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12월 9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혼전(魂殿)을 선정전(宣政殿)에 마련하라."
하였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과 여흥 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에게 봉작(封爵)하였다. 하비(下批)로 제수한 것이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습(襲), 소렴(小斂) 및 대렴(大斂) 때에는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규장각(奎章閣)의 관리, 승지(承旨), 예조 당상(禮曹堂上), 공조 판서(工曹判書),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장관(長官), 홍문관(弘文館) 관리 중의 1원(員)이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미시(未時)에 습(襲)을 행하였다.
유시(酉時)에 소렴(小斂)을 행하였다.
국장도감 시장 제술관(國葬都監諡狀製述官)에 김병국(金炳國)을, 행장 제술관(行狀製述官)에 조두순(趙斗淳)을, 시책문 제술관(諡冊文製述官)에 윤치희(尹致羲)를, 서사관(書寫官)에 윤치정(尹致定)을, 애책문 제술관(哀冊文製述官)에 이돈영(李敦榮)을, 서사관에 홍설모(洪說謨)를, 표석 음기 제술관(表石陰記製述官)에 김흥근(金興根)을, 서사관에 조득림(趙得林)을,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에 김병학(金炳學)을, 서사관에 송근수(宋近洙)를, 개명정 서사관(改銘旌書寫官)에 김현근(金賢根)을, 하현궁 명정 서사관(下玄宮銘旌書寫官)에 윤의선(尹宜善)을, 표석 대자 전문 서사관(表石大字篆文書寫官)에 정원용(鄭元容)을, 옥보 전문 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홍현주(洪顯周)를 임명하였다.
12월 10일
예조(禮曹)에서 복제 절목(服制節目)을 올렸다. 【왕위를 이은 임금은 참최(斬衰) 3년을 입되 왕위에 오르는 의식에서는 면복(冕服)을 할 것입니다. 졸곡(卒哭) 후 시사복(視事服)은 포포(布袍), 포과익선관(布裹翼善冠), 포과오서대(布裹烏犀帶), 백피화(白皮靴)로 합니다. 중궁전(中宮殿)은 참최 3년을 입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은 자최(齊衰) 1년 입을 것이며, 왕대비전(王大妃殿)은 대왕대비전과 복을 같이 입고, 빈(嬪)과 내외 명부(內外命婦), 귀인(貴人), 숙의(淑儀) 이하의 복은 중궁전의 복과 같이 입을 것입니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은 참최 3년을 입고 그 처(妻)는 자최 1년을 입을 것입니다. 수릉관(守陵官)과 시릉관(侍陵官), 내시(內侍)는 참최 3년을 입을 것이며, 일반 백성이나 승도(僧徒)는 백의(白衣), 백립(白笠), 백대(白帶)로 하고, 소상(小祥)이 지나면 그만두게 할 것입니다.】
영상(靈床)을 환경전(歡慶殿)에 이봉(移奉)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왕위에 오르고 난 뒤 중궁전(中宮殿)에 칭호를 올리는 것에 대해 수의(收議)한 초기(草記)에, 기유년(1849)의 전례대로 하라고 비답(批答)을 내리셨습니다. 중궁전을 대비전(大妃殿)으로 높이는 것에는 응당 칭호를 올리고 진하(陳賀)하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존숭(尊崇)하는 예를 종전의 국휼(國恤) 때에는 추후에 길일(吉日)을 택하여 거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윤허하였다.
12월 11일
신시(申時)에 대렴(大斂)을 행하고 재궁(梓宮)에 안치하였다.
빈소(殯所)를 만들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세 도감(都監)에 소용되는 물력(物力)을 우선 주소(鑄所)의 돈 5만 냥(兩)과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의 쌀 1,000석(石)과 콩 200석, 훈련 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의 무명 각각 25동(同)씩을 아울러 호조에 수송하여 적당히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윤허하였다.
12월 12일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왕위를 물려받을 임금의 관례(冠禮)를 행하였다.
12월 13일
성복(成服)하였다. 왕위를 이은 임금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대보(大寶)를 받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러 즉위하는 예를 행하였다. 왕비(王妃)를 높여 대비(大妃)로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받들고 희정당(熙政堂)에서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 예를 행하였다.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태황제 실록(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實錄)】
황제(皇帝)의 휘(諱)는 희(㷩)이고, 자(字)는 성림(聖臨)이고, 호(號)는 주연(珠淵)이다. 처음의 휘는 재황(載晃)이고, 자는 명부(明夫)였다. 흥선 헌의 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적실의 둘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여흥 순목 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민씨(閔氏)이다. 【본향(本鄕)은 여흥이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증 영의정(贈領議政) 민치구(閔致久)의 딸이다.】 임자년(1852) 【철종(哲宗) 3년】 7월 25일 계유일(癸酉日)에 정선방(貞善坊) 사제(私第) 【흥선 대원왕의 사제이다.】 에서 탄생하였으며, 계해년(1863) 【철종 14년】 12월 8일 경진일(庚辰日)에 철종이 승하(昇遐)하자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명으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뒤를 이어 철종 장황제(哲宗章皇帝)의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였다.
아버지는 문조 익황제이고 어머니는 신정 익황후 조씨(趙氏) 【본향은 풍양(豐壤)이다.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이다.】 이다. 처음에는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졌고, 12일 갑신일(甲申日)에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13일 을유일(乙酉日)에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34년 정유년(1897) 9월에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문무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황제의 칭호를 올릴 것을 청한 결과 17일 계묘일(癸卯日)에는 천지에 제사를 지내어 고한 다음에 황제의 지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11년 7월 19일 무신일(戊申日)에 황태자(皇太子)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었고, 대정(大正) 8년 1월 21일 【무오년(1918) 12월 20일 계유일(癸酉日)】 에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하였다. 왕위에 있은 지 44년이고, 나이는 67세이었다. 홍릉(洪陵)에 합장(合葬)하였다. 【양주군(楊州郡) 미금면(渼金面) 금곡리(金谷里)에 있으니, 을좌 신향(乙坐辛向)이다. 대정 8년 3월 4일에 장사를 지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황후(皇后)는 효자 원성 정화 합천 홍공 성덕 명성 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 민씨(閔氏)로, 【본향은 여흥(驪興)이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신해년(1851) 【철종 2년】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에 탄생하였고, 병인년(1866) 【고종(高宗) 3년】 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을미년(1895)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에 경복궁(景福宮) 곤녕합(坤寧閤)에서 승하하였으니, 나이는 45세이었다. 광무(光武) 원년(1897) 10월 12일 【정유년(1897) 9월 17일】 에 황후(皇后)로 추봉(追封)하였다. 홍릉(洪陵)이다. 【광무 원년 11월 22일에 처음 양주군(楊州郡) 청량리(淸涼里)에 장사를 지냈다가 대정(大正) 8년 2월 16일에 이곳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상(上)이 면복(冕服)으로 창덕궁(昌德宮)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한 후 조하(朝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이어서 대왕대비(大王大妃)를 받들고 수렴동청정(垂簾同聽政)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대왕대비가 적의(翟衣)를 갖추고 희정당(熙政堂)을 나와서 동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하여 앉되 앞 기둥에 발을 드리웠다. 상이 백관을 거느리고 의주(儀註)대로 예(禮)를 행한 후 전(殿) 위로 올라가 발 밖에서 서쪽 가까이에서 남쪽을 향해 앉았다. 대왕대비가 대신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단문(端門)에서 천조(踐阼)하는 예를 거행하고 수렴(垂簾)하여 함께 정사를 처결하는 의식도 거행하였습니다. 운수가 막혔던 나라의 형세가 태평하게 되고 위태롭던 백성의 마음도 안정되었으니, 모두 우리 자성(慈聖)께서 정책(定策)하여 함께 정사를 처결하도록 한 크고 성대한 공렬입니다. 임금이 정사를 하는 것은 반드시 학문에 기본을 두어야 하는 법인데,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의 도는 모두 《서경(書經)》의 이전삼모(二典三謨)에 모두 실려 있고 주(周) 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정치도 방책(方冊)에 두루 있습니다. 대체로 정사를 잘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와 백성들이 잘 사는가 못 사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임금이 공부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비록 총명과 슬기를 타고나신 성인이지만 진실로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성을 성취하고 정치의 대체를 분명히 익힐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는 나이가 어려 배움이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중에도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바로 배움에 주력해야 할 때입니다. 이끌어서 도와주고 손을 잡아 끌어주는 방도를 전부 자성에게 바라니, 항상 시간을 아끼라는 경계를 진념하여 때에 맞게 공부가 진전되는 성과를 이루도록 독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정치하는 수단에 통달하여 정사와 교화가 매우 밝아져 훌륭한 덕이 중국의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경지에 오르고 나라의 터전이 억만년토록 공고하게 된다면 종묘 사직과 백성들을 위한 우리 자성의 높은 덕과 큰 공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공제(公除) 이튿날부터 아침마다 진강(進講)하고 저녁마다 소대(召對)하여 과정(課程)을 정해 성취할 방도를 삼으소서. 이것이 바로 신의 구구한 축원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흥근(金興根)은 아뢰기를,
"한(漢) 나라 선제(宣帝)나 송(宋) 나라 효종(孝宗)은 모두 입승(入承)한 명주(明主)입니다. 신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의 구구한 기대는 그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 우(禹) 임금과 탕(湯) 임금,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대체로 전하께서는 거룩한 자태가 영민하고 슬기로우며 거룩한 자질이 고상하고 현명하기 때문에 자성 전하께서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 대책(大策)을 결정해서 맞아들여온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 자애로운 덕에 보답하려면 자성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인데, 자전의 마음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은 또한 오직 요 임금과 순 임금, 우 임금과 탕 임금, 문왕과 무왕처럼 되는 것뿐입니다. 효성스럽고 어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은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기본인데, 그 요점은 또 학문에 힘을 쓰는 데 있습니다. 학문에 힘을 쓰지 않으면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항상 이를 생각하여 힘쓰고 또 힘쓰소서."
하고,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은 아뢰기를,
"성인이 큰 보배로 여기는 것은 지위(地位)이고, 덕이 있는 사람은 거기에 해당하는 지위를 반드시 얻는 법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자성으로부터 그것을 받았는데 은혜롭게 보살피고 돌보아 주어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기약하시는 것은 이제 삼왕(二帝三王)으로 기준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효성스럽고 공경하고 부지런하고 검박한 것은 바로 성인이 되는 기본인데 성덕(聖德)을 이룩하는 것은 오로지 학문에 꾸준하게 힘쓰는 데 달려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 점을 명심하여 혹시라도 소홀하게 하지 말고 정사에 부지런하고 비용을 절약하여 우리 500년이 된 종묘 사직을 이끌어서 억만 년 무궁한 번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즉위하신 초기의 축원으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조두순(趙斗淳)은 아뢰기를,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들을 본받으며 학문에 힘쓰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은 제왕이 정치를 하는 큰 근본입니다. 우리 자성께서 무궁토록 계승될 왕위를 전하에게 물려준 것은 더없이 큰 은혜이고 더없이 대단한 덕입니다. 전하께서는 자성의 은혜와 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하늘에 닿을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매순간 항상 상제(上帝)께서 굽어보듯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고, 항상 조종(祖宗)께서 곁에 있는 듯이 생각하는 것이 바로 조종을 본받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밝혀서 학문에 힘쓰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고 복을 내리어 우리나라 억만 년 번영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고 자전의 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천만 번 지극한 마음으로 비는 바입니다."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대원군(大院君)에게 봉작(封爵)하는 것은 국조(國朝)에서 처음 있는 일인데, 모든 절차를 응당 대군(大君)의 규례대로 거행해야 할 듯하다. 대원군이 굳이 사양하고 있는데 그의 말도 괴이하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무슨 일이든 이전의 법식을 끌어다가 한다면 행하기 쉽지만 이 예(例)는 전례를 찾아볼 데가 없습니다. 나중에 상의하여 우러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여러 대신이 이미 연석에 나왔으니 지금 의논하여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김흥근(金興根)이 아뢰기를,
"이것은 처음 만드는 일이므로 갑자기 결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외 조정의 체례(體例)가 매우 엄하므로 신들과 대원군이 아마 서로 접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그렇지만 혹시 서로 만나게 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이미 서로 만날 기회가 없는 이상 예수(禮數)를 미리부터 강정(講定)할 필요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등극 교문(登極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이 차마 이런 재앙을 내려 갑자기 큰 변고를 당하였지만 왕위는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것이다. 자전의 교지를 받들고 삼가 법도를 따라서 이제 이를 반포하는 바이다. 크게 생각하건대 우리 왕조가 태평함을 이룬 것은 진실로 성신(聖神)께서 계승한 덕분이니, 깊은 명철함은 상서로움을 드러내어 6, 7대의 성인이 이어서 나타난 것은 은(殷) 나라와 비슷하고 심원한 사려로써 터전을 닦아 억만년의 복된 운수를 지닌 것은 주(周) 나라와 다름이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는 슬기로운 자질을 타고나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온순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박하여 세숫대야에까지 경계하는 글을 새겨 넣어서 성인의 수양을 쌓았으며 잠저(潛邸)에 있다가 대궐로 들어온 다음에는 백성들이 노래를 불러 칭송하고 송사(訟事)를 해결해 달라고 몰려들었다. 발을 치고 의로운 하교를 받든 것은 네 조목의 좋은 의견이며 존각(尊閣)에 높이 쌓아놓은 것은 열조(列祖)의 교훈이었다. 정성을 다하여 뜻을 봉양하여 여러 차례 옥검(玉檢)을 올리고 세 번 만세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종신토록 추모하여 서둘러 영원한 터전이 될 곳으로 능을 옮겼다. 젊은 나이에 상중에 있었으나 예절을 법대로 지켰으며 밤중까지 정사에 골몰하니 춥고 더운 데 따라 달라지는 백성들의 숨은 사정도 살피는 데에 이르렀다. 구렁텅이에 굴러 떨어졌던 무리들을 자리 위로 올려 앉히니 빈궁한 층에도 은혜가 미쳤고, 시골로 돌아간 인재들을 불러내니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이 마치 목마를 때 물을 찾듯 하였다. 조상의 공적을 백 년을 계기로 기념하여 더욱 드러나게 하자 온 나라가 기뻐하였고 중국에서 잘못 기록한 선대의 사실을 세 건이나 모두 바로잡았으니 역사책에 광채가 났다. 여러 번 상서로운 현상이 있은 것은 훌륭한 시대라는 것을 알린 것이며 여덟 글자의 아름다운 칭호는 평생의 업적을 표시한 것이었다. 14년 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누구나 성인이 나타난 것을 우러렀다. 이 때문에 수천 리 우리나라 백성들은 항상 나의 임금이 탈이 없기를 축원하였다.
조심한 보람도 없이 우연한 병에 걸려 마침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땅이 꺼진 듯 하늘이 무너진 듯 40살도 채 안 된 나이에 슬픔을 그지없이 자아냈다. 폭풍이 몰아치는 듯 우레가 우는 듯 나라 형편이 한 오리의 실처럼 위태로워진 것이 더욱 기막혔다. 우리 집안에 상사가 나자 친부모를 여읜 듯이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종묘 사직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나라에 어찌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영조(英祖)의 방계(傍系)이지만 인조(仁祖)에게는 직계 후손이다. 나누어진 지 5대가 되어 정조(正祖)의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받았고 한 집안의 정의로 순종(純宗)의 보살핌을 입었다. 목릉(穆陵)의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함에 수레가 와서 맞이하는 것을 어떻게 편안히 여기겠냐마는, 장락(長樂)의 전교가 펼쳐지니 감히 동모(同瑁)의 계승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에 계서(繼序)에 있어 고례를 존중하여 성대한 의식을 섬돌 위에서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계해년(1863) 12월 13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중궁전(中宮殿)을 대비전(大妃殿)으로 높였다. 이리하여 종실(宗室)의 계통은 길이 안정되었지만 이로부터 만백성의 기대는 바야흐로 간절해질 것이다. 축하를 위해 관리들이 모여든 대궐문에 나서서는 면류관(冕旒冠)과 곤복(袞服) 차림으로 굽어보면서 괴로운 느낌을 금하지 못했으며 조회를 위해 관리들이 모여든 대궐 뜰에 나서서는 옥새를 어루만지면서 안타까운 심정을 금치 못했다. 선왕들의 혼령이 위로 올라가서 하늘을 섬기고 아래로 내려와 백성들을 보살피면서 분주히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서라도 화순하고 근신하며 어진 이를 친근히 해야 하지만 변변치 못한 내 자질로서 어떻게 내 몸을 잊어버리고 백성들만 위하는 간고한 일에 투신할 수 있겠는가? 내가 왕위에 오른 첫날에 널리 반포하는 것이니, 너희 온 나라 사람들은 다 함께 들으라. 살리기 좋아하는 우리 자성의 어짊을 체득하여 마땅히 힘써 넓고 크게 해야 하므로 백성에게 혜택을 넓히는 전례(典禮)를 미루기로 하였다. 이에 널리 포용하는 은전을 보여 이달 13일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죄 이하를 모두 사면하라.
아! 깊은 못가에 서 있은 것처럼 얇은 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조심하여 나라의 터전을 태산반석과 같이 공고하게 다져야 할 것이다.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고 복을 내리는 것도 다 처음에 달려 있으니, 오직 하늘이 훈계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며 백성들도 이런 도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는 것이니, 의당 다 알도록 하라."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치정(尹致定)이 지었다.】
수렴 교문(垂簾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진실로 어떤 때인가? 대왕대비(大王大妃)의 밝은 명을 받들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우리 왕가에는 예가 있어 떳떳한 규례를 따라서 수렴(垂簾)하였다. 아아! 오늘날 슬프게도 하늘에서 재앙을 내렸건만 동조(東朝)께서 능히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튼튼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어린 임금이 첫 정사를 시작하는 데에 모후(母后)와 함께 처결하는 것은 응당 있는 일이다. 송(宋) 나라 선인 태후(宣仁太后)의 업적을 상고해 보면 여자로서 요(堯)나 순(舜)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또 우리 조상 때의 옛일을 상고하더라도 정희 왕후(貞熹王后)와 정순 왕후(貞純王后)의 전례를 그대로 따른 것뿐이다. 나라가 위급한 경우에도 부인의 힘으로 능히 진정하게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대궐 안에서 곤복(袞服)과 면류관(冕旒冠)의 위엄을 높이는 것은 은밀한 도움을 널리 드러내는 것이다. 위태로운 형세를 평온하게 하는 데에는 이미 옛사람이 해 온 방도가 있으니 후대의 임금들도 그것을 본받는 이외에 다른 길을 찾을 까닭이 없다. 뜻밖에도 하늘이 이런 재앙을 내렸지만 어떻게 차마 선대 임금들의 제사조차 받들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만 앉았겠는가? 임금의 상사(喪事)로 지극한 슬픔이 산천을 뒤덮고 있기는 하지만 왕위를 물려주는 문제가 너무도 엄하기 때문에 자전께서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변에 갑자기 대궐로부터 마중을 받고 들어왔으며 조종(祖宗)의 혼령이 하늘을 섬기고 사람들을 보살피느라고 위아래로 다니면서 분주히 수고하는 것을 생각하여 종묘와 사직을 담당해 나섰다. 왕실의 정통을 잇고 대왕대비를 높이 받들어야 하겠지만 과인이 너무나 어려서 모든 이치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높은 데서 떨어지기라도 할 듯이 매사에 조심하여 어려운 고비를 뚫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효유 헌성 선경 정인 자혜 대왕대비전하(孝裕獻聖宣敬正仁慈惠大王大妃殿下)는 마음가짐이 연못처럼 깊고 덕이 땅처럼 두터울 뿐만 아니라 자랄 때의 높은 교양이 명가(名家) 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주(周) 나라의 태임(太任)과 태사(太姒) 같은 성녀(聖女)로서도 미치지 못할 바였다. 영고(寧考)께서 대리로 정사를 처결하던 날에는 안으로부터 도움이 컸고 헌종(憲宗)이 생존해 계실 때에는 어머니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부지런하고 검박하여 온 대궐 안을 이끌어갔으며 명성도 높고 인망도 높아 백성들이 누구나 칭송하였다. 왕비나 대비로서 그와 업적을 다툴 사람이 없으니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으로 여러 번 높이는 칭호도 받았다. 오랜 교화 아래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기록하는 붓도 광채가 났으며 근심스럽고 슬픈 일을 두루 지내오는 과정에는 참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건만 한 번 세운 지조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지난날과 같이 정사가 잘될 때에도 오히려 힘을 빌었거늘 오늘날처럼 나라 형편이 어려운 처지에서 어떻게 도움을 청하지 않겠는가? 온 나라가 똑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에 열조(列朝)의 성전(成典)을 상고하여 위아래가 슬픔으로 경황이 없는 때에 감히 작은 정성을 외람되게 진달하였다. 내 몸을 잊어버리고 백성들만 위해야 하는 간고한 일에 투신할 결의를 다지고 다행히도 옛날의 절차를 다시 적용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어머니의 도리에 임금의 도리까지 겸하게 되니 대왕대비의 지극한 자애를 겹쳐 받게 되었고, 하늘의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이 반영되는 것이니 나라는 태산과 반석 같이 튼튼하게 되었다. 이제 백성들이 받들고 나갈 데가 있으니 소자(小子)는 팔짱을 끼고 앉아 따라가기만 하려고 한다.
아! 그 높은 덕에 대해서 백성이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오직 하늘에서 응당한 도움을 내려 줄 것이다. 깊숙이 들여다보이는 발 안에서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한다면 앞으로 만년토록 뻗어나갈 것이며, 영특하고 슬기로운 선대의 업적을 뒤이어 온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관대한 태도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치정(尹致定)이 지었다.】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어명(御名)과 어자(御字)에 대한 망단자(望單子)를 입계(入啓)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수망(首望)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원상(院相)이 성복(成服)하기 전에는 그대로 직숙(直宿)을 했으나 오늘부터는 전례대로 직숙을 그만두게 하겠습니다.’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을 빈전도감 당상(殯殿都監堂上)에 추가하여 차하(差下)하고, 이의익(李宜翼)을 국장도감 당상(國葬都監堂上)에 추가하여 차하하고, 임백경(任百經)을 산릉도감 당상(山陵都監堂上)에 추가하여 차하하고, 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김보근(金輔根)·이돈영(李敦榮)·이경재(李景在)·김학성(金學性)·정기세(鄭基世)·조득림(趙得林)·신석우(申錫愚)를 대행대왕 행장 시장 찬집 당상(代行大王行狀諡狀纂輯堂上)에 추가하여 차하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종전에는 국휼(國恤) 때 성복(成服) 후에 선전관(宣傳官)을 보내 봉성(鳳城)으로 달려가 대행대왕(大行大王)이 승하하셨다는 부고(訃告)와 사신(使臣)으로는 아무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뜻을 보고하여 북경(北京)에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선전관(宣傳官)을 뽑아 말을 주어 떠나보내게 하되, 이런 내용을 먼저 평양 감영(平壤監營)과 의주부(義州府)에 통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윤허하였다.
김흥근(金興根)을 고부 청시 겸 승습 주청사(告訃請諡兼承襲奏請使)로, 정헌교(鄭獻敎)를 부사(副使)로, 홍필모(洪必謨)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대원군 궁(大院君宮)에 주는 결수(結數)와 제택(第宅)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홍우길(洪祐吉)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합계(合啓)를 올려, 【대사헌(大司憲) 임영수(林永洙), 대사간(大司諫) 정천화(鄭天和), 사간(司諫) 홍순학(洪淳學), 장령(掌令) 이운익(李雲翼)·조연우(趙然友), 지평(持平) 정한조(鄭漢朝)·신헌구(申獻求), 헌납(獻納) 조창화(趙昌和), 정언(正言) 황신묵(黃愼默)·정종학(鄭鍾學)이다.】 ‘의관(醫官) 김홍남(金鴻男)·팽계술(彭繼述)·정재원(鄭在元)·이진하(李鎭夏)·김진(金瑨) 등을 모두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실정을 캐내어 속히 전형(典刑)을 바로 잡으소서.’라고 하니, 대왕대비가 비답하기를,
"하늘이 돌보지 않아 이런 망극한 슬픔을 당하였으니 인사(人事)와 천리(天理)가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의관들이 늘 의약(議藥)하는 반열에 있으면서 삼가고 조심하지 못한 탓에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변을 당하게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의관 김홍남·팽계술·정재원·이진하·김진을 모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