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27권, 정조 13년 1789년 3월

싸라리리 2025. 8. 2.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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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기미

춘당대에 거둥하여 서북 별부료 군관(西北別付料軍官)에게 활쏘기 시험을 실시하였다.

 

정일상(鄭一祥)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3일 경신

이병모(李秉模)를 예조 판서로,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5일 임술

이문원(摛文院)에서 재계하며 하룻밤을 묵었다.

 

이에 앞서 무과 시험관 이기성(李基成)과 백동운(白東運)이 지사 이주국(李柱國)의 자책 상소문 끝에다 연명으로 이름을 적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우의정 채제공이 아뢰기를,
"기성 무리들은 몸을 움츠리고 엎드려 있으면서 처분이나 기다려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삼사가 처신하듯이 자기 변론을 한단 말입니까. 그들을 다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소에 연명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던 주국도 중한 쪽으로 추고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성원은 아뢰기를,
"참시관(參試官) 홍문영(洪文泳)·임도호(林道浩)도 소 끝에다 연명하였습니다. 일찍이 듣건대 명관(名官)으로서 음관 출신 재상의 소에다 연명하는 것도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하물며 무장이겠습니까. 견책하여 파직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6일 계해

열천문(冽泉門) 밖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예조가 의주(儀注)의 복색을 잘못 선정하여 곤룡포로 정하였는데, 예조 판서는 파직하고 예방 승지에게는 불서(不敍)의 법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성균관과 사부 학당의 유생 생원 권지(權禔) 등이, 성덕우(成德雨)가 윤선거의 서원 편액을 다시 내려줄 것을 청하면서 윤선거를 선정(先正) 문경공(文敬公)이라고 칭했다 하여 상소해 논박하고 복관(復官)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이렇게 할 일이 아니지만, 특별히 많은 선비들을 대우하는 뜻에서 부득이 비답을 내린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앞으로 이와 같이 대단한 것도 아닌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 소란을 피우는 상소는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자이건 선비들이건 간에 감히 와서 올리지도 말고, 또 그러한 자들은 관리로 불러들이거나 천거하지도 말라."
하였다.

 

식년 문과(式年文科)의 복시(覆試)를 실시하였다.

 

오재순(吳載純)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전 판서 정방(鄭枋)이 죽었다. 호남 도신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동궁 자리에 있을 때부터 그를 알았는데 지금 고인이 되었다니 자못 슬프고 애석하다. 본도로 하여금 부의와 필요한 물품을 각별히 대주게 하라."
하였다.

 

3월 7일 갑자

황단(皇壇)의 절제(節祭)에 참가했던 유생들을 불러 접견하고 응제(應製)하도록 명한 후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규장각이 아뢰기를,
"검서관(檢書官)의 전천(轉遷)010)  에 관한 문제는, 이문 학관(吏文學官)이 45개월 만에 전천되는 것을 기준하면 약간의 참고는 되겠으나 그러나 검서관은 처지가 근신(近臣)이고 일이 고되기가 이문 학관보다는 열 배가 될 뿐이 아닙니다. 30개월이 되면 전천시키는 것이 그들의 공로에 보답하는 뜻에 맞는 일일 것 같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비변사 낭청이 비록 정규직은 아니지만 15개월이 되면 6품으로 올라가니 그것도 참고 자료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초기(草記)대로 30개월로 하도록 규정을 정하라."
하였다.

 

각 도의 살인 사건에 관한 옥사를 심리하였다.

 

3월 8일 을축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재협(李在恊) 등이 치계하였다.
"명년에 황제의 팔순(八旬)을 경축할 때를 대비하여, 황도(皇都)의 궁전으로부터 원명원(圓明園)까지를 모두 다시 수리하고, 또 경성에서 서산(西山)까지 40리 사이에 있는 복도(複道)·정대(亭臺)·사찰(寺刹)들도 모두 다시 수리할 것을 태학사(太學士) 아계(阿桂)·화신(和珅) 등이 이미 주청하여 호부(戶部)로 하여금 거기에 드는 경비를 계산해보게 하였더니 1백 14만여 냥이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생번(生番)은 섬 오랑캐의 별명으로 중국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남쪽 끝 바다에 있고 대만(臺灣)에 소속되어 있는데, 작년 봄 임상문(林爽文)이 패망했을 때 생번으로 망명하자 생번 사람들이 그를 유인해 사로잡아 대군(大軍)에 바쳤으므로 황제가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와서 조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조금 아는 대만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그 수가 44명이었습니다. 그들은 군장(君長)이 따로 없고 단지 두목 4인 만이 있을 뿐이며 얼굴 생김이 모두 어린아이 같고 또 수염도 없었으며 머리는 잘라서 옷깃을 겨우 덮을 정도였으며 더러는 이마 위와 입 밑에 괘(卦) 모양의 문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식성은 생선과 분디를 좋아하며 물재주에 능하여 마치 평지를 다니듯 한다 합니다.
안남국(安南國)에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변고가 생겨 재작년 겨울에 안남국 사손(嗣孫)인 여유기(黎維祁)가 자기 어머니와 함께 탈출하여 바다를 건너 광서성(廣西省)으로 와서 급변을 고하였습니다. 광서 순무(廣西巡撫) 손영청(孫永淸)이 역마를 달려 급히 황제께 아뢰자 황제가 크게 가엾이 여겨 사손 모자에게 묵을 집과 곡식을 주고, 즉시 총독 손사의(孫士毅)에게 명하여 명을 받들어 군사를 동원하게 하고 전성(滇省) 등처의 군량을 운반해다가 그 사손을 데리고 수군을 지휘하여 곧장 안남의 왕성을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역적 괴수 완혜(阮惠)는 패하여 광남(廣南)으로 달아났고 손사의가 거기 주둔하여 그 나라를 진무(鎭撫)하면서 승전 소식을 아뢰니 황제는 사의에게 명하여 여유기를 그 나라 국왕으로 책립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로로 사의는 품계 한 등급이 올라 모용공(謀勇公)에 봉해졌는데 한족으로서 공(公)에 봉해진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안남에서 광남까지의 거리는 2천여 리나 되는데, 황제는 또 사의에게 명하여 광남으로 옮겨가서 역적 괴수를 추격 생포하고 적의 잔당들도 모두 섬멸하게 하였습니다. 안남 국왕은 나라를 다시 찾고 왕위를 이어받게 해준 은혜에 감동하여 그 종실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조회 오기 위해서 운남(雲南)에 와 정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광회(韓光會)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3월 9일 병인

서유린을 예문관 제학으로, 윤숙(尹塾)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0일 정묘

인정전에 거둥하여 문과 전시(殿試)를 보여 서영보(徐榮輔) 등 60인을 뽑고, 춘당대에 거둥하여 무과 전시를 보였다.

 

3월 11일 무진

춘당대에 거둥하여 무과 전시를 보이고 백영진(白泳鎭) 등 4백 37인을 뽑았다. 그리고 문과 전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12일 기사

이재간(李在簡)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3월 13일 경오

새로 과거에 급제한 서영보를 불러 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네 용모가 네 아비를 많이 닮았고 또 고 재상(宰相)의 모습도 있다. 너의 집안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나 때문이었다는 탄식을 하곤 했었다. 3대 정승 집안을 내가 잊을 수 없었는데 지금 네가 출신(出身)하였으니 나의 빚을 갚은 셈이다."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그의 조부 고 재상은 바로 기묘년에 내가 왕세손으로 책봉될 때 유선(諭善)으로서 내가 다년간 수학하였다. 그의 공적을 생각하면 어찌 남 보양(南輔養)·박 유선(朴諭善)만 못하겠는가. 그의 손자가 문과에 장원하였으니, 옛 정의를 되새기는 일을 날을 넘겨서야 되겠는가. 고 영의정 문청공(文淸公) 서지수(徐志修)의 집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도록 하라. 지난 일들은 모두 덧없는 세상 탓으로 돌리고 그 아들이 출신하였으니 그 아비도 서용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집안을 완전한 집안이 되게 하고 그 사람들도 완전한 사람들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전 감사 서유신(徐有臣)의 죄명을 씻어주고 이어 서용하여 즉시 들어와서 치제를 맞이하게 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이만수(李晩秀)·서영보가 이미 6품에 올랐으니 기주(記注)의 일을 익히게 했으면 한다. 또 근거될 만한 전례도 있으니 겸 춘추(兼春秋)로 계하(啓下)하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서리와 하인배가 병조의 금훤랑(禁喧郞)에게 곤장을 맞았었는데, 교리 민창혁(閔昌爀)과 검열 이상황(李相璜)이 그들의 호소만을 듣고 병조 서리의 종아리를 쳤다. 그러자 입직한 병조 낭청이 그 일에 대해 따졌다. 이를 상이 듣고는 민창혁과 이상황을 파직시키고 홍문·예문관의 서리와 하인은 해조로 하여금 엄히 다스리게 하였었다. 이때 와서 형조가 각인의 진술 내용을 들어 아뢰니, 전교하기를,
"야간 통행 금지·대궐 출입 단속·떠드는 것 단속은 금지하는 조항 중에서 지극히 하찮은 것에 불과하지만 정유년 이후로 법령을 엄하게 세워 영구히 실시하도록 하였고 여러 차례 신칙까지 하였는데 그것이 왜 아무 곡절없이 그런 것이겠는가. 《명의록(明義錄)》을 읽은 경들만이 아니라 비록 어리석고 무식한 서리 하인들이라 할지라도 《명의록》이 있다는 것쯤이야 왜 모르겠는가. 익룡(翼龍)이 있었기 때문에 야간 통행을 금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흥문(興文)이 있었기에 대궐문 출입을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해근(海根)이 있었기에 떠드는 것을 단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령 이상의 문제들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일단 금령인 이상 아랫것들이 어찌 감히 법을 어기며 관원들이 어찌 감히 한 쪽을 두둔하고 나선단 말인가. 김계오(金繼吳) 등에게 3차의 형벌을 가한 후 연한을 정하지 말고 가장 먼 섬의 관노(官奴)로 보내고 사면의 특례에도 관계없게 하여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 《명의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3월 14일 신미

조경(趙瓊)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15일 임신

검열 김조순(金祖淳)의 이름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새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주서와 한림에 추천하는 제도를 영원히 없애라고 명하였다. 이때 먼 시골의 강경생(講經生)으로 식년과(式年科)에 급제한 자를 우선 주서에 추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도 하번의 한림이 전례를 들어 서울에 있는 문신을 추천하였기 때문에 이 명을 내렸던 것이다.

 

오재순을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전에 의망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이조 참판  구상(具庠)이 상소하기를,
"신이 마침 병세가 심하여 도목 정사에 참여하지 못했었는데, 지금 의망자 명단을 보았더니 이병모(李秉模)를 다시 부제학으로 의망하였습니다. 부제학이 얼마나 엄정하게 선발해야 할 자리인데 새로 통망된 사람을 다시 의망한단 말입니까. 신이 참판 자리에 있는데도 의견을 묻는 간통을 보내지 않았으니, 이는 신을 동료 당상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을 직에서 물러나게 해주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였다.

 

전교하였다.
"이미 명을 받았고 또 정사에도 참여했었으면서 유독 부제학 통청(通淸)만은 왜 사정이 있다고 하면서 거행하지 않는 것인가. 이런 풍습은 나라의 기강만 해칠 뿐이다. 이조 참의 조윤대(曺允大)를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제수하라."

 

3월 16일 계유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김재찬(金載瓚)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문원(李文源)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17일 갑술

홍문록(弘文錄)에 【부제학 김재찬(金載瓚), 응교 이경오(李敬五), 교리 홍의호(洪義浩), 부교리 안책(安策), 수찬 이동직(李東稷).】  5점을 받은 사람은 한광식(韓光植)·박규순(朴奎淳)·윤행임(尹行任)·조윤수(曺允遂)·이귀운(李龜雲)·서매수(徐邁修)·이희관(李羲觀)·이면응(李冕膺)·서영보(徐榮輔)·이만수(李晩秀)였다.

 

3월 18일 을해

서울과 지방의 옥안(獄案)을 심리하였다.

 

3월 19일 병자

김익휴(金翊休)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윤숙(尹塾)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삼았다.

 

3월 20일 정축

우의정 채제공이 상차하기를,
"성상께서 신으로 하여금 힘을 내어 회권(會圈)에 참여하라는 극진한 유시를 내리셨습니다. 아,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쌓으신 성대한 덕업(德業)은 백성들이 무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훌륭했던 것은 바로 건극(建極)의 정치로써 기성(箕聖) 이후 수천 년 동안 한(漢)·당(唐)·송(宋)의 임금들로서는 따를 수 없는 바였습니다. 우리 성상께서도 선대왕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시어 회탕 정책을 펴기에 주력하고 계시는데, 어제 내리신 전교에서는 회권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더욱 마음을 쓰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이 어찌 감히 일신과 가정만을 걱정하고 제 자신의 편리만을 찾겠습니까. 다만 병이 오는 것은 사람 힘으로 막을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이 평소에 알고 있던 바는 중심(中心)이 충(忠)이 된다는 것뿐이어서 마음으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렇다고 하는 것을 신은 부끄럽게 여기고, 또 마음으로는 그렇게 여기면서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도 신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행동한다면 다만 일을 망치기에 족할 뿐인데 어떻게 성덕을 만천하에 천양하고 한 왕조의 정치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듣건대 동료 재상이 이미 입궐하였고 대제학도 나왔다 하니 그 정도면 회권하기에 충분한데 신이 무엇 때문에 억지로 일어날 수 없는 병을 억지로 이기고 참여할 필요도 없는 회권에 덤으로 참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신에게 병 조리를 하도록 윤허하시어 겨우 붙은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게 하시고 회권하는 일에도 구애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회탕 정책도 선대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일 중의 하나인데 근자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해온 결과 서로 화합될 가망이 없지 않다. 이번 회권에 경이 참여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경은 어째서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차자 가운데, 중심을 충으로 생각하고 평소 그렇게 해오고 있다고 운운했는데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도 어찌 여심(如心)이 서(恕)라는 것으로 경을 대우하지 않겠는가. 경은 부디 사양하지 말고 회권에 참여하라."
하였다.

 

도당록(都堂錄)에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대제학 오재순(吳載純), 좌참찬 김화진(金華鎭), 우참찬 윤숙(尹塾), 이조 판서 이갑(李𡊠), 참판 구상(具庠).】  6점을 받은 사람은 권평(權坪)·오정원(吳鼎源)·서유련(徐有鍊)·최현중(崔顯重)·이지영(李祉永)·한광식(韓光植)·유문양(柳文養)·박규순(朴奎淳)·윤행임(尹行任)·김희조(金熙朝)·김재익(金載翼)·신기현(申驥顯)·조윤수(曺允遂)·이정운(李貞運)·윤광안(尹光顔)·이귀운(李龜雲)·서매수(徐邁修)·이희관(李羲觀)·이면응(李冕膺)·신헌조(申獻朝)·서영보(徐榮輔)·이만수(李晩秀)였다.

 

의정부가 강제(講製)할 문신으로 서영보(徐榮輔)·정약용(丁若鏞)·심규로(沈奎魯)·서유문(徐有聞)·윤인기(尹寅基)·심능적(沈能迪)·심상규(沈象奎)·이기경(李基慶)·박윤수(朴崙壽)·김이교(金履喬)·안정선(安廷善)·이내현(李來鉉)·유한우(兪漢㝢)를 뽑아 아뢰니, 김희순(金羲淳)·이동면(李東冕)을 더 뽑으라고 명하였다.

 

김광묵(金光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1일 무인

춘당대에 거둥하여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영의 장교와 군졸들에게 활쏘기와 총쏘기를 시험보였다.

 

이조원(李祖源)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3월 22일 기묘

소대하였다.

 

3월 23일 경진

이병모(李秉模)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3월 24일 신사

직각(直閣)을 회권(會圈)하라고 명하였다.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상소하기를,
"규장각 직각을 회권하라는 것은 바로 재상이 신을 견제하기 위하여 내건 하나의 큰 제목이었습니다. 그 놀라운 기지와 예리한 칼날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떨리고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일이었으니, 이 일이 있고부터 규장각이 실은 신이 떠나야 할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회권하는 한 가지 일은 바로 신이 상처입은 안건인데 신이 어떻게 차마 그 일을 할 것이며 또 어떻게 감히 그 일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성상께서도 왜 꼭 신에게 차마 하지 못하고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좌상의 말은 비록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나온 것이지만 경이 한 번 이렇게 하는 것이야 어쩌면 이상할 것이 없기도 하다. 즉시 본각(本閣) 검교와 제학으로 하여금 망통(望筒)을 써 들이게 한 후에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려 패초해서 회권하는 일을 완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규장각 직각을 회권하였다. 4점을 받은 사람은 윤행임·이만수였고, 3점을 받은 사람은 이희관·서용보였는데, 이만수를 직각으로 삼았다.

 

3월 25일 임오

좌의정 이성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제학 김종수의 상소문을 보건대 또 신이 상참 때 연석에서 아뢰었던 말을 제기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그날 아뢰었던 것은 바로 국가의 체통으로 보아 그냥 말 수 없어서였던 것인데 그는 상소를 한 번 올리고 두 번 올리면서 신에게 의심과 노여움을 품고 또 신을 짓밟고 깔아뭉개면서, 견제를 한다느니 상처를 입혔다느니 하였습니다. 심지어 놀라운 기지 예리한 칼날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는 바로 더할 수 없는 큰 욕으로써 마치 신이 의도적으로 없는 죄를 꾸며내기라도 한 것처럼 하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신이 있어서는 안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겨우 말 한 마디했다 하면 위험과 모욕이 곧 닥치는데, 신이야 말할 것도 못 되지만 조정의 체통에 손상이 있으니 바라건대 신을 빨리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重臣)은 언제나 저돌적인 것이 병통이어서 내가 늘 지시도 하고 깨우쳐주기도 하는데, 어제 상소문 내용만 해도 너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많이 하였다. 그냥 내버려두도록 하라. 어찌 그와 더불어 이러니저러니 하면서 충후한 기풍을 손상시키겠는가."
하였다.

 

3월 26일 계미

송영(宋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3월 27일 갑신

함경도 관찰사 이숭호(李崇祜)가 관아에서 죽었다. 전교하기를,
"10여 년 동안 궁연(宮筵)에 출입하면서 《강목(綱目)》 한 질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강(參講)하였다. 그만큼 오래 있었던 것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고 내가 도움받은 것은 더욱 적지 않았다. 연전에 자급을 올려준 것도 옛정을 생각해서였는데 지금 갑자기 고인이 되었다니 자못 슬픈 생각이 든다. 영구(靈柩)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원래 주는 부의 이외에 따로 장례에 필요한 물자를 더 주어 옛정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사에 따라 다름이 없음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상차하여, 함경 감사 후보 추천을 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아뢰니, 비답하기를,
"‘소조(所遭)’라는 두 글자를 경은 왜 끄집어내는 것인가. 그저께 중신이 한 상소 때문에 그렇게 운운하는 것인가? 내가 경에게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다. 그가 참으로 조정을 욕되게 하는 일을 했다면 바로잡을 수도 경계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꼭 갈등을 일으킬 것은 또 뭔가. 오늘 당장 경계할 점으로는 없는 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의 고심거리이고 경으로서도 이해하고 인식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보면 중신이 말을 함부로 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니, 조정의 체통을 높이고 시끄러운 일이 생길 꼬투리를 없애는 뜻에서 내각 제학 김종수를 중한 쪽으로 추고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병모(李秉模)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지평 박사기(朴思機)가 상소하여 과거의 폐단을 논하기를,
"오늘날 폐단 중에서 과거의 폐단이 더욱 심한데 그 대략을 논하자면 선비들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시관(試官)이 빨리 낸 시권(試券)만을 취하는 것이 둘째이고, 과거 시험장이 난잡한 것이 셋째이고, 세력있는 자들이 차작하는 것이 넷째입니다. 대체로 과거 시험에서 쓰는 글이 비록 경술(經術)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반드시 육경(六經)에 뿌리를 두고 제자 백가에도 통해야 하는데, 그래서 옛날에는 인재를 취했다 하면 틀림없이 실재(實才)였고, 시험을 보였다 하면 틀림없이 현사(賢士)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비들은 글 읽기를 힘쓰지 않으므로 문체가 거칠고 졸렬하여 수십 년 전과 비교하면 몇 층이 떨어진 정도가 아닙니다.
옛날 시관들은 비록 어지럽게 쌓인 시축과 뒤늦게 낸 시권 중에서도 실수없이 골라 뽑았는데, 지금은 오로지 일찍 낸 시권만을 취하여 비록 한유(韓愈)나 사마천(司馬遷) 같은 재주라 하더라도 시권을 일찍 바치지 않으면 과거에 급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비라는 사람들이 제 재능은 생각지 않고 바쁘게 서둘러 글을 얽어 바치기 위해 반드시 시제(試題)가 걸려 있는 아랫자리를 다투고 또 반드시 글씨를 빨리 쓰는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편의 문장을 두 사람이 짓기도 하고, 한 장의 시권을 두 사람이 쓰기도 하며, 심지어 미리 써둔 투식이 있기까지 합니다.
옛날의 과장은 대과(大科)인 경우 바친 시권이 1천 장에 달하면 훌륭한 선비가 많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비록 향시(鄕試)의 경우에도 시권이 4, 5천 장 이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디 사람들 재주가 옛날보다 나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학문도 없는 무리들이 다른 사람의 초고를 베껴 제 글로 만들어 바쳐 심지어 대과에는 한 사람이 지은 글을 수십 명이 써먹습니다. 그리고 권세있는 집안의 자제 한 사람이 과거를 보는 데는 수종(隨從)이다 사수(寫手)다 하는 자들이 무려 수십 명이나 되니, 이것이 난잡한 소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거의 폐단 중에서도 소과(小科)가 심하고 소과 중에서도 향시(鄕試)가 더욱 심합니다. 대체로 시관들이 눈여겨보는 것이 시권의 종이가 두껍고 얇은 것과 글씨가 정하냐 거치냐는 것뿐이므로 노사 숙유는 항상 침체되어 뜻을 굽히는 근심이 있고, 겉치레를 잘하는 자가 학문도 없으면서 시험에 응시하며, 글씨를 잘 쓴다고 손꼽히는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정해진 값이 있습니다. 네 가지 폐단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과장이 정제될 가망이 없는데 하물며 이 네 가지 폐단이 다 있는데야 어찌되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대왕께서 과거의 폐단을 통찰하시고 대과에는 경(經) 하나를 강하고, 소과에는 《소학(小學)》을 강하게 하셨으며, 또 면접해 시험하는 규정까지 만드셨습니다. 농간을 방지하는 방법으로는 그 방법이 매우 훌륭한데도 강경에서는 불통(不通)의 응시자가 많고, 시제에서는 백지 시권을 내는 자가 많아 이내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이 시행되는 것을 좋아하는 자가 적으니 시행을 하자면 서서히 해야지 서둘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거의 폐단에 대해 진술한 그대의 말이 절실하다. 그러나 강경과 면접하여 시험하는 문제는, 혹시 시행했다가 다시 중지할 염려가 있을까 하여 아직까지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시권을 일찍 내는 것을 우선으로 치는 것을 금하라는 일은 그대의 말이 더욱 옳다. 모두를 묘당으로 하여금 자세히 살펴 등대(登對) 때 상세히 아뢰게 하겠다."
하였다.

 

3월 29일 병술

소대하였다. 서유린(徐有隣)을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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