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계유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산소 두 곳에 모두 원호(園號)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양주(楊州) 산소의 원호에 대해 먼저 망(望)을 갖추어 입계하라고 예문관에 이르라."
하였다. 이에 예문관이 흥경원(興慶園)으로 수의(首擬)하여 계하(啓下)되었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중국 사신의 연향(宴享) 때 사신의 진지관(進止官)과 행주 재신(行酒宰臣)의 경우는 중국 사신과 동일하게 꽃을 꽂지 않을 수 없지만 어전에 출입하는 제조(提調) 이하 모든 시신(侍臣)들은 상의 하교대로 꽃을 꽂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행 부호군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기를,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원호(園號)를 지으라는 명을 엎드려 받들고 삼가 어리석음을 돌아보지 않은 채 지어 올리긴 하였으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 의심되는 점이 없지 않기에 이에 감히 그 줄거리만을 대략 아뢸까 합니다.
생각건대 전하는 타고나신 효성이 어느 왕보다도 으뜸이신데, 이 마지막을 보내는 큰 일을 당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로 종통(宗統)을 생각하고 아래로 조정의 논의를 따라 감정을 억제하고 뜻을 굽혀 예제(禮制) 그대로 따르심으로써 묘에 부속되는 모든 의물(儀物)을 전부 대부(大夫)의 예에 따르고 계시니, 이야말로 훌륭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신민들이 모두 그것을 보고 탄복할 것이며 후대 왕들도 모두 그것을 자랑스럽게 본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묘사(墓事) 역시 장례에 준하는 한 가지 일인데 묘에 원호를 두는 것은 대부에 적용하는 예제가 아니니, 이렇게 되면 앞뒤의 예제가 서로 달라져 논의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혹시 원(園)을 세워 제사를 모시려고 할 경우 제사는 제후의 예로 모셔야 한다는 논의가 분분한데, 신이 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다투고 싶지는 않으나, 그 사이에는 역시 하나의 미안한 절목이 있습니다. 당초 대원군을 모셨던 산이 길지(吉地)가 아니라 하여 조만간 같은 영역 안으로 옮겨 모실 것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한 원 안에 있으면서 원호를 각기 달리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그 원호를 대원군의 묘에까지 적용할 경우 높은 쪽이 낮은 쪽을 따르는 결과가 되어 예로 보아 순서가 뒤바뀌는 일이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의견은 이렇습니다. 전하가 즉위하신 지 지금 4년이 되었는데도 대원군의 묘소에 아직 원호가 없는데 지금 별궁(別宮)의 장례를 당하여 먼저 다른 호칭을 둔다는 것은 하루가 급해서 늦출 수 없는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따라서 우선은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 날 대원군을 옮겨 모신 후에 명칭을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물어 다시 충분히 강구하고나서 시행하게 하시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이 전에 옥당에 있을 때 널리 상고한다는 뜻에서 대략 그렇게 아뢰고 싶었으나 상식(常式)에 어긋난다는 동료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물러왔던 것인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들건대 마침 그 일이라서 전일 말씀드리고 싶었던 점을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신은 이번 일과 관련하여 깊은 우려와 은근히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신과 예관은 모두가 노성(老成)하여 사리를 충분히 아는 사람들이니, 이런 절목들에 대하여 어찌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복계(覆啓)를 할 때는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고 할 말을 다하지 못하는 태도가 보이는데, 그것이 어찌 전하에 대하여 충성심이 없어서 그들이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삼가 근래에 성상께서 내리신 전후의 하교를 보건대 거의 모두가 너무도 준엄하여 상대를 이해하려는 면이 부족하고 더러는 성실하지 못한 말이 불평스런 마음에서 발로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난번 백관들은 와서 참여하지 못하게 하라는 하교 같은 것이 바로 그 예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평일에야 언제 그렇게 명령하신 일이 있었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지금 감정을 억제하고 예를 따르는 것은 원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따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필시 기분이 울적하고 좋아하지 않는 생각이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예제를 모르는 좌우 측근들로부터 외정(外廷)에서는 사상(私喪)이라 하여 대수롭잖게 보고 있다는 말을 꼭 듣지 않으셨다고 보장할 수 없고 보면 지극한 정이 사무친 전하로서야 어찌 한편 서글프기도 하고 한편 상대가 의심이 가기도 하는 경우가 없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상, 그때그때 발로되는 것이 또 어찌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물처럼 언제나 공정하게만 나타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 위아래의 뜻이 서로 막혀 상대를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게 되어 말을 할 때나 일을 처리할 때 걸핏하면 임금이 화를 내실까 두려워한 나머지 소견이 있어도 곧바로 아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어찌 하늘과 땅이 서로 통하여 조정이 화평하게 되는 복된 길이겠습니까.
외정의 백료(百僚) 가운데 그 누가 신하가 아니기에 전하를 낳으신 분을 얕잡아 보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천성은 사람마다 같은 것으로 결코 그럴 이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사리를 살피시어 마음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털어버림으로써 항상 가슴 속에 여유있고 화평하여 털끝만큼도 분을 느끼는 사사로움이 없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마음을 열고 성의를 보이시어 분명한 지시를 내리소서. 그리고 혹은 대신들을 올라 오게 하여 가슴을 활짝 열고 상의하여 가부가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소서. 그러면 그로 인하여 화기애애한 경사가 있을 것이고 전하의 정신 수양과 기체(氣體)를 돌보는 데 있어서도 보탬이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크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 어찌 측근들 말에 빠져 이미 정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겠는가. 경의 말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 말인 것 같다. 그리고 원호(園號)에 대해서는 두 곳을 통칭하려고 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구차한 것 같다. 각기 명칭을 두어 구차하고 소략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내용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4월 3일 을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중국 사신의 연향 때 어전(御前)에도 할육(割肉)을 소선(小膳)으로 올린다고 하는데, 국상(國喪) 때에 소선으로 올린 적이 있었는가. 옳지 않은 듯하니, 물어 아뢰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의 연향 때 대선(大膳)·소선을 쓰는 것이 예찬(禮饌)인데 양·돼지·거위·기러기를 통째로 쓰므로 소선(素膳)으로 그것을 대신하기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리고 빈주(賓主)가 서로 조진(助進)해야 하니, 할육하는 예를 또한 폐할 수가 없습니다.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건대 국상 때 중국 사신에게 연향을 베푸는 경우에는 면상(面床)과 협상(俠床) 모두 대선·소선을 순전히 육선(肉膳)을 쓰고 탕(湯)만은 소선(素膳)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건대 문종조(文宗朝)의 국상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졸곡(卒哭) 후의 연향에서 전례에 의하여 육선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연향 때는 협상의 경우는 중국 사신의 상과 동일하게 차리고 면상의 경우는 탕만을 소선으로 하기로 이미 의계(議啓)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만, 소선의 할육을 중국 사신과 동일하게 차리지 않을 수 없다 하더라도 일단 할육의 과정을 마친 뒤에는 제조(提調)를 시켜 협상에 옮겨놓게 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가 지금 녹봉(祿俸)이 없어 군색함을 면키 어려우니, 내가 매우 가엾은 생각이 든다. 보가 해직되었다고 하나 조관(朝官)들과는 다르니 그대로 품록(品祿)을 주는 것이 어떠할지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논의한 후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호조가 회계하기를,
"상(喪)을 지키기 위하여 해직된 모든 관원은 녹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조종조의 금석(金石)의 법입니다. 능원군 보에게 그대로 품록을 주는 것이 아무리 일시의 은명(恩命)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후일 그릇된 전례가 될 염려가 있습니다. 만약 수시로 별도의 미두(米豆)를 하사하여 급한 처지를 구해 준다면 그것은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대사간 장유(張維)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일에는 지극히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일이 있고, 대단히 사리에 어긋난 일이 있고, 그다지 해될 것은 없어도 진선(盡善)하지는 못할 일이 있습니다. 지극히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일과 대단히 사리에 어긋난 일은 가부를 가리기가 마치 흑백을 가리는 일과 같아서 금방 가릴 수가 있고 또 취사(取捨)하는 데 있어서도 어려울 것이 없으나, 다만 그다지 해될 것은 없어도 진선하지는 못할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은 사람이 소홀히 하여 구차히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성인은 그 마음이 매사에 반드시 천리(天理)를 따르기 때문에 제일의(第一義)의 일이 아니면 스스로 편하게 여기지 않고, 또 충신은 그 뜻이 자기 임금을 반드시 요(堯)·순(舜)처럼 만들려 하기 때문에 역시 제일의의 일이 아니면 감히 임금을 위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아,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지 않는다면 신 등이 어떻게 감히 이러한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이번 이 상례(喪禮)에 있어 전하께서 이미 장기(杖朞)로 복을 내리셨고 또 스스로 주상(主喪)도 주제(主祭)도 않으시니, 대강령(大綱領)과 대두뇌(大頭腦)가 일단 올바르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온 나라의 신민으로서 그 누가 성상께서 감정을 억제하고 의리를 따르시는 훌륭한 덕에 대하여 흠앙하지 않겠습니까. 기타 자질구레한 절차들이야 꼭 일일이 따질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으니, 지금 거론되고 있는 원호(園號) 문제가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천자를 장사지낸 곳을 능(陵) 혹은 원(園)이라 하고 제후와 왕을 장사지낸 곳을 원이라 하니, 원은 천자나 제후가 모두 일컬을 수 있으나 능은 천자만이 가능하고 천자가 아니면 능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 제후 왕이 아니면 원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한(漢)나라의 여태자(戾太子)057) 와 도왕(悼王)058) , 그리고 송(宋)나라의 복왕(濮王)059) 은 비록 위로 천자까지 되지는 못하였으나 제후 왕의 반열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묘를 원이라고 했던 것이니, 이는 그들의 분수로 볼 때 당연한 호칭으로 원래 높여 받들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능이라고 호칭하기 시작은 것은 신라와 고려 때부터로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성조(聖朝)에서 창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당한 예(禮)로 비추어 볼 때는 논의가 안 될 수 없는 문제인데, 더구나 원이라는 칭호는 사실 아직까지 없었던 일로서 쉽게 창시할 문제가 아닐 듯싶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 전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지극한 효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신종 추원(愼終追遠)하는 예에 있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하고 싶으시리라고 여겨집니다. 지금 장지가 정해지고 안장할 날도 잡혀져 있는 상황에서 능이라고 하자니 결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냥 묘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여기신 나머지 그 두 가지 호칭 사이에 또 다른 하나의 호칭이 있지 않을까 궁리하신 끝에 여태자와 도왕의 고사가 생각나 드디어 그러한 명을 내리셨을 것입니다. 대단히 사리에 해로운 일은 전하가 이미 하지 않으셨고 지극히 당연하여 바꿀 수 없는 것들도 거의 이미 제 궤도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일만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데다 한나라와 송나라 때의 고사를 구실로 삼을 여지가 있고 또 그렇게까지 사리에 어긋난 일은 아닐 것 같기 때문에, 그것이 진선이 아니라는 것은 생각지 않으신 채 당연코 행하려 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신 등은 삼가 성명을 위하여 이 일에 대해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본조(本朝)에서 능이라고 칭한 것은 이제 이미 제도화 되었으니 오늘날 다시 논의할 성격이 못 되지만 그렇다고 능이라고 칭했다 하여 또 원으로 칭한다는 것은 잘못이 잘못을 낳는 일로서 그만두어야 할 것을 그만두지 않는 일입니다. 신 등이 어찌 이런 일을 성상께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에 대하여 예를 논할 때 효성이 지극한 선묘(宣廟)로서도 양주(楊州)의 묘소에 별다른 호칭을 붙이지 않으셨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말하기를 ‘선묘는 인후(人後)가 된 입장이니 조후(祖後)로서 대통을 이은 전하와는 입장이 같지 않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그것이 복제(服制)를 논하는 이유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묘호(墓號)를 논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복제는 속칭(屬稱)에 의하여 결정되지만 묘호는 명위(名位)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대원군의 묘인데 저쪽과 이쪽의 호칭이 현저하게 다를 경우 친근한 쪽만 더 후히 대한다는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살아계실 때에도 예(禮)로 섬기고 죽은 후 장례 모실 때에도 예로 하고 제사도 예로 모시는 것이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시작이요 끝인 것입니다. 거기에 단 하나라도 위배됨이 있으면 성인이 말한 효가 못 되는 것입니다. 글자 하나를 다르게 쓴다 하여 어버이를 현양하는 일에 아무런 보탬이 없을뿐더러 역사에 기록되고 후세에 전해져 장차 ‘제후가 자기 사친(私親)의 묘를 원이라고 칭한 것은 아무 왕 시대부터 시작된 제도이다.’라고 한다면, 아마도 성상의 효성을 먼 후대에까지 밝히는 길이 아닌 듯하기에 신 등이 슬피 여기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지극한 정을 가능한 한 억제하시고 대의 명분을 살피시어 호칭을 원으로 하라는 명을 속히 철회하심으로써 후세의 비난과 물의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그 일이 그렇게까지 사리를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이토록 번거롭게 할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밤 1경에 기운과 같은 흰구름 한 가닥이 건방에서 일어나 남쪽을 향해 퍼져갔다. 남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4경에 기운과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서방에서 일어나 곧바로 손방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에 잇닿았다.
육경원(毓慶園)의 지문(誌文) 내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고 다만 ‘맏이가 바로 당저(當宁)이다.’ 하였다. 당초 상이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과 논의하여 정하도록 하였는데, 대신이 아뢰기를,
"지문은 곧 신하가 짓는 글인데 곧바로 어휘를 쓴다는 것은 실로 미안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다시 여러 능의 지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능의 지문을 낱낱이 다 살펴볼 수는 없으나 건원릉(健元陵)060) 비문에는 ‘6남을 두었는데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우리 전하가 다섯째이다.’ 하였고, 헌릉(獻陵)061) 의 비문에는 ‘4남을 두었는데 우리 전하가 셋째이다.’ 하였고, 영릉(英陵)062) 의 비문에는 ‘8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바로 금상(今上) 전하이다.’ 하고 나머지 왕자들은 모두 이름을 썼으며, 정현 왕후(貞顯王后)의 지문에도 ‘금상’이라고 썼는데 금상은 바로 중종 대왕(中宗大王)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목릉(穆陵)063) 의 지문에는 여러 왕자와 손(孫)이 원래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신도비에는 ‘맏이는 바로 하원군(河原君) 아무이고 다음은 하릉군(河陵君) 아무이고 그 다음은 바로 우리 성상이다.’고 하였으니, 이상 모두가 어휘를 쓰지 않는 분명한 전례들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겠다. 그러나 당저라는 두 글자는 다른 글자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조사(詔使)가 왔을 때 은자(銀子)를 써서 접응하는 것은 옛 법도가 아닙니다. 은은 우리 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이기 때문에 부경(赴京)할 때에는 금지하고 있는데, 더구나 학사(學士)와 과관(科官)을 접대하는 데 공공연히 은자(銀子)를 바꾸게 한다는 것은 사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의 조사는 꽤 청명(淸名)이 있는데, 호환(胡宦)064) 도 이에 연좌되어 쫓겨났다고 합니다. 원접사로 하여금 이 기회에 예절과 공경으로 접대하고 사리에 따라 회유하여 은자를 바꾸는 일을 엄하게 물리쳐 절대로 염려스런 폐단을 만들지 말도록 즉시 하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4일 병자
헌부가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생각건대 내수사에 저축된 물품은 또한 공가(公家)의 물건으로서 임금의 사유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일체로서 이동(異同)이 있을 수 없는데, 국가 재용이 이렇게 다급할 정도로 동이 나 있는 상황에서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내장(內藏)을 아껴 사사 용도에는 끊임없이 쓰시면서도 다른 곳은 구제하려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내수사의 저장물을 풀어 놓아 조사가 왔을 때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내수사가 씻은 듯 텅 비어 있는데 그대들은 이런 청을 하고 있으니 현실에 어둡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본국 사정을 그렇게도 모르고 있으니 적들이 하는 짓을 어떻게 알겠는가. 내수사에 만약 여유가 있다면 내가 반드시 아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예장(禮葬)에 조사(詔使)까지 겹쳐 갖가지 부역이 평상시보다 갑절이 많으니, 관리들이 틀림없이 이 시기를 이용하여 이를 빙자하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깊이 구중 궁궐에 계신 전하께서야 극한 상황에 달한 오막살이 백성들의 걱정과 한탄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조종조에서 자주 암행 어사를 보내 백성들의 병폐를 캐묻게 했던 것은 뜻이 있어서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극도로 피곤한 백성들이 밤낮으로 물 떠난 고기들이 입을 벌리듯 누군가가 와서 구제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정상이 애처롭습니다. 속히 암행 어사를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밤에 유성이 천변성(天弁星) 위에서 천시원(天市垣) 안의 두성(斗星)으로 들어갔는데 적색이었다.
4월 7일 기묘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표석(標石)의 전면에 유명조선국계운궁연주 부부인구씨지원(有明朝鮮國啓運宮連珠府夫人具氏之園)이라고 쓰고 그 곁에 모년월일(某年月日)을 쓸 것을 청하니, 따랐다.
4월 8일 경진
간원이 아뢰기를,
"군자감 정 송영망(宋英望)은 사사로이 무판(貿販)하기 위해 먼 곳에 공문서를 보냈으니, 그것만도 지극히 놀랄 일입니다. 그뒤 일이 발각되었으면 조정에서 당연히 사실을 조사하여 조처를 취할 것인데, 뻔뻔스레 상소하여 자기 변명을 하였으니, 사체를 너무도 모른다 하겠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상시 국장(國葬) 때 쓰던 모든 도구를 산릉이 끝난 후에는 즉시 소각하였는데, 그것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을 놔둠으로써 미리 흉사(凶事)가 있을 것에 대비하는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예장 때 쓴 대여(大轝)와 소여(小轝) 그리고 잡기류도 당연히 전례대로 소각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만, 그러나 앞으로 대원군을 개장할 일이 남아 있으니 만약 그때 다시 만들기로 하면 소요 비용이 너무 클 것이므로 예장 때 쓴 모든 도구를 아직 소각하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대원군 이장 때 다시 이용함으로써 조금이나마 비용을 적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발인을 마친 후 당연히 소각해야 할 도구들을 후일에 다시 이용하기 위하여 그대로 둔다는 것은 예도에 맞지 않는 일이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판돈녕부사 이직언(李直彦)이 차자를 올려 나라의 큰 일은 제사와 군무(軍務)인데 지금 제사에 관한 일이 지리 멸렬 상태이고 군무도 해이해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어 사전(祀典)을 공경히 할 것과 변비(邊備)를 단속할 것 등 몇 가지 사항을 조목별로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를 보고 경의 나라를 잊지 못하는 충성심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한 데 대하여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에 아뢴 내용은 지금의 고질적 폐단을 지적한 것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마음에 새겨 변통하도록 하겠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차자를 올리면서 수백 마디에 달하는 군무와 호패에 관하여 변통해야 할 사항을 조목별로 아뢰었는데,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啓) 자만 찍어 내렸다.
4월 9일 신사
밤에 달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는데, 무지개와 같은 한 줄기 흰 기운이 오른쪽 이(珥)의 밖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 가운데를 가리켰고 반환(半環) 모양으로 굽었으며 길이는 10여 척(尺)이었다.
사헌부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장령 정세구(鄭世矩)·민응형(閔應亨), 지평 이경의(李景義)·민응회(閔應恢) 등이 차자를 올려 묘소를 원으로 칭하는 것은 예가 아님을 논하니, 상이 답하였다.
"차자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그러나 이 일을 이제야 논하니 늦은 듯하다."
4월 10일 임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역시 원으로 칭한 잘못을 논하면서 아뢰기를,
"헌부의 차자에 대한 비답은 자못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말로 준엄하게 물리치지 마시고 대신들의 뜻을 깊이 살피고 양사의 말을 여유있게 받아들이시어 사리를 참작하여 예경(禮經)에 맞도록 힘쓰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4월 11일 계미
상이 하교하기를,
"부호군(副護軍) 권점(權怗)은 전번 해서(海西)에서 감사로 있을 때 일을 옳지 못하게 처리하여 의외의 참소가 있게 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일을 그르친 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관직을 삭탈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권점이 해서에 있을 때 도독(都督)의 차인(差人) 왕만재(王萬才)가 화물(貨物)을 가지고 곡식을 무역하면서 너무나 많은 요구를 해왔으므로 점이 그에 대하여 저지와 억제를 많이 가했는데, 만재가 이 때문에 독부에 참소한 결과 마침내 조정에까지 욕이 돌아왔으므로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심명세(沈命世)가 귀양간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고 또 계운궁(啓運宮)이 평일에 여러 조카들 중에서 가장 관심을 두던 자이다. 그런데 지금 죄적(罪籍)에 있기 때문에 영폄(永窆)하는 날에 와서 곡(哭)도 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측은한 생각이 든다. 우선 석방하여 회장(會葬)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라."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호패법을 시행하면서 농간을 부리고 위조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가 한 둘이 아니고 또 사목(事目)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각 지방에 공문을 발송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성 안에는 잡혀들어와 갇힌 자가 옥에 가득할 뿐 아니라 그 중에는 또 사형에 해당되는 자도 몇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지금 외방에는 누락자가 너무 많아 지금 자수령(自首令)을 내려 그들의 살길을 열어준다 하더라도 아마 우직한 백성들이 다 자수하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도 죽을 자가 얼마나 될지 모를 일입니다.
인생은 지극히 가련한 것이고 인명은 지극히 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성인이 목을 베는 형을 만든 목적은 난역자(亂逆者)와 살인자(殺人者) 등 죄가 크고 악이 극에 달한자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었을 뿐, 그 나머지 죄인들은 각기 그 정범(情犯)의 경중에 따라 거기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했던 것입니다. 만약 법령을 어겼다 하여 다 목을 베기로 한다면 너무 중하지 않겠습니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사목 중의 참형(斬刑) 조항을 감사 정배(減死定配)로 개정하여 민생을 죽음으로부터 면제하는 동시에 전하의 살리기 좋아하는 덕을 온전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라옵건대 묘당(廟堂)에 내려 논의를 거쳐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정원이 아뢴 내용이 참으로 휼형(恤刑)하는 도리에 맞으나 다시 더욱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시행하려고 한다면 법을 늦추어서는 안 될 듯하다."
하였다.
4월 12일 갑신
정원이 아뢰기를,
"작년 조사(詔使)가 왔을 때 온 나라 재정을 다 털어서 그 수요에 응하느라 거두어들인 베의 수가 한이 없었습니다. 3결(結)이나 4결마다 베 1필을 책정하고 성화같이 독촉을 하였으므로 베 1필 값이 무려 쌀 1석(石)이나 되어 민간에서는 마치 중병을 앓고 난 사람들처럼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반조(頒詔)하는 사행이 뜻밖에 오게 되자 묘당에서는 이점을 생각하여 전결(田結)에 대한 수포령(收布令)을 애당초 거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조는 당사자로서 걱정한 나머지 산군(山郡)에 나누어 정할 것을 아뢰어 청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하삼도(下三道)도 목면이 해마다 품귀 현상을 빚어 금년은 작년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산군이라면 목면이 원래 생산되는 곳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몇 해 동안에 유망(流亡)하여 호수(戶數)조차 없게 되었는데도 처가 모두 그러합니다. 또 작년에 비록 3결과 4결에 베 1필씩 거두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2결과 3결에 1필씩 받은 셈이 되어서 민간에는 아직도 가슴아파하는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유망하여 없어지고 헛 결수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3결에 1필씩 책임을 지워 걷는다면, 이는 매 1결당 1필을 걷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백성이 어떻게 시달리다 못해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해조에 저장된 은자와 인삼의 수가 적지 않다 하고, 이번 조사는 수행원도 간략하게 거느리고 온데다 청백하고 법을 지킨다는 선성(先聲)이 이미 드러나 있으니 필시 종전처럼 난처한 일은 필시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수포령을 정지하여 민간의 폐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것이 옳겠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해조가 은자를 모진(毛鎭)에서 빌어 쓰겠다고 하는데 이 역시 어쩔 수 없어서 짜낸 계책이겠지만, 어제 등주(登州)의 군무(軍撫)에 보낸 이자(移咨)를 보니 모수(毛帥)의 게보(揭報) 내에 놀랍고 분통터지는 말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교제의 후박을 따지고 득이 있어 봐야 손실을 보상 못할 것이라는 등의 내용까지 들어 있어 지극히 미안했습니다. 지금 만약 모진의 은자를 빌어쓴다면 너무도 수치스럽고 욕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모두를 묘당이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에 묘당이 아뢰기를,
"지금 해조가 청하는 것은 부득이해서 나온 일이니, 수포(收布)와 대은(貸銀)하는 일 모두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되도록 적은 양을 가져와서 부채를 과다하게 지지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수포하는 양을 적당히 감하라고 명하였다.
4월 13일 을유
김포(金浦) 원소(園所)의 광(壙) 속에 돌이 있으므로 바른편 산등성이로 옮겨 정할 것을 명하고, 지가(地家)의 살(殺) 제거하는 법을 채택하여 길일(吉日)을 다시 잡도록 하였다. 이때 심명세(沈命世)가 상소하여, 살 제거하는 법은 믿을 것이 못 되고 또 그곳의 산형(山形)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고 논하면서 이어 조사(朝士) 중에 풍수설을 아는 4, 5명을 추천하였는데, 다시 중의를 널리 모으라는 명이 있었으나 명세의 말은 채택이 되지 않았다. 대사간 장유(張維) 역시 명세가 추천한 인물 속에 포함되었으므로 상으로부터 회의하도록 특명을 받았으나 두 차례나 인피하며 끝내 참여하지 않았다.
이준(李埈)을 사간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내노비(內奴婢) 신공(身貢)에 대하여 그것을 본도에 끊어 주어 군향(軍餉)으로 쓰게 한 것은 변방의 저장을 중히 여길 목적에서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그것을 내수사에서 상납케 한 것은 종전의 잘못된 규례를 답습한 것입니다. 반정(反正) 이후로는 그 상납(償納) 규정을 혁파해버렸던 것인데 요즘 내수사의 계청에 의하여 을축년을 시작으로 전례에 따라 상납하도록 해조에 계하하였습니다. 무릇 내수(內需)란 임금의 사유물이고 변지의 군향은 군국(軍國)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입니다. 임금 자신의 사유물을 털어 중대한 군국의 일을 도왔다가 뒤이어 그것을 다시 상환하라고 한다면 제왕으로의 지극히 공정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에 대관이 조사(詔使)가 나오는데 국가의 재정은 동이 난 형편이라서 내장(內藏)을 풀어 경비를 도와줄 것을 청하였다가 채납(採納)을 받지 못하고서도 감히 다시 거론을 못했던 것은 내장도 비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내장의 것을 풀어 군국에 도움은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리어 해조로 하여금 그동안 변지 군향에 이용했던 것을 뒤미처 상환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성상의 덕을 밝히고 백성의 희망에 보답하는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는 내수사의 담당 내관(內官) 무리들이 내탕(內帑)의 소장품을 아낄 줄만 알 뿐 대체가 손상되는 것은 생각지를 못해 흐리멍덩하게 아뢴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니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내수사에 추상(追償)하라는 공사는 거행하지 말고 담당 내관은 속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북도의 노비 신공에 관한 건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된 것이다. 옛날에는 대관이 그 문제에 관하여 다툰 일이 없었는데, 어찌 까닭없이 그랬겠는가. 계해년에는 내탕이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만둘 것을 특별히 명하였을 뿐이다. 그 일이 오늘 처음으로 시작된 일이 아니고 또 내관의 죄도 아니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14일 병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병부(兵部)가 무원(撫院)에 보낸 자문(咨文)과 박정현(朴鼎賢) 등이 보내온 급사(給事) 설국관(薛國觀)의 제본(題本)을 삼가 보건대 ‘정세가 점점 변하여 속국이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살펴보건대 본국의 사저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고 또 모장(毛將)의 행위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심을 하면서 보거(輔車)와 순치(脣齒)의 사이가 혹시 깨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국의 진정한 뜻은 무엇이며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했는데, 황상께서 또 ‘마음을 함께 하여 같이 어려움을 타개하라.’는 등의 말씀으로 무진(撫鎭)을 하셨으니, 그들이 본국에 바라고 있는 것이 또한 적지 않을 듯싶습니다. 모장은 처음에는 보잘것 없는 일개 부대를 이끌고 많은 어려움을 겪어가며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에 와 붙어 지냈는데, 그가 어떻게든 허장 성세(虛張聲勢)를 취하여 오랑캐들을 견제하고 체요(剃遼)를 가까이하며 무마함으로써 드디어 십수 만에 달하는 무리를 거느리게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약 중국 조정의 큰 공로자가 되었는데, 본국이 사대(事大)의 예를 갖출 수 있도록 바다 길이 트이게 한 것도 사실은 모장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수의 무리들에게 전책임을 맡겨 반복 무상한 태도를 취하면서 적의 괴수를 사로잡았다고 거짓말로 황상을 속이는가 하면 또 터무니없이 공갈을 하여 본국을 기만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하는 짓이 속이 다 드러나 불을 보듯 환한데, 그들이 거짓된 마음으로 사람을 피곤케 하면 끝내 남을 심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약은 체하지만 큰 바보라는 말이 들어맞는다 하겠습니다.
근간에는 또 누차 근거없는 말로 선동하여 변방의 정세를 의혹하게 만들었는데, 조정에서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그들의 궤향(饋餉)이 충분하지 못할까 혹은 서로 감정이나 나빠지지 않을까 하는 그것만을 염려하였으니, 본국으로서는 그만하면 더이상 그들을 대접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지금 무원의 이게(移揭)를 보건대 그 내용이 저들 멋대로 올리고 내리고 열고 닫고 하여 처음에는 충성스럽고 마음이 곧다고 하였다가 끝에 가서는 배신을 하였다고 모함하는가 하면, 오직 산삼의 근수와 종이의 권수가 많다 적다만을 따져 시정의 아이들이나 부녀자가 하는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역적 이괄(李适)이 패한 것을 두고 자기들의 공로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윤의립(尹義立)이 내응(內應)을 했다는 등 황당하고도 근거 없는 말을 지껄이기도 하니, 그들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신 등이 나름대로 헤아려 보건대 모장이 되도록이면 중국의 권세가와 결탁하여 그것으로 자기 주위를 든든하게 만드는 길을 삼으려 하였는데, 중국 조정에도 또한 일종의 공론이 있어 그가 거짓되고 망령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 밖의 일이라 확실하게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본국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이렇게 주자(奏咨)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사실대로 낱낱이 실토해버리면 격변(激變)이 일어날 염려가 있고 그렇다고 다둑거리며 감싸주자니 후일에 가서 틀림없이 또 모함을 받을 것이니,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모름지기 광명 정대하게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것으로서 화복과 성패는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따로 사연을 갖추어 주본(奏本)하면서 중국 조정의 은덕이 후하다는 것과 군신의 분의가 중하다는 것을 갖추어 개진하고, 모장의 공로와 후일에 가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을 진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계해년 여름에 장만(張晩)을 즉시 도원수로 삼아 평양(平壤)에 주둔하게 하고 또 이괄을 부원수로 삼아 나라 안의 정예 병력을 총동원하여 그에게 주면서 양서(兩西)의 군병까지 그의 진영에 전적으로 소속시킨 뒤 그로 하여금 영변(寧邊)에 진주하여 일체 모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협공의 시기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가 바로 화심(禍心)을 품고 조정을 원망하면서 중병(重兵)은 제손에 있고 나라 안이 비어 있다고 생각하여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과 짜고 사잇길을 따라 곧바로 서울로 쳐들어왔다.
다행히 장만이 남은 군대를 수습하여 그들의 뒤를 쫓았기 때문에 적은 비록 죽일 수가 있었으나 그때부터 본국의 병력은 부진하기 시작하고 부고(府庫)는 텅텅 비어 쌓여있는 것이 전혀 없게 되었다. 게다가 또 몇 년 전부터는 산동(山東)에서 오는 양향이 점점 처음같지 않아 모장이 거느린 십여 만 대중과 남녀 노소 몇 십만 명이 모두 본국에 의지하여 겨우 호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들이 명분상 무판(貿販)한다고 하지만 가령 제값에 맞게 장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생산자는 적고 먹는 자가 많으니, 1인이 밭 갈아 10인이 먹는다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질 것이고 창고는 더욱 빌 것이 아니겠는가.
작년부터 남쪽 지방의 첨수(添戍)를 폐지하고 다만 그들에게 곡식을 내고 그것을 수송하여 모영에 공급하도록 하는 대신 변저(邊儲)를 절약하고 아껴 쓰는 것으로 나라를 지키는 대책을 삼고 있다. 그런데 금년에 와서는 남쪽 지방마저 곡식이 부족하여 변방의 저축까지 긁어다가 그들에게 공급하고 있으므로 그렇게나마 나라를 지켜오던 계책이 또 틀려지게 되었다.
또 모영에서는 요민(遼民)에 대하여 단속을 엄하게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배가 고프다못해 다른 계책을 세울 수 없는 나머지 각 마을로 흩어져서 남의 팔을 비틀며 먹을 것을 빼앗는 자들이 득실득실한데도 모영에서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울부짖는 자와 딴곳으로 옮겨가는 자들이 길에 널려 있어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안 가서 변방이 텅 비게 될 형편이다. 그러나 신으로서는 그것까지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오직 협조를 제대로 못하여 은덕을 갚을 것이 크게 민망스러울 뿐이고, 또 중국의 적자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배고파 굴러 떨어져도 돌볼 길이 없는 것이 슬플 뿐이다.
몇 해 전부터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신이 미리 알았기 때문에 상황을 갖추어 주문(奏文)함으로써 살펴주실 것을 기대했으나 끝내 소식이 없고 말았다. 어쩌면 달이 아무리 밝아도 만 리 밖에는 비칠 수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요컨대 체한(剃漢)들을 중국으로 몰아넣으면 장차 난처하게 될 걱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같이 큰 나라로서도 난처한 일이 있을까 걱정했다면 더구나 1천 리도 못 되는 작은 나라로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금년까지는 그런대로 지탱을 한다고 하더라도 명년이 되고 또 명년이 되면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인지 신으로서는 그 점이 너무도 두려워 다시 번거롭게 아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명련(韓明璉)의 아들 윤(潤)과 그의 종제(從弟) 택(澤)은 군대가 패한 후 몸을 빼 도망쳐 간 곳을 모르고 있었는데, 작년 변신(邊臣)의 치보에 의하면 「체한(剃漢) 왕사명(王四明)이라고 하는 자 등이 호중(胡中)에서 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한(韓)이라는 성씨를 가진 형제가 갑자기 12월에 노혈(奴穴)로 투항하였는데, 그들이 자기 아비가 반역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했다고 하면서 본국의 사정을 모두 말하고 또 잡혀들어간 장수 강홍립(姜弘立) 등에 대하여 그들의 부모와 처자가 모두 죽음을 당했다고 속여 결국 적을 유인하여 조선을 치려는 계책을 꾸미고 있다고 했다.」 하였다. 그 뒤에도 모영으로 돌아온 체한들의 말이 모두 그와 동일한 것을 보면 그들이 한윤(韓潤) 형제임이 분명하고, 따라서 본국으로서는 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고 윤의립(尹義立)은 의정(議政)이 아닌데다가 지난번 모영의 접반관으로 차출되어 직무를 잘못 수행했던 탓으로 모장에게 과실을 지적받기는 하였으나 본국을 모반한 사실은 전혀 없고 또 일찍이 진경(進京) 사신으로 임명된 적도 없다. 따라서 모장이 말하는 바 왕중록(王仲祿) 등이 올린 보고 내용이라는 것은 전혀 사실 무근한 말들로서 아마 어느 간사한 무리가 고의로 얽어 무함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정준(鄭遵)·정조(鄭造) 형제는 둘 다 광해(光海)로부터 사랑받던 신하들로서 적을 임반(林畔)으로 인도한 사실과 폐모(廢母)를 모의한 사실 등의 죄가 있어 모두 정당한 형을 받았고, 그의 아우 도(道)·규(逵)는 연좌되어 사변(徙邊)을 당하였을 뿐 도망친 것은 아니며, 또 그들 형제 중에 정매(鄭梅)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애당초 없으니, 그 역시 전문(傳聞)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신(撫臣)이 보낸 자문(咨文)을 볼 때 너무 지나친 염려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바다 밖의 사정이라서 제대로 듣고 살피지 못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본국이 비록 먼 곳에 있으나 대대로 예의를 지키는 나라로서 결코 형세가 위급하다하여 충정(忠貞)의 절개를 바꿀 이치는 조금도 없다. 다만 요민(遼民)이 너무 많고 변지 양향을 대기 어려운 것이 걱정이다. 간곡히 빌건대 황상께서 본국이 다른 뜻이 없음을 굽어 살피시고 아울러 모영의 어려운 사세도 통촉하시어 조속한 시일 내에 처분을 내려 달라. 그리하여 혹 노약자를 수환(收還)하거나 혹은 별도의 양곡을 수송하거나 하여 본국으로 하여금 변지 국경을 보전하고 군대를 가꾸고 백성을 기르면서 영원한 번원(藩援)이 되도록 해 달라.’ 해야 합니다.
설국관(薛國觀)의 제본(題本) 내용 중 찬시(簒弑) 운운한 말은 극히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자문 속에는 거론하지 않았으니, 우리로서도 거론을 않는 것이 체통에 맞을 것 같습니다. 승문원으로 하여금 이런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주문(奏文)을 쓰게 하여 사은사(謝恩使) 편에 부치는 한편, 해원(該院)에도 일체로 자문을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 일이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6일 무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장만(張晩)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모 도독(毛都督)이 노추(奴酋)가 다시 영원(寧遠)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수륙(水陸)으로 진군을 한다고 합니다. 그가 강을 건너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일단 군대를 이끌고 변지를 향해 나간다고 말을 한 이상, 우리 도리로서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신은 황해·평안 사이로 진군하여 사세에 따라 움직이기로 하고, 부사(副使) 윤훤(尹暄)은 먼저 안주(安州)·정주(定州) 등지로 가서 제장들의 지휘와 양향을 준비하는 데 편의를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사세를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모장이 강을 건넌다는 말이 꼭 사실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군대를 책임진 신하가 경솔하게 밖으로 나갈 수는 없습니다. 우선 체찰사와 부사로 하여금 안주에 주둔하게 하고, 순변사(巡邊使)는 구성(龜城)으로 가 상황을 보아가며 접응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그전부터 국상의 발인 때 수행하는 종척(宗戚)·재신(宰臣)들에 대하여 능소(陵所)의 머무는 곳에다 가가(假家)를 세웠던 일은 일찍이 없었으며, 각 고을에서 접대하는 규정도 없었습니다. 이는 기내(畿內)의 물력이 거기까지 미칠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예장 때는 회장(會葬)하는 인원에 대하여 그들이 들어가 있을 곳에 모두 가가를 짓고 심지어는 방을 만들어 구들까지 놓고 있으며 또 각 고을로 하여금 나누어 접대를 맡게 하여 민공(民工)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있습니다. 지금 조사가 곧 오고 예장에 관한 일도 많은 때를 당하여 비록 구례에 있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재손(裁損)해야 마땅할 것인데, 더구나 종전에 없던 일을 어찌 지금 새로 시작하여 끝없는 폐단을 남길 수 있겠습니까. 왕자와 대신은 체모가 중하니 혹 폐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밖의 대소 인원에 대하여는 가가는 물론 접대하는 등의 일을 일체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발인 때 가가를 세우는 일은 분명히 구례가 있는 일인데 그대들이 그렇게 논하니, 자세히 살펴 보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닌가? 종전 규정을 상고해 보고 번거롭게 하지 말 것이며 접대 문제도 전례대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부호군 윤휘(尹暉)는 과거에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꽤 있었고 무오년간에 부경(赴京)했을 때도 남의 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사은사(謝恩使)의 망(望)에 맨먼저 추천했으니 그 뜻이 무엇인지 해조에 물어 아뢰라."
하니, 이조 참판 이현영(李顯英), 참의 이목(李楘)이 아뢰기를,
"이번 사행은 해야 할 일들이 매우 중하여 보통으로 뽑아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윤휘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때가 다르고 또 그때의 죄를 뉘우치며 자신(自新)하려는 뜻이 없지 않은데다 조금은 재간도 있어 일을 주선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또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어서 사람들이 즐겨 가려고 하지 않는 점도 있기에 그로 하여금 자기 과거를 뉘우치고 노력을 다하라는 뜻에서 감히 의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너무도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이후로 사람을 쓸 때에는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7일 기축
상이 하교하였다.
"근래 이부(吏部)가 사람을 잘못 기용하고 있어 혹은 쓸 만한데 기용을 않는 경우도 있고 혹은 써서는 안 될 자를 구차하게 충원하기도 하니, 오늘날 전관(銓官)이 제격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해조의 행동이 너무도 잘못되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종전부터 학사(學士) 출신인 중국 사신이 올 경우에는 반드시 문재(文才)가 있는 자들을 많이 모집하여 수응에 대비하여 왔고, 또 한 가지 재능이나 기예만 있으면 그가 비록 죄폐(罪廢) 중에 있더라도 모두 죄를 씻어주고 기용하였으니, 과거에 정사룡(鄭士龍)이나 이희보(李希輔) 등의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안눌(李安訥)은 자기 죄과에 상응할 만큼 해를 넘겨 귀양살이를 하였고 성상께서도 그를 또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뜻에서 이미 양이(量移)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이번 조사는 대단하다고 선성(先聲)이 이미 들어오고 있는데 그가 과연 문장에 큰 솜씨를 지니고 있는 자라면 우리로서도 그를 대우할 도리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안눌의 재주를 끝까지 버릴 것이 아니라면 이 기회에 그를 거두어 쓰는 것을 그만 두어서는 안될 듯합니다. 신 등이 감히 안눌을 사사로이 비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라를 위하여 그의 재주를 아끼는 구구한 마음이 있어 감히 여쭈어 재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겠다. 적당히 재량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4월 18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풍수설(風水說)은 성인의 도가 아닙니다. 화복이 상응하는 까닭은 너무 아득하고 멀어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선유들이 논한 것도 하나는 흙이 두텁고 물은 깊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바람을 간직하고 기운이 축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을 뿐, 후세의 경사(經師)·술사(術士)들이 실속없이 억지로 끼어붙인 말들은 모두 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저번에 청운군(靑雲君) 심명세(沈命世)가 올린 상소문도 꼭 옳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약 소견이 있었다면 훈척(勳戚)의 신하로서 비록 유배 중에 있었더라도 말씀드릴 수 있었을 것인데, 당초 김포(金浦)에 자리를 정할 때만 해도 언급한 것이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그때 만약 유배 중이라 하여 혐의롭게 여겼다면 풀려 난 후라도 즉시 원소(園所)로 달려가 형세를 살펴본 뒤 결단코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경우 그때 글을 올려 조정에 알리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옛날의 희미한 소견을 내세워 큰 역사가 끝나가는 즈음에 와서야 이해의 설로 단안을 내렸습니다. 이때 만약 상께서 그 근거없는 논의를 진압하고 확고하게 결정된 주견을 내세우지 않으셨다면 막대한 물력과 경비는 그만두고라도 막중한 양봉(襄奉)의 시기가 늦어지게 되어 매우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국가의 중대한 일을 그렇게 경망스럽게 논의할 수가 없으니, 심명세를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호패(號牌) 추가 등록 문제에 있어 만약 기한을 정하지 않을 경우 외지의 간사한 백성들이 더욱 거리낌없이 행동하여 범법자가 더욱 많아질 것이므로 금년 7월 1일을 기한으로 하여 그 기한이 지나면 비록 자수하는 자가 있어도 절대 용서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9일 신묘
사은사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입경하였다. 예조가, 상이 졸곡(卒哭) 전에 교외에 나아가 칙서를 맞는다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이고 또 중국 사신이 직접 왔을 때 조서를 맞는 일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나아가 맞고 상은 대궐문 안에서 지영(祇迎)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출궁할 때는 백포(白袍)를 입고 지영할 때는 길복(吉服)을 착용하며 예(禮)는 숭정전(崇政殿)에서 행하고 악(樂)은 대궐문 밖의 전정(殿庭)에 진열만 하고 주악은 하지 말 것을 청하니, 따랐다. 그 뒤에 상이 편찮아서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게 하니, 예조가, 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 나아가 맞고 예는 태평관(太平館)에서 행할 것을 청하였다.
형조 참판 장현광(張顯光)이 시골에서 부조(赴朝)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장현광이 먼 곳에서 와 필시 행장이 비었을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쌀과 찬을 넉넉히 주어 나의 뜻을 표하게 하고, 또 하등(夏等)의 녹봉도 시기에 맞추어 주라."
하였다. 현광이 소를 올려 직명(職名)과 녹봉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벼슬과 녹봉은 현자에게 농사를 대신하도록 대접하는 뜻으로 주는 것이다. 숙덕(宿德) 정인(正人)을 놔두고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내가 지금 슬픔에 젖어 경황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천리 밖에 생각이 미쳤다는 것이 어찌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실로 현자를 사모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성심의 발로인 것이다. 경은 한갓 고고하게 행동하려고만 들지 말고 도탄에 빠져 있는 창생들을 생각하여 굳이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밤에 기운과 같은 검은 구름 한 가닥이 손방에서 일어나 간방을 가리켰는데 그 길이가 하늘 끝까지 닿았다.
4월 20일 임진
상이 하교하기를,
"성절사(聖節使)의 제 3선(船)이 침몰되었다 하니, 내가 매우 놀랍고 측은한 생각이 든다. 그들이 나라를 위해 바다를 건너가 만리 타국에서 겨울을 나며 고생하다가 끝내 바다 속에 빠져죽고 말았으니, 이는 그들만의 원통한 일이 아니라 국가로서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중외(中外)의 해당 관아에서는 그들 모두에게 별도의 휼전(恤典)을 내려 억울한 넋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가 그들에 대하여 미포(米布)를 줄 것과 아울러 복호(復戶)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역관 등에게는 모두 증직(贈職)하고, 그들 처자에게는 앞으로 3년 동안 요미(料米)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1일 계사
이조 참의 이목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상소 내용은 충분히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바른 편 산등성이를 흙으로 돋우는 일이 너무 엄청나 전번에 아뢰었던 4도(道)의 승군(僧軍) 6백 50 명으로 15일 간이나 부역을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므로 다시 강화(江華)의 연군(烟軍) 1천 명을 동원하여 두 패로 나눈 뒤 5일 간씩 부역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장현광(張顯光)을 대사헌으로, 정온(鄭蘊)을 형조 참판으로, 윤지경(尹知敬)을 보덕으로 삼았다.
4월 22일 갑오
상이 하교하였다.
"서울에서 김포 가는 길이 큰 길이 아니라고 하는데, 지금 만약 너무 넓히면 백성들 전답이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다. 본도에서는 그 길을 너무 넓혀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4월 23일 을미
대사헌 장현광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상소 내용은 충분히 알겠다. 경이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그토록 고사하니 내 마음이 너무 섭섭하다. 경은 재야의 석사(碩士)로서 진작부터 재덕(才德)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당장 우리 백성을 깨우칠 사람이 경이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마음을 바꾸어 나의 잘못된 점을 도와주기에 힘쓰고 요·순의 도를 혼자서만 즐기려 하지 말라. 그리고 경이 말하는 질병이 고황이 아닌 바에야 공무를 살피기에 지장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본부(本府)에는 많은 관원들이 있으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아에 나와서 자질구레한 사무를 결재하라고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경은 나의 이 지극한 마음을 생각하고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4월 24일 병신
장유를 이조 참판으로, 정온(鄭蘊)을 대사간으로, 이경증(李景曾)을 정언으로 삼았다.
수원부(水原府)의 군병을 징발하여 들어와 호위하게 하였는데, 이는 예장 때의 거둥을 위한 것으로 옛날에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광해(光海) 시대에는 무릇 거둥이 있을 때마다 으레 경기의 군병을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였으므로 백성이 농사 시기를 잃게 되고 또 오고 가는데 시달렸으므로 식자들이 한탄해 온 지 오래였다. 그런데 성명의 시대에도 그 폐습을 답습하고 있으니, 통탄을 금할 수 없다.
4월 25일 정유
이조 참판 장유가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아뢰기를,
"전번에도 본직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준엄한 견책을 불렀었는데, 두 번 다시 과오를 범하여 맑은 조정에 오점을 남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6일 무술
남이웅(南以雄)을 형조 참판으로, 심동귀(沈東龜)·윤강(尹絳)을 검열로 삼았다.
4월 27일 기해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졌는데 그 위에 관(冠)이 있었으며 안은 적색이고 밖은 청색이었다.
4월 29일 신축
대사간 정온이 차자를 올려 중국 사행이 왔을 때 써야 할 베의 수량을 감량하여 받음으로써 백성들이 조금이나마 힘을 펴게 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차자 내용을 충분히 알았다. 진달한 말은 모두 옳다. 다만 근년 들어 중국 사람들 가운데 청렴한 자가 매우 드물어 길거리에 떠도는 말을 또한 깊이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조정으로서도 충분히 헤아린 끝에 부득이 그렇게 징렴(徵斂)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초에는 은자와 인삼 값을 마련하지 않고 가을이 되면 그때 받아들여 모영의 것을 상환하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인삼 값을 변통하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때가 닥쳐서야 독촉해 받아들이는 꼴이 되기는 하였지만 사실 잉여(剩餘)를 취하려는 계책이 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복정(卜定)을 하고 나서도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려울까 깊이 생각하고 이미 양감(量減)하였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다시 논의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1백여 기(騎)의 군대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너갔으나 그의 행색을 관찰할 때 필시 깊이 들어갈 리는 없습니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완(李莞)으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 그가 간 방향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현재 왕참정(王叅政)이 봉황성(鳳凰城)에서 진을 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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