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0권, 현종 6년 1665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0.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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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무오

해에 햇무리가 겹쳐졌는데, 좌우에 극(戟)이 있었다. 흰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상의 건강이 좋지 않아 자주 침을 맞으니,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였다.

 

우상 허적이 네 번째 정사하니, 상이 우승지 이천기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2월 2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오시수(吳始壽)를 집의로, 남이성(南二星)을 헌납으로, 정재희(鄭載禧)를 정언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재변을 만나 공구 수성하는 날이라는 이유로 탄일(誕日)에 하례를 올리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우상 허적이 차자를 올려 이무를 석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은 오늘날의 국세가 어떠한 때라고 여기는가? 천재와 시변(時變)이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뜻하지 않게도 음사한 무지개가 태양을 침범하여 마음이 걱정스러움을 형언키 어렵다. 그러니 이 어찌 대신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이겠는가. 더구나 경은 선왕(先王)의 은혜를 받은 것이 얼마인가. 비록 간사한 자의 망령스러운 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소인배에 불과할 뿐이다. 경이 어찌 들어가 국사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아, 이무의 말은 참으로 흉악하다고 할 만하니, 오늘날의 처치는 비단 오늘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뒷날의 무궁한 폐단을 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번 대신의 차자에 대해서도 허락하지 않은 것은 대개 지금 만약 느슨하게 다스리면 이 뒤로는 직무에 전념할 대신이 없을까 해서였다. 뒤폐단으로 논한다면 내린 명령을 고칠 수 없으나 지금 경이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내 마땅히 경의 속마음을 헤아려 그의 죄를 조금 감하겠다. 경도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라가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속히 나와서 치도를 논해 어려움을 구제하라."
하고, 이어서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하늘이 꾸지람을 내림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음사한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이변이 또 중춘(中春)의 달에 일어났습니다. 화의 기미가 나타남이 조석간에 있는 듯하여 인심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의구해 하고, 국세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위태롭습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신들이 직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속히 신들을 면직시키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소서."
하고, 이어 이무의 죄에 대해 먼 변방에 유배까지 시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모두 불가하게 여긴다고 진달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경들이 무슨 잘못한 바가 있겠는가. 다만 수성하는 도가 이미 나에게 있고 보면 서로 협력하는 도리를 경들은 마땅히 스스로 힘써 부박한 논의에 흔들리지 말고 불법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말세의 습속을 참으로 변혁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경들에게 위임하고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경들은 여러 사람의 원망을 개의치 말아야 할 것이다. 아, 우상이 인혐해 들어간 지가 이미 30일이나 되었고 조정이 분열된 것이 아직까지도 진정되지 않았기에 한밤중에 잠 못 이루면서 나도 모르게 베개를 쓰다듬으며 탄식한다. 경들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직하지 말아서 더욱더 덕을 닦기를 힘써 현재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이무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우상에게 내린 비답에서 유시하였다."
하였다.

 

이때 경기 지방에 잇따라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10여 명이나 혹 7, 8명씩 모여 숨어있으면서 재물과 곡식을 약탈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들 마음놓고 살지 못하였다. 이에 감사 김수흥이 장계하기를,
"본도의 도적에 대한 걱정이 이와 같은데 토포사(討捕使)가 치우친 곳에 처해 있어 형세상 금하여 체포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원(水原)·장단(長湍)·양주(楊州)·죽산(竹山)·파주(坡州)·통진(通津)·남양(南陽)과 같은 곳의 고을원은 혹 방어사를 겸임하거나 영장(營將)을 겸임합니다. 지금부터 정식을 만들어 방어사나 영장을 겸임한 수령으로 하여금 책략을 세워 모조리 체포하게 하되, 토포사가 총괄해 살피면서 신칙하게 한다면, 일이 착실해질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장계대로 시행하되, 감사로 하여금 일에 따라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3일 경신

부응교 김만기(金萬基)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요즈음 성상께서 지나치게 노여워하시어 거조가 중도를 잃었고, 견책을 잇따라 내리시어 아랫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없었던 일입니다. 여러 신하들의 쟁변에 그 내용이 이미 대략 갖추어졌습니다. 삼가 보건대, 성상의 생각도 범연한 것이 아니라 대신을 위안시키고 붕당을 타파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방도를 제대로 얻지 못하여서 대신은 더욱더 스스로 편안치 못하고, 붕당 역시 타파할 때가 없을 듯싶습니다.
송시철(宋時喆) 등은 대간의 직을 맡고 있으면서 언로를 염려한데 불과할 뿐이며, 이준구(李俊耉) 등도 승지의 직에 있으면서 잘못된 처사에 대해 다시 아뢴데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일찍이 당파를 비호하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겠습니까. 만약 평온한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그들의 본마음을 살펴본다면 몇몇 신하의 죄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의 밝음이 비추지 못하니, 이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고 붕당을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천재가 한꺼번에 나타나고 기근이 잇따랐으며, 금성(金星)이 낮에 나타나고 음사한 무지개가 해를 침범하였으며,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고 있습니다. 이에 모양을 갖춘 걱정거리와 구제할 길 없는 화가 날마다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두려워하여 삼가면서 한 가지 선정을 행하여 상하의 바람에 답하였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하였다가 죄를 받은 자가 줄지어 늘어섰고 노여움을 마구 발하여 사기가 꺾여졌습니다. 어찌하여 ‘말하면 감히 어기는 사람이 없다’고 한 성인의 경계를 생각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성덕을 확충시켜 여러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여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천리 바깥에서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찌 하늘의 재변을 늦출 수 있는 계책이 없겠으며, 백성들의 원망을 풀 수 있는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걱정스런 마음이 바야흐로 절실하였는데, 지금 진달한 말을 보니 말뜻이 자못 절실하다. 내 가슴속에 담아두고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2월 4일 신유

공산현(公山縣)에 지진이 있었다. 소리가 우레와 같았는데 동쪽에서 남쪽으로 울렸으며, 집이 모두 흔들렸다. 은진(恩津) 등의 고을에도 지진이 있었다.

 

2월 5일 임술

대사간 이경억 등이 아뢰기를,
"시비를 가릴 때에는 사람들마다 각자의 견해가 있는 법입니다. 지난번에 김석주(金錫胄)가 처치에 대해서 이론을 제시한 것은 소견이 마침 그러한 것이었는데 전하께서 사실을 진술한 글에 이쪽저쪽을 가르는 형적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갑자기 파척하였으니, 이 어찌 지나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김석주를 파직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서천(舒川)에서 군사를 동원한 일은 당초에 겸관(兼官)의 보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 본도에서 조사해 아뢴 것을 보니, 승도들이 모여 변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그런 사실이 없었습니다. 과장하여 동요시킨 말이 본 고을의 향소(鄕所)가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잘못 보고한 데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겸관으로 있는 자가 그 죄를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한산 군수 신숭구(申嵩耉)를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으며, 신숭구는 추고하라고만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이 이조 좌랑 홍만용이 잡혀갔다는 이유로 상소하기를,
"당초에 김소(金素)를 승지에 주의한 것은 신인데 물의가 일어남이 여기에서 말미암았으며, 간통(簡通)이 오가는 즈음에 낭관의 뜻을 굳이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한 것도 신이니, 그 근원을 따져보면 죄가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2월 6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강호(姜鎬)·이동명(李東溟)을 장령으로, 홍전(洪瑑)을 우윤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응교로, 김우석(金禹錫)을 발탁해서 동부승지로 삼았다.

 

충청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상소하기를,
"호남은 당초에 13두로 정식을 삼았으므로 포 1필당 절미(折米)가 6두 5승이고, 호서는 10두로 정식을 삼았으므로 포 1필당 절미가 5두입니다. 이것이 당초에 가격을 환산하였던 정수입니다. 그 뒤에 호남은 절미를 1두를 더 주었는데도 백성들이 포목을 무역하기를 어렵게 여겨 본도에서 민간의 폐해에 대해 아뢰자 또 5승을 더해주었으니, 이것은 호남의 가포(價布)가 당초에 정한 것에 10분의 2를 더해 준 것에다가 또 2승을 더해 준 것입니다. 호서에서도 포목을 무역하기 어려움이 호남과 다름없는데도 가격을 환산한 숫자는 더해준 것이 없습니다. 백성들의 바람이나 신이 청한 것은 본래의 숫자에다 10분의 2를 더해 주어 6두로 가격을 환산해 주기를 바란 데 불과할 뿐입니다. 애당초 어찌 호남에 맞추어서 8두로 환산해 주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신이 전에 아뢰면서 단지 헤아려서 더해 주기만을 청하고 숫자가 얼마이니 몇 두로 해 달라고 청하지 않은 것은 대개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묘당에서 저지되었으니, 이것은 신의 잘못입니다. 신의 이 상소를 다시 비국에 내려서 충분히 강구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감사가 전에 이미 계청하였는데, 지금 또 상소를 올려 진달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위를 덜어내어 아래를 보태주자는 아름다운 뜻에서 나왔지만, 쌀을 줄여준 뒤에 대동법(大同法)이 방해를 받아 시행되지 못한다면 보태주려다가 도리어 손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상소의 내용을 시행하기가 곤란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이정영(李正英)이 장계하기를,
"일찍이 어사 민유중의 장계로 인하여 이동(梨洞)과 종포(從浦)를 합해 한 진(鎭)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편리 여부를 두 진에 물으니, 종포의 토병(土兵)들이 말하기를 ‘이동은 토질이 척박하여 살기가 어렵다. 토질이 비옥한 종포를 버려두고 토질이 척박하고 잔약한 보(堡)로 이속한다면, 몹시 답답하다.’고 하였으며, 이동 역시 다른 보에 속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같으나 형세상 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일을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백성들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지금은 우선 전대로 두 진을 두되, 이동은 상사(上司)에서 분정(分定)한 물품을 특별히 정파하여 완전히 회복되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2월 7일 갑자

정언 윤변(尹抃)이, 홍양(洪陽)의 관적(官糴)에 대한 일로 현재 조사받고 있다고 하여 인피하자, 체차하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재이를 이유로 면직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재변을 만난 처음에는 성상께서 마음을 가다듬으셨으나 날짜가 오래됨에 미쳐서는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아, 신이 일찍이 당초의 마음을 항상 보존하라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는 것이 실로 하기 어렵기는 하나, 상께서 다시금 면려하시어 조금도 해이되지 않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두들 처음에는 마음을 굳게 먹으나 끝까지 잘 해내는 자는 드물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수항이 서계로 품의해 정한 뒤에 또 상소하였는데, 북병사(北兵使)에 대한 일로 누누이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의논해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난번에 품의하여 정할 때 상께서 무신(武臣)에 대해 하문하시고 문신과 무신을 교대로 차임하도록 하시었는데, 김수항의 말이 이와 같으니 문신을 차임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순변사(巡邊使)라 칭하여서 차임해 보내야 하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한 다음에야 감사에게 제압을 받지 않아 지역을 통괄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렇게 인재가 부족할 때 어떻게 사람을 가려 뽑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진(城津) 행영(行營)에 대한 일도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행영은 옮겨 설치할 수 있으나 북병사를 문신으로 차임해 보내는 것은 시행하기 곤란하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반드시 옮겨 설치할 필요는 없고 감사로 하여금 길주(吉州)의 객사(客舍)에 가서 있게 하면 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을이 지난 뒤에 가서 있게 하는 것이 좋다. 감사로 하여금 백성들의 실정을 살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유혁연(柳赫然)이 무인이 부족하다고 극력 진달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과거를 베푼다면 무재인(武才人)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거조는 비록 하찮은 일에 관계된 것이라도 재빨리 고친다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볼 것입니다. 지난번에 신이 진달한 최우(崔𦸲)에 대한 일은 당초에 영상이 진달하였습니다. 어찌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신과 우상이 반복해서 진달하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최우가 세 차례 형신을 받고서 끝내 정배(定配)되었는데, 최우의 딸은 다시 궁중에 들이도록 명하였다고 합니다. 이미 아비가 죄를 받았는데 그 딸을 도로 들였으니, 어찌 성스러운 덕에 허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로 인해서가 아니라 사세상 껄끄러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요즈음 나인의 일로 외간에 말이 많습니다. 신의 한 마디 말로 인해서 모두 중하게 죄를 받고 그 딸은 도로 들이도록 명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불안함은 말할 것이 없겠으나 성스러운 덕에 얼마나 누가 되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들은 바가 있더라도 신이 무슨 얼굴로 다시 아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용히 여쭈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다섯 번째 사직장을 올리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2월 8일 을축

이홍연(李弘淵)을 좌승지로, 이성징(李星徵)을 동부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를 인견하였다. 판의금 홍중보가 죄인에 대한 문서를 가지고 차례로 읽자, 상이 대신들과 상의하여 죄를 정하였다. 유후(柳厚)·박형(朴泂)·송계종(宋繼宗)·유정식(劉廷式)·이온(李溫)은 그대로 가두고, 이경면(李慶綿)·박지성(朴之聲)·서정리(徐正履)·정지호(鄭之虎)·이송노(李松老)·김하량(金廈樑)·유제(柳璾)·김숭건(金崇健)은 도년 정배(徒年定配)하고, 임익하(任翊夏)·유진삼(柳晋三)·김원위(金元瑋)는 삭직한 다음 풀어주고, 김찬선(金纘先)·방계남(方繼男)은 파직한 다음 풀어주었다. 홍중보가 또 홍만용(洪萬容)의 공사(供辭)에 대해 아뢰기를,
"본부(本府)에서 의논해 아뢴 가운데에 붓을 던졌다는 조항으로 처결하고자 합니다."
하니, 홍명하가 아뢰기를,
"이조의 규례는 당상과 낭청이 모든 것을 상의하는데, 낭청이 고집할 경우 당상이 마음대로 주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옛 관례입니다. 이번의 경우에는 참판과 참의가 다시 상의하기로 이미 말하였는데 붓을 던지기까지 한 것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사를 처리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에 불과하니, 어찌 깊이 죄줄 것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판과 참의가 새로 벼슬에 올리고자 하여 서로 버티었다면 비록 붓을 던졌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다. 이것은 다시 상의하고자 한 것이었는데 지레 일어나 나갔으니, 어찌 얄밉지 않은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들 역시 일찍이 전조의 낭관으로 있었는데, 이조의 규례는 예전부터 이와 같았습니다. 대개 이조의 낭관은 다른 관서와는 달리 반드시 가부를 논의하므로 주의할 즈음에 낭관의 뜻이 맞지 않으면 반드시 쟁집하고야 맙니다. 홍만용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간 것이 참으로 온당치 않기는 하나, 이상진(李尙眞)이 끝까지 듣지 않은 것도 역시 잘못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홍만용은 파직하고 풀어주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이익한(李翊漢)과 양일한(楊逸漢)의 공사(供辭)에 대해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이익한과 양일한은 죄가 같은데 형신하기를 똑같이 청하지 않으니, 내 참으로 이상하게 여긴다. 이익한도 형추하여 사실을 캐내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장릉 참봉(章陵參奉) 이견(李堅)의 공사(公事)로 아뢰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능관(陵官) 무리들이 죄를 받은 자가 몹시 많은데, 그 중에는 혹 원통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자, 홍중보가 아뢰기를,
"이견은 다시 조사할 일이 없습니다. 다른 능관의 예에 의거하여 똑같이 조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광릉 참봉(光陵參奉) 두 사람은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정배하고 이전 도안(徒案) 가운데에서 부표(付標)를 고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상진이 전에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상소하여 어사를 파견하여 주사(舟師)를 순시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요즈음 어사를 뽑는 일이 있는데, 겸하여 순시하게 한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어사를 보내고자 하니 합당한 사람을 다시 뽑아 들이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시(庭試)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방의 초시도 설행할 것인가? 이미 무과를 베풀었으니 문과도 함께 베풀어야 한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무과 초시의 인원수는 1천 명을 서울과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되, 반드시 강경(講經) 시험을 본 다음에야 인재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조 판서 이상진이 상소하기를,
"삼가 장관(長官)의 상소와 낭관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일을 그르친 잘못을 모두 신에게 돌렸으니, 신은 참으로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소(金素)는 인조조에 재주가 있다고 발탁되어 크고 번잡한 고을의 방백과 곤수(閫帥)를 두루 거쳤으며, 승지가 된 것도 30년 가까이 됩니다. 을미년 여름에 신이 처음으로 정원의 직에 있으면서 그와 함께 있었는데, 그의 사람됨을 보니 질박하고 꾸밈이 없어 마음속으로 그의 장점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듣건대, 서필원(徐必遠)이 전조의 낭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수령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 후에 김소가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고 서필원이 전라 감사로 있으면서는 그의 치적을 칭찬하여 전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이 그의 집이 몹시 가난하다고 듣고는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여겼으며, 그가 판결사(判決事)가 되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잘 처리한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신은 생각하기를 ‘예전의 비방은 이미 밝히기 어렵게 되었고 직책에 알맞은다는 명망이 새롭게 드러난 셈이다. 지금같이 인재가 부족한 때 사람을 쓰는 도리에 있어서 지나치게 국한시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대정(大政) 때 신이 다시 통망(通望)하자는 논의를 먼저 꺼냈는데, 물의가 준엄하게 일어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낭관이 쟁집한 것은 원래 통망하느냐 막느냐 하는 중대한 일에 관계되고 신이 고집한 것은 사체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조용히 의논해 처리하되 언제 처리해도 무방합니다. 사체로 헤아려 볼 때, 낭관이 반드시 자기 뜻대로 하고 당상이 고개를 숙이고 명에 따라 주어서는 안될 듯하였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자연 날이 저물었는데도 개정(開政)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미 무단히 파하고 나갈 수가 없고 또한 바깥에 나가있는 낭관을 사사로이 부를 수도 없었으니 계사를 올리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의 망령된 잘못으로 인하여 예전 규례를 보전해 공의를 따르지 못하여 정사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뒤폐단을 열어놓았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아주 큽니다. 속히 신의 직을 파직하여 물의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은 잘못한 바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참의 이경휘(李慶徽)도 상소하여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 직무를 보라."
하였다.

 

대신이 이익상(李翊相)·오두인(吳斗寅)·조성보(趙聖輔)·이규령(李奎齡)·심재(沈梓) 등이 어사로 합당하다고 뽑아 들였다.

 

2월 10일 정묘

대사간 이경억, 정언 정재희가 아뢰기를,
"제주 판관(濟州判官) 정숙주(鄭叔周), 황주 판관(黃州判官) 김시휘(金時輝)는 모두 직임에 합당치 않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사가 전계(前啓)한 송시철·이준구·이정·김석주에 대한 일을 정계하였다.

 

충청도에 여역이 몹시 치성하였다.

 

2월 11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강유(姜瑜)를 좌부승지로, 심황(沈榥)을 동부승지로, 이시술(李時術)을 형조 참의로 삼았다.

 

밤 3경에 유성이 자미 서원(紫微西垣) 안에서 나와 건방(乾方) 하늘가로 들어갔다. 파루(罷漏) 때 혜성이 위수(危宿) 3도(度)에 나타났다.

 

한산 군수(韓山郡守) 신숭구(申嵩耉)를 파직하였다. 간원이 여러 차례 아뢰자 이때 와서 따른 것이다.

 

2월 12일 기사

병조가 정시(庭試)의 무과 초시에 대해 계청하자, 3월 11일로 날짜를 정해 행하되, 1천 명의 정원을 서울과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라고 분부하였다. 다음날 병조 판서 홍중보가 다시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대신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1천 명은 숫자가 몹시 적다 합니다. 1천 명을 외방에 나누어 배정하고 서울은 별도로 숫자를 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면 양호(兩湖)는 각각 2백 인을 뽑고 경상도는 2백 40인을 뽑고, 양서(兩西)는 각각 1백 인을 뽑고, 강원도와 함경도는 각각 80인을 뽑으며 서울은 경기와 합하여 5백 인을 뽑으라."
하였다.

 

우윤 홍전이 죽었다. 홍전은 언행을 조심하지 않아 청의(淸議)에 버림받았다. 역적 김자점(金自點)에게 아부하여 의주 부윤과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으며, 이로 인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다.

 

2월 13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준한(李俊漢)을 경상 우병사로, 김만기(金萬基)를 사인으로, 장선징(張善瀓)을 수찬으로, 민유중(閔維重)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2월 14일 신미

우의정 허적이 11번째 정사하니,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전라 감사 정만화(鄭萬和)가 장계하기를,
"본도의 순천(順天) 등 다섯 고을 수령의 임기는 모두 풍토병을 이유로 3년으로 줄이도록 하였는데, 낙안(樂安)·곡성(谷城) 두 고을만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순천 등의 예에 의하여 임기를 줄여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황해 감사 서필원(徐必遠)이 치계하기를,
"해주(海州) 기병과 보병 및 사복 제원(司僕諸員)의 전해 내려온 묵은 포목이 모두 45동(同) 남짓한데, 지정하여 받아들일 곳이 없어 해마다 불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만약 모두 탕감하고 충정(充定)하지 못한 것은 비국에서 정한 바에 따라 매년 60명씩 충정한다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숫자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의해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사안을 병조에 내렸다. 병조가 회계하기를,
"장계의 내용대로 탕감하고 빠진 액수는 3년을 기한으로 하여 충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17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8일 을해

이일상(李一相)을 좌참찬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교리로, 이상일(李尙逸)을 호조 참의로, 정치화(鄭致和)를 예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홍명하, 병조 참판 유혁연을 인견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공무목(公貿木)에 대한 일은, 차왜(差倭)가 이 때문에 아직도 가지 않고 있으므로 속히 품의해 정하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국의 뜻은 허락하려는 것인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미(作米)를 2 두로 줄이면 햇수를 한정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고 2두를 감하지 않으면 햇수를 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한 방식으로 허락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말하면 반드시 따를 것이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2두는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가 만약 1두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면 우리도 햇수를 한정하여 주고 2두를 줄이는 것을 허락하면 햇수를 한정하지 않고 주고, 줄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도 작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등의 세 가지 조항을 가지고 동래 부사를 시켜 개유하게 하라. 동래 부사에게 다른 소견이 있으면 다시 치계하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공작미(公作米)를 허락하지 않으면 그가 반드시 공목(公木)을 복구하자는 말을 할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납(正鑞)에 대한 일을 말하면 어떻겠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렇게 하면 그를 설득할 수 없으며, 공목을 복구하면 몹시 곤란합니다. 그가 우리 나라의 시가(市價)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1년에 1만 6천 석이나 주면서 배에 싣고 가게 하니 사체가 몹시 한심스럽습니다. 당초에 왜 이렇게 길을 틔워놓았는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심(柳淰)이 있을 때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하니, 이성징(李星徵)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그 때 왜인이 2만 금(金)을 가지고 와서 쌀을 무역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부득이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그대로 포목으로 쌀을 무역하도록 한 것이 드디어 규례가 되었는데, 해읍(海邑)은 편하게 여기나 육읍(陸邑)은 몹시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인재를 양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요즈음 사람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대사성을 오랫동안 차출하지 못해 성균관이 비어 있으니, 일이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속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정사에서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2월 20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성주(星州)의 아전 장원일(張元一)을 효시하였다. 장원일이 일찍이 성주의 병리(兵吏)로 있으면서 군포(軍布)를 훔쳐냈는데 이상진(李尙眞)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가두고서 조사하여 감사(減死)하여 길주(吉州)에 전가 정배(全家定配)하였다. 그런데 장원일이 배소로 가지 않고 서울에 숨어 있으면서 그의 형을 시켜 격쟁(擊錚)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게 하였다. 이상진이 이 사실을 듣고는 드디어 상소하여 그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형조에서 장원일을 체포하자, 상이 곧장 효시하고자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형추(刑推)하고 계복(啓覆)하여 율에 따라 처결하기를 청하니, 형조에 명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형조에서 14차례나 엄하게 형신하자 비로소 승복하니, 효시하도록 명한 것이다. 성주 목사 이동로(李東老)가 이에 연루되어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2월 21일 무인

햇무리가 졌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우석(金禹錫)을 동부승지로, 정륜(鄭錀)을 헌납으로, 남이성(南二星)을 교리로, 신유(申濡)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관상감의 관원을 옥에 내리고 곤장을 친 다음 이어 직임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혜성이 다시 나타난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일관(日官)이 즉시 정원에 알리지 않았다. 이에 정원이 추고하기를 계청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성신(星辰)을 살펴보는 일은 참으로 중대하다. 그런데 지금 관상감의 측후관이 직무를 제대로 거행하지 않아 요성(妖星)이 또다시 나타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즉시 측후하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성대해진 뒤인 지금에서야 비로소 계문하였으니, 태만하여 직무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꼴이 참으로 몹시 통분스럽다. 오늘 입직한 관상감 관원을 모두 다 유사로 하여금 가두고서 엄하게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관상감에 측후할 관원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다 곤장을 치고 그대로 전과 같이 직무를 보게 하였다.

 

우의정 허적이 18번째 정사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하늘의 노여움이 갈수록 심해져 재변이 더욱 혹독해지니, 나의 걱정스런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같은 때를 당해서는 군신 상하가 마음과 힘을 합하더라도 위태로움을 구제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점을 생각지 않고 한결같이 인피하여 들어가기만 하니, 경은 국사를 까맣게 잊은 것은 아닌가? 속히 정사하는 것을 중지하여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기를,
"요즈음 재변이 겹쳐 나타나 혜성이 하늘에 떠있다가 해를 넘기고 사라졌으니, 전하를 아끼는 하늘이 전하께 경계를 보임이 가이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수를 줄였으며, 구언(求言)하는 전지를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허물을 듣고자 하심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진언하는 자가 없으니, 감언(敢言)하는 길이 막히고 강직한 기풍이 꺾여져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전하께서는 무엇을 통해 허물을 듣고 전하를 경계하는 하늘에 답하겠습니까. 신이 초야에 있으면서 스스로 생각해 보니, 현재 감언하는 길이 막히고 강직한 기풍이 사라진 것은, 전 참의 윤선도(尹宣道)가 귀양간 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신하가 진언함에 있어서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뜻을 거스르는 것을 피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자는 망령된 사람이 아니면 이는 반드시 과감한 선비입니다. 그리고, 임금이 말을 들어줌에 있어서 지나친 말을 하여도 노여워하지 않고 광망스러워도 죄주지 않으면서 반드시 관대하게 대해주고 포용해 주는 것은, 강직한 기풍을 배양해 바른말을 하는 길을 열어주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옛 성인들이 사람 때문에는 말을 폐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신이 삼가 윤선도가 예에 대해 논한 상소를 보건대, 그 생각과 말이 참으로 지나친 것이 많았으니, 윤선도는 참으로 망령되이 말한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 옳다고 하는 예제(禮制)를 윤선도 혼자 그르다고 하고,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떠받드는 유현(儒賢)을 윤선도 혼자 그르다고 하였으니, 광망스러운 것은 죄주어야 하나 감히 말한 것은 용서해야 합니다. 예전에 연 소왕(燕昭王)이 죽은 말을 사들이자 호걸스런 선비들이 다투어 모여들었으며, 월왕 구천(句踐)이 사마귀에게 절하자 절의있는 선비들이 죽음을 다투었습니다. 물(物)은 서로 감통하는 법이며 일은 서로 맞아들어가는 법으로, 이로 인하여 저것과 감통하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윤선도가 상소를 올리던 날 전하께서 이 점에 생각이 미치시어 윤선도가 망언한 죄를 특별히 용서하여 곧은 선비가 감언하는 길을 열었다면, 또한 일개 윤선도의 망언한 죄가 용서됨으로 인하여 날카롭고도 올바른 말이 지금 이 구언하는 날에 다투어 나왔을 줄도 모를 일입니다. 윤선도가 한번 북쪽 변방으로 귀양간 뒤에는 감언하는 선비들이 서로 다투어 입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록 하늘이 재변을 내려 경계를 보임에 성상께서 구언함이 간절하나, 한 사람도 거리낌없이 감언하여 전하로 하여금 허물을 듣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일개 망언한 윤선도를 내쳤다가 감언하는 길을 막은 것이 애석합니다.
신이 듣건대, 윤선도는 나이가 80이 넘었다고 합니다. 흰머리의 얼마남지 않은 목숨이 풍상에 시달리고 인적이 끊어진 곳에 오랫동안 귀양가 6년이나 위리 안치되어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입니다. 가령 윤선도로 하여금 끝내 변방에서 죽게 한다면, 망언하였다가 변방에서 죽는 것이 윤선도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마땅하나, 윤선도로 인해서 언로가 막히는 것을 신은 전하를 위하여 두렵게 여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윤선도를 방환시키도록 명하여 오늘날 입다물고 있는 선비들로 하여금 윤선도가 반드시 죽어야할 죄를 짓고서도 방환되는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다투어 전하 앞에 와서 곧은 말을 아뢰어 전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하소서. 그러면 전하의 허물을 듣고서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유성(流星)이 자미 서원(紫薇西垣) 안에서 나왔다.

 

2월 22일 기묘

남이성(南二星)·여성제(呂聖齊)·심재(沈梓)·윤심(尹深)을 측후관으로 삼았다. 혜성이 다시 나타났는데, 영관상감사 정태화가 아뢰기를,
"혜성을 측후하는 것을 본감의 관원에게만 맡겨둘 수 없습니다. 전례대로 가려뽑아 이 네 사람을 측후하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정원이, 요성(妖星)이 겨우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이유로 진계(進戒)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 응답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것으로 하고 형식적인 것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한갓 형식만을 일삼고 실제가 없으면서 재변을 돌이켜 상서로 만든 경우는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능히 덕을 닦기를 힘쓰고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며, 하늘을 섬김에 경외하는 도리를 다하고 자신을 책함에 수성(修省)하는 실제를 다하며, 신료를 대함에 있어서 미더웁게 교제하는 실제를 다하고 언로를 넓힘에 있어서 마음 비우고 받아들이는 실제를 다하며, 백성의 고통을 돌보되 어루만져 주는 실제를 다하고 정령(政令)을 펴되 진작시키는 실제를 다하여, 한 생각 한 가지 일이라도 모두 성실에서 나오게 한다면 아래에서 인사(人事)를 다하였으니 위에서 하늘이 마음을 돌이킬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밤낮없이 정무에 부지런하시어 조금도 나태하게 하지 말아, 국운이 영원하기를 하늘에 기원하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이 실로 나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떨리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지금 계사를 보니 말뜻이 정성스럽고도 간절하다. 유념하겠다."
하였다.

 

상이 성변(星變)을 이유로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였으며, 정전을 피하고 반찬 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폐하였다.

 

혜성이 동쪽의 탁한 기운 안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2월 23일 경진

우창적(禹昌績)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와 좌상 홍명하가 재변이 겹쳐 일어났다는 이유로 사면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재변을 해소시킬 방책에 대하여 모름지기 상하가 강구하여 그 방도를 다한 다음에야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산강(龍山江) 물이 단류(斷流)되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습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강 여울 깊은 곳도 한 자가 못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단류된 것 같았다고 합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지난날 혜성이 처음 나타났을 때에는 상하가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오래 지난 뒤에는 점차 해이해졌습니다. 이제 만약 전의 습관을 답습한다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좌명이 아뢰기를,
"이른바 수성(修省)이란 것은 정령을 베푸는 사이에서 구하여 새롭게 고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는 한갓 수성한다는 이름만 있고 그 실제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승지와 대간들이 쟁집하고 있는 이무에 대한 일은 규례에 따라 하는 말에 불과합니다. 지금 만약 특별히 서용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무릇 대간의 논의는 차라리 과격한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지나친 말을 하였다 하여 죄를 주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정원이 복역(覆逆)한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 비망기에서 당파를 비호한 죄라고 말하였으니 무슨 복역할 일이 있겠는가."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듣건대, 그때의 논의가 서필원이 영상을 논했는데도 죄가 파직에만 그쳤으니 이무에 대한 벌도 여기에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대간이 환수하기를 청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필원의 말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말이나 이것은 재상이 적임자가 아니라고까지 하였으니, 몹시 가증스럽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조종조부터 혜성의 변을 만났을 경우에는 반드시 심리(審理)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가하다고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회양(淮陽)은 철령(鐵嶺)의 관방(關防)인데 남한 산성에 속해 있습니다. 만약 사별이 있으면 본진과의 거리가 멀어 왕래하는 데 5, 6 일이나 걸려 형세상 반드시 대처하지 못할 것입니다. 회양을 별도로 한 진으로 만들어 금성(金城)의 군병을 통할하게 해, 그들로 하여금 철령을 방어하게 하고, 철원(鐵原)은 남한 산성과 가까우니 철원의 겸영장(兼營將)으로 남한 산성에 속하게 하면 편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대각 신하들에 대한 일을 두 상신이 이렇게까지 청하는데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의 말도 흔쾌히 따르지 않으시니 어떻게 수성(修省)의 도리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말을 믿지 않으시니 대각 신하들이 한 마디를 말하여 성상께서 깨닫기를 감히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로 인하여 언로가 열린다면 고신(告身)을 빼앗고 파직한 것에 대해 무슨 아낄 게 있겠는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모두 서용하라."
하였다. 이경억이 아뢰기를,
"하늘의 변고가 백성들이 원망하는 데서 생기는데 현재 백성들의 원망이 몹시 심합니다. 양주(楊州)에서 양전(量田)한 한 가지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초에 양주의 양전이 유독 무거웠으므로 옥당이 다시 양전할 것을 청하였는데, 영이 내린 후에 해조에서 원수(元數)를 줄이지 않고 그 가운데서 이리저리 옮겨붙여 균등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원수(元數)를 줄이지 않으면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조에서는 도리어 ‘백성들이 처음에는 다시 양전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은 하려고 하지 않으니, 몹시 가증스럽다.’고 하면서, 이런 내용으로 회계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본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채 이런 불신받을 일을 하였으니, 일은 비록 미세하나 민심을 잃는 것은 큽니다. 원수를 정하지 말고 모두 다시 양전하여 원통해 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
하니, 상이 따랐다. 교리 박세당(朴世堂)이 아뢰기를,
"수성하는 도리에 대해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이미 다 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일이 없다면 이것이 어찌 수성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에도 이와 같았는데 끝내 한 가지 일도 한 것이 없었으므로 내가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하자, 박세당이 아뢰기를,
"성상이 마음을 잡느냐 놓느냐 하는 것이 바로 흥망의 기틀입니다. 한갓 부끄러워만 할 뿐이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황해도에 여역이 몹시 성하였다.

 

2월 24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혜성이 실수(室宿) 6도로 옮겨갔다.

 

2월 25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금부·형조 당상, 삼사의 관원을 양심합(養心閤)에서 인견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였다. 상이 판의금 홍중보(洪重普)로 하여금 죄인의 추안(推案)을 읽게 하였다. 이익한(李翊漢)·양일한(楊逸漢)의 일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
"이 율이 어떠한가?"
하니, 홍중보가 아뢰기를,
"《대명률》에, 초적(草賊)이 일어났는데 보고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킨 자는 장 1백(杖一百)에 변원 충군(邊遠充軍)합니다."
하고, 대사헌 박장원이 아뢰기를,
"듣건대, 호서 사람들은 모두 ‘한 번 승변(僧變)을 만나자 감사가 잡혀갔으니, 조정의 처분이 전도되었다.’고 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이 때문에 충군된다면 듣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상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 이경억이 아뢰기를,
"이익한은 감사로 있으면서 온 도를 전제(專制)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대로 발군하였다는 이유로 죄를 받는다면 뒷날에 혹시라도 사변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감히 발군하지 않을 것입니다. 뒤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시라도 사변이 있을 경우에는 먼저 발군하고 뒤에 아뢰는 것이 옳다. 이익한의 경우는 끝내 계문하지 않아 병사가 치계한 다음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들었으니, 어찌 놀랍지 않은가."
하고, 모두 율문대로 변원 충군하라고 명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익한 등에 관한 일은 참으로 이경억이 말한 바와 같이 뒤폐단에 관계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배(定配)로 고치라."
하였다. 홍중보가 또 외방에 정배한 죄인의 추안을 아뢰자, 이세화(李世華) 등 4인을 감등(減等)하여 도년(徒年)으로 하고, 그 나머지 죄인 46인을 풀어주었다. 또 윤선도의 일에 대해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윤선도는 상소 안의 말이 몹시 흉악하여 죄가 참으로 중하나, 선조에서 사부로써 예우함이 몹시 융성하였으며, 또 나이도 70이 넘었는데, 삼수(三水)에서 죽게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영부사 이경석이 아뢰기를,
"듣건대, 나이가 80이 다 되었다고 하며, 또 사부로 있었던 옛 신하이니, 말이 비록 흉악하더라도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윤선도가 예에 대해 의논하는 상소에서 두 송씨001)  를 공격하였는데, 신의 이름을 들지는 않았으나 신 역시 공격받은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다만 신이 매번 동료와 서로 말하면서 ‘윤선도가 비록 죄가 있으나 북쪽 변방에서 죽게 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일이다.’고 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오늘날 달리 의논드리겠습니까."
하고, 좌상 홍명하가 아뢰기를,
"윤선도는 예론(禮論)을 가탁해 마음대로 흉언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종통설(宗統說)로 유현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참작하여 죄를 감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얼마 전에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여 떠보는 것처럼 하였는데, 갑자기 이런 처치가 있으면 외방의 의논이 반드시 대단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우선 내버려두었다가 뒷날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성대경의 말로 인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은 독단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경들에게 의논하는 것일 뿐이다. 양사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장원이 아뢰기를,
"윤선도는 죄명이 비록 중하나 죄를 받은 지 이미 오래되어 성상께서 이렇게 널리 묻는 일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은 참으로 성상의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만, 그 죄가 몹시 중하여 오늘날 가벼이 의논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이경억은 아뢰기를,
"좌상이 진달한 성대경에 대한 일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고, 교리 남이성은 아뢰기를,
"윤선도의 죄명은 아주 중하여 심리할 때 거론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윤선도의 이름을 심리할 때 부황(付黃)할 것인가? 나 역시 그의 죄가 가볍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선조(先朝)의 사부가 늙어서 귀양가 죽는 것이 애처로워 풀어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심리할 때 거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내가 그 뜻을 모르겠다."
하자, 홍명하가 아뢰기를,
"막 성대경의 상소가 있었는데 이어 풀어주는 일을 한다면 온당치 않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성대경의 말을 옳게 여겼다면 즉시 풀어주었을 것이다. 그 소의 내용이 가소롭기에 내가 알았다고 답한 것이다. 단지 사부였었기 때문에 풀어주려는 것이다."
하자, 대신과 삼사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어 묻기를,
"윤선도는 감등해야 하는가?"
하니, 홍중보가 아뢰기를,
"안치(安置)한 뒤 위리(圍籬)하였는데, 그 뒤 심리할 때 다시 위리를 철거하였으니, 이제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는 남쪽 지방으로 정배하였으면 한다."
하니, 정태화와 홍명하가 아뢰기를,
"그것은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쪽 지방으로 정배하여 그의 고향에서 늙어죽게 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김좌명이 형조 죄인의 추안을 아뢰었다. 신수경(愼守慶) 등 23인을 풀어주었다. 또 외방에 정배한 죄인의 추안을 아뢰니, 34인을 풀어주고 그 나머지 중한 죄를 지은 자는 그대로 정배하였다.

 

혜성이 실수(室宿) 8도에 나타났다.

 

2월 26일 계미

상이 처음에 윤선도를 남쪽 지방에 정배하였다가 심리한 공사를 판부(判付)할 때 본토(本土)에 정배하는 것으로 고쳤다. 정원이 온당치 않다고 아뢰고 정배 전지(定配傳旨)를 즉시 써서 들이지 않으니, 상이 재촉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본토에다 정배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어긋난다는 뜻으로 방금 계달하였는데 성상의 분부가 내리지 않아 다른 전지와 함께 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대하였을 때 이미 결정하였는데 어째서 이렇게 아뢰는가?"
하자, 또 아뢰기를,
"본토는 바로 본가가 있는 곳인데 죄인을 본고향에다 정배하는 것은 일찍이 전례가 없었으므로 부득불 여쭙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나의 뜻을 어제 이미 다 말하였는데 이와 같이 번거롭게 아뢰니, 이는 반드시 승지가 잘못 쓴 탓이다."
하자, 또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입시하였을 때에는 다만 남쪽 지방에 정배하라는 명만 들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승지의 말도 옳다. 그러나 나의 뜻은 실로 고향으로 돌아가 죽게 하고 싶어서 이와 같이 하교했던 것이다."
하자, 또 아뢰기를,
"본토는 그의 집이 있는 곳입니다.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실로 정배하는 뜻이 아니며 곧바로 방귀 전리(放歸田里)하는 것입니다. 비단 법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뒤폐단에도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본도에다 정배한다면 편하기가 본토와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또 하교하기를,
"나의 뜻도 그의 집이 있는 곳에다 정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자, 또 아뢰기를,
"지금 명백한 분부를 받들었으니 ‘본토’ 두 자를 모름지기 부표하여 고친 다음에야 해당 부서에 분부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반드시 부표하여 고칠 필요는 없다. 정원이 이 뜻으로 해당 부서에 분부하라."
하였다.

 

평안도에 여역이 몹시 성하였다.

 

동지사(冬至使) 정치화(鄭致和), 부사 이상일(李尙逸), 서장관 우창적(禹昌績)이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이익한을 선천(宣川)에, 양일한을 철산(鐵山)에 정배하였다.

 

2월 27일 갑신

상이 침을 맞았다.

 

윤선도를 광양(光陽)으로 옮겨 유배하였다. 윤선도를 옮겨 유배할 때 처음에는 상이 단지 남쪽 지방에 정배하라고만 말하고 안치를 감등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었으므로 금부가 정배 단자(定配單子)에 안치로 써 넣었다. 이에 상이 정원에 묻기를,
"이미 정배로 전교하였는데 금부에서는 성명(成命)이 없었는데도 안치로 써 넣었으며, 정원에서도 어찌하여 봉입하였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당초에 안치를 감등하라는 분부가 없었으므로 금부에서 이와 같이 써 넣은 것이며 신들도 봉입한 것입니다.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고쳐 써서 들이게 하소서."
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이미 명이 있었으면 거기에 의거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미 정배로 부표하여 내린 뒤에 금부가 감히 이배 안치(移配安置)로 써 넣은 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니, 판의금 홍중보 등이 황공하여 도리어 도사(都事)와 하리에게 허물을 돌리면서 아뢰기를,
"막중한 정배 단자를, 전지 안의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단지 전안(前案)에 따라 ‘안치’ 두 자로 흐리멍덩하게 써 넣었으니, 일이 몹시 놀랍습니다. 해당 도사는 태거(汰去)시키고 본부의 아전은 중한 쪽으로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이에 윤선도를 광양(光陽)으로 옮겨 유배하였다. 윤선도의 집이 해남(海南)에 있어서 광양과 몹시 가까웠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분통해 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2월 28일 을유

이상일(李尙逸)을 동부승지로, 남이성(南二星)을 이조 좌랑으로, 곽성귀(郭聖龜)를 헌납으로, 오두인(吳斗寅)을 부교리로, 장선징을 사간으로 삼았다.

 

혜성이 간방에 희미하게 나타났다.

 

2월 29일 병술

혜성이 간방에 나타났다.

 

경기 감사 김수흥(金壽興)이 장계하여 아뢰기를,
"경기 고을에 양전(量田)한 후 부역이 더욱 무거워져 백성들이 더 고생하고 있습니다. 각종의 가포(價布)를 추수 뒤로 물려 거두어들인다면 눈앞의 위급함은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장계대로 추수 뒤로 물려 받아들이소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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