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무인
열한 번째 기우제를 태묘(太廟)에서 지냈다.
경모궁(敬慕宮)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고 재숙(齋宿)하였다.
5월 2일 기묘
경모궁(景慕宮)에 하향(夏享)을 행하였다.
문희묘(文禧廟)·장보각(藏譜閣)·의소묘(懿昭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비각(碑閣)을 봉심(奉審)하였다.
박종래(朴宗來)를 병조 판서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방 토룡제(五方土龍祭)는 으레 갑(甲)·병(丙)·무(戊)·경(庚)·임일(壬日)로 차례를 살펴 동(東)·남(南)·중(中)·서(西)·북방(北方)에 설행(設行)하는데, 영묘조(英廟朝)계유년159) 6월 초1일에 토룡제를 전례대로 거행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조(本曹)에서는 갑일(甲日)이 아직 멀어서 기다릴 수 없고 병일(丙日)이 내일이니, 남방에서부터 시작하여 설행하게 하는 일을 계품(啓稟)해서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대체로 갑일이 아직 멀다는 것 때문에 이처럼 계품하여 변통이 있었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갑일이 이달 초7일이어서 열한 번째 기우제를 행한 뒤 6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계유년의 남방에서 먼저한 전례를 적용한다면 초3일인 경일(庚日)에 서방(西方)에서부터 시작하여 설행하는 것이 적당하겠으나, 경일과 갑일 사이에 단지 4일의 간격이 있고, 또 생각하건대 지금의 민사(民事)가 아무리 급박하다 하더라도 오늘 하지에 겨우 이르렀으니, 계유년 6월과 비교한다면 매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 예를 끌어다 내일로 앞당겨 정하여, 너무 서둘러 온당치 못하다는 혐의가 있도록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나흘의 간격도 오히려 멀다고 해서 초5일 임오(壬午)에 우선 북방에서부터 설행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또한 의심스러워 결정키 어려운 단서가 있게 됩니다. 무릇 토룡제는 동·서·남·중의 네 방위는 모두 소속된 간지(干支)의 양개일(兩箇日)에 연일(連日)로 설행하며, 유독 북방의 경우는 반드시 하루를 보태어 합해서 3일을 설행하는데, 이 경우에 북방을 먼저하여 동방의 갑일(甲日)을 범용(犯用)하는 것은 불가할 듯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레부터 〈오방 토룡제를〉 지내도록 하되, 육갑(六甲)에서 각각 1일과 5일에 하게 하라. 연달아 차례로 기우제를 지내는 나머지에도 끝내 하늘의 감응이 없으니, 민사(民事)를 생각할 때 매우 막막하다. 자신을 책망하기를 의당 극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오늘부터 6일 동안 감선(減膳)하고 정전(正殿)을 피하여 광명전(光明殿)의 자내 별당(字內別堂)으로 이어(移御)해서 공손히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승지는 상의원(尙衣院)에 이접(移接)하도록 하며, 철악(撤樂)은 〈정전으로〉 환어(還御)할 때까지로 제한하고, 경연(經筵)은 소대(召對)로 대신하게 하되 역시 비가 내릴 때까지 기한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방 토룡제를 육갑(六甲)에서 각각 1일과 5일에 지내도록 하는 일에 대하여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 서방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며 초3일인 경일(庚日)에는 백룡(白龍)이 조성(造成)되니 초4일인 신일(辛日)에 설행(設行)하게 하고, 북방(北方)은 초5일인 임일(壬日)에 흑룡(黑龍)이 조성되니 초6일인 계일(癸日)에 설행하도록 하며, 동방(東方)은 초7일인 갑일(甲日)에 청룡(靑龍)이 조성되니 초8일인 을일(乙日)에 설행하게 하며, 남방(南方)은 초9일인 병일(丙日)에 적룡(赤龍)이 조성되니 초10일인 정일(丁日)에 설행하도록 하고, 중앙(中央)은 11일인 무일(戊日)에 황룡(黃龍)이 조성되니 12일인 사일(巳日)에 설행하게 하되, 전례대로 3품(三品)의 관원을 보내어 매일 양제(兩祭)를 설행하는 일을 지위(知委)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조윤대(曹允大)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순천부(順川府)의 불에 탄 민가 1백 7호(戶)에 대하여 별도로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5월 3일 경진
규장각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5월 4일 신사
서방의 토룡제를 행하였다.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축(香祝)을 전하였다.
5월 5일 임오
종묘와 사직에 기우제를 행하였다.
차대하였다.
소대하였다.
별강하였다.
5월 6일 계미
북방의 토룡제를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전 헌납 유현장(兪鉉章)이 상소하여 박종신(朴宗臣)의 10가지 죄상에 대하여 논박하면서 한 사람의 관리를 아깝게 여기지 말고 뭇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청하니, 하교하기를,
"그대는 대간(臺諫)도 아니며 또한 구언(求言)하는 때도 아닌데 남을 논박하였으니, 매우 망령되고 경솔하다. 원소(原疏)는 되돌려 주게 할 것이며 그대는 파직하겠다."
하였다.
5월 7일 갑신
비가 내렸는데, 물 깊이가 1치[寸] 2푼(分)이었다.
소대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애타게 바라던 나머지 이렇게 단비가 내리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참으로 너무나 다행스럽습니다. 지금 유운(油雲)이 풀리지 않고 쏟아지는 빗줄기가 그치지 않으니 두루 흡족함을 알 수 있습니다. 동방의 토룡제를 지금 잠시 중지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하교하기를,
"애타게 바라던 나머지 우택(雨澤)을 비로소 보게 되었으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너무나 다행스럽다. 감선(減膳)은 그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에 있어 성명(成命)한 기한을 맞추는 것이 합당하며,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앞서 이미 비가 내릴 때까지로 기한을 정하였었다. 지금 두루 흡족한 것을 기필하기는 어렵지만 장마가 지고 비가 내려 적실 기상(氣象)임을 여기서부터 추측할 만한데, 줄곧 정전을 피하는 것은 도리어 잡다한 데 관계된다. 오늘을 시작으로 시어소(時御所)로 돌아가도록 하고, 승지와 당후(堂后)도 일체로 환접(還接)하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농사 형편이 지금 어떠한 지경에 이르렀는가에 대해서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을 도성(都城) 밖의 사교(四郊)에 보내어 살펴보고 오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반가운 비가 비로소 내리기에 두루 흡족하기를 바랐었는데, 조금 지나서 날이 개니 민사(民事)가 매우 염려스럽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앞으로 강구해야 할 계책을 잘 생각하여 의식이 넉넉하도록 하는 계획을 준비하게 하라."
하였다.
5월 8일 을유
소대하였다.
중일각(中日閣)에 나아가 문신의 제술(製述)을 행하였다.
5월 9일 병술
소대하였다.
즙희당(緝熙堂)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5월 10일 정해
숭정전(崇政殿) 월대(月臺)에 나아가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고, 이어서 반열에 참석한 유신과 무신을 시험보였다.
소대하였다.
5월 11일 무자
비가 내렸는데, 물의 깊이가 8치[寸] 8푼(分)이었다.
5월 12일 기축
주강하였다.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당하관(堂下官)인 군직(軍職)과 문신의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5월 13일 경인
주강하였다.
평안 병사 이해우(李海愚)를 유임시키도록 명하고, 이당(李溏)을 어영 대장으로 삼았으며, 특지(特旨)로 김기후(金基厚)를 발탁하여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윤범익(尹範益)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유상엽(柳相燁)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5월 14일 신묘
주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무신의 강(講)을 행하였다.
5월 15일 임진
비가 내렸는데, 물의 깊이가 8치[寸] 6푼(分)이었다.
주강하였다.
5월 16일 계사
하교하기를,
"하늘과 조종(祖宗)이 가만히 돕고 명명(冥冥) 가운데서 백성을 안정시키도록 반가운 비가 많이 내렸다. 삼농(三農)을 흡족하게 위로하여 봄 사이에 마르고 시들었던 싹을 충분히 보전할 수 있게 하였으니, 마음속의 기쁨을 형용하고 비유할 수 없다. 종묘와 사직에 보사(報謝)하고 기쁨을 고(告)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다. 내일 당장 몸소 사직에 나아가 친히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피고 의식(儀式) 연습을 행하여, 모레 그대로 친제(親祭)를 거행하도록 하고, 종묘에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할 것이니, 오늘 당장 우문각(右文閣)에 나아가 재숙(齋宿)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하였다.
호남과 관북의 진휼(賑恤)을 마쳤다. 【호남의 나주(羅州) 등 37읍 역진(驛鎭)의 기민(飢民) 76만 6백 80명[口]에게 나누어 진휼(賑恤)한 각 곡식은 4만 9천 4백 67석(石) 영(零)이었으며, 관북(關北)의 안변(安邊) 등 8읍의 기민 7만 7백 64명에게 나누어 진휼한 절미(折米)가 2천 3백 99석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695면
【분류】구휼(救恤)
5월 17일 갑오
사직에 나아가 재숙하고 희생과 제기를 살피고, 이어서 의식의 예행 연습을 행하였다.
5월 18일 을미
사직에 보사제(報謝祭)를 행하였다.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展拜)하였다.
별강하였다.
5월 19일 병신
비가 내렸는데, 물의 깊이가 9치[寸] 1푼(分)이었다.
5월 22일 기해
소대하였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전경 문신강(專經文臣講)을 행하였다.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전경 문신 가운데 향인(鄕人)에 대한 응제(應製)를 행하였다.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신대곤(申大坤)이 장계(狀啓)하기를,
"각 고을의 상번(上番)인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병(軍兵)들이 예천군(醴泉郡) 삼탄진(三灘津)에 이르러 5, 6십 명이 함께 같은 배를 탔는데, 많은 비가 내린 나머지 강물이 불어 폭류에 휘말려 중도에서 배가 뒤집혀 살아서 나온 자가 겨우 12명입니다."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시골에서 생계를 꾸려가던 가난한 백성이 재산을 털어 강을 건너다가 뜻밖의 물난리를 만났으니, 정상을 생각하면 실로 너무나 가련하고 측은하다. 숙위(宿衛)가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폐단을 끼치고 있음을 어찌 잊겠는가? 각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본영(本營)의 미곡 가운데 20석 정도를 해도(該道)에 내려 보내 재액(災厄)을 당한 군인들의 처소에 일일이 나누어 주도록 하고, 죽은 사람의 신포(身布)와 환포(還布)를 모두 탕감하게 하며,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라."
하였다.
5월 25일 임인
소대하였다.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한학 문신강(漢學文臣講)을 행하였다.
5월 26일 계묘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별군직(別軍職)·선전관(宣傳官) 등의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5월 27일 갑진
소대하였다.
남공철(南公轍)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태학생(太學生)에 대하여 선조(先朝)에서는 달마다 시험을 보이고 해마다 면려함이 주(周)나라 문왕(文王) 시대 연어(鳶魚)160) 의 교화에 그칠 뿐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비록 약간의 위열(慰悅)을 베푼 일은 있었지만 선비들의 기대를 흡족시키지 못하였으니, 어찌 선비를 대우하는 뜻이 되겠는가? 오늘 신시(申時)에 경현당(景賢堂)에서 태학의 사자(士子)들에게 선온(宣醞)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표하도록 할 터이니, 반장(泮長)161) 이 태학의 유생을 거느리고 입시하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8일 을사
민기현(閔耆顯)을 개성부 유수로 삼았다.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태학생(太學生)의 진전(進箋)을 받고 이어서 시취(試取)를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5월 29일 병오
소대하고, 《시전(詩傳)》 〈위풍(衛風)의〉 석인장(碩人章)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부(大夫)들이 일찍 퇴근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수고로움이 없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한다면 현사 대부(賢士大夫)를 가까이 할 때가 적을 것이다. 장강(莊姜)은 정실 부인이니 궁첩과 같이 비교할 수 없을 것이나, 제풍(齊風)의 계명시(鷄鳴詩)를 가지고 살펴보면, 혹시라도 한가하게 즐기는데 지나쳐 조회를 보임이 늦어질까 두려워하고, 멋대로 즐기며 날로 투박하게 될까 염려하였다. 그리고 대아(大雅)에 이르기를, ‘과처(寡妻)에게 본을 보여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근본을 단정히 하고 시초를 바로잡는 도리인데, 인신(人臣)이 된 자가 그 임금이 부인을 가까이 좋아하게 하려고 대부(大夫)가 일찍 퇴근하도록 경계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인군(人君)이 즐겨하는 뜻을 인도하여 아첨하는 데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자, 시독관(侍讀官) 조봉진(曹鳳振)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훌륭합니다. 위(衛)나라의 대부(大夫)가 그들 임금이 어진 부인을 맞게 되었음을 기뻐하여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전경 무신(專經武臣)의 빈청강(賓廳講)을 행하였다.
별강하였다.
야대하였다.
하교하기를,
"6월은 바로 건릉(健陵) 기신(忌辰)의 달이다. 소자(小子)의 깊이 사모하는 슬픈 회포를 펼 길이 없었기 때문에 저쪽 궁궐에 있을 적에는 매번 진전(眞殿)에 첨배(瞻拜)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가 되었다. 내일은 초하루 아침이니 마땅히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친히 향을 전하고 각신(閣臣)을 보내어 별도로 분향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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