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6권, 인조 23년 1645년 9월

싸라리리 2026. 1. 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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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기유

예조가 아뢰기를,
"책례를 이미 물려 정하기로 하여 다시 날을 가리게 하였더니, 이달 27일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지사(冬至使)의 배표일(拜表日)을 28일로 정해 놓았으니, 책례 다음날에 있을 백관의 진하(陳賀)와 팔도에 반교(頒敎)할 일과 세자의 사전(謝箋) 등의 예가 아울러 서로 장애가 됩니다. 하지만 배표일은 기왕 물릴 수 없는 것이고 보면 진하 또한 같은 날에 아울러 행하기 어려우므로, 알묘(謁廟)·입학(入學)·과거(科擧)의 날짜 또한 의당 차례로 물려 정해야 할 것이니, 빈궁이 분만하기를 기다려서 형편을 보아 다시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병사 정봉수(鄭鳳壽)가 죽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봉수는 일찍이 공로가 드러났으므로 의당 구휼의 은전이 있어야 하니, 본도로 하여금 그의 상(喪)을 호송하게 하여 서쪽 지방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라서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할 것을 명하고, 또 사제(賜祭)할 것을 명하였다.

 

9월 2일 경술

상이 하교하기를,
"내일 아침에 영상을 명초하여 복상(卜相)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홍서봉은 이미 죽고 김류 혼자서 영상으로 있었기 때문에 복상을 명한 것이다.

 

책례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일이 지금 이미 완전히 끝났으니, 양궁(兩宮)의 옥인(玉印)을 하루라도 외처에 머물려 둘 수 없습니다. 명일에 도제조 이하가 대궐로 봉진(奉進)해야겠으며, 또 각종의 기명(器皿)도 해장 낭청(該掌郞廳)으로 하여금 별단(別單)에 기록하여 올리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9월 3일 신해

이조 판서 이경석(李景奭)을 우의정으로, 이유양(李有養)을 장령으로 삼았다. 이유양은 집에 있으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았다. 계해년198)   초에 학행(學行)으로 선발되어 군현(郡縣)의 수령직을 역임하면서 명성과 치적이 꽤 있었다. 그런데 이때 헌부의 직에 제수되자, 물의가 오히려 너무 빠르다고 여겼다. 정태제(鄭泰齊)를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삼았다. 정태제는 강석기(姜碩期)의 사위였는데, 그의 처남인 강문성 등이 유배되자,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힘써 구하였다.

 

9월 4일 임자

함경 감사 심연(沈演)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농사는 해마다 흉년이 들었는데, 금년에는 풍(風)·수(水)·한(旱)·상(霜)의 재해를 혹심하게 입었으므로, 백성들의 일이 깊이 염려됩니다."

 

예조가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배전 차사원(陪箋差使員)들이 진하(陳賀)하는 날에 반열을 따라 행례할 일로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니, 책례를 비록 물리더라도 차사원들은 그대로 머물러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전문(箋文) 가운데 연호(年號)와 월일(月日)이 이미 씌여 있는 바, 여기에서 이것은 고쳐 쓸 수 없으니, 의당 본도로 돌아가서 다시 고친 전문을 가지고 오도록 해야 하겠는데, 그렇게 하자면 도로를 왕래하는 데 대한 폐단이 있을 뿐 아니라 배전(陪箋)의 예를 재차 행하는 것도 실로 온당치 못하고, 또 이 뒤로 행례할 날짜의 원근도 예정하기 어려우니 어찌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문은 고치지 말고 그대로 쓰고, 차사원은 먼저 내려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9월 5일 계축

유성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9월 6일 갑인

의주 부윤(義州府尹) 홍전(洪瑑)이 치계하기를,
"운미선(運米船)의 뱃사람들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장련 현감(長連縣監) 신중욱(辛重勗)이 7월 19일에 천진(天津)에서 병사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명하여 그에게 증직(贈職)하고 연도(沿道)로 하여금 호상(護喪)하도록 명하였다.

 

이식(李植)을 이조 판서로, 김세렴(金世濂)을 대사헌으로, 이태연(李泰淵)을 정언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7일 을묘

우의정 이경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은 재덕이 겸전하고 충직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보필(輔弼)의 직임에 합당하니, 사직을 고하지 말고 속히 나와 도를 논하여 상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하였다.

 

9월 8일 병진

약방 도제조 김류 등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봄 가을이면 으레 앓던 증세가 지금은 이미 나았다."
하였다. 상이 매양 봄 가을로 한열(寒熱) 증세를 앓아왔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이미 나아서 간혹 대군 및 환관들과 더불어 원중(苑中)에서 노닐며 즐기기나 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려 하지 않았으며, 경연도 오래도록 폐하였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걱정하였다.

 

9월 9일 정사

세자빈 장씨(張氏)가 사저(私邸)에서 분만하였다. 이때 이미 동궁의 요속(僚屬)을 두었으나, 책례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벼슬을 제수받고 숙배 사은하는 날 한 차례 사저에 문안만 드리도록 했을 뿐이었는데, 식견 있는 이들이 사저는 문안하는 곳이 아니라 하여 오히려 이를 비난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강관(講官)들이 서로 좇아 산실(産室)에 가서 문안을 하므로, 이조 판서 이식이 많은 사람이 모인 데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국가가 동궁의 요속을 두는 것은 장차 세자를 시강(侍講)하여 예(禮)로써 세자를 돕고 인도하기 위해서인데 첩부(妾婦)의 도리를 먼저 행하였으니, 또한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듣는 이들이 그 말을 바르게 여겼다.

 

9월 10일 무오

유성이 북하성(北河星) 아래에서 나와 낭성(狼星) 위로 들어갔다.

 

이조 판서 이식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식이 막 이조 판서가 되어 수령 천거하는 법을 시행하기를 청하면서 옛일을 끌어다 비유해서 많은 논설(論說)을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편리하지 못하다고 말하여 그 일이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이식이 일찍이 자기 말이 쓰이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침내 사직한 것이다.

 

우의정 이경석이 재차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음관(蔭官)에게 헌부의 직을 제수하는 것은 학식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재행(才行)이 있기 때문인데, 새로 제수된 장령 이유양(李有養)은 학식과 재행이 모두 알려지지 못했고, 벼슬을 하면서 일을 처리한 것도 논의할 만한 것이 많았으므로, 본직에 제수되자 물의가 시끄럽게 떠드니, 체차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사람은 학행이 없지 않으니 정도에 지나친 논의를 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는 반드시 공물에 대해 절손(節損)과 견면(蠲免)을 대대적으로 시행한 다음에야 바야흐로 실제 혜택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안(貢案)을 조사하여 감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갑자기 변경하기가 어렵거니와 서도에 비축한 미곡에 이르러서는 실로 난리 이후 서도의 책응(策應) 때문에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조치이지만 이런 큰 흉년을 만나서도 그대로 이름 없는 세금을 징수한다면, 성상께서 재해를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금년에는 사도(四道)에서 징수할 서량(西粮)을 특별히 전부 견면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세(田稅) 황두(黃豆)에 대해서는 일찍이 탑전에서 반으로 감하라는 명을 이미 받았지만, 경창(京倉)에 저축된 것이 아직 많이 있으니, 잠시 각 지방의 재상(災傷)에 대한 계문을 기다려서 그중에 더욱 심한 곳은 특별히 전부 감하도록 하고, 또 제도(諸道)로 하여금 이런 뜻을 민간에 효유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꼭 이것을 효유할 것은 없다."
하였다.

 

궁녀 계향(戒香)·계환(戒還)이 내옥(內獄)에서 죽었다. 이들은 다 소현 세자빈의 궁녀였는데, 저주의 일로 국문을 하였으나 모두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9월 12일 경신

우상 이경석이 또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고, 이어 사정(私情)을 쓰는 폐단과 백성 구제하는 방도를 진술하고서 정성을 다해 아랫사람을 신임하여 상하가 서로 믿는 아름다움을 이루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온후한 말로 답하고 사직을 윤허하지 않으니, 수일 후에야 이경석이 나와서 사은하였다.

 

예조가 이달 27일을 왕세자 및 세자빈 책례의 길일(吉日)로 가려서 아뢰었다.

 

9월 13일 신유

유성이 낭장성(郞將星) 아래서 나와 천창성(天倉星) 위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책례를 치른 다음날에는 백관이 의당 진하를 해야 하나, 배표일(拜表日)과 상치되어 예를 거행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배표의 예를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하를 29일로 물려 행하라."
하였다.

 

신익량(申翊亮)을 좌부승지로, 조경(趙絅)을 대사간으로, 김시번(金始蕃)을 헌납으로, 윤성(尹珹)을 장령으로 삼았다.

 

9월 14일 임술

평안 감사 김세렴이 치계하였다.
"천진위(天津衛)의 운미선(運米船) 1백 2척이 쌀 5만 3천 8백 72석을 【 이것은 곧 지난해에 전후로 운반한 쌀이다.】  실었는데, 배가 부서져서 손실된 쌀의 수량이 1만 7천 7백 25석이고, 북경에 납부한 수량이 3만 6천 1백 47석입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청나라에서 요구한 배[生梨]를 1만 과(顆)는 평안도에 나누어 배정하고, 9천 과는 황해도에 나누어 배정하여 기약된 날짜까지 준비해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6일 갑자

간원이 호위 군관을 혁파해서 무위 도식의 비용을 절감할 것을 청하고, 또 강도 유수(江都留守) 신준(申埈)은 처신이 무상하여 인류(人類)에 용납될 수 없다고 논하면서 사판(仕版)에서 깎아버릴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달을 넘도록 이를 쟁론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얻지 못했다.

 

9월 17일 을축

비국이 아뢰기를,
"공물의 방납(防納)에 대한 폐단은 궁가(宮家)에서 시작되었는데 사대부들도 이 좋지 못한 일을 본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모리배(牟利輩)와 결탁하여 그들에게 자금을 주어 군읍으로 보내면 수령된 자들이 혹은 안면과 인정에 끌리고 혹은 권세를 두려워하여 모두가 고분고분 따라줌으로써 외방에만 해를 끼칠 뿐 아니라 각사(各司)의 주인들도 매우 원망하고 한탄하는 지경이며, 심지어는 보병(步兵)·포병(砲兵)의 보인(保人) 제원(諸員)의 가포(價布)에 대해서도 이 관습을 따르고 있으니, 만일 과율(科律)을 엄격하게 세워서 통렬히 금단하지 않으면 마침내 나라가 나라 꼴이 되지 않는 데 이를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 도의 관리들을 신칙하여 앞으로 만일 외방에 간청(干請)하는 자가 있으면 수령이 그때마다 그의 이름을 들어 보고하게 해서 현행범으로 가장(家長)인 경우에는 장률(贓律)로 논죄하여 고질적인 폐단을 통렬히 혁파하는 뒷받침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9일 정묘

크게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가 책봉을 받은 다음 건양문(建陽門)을 경유하여 곧장 창덕궁(昌德宮)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고, 홍화문(弘化門) 앞 바른 길을 경유하되,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성 안 사서(士庶)들로 하여금 충분히 보게 한 다음에 돈화문(敦化門)을 【 곧 창덕궁의 정문(正門)이다.】  거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궐내(闕內)로부터 직접 동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하였다. 책례 도감이 또 이 일로 청하였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9월 20일 무진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김류, 우의정 이경석 등이 재이(災異) 때문에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기를,
"어제 저녁에 천둥 번개가 연달아 치고 비바람이 함께 몰아쳤는데, 천둥 소리는 요란하고 번개는 번쩍번쩍하여 그 기상이 매우 참혹하였으므로 신들은 몹시 놀라 당황하고 두려워서 넋을 잃었습니다. 대체로 음양(陰陽)을 고르게 다스리는 일은 상신(相臣)의 책임인데, 재상이 재상답지 못하면 음양이 올바른 기후(氣候)를 잃어 괴기(乖氣)가 응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니 지금 거듭된 이 재이가 어찌 모두 신들이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시기는 비록 늦가을에 속하나 절후는 이미 10월에 이르렀으니, 천둥 소리를 거둔 뒤이며 양(陽)이 박탈되는 때입니다. 그런데 천둥 소리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변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백성들이 다 쳐다보는 재상 자리에 못난 신들이 무릅쓰고 있기 때문이니, 우리 백성들의 보고 들음을 인하여 선악을 관찰하시는 하늘이 어찌 우리에게 견책을 보이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속히 책면(策免)199)  을 윤허하시고, 다시 유능하고 덕 있는 이를 가려 뽑아서 재이를 소멸하고 상서를 이르게 하는 뒷받침으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제 천둥치고 비내린 변고는 전보다 더욱 참혹하였기에 밤새도록 걱정되고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이 구징(咎徵)200)  은 실로 과인의 우매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경들은 사직을 고하지 말고 안심하고 공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였다.

 

간원이 의관(醫官)으로 읍재(邑宰)를 임명하지 말 것과 이미 부임한 자도 체차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9월 21일 기사

예조가 아뢰기를,
"세자 및 빈궁이 대궐에 들어가는 날은 바로 책례를 거행하는 날이니만큼, 평상시에 출입하던 관례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니, 책례 도감으로 하여금 여련(輿輦)과 의장(儀仗)을 갖추어 본궁(本宮)으로 나아가서 세자가 곤룡포(袞龍袍)·익선관(翼善冠) 차림으로 여련을 타고 배위(陪衛)하는 관속들을 갖추고서 대궐로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치계하기를,
"남한 산성에서 지난해에 거두어 들인 쌀로 백성들에게 지급한 것이 1만여 석에 이르는데, 금년은 근고에 없었던 흉년이기에 여러 고을이 모두 기근(飢饉) 때문에 쌀 징수하기 어려운 상황을 계속해서 보고해 오고 있습니다. 강도로 옮겨간 곡식에 대해서는 이미 3분의 1만을 징수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니, 남한 산성에서 지급한 쌀에 대해서도 여기에 따라 시행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이시방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만(李曼)을 좌부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동부승지로, 민형남(閔馨男)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제주(濟州)는 6개월 동안 크게 가문 뒤에 큰비가 급작스럽게 내리고 큰 바람으로 나무가 뽑혔는데, 이 때문에 죽은 말이 2백 필이나 되었다. 목사(牧使)가 이 사실을 보고해 왔다.

 

9월 22일 경오

유성이 천균성(天囷星) 위에서 나와 천원성(天苑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9월 24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왕세자가 오늘 의창군(義昌君) 및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의 집에 가려고 한다 하니, 지금 세자의 명호가 이미 정해졌고 책례도 이미 임박한 상황에서 여염집을 출입한다면 남의 이목에만 해괴하게 여겨질 뿐 아니라 체면에 있어 어찌 이와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속히 그 행차를 정지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체면에 있어서는 별로 손상될 것이 없는데, 이와같이 논계하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정부(政府)는 육조(六曹)를 통솔하고 육조는 각사(各司)를 관장하여 다스린 다음에야 바야흐로 체통이 서로 유지되고 사무가 수거(修擧)될 것입니다. 그런데 육조가 개좌(開坐)한 날짜를 정부에 보고하여 근무 태도의 근면 여부를 빙고(憑考)하도록 일찍이 분부하였는데도, 근래에 조정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서 백관이 사무를 게을리 하고 있고 각사가 개좌한 날도 드무니, 특별히 경계하고 신칙하여 직무에 진력하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는 육조 가운데 사무가 바쁜 곳과 한성부·장례원은 법전(法典)에 따라 매일 개좌하게 하고, 또 각 속사(屬司)를 신칙해서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직무를 보도록 할 것이며, 외방의 문보(文報) 및 진공물(進貢物)은 도착한 즉시 수납(收納)하여 먼 데서 온 사람을 유체(留滯)시키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만일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거든 정부에서 법부(法府)에 공문을 내어 하나하나 규찰하여 조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이경석이 막 상부(相府)에 들어와 의견을 진술한 것이 많기는 했으나, 끝내 당시의 폐단을 대대적으로 혁파한 것이 없었다. 또 아뢰기를,
"지금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는 낭비를 절감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우선 사복시 한 기관의 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시(本寺)의 공물은, 공용(公用)된 것은 아주 미세한 반면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매우 거대한데, 각사 공물의 백성을 괴롭힌 것이 이와 같은 유가 많습니다. 또 각도의 목장(牧場)에 둔전(屯田)을 설치한 것이 매우 많아서 1년에 수입된 것이 대략 쌀이 1천 4백여 석, 조(租)가 1천 2백여 석, 두(豆)가 1천 3백여 석, 목화(木花)가 1만여 근이나 되는데, 말 사료(飼料)인 콩은 호조에서 나오고 있고, 말을 기르고 길들이는 일에 대해서는 본디 여러 원역(員役)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각 고을의 공물을 특별히 혁파하고서 본시로 하여금 스스로 마련하게 하고, 기타 양마(養馬)의 도구는 【 마삼(馬衫)·마삭(馬索)·마약(馬藥)·마철(馬鐵)따위이다.】  둔전의 수입에서 취해 쓸 수 있게 하여 이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는다면, 마정(馬政)에는 별로 손상됨이 없이 백성들이 입는 혜택은 클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이런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모두 굶주려서 떠돌다가 구렁에 빠져 죽을 지경인데, 내구마와 외구마를 일체 평상시처럼 사육한다면 자못 ‘짐승에게 사람을 잡아먹인다.’는 경계를 범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그 숫자를 양감하여 사육하는 비용을 덜어야 합니다. 본시(本寺)에는 둔전에서 해마다 거두어 들이는 것 이외에 현재 저축되어 있는 쌀·콩·피곡(皮穀)·목면(木綿)·은자(銀子)가 아직도 1천여 석이나 되니, 지금부터 외구마는 본시로 하여금 사육하게 하고, 호조에서 지급하는 쌀·콩은 백성 진휼의 용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초(馬草)에 있어서는 선혜청(宣惠廳)에서 값을 지급하되 그 수량이 너무 많아서 국마(國馬)를 사육하는 이외에 본시의 관원들이 날마다 나누어 갖는 것이 또한 셀 수 없이 많으므로, 1년 동안의 초가(草價)가 많게는 5천 8백여 석에 이르는데, 낭비를 줄이는 오늘날을 당해서 어찌 한결같이 그 과람한 것을 그대로 용납하겠습니까. 명년 가을까지 이것을 양감하여 그 잉여분을 백성 구제하는 데 옮겨 쓰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구마는 명년 가을까지 양감하되 마초는 재감하지 말라."
하고, 인하여 외구마 40필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9월 25일 계유

비국이 아뢰기를,
"모든 서얼(庶孽)들은 허통(許通)이 되지 않으면 과거에 응시하거나 벼슬할 수 없음이 국법에 매우 엄격하게 정해져 있는데, 요즘에는 법률과 기강이 무너져서 제멋대로 과거에 응시를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법령을 거듭 밝혀 해조로 하여금 허통의 첩문(帖文)을 대조하여 살펴보고 나서 사관(四館)에 붙인 다음에야 녹명(錄名)을 허락하고, 만일 첩문도 없이 무릅쓰고 응시한 자나 첩문을 위조한 자가 있으면 모두 본율(本律)로 처단하며, 사적으로 녹명을 허락해 준 관리도 모두 죄를 과(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종공(扈從功)이나 전공(戰功)이 있어 통사(通仕)하게 된 자 이외에 혹 군직(軍職)으로 가자(加資)는 되었으나 교지에 허통이라는 것이 기록되지 않고 직명(職名)만 기록된 자에 대해서는 모두 정거(停擧)하도록 하고 수금(囚禁)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며, 혹 논상(論賞)하는 일이 있더라도 허통이 되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가자를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면천(免賤)하고 종량(從良)하는 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충대(補充隊)에 편입되었다가 거관(去官)된 다음에야 양역(良役)을 허락하는 것인데, 요즘에는 그들을 곧바로 양역에 소속시키므로 자못 법전의 본 뜻이 없으니, 이것 또한 해조로 하여금 일체 옛법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시행할 것을 명하였다. 이상은 모두 이경석이 건의한 것이다.

 

9월 26일 갑술

이경석을 세자 부로, 임선백(任善伯)을 장령으로 삼았다.

 

진휼청이, 동지(同知) 이하의 공명 직첩(空名職帖)을 제도(諸道)에 나누어 보내서 곡식을 거둬 모아 백성 구제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것은 승지 이만(李曼)의 말을 따른 것이다. 진휼청은 또 서얼(庶孽)들로 하여금 쌀을 납부하고 첩문(帖文)을 받아 벼슬길에 허통되도록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명일 행례(行禮) 때에 세자가 책봉을 받는 시각은 진시(辰時)이고, 빈궁이 책봉을 받는 시각은 오시(午時)인데, 전좌(殿坐)하실 정확한 시각은 의당 재차 여쭙겠습니다마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옥체를 상할까 염려됩니다. 그런데 세자가 책봉을 받고 난 다음 이어서 빈궁에 관한 교명(敎命)·책인(冊印)·명복(命服)을 내려 사자(使者)로 하여금 이를 받아가지고 창덕궁(昌德宮)으로 가게 한다면, 빈궁의 행례 때에 미쳐서는 저절로 오시에 이를 것이니,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찬 땅에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더 상할까 걱정이니, 빈궁의 책례는 권정례(權停禮)로 하라."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사복시의 외구마를 본시로 하여금 사육하게 하는 일은 이미 윤허를 받았으니, 낭비를 절감하여 백성 구제하는 정사에 참으로 작은 보탬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계사(啓辭)를 작성할 때에는 내구에 사육되고 있는 말의 숫자를 외구에 사육되고 있는 숫자로 잘못 알았습니다. 지금 다시 조사해 본 결과, 1년 동안 외구마 사육에 드는 것이 황두(黃豆) 1천 3백 12석, 전미(田米) 2백 72석입니다. 이것으로 계산한다면 내구의 사료 수량에 비교할 때 비록 그 갑절이 되기는 하지만, 남은 것이 아직도 쌀 4백 90여 석, 황두 30여 석이 있고, 이 숫자 외에 조(租)와 목화(木花)가 또 있는데, 구마 또한 양감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본시의 지용(支用)만으로도 부족할 염려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 사육하는 미두(米豆)의 수량이 이렇게 많이 든다면 본시에서 그 지용(支用)을 대기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그 후 비국이 다시 이와같이 기근이 극심한 때를 당해서는 절손(節損)의 조치를 범연하게 하고 말 수 없다는 뜻으로 청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9월 27일 을해

봉림 대군을 왕세자로, 부인 장씨(張氏)를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는데, 책례는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에서 거행하였다. 묘시(卯時)에 병조·도총부 및 동궁의 요속들이 세자를 배위하고 홍화문(弘化門)을 경유하여 들어와 명정전 문 밖에 멈추어 기다렸는데,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명정전으로 나오자, 백관들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사배(四拜)를 마친 다음 반열을 나누어서 전정(殿庭)의 동·서로 줄지어 섰고, 여마(輿馬)와 의장(儀仗)은 전정의 좌우측에 진열하였다. 이에 세자가 면복을 갖추고 명정문을 경유하여 들어오자, 상례(相禮)가 세자를 인도해서 동정(東庭)의 배위(拜位)로 나아가니, 세자가 부왕께 사배를 올렸다. 이때 전책관(傳冊官) 우부승지 이래(李䅘)가 어전에 나아가 꿇어앉아 아뢰기를 "교명(敎命)을 전하겠습니다." 하고는 곧 종종걸음으로 내려와 세자 앞 약간 동북쪽으로 나아가 서쪽으로 향하고 서서 "교명이 있었다."고 칭하자, 세자가 이에 꿇어앉으니, 이래가 서서 책문(冊文)을 선포하였다. 그 책문에 이르기를,
"종저(宗儲)201)  의 자리를 정하는 것은 바로 제왕이 계통을 전하는 큰 규획(規劃)이요, 어진이를 얻어 나라를 맡기는 것은 곧 성철(聖哲)한 임금이 천명을 터잡는 지극한 계책이다. 이에 고난을 구제할 기회를 만나 국본(國本)을 튼튼히 하는 계책이 더욱 절실하므로, 곧 이장(彛章)202)  을 상고하여 현양하는 책문을 삼가 포양하노라.
아, 너 세자 호(淏)는 천품이 총명하고 기국이 깊고 넓어서 효우(孝友)의 성실함은 스스로 타고난 품성을 두터이 하였고, 학문하는 의지는 스승을 찾지 않고 혼자 하였다. 일찍이 개번(介藩)203)  에게 표준이 되었고, 더욱 나라를 반석처럼 견고히 함에 광채를 더하였다. 겸손을 가지고 법을 봉행함으로써 어질다는 소문이 은연중 백성들에게 미더워졌고, 험난한 고생을 겪음으로써 높은 명예가 멀리 전파되었다. 내가 오랫동안 병들어 누워 있는 이때에 이 계체(繼體)의 상(喪)을 당했는 바, 감무(監撫)204)  의 높은 자리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으니, 종사(宗社)가 기탁(寄託)되었음을 생각하여 모름지기 영원한 계책을 생각해야 하고, 의당 압뉴(壓紐)의 부험(符驗)205)  을 받아들여 승조(承祧)206)  의 경사를 잘 이어야 한다. 마침내 나의 뜻만 크게 응했을 뿐 아니라, 실로 군정(羣情)이 다 화합되었으므로,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로 삼노라. 알기 어려운 것은 천명이요, 하기 어려운 것은 왕노릇인데, 오상(五常)과 백행(百行)이 도심(道心)을 보존한 데 벗어나지 않으므로,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은 오직 인륜(人倫)의 지극함을 다하였다. 학문을 연구하지 않으면 이 이치를 밝힐 수 없고, 어진이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그 몸을 신중히 닦을 수 없는 것이니만큼, 학문에 일취 월장하여 사부들의 가르침을 게을리 함이 없도록 기하고, 성해(星海)207)  가 비추고 적셔주었으니 거의 귀신과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 글은 대제학 이식이 지은 것이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다사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내가 감히 사정으로 세자를 세웠으나, 오직 영원한 계책을 생각했기에 마음은 실로 장군(長君)을 가리는 데 공정하였으니, 사직의 복이요, 귀신과 사람이 의지할 데가 있게 되었다. 아, 너 세자 호(淏)는 천성이 본디 총명하고 기국 또한 넓고 커서 궁위(宮闈) 안에 있을 때부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이 드러났고, 타국에서 험난한 고생을 겪을 적에는 슬기로운 생각이 더욱 원대하였으니, 대체로 일찍이 성현의 경전(經傳)에서 힘입은 것이 있어 능히 스스로 원근에 명예를 떨친 것이다. 오늘날 같이 매우 어려운 때를 당해서는 의당 큰 계책을 일찍 정해야 하는데, 서로 의논한 뜻이 모두 같으니 뭇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었고 백성들의 기대가 귀일되었기에 떳떳한 법을 거행하게 되었다. 국본(國本)을 거듭 세우고 나니, 나의 걱정이 조금 풀린다. 이에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노라.
아, 오직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오직 학문을 힘써서 행실을 모두 예법에 따라서 하고, 신하들의 잠규(箴規)208)  를 힘써 받아들여 검덕(儉德)은 반드시 숭상할 일로 삼고 일욕(逸欲)은 반드시 경계할 일로 삼으라. 그리고 형제간의 자식을 자기 자식같이 여겨 인륜을 더욱 두터이 하고, 부모의 마음과 같이 마음을 가져 길이 천명을 보존해야 한다. 아무리 급한 때에도 이것을 잊지 말고 생각하여 밤낮으로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이경석이 지은 것이다. 책문의 선포를 마치자, 세자가 사배를 드렸고, 이래가 교명문을 받들어 세자에게 주니 세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받았다. 이어 죽책(竹冊)과 인수(印綬)를 모두 차례로 세자에게 전수하자, 세자가 다시 사배를 드리고 나가니, 이에 백관이 모두 사배를 드렸다. 통례(通禮)가 어전에 나아가 꿇어앉아 아뢰기를 "예가 끝났습니다." 하니, 상이 곧 대내로 돌아왔다.
오시에 빈궁의 책례를 행하였는데, 전상(殿上)에 자리를 설치하고 백관이 선후로 사배하여 모두 세자 책례 때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사자(使者)인 영의정 김류와 부사(副使)인 예조 판서 김육이 조복을 갖추고 차례로 들어와 정중(庭中)의 배위(拜位)에 나아가서 먼저 사배를 행하고, 이래가 또 교명·죽책·인수를 전하자, 김류 등이 이를 받아가지고 창덕궁으로 갔다. 빈궁은 내명부(內命婦)들과 함께 대내에서 의식대로 행례하였다. 김류 등이 돌아와 복명하기를,
"교명을 받들어 왕세자빈에게 비물(備物)과 전책(典冊)을 주고 예를 마쳤습니다."
하고는, 곧 사배를 하고 물러갔다. 세자는 상의 둘째 아들로 이때 나이 27세였는데, 천품이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기국이 넓고 컸다. 게다가 경사(經史)를 널리 보아 뜻을 통달하였으므로,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훌륭하다는 소문이 이미 전파되어 인심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었기에 책례를 행함에 미쳐 중외가 크게 기뻐하였다. 빈 장씨(張氏)는 고 우의정 유(維)의 딸이며 고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외손이다. 세자빈을 책봉한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사자(嗣子)는 국가의 근본이므로 실로 귀신과 사람의 기대가 모두 그에게 달려 있고, 저비(儲妃)209)  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므로 가르침이 규곤(閨閫)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큰 책례로 후세에 모범을 보일 것을 생각하여 이에 대한 전례를 다 써서 영원한 계책으로 삼는다.
아, 너 장씨는 누대 명문의 딸이요 바로 나의 훌륭한 며느리로서, 좋은 계책과 아름다운 덕이 성대히 날로 드러나고, 착한 행실과 유순한 규범은 타고난 천성이었는데, 일찍이 이체(貳體)210)  의 잠저에서 중궤(中饋)211)  의 자리에 앉아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성화는 대궐 안에 전해지고 훌륭한 칭찬은 궁녀의 사필에 의해 기록되었다. 일찍이 곤정(坤貞)212)  의 길함에 부합하여 길이 그 상서를 발하였고, 과연 이명(离明)213)  의 존귀함에 계합하여 곧 그 경사를 두터이 하였으니, 어찌 한갓 인륜의 처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뿐이랴, 또한 종사의 복을 연장시켰다. 그래서 이에 좋은 때를 가리어 현양하는 책문을 받도록 하노라.
이제 영의정 김류 등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서 예를 갖추어 보장(寶章)214)  을 주도록 하노니, 꽃을 듬성히 수놓은 비단은 상서로운 빛이 초도(椒塗)215)  에 찬란하고, 좋은 구슬로 꾸민 복장은 아름다운 기운이 계원(桂苑)216)  에 넘친다. 아, 오직 공손하고 검소하여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오직 경계하고 삼가야만 그 명예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니, 아름다운 명예를 밝게 이어 여자가 도모해야 할 훌륭한 법도를 어기지 말고, 밝은 훈계를 공경히 복종하여 대궐 안에서 잘 다스리려던 처음 먹은 마음을 더욱 면려하라. 시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니 유종의 미를 이루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예문관 제학 김시국(金榰國)이 지은 것이다. 그 교명문에 이르기를,
"오직 어진이로 세자를 가려서 누조(累朝)의 떳떳한 법칙을 따랐고, 사명(辭命)을 내려 짝을 지어서 이극(貳極)217)  의 곤의(壼儀)를 바로잡았으니, 이에 국본을 공고히 한 때를 당하여 종귀(從貴)218)  의 은전을 반포하노라.
아, 너 장씨는 훌륭한 계책이 일찍부터 뛰어났고, 좋은 명예가 밝게 위로 올랐는데, 성품은 정숙하고 자태는 온순하고 아름답다. 위의(威儀)가 익숙하니 충신의 손녀이고, 재상의 딸이라서 가문도 당당하다. 그래서 종번(宗藩)219)  과 짝을 짓노니, 궁액(宮掖)에서 더욱 아름다움을 드러내어라.
만리 밖의 강한 진(秦)나라에 볼모로 갈 적에 온 가족이 다 따라갔다가 9년 동안에 온갖 고초 실컷 겪고서 형제가 비로소 돌아왔는데, 어찌하여 하늘이 재앙을 내려, 갑자기 세자가 세상을 버리게 되었던고. 생각건대 시사(時事)가 매우 어려운데, 더구나 나의 병까지 점점 고질이 되어가는구나. 세자의 자리가 비었는데 원손은 나이 어려 어찌할 수 없었고, 장군(長君)이 종사를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직의 복이 아니겠는가. 이미 세자를 정하였으니 의당 그 아내도 아울러 높여야 하므로, 예수(禮數)는 저절로 지난날보다 각별해지고 책임과 기대는 오늘날에 아주 간절해졌기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빈으로 삼노라.
아, 순(舜)임금의 덕이 하늘처럼 컸던 것은 진실로 규예(嬀汭)220)  에서 아내의 모범을 본 데 힘입었고, 주(周)나라의 천명이 날로 새로워진 것은 실로 임사(妊姒)221)  가 왕화(王化)를 도운 데서 말미암았으니, 너는 음양이 서로 돕는 것을 본받고 내외가 서로 도와 일을 성취하는 것을 강구하여 삼가 밝은 훈계를 복종해서 아름다운 명예를 저버리지 말라. 옥새(玉璽)와 주헌(珠軒)222)  은 능히 삼선(三善)223)  의 덕과 상대가 되나니, 갈담(葛覃)·규목(樛木)224)   같은 덕으로 이남(二南)225)  의 아름다움을 계승하기를 기다리노라."
하였는데, 이것은 부호군 김광욱(金光煜)이 지은 것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막대한 경사에는 의당 음악을 써야 할 듯한데, 어째서 악기를 진열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예조 판서 김육이 와서 아뢰기를,
"병란(兵亂)을 겪은 이후로 묘악(廟樂)도 아직 다시 설행하지 못하여 10년 동안 음악을 쓴 때가 없었기 때문에, 의주(儀注)에서도 ‘진열만 하고 연주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계하(啓下)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보니, 명백하게 품정(稟定)하지 못한 실수가 현저하므로 황공함을 감당치 못하여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날씨는 비록 추우나 때는 가을 절기인데, 입시한 관원들이 모두 이엄(耳掩)226)  을 착용했으니, 사체에 있어 매우 무례하다. 늙고 병든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이에 대간이 모두 이 일로 인피하고 물러가므로, 지평 이재(李梓)가 처치하여 체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8일 병자

부제학 이기조(李基祚), 병조 참의 남선(南銑), 서장관 이응시(李應蓍)를 북경에 보내어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을 하례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난리를 겪은 뒤로 물력(物力)이 탕갈되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악공(樂工)과 악생(樂生) 중에 포로가 되거나 피살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묘사(廟社)·문묘(文廟)·산천(山川)의 제사에 모두 음악을 쓰지 못하였고 나랏일이 정해지기를 기다려서 다시 설행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10년 동안 국가에 일이 많아 다시 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묘악(廟樂)이 복구되지 못했으면 다른 일에도 음악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어제의 막대한 경사에도 진열만 하고 연주하지 못했는데, 명일 백관의 하례 때에도 거행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는 참으로 흠이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금년 같은 기근의 재해는 근고에 없던 것이므로 이런 때에 비록 음악을 다시 설행하지는 못할지라도 악무(樂舞)는 끝내 폐할 수 없는 것이고, 나랏일이 정해질 시기는 기약할 수 없으니, 앞으로 음악을 쓰는 것의 타당 여부에 대하여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혹 연수(年數)로 한정하거나 혹은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하도록 하되, 미리 악공과 악생들로 하여금 연습을 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9일 정축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이행우(李行遇)를 대사간으로, 남노성(南老星)을 집의로, 이시매(李時楳)를 사간으로, 이위(李椲)·김시번(金始蕃)을 장령으로, 윤집(尹鏶)을 헌납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지평으로, 김식(金鉽)·김휘(金徽)를 정언으로, 민응협(閔應協)을 교리로, 심노(沈𢋡)를 부교리로 삼았다.

 

백관이 세자의 책봉을 하례하였다. 이날에 대사(大赦)하였다. 사문(赦文)에 이르기를,
"전성(前星)227)  이 변고228)  를 보이므로 막 진저(震儲)229)  가 비었음을 염려했는데, 하늘이 복을 거듭 내리시어 곧바로 세자를 책봉하는 경사가 열렸으므로, 이에 나의 진심을 토로하여 덕음(德音)을 크게 선포하노라.
옛 제왕들의 계책을 상고해보면 반드시 총사(冢嗣)230)  부터 먼저 정하였는데, 어찌 다만 일찍 세워 미리 기르는 것이 나라 운명의 근기(根基)가 되어서일 뿐이겠는가, 또한 국사를 감독하고 군대를 독무하는 것에 백성들의 기대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는 덕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국운이 매우 어려운 때를 만나서 질병이 몸에 걸려 온갖 중요한 정사를 폐한 것이 많음으로써, 재해로 인한 기근이 눈앞에 가득하고 온갖 요기(妖氣)가 아울러 발생하였다. 그런데 세자의 상(喪)을 재화가 이토록 절박한 때에 뜻밖에도 갑자기 당하였다. 더구나 사손(嗣孫)은 너무 어려서 이미 그가 장성하기를 점칠 수 없고, 나라의 형세는 위태롭고 의심스러워 조석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치란 변(變)이 있으면 반드시 통하는 법이요, 경도[經]는 권도[權]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아우로써 형을 계승하는 것은 실로 조종(祖宗)의 남긴 법이 있거니와 장군(長君)을 추대하여 적사(嫡嗣)로 세운 것은 진실로 사직의 원대한 계책을 위한 것이다.
봉림 대군 이호(李淏)는 자질이 총명하고 기국과 식견이 뛰어나서 효우(孝友)의 행실은 일찍부터 궁중(宮中)에 드러났고, 시례(詩禮)의 학문은 번거로이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혼자 하였다. 너그럽고 커서 뭇사람을 포용할 만한 국량이 있고, 민첩하고 통달하여 일을 성취할 재간이 있다. 험난한 고생을 두루 겪음으로써 훌륭한 명예가 요동(遼東) 지역에 드러났고, 검약(儉約)을 굳게 지킴으로써 어질다는 명성이 경서(京西) 지역에 전파되었다. 이는 바로 국론(國論)이 있는 곳이니, 어찌 천의(天意)의 소재가 아니겠는가. 의논이 나오자 경사(卿士)들이 따라 협조하였고, 계책이 결정되자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므로, 이에 본월(本月) 27일로 길일(吉日)을 가리고 의물(儀物)을 갖춘 다음, 내가 정좌(正座)에 임어하여 교명을 선포해서 그를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믿고 따르는 이치가 이미 하늘과 사람에게 부합되었으니, 뇌우(雷雨)231)  의 은전이 의당 원근에 모두 미쳐야 할 것이다……. 아,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요, 봉전(封典)은 복의 근원이므로 옥송(獄訟)과 구가(謳歌)232)  가 의당 익대(翊戴)233)  의 소원과 같을 것이니, 천지의 귀신이 거의 태평의 시기를 돌이켜 오게 되리라."
하였는데, 이것은 이식이 지은 글이다.

 

세자가 백관과 함께 시민당(時敏堂)에서 상견례를 하였는데, 사부와 빈객 및 2품 관원들은 모두 당상에서 재배하고 세자가 답배하였으며, 3품관 이하는 정중(庭中)에서 행례하였다.

 

세자가 양전(兩殿)께 전(箋)을 올려 책봉에 대해 사은하였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서연(書筵)에서 이미 《대학(大學)》을 진강하고 있으니, 조강·주강 이외에 의당 겸강(兼講)할 글이 있어야 합니다. 사부와 빈객은 《대학연의(大學衍義)》가 가장 적절하다고 하니, 이것으로 겸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그러나 또 《혹문(或問)》이 아니면 글뜻을 강구(講究)하여 정미한 데까지 다할 수 없으니, 《대학혹문》도 함께 참고할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세자가 서연에서 변론하고 질문하는 것이 매우 자상하였고, 글 뜻을 보고 이해하는 것이 왕왕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어 강관(講官)들이 자주 대답을 하지 못했다.

 

9월 30일 무인

비국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 진휼할 때를 당해서 아직 허통(許通)되지 않은 서얼(庶孽)들에게 자원에 따라 쌀을 납부하고 첩문(帖文)을 받게 해야 합니다. 옛 관례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천첩(賤妾)의 자식에게는 12석을, 양첩(良妾)의 자식에게는 10석을 받고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같이 큰 흉년을 당해서는 자원하는 자가 의당 적을 것이니, 그 원수(元數)에서 각각 3석씩을 감해 주고 면포로 대납하는 자의 경우는 면포 6필을 쌀 1석에 준하여 수납하되, 후일에 이것을 관례로 삼지는 말도록 하며, 또 보충대(補充隊)가 납부하는 면포도 진휼청으로 하여금 이를 거두어들여서 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용도에 보충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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