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신묘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사명(李師命)을 도승지(都承旨)로, 심재(沈梓)를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특명(特命)으로 이혼(李焜)·이엽(李熀) 등을 서용(敍用)하였다.
6월 3일 임진
이규령(李奎齡)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영소전(永昭殿)056) 에는 이미 희생(犧牲)을 쓰기로 결정하였으니, 헌가(軒架)와 일악(佾樂)을 써야 마땅합니다만, 일이 구애되는 것이 많습니다. 이를 전대(前代)에 상고하여 보니 위(魏)나라 견후(甄后)와 당(唐)나라 장손 황후(長孫皇后)는 아직 부묘(祔廟)하지 않았을 적에는 다 따로 사당을 세우고 금석(金石)의 악기를 썼습니다만, 아조(我朝)에서는 인렬 왕후(仁烈王后)057) 의 상(喪)에서 부묘하기 전에 원래 희생과 음악을 썼던 일이 없었습니다. 위나라와 당나라의 예제(禮制)는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지만, 우리 나라의 전례(典禮)는 이와 같으니 이제 이미 희생을 쓰고 만일 이로 인하여 음악을 쓰는 것을 한결같이 종묘(宗廟)처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음악은 본래 공적(功績)을 표상(表象)하여 만드는 것이기에 후비(后妃)의 지위에는 무악(武樂)을 쓸 수가 없으므로 지금에 와서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열성(列聖)들의 악장(樂章)이 미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먼저 영소전의 대악(大樂)을 만드는 것도 또 미안하니, 이러한 절목(節目)은 숙의(熟議)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습니다. 다시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의논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뒤에 유신들의 의논에 의하여, 도로 상찬(常饌)을 쓰고 아악(雅樂)은 쓰지 아니하게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최석정(崔錫鼎)의 문사(文詞)와 경학(經學)은 지금 세상에는 그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이제 《주역(周易)》을 강론(講論)하는 때를 맞아서는 더욱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여성제(呂聖齊)가 계속하여 아뢰기를,
"최석정의 문학(文學)은 온 조정이 아는 바입니다. 신이 바야흐로 부제학(副提學)을 의망(擬望)하고자 하나 합당한 사람이 없으니 더 서용(敍用)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4일 계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지난번에 대흥 산성(大興山城)에서 은(銀)을 도적질한 죄인(罪人)에게 자식을 데려다가 증인을 삼아서 처참(處斬)의 죄를 받게 한 것은 이륜(彛倫)을 손상시킨 일이니, 듣기에 매우 놀랍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드려서 조사하여 다스렸던 관원(官員)에게 죄주기를 청합니다. 포도 대장(捕盜大將) 신여철(申汝哲)·형조 판서(刑曹判書) 남용익(南龍翼)이 상대하여 논의하였던 말을 보았습니다만, 스스로 ‘원래 잘못된 것이 없다’고 하므로, 신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다시 포도청(捕盜廳)의 계목(啓目)을 상고하여 보니, 은(銀)을 도적질한 자를 추핵(推覈)할 적에 세속의 예로 방법(龐法)을 베풀고 열두 살인 어린아들을 불러들여 그의 아비가 은을 훔쳐간 절차(節次)를 물으니, 그 아이가 말하기를, ‘아비가 도적질을 하였을 적에 어미가 이를 말렸습니다’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증거를 삼아 조사하여 문초하고 취복(取服)하였습니다. 그 별장(別將)이 이렇게 이치를 거슬린 일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포도 대장(捕盜大將)이 간사한 뜻과 근거없는 말로 그 별장(別將)을 꾸며서 변호하였습니다. 당초에 한 짓이 이미 인륜(人倫)을 멸망시키는 과실(過失)을 범한 것인데 이제 이 수식(修飾)한 것은 더구나 거짓말을 한 죄과(罪科)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형조(刑曹)에 이르러서는 벽을 뚫고 은(銀)을 훔쳐간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이륜(彛倫)을 손상시킨 것은 매우 큰일인데도 포도청의 죄안(罪案)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루어서 그를 처참(處斬)하는 율(律)로 단정(斷定)하여 마침내 아비를 죽인 죄를 만들었으니, 무슨 말로 스스로 면하겠습니까? 지난해에 인빈(仁嬪)의 묘(墓)에 변(變)을 일으킨 도적이 있었기에, 제사를 받드는 왕자(王子)가 변을 일으킨 자의 아들을 붙잡아서 형조에 보냈더니, 형조에서 그 아들의 초사(招辭)를 받아서 정좌하고자 하였습니다만, 여러 대신들이 이는 옥사(獄事)의 체통에 어긋남이 있다고 하여, 그 당상(堂上)을 추고(推考)하였습니다. 이는 오래된 일이 아니어서 본조(本曹)에서도 의당(宜當) 알고 있을 텐데도 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갓 군수(軍需)를 훔쳐간 것만 중하게 여겼고 천리(天理)와 강상(綱常)은 대단하게 생각지 못하고는 이에 법례(法例)가 그렇지 않고 생각이 나오지 않았으니, 신은 속으로 괴이하게 여깁니다. 신이 평일(平日)에 스스로 내세우는 것을 믿게 하기에는 부족하여 한번 규정(糾正)하는데도 노여운 기색과 성난 어사로 굽고 곧은 것을 비교하고 짧고 긴 것을 다투어 반드시 이기고자 합니다. 신이 비록 변변찮은 사람이지만 처해 있는 지위는 이에 옛사람의 지위이니 어찌 감히 편안하게 있으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빨리 물리쳐서 물러나기를 명하여 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내가 이 옥사(獄事)를 보았다. 도적이 죄를 승복(承服)한 것은 오로지 그 아들의 초사(招辭)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이제 아비를 죽이게 한 죄를 증거하여 이룸으로써 유사(攸司)의 신하를 깊이 책하는 것은 실로 과중하다 하겠다. 인빈(仁嬪)의 묘소(墓所)에서 있었던 일은 사체(事體)가 능침(陵寢)에 비할 수는 없다. 이제 이를 인용하여 예(例)를 삼으면 그들의 마음을 복종(服從)시킬 수 없으니, 경이 이로 인하여 불안(不安)해 하는 것은 또한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6월 5일 갑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6월 6일 을미
남치훈(南致熏)을 헌납(獻納)으로, 윤경교(尹敬敎)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6월 7일 병신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정사(呈辭)하였다. 그것은 지난번의 비지(批旨)에 개납(開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를 놀랍게 여기어 세 번이나 승지(承旨)를 보내 간곡하게 유시하였으나, 남구만이 병(病)을 일컫고 나오지 않았다.
6월 9일 무술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처음으로 《주역(周易)》을 강하였는데, 시강관(侍講官) 신엽(申曅)이 말하기를,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시장(諡狀)이 왔는데, 지금 장관(長官)이 없어서 시호(諡號)를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들으니 고(故) 상신(相臣) 김유(金瑬)와 이후원(李厚源)의 시호를 의논할 때에는 다만 동벽(東壁) 【응교(應敎) 이상을 동벽이라 불렀다.】 으로 의논하여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장관(長官)이 바야흐로 외지(外地)에 나가 있기에 다만 동벽만으로 의논하는 것은 사체로 보아 미안(未安)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의 규칙(規則)이 있으니 장관이 비록 참석하지 않아도 무엇이 해롭겠느냐?"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또 정사(呈辭)하였다. 임금이 세 번이나 도승지(都承旨) 이사명(李師命)을 보내어 유시를 전하고 그와 함께 오게 하였으나, 남구만이 그래도 나오지 아니하였다.
6월 10일 기해
송창(宋昌)을 좌승지(左承旨)로, 이굉(李宏)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이제 형조(刑曹)의 갇혀 있는 죄수들을 보니, 갇혀 있는자가 1백 명이나 된다. 이는 옛사람의 작은 죄를 쇄소(灑掃)하고 세척(洗滌)하여 즉결(卽決)하였던 뜻과 크게 어긋남이 있다. 그래서 흠휼(欽恤)하는 방도(方道)가 없을 수 없으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곧 소결(疏決)하게 하여 심한 더위에 죄수들을 지체(遲滯)시키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끝내 나오지 아니하니, 임금이 그를 위하여 사과(謝過)하고 신여철(申汝哲)과 남용익(南龍翼)을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기를 명하고서야 비로소 나왔다. 맞는다고 말하거나 어긴다고 말하는 것은 당요(唐堯)·우순(虞舜)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임금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더라도 도리어 무엇이 혐의(嫌疑)가 되기에, 자기 차자의 비답을 한 번 보고서는 곧 긴 단자(單子)를 올려서 성내는 뜻이 장독(章牘)에 넘쳤으며, 반드시 임금의 뜻을 꺾고 사과(謝過)한 뒤에야 비로소 나왔으니 그 사람의 사납고 비꼬인 것을 알 수 있다.
6월 11일 경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단하(李端夏)가 《역전(易傳)》에 토를 달아 올리라는 명에 따라 상소를 올려 그 아비와 형의 일을 아뢰었다. 대개 이민서(李敏敍)가 이단하와 더불어 호당(湖堂)058) 에 나가 살면서 토 다는 일을 함께 의논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략에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복거(卜居)할 적에 대과괘(大過卦)에 ‘마른 버들에 싹이 난다’는 글을 얻었는데, 그 전(傳)에 말하기를, ‘강(剛)이 지나친 사람은 중(中)을 얻어 유(柔)를 쓰면 능히 대과의 공(功)을 이룬다’ 하였으며, 대상(大象)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이를 써서 독립(獨立)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세상에 은둔해도 번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신의 아비가 일생동안 마음에 두었던 도리입니다. 그러기에 말년에 선묘조(宣廟朝)의 무사(誣史)를 간정(刊正)하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이는 온 세상이 공정(公正)하다고 모두 일컬어서 대과의 공(功)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대과의 효(爻)의 구삼(九三)에 ‘동(棟)059) 이 흔들리는 것이다’ 한 것과 구오(九五)에 ‘마른 버들에 꽃이 핀다’ 한 것과, 상륙(上六)에 ‘지나치게 물을 건너 머리를 빠뜨린다’ 한 것은 모두 흉(凶)하고 불길(不吉)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의 형(兄) 이면하(李冕夏)가 선부(先父)가 행사(行事)하였던 자취를 따르고 다시는 상도(常道)를 따라 처세(處世)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아니하였기에 병이 나서 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신도 죽은 형의 경우와 마음씀이 또한 같으며 병도 또한 이어서 나고 있습니다. 비로소 대과의 전(傳)을 보니 그에 말하기를, ‘소인(小人)의 소위 대과라 하는 것은 능히 크게 남보다 지나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바로 상도(常道)에 지나치고 이치를 뛰어넘어 위망(危亡)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분에 넘치게 물을 건너려면 머리를 빠뜨리게 되는 것과 같으므로 그 흉함을 알겠다’ 하였습니다. 그 본의(本義)에 말하기를, ‘지나치게 극도의 지위에 처하였으나 재주가 없어서 일을 이루기에 부족하다’ 하였으며, 또 ‘자기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룬다’고 일컬었습니다. 신의 형은 신의 아비의 도리를 체행(體行)하였기에 이렇게 상도에 지나치는 일이 많아서 끝내는 그 생(生)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정전(程傳)과 서로 부합(符合)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마음이 성효(誠孝)에서 나왔으므로 몸을 죽이면서도 변함이 없었으니 또한 본의(本義)와 어찌 서로 부합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곧 동(棟)이 흔들리는 흉함은 그 집을 다시 고치게 하였으나 마른 버들은 꽃을 다시 피울 도리가 없다고 스스로 헤아려 봅니다. 또 선유(先儒)들이 대과괘를 논(論)한 것을 보니 ‘그만한 때가 없으면 지나갈 수 없으며 그만한 때가 있더라도 그만한 재주가 없으면 더욱 지나갈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또 잡괘(雜卦)에 말하기를, ‘대과(大過)는 넘어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인(聖人)이 《역경(易經)》을 지으며 천재(千載) 동안 영험(靈驗)스러운 응감(應感)이 이와 같으니, 어찌 신묘(神妙)하지 않습니까? 신이 또 태괘(泰卦) 단전(彖傳)을 보니, 말하기를, ‘군자(君子)나 소인(小人)이나 독립(獨立)하는데는 붕우(朋友)의 도움을 힘입지 않는 자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만일 독립하다가 넘어지고 꺾이는 도(道)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라면 붕우가 있는 군자의 도(道)를 버리고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벼슬길에 나온 뒤로 경서(經書)는 전적으로 폐하였습니다만, 오직 태괘(泰卦)에 대해서만은 마음에 잊을 수 없어서 언제나 태괘(泰卦)를 익히는 도리로써 당세(當世)의 여러 군자들에게 바랐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의 묵은 병이 더욱 괴롭습니다. 또 표증(表證)이 있어서 목욕(沐浴)을 해야 하므로 목욕을 해보고자 휴가를 얻기를 빕니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엎드려 들으니, 주문(主文)060) 의 신하가 어떤 사람의 집에 간직되어 있는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역전(易傳)》에 현토한 책을 얻었는데 매우 정밀(精密)하게 되었다 합니다. 이 전(傳)을 등사(謄寫)하여 진강(進講)하시면 곧 이 일은 다시 할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나의 뜻을 효유하였다. 그리고 상소의 말이 더욱 간절하니 참으로 서운하다. 아! 경의 나라를 체념(體念)하는 순수한 성심은 내가 자세하게 아는 바이다. 더구나 이제 시사(時事)가 어렵고 위태스러우니 휴척(休戚)061) 의 의리가 어찌 괄시(恝視)를 받겠느냐? 마땅히 전의 유지(有旨)에 따라 그대로 서울 저택(邸宅)에 머물러 있으라. 문성공(文成公) 이이가 현토한 《역전(易傳)》은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찾아 들이게 하라."
하였다.
6월 12일 신축
유지발(柳之發)을 승지(承旨)로, 민진주(閔鎭周)를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6월 13일 임인
달이 남두(南斗)에 들어갔다.
6월 16일 을사
임상원(任相元)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빈(尹彬)을 사간(司諫)으로, 최규서(崔奎瑞)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6월 19일 무신
토성(土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을 침범(侵犯)하였다.
임홍망(任弘望)을 승지(承旨)로, 홍만수(洪萬遂)를 집의(執義)로, 심유(沈攸)를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순창군(淳昌郡)에서 암소가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몸통은 하나에 다리가 여섯이고, 목 위에 군더더기로 다리 하나가 더 생겼고 그 끝이 나뉘어서 발굽이 둘이 되었는데 공중에 매달려 있어 땅에 닿지 않았으니, 변괴(變怪)가 비상(非常)하였다.
6월 20일 기유
황당선(荒唐船)이 서로 이어서 해도(海島)에 출몰(出沒)하고 있는데도 각진(各鎭)의 변장(邊將)들이 이를 조사하여 잡지 못하므로, 하교(下敎)하여 신칙(申飭)하였다.
6월 22일 신해
홍수점(洪受漸)을 지평(持平)으로, 이민서(李敏敍)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6월 24일 계축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남치훈(南致薰)을 집의(執義)로, 이숙(李䎘)을 판윤(判尹)으로, 서종태(徐宗泰)를 교리(校理)로, 이이명(李頤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조종저(趙宗著)를 헌납(獻納)으로 삼았고, 소두산(蘇斗山)은 관질(官秩)을 올려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6월 25일 갑인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다. 홍만수(洪萬遂)를 교리(校理)로, 신익상(申翼相)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숙(李䎘)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오두인(吳斗寅)을 판윤(判尹)으로, 신계화(申啓華)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장령(掌令)의 망단자(望單子)로 전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의 문신(文臣) 중에서 뽑힌 사람을 비의(備擬)하여 들이라."
하니, 판서(判書) 여성제(呂聖齊)와 참판(參判) 임상원(任相元) 등이 복계(覆啓)하기를,
"서북 사람으로서 대각(臺閣)에 합당한 자는 실로 쉽게 얻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공의(公義)가 허락하지 않는 것이므로 쉽게 의망(擬望)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하교는 비록 이와 같지만 아직 비의하여 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문벌(門閥)만을 오로지 숭상(崇尙)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전고(前古)에 있지 않던 폐단이다. 그런데도 해조(該曹)에서 한결같이 방색(防塞)만 하고 있으니, 만일 공의(公議)가 화목하게 귀일되기를 기다리려면 몇 해를 지나야 통청(通淸)하게 될는지 알지 못하겠구나. 근래에 대성(臺省)에 드나드는 자로서 곧은 절조(節操)와 기세등등한 서슬이 서북(西北) 사람보다 뛰어난 자가 열에 한둘도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북(西北) 사람에게만 책임(責任)과 여망(輿望)을 지나치게 중시하는가? 속히 그들을 비의하여 들이라."
하니, 여성제 등이 다시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이와 같아 다시 상의(商議)하였더니 서북(西北) 두 도(道)에는 한두 사람 쓸만한 자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더러 파산(罷散)이거나 계급(階級)이 미치지 못하여 오늘의 정사(政事)에서는 비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이를 담당(擔當)하며 막는 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책문(責問)하자 이에 여성제 등이 황공(惶恐)하여 양현망(楊顯望)을 서용(敍用)할 것으로 비의하여 낙점하였다. 양현망은 평양(平壤) 사람이다. 이른바 계급(階級)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 자는 함흥(咸興) 사람 주택정(朱宅正)이다.
6월 26일 을묘
유성(流星)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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