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인조실록49권, 인조 26년 1648년 9월

싸라리리 2026. 1. 7. 09:37
반응형

9월 1일 임술

번개가 쳤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왕세손의 옥인(玉印)을 제조해야 됩니다. 왕세자의 인보다 줄여서, 사방은 3촌 6푼에서 2푼을 감하고 두께는 8푼 5리에서 5리를 감하고 귀(龜)의 높이는 2촌 1푼에서 1푼을 덜고 귀두(龜頭)의 길이는 1촌 1푼에서 1푼을 제거하고 구의 길이는 4촌 6푼에서 2푼을 제거하며, 왕세손인(王世孫印)이라는 네 글자는 전문(篆文)으로 써서 만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본조에서 왕세손 책봉례 때의 제반 일에 대해 계품했는데, 그 가운데 백관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왕세손에게 하례하는 한 조항에 대해서 위에서 지나친 것 같다고 하교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세손께서 새로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막대한 경사인 것으로,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기뻐 용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백관들의 입장에서 우러러 진하하는 것은 정례에 있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회전(會典)》을 상고하여 보더라도 황태손의 관례가 있은 뒤 백관이 하례를 행한다는 글이 있으니, 이것이 또한 전거할 만한 법규입니다. 황공하게 다시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권정례로 하라."
하였다.

 

9월 2일 계해

유성이 여성(女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9월 3일 갑자

생배, 잣, 은행, 꿀을 심양(瀋陽)으로 보냈는데, 제사를 돕게 하기 위해서였다.

 

9월 4일 을축

천둥 번개가 쳤다.

 

9월 5일 병인

유성이 정성(井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손의 책봉례가 이미 결정이 되었는데, 이는 조종조 이래 드물게 보는 성전(盛典)입니다.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뽐음으로써 사방의 사람들과 함께 경사를 같이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대신들과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내년 봄에 초시를 설행하되 모두 서울에 모아 3백 명을 시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노량(露梁)의 진선(津船)의 숫자를 신들은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근래 듣건대, 토호와 권세가들이 시초(柴草)를 실어나르기 위해 모두 끌고 가고 부서진 배 1척만 남아 있어 왕래하는 행인이 물에 빠져 죽는 경우까지 있다고 하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공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려서 뒤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6일 정묘

채유후(蔡𥙿後)를 이조 참의로, 심유행(沈儒行)을 정언으로, 우상중(禹尙中)을 홍청 병사(洪淸兵使)로, 엄황(嚴愰)을 홍청 수사로, 윤창구(尹昌耉)를 전남 우수사(全南右水使)로 삼았다.

 

9월 8일 기사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9월 9일 경오

눈이 내렸다. 경상도 태백산(太白山)·소백산(小白山) 등에는 한 자나 되게 쌓였다.

 

유성이 옥정성(玉井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왕세손의 이름을 원(棩)  【 음은 원(院)임.】 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손의 책봉례를 거행할 때 묘사(廟社)에 고하는 제문에 반드시 이름을 거론하여야 할 일이 있으니, 호(號)를 의논하는 전례에 의거하여 대신, 정부, 관각의 당상, 육조의 참판 이상을 모이게 하여 의논해서 이름을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른 것이다.

 

9월 13일 갑술

번개가 쳤다. 유성이 자성(觜星) 아래에서 나왔다.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이 왕세손의 책봉례가 있은 뒤 백관들이 진하하는 절목에 대해서는 이미 계하했습니다. 왕세자에게도 진하례가 있어야 되는데 등록에 기재된 것이 없어 일이 신규(新規)에 관계가 되니, 정조와 동지의 예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하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홍청 병사 우상중(禹尙中)은 겁이 많아 곤수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시키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시만(李時萬)을 동부승지로, 임전(林)을 집의로, 신열도(申悅道)를 장령으로, 이무(李袤)를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4일 을해

부교리 이회(李禬)가 소장을 올려, 거듭 형제 세 사람의 상을 당하여 슬퍼하던 끝에 병이 들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정상을 진달하니, 상이 조리하고 나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였다.
"일이 매우 슬프고 측은하니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하게 하라."

 

9월 15일 병자

왕세자가 경덕궁에 나아가 중전에게 문안하였다.

 

유성이 누성(婁星) 위에서 나와 구감성(九坎星) 아래로 들어갔다.

 

간원이 아뢰기를,
"각사의 관원이 문서를 전적으로 하리들에게 위임하고 있기 때문에 막중한 공부(貢賦)의 봉납과 미봉납에도 소루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각사의 장관을 대동하고 직접 공안(貢案)을 가지고 상세히 조사하고 분명히 기록하여 명백히 신계(申啓)하게 하소서. 그리고 죄를 범한 자는 법에 의거하여 죄를 결단함으로써 간사하고 외람된 짓을 하는 습성을 막으소서. 또 특별히 각사의 관원 가운데 강명하고 염간(廉簡)한 사람을 가려서 《대전》의 정액(定額)에 의거, 구임시켜 직사에 전념하게 하여 그럭저럭 넘기려는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각사의 권한이 전부 이서(吏胥)들에게 있었으므로 관원들은 전혀 일에 대해 알지를 못했는데,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고 폐단이 고질화되어 있었다. 이에 간원이 논계하였으나 결국 개혁할 수가 없었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 임어한 뒤로부터 누차 큰 변란을 겪으시어 온갖 우환이 집중되어 있는 가운데 불행하게도 궁궐 안에서 또 사예(邪穢)스런 요괴로움이 발생하여 옥후가 미령하시어 병의 뿌리가 깊어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신명(神明)의 도움을 받아 침약(鍼藥)의 효과를 거두었습니다만, 차분히 조섭하는 즈음에 절선(節宣)을 잘하지 못하면 수시로 발작되고 있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성인이 병을 삼가는 방법은 먼저 그 근본을 배양한 뒤에 그 말단을 다스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과 침은 말단이고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이 근본입니다. 반드시 물욕을 극복하여 제거하려면 먼저 본심을 배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원이 맑고 깨끗해져 원기가 화평해지면 유부(兪跗)나 편작(扁鵲) 같은 명의를 기다릴 것 없이 절로 병이 나을 것입니다. 신들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병을 삼가는 데 있어 과연 올바른 도리를 극진히 하고 계십니까. 깊숙한 구중 궁궐에 거처한 채 신료들을 드물게 인접하면서 항상 함께 거처하는 자는 근습(近習)과 빈어(嬪御)뿐입니다. 이에 병에 이로운 말과 마음을 정양하는 방법이 전하에게 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잘 조섭하려고 하여도 끝내 실효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군신은 부자와 같은 것인데 무슨 예모에 구애될 것이 있어서 접견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지기(志氣)가 저상되어 분발할 뜻이 없으시고 구차스럽게 하루하루 일이 없기만을 바라면서 광복(匡復)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은 생각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점차 나약한 지경으로 흘러 들어감을 깨닫지 못함에 따라 놀이에 빠지려는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입니다. 궁중에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후원에서 공장이들이 집을 짓는다는 말이 여항 사이에 떠들썩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떠한 잗단 오락인데 큰 걱정을 잊은 채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난번 정원에서 구언하는 전지를 내릴 것을 청하였습니다만, 헤아려 조처하겠다는 하교만 내리셨을 뿐입니다. 전례에 따라 진언하는 것도 오히려 채용하지 않는데, 더구나 날카로운 말과 곧은 의논으로 감히 임금의 마음을 거스르려 하겠습니까. 아, 언로가 막힌 지 오래 되었습니다. 곧은 기상을 가진 자는 꺾여지고 나약한 자만이 등용되어 조정에는 공의가 행해지지 않고 사대부 사이에는 염치가 모두 없어져 오직 이익만을 좇고 작록을 보존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무릅쓰고 벼슬로 나아가려는 습관과 탐욕스럽고 비루한 풍조가 이로 말미암아 더욱 극심해진 반면, 충직한 절개와 청개(淸介)한 지조를 지닌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붕당(朋黨)을 타파하자는 말로 사심이 없다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당론이 분분한 것은 물이 깊어지듯 깊어만 가, 서로들 끌어들이면서 청요직(淸要職)을 점거하려 도모하는가 하면 은밀히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남을 선동하여 마구 비방을 가하고 있습니다. 인심이 야박해지고 관방(官方)이 문란해진 것도 모두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더구나 훈신(勳臣)은 의리상 나라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는데도 국사는 염두에 두지 않고 각기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그 누가 국사를 앞세우고 사심을 뒤로 하겠습니까. 아, 지금은 어떠한 때입니까. 비록 상하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마치 불에 타는 자를 구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 내듯이 해도 오히려 헤쳐나가지 못할까 걱정스러운데, 더구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성의(誠意)가 막히고 대소 신하들의 분열이 여기에 이르렀는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러한데도 다 함께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구제하려 한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백성들의 눈을 통하여 보고 백성들의 귀를 통하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생민들의 원망에서 또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막 기근을 겪고 나서 요행히 살아난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풍년이 드는 것뿐이었는데, 또 태풍과 우박으로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국가에서는 태평한 때에나 하는 일을 한결같이 무사한 때처럼 준행하여 공사(公私)의 토목 공사 때문에 삼강(三江)의 백성들이 거의 다 흩어졌고 상하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여 백성들의 재물은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고질적인 기아의 폐단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지난번 도총부의 직려(直廬)와 종친부의 직방(直房)은 헌부의 계사로 인하여 우선 정지시켰으나 두 곳 궁가의 영선은 바야흐로 한창이니, 이것은 그만두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아, 국가가 무사하게 되면 다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제택이 넓지 못한 것이 무슨 걱정이기에 이런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때 아닌 일을 한단 말입니까.
근래 여염의 혼례가 극도로 사치스러워 복식(服飾)의 물품은 반드시 주금(珠錦)으로 하고 시가에 공향(供饗)하는 의식이 대부분 예제를 무시하고 있어 물과 불의 재해보다도 심하다는 말이 불행하게도 근사한 실정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숭선군(崇善君)의 길례 날짜가 목전에 다가왔으니, 모든 의물(儀物)에 관계되는 것을 되도록 간략하게 하여 절검을 행하는 덕을 몸소 보이소서. 신들이 듣건대 선조 대왕께서는 왜란을 겪은 뒤 모든 왕자·부마의 혼례에 헛된 비용을 줄이고 비단을 쓰지 않은 채 겨우 혼례를 이루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선조(先朝)의 아름다운 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다스리는 이 때가 임진년025)  ·계사년026)   때에 못지 않고 천재의 참혹함도 그때보다도 더 심하니, 의당 전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시어 참작해서 감손해야 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순을 본받으려면 마땅히 조종조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으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병자년027)   이래 군정(軍政)이 너무 허술하였으니,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도를 조금도 완만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도피한 자와 물고한 자를 정돈하는 이외에 빈 자리를 충정시키는 일을 한꺼번에 거행했기 때문에 외방의 소란스러움이 마치 전쟁이 일어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임진란 이후 군병의 명목이 많아지고 양민이 투속되는 길이 많아졌기 때문에 강보에 싸여 있는 아이가 군대에 편입되는 것을 면치 못하고 허리가 굽은 노인도 군안(軍案)에 들어 있습니다. 전례에 따라 세초(歲抄)하더라도 매양 그 숫자를 채우지 못할까 걱정스러운 실정인데, 더구나 허다한 빈 자리를 어떻게 하나하나 평시의 예에 따라 충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질없이 소란스런 폐단만 끼치면서 끝내 착실한 성과가 없는 것보다는 속히 변통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대저 군대란 정예롭게 하기를 힘쓸 것이요, 숫자만 많기를 힘써서는 안 됩니다. 전후의 사변이 발생했을 적에 국가에서 끝내 군사력의 도움을 얻지 못한 것이 어찌 군병이 부족한 탓이었겠습니까.
원손의 책봉례에 대한 일은 이에 종사의 막대한 경사이니, 신민들치고 그 누가 춤추면서 서로 경하하지 않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가의(賈誼)는 말하기를 ‘어린 태자가 식견이 있게 되면 효인(孝仁)·예의(禮義)를 밝혀 도리로써 익히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실로 옛 제왕들이 자손을 교육시키던 방법이었습니다. 지금 원손이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니 올바른 도리로 배양해야 할 시기가 바로 지금입니다. 보도(輔導)할 책임이 강서원의 관원들에게 달려 있기는 하지만, 깊은 궁중에서 항상 가까이하는 것은 아보(阿保)와 환시(宦寺)뿐이고 보고 듣는 것도 모두 정언(正言)이요 정사(正事)임을 기필할 수 없으니, 많은 초(楚)나라 사람들이 떠든다는 경우를 어찌 깊이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보와 환시 가운데 착하고 공손한 사람을 가려서 그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보호하게 하여, 비속한 말이 들리게 하지 말고 태만한 기색이 보이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일동 일정이 모두 올바른 데에서 나오게 하여 내외에서 서로 배양시킴으로써 습관이 본성으로 굳어지게 하소서. 그러면 국가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 수찬 홍명하(洪命夏)가 지었다.】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내용은 모두가 가언이요 지언이다. 내가 마땅히 유념하여 채택해서 시행하겠다."
하였다.

 

9월 18일 기묘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큰아들인 이석철(李石鐵)이 제주(濟州)에서 졸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석철의 일에 대해서 내가 매우 놀랍고 슬프게 여기고 있다. 중관(中官)을 내려보내어 그의 관구(棺柩)를 호송해 와서 그의 아비 묘 곁에다 장사지내게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용골대(龍骨大)가 왔을 적에 석철을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들 그가 반드시 보전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태백산사고본】 49책 49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34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석철이 역강(逆姜)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지친으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장독(瘴毒)이 있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그 유골을 아버지의 묘 곁에다 장사지낸들 또한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슬플 뿐이다.

 

비국이 아뢰기를,
"군병의 궐액 숫자가 매우 많습니다. 경상도는 기병·보병·수군·호보(戶保) 모두 합쳐 9만 8천 2백 42인이고 전남도는 기병·보병·조군(漕軍)·수군·호보 모두 합쳐 7만 3천 9백 63인이고 제주(濟州)의 세 고을은 기병·보병·수군·호보 모두 합쳐 4천 1백 64인이고 홍청도는 기병·보병·조군·수군·호보 모두 합쳐 1만 6천 2백 15인이고 평안도는 기병·보병·수군·호보 모두 합쳐 4만 7천 3백 94인이고 황해도는 기병·보병·수군·호보 모두 합쳐 3천 6백 86인이고 강원도는 기병·보병·호보 모두 합쳐 6백 48인이고 함경도는 기병·보병·호보 모두 합쳐 3천 6백 45인이고 경기는 기병·수군·호보 모두 합쳐 24인이고 개성부(開城府)는 기병·호보 모두 합쳐 2천 인이고 오부(五部)는 기병·보병·호보 모두 합쳐 1천 6백 42인입니다. 각도의 충정되지 못한 숫자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여러 해 동안 폐기해 온 끝이어서 십분 참작하여 시행할 만한 일로 명령하지 않는다면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아서 그저 소요스럽게만 될 뿐입니다. 신들이 서로 회의하여 대소와 잔성(殘盛)을 구분하여 그 숫자를 나누어 정하되, 2천 인으로 한정하여 별단(別單)으로 서계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20여 만의 궐액을 단지 2천 인만 충정한다는 것은 너무 소략하다."
하였다.

 

9월 20일 신사

숙안 군주(淑安郡主)의 부마(駙馬)를 간택하라고 명하였다. 군주는 세자의 큰딸이다.

 

일관(日官) 송인룡(宋仁龍)을 청나라에 보내어 시헌력(時憲曆)의 산법(算法)을 배워오게 하였다.

 

9월 21일 임오

김광욱(金光煜)을 도승지로, 신익전(申翊全)을 우부승지로, 홍명하(洪命夏)를 헌납으로, 심유행(沈儒行)을 지평으로, 정유(鄭攸)를 부교리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22일 계미

천둥 번개가 쳤다. 유성이 천봉성(天棓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다.

 

9월 24일 을유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유성이 낭성(狼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손의 책봉례를 행한 뒤에는 공상(供上)과 삭선(朔膳) 등의 일을 알려서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빈궁(嬪宮) 또한 삭선을 진배(進排)하는 규정이 없으니, 하지 말라."
하였다.

 

9월 25일 병술

유성이 북두 제오성(北斗第五星) 아래에서 나와 자미원 단문(紫微垣端門) 안으로 들어 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책봉례가 끝난 뒤에 종묘와 숙령전(肅寧殿)에 전알례(殿謁禮)를 거행했으니, 지금 이 세손의 책봉례를 끝낸 뒤에도 이에 의거해서 행해야 합니다. 일관으로 하여금 미리 길일을 가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이가 어려서 사세상 행례하기가 곤란하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가 출입할 때에는 상례(相禮)가 인접(引接)하고 대군(大君)의 경우에는 봉례(奉禮)가 인접하는 것이 규례입니다. 지금 왕세손의 인접을 봉례로 하게 한다면 대군의 인접은 실인의(實引儀)에게 하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이 근거가 없는 듯하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세손의 인접을 봉례로 한다면 봉례 아래에 찬의(贊儀)·인의(引儀)가 있는데 찬의는 으레 본업(本業)의 가인의(假引儀)를 승진 제수하게 되어 있어 동반의 실직과는 다르니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손을 인접하는 사람도 봉례라고 이름하도록 하라."
하였다. 드디어 이조에 명하여 봉례 1원을 더 차출하게 하였다.

 

9월 26일 정해

간원이 차자를 올리니, 상이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임담(林墰), 사간 양만용(梁曼容), 헌납 홍명하(洪命夏), 정언 오정위(吳挺緯) 등이 차자를 올려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절검을 숭상하고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고 언로를 넓히는 네 가지 일에 대해 말하면서,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황음하여 나라를 망쳤던 것과 광해군의 일을 인용하여 경계로 삼으라고 하였는데, 상이 하교하였다.
"숭정 황제는 국세가 미약했던 탓으로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었던 것이요, 실제로 황음 무도한 임금은 아니었다. 설사 말할 만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도리에 있어서는 예의상 마땅히 숨겨야 할 뿐이요, 비통하게 여겨야 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문자로 형용하여 어머니를 무시한 사람과 함께 논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일이 진계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진실로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이 차자를 도로 내주어 그 부분을 삭제하게 하라."

 

원진명(元振溟)을 장령으로, 양만용(梁曼容)을 부응교로, 조복양(趙復陽)을 교리로, 심지한(沈之漢)을 수찬으로, 이이존(李以存)·임전(林)을 강서원 겸익선(講書院兼翊善)으로, 심지한·홍명하를 겸찬독(兼贊讀)으로, 이행진(李行進)을 사간으로 삼았다.

 

9월 27일 무자

시강원이 아뢰기를,
"본원에 서적이 몇 권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완질이 아닙니다. 왕세자에게 지금 《맹자》를 진강하고 있는데 머지 않아 《시경》·《서경》을 강해야 되니, 서책을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전주(全州)·안동(安東)·합천(陜川)에서 바야흐로 《시경》·《주역》·《서경》을 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아울러 잘 인쇄하여 올려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임담, 정언 오정위(吳挺緯) 등이 인피하기를,
"어제 진달한 차자에 인용한 것이 적당치 않아 성상의 전교가 내렸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성상의 생각이 지극하십니다. 신들은 이런 몽매한 잘못을 범하고서도 그대로 무릅쓰고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지평 이홍연(李弘淵)은 임담과 인척 관계라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시 체직시켜 달라고 청하니, 아울러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진실로 깊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간절한 뜻에서 진계한 것인데, 조어(措語)하는 가운데 인용한 것이 적당치 않은 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무슨 체차시킬 만한 잘못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혐의 때문에 가부(可否)하지 못하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입니다. 임담과 오정위, 이홍연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8일 기축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간원의 차자로 인해 정원에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말뜻이 간절하여 사람을 감동시키게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로부터 진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에 의거하여 진계하는 것은, 감계할 일이 멀지 않으면 따르게 하기가 쉽기 때문인 것입니다. 지금 이 차자에서 인용한 것도 이런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께서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뜻은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받아들이는 도리에 있어서는 말 때문에 뜻을 해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간관의 소차(疏箚)를 삭제하는 것은 전에는 없었던 일입니다. 정원에서는 이에 대해 진백(陳白)하는 거조가 있어야 합당한데도 까맣게 잊은 채 내어주면서 한마디도 한 적이 없으니, 너무도 왕명의 출납을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도리를 어긴 것입니다. 색승지를 추고하고 간원의 차자는 즉시 도로 들여오게 하여 답을 내림으로써 진언하는 길을 넓히소서."
하니, 답하기를,
"간원이 망발한 말을 그대들이 이와 같이 변명하고 나서서 왕명을 출납한 사람을 추고하라고 청하기까지 하니, 나는 오늘날 의리가 밝지 못한 것이 이같이 극심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하였다.

 

9월 29일 경인

대사헌 박서, 지평 심유행(沈儒行)이 인피하기를,
"성상의 전교가 간절하여 진실로 의리에 합치되니, 신들은 진실로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버려두고 쓸 만한 것은 채택하는 것이 본디 임금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인데, 간신(諫臣)의 차자를 도로 내어주고 고쳐 가지고 들여오게 하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도 정원에서는 끝내 한마디도 아뢴 말이 없음은 물론, 간원의 소장을 장차 헛 것으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으니,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정원에서 잘못한 것이 없지 않다고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식견이 명석하지 못하여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탓으로 엄한 비답을 받았으며, 변명하고 나선다는 하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신들은 망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 반성함에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선제(先帝)를 모욕한 말은 그대로 놓아둘 수 있는 말이 아니요, 역시 전에 없던 일이다. 그런데도 경들은 군신간의 대의는 돌아보지 않고 유독 붕당만 생각하기에 겨를이 없어 오늘날의 국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하였다. 지평 이홍연(李弘淵)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승지의 추고를 청하자는 간통(簡通)을 보고는 준례에 따라 답하여 보냈습니다. 그랬는데 성상의 비답에서 준엄하게 변명하고 나섰다고 책하였으니, 신의 잘못도 동료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납 홍명하(洪命夏), 정언 오정위(吳挺緯)가 인피하기를,
"신들에게 오인한 잘못이 있는데 어떻게 감히 헌부의 관원을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파척시켜 주소서."
하니, 사퇴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사간 이행진(李行進)이 처치하기를,
"간원의 차자에 인용한 것이 적당치 않아 성상의 전교를 받들고서 우리 나라로서는 숨겨야 하는 것인 줄 알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전혀 몽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원의 추고를 청하는 즈음에 삭제하느냐 않느냐에 대해 거론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분명히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변명하여 꾸며댄 데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은 면하기 어렵습니다. 일이 본원(本院)에서 연유되어서 감히 처치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한 것이니, 피혐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박서·심유행·이홍연은 체차시키고 홍명하·오정위는 출사시키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좋은 재목이 두어 자 썩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목수는 버리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간신(諫臣)의 막중한 진계가 담긴 차자이겠습니까. 이미 성상의 전교를 받들고 나서는 정원에서는 삭제해야 될 곳을 삭제하게 한 다음 앙품(仰稟)하여 다시 들여서 언로를 넓혀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살피지 않아 성상께서 전체의 차자를 배척하지 않는 성대한 뜻을 끝내 헛되게 하였으니, 어찌 왕명의 출납을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의리에 흠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동부승지 이시만(李時萬)이 아뢰기를,
"어제 신이 우부승지 신익전(申翊全)과 함께 입직했었는데 간원의 차자를 도로 내어 주라는 명이 있기에 신들은 ‘상께서 도로 내어 주라고 한 뜻은 단지 조어 가운데 한 조항을 삭제하라는 것이요, 차자 전체의 내용이 불가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고 여겼기 때문에 급작스런 가운데 이 일이 미안스러운 것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삼가 헌부의 계사를 보건대, 즉시 아뢰지 않고 까맣게 깨닫지 못한 채 내어주었다는 이유로 해방 승지를 추고하라고 청하였습니다. 신이 해방 승지는 아닙니다만, 이미 상의해서 했으니 물의의 비난을 사리상 면하기 어려우므로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죄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9월 30일 신묘

경상도에 비와 눈이 섞여서 내리고 천둥이 쳤는데, 감사가 아뢰었다.

 

조익(趙翼)을 대사헌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집의로, 이행우(李行遇)를 이조 참의로, 이광재(李光載)를 지평으로 삼았다.

 

종묘에 왕세손의 책봉례를 고하였다.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조광원(趙光瑗)이 죄 때문에 파직되었다. 이때 부산(釜山)의 왜관(倭館)을 개조하려 했는데, 광원에게 그 역사를 감독하게 했었다. 왜관의 뒷담장이 매우 좁아서 왜인들이 매양 물려 쌓아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관왜(館倭)들이 다시 동래 부사(東萊府使) 민응협(閔應協)에게 청하였으나, 응협이 고집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광원이 스스로 왜관에 들어가서 지형을 살펴보고 감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홍전문에 이르렀는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왜인들이 광원을 잡아가지고 구타하였다. 좌수사 신유(辛曘)가 광원을 파출시킬 것을 아뢰고, 감사 이만(李曼)이 치계하기를,
"광원이 잘못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왜인들이 감히 멋대로 구타한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어 징계시키게 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인견할 때에 의정하라고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