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신유
대사헌 조경이 식년 회시의 고관으로서 책문(策問)의 출제를 《춘추》에서 냈는데, 당시의 시사가 많이 언급되었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출제가 합당한가? 승지는 살펴서 아뢰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무릇 시취할 때 성경 현전 가운데의 문자로 출제하는 것이 본디 장옥(場屋)의 예사입니다만, 이 출제의 ‘방금(方今)’이라고 한 이하의 조어(措語)는 과연 살피지 않은 것인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해당 시관을 추고하라."
하였다.
11월 2일 임술
식년 전시(式年殿試)에서 문과에 조정(曺烶) 등 33인과 무과에 유성길(劉成吉) 등 28인을 뽑았다.
11월 3일 계해
대사헌 조경이 아뢰기를,
"시원(試院)에서 출제함에 있어 《춘추》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살피지 않고 경솔하게 두찬했습니다. 이미 추감(推勘)을 받았으니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이미 추감을 받았으니 사세상 직에 있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체차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11월 4일 갑자
번개가 쳤다.
심지한(沈之漢)을 헌납으로,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이조가 아뢰기를,
"수령을 천망(薦望)하는 법식을 정할 적에 당상관과 시종을 역임했던 사람은 이 한계에 들지 않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시종신도 모두 천망하고 있어 정해진 법식에 어긋나는데, 그 천장(薦狀)에는 단지 ‘일찍이 시종을 역임했다.[曾經侍從]’는 네 글자만 현록(懸錄)해 놓고, 이 밖에 천망한 사람의 이름이 없습니다. 본조의 당상 1 인이 혼자서 천망한 경우에는 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여러 당상이 천망한 경우에는 ‘본조천(本曹薦)’이라고 기록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6일 병인
비국이 아뢰기를,
"형장(刑杖)을 사용하는 데에는 각기 제도가 있고 신장(訊杖)의 경중에도 정해진 법식이 있으며, 태장(笞杖)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도 모두 대소의 구별이 있으니, 관리가 된 사람은 이를 준수하여 감히 어기지 않아야 합니다. 만일 법제를 어겨 인명을 손상케 한다면 반드시 먼저 하옥하여 무거운 율로 다스리게 했습니다. 조종조의 법이 이와 같이 엄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변란을 겪는 가운데 이 법이 실추되어 문란해진 탓으로 관위(官威)를 지닌 사람이 감히 형장을 가지고 노여움을 푸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먼 변방 고을에 이런 습관이 더욱 심하니 죄없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모든 태장의 형벌을 쓸 적에는 각기 법식을 따르게 하여 지나친 일이 없게 하고 군율이 아니면 절대로 곤장을 쓰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군민(軍民) 가운데 의지가지없는 노약자로서 늙고 병들고 춥고 배고픈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보살피게 하소서. 각읍과 각진에서 조정의 명을 어기고 삼가해서 봉행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계문하게 하여 죄를 매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뜻으로 팔도에 알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7일 정묘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를 정지하였다.
세자가 경덕궁(慶德宮)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중전의 탄일도 이날이었다.
11월 8일 무진
동지(冬至)의 진하를 정지하였다.
11월 9일 기사
시강원 찬선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사면을 청하니, 상이 부드러운 말로 효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0일 경오
유성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 북두성 위로 들어갔다.
11월 11일 신미
유성이 대각성(大角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홍우정(洪宇定)은 학문에는 전혀 깜깜하고 행동이 궤이할 뿐이니 호협객(豪俠客)이라고 하면 혹 가하겠습니다만 선비라고 하는 것은 걸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흘 사이에 낭서(郞署)로 초천(超薦)시키고 이어 큰 고을에 제수했으므로 제목(除目)이 한번 내려지자 물정이 모두들 놀라고 있습니다. 전에 공조 좌랑으로 승진시킨 것과 새로 태인 현감(泰仁縣監)에 제수한 것을 아울러 개정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내관 4인이 며칠 밤을 계속하여 도성 안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포도 군사(捕盜軍士)를 보지 못했고 단지 한 곳에서만 보았다고 했다. 요즈음 순라를 돌지 않고 있는가?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즉시 좌·우포도청의 종사관을 불러다가 물어보니, 말하기를 ‘부장들이 작은 길과 작은 골목을 두루 돌아다니기 때문에 내관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포도청을 설치한 것은 밤중의 일에 대비하고 간사한 짓을 살피기 위한 것입니다. 요즈음 포도 대장이 직무를 포기한 채 야금(夜禁)을 엄하게 하지 않은 탓으로 적간 내관이 연일 밤 왕래하였어도 순라를 도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평상시 신칙시키지 않은 정상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너무도 경악스러운 일이니, 좌·우포도 대장과 종사관은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13일 계유
김시국(金蓍國)을 도승지로, 임전(林)을 사간으로 삼았다.
함경도에 교양관(敎養官) 5인을 설치했는데, 그 도의 문관인 진상립(陳尙立) 등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김세렴(金世濂)이 감사로 있을 적에 계청하여 설치했었으나 얼마 안 되어 폐지되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감사 이후원(李厚源)이 다시 설치하기를 청하자, 윤허한 것이다.
11월 14일 갑술
화성(火星)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제이성(第二星)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16일 병자
상이 하교하기를,
"내일이 숭선군(崇善君)의 납채일(納采日)이다. 밖에 선온할 때 내자시의 관원이 나아간다고 하는데, 승지가 나아가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해조에 문의하여 보니 승지는 나아간 전례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재상의 집에 선온하는 일이 있으면 승지가 나아가니, 이것으로 헤아려 본다면 소사(小司)의 말단 관리가 선온례를 행하는 것은 필시 광해군 때 간략하고 태만히 한 일이 그대로 법규가 된 것이다."
하였다. 정원이 또 아뢰기를,
"대신의 집에 궤장(几杖)과 선온을 내릴 적에는 승지가 나아간 전례가 있습니다만, 가례(嘉禮)·길례(吉禮)·납채 때의 선온에는 승지가 나아간 전례가 실로 없다고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군과 왕자가 대신만 못하다는 말인가? 그대들이 의혹스럽게 여긴다면 예관으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릇 선온할 적에는 승지가 으레 나아가는데 유독 왕자군의 길례에 선온할 적에만 소사(小司)의 말단 관리가 행례하는 것은 실로 간략하고 태만히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광해 때 잘못된 법규일 뿐만이 아니라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도 길례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모두 전례에 의하여 행해 왔습니다. 따라서 지금 변통시키는 것은 신규에 관계되는 것 같으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영원한 법으로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중대한 일이 아닌데도 독단하지 못한다면 장차 예관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러나 아뢴 대로 하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미 선온한다고 했으면 말단 관리를 시켜 행례하게 하는 것이 과연 간략하고 태만한 것인 듯합니다만, 예의 뜻은 오로지 혐의를 구별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왕자의 길례가 중하기는 하지만 이미 위에서 주관하는 혼례가 아니니, 전일 승지가 나아가지 않은 것은 어찌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널리 전례를 찾아보고 힘써 예법에 알맞게 하는 것은 오직 유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니, 【 영의정 김자점은 병 때문에 헌의하지 않았고 영돈녕 김상헌은 외방에 있었다.】 답하기를,
"지금 이 선온은 주혼(主婚) 이하 여러 관원들을 위한 것이요, 신랑을 위한 것이 아니다. 수의한 내용에 혐의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의 말에 대해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마도 살피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어제 이 예는 응당 행해야 할 잗단 일로 여겨 경솔히 하교했었는데, 오늘 재신(宰臣) 이하의 의견을 살펴보니, 이것이 큰일인 것 같다. 오늘의 선온은 행하지 말게 하여 승지가 왕래하는 노고를 덜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하신 것을 살펴보건대 말뜻이 엄준하여 응당 행해야 할 선온도 정지하게 하였으니, 신들은 너무도 황공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군이 출합(出閤)하는 것이 1백 40년 전에 있었는데 오늘날의 해리(該吏)가 어떻게 접대하는 예법을 알 수 있겠는가. 어제 그대들이 전례를 상고하여 굳게 고집한 것은 한번의 웃음거리도 못 된다."
하였다. 경석도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감히 잘못된 견해로 두찬(杜撰)하여 망령되이 진달했습니다. 삼가 하교를 살펴보건대 황공스러움을 금치 못해 대죄합니다."
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1월 17일 정축
왕세자가 경덕궁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11월 19일 기묘
송국택(宋國澤)을 우승지로, 이무(李袤)를 지평으로, 유철(兪㯙)을 대사간으로, 홍명하(洪命夏)를 교리로, 김중일(金重鎰)을 수찬으로 삼았다.
전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래(李䅘)를 금부에 내렸다. 남한 산성의 군량에 포흠(逋欠)된 것이 3만여 석이었는데,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부윤 이래로 하여금 독징(督徵)하도록 계청하자 이래가 어버이의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비국이 조정의 명을 어기고 멋대로 관소를 떠났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른 것이다. 인하여 금부에 하교하기를,
"관곡을 모두 징수한 뒤에 의논하여 처치해서 모피(謀避)하려는 습관을 근절시키라."
하였다.
11월 20일 경진
헌부가 아뢰기를,
"수령이 하직할 적에 두루 양사를 찾아보는 것은 본디부터의 구규인데 금화 현감(金化縣監) 장선징(張善澂)은 전혀 하직을 하지 않은 채 갑자기 사조(辭朝)하였으니, 이는 실로 근일의 간략히 하고 태만하게 하는 습성인 것입니다. 선징의 입장에서는 더욱 이렇게 해서는 안 되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1일 신사
예조 판서 심액(沈詻)이 소장을 올리기를,
"가례의 납채 때 선온하는 일은 이미 결정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니, 즉시 봉행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견해로는, 전의 법규를 고치는 것은 해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반드시 서로 의논하여 결정해서 영원한 항식(恒式)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경솔히 복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엄한 전지가 내렸고 이어 전부터 행하여 오던 중한 예법을 폐기하고 행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의 식견이 분명하지 못하고 처사가 소루했던 소치인 것입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2일 임오
유성이 익성(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11월 24일 갑신
윤득열(尹得說)을 우승지로, 이정기(李廷夔)를 정언으로, 김중일(金重鎰)을 부교리로, 정유(鄭攸)를 수찬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25일 을유
간원이 아뢰기를,
"명관(名官)의 거취는 서료(庶僚)와 다른 것입니다. 지난번 보덕 양만용(梁曼容)이 말미를 받아 하향할 적에 양전(兩殿)의 탄일이 단지 하룻밤을 격해 있었는데도 지레 먼저 사조(辭朝)했으니, 이미 너무 무례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사조하고 나서 3일을 유숙한 뒤에 도성을 떠났으니, 추고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6일 병술
달이 방상성(房上星)을 범하였다.
대사헌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은 10년 동안 시골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문견이 고루하여 조정의 득실과 중외 제신들의 선악에 대해 전혀 잘 살펴 알 수가 없으며, 비록 듣고 본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용이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한 가지 일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스스로를 어질고 슬기롭게 여기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신하들을 너무 하찮게 여기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생각을 발하시는 것을 살펴보면 버티는 것이 너무 견고하시어 끝내 고치지 않으시고, 신하들이 말한 것이 성상의 생각과 다르면 그때마다 배척하시며 간혹 견책이 뒤따르기도 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어질고 훌륭하게 여기는 것이 너무 지나치고 신하들을 하찮게 여기고 계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지난번 간원의 차자에 언급된 것은 진실로 상세히 살피는 데 실수가 있었으니, 고치라고 한 성상의 전교는 실로 지난날의 슬픈 일을 생각하는 지극한 정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헌부가 아뢴 것은 헤아린 것이 부족한 것인데, 이를 이유로 죄를 주는 것은 성인이 널리 포용하는 도량에 손상이 있는 것인가 생각됩니다.
또 삼가 어제 길례 때 선온하는 일로 정원과 예관의 여러 신하들에게 내리신 하교를 보건대, 신은 몹시 의혹스럽습니다. 국가의 대소 절목(節目)은 모두가 전의 법규가 있는 것이므로 벼슬에 당한 사람은 구례를 지키는 것이 바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규례를 방치하고 생각나는 대로 따른다면 모든 일이 문란해질 것인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자신의 직분을 지키는 것이라면 임금의 명이 있다고 해도 감히 봉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하의 바른 도리인 것입니다. 지금 길례의 선온에 승지가 나아가는 것은 실로 그런 전례가 없었습니다. 정원·예관·대신이 전례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 신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성상의 전교에 꺾어 누른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신은 삼가 온당치 못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전일 대군의 길례 때에 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하려고 하시니, 또한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공평한 마음으로 살피신다면 신하들이 대답한 데 대한 시비와 전하께서 조처하신 것에 대한 득실이 모두 절로 환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재상은 당연히 임금과 서로 가부를 따져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여러 신하들을 꺾어 누른 것이 이미 온당치 못한 일인데, 대신이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지 않고 갑자기 허물을 인책한 것 또한 임금께 선을 권장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신은 유독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전부터 진언하는 사람들이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살펴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항상 혈성을 다 아뢰어 성찰하시기를 바랐는데, 마침 근일 이 일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울러 언급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은 모두 알았다.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에서 진달한 내용은 모두가 격언이니,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1월 27일 정해
한흥일(韓興一)을 예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간으로, 이지항(李之恒)을 우부승지로, 유경창(柳慶昌)을 집의로 삼았다.
11월 30일 경인
강원도 관찰사 유석(柳碩)에게 명하여 황지(黃池)로 들어가서 선조(先祖)의 능묘(陵墓)를 찾게 하였다.
당초에 풍기군(豊基郡) 사람인 전 사과(司果) 진벽(秦闢)·서태일(徐泰一) 등이 소장을 올려, 선조(先祖)의 수릉묘(壽陵墓)가 【 곧 목조(穆祖) 황고(皇考)의 능이다.】 삼척부(三陟府) 황지의 노동(蘆洞)에 있는데 찾아낼 수 있으며, 삼척·정선(旌善)·봉화(奉化) 사람 가운데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그 소장을 예조에 내렸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선조의 능침이 삼척에 있다는 말은 조종조 때부터 있어 왔습니다만, 지금은 그 곳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경진년032) 에 박지영(朴之榮)의 꿈에 감지되었다는 글을 인하여 대신에게 수의하게도 하고 빈청에서 회의하게도 했었는데, 막중한 능묘에 대한 일을 심상하게 처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진벽 등의 상소 내용에는 인용하여 증거로 댄 사람이 많으니 박지영의 허탄한 말과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국이 진벽 등과 증인들을 보내어 지시(指示)하여 가려 내게 하고 경상 감사에게 함께 보내어 경상 감사로 하여금 구문(究問)하여 사실을 알아내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마침 진벽 등이 증거로 댄 삼척의 백성 김태운(金太雲)이란 자가 서울에 왔었기 때문에 형조에 내려 안문(按問)하게 하였다. 그의 공사(供辭)에,
"저는 본디 정선군 백성이었는데 지금은 삼척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사하기 전에 황장목(黃腸木)을 베는 일로 삼척의 황대동(黃岱洞)으로 들어갔었는데, 황지(黃池) 아래에 있는 장생리(長牲里)에 사는 백성인 김천국(金天國)과 그의 아우 천복(天福)도 역부(役夫)로서 함께 노동(蘆洞)에 왔었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고분(古墳)을 가리키면서 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부터 전하여 오던 능묘(陵墓)인데 표석(標石)이 없기 때문에 지금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이 살펴보니 그 능묘 곁에 큰 나무 7, 8그루가 있고 잡목도 무성하였으며 15리 안에는 다른 고분이 없었습니다. 황대(黃岱)의 노동 이외에 또 동산이(東山伊) 노동이 있는데 거리가 90리는 됩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곳 노동에도 능묘가 있다고 하는데 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이 일을 비국에 내리니, 비국이 복계하기를,
"태운(太雲)의 공사에서 이른바 황지의 노동에 능묘가 있다는 말은 진벽 등이 들은 것과 서로 부합되니, 말을 주어 강원도로 내려보내어 그 곳 감사로 하여금 김천국 형제를 데려다가 한 곳에서 빙문(憑問)하게 한다면 증험이 될 단서를 더 찾아낼 길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목조(穆祖) 황고(皇考)의 능묘가 본부(本府)의 서쪽 노동에 있고 황비(皇妣)의 능묘는 본부의 서쪽 동산(東山)에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태운이 이른바 ‘동산이의 노동(蘆洞)에 능묘가 있다.’고 한 것은 전부터 말해 오던 지역인 것 같으니, 또한 감사로 하여금 고로들에게 물어 사실을 알아내어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 진벽 등이 증거로 댄 사람들을 모두 풍기군(豊基郡)으로 나오게 하여 본도의 감사가 안문(按問)하였다. 안막성(安莫成)이 공사(供辭)하기를,
"신은 대대로 정선에 살다가 을유년033) 에 비로소 삼척의 황지 위에 있는 장생리로 이사하였습니다. 지난해 3월에 진벽이 종자 두 사람을 데리고 집에 와서 유숙했는데, 다음날 저의 아들인 안대로(安大老)와 함께 산중으로 들어갔다가 밤을 지내고서 돌아왔습니다.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진벽이 말하기를 ‘능묘를 찾기 위해서이다.’ 했는데, 말하는 사이에 저의 처형(妻兄)인 논개(論介)가 말하기를 ‘내 나이 16, 17세 때 아버지 안막정(安莫丁)과 할아버지 안순만(安順萬)을 따라서 산에 들어가 산삼(山蔘)을 캤는데, 황지의 오택(汚澤)에서 서북쪽으로 가다가 산허리에 이르렀다. 그런데 같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어떤 고분(古墳) 위를 큰 나무 다섯 그루를 베어 덮고 있었다. 돌아와서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할아버지가 그것이 실상은 국가의 능묘라고 했다.’ 했습니다만,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논개는 공사하기를,
"제가 어렸을 적에 과연 나무를 베어 분묘를 덮은 곳을 보았습니다. 그 곳은 사면이 평탄한 곳이어서 곡식 종자를 1두(斗) 정도 뿌릴 수 있었습니다. 북쪽에는 함박산(咸朴山)이 있고 동남쪽에는 연화봉(蓮花峯)을 대하고 있으며, 북쪽을 따라 조금 멀리 가면 절이 있는데 본적사(本寂寺)라고 하며 능묘와의 거리는 3, 4장도 못 됩니다. 말[斗]만한 연석(鍊石) 한 덩어리가 있었는데 땅속에서 조금 드러나 있었으며, 아래로 1리쯤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답하기를 ‘여자가 알 일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다시 물으니, 말하기를 ‘이것은 국왕의 선조 능묘이기 때문에 국릉(國陵)이라고 한다. 국가에서 만일 찾게 되면 이곳 백성들은 편안히 살 수가 없으니 부디 입 밖에 내지 말라.’ 했습니다. 어렸을 때 본 곳이라서 지금은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고, 노(奴) 공건(公巾)은 공사하기를,
"능묘가 본적동(本寂洞) 절 위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는 말입니다만 눈으로 본 적은 없습니다. 본적(本寂)은 북쪽으로 함박산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함박산은 대박산(大朴山)이라고도 합니다. 본적의 서북쪽 산허리에 조금 평평한 곳이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곳입니다만, 수목이 울창하게 하늘을 가리어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삼척부 아전의 집에 옛날에 전후 심문(尋問)했던 때 감사(監司)가 올린 계초(啓草)를 등사해 놓은 책이 있습니다."
하고, 이어 가져다가 바쳤다. 감사 이만(李曼)이 치계하여 아뢰니, 비국이 다시 공건과 논개를 힐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강원 감사로 하여금 안막성 등을 인솔하고 황지(黃池)로 달려가서 원근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기어이 능묘와 연석의 형체를 찾게 한 연후에 봉심사(奉審使)를 파견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백관의 녹봉을 더 마련하여 반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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