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기유
소대(召對)하고 《시전(詩傳)》 치효장(鴟鴞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골육(骨肉)의 변고034) 를 만났지만 능히 성의(誠意)로써 성왕(成王)을 감동시키고 또한 지성으로 보필함으로써 주(周)나라의 문물(文物)이 번성하여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주공의 공이었다. 그리고 성왕이 치효의 시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잘못을 뉘우치고 〈주공을〉 친히 성문 밖에서 맞이하였으니, 8백 년 주나라의 기업(基業)이 실로 성왕이 한번 잘못을 뉘우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그런즉 주공의 정성이 아니었으면 성왕이 아무리 현덕(賢德)이 있다 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지 못했을 것이고, 성왕의 현명함이 아니었으면 주공이 아무리 지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감동시키지 못했을 것이니, 주공의 정성과 성왕의 현명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하자, 시독관(侍讀官) 이지연(李志淵)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소대(召對)로 인하여 옥당 이동환(李東煥)이 아뢴 바에 〈《시경(詩經)》의〉 거린장(車隣章)을 인용해 힘쓰도록 진달한 수조(數條)는 본뜻을 충분히 추이(推移)하고 부연(敷演)함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묘당(廟堂)의 업무를 더욱더 힘쓰도록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 아래 빈풍(豳風)의 시장(詩章)에 대한 강(講)을 통하여 특별히 농사를 염려하게 하였다.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은 오로지 세초[歲頭]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관찰해야 한다. 이 뜻을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에 공문을 보내어 강연(講筵)에 임하여 〈《시경》의〉 장구(章句)와 구(句)를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간절하게 백성을 염려한 뜻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년은 바로 인선 성후(仁宣聖后)035) 가 가례(嘉禮)를 행한 지 세 번째 맞는 회갑이다. 능[仙寢]에 거둥하여 조금이나마 미미한 정성을 펴고 싶지만, 거리가 좀 멀어서 비록 생각대로 가서 살펴보고 전알(展謁)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정성을 펴는 의식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니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예당(禮堂)과 의논하고 널리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지금에 적합하다고 할 만한 예(禮)를 신중하게 논의하여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재작년에 각도의 모든 백성들의 고통을 기록하여 아뢰도록 한 명이 있었으며, 여름에 차례로 등문(登聞)한 것들을 묘당(廟堂)에 내려 보내어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하였는데, 지금 이미 한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한 가지 폐단이나 한 가지 고통을 바로잡거나 소복(蘇復)하도록 품처함이 없으니, 어떻게 처음 생각했던 본래의 뜻이 있다고 하겠는가? 위에서부터 이미 강령(綱領)을 제시(提示)하였으니, 그 소소하고 미세한 것들은 묘당에서 스스로 담당하여 의견을 들어서 초기(草記)하고 변통하기 바라니, 이 점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일 경술
소대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예조의 당상관과 함께 해조(該曹)의 상고할 만한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였더니 선조(先朝) 을묘년036) 에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탄강(誕降)을 여덟 번째 맞는 회갑이라고 하여 정릉(定陵)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한 일이 있고, 또 기미년037) 에는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주량 회갑(舟梁回甲)038) 이라고 하여 온릉(溫陵)에 대신을 보내어 작헌례를 섭행한 기록이 있는데, 모두 특별 하교로 인해서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한 것입니다. 이번에 인선 성후(仁宣聖后)의 가례(嘉禮)를 세 번째 맞는 회갑의 해를 당해서 작헌례를 섭행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을묘년과 기미년에 이미 시행한 전례를 모방하여 시행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적합할 듯합니다. 즉시 해조로 하여금 날짜를 가려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황단 제향(皇壇祭享)의 모든 절목(節目)에 대하여 열성(列聖)께서 정성과 공경이 극진하시어, 일무(佾舞)·아악(雅樂)·기복(器服)이 깨끗하지 않은 것은 모두 보충하여 만들도록 하시고, 종고(鍾鼓)·관약(管籥)·간척(干戚)·적모(翟旄)를 정돈하여 가지런하게 하셨다. 해진 복장이나 찢어진 의상이 춤출 때 뒤섞이어 잡된 모습이 지극히 공경하는 처지에 의용(儀容)을 잃었다. 이로 인해서 생각하니, 그 반열에 참가하는 무사가 어떻게 군복 차림으로 반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도 임시로 관복(冠服)을 착용하게 하라."
하였다.
3월 3일 신해
소대하고 《시전(詩傳)》 벌가장(伐柯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장에서 ‘도끼 자루를 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끼가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대저 도검(刀劒)의 종류 가운데에도 쓸 만한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도끼를 가지고 도끼 자루를 벤다고 말한 것은 대체로 기구의 쓰이는 바가 각기 합당한 것이 있음을 이르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관찰하건대, 주공(周公) 이전의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을 한정할 수 없지만, 요·순·우·탕[唐虞夏殷]이 요·순·우·탕이 될 수 있었던 까닭과, 문왕·무왕·성왕·강왕[文武成康]이 문왕·무왕·성왕·강왕이 될 수 있었던 까닭에서부터 한(漢)·당(唐)의 중주(中主)가 한·당의 중주가 될 수 있었던 까닭에 이르기까지, 또한 어찌 이와 다름이 있겠는가? 모든 일이 저마다 그 직분에 맞아야 함을 볼 수 있다. 한·당의 중주 또한 요(堯)·순(舜)이나 삼대(三代)039) 처럼 하겠다고 스스로 기약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또한 후세의 사람들이 한나라와 당나라의 정치를 논하면서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주로써 그것을 보는 데 불과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나라와 당나라의 정치는 한나라와 당나라의 정치로 그칠 뿐이며, 그 당시 신료(臣僚)에 있어서도 역시 한나라와 당나라를 받들어 도운 신하로 족할 뿐이다. 다만 정관(貞觀)의 치(治)040) 를 낳다고 하지만 태종(太宗) 또한 어찌 요순이 본받을 만하며 걸주(桀紂)가 경계할 만하다는 것을 몰랐겠는가마는, 후세의 사람들이 태종에 대하여 역시 태종으로 보는 데 불과하다. 또 태종이 평생토록 스스로 기약한 것이 성왕(聖王)의 극층 지위(極層地位)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행한 정사(政事)의 규모에 있어서 후세에 채택할 만한 것 또한 정관의 치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각신(閣臣) 이광문(李光文)이 아뢰기를,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주가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주로 그치게 된 것은 삼대(三代)의 도를 행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주가 잘 다스리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각기 그들의 방법 때문일 뿐이다. 공자(孔子)가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행하려던 마음을 가지고도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도(道)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체로 신룡(神龍)이 물에 잠겼다가 하늘을 날고 하는 변화가 모두 그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天地)의 운수는 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이 없으며, 성인이 계속 일어나서 그 도를 서로 전하였으니, 어리석은 사람들조차도 성인의 도를 알게 하였다. 그렇지만 왕도가 끝내 전국 시대에는 시행될 수 없었으니, 하늘의 운수가 쇠약해지고 사람의 마음 또한 쇠해져서 진작시키고 발휘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겠는가?"
하였다.
3월 4일 임자
소대하고 《시전(詩傳)》 녹명장(鹿鳴章)과 천보장(天保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진강(進講)한 여러 시(詩)는 모두 훌륭하지만, 천보장 한 편은 찬송하고 기도하는 뜻을 많이 말하였다. 대저 인군이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며 뭇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신하를 예의로 대우하면, 신하 또한 당연히 그 임금이 덕에 힘쓰도록 해서 우리 임금이 요(堯)·순(舜)과 같이 되기를 기대하며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며, 하늘의 감응(感應)은 단지 인군의 덕이 어떠한가에 관계될 뿐이다. 그런데 시인(詩人)이 우선 힘쓰도록 진달하지 않고, 반드시 일월(日月)이나 송백(松柏) 등의 말로 축원한 것은 너무나 사실보다 과장한 데에 관계되고 삼대(三代) 이전에는 이런 기풍이 없었던 듯하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같은 이 또한 영명한 군주라고 칭송하지만, 선유(先儒)가 오히려 한나라의 덕이 쇠약해져서 문제(文帝) 때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지금 이 시인의 찬송과 기도는 오히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때에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하자, 시독관 이지연(李志淵)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으로 군상(君上)이 내려 주는 것을 받고 그 원충(願忠)과 애대(愛戴)의 마음으로 복록을 송축한 것은, 후세에서 아첨하며 잘 보이려 하는 기풍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3월 5일 계축
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경연(經筵)에서 유신(儒臣)이 아뢴 것을 듣고 생각하니 농사짓고 누에 치는 것은 백성을 기르는 긴요한 밑바탕인데, 농작물을 북돋우어 기르는 데에 윤택하고 번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늘에서 비를 고르게 내리는 데 달려 있지만, 일을 시작하고 업적을 이루는 것은 또한 수령들의 감독과 경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며칠 전 전교(傳敎)에서 〈수령의〉 칠사(七事) 가운데 세 조목만을 제시하여 거론하였다. 그러나 이번에 경연에서 아룀으로 인하여 다시 칠사의 첫 번째 것을 유시하니, 각도의 방백(方伯)은 유념해서 대양(對揚)하고, 오는 가을에 〈필요한〉 의복(衣服)과 포백(布帛)의 물자를 보존하는 일에 힘쓰도록 묘당(廟堂)에서 공문을 보내어 분부하게 하라."
하였다.
3월 6일 갑인
소대하였다.
삼일제(三日製)를 반궁(泮宮)에서 설행하였다.
3월 7일 을묘
주강하였다. 특진관 훈련 대장 이득제(李得濟)가 아뢰기를,
"재물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소비를 줄이는 것이 낫습니다. 본국(本局)의 하도감(下都監)은 바로 공장(工匠)이 입역(立役)하는 곳인데, 달마다 차하(上下)041) 하는 그 숫자가 적지 않고 아닌게 아니라 한정이 없습니다. 조총(鳥銃)·화약(火藥) 양색(兩色)의 낭청(郞廳) 및 각소(各所)의 감관(監官) 4인은 모두 쓸데없는 직제이니, 이 뒤로는 궐원(闕員)이 생기더라도 거기에 대신할 사람을 보충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시(庭試)와 무과 초시(武科初試)를 베풀었다.
3월 8일 병진
소대하였다.
3월 9일 정사
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참찬관(參贊官)이 등연(登筵)하여 글뜻을 낱낱이 거론하며 며칠 전 위에서 글뜻이 잘 통하지 않는 것을 누누이 진주(陳奏)하였는데, 말이 마음 속에서 곡진하게 나왔으니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날 위에서 하교한 것은 대체로 ‘요(堯)·순(舜)의 자품(姿稟)은 본래 성스럽고 한(漢)·당(唐) 중주(中主)들의 자품은 본래 나약하다. 그러므로 요순은 성스러우면서 더욱 성스럽게 되고, 한·당의 군주는 그들이 분발하여 진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약한 데서 더욱 나약하게 되었다. 그래서 후세의 공심(公心)으로 관찰하면, 요순의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정치에 있어서 아무리 요순이 그들의 성스러움을 사양한다 하더라도 천하가 모두 칭송하는 것을 빼앗을 수 없으며, 한·당의 경우는 한 가지 정치와 한 가지 일에 있어서도 이미 마음에 용솟음쳐 놀라서 움직이지 못하였으니 한·당의 칭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요순은 저절로 요순이 되는 것이며, 한나라와 당나라는 비록 천만세(千萬世)를 거친다 하더라도 결코 요순이란 이름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의 뜻은 한나라와 당나라는 이로부터 말세이니, 한나라와 당나라 이후로 세상의 풍속이 낮아지고 미미해져서 요순에다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정사를 움직임에 있어서도 하늘의 법칙에 합하기만 한다면, 요순처럼 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며칠 전의 하교는 단지 후세의 공심으로 관찰하여 논하였을 뿐이다. 어찌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데로 나아가겠는가? 며칠 전의 연설(筵說)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번(下番)인 옥당이 분명히 알지 못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두세 번 밝게 깨우쳐 준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만약 참찬의 말과 같다면, 당일 글뜻의 본의와는 조금 다르다. 며칠 전 연설(筵說)을 입계(入啓)한 뒤에 기주(記注)를 취해서 보았더니 정말 참찬의 뜻과 같았다. 주서(注書)의 직책은 진실로 본래의 하교를 실제대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할 뿐인데, 어찌 감히 상세하고 극진하게 하지 않았는가? 이 연설을 후세에 전하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의 체모가 너무나 미안(未安)하니, 해당 입시 주서(入侍注書)는 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여 상교(上敎)의 체모가 중엄하고 연설의 지엄한 것을 알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생각하건대, 이 뒤로는 위에서 만약 송(宋)나라 신종(神宗)의 비상(非常)한 하교보다 지나친 것이 있더라도 오직 담당한 좌우의 사관(史官)이 기록하여 명산에다 소장하고, 주서는 기록해서 승정원 일기(承政院日記)에 기재하게 하라. 이것은 비록 인군(人君)의 위엄이라 하더라도 흔들리게 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간에 대저 임금의 잘못에 영합한 죄와 임금의 잘못을 조장한 죄와 임금의 말을 잘못 듣고서 만세에 누를 끼치는 것 또한 죄가 없을 수 없다. 이 하교는 오늘날 글뜻에서 연유한 바일 뿐만 아니니, 승정원(承政院) 및 당후(堂后), 예문관(藝文館)에서는 이 뜻을 알아 모든 대소 정령(政令)과 일동 일정(一動一靜)을 모름지기 곧바로 사실대로 써서 광명함을 얻도록 힘쓰는 일을 상세히 마음에 새겨 알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금 전에 전교(傳敎)한 뒤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근래의 연설(筵說)에서 여러 신하가 아뢰는 내용에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많이 있어 한 학설 가운데는 몇 달 동안 생각하고서도 짤막한 주(註)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모일(某日)의 등연(登筵)에서는 비록 생각을 쌓고 헤아리기를 오래하도록 하였지만 그 학설의 절반에서 그치고야 말았을 뿐이니 허다한 이야기들을 어찌 이와 같이 아름답게 꾸미려 하겠는가? 또 근래의 연설을 들으니 제신이 경연에서 물러난 뒤에 조목과 양식을 열거하여 초(草)를 만들어 간통(簡通)하고 당후(堂后)에 보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록 한 글자나 한 마디의 말이라도 결단코 보태거나 줄이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기주(記注)의 본래 뜻이 있겠는가? 이것 또한 주서(注書)가 몰라서는 불가하니 오직 진실을 기주함이 마땅하다는 뜻을 승지가 거듭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0일 무오
명릉(明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제(親祭)하였으며, 이어서 익릉(翼陵)·경릉(敬陵)·홍릉(弘陵)·창릉(昌陵)과 순회묘(順懷墓)에 나아가 전알하였다.
3월 11일 기미
주강하였다.
3월 12일 경신
주강하였다.
3월 13일 신유
주강하였다.
예조 판서 김희순(金羲淳)을 파직하고, 병조 판서 이면긍(李勉兢)은 월봉(越俸)042) 1등(等)하며, 선전관 김익빈(金益彬)·이억(李檍)은 충군(充軍)하도록 명하였는데, 능에 행차할 때, 순회묘(順懷墓)에서 경릉(敬陵)으로 나아갈 때에 기고(旗鼓)와 시위(侍衛)가 잘못 명릉(明陵)으로 향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번의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생각하니 대저 능(陵)과 원(園)과 묘(墓)는 본래 차서(次序)가 있다. 그래서 한 국내(局內)의 능침(陵寢)에 모두 전배(展拜)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그 전배하는 차례 또한 당연히 능침의 차례대로 삼가 따라야 할 텐데, 이번의 거행은 실로 어떠하였던가? 이 뒤로는 한 국내에 모두 전배할 경우, 한 국내의 능침에 대한 전배도 역시 차례를 따름에 있어 신중하고 사의에 맞도록 하라. 간혹 같은 국내에 가야 할 묘침(墓寢)이 있는데 묘가 능과 간혹 선후(先後)의 차례가 있으면, 삼가 돌아왔다가 되돌아가는 것에 구애되지 않아야 마땅하다. 또 간혹 능침의 묘침에 대한 차례가 묘침이 먼저고 능침이 뒤인 경우가 있으면, 전배는 본래 묘침에 먼저하고 능침을 나중에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도 도로 사정이 불편하다면 역시 이 사례에 구애될 것 없이 단지 능묘의 차례만을 따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형국(形局)은 둘인데, 그 첫째 국내의 능침 가운데서 둘째 국내의 능침에 대하여 차례가 뒤에 해당하면 자연히 차례에 구애 받지 않고 먼저 해당 국내의 여러 갈래의 차례를 따를 것을 예조(禮曹)에서는 모두 잘 알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능침에 전알(展謁)하는 예(禮)는 결단코 차례를 삼가 따르고 감히 어기거나 뛰어넘지 말도록 해야 한다. 서오릉(西五陵)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의당 먼저 창릉(昌陵)에 전알하고, 다음에 경릉(敬陵)에 전알하며, 이어 순회묘(順懷墓)에 전알하고 다음에 익릉(翼陵)에 전알해야 한다. 하지만 길을 빙 둘러서 가야할 경우는 논할 수가 없다. 이것은 대체로 동일한 국내(局內)에서는 단지 차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친제(親祭)하는 경우에 있어서 차례에만 구애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가령 이번의 명릉(明陵)에 친제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먼저 명릉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에 창릉과 경릉에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또 더러 각능을 두루 전알하면서 길이 서로 어긋나고 분명히 두 개의 형국(形局)으로 되어 있는 경우에, 전적으로 차례만 따르는 것은 부당하다. 만일 동서(東西)의 제릉(諸陵)에 모두 전배한다는 명이 있으면, 동릉(東陵)에 모두 전알한 연후에 다시 서릉(西陵)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겨우 동릉의 한 위(位)에 전알하고 다시 서릉의 한 위에 전알하며, 또 동릉으로 나아갔다가 서릉으로 나아갔다가 하면서 잗달게 왕래하여 한갓 일의 체면만 손상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순회묘에 대한 전배를 명릉에 앞서 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능과 묘에 경중의 분별이 없는 것 같다고는 하지만, 순회묘는 세대가 이미 높고, 또 지나면서 전배하는 것이 편리하여 이 두 가지를 겸했으니, 편리한대로 지나면서 전배하여도 어떠한 단서는 없을 듯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바야흐로 봄 날씨가 온화한 때에 초목과 뭇 생물들이 모두들 절로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팔도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는 필시 매우 곤궁하게 신고(辛苦)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다. 과인이 덕이 없어 은혜가 백성들에게 충분하지 못하고 혜택 또한 펴지지 않았으니, 소간(宵旰)043) 의 사념(思念)에 매우 걱정스럽고 답답하다. 아! 한 도내에도 일의 폐단이 허다하여 낱낱이 거론하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팔도의 뭇 백성들에게 폐막(弊瘼)이 많은 것에 있어서이겠는가? 연초에 나의 본뜻을 제기한 것이 많았고, 방백(方伯)과 수령에게 하교하였으며, 그 뒤에도 만약 대양(對揚)하지 않는다면 그 죄를 장차 어떻게 해야 특별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도록 할 것인가를 매일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옛날 영고(英考)044) 께서 위사(衛士)로 시골에 살고 있는 자를 불러들여 〈병폐를〉 물어보고 환하게 아셨던 일이 지금도 역사에 실려 있기까지 하니, 바로 오늘날에 본받아 계술(繼述)해야 합당하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시골 주민으로 위사에 편입되거나 소속된 자를 크게 모아 일일이 알아 듣게 위무하고 여러 가지 폐단을 모두 말하게 하여 사리를 따져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 전좌(殿坐)했을 때, 소차(小次)에 출입할 즈음에는 시위(侍衛)가 반드시 국궁(鞠躬)하여 몸을 굽혔다 펴는 규례가 있다. 옛날에는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단지 꿇어앉을 뿐이었다. 더구나 갑옷을 착용하고는 절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는데야 더 말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선조(先朝)에서 친히 윤음(綸音)을 지어서 내렸으니, 이것은 후세에서 본받을 만하다."
하자, 승지 이석하(李錫夏)가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대가(大駕)가 움직일 때에 백관(百官)들에게 지영(祗迎)하게 하는데 땅에 엎드리지 말고 단지 경절(磬折)045) 하게 했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관이 지영하면서 설사 부복(俯伏)을 한다 하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겠으나, 지금 이처럼 시위가 몸을 굽히는 것은 도리어 체모(體貌)를 손상시키는 것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하겠는가? 지금부터는 계속해서 옛날의 제도를 신명(申明)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이 밝았으니, 조회하는 이들이 이미 많이 모였겠지요?’라고 하였다. 승정원의 출근[仕進]은 본래 해당 규례가 있는데, 근래에 승지들의 출근이 전혀 조금도 빨라지지 않으니, 이 뒤로는 각별히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갈대가 푸르고 푸른데 흰 이슬은 서리가 되어 가네.’라고 하였다. 국가를 소유하고 있는 이는 신의가 없어서는 안된다. 해마다 내려오면서 각도에서 마땅히 천거할 만한 인물들을 등문(登聞)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전조(銓曹)에서 즉시 발탁하여 임용하지 않는 것은 실로 매우 민망하고 한탄스럽다. 승정원에서는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아서 전조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관방 중진(關防重鎭)과 풍패 고향(豊沛故鄕)에 문사(文士)와 무사(武士)가 많다면, 전조(銓曹)에서 기용하지 않는 것을 어찌 용납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진실로 이 뜻을 본받아 진작시키고 면려하기를 기약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윤대(曹允大)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월 14일 임술
주강하였다.
3월 15일 계해
주강하였다.
한림 권점(翰林圈點)046) 을 【별겸춘추(別兼春秋) 이광문(李光文)·홍경모(洪敬謨)·이기연(李紀淵)이다.】 행하였는데, 3점(點)에는 이용수(李龍秀)·박제문(朴齊聞)이었다.
3월 16일 갑자
경과(慶科) 정시 문과(庭試文科)를 경복궁(景福宮)에서 설행하여 이승렬(李升烈) 등 20인을 뽑았으며, 무과(武科)를 모화관(慕華館)에서 설행하여 홍우항(洪禹恒) 등 1백 90인을 뽑았다.
주강하였다.
김이익(金履翼)을 예조 판서로, 김노응(金魯應)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다. 백성들에게 입고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작하는 집은 하나인데 먹는 집은 열 집이며, 심는 집은 하나인데 입는 집이 열 집이면,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 젊은이나 늙은이나 역시 의뢰할 데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성제(聖帝)·명왕(明王)이 항상 염려했던 바이고 백성들은 이것을 연유하여 살아가는 것이니 어찌 믿지 않겠는가?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기만 하면서 편안하게 살도록 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짐승과 가깝게 된다.’라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예(禮)의 큰 것이고, 이웃과 화목하며 벗과 친하는 것은 예의 중간이며, 일에 종사하고 노력하는 것은 예의 끝부분이다. 이 세 가지의 뜻을 알면 국가가 안녕되고 백성이 편안해진다. 진실로 이 연유를 살펴 보면 실제로 먹고 입는 것이 넉넉한 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또한 전적으로 배만 부르게 하거나 몸만 따뜻하게 하면서 세 가지의 뜻을 소홀히 할 수 없음도 분명하다. 그런데 근년으로 오면서부터 백성들이 이 세 가지 뜻을 소홀히 함이 있으니 패(牌)를 훔쳐 관아를 범(犯)하는가 하면 각 지방마다 소송하기 좋아하는 어지러움을 결단해야 하는 일이 자주 있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실로 극히 한심스럽다. 그것을 바로잡아 깨끗이 소제하고 변혁시키는 방법은 더욱 농사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돌보며 면려하는 데에 달려 있다. 그리고 예의(禮義)를 지극히 어리석은 뭇 백성들에게 크게 펼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시급한 업무가 되기 때문이다. 아! 그대 제도(諸道)의 방백(方伯)과 유신(留臣)들은 이 뜻을 체득하여 빨리 조심스럽게 염려하고 받들어 시행할 일을 생각하라. 그리고 승정원에서는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유시(諭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며 이에 〈문왕의 유업을〉 보존하리라.’고 하였는데, 하늘의 위엄이 어떻게 두렵지 않고 또 겁나지 않겠는가? 지난 역사를 두루 상고하여 보면 재앙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기록하였는데, 요즈음에는 비록 더러 재이(災異)의 비상(非常)한 것이 있었지만 서운관(書雲觀)에서 한 번도 경고가 없으니, 이는 대체로 재이를 숨기려고 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나 홍관(虹貫)047) 등의 현저한 변고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기록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모두 그것을 알지만, 그 나머지의 재이는 모두 〈글로〉 적어서 보이지 않으니, 이것은 옛날 사람이 재이를 반드시 적어서 수양하고 반성하도록 한 아름다운 뜻이 전혀 없는 것이다. 서운관에서는 이러한 뜻을 경건히 본받아서 무릇 찰망(察望)할 즈음에 십분 이러한 재이와 이러한 변고는 혹시라도 〈기록하기에〉 어떻겠는가 하지 말고, 사실대로 바로 기록하도록 힘쓰기를 기필코 명심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열성(列聖)의 어제(御製)와 어훈(御訓)은, 실로 뒤를 계승한 임금이 공경히 귀감으로 삼아 본받아야 할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금원(禁苑)에 봉모당(奉謨堂)을 세우고 서원(西院)에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였으니, 훌륭한 훈계와 아름다운 규례가 오늘날에 더욱 절실하다. 송(宋)나라 때 신하 범조우(范祖禹)가 말하기를, ‘요(堯)·순(舜)을 본받으려거든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아! 그대 내각(內閣)과 홍문관(弘文館)의 유신(儒臣)들은 우러르고 공경하여, 모름지기 경연에 나아갈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열성조(列聖朝)의 제훈(製訓)을 들어 글뜻을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태묘(太廟)의 향사(享祀)는 그것이 얼마나 신중하고 엄숙한 것인가? 옛날 영고(英考)께서 살아 계실 적에는 늘 분주히 하면서 태만함이 있을까 염려하시고, 결(玦)을 패용(佩用)하고 추창(趨蹌)할 즈음에 엄중히 하셨으며, 강신[灌鬯]하고 진퇴하는 절차를 경계하셨는데, 우리 영고(寧考)048) 에 이르러서는 그 지극한 뜻을 계술(繼述)하시어 비록 식견이 없는 수복(守僕)의 무리에게도 또한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조심하고 겁내는 마음을 알도록 하셨다. 소자(小子)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 밤낮으로 살피고 두려워하였으나 감히 띠를 늦추고 태만한 모습으로 전호(殿戶) 가운데서 주선(周旋)함이 없었다. 아! 태묘(太廟)의 제거(提擧)는 그 직분을 다하여 마음에 잊지 않는 마음으로 주(註)하고 찬(贊)하라."
하였다.
3월 17일 을축
주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각도의 도천(道薦)을 발탁하여 기용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고, 또 의정부의 망단(望單)에, 침랑(寢郞)049) 을 전교(傳敎)한 후 의입(擬入)한 것이 있었는데, 전조(銓曹)에서 나의 뜻을 받들어 거행한 것이니, 실로 감탄스럽고 아름답다. 이와 같이 행정을 집행해 간다면 무슨 일인들 빛나지 않겠는가? 이로 인해서 생각해 보니 각도에서 무사를 뽑아서 올리도록 처음으로 〈제도를〉 마련했던 법의(法意)는 지극히 엄중하였다. 그런데 잇달아 해도(該道)에서 선발한 것이 도리어 중식(中式)에도 미치지 못하여 도로 내려 보내는 자가 있으니, 그전처럼 태만히 하거나 소홀하게 하지 말고 성실한 마음으로 선발해서 국가에서 초야의 인사를 기용하는 뜻에 보답하도록 하는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무 전경(文武專經)은 실로 아름다운 규정이다. 내가 언젠가 전(殿)에 나아가 강(講)을 받으면서 장구(章句)의 현토(懸吐)와 해석에 대한 그들의 거조를 보니 너무나도 전체적인 이해력이 부족하였는데, 은미한 말이나 심오한 뜻을 더욱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는가? 아! 유생(儒生)들이 등불 앞, 창문 아래에서 여러 해 동안 신고(辛苦)하고도 백발로 늙어 죽을 때까지 과갑(科甲)에 오르기 어려운 것은, 오히려 법식(法式)이 너무나 엄격한 소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이 젊고 혈기가 왕성한 문무(文武)의 소관(小官)으로 입고 먹을 것이 풍부한 경우에 있어서는, 무슨 걱정이 있길래 갑자기 한번 급제하고는 그 강업(講業)을 폐기하는가? 만약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문을 닫고 이학(理學)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현의 뜻을 강구(講究)하여 말을 실천하고 행동을 돈독히 하며 예의(禮義)의 방도를 수사(修事)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와 같이 추졸(醜拙)함이 드러났겠는가? 지금 이후로 문무의 3품(品) 이하의 전경(專經) 강독에 응해야 할 자에 대하여 시험을 주관하는 명관(命官)은 그 글뜻을 통창(通暢)하지 못하고, 대답하는 내용에 있어 군색하게 꾸며대는 자를 구분하여, 엄격히 경금(警禁)을 더하여 잘못되는 폐단이 없도록 할 것이며, 문신 또한 통렬하게 스스로를 꾸짖어 깊이 분발하고 면려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라. 그리고 무신(武臣)은 무릇 당직(當直)으로 근무지에 나아가는 날에는 역시 기필코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여러 차례 숙독하되, 한갖 금고(金鼓)나 도창(刀槍)만을 위주로 하려는 생각을 말고, 안팎 정조(精粗)한 부분을 깊이 생각하여, 나라를 위해서 힘을 다하고 임금 섬기는 도리를 통달하게 일을 예조와 병조에서는 명심하라. 문신에 대하여 경계하는 하교를 무신보다 더하는 것은 문신이 실상 무신보다 중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3월 18일 병인
주강하였다.
김이도(金履度)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태학(太學)050) 은 현사(賢士)가 참여하는 곳으로 덕성(德性)을 기르고 몸을 수양하는 근본이 되는 곳이다. 세상에 현사가 없으면 부지하기 어렵고, 사람에게 덕성이 없으면 발췌(拔萃)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태학의 제사(諸士) 가운데 과연 국가에서 의뢰할 수 있고 기질이 발췌할 만한 정도로 무리 가운데서 뛰어난 자가 있겠으며, 장차 후세에 권장하고 발탁할 때에 제제(濟濟)하고 아름다운 선비가 있겠는가? 오늘부터 경계하고 분발하여 책을 읽음으로써 몸소 행하고 지조를 지키어, 어버이를 사랑하고 성인을 높이는 도리의 밑천을 삼아야 할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모두 시작은 잘 하지만 끝마무리를 잘하는 이는 드물다.’라고 하였으니, 오래도록 지극한 가르침을 준행하여 영원토록 아름다움을 미쁘게 하라. 반장(泮長)051) 이 박사(博士)·장관과 함께 비천당(丕闡堂)에 가서 유생들에게 선유(宣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서(關西)는 예의가 바른 지역으로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보급되어 오늘날까지 백성들이 따르고 믿음으로써 억만년토록 기반이 튼튼하여 뽑혀지지 않은 업적이 후세에 드러났으니, 이것이 어찌 기자(箕子)의 공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 조정의 의관(衣冠)과 문물이 찬연하게 갖춰지고 혁연(赫然)하게 융성한 것은 또한 어찌 기자의 공이 아니겠는가? 옛날 영고(寧考)052) 께서 계실 때에 여조(麗朝)의 각릉(各陵)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지금 평안 감사가 받들어 거행하게 할 것이 더구나 기자전(箕子殿)인데, 여조(麗朝)와 비교할 때 백 배가 될 뿐이겠는가? 예문관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문(祭文)을 짓게 하여 관서로 내려 보내고 숭인전(崇仁殿)에서 제사를 마련하게 하되, 도백(道伯)이 직접 헌관(獻官)이 되고 여러 집사관(執事官)들도 각기 스스로 성의를 다하여 재계하고 깨끗이 해서 경례(敬禮)를 다하게 할 일을 예조는 잘 알고 본도(本道)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9일 정묘
북원(北苑)에 나아가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였다.
3월 20일 무진
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오위(五衛)의 옛날 제도를 비록 다시 설치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대궐 안에 총부(摠府)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으니 법의(法意)가 있는 바에야 그것을 혁파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근래에 이른바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라는 것은 명색(名色)은 좋지만 조잔(凋殘)하기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호령(號令)을 행하고 가까이서 숙위(宿衛)한다는 뜻이 전혀 없으니, 지금부터는 더욱더 수거(修擧)하도록 하라. 그리고 사소(四所)에서 순경(巡更)하는 것에 대하여 논한다면, 한결같이 정유년053) 의 예를 따른 뒤에 또 비록 다시 설치하였다 하더라도, 그 군인들의 복색을 살펴 보면 실로 놀랄 만하니, 어찌 이와 같은 의제(衣制)를 숙위에 가까이 하도록 할 수 있겠는가? 병조에 영을 내려 한결같이 궐문(闕門) 기병(騎兵)의 예(例)대로 의건(衣巾)과 패도(佩刀)를 만들어 지급하게 하고, 석갑(錫匣)과 철장(鐵杖)을 소지하게 하며, 부장(部將) 또한 모사(帽紗)로 된 짧은 군장(軍裝)으로 왕래하게 할 것을 철저히 신칙하라."
하였다.
충신 조청로(趙淸老) 및 그의 아들 조영서(趙榮緖)에게 정려(旌閭)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은 예조에서 유생의 상언으로 인하여 조청로의 부자가 단종조(端宗朝) 육신(六臣)이 화를 입는 날에 자신의 몸을 버려 의리에 순절(殉節)하였으니, 합해서 포전(褒典)을 시행해야 한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3월 21일 기사
주강하였다.
하교하기를,
"팔도 백성들의 큰 병폐와 깊은 폐단을 상세히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염려하고 불쌍히 여겨, 각 해당 도의 도신(道臣)과 사도(四都)의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조목을 나누어 글을 짓게 해서 조용할 때에 늘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을 분부하였다. 격례(格例)는 차자(箚子) 모양과 같이 하되, 강령(綱領)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마련하라는 뜻을 위주로 하여 일체로 자세히 알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經界)에서 시작된다. 제언(堤堰)을 수축(修築)하는 그 규정은 실제로 훌륭하며 지난번 호부랑(戶部郞) 또한 아뢴 바가 있었으니 각별히 각도에 거듭 경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2일 경오
주강하였다.
지경연(知經筵) 홍의호(洪義浩)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 정시(庭試)에 신의 족손(族孫) 홍원모(洪遠謨)가 이름을 홍귀하(洪龜遐)라고 고쳐서 과방(科榜)에 욕되게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친 이름 중〉 위의 한 글자가 원대(遠代) 조상의 휘(諱)를 범하였으므로 신의 제종(諸宗)으로 놀랍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이름으로 응방(應榜)하게 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본래의 이름으로 되돌리게 하고 이어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의죄(議罪)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일이 진실로 망령되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니, 참작하고 분간(分揀)해서 그전 이름으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3일 신미
소대하였다.
하교하기를,
"옥수(獄囚)에 대한 처결이 많이 지체되어 매우 불쌍하고 염려스럽다. 형조로 하여금 심리(審理)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4일 임신
소대하였다.
3월 25일 계유
소대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明)나라의 정치를 한(漢)나라의 정치와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자, 참찬관(參贊官) 민기현(閔耆顯)이 아뢰기를,
"한나라 고제(高帝)가 창업(創業)한 초기에는 법(法)을 삼장(三章)으로 간략하게 하였으므로 규모(規模)가 관대하고 풍류가 독후(篤厚)하였으니, 서한(西漢)의 정치는 후세에서 미치기 어려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의 문물은 찬연히 구비되었으니 성당(盛唐) 때와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그리고 문식(文飾)과 질박(質朴)을 가지고 논한다면 질박 쪽에 가까운가? 문식 쪽에 가까운가?"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과연 문식 쪽이 우세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성시(盛時)에는 문식과 질박이 중도(中道)를 얻었었지만, 한·당·송·명은 진실로 삼대의 다스림에다 비교하기 어렵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으로 말하자면 태종(太宗) 뒤로는 모두 볼 만한 것이 없다."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당나라 태종이 영웅 호걸의 군주로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룰 수는 있었습니다만, 단지 인(仁)과 의(義)를 빌렸을 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한나라 선제(宣帝)가 오로지 이치(吏治)를 숭상하였지만, 끝내 삼대의 정치에는 미칠 수 없었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가? 그리고 오패(五覇)054) 와 비교한다면 조금 낫겠는가?"
하자, 민기현이 아뢰기를,
"한나라 선제의 다스림은 명분과 실제를 종합하여 자세히 밝혔으니, 한대의 훌륭한 관리가 이때에 융성하였습니다."
하였다.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깎은 듯하고 다듬은 듯하며 쪼은 듯하고 갈은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사람은 깎은 듯이 다듬은 듯이 쪼은 듯이 갈은 듯이 한 공이 있은 연후에야 현명하게 자신을 보전하여 덕에 나아가고 업을 닦을 수 있다.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위에 있는 인군(人君)에 있어서이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모든 경연(經筵)과 소대(召對)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날에 행하되, 혹시라도 탈품(頉稟)하여 정지해야 할 경우는 즉시 옥서(玉署)055) 에서 고사(故事) 두서너 조목을 진달하여 강연(講筵)을 대신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옛말에 이르기를, ‘길 옆에서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완성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근래에 백관[百隷]이 태만하여 전혀 일을 일삼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일이 있어 의논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도 여러 해를 두고도 강구하지 않는다. 이 뒤로 묘당(廟堂)의 계책을 여러 재신(宰臣)들이 모여 의논해야 할 것이 있으면, 신속하게 즉시 상의하여 끝내도록 힘쓰라."
하였다.
영릉(寧陵) 작헌례(酌獻禮) 때에 헌관(獻官)이었던 대신(大臣)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혁혁(赫赫)한 태사(太師) 윤씨(尹氏)여,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 본다.’라고 하였다. 근래 대신(大臣)의 행로(行路)에 매번 각 분야의 차사원(差使員)을 없애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민폐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생략하고 감치(減置)하는 일은 좋겠지만 대신의 체모가 중대하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이 뒤로는 모두 법식대로 대령(待令)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사교(四郊)의 농사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다.
3월 26일 갑술
소대하였다.
3월 27일 을해
주강하였다.
차대하였다.
김희순(金羲淳)을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삼았다.
3월 28일 병자
어수당(魚水堂)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행하였다.
3월 29일 정축
소대(召對)하고 영부사(領府事) 이시수(李時秀)를 불러 보았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여러 고을 가운데 평양(平壤)·강계(江界)·의주(義州)의 세 고을은 한 도(道)의 도회(都會)인데, 근래에 공사(公私)가 조잔하고 피폐하였으니 오늘에 이르러 바로잡아 구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의주의 위화도(威化島) 개간을 허락하는 한 가지 일은 바로 관원이나 백성들이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봄갈이 전에 이를 허락한 연후라야 황무지를 개간하고 잡초를 제거하여 비로소 씨를 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강계에서 전후의 삼값[蔘價]으로 바쳐야 할 것이 4만여 냥이 되니, 몇 해를 기한으로 나누어 바치게 하기를 제도에서 포흠(逋欠)을 징수하는 사례와 같이 한다면, 역시 다소나마 민력(民力)을 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양의 수포군(收布軍)이 3만여 명이 되는데 도망과 사고가 서로 잇달아 빈 항오(行伍)를 보충할 수 없으며, 성(城) 안의 시전(市廛)은 갑자년056) 화재 이후로 형편없이 파괴되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각 창고에 비축해 둔 무명[木]이 2천여 동(同)인데 1년의 응하(應下)는 15동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비축해 둔 무명 가운데서 적당량을 헤아려 시민(市民)에게 내어주고 그들로 하여금 해를 나누어 개색(改色)하게 하소서. 그리고 군포(軍布)와 시세(市稅)는 모두 지방(支放)057) 을 공하(公下)하는 데 관계되니, 본도(本道)의 가분모(加分耗)에서 매년 1천 석(石)씩을 떼어 주도록 허락하고, 시전의 경우는 대략이나마 세금을 감해 주며, 군포의 경우는 사실을 조사하여 액수를 줄여서 떼어 준 모곡(耗穀)을 가지고 분배해서 대신 지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관서의 권관(權管) 한 자리는 본도(本道) 무사(武士)의 초사(初仕)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충분히 상의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여 아울러 시행할 것을 청하고, 병조에서는 갑암 권관(甲巖權管)은 체부(遞付)하는 자리로 정하도록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심상규(沈象奎)를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는데, 전망(前望)에 점하(點下)하였다.
3월 30일 무인
소대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제도(諸道)와 각도(各都)의 전·후 진폐 책자(陳弊冊子)를 가지고 회계(回啓)하기를,
"경상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안동(安東)의 세은(稅銀)에 관한 것은 숫자가 너무 적어 보잘것 없으니, 특별히 영구히 감하여 줄 것을 해조(該曹)에 분부토록 하고, 제읍(諸邑) 가운데 금산(金山)·함창(咸昌) 두 고을의 수령이 진달한 바가 가장 수고로움이 크고 채택할 만한 것과 다른 제읍에서 조진(條陳)한 내용 가운데서도 시행할 만한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금산에는 환곡이 너무 많아 해가 갈수록 증가하므로 국가에서 주관하는 곡식만 남기고 각사(各司)에서 취모(取耗)하는 곡식은 모두 폐지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논하는 바가 생각 없는 견해는 아닙니다만, 각 아문(衙門)에서 소관(所管)하는 것에는 또한 제각기 경비로 없앨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혁파를 발의하여 논할 바가 아니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첨정(簽丁)에 대한 폐단은 전적으로 양반이라고 사칭하면서 신역(身役)을 면하려고 도모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첨군(簽軍)과 납포 규정을 모두 폐지하고 다시 신역(身役)의 법을 제정하여 이른바 양반과 상민을 호적에서 조사한 후에 그에 따른 역가(役價)를 바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옛날 ‘몸[身]이 있는 곳에는 용(庸)058) 도 있다는 법[有身有庸之法]에 전적으로 의거하여 양반과 천인을 따지지 않고 호적을 조사하여 역가(役價)를 바치도록 제도를 정하여 시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선배의 논의가 있어 그것을 검토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하여 십분 행할 만한 실마리가 잡힌 연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전결(田結)에 대한 폐단은 전적으로 다시 측량을 하지 않고 온 나라의 전지(田地)에 대한 등급을 크게 평균화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며, 다시 측량하는 척수(尺數)를 9등(九等)의 법에 의거하여 통일시켜 결부(結負)의 제도를 모두 개혁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요즈음의 결속 수세(結束收稅)하는 법을 없애고, 건국 초기 이랑 수를 계산하여 등급을 나누던 제도를 시행하여 각 아문(衙門)의 둔전(屯田)과 각 궁방전(宮房田)의 면세를 모두 혁파하여 양세(兩稅)의 액(額)을 모두 편입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였는데, 옛날식으로 이랑을 계산하는 것은, 오늘날 척량(尺量)하는 것이 설령 그 요긴함을 얻지 못했다는 탄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경장(更張)하기가 어려우며, 둔전이니 면세전이니 하는 등의 명색(名色)도 하루 아침에 혁파해 버릴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덕(盈德)의 선세(船稅)는 명색이 매우 많아 바닷가의 주민들이 폐해를 받고 있으니, 탈(頉)이 생기는 데 따라 감해 주어 사실대로 선총(船摠)을 작성토록 하여 불법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면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선총(船摠)이 줄어들었는데도 세금 바치는 것은 전과 같으니 이야말로 바닷가 주민들에게 쌓인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바다에 연한 여러 곳에서는 대저 이렇게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사단이 많으니 이미 보고를 받은 뒤에도 그것을 이와 같이 계속 방임할 수는 없습니다.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해청(該廳)과 의견을 교환하여 좀더 나은 방법에 따라 바로잡아 구제하도록 하소서.
1. 훈련 도감의 포보(砲保)059) 는 순전히 무명[木]으로 받아들이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보(軍保)는 돈[錢]과 무명을 반씩 섞어서 징수하게 하였는데, 이 뒤로는 다른 군보의 사례에 따라 반씩 섞어서 징수하거나 순전히 돈[錢]으로 징수하는 것을 그때마다 일례로 시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의 토성(土性)은 목화가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목(錢木)을 각각 반분하여 징수하게 하라는 청원이 비록 편의(便宜)한 방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포보의 사체(事體)는 다른 군보와 다르니 가령 흉년을 만나거나 임시로 적당히 해야 할 때가 있을 터인데, 만약 항식(恒式)으로 만들어 해마다 돈으로 대납하게 한다면 사체(事體)에 구애됨이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하양(河陽)의 군정(軍丁)이 문란한 것과 역(役)에 대한 부담이 고르지 않은 것은 모두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모속(冒屬)한 것을 태정(汰定)060) 할 수 없어서 초래된 것이니, 금지를 무릅쓰고 투탁(投托)061) 한 자는 조사하고 구명하여 채워 보충시키되, 그 본현(本縣) 시산(匙山)의 봉수군(烽燧軍) 1백 명을 양역(良役)의 각종 사고[頉]에 대신하도록 이충(移充)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고을로 역을 부담하는 호(戶)가 매우 적은데, 군총(軍摠)은 두루 두세 배를 넘습니다. 이것과 다른 것을 비교하면 너무나 서로 형평이 맞지 않으니 뼈에 사무치는 폐단은 당연한 염려로 되어 있으나, 고통을 다른 고을에다 옮기는 것은 이미 그런 방법이 없으니 봉수를 혁파하고 그곳의 군사를 얻어다 궐액(闕額)에 옮겨 채우라는 논의가 있기에 이르렀으나, 그 진달한 내용을 살펴보면, 앞에는 경산(慶山)의 성산(城山) 봉수가 있고 뒤에는 영천(永川)의 성황(城隍) 봉수가 있어 각각 조응(照應)함이 있어야 하는데, 해읍(該邑)의 봉수가 읍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원래부터 달리 거쳐서 전해 보낼 만한 곳이 없으며, 단지 영천·경산 두 곳의 봉수에만 의지한다면 스스로 올렸다가 스스로 꺼버릴 뿐이니, 일의 적합함을 잃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혁파하여 버리더라도 불가할 것은 없을 듯합니다만, 일이 변방(邊方) 경보에 관계되는 만큼 끝까지 어렵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도신(道臣)에게 분부해서 형편의 긴박하고 느슨함을 자세히 살펴서 사리를 논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환곡(還穀) 장부가 문란한 것은 명색(名色)이 너무 많은 데서 말미암았으니, 군자곡(軍資穀)과 상진곡(常賑穀)만 비치하게 하여, 각영(各營) 등의 곡식 명색을 절반은 유치시키고 절반은 방출하되, 각영의 모조(耗條)는 시장에 내놓아 취용(取用)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비록 이것이 각 고을의 공통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매우 작은 고을에서는 더욱 절실하고 고통스런 폐단이 있으니, 바로잡아 구제할 방법으로는 의당 절반을 유치시키게 하는 법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각 아문(衙門)에서 모조(耗條)를 취하는 방법은 본래 균일하지 않았으니, 감분(減分)하는 행정을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고 많은 것은 줄이고 부족한 것은 보태는 방법을 별도로 생각하여 조금이라도 소복(蘇復)시키고 구제하는 바탕을 삼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전대동(田大同)을 바칠 때에 서울과 지방의 이속(吏屬)에게 주는 정비(情費)062) 가 해마다 증가하니 엄중히 금단(禁斷)을 가하여 각영(各營)의 예납(例納) 및 별복정(別卜定)의 정채(情債)와 각읍(各邑)의 무역 등의 명색을 정식(定式)으로 마련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정채에 대한 폐단은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날마다 불어나고 달마다 심해지므로 앞서 거듭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본현(本縣) 한 곳의 폐단일 뿐만이 아니니, 서울과 지방의 각 아문에 공문을 보내어 경계하고 거듭 금지하는 뜻을 엄중히 더하게 하소서.
1. 봉화(奉化)는 매우 쇠잔한 고을이어서 사각(史閣)의 수호(守護)를 실로 혼자서 감당할 형편이 못되니, 안동(安東)의 춘양(春陽) 일부를 떼어 받아 수호하는 밑천으로 삼기를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계(地界)를 분할하여 옮기는 것은 일의 체모가 가볍지 않으며, 그전에도 이런 논의가 있었지만 번번이 다 서로 저촉되어 성사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지금 갑자기 의논하여 이속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화사(覺華寺)의 승군(僧軍)에게 오대산 사고(五臺山史庫) 승군의 예(例)에 의해서 특별히 요미(料米)를 지급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각화사 승군의 요미에 대해서는 비록 강릉(江陵)·무주(茂朱)·강화(江華) 세 곳의 예가 있다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없었던 일이니, 지금에 와서 갑자기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함창(咸昌)의 금위군과 어영청 군사의 결원을 채우면서 매번 민호(民戶) 가운데서 비교적 충실(充實)한 자를 파정(疤定)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면역하는 것을 생각하여 역속(驛屬)으로 투입(投入)하니, 특별히 파즐(爬櫛)063) 을 더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민이 역속으로 투입하는 것은 부역을 모면하려는 계책이니 이는 실로 여러 고을의 공통된 근심거리입니다. 도신(道臣)에게 공문을 보내어 경계하고 특별히 더 살피고 신칙하게 하소서.
1. 환곡이 가호(家戶)에 비하여 크게 서로 맞지 않으니 5,6천 석(石)을 이무(移貿)하게 하고, 당년의 모조(耗條)는 본읍(本邑)에서 시장 가격에 따라 돈으로 바꾸도록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값을 감하여 이무(移貿)하는 것은 이미 상정(詳定)한 법식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무(移貿)하는 곳의 석수(石數)에 따라서 감하게 되니 이는 구애되는 단서가 없지 않은 것이며, 백성들의 고통에 관계되는 바입니다. 법은 늦추어 주기도 하고 당기기도 해야 합니다. 앞서 한두 곳의 고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에 시행을 허락한 사례가 있으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일의 형세에 맞게 헤아려 계문(啓聞)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조령(鳥嶺)의 군향(軍餉)은 그 폐단이 더욱 심각하니 금년 가을 적곡(糴穀)을 수납할 때에 절반을 평창(平倉)에 이획(移劃)하고, 또 관할하는 다섯 고을 안에서 고을의 능력과 호구를 참작하여 알맞게 조절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령의 향미(餉米)는 사체가 엄중하며 흉년이 든 해에 수량을 나누어 바치게 하고 유치하는 것은 한때의 임시 편의에 불과한 것이니, 평년의 경우에 이 규정을 인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고을의 능력에 있어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각기 사정에 구애됨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 고을에서 상납할 때에 인정(人情)의 명색이 매우 많으니, 만일 법 외에 사사로이 바치는 자가 있으면 빨리 해당 형률을 시행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여러 고을의 폐단이 같으니 하양(河陽)의 예에 의거하여 일체로 신칙하소서.
1. 산청(山淸)에서 전세(田稅)로 바치는 무명을 다른 고을에서 사오는 것이 주민들의 큰 폐단이 되니, 돈으로 대납(代納)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읍은 바로 산협(山峽)의 고을이며 목면(木綿)은 토산[土宜]이 아니니, 사서 바치는 어려움은 그 형편상 본래 그러한 것이며, 유정지공(惟正之供)064) 은 사체가 가볍지 않으므로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更張)하기에는 불가한 바가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정(軍丁)의 액수(額數)가 많으니 다른 고을의 이정(移定)한 예에 의거하여 여러 고을에 나누어 보내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액이 많은 폐단 역시 당연히 염려해야 할 것이기는 하나 다른 고을에 옮겨 보내면 다른 고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위(軍威) 가산(架山)의 향곡(餉穀)은 칠곡(漆谷)에 이속(移屬)하고, 칠곡 평창(平倉)의 곡식은 본현에 환봉(換捧)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가산(架山) 성향곡(城餉穀)의 폐단이 적지 않지만, 평창에서 받아들여 유치하는 것과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일은 구애됨이 많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각종의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는 것이 들쭉날쭉 가지런하지 않아서, 면포(綿布) 값이 오를 때를 만날 것 같으면 더러는 네 냥씩이나 되기도 하며, 원납(元納) 외의 잡비와 마감채(磨勘債)는 간혹 깎거나 감(減)하기도 하므로 다시 일정한 제도를 정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각양의 군포를 돈으로 대납하는 규정은 본래부터 들쭉날쭉하였으므로, 고루 일정하게 법을 정하는 것을 갑자기 의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연일(延日)의 여석(礪石)을 상공(常貢) 외에 각사(各司)에서 별도로 정하여 〈바치게 하는〉 폐단에 대하여 엄중히 신칙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여석은 채취하기가 매우 어려워 폐단이 아주 심각합니다. 의례히 바치는 숫자도 오히려 많아 민망하게 여길 정도인데, 더구나 이렇게 별도로 정한 명색이겠습니까? 더욱 진념(軫念)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앞서 거듭 경계한 것이 으레 하는 투로 돌아갈까 염려되니, 다시 해시(該寺)에다 거듭 경계하여 이런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1. 갈평(葛坪)·대송(大松)·북송(北松)의 세 봉산(封山)을 즉시 혁파하여 주민들에게 경작과 개간을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 곳의 봉산이 들 가운데 위치하여 동탁(童濯)065) 의 근심을 면하지 못합니다. 경작을 하게 되면 주민들의 먹을 것이 넉넉해지지만 봉산을 하게 되면 주민에게 고통을 끼치게 된다고 합니다. 정말로 그 말과 같다면 그 명분 때문에 한갓 피해만 받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공문으로 도신에게 하문하여 형지(形止)를 상세히 탐지하도록 한 뒤에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1. 장기(長鬐)에서 상납하는 훈련 도감과 금위영·어영청 및 다른 아문의 군포를 모두 순전한 돈으로 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는 데 대한 일입니다. 비록 목화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군포는 사체(事體)가 중하니 영구히 순전한 돈으로 하도록 정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불가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상납하는 대동목(大同木)을 먼 지역에서 환무(換貿)하는데는 그 값이 갑절 이상 다섯 배나 되니 쌀로 바꾸어 하납(下納)에 이관시키게 하고, 상납하는 대동목은 서울에서 가까운 바닷가 고을에서 대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대동목을 상납하는 것이 쌀을 하납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일의 형세가 그러하지만 나누어 획급하는 일의 이해(利害)는 자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도신으로 하여금 일의 형세를 참작하고 헤아려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사천(泗川)의 기병과 보병이 세 차례 번을 드는데 매번 정채(情債)가 있어 허비하는 바가 갑절이니, 지금부터는 나누어 바치지 말도록 하고 합해서 한차례 번을 들게 하여 금위영과 어영청의 보전(保錢)과 함께 일시에 상납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기병과 보병에 대하여 셋으로 똑같이 나누어 상납하게 한 것이 어떠한 법의(法意)에 근거하였는지 모르겠으나, 나누어 바치는 것이 정말 폐단이 된다면 경비를 줄이는 일을 당연히 진념해야 할 것이며, 봉감(捧甘)은 각 해당 영(營)에서 편리한 대로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1. 기장(機張)에 표류되어 온 왜인에 대하여 단지 배를 정박하였다가 출발하였기 때문에 두 차례 치보(馳報)하였는데, 그 병영(兵營)이 좌표(左漂)일 때에는 수영(水營)의 예규에 의거하여 치보하고, 우표(右漂)일 때에는 역시 순영(巡營)과 통영(統營)의 예규에 의거하여 1, 2차를 치보하는데, 합하여 한 첩(牒)으로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표류되어 온 왜인에 대하여 실정을 묻는 것은 본래 관계됨이 있지만 아홉 곳에다 치보하며 7, 8차례나 중첩되게 보내는 것은 비록 중대한 바에 연유된다고 하더라도 역시 폐단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보고한 것에 의거하여 좌표인 때에는 수영의 예규에 의거하고 우표인 때에는 통영의 예규에 의거하여 합해서 한 첩으로 작성하게 하는 것이 크게 구애됨이 없다면 역시 폐단을 줄이는 방도가 될 것이니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시행하게 하소서.
1. 왜료(倭料)066) 로 환상미(還上米)를 찧어서 지급하는 것은 실로 저치미(儲置米)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니, 새로운 결미(結米)를 하납(下納)하는 조목 가운데서 2, 3백 석을 저치미로 덜어 내어 왜료로 지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왜료를 저치미에서 회감(會減)067) 하는 것이 비록 옳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저치미가 없어서 쌀을 바꾸어다 지급해야 하니 이것이 실제로 폐단이 됩니다. 그러나 이 폐단을 없애려고 해도 사정(事情)에 또한 구애됨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지자(持者)068) 에 대한 품삯은 도내(道內)의 원회미(元會米) 가운데서 2천 2백 석을 본현(本縣)에 바꾸어 획급하게 하고 반분(半分)한 모곡(耗穀) 가운데서 1백 석을 해마다 가져다 쓰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자에 대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당연히 염려해야 하겠지만 원회미 가운데서 바꾸어 획급하는 것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웅천(熊川)에 표류되어 온 왜인의 양료(粮料)로 마련한 것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어서 남상(濫觴)의 폐단이 되니, 지금부터는 평목(枰木)으로 교준(較準)069) 하는 것을 정식(定式)하여 시행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표류되어 온 왜인에게 요미(料米)를 지급할 때에 남상(濫觴)의 폐단이 적지 않으니 평목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바로잡고 구제하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전례(前例)에 따라 더 절약하는 뜻을 힘쓰도록 도신에게 분부하여 거듭 경계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1. 파손되어 부서진 어선이 세총(稅摠)에 묶여 현탈(懸頉)되지 못하는 것을 전파된 선척(船隻)을 현탈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결같이 영덕(盈德)에서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1. 문경(聞慶)의 고을 사정이 조잔(調殘)하니 상주(尙州)의 산양(山陽) 다섯 지역을 본현(本縣)에다 도로 예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산양 다섯 지역을 저쪽에서 나누어 이쪽에다 보태는 것은 진실로 병폐를 소복(蘇復)시키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만, 지역의 경계는 한정이 있으며 제도를 정하는 것은 마땅히 신중해야 합니다. 갑자기 의논하여 이속(移屬)시킬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향(軍餉)의 좁쌀[小米]을 많이 축적하였다가 썩고 상하여 도리어 백성들이 해를 받으니, 해마다 2천 석을 한정하여 돈으로 마련하게 하고 8천 석에 이를 때까지 감축시킨 뒤에 비로소 반(半)을 방출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향인 좁쌀을 많이 축적하여 썩고 상하게 하였다는 것이 진실로 그 말과 같아서 만일 돈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전(移轉)할 사정(事情)이 함창(咸昌)과 일반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서 변통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1. 경주(慶州)의 봉산(封山)이 주민들에게 고질적인 폐단이 되니 특별히 혁파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봉산의 폐단은 나무는 있는데 용도가 적합하지 않아 한갓 주민들에게 허다한 폐단만 끼치는 것이니, 명목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아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지방 고을의 사정은 상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도신에게 공문으로 물어서 보고를 기다렸다가 품처하도록 하소서.
1. 안동(安東)의 군액(軍額)은 잡탈(雜頉)을 제외하면 군액을 채우기 어렵고, 신역(身役)을 겸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탱하여 견디지 못하겠으니, 역속(驛屬)으로 투입(投入)하는 것을 엄히 신칙하여 조사하여 규명하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민으로 역을 피하여 역속으로 투입하는 것은 단지 이 고을에서만 홀로 그런 것이 아니고 역(驛)이 있는 여러 고을이 곳곳마다 이와 같아서, 우부(郵簿)나 관첩(關牒)070) 이 한갓 시끄럽기만 하고 사체에 놀라움이 있으니,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조사·검토해서 만일 간계를 부렸다고 의심할 만한 자가 있으면 낱낱이 조사·규명하여 군액으로 옮겨 보충함으로써 뒷날의 폐단을 끊게 하소서.
1. 전정(田政)의 문란이 개혁되도록 하는 것은 오직 개량(改量)하는 데 달려 있으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경륜하여 다스리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전정의 문란은 그렇지 않은 고을이 없습니다. 경자년071) 의 양전(量田)이 이제 1백여 년이 되었는데, 기름지거나 척박한 것이 전과 다르고 경계(境界)가 분명하지 않아서 세금이 점차로 줄어들고 백성 또한 곤란을 당하니, 개량하는 한 가지 일은 당연히 행해야 하는 바입니다. 종전에 한두 고을에서 역시 가능한가를 시험했었지만, 이해가 서로 수반됨이 없는지 보장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오직 수령이 단속하고 경계하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해서 거행하라는 뜻으로 도신으로 하여금 알리게 하도록 하소서.
1. 환상(還上)이 많은 폐단이 되니 어느 아문의 곡모조(穀耗條)인가를 따질 것 없이 회록(會錄)하지 말게 하고, 당년에 돈으로 바꾸어서 다시 환상에 추가시키지 말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곡(耗穀) 위에 다시 모곡이 생기게 하여 점차로 많은 석(石)에 이르게 되니 참으로 폐단을 늘리는 단서가 됩니다. 각 아문의 곡모조를 기필코 당년에 돈으로 바꾸어서 첨록(添錄)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폐단을 구제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됩니다. 그전에도 이 일을 가지고 연품(筵稟)하여 행회(行會)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다시 더 거듭 경계하여 뒷날의 폐단을 끊게 하소서.
1. 우구치점(牛邱峙店)에는 주민들이 모두 흩어지고 은맥(銀脈)도 이미 끊어졌으니 세은(稅銀)을 영원히 감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영원히 감하도록 하는 특별한 은혜는 백성을 위하는 성대한 생각임을 나타내야 하니, 해조(該曹)에 분부해서 해도(該道)에 통보하여 여러 해 동안 고통을 받은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들 하늘 같은 혜택을 알리도록 하소서.
1. 양(羊)을 기르는 목장이 폐단이 되니 만일 혁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양을 기르기에 적합한 고을로 이송하게 하고, 양을 기르는 백성은 모두 양역(良役)으로 정하여 군액에 대신 보충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에서 양을 기르는 도리를 소홀하게 여겨 회안(會案)072) 하여 회부한 바는 명목은 있으나 실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다 액수를 채우기까지 한다면 폐단이 더욱 심할 것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구제하는 방법을 깊이 헤아려 장점을 따라 변통하게 하소서.
1. 상납할 때 인정으로 바치는 경비가 지나치니 먼저 경비(京費)에서부터 바로잡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마다 정도의 지나침을 더하고 명색도 여러 갈래이니, 지방 고을의 폐단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전후로 신칙함이 엄하였을 뿐 아니라 분명하였는데도 고을의 폐단은 그전과 같고, 여러 고을에서 말하는 폐단이 한결같은 내용들입니다. 청하(淸河)·함창(咸昌) 등의 고을은 이미 논열(論列)한 바가 있으니 다시 거듭 엄중히 하는 뜻을 더하여 각 해당 아문에 분부하도록 하소서.
1. 본읍(本邑)은 곡식이 귀하고 주민들은 가난하니 한전(旱田)의 밭두둑을 잇달아 물을 끌어 대어 논[畓]으로 개간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 해의 풍흉은 오로지 수전(水田)에 물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으며, 길고(桔槹)073) 로 물을 대는 것은 그 힘이 작아서 수차(水車)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백성들의 풍속이 평소의 습관에만 익숙하고 처음 보는 것에는 관심이 적어 비록 수차가 있다 하더라도 필시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관아에서 앞장서 권고하여 따라 익혀서 익숙하게 한다면 반드시 시행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한번 이용해 본 뒤에 이로우면 반드시 일반화 될 것입니다. 본도(本道)의 창원(昌原)에서는 이미 이 법을 시험삼아 사용한 적이 있으며 또한 성과를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본주(本州)에서 역시 이 사례를 본받아 편리한 대로 시험삼아 이용해 보라는 뜻을 도신에게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해당 읍에 모두 알리게 하소서.
1. 상주(尙州)에는 환총(還摠)이 너무 많으니 아문의 진분(盡分)하는 곡식은 줄이고 상진곡(常賑穀)으로 절반만 유치(留置)하는 숫자는 늘이며, 한전(旱田)으로 수전(水田)이 된 것은 수전의 예(例)에 따라 재탈(災頉)하게 해달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환자[還上]에 대한 폐단은 대체로 여러 고을의 공통된 문제인데, 진분하는 곡식을 줄여서 절반만을 유치하는 숫자로 만들게 하려고 하는 것이 감분(減分)하여 구폐(捄弊)하는 방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일에 장애되는 점이 많아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한전이었다가 논이 된 경우에는 급재(給災)하지 않는 것이 그전부터의 전례인데, 만약 개량(改量)하기 전에 변통하도록 허락한다면 전정(田政)이 더욱 문란해져 반드시 폐단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포보(砲保)는 다른 군포(軍布)의 사례에 의거하여 평년에는 전(錢)과 포(布)를 참반(參半)하게 하고, 면(綿)이 귀할 때에는 순전(純錢)으로 대납[代捧]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도감(都監)의 사체(事體)는 군문(軍門)과 차이가 있으니, 비록 한때 임시 편의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고정된 규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성주(星州)의 양정(良丁) 가운데 역속(驛屬)에 투입(投入)된 자는 조사하여 본역(本役)에 환입(還入)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양정으로 역속에 투입된 자를 조사해서 캐내어 본역에 환입시키는 것은 본래 그만둘 수 없는 정사로서, 호포(戶布)의 일에 대해서는 선배들의 의논이 있어 여러 차례 시행하려고 하였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조목은 이미 안동(安東) 및 금산(金山)·함창(咸昌)에서 논열(論列)한 바 있으니, 한 가지로 시행하게 하소서.
1. 환자[還上]의 폐단은 일일이 지적하기 어렵습니다. 군향(軍餉)과 진자(賑資)를 제외하고는 각처(各處)의 구관(句管)을 모두 폐지하고 간혹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별도의 방법으로 설시(設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폐단을 말하면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각처의 구관을 모두 폐지하고 둔전의 설시를 의논하는 것은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갑작스럽게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정(軍政)이 문란하니 속오군(束伍軍)의 명색은 혁파하고 보포(保布)를 받는 제군(諸軍)에 대해서는 조련(操鍊)에 환부(還付)하여 속오군에 편입될 양정(良丁)과 더불어 정병(正兵)으로 통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노(雇奴)와 양정을 정병으로 통합하여 조련하게 하고서, 그들의 용겁(勇㤼)을 관찰하여 정병과 보병(保兵)으로 구분하는 것은 일이 군제(軍制)에 관계되므로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1. 양전(量田)한 햇수가 오래 되어 전결(田結)이 문란하므로 쌀과 면포를 상납하면서 인정으로 바치는 비용이 지나치게 많은 데 대한 일입니다. 전결이 문란하여 인정으로 바치는 비용이 번거롭게 많은 것은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곳곳마다 모두 그러한데, 이미 안동(安東) 등의 고을에서 논열(論列)하였으니 한 가지로 시행하게 하소서.
1. 대구(大邱)의 상납·하납(下納)하는 쌀과 포목을 한결같이 경사(京司)에서 수조(收租)를 분획(分劃)하는 예에 따라 거행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상납·하납하는 쌀과 무명의 다과(多寡)와 편부(便否)는 가을의 수확이 풍년인가 흉년인가에 달려 있으므로, 사전에 미리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또 여러 고을에서도 반드시 이와 비슷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낱낱이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어려움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제언(堤堰)에 들어간 결복(結卜)으로 아직 사고[頉] 처리를 받지 못하였거나, 제언 아래 경작자가 백지(白地) 상태로 나누어 떠맡고 있는 경우에는 양안(量案)의 제언과 진전(陳田)의 사례에 의거 탈감(頉減)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상세히 조사해서 해조(該曹)와 왕복하여 좋은 점을 따라 변통(變通)하도록 하소서.
1. 김해(金海)의 강변[沿江]에는 전결(田結)의 포락(浦落)074) 이 빈번하여 재탈(災頉)이 치우치게 많다는 것과, 토질이 척박한데 등급이 높은 곳을 적합하게 헤아려 등급을 낮추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강변 곳곳의 등급이 높은 전지에 대하여 적합하게 헤아려 등급을 낮추는 것이 비록 폐단을 소복(蘇復)시키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이미 개량(改量)을 하지 않고서 한갓 등급만 낮추려고 한다면 일에 구애됨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명도(鳴島)와 녹도(菉島) 두 섬의 염호(鹽戶)가 날마다 줄어드니 공화(公貨) 가운데서 2만 냥의 돈을 내어 이자 없이 도민(島民)에게 나누어 주고, 햇수를 한정하여 나누어 바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종전에 폐단을 구제하는 방도가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할 만한데도 폐단이 곧 뒤따라서 생겨 구제할 만한 약(藥)이 없고 이렇게 2만 냥을 대하(貸下)하라는 논의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한 섬에 까마귀처럼 모여 사는 백성들이 소금을 자본으로 하여 생업을 삼고 있어 본래 항심(恒心)이 없으니, 비록 한때의 요행은 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영구한 폐단이 될 것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전죽(箭竹)에 대한 공사(公私)의 책응(責應)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대나무를 생산하는 밭은 단지 두 곳뿐이니 다른 고을로 이송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대나무의 생산이 점점 그전만 못하니 해당 읍의 폐단이 됨은 미루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여러 읍의 대나무에 따른 폐단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으니, 비록 고통을 옮기려고 해도 그 형세로 보아 방법이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바닷가의 주민들이 조잔(凋殘)한 것은 전적으로 고기 잡는 사역과 배를 빌리는 자본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본읍(本邑)의 어선 4, 5척을 다른 고을로 이송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의 고기잡이 배가 다른 여러 고을보다 많으니, 당초 배정할 때에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본읍에서 말하는 폐단만 듣고서 다른 고을의 사정을 살피지도 않은 채, 갑자기 이송하도록 의논하는 것은 아마도 문제점이 있을 듯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바로잡고 구제하는 방도를 상세히 조사하게 하여 편리함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소서.
1. 군총(軍摠)의 액수가 많아 폐단이 치우치게 심하니 옮겨 온 군사를 도로 각읍(各邑)에 소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애당초 해읍(該邑)에다 나누어 배치한 것은 이미 어쩔 수 없는 행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환송(還送)하는 것을 의논하는 것은 허용키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해(寧海)의 황장목(黃膓木)을 봉진(封進)할 때, 판자를 만들 수 없는 것은 돈을 거두어 사서 봉진하는 것을 장점을 따라 변통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산은 모두 악석(惡石)으로 되어 있고 토질은 소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아 주민들에게 돈을 거두어 바꾸어 바치게 하니, 일이 매우 절실하고 민망합니다. 황장목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중하므로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更張)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본부(本府)의 경계를 나누기 전부터 대소(大所)와 덕현(德峴) 두 봉수(烽燧)가 있었고, 봉군(烽軍)이 2백 명이기 때문에 군액(軍額)을 채우기에 몹시 어려우므로, 덕현의 봉수를 영양(英陽)에 소속시키고 1백 명은 영양현(英陽縣)에서 충정(充定)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곳의 봉수가 폐단이 된 것은 영양과 경계를 나눈 이후에 있게 되었는데, 지금 만약 봉수(烽守) 봉군을 영양으로 이송한다면, 영양의 사정에도 반드시 구애됨이 있어 피차간에 폐단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군포 가운데 포보(砲保)와 악공보(樂工保)는 같은 포(布)인데도 값이 같지 않아 주민들이 어렵게 여깁니다. 사체(事體)는 그렇지만 정례(定例)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갑자기 고치거나 혁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소금 굽는 가마솥 여덟 좌(坐) 가운데 한 좌의 가마솥이 파손되었는데 다시 개비(改備)하지 않았으니, 세전(稅錢)을 탈감(頉減)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가마솥이 파손되고 가호(家戶)가 없어진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으나, 백지(白地)에다 세금을 징수하도록 책임지우니 참으로 매우 민망한 노릇입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적간(摘奸)하게 한 뒤에 해당 관청과 의견을 교환해서 잘 헤아려 변통하게 하소서.
1. 밀양(密陽)의 동서 남북에는 모두 밤나무 숲이 있는데, 남북의 두 밤나무 숲은 갑자년075) 에 개간을 하였지만 토질이 곡식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도로 밤나무 숲을 만들려는 데 대한 일입니다. 동서의 밤나무 숲은 바로 천년이나 된 오랜 숲이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혁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단 공헌(供獻)의 소중함 뿐만 아니라, 그 밤나무 숲이 있음으로 해서 숙천(肅川)의 격류(激流)를 크게 막아주는 역할을 하므로 주민들의 전지(田地)가 이것에 힘입어 터지거나 파손됨을 모면할 수 있으니, 민생(民生)의 이해(利害)에 관계된 바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는데, 중간에 그 숲을 베어 논을 만드는 계획은 상량(商量)함이 너무나 부족하였습니다. 한번 논을 조성한 뒤에는 이익을 얻는 것이 너무 적고 폐단이 되는 것은 매우 많습니다. 듣건대, 본읍(本邑)의 민정(民情)은 모두들 도로 밤나무 숲을 만들도록 원하고 있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상세하게 살피고 사리를 따져 장문(狀聞)하도록 해서 바로잡아 구제하는 조치를 취하소서.
1. 본부(本府)의 두 봉산(封山)을 양산(梁山)의 사례에 의거하여 특별히 혁파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봉산에 대하여 여러 읍에서 말하는 폐단은 기본적인 줄거리가 대략 동일합니다. 경주(慶州) 등 고을의 사례에 의거하여 도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관찰하게 해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작원(鵲院)은 천혜의 관방(關防)이니 성을 쌓아 방비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 형편을 논한다면 진실로 관방을 설치해야 할 지역이며 환란[陰雨]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종전부터 이것을 의논하여 온 것이 또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래부(東萊府)에다 금정 산성(金井山城)을 쌓아 준공 보고를 한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배치[制置]를 아직도 완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력(事力)이 조금 넉넉해지기를 천천히 기다려 다시 더 진지하게 의논하게 하더라도 늦지 않을 듯합니다.
1. 동래(東萊)의 금정 산성(金井山城)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되, 둔전을 설치하는 자본은 매년 순영(巡營)에서 산성전(山城錢)으로 남아 있는 3만 냥 내에서 1만 냥을 한도로 획급하여 차차 이부(移付)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산성을 위해서 조치하는 방법으로는 토지를 소유하게 해서 둔전을 설치하고 주민을 모집하여 식량 거리를 경작하게 하는 것이 정말로 방어하는 요긴한 방법이 됩니다. 옛날부터 변경 수비에 대한 의논 가운데 이것을 우선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당해 고을에서 논한 바는 매우 의의가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충분하게 더 상의하여 확정하도록 해서 소상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해안의 폐단은 다른 것에 비하여 가장 심하니, 어조(漁條)·방렴(防簾)은 한결같이 사목(事目) 가운데 8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법에 의거하여 모두 하등(下等)으로 납세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부(該府)에서는 변방의 중요한 지역에 이러한 고질적인 폐단이 있어 주민들이 애오라지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니 참으로 민망스럽고 측은합니다. 당초 어조·방렴에 대해서 8분 1을 세금으로 내는 데 들어 있었던 것으로 가끔 3등(等)으로 했던 것은 어떠한 일의 단서에 인연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며, 변천되어 내려온 사정도 상세히 알기 어렵습니다. 해당 관청에 상세하게 보고하게 한 다음 장점을 따라 구처(區處)하도록 하소서.
1. 거제(巨濟)의 어장(漁場)에 어조(漁條)·방렴(防簾)·거처(去處) 등의 세 가지 명색이 있어 여러 갈래로 폐단이 많으니, 본읍에 소속시켜 한결같이 원총(元摠)에 의거하여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의 어조·방렴 등 세 가지 폐단은 실로 치료하기 어려운 병폐인데, 그것을 조종(操縱)하는 것은 오로지 통영(統營)076) 에 있습니다. 영문(營門)에서 직접 집세(執稅)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감관(監官)을 차출하여 배를 추적해서 납부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있기도 하며, 또 실권을 잡고서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경우가 있어서, 바닷가 주민에게 뼈를 자르는 듯한 폐단은 진실로 당해 수령이 논한 바와 같습니다. 당해 영(營)에 거듭 경계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바로잡고 고쳐서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는 바닷가 주민들로 하여금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치우치게 당하지 않도록 하소서.
1. 바람에 꺾였거나 저절로 말라 버린 소나무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데, 경내(境內)의 주집(舟楫) 또한 망가지고 파손된 것이 많으니, 3년에 한차례씩 베어다 수선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어민들의 사정상 배 만들기가 어려운 것은 본래 그러한 형편이었으나, 허다한 선민(船民)에게 고루 혜택을 줄 방법이 없고, 봉산(封山)의 소나무 목재는 법의(法意)가 중대하며, 원할 때마다 번번이 따라주는 것 또한 형편상 어려우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천(永川)의 군총(軍摠)에 남칭(濫稱)하여 도탈(圖頉)하는 자가 있으니, 별도 조사하여 밝히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폐(軍弊)에 대해서는 이미 성주(星州)·함창(咸昌) 등의 고을에서 논열(論列)하였으니, 일체로 공문을 보내어 신칙하되 외람되게 유학(幼學)으로 일컫거나 역속(驛屬)으로 투탁(投托)하려는 경우는 도신(道臣)이 엄중히 거듭 경계를 가하고 사실을 조사하여 금단(禁斷)하게 하소서.
1. 전총(田摠)으로 답(畓)의 지목(地目)에 들어간 것은 비록 재해를 만났다 하더라도 해마다 재탈(災頉)을 받지 못하니, 여러번 한재(旱災)를 당한 것은 한전(旱田)으로 환원해 달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전과 수답(水畓)을 반전(反轉)시켜 서로 바꾸는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개량(改量)하기 전에는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천(榮川)의 전결(田結)이 문란한데, 묵은 전지[陳田]와 다시 일군 것이 서로 뒤섞였으니 특별히 개량(改量)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읍(該邑)은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의 두 산 사이에 있으므로, 토질이 척박하고 주민은 가난하며 산이 무너지고 모래둑이 터져, 신유년077) ·임술년078) 의 큰 물을 겪으면서 문득 하나의 겁운(劫運)을 이루어, 강계(疆界)의 구분이 없어지고 세결(稅結)이 많이들 뒤섞여서 개량하는 행정이 실제로 시급한 업무가 되었으니, 당해 수령이 청한 바는 반드시 의견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사정을 헤아려서 편리함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1. 양산(梁山)은 무비(武備)가 허술하니 본군(本郡)의 환상미(還上米) 1천 석을 취모(取耗)에 획부(劃付)하여 요(料)와 시상(施賞)을 마련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 변경에 가까운 고을은 이교(吏校)를 격려하여 씩씩하게 방위를 잘하도록 하는 방법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도(本道) 바닷가 고을의 곡부(穀簿)가 근래에 매우 빈 듯하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겠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적절히 헤아려 보고하게 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1. 경서(經書)를 반강(頒降)하여 유생을 권과(勸課)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먼 지방의 풍속은 어두우니 진흥시키고 권면하여 작성(作成)하는 방도를 당연히 진념(軫念)해야 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인쇄하여 지급하고 앞장서서 권면하여 실질적인 효과가 있게 하소서.
1. 각 궁방(宮房)의 둔세(屯稅) 징수를 위하여 차인(差人)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근래 지방의 고을에 차인으로 인한 폐단은 듣기에 놀랄 만한 것이 많으며 소민(小民)들이 원통하다고 일컫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연전에 먼저 한두 곳에서 보고를 받음에 따라 연품(筵稟)하여 신칙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해당 고을에서 폐단을 진술하였으니 역시 유추(類推)할 만합니다. 이미 그런 사실을 들은 뒤에는 별도로 신칙함이 없을 수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폐단을 당하는 단서를 조사하고 캐물어 엄중히 금단(禁斷)을 더하고 또한 사리를 따져 보고하게 하여 바로잡아 구제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소서.
1. 군포의 상납을 전운(轉運)하는 것이 폐단이 되는데, 상도(上道)의 각 고을은 서울과의 거리가 조금 가깝고, 또한 동래부(東萊府) 등의 지역은 하납(下納)할 군(軍)이 있습니다. 본군(本郡)의 경우는 동래부와 가까우니 본군에서 상납할 군(軍)을 상도에서 하납하는 군(軍)으로 바꾸어 정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해도(該道)의 사정에 있어서 서울에다 바치는 노고를 줄이기 위해 가까운 이웃 고을로 옮겨서 바치게 하자는 것인즉, 이것은 폐단을 없애는 대단(大段)이라고 말할 만하나 바꾸어질 각 고을의 형편이 어려운지 쉬운지에 대해서는 역시 헤아려서 알기에 불가능한 점이 있으니,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할 만한 것은 품처하도록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이천(利川)의 환곡(還穀)으로 해마다 응분(應分)한 것이 거의 2만 4천 석에 가까운데, 환호(還戶)는 3천 6백에 불과하여 인족(隣族)에 대한 침징(侵徵)이 형세로 보아 피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 민호(民戶)를 헤아려서 분조(分糶)를 참작 결정하고, 그 나머지는 더러 환곡이 적은 고을로 이전하고, 더러는 모작(耗作)하는 조목에다 배수(倍數)로 분정(分定)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응분하는 환자곡은 거의 2만 4천 석에 가까운데 응수(應受)하는 환호는 3천 6백에 불과하니, 많은 양을 분배 받아 바치기 어려운 근심이 두루 인족(隣族)에게 미치게 됨은 형세로 보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환호와 환곡을 비교해서 헤아려 남는 것은 덜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야 하는데, 이는 바로 도신의 책임이니, 비록 경기의 사정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환자곡이 많은 폐단이 어찌 유독 이천만 그러하겠습니까? 그러나 또한 반드시 원환자곡[元還上穀]의 숫자가 적어 순조(巡糶)를 잇대기 어려운 고을이 있을 것이니, 이쪽의 것을 옮겨 저쪽에다 보태면 진실로 적의(適宜)하여 곧 일거(一擧)에 두 가지가 편리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이 고을을 따라 금년부터 결단하여 도신이 세밀하게 더 참작하고 헤아려서 점차로 시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대저 여러 고을의 적정(糴政)이 치우치게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지만 폐단은 균일합니다. 이는 오로지 곡품(穀品)의 정조(精粗)에 서로 차이가 나고 두곡(斗斛)의 대소(大小)가 같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두곡이 기준에 맞고 곡물의 품질이 정결한 곳에서는 곡물의 값이 본디 높기 때문에 연례(年例)로 각 항목의 작전(作錢)을 이곳에다 치우치게 떼어 주어 당연히 작전해야 할 예(例)보다 더 초과되는 것은 헤아리지 않으면서 유치(留置)하게 되어 있는 원곡(元穀)에다 모미(耗米)를 뒤섞어 놓기를 해마다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환자곡이 점차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두곡에 흠이 있고 곡물의 품질이 나쁜 고을은 곡물 값이 언제나 낮기 때문에 연례로 작전하는 것 또한 모두 점점 유치하게 되어 이자 위에 이자가 생겨 많은 데는 더 많게 되고 적은 데는 더 적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고을의 수령이 논한 바, 모작조(耗作條)에 배수(倍數)를 분정(分定)하라고 말한 것은 이 고을의 이런 폐단 역시 여기에서 연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량형(度量衡)은 왕정(王政)에 있어 반드시 동일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크거나 작으며 규정에 맞거나 부족하여 일정하지 않으니 진실로 크게 놀라고 한탄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조적(糶糴)은 전적으로 백성의 식량이 되는데, 정결하게 바치고 정결하게 나누어 준다면 백성 또한 어찌 꺼려하겠습니까? 그러나 간혹 능히 이와 같이 하지 못하여 바칠 때는 비록 정결하게 하였으나 나누어 줄 때에는 번번이 거친 것으로 주기 때문에 관아에서 실제로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서 백성 역시 관아에 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곡물이 거칠게 되는 폐단은 전적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므로 이러한 정결함과 거침을 가지고 관리들의 치적(治績)을 판단할 수 있으니, 승진시키고 좌천시키는 인사 행정을 이러한 기준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정결하게 바치도록 경계하는 것은 별도로 거론할 것이 못되며, 가장 바로잡아야 할 것은 각 항목의 작전(作錢)을 각기 그 본곡(本穀)이 있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높은 가격이면 곧바로 추리(趨利)하여 응작(應作)할 것인데도 더러 전체를 유치하게 하기도 하고, 원곡(元穀)인데도 더러 침범하여 내어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도신과 묘당(廟堂)이 있으니 다만 당장 그것이 법을 준수하는 것인지 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인지를 살필 따름입니다. 또한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울 필요는 없으니 사전에 이 뜻을 도신에게 분부하고 또 아울러 제도(諸道)에 공문을 내려 신칙하소서.
1. 통진(通津)은 각 궁방(宮房)의 무토 면세(無土免稅)079) 가 해마다 내부(來付)하므로 전례에 따라 민결(民結)이 가장 많고 면세가 조금인 고을로 이송하게 하며, 각 묘소(墓所)의 면세조(免稅租)를 징수하는 즈음에는 원역(員役)의 무리들이 사단을 일으킬 근심이 없지 않다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무토에 대한 면세를 윤정(輪定)하는 데에는 이미 정해진 규정과 연한이 있으니, 본읍(本邑)에서 정한 바가 이처럼 치우치게 많은 것에 대해서 만일 기한이 차지 않아서 윤이(輪移)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틀림없이 미리 기한이 차기 전에 정해 두고서 또 겹으로 정한 소치이니 도신에게 분부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개정하고 정리하게 하며, 각 묘소의 면세조에 관한 일은 무릇 절수(折受)한 토전(土田)에 차인(差人)이 함부로 수납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조정의 법령이 본래부터 아주 엄격한데, 요마(幺麽)한 원역의 무리가 공무를 빙자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풍습은 극도로 놀랍고 가슴 아픕니다. 이미 하송(下送)할 적에 조절(操切)080) 하지 못했고 또 징수할 무렵에 금지시키거나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묘관(墓官)도 진실로 실수가 있었으나 도신 또한 어째서 신칙함이 없었습니까? 뒤에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곧바로 경기 감영에서부터 해당 원역을 추문하여 다스리도록 하되, 즉시 본사(本司)에 논보(論報)하여 엄중히 징계하는 바탕을 삼게 하소서.
1. 양근(楊根)에 있는 수어청(守禦廳) 아병(牙兵)의 신포(身布)는 다른 곳에 비하여 가장 무겁습니다. 따라서 노아병(奴牙兵)의 사례에 의거하여 숫자를 감하도록 규정을 정해야 하는 일과 서울의 문벌이 좋은 사족(士族)의 발인(發靷) 때에 예선군(曳船軍)을 세우도록 책임지우는 경우가 실로 많으니, 지금부터는 도선생(道先生)·읍선생(邑先生)의 사상(四喪)081) 및 대신(大臣)·경재(卿宰)의 상사(喪事) 외에는 일체 막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수어청의 아병은 바로 단속하고 청조(聽調)하는 군사로, 신포(身布)가 다른 군사들 보다 본래 헐하였는데, 지금 이렇게 가장 무겁다는 논의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런지를 모르겠으며, 또한 단지 고을 수령의 말에만 의거하여 갑자기 변통을 더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해당 영(營)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그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도록 하고, 예선군에 대한 일은 일이 비록 잗달기는 하지만 백성들에게 폐단이 크니, 그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도신에게 분부해 규정을 정해서 시행하도록 하소서.
1. 양천(陽川)은 군액(軍額)이 가장 적으나 보충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떠한 형태이건 군역(軍役)을 회피하려고 도모하는 부류는 개인적으로 서울에 있는 각영문(各營門)에 투속(投屬)하는 자들인데, 이를 일체 막고 금지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정(軍丁)이 몹시 구차한 폐단은 어느 고을이건 그렇지 않겠습니까마는 기전(畿甸)082) 이 더욱 심하며, 본읍은 기전의 고을 가운데에서도 가장 작고 외진 곳에 위치하였으므로, 5백 명의 원액(原額)도 숫자를 채우기가 오히려 어렵습니다. 더구나 이 원액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망하고 회피하니 투속을 금지시키지 않는다면, 전첨(塡簽)083) 하는 데 대한 근심은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각 해당 영문(營門)에 분부하여 만일 먼저 정해 두었거나 혹은 당연히 정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스스로 와서 투속하는 자는 일체 쇄환(刷還)하게 하소서.
1. 음죽(陰竹)의 읍기(邑基)를 옮겨서 설치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을 관아의 터를 옮기는 것의 편부(便否)는 멀리서 헤아려 결정짓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고을의 수령과 충분히 상의하고 고을의 여론을 상세히 탐지해서 만일 정말로 옛터에서는 결단코 그대로 살기가 어렵고 새로 점지한 곳이 확실히 편리하고 낫다면, 청컨대 이치를 따져 장문(狀聞)하게 한 뒤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화부(江華府)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두 가지 조목의 폐단은 급대(給代)나 견감(蠲減)을 따질 것 없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품처하게 하되, 목장(牧場)을 혁파하고 경작을 허락하게 하는 일은 해시(該寺)에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진강 목장(鎭江牧場)에 둔세(屯稅)를 더 바치도록 한 데 대해서는 이미 원세(元稅)를 징수하고 있는데다 또 둔세를 두어 주민들의 뼈를 깎는 듯한 폐단이 되고 있으며, 또한 선두포(船頭浦)·언답결(堰畓結)로 바치는 세미(稅米)가 많게는 70두(斗)나 되어 경작하는 주민들이 모두 다 흩어져 버렸으므로, 이 두 곳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도록 하는 청원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논한 바 두 가지 조목을 살펴보면 윗 항의 수세(收稅)는 모두 해부(該府)의 수성고(修城庫)에 소속되어 있으니, 그 감해 주는 숫자는 형세로 보아 장차 급대(給代)를 해야 하는데, 급대하는 방법으로는 길상 목장(吉祥牧場)의 목축이 그전부터 번성하지 않아 지금은 버려 둔 목장이 되었으니, 이곳에 나아가 경작하도록 허락한다면 1백여 결(結)의 숫자를 바칠 수 있을 것이며, 수성고에서의 급대도 넉넉하게 남아 도는 숫자가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진달한 바가 진실로 의견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해시(該寺)의 사정도 이미 상세히 알지 못하고 목장의 형편도 역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해부(該府)에 고시(告示)하여 다시 더 충분히 상의하고 해시와 의견을 서로 교환하도록 해서 편리한 데로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공충도(公忠道)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홍주(洪州) 등 14고을에서 더러는 사진(査陳)을 청하기도 하고 더러는 개량(改量)을 청하기도 하였으니, 전정(田政)의 문란함을 알 만하며, 왕정(王政)에는 경계(經界)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데, 이 고을이 이와 같다면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이 도(道)가 이와 같다면 다른 도도 알 만하다. 전정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민부(民賦)를 고르게 하겠는가? 지금 만약 일시에 행하려고 한다면 함께 거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폐단이 될 듯하니, 만약 각도의 도신과 수령으로 하여금 가장 문란한 곳부터 금년에 몇 고을을 개량해 나가게 한다면 10년이 못되어 거의 개량을 마치게 될 것이며, 번거롭지도 않고 소란스럽지도 않아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다. 묘당에서 널리 의논하고 강구(講究)한 뒤에 품처하게 하라.’ 하시고, 군정(軍政)과 환곡(還穀) 등 절실하고 고질화된 병폐 외에 여러 가지 잡폐 또한 많이 있으니, 일체로 장점을 따라 품처할 일을 명하하였습니다.
1. 홍주(洪州) 등 14고을에서 혹은 개량(改量)을, 혹은 사진(査陳)을 청한 데 대한 일입니다. 전정의 문란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있지 않았으며, 그 폐단이 본래 한결같지 않아 고을마다 각기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사진과 개량을 청한 데 대해서는 마땅히 즉시 시행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만 이렇게 잇달아 흉년이 든 뒤에 갑자기 의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다시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우선 가장 시급한 곳에 시험하되, 만일 실질적인 효과가 있으면 의당 차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공주(公州)의 충순위(忠順衛)·충익위(忠翊衛)의 군액(軍額)에서 회피하려고 도모한 자에 대해서는 해부(該府)와 해조(該曹)에 엄히 신칙하여 각별히 금단(禁斷)하도록 하고, 양정(良丁)의 포수(逋藪)084) 에 대해서는 각 고을에 행회(行會)하여 낱낱이 조사해서 없애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지금의 생치(生齒)085) 를 가지고 이들 군액과 비교해 보면 반드시 대신 보충하거나 빠진 것을 채우기에 어려움이 없을 터인데, 빠진 양정에 대한 허오(虛伍)가 곳곳마다 모두 그러하여 백골(白骨)에 대한 징포(徵布)와 황구(黃口)에 대한 첨정(簽丁)이 백성들에게는 뼈를 깎는 듯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 폐단의 근원을 따져 보면, 정말로 충순위와 충익위에 거짓 기록으로 도첩(圖帖)하여 교묘히 군역을 회피하려고 하는 까닭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 고을이 이와 같다면 한 도를 알 만하며 이 도가 이와 같다면 다른 도도 알 만합니다. 그러나 군역을 교묘히 회피하려는 것에 있어서는 충순위와 충익위에 거짓 기록하는 것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향교나 서원에 투탁(投托)하거나 지방 관아의 아전과 시골의 향임(鄕任)이 사사로이 모집하여 이름을 유학(幼學)이라고 속이거나, 선원 계파(璿源系派)086) 라고 거짓으로 일컫는 부류와, 세력을 믿거나 부유함을 끼고 생활하며 한가하게 노는 무리들을 충순위나 충익위에 비교한다면, 그 숫자가 몇 갑절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군정이 어떻게 구차하고 어렵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폐단이 그 때문에 생기게 된 것이 오래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은 이로 말미암아 곤궁해지고 초췌해지며 군부(軍簿)는 이로 말미암아 문란하게 되었으니, 한결같이 도신의 발사(跋辭)087) 에 의거하여 우선 본읍(本邑)에서부터 시행하되, 타도와 타읍에도 일체로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충주(忠州)와 양진(楊津)의 군향 미태(軍餉米太) 가운데 1만 석(石)을 한도로 정해진 수량의 반을 방출하고 남은 수량 및 반분(半分)에 대한 모미는 아울러 상정(詳定)으로 작전(作錢)하고 곡물이 적은 고을로 이송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향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향(城餉)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을 민결(民結)을 따라 배비(排比)하여 나누어 준다면 백성들이 폐단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한 지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러한 고을 수령의 보고와 도신의 말에는 반드시 참작하고 헤아려야 할 것이 있으니, 다시 새 도백에게 공문으로 하문한 연후에 품처하게 하소서.
1. 서원(西原)의 환곡은 호수(戶數)와 비교하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또 병영(兵營)의 환곡 및 상당(上黨)의 군향(軍餉)도 있어 폐단됨이 너무 심하나, 병영의 환곡은 이미 지방(支放)하였고 군향의 숫자 또한 늘리지 않았으므로 병폐가 될 것이 없으니, 고을 환곡은 반분하여 취모(取耗)하고 풍년과 흉년을 따질 것 없이 상정(詳定)으로 작전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읍환(邑還)과 영환(營還)은 성향(城餉)과 함께 모두 백성들이 많이 받게 되는 폐단이 되니 오늘날에 이르러 변통시키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영환과 성향을 당장은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읍환에 있어서는 더 늘리도록 하는 것으로 한결같이 도신의 말에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
1. 평택(平澤) 등 다섯 고을에 바닷물이 넘쳤을 때인 정묘년088) 과 무진년089) 두 해의 신포(身布)와 환포(還布)를 정감(停減)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갑자기 의논하기는 어려움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한산(韓山)과 비인(庇仁)에서 방병선(防兵船)을 개조할 때 부유한 주민을 대신 장수로 차출해서 부족한 것을 담당시킨 것은 실로 휼민(恤民)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호남(湖南)의 전병선(戰兵船)의 사례에 의거하여 공곡(公穀)을 나누어 주고 그 이자를 받아 보태어 쓰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한산 등 두 고을의 방병선을 개조하거나 개삭(改槊)할 때에 부유한 주민을 대신 장수로 차출해서 부족한 숫자를 담당하게 했다고 하니, 듣고서 매우 놀라웠습니다. 다시 새 도백에게 좋은 방안을 찾아 폐단을 혁파하라는 뜻으로써 공문으로 하문하여, 상세한 보고가 온 뒤에 품처하도록 하소서.
1. 청풍(淸風)·단양(丹陽)의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보미(保米) 및 포보(砲保)를 상납할 때에 서울과 지방의 쓸데없는 비용을 중간에서 조종(操縱)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여 금단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청풍 등 두 고을의 대전(代錢)에 대한 청(請)은, 진실로 산골의 주민들이 마련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으나, 보미와 보목(保木)은 법을 만든 뜻이 있고, 군수(軍需)의 지방(支放)에 관계된 것이니, 갑자기 의논할 수 없습니다.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것은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근래에 각 관사(官司)에서 정비(情費)를 과외(科外)로 거둬 들이는 것이 해마다 불어나고, 또 점퇴(點退)로 주구(誅求)하는 폐단이 있는 것은 이 두 고을뿐만이 아닙니다. 각별히 엄중하게 경계하여 정식(定式) 외에는 조종할 수 없도록 한다면, 대개는 조금이나마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터이니, 이로써 분부하게 하소서.
1. 태안(泰安) 등 세 고을의 각종 군포(軍布)에 대하여 옛 사례를 회복하여 모두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태안 등 세 고을의 각종 군포를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한 것이 비록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참반(參半)하도록 한 것도 여러 해가 되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하속(下屬)들이 〈담당 업무를〉 인연하여 징색(徵索)하는 것은 공통된 근심거리라 할 수 있으니, 일체로 각 관사(官司)에다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제천(堤川)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영춘(永春)의 사례에 의거하여 모두 돈으로 대신 바치게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가지 세금을 본래의 명목으로 운송 납부하게 한 것이 본래 정식(正式)인 바, 갑자기 의논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하는 것은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1. 황간(黃澗)에 있는 수어청(守禦廳)의 둔토(屯土)는 양향청(糧餉廳) 둔전(屯田)의 사례에 의거하여 둔감(屯監)을 보내지 말고 자관(自官)에 상납하게 하며, 둔우(屯牛)에 대한 세전(稅錢) 및 송아지 값은 지금부터 영영 줄이도록 하고, 천안(天安)의 둔전은 해마다 답험(踏驗)하여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며, 옛날의 둔세(屯稅)는 다른 둔전 사례에 의거하여 돈으로 상납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황간 등 두 고을의 둔토에다 경감(京監)을 하송(下送)하는 것은 바로 해당 관청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폐단을 일으키는 한 가지 건에 대해서만 단연코 엄금(嚴禁)하는 것이 합당할 뿐입니다. 그리고 둔우를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지금 60여 년을 경과하여 현재 남아 있는 우척(牛隻)이 거의 없고, 둔민(屯民)이 죽거나 유망한 지도 역시 오래되어, 인족(隣族)에 대한 징수가 반드시 따르게 될 형편이니, 특별히 영실(寧失)090) 의 뜻으로 모두 혁파하게 하소서. 그리고 천안 네 곳 둔토의 재해(災害)로 인한 곡물의 손상과 백징 또한 매우 놀랄 만하니, 해당 관청에서 한차례 답험한 뒤에 당년(當年)에 면제해야 할 것 및 영구히 면제해야 할 것을 구별해서 규정을 정하고, 옛날의 둔토에 대하여 쌀을 바치게 한 것은 애당초 규정을 어떻게 정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래 세를 바치는 명목으로 수납하게 한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양쪽이 편리하여 둔민이 힘을 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1. 음성(陰城)은 지역이 좁고 주민도 적으니 충주(忠州)의 석우(石隅) 이서(以西) 지역을 본현(本縣)에다 이속(移屬)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충주 석우의 이서(以西) 지역을 본현에다 이속하게 하는 것이 비록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등철(登徹)되지 못한 상소에 있었으나, 이쪽을 분할하여 저쪽에 주는 일은 갑자기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도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두 고을의 수령과 편부(便否)를 충분히 상의하여 다시 보고하도록 해서 품처하게 하소서.
1. 영춘(永春)에서 조자선(調字船) 한 척을 홀로 담당하게 되어 치우친 괴로움이 없지 않으니 정식(定式)에 의거하여 다시 음성(陰城)과 나누어서 담당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조자 참선(調字站船)을 수리하거나 개조하는 일을 영세한 고을에서 홀로 담당하니 치우치게 괴롭다는 탄식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경신년091) 에 이정(釐正)한 정식(定式)에 따라 시행하라는 뜻으로 분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도(平安道)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관서(關西) 여러 고을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것과 도백(道伯)이 논한 것에서 만일 채택하여 시행할 만한 것이 있으면, 묘당(廟堂)에서 사리를 따져 품처하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은 그대로 두게 하며, 그 열 고을의 일 가운데 스스로 결단할 일에 속하는 것이라도 역시 개정하거나 혁파해야 할 것이 있으면, 도백으로 하여금 각각 그 고을에 거듭 경계시킬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안주(安州)는 청천강(淸川江) 가의 포락(浦落)한 토지에 대한 전세(田稅)를 연안(延安)의 사례에 의거하여 영영 사고처리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무릇 전제(田制)는 이쪽편에서 포락으로 잃게 될 것 같으면 반드시 저쪽편의 이생지(泥生地)에서 징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청천강 일대는 물길이 이미 변경되어 강가의 전지(田地)가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듯 하였으니, 옛날의 장부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당연히 전민(田民)들에게 백징(白徵)하는 폐단이 됩니다. 별도로 더 조사하고 헤아린 뒤에 포락지와 이생지를 서로 참고하고 샅샅이 따져서 반드시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분부하게 하소서.
삼화(三和)·중화(中和)·삭주(朔州)·증산(甑山)·영유(永柔)·태천(泰川) 등의 고을은 전정(田政)이 너무 문란하고 전세(田稅)도 균일하지 않으며 백징과 가집(加執)으로 주민들이 지탱해 살아가지 못하겠으므로 아울러 양전(量田)과 사진(査陳)을 청원하였습니다. 양전법(量田法)은 크게 하는 것을 개량(改量)이라 하고, 작게 하는 것을 사진이라 하는데, 대체로 묵은 전지와 개간한 전지를 모두 측량하여 강리(疆理)를 개정(改定)하는 것을 개량이라고 말하며, 먼저 묵은 곳부터 그 허실(虛實)에 대하여 조사하는 것을 사진이라고 말합니다. 개량과 사진을 논할 것 없이 오늘날 전정이 문란하기는 팔도가 마찬가지나, 관서의 경우는 등급이 가볍고 세금이 헐하다는 것 때문에 제도를 정한 것이 처음부터 엄격하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러 가장 폐단이 심하게 되었습니다. 개량과 사진은 바로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급선무입니다. 다만, 양전(量田)하는 데 대한 의논은 선배들로부터 벌써 그러하였지만, 결국 손을 대지 못한 것이 이미 1백 년을 지날 정도로 오래 되어, 장차 전지가 있는데도 장부에 없고 전지가 없는데도 세금이 있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양전이 혹시라도 실(實)을 잃게 되면 백성이나 국가에 해로움이 도리어 양전하지 않은 것보다 심하게 되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양전하는 행정을 크게 시행하여 한꺼번에 통틀어 개정하려고 한다면 적합한 인재를 임명하지 않고 경솔하게 거론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한두 고을의 가장 심각한 곳부터 더러는 개량하고 더러는 사진하여, 한 지경(地境)의 절실히 원망스런 폐단을 바로잡아 고치어 전삼세(田三稅)의 정규적인 세금을 균일하게 하는 것은, 실로 별반 시행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며, 오직 도신과 수령이 조처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시간을 두고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깊이 헤아리고 사리를 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창성(昌城)에서는 새로 일군 전지를 가록(加錄)하고 실제대로 세금을 부과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한정이 있는 토지를 반드시 해마다 새로 개간하지는 못합니다만, 허위로 기록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정말 아주 민망스런 폐단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결국 사험(査驗)하여 별도로 더 묵히거나 일구는 것은 바로 수령의 현명함과 어두움, 근면과 태만에 달려 있으니, 이로써 다시 더 거듭 경계하게 하소서.
자산(慈山)·삭주(朔州) 등의 고을에서 아울러 개량하고 답험(踏驗)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곳은 삼화(三和)·중화(中和)와 다름이 없으니 일체로 분부하소서. 그리고 함종(咸從)·희천(熙川)·용강(龍岡) 등의 고을에서는 모두 묵은 전지에 대하여 허탈(許頉)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묵히거나 일군 전지의 거짓과 사실이 이리 저리 섞여 있지만, 일군 경우는 기록하고 묵히는 경우는 사고 처리하는 것이 바로 전제(田制)입니다. 지금 만약 묵힌 밭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곧바로 허탈해 주어, 그 묵히는 것은 있고 일군 것은 없다는 것으로 전적으로 맡겨 두게 되면 법전에 있는 대로 집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게 하소서.
맹산(孟山)은 원전세(元田稅)에 첨향(添餉)한 조목 중 부족한 것이 1백 36결(結)인데, 관용(官用)의 화세(火稅) 55석으로 원전세에 옮겨 채우고 원향(元餉)에다 보태서 보충하기 때문에 고을의 능력과 주민들의 형세로 보아 지탱해 나갈 수가 없으니, 화속(火粟)을 옮겨다 보충하는 규례를 영영 혁파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당해 고을이 주민들은 흩어지고 원세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조정에서 모두 환하게 아는 바입니다마는, 다만 봉세(捧稅)와 첨향 또한 바꿀 수 없는 규정인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조잔(凋殘)한 창고 화속 50포(包)를 이쪽에서 떼어다 저쪽에 보충하였으므로, 관아(官衙)에서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주민들 또한 보전하기 어려운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약간의 곡식 석으로 나머지 숫자를 더 경작하게 하여도 정향(正餉)에는 크게 득실이 없으며, 해당 읍의 영굴(羸詘)092) 에는 크게 관계됨이 있으니, 55석의 첨향을 특별히 견감(蠲減)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변(寧邊)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고 처리되도록 도모하는 자 및 승음(承蔭)하여 역(役)이 없는 부류에게 향교나 서원에 입속(入屬)하도록 하여, 한결같이 강생(講生)093) 의 자격을 주는 사례에 따라 사람마다 각기 한 냥(兩)을 봄과 가을에 나누어 바치게 해서, 허액(虛額)에 대한 족징(族徵)·이징(里徵)을 면제해 주도록 청원하였으며, 도신도 청하였습니다. 우선 해당 읍으로 하여금 앞서 그것이 가(可)한지를 시험하게 하소서. 일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이 아니고 말이 진실로 근거가 있으니 그들의 청원대로 허락하게 하되, 해당 읍에서부터 우선하여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삼화(三和)는 유군(遺軍) 1백 명을 원액(元額)에서 줄이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속한 7백 30명은 군(軍)이 적은 고을에다 이송하며, 마병(馬兵) 2초(哨)는 혁파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유군의 원액을 줄여 달라는 청원은 군제(軍制)에 크게 구애됨이 없고, 주민들의 폐단 또한 조금 펴지도록 하기에 충분하니 도신으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소서. 하지만 영군(營軍)을 다른 고을에다 이송하는 데 대해서는 도내에 어찌 군사가 적고 폐단이 없는 고을이 있겠습니까? 폐단을 구제하려다가 폐단을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군(馬軍)을 혁파하도록 말하는 것은 사리에 통달하지 못해서이니, 기병과 보병의 제도는 형세가 광대뼈[輔]와 잇몸[車]이 서로 의존하는 것과 같아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제 역할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 사람이 정총(定摠)한 것은 본래 의의가 있는 것이니, 갑자기 혁파하도록 의논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상원(祥原)은 호총(戶摠)이 3천 7백여 호가 되며, 군액(軍額)이 7천 6백여 명인데, 그 잡탈(雜頉)을 제하면 군호(軍戶)가 3분의 1에 불과하니 호수와 군정(軍丁)을 비교 계산 하면 배정(排定)할 방법이 없고 유망(流亡)이 서로 잇따르게 되어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은 비어 있습니다. 본읍(本邑)의 결복(結卜)은 4결(結)을 1통(統)으로 삼아 합계가 6백 60여 통이 되는데, 부(負)마다 6분의 1을 바치며, 1통에서 바치는 것이 24냥(兩)이니 그 당연히 부역을 바쳐야 할 실제 숫자를 제하면 남는 것이 8냥 영(零)이 됩니다. 그러나 모두 통수(統首)가 개인적으로 건몰(乾沒)094) 하는 데로 귀속되며, 결세(結稅)는 정규적으로 바치는 국가의 세금인데, 나머지를 도리어 사용(私用)으로 귀속되게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사례이니, 참으로 적합함을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여전(結餘錢) 합계 5천여 냥 내에서 2천 냥은 군포(軍布)의 허액(虛額)으로 급대(給代)하여 백징(白徵)하는 폐단을 면하게 하고, 3천 냥은 민고(民庫)에 귀속시켜 해고(該庫)의 부족한 비용에 보충하도록 청원하였는데, 도신이 논하는 바 역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일에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결역(結役)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 만약 당연히 지불해야 할 것에 잉여가 많다면 공적(公的)인 것은 공적인 것을 보충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합니다. 지금 이러한 군포의 무면(無麵)095) 을 대신하여 결여전(結餘錢)으로 충대(充代)한다면 군민(軍民)의 뼈를 깎는 듯한 원망이 조금은 해소될 것이며, 또 남는 돈을 가지고 민고(民庫)와 공용(公用)에 보태 쓰게 한다면 정말로 편리하고 적합하겠습니다. 이로써 분부하도록 하소서.
개천(价川)은 교생(校生)을 3대(代)로 제한하고 만약 교생의 자식이나 손자가 아니면 향교에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말며, 아비나 할아버지 모두 교생이 아니면 모두 내쳐서 군오(軍伍)로 충정(充定)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교생일지라도 낙강(落講)한 자에 대해서는 군역을 강정(降定)하는 것이 곧 법전입니다. 더구나 근거도 없으면서 모록(冒錄)한 자에 대해서는 더욱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 뒤로 모든 모록한 것에 대해서는 시강(試講)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쫓아내어 정역(定役)하며, 비록 이미 원안(元案)에 소속된 부류라 하더라도 고강(考講)하는 법을 거듭 밝혀 낙제할 경우 모두 즉시 군오(軍伍)로 보충한다는 뜻을 거듭 경계해야 합니다. 개천 한 고을 뿐만이 아니고 도내의 열읍(列邑)에 대해서도 이로써 법령으로 반포하여 한결같이 준행할 정식(定式)으로 삼아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일체로 분부하게 하소서. 이로 인하여 또 별도로 경계할 것이 있으니, 근래 군정의 폐단은 오로지 투속(投屬)하는 방법이 다양하고 도피하는 것이 더욱 심해진 탓으로 초래된 것이니, 각청(各廳)의 보솔(保率)이나 서원에 투탁한 자 및 이른바 계방(稧房)의 명색(名色) 같은 경우는 모두 간책(刊冊)에서 제외된 것인데도, 별도로 명목을 세워 조금도 제한하거나 절제함이 없어서 바로잡거나 혁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곧 수령이 사사로움을 쫓고 공적인 것을 없애는데 대하여 엄격하고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 즉시 낱낱이 조사하여 쇄환(刷還)시켜 그때그때 군오를 채우게 하되, 만약 혹시라도 옛날의 습관을 고치지 아니하고 엄폐하거나 방치하기만을 일삼는다면, 해당 수령에게 우선 찬배(竄配)하거나 금고(禁固)하는 형률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을 것입니다.
희천(熙川)과 위원(渭原) 등의 고을에서는 다른 고을에서 옮겨온 군사를 해당 읍으로 환송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당초에 옮겨올 때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였지만 지금에 와서 환송하는 것은 그 형세로 보아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우선 모두 그대로 두도록 하소서.
삼등(三登)에서는 감영(監營)에서 어떠한 형태이든 변리(邊利)096) 없는 돈으로 납번(納番)하는 전포(錢布)를 대신 지급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지금 군정의 폐단은 고을마다 그렇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공화(公貨)를 덜어내어 고을마다 수시로 대납하게 하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그리고 강서(江西)에서는 평양(平壤)에서 이사(移徙)한 군사에 대해서는 평양에서 대신 채우도록 하고 본현(本縣)에는 책임을 지우지 말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양에서 부역을 회피하려는 백성들이 강서를 토끼굴로 여기는 자가 해마다 점점 많아져 금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이거(移居)하는 고을로 하여금 대신 채우도록 새로 법을 정하게 되었던 것이니, 지금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증산(甑山)의 군관(軍官)을 양감(量減)하여 군오(軍伍)에다 옮겨 보충하되, 군관의 신역(身役)은 별도로 급대(給代)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삼등(三登)에서 감영(監營)의 무변전(無邊錢)을 얻으려고 청한 말과 다름이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태천(泰川)과 영원(寧遠)은 옮겨온 군관을 다른 고을로 나누어 보낼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희천과 위원에서 청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은산(殷山)은 자체의 면(面)·리(里) 사이에 대정(代定)하는 법을 융통성 없이 고수할 필요가 없으니, 부근 마을의 여정(餘丁)을 추이(推移)하여 대신 채울 수 있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관서의 부근 마을 사이에 대정하는 법은 기묘년097) 부터 시작하여 이미 60년 동안 바꿀 수 없는 규정을 이루었는데, 지금 융통성 없이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논의는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당초 부근 마을에 대정하게 할 때에 벌써 그 모이고 흩어짐이 무상(無常)한 것과 잔약하고 풍성함이 같지 않은 데 대한 근심을 염려하여 반드시 십년마다 한차례 통(統)을 고치도록 하였습니다. 대저 만약 이 마을의 군(軍)이 10정(丁)이면 이 10정은 이 마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며, 저 마을의 군이 만약 1백 정이면 이 1백정은 저 마을에서 벗어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이른바 마을을 대정[里代定]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마을의 잔성(殘盛)과 사람의 취산(聚散)은 1기(紀)이면 반드시 변하게 되니, 연수(年數)를 제한하지 말고 한번 정하면 바꾸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10년마다 한차례 통을 고치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통을 고친 뒤에는 반드시 그 현재 있는 실제의 숫자를 가지고 추이(推移)하여 골고루 분배하여 그때그때 변통하는 규정을 삼게 한 것이니, 이것은 실로 아름답고 훌륭한 법규(法規)로 영구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경우는 단지 부근의 마을에 대정(代定)하는 법만 지키고 통(統)을 고치는 규정을 시행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잘못을 부근의 마을에 대정하는 것에다 돌립니다. 이것이 어찌 법이 잘못된 까닭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법을 행하면서 그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로는 이같은 폐단이 가장 심한 고을이나 아주 고질화된 마을에는 반드시 이정법(里定法)과 개통법(改統法)을 때에 따라 섞어서 시행하거나 두 가지를 병행하여 다 이루어지도록 하라는 뜻으로 도신에게 신칙하소서.
총론하건대, 폐단으로 말하자면 백성들의 고통을 곡진히 살펴야 하고, 폐단을 구제하려면 요긴한 방법을 깊이 터득해야 하는데, 그 근본을 말한다면 수령을 가려 뽑는 것이며, 뇌물 받는 문을 막는 것입니다. 일이 뇌물로써 이루어지고 백성들에게 정지(定志)가 없으며 갖가지 폐단이 주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데, 군정의 폐단은 특히 그 중에서 가장 심한 것입니다. 무릇 오늘날 거짓으로 칭탁하거나 투탁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모면하려고 도모하는데 뇌물이 아니면 어떻게 그 문이 열리고 그 간교함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수령의 잘못입니다. 이 길을 막지 않으면 폐단이 제거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며, 백성을 모조리 죽이는 폐단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수령을 가려 뽑아야 하는 까닭이며, 군정의 폐단을 구제하는 급선무입니다. 이 뜻을 가지고 전조(銓曹)에 거듭 경계하소서.
영변(寧邊)에서는 본읍(本邑)의 환자곡[還上穀]에 대한 폐단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그 조목에 두 가지가 있었으니, 부호가 이를 모면하려고 도모하여 영세한 주민들이 치우치게 폐단을 받게 되는 것과 곡명(穀名)과 사명(司名)의 명목이 아주 많아 아전들의 간교(奸巧)가 쉽게 먹혀든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부호가 모면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바로 수령의 잘못입니다. 진실로 장부를 살피고 통(統)을 비교해서 가좌(家座)의 법을 엄격히 하고, 호수(戶數)를 따지고 등급을 나누어 구식(口食)의 규정을 균일하게 하며, 먼저 수향(首鄕)098) ·대민(大民)에서부터 흔들리지 않고 빠뜨리지 않는다면, 다시 어떻게 모면하기를 도모하며 치우치게 받아야 하는 폐단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종핵(綜核)하여 추쇄(推刷)하는 데 힘쓰게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형으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도신으로 하여금 살펴서 경계하게 하소서. 그리고 곡명과 사명이 요즈음 더욱 구별[門]이 많은데, 실로 이것이 각도(各道)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연전(年前)에 바로잡아 고치려는 계책을 여러 도에 널리 물었지만, 지금까지 대양(對揚)하는 논의가 없었습니다. 만약 크게 변통하는 방법을 행하지 않고서는 정말로 한꺼번에 개혁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앞으로 충분하게 상의할 때까지 기다리소서. 그 대곡(代穀)하는 법과 같은 것은 저절로 준절(準折)099) 하게 되어 있으나, 수령의 경우 감부(勘簿)하는 데 급하고 이향(吏鄕)은 환색(換色)100) 하는 데 교묘하여, 곡물 장부를 어지럽혀서 고즐(考櫛)할 방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방백으로 하여금 바르고 분명하게 집사(執事)를 장악하게 하고 수령으로 하여금 종합하여 다스려서 상부의 지시를 따르게 한다면, 비록 일제히 조사 정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례대로 점점 고쳐지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서울 각 아문(衙門)의 집전(執錢)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백성과 곡식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탄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것은 일조일석의 사고가 아니며 이미 각 해사(該司)의 경비로 쓰여 그것을 시행해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으니, 혁파하려고 하여도 할 수 없는 것이며, 바로잡고 개혁하는 것을 지금 갑자기 의논할 수도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폐단의 근본을 모두 말하였는데, 결국 깊이 생각할 것 없이 진실로 이 폐단을 구제하려면 상정(詳定)일 뿐입니다. 지금 한 도의 모든 공사(公私) 작전(作錢)을 한결같이 상정(詳定)을 따르게 하는 것이 이미 바꿀 수 없는 정제(定制)가 되었으니, 지금 다시 의논하자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창성(昌城)은 당직(唐稷)을 두태(豆太)로 환작(換作)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곡식 장부를 상세히 검토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세밀히 살핀 뒤에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삭주(朔州)는 환곡미조(還穀米條)에 대해서 흉년에 대봉(代捧)하였던 것을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환색(換色)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일의 형편을 헤아려서 장점을 따라 조처하게 하소서.
용강(龍岡) 황룡진(黃龍鎭)의 크고 작은 환미(還米) 각 5백 석을 읍창(邑倉)에다 이부(移付)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그 읍창과 진창(鎭倉)이 같은 성(城)에 함께 있다고 하여 시행을 허락할 것을 또한 한 것이니, 이에 따라 이부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삼등(三登)에서 관리하는 평양성(平壤城)의 성향(城餉) 1천 2백 석은 평양 사창(司倉)으로 나누어 주도록 청원하였습니다. 1백 리(里)안에서 조적(糶糴)하는 것은 폐단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성향은 체모가 중요하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도신이 본도(本道)의 환자곡[還上穀]의 폐단으로 가장 절실하고 고민하는 것을 총괄하여 논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산골과 바닷가 고을에 균등하게 분배하지 않는 것과 경사(京司)에서 모미(耗米)를 돈으로 환산하여 받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정(詳定)한 법을 시행한 지 몇 년이 되어 이미 항전(恒典)이 되었고 이것을 한결같이 고치지 말고 영원히 준행할 규정으로 삼는다면, 산골과 바닷가 고을이 균일해질 수 있으며 비거나 쌓이거나 할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경작전(京作錢) 한 가지 일은 실제로 서곡(西穀)의 미려(尾閭)이며 서민(西民)에게 화(禍)를 불러오는 단서가 됩니다. 비록 지금에 와서 영영 혁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신이 이른바 그 취모(取耗)를 줄이는 것은 거의 가장 심한 것을 없앨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이것은 묘당에서 획일적으로 분배할 것이 아니며, 오직 각 해당 아문(衙門)에서 각기 스스로 적당히 헤아리는 데 달려 있으니, 이 뜻으로 거듭 경계하게 하소서.
중화(中和)는 민고(民庫)를 가하(加下)하여 영전(營錢) 3천 냥을 돌려 갚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추상(推上)할 일이 아니니, 도신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소서.
상원(祥原)은 본군(本郡)의 백성들이 해가 오래 되도록 바치지 못한 각 고(各庫)의 식리전(殖利錢)에 대하여 결여전(結餘錢) 3천 냥으로 급대(給代)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군폐(軍弊)의 조목 가운데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은산(殷山)은 주민 가운데 삼고(三庫)의 식리전을 받아 낼 곳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본현의 결역(結役)이 다른 고을과 비교하여 가장 헐하니, 매 부(負)마다 한 푼[分]씩 가봉(加捧)해서 민고(民庫)에 급대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민고의 형편으로 보아 당연히 급대해야 하고 결전(結錢)이 다른 고을에 비하여 정말로 헐하며, 가봉해서 대신 채우는 것에 대해 도신이 이미 시행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에 따라 구처(區處)하게 하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도신이 총괄하여 논한 관서의 민고에 대한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몇 년 전에 암행 어사가 복주(覆奏)한 것으로 인하여 엄중히 신칙하였지만 과연 뉘우치고 고친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감령(勘令)이 비록 도신에게 관계되기는 하지만, 조종하는 것은 실제로 본읍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공하(公下)를 칭탁하고서 그대로 사사로이 쓰기도 하고, 더러는 식례(式例)를 원용하나 규정을 잘못 적용치 않음이 없어서 분수(分數)가 전몰(全沒)되고 점차로 계한(階限)을 잃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외공방(外工房)이라 일컬으면서도 만약 하등(夏等)이나 동등(冬等)의 회상(會上)할 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깍는 것을 많이 해서 적게 만들고, 거짓을 늘어 놓아 사실인 것처럼 미혹시켜 장부를 날조하여 만듭니다. 의심이 나고 분명치 않은 것을 주목하지만 도신이 총감(摠勘)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멀리 헤아려서 전례대로 성송(成送)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 어떻게 감영과 본읍에서 서로 관리하는 성과를 논하겠습니까? 도신은 10년을 염려해야 하는데 현재의 형편을 보면, 관서에 민고가 비어 있는 것이 조석(朝夕)에 박두해서 반드시 10년 씩이나 오래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무릇 가하(加下)한 고을이 있으면 적고 많은 것을 논하지 말고 5년을 기한으로 하여 아울러 보충해서 보고하게 한 뒤에, 도신이 보고가 끝난 형지(形止)를 가지고 고을마다 조목으로 열거하여 상세하게 장문하도록 하되, 만일 기한이 지났는데도 갚지 않거나 법을 어기고 다시 범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장률(贓律)로 결단한다는 뜻으로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평양(平壤)은 시전(市廛)이 조잔하고 허물어진다는 것으로써 공전(公錢)을 빌려 주도록 청하였으며, 도신 또한 별비전(別備錢)을 빌려 주도록 허락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본부의 36정(井)이 부유하기는 서울의 다음입니다. 그런데 화재가 난 나머지 쇠잔하고 허물어져 대전(大廛)이 이 때문에 철폐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영의 재물을 빌려서 사업을 회복하는 밑천을 삼도록 하는 것은 그만 두지 못할 바입니다. 다만 별비전(別備錢)은 벌써 곡식으로 바꾸어 환자곡[還上穀]에 보태게 하였으니 지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달리 길거(拮据)101) 하는 방법이 있으면, 형편을 헤아리고 힘을 저울질해서 편리에 따라 시행을 허락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정주(定州)는 갈마창(渴馬倉)에 바치는 환자곡을 본읍(本邑)에 환속(還屬)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감영(監營)에 소속된 것을 본읍의 환자곡으로 바치게 하는 것은 본래 끼치는 폐단이 많습니다. 무술년102) 에 본읍에다 소속시킨 것은 반드시 그 연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본읍에다 소속시키도록 하니 백성의 폐단을 없애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창고를 옮기는 데 대해서는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각궁(各宮)과 각사(各司)에서 소유한 토지에 대한 세금의 징수는 도장(導掌)을 보내지 말고 그 고을에 봉납(捧納)하도록 하며, 둔토(屯土)를 진고(陳告)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전에 엄중히 금지시킬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경차(京差)가 둔민(屯民)을 주구(誅求)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민들이 원한 바, 자기 고을에다 봉납하는 것은 정말로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각궁과 각사의 속사정과 형세를 상세하게 살필 수 없으니, 갑자기 혁파하도록 영을 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간교한 주민들이 진고(陳告)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선조(先朝)에서 경계하고 금지시키기를 매우 엄중히 하였습니다. 지금 혹시라도 다시 범할 경우 허실을 논할 것 없이 아울러 형배(刑配)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관과 무관을 아울러 기용한다는 데 있어서는 그 중에 어느 하나라도 폐할 수 없으니 진실로 상자(賞資)를 골고루 배분하여 양편에서 서로 격려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만 이곳의 유름(儒廩)을 깎아서 저곳의 무상(武賞)에 보태는 것은 일의 체모가 합당함에 극히 어긋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영변(寧邊)은 본도의 권무(勸武)하는 방법을 갖추어 진달하였는데, 초사(初仕)의 취재(取才)를 봄에는 감영에서 행하고 가을에는 병영에서 마련하되, 별무사(別武士) 시취(試取)에서 과거 출신이 수석을 차지하면 초사로 비의(備擬)하게 하고, 전함(前啣)이 수석을 차지하면 승자(陞資)하게 하며, 이미 승자한 사람은 오위 장(五衛將)으로 비의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서북의 과거 출신을 시재(試才)하여 서사(筮仕)하게 한 것은 본래 옛날부터의 규정입니다마는 근래에는 오래도록 폐각(廢却)하였으니, 전조(銓曹)에 분부해서 전례(前例)를 수명(修明)케 하고, 별도로 수용(收用)을 더하소서. 별무사를 시취한 뒤에 승자하고 제직(除職)하는 것은 비록 격려하고 권장하는 뜻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처음으로 거행하는 일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세히 전례를 고찰하게 해서 사리를 따져 초기(草記)한 뒤에 다시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성천(成川)의 자모 산성(慈母山城)에 소속된 일곱 고을 가운데 본읍이 가장 멀기 때문에 받을 성향미(城餉米)를 부근 여섯 고을에다 나누어 귀속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산골의 성향미가 지역이 멀어 폐단이 된 것은 옛날부터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곱 고을에다 나누어 귀속시킨 것은 본래 의의(意義)가 있어서인데, 지금 어떻게 폐단을 다른 고을에다 옮길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두게 하소서. 대곡궁세(大谷宮稅)를 고가(高價)로 억지로 바치게 하는 것과 같은 경우는 백성에게 폐단이 될 뿐만 아니라, 법의(法意)에도 크게 어긋납니다. 더구나 근년에 서울과 지방에서 돈으로 바꾸는 것은 모두 상정(詳定)을 따르도록 하였는데, 궁납(宮納)에 법 밖의 징가(徵價)를 어찌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한결같이 상정(詳定)의 뜻을 준행하여 감영(監營)에서부터 특별히 더 엄금토록 하소서.
삭주(朔州)는 별무사 도시(別武士都試)를 창성(昌城)의 방영(防營)에 직부(直赴)하게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의주(義州)와 강계(江界)의 사례에 의거하여 방영에 직부하도록 허락하는 데 대해서는 그것의 편부(便否)가 장차 어떠할런지 상세하지 않으니, 다시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삼화(三和)는 선세(船稅)를 백징(白徵)하고 있으니, 이를 사실대로 허탈(許頉)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배가 없는데 세금을 징수한다면, 토지가 없는데 결세(結稅)를 부담하게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분명하게 즉시 바로 잡으라는 뜻으로 해청에 분부하소서.
용천(龍川)은 군정(軍丁)으로 신도(薪島)에 투입(投入)한 자는 가려서 돌려보냄으로써 쌍방을 구제하고, 제도(諸島)에서 의주(義州)로 이속(移屬)한 자는 양책참(良策站)으로 추환(推還)하거나 읍으로 이입(移入)시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진달한 바가 과연 모두 합당하다 할 수 있으나, 그대로 하게 하소서.
철산(鐵山)은 군정(軍丁)에 있어서 이정(里定)의 법을 따르지 말게 하고, 신포(身布)는 호렴(戶斂)하는 제도를 처음 시행하며, 읍치(邑治)를 거련(車輦)에 옮겨 세울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이대정(里代定)은 바로 50년 동안 한 도에서 통용하던 바꿀 수 없는 규정인데, 어떻게 오늘날에 와서 변혁하도록 가볍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호포(戶布)는 한 고을에서 처음 시작할 수 있는 법이 아니므로 더욱 경솔하게 진청(陳請)할 수 없으며, 읍치(邑治)를 옮기는 것 또한 어렵고 신중히 생각해야 합당할 것이니,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자산 산성(慈山山城)에 소속된 일곱 고을의 산성 군량미에 대한 모곡(耗穀)을 본읍에 도부(都付)한 것을 일곱 고을의 민호(民戶)에 분급(分給)하고, 본읍에 독진(獨鎭)의 수성장(守城將)을 두며, 일곱 고을의 군교(軍校)를 봄·가을에 산성에서 돌아가며 조련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산성의 군량이 고을 사람들에게 폐단을 끼친다는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반드시 곡식을 저축하는 것으로써 성을 수호하는 방도로 삼았던 것은 대체로 곡식이 없으면 성을 수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니, 모조(耗條)를 일곱 고을에다 분산하는 것은 설시(設施)한 본뜻을 크게 잃은 것이며, 본읍을 독진(獨鎭)으로 만드는 것은 벌써 관방(關防)에 관계되며 또 경장(更張)하는데 관계되므로, 지금 갑자기 의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성정(城丁)을 돌아가면서 조련시키는 것은 의도는 좋으나 일이 많고 온편하기 어려우니, 모두 우선은 그대로 두게 하소서.
덕천(德川)은 신삼(信蔘)103) 의 원가를 가분(加分)하여 더 보태도록 하고, 지칙(支勅)104) 은 참(站)에 병합하여 희천(熙川)에 이송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삼값은 본래 정례(定例)가 있으며 각읍에서 균일하게 이 숫자를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올리거나 낮출 수 있겠으며, 지칙을 참에 나누게 한 것 또한 이미 정간(井間)이 이루어져 있어 옮기거나 바꿀 수 없으며 또한 변통할 수도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박천(博川)은 경내(境內)의 파괴된 동막이[坰]에다 도로 동막이를 쌓고, 고을 남쪽의 옛날 창고를 지금 다시 수성(修城)하여 본군(本郡)을 독진(獨鎭)으로 만들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동막이를 쌓고 성을 쌓으며 진(鎭)을 설치하는 것은 도신이 시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영원(寧遠)은 읍치(邑治)를 도리(道里)가 균일하고 적합한 지역에다 옮기고, 지경 안에 있는 열세 곳의 창고를 3분의 1로 통합해서 설치하며, 목물(木物)을 베도록 허락하여 요역(徭役)을 막게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읍치를 옮기는 일은 진실로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려우며, 창고를 합하는 일도 당연히 본읍에서 주민들의 뜻에 따라서 할 것이고 상부 관청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으며, 나무를 베어 요역을 막도록 하는 일은 크게 살피지 못한 논의입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운산(雲山)의 칙참(勅站)을 옮겨 정하도록 한 청원과 맹산(孟山)에서 신삼(信蔘)을 모면하려고 도모한 청원은 덕천(德川)과 다름이 없으니,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태천(泰川)에서 청한 바 여러 조목은 모두 의견이 있으며, 도신이 덧붙여 진달한 것 또한 매우 적당합니다. 청컨대 도신의 말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황해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해서(海西)의 제읍(諸邑)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군적(軍糴)에 대한 폐단은 대동 소이해서, 역시 단지 진달한 바에 따라 갑자기 변통을 가할 수는 없지만, 소는 보고 양은 보지 않았다105) 는 탄식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아울러 묘당으로 하여금 소상하게 강구하도록 하여 바로잡을 만한 것은 바로잡게 하고 그대로 둘 만한 것은 그대로 두게 하며, 이쪽의 폐단을 제거하면서 저쪽에다 폐단이 생기게 함이 없도록 할 것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평산(平山)의 관리영(管理營)에서 관리하는 점석(粘石)과 둔곡(屯穀)은 폐단이 되니 혁파하며, 둔창(屯倉)을 본부에 넘겨 취모(取耗)를 돈으로 환산하여 해당 영(營)으로 보내게 하고, 아병(牙兵)의 번전(番錢) 또한 본부에서 수봉(收捧)하여 상부로 보내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사가 있으면 먹을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둔환(屯還)을 설치하여 절반을 소속 아병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거둬 들이게 한 것은 참으로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아병일지라도 다른 고을에 흩어져 있는 자는 먼 지역에서 수납(受納)해야 하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니, 본부에 있는 아병 가운데 근처에 살고 있는 자를 대장(隊長)으로 차출하여 3백 60여 명이 받는 것을 17명의 대장에게 전부 도급(都給)하나, 대장 역시 나누어 줄 방법이 없어 그들이 모두 받아 먹는데 받아 먹은 것은 모두가 둔속배(屯屬輩)의 잡비로 들어가버려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되며, 기한이 되어 비납(備納)하는 것이 곧 백징(白徵)과 같이 되어 버립니다. 금년에 대장을 차출하고 명년에 대장을 차출하니, 시행한 지 몇 년 만에 아병이란 이름을 가진 자는 서로 돌아가면서 폐단을 받게 됩니다. 군역을 싫어하며 회피하려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똑같은 바인데 아병의 역에 있어서는 이같은 환폐 때문에 마치 죽을 곳처럼 여겨 백성들에게 뼈를 깎는 듯한 폐막이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본부에 넘겨 주어 민환(民還)의 예(例)에 따라 균일하게 나누어 주도록 한다면 숫자를 그리 늘리지 않아 환자곡을 보태게 되는 염려는 없을 듯하며, 모조(耗條)를 돈으로 환산하여 곧바로 보내도록 한다면 아병으로서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분부하소서.
1. 풍천(豊川)에서 납부하는 금위영(禁衛營)의 군보태(軍保太)를 돈으로 환산하여 상납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보(軍保)에 관한 법의(法意)는 다른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한 가지 항목만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서흥(瑞興)의 첨정(簽丁)으로 나이를 속이고 노제(老除)106) 한 자에 대해서는 나이를 뒤로 물려서 환속(還屬)하게 하며, 이를 사정(査正)할 때는 서울이나 지방에서 정채(情債)를 일체 엄히 금지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군역의 나이를 속인 자에 대하여 환속하게 하는 것은 이미 수령의 불찰이며, 심지어 이름을 고치고 사정하여 신군(新軍)처럼 대신 채우는 것 또한 조정의 법령이 아니니, 이 폐단의 근원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수령의 책임이라 여깁니다. 경사(京司)의 이서(吏胥)가 어떻게 나이를 속인 자가 이름을 고친 것을 알고서도 사정하는 정채를 침징(侵徵)하지 않겠습니까? 본읍에서 먼저 적합한 사람을 첨정으로 하여 서울이나 지방의 이속들이 침징함이 없도록 하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두 군영의 원군(元軍) 번상(番上) 때에 경영(京營)의 교리가 절제 없이 징구 토색(徵求討索)하며, 또 군안(軍案)을 수납(收納)할 때에 이름마다 돈을 바치게 하였는데, 작년에 금위영과 어영청의 군사에 대하여 번(番)드는 것을 면제한 일은 한가지 폐단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보군(保軍)은 해마다 면포를 납부하지만 원군은 당번 때에 면포를 납부합니다. 지금의 경우 4년에 한번 번들던 원군에게 해마다 면포를 징수하니 백성을 속이는 혐의가 없지 않은 데 대한 일입니다. 두 군영 상번군(上番軍)의 경영(京營) 잡비는 명색이 여러 가지로 많아 그것이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으니 정말 극히 민망하게 여길 만합니다. 복마군(卜馬軍)에 있어서는 한달에 두 차례 시태(試駄)하게 한 법의(法意)가 있으며, 군안을 수정할 때에 경영(京營)에서 마감(磨勘)하기를 한성부에서 호적을 마감하는 사례와 같이 하여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음을 이미 묘당(廟堂)에서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넘치도록 바치게 하고 더 징수하여 해마다 증가된다고 하니, 듣기에 매우 놀랄만 합니다.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두 군영의 교리배(校吏輩)가 만약 범과(犯科)한 것이 있으면, 별도로 엄중히 조처하여 징계하고 면려하게 해야 합니다. 작년에 두 군영의 상번(上番) 5초(哨) 가운데 1초는 번(番)에서 제외하였습니다. 그것은 선조(先朝) 계축년107) 에 당번군(當番軍)에 대한 제번(除番)이 한때의 임시 편의에서 나왔던 일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의 경우, 원군(元軍)을 군보(軍保)로 강등시켜 영영 번드는 것을 면제하고 면포를 거두어 중초 경군(中哨京軍)을 접제(接濟)하는 비용으로 삼게 한 것과는 다름이 없는데, 어찌 당번이냐 당번이 아니냐는 뜻을 논하겠습니까? 이것은 해당 읍에서 두 군영의 새로 정한 본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경사(京司)의 곡식을 돈으로 환산할 때 곡물의 값이 싸면 상정(詳定)을 기준하고 값이 올라가면 시장의 값을 따르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하민(下民)을 돕는 뜻이 아니니, 우선 경사에서부터 금석(金石)처럼 변함없는 법을 강구하여 밝히라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곡물 값을 상정하는 규정은 온 나라로 하여금 공통으로 시행하는 것이어서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당초에 법의(法意)가 아름답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 시가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게 하여 조정에서 융통성 있게 가격을 조절하는 정사가 없지 않았던 것은, 상정가(詳定價)가 흉년이 든 경우에는 간혹 그 혜택을 베풀기도 하지만 풍년이 든 경우에는 도리어 그 해로움을 받게 하니, 모조리 시장의 값을 따라 돈으로 환산하여 풍년이 든 해에는 풍년이 든 해의 값을 따르고 흉년이 든 해에는 흉년이 든 해의 값을 따르는 것만 같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나 백성들이나 당초에는 득실이 없었을 터이니, 이것이 어찌 〈나라에서〉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되겠습니까? 정말로 높은 값을 정하여 강제로 바치게 하는 폐단이 있다면, 이것은 경사에서 행관(行關)할 적에 고시(告示)한 일이 아니고, 영읍(營邑)의 감색배(監色輩)가 정채(情債)라고 핑계대고 억지로 명색(名色)을 세워 그것으로 인연하여 간교한 짓을 하는 것이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닌 소치인 것입니다. 비록 이것은 상정할 때라 하더라도 역시 이런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조정의 법령을 대양(對揚)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두려워 그치도록 하려고 한다면 먼저 영읍에서부터 그 폐단의 근원을 강구해야 하니, 이로써 신칙하소서.
1. 선적(善積)·소이(所已) 두 진영(鎭營)의 소속들이 송금(松禁)을 빙자하여 주민들에게 강제로 재물을 빼앗으니, 그 병폐를 구제하려면 두 진영을 폐지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과, 대현 산성(大峴山城)에 있어서는 이미 요해처[要衝]가 아니며 현재의 가호(家戶)도 20호 미만인데, 창고를 쓸데없이 설치하고 조적(糶糴)이 문란하여 환민(還民)이 탕패(蕩敗)108) 하였으니, 별장(別將)을 폐지하고 전체를 본부에 소속시키는 데 대한 일입니다. 요즈음에 와서 송금이 느슨하게 풀려 곳곳마다 민둥산인데, 이제는 이처럼 해당 진(鎭)에서는 남이 한다고 덩달아서 금지하여 경계가 민전(民田)을 침범해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들이 금양(禁養)을 잘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상(嶺上)에서는 나무를 멋대로 베고 산하(山下)에서는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 이미 아주 놀랄 만한데, 또 진속(鎭屬)들로 하여금 송금을 빙자하여 강제로 재물을 빼앗기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백성들은 그 전지(田地)를 잃고 또 그 산업(産業)을 망치게 되니, 양쪽으로 폐단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해 영(營)에서 분부하고 해당 진(鎭)에 엄히 신칙하도록 분부하여, 그 옛 경계[舊界]를 정해서 주민들이 경작하여 먹도록 허락하고 또한 진속(鎭屬)들로 하여금 재[嶺] 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재산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하여 실질적인 성과가 있게 하시되, 만일 이렇게 거듭 경계한 뒤에 다시 이런 폐단이 있다고 보고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당장 별도로 엄중한 조처를 가한다는 뜻으로 일체 분부하소서. 당해 진을 설치한 것은 관방(關防) 때문인데 살고 있는 주민이 20호에도 차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어떻게 하여 이와 같이 되었는가를 모르겠습니다. 성향(城餉)도 따라서 텅비었을 터이니, 더욱 심히 놀랄 만 합니다. 이미 보고되었으므로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해도(該道)에 공문으로 하문하고 폐단을 혁파하는 데 대한 한 가지 조목만은 도신으로 하여금 논열(論列)하여 장문(狀聞)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연안(延安)의 전적(田糴)에 폐단 있는 것으로는, 경술년109) 의 해일 후에 영영 개간하기 어려운 곳에도 백지 징세(白地徵稅)하며, 계묘년110) ·갑진년111) 의 참혹한 흉년이 든 뒤에 환향(還餉) 및 군민(軍民)의 신미전포(身米錢布)를 더러는 전부 정봉(停捧)하게 하고 더러는 절반을 정봉하게 하였는데, 그 뒤 유리(流離)한 자에 대한 족징(族徵)과 인징(隣徵)은 백지 징세를 면치 못하는 데 대한 것입니다. 해일로 인한 재결(災結)은 이제 20여 년을 지났으니 비록 더러 영영 개간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미 표재(俵災)112) 할 사목(事目)은 있으나 또한 전결(田結)을 영탈(永頉)할 사목은 없으며, 몇 해 전에 호조에서의 공문도 수경(守經)하는 논의에서 나왔었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계묘년과 갑진년에 정퇴(停退)하게 한 것은 이미 연안(延安)의 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베푼 것이며, 무진년113) 에 그대로 정퇴하게 한 것은 더욱 보기 드문 혜택이 되는데, 그 신구(新舊)를 아울러 징수하는 것을 가지고 조절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으니, 역시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봉산(鳳山)에서 안부(案付)114) 한 사옹원(司饔院)과 제원(諸院)의 작미보(作米保)에 대하여 그 쌀로 납부하게 한 규정을 폐지하고, 매 섬[石]마다 잡비 6냥(兩) 5전(錢)을 함께 재정(裁定)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보미(保米) 매 석(石) 7말[斗] 영(零)의 값은 6냥이 넘으며 거기다 잡비가 있기 때문에 비록 더러 이와 같을지라도, 지금은 장산(長山) 이북의 세납(稅納)을 이미 선운(船運)하도록 하였으니, 다른 고을에 장발(裝發)하는 폐단은 지금 논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다른 고을에 장발할 적에 수봉(收捧)하는 값을 본읍(本邑)에서 선운할 때에 내도록 책임지운다면 그것이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본색(本色)으로 직접 내게 하여 일체로 본군(本郡)의 세선(稅船)에 장발(裝發)하게 한다면 절로 쌀값을 지나치게 징수하는 폐단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분부하소서.
1. 금천(金川)의 태창(泰倉)과 북창(北倉) 두 창고가 모두 대흥 산성(大興山城)에 있으며 송도 유영(松都留營)에서 구관(句管)하는데, 본군(本郡)의 방민(坊民)115) 이 분배(分排)하여 납부하는 즈음에 사람과 말이 다치게 되니, 태창의 경우는 청석진(靑石鎭)에 이봉(移捧)하고 북창의 경우는 군창(郡倉)에 하봉(下捧)하게 하며, 또 크고 작은 남쪽 면(面)들을 송도 유영에 이속(移屬)한 뒤에 각 군문(軍門)의 가포(價布)와 보미(保米)를 송도 유영에서 수봉(收捧)하게 하고, 통어영(統禦營)의 경우는 수군(水軍)의 납포(納布)와 탈(頉)이 있는 것을 본군으로 하여금 대신 담당하게 하며, 앞서 두 면(面)의 백성으로 경사(京司)의 상납(上納)이나 각사(各司)의 정채(情債)를 대신 채우게 한 것에 의거하여 절목을 재성(裁成)하여 서울과 지방에 나누어 배치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태창과 북창 두 창고에 있는 곡물은 바로 성향(城餉)입니다. 더러 흉년이 든 해를 만나 성향을 읍창(邑倉)에다 봉류(捧留)하는 것을 일시 허락한 사례가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영영 다른 진영(鎭營)이나 군창(郡倉)으로 이봉(移捧)하게 하는 것은 설시(設施)한 본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해당 도(道) 및 송도 유영에다 공문으로 하문하여 품처하게 하소서. 크고 작은 남쪽의 면(面)들은 지금 이미 송도 유영에 이속하였으며 군민(軍民)의 납포(納布)와 충대(充代)를 송도 유영에서 거행하게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수군 9명에 대하여 본군(本郡)에 독책(獨責)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 역시 당해 도(道) 및 송도 유영에 공문으로 하문하게 한 뒤에 편리에 따라 결정하고 조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경사(京司)에 상납하는 정채가 해마다 증가하여 정말로 폐단이 되고 있는 만큼, 정식(定式) 외에 증가된 숫자에 대해서도 해당 도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에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의 진폐 책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도신이 진달한 바 구재(舊災)의 변통 및 모작전(耗作錢)에 대한 한 가지 항목은 묘당으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처토록 하며, 해당 읍(邑) 가운데 담양(潭陽) 수령이 진달한 것은 한 고을에서 논할 뿐만이 아니라 팔도에서 공통으로 시행할 만하니, 채택하여 시행할 만한 것은 여러 고을에서 진달한 것과 아울러, 일체로 품처토록 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본도(本道)의 구재(舊災)는 병신년116) 에 묵은 것을 조사한 뒤로 그대로 묵은 것이 3천 5백 54결(結)인데, 해마다 백징(白徵)을 하는 만큼 합쳐서 변통함이 있어야 하며, 서울과 지방 아문(衙門)의 모작전(耗作錢)은 감히 나이(挪移)117) 하지 말도록 하고, 반드시 원곡(元穀)이 있는 곳에서 모곡(耗穀)을 취하여 집전(執錢)하게 하며, 각 궁방(宮房)이나 아문의 둔세(屯稅)는 도장(導掌)을 보내지 말고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직접 살펴 집복(執卜)118)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도신이 청한 세 가지 조목은 다만 본도에서 이러할 뿐만 아니고, 여러 도에서도 이러한 폐단이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구재(舊災)는 바로 그전부터 이미 묵어 있는 것인데 영탈(永頉)에 편입하지 않고, 매번 무면(無麵)119) 이라는 핑계로 곡식이 안되는 척박한 토지에다 세금을 징수하고야 마니, 이것은 크게 인정(仁政)으로서 행할 바가 아니며 실로 소민(小民)들의 절실한 원망이 됩니다. 그렇지만 전부(田賦)에 대한 정제(定制)가 이미 금석처럼 되어 있으니 반드시 새로 일군 것과 옛날에 묵힌 것을 서로 참고하고 대대(對待)하여 새로 일군 것으로 묵힌 것을 보충하도록 함으로써 원결(元結)의 총액을 감함이 없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진탈(陳頉)을 허락해야 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토(王土)에 대한 경상적 세공(稅貢)의 제도가 장차 점차로 훼획(毁劃)되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러한 점이 비록 백징(白徵)의 폐단을 알지라도 끝내 그것을 감해 주도록 청할 방법이 없게 되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지금 곡식이 나는 토지는 거의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옛날에 비하면 거의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닌데, 오히려 원총(元摠)은 점점 줄어들고 정세(正稅)도 점차로 줄어들게 되니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바로 한 지역을 다스리는 자가 모두 전제(田制)에 어두워, 묵히거나 개간하는 즈음에 제대로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고 조사하거나 측량하는 절차를 주관하는 것도 능하지 못해 한결같이 아전들의 손에만 맡기고 멋대로 일을 보살피지 않은 소치입니다. 별도로 여러 고을에 경계하여 더욱더 조심스럽게 고치기를 도모하라는 뜻으로 제도(諸道)에 행회(行會)하게 해야 하며, 서울과 지방의 모작전(耗作錢)에 대하여 한결같이 본곡(本穀)의 실제 숫자를 따르게 하고 혹시라도 값을 따라서 나이(挪移)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병진년120) 의 수교(受敎)가 지극히 엄중하여 그 당시 도신(道臣)이 찬배(竄配)의 처벌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개관(改觀)하는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몇 년을 겨우 지나자마자 또다시 처음과 같이 되었으며, 근년의 경우는 더욱 제멋대로 하고 있으며 산골과 바닷가가 균일하지 않은 것은 더욱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경사(京司)의 작전(作錢)에 있어서도 만약 도신으로 하여금 법에 의거하여 고을에 나누어주게 하고 수시로 옮기거나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면, 치우치게 많거나 치우치게 적으며 이쪽에는 쌓이고 저쪽에는 비게 되는 폐단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앞으로 만약 범과(犯科)하면 먼저 도신을 처벌한다는 뜻으로 엄중히 공문을 보내어 별도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도장(導掌)을 혁파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관서(關西)의 진폐 책자에 대한 회계(回啓) 가운데 진달하였으니, 이것 또한 일체로 시행하게 하소서.
담양(潭陽)에서는 산송(山訟)의 폐단을 크게 진달하면서 영갑(令甲)을 정하고 별도로 절목을 만들도록 청원하였으며, 저채(邸債)121) 하는 풍습을 갖추어 논하면서 분수(分數)를 짐작해서 결정하는 데 대하여 엄격하게 금단(禁斷)을 가하며, 아울러 서원(書院)과 소청(疏廳)에서 경저(京邸)에게 징색(徵索)하는 것을 영영 막도록 청하였습니다. 군정(軍政)은 계해년122) 의 사례에 의거하여 청(廳)을 설치해서 첨정(簽丁)하고, 군포(軍布)의 경우에는 호렴법(戶斂法)을 시행하여 양반이나 천민이나 골고루 징수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산송(山訟)에 대한 법은 품(品)을 따라 계보(計步)하여 각각 등급에 따른 제한이 있으니, 법을 상세하게 마련한 것에 산송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되자 점점 느슨해졌으며, 요즈음에는 더욱 문란하여, 넓게 차지하고 몰래 매장하는 등 온갖 놀라운 일이 없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법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관리는 법을 지키지 않고 백성은 법을 두렵게 여기지 않아 법이 저절로 시행될 수가 없어 거의 법이 없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금석같은 과조(科條)가 옛날에도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영갑(令甲)을 정하고 새로 절목을 간행할 수 있겠습니까? 안팎의 산송을 관장하는 관원에게 엄중히 경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력이 있는〉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말고 〈의지할 데 없는〉 고경(孤惸)을 가볍게 보지 말며, 한결같이 조종조(祖宗朝)에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고 감히 마음대로 유추 해석함이 없도록 하며 오직 법대로 결단하게 한다면, 시끄럽게 떠드는 소송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사로이 〈무덤을〉 파는 죄는 형률이 본래 유형(流刑)에 해당되는데 사면을 받게 되면 번번이 석방되므로 억지를 쓰면서 〈처벌을〉 두려워 할 줄을 모르고, 사사로이 추매(椎埋)123) 하여 정범(情犯)이 몹시 참혹한 일이 달마다 생기는데도 관리가 금지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그들이 자수(自首)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기필코 계획을 꾸민 원범(元犯)을 조사하여 형률을 적용한 뒤에는, 비록 널리 사면[曠蕩]하는 때를 만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사면하는 은전에 뽑아서 넣지 말도록 한다면, 거의 악한 자를 징계하고 간사한 짓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팔도에 행회(行會)하고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저채(邸債)에 대한 폐단은 묘당으로부터 절목을 만들고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우는 등 근래에 더욱 절실하게 하고 엄중히 하였는데도, 끝내 쌓인 폐단을 시원스럽게 혁파하지 못한 것은 바로 수령의 죄입니다. 관아에서 쓴 것은 그때그때 보상하고 관리가 진 빚은 즉시 갚도록 하며, 사사로이 민간에 빚을 놓아 이자를 받거나 와채(臥債)124) 를 친족에게 징수하는 것과 같은 유형에 대해서는 모두 본전은 탕감하게 하고 범한 자를 형배(刑配)하게 한다면, 저리(邸吏)와 백성 사이에 양쪽이 서로 관계가 없게 되어 온갖 폐단이 저절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이 뜻을 절목에 보태 넣어 각도(各道)에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서원(書院)과 소청(疏廳)에서 저전(邸錢)을 곧바로 바치지 못하도록 몇 년 전에 이미 연품(筵稟)하여 영구히 금지하게 하였습니다. 양역(良役) 대상의 장정을 찾아내어 첨오(簽伍)하는 것은 오직 수령이 원망을 떠맡으면서 법을 지키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서울에서부터 청(廳)을 설치하여 한갓 시끄러운 단서만 보태게 할 필요는 없으며, 호포법(戶布法)은 이미 지금으로서는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으로써 관서(關西)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회계(回啓)에서 갖추어 진달하였습니다. 모두 그대로 두게 하소서.
광주(光州)는 환곡을 2만 석에 한하여 돈으로 환산하도록 해서 곡식이 적은 다른 고을에다 옮겨서 나누어주게 하며, 적법(籍法)을 엄중하게 세워 첨정(簽丁)의 충역(充役)과 서울·지방의 상납(上納)에 원래의 인정(人情) 외에 더 징수하는 것을 묘당(廟堂)에서 거론하여 경계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곡총(穀摠)이 많은 것은 줄이고 적은 것은 보태도록 하는 것이 도신의 직분이며, 적정(籍政)은 사실대로 빠뜨림이 없게 하는 것이 수령의 책임입니다. 환곡은 도신으로 하여금 장부를 고찰하여 균일하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치우치게 많아지는 근심이 없도록 하며, 적법(籍法)은 지나간 것은 비록 논하지 않더라도 이 뒤로 식년(式年)부터 시작하여 반드시 가좌(家座)를 따라 낱낱이 입적(入籍)하도록 해서 군정이 빠지거나 부역을 도피하는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의 정채(情債)에 대한 폐단은 해마다 증가하여 갖가지 간교함이 더 생겨나 마지막에 생기는 피해는 전부 소민(小民)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전후로 거듭 경계한 것이 엄중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조금도 그칠 줄을 모르고 폐단이 다시 심하여 하속(下屬)들의 횡포가 심할 뿐만이 아니니, 바로 관장(官長)이 분명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러나 밖으로는 도신에게 공문으로 경계하고 안으로는 해당 관사(官司)에 충분히 경계하되, 그 뒤에도 만약 고치지 않으면 먼저 관장부터 무겁게 죄를 주고, 범(犯)한 자를 조사해 가려 먼 섬에다 형배하도록 하소서.
영광(靈光)에 있는 궁둔(宮屯)과 각둔(閣屯)에 궁차(宮差)나 각속(閣屬)을 보내지 말고 무토 면세(無土免稅)의 사례에 의거하여 본읍(本邑)에 넘겨 주어 봉납(奉納)하게 하며, 호조의 어염세(魚鹽稅)와 선세(船稅)는 한결같이 배와 염분(鹽盆)의 실제 숫자에 따라 세금을 바치도록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지방의 고을에 대한 도장(導掌)의 폐단과 어염세(魚鹽稅)를 치우치게 징수하는 원망은 이미 전후의 회계(回啓)에서 진달하였으니 다시 번거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도나 저 도의 도신(道臣)과 수령이 논한 바를 관찰하건대, 폐단이 다르지 않고 그 말이 같습니다. 그것은 공적으로는 지나치게 바치도록 한 것이며 백성에게는 원통하게 징수한 것이니, 공통으로 각도에서 고루 뼈를 깎는 원통함이 됩니다. 이 뜻을 각 궁방(宮房) 및 내각(內閣)과 해청(該廳)에 분부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사하여 바로잡고 개정하여 구제하게 하소서.
나주(羅州)는 환곡의 아문 명색(衙問名色)이 번거로운 것을 줄이고 간략하게 하여 서리(胥吏)들의 간교함을 막도록 하며, 각사(各司)의 작전(作錢)은 한결같이 해서(海西)의 원모곡(元耗穀)을 작전하는 사례에 의거하여 반드시 상정(詳定)한 것을 따르되, 두곡(斗斛)의 대소(大小)는 유곡(鍮斛)으로 교정(校正)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곡명(穀名)과 사명(司名)을 개정하는 논의는 그전부터 이미 그러하였으며, 지난번 관서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하여 회계(回啓)하면서 역시 낱낱이 펴서 진달한 바가 있었으니 지금 거듭 번거롭게 할 수 없습니다. 상정하여 작전하는데 대해서는 관서의 경우 시행한 지 몇 년이 되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 다른 도에서도 의당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 편부(便否)를 작전(作錢)하는 아문에다 충분히 물어서 한 가지를 지목하여 품정(稟定)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두곡을 유곡으로 교정하는 것은 이미 조정의 법령과 규정이 있으니, 감영과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오가며 충분히 상의하면 족히 규정을 준용하여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번거롭게 아뢸 필요는 없겠습니다.
순창(淳昌)의 환곡 3만 석을 다른 고을에 이송하게 하는 청원은 도신으로 하여금 장부[簿]를 상고하여 균일하게 나누어주도록 하며, 순천(順天)의 통모(統耗)를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수송하여 가게 해달라는 청원은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고 헤아려서 조처하게 해야 합니다.
무안(務安)에서는 승호군(陞戶軍)을 뽑아 올리는 즈음에 부유한 주민들이 탈하(頉下)하도록 도모하여 가난한 자로 구차스럽게 보충시키니, 〈승호군을〉 뽑아 올리는 법을 영영 혁파하고 서울에서 정밀하게 뽑도록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훈련 도감의 승호군을 〈뽑아 올리는 법은〉 바로 숙위 친병(宿衛親兵)을 선발해 올리는 법으로 본래 엄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 고을 원이 진달한 바 가려 뽑을 즈음에 누구는 그대로 두고 누구는 빼어버리는 것이 폐단이 되어, 상호(上戶)인 부유한 주민은 갖가지 방법으로 탈하하려고 도모하며, 가난하고 잔약하여 의지할 데 없는 자들만 구차스럽게 강제로 채우므로 도피하는 일이 서로 잇따르고 피해가 이웃과 친척에게 미친다고 말한 것은 폐단이 실로 그러하나, 폐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된 까닭은 오로지 고을 원들이 능히 법의(法意)를 무섭게 생각하여 준수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거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부유한 주민은 탈하를 도모하게 하고는 가난하고 잔약한 자로 구차하게 채운 것이 과연 누구의 책임입니까? 직접 가려 뽑는 업무를 잘 집행하고 아전이나 향임(鄕任)에게 맡기지 말았더라면, 부유한 주민도 당초에는 모면할 수 없었을 터이며, 가난하고 잔약한 자도 당초에는 구차하게 뽑히지 않았을 것이고, 뇌물을 받고 일부러 빼버리거나 의지할 데 없는 자에게 불법으로 침해하는 등, 허다한 간교와 농간이 저절로 행해질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가려 뽑은 군사도 날래고 근실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법은 본래 이와 같은데 폐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더구나 선발하여 올려보내는 일 또한 해마다 늘 있는 일이 아니고 비록 식년(式年)인 때라고는 하지만, 열읍(列邑)이 본래 정간(井間)에 정해진 당차(當次)가 있고 그 가운데에도 분정(分定)한 명수(名數)가 있으므로 고을마다 십수년에 한두 명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폐단이 있다고 말하면서 막중한 군제를 갑자기 의논하여 경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폐단에 대한 등문(登聞)을 허락하였으니, 비록 살피지 못한 데 관계되기는 하지만 지금 해당 고을의 원을 논박하며 책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로써 신칙하소서. 승호군을 뽑아 올릴 즈음에는 한결같이 구법(舊法)을 준행하고 폐단에 가까운 것은 따르지 말도록 하라는 뜻으로 각 고을에 미리 경계하게 하소서.
함평(咸平)은 분정(分定)한 인책(印冊)의 비용이 결역(結役)에서부터 나오지만 주민들에게 백징(白徵)하는 것이 많으니, 만일 진강(進講)하는 책자(冊子)가 아니면 인출(印出)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인역(印役)을 당하게 되더라도 매우 줄여 간략히 할 것을 청원하였습니다. 주민과 고을에 폐단을 끼치는 것이 이와 같이 치우치게 심하니, 진강하는 책자가 아닌 것 및 긴급하게 쓰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쉽사리 공문을 발송하여 자주 인역(印役)을 올릴 수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옥당과 내각(內閣) 그리고 성균관에 분부하소서.
함열(咸悅)은 영운(領運)에 실제로 네 가지 폐단이 있으니 창속(倉屬)을 일곱 고을에서 돌아가며 차원(差員)을 정하도록 청원하였는데, 도신(道臣)의 논의 또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임자년125) 에 규정을 정하였는데 오래되지 않아 또다시 규정을 고친다면, 그것이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일이 조운(漕運)하는 제도를 변통(變通)하는 데 관계되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처하게 하소서.
장수(長水)는 본래 순포(純布)로 수납(收納)하게 하였었는데 지난 신해년126) 에 별도로 규정을 정하여 순전(純錢)으로 대납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면포가 귀할 때에 주민들의 청원을 따라 경장(更張)한 것에 불과하며, 이번에 도로 본색포(本色布)로 비납(備納)하게 한 것도 역시 주민들의 청원에서 나온 것입니다. 돈으로 받거나 면포로 받거나 공가(公家)에 있어서는 또한 득실이 없으니, 청원한 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강진(康津)은 세위태(稅位太)를 영암(靈巖)과 해남(海南)의 사례에 의거하여 콩 2석(石)에 대미(大米) 1석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본현(本縣)은 바닷가에 위치하였으므로 염분이 많아 콩을 심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또한 영암·해남과 다름이 없으니, 세납(稅納)을 판비(辦備)하기 어려운 것은 주민들의 형편으로 보아 진실로 그러합니다. 영암의 경우는 숙종(肅宗)경자년127) 에 그곳은 콩농사가 적합하지 않은 땅이라고 하여 주민들의 청에 따라 쌀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으며, 해남에도 쌀로 대납하게 하면서 모두 콩 2석을 쌀 1석으로 대납하게 하고 준절(準折)해서 대환(代換)하도록 하였습니다. 강진이 영암·해남 지역과 이미 잇달아 닿아 있고 토산물 또한 같은데, 두 고을에는 이미 변통하게 하였으니 강진의 주민들이 이를 끌어다 청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위태(位太)로 본청(本廳)에 있는 것 가운데 각 공(各貢)으로 먼저 받은 것 또한 2석의 콩을 1석의 쌀로 환작(換作)하게 한다면 더욱 구애됨이 없을 것입니다. 다른 고을의 사례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전주(全州)·여산(礪山)의 양향(粮餉)과 둔토(屯土), 그리고 옥구(沃溝)의 양궁방(兩宮房) 및 기로소(耆老所)의 전답은 모두 지역적으로는 묵히거나 폐지한 것이 있고 세금은 정액이 있는데, 경납(京納)은 반드시 고총(高摠)을 책임지게 하므로 주민들의 세금은 갑절의 징수를 모면하지 못하니, 세 고을에서 묵히고 있는 것은 모두 타량(打量)128) 때를 기점으로 하여 실제대로 세금을 정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대체로 양향이나 각 둔토는 바로 적몰(籍沒)한 전답을 관아에다 귀속시킨 것인데, 토민(土民)들은 주인이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관리들은 보기를 이굴(利窟)로 여기므로 세금이 헐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도 주민들은 오히려 중요하게 여기며, 바치는 것은 정해진 숫자가 있는데도 관리들은 반드시 더 징수하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폐단이 자연 겹으로 생겨나는데 이는 또한 경청(京廳)에서 아는 바가 아닙니다. 당초에 세금을 정한 것이 비록 실제의 결수(結數)를 따랐다 하더라도 해가 오래된 뒤에는 묵히거나 일군 것이 없지 않으니, 별도로 타량하도록 파견하여 한차례 이정(釐正)하는 것 역시 주민들의 청원을 따라주는 한 가지 일이 됩니다. 해청(該廳)에 분부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하게 하소서. 양궁방 및 기로소의 전답에 대하여 그 폐단을 말한 것 역시 양향·둔토와 다름이 없습니다. 각기 둔감(屯監)을 보내어 실제대로 세금을 정하라는 뜻으로 일체로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주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제주 등 세 고을에서 조목으로 진달한 가운데 목자(牧子)와 긴요하지 않은 봉대(烽臺)를 혁파하도록 한 논의는 세 고을이 모두 그러하니, 봉대의 경우는 보존시키느냐 혁파하느냐 하는 것을 잘 헤아릴 일을 해도(該道)에 분부하도록 하고, 목자에 대한 폐단은 3년에 한 번 점고하는 편부(便否)를 태복시(太僕寺)로 하여금 장점을 따라 품처토록 하며, 그 나머지 여러 조목은 묘당에서 조처하도록 하는 일을 명하(命下)하셨습니다. 제주목의 별저곡(別儲穀)을 오래도록 창고 안에 유치시켜 두게 한 것은 뜻하지 않는 일을 대비해서이니, 원환(原還)으로 새로 바치는 보리와 쌀은 해마다 숫자를 나누어 환색(換色)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별저곡은 이미 경오년129) 봄에 호남(湖南)의 진자(賑資)로 삼아 호남에 이전하고서 아직 미처 되돌려 받지 못하였으니, 되돌려 받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정(議定)한 뒤에 품처하게 하소서. 세 고을의 연대(煙臺)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곳은 혁파하도록 청원한 데 대하여 적당히 헤아려서 보존시키거나 혁파하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다시 본목(本牧)에 공문을 보내어, 긴요하지 않아 당장 혁파해야 할 곳이 몇 군데인가를 묻고 논열(論列)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각 목장의 목자(牧子)에 대하여 식년(式年)에 한 번 점고할 것을 청원한 데 대하여 태복시로 하여금 품처하게 한 명이 있었습니다. 3년이나 해마다 편부(便否)를 묻도록 해시(該寺)로 하여금 사리를 따져 품정하게 하소서.
대정(大靜)과 정의(旌義)의 주민들은 영역(營役)에 배정하지 말고 한결같이 현재 살고 있는 고을에다 입적(入籍)하도록 청원하였습니다. 본목(本牧)과 양읍(兩邑)에서 청원한 바가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각반(各般)의 신역(身役)은 아비의 역(役)을 따라 채우도록 청원하였습니다. 청원한 바가 적합함을 얻었으니 이에 따라 규정을 정해서 시행하게 하며, 대정(大靜)의 양전(量田)은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정말로 그대로 두도록 하고, 정의(旌義)는 이교(吏校)의 원액(元額) 외에 투속(投屬)을 원하는 자는 일체 허락하지 말고, 아울러 군역에 보충하도록 한 것은 실제로 누락된 장정을 찾아내는 데서 출발하여 군정(軍政)을 엄히 하라는 뜻으로 의시(依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함경도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에서 품처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삼수(三水)·갑산(甲山)·경성(鏡城) 등의 고을에서 녹용을 봉진(封進)할 때에 수렴(收斂)하는 폐단입니다. 한 대(對)의 값이 1백 냥이라는 것은 많지 않은 것이 아닌데, 심약(審藥)의 무리가 중간에서 조종하여 트집을 잡아 점퇴(點退)130) 하기도 하며, 아울러 값을 보태어 징출(徵出)하게 하고는 그의 개인 주머니로 돌리니 극도로 놀랍습니다. 도신이 청한 바에 의거하여 원회(元會)에서 1백 냥을 감하게 하며, 태가(駄價) 18냥 외에는 다시 감히 값에 보탠다는 명색(名色)으로 민간에서 수렴하는 것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중하게 신칙하소서. 약용으로 하는 녹용은 중량이나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계산하지 말고 오직 성미(性味)의 좋고 좋지 않음만을 가리도록 이미 선조(先朝) 때 규정을 정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 뒤로는 만약 정말로 진품(眞品)일 경우 양수(兩數)가 조금 가볍거나 무겁더라도 트집을 잡아 점퇴하지 말고, 정해진 규정에 의거하여 봉진(封進)하게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함흥(咸興)·정평(定平)·북청(北靑)에서 천신(薦新)하거나 진상(進上)하는 생과어(生瓜魚)와 생대구(生大口)에 대하여 월령(月令)의 기한을 물리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제때에 하는 것이 없고 매번 기한을 물려주기를 청원하니, 사체(事體)가 극도로 지저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삼가 항상 기한을 물려 주기를 청원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월령을 개정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품처하게 하소서.
1. 무산(茂山)·갑산(甲山)·경흥(慶興) 세 고을은 환곡은 많고 주민이 적으므로 가까운 고을에 이전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육진(六鎭)에 환상곡(還上穀)이 많은 폐단은 고을마다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도리(道里) 또한 멀어서 전수(轉輸)하는 데 폐단이 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각 해당 읍과 의견을 교환하여 장점을 따르고 적합함을 헤아려 변통하되, 이쪽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저쪽으로 병폐를 옮기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1. 삼수(三水)의 지방곡(支放穀) 가운데 부족한 숫자는 본읍(本邑)의 군향곡(軍餉穀)·상평곡(常平穀)·진휼곡(賑恤穀)·사진곡(私賑穀)을 가지고 나누어주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읍은 한쪽 모퉁이에 위치하여 도리(道里)가 아주 먼데, 방하(放下)하는 물품을 다른 고을에 나누어 주도록 한다면 전수(轉輸)하는 즈음에 여러 가지로 폐단이 될 터이니, 변통하는 방법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원한 가운데 상평곡과 진휼곡은 이용(移用)할 수 없도록 하는 뜻을 새로 연품(筵稟)하여 행회(行會)하였으니 이것은 논할 것 없지만, 군향이 비록 중하더라도 지방(支放)하는 물자 역시 가볍게 하지 못할 것이니, 관서(關西)에서의 사례에 의거하여 모조(耗條) 중에서 나누어 주도록 허락하고, 아울러 사진곡과 모조를 적당히 헤아려 가져다 쓰도록 하되, 감히 원곡(元穀)을 축내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으로 각별히 엄중 경계하도록 하소서.
1. 단천(端川)과 길주(吉州)의 당미(䅯米)와 명천(明川)·고원(高原)의 태환(太還)을 변통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단천·길주·고원에 대해서는 준절(準折)에 의해 다른 곡식으로 환작(換作)하는 것을 청원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되, 반드시 정곡(正穀)으로 환작하게 하여 감히 피곡(皮穀)으로 준절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거듭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명천에는 조(租)·속(粟)·태(太)를 서로 대납하게 하고, 단천의 피당(皮䅯)을 개록(改錄)하라는 말은 크게 법의(法意)에 어긋나므로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무산(茂山)의 원전(元田)을 속전(續田)으로 시행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정전(正田)을 낮추어서 속전에다 부치는 것은 바로 법 밖의 사안에 관계되며 아래에서부터 앙청(仰請)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역시 경솔하게 시행하도록 허락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산의 환곡이 많은 폐단이 된다는 것은 바로 조정에서 평소에 항상 진념(軫念)하면서도 바로잡거나 구제할 요점을 얻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전(火田)이나 더 일군 것을 모두 정결(正結)에 넣어 세금을 바치게 하고 환곡으로 기록하였으므로 그 숫자가 매우 많고, 묵히거나 폐기한 데 대한 백징(白徵)이 수천 결에 이르는데, 정말 도신이 논한 바와 같다면 정전이나 속전을 옮기거나 바꾸기 어렵다는 것으로 일체 미루어 나갈 수 만은 없으니 도신으로 하여금 별도로 차관(差官)을 정하여 본 고을의 원과 함께 입회하여 적간(摘奸)하게 하며, 화전 가운데 정전에 뒤섞여 들어간 것은 사실대로 구별해서 장문(狀聞)하게 한 뒤에 다시 품처하도록 하소서.
1. 함흥(咸興)의 원전(元田)과 속전(續田) 가운데 묵힌 곳에 대한 탈급(頉給)과 새로 일군 곳으로 더 드러난 것에 대하여 변통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묵힌 전지에 대하여는 경작을 권하고, 새로 일군 토지를 결수에 충당하는 것은 원래 법전에 정해진 것이니, 지금 원전과 속전 가운데 묵거나 황폐해진 곳에 대하여 한꺼번에 모두 탈급하도록 하는 것은 논할 바가 아니며, 새로 일군 것을 수효에다 강제로 정하는 것은 본래 정해진 규정이 아니나, 해마다 1파(把)의 가감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각 고을의 잘못된 사례일 것입니다. 이 뒤로는 해마다 집복(執卜)하여 실제 숫자대로 입총(入摠)하게 하라는 뜻으로 지위(知委)하여 시행하게 하며, 이와 같이 한 뒤에도 각 고을에서 한갓 감하고 줄이기만을 일삼거나 혹은 은닉·누락시키는 폐단이 있어 뒤에 발각이 되면, 해당 수령은 결단코 전결(田結)을 환롱(幻弄)한 죄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니, 이로써 일체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장진(長津)의 〈전지(田地)를〉 개량(改量)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본부(本府)의 토지는 모두가 속전(續田)인데다 묵히고 일군 것이 서로 뒤섞여 부역(賦役)이 고르지 않아 온 고을의 주민들이 모두 개량하기를 청원하였다고 합니다. 청원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되, 개량할 즈음에는 잘 살피거나 신중하게 하지 못하여 일경(一頃)이나 반묘(半畝)라도 혹시 실(實)을 잃어버릴 것 같으면, 주민이나 국가가 폐단을 받게 되어 도리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해당 수령을 엄중 경계하여 감히 그릇되게 하여 죄에 저촉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1. 문천(文川)·홍원(洪原)·북청(北靑)의 어선세(漁船稅)를 감총(減摠)하는데 대한 일입니다. 어장(漁場)과 선척(船隻)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있어 세납(稅納)과 수용(需用)을 보태거나 줄일 수 없도록 해청(該廳)의 절목(節目)이 극히 거듭 엄격하니, 감총하는 한 가지 일 만은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장이 허물어지고 폐기되었거나 선척이 부서지고 손상된 곳에 대해서는 반드시 새로 설치하는 어장과 새로 만드는 선척으로 원총(元摠)을 대신 채우도록 하는 것은 곧 바꿀 수 없는 법이니, 이로써 엄중히 경계하게 하소서.
1. 온성(穩城)과 경흥(慶興) 목장말의 자산(孶産)131) 과 고실(故失)132) 을 감수(減數)하고 달종(㺚種)을 정파(停罷)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고실(故失)이 세 번 탈나면 하나를 징수하게 하고 새끼를 낳은 세 마리의 암컷 가운데 한 마리를 바치게 하는 것은, 바로 각도의 목장에서 당연히 행하여야 할 규정이니 숫자를 줄일 수 없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달마(㺚馬)를 무역하여 들이는 것은 바로 종자를 얻고자 하는 뜻에서인데, 수초(水草)에 익숙하지 않아 한 마리도 생존하지 못하니, 공적으로는 해마다 곡식을 허비하게 되고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필(匹)마다 대금을 징수하게 되어, 해로움은 있고 유익함은 없는 것이 참으로 도신이 논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풍토와 기후가 이미 저쪽 땅[彼地]과 가깝기 때문에 번식시켜서 달종(㺚種)을 취하려고 한 것은 반드시 당초부터 의의가 있었던 것이니, 갑자기 정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영흥(永興) 말응도(末鷹島)의 말을 문천(文川)의 사로도(獅老島)로 옮겨 기르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마필을 외양(喂養)하면서 목호(牧戶)를 주지 아니하고, 빈 목장을 수축(修築)하게 하면서 촌민(村民)들에게 폐단을 끼치게 되어 일이 너무나 의의가 없이 되며, 도연포(都淵浦)에 옮겨서 기르도록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니 청원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되, 마필만 옮겨 가도록 할 수 없으니 목호를 문천에 함께 보내도록, 이로써 분부하소서.
1. 갑산(甲山)의 행전(行錢)133) 에 대한 일입니다. 서변(西邊)은 저쪽 땅과 서로 닿아 있는 곳으로 기한을 정하여 〈전지(田地)를〉 묵히거나 폐기하므로 주민들의 살고 있는 곳과의 거리가 서로 모두 수백 리가 넘습니다. 그러나 북변(北邊)은 경원(慶源)과 회령(會寧) 등의 지역이 더러는 강을 사이에 두고서 닭 소리와 개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서변에서는 행전하게 하였으나, 북변에서는 막도록 한 것입니다. 갑산은 저쪽 땅과의 거리가 서변과 다름이 없고 동일한 한 도(道) 안의 변지(邊地)인데, 육진(六鎭)에는 허락하지 않고 갑산에서만 허락한다면, 일이 원칙 없이 처리되는 것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두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원 도의 진폐 책자(陳弊冊子)에 대한 판부(判付) 내에 묘당에서 품처할 일을 명하(命下)하였습니다.
1. 도내 26고을의 인삼값이 해마다 증가하고 가호마다 결렴(結斂)과 번전(番錢)·이전(利錢)을 거두는 것이 뼈를 자르는 듯이 지탱하기 어려운 병폐가 되니, 특별히 경작공(京作貢)을 허락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관동(關東)의 인삼에 대한 폐단은 크고 작은 여러 고을을 따질 것 없이 공통된 근심거리여서, 지나간 적에 그 일년 동안 쓰고 남을 것을 계산하여 작공(作貢)하도록 변통하였습니다. 만약 폐단이 있을 때마다 변통하게 한다면, 막중(莫重)한 탕제(湯劑)에 사용하는 데 남을 것이 거의 없게 될 터이니, 토공(土貢)의 뜻이 또한 정말로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의 체모가 있는 바 갑자기 작공을 의논할 수 없으니, 그대로 두게 하소서.
1. 철원(鐵原) 등 개량(改量)을 하지 않은 9고을에 대하여 양전(量田)을 하게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전결(田結)이 문란한 폐단은 여러 도가 마찬가지이지만 호서(湖西)의 진폐 책자(陳弊冊子) 가운데 양전에 대한 한 가지 일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우선 가장 시급한 곳을 시험하게 하고서 만일 실제 효과가 있으면 마땅히 차례대로 거행하라는 뜻으로 회계(回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소서.
1. 강릉(江陵) 등 9고을의 바닷가 주민에 대한 폐단을 변통하도록 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바닷가 주민에 대한 폐단을 신칙한 것이 전후로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만, 공헌(貢獻)을 특별히 줄이고 별복(別卜)을 영원히 막 폐지하였으니 바로잡고 구제하는 효과가 있어야 할 터인데, 폐단이 여전하여 주민들이 애오라지 살아가지를 못하는 데 대한, 도신이 발본 색원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그 요령을 얻었다고 말할 만합니다. 바닷가의 가호(家戶) 가운데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자는 본역(本役)을 모면하려고 도모하여 간혹 교안(校案)에 의탁하거나 더러는 군임(軍任)에 오르거나 하여, 한번 들어간 뒤로는 그 자질(子姪)과 함께 육지로 이거(移居)해 버리므로 바닷가의 가호로 남은 것은 열에 한두 집도 없으니, 당연히 치루어야 할 역(役)이 치우치게 괴로운 것은 형세로 보아 필지(必至)의 것입니다. 제안(除案)한 수령을 별도로 논감(論勘)하고 육지에 사는 바닷가의 주민에게는 일례로 부역에 응하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을 얻는 것이니, 도신이 논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진주인(津主人)이 점퇴(點退)하거나 조종(操縱)하는 것은 진실로 이 폐단이 심한 것이니 해호(海戶)가 직납(直納)해서 고을의 수령이 친봉(親捧)토록 하고, 진주인 명색(名色)은 영구히 혁파하도록 처리하는 것이 과연 합당할 것이나, 트집을 잡아 개비(改備)하고 값을 후하게 해서 환봉(還捧)하는 풍습은 진주인보다 감영과 고을 관속들이 더 심하니, 이와 같은 곳에 대해서는 엄중히 규찰과 신칙을 더하여 나중이나 처음이나 하나같은 효과가 있도록 하소서. 가전(價錢)의 수봉(收捧)은 자기 고을에서 가져다 바꾸게 하는 것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이 될 듯합니다만, 자기 고을에서 바꾸는 즈음에 헐값으로 강제로 취하려는 폐단 또한 반드시 있게 될 터이니, 다시 상의하고 헤아려 결정하여 폐단을 제거하려다가 폐단을 생기게 하는 경우가 없도록 하소서. 모든 계하(啓下) 절목(節目) 외에 만일 첨가하여 넣을 만한 것이 있으면 서울이나 지방을 논할 것 없이 추후에 마련하는 경우도 많이 있으니, 기미년134) 의 절목을 첨가하여 넣는 것은 반드시 마음대로 편리하게 논할 것이 아니라 같은 사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1. 강릉(江陵)의 인삼과 화전의 세금에 대하여 10결(結)을 감하여 주도록 허락하는 데 대한 일입니다. 강릉의 대관령(大關嶺) 서쪽은 땅이 넓으면서도 메말라 살고 있는 주민이 드물고 화전으로 옛날에 일군 것도 지금은 묵히고 있으니, 지금이 지금이 아닐 정도로 달라졌습니다. 1백 24결 내의 양 성조(聖朝)에서 특명으로 탕감해 준 숫자가 1백결이 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아랫사람에게 보탬을 주려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10결을 탕감하는 것을 아까워하여 승낙을 유보할 수 없습니다. 급대(給代)한 수효가 3백여 냥이나 된다고 하는 데 있어서는 어디를 쫓아 판비(辦備)해 내야 할 지 모르겠으며, 또 1결의 세전(稅錢)이 30냥이나 되도록 많은 것에 대해서도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도신으로 하여금 조목을 나열하여 보고하게 한 뒤, 다시 품처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