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축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이 차자를 올려서 장선충(張善冲)을 신구(伸救)하고, 이어서 장선충을 잘못 천거한 일로 인책(引責)하였으니, 이는 일찍이 여러 차례 천거하여 이끌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우악(優渥)한 내용으로 비답하고 위유(慰諭)하였다.
8월 2일 경인
이숙(李䎘)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박세채(朴世采)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이명(李頤命)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대사간(大司諫) 윤경교(尹敬敎)와 정언(正言) 서문유(徐文𥙿)가 또 인피(引避)하면서 장선충(張善冲)을 신구하고 처치(處置)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장선충은 교유(交遊)한 것이 매우 넓어서 그를 신구하는 자가 많았다.
8월 3일 신묘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신정(申晸)이 임금께 아뢰기를,
"대신(大臣)을 체직(遞職)할 적에는 으레 서추(西樞)104) 에 붙였다가 차례를 따라 갈려서 강쇄(降殺)하므로 지금의 원임 대신(原任大臣) 민정중(閔鼎重)과 이상진(李尙眞)을 다 지사(知事)에 붙였습니다. 지사는 이것이 2품인데, 의관(醫官)과 역관(譯官) 등 잡류(雜流)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대신을 처우(處遇)하는 것이 아니며 녹봉(祿俸)도 따라서 강쇄되니,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러하여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이를 변통(變通)하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에게 묻기를,
"나의 뜻에도 이를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 판중추(判中樞)를 더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영돈녕(領敦寧)은 본래 1과(窠)뿐입니다만, 국구(國舅)가 둘이 있을 적에는 또한 더 설치하였습니다. 이로써 말하자면 영중추(領中樞)를 더 설치하여 대신들을 처우(處遇)해야 하지만, 대신은 한두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니, 영중추를 4, 5과(窠)를 더 내는 것도 또한 너무 많은 듯합니다. 서추(西樞)에 보낼 사람이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서 판중추(判中樞)를 더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품(正品)의 녹봉(祿俸)을 받게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副校理) 이이명(李頤命)이 민정중(閔鼎重)의 차자(箚子)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법(法)을 준수(遵守)하려는 의논은 항상 대각(臺閣)에 있으며, 사정을 하소연하는 말은 매양 묘당(廟堂)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신이 대신의 배척을 당하여서는 진실로 감히 스스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어찌 잠자코만 있겠습니까? 적신(賊臣) 이흥립(李興立)은 뒤에 이경립(李景立)으로 이름을 갈았습니다. 그는 폐조(廢朝)105) 때에 군사를 거느리던 신하로서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에 공(功)이 있었던 자입니다. 갑자년106) 의 난리에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臨津)을 차단하는데 군사가 교전(交戰)도 하기 전에 다 무너지고 흩어지므로 이흥립이 편지를 역적(逆賊) 이괄(李适)에게 보내서 그의 군사를 청하여 들였습니다. 그때의 대관(臺官) 및 대신(大臣)과 중신(重臣)들이 그의 죄를 극론(極論)하여서 반적(叛賊)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자결하자 그를 훈적(勳籍)에서 삭제(削除)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국조(國朝)에서는 본래 훈신(勳臣)을 매우 후(厚)하게 대우하여, 대역죄(大逆罪)가 아니면 훈적에서 삭제한 적이 없으므로 장신(張伸)과 김경징(金慶徵) 같은 이도 그 죄가 죽음에 이르렀지마는 이름은 오히려 훈적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훈적에서 삭제하는 법이 이 역적에게만 행해졌고, 다만 계해년107) 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연좌(緣坐)와 적몰(籍沒)의 법을 거행하지 않았던 것뿐이었으나, 지금 세상 사람의 이목(耳目)이 이미 멀어진 후에도 그때 정형(正刑)108)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손(子孫)된 자가 의기 양양하게 감히 조정의 반열(班列)에 출입(出入)하게 되었는데도 뒤따라 이를 당연(當然)하다고 일러야 하겠습니까? 지금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죽어야 할 자가 있기에 유사(有司)가 그를 붙잡아서 죽였다면, 그의 아들된 자로서는 법을 집행한 사람을 비록 원수라고 일컬을 수는 없지마는, 그 일이 지난 뒤에 그의 문에 분주하게 출입하게 되면 이는 어버이를 잊은 것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가 없으니, 어버이를 잊은 것은 곧 명교(名敎)의 죄인입니다. 장신이 죄를 받았을 때에는 장선충은 이미 장성(長成)하였으니 그 때에 논의(論議)되었던 일의 기미가 그의 아비의 생사(生死)에 크게 관계되었던 것을 그가 어찌 듣지 못했고 알지 못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 때에 양사(兩司)에서 율(律)대로 안죄(按罪)하라는 말이 한 달 이상을 지나고서야 정론(停論)되었으며, 옥당(玉堂)의 관원(官員)들이 차자를 올려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청하였으며, 또 정론한 것을 배척하여 끝내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장신의 아들된 자로서 이 집안의 자제(子弟)가 교유(交遊)하여 왕래(往來)하는 것이 다른 집안과 다르게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만일 알지 못하고서 하였다면, 이는 그 아비의 죽음에 전적으로 마음을 쓰지 않은 것이라 하겠고 이를 알고서도 하였다면 이는 과연 부자(父子)간에 차마할 짓이겠습니까? 어버이를 잊고서 명교(名敎)에 죄를 얻었다고 이르더라도 아마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였다. 【옥당의 관원 윤강(尹絳)도 또한 그 가운데 있었다. 장선충이 일찍이 윤지선(尹趾善) 형제의 집에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그를 탄핵한 계문(啓文)에 ‘아비의 원수를 피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이것을 이른 것이다.】 답하기를,
"근자에 여러 신하들의 피사(避辭)를 보니, 장선충이 조용히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 아님은 대개 알겠다. 그런데 경의 계사(啓辭) 가운데의 조어(措語)는 너무 박절(迫切)한 듯하니, 그것이 온당하게 된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8월 4일 임진
금부 도사(禁府都事)가 아비의 시체(屍體)를 불태운 정득춘(鄭得春)을 잡아왔다. 정득춘은 남원(南原) 사람인데 그의 아비가 나병(癩病)으로 죽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 시체를 태우면 자손에게 전염(傳染)되지 않는다’고 하자 정득춘(鄭得春)이 드디어 아비의 시체를 태웠으니, 그의 극도(極度)로 흉악(凶惡)함은 이전에 듣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를 추국(推鞫)하여 정형(正刑)하였다.
8월 5일 계사
신익상(申翼相)를 도승지(都承旨)로, 송규렴(宋奎濂)을 강양 도 관찰사(江襄道觀察使)로, 신계화(申啓華)를 헌납(獻納)으로, 김성적(金盛迪)을 정언(正言)으로, 이돈(李墩)을 부응교(副應敎)로, 서종태(徐宗泰)를 수찬(修撰)으로, 윤덕준(尹德駿)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선(李選)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경교(尹敬敎)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최관(崔寬)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았다. 졸(卒)한 우의정(右議政) 김석주(金錫胄)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민정중(閔鼎重)과 이상진(李尙眞)은 승진시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붙였고, 유상운(柳尙運)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삼았다. 유상운은 호남(湖南)의 한미한 사족(士族)으로 그의 아비가 이명한(李明漢)과 더불어 동서(同婿)가 되었다. 유상운이 처음 과거(科擧)에 올랐을 적에 그의 이종형인 이일상(李一相)·이단상(李端相) 형제가 그를 추천(推薦)하였기에 이를 인하여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여 옥당(玉堂)에 뽑히게 되었다. 뒤에는 김석주의 권세가 무거운 것을 보고 그에게 붙어서 경신년109) 의 경화(更化)하던 날 특별히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니, 이는 김석주의 힘이었다. 후에 조지겸(趙持謙) 무리들이 뜻을 얻어 김석주의 세력이 외로워지자 드디어 김석주를 배반하고 조지겸의 당(黨)에 붙었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의논이 본래 경박하여 대사간이 된 지 여섯 해 만에 마침내 대사헌에게 방해를 받았다. 이 해 여름에 조지겸의 당이 그를 바로 아전(亞銓)110) 에 의망(擬望)하니 물정(物情)이 이를 매우 마땅치 못하게 여기었다. 이때에 장차 신록(新錄)을 행하려 하자 그의 당에서는 반드시 유상운을 부제학으로 삼아야만, 쓰고 버리는 것이 자기들 뜻대로 될 것이라고 여기고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숙(李䎘)을 위협하였다. 이숙은 평소 유상운(柳尙運)을 취하지 않았는데 그의 동생 이익(李翊)이 소론(少論) 무리들에게 밉보여서 탄핵당한 것에 징계되어 억지로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경악(經幄)의 장(長)111) 은 지위와 명망(名望)이 아전(亞銓)보다 더욱 중하기에 온 세상이 크게 놀랐지만, 그의 당여(黨與)가 많고 성하기 때문에 그를 탄핵하는 의논은 일어나지 않았다.
8월 6일 갑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여(李畬)가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위태하고 어지러운 지경으로 달려가는 근심은, 정치의 방법이 확립(確立)되지 못한 것보다 더 깊은 것이 없을 것이요, 조정의 의논들이 조용하지 못한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문치(文治)를 주로 하여 비교하자면 삼대(三代)112) 의 주(周)나라나 후세(後世)의 송(宋)나라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겨서 허위(虛僞)가 날로 증가되어 변폭(邊幅)113) 으로 전례(典禮)를 삼고, 유폐(流弊)114) 를 경법(經法)으로 삼았습니다. 묘당(廟堂)은 전하께서 함께 나라의 일을 도모(圖謀)해야 하는데 진현(進見)하는 데 일정한 날이 있고 인접(引接)하는 데 성례(成例)가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左右)에 이들을 두어 정치(政治)를 깊이 연구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경연(經筵)은 전하께서 함께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하는 곳인데도 다만 문의(文義)에 응(應)하여 수(數)를 채우는 것뿐이어서 마음속을 열어 수작(酬酌)하며 미묘(微妙)하고 심오(深奧)함을 토론(討論)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대각(臺閣)은 전하의 귀와 눈을 붙이는 곳인데도 진부(陳腐)한 말로써 베껴서 아뢰거나 의례(依例)적인 말로써 보고하고 끝낼 뿐 전폐(殿陛)에 서서 가부(可否)를 되풀이해 논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고, 대관(大官)들은 위에서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낼 뿐 심원(深遠)한 장래를 염려(念慮)하여 나라를 자기집처럼 근심하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으며, 소관(小官)들은 아래에서 그럭저럭 되는 대로 지낼 뿐 마음을 다하여 직무(職務)에 종사하고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는 실상이 있음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온갖 법도가 폐해지고 해이해져서 다시는 기강이 없어져서 국가의 큰 혜택(惠澤)은 간사한 이서(吏胥)들의 주머니에 돌아갑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깊은 궁중에 거처하고 높은 곳에서 팔짱만 끼고 있으면서 문득 규도(規度)만을 따르고 차츰차츰 쇠미(衰微)해지는 근원에 이르러서는 일체(一切)를 정리(整理)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이에 혹시 상규(常規)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이 있으면 여러 신하들이 또 의견(意見)을 내어 의심하고 놀라게 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지금의 폐단을 구하는 데 있어서는 형식적으로 미봉하는 것을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그 실상에 나아갈 수가 없을 것이요 번쇄(煩碎)한 것을 덜어버리지 않고서는 그의 간편(簡便)함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원하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편전(便殿)에 납시어서 후설(喉舌)115) 의 신하들로 하여금 좌우(左右)에 출입하면서 일이 생기는 대로 아뢰게 하고 항상 두세 대신들과 더불어 조용하고 편안하게 앉아서 시무(時務)를 강론(講論)하게 하며, 유신(儒臣)들은 아침 저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 경서(經書)의 뜻을 담설(談說)하게 하고, 대신(臺臣)들은 날마다 전상(殿上)에 올라와서 반복(反覆)하여 논주(論奏)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考究)하고 명분과 실상을 종합하여 자세히 밝혀야 하니, 요컨대 실사(實事)로 실효(實効)를 책임지워야 하고 전하께서도 지성(至誠)으로 몸을 가져 힘써 행하고 이를 인도하면 공경(公卿)의 보필(補弼)과 좌우(左右)의 시종신(侍從臣)들이 어찌 감히 다시 당장만 편하려고 게을리하는 습관으로 전하를 받들겠습니까? 대저 그런 뒤에야 전해 내려온 폐해도 조금은 변할 수 있으며 정치의 방법도 조금은 확립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언의(言議)를 중하게 여기기에 조정에 선 자는 강개(慷慨)한 태도로 일을 논하여 탁류(濁流)116) 를 제거하고 청파(淸波)117) 를 일어나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처음 나라를 세운 규모(規模)와 본뜻이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전해 내려온 폐해는 드디어 심심풀이하는 쓸데없는 말이 성행하게 되고 실행(實行)하는 것은 없어지게 되어서 의논만 성하고 정치상의 공적은 무너지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이른바 ‘정치는 떠도는 의논에서 어지러워진다’ 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 폐단이 이미 극도에 이르게 되자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색목(色目)이 비로소 나누어져서 온 세상이 회양(懷襄)118) 하여 임진년119) 의 패전(敗戰)을 순치(馴致)하였었고 혼조(昏朝)120) 에 이르러서는 그 화(禍)가 이미 극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견식이 있는 선비들이 옛부터 내려오던 명목(名目)을 타파(打破)함으로써 함께 대도(大道)로 가기를 말하고 있으니, 마땅히 전철(前轍)을 조금은 징계(懲戒)할 것 같기도 하지마는 돌아다 본다면 지금 분요(紛鬧)한 형세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때보다 도리어 심합니다. 처음에는 의견의 차이(差異)로 인하여 각각 자기의 이기기를 힘써서 서로가 틀어지고 막혀서 세미한 것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되고 작은 것이 쌓여서 큰 것을 이루어 표방(標榜)하는 조목에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는 형편입니다. 신이 지난 겨울에 김환(金煥)의 일로 인하여 절충(折衷)하는 의논을 감히 올렸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또 윤증(尹拯)의 서찰(書札) 사건(事件)으로 인하여 시끄러운 단서(端緖)가 층층(層層)으로 생겨서 장보(章甫)121) 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조정의 분란(紛亂)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편지를 구명(究明)해 보면 바로 뜻없이 망발(妄發)한 것이었으니,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죄를 더하는 것이 진실로 잘못입니다. 그런데 그 어구(語句)가 실착(失錯)된 것은 숨길 수 없는데도 이를 구해(救解)하려는 자들이 반드시 과실(過失)이 없는 곳에 두고자 하여 ‘이이(李珥)가 참으로 과실(過失)이 있었다’고 한 것은 실언(失言)이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선정(先正)이 초년(初年)에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에 출입(出入)하였던 것은 반드시 ‘진지(眞知)’를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산에 들어가 고요하게 앉았다가 그것이 허위(虛僞)임을 환하게 알고 난 뒤에 우리 유도(儒道)에서 도로 구하였으니 그 일은 더욱 특별히 뛰어난 일입니다. 이를 일러 ‘참으로 산에 들어간 과실이 있다’고 하여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말을 한 자가 어찌 선정을 침노하고 모욕(侮辱)하려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뜻이 가리워져서 이에까지 이를 줄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를 일러 ‘사슴을 쫓다가 큰 산을 보지 못한다’ 한 것이니 어찌 한탄스러움을 견디겠습니까? 그 밖의 크고 작은 의논들은 다 서로 과격(過激)한 데서 나온 것이어서 나라의 계책(計策)과 백성들의 근심을 서로 잊어버리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지금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에는 믿을 수 없는 의논을 억눌러 줄이지 않고서는 조정을 화합할 수가 없다고 여깁니다. 이는 다만 전하께서 표준을 세워서 다스리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전하께서 갑(甲)과 을(乙) 저쪽과 이쪽을 가슴에 두지 말고 다만 인재(人才)의 우열(優劣)을 보아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시며, 돈후 질박을 숭상하고 경망 조급을 억누르시며 질직(質直)을 취하고 교식(矯職)을 물리쳐서 등용하고 않는 것이 이미 분명하고 형상(刑賞)이 이미 정당(正當)하면 한두 사람을 쫓아내고 벌주는 데에 지나지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이 징계(懲戒)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경계하는 가르침이 진실로 매우 절실(切實)하니 이를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직산(稷山)의 유학(幼學) 진상한(陳相漢)이 상소하여 직산(稷山)은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탄강(誕降)한 고을이니 인조(仁祖)가 탄강한 해주(海州)와 똑같이 은전(恩典)을 베풀어 복호(復戶)122) 하고 과거(科擧)를 설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정지화(鄭知和)·정재숭(鄭載嵩) 등이 말하기를,
"왕비가 탄강한 고을에 복호하고 과거(科擧)를 설치했던 것은 전례(前例)에 의거할 데가 없고 해주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대왕이 탄강한 곳과는 사체(事體)가 자연히 다르니, 마땅히 이를 끌어다가 예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만일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 낸다면 반드시 직산 한 고을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그 고을 사람이 진달한 상소로 인하여 계고(稽考)할 수 없는 일을 갑자기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므로, 드디어 그만두기를 명하였다.
8월 8일 병신
김재현(金載顯)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10일 무술
정명 공주(貞明公主)가 졸(卒)하였다. 공주는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딸로서 인목 왕후(仁穆王后)가 낳았다. 어려서 인목 왕후를 따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자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下嫁)하여 자손(子孫)이 번성함을 갖추 누렸으며, 수(壽)는 대질(大耋)123) 을 지내고서 마쳤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녹봉(祿俸)은 3년을 기한하여 그대로 주도록 명하였다.
비가 그치지 않아서 장차 농사에 피해(被害)가 있겠기에 기청제(祈晴祭)를 베풀기를 명하였다.
8월 11일 기해
홍수점(洪受漸)을 정언(正言)으로, 신엽(申曅)을 사간(司諫)으로, 이이명(李頤命)을 부교리(副校理)로, 김수항(金壽恒)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김수항을 체차(遞差)하였던 것은 임금의 본의(本意)가 아니었으므로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가 도로 임명한 것이다. 고(故) 상신(相臣) 정철(鄭澈)의 시호(諡號)를 문청(文淸)으로,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의 시호를 정익(貞翼)으로, 판서(判書) 조계원(趙啓遠)의 시호를 충정(忠靖)으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시호를 충무(忠武)로, 청흥군(靑興君) 이중로(李重老)의 시호를 충장(忠壯)으로, 참판(參判) 이신의(李愼儀)의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주부(主簿) 송시영(宋時榮)의 시호를 충현(忠顯)으로 내리었다. 【이 두 사람은 폐모(廢母) 때에 절의(節義)를 세웠으며, 오랑캐의 난리에는 죽음으로 절개를 세워 특별히 시호를 내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수찬(修撰) 김만길(金萬吉)이 상소하기를,
"박신규(朴信圭)가 지난날에 동료(同僚)들의 자리 사이에 있었던 것은 사대부(士大夫)의 예양(禮讓)하는 기풍을 크게 잃었기에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그의 잘못을 힘써 물리쳤으니 사의(辭意)가 엄정하였는데 인입(引入)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문득 나와 공사(供仕)하였으니, 염치(廉耻)의 도리가 땅을 쓴 듯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친제(親祭)하여 조두(俎豆)를 올릴 때 우연히 그것을 떨어뜨렸으니, 이는 비록 고의(故意)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불결(不潔)한 물건을 주워서 그대로 천진(薦進)한 것은 신(神)을 업신여긴 것으로 귀착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승정원(承政院)에 나아가 대죄(待罪)하여 아뢸 때에는 떨어진 것을 주워서 그대로 천진(薦進)하였던 상황은 전혀 없애버리고 숨겨서 사실대로 열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정상(情狀)이 이미 이와 같았는데도 그가 중외(中外)에서 재직(在職)하였을 적에 오로지 억세고 혹독(酷毒)한 것으로 일을 삼아 전후(前後)에 조그만 죄로 사람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기에 관하(管下)의 사람들이 그를 보기를 마치 승냥이와 범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일을 주관(主管)하여 처리하는 재주가 있다고 잘못 알아서, 갑자기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발탁(拔擢)하여 주었습니다. 옛적에도 혹리(酷吏)를 높여서 등용(登用)하였다가 국맥(國脈)을 끊어 잃어버렸던 것을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신은 훗날 나라에 해(害)를 끼칠 자는 반드시 이러한 사람일 것이라고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박신규가 자처(自處)하는 도리는 그다지 모자라거사 손상(損傷)됨이 없었다. 그런데 ‘혹리(酷吏)를 높게 등용한다’ 하고 또 ‘국가에 해(害)를 끼칠 자는 반드시 이러한 사람이다’ 하는 등의 말은 너무나 박절(迫切)하다 하겠다. 사람을 논(論)하는 데는 화평(和平)함을 소중하게 여기니, 이와 같이 심각(深刻)한 의논은 내가 절대로 취하지 아니하겠다."
하고, 이어서 ‘상소에 의논한 것이 심상(尋常)한 것이 아니어서 경계한 것이 절박하니 신하를 부리는데 예(禮)로써 대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박신규를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8월 12일 경자
여성제(呂聖齊)를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일을 잘못하여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위로하는 유시로 답하였다. 전에 남구만이 사명(使命)을 받들어 북경(北京)에 갔을 적에 통역관(通譯官) 장효례(張孝禮)가 회령 개시(會寧開市)로부터 돌아와서 ‘북도(北道)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소가 거의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눈으로 본 상황(狀況)을 돌아와서 아뢰었더니 황제(皇帝) 및 여러 합로(閤老)들이 이를 듣고 모두 염려해 주는 뜻이 있어서 소를 교역(交易)하는 일을 정지해 달라고 청한다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렀을 때에 그 사람이 또 ‘지난해의 개시(開市)에사 가지고 온 소들이 다 우역 때문에 죽었기에 우리들이 본값마저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우역이 이처럼 번지고 있으니 어찌 교역을 정지해 달라고 청하지 아니합니까?’ 하기에, 남구만(南九萬)이 그 말을 믿고 강을 건널 때에 그런 뜻으로 먼저 치계(馳啓)하였었다. 그 뒤에 사은사(謝恩使)의 행차가 주문(奏文)을 지어 보냈다. 예부(禮部)에서 제본(題本)을 보낼 때 사행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충분히 주지 못하였으므로, 제본의 말이 매우 패만(悖慢)하였다. 남구만이 이 때문에 인구(引咎)한 것이다.
8월 15일 계묘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겨우 체직(遞職)되자마자 곧 제수되었다는 것으로 차자를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임금이 효종(孝宗) 때에 고(故) 상신(相臣) 이시백(李時白)과 구인후(具仁垕)에게 도로 정승을 제수하였던 일을 인용(引用)하여 속히 나와 도(道)를 논하라는 일로 힘쓰게 하였다.
사은사(謝恩使) 박필성(朴弼成) 등이 소의 교역을 정지하기를 청한 일 때문에 청(淸)나라에 곤욕(困辱)을 당하였고 예부(禮部)에서 회자(回咨)하지 않았으니, 대개 저나라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 많았는데, 그들의 한없는 욕심을 이미 채워줄 수는 없었고 또 주선(周旋)도 잘하지 못하여 국가에 욕을 끼치게 되었으므로 사신(使臣)들의 행차가 쫓김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황주(黃州)에 들어오자 청나라 사람이 비로소 회자를 의주(義州)에 전하여 보냈으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지금 조선 국왕(朝鮮國王) 모(某)는 황상(皇上)이 진휼하는 높은 은혜를 여러 번 입었으니, 도리상 마땅히 공손하고 삼감을 더욱 더해서 알맞게 보답하기를 힘써 도모하여 일체 사무(事務)를 모두 성례(成例)에 따라야 할 것인데, 이에 소가 우역(牛疫)으로 죽었다고 일컫고는 제본(題本)쓰기를 미루어 핑계하고 있으니, 이는 매우 합당(合當)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장차 조선 국왕 모에게 은(銀) 1만 냥(兩)을 벌금으로 내게 해야 한다."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이 때문에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고 죄를 청하니, 임금이 다시 위로하는 유시로 답하였다.
8월 16일 갑진
사은 상사(謝恩上使) 박필성(朴弼成)과 부사(副使) 윤지선(尹趾善)과 서장관(書狀官) 이선보(李善溥)가 돌아와 홍제원(弘濟院)에 이르러 상소하여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위로하는 유시로 들어오기를 재촉하여 드디어 사대(賜對)하였다. 박필성 등이 죄를 인책(引責)하는 뜻을 간략하게 아뢰고, 이어서 아뢰기를,
"저들 나라의 사정(事情)을 듣건대, 대비 달자(大鼻㺚子)들이 귀순(歸順)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다만 약간의 사람 뿐이고 모두 항복하여 붙은 것은 아니라 합니다. 황제(皇帝)가 황음 무도(荒淫無度)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정령(政令)이 크게 어지러우며 동작(動作)이 무상(無常)하여 순행(巡行)하는 즈음에 구경나오는 여자들을 겁탈(劫奪)하니, 원망하는 소리가 자못 많습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개시(開市)의 소는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 아니라면 예(例)에 따라 들여 보내야 하였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경솔히 믿어서 갑자기 정지하기를 청하였다가 끝내 수욕(羞辱)을 당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일을 헤아려 처리하는데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부(禮部)에서 패만(悖慢)한 말로 우리 국왕을 모욕하고 벌금을 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바로 충신(忠臣) 지사(志士)가 통곡을 해도 시원하지 못할 일이니, 사신된 자는 마땅히 눈물을 뿌리며 정성을 다하여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을 하였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사세(事勢)를 핑계하고 두려워하면서 돌아왔으며, 또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능히 죄를 지고 인책(引責)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게 두세 마디 말로 데면데면하게 인구(引咎)하였으니, 그들의 무식(無識)함이 너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개시(開市)의 소는 대단히 견디기 어려운 폐단이 아니라면 예(例)에 따라 들여 보내야 하였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경솔히 믿어서 갑자기 정지하기를 청하였다가 끝내 수욕(羞辱)을 당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일을 헤아려 처리하는데 자세하게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예부(禮部)에서 패만(悖慢)한 말로 우리 국왕을 모욕하고 벌금을 청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는 바로 충신(忠臣) 지사(志士)가 통곡을 해도 시원하지 못할 일이니, 사신된 자는 마땅히 눈물을 뿌리며 정성을 다하여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을 하였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사세(事勢)를 핑계하고 두려워하면서 돌아왔으며, 또 등대(登對)하였을 때에 능히 죄를 지고 인책(引責)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게 두세 마디 말로 데면데면하게 인구(引咎)하였으니, 그들의 무식(無識)함이 너무 심하다."
대사헌(大司憲)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여 장선충(張善冲)을 신구(伸救)하기를,
"그의 숙부(叔父)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가 항상 훌륭한 자질(子姪)이라고 일컬었으며 또 일찍이 효종(孝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적부터 섬기어 범류(凡流)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장선충이 비록 경의(經義)를 궁구(窮究)하고 수양(修養)을 간직한 무리는 아닙니다만, 재기(才氣)가 노성(老成)하고 언의(言議)가 평정(平正)하여 충성으로 나라에 보답하기를 원하는 것이 더욱 그의 마음에 축적(蓄積)된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그를 논하여 천거한 이유로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경(卿)에게는 특별히 잘못된 것이 없다."
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태손(朴泰遜)이 상소하기를,
"지난날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숙(李䎘)·호조 판서(戶曹判書) 박신규(朴信圭)·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사석(趙師錫)이 상소하고 인입(引入)한 것은 실로 무릅쓰고 일하기 어려운 뜻은 있으나 완강하고 곡진하게 피혐(避嫌)할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전하께서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힘써 반열(班列)에 나오되 손발을 묶고 달리게 하듯 두서없이 행공(行公)하게 하셨으니, 이는 아마도 명철한 임금이 신하를 예우(禮遇)하는 도리에 방해(妨害)됨이 있을 것이며 군주의 강단(剛斷)이 날로 너무 지나치니, 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 합니다."
하니, 논자(論者)들은 말하기를,
"일종의 소론(少論) 무리들이 이숙(李䎘)이 다시 전조(銓曹)를 맡은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박태손(朴泰遜)의 상소 또한 이러한 뜻이 있어서 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 진실로 신하를 부리는데 예(禮)로써 하는 도리를 이해한 것이 있으니 만일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그 뜻을 깊이 살피게 한다면 보익(補益)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신완(申琓)을 승지(承旨)로, 신엽(申曅)을 교리(校理)로, 윤빈(尹彬)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윤빈(尹彬)은 늙어 혼미(昏迷)하고 편벽(偏僻)되며 막혔기에 대직(臺職)에 맞지 않는데도 적당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니, 견식이 있는 사람은 이를 비웃었다.
예조(禮曹)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전라도(全羅道)와 경상도(慶尙道)에서 삭일(朔日)마다 진상(進上)하던 것과 단오(端午)의 납육(臘肉), 통영(統營)에서 특별히 진상하던 물종(物種)은 지난 가을에 양감(量減)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호남(湖南)은 명년(明年) 가을을 기한으로 하여 그대로 양감하여 주고, 영남(嶺南)은 10월 초하루날부터 시작하여 예전대로 회복시켜 봉진(封進)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납육과 통영에서 특별히 진상하던 것 이외에는 명년 가을을 기한으로 하여 아직은 그대로 양감한다."
하였다.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김경(金澋)과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기미년124) 의 역적(逆賊)을 치던 날 고(故) 상신(相臣) 김석주(金錫胄)가 바야흐로 문형(文衡)125) 을 맡았었기에 교서(敎書)를 지어냈는데, 이하진(李夏鎭)은 그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외방에 나가 있음을 틈타서 마음대로 첨가(添加)하였으므로 말이 매우 흠흉하고 참혹하여 예제(禮制)를 의논했던 사람들에게 죄를 얽어서 대역(大逆)의 율(律)에 바로 몰아들이려 하였으니, 그의 설계(設計)한 것이 상변(上變) 무고(誣告)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일 그가 시험을 맡은 이로서 사정(私情)을 따랐던 죄를 논할 것 같으면, 그 수단(手段)이 교활(狡猾)하고 부정(不正)한 길이 다단했던 것에 대하여 국론(國論)이 자자한테, 이러한 것은 이하진(李夏鎭)에 있어서는 두 번째에 속한 일입니다. 다만 그가 임금의 말씀을 제마음대로 고쳐서 사람들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한 것은 얼마나 무거운 죄인데 그에게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죄만을 첨가(添加)하여 귀양보내는 데 그쳤으니, 그에게는 진실로 다행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에 추가(追加)로 용서하여 준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에게 직첩(職牒)을 내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합니다. 전(前) 대사간(大司諫) 심재(沈梓)는 법을 무시하고 사정(私情)을 따라서 쓸데없는 말로 그를 신구(伸救)하였으니, 파직(罷職)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8월 19일 정미
이동명(李東溟)·송창(宋昌)·이세익(李世翊)을 승지(承旨)로, 이징명(李徵明)을 정언(正言)으로, 김만중(金萬重)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조사석(趙師錫)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김경(金澋)과 지평(持平) 민진주(閔鎭周)가 아뢰기를,
"국경(國境) 밖으로 나가는 신하는 나라에 이익이 있으면 이를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 국가에 욕을 끼치지 않게 하여야만 바야흐로 그 직책(職責)을 잘 수행하였다고 이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신(使臣)들의 행차(行次)가 겨우 돌아오자 마자 벌금(罰金)을 내라는 회자(回咨)가 잇따라 왔는데 그 말의 뜻이 너무나 패만(悖慢)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록 늘이고 줄이는 권한은 저들에게 있으므로 기사(機事)가 불순(不順)하였다고 하더라도, 사명(使命)을 받든 사람이 진실로 마음을 다하여 주선하여 그 사이에서 잘 처리하였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사태(事態)가 있게 되었겠습니까? 왕명(王命)을 받들어 나갔던 자가 욕을 당하고 돌아왔으니, 이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의리(義理)로 헤아려 본다면 어찌 감히 그 책임을 도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 사은 정사(謝恩正使) 이하의 사신들을 모두 파직(罷職)을 명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윤허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지금 욕을 당한 것은 그 근본(根本)을 구명(究明)하면 실지로 남구만(南九萬)에게 허물이 있었다. 정미년126) 에 벌금(罰金)을 냈을 때에는 대간(臺諫)들이 바로 허적(許積)에게 죄 주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사신(使臣)만을 논죄(論罪)하고 남구만은 아무 일이 없으니, 또한 세상(世上)이 변했음을 알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역사-사학(史學)
[註 126] 정미년 : 1667 현종 8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지금 욕을 당한 것은 그 근본(根本)을 구명(究明)하면 실지로 남구만(南九萬)에게 허물이 있었다. 정미년126) 에 벌금(罰金)을 냈을 때에는 대간(臺諫)들이 바로 허적(許積)에게 죄 주기를 청하였는데, 지금은 다만 사신(使臣)만을 논죄(論罪)하고 남구만은 아무 일이 없으니, 또한 세상(世上)이 변했음을 알만하다."
화순(和順)의 유학(幼學) 임척(林滌)이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아뢰면서 말이 조정의 의논이 갈라진 폐단에 미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비록 ‘붕당(朋黨)을 나누어 다투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에는 공사(公私) 시비(是非)의 구별이 자연히 있는 것인데, 상소 가운데 양쪽이 다 그르다는 말은 매우 부당(不當)하다."
하였다.
8월 20일 무신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처음으로 정사(呈辭)하였으나,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렸다.
비망기(備忘記)로 이르기를,
"내관(內官) 김삼달(金三達)은 타고난 성품이 위험스럽고 윤리(倫理)가 없어졌으니, 그의 매우 음흉하고 극악(極惡)한 일은 한두 가지로 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패만(悖慢) 망측(罔測)한 말로 공공연하게 입 밖에 내기까지 했으니, 이와 같은 무리는 하루라도 연곡(輦轂)127) 아래에 둘 수가 없다. 제주목(濟州牧)에 전가(全家)를 정배(定配)하여 당일로 압송(押送)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1일 기유
임금이 하교하여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오부(五部)의 방병(坊兵)들을 다 동원(動員)하여 경계(境界)를 분정(分定)하여 송충이[松蟲]를 잡아 없애게 하고 이어서 오부의 관원(官員)에게 엄하게 신칙(申飭)하였다. 이는 대개 수년(數年) 이래로 송충이가 너무나 극성스럽게 번져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에까지 원릉(園陵)128) 과 사묘(私墓)의 다 자란 나무들이 송충이에게 껍질을 먹히지 아니한 것이 없어서 그로 인하여 말라 죽게 되었다. 이는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마다 쓸쓸할 뿐만 아니라 쓸만한 재목들이 모두 그 해(害)를 입었다. 이는 실로 재해(災害)로서 가장 큰 것이니, 어찌 우연히 발생한 것이겠는가? 고려말(高麗末)에도 이런 재해가 있었으므로 견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근심하였다.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숙안 공주방(淑安公主房)의 김해(金海) 땅 언답(堰畓)은 절수(折受)129)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본 고을이 간사한 백성들의 무소(誣訴)함을 듣고 믿어서 면세(免稅)된 전답(田畓)을 마음대로 빼앗아 주는데 매우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은 수본(手本)을 인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상언(上言)을 인하기도 하지만, 그들 다 시행하지 말고 그대로 해궁(該宮)에 소속되게 한 것은 두 차례나 결정하여 준 것인데, 본읍(本邑)의 수령(守令)은 전후(前後)의 판부(判付)를 무시하고 끝내 이를 빼앗아 김연상(金連上) 등에게 주었다 하니, 이 일은 매우 놀랍다. 당해(當該)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먼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 일은 비록 그 곡절(曲折)을 알 수는 없지마는, 미천한 백성들이 궁가(宮家)에 대해서는 자기의 물건이 아닌데다가 궁가(宮家)가 차지해야 하는 것이면 감히 궁가와 더불어 저항하여 서로 다투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군주는 매양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궁가를 치우치게 두호(斗護)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사정(私情)에 마음이 가리기 때문이다. 비록 임금의 영명(英明)함을 가지고도 이를 면치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3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사법-재판(裁判) / 재정-국용(國用) / 역사-사학(史學)
[註 129] 절수(折受) : 종친이나 공신에게 농지 또는 산림의 일부를 떼어주는 것.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 일은 비록 그 곡절(曲折)을 알 수는 없지마는, 미천한 백성들이 궁가(宮家)에 대해서는 자기의 물건이 아닌데다가 궁가(宮家)가 차지해야 하는 것이면 감히 궁가와 더불어 저항하여 서로 다투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군주는 매양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궁가를 치우치게 두호(斗護)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대개 사정(私情)에 마음이 가리기 때문이다. 비록 임금의 영명(英明)함을 가지고도 이를 면치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
8월 22일 경술
부제학(副提學) 유상운(柳尙運) 등이 홍문록(弘文錄)130) 을 만들어서, 조상우(趙相愚)·박세준(朴世𤎱)·강현(姜鋧)·최규서(崔奎瑞)·최석항(崔錫恒)·유명일(兪命一)·이윤수(李允修)·윤세희(尹世喜)·홍수헌(洪受瀗)·송주석(宋疇錫)·김창집(金昌集)·민진주(閔鎭周)·서문유(徐文𥙿)·이징명(李徵明)·박태만(朴泰萬)·김성적(金盛迪) 등 16인을 뽑았다.
8월 23일 신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대관(臺官)들의 의논이 이미 나온 뒤에는 일의 가볍고 무거운 것을 논할 것 없이 거행하지 못하는 것은 옛부터 전하여 오는 규칙입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안치(安置)된 죄인 민희(閔熙)·권대운(權大運)을 양이(量移)하였을 적에 압송(押送)하여 가는 도사(都事)가 길을 떠난 뒤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비로소 도로 거두어 들이라고 발계(發啓)하였는데 대계(臺啓)가 이미 발계된 뒤에는 도사(都事)가 비록 이미 길을 떠났더라도, 의금부(義禁府)에서 마땅히 추환(追還)하라고 입계(入啓)해야 할 것인데, 끝내 이러한 일이 없이 그대로 양이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이미 품계(稟啓)하니 아니하였고 대간(臺諫)들도 또한 이를 규정(糾正)하지 않았으니 근래 조정에서 관종(寬縱)하는 뜻이 너무 승(勝)하여서 악(惡)을 징계(懲戒)하는 형률이 엄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뒤에는 반드시 이를 인용(引用)하여 예(例)를 삼게 될 것이니, 전장(典章)과 기강(紀綱)이 일체 없어져서 국가가 장차 유지(維持)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일은 비록 이미 지나갔지마는 관계되는 것은 작지 아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옳다. 당해(當該)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정언(正言) 이징명(李徵明)이 박유태(朴由泰)를 국문(鞫問)하라고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언(求言)하는 때에 국문(鞫問)하는 것은 미안하다."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는 다만 박유태의 말만 이와 같을 뿐 아니라, 역적(逆賊)의 옥사(獄事)가 있은 뒤에는 사람들이 대개 당론(黨論)으로 의심하는 것이 많으니, 이러한 풍습(風習)은 징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구언한 후에는 반드시 국문할 것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었다. 이징명(李徵明)이 또 김삼달(金三達)에 대하여는 유사(攸司)로 하여금 엄중하게 조사하여 죄를 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를 물은 뒤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8월 24일 임자
함경도(咸鏡道) 진사(進士) 주계(朱棨) 등 96인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무욕(誣辱)을 신변(伸辨)하고, 이어서 윤증(尹拯)과 홍수주(洪受疇)의 무패(誣悖)한 실상과, 최석정(崔錫鼎)·김홍복(金洪福)·심권(沈權)·유상재(柳尙載)·이인환(李寅煥)·이선부(李善溥)·윤이도(尹以道)·한구(韓構)·윤빈(尹彬)·김두명(金斗明)·김세정(金世鼎)·윤덕준(尹德駿)·이돈(李墩)·박태만(朴泰萬)·유성운(柳成運) 등 및 태학(太學)의 유생(儒生) 송징은(宋徵殷)의 무리들이 서로 창화(唱和)하면서 속여서 현란(眩亂)시키는 형상을 극론(極論)하니, 답하기를,
"조어(措語)의 사이에 어떤 데는 타당한 점이 좀 모자라지만, 그들이 자세히 진설(陳說)한 것을 요약한다면 선현(先賢)을 높이고 사론(邪論)을 물리치는 주장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매우 가상(嘉尙)하게 여긴다."
하였다.
8월 25일 계축
이무(李堥)를 승지(承旨)로, 김창집(金昌集)을 지평(持平)으로, 신엽(申曅)을 응교(應敎)로, 신계화(申啓華)를 부교리(副校理)로, 조종저(趙宗著)를 헌납(獻納)으로 엄집(嚴緝)을 사간(司諫)으로 삼았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여(李畬)가 주계(朱棨) 등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자기의 체직(遞職)을 원하였다. 대개 이여도 일찍이 장소(章疏)를 진달(陳達)하기를, ‘윤증(尹拯)이 이이에게 참으로 산에 들어갔던 과실(過失)이 있었다고 하는 편지는 실정이 없는 망발(妄發)이라고 하고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한 죄를 더하고자 한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다. 주계 등의 상소에 ‘본뜻은 그렇지 않다고 핑계한 것은 또한 그의 마음이 가리워지고 빠졌으며, 간사하고 숨기려한 까닭에 불과하다’ 하자 이여가 이 일로 인구(引咎)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윤증이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던 사람으로서 밖으로는 스승과 제자의 구의(舊誼)를 핑계하면서 속으로는 원망하고 한하는 마음을 품어서 장자(長者)를 무욕하기에 기탄없이 방자하였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의 큰 변고(變故)이며 성세(聖世)의 지극한 수치이므로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림(士林)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명확하게 분변하고 엄격하게 배척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창하였던 선정(先正)에 대한 일 한 건은 이는 대개 끌어다가 비유한 것이 차례가 없고 말을 꺼낸 것이 실수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만일 그가 마음을 써서 선현을 무욕했다고 한다면, 이는 결코 그의 본뜻이 아닌데, 윤증을 공격(攻擊)하는 자는 한갓 그를 미워할 줄만 알아서 반드시 일마다 죄를 주려 하고 과실로 생긴 잘못을 용서해야 함은 생각하지 않으며, 또 윤증을 구제하려는 자들은 다만 그의 본뜻이 아닌 것만 알아서 그의 망발(妄發)까지도 두호(斗護)하느라고 말이 선정(先正)에게 미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합니다. 전하께서는 그들의 사이를 절충(折衷)하시어 떠도는 의논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가라앉지 않게 할 것 같으면 조정이 자차 편안하고 고요해질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8월 26일 갑인
이유(李濡)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8월 28일 병진
임금이 숭릉(崇陵)131) 을 배알(拜謁)하였다.
8월 29일 정사
천둥 번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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