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인
간원이 아뢰기를,
"응교 김시양(金時讓)은 일찍이 전랑(銓郞)으로서 주의(注擬)를 잘못한 것 때문에 엄한 분부를 받아 나수(拿囚)까지 되었습니다. 그때의 전관(銓官)이었던 판서 이하가 거의 다 사퇴하여 체직되었는데, 시양만은 한 번 정사(呈辭)하고 그쳐 이미 사대부가 절의를 소중히 하는 도리를 잃었습니다. 계운궁(啓運宮)065) 의 상을 당하던 날 시양은 그때 숙배하지 않고 정고(呈告) 중이었습니다. 전부터 이러한 사람이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뒷줄에 수행해 참여하는 규례가 이미 있는데도 시양은 버젓이 차자를 올리는 옥당의 반열에 나아가 참여하였습니다. 성복(成服)한 후에 상께서 그의 사직 단자를 내리면서 ‘이 사람은 이미 출사하였으니, 이 정사는 소용이 없다. 정원에서 헤아려 처리하라.’고까지 전교하셨으니, 시양으로서는 마땅히 사유를 갖추어 진달하고 숙배 사은한 후에 출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아무말 한 마디 없이 끝내 사은하지 않았으니, 그가 공의(公議)를 꺼리지 않고 스스로 몸가짐의 절도를 무너뜨린 것이 큽니다. 체차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시양은 이미 무죄로 석방되었으니, 출사하여 반열에 참여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설사 미진한 일이 있더라도 그 허물은 아주 미세하니, 지금 와서 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논사(論思)하는 중요한 자리를 경솔히 체직해서는 안 되니,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예장 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도설에 ‘빈궁(殯宮)에서의 속절(俗節)·삭망(朔望) 및 습전(襲奠)부터 안릉전(安陵奠)까지의 찬품(饌品)은 모두 소선(素膳)을 쓰고, 혼궁(魂宮)의 초우(初虞) 이후 각 제사의 탕선(湯膳)에는 육선(肉膳)을 겸하여 쓴다.’라고 하였는데, 계운 별궁(啓運別宮)의 공상(供上)을 살았을 때에 하던 대로 육선을 진배(進排)하라고 하신 전교에 따라 해당 관사가 삭망에도 모두 육선을 진배하였습니다. 이는 예문(禮文)과 다름이 있으나 신들은 살았을 때 섬기듯이 죽은 분을 섬겨야 한다는 성상의 뜻을 본받아 감히 소선쓰기를 계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계빈전(啓殯奠) 이후로 안광전(安壙奠)에 이르기까지의 각전(各奠)은 삭망 때와는 다름이 있으니, 마땅히 예문에 의하여 소선을 쓰고, 초우 이후에도 또한 예문에 의하여 육선을 겸해 쓰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혼궁의 조석 상식(朝夕上食)은 《오례의》에 도식이 없으나 효경전(孝敬殿)·영모전(永慕殿)의 등록(謄錄)에 모두 소선으로 실려 있기 때문에 호조가 소선으로 마련했던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육선으로 고쳐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계빈전 이하 각전에만 유독 소선을 쓰는 것은 미안할 듯하니, 모두 육선으로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혼궁에 초우제(初虞祭)를 지낸 이후에는 마땅히 《가례》에 의하여 주인이 초헌을 행하고, 아헌과 종헌은 친속 가운데 항렬이 높은 자가 하여야 하는데, 혼궁 전면의 지형이 매우 좁습니다. 전하 및 왕세자의 배위는 마땅히 왼쪽 보계(補階) 위에 설치하고 주인 및 아헌관·종헌관의 배위는 오른쪽 처마 계단 아래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초헌례는 위에서 친히 하도록 하고 배위는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할 때의 예에 의하여 계단 아래에 설치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覆啓)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예경(禮經)을 참작하여 상제를 단정하셨고 또 대신과 백관들의 소청에 따라 능원대군(綾原大君)을 상주로 삼아 주사(主祀)로 정하셨으니, 전례(典禮)가 크게 정해짐에 따라 여러 사람이 탄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 초헌에는 주사(主祀)했던 사람을 놓아두고 전하께서 친히 행하려 하는데, 우제와 졸곡제는 바로 상기(喪紀)의 대절이므로 축문의 머리말도 고쳐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문과는 크게 어긋나서 종전 전하께서 강정(講定)한 뜻이 모조리 허탕으로 귀착될 것이니, 어찌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반곡(返哭)하고 당(堂)에 오를 때 살아계시는 듯 속이 텅 빈 듯한 것은 자식으로서 갖는 지극한 정 때문입니다. 성상의 마음이야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곡위(哭位)에만 참여하고 헌례(獻禮)를 행하지 않으면 성상의 마음이 서운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經)에 이르기를 ‘예란 전할 만한 것이며 이를 만한 것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곡용(哭踊)에도 절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번 우제와 졸곡제에는 한결같이 전례(典禮)에 의해 행하고, 반곡한 후에 별도로 친히 제사를 행하여 상께서 초헌례를 행하고, 세자가 아헌례를 행하고, 친속이 종헌례를 하되 축문과 머리말은 계해년 초에 본조가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한 ‘자(子)’라고만 일컫고 ‘효(孝)’자를 일컫지 않았던 것처럼 한다면 정에 있어서나 예에 있어서 마땅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좌상(左相) 윤방(尹昉), 우상(右相) 신흠(申欽)이 모두 ‘예조의 말에 따라야 한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계단 아래에 배위를 설치하는 일 역시 예조의 계사로 인하여 다시 계단 위로 고쳐 정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친의 제사에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상의 지혜로 자신이 주관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모르지 않을텐데 기어이 친헌(親獻)하려 하니 지극한 정에 가려져서 그런 것인가? 대신과 예관(禮官)은 극진히 강구하여 국시(國是)를 정해놓고서 갑자기 다시 고쳤으니, 어찌 매우 부당하지 않은가.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9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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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사친의 제사에는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상의 지혜로 자신이 주관하는 것이 예가 아님을 모르지 않을텐데 기어이 친헌(親獻)하려 하니 지극한 정에 가려져서 그런 것인가? 대신과 예관(禮官)은 극진히 강구하여 국시(國是)를 정해놓고서 갑자기 다시 고쳤으니, 어찌 매우 부당하지 않은가.
홍명구(洪命耉)를 지평으로, 유경집(柳景緝)을 주서로, 윤의립(尹義立)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5월 2일 계묘
대사헌 장현광(張顯光)이 다시 상소하여 늙고 병이 들어 벼슬을 감당할 수 없는 정상을 진달하여 체직시켜주기를 청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출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없는 처사이니, 경은 고사하지 말고 즉시 취임하여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정언 이경증(李景曾)이 아뢰었다.
"동료가 한 간통(簡通)을 보내왔는데, 바로 김시양(金時讓)을 논하는 계초(啓草)였습니다. 그 가운데 ‘시양만이 한번 정사(呈辭)하고 그쳤으니, 이미 사대부의 명예와 절의를 잃었다’는 말이 있었고, 또 파직으로 의율(擬律)까지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시양은 석방된 후에 즉시 정고(呈告)하였지만 갑자기 상변(喪變)을 당하여 그대로 예장 도청(禮葬都廳)이 되었으므로 번거롭게 사임하기 어려운 형세였을 것으로, 단지 한번 정사하고 그친 것은 반드시 시양의 본 마음은 아닐 것이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신은 이런 뜻으로 답해 보내면서 ‘이미 명예와 절의를 잃었다.’는 한 조항을 삭제하고 의율도 체차로 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복간(復簡)을 보니 ‘첨의(僉議)에 따라 체차로 하였다.’라고 답하였는데, ‘명예와 절의를 잃었다.’는 한 조항에 대해 삭제했는지의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이미 첨의에 의한다고 했으니 반드시 명예와 절의를 잃었다 한 조항을 삭제하고 체차로 논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조보(朝報)를 보니, 내용이 전과 같았습니다. 신의 말이 만약 적당치 않으면 마땅히 다시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보여, 귀일된 뒤에 입계해야 하는데도 끝내 가부가 없었습니다. 이는 모두 신이 동료에게 경시당하여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 것이니, 신을 체직하라 명하소서."
대사간 정온(鄭蘊)이 아뢰기를,
"전조(銓曹)와 옥당(玉堂)은 일시의 지극한 청선(淸選)이어서 털끝만큼의 미안한 일이 있기라도 하면 그대로 그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김시양은 주의(注擬)를 잘못하여 거듭 엄한 견책을 받았으며, 동료들은 모두 체직되었는데 홀로 직명을 보존하였으니, 그 마음이 편안하였겠습니까. 대소의 제배(除拜)는 사은하고 행공(行公)하는 것이 바로 2백 년 동안 내려온 옛 규칙인데 시양으로부터 무너지면 이 역시 그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신이 이 때문에 파직시키자고 발론하여 동료에게 간통하였더니, 사간 이준(李埈) 정언 이경증(李景曾)은 체차로 논계하자고 하였고, 또 한 조항을 삭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성상소(城上所)와 연명하여 회답하면서 다만 체차하자는 논의만 따르고 삭제하는 여부를 언급하지 않아 동료가 먼저 인피(引避)하도록 하였으니, 결코 관직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하라 명하소서."
하였다. 사간 이준이 인피하고 정언 한필원(韓必遠)도 ‘예와 절의’ 한 조항을 간통(簡通) 가운데 전혀 간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정온·이준·이경증은 출사시키고 한필원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다.
응교 김시양이 상소하여 변명하면서 정온을 모욕하는 말이 많았다. 상이 일렀다.
"허물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공의(公議)가 있기 마련인데 논의가 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진변(陳辨)하는 것은 거리낌이 없는 듯하다. 이 상소는 다시 내어주라."
사신은 논한다. 시양이 숙배하지 않은 채 행공(行公)한 것은 창졸간에 한 것이니, 실로 미세한 허물인 바, 정온이 추후 논한 것은 혹 지나친 듯하다. 대개 정온은 처음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였으나 능히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능멸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더군다나 간장(諫長)이 되어 관원의 사(邪)를 바로잡는 것이 그 직분임에랴. 시양으로서는 마땅히 허물을 자인하여 공론을 기다리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꺼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진변하였다. 이에 정온을 은연중 역신(逆臣) 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의 사이에 연명(聯名)시켜 감히 비난할 계책을 삼고, 또 ‘정온은 본시 향생(鄕生)이다.’는 등의 말로써 드러나게 모욕을 가했으니, 그의 분심이 극에 달했으며 외람됨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9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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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시양이 숙배하지 않은 채 행공(行公)한 것은 창졸간에 한 것이니, 실로 미세한 허물인 바, 정온이 추후 논한 것은 혹 지나친 듯하다. 대개 정온은 처음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였으나 능히 대절(大節)을 세웠으니 능멸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더군다나 간장(諫長)이 되어 관원의 사(邪)를 바로잡는 것이 그 직분임에랴. 시양으로서는 마땅히 허물을 자인하여 공론을 기다리기에 여념이 없어야 하는데도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꺼리지 않고 먼저 스스로 진변하였다. 이에 정온을 은연중 역신(逆臣) 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의 사이에 연명(聯名)시켜 감히 비난할 계책을 삼고, 또 ‘정온은 본시 향생(鄕生)이다.’는 등의 말로써 드러나게 모욕을 가했으니, 그의 분심이 극에 달했으며 외람됨이 심하다.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이, 대사간 정온이 차자를 올려 해조(該曹)가 수포(收布)를 잘못했다고 논한 것 때문에 사직하니, 답하였다.
"차자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무를 보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전 참봉 안승경(安承慶)의 상소 및 올린 책자(冊子)를 보니, 거기에 ‘공물(貢物)을 없애고 시장에서 진선(珍膳)을 무역하며, 용관(冗官)을 줄여서 각사에는 단지 2원(員)만 두며, 부방(赴防)을 없애고 임진(臨津)을 굳게 지키며, 산성(山城)을 보위하여 적의 양도(糧道)를 끊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병제(兵制)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5인으로 1오(伍)를 만들어 군대를 양성하는 실제가 있게 하며 무학(武學)을 우대하여 훈련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남들이 생각도 못한 것이니, 초야 가운데 이런 시무(時務)를 아는 기재(奇才)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대법(大法)을 새로 세우고 폐단을 개혁하여 다스림을 여는 날을 맞이하여 참으로 마땅히 인재를 다 초치하여 그의 장책(長策)를 의뢰해야 합니다. 역마(驛馬)로 불러다가 그의 흉중을 다 진달하게 한 다음 참작해서 채택하여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해조로 하여금 실직(實職)에 올려 제수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승경은 본래 일개 보통 사람이다. 상소하여 진달한 몇 조항이 시의(時宜)에 혹 맞다 하여 갑자기 시무를 아는 기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라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람이 진달한 바를 만약 다 채택해 쓴다면 나라 일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도 한 마디도 시행한 것은 볼 수가 없다. 역마로 불러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필경에는 한갓 형식이 되고 말았다. 대저 이렇게 되면 관중(管仲)이나 제갈 량(諸葛亮)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34책 9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정론(政論) / 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승경은 본래 일개 보통 사람이다. 상소하여 진달한 몇 조항이 시의(時宜)에 혹 맞다 하여 갑자기 시무를 아는 기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라도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사람이 진달한 바를 만약 다 채택해 쓴다면 나라 일에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인데도 한 마디도 시행한 것은 볼 수가 없다. 역마로 불러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 필경에는 한갓 형식이 되고 말았다. 대저 이렇게 되면 관중(管仲)이나 제갈 량(諸葛亮) 같은 재주가 있더라도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5월 3일 갑진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위에서 나와 왕량성(王良星) 아래로 들어갔다.
5월 4일 을사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가 치계하였다.
"도독(都督)이 신을 갑암(甲巖)으로 불러 말하기를 ‘노적(奴賊)이 이미 광녕(廣寧)으로 향하였으므로 현재 강을 건너 뒤쫓고 있으니, 창성(昌城)의 쌀과 콩 4천 석을 급히 군전(軍前)으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하기에, 신이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았더니, 그의 답서에 입에도 담지 못할 말까지 언급했기에 부득이 창성의 쌀 2백 석과 콩 1백 석을 내주었습니다. 창성과 의주의 군량을 거의 다 빼앗겨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육(金堉)을 정언으로, 김광현(金光炫)을 수찬으로, 【 김상용(金尙容)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단중(端重)하고, 논의가 평정(平定)하여 일시의 동류에게 존중받았다.】 정경세(鄭經世)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5월 5일 병오
황해 감사 이필영(李必榮)이 도내의 가뭄에 대한 상황을 계문하였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도독이 갑암(甲巖)에 이르러 창성에서 쌀과 콩 각 1천 석을 요구하며 매우 급히 독촉하였는데, 부사(府使) 김시약(金時若)이 단지 쌀과 콩 각 10석씩만 지급하였더니, 도독이 크게 노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창성에 저장된 양식을 전부 가지고 갔었는데 이제 또 이처럼 내놓으라고 다그치니 매우 민망합니다."
대사헌 장현광(張顯光)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함을 잘 알았다. 경은 이미 나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멀리서 왔는데, 마침 조정의 천거가 실로 나의 쓰고자 하는 뜻에 맞았기 때문에 제수하였다. 경이 만약 한결같이 머리를 흔들며 나오지 않는다면 군신의 뜻을 잊어버리는 데 가깝지 않겠는가. 경은 마땅히 멀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내 바람에 부응해야 한다."
대사간 정온(鄭蘊)이 상소하기를,
"신은 천성이 오활하고 어리석으며 말하는 것이 경망하여 전후 다섯 번 간원에 있었으나 모두 망령된 말 때문에 낭패를 당했습니다. 뜨거운 국에 데이고 나면 찬 국도 불어 먹는다는데 저는 어리석은 자질을 끝내 바꾸지 못하였으며 이번 논체(論遞)한 일 역시 화를 자초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김시양(金時讓)의 상소 내용을 보니, 전적으로 신을 공격하여 신의 숙배하기 전에 출사했다는 설까지 거론하였으며 역신(逆臣) 정인홍에 관한 한 조항을 제기하여 그 사이에 덧붙인 것은 은연중 신의 죄를 인홍과 이이첨의 열에 넣어 함께 논하여 몰래 후일 모함할 터전으로 삼으려는 것이니, 계략이 교활하고도 또 참혹합니다.
신과 인홍은 본래 사제의 분의(分義)가 있음은 전일 상소 가운데 이미 진달하였으니,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시어 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무신년066) 에 인홍이 주소(奏疏)하던 날 삼사(三司)가 떼 지어 일어나 불측한 지경에 빠뜨리려 했는데, 신은 그때 마침 과거 보려고 상경하였다가 같은 도(道)에 사는 몇 명과 함께 한 번 신구(伸救)한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양이 ‘인홍이 신 및 이첨과 함께 상소하여 유영경(柳永慶)을 공격했다.’ 한 것은 없는 일입니다. 이 외의 이야기야 다 따질 것도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불초함을 모르시고 간관의 열에 발탁하여 두시었으므로 아는 일은 모두 말씀드렸으며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여 총애하시는 데 있어 만에 하나라도 저버리지 않고자 한 것이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강자와 맞서 스스로 위험과 모욕을 취하니, 이는 신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버티고 있으므로 해서 남에게 경시를 당한 소치입니다. 빨리 직명(職名)을 삭제하라 명하시어 시골집에 귀양(歸養)할 수 있게 해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김시양이 기승(氣勝)함을 면치 못하고 말을 분노에 차게 한 것이므로 내가 이미 책망하였다. 경은 직무를 보고 다시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성절사(聖節使) 전식(全湜)의 행차에 요동(遼東)에 있는 백성을 쇄환(刷還)하는 일을 부탁했었는데, 성심으로 주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성지(聖旨)를 받들었는지 여부도 사신들이 알지 못하고 왔으니 조정에서 위임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 혼미하여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사신과 서장관을 아울러 추고하라. 금후 중국 각 아문(衙門)의 문서는 사신이 타고 오는 배에 싣고 올 일을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응교 김시양은 창졸간에 미처 사은 숙배하지 못하고, 급기야 정사(呈辭)를 대내에서 다시 내린 때에도 끝내 사피하는 말이 없었으니 소루한 잘못을 공평히 상고해보건대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대론(臺論)이 발론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면 마땅히 인피하여 체직을 빌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이에 얼굴색을 변하며 변명하면서 인용해서는 안 될 말까지 인용해 대관(臺官)을 침모하여 마치 언관과 대적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 밝은 조정에서 백료들이 성대하게 서로 사양하는 날을 당하여 어찌 이런 추하고 거친 습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두 가지 잘못을 한 번만 추고하여 징계해서는 안 됩니다.
경상 감사 원탁(元鐸)은 사송(詞訟)하는 사이의 말의 잘못을 가지고 선비 이유도(李有道)를 형신(刑訊)하여 목숨을 잃게 하였으니 조정에서 흠휼(欽恤)하는 뜻이 아닙니다. 김시양과 원탁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시양은 체차하라. 원탁은 참으로 잘못이 있지만 유도의 소행 역시 매우 패악스럽다. 지금 만약 이를 인하여 죄를 주면 영남의 사나운 습관을 징계하여 제압하기 어려울 듯하다. 함사(緘辭)를 보아가며 처리할 것이니,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5월 6일 정미
평안 감사 윤훤이 치계하였다.
"열진(列鎭)의 치보를 접하여 보니 노적(奴賊)이 군사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광녕(廣寧)을 향했다 하는바, 천하의 승패와 안위가 이 한 거조에 달려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도독이 군마를 거느리고 차유령(車踰嶺)을 거쳐 삼차수동(三叉水洞)으로 향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영리한 통사(通事)를 정하여 봉황성(鳳凰城)과 영원(寧遠) 지방에 보내서 탐문하여 과연 적병과 교전할 걱정이 있으면 즉시 순변사(巡邊使) 남이흥(南以興)으로 하여금 창성과 의주 등처로 진주(進駐)하여 그곳의 민병(民兵)을 거느리고 위급에 대비토록 하고자 합니다."
5월 7일 무신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를 위하는 길은 지성(至誠)일 뿐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성(誠)이 아니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 모두 거짓이어서 마치 사람이 술을 마시면 먼저 얼굴에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거짓으로 사이(四夷)를 대해도 오히려 불가한데 더군다나 상국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이번에 중국 사신이 와서 반드시 변상(邊上)의 실정을 알아보고자 할 것입니다. 이에 치켜 세우는 말을 만들어 공이 없는 사람을 칭송하면 설령 일에 해가 없고 나라에 이익이 있더라도 당당한 성조(聖朝)에서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 모문룡(毛文龍)을 가리킨다.】 소행이 모두 상국을 속이고 속번(屬藩)을 모함하는 일이어서 속셈이 모조리 드러나자 보고 듣는 사람이 다 분노하고 있는데이겠습니까.
이미 우리쪽에서 변무(辨誣)하는 주문(奏文)을 하였는데 또 공을 칭송하는 말을 한다면 비단 이치에 근거할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에도 무익하며, 혹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조사(詔使)에게 의심을 받는다면 그 수치와 욕됨이 말로 다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만약 ‘이 사람에게 노여움을 사면 반드시 상국에 참소를 입게 될 것이니, 사변에 대처하는 방도로는 모름지기 환심을 얻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임진년 이후 우리 나라가 무함을 입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정성과 믿음으로 감동시켜 끝내 의심을 받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찌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을 억측하여 먼저 속이고 가리는 말을 하여 스스로 기만의 죄에 빠지겠습니까.
소문에 들으니 기로(耆老)와 군민(軍民) 등의 정문(呈文)을 이미 승문원에서 지어 서로(西路)에 보냈다고 하는데, 급속히 쫓아가 환수하여 바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문하는 일은 이미 의논해 정하였는데 이처럼 경솔히 의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지금 정지하기 어렵다. 다시는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떨치지 못하여 인심이 날로 악해지고 있습니다. 의성현(義城縣)에 사는 토호가 관의 명령을 어기고 부역에 응하지 않자 현령 이경민(李景閔)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형신하여 10대 미만의 곤장을 때렸는데, 그뒤 저절로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향리 족당들이 떼 지어 관아를 둘러싸고 현령을 위협하고는 드디어 형리(刑吏)를 묶어 갔습니다.
이는 근고에 없던 변으로 설혹 죄없이 죽었다 하더라도 해당 관사에 고소하여 억울하고 잘못됨을 폭로하라는 국법이 있는데도 사사로이 스스로 무리를 모아 관원을 범하여 함부로 악을 부렸으니, 이런 조짐이 만약 커지면 장리(長吏)를 멋대로 죽일 염려를 후에는 반드시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사는 즉시 계문하여 처단해야 하는데도 지금껏 덮어두었고, 현령 역시 평소 아랫사람을 통솔하지 못하여 이런 큰 변고를 초래한 것입니다.
경상 감사 원탁(元鐸)과 의성 현령 이경민을 아울러 추고토록 하시고 그 수창하여 난을 일으킨 자는 율(律)에 의해 죄를 정해 뒤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감사는 파직하고, 수창한 사람은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지난번 정청(庭請)하던 날 정의(庭議)에 일단 따를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막중한 예(禮)가 장차 패륜(敗倫)으로 귀착될 것을 목견하고 한갓 때에 맞추어 구정(救正)하고자 한 것인데, 말을 만드는 사이에 분격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개 뜻밖의 중한 배척을 입은 것인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전에 말한 바가 이미 곡진하여 성명(聖明)께서 반드시 차례로 시행하여 예경(禮經)의 본뜻에 맞기를 구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박지계(朴知誡)가 상소하여 신이 다시 간쟁하지 않은 것으로 죄를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신의 본뜻을 안 것이겠습니까. 또 남군(南軍)을 들여보내지 말자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망령되이 우견을 진달하였으나 역시 시행되지 않았기에 감히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한 말씀 올립니다.
대저 적(賊)이 국경에 이르기 전에는 남군은 남쪽을 지키고 북군(北軍)은 북쪽을 지키고, 내지(內地)의 각 고을은 미리 정병(精兵)을 뽑아 장령(將領)을 별도로 정해 집에 있으면서 조련하게 하여 변을 듣는 날에 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적절히 군사를 내는 것이 바로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일찍이 주변 십책(籌邊十策)에서 힘써 남군을 들여보내지 말자는 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도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내지를 피폐하게 하는 일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은 또 역적 이괄(李适)이 남병(南兵) 15만을 청할 때에 극력 쟁변하여 겨우 8천을 감하였었습니다. 이 일을 보아 오히려 경계할 수 있는데도 아직껏 깨닫지 못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조종조로부터 오랑캐를 정벌하는 싸움에도 오히려 남군을 징발하지 않았는데, 강홍립(姜弘立)이 원수(元帥)가 되면서 비로소 남군을 징발했으니, 그 폐단이 반드시 내지가 궤멸된 후에야 그칠 것입니다. 더군다나 노적(奴賊)이 현재 중국과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고 있으니 먼저 우리 나라를 침범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먼저 남군을 징발하여 앉아서 복심(腹心)에 폐를 끼치니, 신은 실로 모를 일입니다.
사람들이 혹 말하기를 ‘변성(邊城)에 만약 보낼 수 없다면 평양이나 황주(黃州) 사이에 또한 유방(留防)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중국의 상서(尙書) 우겸(于謙)과 우리 나라 고 찬성 이이(李珥)의 계획에 의하여 이 군사를 도성(都城) 안에 머물러 두어 사방의 위급에 대응한다면 복심이 견고하고 외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남군의 자장목(資裝木)을 적당히 징수하여 서쪽으로 들여보내 체부(體府)의 아병(牙兵)에게 나누어 주어 얼음이 얼 때 각 고을의 본진(本鎭)에 들어가 방수하게 하고, 얼음이 녹을 때에 놓아보내 농사를 짓게 하면 안팎으로 서로 자뢰하는 이익이 있게 되고 변방에 소루한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거조는 흥망이 달려 있는데 신 역시 입을 다물면 누가 위로 성상의 뜻을 거스르고 아래로 시기(時忌)를 저촉하면서 한 마디라도 쟁변하려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결정하게 하거나, 혹은 수신(帥臣)과 탑전에서 면대하여 각기 품은 바를 진달하게 하소서. 그러면 성감(聖鑑) 아래에 흑백이 저절로 구별될 것이니, 어찌 결단하기 어려울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이 여러 차례 상차하여 정성스레 논하니, 만약 실지로 체득한 바가 없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다만 지난해 일로 말하자면 변방 장수가 두려워하여 경외(京外)가 소란했으니, 그때에는 비록 경의 높은 식견으로도 역시 동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모두 변방에 군사가 없어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한 소치이다. 노적이 반드시 동쪽을 침략하지 않는다는 설은 과연 경의 말이 옳지만 그러나 일률적으로 경솔히 논할 수 없으며, 우선은 군대를 정돈하여 형세를 살피는 것도 그만둘 수 없다. 대저 이 일은 본디 본병(本兵)의 계획이 있으니, 경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김육(金堉)을 헌납으로, 박황(朴潢)을 부수찬으로, 김지수(金地粹)를 정언으로 삼았다.
5월 8일 기유
대사헌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신은 노병(老病)이 매우 중하여 결코 출사할 수 없다는 실상을 전후에 걸쳐 자세히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말이 헛된 핑계로 돌아가고 직명(職名)이 그대로 있는 채 성상의 비답은 더욱 준엄합니다. 심지어 신이 군신의 의리를 잊어버린 데 가깝다고까지 하시니, 신은 감격스럽고 황공하여 뜻이 궁하고 정이 절박해 감히 더 사설을 늘어놓을 수가 없어 이번에 질병을 무릅쓰고 와서 사은하는 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사은 숙배를 지체한 것이 반 달이나 되어서 규례(規例)를 크게 어겨 자취가 패역과 태안에 관계됩니다. 이름이 법사(法司)의 직에 있으면서 자신이 처음을 잘하는 도리를 잃었으니, 이러고서도 하루인들 부료(府僚)의 열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국가에 예장(禮葬)과 조서(詔書)를 맞는 중대한 예가 연달아 있어 헌부의 직무로 마땅히 살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귀로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고 눈으로는 공무의 문자를 보지 못하는 신과 같은 자가 어찌 하는 일 없이 정원만 채우고 있으면서 직무를 비우고 날짜를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모두 신이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을 것이고 마땅히 배척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사은 숙배하고도 집무할 수가 없어 드디어 감히 스스로 탄핵하고 물러가는 바입니다. 성명께서는 신의 낭패스런 두려움을 살피시고, 방헌(邦憲)의 긴요한 직임을 중시하시어 마땅한 사람을 특별히 가리시어 광구(匡救)하는 책임을 다하도록 하시면 공의(公義)에 있어서나 사분(私分)에 있어서나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경이 이제 출사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기뻐하고 다행으로 여긴다. 나의 뜻은 전에 이미 다 유시하였으니, 경은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치계하였다.
"신이 영리한 소역(小譯)을 차출하여 대략 돼지 고기와 술을 갖추어 가지고 강을 건너가 모병(毛兵)067) 의 동정을 살피게 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관진(管津)의 관병(管兵)에게 저지되어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대개 도독의 이번 걸음은 본래 숨길 것이 없는데도 비록 장대추(張大秋)처럼 친절한 사이에도 역시 극도로 비밀에 붙이기 때문에 참여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필시 중국 사신이 곧 올 것이기 때문에 정진(征進)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만 사람들이 그것이 허위임을 알까 두려워해서일 것입니다."
5월 10일 신해
상이 예조에 하교하기를,
"원소(園所)에 하관(下棺)할 때의 망곡(望哭)은 마땅히 배례(拜禮)가 있어야 할 듯하다."
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망곡례만 행하기 때문에 전례에도 역시 배례는 없었습니다. 이제 하교를 받들었으니, 의주(儀註) 가운데 부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정온이 패소(牌召)해도 오지 않고 인하여 정고(呈告)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세 번 말미를 더 주었다. 비로소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원접사(遠接使)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사포(蛇浦)의 탐후 역관(探候譯官) 박선(朴璇)의 보고에 ‘동지사 일행 역관 김성립(金城立) 등 6인 및 격군(格軍) 7명이 파선된 뒤 마침 중국 배의 구조를 받아서 사포로 살아 돌아와 「조사(詔使)가 4월 22일 승선하였다.」라고 전언(傳言)하였다.’ 하였습니다."
5월 11일 임자
정원에 하교하였다.
"세월이 멈추지 않아 장례일이 이미 박두하니, 나의 애통한 회포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런 심사로 곡읍(哭泣)한 나머지 모든 일이 바쁜데도 일을 대하면 망연 자실할 뿐만이 아니니, 또한 대단히 착오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공사(公事)는 우선 정원에 머물러 두라. 이런 뜻을 삼사(三司)에도 말해주어 우선은 계차(啓箚)를 정지하게 하라."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이번 계운궁(啓運宮)의 발인 때에 상께서 추반(追攀)하는 망극한 정은 어찌 원근에 다름이 있겠습니까만 임금의 거둥은 본디 필부와 같지 않아 참으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밤중에 창황하게 도성을 비우고 멀리 나가는 것은 부당할 듯합니다. 조종조에서 멀리 나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뜻이 있어서입니다. 비단 이뿐만 아니라 멀리 떠나는 날에는 응당 행하여야 할 전례(奠禮)가 있고, 전례를 마치고는 파빈(破殯)하며, 대가가 먼저 출발하고 영여(靈輿)가 따라 나가야 하므로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군박할 걱정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원소(園所)가 또 70리 밖에 있어 해지기 전에 미치지 못할 근심이 있으니, 또한 매우 염려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지극한 정을 애써 억제하여 교외에 가신다는 명을 정지하시고 해조의 계사에 의하여 궐문 밖에서 곡송(哭送)하소서. 대소의 인정이 이러하므로 감히 이렇게 와서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교외에서 곡송하는 것 역시 지극한 정을 애써 억제한 데서 나온 것이다. 경들의 청이 이처럼 간곡하지만 결코 따르기가 어렵다."
하였다. 정원도 진계(陳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성균관이 아뢰기를,
"학궁(學宮)의 흥폐는 실로 국가에서 유교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일에 관계됩니다. 태조 대왕께서 개국한 처음에 맨 먼저 본관(本館)을 세워 문교(文敎)를 중하게 하였는데, 9년 후인 경진년068) 에 불이 나서 태종 대왕 3년 정해에 옛 자리에다 새로 지었습니다. 그때 신 변계량(卞季良)이 명을 받아 그 일을 서(序)하여 돌에 새겨 2백년이나 오랫동안 내려왔으니, 지금 그대로 계량이 지은 글을 새겨야 합니다.
다만 임진년 변란에 본관이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고 비석도 파괴되었는데 그후에 묘우(廟宇)는 중건하였으나 이 비는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학궁의 흥폐와 시말이 민멸되어 징험할 바가 없었는데 30여 년 후에야 구비(舊碑)를 다시 세우게 되니, 선성(先聖)을 높이고 오도(吾道)를 중히 하는 것이 오늘날을 기다렸던 듯싶습니다. 발(跋)이나 기(記)를 지어 장래에 남기어야 하는데, 찬문(撰文)·서비(書碑)·사전(寫篆) 세 가지 일은 반드시 여망(輿望)이 돌아가는 사람이 한 연후에야 흠이 없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변계량이 지은 글은 2백년 전에 있었는데, 지금 중건하는 것이니 비석을 세운 연월은 천계(天啓)069) 를 써야 합당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뒷날에 보는 자가 곡절을 모를 것이요, 흥폐와 시말은 바로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이니 역시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관의 계사대로 그 대략을 서술하여 비음(碑陰)에 새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찬술(撰述)하고 서사(書寫)하는 사람을 초계하는 것은 해조에서 할 일입니다."
하니, 따랐다.
정원이 아뢰기를,
"발인일에 상께서 성문 밖에서 영결하는데 출궁(出宮)하고 환궁할 때 내시가 상장(喪杖)을 받들고 가거나 드리는 일은 이미 의주(儀註) 안에 마련했으나 상께서 ‘내시가 말을 탄 채 상장을 받들고 가는 것은 불가하다. 만약 하인에게 준다면 설만할 듯하니, 연(輦)을 탄 후에 연 안에다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전교하셨습니다 내시가 상장을 받들고 가는 것은 이미 예문(禮文)에 실려 있으니 말 위에서 받들고 있는 것이 본디 무방하며, 만약 연 안에다 두면 미안할 듯합니다. 해조의 뜻 역시 그러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말 위에서 상장을 받들고 가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다. 예문에도 말 위에서 상장을 받들고 간다는 말이 없다. 다시 의정하라."
하였다. 예조가 상의 분부대로 임시로 연에 두기를 청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세자는 교외에 따라가서 길 왼쪽에서 영결해야 실로 정례(情禮)에 합당하다. 다만 어린 나이여서 기혈(氣血)이 건장하지 못하니 밤새도록 출입하면 반드시 매우 상할 것이다. 단지 궐문 밖에서 배사(拜辭)하게 하고, 교외에 가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뜻을 예조에 말하라."
원접사(遠接使) 김류(金瑬)가 치계하였다.
"조사가 4월 22일 승선해 28일에 출발하여 지금 묘도(廟島)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부안 현감(扶安縣監) 한흥일(韓興一)이 상소하였다.
"본현은 바닷가이기 때문에 모든 공물(貢物)을 다 쌀로 상납하여 미곡의 부족분이 매우 많게 되었습니다. 우선은 본색(本色)으로 상납하여 혜택을 입게 하소서."
이민구(李敏求)를 대사간으로, 이경의(李景義)를 문학으로 삼고, 정온(鄭蘊)을 특별히 명하여 경상 감사로 삼았다. 온은 상에게 총애를 받아 이번에 특별히 제수된 것인데, 온의 노모가 본도에 있기 때문이었다.
5월 12일 계축
경상 감사 정온이 상소하기를,
"노모의 와병 소식이 금방 도착하여 유시하는 교서를 기다려 조용히 배사할 수 없습니다. 본직을 체직시켜 때맞추어 돌아가 구원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지극히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경의 어머니 병은 이미 나아가고 있으니, 반드시 병이 나을 것이다. 경은 우선 머물러 유시하는 교서를 받고 가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발인할 때에 어막(御幕) 근처 및 길가의 곡식을 밟는 사람을 일체 엄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해당 부장(部將) 등이 만약 엄금하지 않아서 손상되는 곳이 있으면 마땅히 적발하여 중히 따질 것이다 이 뜻으로 승전을 받들어 착실히 거행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발인할 때에 먼저 교외에 가서 기다리는 것은 예(禮)에 있어 미안하다. 예문(禮文)에 의하여 뒤따라 모시고 가되 성 밖에서 노제(路祭)를 지내는 사이에 반서(班序)를 정돈하여 제사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곡하고 물러 나오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속히 해당 관원으로 하여금 의정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상의 분부대로 행하기를 청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본조가 거둥할 때의 각가지 복색(服色)을 예조에 물었더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전하께서 타실 여(輿)·연(輦) 및 양산(陽繖)·부채 등의 물건은 전교에 의하여 백색으로 싸고, 여·연의 배근장(陪近仗) 및 내차비(內差備)로 양산·부채 등을 받드는 사람들은 백의(白衣)·청건(靑巾)·흑대(黑帶)를 하며, 공련(空輦) 및 의장(儀仗)은 별로 고칠 것이 없다.’라고 하였기에, 이에 의하여 봉행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최복(衰服)을 입고 소련(素輦)을 타면서 앞에 오색(五色) 의장을 베푸는 것이 되겠는가. 정례(情禮)로 헤아려도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는데, 예관(禮官)의 의견이 그러하니,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연과 의장을 다르게 할 수 없으니, 속히 결정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대왕상 발인 수행 시의(大王喪發靷隨行時儀)에 ‘여(輿) 및 양산·부채는 흰 것을 쓴다.’ 하였고, 그 아래에 ‘승여에서 내리고 연에 오를 때 도종(導從)은 상의(常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왕위 계승한 후 교서를 반포할 때 및 황제상(皇帝喪)에 성복할 때에는 양산·부채만 흰 것을 쓴다고 하였으니, 지금 흰 것을 쓰는 것은 특별한 분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장(儀仗)에 이르러서는 각기 방색(方色)이 있으니, 이는 군용(軍容)에 관계되어 전의 국상부터 흰 것을 사용한 때가 있었습니다. 신들은 단지 《오례의》의 글에 의하여 구례대로 거행하라는 일로 병조에 답했던 것입니다. 이는 군용에 관계되니, 병조로 하여금 참고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병조가 아뢰기를,
"여·연·양산·부채는 전하의 몸에 따르는 물건으로 전하께서 최복(衰服)으로 상에 임하면서 청색·흑색을 쓰는 것을 편치 않게 여겨 흰 것으로 싸게 하셨는데, 《오례의》에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한때의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기휘·금고(金鼓)는 군용(軍容)을 호위하거나 여러 장소를 지휘하는 것이지 화려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니, 예조가 마련한 것이 근거 있는 것인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무신년070) 전례가 있으니, 대신에게 의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병조가 복계(覆啓)하기를,
"무신년 일이 등록(謄錄)에 실려 있지 않아 그때 해당 하인에게 물었더니, 교룡기(交龍旗)는 백색에다 흑룡(黑龍)을 그렸고, 홍색모(紅色毛) 및 둑(纛)은 흰 목면(木綿)으로 싸고, 앞에서 인도하는 방색(方色) 기휘는 모두 본색(本色)을 썼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에도 이에 의하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예장 도감이 아뢰기를,
"각처(各處)의 절목 가운데 감쇄하여 마련한 곳을 다시 자세히 살피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일찍이 예조 및 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마련할 때에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각 제사는 일일이 준수하여 빠뜨림이 없었으나 빈궁문 도로 교량제(殯宮門道路橋梁祭), 빈궁 해사제(殯宮解謝祭), 문장 파훼 선고 사유제(門墻破毁先告事由祭), 하산 소전 인혼 이안제(下山所奠引魂移安祭), 환안제(還安祭) 등은 등록에만 실려 있고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관상감이 주관하고 해당 관사에서 전례를 살펴 설행한다 하였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각 해당 관사로 하여금 참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계빈전(啓殯奠)은 《가례》에 단지 ‘조전(朝奠)을 인하여 설행한다.’고 되어 있는데, 등록에는 ‘계빈후에 별전(別奠)한다.’라는 말이 있어 다시 《오례의》의 계빈전의(啓殯奠儀)를 상고하였더니, ‘조전을 인해 제고(祭告)한 후에 또 전(奠)을 설행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별전인 듯합니다. 지금은 마땅히 이에 의하여 마련해야 합니다.
산소(山所)의 3년간의 주다례(晝茶禮)에 대해서는 《오례의》에 없고 경자년 등록에 있으나, 반드시 한때의 특별한 분부에 의하여 행한 것입니다. 이는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서 행하는 예로 대신의 뜻은 모두 예문에 의하여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산릉(山陵)의 3년간의 주다례는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으나 예로부터 행해져서 이미 규례가 이루어졌는데 지금 말을 꾸며가며 막으니 야박하다고 하겠다. 여염집에 비하면 두 곳에 제사를 설행하는 것 역시 참람하다. 다례(茶禮)를 폐지하고자 하는 것 역시 마땅하지 않은가? 이는 응당 행하여야 할 제사이나 대신의 뜻이 이미 그러하고, 도감의 말 또한 이러하기 때문에 내가 감히 강행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도감이 또 아뢰기를,
"원소(園所)의 주다례는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혼궁(魂宮)에 이미 주다례가 있으니, 원소는 예문(禮文)에 의하여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계품한 것이지, 처음부터 말을 꾸며 아뢴 것이 아니며 역시 억지로 다투려는 뜻도 없었습니다. 지금 하교를 받드니, 황공하고 조심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도감에 있으면서 대단히 제도를 어기는 일이 아니면 오직 성상께서 추모하는 지극한 정을 받들고자 하였는데, 유독 이 다례 한 절목만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방해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해당조로 하여금 속히 마련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신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다례의 선품(膳品)이 열 그릇도 못 되는데 도감이 그 비용을 아껴서 또 강쇄하려 시종 방계(防啓)하니, 역시 박하지 않은가. 이처럼 구차한 제사는 내가 지내고 싶지 않다. 마련하지 말라."
하였다.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치계하였다.
"5월 7일, 도독(都督)이 돌아와 수구(水口)를 건너 본부(本府)에 이르러 소역(小譯)을 불러 말하기를 ‘이번 군사의 성공은 오로지 그대 나라에 힘입은 것으로 내가 실로 감사한다. 부성(府城)에 들어 가고자 하나 많은 군병이 반드시 폐단을 끼칠 것이므로 우선은 이곳에 머물다가 곧 노영(老營)으로 돌아가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먼저 보낸 군병이 갑자기 적의 기병(騎兵)을 만나 싸워 서로의 피해가 비슷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깊이 들어가지 않았거늘 어찌 서로 싸웠겠는가. 이는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또 치계하였다.
"소역 김덕룡(金德龍)의 고목(告目)에 ‘도독의 장관(將官) 왕보(王輔)·모영미(毛永美) 등이 한 떼의 적을 만나서 해를 면치 못하고 그 나머지 최천태(崔天泰)·모유남(毛有男)·모영영(毛永榮)·장괴(張魁)·조익룡(趙翼龍) 등은 패주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도독의 군중 사람이 귀에 대고 밀담을 나누었다. 대개 비밀에 부침이 아주 심해 확실히 탐지할 길이 없다.’ 하였습니다."
5월 13일 갑인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 등이 상차하기를,
"제왕(帝王)의 효도는 일반 필부의 예와는 달라 사세에 관계되므로 자기 심정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밤늦도록 창황하게 멀리 교외로 나가시게 되면 여러 아랫사람들이 분주히 따라야 하므로 도성이 텅 비게 될 것이니 대소의 인정이 모두 우려합니다 신들이 곡진히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성명께서 어찌 이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십니까. 우러러 열성조를 상고해 보아도 행한 일이 없으니, 반드시 그 사이에 깊은 뜻이 있어서였지 결코 구차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지금은 밤 시간이 아주 짧고 날이 쉬이 밝아져 전(奠)을 설행하고 계빈(啓殯)함이 용이하지 않은데 대가가 먼저 출발하고 영여(靈輿)가 뒤따라 나가면 모든 일이 군색하게 될 단서가 한둘이 아니고,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전념하기를 보장할 수 없으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윤방과 신흠 등이 어제 이미 갖추어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연계(連啓)하고자 하였으나 번거로울까 염려하여 우선 물러나왔습니다. 물러나온 후에 생각해 보니, 여정(輿情)이 있는 바여서 다시 진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명께서는 내리신 명을 정지하도록 허락하시고 해당조의 계사대로 궐문 밖에서 예를 행하시면 매우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 경들의 정성을 잘 알았다. 인정과 사세는 혹 그렇더라도 지극한 정이 일어나 스스로 억제할 수가 없으니, 경들은 모름지기 내 심정을 생각하여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耉), 접반사(接伴使) 정두원(鄭斗源)이 치계하였다.
"도독의 군병이 처음에 강을 건널 때 여덟 길로 나누어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수병(水兵)으로 마응괴(馬應魁)가 거느리고, 하나는 참장(參將) 왕보(王輔)가 선봉 대장(先鋒大將)이 되어 여러 장관(將官) 20명을 거느리고 의주에서 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는 곡승은(曲承恩)·서고신(徐孤臣) 등이 창주(昌州)로부터 강을 지나갔습니다. 모유희(毛有喜)는 바로 왕보 휘하의 장수인데 그날 몸을 빼어 도망해 와 말하기를 ‘이달 5일에 왕보는 거짓으로 항복한 가달(假㺚)의 꾐에 빠져 요양(遼陽)을 지나 안산(鞍山)에 이르렀는데, 성 안에는 달병 및 가달 몇 명만 있어 드디어 그 성을 함락시키고 사람과 가축을 많이 노획하여 나왔다가 조금 이긴 것을 이롭게 여겨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니 뜻밖에도 진달(眞㺚)이 포위하고 공격하여 왕보·이양매(李良梅)·최천태(崔天泰)·이상충(李尙忠)·장문등(張文登)·모유남(毛有男) 등 6명의 장수는 전사하고 그 나머지 14명의 장수는 간 곳을 모르며, 거느렸던 1만 8천은 모조리 결단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국 사람의 말은 모두 믿기가 어렵습니다."
박동선(朴東善)을 대사헌으로, 강석기(姜碩期)를 응교로 삼았다.
5월 14일 을묘
간원이 아뢰기를,
"하늘에 닿는 슬픔이야 본디 끝이 없는데, 마지막 보내는 정이 어찌 원근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전하의 추모하는 망극한 정회로는 반드시 교외 몇 리까지 나가기 전에는 정례(情禮)를 다했다고 여기시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밤을 무릅쓰고 성(城)을 나가서 처소 아닌 곳에 임하여 비좁은 땅에서 애통해 하시고, 북적대는 가운데서 곡사(哭辭)하시는 것은 체례(體例)로 헤아려보아도 실로 온당치 않습니다. 영여(靈轝)를 멈추고 장막을 치느라 저물게 되는 것도 미안할 뿐만 아니며 더군다나 대신이 계사한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한 정을 억누르시고 내리신 명을 정지하도록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 교외에서 곡송(哭送)하는 일은 실로 정례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대들이 예제(禮制)를 돌보지 않고 이처럼 망령되이 논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밤 1경(更)에 창백(蒼白)한 기운 한 가닥이 건방(乾方)에서 일어나 하늘 복판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3, 4장(丈), 넓이는 1척쯤이었으며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5월 15일 병진
승지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우제(虞祭) 때의 여러 집사(執事)를 사묘(私廟)에 친히 제사할 때의 예에 의하여 마련하고, 여러 종친 가운데 벼슬이 있는 자도 들어와 참여하게 하라는 일로 전교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의 참여 여부는 그 결정 가운데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감히 품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승지와 사관이 들어와 참여해도 무방하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어제 습례(習禮)할 때에 여(轝)를 메는 군사가 많이 다쳤다고 한다. 대장(大將)에게 말하여 이수(里數)를 줄여 정하고 군사를 자주 교체하여 상하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 그렇게 하고도 마찬가지이면 별도로 의원(醫員)을 정하여 얼음과 약물을 많이 가지고 가 성의를 다해 구활(救活)하게 하라. 만약 사람이 죽거나 하면 의관은 중죄를 면치 못할 것이다."
5월 16일 정사
예조가 아뢰기를,
"혼궁(魂宮)에 별제(別祭)를 친히 행할 때의 의주(儀註)는 사묘에 친히 제사하는 예로 입계하였는데, 지난해 친히 제사할 때에는 울창주(鬱鬯酒)만 쓰고 전폐(奠幣)는 하지 않았습니다. 친히 행하며 주헌(主獻)하는 별제는 상주(喪主)가 주헌하는 제사와 다름이 있으니, 전폐를 병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중대한 일에 관계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해당 조의 계사대로 병행하는 것이 무방합니다."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반혼(返魂)할 때에, 상께서 혼궁 문밖에서 지영할 때의 배곡(拜哭)하는 절차는 지난번 우러러 품하였습니다. 당초 곡례(哭禮)로 마련한 것은 단지 정례(情禮)상 그만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고 사세상 불편한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뒤 여러 사람의 의논이 ‘혼교(魂轎)가 지나갈 때 만약 배곡의 예를 행하면 반드시 혼교를 멈추어야 하는데, 교부(轎夫)가 메고 서 있는 앞에서는 결코 예를 행하기가 어렵다. 반드시 악차(幄次)를 설치하여 봉안(奉安)한 후에야 바야흐로 예를 행할 수 있어 매우 불편하다. 상시의 지영례에 의해 국궁(鞠躬)만 행하고 따라 들어가 예를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제 배례한다는 전교를 인하여 감히 성지를 품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곡례(哭禮)를 하지 않으면 성상의 심정이 반드시 서운하실 것이고, 혼교를 멈추는 것도 매우 편의하지 못합니다. 만약 혼교가 처음 동구(洞口)에 이를 때에 찬의(贊儀)가 미리 ‘곡배(哭拜)’라 외치고, 이미 지나간 후에도 그도 따라 들어가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일이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이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신들이 확정지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밖에서 작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신(大臣)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전과 중전에게 위로의 말씀을 올렸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상께서 교외로 나가실 때 대소 신료들이 모두 배위(陪衛)하면 궐내의 수직(守直)이 허술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마땅히 유도 대신(留都大臣)이 있어야 하는데, 신 이원익(李元翼)은 바야흐로 병고(病告) 중이고, 신 윤방(尹昉)은 교외로 거가를 따라 가고, 신 신흠(申欽)은 원소(園所)에 배행해 가서 머물러 있지 못할 형세입니다.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궐하(闕下)에 머물러 있게 하고, 도감(都監)의 초군(哨軍) 약간 초(哨)가 머물러 호위하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귀가 남아 있으면서 대궐을 지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5월 17일 무오
상이 교외에 행행하여 계운궁(啓運宮)의 영여(靈轝)를 곡송하였는데, 환궁한 후에 백관이 위로의 말씀을 올리니, 답하였다.
"나의 악이 쌓여 끝내 이런 변을 만났고, 또 전의 규례와 사세로 인하여 광(壙) 옆에서 배곡하는 예를 하지 못하였으니, 영결하는 슬픔이 하늘에 사무쳐 가시지 않는다. 지금 여러 경들의 위로의 말을 들으니, 더욱 슬프고 가슴 아프다."
우의정 신흠(申欽), 도승지 조익(趙翼)이 배호(陪護)하여 원소(園所)에 갔다.
5월 18일 기미
강원도 금화현(金化縣)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다. 양구현(楊口縣)에 광풍이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려 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춘천부(春川府)에는 소나기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쏟아지고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크기가 개암만하여 면화(綿花)와 서속(黍粟)이 태반이나 손상되었다. 감사 김상(金尙)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원소에 하관(下棺)할 때 상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연평 부원군 이귀가 상차하여, 처음에 강복(降服)한 것이 잘못임을 극론하고, 또 우제(虞祭)·졸곡제(卒哭祭)의 전헌(奠獻)을 친히 주관하기를 청하였는데, 예조에 회답할 만한 당상이 없어 예조의 낭청이 대신에게 물었다. 좌상 윤방이 아뢰기를,
"이 차자의 말을 보니, 강복한 것이 잘못임을 극론하고 우제·졸곡제를 상께서 주헌(主獻)하여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당초 조정 신하들의 의논은 대개 성상께서 이미 선조 대왕의 대통을 이었으니, 낳은 어버이는 강복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초상(初喪) 때에 여러 번 청하여 성상의 윤허를 받아서 이미 장기(杖期)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니 삼년상을 지내야 할 사람이 상주(喪主)가 되어야 마땅할 듯하기 때문에 예에 따라 여러 번 청하여 역시 성상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성상의 효성으로써 뜻을 굽혀 억지로 따르셨으니 여러 아래 사람으로서 누군들 감격하지 않았겠습니까.
차자 안에 있는 이른바 적서(嫡庶)와 귀천(貴賤)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조정 신하의 말이 아니며, 또 조정 신하가 감히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후에 조정 의논을 공격한 상소에 비로소 이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상주를 정하였고, 신주(神主)의 방제(傍題)를 썼으니, 우제·졸곡제의 전헌은 상주가 마땅히 주관하여야 할 듯하고 상께서 별도로 친히 제사하시는 것도 정례(情禮)에 합당합니다. 그래서 신이 동료들과 더불어 해당 조의 계사로 인해 망령되이 헌의(獻議)한 것이니, 지금 감히 처음 설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오직 상께서 재단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보(李俌)가 이미 상주가 되었으니, 우제·졸곡제의 초헌(初獻)은 보가 행해야 예에 합당하다. 그러나 내가 출계(出繼)한 일이 없으니, 초헌은 위에서 하는 것 역시 불가할 것이 없다. 차자의 사연대로 고쳐 마련해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우제의 초헌은 위에서 행할 것이니, 별제(別祭)는 행하지 말아야 할 듯하다. 정원은 의논해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생각해 보니, 이번 상제(喪祭) 한 가지 일은 처음부터 조정의 백료 상하 여러 사람의 같은 뜻에서 나왔기 때문에 전하의 지극한 정으로도 오히려 뜻을 굽혀 강쇄하였고, 반복해 탁마하여 경(經)에 의거, 예를 정했습니다. 우제와 졸곡제의 초헌에 있어서는 상주가 행하는 것이 실로 예에 마땅한 것이며, 해당 조가 이미 대신에게 의논하여 복계(覆啓)해 품정하였으니, 오늘 저녁부터 차례로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작스레 막중한 예제(禮制)를 고쳐서 종전에 숙의하여 완전히 정한 예를 모조리 전도되고 문란되게 하니, 사리로 헤아리건대 매우 부당합니다. 신들이 출납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묵묵히 있을 수 없어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하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문관 응교 강석기(姜碩期), 부교리 이경석(李景奭), 수찬 김광현(金光炫), 부수찬 박황(朴潢) 등이 상차하기를,
"삼년상은 통상(通喪)인데 힘써 공의(公議)를 따라 기복(朞服)으로 내렸으니, 종통(宗統)에 압존(壓尊)되는 그 뜻이 매우 엄합니다. 이미 종통에 압존되어 기복으로 낮추었으니, 상(喪)에는 저절로 주장하는 자가 있어 전하께서 우제를 주관하지 못하는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하여 많은 변설을 기다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는 반드시 자기 주장을 세우고자 하여 우제의 예(禮)를 인하여 다시 당초의 복제(服制)를 이끌어 비난하는데, 그의 허다한 사설은 우선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대개 이치로 미루어 보아도 능원군(綾原君) 이보(李俌)가 이미 상주가 되고 전하께서는 기복으로 낮추었으니, 예에서 이른바 주인이라 하는 것은 이제 과연 누가 되겠습니까. 예관(禮官)이 우제의 의례를 품정한 것이 이미 자세하였고, 이번 대신의 헌의 역시 매우 명백하였으니, 전하께서도 그것이 당연함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지극한 정에 가리워 근거없는 설에 미혹되셨는지 우제의 의례를 고치도록 하시니, 신들은 부당하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출계(出繼)하신 일은 없으나 이미 압존, 강등하는 원칙에 따라 복을 강등하셨고 상에는 주인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우제에 전하께서도 도리어 주인이 되시면, 당초 압존하여 강등한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상주를 세워 전궤(奠饋)를 주관시키는 뜻에도 매우 어긋납니다. 전도되고 문란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성명께서는 대신의 의논을 살펴 받아들여 이미 정한 예를 준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귀의 차자는 소견이 없지 않으며, 예제(禮制)를 강정하는 것은 해당 관원이 하기 마련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집의 윤형언(尹衡彦), 사간 이준(李埈), 장령 정세구(鄭世矩)·민응형(閔應亨), 지평 민응회(閔應恢)·홍명구(洪命耉), 헌납 김육(金堉), 정언 이경증(李景曾)·김지수(金地粹)가 합계(合啓)하기를,
"《예기(禮記)》에 ‘예(禮)란 것은 이치상 바꿀 수 없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종묘의 주인이 되셨으므로 사친(私親)의 상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치가 매우 명백하며 그 의리도 엄정합니다. 이미 한 나라의 공의(公議)를 인하여 기왕 능원군 이보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귀의 근거없는 설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대신의 계사를 거절하시고 도리어 우제를 스스로 주관하겠다고 전교하시니, 경(經)에 어긋나고 이치에 벗어나며 지난번에는 따르셨다가 지금은 어기시는 것입니다. 신들의 염려는 이 한 가지 예를 다투는 데 있는 것만 아닙니다. 보가 마땅히 이 제사를 주장하여야 함은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는 바인데 또 스스로 주관하겠다는 명이 계시니, 신들은 이점에 대해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명께서 친히 제사하시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라면 별제(別祭)의 설행이 내일 있습니다. 하루 사이에 성명(成命)을 고치고자 하시니, 천리와 인정으로 헤아려도 큰 잘못입니다. 대신의 계사대로 이미 정한 예를 그대로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헌례(獻禮)를 친행한다 하여 별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없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예에 있어 그다지 어긋나는 일이 없는 듯한데 이처럼 논집(論執)하니 너무 지나치다."
하였고, 세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미 유시하였다.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고, 네 번째 아뢰니, 답하기를,
"이는 크게 방해되는 일이 아닌데 그대들이 이처럼 굳게 고집하여 막중한 제향(祭享)을 때맞춰 지낼 수 없게 하니 매우 부당하다."
하였다.
옥당이 다시 상차하여 대신의 의논을 살펴 받아들여 이미 정한 예를 준행할 것을 청하니, 이미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양사가 합사(合司)하여 아뢰기를,
"주상(主喪)이란 무엇이냐 하면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말합니다. 능원군(綾原君)에게 주상의 이름이 있는데 그 제사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고, 전하께서는 종묘 제향의 주인이신데 주관해서는 안 될 제사를 주관하려 하시니, 둘 다 근거가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귀가 편벽되고 그릇된 견해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제사가 이미 임박했는데 갑자기 차자를 올렸으니, 조정의 존엄성을 매우 무시한 처사입니다.
예에 밝고 경에 통달하신 전하께서 시비(是非)의 소재를 모르시지 않을텐데 지극한 정에 끌려 이미 정한 예를 경솔히 고치면서 외정(外廷)의 의논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후세의 비난을 상관하지 않으시니, 신들은 실로 성명께서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사는 큰 일이고 예는 상경(常經)인데 어찌 한 사람의 빗나간 의논 때문에 분분하게 변경시켜가면서 꺼림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초우(初虞)는 제사의 시작입니다. 시작이 이미 잘못되면 그뒤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아닌 것으로 제사를 지내면 참으로 미안한데 때맞춰 지내지 못하는 것을 어찌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밤늦도록 연달아 다투어 명을 받지 못하면 물러가지 않겠습니다. 대신의 계사대로 이미 정한 예를 그대로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지나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옥당이 세 번째 상차하여 논하니, 이미 양사에 유시하였다고 답하였다.
우의정 신흠(申欽)이 상차하기를,
"신이 오는 길에, 우제의 초헌(初獻)을 해당 조로 하여금 고쳐 마련하도록 전교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은 예관(禮官)이 이미 품정(稟定)하였고, 초우의 예가 현재 있는데 갑자기 이런 전교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평소 예학(禮學)에 어두워 터득한 바가 없으나, 생각하건대 해당 관아의 의논은 예에 의거해 정한 것이지 결코 날조한 설이 아닙니다. 예에 있어선 정(情)을 굽히는 수가 있으므로 이미 능원군을 상주로 삼았으면 어찌 우사(虞祀)의 주인을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능원군이 초헌을 하고 성명께서 초헌을 하시지 않는 것이 모두 본디 그런 것인데, 이미 정한 예를 이처럼 분분하게 고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이귀(李貴)의 말은 상정(常情)을 주장하는 것이며, 예관의 의논은 예문(禮文)에 분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정례(情禮)의 사이를 살피시어 정으로써 의리를 해치지 마소서.
신은 윤방(尹昉)이 헌의할 때에 원소(園所)에 있어서 번거롭게 아뢸 필요가 없었으나 이런 대례(大禮)를 당하여 어찌 감히 품은 생각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이처럼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관이 의논하여 정한 것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출계(出繼)한 예(禮)가 없으니 초헌을 행하더라도 의리를 해치는 일이 없을 듯하다. 정례로 헤아려 보아도 여기에 지나지 않으니 이러한 뜻을 양해하여 분분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사(合司)하여 다시 아뢰니, 답하기를,
"나의 불효로 인하여 초우례를 오늘 안에 설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매우 비통하다. 결코 윤허하여 따를 리가 없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합사하여 세 번째 아뢰어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이미 밤이 깊었으니 만약 빨리 서둘러 행하지 않으면 오늘 안에 우제를 행할 수 없게 된다. 전에 마련한 대로 예모관(禮貌官)은 여러 집사를 거느리고 즉각 실행하라. 나는 병이 있어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니, 정원은 잘 알고, 별제 역시 물려 행하라."
5월 19일 경신
연평 부원군 이귀가 상차하기를,
"신이 양사가 합계한 말을 보건대, 바로 신의 윤기(倫紀)를 밝히고자 하는 말을 도리어 예경(禮經)에 위배된다고 하였으니 대간이 다투는 바가 무슨 일이며, 신이 다투는 것 역시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은 대원군(大院君)071) 을 사친(私親)이라 하나, 신은 전하께서 출계하지 않았으니 대원군은 마땅히 전하의 아버지가 된다고 여깁니다. 대간은 예경에서 말하는 ‘임금의 어머니가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계운궁(啓運宮)에 적용하나, 신은 이른바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은 바로 왕자(王子)로서 정통을 이은 자는 그 본생(本生)이 정후(正后)에게 압존되기 때문에 시마복(緦麻服)을 입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당초에 시마복으로써 이 상(喪)의 복제로 삼고자 한 것은 또한 틀리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바로 왕손입니다. 출계하여 남의 후사가 된 적이 없으니, 대원군은 바로 전하의 아버지여서 결코 사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사친이란 것은 마치 선조(宣祖)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사이가 그런 것입니다 이미 사친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임금의 부모이니, 예경에 ‘임금의 부모상에는 임금은 삼년상이고 여러 신하들은 기복(朞服)을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대원군의 귀천과 적서를 논하여 예경의 ‘제후는 탈종(奪宗)072) 한다.’는 법으로 헤아려선 안 됩니다. 그렇다면 결코 아들이 제후가 되었는데 아버지가 왕자로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땅히 별도로 예묘(禰廟)를 세워 조예(祖禰)의 통(統)을 이어야 한다는 곡절은 이미 전번 차자에서 다 썼습니다.
대간은 종통(宗統)에 압존된다는 것으로 주장하지만 신은 달리 생각합니다. 《예기》에 ‘조(祖)는 손(孫)을 압존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조(宣祖)께서 비록 살아 계시더라도 계운궁의 삼년상을 강등할 수가 없는데, 어찌 전하께서 조통(祖統)을 이어받은 까닭으로 ‘왕비가 아니면’이라는 말을 끝내 계운궁에게 적용하며, 또 능원군으로 하여금 이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심지어 이 상에는 변복만 하고 삼년상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간은, 전하께서는 자전(慈殿)에게 나라를 받았으니, 남의 후사가 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강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신은 달리 생각합니다. 《의례(儀禮)》에 이른바 ‘증조(曾祖)에게서 나라를 받은 임금은 강복하지 않으며, 질병이 있어 즉위하지 못한 조(祖)와 부(父)에는 삼년상을 강등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증조와 조에 후사가 된 것에 차별을 주어 말하겠습니까. 이는 더욱 무리한 말입니다. 이것은 당초 예관(禮官)이 예경의 본뜻을 모르고 잘못 마련한 소치입니다. 이 잘못은 예관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하 후세에 전하를 어떤 임금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는 기왕의 잘못이어서 신이 다시 번거롭게 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임금은 한 나라의 주인이니, 한 나라의 무슨 일인들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군모(君母)의 제사에만 이미 대원군을 고(考)라 칭한 마당에 스스로 초헌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전하께서 이 제사에 임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지만 만일 이 제사에 임하셨는데 삼헌(三獻)을 주관하지 못하고 곡위(哭位)에 물러서 계시면 정례에 과연 합당하겠습니까. 예관과 대신이 이러한 곡절은 모르고 잘못된 견해만 억지로 고집하여 끝내는 막대한 중례(重禮)를 저절로 무륜(無倫)의 행사로 빠지게 하니, 신은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이른바 예라는 것은 인정(人情)을 따르고 천리(天理)를 조절한 것을 말합니다. 이번에 전후에 예를 의논한 것은 경문(經文)의 본뜻에 의거하지 않고 단지 억견(臆見)으로 황(皇) 자와 효(孝) 자를 삭제하여 예의 바름을 얻은 것이라 여기니, 이 예 역시 어떤 성현(聖賢)이 지은 글에 의거하여 한 것입니까.
또 옛사람의 글에는 허(虛)와 실(實)이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황고(皇考)·효자(孝子) 네 글자 가운데 ‘황’과 ‘효’ 두 글자는 허자(虛字)이며 ‘고’와 ‘자’ 두 글자는 실자(實字)라고 여깁니다. 황·효 두 글자를 감하고 이미 고·자 두 글자를 칭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이는 참된 고(考)가 아니며 참된 자(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지난번 조정 신하들이 합계(合啓)하면서 ‘고(考)라 칭하는 것은 방편상 부득이해서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고’라고 칭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데 이에 방편상 부득이해서 그렇게 일컬으면서 감히 고(考)의 제사를 주관하지 못해야 합니까. 아, 사람의 소견이 짧음이 이지경이니 또한 괴이하지 않습니까.
지금 대간이 신의 말을 예경(禮經)에 위배된다고 하는데, 대간이 논한 바는 예경에 위배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전번 차자에서 전하를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못하게 인도한다고 한 것은 신도 다시 생각해보니 지나친 말이라고 여겼는데, 지금 대간이 논한 바를 보면 신의 말이 이제 과연 징험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않는 것과 모후(母后)를 폐한 것은 예경에 위배되기는 마찬가지인 것으로 지금의 대간은 광해군 때의 대간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만 광해군 때의 대간은 이익을 위해서였고, 지금의 대간은 알지 못하면서 한갓 명분을 위한 것으로, 단지 명리(名利) 사이에서 다투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한심하지 않습니까. 신이 당초 의(義)를 내세운 것은 윤기(倫紀)를 밝히기 위해서인데, 지금의 대간은 전하를 아버지를 아버지로 하지 못하게 인도하니,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만약 신의 말이 예경에 어긋난다고 여기시어 성현의 예경 본뜻을 따르지 않으시고 마침내 능원군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 스스로 헌례(獻禮)를 주관하지 않으시면, 신은 결코 지금의 대간과 함께 조정에 서서 차마 윤기가 끊어지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한 번 옳게 여기거나 그르게 여기는 데 따라 윤기의 명암이 판가름납니다. 한 번 잘못된 것도 이미 심한데 어찌 다시 그르칠 수 있겠습니까. 감히 공자의 ‘스스로 돌이켜 보아 곧으면 천만 명의 적에게라도 나는 가 대적하겠다.’라는 교훈으로써 거취를 결정하고자 하여 다시 천청(天聽)을 번거롭히니, 만 번 죽어도 감수하겠습니다. 성명께서는 먼저 신의 직을 삭탈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조정 의논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신을 조용한 바닷가에서 노닐다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시면 그지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의주(儀註) 가운데, 주인 및 헌관(獻官)은 서계(西階)에 자리하고, 여러 종친은 서정(西庭)에 자리한다고 하였는데, 존속(尊屬)의 위치를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제 우제 때 헌관은 계단 위에 서고 왕자군(王子君)은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고 하니, 매우 미안하다. 지금 이후에 만약 왕자군이 들어와 참여할 때가 있으면 헌관 및 여러 종친의 자리는 서정에 설치하고 왕자의 배위(拜位)는 서계 위에 베풀어 존비를 구별하게 하고, 또 미안한 일이 없도록 하라."
5월 20일 신유
상이 혼궁(魂宮)에 행행하여 재우제(再虞祭)에 참석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모병(毛兵)073) 이 패배한 연유는 계속된 변신(邊臣)의 보고가 서로 달라서 혹은 ‘적의 꾐에 빠져 성에 들어갔다가 패배당한 것이다.’ 하고, 혹은 ‘말 목장(牧場)의 순라병에게 패배당한 것이다.’ 하고, 혹은 요성(遼城)의 진달(眞㺚) 3백 기(騎)쯤이 뜻밖에 달려와 섬멸한 것이다.’ 하여 어떤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모병이 이미 패하여 남은 군졸이 아직껏 강을 건너지 못하였고, 또 곡승은(曲承恩) 등이 이미 살아 돌아왔는데도 강을 건너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서고신(徐孤臣)은 소굴로 돌아간다는 말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습니다. 또 가달(假㺚) 등이 모두 말하기를 ‘적이 4월 19일 서쪽을 범했다.’고 하는데 도망하여 온 사람 이명길(李明吉)은 또 말하기를 ‘5, 6월 사이에 산해관을 침범하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변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탐지하여 힘써 실상을 알아내어 명백하게 치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다시 노병(老病)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였다.
"상소를 보고 경의 간결한 뜻을 잘 알았다. 내가 상 중에 있지만 경에 대한 일념은 일찍이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는데,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내 마음이 서운하다. 지금이 어떤 때인데 경은 이런 말을 내는가. 조사(詔使)가 곧 오게 되어 있고, 모병(毛兵)도 혼란에 빠졌고 노추(奴酋)가 산해관을 침범한다는 매우 나쁜 소식이 있으니, 이는 참으로 천하가 위급한 때이다. 경이 병중에 있기는 하지만 어찌 아무 걱정없이 마음속에 잊어버리겠는가. 내가 새로 상을 당해 장례를 겨우 마쳐 슬프고 망연하여 의지할 곳이 없는 듯한데, 경이 그 자리를 떠나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경의 진퇴는 실로 종사의 안위에 관계되니, 경은 위로 선왕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내 심정을 살펴 모름지기 사직하지 말고 병조리하며 힘써 보필하라.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민구(李敏求) 이하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예(禮)는 본디 명백하여 쉽게 알 수 있는 도리여서 다시 별달리 의논할 단서가 없으니, 참으로 편견을 갖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이론을 제기하여 한번 정해진 경제(經制)를 어지럽히겠습니까. 연평 부원군 이귀(李貴)는 갑작스레 일에 임하는 즈음에 기회를 틈타 주장을 펴 요행히 따르기를 바랐고, 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장황하게 진차(陳箚)하여 거취로써 강요하였습니다.
원본(原本)이 내리지 않아 그 말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대개의 말을 보면 이미 그지없이 한심스럽습니다. 종이 가득히 내닫는 말이 마음대로 기세를 부리며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었고, 심지어 인륜도 없고 도리도 없는 부당한 말을 가지고 배척해서는 안될 지위까지 배척하였으니, 조정의 욕됨이 막심합니다.
신들은 모두 무상한 사람으로 언관의 자리에 있어 학문은 예(禮)를 밝히기에 부족하고, 정성은 임금을 바로잡는 데 부족하나 평소의 마음은 다만 임금을 허물없는 곳으로 인도하여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추악한 비방을 함부로 가하여 윤기(倫紀)를 멸절시킨다고까지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대각(臺閣)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파척하라 명하시어 조정을 맑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연평 부원군 이귀의 차자 사연은 맞지 않는 곳이 있으나 그 마음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사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번 우제의 헌례(獻禮)를 위에서 행하는 것 역시 크게 불가할 것이 없는데도 경들이 밤늦게까지 논집하여 막중한 제향을 제 날짜에 행할 수 없게 하였으니, 경들의 처사 또한 매우 괴이하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응교 강석기(姜碩期), 부교리 이경석(李景奭), 수찬 김광현(金光炫), 부수찬 박황(朴潢)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논사(論思)하는 직책에 있으면서 예 아닌 일을 목견하고 감히 묵묵히 있을 수가 없어 양사와 함께 간쟁했는데, 지금 양사의 많은 관원이 연평 부원군 이귀의 배척을 무겁게 받아 전부 피혐하여 본관이 처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시종 논집(論執)한 바가 양사와 다름이 없는데 어찌 감히 버젓이 처치하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속히 처치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상차하기를,
"이론(異論)의 해됨은 심한 것입니다. 응당 행해야 하고 바꿀 수 없는 제도를 갑자기 때가 임박하여 뒤흔들어 이미 정한 막중한 예가 전도되게 한 것은 연평 부원군 이귀의 차자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옛 예(禮)를 거스르고 국시(國是)를 어지럽혔는바 한 절목이 어긋나면 대경(大經)이 따라서 파괴되는 것으로, 그것을 ‘경례(經禮)에 위배된다.’고 한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대신(臺臣)이 시종 힘껏 다툰 것은 실로 임금을 예로 섬기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다행히 성상의 밝은 결단을 힘입어 곧장 비례(非禮)의 일을 정지했으니 이른바 해와 달이 다시 빛을 발해 사람이 모두 우러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귀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도리를 알았다면 그가 다시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어야 하는데, 감히 장황한 사설을 늘어 놓아 다시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는 조정을 욕보이고 공론을 멸시함이 커서 비단 대신(臺臣)만 꺾고 욕한 것이 아닙니다. 윤기(倫紀)를 멸절시켰다는 말은 또 조리가 없어 이는 본디 해괴하여 따질 것이 못 되니, 하필 이 때문에 인피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21일 임술
평안 감사 5월 18일에 조사가 가도(椵島)에 정박했다고 치계하였다.
5월 22일 계해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삼우제(三虞祭)에 참여하였다.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삼우제(三虞祭)에 참여하였다.
5월 23일 갑자
예조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면 왕세자가 접견하는 예가 있어야 할 듯하여서 의주(儀註)와 절목을 해당 조로 하여금 강정하게 하셨습니다. 왕세자가 중국의 책명(冊命)을 받은 후라면 조칙을 맞이하거나 연향할 때 다 나가 참여하여야 하고, 또 별도로 연향을 청하는 예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중국의 책명을 받지 않았으니 전례에 의하여 접견하기가 어려울 듯싶습니다. 다만 중국 사신이 만약 들어서 알고 접견을 청하면 접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관복(冠服) 및 복색을 대신에게 의논하여 미리 강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원접사 김류(金瑬)가 치계하기를,
"역관(譯官) 장예충(張禮忠)이 문안사(問安使)를 따라가 정사(正使)를 뵈었는데, 상께서 내린 예단(禮單) 가운데서 황모필(黃毛筆) 10 개만 받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주었으며 부사(副使)도 그렇게 했습니다. 정사는 용모와 사기(辭氣)가 매우 단정하고, 부사는 뚱뚱하고 엄준하여 성품이 꽤 까다롭고 세세했습니다. 정사가 묻기를 ‘국왕의 배첩(拜帖)에 어찌 남색(藍色) 찌를 사용하였는가?’ 하므로 예충이 답하기를, ‘국왕께서 금년 정월에 생모 상을 당하였다.’ 하니, 정사가 ‘이는 너희 나라의 사상(私喪)이며, 이번 조칙은 바로 성천자(聖天子)의 막대한 경사이다. 어찌 예를 모르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 이후에는 남색 찌를 한 첩자(帖子)는 우리가 결코 받지 않을 것이니, 너희는 원접 배신(遠接陪臣)에게 전해 후에는 이렇게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예충 등이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예의를 조금은 아니 국왕께서 조칙을 맞을 때에는 으레 길복(吉服)을 입으실 것이지만, 노야(老爺)와 서로 만날 때에는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므로 소복을 입으실 것이다. 배첩에 남색 찌를 쓴 것 역시 그런 예이다.’ 하니, 정사가 답하기를 ‘내가 남색 찌를 받지 않는다는 뜻을 너희들에게 말했으니, 내일 다시 말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원이 홍색 찌를 쓸 것을 청하니, 따랐다.
밤에 곤방(坤方)과 동방(東方)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다.
5월 24일 을축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사우제(四虞祭)에 참여하였다.
5월 25일 병인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오우제(五虞祭)에 참여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하의 면복(冕服)에 혁대(革帶)가 없는데 이른바 혁대는 바로 백관의 조복(朝服)에 착용하는 품대(品帶)인 것입니다. 관(冠)은 있고 대가 없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듯합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및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하니, 천자 관복(天子冠服)·친왕 관복(親王冠服)·문무관 관복(文武官冠服)의 도설(圖說)에 열록(列錄)된 각 장에 모두 혁대가 있어, 천자는 옥대(玉帶)요, 친왕은 금구철(金鉤䚢)이요, 문무관은 옥이나 서각(犀角)이나 금은(金銀)인데 모두 품수(品數)로 구별하였으니, 이로 보건대 혁대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니, 백관에게는 모두 품대(品帶)가 있으나 전하와 왕세자는 대대(大帶)만 있고 혁대는 없는바 이는 바로 영락(永樂)075) 원년076) 에 흠사(欽賜)한 예제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당초 흠사할 때에 옥혁대(玉革帶)의 값이 비싸서 혹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갖추도록 하여 빠진 것을 《오례의》를 편찬할 때 그대로 싣지 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관을 쓰고 대가 없으면 보기에 아주 이상하여 중국 사신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데도 빠진 것이라면 지금에 이르러 갖추어 올려야 하고, 《오례의》에 없는 것을 경솔히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번 사행의 사지 역관(事知譯官)으로 하여금 예부(禮部)에 자세히 묻고 혹 보충하여 하사해 주거나 스스로 갖추도록 해줄 것을 청하게 하소서. 마땅히 고정(考定)하는 일이 있어야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좌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신흠(申欽)이 아뢰기를, "이미 흠사가 없었고, 또 《오례의》에도 실리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창시하는 것은 또한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리로 헤아리건대 대대(大帶)·혁대(革帶)는 하나라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장복(章服)과 위의(威儀)에 관계되니, 준비하여 올려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5월 26일 정묘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별제(別祭)를 지냈는데, 상이 초헌(初獻)을 행하고 세자가 아헌(亞獻)을 행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 후 왕세자가 대비전(大妃殿)을 진현할 때 및 서연(署筵)할 때에 무양 적색 흑의(無揚赤色黑衣)를 입으라고 계하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 상께서 출궁할 때 왕세자가 마땅히 지영(祗迎)·지송(祗送)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출궁할 때에 상께서 백포(白袍)를 입으시면 세자는, 천담복(淺淡服)으로 해야 하고, 조서를 맞이하고 환궁할 때 상께서 길복(吉服)을 하시면 세자도 길복으로 지영해야 합니다. 이로써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따랐다.
5월 27일 무진
상이 혼궁에 행행하여 졸곡제(卒哭祭)에 참여하였다.
5월 28일 기사
상이 하교하였다.
"사은사(謝恩使) 김상헌(金尙憲)에게 실직(實職)을 제수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이번 혼궁의 시향(時享)을 다시 생각해보니, 제사 지내는 일이 너무 번거로울 뿐 아니라, 때가 지난 제향이어서 예(禮)에도 맞지 않을 듯하다. 예관으로 하여금 설행의 가부를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가례(家禮)》에 ‘중삭제(仲朔祭)는 상순에 날짜를 잡으나 상(喪)이 있는 3년 안에는 설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례의》에 ‘혼전은 3년 안에는 사시(四時) 및 납일(臘日)·속절(俗節)·삭망에 모두 제식(祭式)이 있다.’ 하였기 때문에 당초에 각제(各祭)의 절목을 대신이 함께 의논하여 마련할 때에 이미 계하하였고 이른바 사사는 곧 중삭이므로 감히 계품한 것입니다. 지금 하교를 받드니 매우 윤당합니다. 제사 일이 너무 번거로울 뿐만 아니라 하순도 다 되어 이미 때가 지난 듯하니 설행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영남(嶺南) 한 도는 선비의 습성이 바르고 고을 풍속이 순박하다고 예로부터 일컬어졌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파괴되어 투박하게 변했습니다. 토호(土豪)와 지방 유력자가 사림(士林)으로 행세하며 고을 수령을 능멸해도 수령인 자 역시 어쩌지 못해 그들이 마음대로 모욕하고 농락한 지가 오래입니다. 그래서 본도의 유식한 선비들이 모두 걱정하지만 역시 바로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방백(方伯)·수재(守宰)의 관원을 가려서 교도(敎導)하고 화육(化育)하는 책임을 맡긴 자가 교화를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그 사이에 혹 먼저 스스로 도리를 잃어 남들에게 모욕을 사는 자가 있었습니다. 벼슬살이를 강직하고 과감하게 하여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도 또한 뜻밖에 함부로 욕을 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전 경상 감사 원탁(元鐸)은 송사를 결단하다 욕을 당하자 선비 이유도(李有道)에게 곤장을 쳐 마침내 운명하게 만들었으니,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원통한 심정을 머금고 슬피 하소연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만약 이를 인하여 방백을 죄주면 이로부터 한 도의 풍헌(風憲)을 맡은 자가 앞으로 그 수족을 놀릴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이 일찍이 그의 아들 이암(李巖) 등의 정소(呈訴)를 인하여 원탁을 논하지 않은 것은 대개 후폐를 염려해서였습니다.
이번 예안(禮安)의 유생이 ‘산림(山林) 속의 행의(行義)있는 사람’ 및 ‘체포하여 박살하였다.’ 등등의 말로써 무함하여 여러 고을에 통문해 감사를 배척하였습니다. 이는 조정의 명리(命吏)를 무시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는 것이니, 그 끝에 가서는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국위가 존엄하지 못해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수상한 자를 감사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게 하여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해 징계할 바탕을 삼으소서. 모 도독(毛都督)이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면서 우리 나라 사람을 꺼리고 정보를 숨겼더라도 뒤따라 정탐하는 일은 간단한 일일 것입니다. 의주 부윤 이완(李莞)은 모병(毛兵)이 패전한 상황을 전혀 살피지 않아 그 현실을 망연히 몰랐으니, 적에 대해 간첩을 파견하려는 대책에 있어서도 어떻게 후일을 기대하겠습니까. 수신(帥臣)이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음을 이로써 알 수 있습니다. 의주 부윤 이완과 부원수(副元帥) 남이흥(南以興)을 모두 추고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부호군 장현광(張顯光)이 상소하기를,
"신은 일생 동안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데, 지금 우리 나라 역시 병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은 사람의 몸에서 질병을 없애고 질병을 부르는 근본이 모두 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써 비유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마음이란 몸의 임금입니다. 임금이란 표준을 세우는 것[建極]을 말합니다. 한 몸의 내외 기관(器官)과 대소의 용(用)은 모두 심군(心君)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표준이 서면 그 아래는 모두 그 도(道)를 받들게 되고, 표준이 서지 못하면 그 아래가 모두 그 직분을 잃게 되어 몸의 안위가 판가름 납니다 이른바 마음의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마음속에 항상 경외(敬畏)를 보존하여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고 물욕에 구애받지 않으며, 사설(邪說)에 유혹되지 않고, 안으로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며 위로는 하늘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는 남을 속이지 않으며, 어지러운 생각이 없어, 동서로 생각이 내닫지 않고 기백(氣魄)이 고정되고 정신이 안을 지켜 맑고 밝고 빛나고 커 저절로 주재자(主宰者)가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칠정(七情)이 모두 절도 있고, 백맥(百脉)이 모두 순조롭고,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밖의 유혹에 어지럽혀지지 않으며 힘줄·뼈대·지체가 천부적으로 기능을 잘 발휘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원(眞元)이 완실(完實)하고, 화기(和氣)가 충만하여 바람·추위·더위·습기가 침입하지 못하고 요사한 기운이 범하지 못하여 방서(方書)와 약석(藥石)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며 치료를 일삼지 않아도 병이 저절로 발생하지 않아서 천수를 다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의 표준을 잘 세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마음이 그 표준을 잃어 게으르고 방자하여 스스로 수습하지 못해 본연의 밝음을 어둡게 하고 막히어 주재(主宰)하는 도를 폐하면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혈맥이 순조롭지 않아 장부(贓腑)가 그 정기를 간직하지 못하여 이목 구비가 유탕(流蕩)하여도 금하지 못하고, 힘줄 뼈대 손발이 해이되어도 단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밖에서 사(邪)가 허(虛)함을 틈타 온갖 병이 뒤섞여 일어나 쌓여서 응어리가 되고, 발하여 종기가 되어 혹 감각이 마비가 되어 몸져 자리에 눕게 되면 편작(扁鵲)이 옆에 있고 백약이 다 갖추어져 있더라도 어떻게 의술을 써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는 심군(心君)이 임금 노릇을 못해서입니다.
신은 이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임금이 나라의 임금노릇을 하는 것 역시 이런 이치라고 봅니다. 마음이 한몸의 임금이 되면 몸의 내외 백체(百體)는 바로 마음의 신민(臣民)이 되니 임금은 온 나라 신민의 마음이 되며, 온 나라의 신민은 바로 임금의 백체가 됩니다. 마음의 표준이 섰는가 못섰는가에 따라 백체가 순조롭든지 않든지 하기 때문에 신민의 꾀하는 바와 일하는 바와 지키는 바를 보면 임금이 제대로 표준을 세웠는가 못세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임금의 표준을 세운다는 것은 역시 별도의 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성(性)을 다하여 남에게 의표와 준칙이 되는 것입니다.
성을 다하는 차례는 그 절목이 넷인데 학문을 성취하는 것, 행실을 닦는 것, 도(道)를 이루는 것, 덕(德)을 순순히 하는 것입니다. 덕은 도가 이루어져야 순수해지고, 도는 행실이 닦여야 이루어지며, 행실은 학문이 성취되어야 닦이는 것이니 이는 한 이치 가운데의 사업입니다. 그 학문은 곧 《대학(大學)》의 법이 이것으로 이 학문 이외에는 다른 학문이 없어 이 학문으로 하면 온갖 행실이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 도(道)는 《중용(中庸)》의 도가 이것으로 이 도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이 도를 도로 하면 지극한 덕이 그 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미 학문이 성취되어 행실이 닦이고, 도가 이루어져 덕이 순수해지면 총명 예지(聰明叡智)로 천하의 이치를 다 알게 되고, 겸공 근검(謙恭勤儉)으로 천하의 선(善)을 모으게 되고, 관인 성신(寬仁誠信)으로 천하의 마음을 복종시키게 되고, 강의 간중(剛毅簡重)으로 천하의 정(情)을 회복시키게 되고, 광명 정대(光明正大)로 천하의 뜻을 소통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천지 귀신도 오히려 어길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사람과 만물이겠습니까. 치평(治平)의 대업과 위육(位育)의 극공(極功)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임금의 표준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표준을 세우는 도리에 있어서 그 체(體)는 본디 심신(心身)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용(用)은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시행하는 두 가지 뿐입니다. 인재의 등용에 있어 구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선과 악이며 정사를 시행하는데 있어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입니다. 선한 자는 반드시 쓰고 선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제거하는 것이 사람을 쓰는 일정한 방법이며, 옳은 것은 반드시 행하고, 옳지 않은 것은 반드시 행하지 않는 것이 정사를 시행하는 일정한 방법입니다. 그 선악과 시비사이에서 과연 선한 것을 선하다 하고 과연 불선한 것을 불선하다 하며, 옳게 여길 것을 옳게 여기고 옳지 못하게 여길 것은 옳지 못하게 여기면, 백관에 모두 적임자를 얻게 되고 온갖 일이 다 사리에 맞게 되어서 민심이 이 때문에 다 복종할 것입니다. 간혹 선히 여긴 것이 정말로 선하지 않으며, 불선하게 여긴 것이 정말 불선하지 않으며, 옳게 여긴 것이 꼭 옳지 않고 옳지 않게 여긴 것이 꼭 옳지 않은 것이 아니면 백관이 직무를 유기하고 온갖 일이 성적이 없어 민심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준을 세우는 용(用)은 이것이 그 대강입니다. 임금이 표준의 체를 잘 세우면 두 가지의 용이 저절로 바르게 될 수밖에 없으리니, 군신 만민이 누군들 임금의 표준 가운데로 귀의하지 않겠습니까. 백성은 먼곳에 있어도 표준으로 귀의하는데 하물며 조정에 있는 신하이겠습니까.
감히 그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오직 임금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을 것이고, 감히 그의 일을 일삼지 못하고 오직 국가의 일을 일로 삼을 것입니다. 누가 감히 총애를 굳힐 계획을 하겠습니까. 오직 직무를 다할 계책을 할 것입니다. 감히 권세를 좋아하는 생각을 갖지 못하고 보필하는 것은 군덕(君德)일 것이며, 감히 편당짓는 사의를 두지 못하고 넓히는 것은 공도(公道)일 것입니다. 선은 함께 선으로 여기고 불선한 것은 함께 불선으로 여겨 자기 일신의 호오(好惡)의 감정을 쓰지 않으며, 옳은 것은 함께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함께 그르게 여겨 자기 일신의 이해를 계산하지 않으며, 일치 단결 협동하여 한 마음이 되어 임금 일엔 자신을 잊고 나라 일엔 집안을 잊을 것이니, 이것이 그 임금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참으로 그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과 같다면 같은 조정에 있는 백료를 역시 형제처럼 여겨 서로 화목할 것입니다. 또 그 인(仁)을 억조 창생에게까지 확대하여 한 나라를 집안처럼 볼 것이니 사람에겐 아첨하는 행위가 없고 백성에게는 사악한 무리가 없어 그 표준에 모이고, 표준에 귀의할 것입니다. 이런데도 치평(治平)을 이루지 못하고 교화가 펴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마음의 표준이 서서 온갖 병이 떠나 한 몸이 형통하고 편안하게 된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 임금의 표준이 서지 않으면 그 응험이 이와 반대되어 사람들이 모두 각자의 마음을 마음으로 하고, 각자의 몸을 몸으로 삼아 자기만 알고 임금은 모르며 집안이 있는 줄만 알고 나라가 있는 줄을 몰라서 한결같이 사정(私情)대로만 하고 공도(公道)를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호오의 감정이 성(性)을 어기고 애증이 사리를 잃어 시비가 전도되고 선악이 도치되어 정(正)을 사(邪)라 지목하고, 사를 정이라 지목하며, 충신을 가리켜 간신이라 하고, 간신을 가리켜 충신이라 하여 드디어 서로 모여서 간사한 자끼리 무리지어 성세(聲勢)를 이루면 단단하여 깨뜨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사사로이 좋아하는 자는 함께 밀어서 치켜 올리고 사사로이 미워하는 자는 함께 일어나 배척하며, 정론(正論)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大義)를 돌아보지 않을 것입니다. 형체 없는 덫과 헤아릴 수 없는 함정을 설치하여 공격하는 자가 있게 되고, 이치에 가깝지 않은 말과 무리한 이야기를 꾸며서 현란시키는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욕심의 물결이 하늘까지 닿고 이익의 문이 사방으로 열려 턱없이 함부로 빼앗으며 꺼림없이 살육을 자행하여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한 후에야 그칠 것입니다. 자신은 나라를 위해 꾀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라를 병들게 하며, 자신은 임금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임금을 그르치며 심지어 대중의 분노가 아래에서 쌓여도 걱정하지 않고, 하늘의 노여움이 위에서 극에 달해도 경계할 줄을 몰라 마침내는 나라에 토붕 와해의 형세가 있어도 구제하지 못하는 지경을 빚을 것입니다. 이 역시 마음의 표준이 서지 않아서 온갖 질병이 모두 일어나 몸을 위독하게 하고 망치는 것과 같습니다.
근래에 폐조(廢朝)077) 때의 일을 보니 이와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대낮이 음침하여 요기가 가득하였으며 승냥이와 범 같은 무리가 권력을 남용하고 여우와 이리같은 무리가 큰 저자에 난무함으로써 인륜이 끊어지고 강상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백성은 도탄에 빠져 인심이 이미 떠나자 음양이 순서를 잃고 천명이 옮겨가 수백 년의 사직이 며칠이 못 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인재요 왕실의 빼어난 인물로 마음은 성무(聖武)의 덕을 지니시고 인효(仁孝)의 행실을 몸소 행하셨는데 친히 그 참상을 보시고 강개, 분노, 번민하시어 차마 종국(宗國)이 망하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한번 일어나시어 통렬하게 쓸어버리고 씻어버리시더니 드디어 모후(母后)의 뜻을 받들어 천자의 명을 받은 다음 몸소 대통을 이으셨습니다. 용이 날아 천위(天位)에 오르신 것은 실로 황천이 우리 조선을 도우신 것이요, 열성(列聖)께서 우리 종묘에 복을 내려 전하를 탄생시켜 오늘날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이런 반정(反正)의 최초 공적을 지극한 일로 여기고 만족해하며 원대하고 영구한 홍업(鴻業)을 추구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폐정의 여습(餘習)을 모조리 혁파하고 열성의 대전장(大典章)을 모두 회복해 마지 않아서 옛날 제왕(帝王)의 지극한 다스림을 이루고 동방에 주(周)나라의 도(道)를 일으킨 연후에야 천명에 책임질 수 있고 인망에 만족을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참으로 크게 해보고자 하는 뜻을 지니셨습니다. 폭군은 이미 무너졌으나 개혁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사나운 오랑캐가 바야흐로 창궐하고 중국 군사가 국경에 압박해 있으며, 백성들은 곤궁하여 소생되지 않은 상태고 나라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고 여기시어 즉위한 이래 밤낮으로 근심하시며 잘 다스리기를 도모한 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 사방의 백성들이 전하께서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듣고는 매우 늙고 병든 자라 하더라도 모두 조금이라도 더 명을 늘여 세상에 있으면서 새로운 교화의 융성한 모습을 보기를 원하여 목을 늘이고 눈을 닦으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은 궁벽한 산야에 병들어 있는 가운데 혹 길거리에서 서울로 부터 오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소식을 물었는데 그 대답에 ‘남방이나 북방에 아직 급한 경보(警報)는 없다. 다만 나라의 크고 작은 공사간의 일이 점차 폐조의 폐습과 서로 가까운 것이 날로 발생한다. 그런 까닭에 여러 사람이 기뻐하는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물을 때마다 답한 말이 모두 이러하여 신은 삼가 괴이쩍게 여겼습니다.
반정(反正)한 후에 여러 사람들이 신정(新政)에 바라는 마음이 깊고도 컸었습니다. 겨우 도탄에서 구제되자 스스로 속히 효과를 보려고 급하게 여긴 자가 불만스런 점이 있어 그리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폐조의 폐정이 모조리 고쳐지지 않은 것이 있어서 한을 불러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아니면 일반 백성들 중에 이익을 잃어 실망한 자가 있어 스스로 시정(時政)에 원망을 품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까.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여러 어진이들이 조정에 있어 정책을 실시하는데 반드시 완벽을 기하고자 할 것이니, 여기건 저기건 간에 미워하지 않고 싫어함이 없을 것인데, 감히 폐조에 비교한단 말입니까. 아마도 정령(政令)에 흠이 있어서 여정(輿情)에 허물을 취한 것이 혹시라도 없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또 보건대 향리의 대소 인원이 반정의 처음에는 모두 그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고 그 마음을 고쳐서 선한 자는 대세 역전을 기뻐하고, 선하지 않은 자는 그 청명(淸明)함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기뻐한 자는 흥기하고 두려워한 자는 사라졌습니다. 집에 있는 자는 서로 촌항(村巷)에서 위로하고, 길가는 사람은 서로 도로에서 경하하였습니다. 두세 해가 지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난날 기뼈하던 자는 조금도 기뻐하는 마음이 없고 두려워하는 자는 점점 두려워하는 뜻이 없습니다. 신은 이로써 근본의 바탕이 처음의 기틀만 같지 못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시시 비비의 이치는 사람마다 성품에 갖춘 것이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똑같은 심정으로서 속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조종의 행사는 귀가 있는 사람은 다 듣고, 백관의 잘잘못은 눈이 있으면 다 바라보는데, 신은 묘당에서 시행하는 정사가 과연 모두 천리와 인정에 합하며, 백관이 행하는 일이 과연 모두 정도와 공의(公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은, 성인(聖人)께서 왕위에 오르신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이미 그 지위에 있으면 그 지위에 대한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덕업(德業)에는 본디 제일등의 도리가 있으니, 이른바 표준을 세운다는 것의 표준이 바로 이 도리입니다. 그것이 도리의 제일이 되는 것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선하며 극중(極中), 극정(極正)하여 하늘이 하늘이 된 까닭이며, 땅이 땅이 된 까닭으로서 우리 사람에게 부여된 본연의 덕성(德性)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세도(世道)의 주인이니 이 도리만은 임금이 한번 정하여 바꾸지 말고 반드시 극진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한다면 어찌 제일등의 도리를 버리고 자기의 책임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면서 이 도리로써 그 임금을 힘써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임금을 존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도리를 자신이 담당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이 자기(自棄)하는 것이며 신하이면서 임금이이면서 이 도리를 자신이 담당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이 자기(自棄)하는 것이며 신하이면서 이 도리로써 그 임금을 힘써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임금을 존경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도리를 극진히 한 것은 바로 이제(二帝)·삼왕(三王)의 덕업입니다. 후세의 임금으로서 참으로 이제·삼왕의 덕업을 준적(準的)으로 삼지 않는다면 어찌 보잘것 없다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이 가는 것을 뜻[志]이라고 하는데, 뜻이 낮으면 도(道)가 낮고, 도가 낮으면 정사가 낮고, 정사가 낮으면 사업이 낮고, 사업이 낮으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면 이웃 나라가 두려워하지 않으며, 천지 귀신도 돕지 않습니다. 그러니 뜻을 세우는 시초에 신중을 기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재능이 미치지 못하니 이제·삼왕의 도를 내가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나라가 좁고 작은데 당(唐)·우(虞)·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내가 어찌 본받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이미 계세(季世)가 되었으니, 상고(上古) 상성(上聖)의 일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 비하(卑下)의 경지를 달게 여기는 것이어서 이미 크게 해보려는 뜻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바가 있는 자는 또한 이와 같다.’ 했고 또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 하였으니, 참으로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나라가 성립되어 신민(臣民)이 있고 정사(政事)가 있으니 참으로 나라가 좁고 작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도(道)에는 고금이 없는바 제도(帝道)를 행하면 제가 되고, 왕도(王道)를 행하면 왕이 되니, 참으로 세상이 말세라고 핑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다스림에 있어 삼대를 본받지 않으면 모두 구차할 뿐입니다. 요·순은 인륜의 최고 표준이며 당·우와 삼대는 성치(聖治)의 최고 표준인바, 참으로 이를 버리고 그 다음 것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제왕(帝王)의 심법(心法)과 그 덕업(德業)과 그 치도(治道)는 경전(經傳)에 소상히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루에 세 차례 경석(經席)에서 유신(儒臣)을 접견하여 강명(講明)하는 것은 반드시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스스로 살피시기에 그 마음가짐이 과연 제왕의 마음가짐과 더불어 그 법이 같고, 그 덕을 지킴이 과연 제왕의 덕을 지킴과 그 업이 같고, 그 다스림이 과연 제왕의 다스림과 그 도가 같습니까? 요사이 시정(施政)은 근본이 개혁된 적이 없고, 백료(白僚)는 진작될 뜻이 없으며, 모든 일이 새로워질 징험이 없고, 사방에 감동하여 흥기하는 효과가 없으며, 염치의 기풍이 일어나지 않아 탐오(貪汚)한 습성이 제거되지 않으며, 공손과 검소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아 사치의 폐단이 바뀌지 않으며, 공정한 도가 서지 않아 편사(偏私)의 해가 제거되지 않으며, 정성과 믿음의 의리가 전달되지 않아 위태로운 풍속이 억제되지 않는 것은 왜입니까? 신은 전하의 학문이 발전하지 못함이 있고, 행실이 미진한 바가 있고, 도가 지극하지 못함이 있고, 덕이 순수하지 못한 바가 있어 표준을 세운 것이 오히려 충분한 경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가 싶습니다. 대개 덕업이 높아지고 치화(治化)가 융성해지는 것은 반드시 오랫동안 쉼없이 도를 행하고 덕을 쌓은 연후에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의 덕정(德政)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쌓이고 쌓임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정사에 임한 지 겨우 3년이니, 참으로 다스림이 정해지고 공이 이루어질 때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다만 지금 사람에게 듣고 본 것이 위에 진달한 바와 같기 때문에 지금을 위해 지나치게 염려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젊으시고 역량이 강대하시니, 이는 참으로 노력하여 일을 해볼 시절입니다. 옛사람이 30세 이후의 공부가 긴요하다 한 것은 사람이 이때에 이르러 혈기가 장성(壯盛)한데 빠르지 않고 늦지도 않아 공을 들이고 힘을 쓰면 어려운 것도 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신이 감히 이때와 이 도로써 전하에게 이처럼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다시 분발하여 남들보다 백배 천배의 공력을 들이지 않고 세월만 지연시켜 쇠퇴하고 타락하여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비단 폐조의 폐정(弊政)과 서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염려할 만한 일이 이루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날마다 진보하지 않으면 반드시 날마다 퇴보하게 되는데, 날로 진보하는 것은 어렵고 날로 퇴보하기는 쉽습니다. 전하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신이 올 적에 사람들이 모두 신에게 ‘그대는 이미 늙고 병들었으니 출사는 반드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한 말씀 올리고 돌아와야 한다.’ 하였습니다. 향리에 사는 부로(父老) 및 길에서 만난 사람, 서울에 들어와 만나본 사람까지 말한 바가 다 그러하였습니다. 신은 하찮고 한 늙고 병든 사람이니, 그 말이 어찌 성총(聖聰)에 비중을 차지하겠습니까마는 그런데도 오히려 헌언(獻言)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에게만 원통과 질고가 있어 펴볼 수가 없기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중외와 원근이 동일한 상정(常情)으로 반드시 모두 보고 듣기에 불안하고, 그 마음이 불편한데다가 기대에 차지 않은 것이 속이 답답하도록 쌓여 스스로 말하고자 하여도 길이 없어 요행히 남을 통하여 발설하기를 바란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에 말할 만한 것이 반드시 한두 가지 일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우리 전하께서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들 모두가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그 형세가 사람마다 다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이미 그 직임을 설치하여 전적으로 책임지운 자는 언관(言官)이 아니겠습니까. 언관이란 임금의 이목(耳目)이 되고 총명(聰明)을 넓히는 관사입니다. 그러므로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 언관의 도리이며, 말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들어주는 것이 임금의 도리인 것입니다. 만약 말할 만한데도 말하지 않는 바가 있다면 임금과 신하가 모두 그 도리를 잃은 것이니, 직임을 설치한 본뜻이 어디에 있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오늘날 언관이 과연 말할 만한 것을 다 말하며, 전하 역시 들어야 할 말을 순순히 다 들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언관이 과연 말할 만한 일을 다 말하면 이는 사방의 말이 모두 전달될 수 있는 것이며, 임금이 언관의 말을 다 들어주면 이는 사방의 말을 두루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틀은 역시 임금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름지기 임금이 먼저 순순히 들어주는 덕이 있은 연후에야 언관이 말을 다하는 충성이 있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시원스레 들어주는 미덕을 갖지 않으면 언관이 어찌 곧은 말을 하겠습니까. 언관이 말을 다하지 못하면 사방 사람의 마음이 또 어디를 말미암아 반드시 진달되겠습니까.
이번에 하찮은 신이 올라 오는 것을 보고 헌언(獻言)하기를 바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언관이 반드시 말을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며, 조정에 반드시 우려할 만한 단서가 많이 있는 것이며, 사방 여러 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통하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들어주시는 정서에 미진한 바가 있어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래에서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이며, 위에서 다 들어주지 않는 것은 구애되는 바가 있어서입니다. 위에는 구애되어 들어주기 어렵고, 아래는 두려워서 말하기가 어려워 두 어려움이 서로 만나서 항상 말하지 않고 듣지 않는 것으로 서로 편안한 심경을 삼는다면 위망(危亡)한 나라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말하기 어려워도 잘 말하고, 들어주기 어려워도 잘 들어 준 연후에야 사방의 눈이 밝아지고 사방의 들음이 트이어 물정이 통하고 언로가 열리게 됩니다. 만약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말을 다하지 못하여 사방의 실정이 모두 전달될 길이 없다면 이는 임금의 복이 아니며 국가의 이익이 아닙니다.
신은 일찍이 들었습니다. 언관은 반드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가려서 요의(僚議)가 귀일한 연후에야 그 말을 진달하고, 일단 진달했는데도 상께서 윤청(允聽)하지 않으시면 또 반드시 다시 진달하는 것은 그 일이 중대하여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진언하여 윤허를 받지 못해도 말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고 연이어 세 번이나 진언하면 그 일이 반드시 아주 중하여 더욱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이 어찌 관심을 기울여 들어서 쓰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 말이 과연 의리에 합당하면 처음 한 마디에 즉시 따라야 하고, 다시 말하기에 이르면 더욱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세 번에 이르는 것이겠습니까. 혹 그 일이 아주 중하고 그 형세가 매우 어려워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고 백관에게도 의논하여 그 양단(兩端)을 잡아 그 중(中)을 취하여 결단해 써야 하는데 하물며 그 일과 형세가 그다지 중대하거나 어렵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말하여 마지 않고 거절하여 마지 않으면서 한 가지 일을 서로 버티어 번거롭힐수록 외면하여 달을 넘기고 철을 넘기기까지 하는 것은 성세(盛世)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은 강직(剛直)함을 귀히 여기고, 듣는 것은 용단(勇斷)을 귀하게 여깁니다. 강직하면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고 용단하면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신하는 직무를 유기하지 않고 임금은 정책 실수가 없어 상하가 서로 자기의 구실을 하여 태평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대개 표준이 표준으로 되는 것은 많은 선(善)을 합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이 천하의 선을 모아서 자기의 선으로 삼은 연후에야 천하의 선을 다 모을 수 있어 그 도가 바야흐로 온전해지고 그 덕이 제대로 갖추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표준을 세우는 도에 있어 말을 들어 쓰는 것이 가장 요점이 되는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특별히 더 생각하소서. 표준이란 개념에서 중(中)이 비중이 큽니다. 이른바 중이란 것은 마음에 있어 치우치거나 기울지 않는 것이며 일에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치우치는 것은 표준이 아니며 기우는 것도 표준이 아니며, 지나친 것도 표준이 아니며 미치지 못한 것 역시 표준이 아닙니다. 표준을 세우는 자는 마음에 치우치거나 기우는 바가 없는 연후에야 제대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성인이 하늘의 질서를 인하여 예(禮)를 제정하였으니, 중정(衆情)을 절제하고 만사를 제재하여 중에 돌아가게 한 것입니다. 어찌 견지하는 것이 중이 아닌데도 표준을 세우는 자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상례(喪禮)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초 복제(服制)의 의논에 있어 조정의 소견이 서로 달라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양단(兩端)이 없지 않았는데, 전하께서 절충하여 결정해 쓰셨으니, 중(中)이라 이를 만합니다. 다만 듣건대 지난번 예장(禮葬)의 의논에 있어 규모를 크고 무겁게 했다 한 것은 시중(時中)의 마땅함에 지나침이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대개 일을 집행하는 여러 관원이 전하의 지극한 정성을 본받아 모든 의물(儀物)과 품수(品數)를 힘써 구비하고 화려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부모상은 스스로 정성을 다한다.’ 한 것은 마땅히 다해야 할 것을 반드시 다해야 한다는 것이지 지나칠 정도로 다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공자께서 또 ‘살아서는 예(禮)로 섬기고, 죽으면 예로써 장사하며, 예로써 제사지내면 효(孝)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란 중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효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없는 것이고, 지나쳐선 안 되는데도 지나치게 하면 돌아가신 어버이의 마음이 편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이면서도 중을 지킨 연후에야 어버이의 마음이 편안하고 효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사이 일은 기왕지사니 말할 필요가 없으나 앞으로 또한 재정(裁定)할 의논이 많이 있기 때문에 감히 언급하여 후일 더욱 신중을 기하라는 뜻을 붙입니다. 전하의 효성은 천부적이라 외방의 우매한 백성 역시 감격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은 무궁하지만 예에는 자연히 한정이 있기 마련이어서 혹시 지나치면 도리어 효도를 해치게 되니, 이것이 또 효자가 반드시 삼가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임금의 행위는 일시의 법이 될 뿐만 아니라 후세에 본받게 되니 어찌 감정대로 제도를 넘어서 표준을 세우는 도리를 해쳐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다시 더 살피시어 참작하소서.
임금은 한 마음으로 만기(萬機)에 응하고, 한 몸으로 백성에게 임하며, 구중 궁궐 안에 있으면서 넓은 사방을 다스리니 그 견문이 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 보는 이외의 것을 본 연후에야 그 보는 것이 보지 않는 것이 없고, 귀로 듣는 이외의 것을 들은 연후에야 그 들음이 듣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치로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데 그치고, 듣는 것이 귀로 듣는데 그친다면 눈과 귀로 듣고 보는 바깥에 모두 몇 천 몇 만 번의 무궁한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체 있는 것을 보고, 이치로 보는 것은 형체 없는 것을 보며, 귀로 듣는 것은 소리가 있는 것을 듣고, 이치로 듣는 것은 소리 없는 것을 들으니 그 천심과 원근이 어떠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은 엄폐(掩蔽)할 수가 있지만 이치로 보고 이치로 들으면 누가 속이겠습니까. 임금이 참으로 그 눈앞에 보이는 것과 귀가에 들리는 것을 믿지 않고 형체없는 데에서 보고, 소리없는 데에서 듣는다면 천하의 실정을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지없는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지금 나라의 복심(腹心)의 병과 사지(四肢)의 병의 증세가 다양한데, 신이 산야에서 와서 겨우 한 달 정도 있다가 돌아가니, 어찌 다 들어서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단지 표준을 세운다는 설로 전하를 위하여 그 근본을 다하도록 권면합니다. 기타 증세에 맞는 약이나 구급치료법은 본디 당세의 명의의 소관입니다. 신은 바야흐로 죽을 나이에 이르러 은덕을 갚을 길이 없지만 충정은 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드린 말씀이 힘없는 늙은이의 말일지는 몰라도 모두 심간(心肝)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성명께서 오원하다 하여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신은 돌아가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큰 덕과 높은 재주로 암혈(巖穴)에 살지만 명성이 미치는 곳이면 그 누가 경모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전일에 잠저에 있으면서 명성을 익히 들었으나 도(道)를 물을 길이 없었다. 지금 같은 조정에 있게 되어 기쁘고 다행함이 참으로 깊다. 경은 내가 변변치 못하다 하지 않고 내가 상을 당하자 고생을 무릅쓰고 멀리서 와 정성스레 진달하고 순순히 교훈하였다. 뛰어난 논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씻고 보게 한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감히 이 교훈을 가슴에 새겨 경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지 않겠는가. 경은 모름지기 잠시 돌아갈 뜻을 늦추어 조금만 더 도성 안에 머물러 한편으로는 내 마음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여망에 부응하라. 내가 차후 명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밤에 한 가닥 먹구름 같은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곧 바로 서쪽을 가리켰는데, 길게 하늘에 닿았다.
김상헌(金尙憲)을 동지중추부사로, 한필원(韓必遠)을 지평으로, 이기조(李基祚)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5월 29일 경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동궁에 든 지 지금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아직껏 중국에서 책명(冊名)을 받지 못하여 본조에서 전례대로 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신의 행차를 당하여 공사간에 물력이 다 떨어져 성상께서 민생을 걱정하시어 드디어 우선은 후년을 기다리자는 의논을 따르셔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응당 행하여야 할 막대한 전례(典禮)가 이로 인하여 지체되니, 어찌 대단히 미안하지 않습니까. 조사(詔使)가 만약 ‘이미 책봉하였는데 어찌 주청하지 않았는가?’라고 묻는다면 물력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지금 사은사(謝恩使)의 행차에 책봉을 청하는 주문(奏文)을 부쳐 보내면 이는 예전(例典)이어서 반드시 유보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대신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말이 매우 옳다. 다만 이처럼 물력이 고갈된 때에 조사가 3년을 연달아 나오니, 감당하기가 매우 어려울 듯하다. 다시 후일을 기다려 주청함으로써 우리 백성을 거듭 고생시키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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