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렸다.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이니 비록 자주 풍년이 들었다 해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작년에는 여러 도가 풍흉이 각각 다르지 않았던가. 앞으로 풍년이 들게 하려면 오로지 권농(勸農)에 달렸을 뿐이다. 나는 지금 재계를 하고 사직단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내려 하고 있으니, 너희 방백과 유수(留守)들도 이런 나의 뜻을 본받아 각 고을의 원들로 하여금 각기 전준(田畯)001) 의 일을 몸소 행하고 농사에 마음을 다해 거듭 유시(諭示)하는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게 하라."
전 참판 조경(趙瓊)을 발탁하여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조경은 고 재상 조경(趙璥)의 형이다. 상이 세찬 단자(歲饌單子)를 보고서 특별히 구신(舊臣)을 생각하는 은전을 보인 것이다.
1월 2일 기미
오재순(吳載純)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3일 경신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기곡 대제에 쓸 향축(香祝)에 친히 서명하고서 이어 사직에 가서 희생과 제기를 살펴보았다.
1월 4일 신유
사직에 기곡제를 지냈다.
전 영의정 김치인의 죄명을 씻어주고 서용(敍用)하여 다시 상직(相職)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승지가 연명으로 계사(啓辭)해 간쟁하니, 그 계사를 되돌려 주었다.
오재순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치인에게 유시하기를,
"지난번의 일은 첫째도 창상(滄桑)002) 이고, 둘째도 창상이었다. 사심이 없었던 허물이 뜻밖에 공격으로 변형되어 경도 스스로 해명할 말이 없었고 나도 곡진히 깨우칠 말이 없어 황급하게 경을 내쫓아 강가에서 소일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경에 대한 은례(恩禮)가 처음과 달라져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것은 사세나 국가의 체통으로 보아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가 없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뿐이다. 하물며 정확한 조사 끝에 모든 문제가 다 풀린 사실을 연교(筵敎)에서 이미 다 밝혔으니 경은 모름지기 서둘러 다시 제수한 뜻을 이해하고 당일로 성안으로 들어와서, 즉시 숙배(肅拜)하고 나의 면유(面諭)를 들으라."
하였다. 이에 앞서 교리 서미수(徐美修)가 상소하기를,
"그날 빈대(賓對) 때 선포하신 연교가 자세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치인은 당장 들어왔어야 했는데도 느리게 움직였고, 급기야 등연(登筵)하여서는 기운이 팔팔하게 살아 감히 두 해의 일에 관한 말을 거침없이 입밖에 내놓았으니, 그 마음의 소재가 어찌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유언호(兪彦鎬)의 경우는 관계된 바가 막중한 그 말을 듣고서도 거짓으로 모른체하며 임금의 명에 극력 항거하였고, 뒤늦게 비로소 등연해서는 하문(下問)에 대해 한 마디도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 심보를 논하면 흉악하기 그지없으니 차율(次律)로 처단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신은 치인과 언호에 대해 빨리 삼사의 주청을 따르시어 온 나라 사람들의 분해하는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수찬 이현묵(李顯默)은 상소하기를,
"아, 성토하는 자리에 있는 신하로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는데, 그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소도 올리고 차자도 올려 기탄하는 바가 없었단 말입니까. 종당에 정적(情跡)이 탄로나자 더욱 독기를 부렸고, 늙어 정신이 혼미하다는 핑계로 더욱더 방자하게 굴어 우리 성상의 마음을 근심스럽게까지 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의 주청을 모두 윤허하소서."
하고, 정언 정내백(鄭來百)은 상소하기를,
"유언호의 용서할 수 없는 죄에 대해서는 성상의 전교에도 이미 언급이 되었고 합사(合辭)에도 이미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데도 용서해준다면 아마 왕강(王綱)이 무너지고 인기(人紀)가 끊어질 것입니다. 김치인으로 말하면 그때의 흉적(凶賊)이 이미 다른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조진도(趙進道)의 일을 감히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차자 내용도 윤시동(尹蓍東)의 그것과 한 사람은 선창하고 한 사람은 화답한 격이었으며 등연(登筵)하여서도 놀라고 통분해 하는 뜻이 조금도 없었고, 또 두 해의 일에 관한 말을 거침없이 아뢰었는데 하나는 위협하려는 계책이고 하나는 분해하고 원망하는 말이었습니다.
더구나 언호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은 바로 저 치인의 그림자로서 그날 지은 죄도 이미 동일 사건이었고 보면 치인과 언호는 참으로 이른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 바라건대 단안을 내리시어 국법을 펴소서.
윤시동은 평소의 마음과 뜻이 역적 홍계희(洪啓禧) 등과 가장 친밀하였으므로, 연전의 정주(政注) 때도 지난날의 친분을 잊지 않은 흔적이 많았는데, 어찌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 까마득히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차마 문자(文字)에 올렸습니다. 더구나 이 소(疏)가 나온 뒤로 찬양해 호응하는 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갈아 나온 것으로 보아 일을 꾸몄다는 진상을 숨길 수 없으니, 저 혼자서 일을 꾸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국청(鞫廳)을 열어 진상을 캐내소서."
하였다. 이상의 상소문들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보류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비답을 내린 것이다.
1월 5일 임술
우의정 채제공이 장문의 단자를 올리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봉한 채 돌려주었다.
영의정 김치인이 사관을 통하여 부계(附啓)하기를,
"그날 연석(筵席)에서의 전교가 얼마나 중대한 데에 관계된 것이었습니까. 신이 비록 병들어 정신이 혼미하다고는 하지만 실성(失性)하지는 않았는데도 말마다 이치에 어그러진 망언이었고 일마다 해괴한 짓이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위에서 근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는데도 신은 아래에서 여유있는 태도로 아뢰면서 성상의 마음을 힘껏 위로해 풀어드릴 방도를 강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간혹 감히 말할 수 없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신이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 하늘이 넋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윤기(倫紀)를 멸시하고 분의(分義)를 범하는 죄에 거듭 빠지게 된 것인 듯합니다. 신하로서 이런 죄를 짓고도 오히려 천지 사이에 스스로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10년 후에 다시 정승에 제수한 것도 이미 특례였고, 이번에 다시 제수한 것도 특례이다. 오직 특례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대하고 예우를 하는 즈음에 정중하게 반복하는 것도 혐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경을 이렇게 대우하는데 경의 대응이 예사로워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염방(廉防)003) 과 거취(去就)에 대해 그렇게 뒤돌아보고 깊이 생각할 것이 없을 듯하다. 경은 빨리 나오는 것이 허물을 씻는 길이 되고 용감하게 나오는 것이 비방을 막는 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내일 도성으로 들어와서 내가 환궁(還宮)하기를 기다려 숙배(肅拜)하고 명을 받으라."
하였다.
1월 6일 계해
인정전(仁政殿)에 거둥하여 춘향(春享)에 쓸 향축(香祝)에 친히 서명(署名)하고서 이어 태묘(太廟)로 거둥하여 희생과 제기를 살폈다.
1월 7일 갑자
태묘에 참배하고서 이어 춘향을 지냈다. 전교하기를,
"강신(降神)이 끝난 뒤에는 정성과 경건함이 종묘 문을 들어설 때보다 점점 못해진다. 어젯밤 대제(大祭) 때 신을 영접하는 음악 9곡(曲)을 연주한 것만이 정해진 수를 그대로 따랐을 뿐, 그밖의 의식 절차는 대부분 간편함을 따라서 성의가 느슨해지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에 제향이 신하가 대행할 때보다 도리어 빨리 끝났는데, 그것이 어찌 간편함만을 취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사실은 정성이 소홀해지고 경건함이 해이해질까 염려해서였던 것이다. 이번의 홀기(笏記)를 그대로 친제(親祭) 때나 대행할 때 통용하는 것으로 하라.
종묘와 조정에서의 의식은 신하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의식인 것이다. 그런데 근래 크고 작은 조회나 일상의 연석(筵席)에서 추창(趨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폐습(弊習)이 풍속이 되어 벼슬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가 모두 한결같으니 처음으로 반열에 나온 젊은 관원들을 어찌 깊이 꾸짖겠는가. 일전에 기곡제(祈穀祭)를 친향(親享)하던 때에 우상이 오르내리고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니 허리를 굽히고서 추창하는 모습이 법도에 맞았기 때문에 물러나와서 제신들에게 본받으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제사 때 반열에서의 거동을 보니 본받기는 고사하고 여전히 보기에 해괴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연석에 출입할 때부터 추창하는 의식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 폐단이 막중한 제향의 반열에서까지 그렇게 느슨하게 하기에 이른 것인데 지금 만약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조정과 종묘에 무슨 의식이 있다고 하겠는가. 묘당으로 하여금 각별히 모든 관료를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김화진(金華鎭)을 의정부 좌참찬으로, 권도(權導)를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1월 8일 을축
경모궁(景慕宮)에 전배하고 반궁(泮宮)에서 인일제(人日製)를 보였다.
영의정 김치인이 상소해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의 돈유(敦諭)에 나의 뜻을 대충 다 말하였거니와, 내가 경에게 어찌 사사로이 좋아함이 있어 그런 것이겠는가. 하나는 경이 딴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서 이고 하나는 경을 꼭 보전시키고자 해서이다. 과거에 내가 경을 특례로 발탁해 쓰지 않았다면 경에게 어찌 그처럼 허다한 낭패가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다시 경을 제수한 것인데 경이라고 보답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아서 될 일인가. 오늘 경이 취할 도리는 힘써 명을 받드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나도 대신을 존경하고 예우하는 법을 대략은 알고 있다. 근일에 경을 돈소(敦召)하면서 혹시 다그치는 것 같은 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경이 입대(入對)하기를 기다려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니 경은 모름지기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리는 나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당일로 길에 오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9일 병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군병(軍兵)을 호궤(犒饋)하였다.
전교하였다.
"그의 나이가 이미 높을 뿐더러 18년 동안 승지로 있은 이는 옛날에도 드물었다. 섣달 그믐날 여러 대신이 입시했을 때 세 정승이 그와 동년(同年)이었는데 이로 보아도 그가 불우했었음을 더욱 알 수가 있었다. 행 도승지 심이지(沈頤之)를 도총관(都摠管)에 제수하라."
영의정 김치인이 면직되었다. 치인이 올라와 도성 문 밖에 엎드려 있었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 돈유(敦諭)하니 치인이 비로소 들어와서 숙배(肅拜)하였다. 상이 불러 접견하고 이르기를,
"지난 일은 말할 필요가 없겠으나, 경이 강가에 가 있었던 것이 어찌 경이 즐거워서 한 일이며 내가 그만두게 할 수 있는 일이었던가. 그 모두가 사실은 자초한 일이었다. 내가 경이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반드시 보전시키고자 한다고는 하였지만, 경이 그때 만약 일처리를 잘하였다면 어찌 그런 일이 생겼겠는가. 나도 덮어둘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혹시 사단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 더욱 격렬해질 경우 장차 어떤 지경까지 이를지 모를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누차 생각한 끝에 내가 선수를 썼던 것이다.
경 자신도 늙어서 정신이 혼미한 탓이라고 말했고 나도 늙어서 정신이 혼미한 소치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왕년에 있었던 일망 삼통(一望三通) 때의 일만 보더라도 경의 의지가 본래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번 사단 역시 조덕린(趙德隣) 사건에 연연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 틀림없다. 앞으로는 생각이나 태도를 조금 바꾸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경을 보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늘도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경을 보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도 들은 바가 있었을 것이고 이해도 갔을 것이다."
하니, 치인이 아뢰기를,
"가령 신이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다 받은 뒤에 다시 은전을 입는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인데, 더구나 문외 출송(門外黜送)으로 이미 처벌이 끝났다고 치고 다시 관직의 거취(去就)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약 특례로 발탁해 등용하지 않았더라면 경은 여전히 물러나 한가로이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인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겠는가."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나오게 하는 것도 예로, 물러가게 하는 것도 예로 하는 것이 곧 대신을 존경하는 뜻인 것이다. 오늘 나와서 숙배하였는데 오늘 사직을 윤허하는 것이 어쩌면 너무 경솔한 처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연석에서의 간곡한 진술이 그러할 뿐더러, 당장 시끄러운 비방을 종식시키자면 한가로이 정양(靜養)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나야 서울 집에 와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뜻을 이해하는 일이 더 다급하니, 경솔하다는 혐의는 돌아볼 겨를이 없겠다. 영상의 직을 우선 사임하도록 윤허해서 대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야겠다."
하였다.
김노순(金魯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월 10일 정묘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내금위(內禁衛)에게 시사(試射)를 보였다.
전교하였다.
"해가 이미 바뀌었는데 지금 백성들의 사정이 지난 겨울에 비해 어떠한가? 내탕(內帑)의 진휼 물자를 전송과 영접하는 데 써버렸는데 진휼이 시작되기 전 여러 고을에 각각 몇 차례씩이나 구조를 했으며, 받아들인 환자곡도 과연 예정 수량에 맞게 하였는지, 그리고 개창(開倉)한 뒤에 나누어 줄 환곡도 그 곡식이 너무 거칠지는 않은지를 각각 본 대로 장계로 아뢰어 밤낮으로 걱정하는 나의 근심을 풀게 하라. 이런 내용을 묘당으로 하여금 북백(北伯)과 어사에게 행회(行會)하게 하라."
전교하였다.
"배에 곡식을 실어 북도로 운송하라는 명을 내린 뒤로 영남 백성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루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금 배를 출발시킬 날은 가까워오는데 봄추위는 아직 쌀쌀하고 바닷길은 멀기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희소식이 있도록 영남 백성들을 위해 가슴 조이며 바라는 것이다. 배가 출발한 뒤에는 그 배가 경과하는 각 고을의 경내를 무사 통과했다는 것을 각 해당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즉시 장계로 아뢰게 하고, 회선(回船)할 때에도 도내 경내를 무사히 통과했음을 역시 장계로 아뢰게 하라."
강계(江界) 기생 소상매(瀟湘梅)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평안 감사 김이소(金履素)가 도내의 효자·열녀를 아뢰니, 전교하기를,
"소상매는 천한 기생으로서 한 지아비를 섬기다가 지아비가 죽자 뒤따라 죽었다 하니, 이처럼 굳은 절개는 전에도 드물게 들은 바이다. 하물며 먼 변방에 사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특별한 행동이 있었으니, 더욱 특례로 포장(褒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1월 11일 무진
상참(常參)하고,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겨울에 비록 참판 둘을 승진 발탁한 일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전조(銓曹)에 오래 있어 차례에 의해 승급한 것이니, 조정으로 볼 때 별로 새로 인재를 얻은 효과가 없다. 그러니 정3품 중에서 품계를 올리기에 합당한 자를 경이 지적해 주기 바란다."
하자,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권엄(權𧟓)과 유항주(兪恒柱)를 들어 대답하니, 모두 자급을 올려주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호(號)를 의정(議定)하라는 명이 내리면 시임·원임 대신이 의례 모두 참여하지만, 일을 주관하는 기관은 어디까지나 관각(館閣)입니다. 그런데 선희궁(宣禧宮) 호를 의논할 때 단지 홍문관 제학 한 사람만이 나와서 참여했을 뿐이니, 나라의 체통이 구차하였습니다. 예문관 제학 이명식(李命植)은 실지로 병 때문에 참여하지 못한 듯 하지만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는 제사(諸司)의 폄좌(貶坐)와 본각(本閣)의 회권(會圈)에는 연속해 참여했으면서 유독 그날에만 까닭없이 패초(牌招)를 어겼으니, 파직의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정을 들어보니 형편이 그러했던 것 같다.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고 교리 박재원(朴在源)에게 홍문관 부제학을 추증(追贈)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박재원이 연전에 한 장의 소를 올려 아뢰었던 말은 시행되었으나 그 몸은 곤궁을 겪다가 죽었으므로 식자들의 논의가 모두 가엾게 여기고 있습니다. 연전의 대각에 내린 비답에, 뒤에 마땅히 증직을 해야겠다고 하셨으나, 시행하라는 명령은 아직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박재원의 일로 말하면 그때 가장(嘉奬)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더욱 후회가 된다. 전번에 대소(臺疏)가 있은 뒤로 아직까지 하교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였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증직을 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북로(北路)로 귀양간 사람 조진택(趙鎭宅)이 상(喪)을 만나 장사지내기 위해 돌아왔는데, 병이 낫지 않고 더욱 깊어져서 배소(配所)로 돌아가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참작해 용서해 주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벌을 받은 다섯 유신(儒臣)들도 너그럽게 처결하여 석방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용서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이갑(李𡊠)이 아뢰기를,
"김덕령(金德齡) 부처(夫妻)의 비석을 세우고 쌍 정문(旌門)을 세우라는 명이 계셨으므로 부인의 직함(職啣)을 정경 부인(貞敬夫人)으로 써서 내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김덕령의 증직이 자헌 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인데, 부인이 정경이 되면 남편의 직함에 따르는 예(例)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장공(忠壯公)의 자급(資級)을 종1품으로 하비(下批)하라."
하였다.
신대승(申大升)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어제 영남의 선운(船運)에 대해 공문으로 물으라는 명을 내렸거니와 허다한 격군(格軍)들이 먼 바다를 가게 되니 마땅히 구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공(身貢)이나 군포(軍布)를 물어야 할 자가 있으면 특별히 탕감해 주고, 원래 급여하는 양곡 이외에 특별히 더 주어 조정에서 진념(軫念)하는 뜻을 보이라."
1월 12일 기사
주강하였다. 삼사(三司)의 전계(傳啓)에 이인(李䄄)의 사건이 거론되자, 상이 이르기를,
"이 계사(啓辭)를 어떻게 차마 다시 들으란 말인가. 그렇게 처리했던 것은 비록 보전시키려는 간곡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임금 노릇 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더구나 해가 지나도록 전계하지 않던 끝에 또 나로 하여금 그 계사를 들으라고 하니, 내가 어찌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 그의 이름자를 들으니 더욱 차마 못할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였다. 지평 김용(金鎔)이 체직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피혐할 것이야 뭐 있는가. 아래에 있는 계사를 계속 진술하라."
하였다. 승지 홍인호(洪仁浩)가 아뢰기를,
"합계(合啓)는 사체가 중대한 것인데, 대신(臺臣)이 비답도 받기 전에 바로 하단의 계사를 전계한다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해괴한 일입니다. 인의 문제는 비답이 없는 것으로 반포할까요?"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수어사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 12월에 소명(召命)을 어긴 일로 대신이 신을 견책 파직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하고 몸이 떨려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일의 시말은 성상께서도 굽어 살피시는 일인데 신이 감히 무슨 말씀을 다시 드리겠습니까. 그러나 정월 초하룻날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으시는 정전(正殿)에서 대신이 죄를 성토했다는 것은 사체가 보통 엄중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일을 가지고 신을 조이려 한다면 그 죄가 어디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속히 신을 처단하시어 중론(衆論)에 답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을 다친 사람 보듯이 애처롭게 여겼고 어린아이 보호하듯이 하여 살려주고 또 살려주고 했는데, 경은 어째서 요행으로 살았다고 하는가. 대신이 경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관료끼리 서로 경계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경도 당연히 그렇게 보아야 할 것이다. 죄명(罪名)이래야 견책 파직에 불과했는데, 그것을 깊이 인혐(引嫌)하여 심지어 등골이 오싹하고 몸이 떨린다고까지 하였으니 너무 지나치다. 경이 겁을 먹은 것인가. 경은 염려하지 말라. 사직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말 할 필요가 없다.
노인을 잘 봉양하자면 서울이 시골보다 10배나 낫다. 당초에 올라온 것도 까닭이 있어서였는데, 더구나 오늘에 와서 감히 돌아간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일전에 연석에서도 이미 면대하여 분부한 바가 있으니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렇게 고집한다면 그것은 사람다운 마음도 없고 신하로서의 절의도 없는 것이니 경이 스스로 골라 결정하라."
하였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정동준(鄭東浚)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3일 경오
영희전(永禧殿)·저경궁(儲慶宮)·육상궁(毓祥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의소묘(懿昭廟)에 전배(展拜)하였다.
전교하였다.
"행정 사무를 익혀 알게 하고 싶고, 또 다년간 고생한 것을 생각하여, 마침 그 자리가 비었기에 그를 의망해 올리도록 한 것이니, 그의 도리로서는 의당 명을 들은 즉시 달려와서 사은 숙배하고 임지로 떠나야 할 것인데 명이 내렸는데도 까닭없이 들어오지 않아 신칙하는 전교를 내리는 번거로움을 끼쳤다. 의성(義城)이 불만스러워서 그러는 것인가? 다시 생각해보니 첫 솜씨에 큰 고을을 맡기면 만족스럽게 해나가기가 어려울 것이고 또 그 전에 두 번씩이나 유방을 당한 적도 있어 틀림없이 그곳 풍속을 잘 알 것이니 의성 현감 윤행임(尹行任)을 직산 현감(稷山縣監)과 서로 교환하도록 하라."
1월 14일 신미
윤방(尹坊)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재순(吳載純)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1월 15일 임신
각사(各司)·각영(各營)이 무신년 회계 장부를 올렸는데, 호조·양향청·선혜청·병조·훈련 도감·금위영·어영청·수어청·총융청에 현재 있는 황금이 3백 25냥, 은자가 41만 5천 6백 17냥, 돈이 1백 29만 9천 5백 40냥, 명주가 82동 43필, 무명베가 2천 6백 61동 15필, 모시베가 63동 5필, 포자(布子)가 1천 3백 23동 28필, 쌀이 28만 6천 9백 64석, 좁쌀이 1만 1천 9백 91석, 콩이 4만 2천 4백 3석, 각 피곡(皮穀)이 7천 7백 36석이었다.
1월 16일 계유
문희묘(文禧廟)에 거둥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정동준(鄭東浚)이 명을 받들지 않았는데, 그 직을 삭탈하고 이조의 의망 대상에서 영원히 빼버려 다시는 지방관에 의망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죄인 김응우(金應禹)가 대원군(大院君) 사당의 앞면 휘장과 독(櫝)을 덮는 보자기를 훔친 데 관하여 율문(律文)을 자세히 상고해 보니, 천신(天神)·지기(地祇)에 지내는 대사(大祀)에 사용하는 제기나 장막 등의 물건을 훔친 자와 신에게 올리는 옥백(玉帛)이나 희생이나 찬구(饌具)를 훔친 자는 참(斬)한다고 하였고, 또 중사(中祀)에 사용할 물건들을 훔친 자도 같은 죄로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 대원군 사우는 보통 사우와 다르므로 중사에 관한 법을 적용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에게 헌의(獻議)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은 아뢰기를,
"일율(一律)004) 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중사이니만큼 차등을 두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엄한 형벌을 세 차례 가하고서 먼 섬으로 보내어 종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재협(李在恊)은 아뢰기를,
"바로 일율로 단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니, 우상의 헌의를 따르라고 전교하였다.
1월 17일 갑술
차대하였다. 형조 판서 심이지(沈頤之)가 아뢰기를,
"법성창(法聖倉)의 조운선이 경강(京江)에 당도해서 침몰한 뒤 그 감관과 색리와 사공과 곁꾼을 본토로 내려보내 형벌이 내릴 때까지 대기하도록 하였던 바 이제 잡아올려 엄중 신문해야겠는데, 작년에 흥양(興陽)의 조세 운반선도 경강에 와서 침몰한 사정이 법성창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니, 사공과 곁꾼 등을 똑같이 죄상에 따라 처리해야겠습니다."
하니,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이 아뢰기를,
"배를 침몰시킨 격군들을 반드시 배가 침몰한 지방에서 사정을 철저히 조사하여 만 3년 동안 10차에 걸쳐 조사한 뒤에 원래 소속된 고을로 이송하도록 한 것은 고의로 배를 침몰시키는 폐습을 엄히 징계하기 위해서입니다. 경강은 바로 서울의 관할 구역이기 때문에 형조에서는 그 규례대로 거행하려는 것이지만, 지금 만약 죄수가 오래 갇혀 있는 것이 딱하고 사실을 철저히 규명하기도 어렵다 하여 지레 처리를 한다면 법의 뜻과 어그러짐이 있습니다. 연전에 경기·호서 두 도에서 배를 침몰시킨 죄인들의 허다한 보수(保授)005) 는 주객(主客) 모두를 고달프게 할 염려가 있다고 해서, 3년 이내에 우선 원래 소속된 고을로 돌려보내어 10차에 걸친 철저한 조사를 하게 하고, 건져내지 못한 쌀에 대해서는 분배해서 징수하는 일을 모두 원래 소속한 고을에서 시행하도록 도신이 장계로 주청해서 윤허를 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흥양의 격군들도 이 규례에 따라 원래 소속된 고을로 이송하여 조사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격군들이 비록 서울 관내 사람들이긴 하지만, 같은 서울 관내라도 소속이 고양(高陽)인 자도 있고, 양주(楊州)인 자도 있으니, 그들을 각기 소속 읍으로 나누어 이송한다면 원옥(原獄)006) 에 죄인을 가두어 두는 폐단을 제거할 수 있고, 고의로 배를 침몰시키는 것을 징계하는 법도 존속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법성창의 원래 소속된 고을은 영광(靈光)이니, 격군들을 영광에 맡겨 법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홍억(洪檍)을 경상도 관찰사로, 권엄(權𧟓)을 충청도 관찰사로 삼았다.
1월 18일 을해
문신·무신에게 전강(殿講)을 행하였다.
1월 19일 병자
이조·병조에 전교하기를,
"조정의 용사(用捨)와 인재의 우열이 나이의 많고 적음과 벼슬에 있은 지 오래이고 오래지 않은 것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늙은이나 침체되어 있는 사람들을 일반 규정을 무시하고 발탁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말은 신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지금 막 각도에 명하여 각기 그 도내의 문관·음관(蔭官)·무관의 나이, 과거에 급제한 것, 처음으로 관직에 임했던 것, 산관이 된 것 등을 하나하나 죽 써서 올리게 하여 그것들이 이미 다 도착이 되었는데, 만약 한 번 보아넘겨버리고 말 뿐이면 목을 늘이고 기대를 걸었던 팔도의 조사(朝士)들이 그 누가 ‘진실된 마음이 있고 진실된 정사가 있다.’고 여기겠는가. 문관·무관·음관들 중에 한 번 물리치고는 마치 버리기라도 한 듯 다시는 찾지 않아 임금이 신하 이름을 모르고 신하가 임금 얼굴을 모르는 자들이 과연 모두 몇 십 명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이름이 대적(臺籍)에 올라있는 자이면 그는 바로 나의 법종(法從)의 관원들인데 즉위한 지 10여 년이 되었어도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많아 언제나 정사에 임해 낙점을 할 때면 문득 붓을 멈추고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지가 오래였다. 나의 마음이 이러하니 많은 사람들의 심정도 알 만하다. 4품 이상의 조관(朝官)은 나이 80세가 되어야 자급을 올려 주는 것이 비록 법전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정력은 사람에 따라 쇠약하고 왕성함이 같지 않은데, 만일 80세가 다 차도록 기다리다가 서울에 있는 자도 미처 자리에 한 번 못 올라보고 시골에 있는 자는 몸 한 번 일으킬 기회도 없게 만들고 말면 앞으로 한번 만나 볼 기회마저 영원히 막혀버리고 말 것이다.
가령 지금이라도 그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려고 하면 당연히 종반(從班)부터 불러들여야 할 것이나 인륜과 의리는 지중한 것이고 사람의 천성은 똑같은 것인데 그 이외의 문관·음관·무관들이 이 전교를 들었을 때 어찌 그들이라고 그리움이 가슴에 맺히는 한편으로 쓸쓸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내 뜻이 우선 그렇게 정해졌고 뭇사람도 같은 생각인데 지금 와서 한갓 격례(格例)에만 얽매일 것이 뭐 있겠는가. 대간이나 시종을 지낸 자로서 70세가 된 사람과 등과한 지 30년 이상이 된 사람들을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돈녕부 도정이나 분사(分司)·한사(閒司)의 차관에 차례로 의망하고, 무신으로 등과한 지 50년 이상 된 사람, 음관으로 나이 70세가 된 사람, 벼슬길에 나선 지 40년 이상 된 사람들도 역시 한 자급을 올려 걸맞는 직에 등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사은 숙배하는 날 정원이 넌지시 구두로 아뢰면 불러서 접견하겠다. 그러니 묘당으로 하여금 각도 방백에게 공문을 보내 따뜻한 봄철에 올려보내게 하고 올라올 때와 내려갈 때는 연로의 각 고을에서 말과 식량을 대주도록 하라. 위에서 말한 자급을 올려줄 사람들은 대부분 근력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한 일이 비록 늙은이를 우대하는 일은 되지만 침체된 사람들을 발탁하자는 본의와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러니 이조·병조에서는 문관·무관·음관으로서 산인(散人)이 된 사람들을 을미년 12월 이전부터 뽑아내어 따로 하나의 안을 작성하여 입계(入啓)하되, 주를 달아 연도를 기록하고, 매번 복직시킬 때 의망된 사람을 몇 자리나 복직시켰느냐와 수용된 의망 단자에도 주를 달도록 하라.
또 생각해 보건대 문신의 경우 등과한 지 10년이 되면 의례 6품으로 올라가는 규정이 있으나, 음관과 무관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벼슬길에 올랐거나 혹은 벼슬자리에서 떨어진 후 모두 30년 안팎이 된 자도 있으니, 이들도 모두 사과(司果)로 승진시켜 우선 등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금 이 일을 규례에 어긋난다거나 또는 새로운 규례를 만든 것이라고 하지 말라. 이는 임금으로서 일단 한 말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또 이를 미루어 참으로 큰 회탕 정책을 실현하려는 것이지 아무 뜻없이 한 일이 아니다. 아, 너희 두 전조(銓曹)의 신하들은 모름지기 각별히 유념하여 왕명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는 데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고, 돈녕부 도정·공조 참의·오위장·충장위 장·충익위 장으로서 유고자가 있으면 그 자리를 만들고 돈녕부 도정과 분사(分司)의 참의는 한 자리씩을 더 만들어 햇수가 오래되어 자급이 오른 문관이나 무관을 차례로 의망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늙은 사람은 자리가 나도록 기다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민종현(閔鍾顯)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고,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가 이내 체직하고 정창순(鄭昌順)을 대신 제수하였다.
승정원이 병조 당상관의 당직 교체 일로 인하여 금호문(金虎門) 출입 표신을 내줄 것을 청하니, 전교하기를,
"대궐 안의 각문을 유문(留門)하였을 때 조정 신료가 드나들지 못할 문은 원래 없는 것이다. 체통이 막중한 대신과 대신(臺臣)의 체통이 근래 궁인(宮人)들이 출입하는 문이라고 하는 요금(曜金)·통화(通化) 두 문도 구애되지 않고 출입하였던 사실을 《당후일기(堂后日記)》를 보면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몇 해 전부터 막중한 대궐문을 마치 각 부서에서 나누어 맡은 것처럼 돈화문(敦化門)은 대간에, 금호문은 조신(朝臣)에, 단봉문(丹鳳門)은 중관(中官)에, 선인문(宣仁門)은 사복시(司僕寺)에 각각 소속되어 마치 서로 어겨서는 안 될 무슨 정해진 한계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유문하고 있을 때라도 열려 있는 문을 놔두고서 유문 표신을 따로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도 누차 신칙했지만 끝내 고칠 줄을 모르니, 당해 승지를 파직하고 앞으로는 유문할 때 뿐만 아니라 아침과 낮에 공사로 들어올 때에도 따로 출입하는 문을 정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0일 정축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재계하면서 하룻밤을 묵고 예조 판서 정창순을 불러 접견하였다. 창순이 아뢰기를,
"궁원의(宮園儀)에 실려 있는 제품 도식(祭品圖式)에는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에만 유독 제물과 희생·폐백 등을 올리는 절차가 없어 예의 뜻에 어긋남이 있었습니다. 품의해 결정한 대로 대제(大祭)보다는 못하게, 속절(俗節)보다는 낫게 하는 것으로 일정한 제도를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1월 21일 무인
경모궁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1월 21일 무인
전교하였다.
"지금 지제교(知製敎)가 지어 올린 경상 감사와 충청 감사에게 내릴 교서(敎書)를 보니, 호서(湖西)의 풍속을 말하면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거짓말로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진무(鎭撫)하여 마음을 고쳐 먹게 하였다고 하였고, 영남을 말하면서는 풍속이 퇴폐하고 야박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디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하기를 힘쓰는 왕의 말투이겠는가. 호서에 지난 한때 사변이 있었지만 그것은 농민 무리가 일으킨 것에 불과한데, 어찌 그것을 가지고 한 도의 사대부를 전부 욕되게 하겠는가. 영남은 본래 예의와 학문의 고장이니 풍속이 순후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가하지만 어찌 풍속이 퇴폐하고 야박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교서를 다시 다듬도록 하고, 앞으로는 영남과 호서의 감사에게 보내는 교서에 이런 말들을 넣지 말도록 하라."
조신(朝臣)의 하마석(下馬石)을 두 대궐의 각문 밖에다 세웠다.
1월 22일 기묘
전조(銓曹)에 신칙하였다.
"직명(職名)은 곧 조정의 직명일 뿐, 사대부나 중인(中人)·서민들의 계급을 정하자고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종래에 대관 후보자를 의망할 때 처음으로 의망된 사람이거나 여러 번 의망된 사람이거나, 수망(首望)·부망(副望)·말망(末望)할 것 없이 모두 같은 처지인 데도 일찍이 평상시에 의망했던 사람과 함께 섞어 의망한 적이 없었다. 이 규례가 한 번 나온 뒤로 임시 장령이니 임시 지평이니 하는 말이 생겼는데 사리에 맞지 않는 일 치고 이보다 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전관(銓官)은 자기 처신에 혐의가 있을까봐서 그렇게 성실하지 못한 일을 하였지만, 나는 같은 무리의 사람으로 삼망(三望)을 갖추는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만 못하여 선조의 회탕 정책을 쓰려고 했던 성상의 뜻을 받드는 길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정에서 인재 등용하는 방법이 결코 이렇게 구차해서는 안 된다. 그의 처지가 감당하지 못할 만하거나 합당하지 않으면 애당초 의망하지 말고 제수하지 말기를 강력히 청하는 것은 오히려 가하지만, 명색이 조정 공물(公物)인데, 의망은 해놓고서 통망인(通望人)으로 의망은 않으려고 하고 제수는 해놓고서 그 중에서 골라 제수하는 법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 풍습이 고쳐지지 않고는 하루에 열 개, 백 개 직함을 제수하더라도 그들에게 임시라는 호칭이 붙기는 일반일 것이다."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서원에 옥동(玉洞)이란 편액을 내렸다. 이 서원은 상주(尙州) 백옥동(白玉洞)에 있는데, 유생들의 소청(疏請)에 따라 편액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어 익성공 집안의 제사를 주관하는 자손을 찾아서 아뢰라고 명하였다.
전 군수 홍언섭(洪彦爕)이 상소하기를,
"병오년의 변고는 바로 신하로서는 머리가 부서지도록 조아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해야 할 일이었는데, 말 한 마디 못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던 일이 도리어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신도 사람인데 어찌 차마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예경(禮經)을 상고하건대, 원수를 갚지 못하면 복을 벗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이 지키고 있는 피끓는 마음을 위명(威命)이나 은수(恩數)로 인하여 고쳐먹을 수는 없기에 지난번 숙문(淑問)이 내렸을 때도, 만 번 죽을 것을 각오한다고 진술한 바 있었으니, 그 말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사적(仕籍)에서 신의 이름을 삭제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꼭 이렇게까지 곡진한 말을 하여 내 마음을 슬프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1월 24일 신사
전라도 관찰사 서용보(徐龍輔)에게 유시하였다.
"지난번에 무명이 귀하다 하여 군포(軍布)를 연차로 나누어 돈으로 대납할 것을 장계로 청하였기 때문에 비록 대동목(大同木)의 경우라도 흉년이 더욱 심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더러 있을 것 같아, 마찬가지로 구별해서 장계로 아뢰도록 했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미리 알아서 한편으로는 짐을 벗고 한편으로는 마음에 위안을 받게 하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 뒤의 장계 내용이 너무 분명하지 않았다. 때가 닥쳐서야 분등하고 구별하다가 만약 일호라도 허와 실이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는 폐단이 있다면 그 죄가 더욱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각신(閣臣)이라면 바로 이른바 이열(邇列)이요 근신(近臣)인데, 각신으로서 관찰사로 나간 자가 죄가 있는데도 요행으로 처벌을 면하고 어느 곳에서나 비호를 받는다면 이는 조정에서 이미 호오(好惡)를 사사로이 하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서둘러 체직시키는 것만으로 용서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니, 만약 임기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체직되어 관직을 가진 채로 돌아와 부모를 뵙고,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가는 고통을 면하고자 한다면 먼저 이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라."
형조가 주인을 고발한 사노(私奴) 득복(得福)의 죄를 엄히 다스릴 것을 아뢰어 청하니, 전교하기를,
"인륜 강상은 상하가 분명하여 그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라에는 임금과 신하가 있고, 개인 집에는 주인과 종이 있어 신하로서 임금을 범하면 역신(逆臣)이 되고, 종으로서 주인을 범하면 역노(逆奴)가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와 비슷한 짓을 하면 이는 바로 인륜 강상을 무시한 것으로 마음을 두고 했거나 두지 않고 했거나 감정이 있어 그랬거나 없이 그랬거나 그것은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세상 교화가 날로 떨어지고 민간 풍속은 날로 변하여 이대로 가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성을 상실하고 금수가 되어버리고 말게 되겠는데,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예사로이 보아넘길 일이겠는가.
이 사건 기록으로 말하면 당초에는 이천손(李千孫)이 소란을 일으킨 데서 발단이 된 것인데 천손은 현재 액례(掖隷)이기 때문에 감히 바로 고발할 수 없어 우선 차범자인 이영규(李永逵)를 관에 고발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영규는 바로 그의 작은 상전이니, 이것이 종이 주인을 고발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엄한 형벌을 가하여 사실대로 공초를 받아 법에 따라 처단하라."
하였다.
1월 26일 계미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도기 유생(到記儒生)들에게 강경과 제술 시험을 보여 제술에 장원한 생원 정약용(丁若鏞)과 강경에 장원한 유학(幼學) 김필선(金必宣)에게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재학(李在學)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30일 정해
형조가 아뢰기를,
"진안현(鎭安縣)의 살인 죄인 변덕금(卞德金)을 서둘러 가벼운 형으로 처리한 것은 인명을 중하게 여기는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겁탈과 살인을 징계해 막을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판하(判下)하기를,
"도둑을 막는 일은 평민을 위해서인 것이다. 기자(箕子)가 우리 나라에 와서 8조의 교화를 펼 때도 그 중 한 조항이 바로 강도질한 자는 그가 가진 전부를 몰수하고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또 더구나 법을 가장 관대하게 만든 나라로는 서한(西漢)을 치고 있지만 한 고조(漢高祖)가 약속한 법령 3조 중 한 조항도 역시 남을 해치거나 도둑질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근래에는 도둑을 막는 정사가 유명 무실하여 이른바 도둑을 다스리는 형구(刑具)라는 것이 한갓 젊은 무인들의 화풀이하는 도구가 되고 있을 뿐, 정작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한 특수한 업적을 남겼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덕금 같은 범죄에 대해서조차 대단찮은 일로 보아넘기려고 하니 이러고서야 백성들이 어떻게 생활을 할 것이며 법은 쓸 곳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에 대해서 감사나 병사로 있는 자들은 유의해 감독하고 신칙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마침 죄수 문안을 판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다시 이렇게 신신당부하는 바이니 경의 조(曹)에서 각도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라."
하고, 이어 덕금을 전대로 함께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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