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임신
임금의 병이 더욱 위급해졌고 또 한열(寒熱)의 증후가 있었으므로 시진탕(柴陳湯)을 올렸다. 임금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서 드디어 형용하기 어려운 병이 생기게 되었는데, 해가 갈수록 더욱 고질이 되어 화열(火熱)이 위로 오르면 때때로 혼미(昏迷)하기도 했다. 국방(局方)017) 에서 올린 우황육일산(牛黃六一散)·곤담환(滾痰丸) 등 하리(未利)시키는 약제를 잇따라 복용하였으나, 그래도 효험이 없었다. 사인(士人) 이공윤(李公胤)은 성품이 광망(狂妄)하지만 의학(醫學)을 공부하여 이름이 있었는데, 그의 의술(醫術)은 대체로 준리(峻利)018) 를 주로 하였다. 임인년019) 이후 천거되어 약방(藥房)에 들어가 시질(侍疾)하고 있었는데, 이공윤이 스스로 말하기를,
"도인승기탕(桃仁升氣湯)을 자주 복용하여 아주 깨끗이 씻어내면 성상의 질환을 즉시 낫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므로, 시험하여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공윤이 그래도 방자하게 스스로 자랑하면서 다시 의논드리기를,
"시평탕(柴平湯)에다 대황(大黃)·지실(柷實) 등 밀어내고 씻어내는 약재(藥材)를 군약(君藥)020) 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계묘년021) 이후 금년 봄에 이르도록 잇따라 1백 수십 첩을 진어하였다. 임금의 체부(體膚)가 밖은 괜찮아 보였으나 속으로 비위(脾胃)가 허하여져서 수라(水剌)를 싫어한 지가 오래 되자, 드디어 한열증(寒熱症)이 발생하였다. 그런데도 이광좌(李光佐)는 이공윤의 망령됨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대비(大妃)의 질환이 나았다는 것으로 약에 대해 의논한 공을 이공윤에게로 돌리고 논상(論賞)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밤에 임금의 한열(寒熱)이 갑자기 위독해졌으므로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이광좌(李光佐) 등이 대조전(大造殿)의 침실(寢室)로 들어가서 진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의논하여 승양산화탕(升陽散火湯)을 올렸다.
8월 6일 병자
임금이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으로 이어(移御)하였다.
8월 7일 정축
임금에게 또 설사 하는 증후가 있었으므로 약방에서 들어가 진찰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가, ‘수 어사(守禦使) 김일경(金一鏡)이 대계(臺啓)가 있었다는 것으로 병부(兵符)를 반납하고 교외(郊外)로 나가 오래도록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은 사체에 미안하니, 김일경을 추고(推考)하여 재촉해서 올라오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8월 8일 무인
임금이 앓고 있는 한열증(寒熱症)이 그치지 않자 약방(藥房)에서 의논하여 시호백호탕(柴胡白虎湯)을 올리고 삼제조(三提調)가 비로소 본원(本院)에서 숙직(宿直)하였다.
8월 16일 병술
임금의 병이 중하여 침식(寢食)이 날로 감소됨에 따라 소변도 점점 적어졌다. 약방에서 의논하여 시령탕(柴苓湯)을 올렸다.
8월 19일 기축
육군자탕(六君子湯)을 올렸으니, 비로소 임금의 증후가 허비(虛憊)함을 우려한 것이었다.
8월 20일 경인
밤에 임금이 가슴과 배가 비틀리듯이 아팠다. 다음날 여러 의관(醫官)들이, ‘임금이 어제 게장(蟹醬)을 진어하고 이어 땡감을 진어했는데, 이는 의가(醫家)에서 꺼리는 것이라’ 하여 두시탕(豆豉湯)과 곽향정기탕(藿香正氣湯)을 진어할 것을 청하였다.
8월 22일 임진
임금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에 황금탕(黃芩湯)을 올렸다.
임금의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아서 혼곤(昏困)한 상태가 극심해졌다. 약방에서 들어와 진찰하고 탕약(湯藥)을 정지하였으며, 인삼 속미음(人蔘栗米飮)을 잇따라 올렸다.
8월 24일 갑오
임금의 혼곤(昏困)한 증후가 더욱 극심하여 맥박이 낮고 힘이 없었다. 4경(四更)에 삼다(蔘茶)를 올리고 약방에서 주원(廚院)으로 이직(移直)하였다. 임금이 병을 앓은 이래 제신(諸臣)이 성후(聖候)에 대해 문안하면 임금은 그때마다 수답(酬答)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옥음(玉音)이 점점 희미하여졌다. 도제조(都提調) 이광좌(李光佐), 제조(提調) 이조(李肇)가 죽을 올리면서 마시기를 권하였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왕세제(王世弟)가 일어나서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머리를 들고 미음을 진어하였다. 이공윤(李公胤)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삼다(蔘茶)를 써서는 안됩니다. 계지마황탕(桂枝麻黃湯) 두 첩만 진어하면 설사가 즉시 멎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달여서 올려 복용하게 하였다. 유각(酉刻)에 의관(醫官)들이 들어가 진찰하고 나서 물러나와 말하기를,
"증후가 아침에 비하여 더욱 위급합니다."
하니, 제신(諸臣)이 달려서 희인문(熙仁門)으로 들어갔고, 이광좌(李光佐)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내시(內侍)에게 의지해 있는데, 눈이 깊숙이 들어갔고 시선은 치뜨고 있었다. 이광좌가 문후(問候)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자 왕세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시급히 인삼과 부자를 써야 한다."
하니, 이광좌가 삼다(蔘茶)를 올렸다. 그랬더니 임금의 시선이 조금 안정되었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2경(二更)에 임금의 기식(氣息)이 다시 희미해졌으므로 이광좌가 삼다를 올렸으나, 임금이 이미 마실 수가 없게 되매, 의관(醫官)들이 숟가락으로 떠넣었다. 이광좌가 묘사(廟社)에 기도(祈禱)할 것을 청하니, 왕세제가 이르기를,
"기도하는 것이 비록 때가 늦기는 했으나, 속히 거행해야 한다."
하였다. 제관(祭官)이 향(香)을 받기도 전에 임금이 속광(屬纊)022) 하였다. 이광좌가 사관(史官)에게 ‘상대점(上大漸)’이라는 글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두루 보이게 하였다.
8월 25일 을미
축각(丑刻)023) 에 임금이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昇遐)하였다. 내시가 옥상(屋上)에 올라가서 복(復)을 부르고 나서 거애(擧哀)024)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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