멋대로 출입하는 것을 한결같이 약조에 의거 거듭 엄히 계칙시킨다.
1. 화관에 있는 사람들이 교린(交隣)의 뜻을 모르고 근래 난동을 부리는 폐단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삼가는 마음을 지니고 화기(和氣)를 그르치는 일이 없게 한다.
1. 화관의 진피(陳皮)·청피(靑皮)·황련(黃連)은 이것이 일용(日用)하는 물건이니, 다시는 이렇게 도고(都賈)해서는 안 된다.
기사년164) 9월 일부터 봉행한다.
11월 16일 임신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차자(箚子)를 올려 과거(科擧)의 폐단을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과거의 폐단을 누차 전석(前席)에서 진달하였습니다만, 지금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은 과거인 것입니다. 아! 오늘날 유관(儒冠)을 쓰고 유의(儒衣)를 입을 사람들은 모두가 세록가(世菉家)의 자제(子弟)들로서 이 싯점에는 원기(元氣)가 되고 뒷날에는 공경(公卿)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태어나서 머리털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이미 습속(習俗)에 물들어서, 겨울에는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여름에는 하나의 글을 짓지도 않은 채 의욕(意慾)이 먼저 자라나서 염치는 하나도 없어져 버리는가 하면, 아비가 그렇게 가르치고 형이 그렇게 면려하면서 이를 당연한 방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소(大小) 과갑(科甲)에 있어 백지(白地)로 약취(掠取)하는 한 가닥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까닭에 한번 과시(科試)를 당하게 되면 번번이 온갖 갈랫길이 생겨나게 마련이고, 따라서 글을 사고 차술(借述)하는 것에 대해 애당초 부끄러움이란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이름을 바꾸어 대신 과장(科場)으로 들어가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습니다. 이른바 외장(外場)의 폐단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것이 없는 정도입니다. 대저 안으로 연줄을 대고 밖으로 호응케 하는 계교가 갈수록 더욱 간교하여 은밀한 곳에서 남모르게 초고(草稿)를 만드는 것에는 납환(蠟丸) 속에 글을 숨기는 것 같은 것이 있고, 틈을 노려 간사함을 부리는 데는 각기 자기들만의 표호(標號)로 서로 응답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권(試券)을 바치고 시권을 걷고 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사인(私人)을 모아 군졸(軍卒)로 위장하여 자호(字號)를 엿보아 입락(立落)을 미리 탐지하게 하는가 하면, 혁제(赫蹄)165) 가 곧바로 장내(帳內)로 알려지고 서두(書頭)166) 를 소매속에 넣어 서로 전달하는 지경이어서, 계교를 부리는 것이 천태 만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시(考試)가 끝나기도 전에 성명(姓名)이 드러나고 방목(榜目)이 나오기도 전에 물색(物色)이 먼저 정하여집니다. 따라서 뜻이 있어 스스로 이름 아끼기를 좋아하는 선비들은 괴황(槐黃)167) 의 길 떠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온 지 오래입니다. 이것이 어찌 유독 장보(章甫)들의 탓이기만 하겠습니까? 유사(有司)가 된 사람이 실로 인도한 것입니다. 남의 자식을 그르친 것이 죄이고, 국조(國朝)의 더없이 엄한 법을 무너뜨린 것이 죄이고, 나라가 반드시 망하게 되는 거조라는 것을 알면서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이 죄이고, 단지 남의 환심을 살 계교만을 세우고서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그것 또한 죄인 것입니다. 진실로 이 죄를 곰곰 따져보면 그 죄가 장차 어디에 해당이 되겠습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이를 적마다 곧바로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이미 지난일이야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문과(文科)의 회위(會圍)168) 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상유(桑楡)의 가지 끝에 걸린 햇살 같은 기대를 거둘 수 있기를 그래도 혹 바랄 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미 고질이 된 병이어서 약으로 치료할 방도가 없고 이미 뒤틀린 파도여서 조각배로는 건널 방법이 없습니다. 대저 이렇게 갈수록 더욱더 발생하는 수많은 폐단은 실로 아래에서 바로잡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구구하게 바라는 것은 조화(造化)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먼저 한 장의 종이에 분명한 명령을 내려 백성들에게 환히 보이는 것은 보감(寶鑑)으로 물건을 비추는 것과 같고 엄한 것은 태아(太阿)169) 를 손에 잡고 있는 것과 같이 근엄하게 하유함으로써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형륙(刑戮)에 처한다는 의의를 크게 보이신다면, 오늘날 북면(北面)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크게 혁신되어 명을 받들어 임금의 하교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였는데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비로소 해당되는 율(律)을 적용하여, 흥망을 판가름하는 쪽으로 전이시키는 하나의 큰 기회로 삼으시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거(科擧)의 허다한 폐단에 대해서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 경의 차자 내용을 보니 어떻게 이처럼 극도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평소에 시관(試官)을 항상 믿고서 예(禮)로 부려 왔었는데, 만일 경의 말과 같다면 이는 내가 믿었던 것과 매우 어긋나는 것으로 경악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겠다. 그러나 경이 이미 제반 간사한 정상을 두루 거론하였으니,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한 자가 누구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경은 어찌하여 적발하여 논죄하고 감단(勘斷)하지 않고서 단지 이미 지난 일이어서 소급하기 어렵다는 것으로만 말을 하였는가?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방헌(邦憲)이 더없이 엄하고 관석(關石)이 균일하게 시행되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다시 밝은 명을 내려 환히 보이고 계칙을 누차 번거롭게 내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경은 다시 차자나 계달(啓達)을 통하여 논열(論列)하여 먼저 감률(勘律)할 것을 청함으로써 이 뒤로의 시장(試場)에서 금즙하는 것이 있게 하여 과거의 폐단을 통렬히 변혁시키게 하라."
하였다.
진하 겸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한용귀(漢用龜) 등이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치계(馳啓)하였다.
11월 17일 계유
소대하였다. 《시전(詩傳)》의 상유장(桑柔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는 곧 여왕(厲王)의 난세 때 지은 것이다. 폭군이 위에 있고 소인이 지위에 포열되어 있어서 민생(民生)이 날로 곤폐하게 되고 국본(國本)이 날로 위축되어 화란(禍亂)이 초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를 당해서도 군신 상하가 모두 태연히 즐기기만 할 뿐 나라의 위망(危亡)이 곧 닥친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만일 조금이라도 걱정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소인이 물러가기를 기약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물러갔을 것이고 군자가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았어도 장차 나오게 되었을 것이니, 어찌 이 지경까지 될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나 현사(賢邪)가 진퇴하는 기미는 지극히 은미하고도 쉬운 것이어서 그렇게 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변별(辨別)하고 통렬히 배척해서 점점 물들어 뒤섞이게 되는 폐단을 없앨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 김학순(金學淳)이 말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어진이를 기용함에 있어서는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간사한 자를 제거함에 있어서는 의심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진퇴(進退)시키고 취사(取捨)할 즈음에 있어서는 광명 정대하게 한 연후에야 틈을 노리는 자들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지혜로운 자도 천번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한 번의 잘못이 있게 되고 어리석은 자도 천번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한번은 얻게 되기 마련이다.’하였으니, 말을 따르는 방법은 한때의 득실(得失)을 가지고 곧바로 구단(句斷)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간(大奸)은 충신과 같아서 기폐(欺蔽)되기 쉽고 정언(正言)은 우원(迂遠)하여 믿음을 얻기가 어렵다. 이를 판별하는 요점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하니, 김학순이 말하기를,
"귀에 거슬리는 것과 마음에 딱맞는 것을 가지고 판별한다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수만(洪秀晩)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8일 갑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직접 동지(冬至)의 치사(致詞)와 표리(表裏)를 왕대비전(王大妃殿)·혜경궁(惠慶宮)·가순궁(嘉順宮)에 올리고, 이어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의 복시(覆試)를 설행하였다.
11월 19일 을해
소대하였다.
동지 부사(冬至副使) 김노경(金魯敬)이 말하기를,
"평안 병사 조계(趙啓)가 교자(轎子)를 타고 곧바로 계하(階下)에까지 이르렀으니, 조정의 체통을 높이고 사명(使命)을 중히 하는 방도에 있어 그대로 버려둘 수 없습니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의금부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잡아다가 감죄(勘罪)하고 해당 비장(裨將)은 형배(刑配)시키소서."
하니, 따랐다.
이윤겸(李潤謙)을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로 삼았다.
11월 20일 병자
하교하기를,
"지금은 겨울철이 이미 깊었는데 기근에 허덕이는 저 불쌍한 백성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죽는 걱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깊은 걱정 속에서 마음이 놓이지를 않는다. 진자(賑資)에 대한 구획(區劃)을 초기(抄饑)한 뒤에 한다면 반드시 제때에 하지 못하는 탄식이 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양호(兩湖)의 구황(救荒)은 더더욱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초기(抄饑)를 기다리지 않고 우선 사의를 헤아려 구획토록 하라. 각도(各道)의 진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구획하여 내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1일 정축
비국(備局)에서 진자를 구획하는 것 때문에 계청(啓請)하기를,
"호남(湖南)에는 쌀과 각곡(各穀) 12만 5천 석과 공명첩(空名帖) 1천 장을, 호서(湖西)에는 쌀과 각곡 4만 1천 5백 석과 공명첩 7백 장을, 경기(京畿)는 쌀과 각곡 4만 2천 4백 석과 공명첩 9백 장을, 화성(華城)에는 쌀과 각곡 1만 2백 석과 공명첩 2백 장을 획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북관(北關)의 곡식 7만 석을 영남(嶺南)으로 옮기고, 영남의 곡식 5만 석을 호남으로 옮겨서 획급하여 환곡(還穀)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어 호남의 진자에 2만 석을 더 획급하게 하였는데, 흉황이 더욱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11월 23일 기묘
박종훈(朴宗薰)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홍의모(洪義謨)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24일 경진
소대하였다.
11월 25일 신사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증광 문무과의 전시를 설행하여, 문과에는 이재수(李在秀) 등 43인을 뽑았고 무과에는 이숙(李橚) 등 4백 인을 뽑았다.
11월 26일 임오
경기(京畿)·양호(兩湖)·화성(華城)의 백성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이르노라. 아! 그대 경기·호남·호서 와 화성의 백성들은 나 일인(一人)의 고명(誥命)을 분명히 들으라. 나 소자(小子)는 부덕하고 과매(寡昧)한 자질로 외람되이 대위(大位)를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지 9년이 되었는데, 그간 단 하나의 물사(物事)에도 은택을 보인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대들이 오히려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괴로움을 면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이는 실로 우리 조종(祖宗)의 은택이 민생에 흡족하게 배여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황천(皇天)이 우리 동방을 돌보아 주시어 9년 동안 농사가 잇따라 풍년이 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모든 도의 연분(年分)에 대한 장문(狀聞)이 있을 때마다 매번 속으로 중얼거리기를, ‘나의 불민(不敏)함으로 덕이 전왕(前王)만도 못하고 정성은 위로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있는데도 하늘의 복을 내리는 것이 성대하였고, 은택이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는데도 백성들의 심복하여 존숭함이 정성스러웠으니, 이것이 어찌 나 소자(小子)가 마땅히 두렵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비와 바람이 순조로운 것은 얻기 어려운 성대한 일이지만, 나의 마음의 걱정스러움은 실로 수재(水災)나 한재(旱災)가 닥쳤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내릴 기색이 깜깜한 채 햇볕만 쨍쨍 내려쪼인단 말인가? 규벽(圭璧)을 올려 교야(郊野)와 종묘에다 누차 기우제를 지내어 늦여름에 우택(雨澤)을 얻기는 하였으나, 저 경기·호남·호서·화성에는 신령의 감응이 끝내 인색하여 모낼 시기가 이미 지나가 버렸으므로 연분(年分)이 드디어 흉년으로 결판이 나고 말았다. 대저 금년의 한재는 비록 각도(各道)가 같지 않은 점이 있었으나, 한마디로 결론지어 말하면 흉황(凶荒)이라고 할 수 있다. 곡식이 조금 잘 여문 해서(海西)에 이르러서도 근래 홍수의 재앙 때문에 또한 흉년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으니, 불쌍하고 딱한 저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 한 지아비가 제 살곳을 얻지 못하면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은 오히려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는데, 더구나 이렇게 몇 만 명의 생령(生靈)들이 기근을 면치 못하여 떠돌게 되었는데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내가 부덕한 탓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초래하여 죄없는 백성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주야로 두려워서 밥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밤새도록 촛불을 밝히고 연일 고요히 생각하여 보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나라에 백성이 없으면 어떻게 나라라고 할 수 있겠으며 곡식은 백성의 목숨인데 백성이 곡식이 없으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옛날 우리 선조(先朝) 갑인년170) 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렸으나 오늘날처럼 더욱 급박한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다친 사람 보살피듯 하고 갓난아기 보호하듯 하는 정사를 딱하게 여기는 지극히 간절한 마음으로 행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대정(大政)이 팔도(八道)의 억조 창생들에게 넘쳐흘렀으니, 우리 해동(海東)에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신민(臣民)들 그 누가 감격하여 보답하려 하면서 잊지 못하는 생각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아! 대성인(大聖人)께서 백성을 위하시는 성념(聖念)이 지극하고도 극진하였다. 금년은 본도(本道)의 흉황이 갑인년보다 더욱 극심하게 생겼으니, 진실로 백성에게 이로움이 있는 것이라면 내가 무엇을 아낄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는 계술(繼述)하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인데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에 내탕전(內帑錢) 2만 냥(兩), 호초(胡椒) 1천 두(斗), 단목(丹木) 5천 근(斤)을 내놓겠으니, 호남에는 돈 1만 냥, 호초 4백 두, 단목 2천 근을, 호서에는 돈 5천 냥, 호초 3백 두, 단목 1천 근을, 경기에는 돈 3천 냥, 호초 2백 두, 단목 1천 근을, 화성에는 돈 2천 냥, 호초 1백 두, 단목 1천 근을 나누어 주라. 호남에서 진상하는 가미(價米)171) 를 정퇴(停退)시키는데 삼등(三等)의 읍은 물론이고 제류(除留)172) 시켜 하송하며, 호서에서 진상하는 가미는 흉년이 더욱 심한 읍에 대해서 또한 제류시켜 하송하도록 하라. 그대들은 내가 부덕하다는 것을 탓하지 말고 구중 궁궐이 멀다고 여기지 말고서 각기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고 각기 자신의 힘을 끝까지 다하여 경솔히 향정(鄕井)을 떠나지 말며, 서로 선동하여 원망과 수심에 잠기는 일이 없이 친척과 이웃이 서로 면계(勉戒)하고 서로 구조(救助)하여 생활을 안정하기 바란다. 그리하여 몸에 괴로운 것이 있으면 수재(守宰)에게 말하고 도신(道臣)에게 의논하며, 도신과 수재 역시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구제하게 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대들로 하여금 죽어서 구렁에 나뒹구는 환란이 없게 할 것이니, 그대들은 각기 굳게 믿고서 내년의 풍년을 기다리도록 하라. 상천(上天)은 지극히 어질고 인자하니 또한 어찌 우리에게 내년에는 많은 곡식을 수확하는 풍년을 내리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심복(心服)에서 우러난 고명(誥命)을 분명히 잘 들으라. 이로부터 생각하건대, 도둑이 발생하는 환란이 이런 때에 많이 발생하는 것이니, 도백(道佰)은 이런 뜻을 알고서 영장(營將)과 각 고을에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토포(討捕)하는 책무를 극진히 하여 감히 해이한 마음을 지니는 일이 없게 하고 감히 평민(平民)을 침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조가(朝家)에서 또한 어찌 특별히 염찰(廉察)하는 방도가 없겠는가? 이 또한 흉황이 들었을 적에 백성을 위하는 한가지 방도인 것이니, 아울러 알기 바란다."
하였다.
11월 27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감제(柑製)를 설행하였는데, 으뜸을 차지한 남로(南潞)에게는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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