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기미
유상운(柳尙運)을 도승지(都承旨)로, 윤지완(尹趾完)을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삼았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 박태상(朴泰尙)과 공홍 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 권시경(權是經)이 사조(辭朝)하였다. 임금이 이들을 인견(引見)하고 칙려(飭勵)하여 보냈다. 승지(承旨) 송창(宋昌)이 아뢰기를,
"간성(杆城)의 해부(海夫)의 아내 막개(莫介)는 남에게 약탈되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의 뜻과 절개가 높이 여길 만하니, 포상(褒賞)하여 장려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사실을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였다.
7월 2일 경신
양사(兩司)에서 정청(政廳)의 전교가 불안(不安)하다는 것으로 인피(引避)하였다. 수찬(修撰) 김만길(金萬吉)이 처치(處置)하여 나오기를 청하면서 이어서 진계(陳戒)하기를,
"옛부터 제왕(帝王)은 반드시 사령(辭令)과 거조(擧措)에 신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북(西北) 지방의 사람을 특명으로 대직(臺職)에 비의(備擬)하셨으니, 이는 이미 어려워하고 삼가는 뜻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로 인하여 나란히 대각(臺閣)에 출입(出入)하는 자를 한 마디도 구단(句斷)하여 대각(臺閣)으로 하여금 기운을 잃게 하였기에 여러 신하들이 해체(解體)되었으니, 그것이 언로(言路)를 방해(妨害)하고 성덕(聖德)을 손상(損傷)하는 것으로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경계하고 성찰(省察)하시어 정령(政令)의 거조(擧措) 사이에 반드시 이치에 맞기를 힘쓰시어 혹시나 뉘우침이 없게 하여 표준을 세우는 도리를 다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의(大意)가 진실로 좋으니 내가 마땅히 유심(留心)하겠다."
하였다.
7월 3일 신유
유성(流星)이 문창성(文昌星) 위에 나타났다.
정언(正言) 서문유(徐文𥙿)가 상소(上疏)하기를,
"전(傳)에 말하기를, ‘현인(賢人)을 임용하는데는 유별(類別)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직 현능하기만 하면 그 지위에 임용할 뿐이고 그 유별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한갓 중앙의 사람만을 등용(登用)하고 서북(西北)의 선비를 버리는 것은 진실로 잘못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됨을 묻지 않고서 서북 사람에게만 오로지 뜻을 두는 것도 성인(聖人)이 입언(立言)한 본의에 어긋나게 됩니다. 더구나 상규(常規)를 털어버리고서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린다면 한쪽에만 치우치게 돌아간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번부터 서북 사람으로서 황윤후(黃胤後)·이지온(李之馧)·염우혁(廉友赫) 등 여러 사람들은 다 대간과 시종에 출입(出入)하였었으며, 더러는 아경(亞卿)062) 에까지도 이르렀으므로 다만 그 사람이 어떠한가에 있을 뿐입니다. 어찌 반드시 조가(朝家)의 교령(敎令)을 번거롭게 하기를 오늘날과 같이 하여야만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서북 사람을 위하여 한 과(窠)를 두고자 하시면, 동남(東南) 사람들에게도 장차 구별(區別)하여 대우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신은 가만히 성명(聖明)의 거조(擧措)가 온당(穩當)함을 잃었으며 그리고 대간들을 대우한 것이 너무 박(薄)하심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편계(偏係)에만 주장하지 마시고 먼저 신의 직위(職位)를 삭제(削除)하여 여러 신하들의 곧은 절조(節操)를 힘쓰게 하소서. 이어서 다시 양현망(楊顯望)의 직위(職位)를 체개(遞改)하여 관방(官方)063) 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북(西北) 사람을 통청(通淸)064) 한 데 대하여 정체(政體)에 손상됨을 나는 보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대신(臺臣)이 서로 이어서 편계(偏係)되었다고 배척함으로써 마치 대단히 잘못된 일이 있는 듯이 여기지만 나는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職務)를 보살펴라."
하였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한재(旱災) 때문에 대신들을 종묘(宗廟)와 북교(北郊)와 사직단(社稷壇)에 보내어 비를 빌기를 명하였고, 자기에게 허물을 돌려 자기 몸을 책망하는 뜻으로써 제문(祭文)에 언급(言及)하였으며, 명일(明日) 경외(京外)의 죄수(罪囚)들을 소결(疏決)하기로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선조(先朝) 때에 이지온(李之馧)은 북쪽 사람이지마는 청망(淸望)에 통과되었던 것은 물의(物議) 때문에 윤허(允許)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양현망(楊顯望)은 인망(人望)에 맞지 아니한데도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리면서 특령(特令)으로 비의(備擬)하시니 처분이 실로 온당(穩當)하지 못합니다. 또 서북 사람들이 연이어서 춘조(春曹)065) 의 사유(師儒)의 관직을 제수받았으니 대우가 지극하다고 하겠고 혹은 기성(騎省)066) 에 제배(除拜)되기까지도 하였는데 역시 물의(物議)가 대부분 외람(猥濫)하다고 하였거늘 하물며 대직(臺職)이겠습니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염우혁(廉友赫)과 이지온(李之馧)이 대관(臺官)에 제배(除拜)되었을 적에 그 때의 물의(物議)가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서경(署經)을 넘기고서야 마침내 행공(行公)하였습니다. 양현망만 어찌 홀로 이 두 사람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좌상(左相)이 진달(陳達)한 것이 비록 ‘현인을 임용하는 데는 유별(類別)이 없다는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우상(右相)의 말이 진실로 옳습니다. 이 사람들을 비록 대직(臺職)에 제배(除拜)하여도 곧은 절조(節操)와 모난 풍도(風度)가 어찌 반드시 지금의 대신(臺臣)보다 낫다고 하겠습니까? 신의 뜻에는 그들 가운데 약간 나은 자를 가려 뽑아서 여러 차례 주군(州郡)의 수령을 제수(除授)하였다가, 그의 치효(治效)와 재국(才局)을 보아서 천천히 의논하여 대각(臺閣)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여러 사람들의 뜻을 억지로 어기고서 등용(登用)하면, 물의(物議)가 시끄러워질 것이니 그도 또한 공사(供仕)067)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북 사람들을 만일 문벌(門閥)을 가지고 보면 마침내는 통청할 길이 없게 되므로 이제 격식을 벗어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서북 사람을 특별히 조용(調用)하는 것이 불가하다는 뜻을 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남구만은 일찍이 관북(關北)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서북(西北) 사람을 통청하여야 한다는 의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그래서 본병(本兵)에 있을 적에는 무변(武弁) 두서너 사람에게 선전관(宣傳官)과 도총관(都摠官)의 직임에 통망(通望)되었고, 또 문관(文官) 두서너 사람을 동전(東銓)068) 에 힘써 천거하여서 기성(騎省)에 제배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말이 이와 같았다. 대사간(大司諫) 심재(沈梓)도 이어서 양현망의 직위(職位)를 개정하려고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4일 임술
유성(流星)이 천진성(天津星) 위에 나왔다.
이동명(李東溟)을 승지(承旨)로 조지겸(趙持謙)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삼고, 특별히 박태손(朴泰遜)을 승지로 제배하였다.
대신과 금부(禁府)·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들을 인견(引見)하고 경외(京外)의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권대운(權大運)에 이르러서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대사간(大司諫) 심재(沈梓)·집의(執義) 남치훈(南致熏)이 모두 참작(參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양이(量移)069) 할 것을 명하였다. 정유악(鄭維岳)에 이르러서도 정재숭이 또 참작(參酌)할 것을 청하였으나 남구만(南九萬) 및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정뇌경(鄭雷卿)의 아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이로써 비록 참작하더라도 연곡(輦轂) 아래에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를 전리(田里)로 놓아 돌려보내기를 명하였다. 민희(閔熙)에 이르러서는 정재숭이 또한 그를 신구(伸救)하였으며 심재도 또한 그의 죄명(罪名)이 애매(曖昧)함을 힘써 아뢰었기에, 임금이 그를 권대운과 함께 똑같이 양이하기를 명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그의 죄명(罪名)이 매우 무겁기에 임금이 이미 그대로 두려하였는데, 판의금(判義禁) 박신규(朴信圭)가 ‘홍우원은 나이 80세가 지났으니 소석(疏釋)하여 줌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김수흥은 그것이 옳지 못함을 말하였고, 남구만·정재숭도 감히 그를 신구(伸救)하지 못하였기에 임금이 그는 그대로 두라고 명하였다. 심재가 또 이하진(李夏鎭)에게는 그의 직첩(職牒)을 돌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를 물으니, 정재숭이 심재의 말이 옳다 하였기에,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박신규는 대각(臺閣)에서 도로 거두어 들여야 한다는 의논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겨우 파대(罷對)하자 곧 권대운을 철원(鐵原)으로, 민희를 연안(延安)으로 정배(定配)하여서 도사(都事)를 독촉하여 서둘러서 떠나 보냈다. 권대운과 민희는 모두 사유(赦宥)할 수 없는 죄가 있는데도 그들을 좋은 곳으로 이배(移配)하여 주었고, 정유악과 이하진은 모두 간사한 무리인데도 혹은 석방(釋放)되기도 하고, 혹은 복직(復職)되기도 하였으니, 물정(物情)이 이를 분개하고 원망하였다. 박신규와 심재와 남치훈의 무리들은 곧 그들의 사당(私黨)이므로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정재숭과 같은 이도 이에 또한 굽혀서 흉당(兇黨)을 위하여 형정(刑政)을 크게 무너뜨린 것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가 식견(識見)이 없음을 모두 탄식(歎息)하였다.
한재(旱災) 때문에 교지(敎旨)를 내려 구언(求言)070) 하였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송시열(宋時烈)에게 유시하여서 그로 하여금 군주의 덕(德)과 조정 정사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아뢰게 하였다. 또한 이러한 뜻으로써 박세채(朴世采)와 이상(李翔)에게도 유시를 내리었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급히 청하기를 그만두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여러 차례 승지(承旨)를 보내어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돈면(敦勉)하였으나, 김수항이 끝내 나오지 아니하였으며, 이때에 이르러 정사(呈辭)한 것이 스물 일곱차례나 되니, 임금이 하는 수 없이 체차(遞差)할 것을 윤허하였다. 이때 나이 젊고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선배(先輩)에게 반대하여서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의 당(黨)을 몰래 돕고 있었다. 대신(大臣) 남구만과 정재숭 등이 그들과 더불어 서로 표리(表裏)가 되었는데도 홀로 김수항이 그 사이에서 지주(砥柱)처럼 버티고 서서 언의(言議)가 엄숙하고 바르니 사림(士林)에서 그를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직위를 내어놓고 청한(淸閑)하게 지내니, 중외(中外)가 실망(失望)하였다.
7월 6일 갑자
가뭄이 아직도 그치지 않으니 임금이 좋은 날을 가리지 않고서 친히 남교(南郊)에서 비오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겠다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대단치 않은 병이 있었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는 그 명을 도로 중지하기를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김수흥(金壽興)과 김만중(金萬重) 등이 청대(請對)하여 중지하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 윤허하지 않았다. 김수흥 등이 되풀이하여 아뢰어 청하니, 임금이 이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자기에게 허물을 돌리게 한다는 말을 제문(祭文) 가운데에 첨가(添加)하여 넣기를 명하였다.
이유(李濡)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충원(忠原)의 유생(儒生) 이시규(李時) 등이 상소(上疏)하기를,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선조(宣祖)를 만났던 것이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나듯이 서로 맞았던 것입니다. 다만 그의 덕이 높아서 헐뜯는 이가 많았고 임무가 무거워서 꺼리는 이가 많았으므로, 어릴 적에 산이 들어갔던 일을 가지고 모함하여 해치는 기틀로 만들려 하는데에 이르렀으나 다행스럽게도 열성(列聖)들의 숭장(崇奬)하심을 힘입어 교묘한 혀를 가지고도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임어(臨御)하시게 되자 문묘(文廟)의 배향(配享)을 소급하여 거행하였으니 유림(儒林)에서 기운이 증가되어 이로부터는 공의(公議)가 아주 정하여져서 부정한 말이 종식(終息)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람들의 마음이 착하지 못하여 ‘참으로 과실(過失)이 있었다’는 말이 유자(儒者)로 자처하는 자의 입에서 나왔으며 아첨하여 붙는 무리들이 또 뒤따라 도와서 이루었으니, 홍수주(洪受疇)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용의주도(用意周到)하게 말을 만든 것이 한 절(節)보다 더 깊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저 윤증(尹拯)은 그 아비의 허물을 덮으려고 외람(猥濫)되게 선정(先正)을 끌어들이어 ‘참으로 과실(過失)이 있다’고 하여 일찍이 돌아보고 두려워하지 않고서 도리에 어긋나고 망령된 형상은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洞燭)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종(一種)의 간세(奸細)한 사람들이 왜곡하는 말이 많아서 반드시 윤증을 허물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하려던 것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행적에 빠졌는데 변환(變幻)하게 출몰(出沒)하며 패악하게 음험(陰險)하였던 것은 홍수주의 상소가 실로 으뜸입니다. 그 상소에 이르기를, ‘이이가 입산하였던 것이 한 점의 하자에 지나지 않기에 선배(先輩)들이 일찍이 꺼리어 숨기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아! 홍수주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가리키며 의논하고 숨은 것을 들추어낸 것이 이와 같이 무엄(無嚴)한 것입니까? 또 전후(前後)로 신구(伸救)하였던 말을 가지고 마치 일부로 꺼리어 숨기는 것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니 마음가짐이 참으로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채진후(蔡振後)와 유직(柳稷)의 무리들은 선문(禪門)에 도망하여 숨은 것으로 그를 헐뜯고 무욕(誣辱)하는 자료(資料)로 삼으니 사림(士林)들이 변명하였고, 윤증이 부정한 말을 하여 도와서 공격하니 사람들이 배척하였습니다. 모두 그러한 일이 있을 적마다 논변(論辨)하였을 뿐인데, 어찌 일찍이 꺼리어 숨기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홍수주가 또 선조(宣祖)의 비답과 송시형(宋時螢) 등의 상소 안에 있는 실(失)자를 끌어다가 윤증의 말을 사실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윤증이 단안(斷案)을 만든 것과 어찌 일호(一毫)라도 가까운 것이 있기에 또 아첨하여 같은 것이라 여깁니까? 이렇게 군부(君父)를 속이고 세상 사람들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또 장유(張維)의 《만필(漫筆)》 가운데에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인용(引用)한 것을 끌어다가 말하기를, ‘김장생도 일찍이 마음 쓰거나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또 그가 머리를 깎았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으니, 사람으로서 말썽을 만든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장유가 기록하였던 것은 다만 전해들은 데서 얻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홍수주가 그것을 증거(證據)로 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임억령(林億齡)은 이이가 산에 들어갔던 때를 당하여 그와 더불어 수창(酬唱)하였던 여러 작품(作品)에 반드시 ‘이생 이(李生珥)와 함께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이가 처음부터 머리를 깎지 않았음은 여기에서도 더욱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홍수주는 한 번 《만필》을 보고서는 마치 진기한 보배를 얻은 것처럼 좋은 기회로 여겨 그 본래의 뜻을 바꾸어 자기 뜻으로 한 귀절(句節)을 더 첨가(添加)하여 넣었으니 그의 수족(手足)과 간폐(肝肺)가 남김없이 다 드러난 줄을 전연 알지 못하므로 이를 일러 잘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잡쳐 놓은 격이라 하겠습니다. 이이의 학문이 김장생에게 전해졌고 김장생의 학문이 또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제 송시열이 능멸당하고 있으니 그 형세는 반드시 이이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이가 능멸당하면 김장생이 마땅히 그 다음 차례가 될 조짐이 드러나게 되니 그 자취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홍수주의 상소가 있음으로부터 누군들 매우 분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대각(臺閣)에 이르기까지 오직 호당(護黨)만을 일삼아서 잠자코 한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경연(經筵)은 보도(輔導)하는 책임을 맡았고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틈을 타서 홍수주는 처음부터 선현(先賢)을 침범(侵犯)하지 않았는데 유생(儒生)들의 상소가 남을 무함하려는 데서 나왔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러한 말이 한 번 나오자 듣는 자들이 모두 한심(寒心)하게 여깁니다. 윤이도(尹以道)와 한구(韓構) 등이 장황(張皇)하게 진계(陳啓)하면서 윤증의 글을 인용하였고, 또 ‘선생(先生)’ 두 글자를 첨가하였으며 홍수주의 상소의 ‘한 점의 하자에 불과(不過)하다’는 한 구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승정원(承政院)에서는 또 ‘과(過)’자를 ‘족(足)’자로 고치면서도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주서(注書) 유성운(柳成運)은 윤증을 재야(在野) 유신(儒臣)이라 하였는데 대신들이 이미 유신으로 대우하지 말자고 하는 뜻을 임금께 진달(陳達)하였는데도, 감히 유신이란 칭호(稱號)를 장주(章奏)에 썼습니다. 그리고 태학(太學)은 정론(正論)이 나오는 곳인데도 송징은(宋徵殷)과 이징해(李徵海) 무리들이 사류(士類)를 공격하여 정론(正論)을 물리쳐 막는 것을 자기들의 임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조(銓曹)의 관원(官員)들이 감히 홍수주를 사판(仕版)에 비의(備擬)함으로써 정기(正氣)가 소멸되고 사의(邪議)가 자행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하고도 하늘의 견책(譴責)이 거두어 돌려지기를 바라고자 하니 또한 멀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선현(先賢)이 무욕(誣辱)당하는 것을 상심(傷心)하고 시비(是非)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탄식하여서 힘을 다해 신변(伸辨)하였으니, 말이 매우 명쾌(明快)하기에 내가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해조(該曹)에서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사람을 멋대로 의망(擬望)한 것은 진실로 무엄(無嚴)한 짓이라 이르겠다. 다만 ‘대신들이 오직 호당하는 것만을 일삼는다’고 한 말들은 매우 근거가 없다."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숙(李䎘)·지평(持平) 홍수점(洪受漸) 등이 아뢰기를,
"민희(閔熙)와 권대운(權大運)을 양이(量移)하고 정유악(鄭維岳)을 전리(田里)로 석방(釋放)하여 보내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또 입시(入侍)하였던 대관(臺官)들이 이를 구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던 것과 장령(掌令) 이태귀(李泰龜)가 이 의논을 낼 적에 다른 주장을 내세웠다 하여 모두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지 않고 다만 체차하는 일만을 윤허하였다.
7월 7일 을축
임금이 삼각산(三角山)에서 비오기를 비는 제문(祭文)에 간절하고 절박하고 애소(哀訴)하는 뜻이 없다 하여, 고쳐서 지어들이게 하였다.
7월 8일 병인
유성(流星)이 우성(牛星)의 위에 나왔다.
7월 9일 정묘
세 차례나 기우제를 지낸 뒤에도 가뭄이 더욱 혹심하자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11일에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기도하겠다고 하였다.
7월 10일 무진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위에 나왔다.
7월 11일 기사
임금이 사직단(社禝壇)에서 비오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묘시(卯時)에 환궁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박신규(朴信圭)가 제물(祭物)을 진설할 때에 조두(俎豆)넣는 갑(匣)을 떨어뜨렸는데 주워서 다시 올리고서는 승정원(承政院)에 나가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7월 12일 경오
윤경교(尹敬敎)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여(李畬)를 집의(執義)로, 임원구(任元耉)를 장령(掌令)으로, 김창집(金昌集)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친히 비오기를 빈 뒤에도 비가 내릴 기미가 까마득하므로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하여 아직 천심(天心)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겨우 내가 친히 빌었다는 이유만 가지고 기다릴 수는 없다. 그러니 남교(南郊)에는 대신을 보내고, 용산(龍山)의 저자도(楮子島)에는 중신(重臣)을 보내서 날을 가리지 말고 연이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도록 할 것이며, 제문(祭文) 가운데에는 자기에게 허물을 돌려서 자기 몸을 책망한다는 뜻으로 특별히 내용을 만들어 첨입(添入)하게 하라."
하였다.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도움말을 구하는 교서(敎書)가 선포(宣布)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귀를 기울여 들으려 한 지 여러날이 되었으나 가언(嘉言)을 들을 수가 없구나. 옥당(玉堂)은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으니 관련된 실수를 광구(匡救)함이 마땅히 남보다 앞서는 데 있어야 하는데, 이제까지 고요하기만 하였고, 양사(兩司)에서도 또한 진언(進言)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내가 더불어 큰일을 할 만한 재목이 못된다고 여겨서 그러함인가? 내가 실로 부끄러워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하였다.
하직하는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을 인견(引見)하고 면계(勉戒)하여 보냈다. 승지(承旨) 이유(李濡)가 재변(災變)을 만나 수성(修省)하며 언로(言路)를 널리 열어야 한다는 뜻을 간추려서 아뢰니, 임금이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고 답하였다. 이유가 또 아뢰기를,
"근래에 수령(守令)들이 명예를 바라는 풍습(風習)이 오히려 재물을 긁어들이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그래서 다만 고식책(姑息策)에만 힘써서 점차로 폐단(弊端)이 불어나게 되어 마침내는 수습(收拾)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 무리들이 문득 포상(褒賞)의 은전(恩典)을 입어서 원망을 받으며 봉공(奉公)하는 자는 전패(顚沛)되는 근심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윤계(尹堦)가 강도(江都)에서 지난 가을에 거두어들인 것이 거의 2만 석(石)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으니, 임금께서 마땅히 명목과 실상을 자세히 조사하시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로써 전조(銓曹)를 신칙(申飭)하시어서 고을 수령을 제수(除授)할 즈음에 허실(虛實)에 현혹(眩惑)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이 뜻으로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하도록 명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박신규(朴信圭)가 제물 담는 갑(匣)을 떨어뜨린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이유로 그의 파직(罷職)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구현(沃溝縣)의 미제면(米堤面) 포구(浦口)가의 언덕이 동쪽과 북쪽의 양쪽 가운데가 갈라졌는데, 길이가 57척(尺)이고 넓이가 1척 1촌(寸)이었다. 장맛비로 사태(沙汰)가 난 곳도 아니고, 또 바위돌이 굴러 떨어져서 생긴 것도 아니므로 변이(變異)가 비상(非常)하였다.
교리(校理) 홍만수(洪萬遂)가 상소를 올리었다. 대략에 이르기를,
"금번에 소결(疏決)한 것은 그 죄를 용서한 것이 진실로 관대(寬大)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밖에도 찬축(竄逐)된 자 또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견책(譴責)하는 것이 비록 중하지만 정리(情理)로는 긍휼(矜恤)해야 할 자가 있을 것이고, 죄명(罪名)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혼동되어 그대로 귀양간 자도 있을 것이며, 늙고 병이 많은 자로서 죽을 시기를 더욱 재촉하는 자와 사람이 미천(微賤)하고 지위가 낮은 자와 생계(生計)가 더욱 가난한데도 먼 오랑캐 땅에 붙잡혀 있는 자들을 풀어줄 것을 오랫동안 아꼈기에 사적(沙磧)의 땅에서 잇달아 사망(死亡)하게 되니 이 어찌 성덕(盛德)의 일이겠습니까? 홍우원(洪宇遠)과 같은 이에 이르러서는 나이 이제 80여 세인데도 아직도 오늘날 사유(赦宥)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장차 새상(塞上)의 외로운 혼(魂)이 될 것이니 이 어찌 더욱 불쌍히 여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소 가운데의 말은 이미 경중을 참작(參酌)하여 처리(處理)하였다."
하였다.
부호군(副護軍) 박세채(朴世采)가 상소(上疏)하기를,
"지난번에 신이 입조(入朝)하였다가 낭패(狼狽)하여 돌아갔습니다. 중간에 횡파(橫波)와 격랑(激浪)이 점점 더해져서, 조정에서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을 등용하고 처벌하는 것과, 조정의 의논이 둥근 구멍에 네모진 자루가 맞지 않듯 하는 것의 시말(始末)을 상고해 보면 대개는 신에게 관계가 됩니다. 이제 만일 망령되게 논열(論列)하는 것이 관계 없는 사람같이 되면 신의 염의(廉義)가 상실(喪失)되는 것은 진실로 말할 것이 못됩니다만 또한 장차 성조(聖朝)께서 특별히 유시하신 거조(擧措)에 누(累)를 끼치게 될 것이니, 신이 어찌 대양(對揚)071) 하는 상례(常禮)를 어겨서 스스로 사유(赦宥)되지 못할 주벌(誅罰)을 받아들이겠습니까? 가만히 엎드려 듣건대 전하께서 재이(災異)를 만나매 경척(警惕)하시어 모든 죄책이 자신에게 있는 것같이 상심하여 구언(求言)하고 감선(減膳)하며 소석(疏釋)하고 정성껏 빈다고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홀로 있을 때도 과연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어서 상제(上帝)에게 답할 수 있는지요? 전(傳)에 이르기를, ‘지극한 정성이면 감동(感動)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임금의 마음에 능히 그 정성을 이루면 계구(戒懼) 근독(謹獨)하여 몸을 바르게 하고 허물을 살피며 덕을 닦아 백성을 보전하는 술책이 모두 이에서 벗어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금석(金石)같이 단단한 것도 뚫을 수 있을 것이요 돈어(豚魚) 같이 미련한 동물도 교화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상천(上天)이 군주를 인애(仁愛)하는데 어찌 감통(感通)하고 소격(昭格)하는 방도(方道)가 없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마음을 맑게 하여 반성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성스러운 가르침이 간절하고 지극하였으니 감히 유심(留心)하여 찰납(察納)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7월 13일 신미
큰비가 내렸으니, 친히 비오기를 빈 뒤 이틀이 지난 날이었다. 큰 가뭄 끝에 단비가 줄기차게 내리니, 타서 말라 죽으려던 늦곡식이 거의 되살아날 희망이 있었다. 아헌관(亞獻官) 남구만(南九萬) 이하의 관원에게 포상을 차등(差等)있게 주었다.
7월 14일 임신
응교(應敎) 신엽(申曅)·교리(校理) 이이명(李頤命)·수찬(修撰) 신계화(申啓華)·부수찬(副修撰) 김만길(金萬吉)이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우러러 생각하오니 성명(聖明)께서는 경전(經傳)을 널리 읽어서 학문이 날로 향상하시나, 허명(虛明)하신 몸에는 오히려 누(累)에 매임을 면하지 못하시니, 궁장(宮庄)의 내노비(內奴婢)의 일은 매양 치우치게 비호하시고 반포(頒布)되지 않는 은택(恩澤)의 비용은 과람(過濫)한 데로 돌아가서, 기뻐함과 성냄이 얼굴을 바꾸고 말씨가 너무 드러나며, 호령(號令)을 발포하고 명령을 시행하는 것이 아침 저녁으로 개역(改易)되니 백성들이 일정한 뜻이 없고 선비들은 일정한 의논이 없습니다. 이는 전하의 한마음이 다 바르지 못한 데서 그 유폐(流弊)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조정에서는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흐르고 논의(論議)가 갈라진 것이 많아서 서로가 헐뜯고 배척합니다. 이는 오늘의 신자(臣子)들이 죽어도 남은 책임(責任)이 있겠습니다. 아! 지난번에는 당인(黨人)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서 마침내는 충성스럽고 어진이를 살해하였기에 종사(宗社)가 거의 위태로왔습니다.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모골(毛骨)이 송연합니다. 이제 큰 덕화(德化)가 경신(更新)되었으니 도궤(刀几)072) 에 출입하는 자가 모두 조정에 나와서 거의 힘과 마음을 함께 하여 국맥(國脈)을 부조(扶助)하고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하여 평명(平明)의 다스림을 빛나게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이심(貳心)하는 마음을 내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으니, 진실로 졸졸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마침내는 하늘까지 창일하는 큰물이 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슴을 쫓을 때는 태산(泰山)을 보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미 깊은 경계가 있었습니다. 만일 소인(小人)이 있어서 틈을 엿보아 가만히 일을 꾸미면 필경에는 국가가 마침내 그 재화(災禍)를 받게 됩니다. 오늘날 조정에서 함께 사모하여 우러르는 이는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만한 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물러나 있은 지가 해를 지나도 아직 조정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정초(旌招)073) 해야 할 선비들이 다 초야(草野)에 숨어 있습니다. 이들을 만일 정성과 예우(禮遇)를 더욱 더하여 기어이 불러들이게 한다면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어 논의(論議)가 저절로 귀일될 것입니다. 조정이 화목하고 태평하면 백성들이 그 은택(恩澤)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은 이와 반대여서 민생들이 근심하고 고생하여도 거의 서로 잊을 지경입니다. 각 아문(衙門)에서는 이익을 구하는 것이 날로 심하고 여러 군문(軍門)에서는 수괄(搜括)이 더욱 급합니다. 다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숭장(崇奬)하고 임사(任使)하는 것이 거의 다 잔혹(殘酷)한 속리(俗吏)들 뿐이므로 화락하고 어진 선비는 한두 명도 없고, 기내(畿內)의 수령 자리는 의원(醫員)과 기술(技術)과 잡류(雜類)들이 으레 보임(補任)되는 과(窠)074) 가 되었으니 피곤하고 파리한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진언(進言)을 깊이 가상(嘉尙)하게 여기니, 좌우(左右)에 두고서 유심(留心)하여 살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였다.
7월 15일 계유
주서(注書) 유성운(柳成運)이 송시열(宋時烈)에게 유시를 전한 뒤에 송시열이 대답한 말을 서계(書啓)하였는데, 말하기를,
"홍범(洪範)에 ‘참항양약(僭恒暘若)’이라 하였습니다. 이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참(僭)은 어긋나는 것[差]이니 정치가 다스려지지 않으면 분수에 어긋난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정자(程子)는 ‘사람이 소의 힘으로 먹으면서도 이를 도살하니 흉(凶)함을 초래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예부터 가뭄으로 마르는 것은 대개 원한을 쌓는 데서 많이 나왔습니다. 소의 원기(寃氣)도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이 마음을 미루어서 미천한 백성들이 원한을 품고도 위에 알릴 수 없는 것을 더욱 생각해 주시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화기(和氣)는 상서(祥瑞)를 오게 하고 괴기(乖氣)는 재앙(災殃)을 오게 한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정의 진신(搢紳)들은 오로지 통색(通塞)075) 에만 날치면서 스스로 원수를 만들고 있으니, 이런 것은 화기라고 이를 수가 없으므로 그것이 초래하는 것은 알 만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를 살피시어 잘 처리하소서. 옛적에 강을(江乙)076) 이 굶주려 죽었는데, 그의 어미가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삼공(三公)이 내 아들을 죽였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대신(大臣)들은 어찌 위아래가 모두 의지하고 힘입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함께 안정(安定)하는 방도(方道)를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성심으로 가르치는 말이 매우 근실(勤實)하고 매우 정성스러워서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지성이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으니 깊이 감탄(感嘆)한다. 이를 큰 띠[紳]에 써서 복응(服膺)077) 하면서 서로 면려(勉勵)하는 방도(方道)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7월 16일 갑술
유명일(兪命一)을 정언(正言)으로, 신정(申晸)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삼았다.
지평(持平) 박태만(朴泰萬)이 응지(應旨)하여 소를 올려 김중하(金重夏)는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하며, 홍수주(洪受疇)와 윤증(尹拯)을 힘써 구제하고, 서문환(徐文渙)과 이시규(李時)는 매우 배척하였다. 그는 또 ‘말이 대신(大臣)에게서 나왔으면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따르며, 일이 경재(卿宰)에게 관련이 되면 이를 다시 펴서 구명(究明)하지도 않고 꺾어 버립니다’ 하였으니, 이는 이진안(李震顔)과 윤세희(尹世喜)의 일을 말한 것이다. 끝에는 홍우원(洪宇遠)의 죄명(罪名)이 매우 무거운데도 입시(入侍)하는 신하나 경악(經幄)의 관원(官員)들이 서로 이어서 그를 신구(伸救)하는 잘못을 말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홍수주의 상소의 말은 차례가 없고 정직하지 못하므로 실로 사문(斯文)의 죄인(罪人)인데 많은 선비들이 신변(伸辨)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제 은연(隱然) 중에 현란시키는 계획을 꾸몄으니 내가 실로 한심하게 여긴다. ‘공의를 돌아보지 않고 이를 따른다’고 말한 데 이르러서는 내가 또한 알 수 없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경교(尹敬敎)가 또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시비(是非)가 분명치 못하시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을 편파적으로 믿고 대각(臺閣)들을 싫어하여 박대(薄待)하며, 대신들의 말은 시비를 따지지 않고 모두 굽혀 따르시며 대각(臺閣)의 의논은 곡직(曲直)을 살피지 않고 문득 꺾어버리십니다. 그래서 대각(臺閣)들이 직위(職位)를 잃어서 바른 말을 듣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福)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대각들을 너무 박하게 대우하여 말이 대신에게 관계되면 곧 노예(奴隷)와 같이 욕보이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의논이 중신(重臣)에게 미치면 곧 엄한 말씀으로 준렬(峻烈)하게 물리쳐서 폐기(廢棄)하거나 금고(禁錮)합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임금의 뜻에 거슬리면 문득 낙점(落點)하기를 아끼시어 한번 울면 마치 장마(仗馬)078) 와 같이 물리쳐 버립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대각에서는 말하는 것을 꺼리게 되니 불행히도 권간(權奸)들이 조정의 권한을 맡게 되면 그 폐해는 장차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어 들어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렵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마음을 비우고 충간(忠諫)하는 말을 따라서 언로(言路)를 넓게 열고 외방(外方)에 보직(補職)하였던 선비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폐고(廢錮)되었던 사람들을 거두어 쓰셔서 그들로 하여금 전의 일을 징계함이 없이 하고 할 말을 다 말하여 꺼리지 않게 되면 해와 달이 다시 빛나게 될 것이니, 누구인들 흠앙(欽仰)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답하기를,
"시비가 분명치 못하여 대신들을 편파적으로 믿는 것은 또한 나의 병통(病痛)이다. 그러나 말세(末世)의 풍속이 시끄러워서 나아가 향하는 것이 정하여지지 아니하고 옳고 그름이 뒤섞이게 되는 모습을 진실로 원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특명으로 박신규(朴信圭)를 잡아다 추고(推考)하게 하였다. 그것은 대간(臺諫)에서 아뢴 것 가운데 ‘땅에 떨어졌던 제물(祭物)을 담는 갑(匣)을 주워서 다시 천진(薦進)하였다’는 말을 추가하였기에 임금이 듣고 놀라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7월 17일 을해
부응교(副應敎) 이돈(李墩)이 응지(應旨)하여 소를 올려서 여섯 가지의 폐해를 진달(陳達)하였으니, 첫째는 다스림을 구하는 뜻이 서지 않은 것이요. 둘째는 학문을 힘쓰는 공(功)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요. 세째는 말을 받아들이는 도량(度量)이 크지 못한 것이요. 네째는 사람을 쓰는데 법도(法度)가 없는 것이요. 다섯째는 검소(儉素)함을 숭상함에 실적(實績)이 없는 것이요. 여섯째는 백성을 구제하는데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함을 논(論)하는 데에는 전후(前後)의 견책(譴責)을 받았던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박태보(朴泰輔)·최석항(崔錫恒)·윤세희(尹世喜)·조상우(趙相愚)·최석정(崔錫鼎) 등 여러 신하의 이름을 낱낱이 들어서 각각 칭찬을 하면서 혹은 불러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였고 혹은 거두어 서용(敍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제 이러한 두서너 신하들은 본래 그들을 죽을 때까지 영원히 버리려는 뜻이 아니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의 성명(姓名)을 나열해 기록하여 가지고 급급하게 인진(引進)하기를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느냐?"
하였다.
전(前) 대사헌(大司憲) 이상(李翔)이 상소하기를,
"대저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천륜(天倫)은 사람들이 다같이 가지는 것이므로 옳음과 그름의 두 끝은 본래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기편의 사람을 돕는 일에 급히 서둘러서 그릇되게 문식(文飾)을 더하고서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합니다. 이는 자못 그 허물을 문식하려 하면 그 허물이 점점 더하여지고 그 잘못된 것을 꾸미려 하면 그 잘못된 것이 더욱 커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도 온 세상의 공의(公義)를 복종시켜서 사방(四方)의 비난을 면하려고 바란들 어찌 그렇게 되겠습니까? 아! 당로(當路)한 의논들이 지극히 공평(公平)한 데서 나왔다면 저절로 편파(偏陂)되는 과실(過失)이 없어서 능히 사람들의 마음이 다함께 옳게 여기는 데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사심(私心)을 면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기를 바라므로 부회(傅會)하여 말을 꾸며서 무식(無識)한 사람들을 속이지만 온 세상의 참된 시비(是非)는 끝내 민절(泯絶)될 수 없는 것이 있게 됩니다. 이 또한 성명(聖明)의 통촉(洞燭)함을 입어서 시비를 밝게 보이셔야 사문(斯文)이 매우 다행할 것이며 사림(士林)이 매우 다행할 것인데 조정의 무너지고 어지러워지는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환해(宦海)의 풍파(風波)는 한 묶음의 갈대로서는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다만 유식(有識)한 자가 알지 못하게 근심하고 가만히 탄식하는 것만이 아니므로 또한 전하께서도 반드시 을야 병야(乙夜·丙夜)079) 에 베개를 편히 베고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진정(鎭定)시키고 소융(消融)시키는 계책(計策)이 이미 임금의 계획에 정하여졌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송(宋)나라 조정에 소식(蘇軾)과 같은 무리들은 비록 이정(二程)080) 에 견줄 수는 없지마는, 그의 문장과 절행(節行)은 또한 사류(士類)라고 이르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붕당(朋黨)을 나누어 사문(斯文)에 죄를 얻었고, 집안과 나라를 그릇되게 하여 원부(元符)081) 의 화(禍)를 불러왔으니, 장돈(章惇)·채경(蔡京)과 비교해 볼 때 서로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마음씨에 대해 처벌하는 의논은 부월(鈇鉞)뿐만이 아닐 것이며 이미 엎어진 수레바퀴는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귀감(龜鑑)이 되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이 송(宋)나라 조정의 일과 방불(彷彿)합니까? 뒷 사람들이 오늘을 보는 것이 또한 오늘의 사람이 옛날을 보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이어서 수령(守令)을 가려 뽑을 것과 군액(軍額)을 고르게 할 것과 전부(田賦)를 바르게 할 것과 저적(儲積)을 신칙할 것과 옥송(獄訟)을 결단할 것과 사유(赦宥)를 신중히 할 것 등 두어가지 일을 진달하였고 끝에는 마음을 바로 가지고 학문을 부지런하게 하는 도(道)로써 마치었다. 답하기를,
"자세하게 진술한 것이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겨서 감탄(感嘆)한다.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이어서 생각하니 조정의 의논이 거침없이 무너진 것이 일조일석에 된 것이 아니지만 어찌 오늘과 같이 심한 적이 있었느냐? 사의(私意)에 가리어서 그 양심(良心)을 잃었기에 시비(是非)가 점차 난잡하게 되고 의리(義理)가 점점 막혀서 날로 위태롭고 멸망하는 지경에 나아가는데도 한 사람도 생각이 이에 미치는 자가 없으니, 이것에 내가 몹시 근심하여 잠을 자지 못하면서 개연(慨然)히 탄식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제 경(卿)의 상소의 내용을 보니 매우 명쾌(明快)하기에 더욱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조목을 들어 진술(陳述)한 일들은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7월 18일 병자
대사헌(大司憲) 이숙(李䎘)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였는데, 백성들의 고통을 구휼(救恤)할 것과 조정을 바르게 할 것과 관방(官方)082) 을 맑게 할 것과 기강(紀綱)을 진작(振作)하는 방도를 논한 것이었다. 또 수령(守令)들이 따로 허위(虛僞)를 갖추는 폐단을 논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근래에 사람들의 마음이 자못 괴벽(乖僻)하여지고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져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사람 【민희(閔熙)를 말함.】 을 가리켜서 암매(暗昧)한 탓이라고 여겼고, 군부(君父)를 협제(脅制)한 죄 【권대운(權大運)을 말한다.】 를 말이 과격하였다는 데로 돌렸으며, 음험하고 간특하여 역당(逆黨)에 붙었던 무리 【정유악(鄭維岳)을 말함.】 를 그의 사정(私情)으로 진술하여 사유(赦宥)의 특전(特典)을 입게 하였는데도 아래의 사람들이 이를 고구 역쟁(苦口力爭)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이것이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더구나 뜻을 받들어 순종하고 찬성하여 급급(急急)하게 받들어 시행하는 자들은 어찌 그리 방자하여 꺼리지 않기가 이와 같이 심합니까? 종묘(宗廟)에 고하는 글을 고쳐 지어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계획을 세우려 도모한 자 【이하진(李夏鎭)을 말한다.】 는 이것이 매우 무거운 죄인데도 그 실상(實狀)을 숨기고 미세(微細)한 죄만을 들어서 임금을 지척(咫尺)에서 모시며 은전(恩典)을 비는 자가 있었으며, 경의(經義)에 맞추어서 동조(東朝)083) 를 침범(侵犯)한 자 【홍우원(洪宇遠)을 말한다.】 는 이것이 매우 큰 죄인데도 그의 과실과 죄악은 줄여 간략히 하고 다만 늙은 이를 불쌍히 여기는 인정(人情)만을 말하여 장주(章奏)의 사이에 어여삐 여기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나라의 법은 두려워하지 않고서 사사로운 뜻에 사역(使役)되어서 탐시(探試)하는 계획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이미 이러한 사론(邪論)들을 물리쳐 끊어버리지 못하고서 어떤 것은 따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거부하기도 하면서 현란시키고 변화하는 꾀 속에 떨어졌습니다. 신은 이를 이어서 일어나는 것이 장차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까 두려워 합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으로 가르쳐 주는 말은 시국의 병폐(病弊)에 절실하게 맞아서 지론(至論)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어찌 복응(服膺)하지 않겠는가? 아! 인재(人才)를 수습(收拾)하여 진퇴시키는 것은 그 책임이 전조(銓曹)084) 에 있는데 쓰는 것이나 버리는 것이 공정(公正)하지 못하여서 관방(官方)의 소요를 불러 일으켰으니, 어찌 심히 미안(未安)하지 않겠느냐? 내가 마땅히 두 전조(銓曹)를 엄하게 신칙(申飭)하여 답답하게 막히는 탄식이 없도록 하겠다. 민희(閔熙) 등이 죄를 범한 것이 매우 무거운 데 이르러서는 대신(臺臣)들이 능히 쟁집(爭執)하지 못한 과실이 있었음을 내가 알지 못함은 아니나, 그러나 이렇게 비상(非常)한 재앙(災殃)을 만나서 겨우 광탕(曠蕩)085) 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으니 이제 도로 정지할 수가 없으며, 그리고 또 반드시 추죄(追罪)할 수도 없다."
하였다.
7월 19일 정축
이이명(李頤命)을 헌납(獻納)으로, 이유(李濡)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임홍망(任弘望)을 승지(承旨)로 삼았고, 집의(執義) 이여(李畬)를 승진시켜 승지로 삼고, 신엽(申曅)을 대신 집의로 삼았다.
정언(正言) 서문유(徐文𥙿)가 응지(應旨)하여 상소를 올려서 김중하(金重夏) 등이 아뢴 것을 따르라고 청하였고, 또 붕당(朋黨)의 해와 군문(軍門)의 폐단을 언급(言及)하였으며, 또는 사유(師儒)의 관원(官員)을 가려 뽑아서 선비의 습속(習俗)을 아주 변경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내용으로 답하였다.
전(前)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지겸(趙持謙)이 졸(卒)하니, 나이 47세였다. 조지겸은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용모(容貌)가 작고 못 생겨서 시골의 가난한 사람과 같았다. 그러나 문재(文才)가 풍부하였고 몸가짐이 청렴 검소하고 강직하게 혼자 즐기며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니 인망(人望)이 매우 무거워서 한 시대의 제일이라고 추존(推尊)하였다. 갑인년086) 과 을묘년087) 에 여러 소인(小人)들이 처음 뚫고 들어올 적에 조지겸이 오랫동안 금액(禁掖)에 있으면서 그들의 간특한 정태(情態)를 자세히 알아서 논의(論議)가 더욱 준엄(峻嚴)하고 과격하여 털 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았기에 여러 소인(小人)들에게 제일 미움을 받았다. 경신년088) 경화(更化)할 때에 맨 먼저 요지(要地)에 들어와서 언론(言論)을 주장하였다가 권간(權奸)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가는 것을 보고서는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서 문득 나뉘어져서 스스로 보전할 계획을 내었다. 또 조지겸의 아비 복양(復陽)은 윤선거(尹宣擧)와 더불어 걸상[榻]을 같이 쓰던 벗이었다. 이 때문에 윤선거의 아들 윤증(尹拯)이 조지겸과 더불어 사이가 두터웠다. 윤증이 주장하기를 ‘남인(南人)들이 쫓겨나게 된 것은 오로지 훈척(勳戚) 때문이었는데 김수항(金壽恒) 등 여러 사람은 모두 훈척들과 더불어 서로 좋게 지냈고 송시열(宋時烈)은 남인들이 죽이고 싶어한 사람이었는데 또 훈척들을 끊어 버리지 않았기에 더욱 남인들의 노여움을 사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계획은 반드시 안으로 남인들과 결합(結合)하고 밖으로 훈척들을 배척하여 송시열과 김수항 등 여러 사람들을 침알(侵軋)하고 따로 한 당(黨)을 세운 뒤에야 바야흐로 처세하는 데 좋은 계획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조지겸이 이를 깊이 그렇게 여기었다. 오시수(吳始壽)의 옥사(獄事)가 처음 발생하였을 적에 김수항을 가서 보고 그를 힘써 구해(救解)하면서 ‘그는 대가(大家)이다. 일후(日後)의 염려를 또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김수항이 정색(正色)하여 꾸짖으므로 조지겸이 마침내 인피(引避)하면서 다른 의견을 내세웠다. 뒤에 허새(許璽)·허영(許瑛)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적에 남인(南人)들이 고인(告引)을 당한 자가 많았다. 조지겸이 또 선언하기를 ‘이는 무옥(誣獄)이라’ 하니,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문득 국론(國論)이 되었으므로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신하가 또한 법을 다 써서 구치(究治)하지 못하고 다만 허새·허영만을 목베니 그 나머지 고인당한 자들은 다 석방(釋放)되었다. 조지겸의 뜻은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여서 또 김익훈(金益勳)의 일로 죄안(罪案)을 만들어서 대관(臺官) 한태동(韓泰東) 등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고 조지겸은 스스로 후전(後殿)089) 이 되어 공갈하고 협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김익훈이 장차 대하(大何)090) 를 입게 될 적에, 김수항이 조지겸 등의 하는 짓을 크게 옳지 못하게 여기었다. 그러나 논의(論議)를 공평히 재결(裁決)하려고 하여 드디어 김익훈의 관직(官職)을 삭제(削除)하여 내쫓고 고변(告變)하여 올린 자를 어떤 이는 목을 베고 어떤 이는 귀양보냈다. 그 뒤에 고인(告引)된 자들이 장희재(張希載)와 몰래 결탁(結托)하여 기사년091) 의 화(禍)를 빚어내서 마침내 국모(國母)를 유폐(幽廢)시켜 이륜(彛倫)092) 이 땅에 떨어지게 하였다. 조지겸과 한태동이 함께 포상(褒賞)으로 증직(贈職)되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논자(論者)들은 허새(許璽)·허영(許瑛)이 순수히 자백하여 처형(處刑)되었기 때문에 기사년의 간흉(奸凶)들도 그의 설원(雪寃)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이미 허새·허영을 감히 역적이 아니라고 하지 못한다면 허새·허영은 미천(微賤)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제가 스스로 역적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반드시 주장한 자가 있었을 텐데 그때에 끝까지 핵실하지를 못하였기에 거개가 법망(法網)에 빠지게 됨을 면하지 못하여서 마침내 이 무리들이 흉역(凶逆)을 멋대로 행하여 종사와 국가가 거의 멸망할 뻔하였다. 조지겸이 흉악한 무리를 보양(保養)하여 국가에 화(禍)를 주었으니, 그의 죄는 이루다 속죄(贖罪)할 수 없다고 한다. 대개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한 뒤로부터 서인(西人)들이 국정(國政)을 담당한 지 50여년 동안 조정(朝廷)이 편안하여 근심이 없게 되었다. 갑인년에 이르러 여러 소인(小人)들이 정(楨)과 남(柟)으로 인하여 들어왔었으나 정과 남이 주벌을 당하고서는 그들이 모두 쫓겨나 물러났으니, 어진이와 간사한 자의 역(逆)과 순(順)의 분별은 흑색(黑色)과 백색(白色)처럼 쉽사리 나타날 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지겸은 망령되게 일신(一身)의 사사로운 계획 때문에 문호(門戶)를 나누어 유종(儒宗)093) 을 배반해 버리고 몰래 흉악한 도적의 붉은 기치(旗幟)가 되어서 한 떼를 거느리고 돌아가서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틀어지게 하고 변괴(變怪)가 층층으로 나와서 마침내는 하수(河水)가 무너지고 물고기가 부란(腐爛)하는 데까지 이르러 이를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속담에 이르기를, ‘누가 재앙의 단서를 발생시켰는가 지금까지 방해가 된다’ 하였다. 재앙의 단서를 추구해 보면 조지겸이 어찌 그 책임을 사피(辭避)할 수 있겠는가? 아! 또한 마음 아프구나.
7월 20일 무인
전교하기를,
"여러 관사(官司)의 관원(官員)들은 묘시(卯時)에 출근하고 유시(酉時)에 퇴근하는 것이 법전(法典)에 기재되어 있고, 계하(啓下)한 공사(公事)를 3일 이내에 복주(覆奏)하여야 함도 또한 수교(受敎)가 있는데 백례(百隷)가 직무(職務)에 태만(怠慢)한 것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매우 온당하지 못하다. 이제부터는 법전에 의거하여 모두 묘시에 출근하였다가 유시에 퇴근하게 하라. 이와 같이 엄하게 신칙(申飭)한 뒤에도 다시 전의 습관을 따르고 이를 봉행하지 아니하면 마땅히 무거운 책벌(責罰)이 있을 것이다. 이로써 각사(各司)에 분부하라."
하였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은 권한이 중하므로 사지(辭旨)가 매우 엄하여, 심지어 ‘한(漢)나라 법으로 논(論)한다면 목을 베어 저자에 버릴 형률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다."
하고, 이어서 명하기를,
"이제부터는 낭관으로서 통색(通塞) 등의 일에 간예(干預)함을 모두 정파(停罷)시킨다. 혹시 다시 전철(前轍)을 밟는 자가 있으면 사방 변방에 내쫓아서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승정원에서는 이를 자세히 알아서 선포(宣布)하라."
하였다. 임금이 창졸히 이런 전교를 내리니 중외(中外)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어떤 사람은 ‘임금이 서북(西北) 지방의 사람을 통청(通淸)하였을 때 정청(政廳)에서 아뢴 것에 격발되어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고 여겼다.
서울에 사는 유학(幼學) 박유태(朴由泰)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大略)에 이르기를,
"크게 쏟아지는 비와 같은 은전(恩典)을 빨리 행하시어 조정 신하들의 쟁집(爭執)을 제거시켜서 죄가 있건 없건 그들에게 임금의 은택(恩澤)을 골고루 젖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붕당(朋黨)의 폐단을 고치기를 논하여 말하기를,
"전일 반역을 일으켰던 당(黨)의 흉변(凶變)은 실로 자기와 달리하는 이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도모(圖謀)한 것이었는데 하늘이 당비(黨比)를 싫어하였기에 그들로 하여금 자멸(自滅)하게 하였습니다만 국맥(國脈)이 상처를 받아 쇠잔(衰殘)한 것이 또한 이미 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엄한 비답을 내리기를,
"머리를 감추고 말하면서 저쪽은 억누르고 이쪽은 드날려 마음쓰는 것이 간사하고 음흉하여 형적(形跡)을 숨기기가 어렵다. 때를 타서 나의 속마음을 떠보는 태도가 매우 얄밉다."
하고, 이어서 승정원에 명하여 박유태(朴由泰)의 심정(心情)을 힐문(詰問)하였더니, 대답이 매우 모호(模糊)하여 거의 말을 이루지 못하였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그의 마음을 쓴 것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하여서 마땅히 달리 징계하여 다스려야 하겠지마는, 이미 응지(應旨)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지금은 그대로 둔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차자를 올려서 비오기를 빌었을 적에 내리신 상격(賞格)을 사양하였으며, 이어서 은상(恩賞)이 과람(過濫)함을 말하기를,
"옛적에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서달(徐達)을 명하여 북으로 중원(中原)을 정벌(征伐)하였었습니다만 그가 개선할 적에는 그에게 준 상(賞)은 백금(白金) 5백 냥(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숭정(崇禎)094) 무렵에 이르러서 조대수(祖大壽)는 조그만 공(功)도 없었는데 다달이 1백만 금(金)씩 주었기에 내탕(內帑)에 간직한 것이 텅 비었습니다. 그래서 종사와 국가가 윤망(淪亡)해도 끝내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힘을 다하게 하는 것이 과연 상뢰(賞賚)의 많음과 적음에 있었겠습니까?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는 백성의 물력(物力)이 가장 풍성하였는데도 그때의 상신(相臣)인 왕조(王朝)095) 가 매양 사여(賜與)하는 것을 볼 때마다 반드시 눈을 감고서 탄식하기를 ‘백성들의 기름과 피를 어찌 저렇게 많이 쓰는가?’ 하였습니다. 대관(大觀)096) 무렵에 채경(蔡京)이 나라의 정사를 맡았을 적에 함부로 내려 준 상품(賞品)이 제택(第宅)을 가득 채웠기에 마침내는 제 집과 나라가 함께 멸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들의 지극한 경계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공주(公主)의 아들 정태일(鄭台一)의 초상에 내재궁(內梓宮)과 외재궁을 모두 주었다고 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친한 이를 친하는 데 있어 정도를 줄이는 것은 예(禮)가 거기서 생기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공주(公主)의 아들의 초상에 재궁(梓宮)을 내려 주기까지 한다면, 친속(親屬)으로서 이보다 가까운 자에게는 다시 무엇으로 그에게 더 사여(賜與)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재궁(梓宮)이라고 이름하면 더욱 어리고 젊은 신자(臣子)의 초상에는 함부로 내려 줄 수 없습니다. 이는 다만 백성들의 힘을 소비(消費)함이 무거울 뿐 만이 아닙니다. 신이 장로(長老)의 말을 들었는데 그 말에, 인조(仁祖) 때에 인빈(仁嬪)의 제사를 받드는 집에서 그의 묘소(墓所)에 일이 있어서 역군(役軍)을 청하였을 적에 인조께서는 ‘이 일은 능침(陵寢)의 일과 다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사우(祠宇)를 옮겨 세우는 일로 인하여 이미 그 집을 지을 기지(基地)를 사 주셨고, 또한 그 사우를 조성(造成)하기를 명하셨는데 이제 또 그 비용을 관(官)에서 주었으니, 이는 실로 역대(歷代) 조정에서 이미 행하였던 규칙이 아니며 또한 일후에도 이를 계승하여 행할 수 있는 방도(方道)가 아닙니다. 이미 이룬 일은 지금 어찌할 수가 없지마는 일후를 깊이 경계하여 은혜가 고갈(枯竭)되지 않게 한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또는 재신(宰臣)들에게 상가(賞加)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면 정경(正卿)의 반열에 든 자가 23인이나 되고 1품(品)에 승진된 자도 또 11인이나 됩니다. 이들은 다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들이라고 하겠지마는, 만일 관방(官方)으로 논한다면 이미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매양 공회(公會) 반열(班列)의 사이에는 1품이 2품보다 많기도 하니 이는 성조(聖朝)의 천작(天爵)을 중하게 여기어 아끼는 도리는 아닌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명주[帛]나 말[馬]로 하사하는 것을 바꾸시어 시인(詩人)으로 하여금 ‘적필(赤芾)097) 이 3백이라’는 비난이 있지 않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열(論列)한 것이 진실로 간절하고 지극하구나. 다만 크고 작은 상뢰(賞賚)는 자연히 옛 법도가 있으니 그것을 일체 변개(變改)한다는 것은 끝내 미안한 것이 있다."
하였다.
7월 21일 기묘
유성(流星)이 나왔다.
임금이 여러 차례 김수항(金壽恒)의 입시(入侍)를 명하였으나, 김수항은 병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어 특명으로 부르니, 김수항이 와서 빈청(賓廳)에 나아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기를 명하여 온유(溫諭)하여 말하기를,
"방금 나라의 형세가 어렵고 근심되는데 한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구나. 조정이 분열되어 논의(論議)가 서로 틀리게 되니 믿고 붙들 사람은 다만 두 서넛 고굉(股肱)의 신하들뿐이다. 경(卿)이 여러 해를 분주(奔走)하였으니 경에게는 수고스러운 일이라 하겠지마는, 조정에서 의지하고 신임하는 도리로는 해가 오래되었다 하여 쉽사리 체직을 윤허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 시국을 조제(調劑)하여 진정(鎭定)시키는 책임은 경이 아니고는 적당한 이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전후(前後)에 돈유(敦諭)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의 성의(誠意)가 천박(淺薄)함인지 아직도 서로 부합(孚合)되지 않았으므로 마지 못해서 부응(副應)하기를 힘쓰게 한다. 내 생각에 경은 선조(先祖)의 고명지신(顧命之臣)으로서 국가의 기쁨과 근심을 마땅히 함께 하였으므로 내가 경을 의지하고 중히 여기는 것이 진실로 다른 신하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은 마땅히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에게 하듯 마음을 다하라."
하니,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辭謝)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박태만(朴泰萬)과 윤경교(尹敬敎)의 상소에 ‘대신(大臣)의 말은 옳고 그름을 묻지 않고서 곡진하게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은 오랫동안 수석(首席)에 있었기에 하순(下詢)하실 즈음에 신이 먼저 진달(陳達)하여 말이 혹 의중에 맞는 것은 많이 채용(採用)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상소 가운데의 말은 모두 신을 가리켜 말을 낸 것입니다.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도움이 없으니, 사람들의 말이 생기는 것은 진실로 괴이(怪異)히 여길 것이 못됩니다. 다만 일후(日後)에 대신들이 좋은 말을 아뢰어 임금께서 믿고 쓰더라도, 대간(臺諫)들의 말이 계속하여 이와 같이 일어난다면 그 해로움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더욱 황공하고 근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사람의 상소 말은 옳고 그른 것이 전도(顚倒)되었으니, 그의 말을 반드시 혐의(嫌疑)로 삼을 것은 없다. 이 뒤에도 만약 말할 것이 있으면 이 때문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지사(知事) 이단하(李端夏)는 매양 ‘외방(外方)의 각 고을에 축적(蓄積)된 것이 적기 때문에 흉년을 한 번 만나면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백성들의 인구(人口)를 전부 계산(計算)하여 조곡(糶穀)을 더 준비한다면 비록 흉년을 만나더라도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므로, 신 등도 또한 상의하여 시행하기를 허락하였었습니다. 이단하는 양남(兩南)의 감사(監司)들과 의논하였고 일찍이 또한 어탑(御榻) 앞에서 진달하기를, ‘관서(關西)의 은(銀) 1만 냥을 가져와서 조곡을 마련하는 자료로 삼았습니다.’ 그는 또 ‘외방(外方)의 군병(軍兵)들의 신포(身布)를 각 아문(衙門)에 바치던 것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로 대신 바치게 하여 조곡(糶穀)에 회록(會錄)098) 하도록 하고, 그리고 군포(軍布)는 진휼청(賑恤廳)에서 수량을 계산하여 각 아문(衙門)에 이송(移送)하면 피차 양쪽이 다 편리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경기(京畿) 지방에 먼저 시행하려고 하여 군인(軍人)과 일반 백성에게 이것이 편리한지를 순문(詢問)하였더니, 그것을 원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이미 거두어들일 것을 책자(冊子)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박신규(朴信圭)는 이를 이단하(李端夏)에게 묻지 않고서, 이에 대한 묘당(廟堂)의 의논이 일치(一致)되지 못하였다고 일컫고는 바로 공문[關文]을 발송(發送)하여 도로 중지시켰습니다. 박신규(朴信圭)는 만일 의견이 합일(合一)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면 처음 나올 적에 쟁집(爭執)하는 것이 옳았을텐데 이미 거두어 바칠 것을 책자(冊子)로 만든 뒤에 이를 곧 중지시킨 것은 조정의 명령이 이미 백성들에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므로 군인과 백성들이 거의 모두가 낙막(落莫)한 형편이니, 거조(擧措)가 전도(顚倒)됨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조가(朝家)에서 모든 일을 시행할 적에나 정파(停罷)할 즈음에는 비록 대신(大臣)이 여러 재신(宰臣)에게서나 당초에 그 의논을 주장하였던 사람에게 반드시 물어본 뒤에, 그것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단하(李端夏)는 이 일에 대하여 여러 해 동안 연구하고 조사하여 그의 마음과 힘을 다하였는데, 같은 자리에서 박신규(朴信圭)가 붓으로 선을 죽 그어서 지워버렸으니, 어찌 이와 같은 사체(事體)가 있겠습니까? 이단하를 사물 처리하는 재주로 논한다면 진실로 그의 장점(長點)이 아닙니다만, 그가 나라를 위하는 성심이라면 그와 비교할 이가 적습니다. 비록 혹시 재주는 있더라도 나라를 위하는 데 성실하지 못한 자가 이단하보다 우수(優秀)한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조정(朝廷)에서는 예양(禮讓)하는 것이 중한데 박신규(朴信圭)는 동료(同僚)를 대하는 것이 이와 같이 소홀한 것은 매우 잘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단하가 여러 해를 지나면서 계획했던 일에 박신규(朴信圭)가 그에게 다시 통문(通問)하지도 않고 먼저 그 일을 중지(中止)시켜서 이단하로 하여금 불안(不安)하여 물러나 돌아가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어서 나라에 원망이 돌아오도록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부당(不當)한 것이다. 그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이단하는 비록 진휼(賑恤)하는 일을 끝냈다고는 하지마는 앞으로 또한 요리(料理)할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승정원(承政院)에서 특별히 조사(措辭)하여 하유(下諭)해서 다시 불러오도록 할 방법을 만들라."
하였다. 이단하의 ‘인구(人口)를 헤아려서 조곡(糶穀)에 대비(對備)하여야 한다’는 말은 실지로 경험(經驗)과 근거(根據)가 있으며, 군포(軍布)를 대봉(代捧)하자는 것도 또한 양쪽이 다 편리한 방책(方策)이었는데, 이서(吏胥) 무리들이 자기에게 불리(不利)하다고 하여 이를 선동(煽動)하여 뒤흔들어 놓았는데 박신규(朴信圭)는 그들의 말만 믿고 이를 이단하에게 묻지 않고서 갑자기 중지시켜서 이단하로 하여금 불안(不安)하여 물러나 돌아가게 하였기에 김수항(金壽恒)의 말이 이와 같았다.
7월 23일 신사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금위영(禁衛營)에 대장(大將)을 따로 설치(設置)하는 일로써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다 옛 제도를 그대로 두어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로써 대장(大將)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따로 제조(提調)를 두기를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재숭(鄭載嵩)이 아뢰기를,
"지난날 소결(疏決)하였을 적에 권대운(權大運)과 민희(閔熙)를 양이(量移)하는 일에 대하여, 신 등은 임금의 명을 받들어 따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간들의 상소에 ‘승순(承順)하여 찬성하며 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말을 더 보태었으니, 이는 신을 지적하여 배척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씨가 자못 사나왔으며, 또 아뢰기를,
"대간의 의논에서 진실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려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인피(引避)하였다가 처치(處置)하여 나오기를 청하고 그런 뒤에 논계(論啓)하는 것이 예(例)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대관(臺官)들은 인피하지 않고 앞질러서 먼저 논계하였으니, 이는 뒤 폐단에도 관계됩니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도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사헌(大司憲) 이숙(李䎘)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멋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었다는 말은 판의금(判義禁)을 지적(指摘)한 것이요 대신(大臣)을 가리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공의(公議)가 있는 데서는 시비(是非)가 이미 결정된 일이라도 곧 바로 논핵(論劾)하는 것은 근래의 일을 보더라도 근거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권대운과 민희의 죄는 주벌(誅伐)을 용서받을 수 없는데도 한 때의 한재(旱災)로 인하여 갑자기 그의 양이(量移)를 명하였다. 정재숭 등은 대신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이미 그 잘못된 일을 찬성하였으며, 또 어탑(御榻) 앞에서 대신(臺臣)들을 대해 놓고 물리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흉인(凶人)들을 몰래 두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심히 기탄(忌憚)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남구만도 또한 부화 뇌동(附和雷同)함을 면치 못할 것에 대관(臺官)들의 잘못한 것도 없는 실수를 지적하였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권대운과 민희의 죄는 주벌(誅伐)을 용서받을 수 없는데도 한 때의 한재(旱災)로 인하여 갑자기 그의 양이(量移)를 명하였다. 정재숭 등은 대신의 반열(班列)에 있으면서 이미 그 잘못된 일을 찬성하였으며, 또 어탑(御榻) 앞에서 대신(臺臣)들을 대해 놓고 물리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흉인(凶人)들을 몰래 두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심히 기탄(忌憚)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남구만도 또한 부화 뇌동(附和雷同)함을 면치 못할 것에 대관(臺官)들의 잘못한 것도 없는 실수를 지적하였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헌납(獻納)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장령(掌令) 임원구(任元耉)는 일찍이 이 직위(職位)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현도 상소(縣道上疏)099) 하여 사직하고 올라오지 않으며 자기의 집에 있으면서 지공(支供)을 본읍(本邑)에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본읍에서 ‘자기의 집에 있으면서 지공(支供)한 사례(事例)가 없다’고 하였더니 임원구는 즉시 다른 집으로 옮겨 나와서는 지공하라고 이서(吏胥)들에게 매질까지 하는 등 거조(擧措)가 매우 괴이하였습니다. 그를 체차(遞差)하기를 청합니다. 전(前) 장령(掌令) 이태구(李泰龜)는 바야흐로 거세게 일어나는 의논에 감히 다른 주장을 내세웠고, 또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 스스로 나열(羅列)하기를, ‘민희는 애매(曖昧)한 죄이고 권대운은 말에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하였는데, 미처 입계(入啓)하기도 전에 먼저 탄핵받아 체차되었기에 승정원(承政院)에서 도로 내주었다고 합니다. 민희가 흉모에 간예하였었고, 권대운이 공동(恐動)하여 임금을 위협하였던 것은 이것이 어떠한 죄악(罪惡)인데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어찌 감히 그를 신구(伸救)할 뜻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언어(言語)가 더욱 형편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기를 청합니다. 전(前) 부사(府使) 장선충(張善沖)은 곧 역적(逆賊) 이흥립(李興立)의 외손자(外孫子)이고 죄로 죽은 장신(張紳)의 아들인데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사칭(詐稱)하며 헛된 명예를 훔쳤기에 천섬(薦剡)100) 에 이름이 여러 번 기록되었지만 한 번도 명(命)에 의하지 않다가 현직(顯職)에 발탁되기에 이르러서야 승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경상(卿相)들과 논의(論議)하는 데 참여하면서 진실로 이익될 형세가 있는 곳이면 아비의 원수라도 피하지 않고 분주히 다니며 악착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차마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사판(仕版)을 삭제하여 버리기를 청합니다."
하니,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고 다만 임원구의 일만을 윤허하였다. 장선충(張善冲)은 세속(世俗)의 번거로운 일을 생각지 않고 논의(論議)를 잘하여 조지겸(趙持謙)의 무리들과 더불어 일당이 되니, 식자(識者)들이 그의 부정(不靖)을 미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중하게 논박(論駁)당했으니, 비록 그 조어(措語)가 너무 박절(迫切)하기는 했지만 자초(自招)한 것이라고 하였다.
공홍도(公洪道) 부여(扶餘) 땅에 큰 돌이 일어섰다.
7월 24일 임오
이규령(李奎齡)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김경(金澋)·박세장(朴世樟)을 장령(掌令)으로, 이돈(李墩)을 사인(舍人)으로, 신엽(申曅)을 부교리(副校理)로, 이이명(李頤命)을 부수찬(副修撰)으로, 한은(韓垽)을 집의(執義)로, 이국방(李國芳)을 헌납(獻納)으로 삼았다.
7월 27일 을유
주서(注書) 유성운(柳成運)이 이시규(李時)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대저 사람이 젊어서는 산야(山野)에서 글을 읽고 늙어서는 공조(公朝)에 벼슬하지 않으며 돈후(敦厚)함을 심고 문장(文章)에 힘써서 집에 유학(儒學)을 전하는 이를 선비[儒]라고 지목(指目)한 것이 실은 지나치게 꾸민 말은 아니지만, 선비가 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가 아니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윤증(尹拯)이 좌죄(坐罪)된 것은 결코 작은 허물이나 하찮은 과실이 아니다. 조가(朝家)에서 이미 선비로 대우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이 상소의 말은 매우 방자하고 무엄(無嚴)하다."
하였다.
민진주(閔鎭周)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7월 28일 병술
사간(司諫) 윤빈(尹彬)이 응지(應旨)하여 상소해서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의 일로 내린 비망기(備忘記)의 사지(辭旨)가 미안(未安)하고, 장선충(張善冲)을 논핵(論劾)한 것이 과중(過重)하게 논하였으며, 또 전후(前後) 유생들의 상소에 대하여 모두 총답(寵答)을 내린 것은 잘못이라고 논하고, 말하기를,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서 추요(蒭蕘)101) 의 말일지라도 폐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제왕(帝王)의 훌륭한 일이었지만 듣고 받아들이는 즈음에는 스스로 재량하는 방도가 있었습니다. 만약 시비(是非)를 정밀하게 가리지 않고서 하나같이 너그럽게 용납하기만 하면 이는 족히 요행(僥倖)의 문을 열어줄 만한 것이어서 거기에 현혹(眩惑)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것입니다. 근자에 초야(草野)에 있는 장보(章甫)102) 들이 서로 이어서 소를 올리는데 그 가운데에서 어떤 것은 외람되어 옳지 못한 말이 있어서 그의 곡직(曲直)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조정에 가득한 의관(衣冠)103) 들을 침노하고 배척하기에 있는 힘을 남기지 않았으며 심한 경우는 욕설과 비방이 또한 죽은 자에게까지 미칩니다. 이것이 과연 공평하여 편당이 없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말을 올리는 사람들을 비록 죄를 줄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방자한 마음이 더 성해져서 천박하고 경솔하며 위태롭고 반목하는 습관을 키워서는 안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선정(先正)은 우리에게 있어서 권형(權衡)이오니 그 거짓말에 현란(眩亂)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후(前後)로 응지(應旨)한 상소의 비답은 다만 공사(公私)간의 시비(是非)를 보아서 어떤 것은 가장(嘉奘)하였고 어떤 것은 심히 배척하였는데 ‘모두 총답(寵答)을 내렸다’고 하니, 이 무슨 뜻에서 나온 말인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의 문집(文集)은 이미 성람(省覽)하였다. 특별히 교서관(校書館)으로 하여금 교정(校正) 간행하여 주어서 나의 뜻을 표시(表示)하라."
하였다.
7월 29일 정해
유성(流星)이 북하성(北河星) 위에 나왔다.
안세징(安世徵)을 장령(掌令)으로, 최규서(崔奎瑞)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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