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자
예조가 각능의 봄 전알(展謁)에 대해 여쭈었는데, 전교하기를,
"작년에는 【무신년이 진종(眞宗)이 승하한 해이다.】 연고로 인하여 전알을 못했지만, 이달이 바로 영릉(永陵)께서 탄강하신 달이니 마땅히 영릉을 전알해야 할 것이다. 회가(回駕)하는 날이 또 마침 홍릉(弘陵)의 기신(忌辰)이니 재전(齋殿)에서 재숙한 다음 친히 기신제를 모시고 환궁할 것이다.
봄철을 당하여 백성들의 형편이 대부분 궁핍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견감하거나 면제해도 될 만한 그리 긴요하지 않은 물건들은 견감 면제하도록 경기 감사가 이미 연교(筵敎)를 받아 각읍에다 엄히 신칙하였으므로 경기 백성들은 이미 많은 감면을 받았을 것이다. 각 관아의 이례(吏隷)와 각영(各營)의 군교(軍校) 그리고 공시인(貢市人)들도 다 같은 백성인데, 외읍(外邑)은 그렇게 돌봐주면서 서울 백성들은 침탈과 곤란을 받도록 내버려둔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신과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입시했을 적에 이미 반과(盤果)를 지응(支應)하는 등의 일을 금하여 작년과 똑같이 하도록 하였고, 그 밖에도 공시인 및 이례·군교들에게 폐단이 되는 지나친 비용도 일일이 찾아내어 모두 즉시 견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가(公家)에서 의례 공급해야 할 물품들은 각영·각사를 막론하고 전례와 똑같이 주고 절대로 줄이거나 깎지 말므로써 조정에서 서울과 지방을 똑같이 보고 있다는 뜻을 보여주고 윗사람의 것을 덜어 아랫사람에게 보태주는 실지 효과가 백성들에게 미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구상(具庠)을 이조 참판으로, 김노순(金魯淳)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3일 경인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희생과 제기를 살폈다. 내일이 춘향(春享)이기 때문이었다.
이재학(李在學)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광묵(金光默)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4일 신묘
삼화부(三和府)로 귀양간 죄인 윤시동(尹蓍東)을 특별히 방면하여 편리한 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쥐를 잡으려다가 아끼는 그릇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은 것이 죄는 죄다. 그러나 과거(科擧) 일을 증거로 인용한 것으로 보아 그가 아무 것도 모르고 함부로 덤벙된 짓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뒤에 듣고 다시 상고해 보니 그 한 사람뿐이 아니며, 듣기에 90세된 그의 노모가 근심 걱정으로 병이 났다고 한다. 그의 실지 정상이 이렇고 또 그의 개인 사정도 이러하니, 왕정(王政)은 효도로 다스리는 것이 급선무 아닌가."
하고, 이어 이 명을 내렸다.
2월 5일 임진
김이주(金頤柱)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동지의금부사 유항주(兪恒柱)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윤시동이 본 사건을 자세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지만, 시동이 만약 자기 집에서 등사한 책자를 보지 않았다면 그 네 글자를 어떻게 써넣었겠습니까. 그는 속으로 ‘내가 비록 이것을 써넣더라도 누가 알겠으며 설령 아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조정에서 누가 감히 나에게 따지겠는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조금도 기탄없이 분수 넘게 떠맡고 나섰던 것입니다. 범죄가 지극히 중한 사람을 다시 벼슬길로 들어오게 하려고 하는데도 승정원에 있는 신하들이 간쟁하는 말 한 마디 없으니, 전에 약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용감했던 사람들이 오늘에 와서 세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그렇게 비겁하단 말입니까. 윤시동을 방면하여 본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짐작도 없이 그런 처분을 내렸겠는가."
하였다.
이면긍(李勉兢)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2월 6일 계사
도승지 김희(金憙)가, 의금부 당상이 승정원을 침범해 배척했다 하여 상소해 체직을 청하고, 좌승지 이조승(李祖承)과 좌부승지 이조원(李祖源)도 연명으로 상소하고는 곧장 나갔는데, 동부승지 홍인호(洪仁浩)가 또 의리를 내세워 물러가려고 하자, 전교하기를,
"요즘 겉으로는 시끄러운 듯해도 내용으로는 안정 위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소원한 관료들도 알고 있는 실정인데 더구나 다년간 정원에 있는 가까운 반열의 사람들이 왜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의금부 당상의 상소 내용이 과격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직무에 충실하기를 권면하고 경계를 베푼 것이 대략 후진을 인도하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완급의 사이에 처리해 나갈 길을 이미 잡고 있는데, 갑자기 가로막고 나서서 마치 승정원을 철의 장막이라도 되는 양 하였다. 도승지 김희에게 다시는 서용하지 않는 법을 속히 시행하라. 3품의 관원이 소명을 세 번 어긴 것이 이미 격례(格例)에 어긋난 일인데, 계속해서 사직소를 올리다니 해괴하기 그지없다. 동부승지 홍인호는 삭직하라. 그리고 뒤늦게 문제를 일으킨 책임과 과격한 잘못에 대해서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동지의금 유항주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7일 갑오
춘당대에 거둥하여 서총대 시사(瑞蔥臺試射)를 보였다.
2월 8일 을미
윤상동(尹尙東)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2월 9일 병신
전 판서 김용겸(金用謙)이 죽었다. 용겸은 자가 제대(濟大)이다.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손자로 음사(蔭仕)로 발탁되어 정경(正卿)까지 되었다. 도량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또 행실과 품격이 매우 높아 우뚝한 고가(古家)의 유로(遺老)가 되었으므로 상도 매양 그를 예우하여 음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연석에 오르면 담론이 성실하고 숨기고 기피하는 말이 없었다. 송덕상(宋德相)이 부름을 받고 올라오자 온 조정이 그를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였으나, 용겸은 상에게 아뢰기를,
"덕상은 학식도 없는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그를 부르셨습니까."
하니, 그 말을 들은 자들이 옳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죽자 전교하기를,
"고가의 사람으로 나이가 80여 세에 이르렀는데, 언제나 서연에서 책을 끼고 있던 일을 생각하여 적지 않은 은총을 베풀었었다. 그런데 지금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매우 슬프다. 정해진 부의 이외에 더 주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집(金尙集)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형(朴天衡)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10일 정유
전교하였다.
"능에 행차하여 환궁하기 전에는 모든 제사에 궁을 지키고 있는 승지가 전향(傳香)하고, 이어 봉심하고 부정 유무를 조사 적발한 뒤 그 모든 사실을 장계로 아뢰라. 봉심하기 위해서 나갈 때에는 정원이 빌 염려가 있으므로 가승지 한 사람을 추가하여 재가를 받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
2월 11일 무술
영릉(永陵)을 전알하기 위해 대가가 신원천(新院川)에 이르렀을 때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과 선공감 제조 이병모(李秉模)가 청대해 아뢰기를,
"도감 진영에서 선상군(先廂軍)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너는데 절반도 건너기 전에 다리가 무너졌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이나 말도 다쳤는가?"
하자, 유린이 아뢰기를,
"시내가 넓지 않아 사람과 말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건너갈 만한 다른 다리가 또 있는가?"
하니, 유린이 아뢰기를,
"곁에 작은 다리가 하나 있기는 하오나 대가가 어떻게 작은 다리로 건너가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상관인가."
하고, 드디어 작은 다리로 건너 고양(高陽)의 임시로 마련된 전궁에 행차를 멈추고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김익(金熤)과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을 불러 접견했다. 명선 등이 다리 무너진 일로 하여 도신(道臣)과 차사원에게 죄를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께서 교하(交河)에 거둥하실 때와 병술년에 고령(古嶺)에 거둥하실 때 신원천(新院川) 다리가 무너졌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다시 축조하는 일을 마쳤다 하여 도리어 상전을 내리셨다. 작년 가을에 선창 일로 하여 도신과 수령을 귀양보냈는데, 지금 또 다리 문제로 죄를 내린다면 그게 어디 듣기에 좋겠는가.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고양 동헌(東軒)의 편액(扁額)을 향춘헌(向春軒)이라고 명명하였다. ‘양지쪽 꽃나무엔 봄이 쉬 찾아드네.[向陽花木易爲春]’라는 시구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2월 12일 기해
대가가 고양 군재(高陽郡齋)를 출발하여 노차(路次)에서 본군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하고 이어 영릉에 이르러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후 순릉(順陵)과 공릉(恭陵)을 차례로 전알하고 저녁에 교하군에 머물렀다. 전교하기를,
"묘 앞의 길을 지나자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사당에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종가집이 빈한하니 본도로 하여금 먹을 것을 대주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선왕께서 형제간에 우애하시던 성덕을 본받는 길인 것이다."
하고, 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묘, 봉조하 홍봉한(洪鳳漢)의 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묘,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묘,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묘에도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이들의 묘가 대가가 지나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월 13일 경자
대가가 교하 군재를 출발하여 노차에서 본군의 부로들을 불러 접견하고서 특별히 금년 조세의 절반을 견감해주고 임인·계묘년 이전의 묵은 환자곡을 탕감하였다. 그리고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다 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곡물의 필요한 양을 계산하여 그것으로 영구히 여유있게 먹을 수 있도록 하게 하고, 경내의 사서인 중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음식물을 급여하고, 80세 이상으로 거둥을 세 번 겪은 사람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주게 하였다. 그리고 이어 장릉(長陵)으로 가서 작헌례를 행하고 전교하기를,
"고향의 나무도 오히려 공경하는 것인데 하물며 손때가 묻은 나무이겠는가. 선왕조 신해년에 파주(坡州)에서 본 능으로 이장하고서, 효묘(孝廟)께서 옛 능소에다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으셨던 고사를 따라 이 나무를 심으셨던 것인데 지금 저렇게 울창하다. 만약 이 나무에 표지를 하지 않으면 후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나무에 대부(大夫)의 명호를 붙인 것은 옛날에도 그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더 소중한 이 나무이겠는가. 어의궁(於義宮)·용흥궁(龍興宮)의 소나무에도 자급(資級)을 주라고 명하였으니, 이 역시 선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 방법인 것이다. 선왕이 손수 심으신 잣나무 세 그루에 구리로 울타리를 치고 수식(手植)이란 두 글자를 새겨놓는다면 뒤에 이 능을 전알하고 이 나무를 보는 자가 누가 감히 공경하고 감격하지 않겠는가. 이 전교를 능지(陵誌)에다 기재하라."
하였다.
대가가 파주에 이르러 행전(行殿)에서 각영의 장관(將官)들에게 활쏘기와 총쏘기 시험을 보이고서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2월 14일 신축
파주 행전에 나아가 본주의 부로들을 불러 접견하고, 전교하기를,
"숙배 단자를 봉하여 내리는 것은 바로 옛부터 있던 예로써 경의를 널리 표하는 아름다운 법을 받들어 따르는 뜻이다. 수령들에게도 그렇게 하는데 어찌 이 지방에 사는 백성들에게 은혜가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로들을 불러 접견하고 이미 고통을 물었다. 백성들이 비록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어찌 모르는 체 하겠는가. 더구나 본 목(牧)은 방어사가 있는 병영으로서 체모가 각별하니 환곡·향곡(餉穀)이 넉넉치 못하리라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곡물 6천 석을 떼어 향곡에 보태도록 하고, 임인·계묘년 이전의 묵은 환곡은 모두 탕감하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대가가 지날 때면 한 번 치제(致祭)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였다. 같은 시대의 덕있는 이로서 원(院)과 묘(墓)가 또 같은 고장에 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듯하여 감회가 더욱 깊다. 승지를 보내 선정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묘에 치제하라. 제문은 직접 짓겠다."
하였다. 그리고 고양군에 행차를 머물고는 전교하기를,
"10년 사이에 본군에 거둥한 것이 거의 열 차례나 된다. 어가가 지나는 곳에는 으레 은택이 있는 것인데 하물며 자주 지나는 곳에 어찌 자주 은택 베푸는 일을 아끼겠는가. 곡물 5천 석을 떼어 환곡에 보태게 하고, 그 모곡(耗穀) 몫은 그대로 고을 수령에게 주어 거둥 때의 경비에 쓰게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들도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것이고 고을도 잔폐에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인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나서 이어 어제(御製)를 군의 관아에다 게시했던 것을 옛날 보아왔었는데 선대왕께서 거둥하시던 날 백성들을 불러 접견하던 일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전교를 지방관으로 하여금 써서 게시하게 하라. 파주와 교하에는 이미 시행하였는데 여기라고 똑같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임인·계묘년 이전의 묵은 환곡을 역시 탕감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창릉(昌陵)에 이르러 전배하고 홍릉(弘陵) 재실로 돌아왔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이희(金履禧)가 규정 외의 차왜(差倭)를 들여보낼 일로 장계하여 청하였습니다. 이웃 나라와 사귀는 도리는 약조를 잘 지키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통신사의 시기를 물리는 이유를 통보하지 않을 수는 없겠으나, 이미 연례로 사신을 보내고 있는 이상 저들 편리한 대로 수행해 올 수도 있는데 따로 차왜를 보낸 것은 조약을 위반한 일입니다. 입국 허락은 고사하고 사리에 의거해 책망하는 유지를 내리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것은 예사로이 조약을 어긴 일과는 다르다. 통신사를 보낼 기한이 되었는데 그들의 형편이 넉넉치 못하여 이렇게 기한을 물려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웃 나라와 사귀는 우리의 도리로 볼 때 어떻게 원래 정해진 약조를 약간 어겼다 하여 무조건 막기만 함으로써 오래도록 객관(客館)에 머물러 있게만 해서야 되겠는가. 특별히 입국을 허락하고 이어 즉시 접위관(接慰官)을 보내어 접대하도록 하라."
하였다.
궁궐을 지키는 가승지 홍문영(洪文泳)·임제원(林濟遠)이 치계하기를,
"오늘 초경 녘에 병조 참판 유의(柳誼)와 궁궐을 지키는 종사관 이청(李晴)이 와서 말하기를 ‘돈의문(敦義門) 부장(部將) 박종혁(朴宗赫)이 수문군(守門軍) 한 사람을 대동하고 홍령기(紅令旗)를 가지고 단봉문(丹鳳門) 밖에 와서, 선전관이 신전(信箭)을 가지고 와 문틈으로 홍령기를 들여보내면서 성문을 열어 달라고 하였는데 표신(標信)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기에, 신들이 삼가 《대전통편(大典通編)》의 궁궐문 여닫는 조항을 상고해보았더니, 거기에는 ‘능에 행차하여 밤을 지내게 될 때는 성문을 유문함에 있어 반드시 신전과 표신이 함께 와야 자전께 분부 내리시길 청하여 신표를 조사 확인하고 나서 문을 열어준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선전관은 단지 신전만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법을 어겨가면서 함부로 자전께 분부 내리시기를 청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돈의문은 으레 열어두는 문이기에 아마 그대로 유문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신전과 영기만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문이 이미 닫혀 있고 표신도 함께 가져오지 않았으면 말없이 그냥 돌아갈 일이지, 열라거니 유문하라거니 하면서 서로 힐난했다는 것부터가 이미 너무 데면데면하고 경솔한 일이었다. 영기도 하나의 신표인데 더구나 홍령기이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문틈으로 문졸(門卒)에게 주어 기를 가지고 성안의 거리를 왕래하게 하였으니,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해괴하기 그지없다. 그 선전관을 파면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임인
홍릉(弘陵) 기신제(忌辰祭)를 친히 지냈다. 전교하기를,
"기신제를 능침(陵寢)에서 친히 지낸 일은 일찍이 선대왕 때 그렇게 한 전례가 한 번 있었을 뿐인데, 대가가 돌아오는 날이 마침 기신일이어서 한 번 이루고 싶었던 정성을 이루게 되어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우며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본 능의 관원을 벼슬을 올려주되 6품에 오르지 못한 사람은 6품으로 승진시키라. 임신년이 바로 성후(聖后)의 갑년인데, 내가 이해에 태어나 사랑하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특별히 입었었다. 오늘 이 제사에 임하는 나의 마음이 과연 어떻겠는가. 본 능의 관원 중에 빈 자리가 생기면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직계 자손 중에서 골라 임용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릉(明陵)·익릉(翼陵)·순회묘(順懷墓)·경릉(敬陵)에 가서 전배하고 환궁하였다.
2월 16일 계묘
특별히 병조 판서 이문원(李文源)을 체직하고, 정호인(鄭好仁)을 대신 제수하였다.
1백 47건의 상언(上言)에 대해 판하(判下)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 수문장(守門將) 이희대(李喜大)가 자기 10세 방조(旁祖)인 고 영의정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위하여 무덤을 수축하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상언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상고하건대, 구성군 준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한 공로로 재상이 되었으나 성종조 때 역모 사건에 말려들어 영해부(寧海府)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그대로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다가 숙묘조 때에 와서 고 참판 이선(李選)이 상소해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훈등과 작위가 회복되었습니다. 죄명을 입은 채로 죽은 후 2백 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신원이 허락되었으니, 시호를 내리고 무덤을 봉축하는 은전은 애당초 논의 대상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구성군의 일에 대해 내 일찍이 마음속으로 가엾게 여겨왔던 바이다. 그의 재능이나 공적으로 볼 때 결코 그냥 없어지도록 버려둘 수는 없다. 귀양지에서 죽은 것이 그냥 앉아 죽은 것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신원이 숙묘조 때 있었다 하니 애석하게 여기신 성은을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시호 내리는 일은 함부로 논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구역의 묘역마저 한없이 잡초가 무성하도록 버려둔다면 그것은 그의 업적을 기억해야 할 뜻과는 매우 배치되는 일일 것이다. 묘지가 어느 곳에 있는지, 직계 자손이 누구인지, 집안에 간직한 고적(古蹟)으로 혹 전해오는 것이 있는지를 경이 조사해 모아서 다시 초기(草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그의 보첩(譜牒)을 가져다가 상고해보니, 구성군은 아들이 없고 무덤은 양주(楊州)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무덤을 지켜 나무꾼을 금하도록 지방관에게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진안 대군(鎭安大君)의 묘를 수축하고 어제비(御製碑)를 세웠다. 유학(幼學) 이국주(李國柱)가 상언하기를,
"15대조 진안 대군을 풍덕(豊德)에다 장사지냈는데, 병자년 난리 뒤에 자손들이 유랑하다가 묘를 실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미년에 묘 옆이 장마에 깎여나가서 작은 묘갈(墓碣)이 형상을 드러냈습니다."
하니, 도신에게 명하여 직접 봉심하고 나서 돈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 무덤을 봉축하고 제청(祭廳)을 지어주게 하였고, 따로 무덤 지키는 민호(民戶)를 두어 백성들이 장사지내거나 나무하고 꼴베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며, 지방관이 춘추로 보살펴서 감영을 통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묵은 비석이 단소하므로 본도로 하여금 비석을 새로 만들게 하고 어제 비문을 내렸다. 그 비문에,
"내가 즉위한 지 13년이 되는 기유년 2월에 선왕의 능침을 전알하고 돌아오다가 서울 근교에 머물렀는데, 충주에 사는 유학 이국주가 연로(輦路)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은 진안 대군의 15대손입니다. 대군의 묘를 함흥에서 풍덕 고개(古蓋)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헌은 병화(兵火)로 인해 다 없어졌고 자손들은 먹고 살기 위해 바삐 돌아다닌 지가 지금 거의 1백 년이 가까우니, 무덤에 봉분하고 나무를 심었던 자라 하더라도 그곳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가깝고 먼 친척을 돈독하게 대해주시는 조정의 은덕에 힘입어, 지난 정미년 풍덕에 물이 넘쳐흘러 짧은 묘갈이 나타났는데, 그 묘갈에, 진안 대군 처 삼한 국부인 지씨 지묘(鎭安大君妻三韓國夫人池氏之墓)라고 씌여 있고, 그 옆에는 대군묘재좌(大君墓在左)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앞에는 석인(石人) 한 쌍이 쓰러진 소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묘역 둘레에 도도록한 것들은 모두 백성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니 신이 감히 그것들을 뭉개고 새로운 무덤을 만들 수 없어 이렇게 참람스럽게 아룁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아, 그분이 바로 우리 집안의 오태백(吳泰伯)이시다. 옛날 우리 선대왕께서 오랫동안 도를 행하시어 교화가 이루어졌고 덕있는 이를 표창하고 공있는 이를 보답함에 있어 빠뜨린 일이 없었으므로 대군에게도 마침내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주셨다. 그때는 묘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떨어져나간 비문 조각과 깎여나간 글자를 이끼에 묻히고 돌이 부서진 뒤끝에서 비로소 찾아냈으니, 내가 변변치는 못하지만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 융숭히 보답하는 데 있어 어찌 감히 선대왕의 뜻과 일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도신에게 명하여 묘역의 한계를 정해 금장을 하게 하고 나라 법에 따라 물자를 대주어서 다시 봉축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은전을 보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병자일에 큰 비를 다시 세워 서(序)를 짓고 명(銘)을 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하였다. 그 서(序)에,
"대군의 휘(諱)는 이방우(李旁雨)이고 태조 대왕의 장남으로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소생이다. 어려서 태조를 섬길 적에 효자로 칭송되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돈독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시서(詩書)에 몰두하고 몸소 검약(儉約)을 실천하였으며 일체의 부귀 영화에는 전혀 뜻이 없었다. 고려조에 벼슬해서 벼슬이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으나, 홍무(洪武) 무진년에 태조께서 우시중(右侍中)으로서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에 제수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 정벌을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의리를 내세우고 회군(回軍)하시어 중국을 받들자, 이때 대군은 가족을 이끌고 철원(鐵原)으로 들어가 은거할 뜻을 가졌다. 임신년 가을 태조께서 사람들의 권고로 대위(大位)에 오르시자 대군은 마음속으로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이 모두 성덕(聖德)이 있어 하늘이 인정하고 인심이 쏠리는 것이 마치 주(周)나라 왕가(王家)의 왕계(王季)·문왕(文王)과 같음을 알고는 항상 노둔한 사람으로 자처하며 다시는 국가의 일에 간여하지 않고 고향 함흥으로 물러가 살았다. 그러자 태조께서도 그 뜻을 대략 아시고서 한 구역의 전지와 집을 주고서 거기에서 늙도록 살게 하였으니, 그것은 그의 뜻을 꺾고 싶지 않아서였고 또 그 자취를 묻어버리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부인은 찬성사 지윤(池奫)의 따님이고 아들은 이복근(李福根) 하나를 두었는데, 정종조 때 정난 정사 공신(靖難定社功臣)에 기록되고 봉녕후(奉寧侯)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안간(安簡)이다. 안간공의 후손으로 지금 생존해 있는 자가 약간 명이라고 한다."
하였고, 그 명(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주(周)나라가 주나라가 된 까닭을 알 수 있다. 원천이 멀리 칠수(漆水)·저수(沮水)에서 시작되고007) 풍수(豊水)에 기초(芑草)가 있는 데서 기틀을 잡아008) 급기야 어지신 주공(周公)·소공(召公)·필공(畢公)·굉요(閎夭) 등이 모두 함께 나라의 기강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하늘이 주나라를 특별히 후하게 돌보아주어 주나라의 덕이 역사상 어느 누구도 겨룰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일찍이 태백이 세 번 사양했던 것이 그 중에서도 더욱 찬란한 빛이 되었음을 모른 것이다. 옛일로 오늘을 비추어 볼 때 대군은 우리 나라에 있어 주나라의 태백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산에도 색깔이 있으니 남기(嵐氣)가 그것이고, 물에도 무늬가 있으니 물결이 그것이다. 나라라고 하여 어찌 빛깔과 무늬가 없겠는가. 백세 이후에도 그 풍도를 듣고서 흥기할 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하였다.
2월 18일 을사
양인(良人) 김형도(金亨道)가 상언하기를,
"고조(高祖) 김효건(金孝謇)의 누이동생이 상궁(尙宮)으로서 임술년에 영묘조(英廟朝)의 어제(御製)·어필(御筆)의 사언(四言) 여덟 구절로 된 글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나이 1백 세가 가깝도록 밤낮으로 나라를 위하였다. 지금 옛날을 생각하여 중관(中官)을 시켜 나이가 높아갈수록 더욱 충성스러웠던 것을 내 일찍이 칭찬했었으므로 32글자의 글로 나의 마음을 표하는 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 중관을 보내 그 무덤에 치제하게 하였습니다. 정축년 겨울에는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정문을 세우게 하고서 ‘오조 궁인 구십일세 상궁 삼척 김씨 정충지문(五朝宮人九十一歲尙宮三陟金氏旌忠之門)’이라는 어제(御製)를 써서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記)에 이르기를 ‘아, 예로부터 궁인으로 나이가 많았던 사람이 몇 사람 있었지만 어찌 이 사람 같은 자가 있었던가. 황조(皇朝) 숭정(崇禎) 계유년에 출생했으니, 아, 병자년이라면 그의 나이 네 살 때였다. 나이 여섯 살이던 인묘 16년 무인년에 궁궐에 들어와서 효종·현종 두 임금을 거쳐 우리 성고(聖考) 때 와서는 7년 동안 시탕(侍湯)하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던 것을 내가 직접 눈으로 보았었고, 경자년에는 나이가 90세에 가까웠지만 3년 동안 능소의 차례 때 한 번도 가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부묘(祔廟)하는 것까지 보았었다. 다음해인 나의 황형(皇兄) 3년 계묘에 명이 다해 죽었는데 그때 나이 91세였다. 더욱 이상스러운 것은 그가 입궐한 지 8년이 되던 을유년에 우리 황조(皇祖)께서 세자 책봉되시는 것을 보았고, 77세이던 신축년에 또 내가 세자 책봉의 명을 받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충성이 그러했고 그의 수명이 그러했으니 이 사실을 후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록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가 또 멀리 중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킨 것은 명나라가 망한 해가 바로 노궁인(老宮人)이 태어난 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평생을 차마 묻어둘 수 없어 이에 기록한다. 황명 숭정 기원 후 1백 30년 정축년 겨울에 정문을 세우도록 특명을 내리고 그 대강을 이렇게 적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를 써서 내리기를 ‘김기중(金器重)의 아들 김형도(金亨道)는 이 전교에 따라 시행하라. 너의 고조 고모(高祖姑母)인 상궁 김씨가 왕년에 공로가 많았고 나이 90세가 되도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기 때문에 자전께서 영암(靈巖)·나주(羅州)·안주(安州) 소리산(所里山)의 전토(田土)와 연안(延安) 북쪽에 있는 노비 전토의 도장(導掌)으로 너의 아비를 특별히 제수하여 영원토록 상궁의 제사를 받들게 하셨다. 이는 너의 증조 김흥택(金興澤)이 상궁을 모시고 있었고 너의 할아비 김만청(金萬淸)과 너의 아비 김기중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지난날을 생각하여 너의 중부(仲父) 김구중(金九重)을 특별히 군직(軍職)에 임명하고 너에게도 도서(圖署)를 만들어주어 세대에 관계없이 대대로 제사를 받들게 하려는 것이다. 앞으로 만약 대신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구중의 아들이나 손자가 대신토록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 서유방(徐有防)이 아뢰기를,
"이것은 죽은 중신 이익정(李益炡)이 예조 판서로서 명을 받들어 정려하고 그 전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저가 지금 빈한하여 도장 자리를 팔지 않을 수 없으므로 어제와 어필을 조정에 바치고서 장차 낙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니, 판하하기를,
"은전을 바라는 듯하나 그러나 그 일이 귀한 일이고 선대왕께서도 그렇게 전고에 없는 처분을 내리신 것으로 보아 꼭 은전을 바란 것으로만 말할 수는 없겠다. 그리고 또 외정(外廷)의 일과는 다름이 있으니 당해 궁방(宮房)으로 하여금 값을 주고 여러 곳의 도장을 도로 찾아주도록 하라. 그리고 이후로는 판 자와 산 자를 막론하고 이 도장에 손을 대는 자는 법사(法司)로 이송해서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하였다.
2월 19일 병오
춘당대에 나아가 별시사(別試射)를 보였다.
부응교 성덕우(成德雨)가 상소하기를,
"교하(交河) 유생들이 선정신 문경공(文敬公) 윤선거(尹宣擧)의 서원 편액을 다시 내려 달라는 일로 행차 앞에서 노장(露章)을 했다가 끝내 거절당하고 말았는데, 바라건대 다시 서원 편액을 내리시어 성상의 덕을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애당초 조정 명령이 없었던 일이니 이 일은 위에 알릴 일이 아니다."
하였다.
승지 이조승(李祖承)이 상소하기를,
"모든 상소가 정원에 도착하면 반드시 여러 동료가 자세히 보고서 사리가 타당하다고 생각된 뒤에야 비로소 받아들였는데, 이번에는 부응교 성덕우의 상소를 회람하는 과정에서 유독 신과 전 승지 이형원(李亨元)에게만 회람시키지 않고 마치 급서(急書)나 올리듯이 바삐 서둘러 입계하였습니다. 내려온 원소(原疏)를 보건대 바로 윤선거 부자의 서원 편액을 다시 내려줄 것을 청한 내용이었습니다. 당초에 그들을 복관(復官)시킨 것은 곧 죄인을 너그럽게 처결하는 큰 은전을 내린 것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의 울분은 날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편액을 다시 내려줄 것을 청한 덕우의 청 자체가 이미 놀랍고 통분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동료가 그것을 슬그머니 올린 것은 그 또한 무슨 짓들입니까. 그때는 전좌(殿坐) 시기여서 감히 개인 입장을 말하지 못했다가 이제서야 비로소 글월을 올려 제 자신을 해명하고 곧장 궐문을 나갑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상소문이 들어왔을 때 의견이 서로 다르면 충분히 토론하여 하자가 없도록 한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못할 경우 각자가 서로 인의(引義)하는 것도 혹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정원에 있는 승지들이 한 일은 매우 옳지 못하다. 때마침 대궐에 들어왔다가 복잡했던 탓으로 그렇게 된 듯 하기는 하지만 회람을 하지 못한 자가 두 승지 뿐이었다니, 그렇다면 고의건 고의가 아니건 간에 뒷폐단에 관계가 될 것이다. 당해 승지들을 모두 파직시키라. 그리고 한 정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도 직분을 제대로 수행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잠자코 한 마디 말도 없다가 지금에 와서야 장황하게 자인(自引) 하고 있으니 그 승지도 교체시키고 본 상소문은 되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정미
감시(監試)와 복시(覆試)를 보였다.
2월 21일 무신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이득신(李得臣)을 대사헌으로, 이경일(李敬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2일 기유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상소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정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니 사리로 보아 소청을 그대로 들어주기 어렵다."
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 정대용(鄭大容)이 진휼곡(賑恤穀)을 더 조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이어 경성(鏡城)과 성진(城津)의 전직 관원들이 곡식을 정하지 않게 받아들였음을 논하니, 비답하기를,
"수의 어사를 보내고부터 조마조마한 일념이 잠시라도 북도 백성들에게서 떠난 적이 없었다. 요사이 봄추위가 아직 쌀쌀하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일이 하나 더 늘었었는데 뒤이어 듣기에 머나먼 북쪽 한 모퉁이는 날씨가 마천령(摩天嶺) 이남 같지는 않다고 하므로 마음이 약간 놓였다. 이때 마침 어사의 소를 보니 백성들 정황이 눈으로 보는 듯하다. 요청한 6천 포대의 곡식이야 무엇을 아끼겠는가. 일전에도 부족할 것이 염려되어 우선 수천 포대를 더 책정하여 도백으로 하여금 정한 수량대로 실어 보내도록 신칙하였다. 그 밖에 부족한 수량은 그대가 도백과 연락을 취하여 필요한 양을 실어다가 한 남자 한 여자도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하고, 경성의 전 판관 강이정(姜彝正)과 성진의 전 첨사 이윤원(李潤元) 등은 파직 출송한 후 해조로 하여금 잡아다가 신문하고서 죄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3일 경술
황해도 관찰사 이경륜(李敬倫)이 임지에서 죽었다.
2월 23일 경술
정창성(鄭昌聖)을 평안도 관찰사로, 이홍재(李洪載)를 황해도 관찰사로, 박천행(朴天行)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5일 임자
춘당대에 거둥하여 생원·진사시의 합격자를 발표하고 이어 재계하며 하룻밤을 묵었다.
2월 26일 계축
문묘(文廟)에 작헌례를 행하였다.
다시 춘당대로 가서 문과·무과를 보여 문과에서 신헌조(申獻朝) 등 6인을, 무과에서 유재춘(柳載春) 등 18인을 뽑았다. 전교하기를,
"그의 아들이 합격하였으니, 그 아비인 전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에게 직첩을 주고 다시 서용하라."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이조 참의로, 이성규(李聖圭)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신응현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27일 갑인
춘당대에 거둥하여 문과·무과에 합격한 사람과 생원·진사들의 사은(謝恩)을 받았다. 삼일제(三日製)를 보이고서 서울 유생 중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윤명렬(尹命烈)과 시골 유생 중에서 수석을 차지한 유학 임업(任㸁)에게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2월 28일 을묘
차대하였다. 삼일제에 합격한 유생들을 불러 접견하고, 표(表)에서 수석을 차지한 윤명렬에게는 진퇴표(進退表)를, 부(賦)에서 수석을 차지한 임업에게는 진퇴부를 지어 바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이성원이 아뢰기를,
"표와 부에서 수석을 차지한 사람들이 지금 명을 받고 진퇴표와 부를 짓는 때에 표는 한 글자도 써서 내지 못하였고, 부도 다섯 구절을 썼는데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시험은 매우 엄격한 것이어서 합격자 명단에서 빼버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채제공은 아뢰기를,
"선대왕께서는 오로지 관대함을 앞세웠지만 과방(科榜)에 있어서는 강석(講席)에서 통하지 못하거나 혹 시권(試券)이 분명하지 않으면 비록 합격을 발표한 이후라도 빼버린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시험 제도는 지극히 엄정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받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몇 시간 동안 단 한 글귀도 써내지 못하였고, 한 사람은 다섯 글귀 중에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곳이 몇 군데나 되므로 빼버리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빼버리는 것이야 어찌 경들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아끼고 있는 것은 연전에 을미년 합격자 발표를 취소한 후로 본범(本犯)이야 어떠했던지 간에 항상 너무 잔인했다는 생각이 들어 꼭 삭제하거나 빼버려야 할 일만 만나면 언제나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일로 말하면 지엄한 과장(科場)의 법을 그 일 때문에 굽힐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제공이 아뢰기를,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준 두 사람을 이미 다 빼버렸으니 차석을 한 사람들에게 회시(會試)를 보게 하거나 급분(給分)009) 을 한다면 이는 과방(科榜)의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니 그들 모두에게는 상이나 내리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윤허하고 나서 삼일제를 다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였다.
"무장(武將)의 처신은 자별할 뿐이 아닌데, 직위가 정경(正卿)도 아니면서 포도 대장을 겸임한 몸으로 오늘 차대에 참여하지 않은 것부터가 벌써 해괴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게다가 비변사 모임에까지 어려움없이 있지도 않은 병을 핑계대기까지 하였다. 일찍이 듣건대 무장이 있지도 않은 병을 핑계대는 것을 대신이 엄히 금하고 또 반드시 죄주기를 청했다고 하였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히 늙은 사람도 아니고 또 활동하기에 어려운 병도 없으면서 감히 병들었다는 글을 써서 올린단 말인가. 이렇게 계속되다가는 옛 법칙은 점점 흔적도 없어지고 무장은 장차 교장(驕將)이 되고 말 것이다. 새로 제수된 자가 이러한데 조금 오래된 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총융사 조심태(趙心泰)에게 서둘러 불서(不敍)의 법을 적용하여 학문(學問)으로 인한 폐단을 징계하고 옛법칙을 존중하는 뜻을 보이라."
윤상동(尹尙東)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박천형(朴天衡)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유천군(儒川君)이 약을 처방한 공로를 어찌 추념하지 않을 것이며, 장계군(長溪君) 역시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했었다. 더구나 그 부인마저 두 선왕의 가례(嘉禮) 때 많은 수고를 하였고, 낙풍군(洛豊君)의 수고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손자가 과거에 급제했으니 관원을 보내 치제하도록 하라. 또 그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보니 자못 슬픈 생각이 든다. 고 직제학 심염조(沈念祖) 집에도 치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새로 과거에 합격한 이서(李垿)는 낙풍군의 손자였고, 심상규(沈象奎)는 염조의 아들이었다.
이한풍(李漢豊)을 총융사로, 이한태(李漢泰)를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29일 병진
춘당대에 거둥하여 다시 삼일제를 보이고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 안정선(安廷善)에게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전교하기를,
"표(表)에서 장원했던 사람은 자신의 졸렬함을 드러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부(賦)에서 장원한 사람은 지은 글귀의 뜻이 제대로 통하지 못할 뿐, 한 편도 쓰지 못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부에서 장원한 임업(任㸁)을 빼버리는 일을 분간해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윤대(曺允大)를 이조 참의로, 신응주(申應周)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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