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갑진
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상례를 논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였다. 좌상 윤방(尹昉), 우상 신흠(申欽)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차자에서 아뢴 수천 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그 주된 뜻은 삼년상(三年喪)과 상주(喪主) 그리고 별묘(別廟) 건립의 건이었는데, 이에 대해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렇습니다. 대원군(大院君)025) 은 곧 선조 대왕의 지자(支子)인데 성명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시어 선조 대왕의 계통을 곧바로 이으셨으니, 그렇다면 성명께서는 종묘의 주인이 되신 반면 대원군은 그대로 선조 대왕의 지자로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후의 지자는 종묘의 차원에서 보면 소종(小宗)이니, 대종(大宗)에 중점을 두고 소종에 대해서는 강복(降服)하는 것이 예입니다. 그래서 후에 사람들이 소기(小記)026) 의 ‘대부는 서자(庶子)에 대해서 강쇄하나 손자는 그 아비에게 강복하지 않는다.’는 조항에 대해 논하기를 ‘이는 보통 서자를 두고 이른 말이기 때문에 정현(鄭玄)이 「자기 아비를 할아버지가 강복했다고 하여 손자까지 그 아비에 대해 강복하지는 않는다.」고 한 것이지, 할아버지를 승중(承重)하고서도 마음대로 사복(私服)을 입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대부도 그러한데 더구나 막중한 종통(宗統)을 이은 임금의 경우이겠습니다. 이미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게 된 이상 어떻게 또 사상(私喪)의 상주(喪主)가 될 수 있겠습니까. 종통에 관계되어 강쇄해야 한다면 의문(儀文)과 절목(節目)을 어찌 그 차례에 따라 강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별묘 건립 문제는 그것이 강원(姜嫄)의 일027) 과 부합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후세에 별묘를 세운 경우는 대부분이 자기들 뜻대로 세운 것으로 성명께서도 그전 것들을 필시 전사(前史) 가운데에서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신들은 예학(禮學)에 원래 어둡고 지식도 얕아 미혹된 소견을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차자의 내용에 대해 조목마다 밝혀 보려 하였으나 이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차자 가운데 ‘선왕의 예제(禮制)를 무너뜨리고 부자의 대륜(大倫)을 말살하였다.’ 하였고, 또 ‘조정에 가득한 명류(名流)들이 모두 무부(無父)의 죄에 빠지고 말았다.’고 하였습니다. 신 같은 사람들이야 명류라고 할 수는 없지마는 대신의 몸으로 앞장서서 아뢰어 청하였으니, 무부의 죄야말로 오로지 신들에게 있는 것으로서 남의 뒤를 따라 일반적으로 논한 서관(庶官)들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따라서 도의상 하루도 이 자리에 욕되게 있으면서 대례(大禮)를 그르치게 할 수는 없으니,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 서둘러 죄척(罪斥)을 내리시어 국가의 체면을 바로하신다면 그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경들이 굳이 사의를 표할 것은 없다."
하였다.
3월 2일 을사
예조 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이 변례(變禮)의 시기를 당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 오직 장례에 대한 일을 손색없이 치르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다만 늙고 병들고 정신이 어두워 어그러지고 틀린 일들이 많았기에 항상 두렵고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명께서 애써 지정(至情)을 억제하시고 대신과 백관이 청한 대로 따르실 경우 거기에 관계되는 모든 절목이 당연히 그에 맞게 마련될 것인데, 이렇게 일정한 제도가 있게 되면 유사(有司)가 봉행하는 데에도 별로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또 혹 짐작만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정문(情文)이 있을 경우에는 위로 성명의 마음을 받들고 아래로 뭇 논의를 따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신의 구구한 일념이었습니다. 이는 단지 우리 임금을 허물없는 곳에 처하게 하고 대례를 유감없이 치르려는 마음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발인(發引)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뒤 따라 간다.’는 문구가 있지만, 이는 대왕이나 왕후의 상에 신하가 임금의 장례를 치르는 예를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먼 옛날의 일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인종(仁宗)께서 산릉(山陵)에 가시려 하자 대신과 예관이 쟁론하여서 대궐 문 밖에서 곡송(哭送)만 하였고, 선묘(宣廟) 때에도 국장(國葬)이 세 차례나 있었지만 모두 궐문 안에서 곡송만 하였다고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 발인 때에는 선조께서 궐문 밖에서 곡송하려고 하였으나 예조가 아뢰어 대내의 뜰 아래에서 망곡(望哭)만 하였습니다. 이는 상신(相臣)이 분명히 기억하여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신으로서도 어리석은 생각에 창황하여 질서가 없는 상황에서 임금이 밤에 거둥하여 성 밖을 나간다는 것이 지극히 미안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선묘께서 이미 행했던 제도대로 따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렇게 두 번 세 번 감히 아뢰었던 것인데, 그처럼 번잡스럽게 소요를 일으킨 죄에 대해서는 신이 만번 죽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서연(書筵)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천담색(淺淡色)을 주장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오례의》에 ‘전하와 왕세자는 외조부모의 복에 5일 동안 추포대(麁布帶)를 하고 제복(除服)하며, 왕세자 이하의 상에 있어서는 거애(擧哀)만 하고 복은 없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예경(禮經)》에서 ‘제후는 기복(期服)은 입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왕세자도 그 명위(名位)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제왕의 복제는 본래 사대부와는 다른 것입니다. 더구나 막중한 삼년상의 경우에도 전하께서 종통(宗統)을 위해 강복하는 판인데, 왕세자가 어찌 그 복에 있어 변제(變除)028) 의 절목에 강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세자의 기복은 전하의 기복과 그 경중이 또 다릅니다. 전하께서 졸곡(卒哭) 전에 일 보는 복색으로 백포(白袍)를 착용하시는 이상 왕세자가 서연에서 일을 볼 때에는 당연히 천담복을 착용해야 하고 졸곡 후의 복색 역시 차례로 강쇄되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마침 하문이 계셨기에 감히 그 곡절을 아뢴 것이니 감히 자신의 의사로 단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다만 분명히 밝혀 말씀드리지 못함으로써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명의 하교를 받고 보니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명을 지고 어디에 몸을 두겠습니까. 신이 예관으로서 예의 절목을 논의함에 있어 이미 성명의 뜻을 어겼으면서도 그것을 변통하여 절도에 맞게 할 줄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결코 이대로 눌러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속히 신의 죄를 바로잡고 대례를 완결지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묘시(卯時)에 운기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햇빛을 가로 가리웠는데 적색이었다. 밤에 남방에 불 같은 기운이 있었는데 붉은 빛이 땅을 비췄다.
3월 4일 정미
충청도 결성(結城) 지방에 바위가 옮겨간 변이 있었는데, 감사 정광경(鄭廣敬)이 계문하였다.
김상용(金尙容)을 좌참찬으로, 서성(徐渻)을 우참찬으로, 윤형언(尹衡彦)을 사간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장령으로, 정백창(鄭百昌)을 부응교로, 이기조(李基祚)를 교리로, 이경증(李景曾)을 정언으로 삼았다.
초저녁에 유성이 낭성(狼星) 위에서 나와 귀성(鬼星) 아래로 들어갔다. 밤에 남방에 불빛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5일 무신
간원이 차자를 올리기를,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요 만화(萬化)의 근본으로서 성인이 《효경(孝經)》이라는 책에 자세히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효는 일반 신서(臣庶)들과는 다르니, 그 효를 행함에 있어 반드시 천지(天地)에 순응하고 조종(祖宗)에도 알맞으며 경과 사대부가 기꺼이 심복하고 만백성의 환심을 얻어야만 교화가 유통되고 나아가 기반이 공고해져서 바야흐로 성인으로서의 달효(達孝)가 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그 지극하신 덕과 순수한 행실이 천성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이미 그 효가 상하에 통하였고 보위에 오른 이후로는 위로 자전을 받들고 곁으로 별궁(別宮)을 모심에 있어 성과 예를 다하시어 그 누구도 뭐라고 할 말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계운궁(啓運宮)029) 이 병석에 누우신 후로는 시약(侍藥)과 치양(致養)하는 도리에 있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하지 않음이 없으셨는데 신(神)의 이치란 어려운 것으로 끝내는 대고(大故)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전하께서 겉으로는 공의(公議)에 쫓긴 나머지 복제(服制)를 할 수 없이 강쇄(降殺)하긴 했으나 곡용(哭踊)과 애훼(哀毁)에 있어서는 정문(情文)에 지나쳐 그 아름다운 성효(聖孝)가 백대에 뛰어나고 있습니다. 무릇 혈기가 있는 자로서 그 누가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의 구구한 생각으로는 전하의 지극한 정성에서 발로된 것이 중도(中道)에 지나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필부는 그 몸이 보잘것 없이 가볍고 또 친상(親喪)을 당했을 경우 사람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당연히 바쳐야 할 일인데도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극진히 절도(節度)가 있게 하셨는데, 그럼에도 혹시 너무 훼척하여 상생(傷生)에 이를까 염려했기 때문에 ‘죽은 이 때문에 상생해서는 안 되니 훼척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지 않아야 한다.’ 하였고, 또 ‘상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면 부자(不慈)·불효(不孝)한 것과 같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규정을 두고 있는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그 한 몸이 종사와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시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편치 못하시면 삼령(三靈)030) 이 놀랄 것이고 뭇 백성이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니, 이미 돌아가신 대원군이나 계운궁의 영령께서도 저승에서 반드시 불안해 하실 것입니다. 전하께서 아무리 직성대로 증자(曾子)나 민자건(閔子騫)처럼 하고 싶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위에 말한 점 등을 생각해 보지 않으십니까.
여염의 사서인(士庶人)들은 장위(腸胃)나 기혈이 원래 튼튼하고 춥고 가난한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인데도 상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 보면 병에 걸리지 않는 경우가 드물고 또 일단 병이 들면 아무리 오래 치료해도 쉽게 완치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슬퍼하다 보면 심간(心肝)을 손상시키고 소수(蔬水)만 먹다 보면 비위를 손상시켜 장부(贓腑)가 상하게 된 나머지 난치병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 때이나 높고 귀한 분위기에서 생장하셨고 따뜻하고 후한 봉양을 받아오셨으므로 본래 하천(下賤)들처럼 체질이 강인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질(侍疾)하신 이후로 벌써 허다한 세월이 흘렀건만 허리띠 한 번 풀지 않으시고 편히 잠자리에 드신 적도 없어 남이 다 알 수 없는 걱정과 근심에 반드시 손상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상처가 쌓인 뒤끝에 드디어 상화(喪禍)를 당하셨는데 그러고도 옥체에 아직 병의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역시 신명이 도와주신 덕분일 따름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고 보면 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옵니다.
외정(外庭)의 미천한 신들이야 일찍이 전하의 기거를 직접 받들어보지 못했으므로 음식을 얼마만큼 드시는지 거처는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소상히 알 길이 없으나 전해 들은 말로 논하면 아마도 성명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지난번에도 대신과 약방(藥房)이 여러 번 성명의 몸을 조호(調護)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때마다 지나친 염려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마음으로서는 이에 대해 지나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전하로서도 어찌 지나친 염려를 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루 아침에 성체가 혹시라도 건강을 잃게 될 경우 신민들의 절박한 심정이야 말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위로 자전께 끼치는 걱정은 어찌하실 것입니까.
아, 상을 당하여 애통한 마음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의 미행(美行)인데 제왕에게는 그러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들이 정말 다행스럽게도 직접 성상의 효행을 접하게 되었으니, 덕을 기준으로 임금을 사랑하는 구구한 마음 같아서야 어찌 그렇게 하시는 일에 대하여 더욱 그 뜻을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훼척하신 끝에 병이 생겨 결과적으로 필부의 행위를 따르게 되고 종사의 중함은 생각지 않으신 것이 된다면, 이는 참으로 성명께 바라는 바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인의 교훈을 깊이 체득하시어 지정(至情)을 억제하여 조호에 더 힘을 기울이시고 기력과 체력의 허실을 참작하시어 기거와 음식을 적절히 조절하소서. 몸이 편안해야만 국가가 편안하고 국가가 편안해야만 효도를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들이 또 생각건대 양암(諒闇)의 예를 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이는 제대로 행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형편상 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가 재건되어 모든 일을 새로 시작하는 때이므로 걱정스럽고 위태로운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옛날에 장소(張昭)031) 가 손권(孫權)에게 말하기를, ‘효렴(孝廉)이라 하여 지금이 어디 곡(哭)이나 하고 있을 때입니까.’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엄청난 일을 당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어찌 융통성이 없이 예절만을 지키기 위하여 검은 얼굴로 깊이 들어앉아 있기만 하고 한 번도 공경을 접견하여 나라 일을 모의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예장(禮葬)도 아직 치르지 못한 판에 조사(詔使)가 곧 오게 되어 있는데,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재정이 바닥난 상태이고 민력도 고갈되어 조야(朝野)가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를 논의하는 즈음에 이론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제각기 자기 의견을 반영하려고들 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이미 조정 공동의 요청에 따라 정문(情文)을 절충하여 전례(典禮)를 분명히 정하였으므로 분분한 말들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항간에서 거론되고 있는 논의들이 염려되는 바 없지 않고 또 대신 역시 물러나려고 하여 기상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신하들을 접견하고 공의를 받아들여 모든 빈접(儐接)에 관한 문제나 상장(喪葬)의 예절에 관한 문제를 국계(國計)에 편리하고 인심에 흡족하도록 난숙한 강론을 거쳐 분명히 밝히시고 정밀하게 고찰하여 확정지우지 않으십니까. 임금과 신하 사이는 아비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비와 자식이 서로 만나는데 무슨 구애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비록 상차(喪次)를 벗어나지 않고 최복(衰服)을 벗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대신 이하는 모두가 옷을 바꿔 입고 등대(登對)해도 안될 것이 없을 듯싶습니다.
아, 세상 일이란 서로가 마음으로 믿으면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없는 반면, 위아래가 서로 근심을 하고 간격이 생기면 되는 일이 또한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태(否泰)와 치란(治亂)이 갈라지는 연유인 것입니다. 요즘 상례(喪禮) 때문에 전하께서 번번이 정신(廷臣)들의 논의에 대하여 석연찮은 생각을 갖고 계시는데, 세밀하게 따지면 그 곡절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을 뿐입니다.
발인(發引)할 때 곡송(哭送)하는 하나의 절차는 예문(禮文)을 들어 말할 경우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나 사세로 말하면 크게 어려운 점이 있는데, 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그 까닭을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신하의 초상에도 혹 교외(郊外)까지 나아가 직접 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번 이 상례는 전하에게 있어 실로 망극한 슬픔이 되는 상으로서 영이(靈輀)가 먼 곳을 떠나는 영결 종천(永訣終天)의 자리이니, 성 밖에 나아가 곡송을 한다 한들 무슨 유제(踰制)의 혐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세로 보면 실로 용이하게 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오례의(五禮儀)》를 보면 ‘능소까지 뒤따라 간다.’는 구절이 있는데, 열성(列聖) 역시 그렇게 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이 예가 드디어 철폐되었는데, 그것이 어찌 송종(送終)하는 예가 박해져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초상은 큰 변고인데, 이렇게 정신이 없는 때일수록 계엄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임금은 그 한 몸의 안위에 종묘와 사직의 운명이 직결되어 있으니 자질구레한 예문 따위는 혹 폐지할 수도 있지만 만일을 염려하는 조처는 절대로 소홀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 예관(禮官)이 말했던 것도 그 주된 뜻은 이런 범주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을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치 못한 바가 있어 오히려 성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킨 나머지 산릉(山陵)에까지 뒤따라 가겠다는 하교가 있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관의 말이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그 지나친 점 때문에 도리어 당찮은 거둥을 하신다는 것은 대성인으로서 사리를 따라 물정에 순응하는 바른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이는 군신간의 정의(情意)가 돈독하지 못한 까닭에 한 마디 말만 맞지 않아도 금방 어긋나버리는 결과를 빚게 된 것이니, 어찌 크게 일을 망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포(金浦)와 서울과의 거리가 2사(舍)032) 나 되는데, 발인할 때에 동원되는 인부와 군마 그리고 음식 등만 해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또 대가(大駕)까지 거둥하신다면 수많은 말과 수레로 백관이 뒤따를 텐데 기보(畿輔)의 물력을 가지고 어떻게 다 치루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째 불가한 점입니다. 그리고 하루는 길을 가야 하고 이튿날은 안조(安厝)해야 하고 3일 째에 반혼(返魂)하게 됩니다. 따라서 사흘 밤과 사흘 낮 동안 바람과 이슬에 그대로 몸을 드러내는 셈인데 허묘(墟墓) 사이에서 곡벽(哭擗)을 하다 보면 성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상이 반드시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또 요즘 들어 이변이 겹겹이 나타나 무지개 등 요사스러운 기운들이 태양을 가리는가 하면 인심이 안정을 잃고 나라 형세 또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멀리 도성을 떠나 강 건너까지 행차하시어 여러 날을 보낸다면 전하 자신의 입장에서야 가볍게 여기실지 몰라도 종묘와 사직 그리고 자전의 입장은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점입니다. 신 등은 이번 일이 일시적인 격동과 촉발에 의하여 나온 것일 뿐으로서 필시 행해질 리는 없으리라는 것을 본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의혹하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니, 또한 바라옵건대 분명하게 지휘(指揮)를 내리시어 전의 명령을 속히 개정하소서. 그러면 반드시 사방에서 보고 듣고 큰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아, 오늘날의 일을 말할 것들이 많으니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신들은 감히 자질 구레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 슬픔에 잠기고 계신 성상을 괴롭혀 드릴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관심을 두시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셔서 예에 의하여 감정을 절제하시고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처리하심으로써 필부처럼 구차스레 어려운 길을 걷지 마시고 성인이 행하는 달효(達孝)의 도리를 다하도록 노력하소서. 그러면 종묘와 사직에 매우 다행한 일이 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용은 충분히 알겠다. 이토록 슬픔에 쌓인 와중에 조사(詔使)까지 온다고 하니,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상례(喪禮)로 말하면 사람마다 소견이 달라 시비(是非)가 엇갈리고 빈접(儐接)으로 말하더라도 생각 밖의 일이어서 준비를 해낼 길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은 지도 어언 반 년이 되어가는데 난들 어찌 여러 경들을 한번 만나보고 위아래의 정의(情意)를 펴보고 싶은 생각이 없겠는가. 다만 예절로 보아 구애되는 일이 많은데다가 기력마저 미치지 못해서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산릉에 가는 일은 지극한 정을 억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예전(禮典)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아무리 경들이 그렇게 말해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듯하다. 조호(調護)하는 일에 대해서는 내가 경들을 위하여 마음에 새기겠다."
하였다.
홍문관 교리 이기조(李基祚), 부수찬 홍명구(洪命耉)·민응회(閔應恢)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의 차자를 보건대 두루 문헌을 뒤져 인용하고 경전과 사책을 들락거리면서 현하(懸河)의 변론을 늘어놓고 변환(變幻)의 말로 잘 꾸며 놓아 사람으로 하여금 한두 번 얼핏 보아서는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禮)에는 반드시 정당한 뜻이 있기 마련이어서 예를 논하려면 반드시 그 정당한 뜻부터 밝혀야 하므로 ‘수(數)는 개진하기가 쉬우나 의(義)는 알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상(喪)을 논할 때에는 압굴(壓屈)하는 것으로 대의(大義)를 삼아야 마땅합니다. 성상께서 이미 지손(支孫)으로 들어와 대통을 이어받음으로써 바로 선조(宣祖)의 후계자가 되셨으니 친생 부모는 당연히 사친(私親)이 되어야 한다는 정당한 뜻이야말로 청천 백일처럼 명백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우지(愚智)를 막론하고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미 사친이 되었다면 어떻게 강굴(降屈)하지 않고 본복(本服)을 그대로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애써 삼년상을 주장하면서 ‘장손(長孫)은 자기 어버이에 대하여 복을 내리지 않는다.’는 설을 들어 꾸며대는가 하면 끝에 가서는 ‘종통(宗統) 때문에 압존을 당한다는 말이 어느 경전에 나오는가.’ 하고 있으니, 그 말이 너무도 방자하다 하겠습니다. 성상께서 대원군에 대해서는 장자임이 분명하나 선묘(宣廟)에 대해서는 서손(庶孫)이지 장손(長孫)은 아닙니다. 임해군(臨海君)이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폐위된 이후의 상황에 입각하여 말한다면 그 서차로 보아 대원군이 맏이 되겠지만 애당초의 천륜으로 말한다면 중자(衆子)이지 장자는 아닌 것입니다.
자하(子夏)가 전(傳)에 이르기를 ‘적자(適子)가 있는 경우에 있어서 적손(適孫)은 없다.033) ’ 하였습니다. 적손이라면 조부의 후(後)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적자가 있을 경우에는 모두가 서손(庶孫)이며 반드시 적자가 없어야 적손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 의리가 엄격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이르기를 ‘오늘의 일로 말하면 대원군은 장자가 되고 전하는 장손이 된다.’ 하니, 이것이 속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공자(公子)가 자기 어머니 상에 연관(練冠) 마질(麻絰)에다 붉은 색 선으로 깃을 두른 마의(麻衣)를 입고 장사가 끝나면 제복(除服)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자하전(子夏傳)에 이르기를 ‘왜 오복(五服)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인가? 임금이 입지 않는 복은 자식도 감히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고 소(疏)에는 ‘자식도 감히 입을 수 없는 것은 임금의 정통(正統)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종통(宗統)에 눌림을 당한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 전하께서 이미 종묘의 정통이 되어 있고 별궁(別宮)의 상에 대해 선묘(宣廟)께서도 복을 입지 않는다면 선묘께서 계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압을 당하게 되는 것인 만큼 전하가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는 삼년상으로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그릇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기》에 이르기를 ‘대부는 서자(庶子)에게 강복(降服)하나 그 손자는 자기 아버지에게 강복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할아버지 때문에 손자가 억눌림을 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조문을 주상께서 삼년상을 입어야 한다는 큰 증거로 제시하면서 ‘선묘가 계시더라도 강복하지 않아야 마땅하다.’고 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유울(庾蔚)은 말하기를 ‘이는 모든 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므로 정현이 「할아버지 때문에 손자가 억눌림을 당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 할아버지를 위해 승중복(承重服)을 입고서도 사복(私服)을 입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로 보면 할아버지를 승중한 자는 비록 자기 아버지 복이라도 강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전일에 고(考)라고 칭했던 것이 옳은 일이었다면 오늘 와서 강복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고 한 말도 역시 틀린 말이 아니겠습니까.
《예기》에 이르기를 ‘천자가 나라를 세우면 제후는 탈종(奪宗)한다.’ 하였는데, 이는 천자가 제후를 봉건(封建)할 때는 어질고 공로가 있는 자를 골라 세운다는 뜻입니다. 가령 한대(漢代)를 예로 들면 소하(簫何)나 조참(曹叅)이 꼭 장자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탈종’이라고 한 것일 뿐이지 오늘날과 같은 경우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는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불세(不世)의 공로가 있으시니 비록 장자가 아닐지라도 탈종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장자임에랴.’ 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종묘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전하로 하여금 또 다시 대원군의 종자(宗子)가 되라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이존(二尊)이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이의길(李義吉)의 말처럼 대원군이 바로 종묘로 들어와야만 비로소 일통(一統)이 되어 이존이라는 기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이말은 공의(公議)에 죄를 얻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별묘(別廟)의 의논을 들고 나온 것인데, 이러한 그의 말이야말로 머리와 꼬리가 연속이 안 되어 스스로의 모순을 가져오는 말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당연히 설 사람이나 당연히 서지 않을 사람을 막론하고 임금의 부모라면 다 마찬가지이다. 어찌 서손(庶孫)으로서 승중(承重)했다 하여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물론 부자간의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예제(禮制)가 바뀌어지는 절차를 가지고 말할 때는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하순(賀循)이 폐질(廢疾)로 인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한 부조(父祖)에 대하여 논하면서 이르기를 ‘비록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더라도 적정(適正)의 지위이면 아버지가 이어야 할 것을 자기 자신이 승계했기 때문에 삼년상을 입는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원군으로 말하면 선조의 지자(支子)인데 그를 어떻게 계체(繼體)의 적자(適子)에 비유하여 복을 강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또 이르기를 ‘합사(合司)가 말하기를 「『아버지는 사(士)인데 아들이 천자나 제후가 되면』이라는 말은 바로 처음 수명(受命)하여 임금이 된 이를 가리킨 말이다.」 하였다. 그 말이 누구의 말을 따라 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설마 경술(經述)을 자기 멋대로 꾸며대고 한(漢)의 구묘(九廟)를 옮겨놓은 왕망(王莽)이 한 말을 합사가 취하여 증거로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 역시 너무도 심하다 하겠습니다. 합사가 그렇게 논한 내력에 대해서는 신들도 알 수 없습니다. 사리로 미루어 본다면 처음 수명한 임금이 아닌 바에야 어찌 아들이 천자 제후가 되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사(士)일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대종(大宗)이 무후(無後)하여 지자(支子)가 들어와 뒤를 이은 경우를 말한 것이라면 거기에 따라 자연히 강쇄되는 예가 있어서 본친(本親)의 복을 제대로 다 입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원시(元始)034) 때 주청한 것은 애당초 왕망이 독자적으로 내놓은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설사 왕망의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다만 그말이 옳은가 그른가만 따지면 될 뿐 그 사람의 현부(賢否)는 묻지 않는 것이 바로 형편없는 사람이라 하여 그 말까지 버리지 않는 성인의 공정한 마음인 것입니다. 만약 명길의 논리대로 한다면 여불위(呂不韋)의 글은 《예기(禮記)》에 싣지 말아야 하고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도 불태워버려야 할 것입니다.
《예기》에 복제(服制)가 여섯이 있다고 말한 것은 은(恩) 때문에 의(義)가 가리워질까 염려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장하기를 ‘존존(尊尊) 때문에 친친(親親)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하니, 이것 또한 선유의 설과 정반대되는 말입니다. 성상의 성효야 말로 타고나신 것인데,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점이 어찌 은(恩)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범선(范宣)이 장만(蔣萬)에게 답한 글은 그 주의(主意)가 차손(次孫)이 지중(持重)해야 할 경우를 말한 것으로서 오늘날 삼년상을 꼭 행해야 한다는 말과는 본래 관계가 없는데, 그는 이 말을 ‘오늘의 일을 분명하게 그린 듯이 보여주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그는 후세 사람들이 절충하여 쓸 가치도 없는 숙세(叔世)의 예문들을 잡다하게 인용하여 입증하고 있는데, 그의 논리가 얼마나 순수하지 못하고 부정확하지를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아, 조정의 신하로서 그 누가 임금을 허물없도록 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에 이르기까지 논의가 당당하여 사전 모의 없이도 누구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이른바 ‘사람의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감히 자기 개인의 사견을 들어 이미 정해진 공의와 싸우면서 별묘(別廟)니 헌가(軒架)니 하는 말 등을 제멋대로 만들어내어 조금도 사양하거나 신중해하는 뜻이 없습니다. 그는 심지어 조정에 가득한 명류(名流)들이 모두 무부(無父)의 죄를 범하고 있다고까지 하면서 삼공(三公)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고 조정 전체가 실색(失色)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통탄할 일입니까.
신들은 모두 들은 것도 적고 식견도 없는데다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더욱더 아는게 없습니다. 그러나 압강(壓降)을 해야 하는 오늘날의 대의야말로 양지(良知)에서 나온 본연의 순리이고 만구 일사(萬口一辭)로 얻어진 공론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논사(論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생각건대, 성명께서 꼭 그의 말에 현혹되지 않으실 줄은 알지마는 그래도 묘당으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신 것은 아마도 옳고 그름을 더 분명히 밝힐 목적으로 싫어하지 않고 강론하게 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대신들은 그저 깊이 따지고 싶지 않아 대략만을 말하고 있어 구구한 신들의 얕은 소견으로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므로 감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겠다. 그러나 그대들이 한 말이 다 옳은지는 또한 모르겠다."
하였다.
3월 6일 기유
밤에 간방(艮方)과 동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7일 경술
동틀 무렵에 기운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곤방(坤方)을 직선으로 가리켰다.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발인(發引) 때 산소까지 친히 가시겠다는 한 문제에 대하여 그저께 간원이 차자를 올렸었는데 성상께서 간측(懇惻)하게 비답하시며 첫째는 지정(至情)을 억제하기 어렵다고 하시고 둘째는 예전(禮典)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신들도 어찌 성상의 하교를 우러러 받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전고(典故)를 상고해 보고 사세를 참작할 때 단연 그렇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니, 임금의 한 몸이야말로 종사와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는 만큼 스스로 가벼이 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산소가 서울과는 2식(息)이 넘는 거리에 있는데 풍로(風露)를 무릅쓰고 산을 넘고 시내를 건너 친히 둔석(窀穸)035) 에 임하여 호모(號慕)하고 벽용(擗踊)하시다 보면 성상의 몸에 필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상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불가한 점입니다. 허둥지둥 질서가 없이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어두운 밤에 성 밖에서 곡송(哭送)하는 것만도 오히려 미안한 일인데 더구나 대가(大駕)가 먼 곳에 가 머물면서 사흘 밤낮을 지내다니 임금으로서 어찌 그렇게 위험한 거둥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둘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발인 때 쓰여질 민력(民力)만 해도 벌써 엄청난데 게다가 대가의 행차까지 겹치게 되면 기전(畿甸)의 역량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장차 공급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조사(詔使)의 행차까지 조만간 당도한다고 하니, 백성의 힘이 다 빠질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삼군(三軍)이 대가를 호위하고 백관이 뒤따라가 원야(原野) 가득 노숙하면서 여러 날을 보내다가 혹시 비라도 내려 다 젖게 되는 날이면 형언할 수 없는 낭패가 뒤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네 번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배왕(陪往)’이라는 문구가 있기는 하나 조종(祖宗) 이래로 이를 행한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묘(仁廟)·선묘(宣廟)와 같은 성효(聖孝)로서도 이를 행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체로 사세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열성(列聖)들이 국장(國葬) 때도 행하지 않던 일을 전하께서 사상(私喪)에 행하시려 한다면 사리로 따져도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다섯 번째로 불가한 점입니다.
전하의 지극하신 정성으로 송종(送終)의 예에 있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시려고 하시지만 이상 다섯 가지의 안 될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사(三司)와 대신들이 틀림없이 죽을 힘을 다하여 말릴 것이고 결코 성상의 뜻을 그대로 받들지는 않을 것이니,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버이 초상에 있어서는 본래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하는 것이니, 사세의 어렵고 쉽고는 따질 것이 없다. 그리고 예전(禮典)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고 또 구례(舊例)도 있으니, 이번에 배왕(陪往)하는 일이 조금도 안 될 것이 없다. 결코 그대들 뜻대로 윤허하기는 어려우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이에 따랐다.
병조가 아뢰기를,
"예장(禮葬) 발인 때 쓰일 여사(轝士) 이하 모든 차비군(差備軍)의 숫자에 대해 국장(國葬) 때의 등록(謄錄)을 살펴 보건대 경자년에는 총 5천 4백 77명이 동원되었고 무신년에는 6천 명이 동원되었는데, 지금은 비록 조금 강쇄(降殺)하는 절목이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4천 3백여 명은 동원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옛날의 예를 보면 서울의 시민들, 각 관아의 노자(奴子)와 종사원, 장인(匠人), 악공(樂工), 악생(樂生), 출번(出番)한 응사(鷹師), 경기와 서울의 하번(下番) 군사를 썼으며 개성부 시민도 5백, 6백 명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계통이 없고 난잡한 오합지중이어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5천 명의 백성을 한꺼번에 모이게 하기가 형세상 지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도하(都下)의 백성들은 일제히 모이게 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니, 모름지기 미리 정돈해 두어야만 그 때 가서 발생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즉각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 그리고 각 관아로 하여금 낱낱이 성책(成冊)하여 본 아문으로 이송하도록 하고, 외방에 거주하는 자들의 경우는 각도에 공문을 발송하여 기일 안에 올려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도 수가 부족할 경우에는 경기와 서울의 하번(下番) 군사들까지 동원해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밤에 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정세구(鄭世矩)를 사헌부 장령으로, 이경석(李景奭)을 홍문관 교리로 삼았다.
3월 8일 신해
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서연(書筵) 복색에 대하여 해조에서 천담복(淺淡服)으로 할 것을 품정(稟定)하자 상께서 옳지 않게 여겨 엄하게 하교하시기까지 하였다 하니, 신들은 성상의 의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자의 본복(本服)은 기년복(朞年服)에 불과합니다. 평상시 사대부가 기년복을 입는 경우에도 상차(喪次)에 있을 때만 최복(衰服)을 입고 집안에 있거나 출입할 때는 포대(布帶)에 소의(素衣)를 입으며 공회(公會) 때는 순전히 길복(吉服)을 입습니다. 더구나 제왕(帝王)의 가문은 그 복 입는 제도가 신서(臣庶)와는 다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세자가 서연을 열고 강(講)에 임하는 일은 전하께서 시사(視事)하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전하께서 시사하시는 복장으로 백포(白袍)를 착용하신다면 세자의 서연 복색도 당연히 진현(進見)할 때와 차이가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해조에서 천담복으로 정한 것은 오히려 지나친 점은 있을지언정 부족한 점은 없을 듯싶습니다. 어린 나이에 강학(講學)하는 일이야말로 하루가 급하니, 해조가 정한 천담복을 입고 서연을 열게 하고, 졸곡(卒哭) 후에 다시 해조로 하여금 차차 마련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세자의 복이 기년복이라고는 하나 현재 상중에 있으면서 천담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한 것 같다."
하였다. 연계(連啓)하니, 이에 따랐다.
3월 10일 계축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명기(明器)와 복완(服玩)·악구(樂具) 등을 지금 만들고 있는데 종(鍾)·석경(石磬)·축어(祝敔)와 같이 종묘 제악에 쓰는 것들은 좀 참람한 듯한 혐의가 있으니, 다만 속악(俗樂)에 쓰이는 당적(唐篴)·통소(洞簫)·당필률(唐觱篥)·향필률(鄕觱篥)·당비파(唐琵琶)·향비파(鄕琵琶)·현금(玄琴)·가야금(伽倻琴)·아쟁(牙爭)·박(拍)·절고(節鼓)·장고(杖鼓)·와방향(瓦方響) 등을 만들어 쓰고 목공인(木工人)·목노비(木奴婢) 등도 그 수를 조금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명기를 나무궤에 넣을 경우 오랜 세월이 지나면 썩게 되어 땅이 무너져 꺼질 염려가 있으니, 등록(謄錄)에 기재된 대로 석함(石凾)을 만들어 쓰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며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최명길(崔鳴吉)의 차자 내용 가운데 반복하여 신을 공박한 대목을 보건대, 신이 올린 차자 내에 경전을 인용하면서 멋대로 산감(刪減)하여 그 경전의 주된 의도는 몰락한 채 자기 주장에 부합시켜 입증자료를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아, 명길이 어찌 신을 무함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마는, 신을 논한 그의 방식이 각박함을 면치 못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공자는 이르기를, ‘언어 표현은 의사만 전달하면 된다.’ 하였습니다. 성현들의 글을 보면 어떤 사건이나 이치를 논한 것을 막론하고 되도록 글을 간략하게 쓰면서 뜻을 분명히 밝혀 누구나 한 번 보면 그 목적한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끔 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어(古語)를 인용할 때에도 굳이 그 전문(全文)을 다 인용할 필요는 없으니, 대체로 말이 많아지다 보면 그 뜻이 도리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신이 경황 중에 합문에 엎드려 아뢰면서 존조(尊祖)의 뜻이 매우 엄하다는 것을 논할 때는 다만 자의솔조(自義率祖)036) 라는 문구만 인용하였고, 빈렴(殯斂)이 제도를 뛰어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논할 때는 다만 시복이사(尸服以士)037) 라는 구절만 인용했으며, 상(喪)을 강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논할 때는 다만 ‘대종(大宗)에 중점을 두고 소종(小宗)은 강쇄해야 한다.’는 대목만을 인용하였습니다. 이는 어세상 당연한 것으로서 지엽적인 말까지 늘어놓아 그 뜻을 애매하게 만들지 않으려 한 것일 뿐, 고의적으로 위아래 문구를 끊어 내버림으로써 성현의 주된 의도를 몰각시켜 임금을 속이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차자를 올릴 때 인용했던 예경(禮經)의 ‘위인후(爲人後)’ 조항 아래 소주(小註)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사실 신이 착오를 일으켰습니다. 평소 조감(照勘)을 잘못하여 그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데, 차자를 초기(草記)하던 날 집에 있던 예경을 마침 어느 친구가 빌어갔기 때문에 미처 고검(考檢)하지 못한 채 마침내 ‘자기가 후계자로 간 아버지가 일찍 죽었을 경우[소후부조졸(所後父早卒)]’라는 조항을 빠뜨렸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점을 두고 경솔했다고 한다면 그 죄를 감히 모면할 길이 없겠으나 고의로 끊어 내버린 것은 또한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통전(通典)》에 기록된 유보(劉寶)의 말을 보면 ‘남의 뒤가 된다[爲人後]라는 것은 아들이 될 수도 있고 손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경(經)에서 「남의 뒤가 된다.」고만 하고 누구의 뒤가 된다는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옛사람 중에서도 이렇게 본 이도 있었던 것입니다.
아, 거짓을 꾸미느라 마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사부(士夫)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요 곧지 않게 임금을 속였다면 이는 신하로서 큰 죄를 지은 것인데, 이렇게 의심을 받는대서야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명길이 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일테니 지금 그러한 의심을 받는다 하여 몹시 원망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이 보잘것 없이도 군부(君父)로부터 인정을 받은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 하루 아침에 거짓을 꾸며 임금을 속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보면, 이후로 아무리 좋은 말을 올리기 위하여 경전을 인용한다 하더라도 신임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 점이 원통할 따름입니다.
그는 상례(喪禮)를 논함에 있어 만 마디도 넘는 말을 가로 세로 늘어놓으면서 상(喪)은 반드시 삼년상으로 해야 하고 제사는 반드시 전하가 주제(主祭)가 되어야 한다는 설을 극력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본디 온 나라의 공론이 있는 것으로서 신 한 사람이 감당할 문제가 아닌데 어찌 일일이 각승(角勝)하는 것처럼 따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남이 한창 나를 공격하고 있는데 내가 또 그를 그르다고 한다면 그것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남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또 그렇게 주고받고 해 봐야 그저 전하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압강(壓降) 문제에 있어서는 성상의 주견이 확정되어 이의(異議)가 있더라도 결코 거기에 현혹될 염려는 없을 것인데, 어찌 감히 쓸데없는 말로 다시 시끄럽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다만 남의 준엄한 꾸짖음을 받고 그냥 편안히 있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번거롭게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신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신다는 뜻에서 신이 맡고 있는 경악(經幄)의 장관 직책을 즉시 그만두도록 윤허하시어 어리석은 신의 마음을 편안케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용은 잘 보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앞으로는 모든 차진(箚陳)할 때의 일을 자세히 살펴서 하라."
하였다.
3월 11일 갑인
해조에 명하여 원소(園所)를 수호할 군사를 정하도록 했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덕흥군(德興君) 묘소는 선조 대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에도 수묘군(守墓軍)을 7호(戶)만 정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전례가 될 듯 싶습니다. 다만 김포(金浦)의 산소 부근에는 거주하는 백성이 적고 수목도 없는 벌거숭이 산이어서 수호하는 사람이 적을 경우 청소 작업이나 초목(樵牧)을 금하는 데 손이 모자랄 염려가 있으니, 수를 늘려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병조로 하여금 15호를 골라 정하고 45명의 봉족(奉足)을 산 밑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게 하면서 각기 위전(位田)을 주고 면세(免稅)와 복호(復戶)를 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5호를 더 정하도록 명하였다.
3월 12일 을묘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상장(喪葬)에 있어 모든 행사와 제식(祭式) 그리고 의물(儀物) 등에 대하여 전에 도감 당상 및 대신들과 함께 논의하여 계하(啓下)받았습니다. 그런데 그후로도 미진한 문제들이 일에 따라 자꾸 발생하는데 그것은 예문(禮文)에 실려 있는 것들도 아니고 또 등록(謄錄)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아닌 전에 없던 변례(變禮)이기 때문에 난처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이 닥치고 나서야 부득이 정문(情文)을 참작하거나 옛 규례에 의거하여 성상의 재가가 있도록 여쭙는 실정이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성효(聖孝)에 부응할 수 있겠으며 뭇 논의에 걸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발인할 때도 각 관아에서 1원(員)씩 교외에 나아가서 송영(送迎)하는 것이 옳을 것 같으나 그 문제는 상께서 거둥하실지의 여부가 결정된 이후에야 논의해서 여쭐 일입니다. 노제(路祭) 후의 여러 제전(祭奠)에 관한 절차와 폄장(窆葬) 절차 및 졸곡(卒哭) 이후 거둥하실 때의 복색(服色) 등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하는데, 대신이 회좌(會坐)한 곳에서 신들과 도감 당상이 하나하나 같이 논의하여 시행했으면 합니다."
하니, 따랐다.
완성군(完城君)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였다.
"숨김 없이 할 말을 다 하는 것이 임금 섬기는 도리이다. 남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경에게 손상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3월 13일 병진
상이 하교하기를,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는 나라일은 생각하지 않고 눈 앞에 닥친 욕만을 모면하기 위하여 환자곡[還上穀] 중에 조금 남은 군향(軍餉)을 중국인에게 몽땅 주어버렸다. 적이 강을 건너오지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만약에 적들이 휘몰아오는 걱정이라도 있게 되면 무슨 군량으로 방어할 것인가. 그렇게도 무모하고 경솔한 사람을 중임(重任)에 그대로 두어 대사를 그르치게 할 수 없으니, 그를 체직시키는 것이 좋을지의 여부를 대신에게 물으라."
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군량을 관리하는 신하는 위임받은 임무가 중차대하니, 중국 군대를 접제(接濟)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할 생각도 마땅히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준구는 독부(督府)에 몰려 사세가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주선을 잘 하지 못한 채 목전의 일을 피하려고 임시 방편만을 위하여 중요한 관방(關防) 지대의 창저(倉儲)가 텅 비게 만들고 말았으니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상의 하교대로 체직해야 마땅하겠으나 다만 막중한 임무를 자주 바꾼다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인 듯합니다. 우선 그를 중하게 추고하여 앞으로라도 일을 잘하도록 하고, 다시 마음을 다해 요리하여 의주(義州)와 안주(安州)에서 이미 써버린 양곡의 수 만큼 성화같이 운반해 오게 함으로써 조만간 군대가 동원되더라도 양향이 부족한 염려가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이미 써버린 환자곡도 그 수만큼 운반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거자(擧子) 원영길(元永吉)이 허통(許通)이 안 된 서얼(庶孽)로서 함부로 무과에 응시한 죄에 대해서는 대명률(大明律) 관원 습음조(官員襲蔭條)의 ‘만약 서출 자손이 참람되게 습음한 경우에는 장 일백(杖一百)·도 삼년(徒三年)으로 처벌한다.’는 규정에 의거하여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과거를 보일 때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아직 허통 안 된 서얼이 함부로 응시한 경우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죄를 적용한다.’고 했다 하기에, 신들이 지금 막 사유를 갖추어 여쭈어보려던 참이었는데, 거자 윤익(尹瀷)이 또 같은 죄로 자수해 왔습니다. 전가 사변의 율이야 말로 과중한 벌인데,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일정하게 적용하는 법률 이외에 또 별도의 사목이 있을 줄 어찌 알기나 했겠습니까. 따라서 원영길과 윤익에 대해서는 대명률의 조목을 적용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되면 사목과 위배되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모두 사목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3월 14일 정사
헌부가 아뢰기를,
"살인죄에 대해서는 왕법이 지극히 준엄하니 조금이라도 의심의 실마리가 있을 때는 반드시 끝까지 추궁하여 사실을 캐내는 것이 관례입니다. 유함(惟諴)이 밤중에 종무(宗武)를 묶어 말 위에 싣고 갔다는 사실은 겨린(切隣)의 공초에서 밝혀진 것으로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명백한 일이며 그가 묶어간 뒤에 끝내 놓아둔 곳이 없고 보면 그 형적이 의심스러울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을 캐내기도 전에 금방 놓아 준 것은 옥(獄)을 다스리는 사체로 보아도 그렇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설령 유함의 행적에 의심쩍은 데가 없다고 하더라도 현재 벼슬을 하고 있는 종실로서 외방에 출몰하면서 멋대로 흉악한 일을 하였으니 국법을 무시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유배하여 나라의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니, 따랐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장령 정세구(鄭世矩)·민응형(閔應亨), 지평 이경의(李景義)·김육(金堉)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큰 변혁을 일으킨 몸으로서 뭔가 크게 할 수 있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백성을 돌보기에 충분한 어짐과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과 일을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계십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성심과 간언을 따르고 과실을 고치는 성심과 학문에 몰두하는 성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만 입지(立志)가 굳건하지 못하고 존주(存主)가 확고하지 못하여 한결같이 물러서려고만 하고 떨치고 일어나질 못하십니다. 그리하여 도에 뜻을 두어도 그 도가 밝아지지 않고, 치(治)에 뜻을 두어도 그 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나를 버리고 남을 따르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도 어진 선비들이 날로 멀어져 여유있게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보이지 못하고, 백성을 상처받은 사람 보살피듯 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도 원망이 날로 일어나 그렇게 보살피려는 덕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딴 이유가 있어서 그러겠습니까. 바로 전하의 뜻이 확립되지 못하여 결국 다른 사물에 따라 옮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뜻이란 마음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나고 들고 하는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는 두 갈래의 의혹이 없어야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여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고 아무리 하여도 바꾸어지지 않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상을 당하신 이후로 너무 슬픈 나머지 지극한 인정에 가리워 전례(典禮)를 그대로 준수하지 못하고 법도에 넘치는 일을 많이 하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압강(壓降)하는 제도에 있어서는 그것이 국시(國是)와 관계된 문제이고 성상의 주견도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평소 전하가 예학(禮學)에 관심을 두었던 뜻을 이번의 이 일로 더욱 증험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염려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지금 논의가 시끄럽게 일고 있는 것이 각기 자기들 의견을 내세우기 위하여 종횡으로 변론을 구사하여 되도록 상대를 꺾으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고, 그리하여 대신들은 물러갈 뜻을 가지고 있어 기상이 매우 좋지 않으므로 신들로서도 근심과 염려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유신(儒臣)들의 논란을 거친 것이고 묘당에서도 익히 강론한 것으로서 성경(聖經)에 근거하고 의례(儀禮)를 참고하여 정문(情文)을 절충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려놓은 것이기에 조야(朝野)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따르면서 이의가 없는 것들입니다. 신들의 한 두 마디 말을 더 보탤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 임금의 뜻만 정해지면 공과 사가 금방 구별될 것이고 정과 뜻이 서로 통하면 위아래가 막힘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흥망과 치란의 갈림길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언제나 말을 듣는 즈음에 외정(外庭)의 논의에 오히려 혼돈을 일으켜서 그것이 비록 예에 맞고 사리에 어긋남이 없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거나 평탄한 마음으로 살피시지를 못하고 혹 사사로운 뜻에 집착되고 혹은 노여운 마음이 앞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자주 아랫사람을 대함에 있어 사기(辭氣)가 너무 드러나 보이고 뜻에 맞고 맞지 않음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므로 갑과 을이 모순이 되고 호(好)와 오(惡)가 분명하지 못하게 되므로 바른말 하는 사람이 침묵을 지키고 식견있는 논리가 옥하(屋下)의 한담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는 사실 사리대로 순응하는 성인의 공도가 아닌 것으로서 임금의 뜻도 확고하지 못하고 위아래가 서로 막혀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신들이 우선 근일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합계(合啓)하여 논했던 것이 나라 전체의 공의였는데도 전하는 그것을 거절하였고, 여러 궁가(宮家)의 폐단을 법에 의거하여 극력 간하였는데 전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면쇄(免刷)하는 한 가지 일도 간원이 논할 때는 끝까지 채택을 하지 않으셨는데, 중신(重臣)이 한번 아뢰자 곧 윤허하셨습니다. 이것은 전하가 우리 대관들을 이목(耳目)으로 여기시지 않은 것으로서 신들이 자리를 메꾸고 있다는 것이 또한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 어찌 성명께 바라던 것이겠습니까.
현재 하늘에서는 경계할 것을 보여주고 있고 요사스런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는데, 머지 않아 조사(詔使)가 들이닥칠 상황에서 장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계속되는 부역과 겹친 부세로 백성의 힘은 이미 바닥이 나 있고 창고도 있는 대로 털어내어 국저(國儲) 역시 고갈 상태입니다. 나라의 근본이 한 번 흔들리면 다시 걷잡을 수 없을 것인데 이렇게 시들고 위급한 상황하에서 누구 하나 자신을 잊고 모든 노력을 다하여 원망을 자기가 맡아가면서 해 나갈 자가 없으니, 신들이 전하를 위하여 생각할 때 이 뒷 수습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궁위(宮闈)는 엄숙하기가 점점 처음과 같지 않고, 내수(內需)의 폐단은 날로 더 심해가고 있으며, 궁가에서는 남의 전답과 집을 무턱대고 점거하는가 하면, 훈척(勳戚)들이 멋대로 기세를 부리는 등 비록 낱낱이 다 들 수는 없어도 초야에서의 평판은 과거에 비하여 자못 심해가고 있으므로 신들이 통탄해하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일대 혁신을 가하시어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큰 뜻을 분발하여 뭇 신하들을 바로잡아 거느리소서. 그리하여 실덕(實德)을 닦아 위로 천재에 대응하시고 자신만을 믿지 말고 남의 지혜를 즐겨 취하실 것이며 의식과 예절을 분명하게 정하여 국시(國是)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폐막을 돌보아 주며 그들에게 실지 혜택이 돌아가도록 힘쓰소서. 그러면 뜻이 이미 확고히 서게 되고 모든 교화도 이루어져 위 아래가 서로 믿게 되고 일도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없게 될 것이니, 그 누가 감히 그냥 세월만 보내면서 자기 직책을 수행하지 않고 불성실하게 되는 죄를 벌할 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뜻을 확고히 세워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제일의(第一義)로 삼은 까닭이 진정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 유의하소서.
신들로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뢰어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줄 아오나 요즘 동료 관원들이 제회(齊會)하지 못하여 한 번의 차자마저 늦게 올리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신들의 죄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용은 충분히 알겠다.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경들의 충성에 대하여 나로서 매우 가상하게 느끼고 감탄하였다. 차자 내용을 내가 마음에 새기겠다."
하였다.
3월 15일 무오
상이 전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에게 봄 여름의 옷감을 보내도록 명하였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명하여 서방에 나가는 포수(砲手)·살수(殺手)에 대하여 재능을 시험하고 시상을 하도록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포(金浦)의 산소에도 당연히 묘호(墓號)가 있어야 할 듯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한대(漢代)의 고사에 따라 논의하여 정하게 하라."
하니, 예관이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고사를 널리 상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홍문관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 ‘한 선제(漢宣帝)가 즉위한 후 조서를 내리기를 「고 황태자(皇太子)038) 를 호현(湖縣)에 장사하였지만 아직 시호(諡號)가 없고 세시(歲時) 때 제사도 없었다. 태자의 시호를 의정하고 원읍(園邑)을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예문에 의거하면 남에게 입양되어 간 이는 입양한 사람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자기의 본생 부모에 대하여는 강쇄(降殺)의 예가 적용되어 친히 제사를 모실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부를 존중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폐하는 효소 황제(孝昭皇帝)의 뒤를 이어 조종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고 황태자 묘위는 호현에 있고 사 양제(史良娣)039) 의 무덤은 박망원(博望苑) 북쪽에 있으며 아버지 사 황손(史皇孫)040) 묘위는 광명(廣明) 성곽 북쪽에 있다. 시법(諡法)에 의하면 시호란 그의 생전의 행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시호는 도황(悼皇), 어머니는 도후(悼后)로 하고 제후왕(諸侯王)의 원(園)에 준하여 3백 호(戶)의 봉읍(奉邑)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황태자의 시호는 여(戾)로 하여 봉읍 2백 호를 두고, 사 양제는 여부인(戾夫人)으로 하여 무덤지기 30 호를 두며 원(園)에는 장승(長承)을 두고 순찰하고 경비하기를 법대로 하게 하면 좋겠다.」 하였다. 그리하여 호현 문향(閿鄕)의 야리취(邪里聚)를 여원(戾園)으로 하고, 장안(長安)의 백정(白亭) 동쪽을 여후원(戾后園), 광명(廣明)의 성향(成鄕)을 도원(悼園)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나 유사가 다시 아뢰기를 「예문에 의하면 아버지가 사(士)이고 아들이 천자이면 제사를 천자의 예로 모신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도원(悼園)에 대하여 당연히 존호(尊號)를 올려 황고(皇考)라고 하고 사당[廟]을 세울 것이며 묘원(墓園)을 침전(寢殿)으로 만들고 시절마다 제사를 올리는 한편 수호할 민가도 더 늘려 1천 6백 호가 되도록 하고 거기를 봉명현(奉明縣)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여부인은 높여 여후(戾后)로 하여 원(園)과 봉읍(奉邑)을 두고 여원과 여후원의 봉읍을 늘려, 각각 3백 호가 차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일단 한대의 고사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만, 양한(兩漢)041) 에 걸쳐 사친(私親)을 높이 받든 형제들이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환제(桓帝)·영제(靈帝) 같은 이들은 모두 자기 친생 고비(考妣)를 추존하여 황(皇) 또는 후(后)로 하였으므로 그들 장지(葬地) 역시 바로 능(陵)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너무나 예를 무시하고 제도에 어긋난 처사여서 성상께서도 매우 싫어하시어 그렇게 하시려고는 않으실 줄로 믿습니다. 다만 선제(宣帝)는 능이라고 쓰지 않고 원으로 칭하였는데, 이 밖에는 달리 근거 삼을 만한 고사가 없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예조가 이것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였다. 좌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능이라는 글자를 이미 쓸 수가 없고 원이라는 글자 역시 근래에는 쓰이지 않던 것이니, 성상의 하교대로 묘(墓) 자 위에 별도의 명칭을 붙여 일반 묘와 구별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신흠(申欽)은 아뢰기를,
"김포 산소에 묘호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예조에 내리신 전교를 삼가 받들고 이어 홍문관이 널리 고사를 상고한 끝에 아뢴 내용을 보건대, 홍문관이 고출한 것은 묘가 아니고 원에 관한 일이어서 성상이 하교하신 본의와는 어긋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일단 널리 상고해 본다는 뜻에서 그 원(園)의 기원을 고찰해 보건대, 삼대(三代) 이전에는 묘제(墓祭)가 없었다가 진(秦) 대에 와서 비로서 묘 옆에 침전(寢殿)을 두었는데, 한(漢) 대에 진대의 제도를 그대로 인용하여 모든 능에도 침전을 두어 생시에 기거하던 것과 똑같이 의복 등 모든 용구를 갖추어 두고 침원(寢園)이라 이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태상황(太上皇) 이하 고제(高帝)·혜제(惠帝)·문제(文帝)·경제(景帝) 등 대대로 있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원이란 바로 능을 달리 부르는 칭호인데, 옛 사람들의 문자상에도 원릉(園陵)이니 침원(寢園)이니 하여 천자 제후의 구별없이 써 온 것으로서 묘자와 능자의 사이에 별도의 원자를 두어 그것으로 위아래의 등급을 나타내기 위하여 능이니 원이니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원(戾園)·도원(悼園)도 능처럼 침전을 두어 세시(歲時)에 제향을 올린 것이 아니라 그들 침전이 있는 곳에 그들 시호인 여(戾)·도(悼) 두 글자를 합쳐 여원 또는 도원으로 불렀던 것이니, 수릉(壽陵)042) 이나 장릉(長陵)043) 처럼 특수한 칭호로 만든 것은 아닌 듯합니다. 대체로 원이라는 호칭은 한대에는 성행하다가 당(唐)·송(宋)으로 내려 올수록 점점 줄어들고 원(元)·명(明) 이후로는 더욱 보기가 드물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전혀 원으로 칭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만약 묘를 원으로 고쳐 부르려고 한다면 처음으로 시작되는 일이라서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주상의 하교대로 묘자 위에 색다른 명칭을 붙여 다른 묘와 차이가 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학(禮學)에는 원래 어두운 신으로서 절충을 취할 만한 소견이 어디 있겠습니까. 감히 억설을 올리면서 주상의 재가가 있기를 엎드려 바라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한대의 고사에 의하도록 하교를 내렸었는데 대신들의 헌의(獻議)가 이와 같으니, 그들이 말한 ‘주상의 하교대로’라고 칭한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단문(短文)한 소치로 말이 부실하여 사체에 손상을 입힌 일을 저질렀으니, 이것이 나의 과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능과 원이 등급이 없지 않을텐데 저처럼 말하니 그 뜻도 나로서는 모르겠다."
하였다. 대신들이 이로 인하여 대죄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제(帝)와 왕(王) 두 칭호가 원래는 높낮이가 없었던 것인데 진대에 와서 그것을 구별하여 지금까지 준행하고 있다. 능과 원도 그것이 공통된 칭호라고 하나 한대와 송대에 구별을 둔 것이 어째 아무 뜻 없이 그러했겠는가. 더구나 원이라는 그 칭호가 원래 능명(陵名)처럼 참람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 선제가 했던 대로 김포의 산소에 대해서도 무슨 원(園)이라고 칭하여 조금은 구별하는 뜻을 나타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예문관이 원의 호칭을 찬정(撰定)하였는데, 결국 육경(毓慶)으로 계하(啓下)되었다.
3월 16일 기미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를,
"신들이 논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의 해택(海澤)·어염(魚鹽)에 대한 면세(免稅) 등 건에 관하여 할 말을 다한 지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막막하게 윤허를 하지 않으시니, 이는 신들의 성의가 부족한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이 일이 그다지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그만두어도 좋겠으나, 이 일에 인심의 이합(離合)이 달려 있고 국가의 안위가 관계되기 때문에, 또 한번 목소리를 같이 하여 호소함으로써 상의 일대 각성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을 백성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왕정(王政) 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이라 하여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신하로서도 무작정 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왕조에서 혹시 일시적으로 누구에게 하사한 오은(誤恩)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그것이 비도(非道)임을 알면서 어찌 고치지 않고 그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해택(海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땔나무를 하는 산림까지도 모두 입안(立案)하여 금하고 있어 백성들이 그 속에서는 땔나무를 하고 가축을 칠 수 없게 하고 있는데, 이 폐단이 혁파되지 않는다면 후일에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일어나게 되어 백성 모두 흩어져 결국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 산 속의 사원(寺院)들까지도 각 궁가의 원당(願堂)이라는 구실로 많은 위전(位田)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면세까지 받고 있고, 각 아문도 면세의 전답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야말로 매우 놀라운 일로서 단 하루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문제들입니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 소속되어 있는 해택과 어세 그리고 전결(田結)에 대한 면세 규정을 일체 혁파하도록 명하시고, 아울러 땔나무를 하는 산림을 점거하고 있는 경우와 사원의 면세받고 있는 위전에 대하여도 해당 관아에서 철저히 조사하여 혁파하도록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의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혁파할 수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는 뜻을 이미 남김없이 밝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만두지 않고 이렇게 집요하게 논하고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세 차례 아뢰자 각 아문의 면세전만을 조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해조가 복계(覆啓)하기를,
"각 도의 전안(田案)을 가져다 조사한 결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둔전(屯田), 충훈부에서 떼어 받은 것, 비변사 소모진(召募陳)의 것, 사복시의 것, 관학(館學)·서원(書院)의 것 등 총계 2천 90여 결(結)이었습니다. 이를 법규로 헤아려 보건대 비록 하사받고 떼어받은 것을 백성에게 경작하게 하고 그 중 절반을 받아들이는 경우라 하더라도 면세를 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대간의 논의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도감의 둔전만 조세를 받지 말도록 명하였으므로 대간이 다른 관아까지 포함하도록 계속 간쟁하였으나 끝내 쾌히 따르지 않았다. 비록 조사 처리하였다고는 하나 고질적인 폐단은 그대로 남아 있어 군의(群議)가 애석하게 여겼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서(兩西) 지방은 연이어 흉년이 든데다 군대를 모집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일까지 겹쳐 백성들의 힘이 바닥이 나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관(官)에 있는 자들은 접빈에 관한 잘못된 규정을 그대로 지켜 여악(女樂)을 갖추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태평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금령(禁令)을 하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직도 옛날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매우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각종 사명(使命)의 접대와 맞아들이는 절차에 관해서도 일찍이 조목을 만들어 팔도에 공문을 띄움으로써 모든 것을 절감하도록 전과 같이 독책하고 있으나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자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감사가 반드시 먼저 검약을 실천해야만 법을 어긴 다른 사람을 단속할 수 있을 것인데 감사 자신이 또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 조사(詔使)가 곧 오게 되어 모든 수응(酬應)이 보통 때와는 너무나 다를 것이니, 더욱 더 절손(節損)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마(駕馬)의 폐단도 점차 불어나 오늘에 와서는 타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졸(郵卒)이 시달리다 못해 없어지고 체전(遞傳)도 끊길 지경인데, 그 원인이 또한 누구나 다 탈 수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인 만큼 어떠한 한계를 정하여 크나큰 폐단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중신(重臣)으로서 늙고 병들어 말을 탈 수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그 나머지 사명(使命)이나 수령들은 가교(駕轎)를 일체 타지 못하도록 하고, 만약 그것을 어긴 자가 있을 때는 준 자나 받은 자를 모두 적발하여 중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각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거듭 밝혀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신경진(申景禛)을 공조 판서로, 윤의립(尹毅立)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이목(李楘)을 이조 참의로, 정백창(鄭百昌)을 사헌부 집의로, 윤징지(尹澄之)를 승정원 주서로 삼았다.
진시와 사시에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배(背)가 있었으며 안은 적색이고 겉은 청색이었다.
3월 17일 경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모든 계하(啓下)된 공사에 대하여 각사(各司)가 3일 이내에 회계(回啓)하지 않을 때는 정원이 일일이 적발하여 추치(推治)하도록 전에 이미 하교하였다. 그런데도 보통으로 알고 단속하지 않고 있으니, 정원의 행위가 지극히 잘못되었다. 승지는 그 실책을 면키 어려우니 모두 추고하라."
하니, 좌승지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승지 모두를 추고하라는 명이 계셨으니 신들도 모두 추고를 받아야 할 대상이므로 감히 승전(承傳)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사헌부 성상소(城上所)를 명초하여 곧바로 승전을 받들도록 하였으면 하여 감히 아룁니다."
하자, 알았다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조정의 체면은 안과 밖의 한계가 분명하니 이를 서로 문란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전라 감사 민성휘(閔聖徽)은 번신(藩臣)의 신분으로서 주제넘게 도감(都監)에 관문을 보냈으니 그것만으로도 벌써 체통을 잃었는데, 나아가 헐뜯고 꾸짖는 말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곳에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망령되고 방자한 죄가 어찌 자급(資級)을 강등하는 것만으로 될 일이겠습니까. 그가 비록 선치(善治)를 하였다는 이름은 있으나 그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니 파직을 명하소서.
도총부(都摠府) 관원은 그 임무가 막중하여 아무나 함부로 있을 곳이 못 됩니다. 그래서 조종조에서 가끔 무변(武弁)을 임명한 경우가 있기는 하였어도 반드시 명망이 당대를 주름잡던 자를 골라서 임명했던 것이니 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전혀 인재를 고르지 않고 함부로 제수한다는 기롱이 많습니다. 도총관(都摠管) 안륵(安玏)은 원래가 어긋나고 고약한 사람으로 그가 재신 반열에 섞여 있게 된 것만도 놀라운 일이라 하겠는데 본직(本職)의 제수까지 받게 되니 물의가 떠들썩합니다. 그리고 도총관 이응순(李應順) 역시 매우 용렬하여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닙니다. 정사의 체계가 전도됨이 이보다 더 할 수가 없으니 안륵·이응순 모두를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러한 시기에 방백(方伯)을 교체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하기 때문에 이모 저모로 살핀 끝에 내린 벌이니 더 이상 번거롭게 말라. 안륵은 그의 나쁜 점을 젖혀 두고 그를 수용하므로써 그로 하여금 자신(自新)의 길을 걷게 한 것이니 안 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응순은 비록 뛰어난 재주는 없으나 그런 대로 일을 맡을 만한 인물이다. 그들에 대하여 다시 번거롭게 말라."
하였다.
3월 18일 신유
사헌부가 아뢰기를,
"경기 수사(京畿水使) 유응형(柳應泂)은 사람됨이 방자하고 집안의 행실도 도리에 어긋난 짓을 잘했는데, 기보(畿輔)의 관원으로 제수되고 나서는 그 마음이 더욱 거리낌이 없어 형장(刑杖)을 함부로 휘두르고 탐욕과 포악한 행동이 날로 심해져 갔습니다. 심지어는 대신의 아문에 보고하는 문투까지 너무 거만하고 상대를 얕잡아보는 투여서 듣는 자마다 통탄해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명하여 조정을 업신여긴 죄를 징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유응형이 잘못이 있다면 벌을 주어 마땅하나 다만 그가 도임한 이후로 나라 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파직시킬 것까지는 없고 우선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비로소 체차할 것을 명하였다.
진시부터 오시 미시까지 햇무리가 졌는데,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안은 적색이었고 밖은 청색이었다.
3월 19일 임술
정원에 하교하기를,
"초상 때 습(襲)과 염(斂) 등의 일에 대하여 판윤 구굉(具宏) 이하 세 사람이 마음을 다해 주선한 덕택으로 마지막을 보내는 대례(大禮)가 유감없이 될 수 있었기에, 내가 그들을 지극히 가상하게 여기는 동시에 다행으로 생각한다. 해시(該寺)로 하여금 각기 숙마(熟馬) 1필씩을 내려 나의 뜻을 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외방에서 올려오는 삭선(朔膳)에 대하여 소선(素膳)으로 봉진하라고 해조에서 공문을 보내 알리지 않았던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당초 각도에서 삭선을 올릴 때 고기를 포함시킬 것인지의 여부에 대하여 공문으로 물어 왔기에 본 아문에서는 각도에 옛날부터 시행해온 규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참고하여 시행하도록 하고, 졸곡(卒哭) 전에는 고기는 포함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통지하였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졸곡 후에도 소선(素膳)으로 봉진하도록 다시 통지하라."
하였다. 당시에 황해 감사가 육선(肉膳)을 올려왔기 때문에 상이 특별히 그를 추고할 것을 명하고 이어 이러한 하교를 내렸다.
상이 승지를 보내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에게 돈유(敦諭)하였다.
"근래 들어 모병(毛兵)은 군량이 동이 나고 조사(詔使)는 곧 올 형편이라서 경외(京外)가 경황이 없고 사세가 급박한데, 지금이 어느 때라고 경은 모른체 한다는 말인가. 경은 훈척(勳戚)의 신하로서 종국(宗國)이 위기에 있는데 아무 걱정없이 앉아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경은 모름지기 나의 이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조정 전체를 총괄하여 살피도록 하고, 공아(公衙)에 나오지 못했던 것을 혐의롭게 여기지는 말라."
윤형언(尹衡彦)을 사헌부 집의로, 김육(金堉)을 지평으로, 윤지경(尹知敬)을 사간원 사간으로, 오준(吳竣)을 홍문관 부교리로 삼았다.
3월 20일 계해
호조가 아뢰기를,
"이번에 조사가 올 때도 당연히 종전의 예대로 무명베를 거두어야 할 것인데, 지금은 목면(木棉)이 귀하여 민간에서 마련하기가 매우 어렵기에 전일 빈청(賓廳)에서 회의할 때 모영(毛營)에서 은자(銀子)를 빌려 충당하고 의례이 거둘 결포(結布)를 가을에 작미(作米)하여 갚는 것으로 입계해서 결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은자는 모영의 힘을 전적으로 빌린다고 하더라도 예단(禮單)이라든지 또 그쪽에서 청구하는 인삼(人蔘)이 필시 몇천 근을 밑돌지 않을 것이며 기타 서울에서 무역해 쓸 물건이 매우 많을 것인데, 무명베 한 필도 거두지 않는다면 그 비용을 어디에서 마련해 내겠습니까.
따라서 생각건대 바닷가 가까운 고을에서는 작미하는 것을 편리하게 여기고 산골이나 바다가 먼곳에서는 베로 내는 것을 편리하게 여긴다 합니다. 지금 하삼도(下三道)와 강원도에 대하여 을축년에 적용했던 전결(田結)을 기준으로 조사 유(劉)와 양(楊)이 왔을 때의 예대로 매 3결(結)마다 무명베 1필씩을 받기로 하면 2천 1백 52 동(同) 7필이 됩니다. 이 중에서 4분의 1에 해당하는 5백여 동은 산골 또는 바닷가 먼 곳에서 지금 당장 베로 받아들여 인삼을 사들일 자금으로 충당하고, 바닷가 가까운 고을에서 거둘 1천 5백여 동은 금년 가을 형편을 보아가며 작미하여 받아들여 은자 상환용으로 이용하면 편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신의 뜻도 그러하기에 감히 이렇게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세가 그렇다면 징수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산골은 작년 농사를 망쳐 지금 당장 먹을 거리가 없는 형편인데 그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먼저 결포부터 받아들이면 출역(出役)에 있어 균등하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복계(覆啓)하기를,
"이 시기에 베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신들도 알고는 있으나, 조사가 곧 올 것인데 당장 베 1필도 없어 모든 일을 준비하려 해도 속수 무책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산골의 경우 지난해 농사는 풍년이 들지 못했지만 목화(木花)는 꽤 잘 되었다고 하고, 지금 또 모병(毛兵)에게 보낼 군량을 작목(作木)으로 하기를 바란다는 보고가 곳곳에서 똑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제 3결당 베 1필을 받았던 구례대로 그 뜻을 우선 민간에 알리고 나서 산골은 그곳에 배당된 면포를 먼저 징납하고 그 밖의 고을들에 대하여는 가을철에 작미하여 받으면, 비록 먼저 받고 뒤에 받는 차이는 있지만 출역의 입장에서는 균등하지 못할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신들도 백성을 우선 돌보시려는 성상의 지극하신 뜻을 받들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세가 급박하기에 감히 종전의 청을 다시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만둘 수 없다면 우선 6결당 베 1필씩을 받아 인삼 값에 보충하고 나머지 절반을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 받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가 다시 사세가 불편한 점을 들어 아뢰면서 전번에 아뢰었던 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평안도의 유학(幼學) 변지익(卞之益)이 상소하여 아비 변헌(卞獻)의 문과 급제를 회복시켜 줄 것을 애걸하였는데, 예조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자, 상이 따랐다. 【 변헌은 안주(安州)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는데,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장성한 후 환속하였다. 그는 허균(許筠)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경술년에 허균이 고관(考官)으로 있으면서 사(私)를 많이 행하였을 때 헌 역시 그 속에 끼었다. 그래서 대론(臺論)에 의하여 방(榜)에서 삭제를 당하였기 때문에 지금와서 그의 아들이 억울하다고 상소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84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인사-선발(選拔)
ⓒ 한국고전번역원
한성부가 방민(坊民) 1천 2백 명을 뽑아 산소(山所)에 나누어 보내고 또 여사군(轝士軍)도 4천 7백 명을 뽑았는데,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매 1호(戶)당 1명씩 뽑은 것이라고 하였다.
평안도에 시예(試藝)를 명하여 수석으로 합격한 출신(出身) 장내현(張乃賢)은 변장(邊將)에 임명하고 포수 정경립(鄭景立)은 금군(禁軍)을 제수하였다.
전라도 보성(寶城)에 사는 진사 안유신(安由愼)이 호패(號牌)를 실시하는 법을 비방하면서 욕스러운 말을 문안으로 작성하기까지 하였다 하여 감사 민성징(閔聖徵)이 계문하였다. 호패청(號牌廳)이 아뢰기를,
"안유신이 글자를 아는 유생으로서 감히 사리에 어긋난 말을 가지고 나라의 법을 헐뜯고 업신여겼으니, 그의 정적(情跡)을 따진다면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뚜렷이 나타난 문서에 의거해야 할 것인데, 지금 그 만들어진 문서를 볼 때 뒤에 고친 흔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실제로는 그러한 내용은 없으니, 이미 고쳐버린 것을 추급하여 논할 것까지는 없을 듯싶습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중하게 죄를 매겨 그의 어긋나고 망령된 습성을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유신이 글자를 아는 유생으로서 조정을 업신여기고 국법을 우롱하는 뜻으로 감히 설만하고 무리한 말을 문자로까지 나타내어 공안(公案)을 더럽혔으니, 그 죄는 주벌해도 시원치 않다. 다시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
하였다. 호패청이 다시 아뢰기를,
"안유신의 어긋나고 망령된 죄는 허위로 날조한 것이 아닌 듯하여 지극히 놀랐습니다만 정서하여 문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고쳐버렸습니다. 조정에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다만 나타난 사실만을 들어 죄를 매겨야 하지 만약 그와 혐의가 있는 집에서 꾸며낸 말을 토대로 남의 숨겨진 비밀까지 들추어 내어 그를 꼭 죽을 지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은 성조(聖朝)의 관대한 덕에 손상을 끼치는 일이 아닐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본도에서만 다스리고 말도록 청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성상의 하교를 받고 역시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격려한다는 지극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겠습니다. 무릇 형벌을 적용하는 즈음에는 당연히 사실을 분명히 밝혀내야 할 것이니, 안유신을 왕옥(王獄)으로 잡아들여 다시 엄한 신문을 거쳐 죄를 부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마침내 그를 잡아들여 국문한 뒤 해서(海西)로 정배하였다.
3월 21일 갑자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예에 지나치도록 상제(喪制)를 지키시느라 옥후가 점점 처음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무슨 증후가 있어 그러시는지 알 수는 없으나 뭇 신하들로서는 민망하고 절박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신 등으로서는 오늘도 한 번 면대해 주실 것을 청하여 옥안을 우러러 뵙고 하정(下情)을 진달하고 싶은 심정이오나 대죄하는 입장이라서 황공하여 감히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위로 종사(宗社)의 중함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신민의 기대를 살피시어 멸성(滅性)의 경계를 깊이 거울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혹 의관(醫官)을 불러 증후를 살피게 하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진현(進見)하게도 하여 옥체가 어떠한지 알게 하실 것이며 너무 손상되기 전에 때때로 적당한 약물도 복용하소서. 신 등이 간곡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는 지금 병이 없다. 그리고 경들에게 걱정을 끼칠까 염려하여 조심조심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들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도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였다.
영의정 이원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하유를 받들고 황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지난 계해년044) 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신의 나이 이미 80이 가까워 본래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할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명의 세상을 만나 감히 결연히 떠날 수 없었던 데다가 10년을 한가로이 있으면서 몸을 조섭했기 때문에 그런 대로 지탱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후 몇 년을 지나면서 허리와 다리의 병이 점점 깊어갈 뿐만 아니라 원기(元氣)마저 마치 서산에 지는 해처럼 쇠약해져 달이 바뀌면 달라지고 계절이 바뀌면 더 심하여만 갔습니다. 그리하여 실오라기같은 정신마저도 다시 혈기(血氣)에 빼앗겨 흐트러지고 지려(志慮)도 손상되어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통에 부서(簿書)를 대해도 까마득하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가지 계책이라도 내어 나라 일에 도움을 주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실정인데, 이는 잔약하고 병든 사람이 나이 80이 되었으니 당연한 이치로서 이상할 것이 없다 하겠습니다.
신은 나이 80이 되어서야 성명을 섬기에 되어 이제 다시 성상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분주히 노력을 기울여도 시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늙은 신하의 이같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신에게 감당못할 일을 맡기시고 신이 하지 못할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전후에 걸쳐 정녕하고도 준엄한 성지를 누차 내리시니, 신은 이로부터 두려움을 안고 죽게 되어 지하에 가서도 눈을 감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대를 두고도 찾아보기 힘들 성상의 남다른 은총이 혹시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할까 하여 신은 정말 ‘크나큰 하늘과 땅도 유감이 없을 수 없다.’는 심경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상께서 상중에 계시므로 신이 감히 잇달아 걸고(乞告)는 하지 못할 형편입니다만, 사실(私室)에서 헛되이 직명(職名)만 갖고 엎드려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사세로 보아 매우 분명한 일인 데다가 조사(詔使)가 오는 등 일이 많은 때에 죽음을 앞에 둔 병든 신하로서 그냥 눌러앉아 있을 수는 더욱 없는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물러 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신 자신은 보잘것없는 몸인데도 명위(名位)를 돌아보건대 선왕조에서 중신(重臣)으로 삼으셨고 성명께서 사랑하여 발탁하셨습니다. 자애로운 성상께서 신을 죽음을 앞둔 구물(舊物)로 보시고 너그럽게 용납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고 땅에 들어가게 해 주신다면 어찌 다만 천신(賤臣)의 영광이며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국가의 예의(禮義)로써 늙은 신하를 대우했다는 미덕의 말이 만세를 두고 전해질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여염에 있을 때부터 경의 이름을 익히 들었는데 경이 나라를 다스려온 덕택에 오늘이 있게 된 것이다. 나도 경을 의지하여 치세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러나 경이 나이가 많고 병이 있으니 서로 권장하고 격려할 날이 앞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때로 이 점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인다. 경이 늙기는 하였으나 정신은 쇠퇴하지 않아 이 어려운 시기를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심회를 이해하여 안심하고 조리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요즘 들어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염치의 도리가 없어져서 이대로 가다가는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다시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니, 어찌 한심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혼조(昏朝) 때 궁첩(宮妾)과 적신(賊臣)의 무리들이 백성의 전지(田地)를 마구 빼앗아 전장(田庄)을 만들고 진(陳)이라고 칭하던 곳에 대해 각읍으로 하여금 낱낱이 적발하여 혁파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훈척(勳戚)의 집에서 다시 그것을 떼어받아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강제로 다시 모이게 한 후 그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이 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 어디에 그런 곳이 있는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소문이 나라 안에 자자하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으니, 거리낌없이 방종한 짓을 자행하는 그 행동이 지극히 놀라울 뿐입니다. 지금 도하(都下)의 사람들은 그들을 지적하여 더럽게 여기며 욕하면서 모두 그때 그 사람들의 정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니, 이 어찌 사부(士夫)에 대한 모욕이 아니며 청명한 조정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각 고을의 노비들이 시(寺)의 노비로 투속(投屬)하려 하는데 이를 사패(賜牌)라고 핑계대면서 멋대로 점유하는가 하면, 역적의 집의 노비 가운데 주인을 배반하고 투탁하여 온 무리들이 많은데 본주(本主)의 문권(文券)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덮어놓고 역적의 집의 물건이라고 하여 싸잡아 받아내고 있다 하니, 이 역시 매우 경위없는 일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나라 다스리기에 총력을 다하고 있고 뭇 신하들도 있는 힘을 다하고 있는 터인데 이상 운운하는 소리가 나돌고 있으니,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치는 원인이 실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백성들이 마음으로 원망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감히 화를 내며 말만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 예로부터 백성이 불안하고서도 나라를 보존한 경우가 언제 있었습니까. 해조로 하여금 철저히 조사해 가려내어 마구 빼앗은 물건은 문권대로 본주에게 되돌려 주고, 각사(各司)에 이속되어 있는 각 고을의 노비들도 조사를 거쳐 본역(本役)에 되돌아가도록 할 것이며, 사패로 정하지 말도록 거듭 밝혀 거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무작정 점유하는 폐단을 없애고 한편으로는 궁지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게 위안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각사에 이속된 노비는 이미 내려준 것이니 다시 본역으로 환원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비로소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국가에서 과거를 실시하는 법이 지극히 엄중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사(私)를 행사한 흔적이 있을 때는 준 자나 받은 자를 똑같이 처벌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지난번 무과(武科) 이소(二所)에 거자(擧子)로 응시했던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구인기(具仁墍)가 쏜 6량(兩) 화살이 모두 불합격이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직접 본 사실인데, 차비관(差備官)이 그것을 합격으로 써넣었다가 그 때문에 지금 이미 먼 변방으로 정배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인기는 서로 수작한 흔적이 뚜렷이 나타난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찌 그 혼자만이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심지어는 기사(騎射)로 끝내 그 방에 참방(叅榜)하였으므로 오래 갈수록 물정이 더욱 분개하고 있습니다. 파직하고 방목(榜目)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서로 수작한 자취가 없다면 파직에 상당한 죄가 뭐가 있겠는가. 방목에서 삭제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하였다. 살펴 보건대 차비관이 인기에게 사정을 썼다가 발각이 되어 죄를 받게 되었으면 당연히 거자(擧子)까지 아울러 거론을 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인기만은 불문에 부쳤는가 하면 감시(監試)를 맡았던 양사의 관원들도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거자들 모두가 이르기를 ‘오늘의 과장(科場)도 또 저 모양이니 결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런데도 인기는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고 차비관이 사핵(査覈)을 받기 전에 공공연히 또 기사(騎射)에 응시하여 끝내 참방까지 하였으니, 너무도 그 행동이 방자하다 하겠다.
지평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지금 구인기가 홀로 죄를 모면한 건에 대하여 동료가 논한 것을 보았는데, 신이 당시 감시관(監試官)으로서 준 자와 받은 자 모두에게 죄를 청하지 못하여 이 물의가 다시 일어나게끔 하였으니, 나약하여 제대로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 신의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으니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처치하여 체차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가는 사신에 대하여 해마다 합쳐서 1명의 사신만 보내기로 본조에서 일찍이 대신과 의논하여 계하(啓下)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번 진하(進賀)의 행차도 동지(冬至)와 성절(聖節)을 합쳐 보내는 것이 당초 의정했던 규약이므로 그것을 영원한 성례(成例)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다만 조사(詔使)가 돌아간 뒤에 으레 조칙(詔勅)을 반사(頒賜)한 데 있어 사은(謝恩)의 사신이 있었으니, 이제 마땅히 차출해야 하며 진하와 사은을 1명의 사신이 겸할 수는 없습니다. 아울러 생각건대 모든 사행에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두는 까닭은 황태자에 대한 전문(箋文)과 방물(方物)이 있기 때문이고 또 중대한 사은을 할 때는 상사에게 반드시 의정(議政)의 직함을 가지게 하는 관계로 으레 부사를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태자가 아직 책봉되기 전이어서 전문과 방물이 없는데다 또 의례적인 사은이므로, 진하와 사은을 합쳐 1명만 차출하는 한편 진하사는 동지사를 사은사는 성절사를 겸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부산의 왜영(倭營)에 대하여 조세를 만약 착실히 받아들인다면 1년 동안에 은자 몇 천냥은 힘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법을 지키지 않아 부산 왜영을 상대로 무역하는 경외(京外)의 장사치들이 상사(上司)의 공문을 교묘히 발부받아 모두 면세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세입이 날로 감축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지금부터는 새로 과조(科條)를 만들어 비록 공문을 가지고 내려간 자라도 모두 조세를 받게 하고 그 밖에 다른 길을 통하여 밀무역하는 자들은 모두 법대로 처단하여 수세(收稅)의 길을 넓히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질(秩)이 높은 아문에서도 이렇게 염치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풍조를 살펴 보건대 너무나도 한심스럽다 하겠다.
상이 계운궁(啓運宮)045) 의 행장(行狀)을 내려 대제학 김류(金瑬)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써 올리도록 하였다. 그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대통(大統)을 이은 지 4년째 되는 병인년 1월 14일 무오에 계운궁의 병세가 악화되어 경덕궁(慶德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하직하시니, 그때 춘추가 49세였다. 초빈하고 난 다음달 성상께서 세계(世系)와 언행에 관한 일체 사항을 써 주시면서 신 유(瑬)에게 그것을 토대로 묘지명을 쓰도록 명하시었다. 신 유는 상소하여 감히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일단 그 행장을 읽고나서 삼가 생각건대 옛날 주공(周公)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대명(大明)과 생민(生民)의 시를 지어 노래하였는데, 그 내용은 모두 선조(先祖)와 선비(先妃)의 덕을 추모한 것들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이들치고 그 조상 적부터 장차 경운(景運)이 크게 열릴 수 있도록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음으로써 하늘의 대명을 맞아들일 소지를 마련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계운궁이라고 이름한 것이 그 얼마나 걸맞는 칭호인가. 아, 훌륭하다 하겠다. 이에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계운궁은 성이 구씨(具氏)이고 파계는 능성(綾城)이다. 먼 조상인 휘(諱) 존유(存裕)가 고려조에 벼슬하여 이름이 있었고 국조(國朝)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벼슬이 끊기지 않아 마침내 크게 현달했다. 증조는 영유 현령(永柔縣令)으로 휘는 희증(希曾)이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사헌부 감찰로 휘가 순(諄)인데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휘 사맹(思孟)은 문학으로 문과에 우등으로 뽑히고 세상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명종(明宗) 이래로 임금을 계속 섬겨 요직과 현직을 역임하였고 의정부 좌찬성으로 마감하였는데, 아들 구성(具宬)과 구굉(具宏)이 호성 공신(扈聖功臣)과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녹훈됨을 인하여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순충 병의 보조(純忠秉義補祚)의 공신호를 받았으며 능안 부원군(綾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의정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신씨는 고려조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서 영의정과 평주 부원군(平洲府院君)에 추증된 화국(華國)의 따님이었다. 이 사이에서 바로 계운궁이 출생하였으니 때는 무인년 4월 17일 무술이었다.
계운궁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겨우 4세에 이미 예(禮)로 몸가짐을 할 줄 알았고 5세가 되자 어린 티가 없이 의연하기가 성인과 같았다. 하루는 부모를 모시고 음식을 먹다가 몇 수저 뜨더니, 숟가락을 놓았다. 이상히 여긴 부모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가 부르다는 대답이었다. 그런데 밥상을 물릴 때 보니 그 음식에 오물이 섞여 있었다. 이때부터 부모는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부모는 그의 행동을 보려고 일부러 장난감을 다른 아이들에게만 주고 계운궁에게는 주지 않았는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에 부모가 그를 사랑하여 쓰다듬으며 말하기를 ‘내 딸은 진짜 딸이다. 다음에 반드시 우리 가문을 빛낼 것이다.’ 하였다.
선조 대왕은 평소 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046) 을 기국이 있다고 여겨 사랑하였는데 경인년에 가례(嘉禮)를 치르려고 대등한 짝을 고르기 위해 사대부 집 딸들을 모두 대궐로 모이게 하고 친히 간선(簡選)하였다. 그런데 두 차례를 하고도 맞는 짝을 찾지 못하다가 계운궁을 한 번 보고는 금방 마음에 들어 기쁜 빛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빈어(嬪御)들도 모두 하례하였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그 해 10월 3일에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게 하였다. 대원군은 인빈(仁嬪)의 소생이었는데, 덕이 있고 식견이 높은 인빈도 늘 훌륭한 우리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
선조 대왕이 여사(女史)에게 명하여 《소학(小學)》 등 여러 서적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는 다 읽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음의(音義)를 통하였다. 또 따스하고 인자한 가운데 말이 적었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높은 이는 높은 이대로 낮은 이는 낮은 이대로 맞게 행동하였으므로 궁중에서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대원군을 섬기면서도 순하고도 올바르게 받들어 활기차고 고운 얼굴로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감히 아내의 위치에 있다고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측출(側出)에게도 사랑으로 대하고 동사(僮使)에게도 너그럽게 대하여 집을 다스리는데 있어 위아래 할 것이 없이 모두 법식이 있었으므로 대원군도 그를 매우 높이고 소중히 여기었다. 급기야 하늘이 돌보시어 성자(聖子)를 낳게 되었는데 때는 만력(萬曆)047) 을미년048) 이었다. 이른바 덕을 심고 경사의 터전을 닦아 경운(景運)이 크게 열리게 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무신년에 선조께서 승하하시자 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였고 인빈의 초상 때에도 그러하였다. 을묘년049) 에 막내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참혹한 화를 당하자 대원군이 비통한 나머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이때 계운궁은 병석을 떠나지 않고 여러 해 병시중을 들면서 약을 달이거나 더럽혀진 의복을 세탁하는 일 등을 남에게 시키지 않고 모두 손수하였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는 물 한 모금 입에 넣지않고 울부짖다가 졸도까지 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치도록 미음으로만 연명하였다. 그리고 동기간의 대접과 잉첩(媵妾)들을 상대함에 있어서도 대원군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후하게 대하였다. 겨레붙이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했고 남의 급한 일을 보살피는데 있어서도 가난하고 천한 이부터 우선 하였으며, 처음 능창군의 참화가 있었을 때 친속 중에서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발걸음을 끊은 자도 있었지만 그들을 대할 때도 말이나 얼굴에 기색을 나타내는 일 없이 처음과 똑같이 대하였다.
한 평생 부귀의 티 없이 화사한 비단옷을 몸에 걸친 일이 없었고, 언제가 깊이 간직해두었던 진귀한 보배를 잃어버렸을 때 숨겨놓은 곳을 알면서도 그것을 불문에 부치고 말하기를 ‘남의 나쁜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대의(大義)에 밝아 경중과 완급을 알았는데 반정 때에는 금백(金帛)을 모두 꺼내 장사(將士)들을 위로하기도 하였으며, 거의(擧義)하던 날에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고 난을 진정시킨 뒤에도 좋아하는 빛이 없었다. 위기와 변란을 당하면서도 그때그때 알맞게 처리하여 대업을 달성하는데 한 몫을 하였고 그리하여 큰 터전을 다질 수 있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덕택이었던가. 갑자년 봄 역적 이괄(李适)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육박하여 왔을 때 대가가 남쪽으로 옮겨 수원(水原)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때 따르는 자들이 모두 두려움에 싸여 뿔뿔히 흩어질 기미를 보이자 주머니를 털어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고, 대비(大妃)를 극진한 효성과 공경으로 받들고 곡진하게 순종하면서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경황없는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해이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병이 들어도 푸닥거리 같은 것을 일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비는 것이 헛된 일이라면 애당초 말아야 할 것이고, 응험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미망인(未亡人)인데 빌어 무엇을 할 것인가.’ 할 정도로 사리에 밝아 현혹됨이 없었다. 무신년 이후 언젠가 꿈에 선왕(先王)이 계운궁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 집에 천명을 받아 왕위에 오를 자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이어 옥새를 내어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특별히 그에게 주고 나의 가르친 말을 전하라.’ 하자 계운궁이 절하고 사례한 후 묻기를 ‘신정(新政)에 최선을 다하면 이 나라를 진압하고 창성하게 할 수 있을까요?’ 하였는데, 그 역시 신묘한 일이었다. 아, 빛나신 열조(列祖)의 영령이 우리 성상을 격려하여 큰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뒤를 이어 복을 받아 이 나라에 억만년토록 끝없이 빛나는 길을 열게 하였으니, 그 꿈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었다.
계운궁은 계해년에 병이 들어 갑자년에 점점 심해지다가 병인년에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예빈(禮殯)을 하고 예장 도감(禮葬都監)을 설치하도록 하였으니 종백(宗伯)이 상례를 맡고 탁지(度支)가 일을 주관하였으며 빈궁(殯宮)은 장작(匠作)이 맡아 다스려 위아래가 총동원되어 일을 마쳤다. 반정 초기에 조정 대신의 논의에 따라 정원군(定遠君)에게 대원군(大院君)의 칭호를 붙였고 궁(宮)의 호를 계운으로 하였다. 누차에 걸쳐 임금이 근성(覲省)하려고 사제(私弟)에 납시다가 그것으로 부족하여 직접 대내(大內)에 옮겨 모시고 별공(別供)과 시선(時膳)을 빠짐없이 갖추어 끝까지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새 택조(宅兆)를 김포현(金浦縣) 뒷산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으로 정하였는데, 그해 4월 25일 장례를 모시고 그 바른편 자좌 오향(子坐午向) 자리는 대원군을 옮겨 모시기 위하여 비워두었다.
계운궁은 아들이 세 분인데, 맏이가 바로 당저(當宁)로서 청주 한씨(淸州韓氏)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謙)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보위에 올라 대통을 계승하였다. 하늘로부터 복을 받아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왕()으로 왕세자에 책봉되고 다음은 아무 【 금상(今上)으로 휘는 호(淏).】 이고 다음은 요(㴭)이고 다음은 곤(滾)인데 모두 어려 아직 봉호가 없으며 딸은 맨 끝이다. 그리고 계운궁의 둘째 아들은 능원군(綾運君) 이보(李俌)인데 현재 슬하에 자녀가 없이 정원 대원군의 제사를 맡고 있고, 셋째는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으로 호협하고 재주가 영특하였으나 지난 혼조(昏朝) 때 간사한 무리들의 날조된 모함에 빠져 섬으로 귀양갔다가 17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죽었는데 아직 부인을 맞이하기 전의 일이었다. 명(銘)하기를,
어느 산 이보다 더 높으며
어느 시내 이보다 더 깊을까
근원이 깊어 멀리 흐르듯
쌓임이 많으면 동나지 않는다네
구씨라면 대단한 문벌로서
선덕이 쌓여 복조가 열렸다
그 문호를 의정공이 더 넓혀
전대에 비하여 더욱 빛이 나네
훌륭한 따님이 탄생한 것은
그 덕과 그 유래가 있어서라네
맑은 자질과 어른다운 법도
어린 시절부터 양성되었네
배우지 않고도 그리 되었던 것
어짜 타고나서만 그랬겠는가
올바른 일만 하는 가문의 전통에
귀에 젖고 눈에 젖어 그런 것이겠지
혼기를 맞은 대원군을 위하여
걸맞은 어진 짝을 찾고 있을 때
왕께서 한 번 보고 아름답게 여겼으니
그보다 앞설 자 그 누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를 왕자비로 맞고서는
법도와 예절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모든 영령들이 그를 돌보아
성자를 탄생시켜 양육케 하였네
아, 빛나신 성조께옵서도
오르내린 넋이 하늘에 계시면서
어느날 밤 갑자기 꿈에 나타나
옥새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네
선왕을 이어 갈 신손께서
탈없이 이 나라 장래를 걸머졌다네
대의를 밝혀 떨쳐 일어나자
하늘과 땅이 제대로 운행되었네
떳떳한 윤리가 바로 잡히고
흐렸던 해와 달도 빛을 다시 찾았네
어머니 공로가 크기도 하였으나
인력으로 된 것만은 아니었다네
예를 갖춘 융숭한 대접으로
오래오래 사시리라 여겼더니
무정한 병마가 점점 심하여
흐려진 정신이 육신을 떠났네
예부터 일궈 온 김포 고을
한강 서쪽에 자리잡은 곳에
무덤 자리 마련하여 일을 마치니
새로운 묘역이 이에 열렸네
야무지고 단단한 돌을 골라서
갈고 다듬어 거기에 새기려고
경건한 마음으로 이 글을 지어
현궁 속에 함께 묻으려 하네
라 한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라 수사(全羅水使) 김완(金完)은 직질(職秩)이 높은 무장으로 곤외의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공도를 따르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변방 장수들의 현부(賢否)에 대하여 사실과 다르게 포계(褒啓)함으로써 막중한 은전을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에게 주게 만들었다. 이는 바로 지난 시대의 잘못된 습관인데 김완이 어째 감히 오늘날 다시 자행한단 말인가. 나국하여 정죄(定罪)하라."
3월 22일 을축
문학(文學)하는 신하들을 뽑아 사가 독서(賜暇讀書)할 것을 명하니, 대제학 김류(金瑬)가 이경여(李敬輿)·이경의(李景義)·이경석(李景奭)·이소한(李昭漢)·윤지(尹墀)를 뽑아 아뢰고, 이어 일찍이 이 선발에 뽑혔던 자로서 당상의 위계에 오른 이민구(李敏求)·이명한(李明漢)·이식(李植)도 파격적으로 그대로 둘 것을 청하였다.
윤지는 해숭위(海嵩尉) 신지(新之)의 아들이요 좌의정 윤방(尹昉)의 손자로서 사람이 영리하고 재주도 꽤 있었으나 다만 소년시절부터 벼슬길에 나가기에 급급하여 처신이 사부(士夫)같지 않았으며 폐조(廢朝) 때에는 그들 부자가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뛰어다닌 끝에 설서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반정 후에 그는 문호의 세력이 든든했던 관계로 다시 청현(淸顯)의 길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아무런 누(累)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기만 하였다. 그는 대각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논의가 있을 때마다 양다리 걸치기로 빠져나갈 구멍만을 찾았는데, 지난날 인성(仁城)050) 의 논의에 대하여 정온(鄭蘊)이 이의를 달았을 때도 윤지는 헌납의 신분으로서 주견없이 빠져나가려고만 하다가 드디어 청의(淸議)의 버린 바가 되었었다. 그뒤 오래지 않아 김류가 전장(銓長)이 되면서 윤지가 다시 헌납에 제수되었는데 집의 유백증(兪伯曾)이 그의 전후 자취를 들추면서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백증이 외직을 받고 나가자 윤지는 끝내 또 이랑(吏郞)에 임명되었는데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의기양양하게 벼슬에 나아갔으므로 식자들이 더욱 타기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또 사가 독서의 대열에 끼게 되었으므로 이를 듣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조 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상소하여 본직과 겸임한 대장(大將) 가운데 하나를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수행하라."
밤에 간방·손방·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23일 병인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의 복색을 다시 논의하여 청하라는 하교가 일찍이 있었습니다. 신 등이 반복하여 참고하고 상량하건대 《오례의(五禮儀)》에서 말한 ‘대왕과 왕후의 상에 있어서는 졸곡을 지난 후 시사복(視事服)으로 백포(白抱)를 착용한다.’라는 조항을 1년상인 이번 상에 그대로 통용하여도 하등의 차이가 없을 것 같기에 당초에 천담복(淺淡服)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그 이유는 대체로 이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뭇 논의가 대부분 그러합니다.
다만 《오례의》의 내상재선(內喪在先)051) 조항에 의하면 ‘졸곡 후에는 백의(白衣)에 익선관(翼善冠)·오각대(烏角帶)를 착용하고 상(祥)에서 담(禫)까지는 짙은 옥색 옷을 입니다.’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가 살았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입는 복입니다. 이번의 1년복도 사실은 이 예와 같으므로 졸곡 후에 백포를 착용하기로 한 것도 근거가 있는 일인 듯하여 그렇게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짙은 옥색과 천담복이 그리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문에 있는 대로 짙은 옥색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예조가 또 장례에 거둥할 때 입을 복색의 절목에 대하여 의주(儀注)를 작정하여 아뢰기를,
"1. 발인(發靷)하는 날 견전(遣奠)052) 후에 전하와 왕세자는 상복 차림으로 먼저 숭례문(崇禮門) 밖 길 왼편에 위치한 곡송(哭送)할 막차(幕次)로 나가는데, 내시(內侍) 이하는 상의 복제 그대로 입고 뒤를 따르고, 백관들은 천담복으로 하여 임금이 탄 가마와 일산 등은 모두 흰색으로 쌉니다. 그리고 시위하는 장사들은 흑립(黑笠)·백의(白衣)·흑대(黑帶)를 착용하며, 관대(冠帶)를 착용하는 모든 사람은 천담복을 하고 금군(禁軍) 이하는 평상시 복장 그대로를 입습니다.
1. 반혼(返魂)하는 날 혼궁(魂宮)에 거둥할 때 전하가 출궁하고 환궁할 때에는 백포·익선관·오서대(烏犀帶)를 착용하고 재실(齋室)에 와서는 최복(衰服)으로 혼궁의 문 밖에서 지영(祇迎)합니다. 내시 이하는 상의 복색대로 입습니다.
1. 졸곡 후에는 전하는 시사복으로 백포·익선관·오서대를 하고 진현(進見)할 때도 같으며, 입시한 관원은 천담복, 내시 이하는 상의 복색대로 입습니다.
1. 졸곡 후 왕세자가 대전(大殿)에게 진현할 때는 천담복에 익선관·오각대를 하고, 대왕 대비에게 진현할 때는 무양 적색 흑의(無揚赤色黑衣)에 익선관·오각대를 하며, 서연(書筵)에서도 같은 복색을 합니다. 그리고 입시한 궁관은 평상복을 입으며 내시 이하도 같습니다.
1. 발인할 때는 각사에서 1원(員)이 천담복으로 강 머리까지 나아가 전송하고 반혼 때도 그와 같이 합니다.
1. 도감 당상(都監堂上)·낭청(郞廳)·감조관(監造官), 그리고 왕세자 이하 복이 있는 친척과 근친·근속(近屬)들은 장지까지 따라가 회장(會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시행하라. 그러나 금군의 복색도 백의로 마련하고, 졸곡 후에도 가마와 일산을 청색으로 바꾸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사가(私家)의 상사 때문에 백관을 수고스럽게 하니,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발인과 반혼의 거둥 때 백관을 참여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예로 보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면 비록 하교가 없더라도 의당 여쭈어서 행해야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이면 비록 하교가 있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상례(喪禮)에 융쇄(隆殺)가 있다고는 하나 임금이 거둥하실 때 신하들이 뒤따르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당한 예절인데, 성상의 하교가 그러하시니 매우 미안한 바가 있기에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자, 답하기를,
"뒤따르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도승지 이홍주(李弘胄)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발인과 반혼 거둥 때 백관들은 참여시키지 말라시는 하교를 삼가 보고 서로 돌아보며 당혹하여 무어라 할 말을 몰랐는데, 또 바로 해조에 내린 비답을 보건대 뒤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 등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너무나 미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습니다. 평상시에도 임금이 거둥할 때면 대소 백관이 대가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 망극한 상을 당하여 영결(永訣)을 고하는 마당에 상께서는 교외까지 나아가 곡송을 위한 거둥을 하시는데 신하된 자가 어떻게 감히 뒤따르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정이나 사리로 따져 보아도 결단코 부당한 일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내린 명령을 다시 거두시어 여정(輿情)을 편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는 백관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인데, 경들이 그렇게 아뢰니 따르겠다."
하였다.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여 모영(毛營)에 내려보내야 할 군량을 속히 운송해 줄 것을 청한 데 대하여, 호조가 해주(海州)에서 받아들여야 할 쌀이 도착되는 대로 그때그때 운송하여 우선 다급한 상황을 구제해 주도록 청하니, 따랐다.
호패청이 호패를 위조한 죄인 정유훈(鄭惟勳)의 아비 정저(鄭櫧)가 올린 상소문에 대하여 복계(覆啓)하기를,
"정곤수(鄭崑壽)는 사직을 보위한 공로가 있는 사람으로 손자가 1명뿐인데 지금 절사(絶祀)될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불쌍하고 측은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가 위조한 사실은 틀림없는 듯하니 유사로서는 법대로만 집행할 뿐입니다. 상소 내용에 대하여는 무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처음으로 시행되는 법을 맨 먼저 범하였으니 죽임을 당해도 마땅하다. 다만 그의 조부와 그의 선조 정총(鄭摠)이 모두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이들인데, 지금 만약 그를 법대로 다스린다면 훈신(勳臣)의 사당 제사가 끊길 뿐만 아니라 국가 유공자의 자손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대를 물려 용서한다는 당초의 서약에도 위배되는 일이니, 그에게 관전(寬典)을 베풀어 감사(減死)의 율을 적용하도록 다시 논의하여 아뢰라,"
하였다. 이에 호패청에서 상의 분부대로 공로를 참작하여 법을 적용할 것을 청하였다.
전라도 장수현(長水縣)의 사노(私奴) 김수(金水)가 상전을 시해한 죄로 복주(伏誅)되었다.
3월 24일 정묘
이조 판서 김류(金瑬)가 상소하여 자기의 본직과 겸직인 금오(金吾)의 직을 사직하였는데, 이는 장차 빈사(儐使)로서 서쪽으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다녀오라."
밤에 동방과 간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25일 무진
원접사(遠接使) 김류 및 종사관 부응교 정백창(鄭百昌), 이조 정랑 정홍명(鄭弘溟), 부수찬 이소한(李昭漢)이 서쪽으로 내려갔는데 차등있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백창은 소년 시절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사람이 경망한데다 술주정까지 잘하여 사람들이 교동(驕童)으로 지목하였다. 소한은 정구(廷龜)의 아들로 총명하고 재간도 있었으나 평소 고서(古書)를 읽지 않고 주워들은 견문만으로 사장(詞章)을 업으로 하였다. 이들이 빈좌(儐佐)로 임명되자 시론(時論)이 가볍게 여기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번에 시행하는 호패법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한데 유사가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아 기한이 지난 뒤에도 아직 호패가 없는 자가 많다. 용서하려 하자니 법으로 보아 안 될 일이고 그렇다고 벌을 내리자니 나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이 얼마나 난처한 일인가. 이러한 문제가 있게 한 것이야 말로 유사의 책임이니, 해청과 해부의 당상과 낭청을 모조리 엄중하게 추고하여 잘못을 깨우치도록 하라. 만약 며칠이 지나도 종전 습관을 답습할 때는 잡아들여 추고한 후 정죄할 것이고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상의 복색·음식·음악 연주 여부에 관하여 각조(各朝)의 실록(實錄)을 놓고 모두 참고하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대왕(大王)의 상사 때 조제(吊祭)와 책봉(冊封)을 위하여 온 중국 사신에 대한 예절뿐이어서 지금과는 사정이 상당히 달랐으므로 접견이나 연향(宴享) 때에 모두 소복(素服)을 착용하였습니다. 다만 선묘(宣廟) 무진년에 황태자 책봉을 하고 반조(頒詔)하기 위하여 중국 사신이 왔을 때는 선묘께서 바야흐로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상을 입고 계셨는데 하마연(下馬宴) 때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예를 행하였으며 7작(爵)의 술을 돌리고 파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근래의 예로서는 조금 비슷한 전례가 된다 하겠습니다.
등극(登極)을 알리러 오는 중국 사신은 으레 황제의 초상 때 나오게 마련인데 모두들 길복(吉服)을 착용하고 잔치와 풍류를 즐겼으니, 이는 대체로 반경(頒慶)하기 위해 나온 사신은 초상을 알리기 위해 나온 사신과는 그 규례가 구별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의 내상재선(內喪在先) 조항에 의하면 재기(再期) 이전에는 무양 적색 흑의(無揚赤色黑衣)로 중국 사신을 접견한다고 되어 있는데, 선묘가 흑단령으로 연례(宴禮)를 행하였던 것은 대체로 중국 사신이 반경을 목적으로 나왔기 때문인 동시에 《오례의(五禮儀)》의 이 조항을 의거하여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조칙을 맞을 때 길복을 착용하는 것은 황상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기 위함인데, 왕인(王人)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또한 황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된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칙을 맞을 때는 길복을 착용하였다가 접견할 때는 다시 백의를 착용한다면, 중국 사신이 괴이하게 여기는 점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은 무늬없는 흑포(黑袍)를 소복(素服)으로 여기니, 이번에는 선묘조에서 한 전례대로 《오례의》의 무양 적색 흑의로 접견과 연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향 때의 찬선(饌膳)에 있어서는 근래의 예에 따라 협탁(俠卓)053) 의 경우는 중국 사신과 같이 차리고 면상(面床)의 경우는 소찬(素饌)을 차릴 것이며, 갖가지 음식의 수와 탕(湯)·적(炙) 등도 모두 소찬으로 하는 동시에 음식은 차려 놓기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 것이 알맞은 중도일 듯합니다. 그러나 사체가 막중하니 대신들과 논의하여 결정을 본 뒤에 문례관(問禮官)을 시켜 중국 사신에게 사실대로 모두 알리고 그에게 물어 확정하여 오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조(先朝)에서 흑단령으로 접견했던 것은 조사(詔使)가 백의를 착용하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니 그것을 전례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오례의》의 재기(再期) 이전의 복색을 재기가 아직 먼 상황에서 증거로 인용한다는 것도 잘못인 듯싶다."
하였다. 대신과 논의한 결과 대신들 역시 해조에서 아뢴 내용이 옳다고 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행 호군(行護軍) 김장생(金長生)이 상소하기를,
"나라에 큰 상사가 있어 성상께서 슬픔 속에 계시니 멀거나 가깝거나 슬퍼하지 않을 신민이 누가 있겠습니까. 신이 죽음을 눈 앞에 둔 병든 몸으로 먼 시골에 엎드려 있으면서 제 때에 몸을 일으켜 성상을 위로하는 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병든 몸을 들것에 실어 조금씩 나아와 달포가 지난 후에야 오게 되었으니, 도리로 보아서는 의당 연곡(輦轂) 아래 머물면서 여러 대부의 뒤를 따라 아침 저녁 성상의 기후를 살폈어야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먼 길을 어렵게 오는 동안에 노병이 더욱 심해져 여저(旅邸)에서 금방 죽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호구(狐丘)054) 의 뜻을 이루어 보려는 마음에서 해직을 원하는 정고(呈告)를 하고 고향 길을 다시 밟게 되었으니 경궐(京闕)을 돌아봄에 정신이 날아갈 듯합니다.
신이 서울에 있는 동안 동궁이 누차에 걸쳐 하문해 주셨고 신이 강을 건널 때는 정원이 상의 명에 의하여 신에게 서한을 보내 신의 발걸음을 붙잡기도 하였는데, 신은 그 명을 받고 너무도 놀랍고 황공하여 그 감격을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사정이 앞에서 아뢴 바와 같았기 때문에 삼가 상의 명령을 받들어 베푸신 큰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였으니, 신의 분의를 생각할 때 몸을 용납할 곳이 없습니다.
신이 한편 듣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법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좌우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들이 모든 보호의 방법을 다하고는 있겠으나 얼굴이 검게 변하도록 애통해 하시느라 측근의 당연한 말을 가려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마음대로 일을 행하여 선왕의 예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신으로서는 참으로 걱정스럽고 민망하여 뭐라고 말씀을 올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필부도 상중에 있을 때 생명이 위독하도록 생을 돌보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경계가 있는데, 더구나 임금이라면 그 한 몸이 위로는 종묘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민의 주인이 되신 터에 법제에 맞게 따르지 않다가 끝에 가서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을 무엇으로 위로할 것이며 대업을 이어 후세에 물려줄 책임을 어떻게 이행할 것입니까. 모든 일이 크거나 작거나 중도에 어긋나면 그것이 비례(非禮)인 것입니다. 비례를 하고서도 효도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애써 견딜 수 없는 정을 억제하시고 정상적인 법도를 따르실 것이며 나아가 가까운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시어 실정과 예법에 알맞은 길을 강구하소서. 그리고 약이(藥餌)를 가까이하여 성상의 몸을 돌보심으로써 항상 못잊어 하시는 조종의 마음에 위안을 주시고 근심 걱정에 싸인 자전의 마음도 이해하시며 사랑으로 떠받들고 있는 신민의 소원에도 답해주소서. 그러면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
신이 비록 물러와 시골에 엎드려 있어도 마음만은 신극(宸極)을 향하여 달리고 있어 피끓는 구구한 정성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절문(節文)과 의식(儀式)에 있어서도 소견이 없지 않아 신 나름대로 논하고 싶은 바도 있으나 전일의 장소(章疏)에 대강 올린 바 있기에 지금은 감히 애통 중에 계시는 성상을 또다시 번거롭게 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굽어 살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고 그 지극한 정성을 충분히 이해하였다. 그러나 경이 내 뜻을 몸받지 못하고 곧바로 돌아간 데 대해서는 내가 마음 속으로 섭섭하게 여긴다. 상소의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서(李曙)를 형조 판서로, 홍서봉(洪瑞鳳)을 부제학으로, 조희일(趙希逸)을 병조 참판으로, 김남중(金南重)을 지평으로, 여이징(呂爾徵)을 사서로, 임광(任絖)을 주서로, 이응순(李應順)을 특명으로 전라 우수사로 삼았다. 헌부가 응순을 탄핵하여 노쇠하고 성품이 느려 곤임(閫任)으로는 맞지 않는데 그를 특명으로 제수하는 것은 정체(政體)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체한(剃漢)이 침노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과 모영(毛營)의 은자(銀子)를 빌어 쓰는 것은 구차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자, 상은 그에 대하여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고 그 상소문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복계(覆啓)하기를,
"모영에 대한 난처한 상황은 어제 본사의 계사에서 대략 진달하였습니다. 은자를 빌어 쓰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이완의 말이 나름대로 소견이 없지 않고 조정에서도 그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다만 모영에 현재 군량이 동이 나서 날이 갈수록 독촉이 성화같은데 비록 은자를 빌어오지 않더라도 형세상 그들 군량은 우리가 대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 군량은 군량대로 대주면서 조사(詔使)에 대비하는 은자도 따로 마련한다면, 백성의 힘으로는 더욱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해조에서 모영의 은자를 쓰자고 한 것은 실로 양쪽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나온 계책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6일 기사
접반사 정두원(鄭斗源)이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말하기를 ‘작년에 조사(詔使) 호양보(胡良輔)가 환조(還朝)했을 때, 귀국으로부터 인삼 30만 근을 받았다는 이유로 배척을 받아 남경(南京)에 물러가고 있고, 양 총병(楊摠兵)도 번갈아 물품을 짐바리에 싣고 날랐다 하여 함께 탄핵을 받았다. 중국 조정의 많은 관원들은 조선이 매우 부유한 나라로서 인심이 후하다고들 말하고 있는데 심지어는 나도 그때 귀국으로부터 은자 40만 냥을 받았다고 하니, 가소로울 따름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노야가 40만 냥의 은자를 받았다고 무함을 당했다면, 본국이 반드시 중국 조정을 상대로 변백(辨白)해야 하겠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도독이 말하기를 ‘굳이 주문(奏文)까지 할 것은 없고 조사가 올 때 국왕이 그를 대면하여 서면으로 변백하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과군(寡君)이 만약 그 말을 들으면 틀림없이 깜짝 놀라 즉시 조사를 상대로 분명한 변백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독이 또 말하기를 ‘저번에 또 나를 비방하는 일종의 뜬소문이 있었는데, 내가 귀국의 왕과 개인적으로 친하기 때문에 봉전(封典)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것이다. 내가 봉전을 청한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무슨 딴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것을 항상 통탄히 여겨오던 즈음에 귀국의 왕이 이상길(李尙吉)의 유임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그 때문에 중국 조정에서 비방이 조금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고 윤의립(尹毅立)의 경우는 이러하다. 당시 청포(靑布) 1필의 시세가 4두(斗)였는데 의립이 그것을 3두로 값을 매겨 사사건건 감손(減損)하였기 때문에, 무 무대(武撫臺)에 이자(移咨)하여 내용을 약간 밝혔던 것인데, 무 무대에서 의외로 과중한 탄핵을 하였으므로 내가 대단히 미안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윤의립과 옛날의 나쁜 일들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국왕에게 꼭 보고하여 나의 애매한 사정을 밝혀 주도록 해달라.’ 하였습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요즘 연이어 윤훤(尹暄)과 이완(李莞)의 장계를 보건대 모장(毛將)의 행동이 점점 전날과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양곡을 겁탈하여 변방의 창고를 텅텅비게 만드는가 하면 청천(淸川)을 넘어서까지 주민들을 괴롭히는 등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신 등도 밤낮으로 애태우며 걱정하고 있으나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모장이 수십 만의 남녀를 거느리고 우리 변경에서 살고 있는데, 지난해에는 그래도 산동(山東)에서 곡식이 들어오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 와서는 중국의 힘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오로지 우리 나라를 향해 입을 벌리고 먹여주기를 바라고 있는 형편입니다. 1천 리 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수십 만에 달하는 객병(客兵)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도저히 계속해 나갈 수 없는 일인데, 그렇다고 금방이라도 양식이 떨어지면 그들로서도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중국 조정에서 오랑캐에 대하여 기각(掎角)의 형세로 삼고 의지하는 것은 실로 모장인데, 모장이 낭패의 지경까지 가지 않고 그런 대로 의지하며 버티고 있는 것은 사실 우리 나라 덕택입니다. 따라서 만약 주객(主客)이 모두 곤경에 빠져 끝내 둘 다 유지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면, 이는 중국 조정으로서도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인데, 앞으로 닥칠 형세에 대해서는 중국 조정에서도 반드시 훤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에 정장(精壯)한 자만을 골라 군오(軍伍)를 편성하고 노약자들은 모두 중국으로 들어가 먹을 곳을 찾게 하자는 뜻으로 중국 조정에 주문(奏文)하여 거의 성사될 뻔하였는데, 결국 과신(科臣)에게 저지당하고 말았습니다. 과신의 의도는 대체로 그 많은 체한(剃漢)들을 중국으로 몰려 들어오게 했다가는 장차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염려에서였을 것입니다. 천하의 대국으로서도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을 걱정하였는데, 더구나 작은 나라의 경우이겠습니까. 이는 중국 조정이 우리 나라를 내복(內服)과 동일시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에도 뭔가 미진한 점이 있는 일이고, 또 서로 돕고 성세를 취한다는 면에서 볼 때에도 소루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황상의 본뜻이겠습니까. 이번에 사은사가 갈 때 다시 한번 그 뜻을 아뢰고 아울러 해부(該部)에도 정문(呈文)하여 준청(准請)을 얻을 때까지 힘을 다해 주선하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모장에게도 별도로 중신(重臣)을 보내 변방의 창고를 털고 청천을 넘어서까지 주민을 괴롭히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반복하여 타이르고 약속을 거듭 분명히 함으로써 눈앞의 화환을 늦추는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금 김류(金瑬)가 원훈(元勳)인 중신으로서 변상(邊上)에 나가 있는데, 그로 하여금 예단(禮單)을 후하게 가지고 직접 모영에 가서 이해를 내세워 잘 타이르게 하면, 모장도 전일에 필시 유의 이름을 들었을 것이므로 그의 말이라면 듣고 감동을 받을 희망이 또한 없지 않을 것입니다. 김류에게 그 뜻을 추가로 알리고 이어 호조로 하여금 예물을 준비하여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호패청(號牌廳)이 법을 범하고 자수한 자에게 차율(次律)로 논하는 건에 관하여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좌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전종생(全從生) 등 3명 모두가 사형을 받아야 할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생은 경주(慶州)로 입적(入籍)이 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포수(砲手)이고 보면 역(役)을 기피한 사람은 아닌 듯합니다. 득수(得水)는 입적을 지원하였는데도 허가를 받지 못한 경우이니, 역시 고의로 기피한 자와는 구별이 있습니다. 호패청이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원정(原情)을 살펴 정죄할 경우 그들에게 차율을 적용하더라도 호생(好生)의 덕에 위배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 법이 시행되면서 완고한 백성들이 형벽(刑辟)에 걸려든 경우가 많은데 완고한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고 지각 없는 사람들의 경우는 유사가 아무리 사목을 분명히 게시하여 중외(中外)에 소상히 알릴지라도 자세히 살피지 못한 채 시간을 끌며 차지 않기도 하고 혹은 위조를 하였다가 잡혀오기도 하곤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되다가는 앞으로 주륙(誅戮)을 당할 자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그렇다고 그들을 주륙하지 않으면 법이 서지 않을 것이고 다 죽이자니 죽게 되는 자가 많을 것이므로 신 등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신 등의 생각으로는 자수에 관한 법을 거듭 밝혀 방(榜)을 걸어 알림으로써 호패가 없는 자들은 모두 와서 고하게 하여 소급해서 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한편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는 길을 트는 것이 타당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논한 대로 하라. 그런데 이미 입적이 되었다면 호패를 받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종생의 경우는 다시 상세히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 후 종생에게는 결국 효시(梟示)하는 율이 적용되었다.
밤에 간방·손방·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3월 27일 경오
간원이 아뢰기를,
"예(禮)는 길흉(吉凶)에 따라 각기 합당한 예가 있으니 털끝만큼도 차질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왕인(王人)을 접대하는 일은 사대(事大)와 관계되는 일 중의 하나로서 사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그 조정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므로 그 예에 대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상시 조제(吊祭) 때문에 온 사신은 원래 상례(喪禮)를 위하여 온 것이므로 접견할 때 소복을 착용해도 되겠지만 반경(頒慶)을 목적으로 온 사신의 경우는 사체가 다릅니다. 과거 선조(宣祖) 무진년에 태자 책봉을 알리는 조사(詔使)가 나왔을 때 선조께서 명묘(明廟)의 상중에 계셨으나 그래도 흑단령(黑團領)을 입고 잔치를 행하셨으니, 이는 황명(皇命)을 존중하는 동시에 왕인을 존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조사를 연향(宴享)할 때의 복색에 대하여 해조에서 그것을 전례로 삼아 마련하였는데, 성상께서는 불가하다고 하교하였습니다. 명종 대왕의 상을 당해 선조께서 참최복을 입고 계셨는데 검정색 도포를 착용하셨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사상(私喪) 1년복인데도 흰옷을 입으려고 하시니 신 등으로서는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만약에 조사가 옛 증거를 대고 대의명분을 내세워 준엄하게 따진다면 국가에서 무슨 말로 대답을 할 것입니까. 사체가 손상되는 일로서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설사 조사가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여 힐책을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쪽에서 먼저 도리를 잃는 것이니, 어찌 크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왕조에 있었던 고사대로 검정색 도포로 접견하시어 옛 법을 따르고 왕인을 존경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지레 논의하지 말라. 해조에서 결정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태안 군수(泰安郡守) 목서흠(睦敍欽)이 본사(本司)에 첩정(牒呈)하기를 ‘군내의 장도(獐島)와 덕암(德巖) 등지의 어전(漁箭)이 당초에는 훈련 도감에 소속되었던 것인데, 정사년에 이현궁(梨峴宮)에 점거되었다가 계해년에 이르러 체부(體府)로 이속되어 군량을 마련하여 왔다. 그런데 작년에 다시 이현궁이 탈취하여 본관으로서는 손을 쓸 수가 없으니, 종전 사목대로 본사에 분속시켜 무판(貿販)의 터전을 삼게 하라.’ 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조(廢朝) 때 여러 궁(宮)의 하인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널리 점거하여 각읍에 끼친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반정(反正) 후에 일체 그것을 혁파하였는데, 또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종전의 폐습이 되살아나니 자못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본군은 현재 본사에 소속되어 강도(江都)의 군량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여 본 고을에 되돌려 주게 함으로써 폐습을 고치고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가 다스려지는 것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서로 막힘이 없는 데에서 이루어지고, 국가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임금과 신하가 사이가 서로 막혀 있는 데에서 연유됩니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면 태(泰)가 된다.’ 하고, 이어 해석하기를 ‘위아래가 서로 통하면 뜻이 같아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통하지 않으면 비(否)가 된다.’ 하고, 이어 해석하기를, ‘위아래가 서로 막혀 있으면 천하에 나라가 없게 된다.’ 하였습니다. 나라가 없게 된다는 것은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아래가 서로 통하지 못하면 비록 조정이 있고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어도 나라가 망할 조짐이 이미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는 말이니, 이 얼마나 무섭고 무서운 일입니까.
지난날 예조에 내리신 비망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거기에 ‘임금 보기를 어린애 보듯 한다.’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남의 신하된 자로서는 더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인데, 예관이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그러한 태도가 있었다면 언관이 논핵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만 모든 상례(喪禮)의 절차라던지 복색(服色)의 강쇄에 대해서는 예관의 의견이 아니라 조정 전체의 논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죄를 예관에게만 덮어 씌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사기(辭氣)가 너무 각박하시다는 뜻으로 감히 차자로 아뢰었던 것인데, 전하로부터 가상하고 감탄스럽다는 하교가 계셨기에 신은 이제 성상께서 쾌히 깨치셨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열흘이 못 되어 발인(發引) 때와 반혼(返魂) 때 백관들은 참여하지 말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신으로서는 정말 성상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상례에 있어 감정을 억제하고 애써 중의를 따르시는 것은 신료(臣僚)들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리(義理)를 존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의리를 존중히 여겨 따르신 것이라면 그 속에는 약간의 사사로움도 개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성상께서는 번번이 인정을 벗어난 하교를 하고 계십니다. 이는 전하께서 공의(公議)에 눌려 겉으로는 비록 따르는 척하면서도 내심 불평하는 사사로운 뜻이 속에 쌓여 있기 때문에 말만 하시면 그 속에 불평의 기운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어 그러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 들어왔던 유신(儒臣)들도 언제 간지 모르게 물러나고 조정 안에 있는 유신들도 그 직에 불안을 느껴 체임되는 것을 빌고 있으니, 이야말로 이른바 위아래가 서로 막혀 나라가 없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오늘의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국가가 망할 정도로 위태롭기가 거의 10분의 8, 9정도에 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기강은 무너지고 인심은 흩어졌으며 백예(百隷)는 태만해지고 공도(公道)는 크게 막혀 있는데 신이 이에 대해서는 놔두고 거론하지 않겠으며 다만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천변(天變) 하나만 가지고 우선 말씀드릴까 합니다. 요즘 몇 해동안 태백(太白)과 형혹(熒惑)의 재변이 달마다 나타나는데, 지난번에는 또 요홍(妖紅)의 변괴까지 있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사랑을 보여주는 뜻이겠습니까, 아니면 화패(禍敗)가 닥칠 것이라는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겠습니까?
옛사람의 말에 ‘국가가 도를 잃어 장차 화패가 있게 되면 하늘이 먼저 재해를 내려 꾸짖는 뜻을 보이고, 그래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면 또 요괴(妖怪)를 내려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그래도 이 변고에 대응할 줄 모르게 되면 그 뒤 화패가 이르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들을 참작하여 오늘의 재변과 맞추어보면 국가가 위망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뜻이 서로 맞고 서로 믿으며 가부(可否)에 있어 서로 돌보고 깊은 못에 다다른듯 얇은 얼음을 밟은듯 두려운 마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으며 타오르는 불을 끄듯 위태로운 고비를 넘기기에 급급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다시 돌려 나라의 형세를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을까 두려운데, 더구나 건도(乾道)055) 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가고 하정(下情)056) 은 날이 갈수록 위축되기만 하여 함께 위망으로 빠져들어가는데도 손 쓸 생각도 없이 앉아서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임금이 되려면 임금의 도리를 다해야 하고 신하가 되려면 신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나라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그 책임이 전적으로 전하께서 도리를 다하지 않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은데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 배치되어 있는 선비들이 비록 명류(名流)가 다 모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일삼는 것이라곤 편당(偏黨)이고, 그들이 힘쓰는 것이라곤 사론(私論)뿐입니다. 근래 들어서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해져 오이조각처럼 갈라지고 팥알같이 흩어져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나라 일 보기를 마치 진(秦)나라가 야위어가는 것을 보듯 아무런 관심이 없고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을 잊고 공도를 따라 나라 일을 걸머지고 나서는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전하께서도 그들을 골라 쓰는 것만이 수습하는 길인 양 생각하시고 일대 개혁을 단행할 정책 수립은 생각지도 않고 계십니다. 사부(士夫)로서 사실(私室)에서 서로 만나는 자들도 여기에 대해 언급할 경우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며 온 몸으로 가슴 아파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태연히 말을 주고받으며 사세가 그렇다고만 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모두 위태롭다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말들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이 천상(天象)을 우러러 볼 때 이미 저러하고 또 아래로 인사(人事)를 살펴볼 때도 그 모양이니, 나라가 무엇을 믿고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말이 여기에 미치고 보니 자신도 모르게 숨이 막히는 것만 같습니다.
아, 예로부터 국가가 비록 위태롭더라도 성인(聖人)이 그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대응하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밝고도 성스러운 전하로서 이렇게 위급한 날을 당하여 어찌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 보시지 않으십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전(傳)에도 이르기를 ‘임금이 하는 일은 반드시 기록을 한다. 기록을 하는데 모범될 만한 것이 아니면 뒷 자손들이 무엇을 본뜰 것인가.’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오랜 기간 여염(閭閻)에 계시면서 많은 어려운 일들을 맛보셨을 것이므로 임금이 되면 어떻게 해야겠다는 계획을 미리 짜두시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인데, 즉위하신 지 오래 되지도 않아 점점 처음만 같지 못하시고 말도 차례가 없고 정치도 합의점을 잃은 것들이 많습니다. 나이 어린 세자가 궁중에 들어와 보는 것이라곤 전하가 하시는 일뿐인데, 만약 전하의 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면 세자가 본받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후세에 남기실 교훈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소서."
하고, 인하여 사직을 청하니, 답하기를,
"상소문을 보고 그대의 성심을 충분히 알았다. 상소의 내용에 대해서는 유념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3월 28일 신미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산소(山所)의 부역군(赴役軍)이 부족하니 강화의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건장한 사람 1천 명을 골라 그들로 하여금 10여 일 동안 부역을 하게 한 다음 공로에 걸맞게 무명베를 나누어 주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 뜻을 경기 관찰사에게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속오군을 거기에 쓴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병조 판서 장만(張晩)이 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장만의 사람됨을 보면 지모는 많으나 행사가 부정하였다. 그는 폐조 때 궁금(宮禁)을 배경으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 병조 판서까지 제수되었고 또 폐모론(廢毋論)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도 참여하였으므로 동료들이 천하게 여겼다. 그런데 반정 후에도 최명길(崔鳴吉)의 장인이라는 것 때문에 홀로 죄와 벌을 면할 수 있었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에 머뭇거렸다는 죄를 면하기 어려웠으나 성상의 너그러운 도량으로 원공(元功)에 책봉되기까지 하는가 하면 팔도 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에 병조 판서까지 겸임하게 되었으므로 물의가 모두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장만은 여전히 자숙할 줄을 모른체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가옥에다 선물 꾸러미가 문에 가득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4책 8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장만의 사람됨을 보면 지모는 많으나 행사가 부정하였다. 그는 폐조 때 궁금(宮禁)을 배경으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 병조 판서까지 제수되었고 또 폐모론(廢毋論)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도 참여하였으므로 동료들이 천하게 여겼다. 그런데 반정 후에도 최명길(崔鳴吉)의 장인이라는 것 때문에 홀로 죄와 벌을 면할 수 있었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에 머뭇거렸다는 죄를 면하기 어려웠으나 성상의 너그러운 도량으로 원공(元功)에 책봉되기까지 하는가 하면 팔도 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에 병조 판서까지 겸임하게 되었으므로 물의가 모두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도 장만은 여전히 자숙할 줄을 모른체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가옥에다 선물 꾸러미가 문에 가득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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