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6권, 인조 23년 1645년 8월

싸라리리 2026. 1. 5.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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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진

함경 감사 심연(沈演)이 치계하기를,
"개시(開市)로 인하여 청나라 사람이 소[牛] 1백 두(頭)를 사서 보내달라고 청했으므로 10두는 순영(巡營)에서 마련하여 보내고, 그 나머지는 남·북도에 나누어 정하였는데, 남도의 소는 도로가 멀고 험난한 관계로 미처 들여보내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순영에 저장된 쌀로서 북도에 있는 것 3백 8석을 병영(兵營)으로 옮겨 비치했다가 소값을 쳐주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순영에 저장된 쌀이란 바로 질병이 있어 북도에 가지 못하는 남도의 삼수군188)  이 바친 것이다.

 

강진(康津)의 중[僧]이 서쪽 변방에 들어가 남의 고용살이를 하였는데, 창원 부사(昌原府使) 윤우량(尹友諒)과 어정 권관(於汀權管) 이영(李梬) 등이 그가 역당(逆黨)으로서 망명한 자인가 의심하여 그를 붙잡아 공초를 받아 가지고 감사에게 치보(馳報)하였는데, 감사가 조정에 전문(轉聞)하기를,
"중이 스스로 말하기를 ‘속명(俗名)은 이계룡(李繼龍)인데, 지난해 역옥(逆獄) 【 심기원(沈器遠)의 옥사이다.】  때에 형 이애룡(李愛龍)·이준룡(李俊龍)과 함께 모두 역적의 공초에 이름이 나왔으므로 도주하여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하나, 이것은 모두 윤우량·이영 등이 허위로 날조한 말이요, 참으로 이계룡이 스스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잡아다가 조사한 결과, 과연 그런 사실이 없었다. 그러자 국청이 아뢰기를,
"이계룡의 공초 내용이 저곳에서 처음 공초할 때와 크게 서로 다릅니다. 이 사람 형제의 이름이 일찍이 여러 역적들의 공초에서 한번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이영 등이 유도 신문한 말만을 믿고 그를 역적으로 단정할 수 없으니, 윤우량·이영 등을 잡아와서 한 곳에 앉혀놓고 대질 신문을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죄인이 초사(招辭)를 번복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체포해서 고발한 수령과 변장을 잡아다가 신문하는 것은 사체가 옳지 않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이, 이계룡이 초사를 번복한 것이라고만 의심하고 이영 등이 무고한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국청이 또 아뢰기를,
"만일 저곳에서 받은 공초에 따라 바로 형추(刑推)할 것을 청하자고 보면 대역죄를 범한 형적이 없어서 곤란하고, 만일 이곳에 와서 진술한 공초에 따라 죄가 가벼운 쪽으로 품처(稟處)한다면 또한 옥사를 다스리는 체통이 아니므로, 이영 등을 잡아다가 사실을 조사해서 처리할 뒷받침으로 삼기를 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의 하교가 이 지경에 이르니, 신들은 처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저곳에서 받은 공초에 이미 ‘애룡·준룡이 역모에 참여했다가 도주했다.’고 했는데, 어제의 공사(供辭)에는 또 ‘간 곳을 모른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정적(情迹)이 자못 기만적이고 비밀스러운 데 가깝다. 그러니 비록 형신(刑訊)은 하지 않더라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혹 옳을 듯하다."
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가 속으로는 그가 무죄임을 알면서도 상의 뜻에 거슬릴까 염려하여 의논드리기를,
"이계룡이 대역죄를 범한 정상은 비록 드러나지 않았지만, 어미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서 멀리 절새(絶塞)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속인이 되었다 하였으니, 이는 착한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니 사형을 감하여 장 일백(杖一百)에 유 삼천리(流三千里)로 해야 합니다."
하니, 판중추부사 이경여가 쟁론하기를,
"이계룡이 이미 대역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어찌 갑자기 무거운 형률을 쓸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류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대사헌 이식과 대사간 윤강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일이 옳지 않다면 공들이 나의 허물을 들어 탄핵할 수 있소."
하므로, 이경여는 입을 다물고 다시 말하지 않았는데, 끝내 이계룡을 경흥부(慶興府)에 유배하였다. 상이 또 이영 등에게 논상(論賞)할 것을 명하니, 여론이 이를 해괴하게 여겼다.

 

8월 2일 신사

함경도에 큰 바람이 불고 큰물이 졌다. 감사가 이 사실을 보고해왔다.

 

이기조(李基祚)를 부제학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이조 참의로, 김광욱(金光煜)을 도승지로, 윤이지(尹履之)를 평안 감사로, 이기발(李起浡)을 지평으로, 김홍욱(金弘郁)·김시번(金始蕃)을 부교리로, 김중일(金重鎰)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세자의 장녀(長女)가 병으로 죽었으니, 해사로 하여금 군주(群主)의 예에 따라 염장(斂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군주 염장하는 예(禮)를 근거할 만한 전례가 전혀 없으니, 치상(治喪)에 관한 모든 일을 《대전(大典)》에 기재된 정2품 관원 치상의 예에 따라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일 임오

대제학 이식이 아뢰기를,
"《춘추(春秋)》란 경서는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인데, 요즘 선비들이 《춘추》는 폐하여 전혀 강(講)하지 않고 《주역(周易)》의 문장을 표절(剽竊)하는 데는 민첩하니, 그것은 우선 강경에 응시했을 때, 《주역》은 배획(倍畵)189)  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춘추》에 배획을 옮겨준다면 강하는 자가 반드시 많아질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요즘의 문체(文體)는 규정을 따르지 않아서 부(賦)에는 운(韻)을 달지 않고, 표(表)에는 염(簾)190)  이 틀린 것이 많으니, 앞으로는 격식에 어긋난 것은 내쳐야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사륙문(四六文)에 있어서는 글 뜻[文意]으로 대(對)를 하지 않고 글자 모양[字樣]으로 대를 해서 문리(文理)를 이루지 못하니, 앞으로는 이런 작품을 절대로 금해야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노(老)·장(莊)의 글은 본디 나라에서 금하는데도, 요즘에는 큰 단락의 대의를 그대로 전용(專用)하고 있으니, 이런 작품은 일체 내쳐버리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김류·김자점·이경여가 의논드리기를,
"세상 사람들이 경(經)을 다루는 데 있어 오로지 구두(口讀)만을 일삼으므로, 지금 비록 《춘추》를 숭상한다 하더라도 또 《주역》 익히듯이 한다면 실용(實用)하는 데 알맞지 않을 것이니, 오직 강경을 고시할 때에 이것저것 섞어서 어려운 것을 물어보고 그 뜻을 모르는 자는 내쳐야 합니다. 그리고 획수(畵數)를 더 주어 선비들로 하여금 《춘추》로 쏠리게 하는 것은 일을 바르게 하는 도리가 아닌 듯하니, 옛 규정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심열이 의논드리기를,
"《주역》을 강송(講誦)하기가 《춘추》보다 몇 배나 어려우므로, 지금부터 배획을 준다면 선비들이 반드시 다 《춘추》로만 쏠리게 될 것이니, 부득이하다면 획수를 약간 헤아려 더 주어서 한쪽을 폐해버리는 걱정이 없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김류의 의논을 따랐다.

 

8월 4일 계미

상이 승지 김상(金尙)을 보내어 좌의정 홍서봉에게 문병하였다.

 

8월 5일 갑신

공청도 청주(淸州)에 7월에 서리가 내렸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8월 6일 을유

평안도 덕천(德川)에 7월에 눈이 내렸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경상 감사 유철(兪㯙)이 치계하기를,
"서울 상인(商人) 운봉(雲奉)이 왜화(倭貨) 동철(銅鐵) 3백 11근과 함석(含錫) 1백 7근을 사사로이 무역한 사실이 발각되어 이것을 관(官)에 몰수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구분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그 절반을 가져와서 뜻밖의 일에 쓸 비용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모두 본도에 주어 진휼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전(洪瑑)이 치계하기를,
"운미 차사원(運米差使員) 아이 첨사(阿耳僉使) 김축(金築)이 배 6척을 거느리고 동하구(東河口)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침몰되었는데, 김축 및 뱃사람 14인이 모두 익사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김축에게는 증직하고 익사한 뱃사람들에게는 본도로 하여금 구휼의 은전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8월 8일 정해

좌의정 홍서봉이 죽었다. 홍서봉은 사람됨이 총민하고 빼어났으며, 특히 문사(文詞)에 뛰어나서 동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계해년 반정(反正)으로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참록(參錄)되었고, 이어 이조 판서·병조 판서와 대제학을 역임하고 재상이 되어서는 정사를 건의하여 밝힌 것이 없었다. 목릉(穆陵)191)  의 변고 때에는 남의 말을 견강 부회하여 임금을 속였고, 이조·병조의 판서로 있을 적에는 뇌물을 꽤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나무랐다.

 

8월 9일 무자

공청 감사 이해가 치계하기를,
"부여현(扶餘縣)에 사는 전 참지(參知) 황일호(黃一皓)의 어미 및 아내에게 일찍이 상의 하교를 인하여 다달이 미태(米太)를 주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미가 이미 죽었으니, 제급(題給)할지의 여부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호조가 그대로 주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하니, 상이 3년까지 한정하고 그대로 주라고 명하였다.

 

8월 10일 기축

간원이 아뢰기를,
"근래에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풍속이 날로 사나워져서 골육(骨肉)간에 재물을 가지고 다투는 송사가 높은 벼슬아치의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안시현(安時賢)의 일은 말을 하자면 입을 더럽힐 지경이거니와, 개성 유수(開城留守) 안응형(安應亨)은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그것을 딴 나라 사람의 일처럼 보고 뻔뻔스럽게 부끄러이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전 현감 황효전(黃孝全)은 자기 아내로 하여금 송사를 일으키게 하여 아내의 재물을 차지하려고 꾀하였으니, 안응형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고, 황효전을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리고 안응형은 추고하라."
하였다. 이때 황효전의 아내 안씨(安氏)가, 자기 조카인 전 필선 안시현이 재산을 균등하게 나누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官)에 나아가 송사를 일으키자, 안시현 역시 형조에 맞서 변명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 탄식하였다. 그런데 그 후 재판관이, 안시현의 처사가 사리에 어긋난다는 뜻으로 입계하여 마침내 안시현이 형신을 받고 청양현(靑陽縣)에 정배되었다. 안응형은 바로 안시현의 숙부이다.

 

병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책례 및 입학 관계로 지금 그 두 가지 경사를 합해서 과거를 실시하려고 하는데, 《등록(謄錄)》을 상고해 본 결과, 을축년192)   세자의 입학으로 인해 별시를 보이던 때에는 무과 초시를 6백 인으로 숫자를 정해서 취했고, 기타 황자(皇子) 탄생 때와 원손(元孫) 탄생 때의 별시에서는 1천 인을 취하기도 하고 혹은 1천 6백 인을 취하기도 했으니, 지금은 어느 숫자를 따라서 취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많이 취하면 혼잡함이 더욱 심할 것이니, 을축년의 예에 따라서 시취하라."
하였다.

 

8월 11일 경인

김류(金瑬)를 세자사로, 남이웅(南以雄)을 대사헌으로, 이식(李植)을 우빈객으로, 김시국(金蓍國)을 좌부빈객으로, 김세렴(金世濂)을 우부빈객으로, 민응협(閔應協)을 집의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엄정구(嚴鼎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북병사 김여수(金汝水)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였다.
"후춘(厚春)의 호(胡) 억송아(億宋阿)가 새로 투항한 호 1백 20인을 거느리고 경원부(慶源府)에 와서 굶주림을 하소연하기에 조정의 분부에 따라 전미(田米) 30석을 발급하였습니다."

 

8월 12일 신묘

예조가 아뢰기를,
"궁관(宮官)을 이미 차출하였으니, 양전(兩殿)에 사은한 다음에는 의당 세자궁에 사은을 해야 할 것이나, 사저(私邸)에서는 예를 행할 수 없습니다. 또 궁관은 다른 신하들과 달라서 당연히 세자를 모시고 드나드는 일이 있는 것인데, 사은을 하지 않고 갑자기 공무를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정원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에 정원이 아뢰기를,
"이 일을 근거할 만한 전례는 없으나, 다만 궁관은 다른 신하들과 다르니, 사은하는 일을 비록 사저에서라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번 문안의 예만 거행하고는 우선은 수행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8월 13일 임진

헌부가 아뢰기를,
"평안 감사 윤이지(尹履之)는 누차 방백(方伯)을 역임하여 비록 일을 처리하는 국량이 있다는 칭찬이 있기는 하나, 지금은 나이가 늙어 근력이 이미 떨어졌으므로, 제목(除目)이 한번 내리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감당치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윤이지가 스스로 여론이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줄을 알고 극력 사양하여 체직되었다.

 

8월 14일 계사

헌납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농사를 누차 실패한 데다, 사변이 거듭 발생해서 징발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에 없던 운미(運米)의 역사와 뜻하지 않던 상장(喪葬)의 비통함과 전후 객사(客使)의 행차 등을 만나 그에 따른 모든 수용(需用)이 다 일정한 부세(賦稅) 이외에서 나옴으로써, 인력과 재물이 다하여 떠도는 백성들이 태반이나 되며, 처자(妻子)를 이끌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으면서 하늘에 대해 죽기를 비는 정성은 차마 보고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황정(荒政)을 급히 강구하기를 마치 새는 술잔을 받들듯이 하고 타는 솥에 물을 붓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의당 조신(朝臣) 가운데 심계(心計)가 성실한 자 2, 3인을 가려 그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칭호를 별도로 세워 그들로 하여금 그 일에만 전심치지하게 하여, 모든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관계된 것들을 다 하나하나 살피고 헤아려 품의(稟議)해서 시행하도록 한다면, 일 처리하는 것이 한군데서 나오므로 거의 착실한 효과가 있게 될 것입니다.
공물(貢物)에 대한 폐단으로 말하자면, 그 실리(實利)는 모두 중간 방납자(防納者)의 수중으로 돌아가는데, 각사 하인(下人)들의 농간으로 인해 관수(官需)로 바치는 공물이 모든 고을이 각각 달라서 많고 적음이 균등하지 않고, 불법적인 징수가 끝이 없어서 백성들이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삼가 보건대, 외방에는 대동공물법(大同貢物法)을 사사로이 실시하고 있기는 하나, 여러 고을의 규정이 저마다 각각 다르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경기·강원도 선혜청(宣惠廳)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연해 지방은 쌀로 바치고 산군 지방은 목면으로 바치되, 이를 경창(京倉)으로 수납해서 국(局)을 설치해 이것을 맡아 관리하게 하고, 공안(貢案) 가운데서 십분 참작하여 크게 줄이는 조치를 시행한다면, 각사의 공물은 저절로 넉넉하지 못할 리가 없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금년의 황두(黃豆)는 전혀 결실이 없었으니, 전세(田稅)로 낼 황두가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서울과 지방에 저축된 콩이 여유가 많아서 충분히 1년을 지공할 만하다고 하니, 이것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더라도 될 수 있습니다. 또 서쪽 지방에 비축한 쌀은 특별히 당장 시급하게 쓸 데가 없다 하니, 신이 바라고 싶은 것은, 조정에서 명년의 전세에 대한 콩과 서쪽 지방에 비축한 쌀을 아울러 완전히 감해 주는 것입니다.
방물을 진상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를 완전히 감할 수는 없더라도 그 절반이나마 감해 주어 윗사람이 손해를 보고 아랫사람을 도와주는 훌륭한 뜻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또 백성들이 가장 놀라 소요하게 되는 것은 군역(軍役)을 초정(抄定)하는 정사인데, 지금 세상이 혼란하고 백성이 흩어져 떠도는 때를 당해서 군역 초정하는 일을 바로 거행한다면, 이는 곧 백성을 흩어져 떠돌도록 몰아내는 일이니, 아울러 일체 정지해야 합니다.
또 특별히 곡식 징수하는[募粟] 규정을 세워 백성들로 하여금 균평하게 수납하게 하되, 특별히 계려(計慮)와 성심(誠心)이 있는 사람을 가려 진휼 어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암행 어사까지 겸임시켜 민간에 드나들면서 수령들의 비행을 살피며 곡식 징수하는 일까지 주관케 하여 오로지 백성 구활하는 정사를 책임지도록 한다면, 수령들이 반드시 모두 두려워하여 힘을 다할 것입니다.
삼가 토지를 답험(踏驗)하는 규정을 보건대, 반드시 애당초 경작하지 않은 것은 진전(陳田)으로 인정하고, 경작했다가 묵은 것은 전재(全災)로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원전(元田)을 모두 경종(耕種)하였으므로, 진세(陳稅) 이외의 모든 공역(公役)이 전세(田稅)의 10배나 되니, 만일 전세의 10배나 되는 공역을 적지(赤地)193)  에서 징수한다면 어찌 매우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경작했다가 묵어버린 토지를 모두 진전으로 인정해 주도록 하소서. 이 일을 서둘러 시행한다면 거의 백성을 구휼하는 실제 혜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후한 말로 비답하고 그 상소문을 호조에 내렸다. 그러자 호조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고, 묘당의 회계(回啓)에서도 변통한 것이 없었으므로, 상이 특명으로 각영(各營)의 방물을 모두 전감(全減)하도록 하였다.

 

8월 15일 갑오

전강(殿講)을 한 관학(館學)의 유생들에게 차등 있게 논상(論賞)하였다.

 

8월 18일 정유

민가(民家)에 모란꽃이 피었다.

 

8월 19일 무술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 책례일(冊禮日)의 행례하기 좋은 시간이 진시(辰時)에 있으니, 양궁(兩宮)194)  께서 본궁으로부터 먼저 대궐 안으로 들어가되, 시강원·익위사·도총부가 평상시처럼 배위(陪衛)할 것이요, 세자는 명정문(明政門) 밖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면복(冕服)을 갖추고 있다가 시간이 되면 예를 거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빈궁은 의당 내전(內殿)으로 들어가야 할 듯한데, 어느 전(殿)에서 예를 거행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내명부(內命婦)로 하여금 습의(習儀)에 따라 예를 거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세자빈은 조금 늦게 들어오는 것이 옳다."
하였다.

 

8월 20일 기해

서리가 내려 풀을 죽였다.

 

상이 명하여 각사의 관리들이 그대로 ‘원손(元孫)’이란 칭호를 쓴 죄를 다스렸다. 원손은 바로 소현 세자의 장자(長子)이다. 상이 이미 봉림 대군을 세자로 정하였으나, 원손의 칭호에 대해서는 아직 고치라는 명이 없었으므로, 신하들 또한 감히 품처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국인(國人)들도 원손으로 칭하고 있고, 각사의 공상 문부(供上文簿)에도 모두 그대로 써 왔으나, 상이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궁중에서 저주한 일이 발각되자, 상이 강빈(姜嬪)의 궁녀(宮女) 두 사람을 내옥(內獄)에서 안치(按治)하였다. 그 가운데 상궁(尙宮) 최씨(崔氏)는 원손의 보모(保母)였기 때문에 모두 고문(拷問)을 받고 죽었다. 그러고 나서 상이 하교하기를,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니, 각사의 해당 관리들을 추고하여 치죄하라."
하였다.

 

낙흥 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 등을 보내어 청나라에 가서 조제(吊祭)해 준 것에 대해 사례하고 인하여 세자의 책봉을 주청하게 하였다.

 

8월 21일 경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계미년 이후로 은사(恩賜)를 받아 과거 볼 자격을 얻은 자가 13인에 이르는데, 이들을 모두 한성시(漢城試)의 두 시장(試場)으로 나누어 보낸다면, 두 시장의 정원수(定員數)가 매우 적어서 어렵게 공부한 선비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니, 이는 원통하고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관시(館試)의 정원은 모두 50인인데, 금년에는 출석(出席)을 계산한 원점(圓點)이 정수(定數)인 50점에 준한 자가 43인뿐이니, 그 은사 받은 사람 가운데 7인을 관시로 보내서 모자란 액수를 채우고, 그 나머지 6인은 한성시의 두 시장으로 보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다만 신규(新規)에 관계된 일이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품달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22일 신축

세자빈의 책례에 대한 세 번째의 습의를 물려 행하라고 명하였다. 세자빈이 이때 막 임신하였는데, 미처 분만하기 전에 책례일이 가까이 다가오므로 책례를 행할 수 없을까 염려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8월 23일 임인

대사헌 남이웅 등이 아뢰기를,
"지금 이 원손의 칭호에 대해서 당초에 해조가 감히 품처하지 못했고 전하께서도 하교하신 것이 없었으니, 각사에서 누가 감히 스스로 의견을 내어 그 칭호를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추고하여 치죄하라는 전교가 뜻밖에 갑자기 내리니, 신들은 삼가 의혹됩니다. 일찍이 쓰지 말라는 명령이 없었는데, 칭호를 그대로 쓴 사람을 먼저 치죄하는 것은 실로 과당한 처사이니, 치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관(小官)을 추고하는 것은 매우 미세한 일인데, 이를 논계(論啓)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생각 밖의 일이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쓴 것이 매우 해괴하다는 뜻으로 전교하셨으니, 신들은 송구스러움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이 일은 참으로 성상의 하교와 같기는 하나, 다만 당초에 즉시 품정(稟定)하지 않은 관계로 각사가 이전의 칭호에 습관이 되어 변통할 줄 모른 것이니 형편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의당 명호를 정해야 할 터인데, 전례를 근거할 만한 일이 없고 또 아직 직(職)을 제수하지도 않은 터이니, 다만 제손(諸孫)으로 칭하여 일자(一子)·이자·삼자로 차례를 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황해도의 운미 패선군(運米敗船軍)이 영원위(寧遠衛)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청나라에서 우리들에게 은자(銀子)를 나누어 상주었는데, 차사원(差使員) 개천 군수(价川郡守) 최득남(崔得男)이 다른 사람의 몫을 삭감해서 자신이 차지했다." 하므로, 황해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이 사실을 장계로 보고하였다. 이에 명하여 최득남을 잡아다 심문하였는데, 최득남이 공초하기를,
"청나라에서는 배를 온전히 운반해 온 사람에게만 상을 주었고, 패선(敗船)한 자에게는 상이 미치지 않았는데, 신이 그들의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것을 불쌍히 여겨 신이 얻은 은자 및 개인적으로 지니고 있던 은자를 가지고 목화(木花) 등의 물품을 사서 나누어 주었으나 많이 주지 못했으므로 패선군은 이것을 청나라에서 준 것으로 잘못 알고 신이 삭감하여 주었다고 말을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은인을 원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므로, 이에 금부가 형장 신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은사(恩賜)한 물품을 이미 훔쳐놓고도 잡아다 신문할 때에 거짓으로 꾸며 대답하니, 더욱 몹시 가증스럽다. 다시 더 물을 것 없이 형률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금부가 이에 장물죄(贓物罪)로 의율하여 결안(結案)195)  을 가지고 취초(取招)하니, 최득남이 끝까지 원통하다고 호소하면서 문안(文案)에 서명을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금부가 다시 형장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패선군을 애당초 상주지 않았다면, 자기의 물건을 덜어내어 그들에게 나누어 줬을 리는 만무하니, 이란(李灤)의 【 지난 기사년에 이란이 심양에 사신으로 가서 호화(胡貨)를 사적으로 무역해 온 일이 발각되어, 그를 국문하지 않고 그냥 참형에 처했었다.】  예에 따라서 처치하라."
하였다. 이에 비국이 회계하기를,
"무릇 죽을 죄인도 반드시 자복을 받은 다음에야 형률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니, 최득남의 범죄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지만, 자복을 받기 전에 급작스럽게 처단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의당 국문하여 스스로 범죄 사실을 실토하도록 하고, 다시 전후 패선군의 수상(受賞)에 대한 동이점(同異點)을 조사해서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여 처리해야만 바야흐로 옥사의 체통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례가 없지 않으니 번거롭게 품하지 말라."
하고, 마침내 그를 참형에 처했다. 최득남은 본디 천례(賤隷)로 의주(義州)에 살았었는데, 정명수(鄭命壽)에게 아부하여 나라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누설시킨 것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명수가 그를 믿고 사랑하므로 조정이 정명수의 위세에 눌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최득남에게 벼슬을 제수하여 군수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 일을 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자, 대신 김류 등은 모두 옥사의 체통상 자복을 받지 않고 지레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을 하였는데, 실상은 정명수가 두려워서 기필코 그를 살리고자 한 것이었다.

 

8월 24일 계묘

호군(護軍) 이식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예조 판서의 자리에 있으면서 응대(應對)가 소루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 해사(該司)가 원손의 칭호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일로, 추고해서 치죄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그 책임은 오로지 그 당시의 예관(禮官)에게 있으므로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익위사는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를 엄밀히 선택하는 곳이므로, 관원을 주의(注擬)할 때에 십분 가려 주의해야 하는데, 세마(洗馬) 윤선(尹瑄)은 본디 도리에 어긋난 위인으로 사람 축에 들지 못한 지 오래이니, 그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그리고 당해 당상 또한 인물을 신중히 가리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윤선은 본명이 탁(琢)인데, 일찍이 인문(印文)을 위조한 일로 고발을 당해 죄를 받게 되었다가 요행으로 죄를 면하고는 이름을 선(瑄)으로 고쳤었다. 그런데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가 그를 세마에 의망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는데, 과연 탄핵을 받았다.

 

8월 25일 갑진

달이 헌원성(軒轅星)의 제일성(第一星)을 범하였다.

 

평안도의 평양 등 18개 고을에 대해 금년도 수미량(收米量)의 3분의 1을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감사 김세렴(金世濂)이, 연해 각 고을이 운미(運米)의 사역(使役)으로 인한 고통을 지나치게 많이 받았다는 것으로 조정에 보고하자, 호조가 회계에서 "수미량의 3분의 1을 감해야 한다."고 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청나라에 쌀 운반하는 일이 이미 잘 마무리 되었으리라고 여겼는데, 지금 회자(回咨)를 보건대, 패선(敗船)으로 인해 손실된 쌀을 은(銀)으로 보충하라는 말이 있으니, 후일의 염려가 있을 듯하다. 또 먼저 운반한 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에 운반한 것도 패선된 것이 많으니, 어떻게 처리해야겠는가?"
하니, 영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다면 신들도 걱정이 됩니다."
하였다. 상이 또 김류에게 이르기를,
"말하는 자들이 모두 강도와 남한 산성에 있는 곡식을 가져다가 국가의 경비에 보충할 수 있다고 하나, 그 실제 숫자를 살펴보면 역시 매우 작은 양인데, 지금 그것을 다 가져다 써버릴 경우, 급한 때를 당해서 어찌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강도와 남한 산성의 곡식을 가져다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선 목전의 일이 시급해서 여쭌 일이 있었는데, 다행히 윤허해 주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각영(各營)의 방물 값을 모두 감하라고 또 명하셨으니, 백성들의 감격하여 기뻐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호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복양(趙復陽)의 상소를 보니, 금년의 세두(稅豆)를 전부 감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록 전부를 다 감하지는 못할지언정 그 절반만이라도 감해 준다면 백성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후원(後苑)에 곡식을 심은 것은 대체로 해의 풍흉(豊凶)을 증험하기 위해서였다. 그 밭의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금년엔 큰 흉년이 들지는 않을 듯한데, 바깥 사람들이 아주 심한 흉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바깥 사람들 말 가운데 비록 실상에 지나친 말이 없지는 않으나, 어찌 모두 실상에 지나친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세폐(歲幣)의 수량을 감해 줌으로 인하여 제감(除減)할 것이 꽤 많으니, 의당 금년에 제감한 수량을 명년으로 이월해서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 하면 민폐를 많이 덜게 될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최득남이 종전에 심양을 왕래하면서 죄악을 저지른 것이 많으나, 다만 지금의 범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문하여 자복을 받은 다음에야 죽일 수 있습니다. 왕법(王法)을 한번 그르쳐 놓으면 뒤폐단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엄하신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 어찌 감히 눈앞에서 속이겠습니까. 또 정역(鄭譯)은 성질이 반복 무상하고 불측하여 국가의 안위가 모두 이 사람의 희로(喜怒)에 달려 있으니, 그가 만일 보복을 하려고 한다면 우환이 반드시 우리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고, 대사헌 남이웅(南以雄)이 아뢰기를,
"진실로 정명수가 성을 낼까 두려워서 그를 용서하고 죽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왕법으로 말하자면, 자복을 받기 전에 지레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최득남에게 언제 자복을 받는단 말인가. 금부의 관원은 정명수가 두려워서 반드시 감히 엄하게 형신하지 못하고 정명수가 오기만을 기다릴 터인데, 정명수가 와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경들이 과연 죽일 수 있겠는가.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양서(兩西) 지방을 호령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이목(李楘)에 대해서는 애당초 창졸간에 그가 나를 속인다고 미리 헤아린 것이 아니고, 일찍이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보았기 때문에 지난번의 전교가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매양 청나라 사신이 올 때면 병을 핑계하여 조반(朝班)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내가 항상 그를 그르게 여겼다. 지난번의 일로 말하자면, 나도 그가 병이 있는 줄은 알고 있으나 다만 병이 과연 중하다면 처음부터 오지 않았어야 하고, 기왕 왔으면 뭇사람의 의논이 결정되기 전에 지레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에 경들의 아뢴 말을 보고는 내가 부끄러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이목이 거동(擧動)에 참여한 것을 신이 일찍이 보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여한 것을 언제 보았으며, 몇 번이나 가서 참여하였는가?"
하므로,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청나라 황제의 초상 때에 이목이 종이로 모(帽)를 싸서 쓰고 와서 참여하여 조신의 반열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의 의논은 바로 막중한 일이었다. 옛날 양녕 세자(讓寧世子)를 폐할 적에도 황희(黃喜)가 이의(異議)를 주장했다 하니, 소견이 다르면 이의를 주장해도 될 것인데, 지레 나가서야 되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목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은 조신들이 다 아는 바인데, 어찌 모두가 이목을 위해 성상을 속이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에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전달하는 것이니, 내 또한 무슨 말인들 다하지 않겠는가. 나의 생각이 이러하므로 특별히 경들을 위해 말하는 것이다."
하니, 이경석·김육이 또한 이목을 위해 신구하는 변론을 매우 자세하게 하므로, 상의 뜻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자 김류가 아뢰기를,
"한때의 청론자(淸論者)로 불려진 자들은 매양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가서 참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이목 같은 사람은 본디 그런 자리를 기피하려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심지어 평상시에는 큰소리를 쳐놓고 저쪽에 가서는 자기의 지조를 끝내 지키지 못한 자들도 【 대체로 이경여·신익성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있으니,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이 실로 하찮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뭇 신하들에게 묻기를,
"국본(國本)이 이미 정해진 데 대해서 바깥 의논은 어떠한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인정이 모두 기뻐하며 복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 인심이 소란하여 평온하지 않다는 말을 한 자가 【 이경여가 일찍이 이 말을 했었는데, 상이 그를 미워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있었는데, 과연 인심이 소란한 형세가 있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겉으로는 비록 말하지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하니, 뭇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람들이 기뻐하며 복종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상의 이와 같은 하교는 매우 상하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것에 대해서는 우연히 물은 것이다. 다만 지금 선처(善處)해야 할 일이 있으니, 시험삼아 말하겠다. 저 여러 강씨(姜氏)196)  들이 모두 어리석고 분수를 모르니, 그들을 먼 데로 이주시켜 인심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여러 강씨들이 비록 우매하여 망령되이 행동한 일이 있기는 하나 특별히 드러난 죄악은 없었는데, 그들을 죄인으로 취급한다면 인심이 놀랍게 여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일이 만일 드러나버리면 사리상 안전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지금 선처를 하려는 것은 실로 심상한 뜻이 아니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무슨 죄를 범한 사실이라도 있습니까?"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지난 상사(喪事) 때의 일로 말하자면 그들의 소행이 매우 어리석고 분수에 넘쳤다. 그런데도 대신까지 그들의 말에 동요되어 심지어는 계사(啓辭)를 올려 의관(醫官)을 죄줄 것을 청하기까지 했는데, 그 계가 정지된 뒤에는 또 그들이 대간을 사주해서 다시 발론케 하였으니, 이것으로 살펴본다면 그 기세가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다."
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저들은 마치 고추 부서(孤雛腐鼠)197)  와 같은데, 어떻게 대간을 지휘할 수 있겠으며, 대간 또한 그 누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시 발론하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문명(姜文明)은 왜 김광현(金光炫)의 사위가 아니던가."
하고, 【 강문명은 김광현의 사위인데, 김광현이 의관을 죄주자는 논의를 다시 제기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의심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대궐 안에 일찍이 운운한 말이 있었는데, 이에 대간의 계사를 보니 그 말과 서로 부합되었다. 대궐 안의 말을 대간이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의심을 한 것이다."
하니, 좌우에서 모두 아뢰기를,
"김광현은 기필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부제학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그때에 신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그 논의에 참여했었는데, 뭇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갑자기 정지한 것을 그르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문명의 사람됨이 무식하고 또 외람되므로, 만일 흉도(凶徒)에게 꼬임을 당하면 작게는 유언 비어를 퍼뜨릴 것이고, 크게는 변을 일으킬 것이니, 그때에 가서는 경들이 아무리 후회한들 장차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여 이 전교를 하는 것이다. 강빈(姜嬪) 또한 현철한 사람이 아닌데 그의 형제들이 저렇듯 불량하니, 후일에 혹시라도 염려되는 일이 생긴다면 경들이 의당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나의 뜻은 그런 흔단이 생기기 전에 선처를 하려는 것이니, 흔단이 이미 생긴 뒤에는 비록 선처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토록 상세하시니, 참으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인심이 반드시 불평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후일의 사변을 비록 미리 헤아려 알 수는 없으나, 지금의 처치에 있어서는 의당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할 듯하니, 대신과 함께 십분 헤아려서 선처하소서."
하고, 이기조가 아뢰기를,
"연소하고 무지한 여러 강씨 무리들이 지난번에 비록 망령되이 행동한 일이 있기는 하나, 저들은 이름 있는 사대부들이 아니고 다만 두서너 포의(布衣)일 뿐이니, 후일 그들이 아무리 불령(不逞)한 일을 하려고 하더라도 그 누가 따르겠습니까. 성상께서 염려하신 저의는 말세에 인심이 착하지 못하여 혹 뜻밖의 환난이라도 있을까 해서 그들을 보전하는 뒷받침으로 삼고자 하시는 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만일 성상의 하교를 듣는다면 어찌 먼 데로 물러가 엎드려 있으면서 남은 생명이나마 연장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김류가 다시 아뢰기를,
"외인들이 천만 뜻밖에 갑자기 이런 일을 들으면 반드시 놀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신은 여기에 실로 다른 뜻은 없고 다만 인심을 진정시켜서 국가를 편안하게 하고자 할 뿐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상이 뭇 신하들이 자신의 의논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기쁘지 않아 의논을 파하였다.

 

박서(朴遾)를 평안 감사로, 이시매(李時楳)를 응교로, 서상리(徐祥履)를 수찬으로, 이석(李晳)을 정언으로 삼았다.

 

8월 26일 을사

상이 특명으로 강문성(姜文星) 등 4인을 먼 고을에 정배(定配)하였다. 여러 강씨 형제인 문성(文星)·문명(文明)·문두(文斗)·문벽(文璧)은 모두 강석기(姜碩期)의 아들이다. 강석기는 청백하고 신중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사류(士流)들의 존경을 받았고, 끝내 좋은 명예를 남기고 죽었다. 오직 문성·문명은 어리석고 망령되게 기세를 부렸고 소현 세자가 죽었을 때 문명은 장사지낼 날짜가 불길하다고 함부로 말하고 지관(地官) 최남(崔楠)을 찾아가 협박하였으므로, 상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그때는 오히려 죄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강문성 등은 사람됨이 무식하고 처사하는 것이 분수에 넘치니, 몇 해 동안 먼 고을에 정배해서 안과 밖을 다 보전하는 뒷받침으로 삼으라."
하니, 금부가 양남(兩南) 지방을 배소로 정하자, 상이 다시 문성·문명은 절도(絶島)에 정배하고 문두·문벽은 강원도의 궁벽한 고을에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가, 또 제주(濟州)·진도(珍島)·흡곡(歙谷)·평해(平海)로 바꾸어서 네 사람을 나누어 유배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나주(羅州)의 변고는 근고에 없던 일이므로 그 고을 호칭을 강등시키라는 명이 특별히 성상의 결단에서 나왔으니, 악을 징계하고 우환을 방지하는 도리가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법을 설치한 뜻으로 말하자면, 신하가 임금을 배반하거나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는 경우에만 고을의 호칭을 강등시키는 것이니, 이는 대체로 천지의 높고 낮은 구분이 지극히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관리들 사이에 명분이 비록 중하다 할지라도, 그들 사이에 일어난 변고를 강상죄로 단정해서 그 고을 호칭을 강등시키기까지 한다면 이는 실로 법 밖의 일이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다시 의논해서 처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을 호칭을 강등시키는 일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하다."
하였다.

 

민성휘(閔聖徽)·정태화(鄭太和)·이시방(李時昉)·조석윤(趙錫胤)으로 하여금 빈민을 구제하고 폐단을 줄이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8월 27일 병오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 지진이 있었다. 감사가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강문성 등을 정배하라는 명은 진실로 성상께서 그들을 보전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다만 생각건대, 강문성 등이 비록 어리석고 분수에 넘친 일은 있지만 아직 확실히 드러난 죄명은 없으므로, 원근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듣고서 성상의 염려하신 저의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에는 반드시 의혹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책례 도감이 아뢰기를,
"책봉(冊封)은 막중한 대례이므로 하루가 시급한 일이니, 당초에 이 일을 7월에 거행하기를 청한 것도 우연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을철이 다 되어가는 이때에 또 그 일을 뒤로 물려 거행하자고 보면, 한달 가운데는 좋은 날도 적을 뿐더러 각사의 모든 도구가 이미 정비되었고, 외방의 전문(箋文)도 다 올라와 있으니, 청컨대 세자의 책례를 먼저 거행하고, 빈궁에 대해서는 다시 좋은 날을 가려 추후에 책례를 거행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자의 책례를 먼저 거행하면 편리하지 못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좌부승지 이만(李曼)이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갔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는 곧바로 상소하여 백성들에 관한 일을 말하였다. 그 대략에,
"청컨대 진전(陳田)의 다과를 조사하여 공물을 헤아려 감해서 백성 보호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지금 만일 세입(稅入)을 이미 면제한 상황에서 또 공물까지 감한다면 경비가 절핍되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의당 경차관(敬差官)이 순심(巡審)할 때에 그로 하여금 진재(陳災)의 실수(實數)를 분명하게 조사한 다음 자신의 소견을 참작하여 각 고을 피재 상황을 몇 등급으로 나누어 매기게 하고, 감사로 있는 신하에게는 도내의 공론을 겸해서 채택하여 사실대로 계문하도록 해서, 해조가 그 매겨놓은 등급에 따라 진전의 많고 적음을 사준(査准)해서 분등(分等)에 따라 세율을 올리고 내린다면, 세금 견면하는 것은 한계가 있게 되고 혜택은 두루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복시에서 말 목양(牧養)하는 자본과 군기시에서 무기를 만드는 비용은 1만여 석 이상이며, 타사(他司)의 불요불급한 공물도 이런 유가 매우 많으니, 금년 말까지만 재감하거나 혹은 일시 중지한다면 어찌 국사에 큰 해가 미치기야 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 일을 해조에 내려 속히 헤아려 살피게 하고 각사의 공안(貢案)을 다 가져다가 그대로 둘 것과 임시로 견감할 것 따위를 구별하여 대신에게 결재를 받고 또 품지(稟旨)의 재결을 받은 다음, 이를 통계(通計)해서 방책을 마련하여 힘써 서로 알맞게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호조가 아뢰기를,
"이것은 상규(常規) 이외의 일이므로 감히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으니, 묘당에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이 의논드리기를,
"상소 가운데 진술한 것들을 모두 시행해야 합니다. 또 군기시에서 무기 만드는 일도 의당 1 년 동안 일시 중지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8일 정미

유성이 삼성(參星) 아래서 나와 묘성(昴星) 위로 들어갔다.

 

진휼청이 아뢰기를,
"명년 봄의 진구 대책이 극도로 긴급한데, 본청에 남은 곡식이 매우 적어서 참으로 백성을 구활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삼도(下三道)의 여러 영(營)에는 저축된 미포(米布)가 많이 있으니, 힘이 닿는 대로 거두어 모아서 이송(移送)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또 영광 군수(靈光郡守) 유석(柳碩)이 특별히 준비한 쌀과 황두(黃豆)가 각각 1 천여 석이고, 조(租)도 수천 석이 되니, 그 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그 수량의 전부를 서울로 수송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강문성(姜文星) 등을 처치할 일에 대해서는 신 남이웅(南以雄)이 이미 탑전의 하교를 받았고, 또 삼가 비망기 가운데의 사지(辭旨)를 보건대,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신 뜻은 실로 그들을 보전하려는 데 있었으니, 어찌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문성 등이 비록 무식하고 우람한 일은 있었으나 대단한 죄상은 드러난 것이 없는데, 처음부터 먼 곳에 정배했다가 또 절도에 이배하시니, 성상 뜻의 소재를 개개인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워서 원근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들으면 반드시 의혹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삼가 성명께서 오히려 지나치게 염려하신 바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니, 성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8월 29일 무신

유성이 천진성(天津星) 아래서 나와 패과성(敗苽星) 위로 들어갔다.

 

사은 주청사(謝恩奏請使) 김자점(金自點)이 치계하였다.
"신이 중화(中和)에 이르러 영선 차사원(領船差使員) 정연(鄭埏)을 만나 북경의 소식을 물었더니, 윤 6월에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의 한인(漢人)들을 협박하여 모두 머리를 깎게 하였고, 북경으로부터 그 동쪽으로는 크게 흉년이 들어 관내(關內)의 토적(土賊)들이 떼 지어 일어나서 관리들을 살해했다고 하였습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책봉받는 일은 국가의 막대한 예이니, 대단한 사고만 없다면 하루라도 지연시킬 수 없는데, 저위(儲位)가 정해진 지 지금 벌써 3개월이 되었는데도 책봉의 명을 아직까지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물(儀物)을 이미 준비하였고 책례 치를 날짜도 정해 놓았는데, 갑자기 날짜를 물려 정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들도 사세가 편리하지 못한 점이 있음을 알기는 합니다마는, 삼가 듣건대 앞으로는 좋은 날짜가 많이 없고, 빈궁의 분만이 더딜지 빠를지도 미리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막대한 예를 어찌 번번이 물려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빈궁의 책례는 비록 물려 행할지라도 동궁의 책봉받는 일은 처음 정했던 날짜에 먼저 거행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하니, 도감의 계사에 따라 왕세자의 책례를 먼저 거행하소서."
하고, 헌부도 이런 뜻으로 논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으므로 두 차례 아뢰고 그만두었다.

 

삼남 지방의 연해 여러 고을에 대해 명년 세폐(歲幣)의 면포를 견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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