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8권, 인조 25년 1647년 3월

싸라리리 2026. 1. 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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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임인

비국이 아뢰기를,
"대군이 사행(使行)하는 일은 상의 하명을 기다려야 됩니다만, 미리 결정해 놓아야 행장을 꾸릴 수가 있겠기에 이를 품의합니다."
하니, 대군을 보내라고 답하였다.

 

3월 2일 계묘

예조가 아뢰기를,
"정 칙사의 말이 모든 사은하는 사행(使行)에는 섭정왕(攝政王)에게 예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니, 을유년005)   윤6월 조제(吊祭) 뒤 사례한 예물 단자의 예를 항식(恒式)으로 정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정 칙사가 말하기를 ‘중강(中江)에서 교역하는 물화는 면포·마포·소금·우마·농기구 등에 불과하니 양서(兩西)의 상인들만으로도 교역이 가능하다. 봄철에 교역하는 물화인 종이·남초(南草) 등은 향신(餉臣)들로 하여금 넉넉히 준비하게 했다고 하니, 한성부와 개성부의 상인들을 꼭 보낼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말을 매입하는 일은 말을 잘 해 사절하여 폐단을 막으라."
하였다.

 

3월 3일 갑진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를 사은사로,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를 부사로 삼았다. 이만(李曼)을 평안 감사로, 소동도(蘇東道)를 은산 부사(殷山府使)로, 맹원빈(孟元賓)을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삼았다. 평안 감사 및 두 고을 수령들은 모두 정명수(鄭命壽)의 말로 인하여 체직되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으로 대신한 것이다. 조경(趙絅)을 도승지로, 정유(鄭攸)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4일 을사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고 사치가 만연하여 사대부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혼인 때는 다투어 음식과 의복에 사치를 부립니다. 신부가 시부모를 뵐 때에도 본디 일정한 법식이 있는데, 찬품(饌品)의 가짓수를 풍성하게 하기만을 힘쓰니, 그 비용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으로 하여금 일체 금지시키고 만약 전일의 습속을 되풀이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정 칙사가 신 정태화에게 말하기를 ‘호조 판서를 사은사의 부사로 삼았다고 하는데, 본국의 일처리는 어찌 그리 앞 일을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가. 부사는 애당초 약조 내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니 이왕 대군이 간다면 부사가 없더라도 괜찮고 굳이 보내려면 참판이나 승지라도 안 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세폐미(歲幣米)를 봉황성(鳳凰城)에 납부하는 문제는, 이것이 아무리 선황제가 결정한 일이라 하더라도 지금은 북경(北京)으로 옮겨 갔으니, 사세가 지난날과는 다르다. 만약 일에 능한 역관을 뽑아 이 일을 전담하여 품의하게 한다면 허락을 얻을 가망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구매하는 일이 쉽지 않은 사유를 말하자니 ‘형편이 이와 같다면 꼭 그렇게 할 것은 없다. 우리들이 돌아가 마땅히 이러한 사실을 섭정왕에게 고하겠다.’라고 정 칙사가 말하고, 또 ‘우리들이 올 때에 섭정왕이 분부하기를 「세자나 대군이 모두 핑계를 대고 오지 않거든 너희들은 속히 말을 달려 되돌아 오고, 만약 들어 온다고 하거든 너희들은 그들이 도강하기를 기다렸다가 호송하여 오라.」 하였다. 우리들은 의주에 머물면서 대군 일행을 기다렸다가 함께 도강해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대군의 행차는 다른 사신과는 같지 않으므로 기일에 맞춰 뒤쫓아 도착할 수가 없다. 이 일은 결단코 할 수 없다.’ 하니, 정이 말하기를 ‘그러면, 상께서 추후에 들여보내겠다고 하교한다면 우리들은 이것으로 들어가 보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사은 부사는 이미 교체하였으니 해조로 하여금 종2품 당상관 중에서 엄선하여 차출하도록 하소서. 세폐미를 봉황성에 수송하는 일은 그의 말에 따라 역관을 뽑아 보내 잘 주선하도록 하고, 대군의 사행은 저들이 독촉하는 말을 하지 않은 바에야 날짜를 정하여 늦추어 보내겠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참판 박서(朴遾)를 사은 부사로, 한필원(韓必遠)을 도승지로, 양만용(梁曼容)을 집의로, 엄정구(嚴鼎耉)를 교리로, 목겸선(睦兼善)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6일 정미

진휼청이 아뢰기를,
"본청에 쌓여 있는 남은 미곡 가운데 쌀 8백여 석, 조(租) 7백여 석은 해를 넘기게 되면 썩을 염려가 있습니다. 근일 춘궁이 한창 심하고 또 칙사가 온 때라 외방 사람들이 많이 서울에 모였으므로 쌀값이 등귀하여 굶주릴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이 미곡을 옛날 상평창(常平倉)의 규례에 따라 값을 올려 포(布)와 바꾸어, 한편으로는 서울과 지방민의 위급한 식량 부족에 기여하고 한편으로는 본청 곡식을 개색(改色)하여 원수(元數)를 보존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겉곡식[租]은 경성 10리 이내의 농민 중 원하는 자들에게 방출하여 종자나 식용의 밑천으로 삼게 했다가 가을에 거두어 흉년에 대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접 도감이 아뢰기를,
"정 칙사가 말하기를 ‘섭정왕이 세폐 문제를 이미 조사하라고 했으니, 무슨 율(律)로 해관(該官)의 하리(下吏)를 논죄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회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전후의 판서들은 모두 조사를 받았고, 담당 낭관은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기로 했는데 아직 조율하지 않았으며, 담당 하리들은 가두어 두고 기다리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이 ‘우리들이 보고해서 선처하도록 하겠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의주 사람 한덕련(韓德連)은 전부터 은혜를 입은 자인데 그를 대길호리(大吉號里)의 권관(權管)으로 삼았으면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3월 10일 신해

간원이 아뢰기를,
"평안도 군병의 숫자에 대해 병조에는 병신년의 통융안(通融案)만 있고 감영에는 애초부터 만들어진 명부가 없었으며, 병사(兵使) 혼자서 마치 수하에 부리는 사병처럼 오로지 관장하니, 막중한 군정을 어찌 이같이 소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기묘년에는 임경업(林慶業)이 병사로 있을 때 방수를 파한 일로 인하여 도내의 각종 군사 수만 명에게 모두 1인당 3필씩의 포를 거두었는데, 도망하거나 죽은 자를 따지지 않고 해마다 독촉하여 징수하였습니다. 1년에 징수하는 수량만 계산해도 무려 1천여 동(同)이나 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몰랐고, 도신(道臣)은 그 출납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병영(兵營) 전속의 수포(收布)와는 종류가 다르니, 도신으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아뢰게 하소서. 그리고 각종 군사의 숫자는 다른 도처럼 군적(軍籍)을 작성하여 해조로 보내게 한 뒤 도신으로 하여금 징수한 포를 관장하게 하여 공용(公用)에 보태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서로(西路) 군사와 백성들은 곤궁함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전처럼 징수를 독촉하면 반드시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니, 역시 헤아려서 적절하게 감액하여 징수하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실제 혜택을 준다는 것을 보이시고, 분명히 도망갔거나 죽은 자는 일체 탕척(蕩滌)하여 이웃이나 친족에게 떠넘기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였다.

 

3월 14일 을묘

헌부가 아뢰기를,
"강원 감사 유항잠(柳恒潛)이 가족들을 원주(原州)에 모아놓고 그곳에서 그냥 신혼례를 거행했으며, 또 개인용 제수(祭需)를 여러 고을에 분정(分定)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무리한 일이니, 파직하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3월 15일 병진

호조가 아뢰기를,
"이번 칙사 행차 때 은(銀) 값으로 쳐서 발매한 미포(米布)의 수가 평소 가격의 십분의 일에도 차지 않으므로 시중 백성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는데 진실로 불쌍합니다. 각사(各司)에 있는 쌀이나 베로 그 값을 보충해 주소서."
하니, 상이 쌀과 베를 헤아려 지급하게 하였는데, 공조는 베 50동(同), 선공감(繕工監) 3동, 사복시 10동, 비변사 40동, 병조 10동, 호조 대두 1천 석, 훈련 도감 은자(銀子) 1백 냥, 진휼청 쌀과 콩 3백 석이었다.

 

3월 17일 무오

하교하기를,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에 있는 병자의 수를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돌림병이 크게 성하여 활인서에 있는 병자의 숫자가 항상 수백 인을 밑돌지 않았다.

 

3월 18일 기미

사옹원이 아뢰기를,
"칙사 일행이 왔을 때 술맛이 좋지 않았으므로 본원에서 주방 서원(酒房書員)을 벌주자고 청하여 결장(決杖)으로 조율(照律)했으며, 또 강원도에서 진상한 송어(松魚)가 전부 부패하였으므로 본원에서 수송 책임자를 벌주도록 청하여 역시 결장으로 조율했는데, 해조에서는 즉시 죄를 주지 않고 모두 속(贖)을 징수하고 석방했습니다. 계하하신 일이 매양 이렇게 중단되고 만다면 앞으로 해당 관원들의 태만한 습관과 어선(御膳)을 부패하게 하는 폐단이 끝내 징계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방의 서원 및 수송 책임자를 유사에게 다시 명하여 전에 조율한 대로 그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해당 당상과 낭청을 모두 잡아다 추문하라."
하니, 형조 참판 이시방, 참의 이민수(李敏樹), 정랑 한필구(韓必久), 좌랑 박수소(朴守素) 등을 모두 대질 심문하였다. 상이 이시방만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조경을 대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을 동부승지로, 오정일(吳挺一)을 응교로, 민광훈(閔光勳)을 교리로, 조빈(趙贇)을 수찬으로, 남중회(南重晦)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19일 경신

평안 병사 정익(鄭榏)이 치계하기를,
"본도 여러 진(鎭)과 보(堡)에 난리를 지낸 뒤 거두어 저장해 놓았던 군기(軍器)들이 심하게 파손되어 때맞추어 보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러 진과 보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로량(吾老梁)·미곶(彌串)·선사포(宣沙浦)·대파아(大坡兒)·만포(滿浦)·상토(上土)·창주(昌洲)·등공구비(登公仇非)·광평(廣坪)·이동(梨洞)·종포(從浦)·대길호리(大吉號里)·건자포(乾者浦)·추파(楸坡)의 변장들이 모두, 정성을 기울여 보수하고 싶으나 가난한 소수의 군사들로는 조처할 길이 전혀 없다고 하였습니다. 파손된 군기의 숫자에 따라 본영에 비축한 포를 적당히 나누어 주어 보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0일 신유

정언 임중(任重)이 인피하기를,
"신이 일찍이 감기가 들었는데 증세가 악화되어 여러 차례 사직 단자를 올렸으나 시종 물리침을 당했습니다. 또 본원의 계사는 모두 신이 사직서를 올린 뒤에 있었으므로 논계한 일 중에는 신이 알지 못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병으로 사직을 청한 사람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을 따라 구차하게 의견을 함께하여 억지로 와서 연계(連啓)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아뢰는 대열에서 빠졌으니 태만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대간에게 곤란한 일이 있을 경우 사직 단자를 올리거나 소장(疏章)으로 뜻을 진달하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고의로 궐계(闕啓)하여 감히 부정한 계책을 쓴단 말인가. 대체로 궐계한 실수는 중대한 일이 아니니, 지금부터는 궐계를 이유로 체직을 청하지는 말라고 간원에 말하라."
하였다. 공산 현감(公山縣監) 박안제(朴安悌)가 술에 빠져 공무를 폐한 일로 간원이 논계하게 되었는데, 임중은 안제와 친밀했던 관계로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하여 논계하는 대열에서 빠지고는 다른 말을 꾸며대며 피혐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명이 있었다.

 

3월 22일 계해

심액을 대사헌으로, 유철을 대사간으로, 민광훈(閔光勳)을 사간으로, 이성항(李性恒)을 지평으로, 조경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이조가 처음에 김육(金堉)·민성휘(閔聖徽)·정세규(鄭世規)로 의망했는데, 상이 종2품 중에서 가려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이조가 또 여이징(呂爾徵)·김남중(金南重)·이후원(李厚源)을 의망해 올리니, 더 의망하라고 또 명하였다. 이에 윤순지(尹順之)·조경을 의망하여 올리니, 상이 마침내 조경을 제수하였다.

 

종루(鍾樓)의 종이 저절로 울려 시장 사람들이 담을 치듯 모여서 구경하였다.

 

3월 24일 을축

형조에 있는 연못 물이 핏빛과 같이 붉었다.

 

경상도에 가뭄이 들었다.

 

3월 25일 병인

동래 부사(東萊府使) 민응협(閔應協)이 치계하였다.
"등지승(藤智繩)의 말이 ‘대군(大君)006)  이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이곳에서는 남경(南京)과 북경의 소식이 연속해서 들리는데, 도주는 조선과 우의가 두터우면서 한번의 통보도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그러므로 도주가 강호(江戶)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전까지 상세히 전해 주어야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표류민의 일로 말할 것 같으면 청국에서는 조선으로 보내고, 조선에서는 우리 나라에 전송(轉送)했는데, 이것은 조선이 청국과 서로 좋게 지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대명(大明) 때에는 조선이 명의 번방(藩邦)이었는데 지금 귀국이 청국에 대해서 역시 그러한가? 평성행(平成幸)이 지금 이 일 때문에 나오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난리 전에는 해조의 세입이 지금보다 조금 넉넉했고 국가 용도도 근년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오히려 경비의 부족을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신구(新舊) 공신으로 군호(君號)를 승습(承襲)한 사람 중에는 품계에 따라 녹을 받는 자도 있고 충훈부에서 별도로 군직(軍職)을 설치하여 부록(付祿)한 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입이 점차 감소되었는데 군호를 승습하여 녹을 받는 자가 17원(員)에 이릅니다. 충훈부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해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6일 정묘

비국이 아뢰기를,
"칙사가 관에 머물고 있을 때 일본의 사정을 들으려고 했는데, 그들이 국경에 있을 때 마침 등왜(藤倭)가 왔으니, 형세상 반드시 소문을 나름대로 들어서 알 것입니다. 접반사로 하여금 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문학 곽지흠(郭之欽)을 왜차(倭差)의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3월 27일 무진

수어사(守禦使) 이시방이, 광주 부윤(廣州府尹) 조흡(趙潝)이 술에 빠져 공무를 폐한 실상을 진계(陳啓)하니,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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