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10월

싸라리리 2026. 1. 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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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임진

원손이 병이 있었으므로 예조로 하여금 책봉하는 날짜를 조금 물리게 하였다.

 

고 참판 이명준(李命俊)에게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온양 군수(溫陽郡守) 조극선(趙克善)이 소장을 올리기를,
"이명준이 일생을 청백하게 보냈다는 것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 바이니, 포장(褒奬)하는 은전이 있어야 합니다."
했는데, 이 일을 이조에 내렸다. 이조에서 증직하고 그의 자손을 녹용할 것을 청하니, 따른 것이다.

 

강서원이 아뢰기를,
"본원과 위종사(衛從司)는 새로 설치하는 관사이니, 그에 대한 절목과 처소를 예조로 하여금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강서원의 관원은 세손의 모든 말과 문서를 출납할 적에는 백(白)자를 쓰고 그 인신(印信)은 공조로 하여금 주조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록에서 상고하여 보건대, 강서원과 위종사를 모두 겸관(兼官)으로 차임하여 실관(實官)이 없으니, 그 당시 개국(開局)과 입직하는 일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전거할 만한 데가 없으니 수시로 참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서원과 위종사는 창경궁(昌慶宮)에 설치하소서. 그리고 병조에서 각각 1원씩을 윤차(輪次)로 입직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위종사는 입직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10월 2일 계사

밤에 동방에 용과 뱀같은 붉은 운기가 있었다.

 

10월 3일 갑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간원의 차자 내용에 조어가 적당치 않았으니 성상의 전교에 삭제하게 한 것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고쳐 써서 다시 들여오라는 전교가 없었습니다. 그 차자의 내용에는 절실한 말이 많이 있었으니 도로 들여오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어준 이유는 온당치 못한 말을 삭제하게 한 것인데, 대간들이 고쳐서 들여 오지 않으니, 그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자점과 좌의정 이경석이 합사(合辭)로 대답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합니다. 대간이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린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망발한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황공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린 것뿐이지 무슨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삭제한 다음 다시 들여오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고쳐서 들여 오게 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사치 풍조가 만연되어 세도가 크게 뒤바뀐 탓으로 천한 하인들도 온 몸을 비단으로 감싸고 있으니, 조정에 법도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궁중 안에 사치스런 풍습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모든 일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마련인 것이다. 이는 궐내에서 검소하게 하지 못한 소치인 것이다. 지난날 나만갑(羅萬甲)이 헌관으로 있을 적에는 백성이 법을 어기면 반드시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징계되어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정엽(鄭曄)·김상헌(金尙憲)이 헌장으로 있을 적에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었다. 근래의 헌관들은 풍력(風力)이 없는데다가 아침에 제수하면 저녁에 옮겨 간다. 이에 교화시킬 수 없는데다가 또 법으로 금하지도 않으니,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임금이 어두워 그런 것이다. 그러나 육경과 대간이 각자 자기의 직분을 잘 수행한다면 또한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심지원(沈之源)은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전에 호조 참의로 있을 적에 산원(算員)을 불러서 경비(經費)가 지출된 숫자를 계산하게 하려 하였으나 아랫사람들이 그가 강명한 것을 싫어하여 누차 불렀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그들의 죄를 다스리려 했었으나 이조로 이배(移拜)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뒤에 참의로 간 사람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었는가?"
하자, 두표가 아뢰기를,
"문서는 많은데다가 벼슬은 자주 체직되기 때문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청나라는 천하에 뜻을 두고 있으니 반드시 우리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관백(關白)이 3대를 승습해 와 편안함을 누리려는 데 뜻이 있으니, 어느 겨를에 군사를 동원하겠는가. 그러나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국경에 혹시라도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자점이 아뢰기를,
"상하가 더욱더 힘써 백성들을 보호한다면 국경에 일이 발생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긴급한 일이 발생하면 원수(元帥)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유장(儒將)의 천망(薦望)은 매우 어렵고 무변(武弁) 가운데에서도 쓸 만한 사람이 또한 부족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그 가운데서 쓸 만한 사람을 가려서 차례에 구애없이 발탁하여 기용하도록 하라."
하니, 이조 판서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수령의 천망에 오른 자도 이미 다하였는데, 문관 가운데 천망된 자가 없기 때문에 의망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3당상(堂上)이 서로 상의하여 천용(薦用)하라."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천안 군수(天安郡守) 박순의(朴純義)는 치적이 도내에서 최상이었습니다만, 승서하라는 명이 없기 때문에 초천(超遷)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초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매양 무인으로 차임하여 보내기 때문에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으니, 의당 문관을 기용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청렴한 사람을 가려서 기용하라."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관학(館學)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구례를 모방하여 사업(司業)을 두어 이끌어 가르치는 자리로 삼아야 합니다. 관서(關西)에 선우협(鮮于浹)이란 사람이 학문이 있어 사장(師長)의 직임을 맡길 만하니, 그를 사업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소학》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는데 변란을 겪은 이후 남아 있는 책이 매우 적으니, 개간(開刊)하여 반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그리고 《소학》에 이르기를 ‘자제(子弟)가 된 자는 의관을 순백색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 나라의 풍속은 흰옷 입는 것을 좋아한다. 근래 들리는 바에 의하면 사대부들이 또 백모 관(白毛冠)과 백모 모자(白毛帽子) 쓰기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흰옷을 입고 나서 또 백관과 백모를 쓴다면 상인(喪人)이 흰옷을 입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는 매우 불길한 징조이니 의당 금지시켜야 한다. 그리고 의주 부윤에게 일러서 이제부터 백모와 백관을 사오는 것을 일체 금단하게 하고 이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무겁게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경석이 각도의 감사에게 알려서 그들로 하여금 도내의 유생들에게 권과(勸課)하여 《소학》을 교습시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하유하게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 일이 잘 시행된다면 좋겠습니다만 끝내 겉치레가 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과 육경이 착실히 행한다면 어찌 행해지지 않겠는가. 경들이 면대해서는 이렇게 아뢰고 물러가서 행하지 않으면 어찌 되겠는가. 또 대관(大官)은 강령을 총람하고 소관(小官)은 직사를 극진히 수행해야 된다. 모든 공사의 서명을 그날 좌기한 관원이 하고 있는가? 지금부터 입계하는 공사는 좌기하여 참여한 자가 아니면 서명하지 말게 하여 그 근만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이시백이 도감(都監)의 포수들이 화약이 없는 탓으로 사사로이 익힐 수가 없으니 해서(海西)에서 거두어 들인 베 1백 동을 덜어내어 염초를 굽게 하고 또 갑주(甲胄)를 만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김류의 시장(諡狀)을 살펴보니 사실과 틀리는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자 진표(震標)가 장차 간행하려고 하니, 속히 고치게 해야 되겠습니다. 거기에 전하께서 즉위할 때의 일이 거론되었는데, 그 내용에 ‘광해(光海)를 즉시 폐하지 않자 공이 건의하기를 「세조(世祖)가 즉위하여 노산(魯山)을 폐하였고 중묘(中廟)가 즉위하여 연산(燕山)을 폐한 것은 모두가 종사를 위한 것입니다. 폐하지 않으면 어떻게 흥기시킬 수 있겠습니까. 조속히 결단을 내리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겸양하면서 허락하지 않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억지로 따랐다.’고 했고, 또 임술년028)   겨울에 양사에서 이귀(李貴)를 잡아오라고 청할 적에 시장에 기록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지려 했으나 공을 힘입어 진정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흩어지려고 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는데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있으니, 되겠는가. 이 한 조항은 삭제하게 하라."
하였다. 그 시장은 바로 이경석이 찬술한 것이었다. 경석이 아뢰기를,
"신은 곡절을 상세히 모르고 단지 그의 집에서 초안한 것에 의거하여 찬차(撰次)했는데 사실과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삭제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야 단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찬술했으니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시장에 사실과 틀리는 일이 많이 있는데도 이미 정부를 거쳐 입계되었기 때문에 그대로 계하한 것이었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거기에는 또 전하께서 누차 공(公)의 집으로 왕림했다는 말이 있는데, 신은 단지 한 번 왕림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누차라는 것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류의 집에 대해서 이 말을 제기할 필요는 없다. 제기하면 불편한 일이 많을 것이다."
하였다. 자점이 아뢰기를,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이 있을 적에 김류가 아뢰어 참수한 사람이 38인이었는데, 그 뒤 김류가 잘못 헤아려 처단했다는 것으로 대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시장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일은 실제로 심명세(沈命世)가 주장한 것이었다. 시장에 과연 사실과 틀리는 곳이 있고 훈신들의 의견도 이와 같으니,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4일 을미

유성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헌납 홍명하(洪命夏), 정언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삼가 고쳐 써서 다시 들여 오라는 하교를 받드니 성상께서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뜻이 말 밖에 넘쳐 흐릅니다. 따라서 신들이 저지른 잘못을 더욱 면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퇴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조광원(趙光瑗)이 왜인에게 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동래 부사(東萊府使) 민응협(閔應協)을 파직시키고 왜관(倭館)의 훈도(訓導)와 별차(別差) 등을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동부승지 이시만(李時萬)이 아뢰기를,
"민응협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깨끗하고 일을 조처하는 것이 강명한 사람이니, 경솔히 체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응협은 전부터 일을 조처하는 것이 허술하고 졸렬하여 담장을 물려 달라는 청을 엄히 배척하지 못했으니, 왜노가 행패를 부린 것이 필시 이 사람에게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전의 차자를 고쳐 써서 봉진했는데,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억조 창생 위에 군림하고 있는 바, 온 백성들의 부모인 것입니다. 부모가 진노하여 성색(聲色)이 이상해지면 아들로서는 당연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줄 것을 생각해야지, 그것을 가리켜 정성(情性)이 발현된 것이라 하여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천지의 기운이 비색(否塞)하여 재이가 잇따라 발생되면 임금으로서는 당연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화평해지게 할 것을 생각해야지, 기수(氣數)가 마침 그러하다고 핑계대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늘의 경계를 잘 삼가서 재앙을 돌려 상서로 만든 옛날의 어진 임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근본은 자신에게 반성하여 자신의 덕을 닦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전하께서 깊숙한 궁중의 보는 사람도 없고 듣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하늘에 대해 공경하는 것이 참으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실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중 궁궐은 깊고도 근엄하여 외신(外臣)으로서는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만,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재이를 만났을 적에 경계하고 삼가한 방법은 단지 구언하는 말단적인 것과 피전하는 겉치레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정성이 하늘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치의 해는 천재보다 더 심하다는 것은 선유들의 격언입니다. 근래 사치스런 풍조가 날로 더욱 극심하여 안으로 서울에서부터 밖으로 시골에 이르기까지 법제에 지나친 집과 분수에 넘친 의복이 더할 수 없이 공교한 것이 지난날보다 더합니다. 그리하여 큰집의 높은 대문이 궁궐보다 더 사치한 집이 있고 서인들의 첩이 비빈(妃嬪)에게 견줄 정도로 화려하며, 장사치나 하인들에 이르러서도 온몸을 비단으로 감싼 자가 있습니다. 만일 가생(賈生)029)  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어찌 눈물만 흘리고 그칠 뿐이겠습니까. 이것이 인심이 예스럽지 못하고 습속이 피폐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빠른 법이니, 오늘날의 폐단은 아마도 전하께서 몸소 행하시는 것에 반드시 그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상(商)나라의 주왕(紂王)이 나라를 패망시킨 일은 그 단서가 한둘이 아니겠습니다만, 그 근원은 상아로 만든 젓가락과 옥으로 만든 술잔을 쓰고 교만하고 방자한 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한 문제(漢文帝) 때 부유했던 공효를 이룬 것은 그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습니다만, 그 근본은 잘 해지지 않는 검은 옷을 입고 잘 닳지 않는 가죽신을 신은 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치와 검소 사이에 국가의 흥망이 판가름나는 것이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감계(鑑戒)해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듣건대 앞으로 옹주(翁主)의 결혼과 왕자(王子)·군주(郡主)의 길례(吉禮)를 순차로 행한다고 하는데, 응당 들어가야 할 여러 가지 물품을 한결같이 간략하게 하여 부미(浮靡)를 제거함으로써 검박함을 보여 천하에 솔선하신다면 창반(瘡瘢)과 광수(廣袖)의 변화030)  가 우역(郵驛)을 설치하여 명을 전하는 것보다도 빠를 것입니다.
궁위(宮圍)가 엄하지 않은 것은 화란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인 것입니다. 참소와 아첨이 시행되고 간알(干謁)의 조짐이 발생되는 것은 그 근원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궁정 안을 반드시 금문(禁門)·금액(禁掖)·금원(禁苑)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잡된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내외의 방한(防限)을 엄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즈음 궐문 안에 잡인이 번거롭게 드나들어 마치 시장과 같아 무단히 출입하는 남녀가 서로 액정(掖庭)에 잇따랐는데, 간혹 보자기에 싼 소반을 이고서 멋대로 들어가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없습니다. 신들이 대청(臺廳)으로 나아가노라면 날마다 이런 것을 봅니다. 비록 어떤 사람들이 이처럼 끊임없이 왕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외의 구분이 엄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너무 심합니다. 조금씩 새는 물이 필경에는 하늘을 덮치듯이 넘실거리고 하찮은 불꽃이 필경에는 요원의 불길이 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를 무심하게 보아넘긴 채 그 근원을 막지 않으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연줄을 타고 반부(攀附)하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됨을 면할 수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잗단 일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내외의 출입에 대한 금방(禁防)을 엄히 하여 부정한 길이 널리 통하는 조짐을 막으소서.
언로가 막히느냐 열리느냐에 국가의 흥망이 나뉘는 것입니다. 언로는 국가에 있어서 사람에게 혈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양생법(養生法)을 잘하는 사람은 관절(關節)을 도인하고 영위(榮衛)를 보호하여 혈기가 막힌 데가 없이 두루 유통되게 하는데, 그런 뒤에야 몸이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꼴베는 목동들의 말도 반드시 채택하고 우직한 사람의 말도 빠뜨리지 않아서 상하가 서로 미덥게 되어 막히는 것이 없게 하는데, 그런 뒤에야 국가가 편안하게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이 간언을 듣는 방법에 있어 세 가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유도해서 말을 하게 하는 것이 어렵고, 말을 하면 의심없이 따르는 것이 어렵고, 따르되 정사에 시행하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대저 말을 하게 하고서 따르지 않는 것과 그 말은 따르면서 행하지 않는 것이 간언을 거절하고 말한 자를 죄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실상이 없는 데로 귀결되기는 매일반인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양 신하들이 진언할 적에는 으레 부드러운 유시를 내리십니다만 시행할 즈음에 이르러서는 전과 다름이 없으니, 이것은 겉으로는 말을 받아들이고 속으로는 그 충심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후 일을 논하다가 죄를 얻은 사람이 또한 많으니, 말하는 것을 경계하려는 조짐은 오늘날 우려해야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신은 훌륭하고 남은 부족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더욱 널리 포용하는 도량을 넓히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니 모두가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10월 5일 병신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다. 또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와 구감성(九坎星) 위로 들어갔다. 또 자성(觜星)의 성좌 가운데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로 들어갔다.

 

조익(趙翼)을 좌참찬으로,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황감(黃㦿)을 대사간으로, 최내길(崔來吉)을 경기 감사로, 임전(林)을 부응교로, 홍처윤(洪處尹)을 수찬으로, 선우협(鮮于浹)을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선우협은 평양 사람인데 기자(箕子)의 후손으로 학행이 있다고 소문이 났다.

 

10월 6일 정유

번개가 쳤다.

 

10월 7일 무술

유성이 천고성(天庫星) 아래에서 나와 누성(婁星) 위로 들어갔다.

 

10월 8일 기해

헌부가 아뢰기를,
"감사의 직임은 온 도의 기강을 바로잡고 여러 고을을 호령하는 것이므로 진실로 적격자가 아니면 백성을 병들게 하고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경기는 평시와 크게 달라 매양 칙사(勅使)가 올 적마다 책응(責應)에 분주히 뛰어다녀야 하므로 기력이 한창 강성하고 재지가 넉넉한 사람을 시켜도 항상 부족한 점이 있어 왔습니다. 이번에 새로 제수한 감사 최내길은 일찍이 방면을 맡을 만한 명망이 없었고 근력도 이미 쇠진했으니, 이 직임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답하기를,
"공도 있고 재주도 있으니 실로 합당하지 않을 리가 없다. 지나친 의논은 하지 말라."
하였다. 다시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내길이 드디어 병을 핑계로 체직되었다.

 

10월 9일 경자

제도(諸道)에 별장(別將)을 나누어 보내어 어영군(御營軍)을 단속하게 하였다.

 

10월 10일 신축

간원이 아뢰기를,
"대군(大君)이 편복(便服)으로 금중(禁中)을 출입하는 것은 일이 너무 간편한 데에 관계되어 예법에 있어 미안스러우니, 공복 차림으로 출입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11일 임인

유성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다.

 

10월 12일 계묘

유성이 함지성(咸池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또 성성(星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3일 갑진

이재(李梓)를 장령으로, 정유(鄭攸)를 헌납으로, 황준구(黃儁耉)를 정언으로, 홍명하(洪命夏)를 교리로, 목행선(睦行善)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특명으로 박서(朴遾)를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삼았는데, 색승지를 추문하기를 청하여 상의 뜻을 거스른 탓이었다. 김집(金集)을 시강원 찬선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진선(進善)으로, 권시(權諰)를 자의(咨議)로 삼았다. 송시열과 권시는 모두 출사하지 않았는데 학문으로 일컬어졌다.

 

대신과 비국 당상, 양사의 장관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자점이 아뢰기를,
"전 대사헌 박서를 특명으로 외직에 보임시킨 것은 일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색승지를 추고할 것을 청한 것은 일이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대신(臺臣)이 비록 지나친 의논을 했더라도 성상께서는 반드시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합니다. 과거 선조조 때 어떤 사람이 만력 황제(萬曆皇帝)의 잘못을 말하자, 선조께서 노하여 이르기를 ‘황상은 우리 나라의 군부(君父)인데 신하가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 지금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황음 무도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등의 말을 삭제하게 한 성상의 전교는 참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간원의 소장을 도로 내어준 것은 전규에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상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것도 전규가 있는가."
하였다. 자점과 경석이 아뢰기를,
"우상을 오래도록 비워둘 수는 없으니 복상(卜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격자를 얻었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찌 신들보다 나은 사람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자점이 또 아뢰기를,
"전 직장(直長) 홍우정(洪宇定)은 궁함을 지키는 뜻이 있는 선비입니다."
하니, 상이 6품관으로 발탁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자점이 또 아뢰기를,
"고(故) 유생 조척(趙滌)은 효행이 있는데 그의 아비가 원통하게 죽은 것 때문에 너무 슬퍼하다가 자진(自盡)하였으니, 그의 아들 조종운(趙從耘)을 녹용(錄用)하여 정표하는 뜻을 보여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경석은 고 판서 정경세(鄭經世)의 손자인 정도응(鄭道應)이 나이가 어리지만 재행(才行)이 있어 쓸 만하다고 천거하였으며, 오준(吳竣)도 김만영(金萬榮)이 재행이 있다고 천거하고, 또 아뢰기를,
"삼남(三南)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장현광(張顯光)·김장생(金長生)의 문생과 자제들은 모두 선발하여 기용할 만합니다."
하였다. 대사헌 조경이 아뢰기를,
"헌관에 반드시 강직한 사람을 기용한 뒤에야 기강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장석지(張釋之)는 실례한 황자(皇子)를 감히 공문(公門)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었습니다. 공도(公道)의 적용을 이렇게 한 뒤에야 기강을 확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치스런 풍조가 근래 더욱 극심한데 법리(法吏)가 이를 금할 수 없어 공도가 크게 무너졌으니, 소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본디 강직한 사람이니 힘쓰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옛날에 최유원(崔有源)이 집의로 있을 때 대랑피(大浪皮)로 된 말안장을 금했었는데, 임해군(臨海君)이 자기가 타고 있던 안장을 풀어서 법사(法司)에 주어 불태우게 했습니다. 이러한 풍채(風采)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조경에게 위임하여 그의 말을 다 써준다면 기강이 확립되고 공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대사간 황감이 아뢰기를,
"조종조 때에는 옥우(屋宇)의 간가(間架)에 모두 정해진 제도가 있었는데 지금 사치스러운 것 가운데 토목 공사가 더욱 법제를 무시하고 있으니, 적발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조경이 아뢰기를,
"동대문 밖에서부터 양근(楊根) 땅에 이르기까지 여러 궁가(宮家)에서 법을 무시하고 시장(柴場)을 점유하여 백성들이 나무하고 풀을 벨 수 없으니, 특별히 어사를 정하여 보내 규검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 해조로 하여금 검찰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는 반드시 청근(淸謹)한 사람을 기용해야 된다. 그리고 첨사가 수모를 당한 것에 대해 관왜(館倭)들에게 슬쩍 말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하라."
하고, 상이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옷소매를 너무 넓게 하는데, 이것이 용병(用兵)에 있어서 가장 큰 방해가 되고 있다. 군인들로 하여금 옷소매를 좁게 하도록 하라."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마땅히 성상의 분부대로 군중에 신칙시키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은 대장이니 먼저 소매를 좁게 하여 군인들이 보고 본받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백이 아뢰기를,
"신병(新兵)들을 시재해야 되는데 약환(藥丸)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가 내려 갈 적에 여러 고을에서 화약을 구워서 거두어 들이라는 뜻으로 효유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10월 14일 을사

간원이 아뢰기를,
"여주(驪州)·제천(堤川)·충원(忠原)·해주(海州)·울진(蔚珍)·인동(仁同) 등의 고을은 10개월 이전에는 경솔히 체직을 허락하지 말아서 민폐를 제거하고 공기(公器)를 온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여주 등의 고을에 포흠(逋欠)된 것이 많았는데, 그 곳의 수령이 된 사람은 임기가 10개월이 지나게 되면 해유(解由)를 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피하였고 부임했다고 하더라도 10개월 되기 전에 체직되어 돌아가기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포흠은 갈수록 누적되었고 백성들은 영송(迎送)의 폐단을 견딜 수 없게 되었으므로 간원이 논한 것이다.

 

찬선 김집(金集), 진선 송시열(宋時烈), 자의(咨議) 권시(權諰) 등에게 하유하여 역말을 타고 올라오게 하였다. 병자 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역로가 피폐되었다는 이유로 모든 시종신(侍從臣)들에게 역말을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런 명이 있은 것은 총애하고 대우해서이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원손의 병이 지금까지 낫지 않고 있으니 책봉례를 내년 봄으로 물려서 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원손의 책봉례는 온 나라의 막대한 경사인데 누차 물려 정하였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원손께서 한때 대단찮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만 조섭하여 다스리면 절로 나을 것이니, 우선 며칠을 물려서 다시 징후를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15일 병오

유성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간방(艮方)으로 들어갔다.

 

10월 16일 정미

달이 전성(塡星)을 범하였다.

 

10월 17일 무신

무지개가 북쪽에 나타났고 우박이 내렸고 천둥 번개가 크게 쳤다.

 

선전관 조유(趙猷)에게 6품의 실직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수찬 심지한(沈之漢)이 저물녘에 궐문에 이르렀는데, 궐문이 이미 닫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금호문(金虎門)이 열렸고 식년 강경시(式年講經試)의 시관들이 나왔는데, 선전관 조유가 표신(標信)을 받들고 문에 서 있었다. 지한이 그 틈을 이용하여 들어가려 하니, 조유가 말하기를,
"지금 유문(留門)한 것은 오로지 시관들을 나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옥당의 관원을 들어오게 하라는 명이 없었으니 결단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고는, 정원에 가서 고하니, 정원이 조유에게 들여보내게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조유가 고집하면서 안 된다고 하니, 정원이 이에 계품하여 들여 보냈다. 상이 조유가 자신의 직분을 잘 수행한 것을 가상하게 여겨 해조로 하여금 6품의 실직을 제수하여 포상하게 한 것이다.

 

10월 19일 경술

유성이 대리성(大理星) 아래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갔다.

 

영의정 김자점, 좌의정 이경석이 천둥의 변 때문에 차자를 올려 사면을 청하니, 답하였다.
"경들의 잘못이 아니라 실은 내가 과매한 탓에 연유된 것이니, 경들은 사퇴하지 말고, 안심하고 치도(治道)를 논하라."

 

영남 사람 이황(李潢)이 죄 때문에 전가(全家)가 의주(義州)로 옮겨졌는데, 부윤에게 말미를 얻어 영남에 가 부모를 뵈었다. 그런 다음 이어 전라도 나주(羅州)로 갔는데, 그의 노비가 무리를 모아 사살하고 나서 칼로 난자하고 갔다. 전남 감사가 아뢰었다.

 

10월 20일 신해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세손의 책봉례는 진실로 천년만에 한번 있을 막대한 경사입니다. 길일을 이미 정하였고 의물(儀物)을 이미 갖추었는데, 하찮은 병을 인하여 갑자기 물려서 행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원근에서 보고 들은 사람이 어찌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이미 종묘에 고하였으니 무단히 물려서 거행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다시 길일을 택하여 증세와 일기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서 당기고 늦출 것이요, 내년 봄으로 물려서 행하라는 명은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21일 임자

남선(南銑)을 경기 감사로, 홍명일(洪命一)을 우승지로, 조계원(趙啓遠)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좌참찬 조익(趙翼)이 소장을 올려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다. 조익은 병자 호란 이후 호서(湖西)에 물러가 있었는데, 그의 늙은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고 상례(喪禮)를 마치고 나서는 참찬으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들어오기는 했으나 누차 진정소(陳情疏)를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위유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24일 을묘

제도의 방물(方物)인 갑주(甲胄)를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만들게 하였는데, 몸에 편리한 점을 취한 것이다.

 

10월 25일 병진

문과 회시(文科會試)가 있었다. 시관이 아뢰기를,
"거자(擧子) 김여원(金汝)의 시권(試券)에 나이를 쓰지 않아서 격례(格例)에 어긋난 점이 있어 감히 원획(元劃)이 15분이라 하여 방중(榜中)에 기록할 수가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여쭈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법전에 의하면 강경의 분수가 많은 사람은 중장(中場)·종장(終場)에 제술을 하지 않아 입격되지 못하였더라도 단지 강경의 획수만 가지고 뽑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김여원은 강경 획수가 15분이나 되니 마땅히 변통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획수가 매우 많으니 파격적으로 뽑으라."
하였다.

 

10월 26일 정사

유성이 우림성(羽林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또 상태성(上台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다.

 

정유성(鄭維城)을 우승지로, 임중(任重)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매우 차가우니 위사(衛士)와 각처의 수직하는 군사에게 해조로 하여금 공석(空石)을 나누어 주게 하라."

 

함경 감사 이후원(李厚源)이 치계하기를,
"북도에 인물이 비록 적다고 하지만 정병이 1만 명에 가까운데 서울과의 거리가 매우 멀어서 부거(赴擧)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항상 재주를 지니고도 써 보지 못하는 탄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를 설행할 적에 무진년031)  의 전례에 의거하여 본도에 와서 시험보게 함으로써 용동(聳動)시키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예가 있어 입격된 자는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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