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종실록 1권 1864년 3월 1일~10일

싸라리리 2024. 12. 26. 09:41
반응형

1864년 3월 1일

 

송근수(宋近洙)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강난형(姜蘭馨)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홍문관(弘文館)에서, ‘계속 진강(進講)할 책자(冊子)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문의하여 《소학(小學)》으로 정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행 호군(行護軍) 이원조(李源祚)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들으니, ‘천하의 모든 일에는 큰 근본이 있고, 매사에는 또 각각 중요하고 간절한 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감히 그 뜻을 부연하여 하나의 근본에 네 가지 요점이라는 논의를 가지고 전하의 덕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태려고 합니다. 무엇을 하나의 기본이라고 합니까? 전하의 한 마음이 바로 만 가지 교화의 기본이며, ‘정성스럽고 진실하며 공정하고 화평하다〔誠實公平〕’는 네 글자는 마음을 보존하고 일에 대처하는 근본입니다. 무엇을 네 가지의 요점이라고 합니까?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덕을 기르며, 사소한 오락을 멀리하고 큰 법을 세우는 것은 자기의 몸을 수양하는 요점입니다. 재물을 아껴 쓰고 사치하는 버릇을 버리며, 뇌물을 막고 탐오(貪汚)를 징계하는 것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요점입니다. 겸손히 물러가는 것을 장려하고 조급하게 나서는 것을 억누르며,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구별하고 내쫓거나 승진시키는 것을 엄격히 하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요점입니다. 선비의 도리를 밝히고 괴벽하거나 음탕한 행동을 막으며, 향약(鄕約)을 장려하고 소란스러운 행동과 헛소문을 단속하는 것은 세상을 면려(勉勵)하는 요점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지려(志慮)가 정해지지 않아서 기욕(嗜慾)과 완호(玩好)가 덕성을 해치고 심술(心術)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전하로 말하면 공자께서 학문에 뜻을 둔 나이와 멀지 않습니다. 만약에 일찍부터 스스로 뜻을 세워놓고 흔들리지 않아서, 학문에서는 반드시 공자 맹자(孟子)를 기준으로 삼고, 다스리는 데서는 반드시 요(堯) 순(舜)을 목표로 삼아 광명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게 되면, 다른 날에 정령(政令)과 조치가 다 이미 몸으로 실천해 보았거나 마음으로 터득한 가운데서 우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전하는 오직 힘써야 합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인데 지금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어 극도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 원인은 사치를 금하지 못하고 뇌물을 막지 못하고 탐학한 자들을 징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폐단이 서로 원인이 되어 모든 것이 다 병드니 이 폐단을 고치려거든 반드시 왕궁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선대 임금들이 지켜온 규범을 한결같이 지켜 사사로이 바치는 물건을 물리치고 검소한 덕을 숭상하며, 형식적인 행사를 제거하고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한다면, 바람을 따라서 풀이 눕듯이 스스로 크게 변화하는 효과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상벌(賞罰)이 법도에 맞으면 누가 감히 그 뜻에서 벗어나겠습니까?

옛날 국운이 왕성한 때에는 명예를 존중하고 염치를 차리는 것을 장려한 관계로 조급하게 벼슬에 나서는 자는 배척을 받고 겸손하게 물러서는 자는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관리나 선비나 할 것 없이 벼슬자리를 얻고 과거에 오르기 위하여 저마다 부산을 피우면서 거리 가득 골목이 떠들썩하도록 날마다 몰려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령(守令)을 선발하는 데는 그 인물이 어떤가를 따지지 않고 오직 자급(資級)의 높이만 보기 때문에 잘 가려 차출(差出)하는 것도 전례를 따르는 데만 귀착되고 자주 교체시키는 것이 도리어 편의를 봐주는 결과가 됩니다. 정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은 수령이 반드시 백성을 잘 다스린 사람은 아니며, 자신을 위한 계교만 일삼는 자는 폐단이 많은 고을 맡아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형(銓衡)을 신칙하여 첫 벼슬에는 반드시 겸손하고 조용한 인물을 먼저 등용하고, 앞을 다투어 덤벼드는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며, 수령은 반드시 청렴하고 결백한 인물을 우선 선발하고, 탐욕스럽고 간교한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문학을 아는 사람이라야만 경연(經筵)의 관리로 비의(備擬)하고, 신망이 있는 사람이라야만 대각(臺閣)으로 선발하면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가 제대로 이행될 것입니다. 전하는 유의해야 합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원칙만 바로 서면 뭇 백성들이 흥하고, 뭇 백성들이 흥하면 거기에는 요사스럽고 간특한 것들이 붙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천주학(天主學)이란 것이 해외로부터 들어와서 점차로 우리나라를 물들여 놓았으나, 신유년(1801)에 크게 토벌을 행하고, 기해년(1839)에는 반포문까지 내려서 왕법(王法)을 충분히 밝히는 동시에 백성들의 마음도 바로잡았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근자에 음험하고 간사하기가 도깨비와 같은 무리들이 얼굴을 바꾸어 사사로운 이름까지 달고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서로 유인하게 하고, 귀신에 핑계를 대며 소란을 선동하는 일이 벌어집니까? 대개 바른 기운이 쇠약해지면 음침한 기운이 떠돌고, 유교(儒敎)가 숙어들면 음탕한 것이 고개를 추켜들기 마련입니다.

원칙이 바로서지 못하고 도리가 밝게 되지 못한 것이 어찌 나라의 수치가 아니고 선비나 관리들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 도(道) 안의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윤번으로 강론(講論)하는 모임도 열고 향약(鄕約)도 다시 밝히려고 하나, 조정의 행회(行會)가 있은 뒤에야 그 위력을 빌어서 딴소리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묘당(廟堂)에서 본도(本道)에 관문(關文)을 보내 통(統)과 호(戶)에 대한 법을 엄격히 시행하여 동리마다 잡된 무리들이 발을 붙일 수 없게 하며, 삭강(朔講)에 대한 규정을 다시 시행하여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의 선비들로 하여금 《효경(孝經)》 《소학(小學)》 등의 책을 통독하게 하여 과시(科試)의 조흘(照訖)을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식년과(式年科)에 도(道) 자체에서 추천하는 규례 이외에도 경서(經書)에 밝고 주서(朱書)에 능통한 인물을 따로 천거하게 하여 규례에 따라 등용하여 정조(正祖)의 규례를 따른다면 아마 이 시대를 면려(勉勵)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전하는 경계하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모든 항목에 기본도 있고 요점도 있으니 응당 유념하겠다. 그리고 향약(鄕約)을 다시 밝히거나, 초하루마다 강(講)받는 규정을 복구하거나, 경서에 밝은 선비를 따로 천거하는 등의 내용들은 모두 충분히 바른 도리를 밝히고 요사스런 소리를 가라앉힐 만한 것으로써 좋은 의견이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김병준(金炳駿)이 상소하여 권면하고 이어 만장 제술관(輓章製述官)을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삭제(朔祭)를 겸하여 지냈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건조(鄭健朝)가, ‘위도 첨사(蝟島僉使) 김윤항(金潤恒)이 탐욕스럽고 불법을 자행하므로 우선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은 유사(攸司)에게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니, 대왕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이 자들은 오랫동안 고생스런 자리에 있으면서 애쓰다가 진장(鎭將) 한 자리를 얻었는데, 그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정상이 불쌍하고 또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매번 용서해 주면서 심하게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소할 곳 없는 백성들이 그들의 침해와 학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곳곳이 그러하니, 어찌 가엾은 노릇이 아니겠는가? 이런 자들을 한 번 호되게 징벌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탄환만한 그 조그마한 섬에서 3,000냥(兩)이나 탐오하는 큰 죄를 저질렀으니, 양심도 없고 두려움도 모르는 행동으로 더욱 극히 해괴한 일이다.

위도 전 첨사(蝟島前僉使) 김윤항은 해당 수사(水使)에게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은 가운데서 엄하게 곤장 30도(度)를 친 다음 원악도(遠惡島)로 보내 종신토록 노비로 삼게 하라. 차후로 변장(邊將)의 전최(殿最)를 감히 종전과 같이 전례에 따라 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살펴가면서 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각도(各道)의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들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3월 2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동학(東學)이라고 일컫는 것은 서양의 사술(邪術)을 전부 답습하고 특별히 명목만 바꿔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조기에 천토(天討, 하늘의 뜻으로 죄를 물어 처벌한)를 행하여 나라의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 중국의 황건적(黃巾賊)이나 백련교(白蓮敎)라는 도적들처럼 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대왕대비(大王大妃)의 자세한 전교는 간악한 것을 밝혀내고 요사스러운 것을 들추어내어, 그 죄상을 낱낱이 밝히면서도 죄지은 자를 가엾게 여겨 보살펴주는 뜻을 베푼 것이므로 참으로 엄숙하게 여기고 우러르는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조사한 문건에서 단정한 내용을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최복술(崔福述, 최제우)이 그들의 두목이라는 것은 자기 자백과 사실 조사를 통한 단안(斷案)이 있으니 해당 도신(道臣)에게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은 가운데 효수(梟首)하여 뭇사람들을 경각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강원보(姜元甫) 등 12명은 분등(分等)하여 형배(刑配)하고, 그 나머지의 여러 죄수들은 도신에게 등급을 분등하고 참작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이 자들은 서로 물들여 도당(徒黨)을 이룬 죄로 조율(照律)하면 처음부터 피차(彼此)와 천심(淺深)의 구별이 없으니, 전부 처분을 내린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없지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대왕대비의 덕을 받들어 억지로 차등을 두었습니다. 정학(正學)이 밝아지지 못하고 사설(邪說)이 횡행하므로 혼란을 좋아하고 재화(災禍)를 즐기는 무리들이 거짓말과 헛소문을 퍼뜨려 점점 젖어들고 익숙하게 하여 결국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경상도(慶尙道)는 우리나라에서 노(魯) 나라 추(鄒) 나라와 같이 음악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 않던 고장이었으나, 이런 일종의 요사스러운 무리들이 나타나서 많은 도당(徒黨)을 집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야말로 음(陰)과 양(陽)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기회와 같은 것입니다. 삼가 등대(登對)한 자리에서 따로 진달하려고 합니다만, 먼저 이런 내용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모레에 사찬(賜饌)할 것이니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들, 전후 시강(侍講)에 참가한 강관(講官)들,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들, 승지(承旨)들, 사관(史官)들, 규장각(奎章閣)의 관리들은 모두 들어와서 대령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어서 강론(講論)할 날짜를 7일로 정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방인의 투서(投書)는 비록 거래를 통하여 물건을 사고팔자는 말에 지나지 않지만, 필시 우리나라 사람들 속에 내통한 자가 있음은 분명 도신(道臣)의 장계(狀啓)와 같을 것이다. 변경의 금령이 전부 없어진 것은 극히 놀라운 일이다. 평소에 단속을 잘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하는 도신과 북병사(北兵使)에게 모두 월봉(越俸)의 법을 시행하고, 각별히 엄중하게 조사하여 치계(馳啓)하라는 뜻으로 묘당(廟堂)에서 말을 잘 만들어 공문을 보내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의주 암행어사(義州暗行御史) 이응하(李應夏)를 소견(召見)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심이택(沈履澤)의 일이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지극히 통탄할 일이다."

하니, 이응하(李應夏)가 아뢰기를,

"서계(書啓)에 이미 자세히 써 올렸지만 그가 탐오한 수량은 심히 많습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이 청렴한가 청렴하지 못한가는 그저 포삼(包蔘) 한 가지에만 달려 있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범한 허다한 장물(贓物)이 이밖에 또 있다고 하니, 더욱 나도 모르게 통탄하게 된다."

하였다.

 


3월 3일

 

의주 암행어사(義州暗行御史) 이응하(李應夏)가 올린 서계(書啓)에,

"전 부윤(府尹) 심이택(沈履澤)은 그저 뇌물을 주고받는 것만 일삼고 순전히 재물을 거둬 들이는 것만 힘썼습니다. 크고 작은 정령(政令)은 뇌물이 아니면 되는 것이 없고, 크고 작은 읍무(邑務)는 곳곳마다 병들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탐학한 짓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한 고을이 탕진되고 말았습니다.

임술년(1862)과 계해년(1863)에 부(府)에서 작미(作米)할 것을 작전(作錢)하면서 이익을 남겨 먹었고, 환곡(還穀)과 양향곡(糧餉穀)을 그대로 사용(私用)으로 돌렸으며, 변진(邊鎭)의 군적(軍籍)까지 제멋대로 삭감(削減)하여 제 뱃속만 채운 자취를 가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세 섬을 개방하고 물건을 팔아먹으면서 국경에서의 신용 문제를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사상(私商)에게서 뇌물을 받고 몰래 국경을 넘겨주고, 포삼(包蔘)에 대해 세금을 더 부과하여 강제로 받아먹었습니다. 매임(賣任)과 매과(賣科), 그리고 부민(富民)들로부터 재물을 강탈한 것이 도합 27만 3,700냥(兩)에 달합니다. 탐학스럽고 법을 어긴 행위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으니, 그 죄상을 유사(攸司)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낙유(金洛裕)는 주진(主鎭)을 빙자하여 가로채고 강탈한 것이 2,500여 냥이나 되며, 법을 무시한 허다한 행위는 이루 다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범한 바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으니, 그의 죄상을 유사(攸司)에게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이 어사(御使)의 계사(啓辭)를 보니, 심이택(沈履澤)의 낭자한 탐오(貪汚)가 어찌 이처럼 심한 것인가? 변경의 관문인 중요한 지역에서 이런 죄를 저질렀으니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꾸민 것과 그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선 형구(形具)를 채워 나수(拿囚)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의금부(義禁府) 당상(堂上)을 패초(牌招)하고 개좌(開坐)하여, 심이택(沈履澤)이 범한 죄상을 어사의 계사(啓辭)에 있는 조목으로 문목(問目)을 만들고, 엄히 형신(刑訊)하여 공초(供招)를 받아서 들이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의금부(義禁府)의 당상(堂上)은 재일(齋日)에 구애받지 말고 빨리 거행 하라."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어제 위도 첨사(蝟島僉使)의 문제 때문에 신칙하는 전교를 내린 바 있다. 지금 어사(御史)의 계사(啓辭)를 보니,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낙유(金洛裕)의 허다한 탐오(貪汚)는 위도(蝟島)의 일보다도 더 심한 편이다. 이런 자들이 감히 이런 죄를 범하는 것은 역시 윗관리의 무례함을 본받아서 그런 것인가? 마디마디가 다 통분한 것이다. 김낙유를 해당 수신(帥臣)에게 군사와 백성들을 많이 모아놓은 가운데 죽을 정도로 엄히 곤장 30대를 친 다음, 원악도(遠惡島)로 보내 종신토록 노비로 삼아서 징계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라."

하였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향(香)을 올리고 겸하여 조전(朝奠)을 지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4일

 

유치선(兪致善)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의주부(義州府)를 본래 부유한 고을이라고 불러오는 것은 중국의 물품이 드나들기 때문에 그런 것에 불과한 만큼 본래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선비로서는 응당 조심하고 삼가야 할 바이다. 그런데 가끔씩 비난과 의심을 면치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것만도 너무나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심이택(沈履澤)이 낭자하게 범장(犯贓)한 것은 또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이 많으니, 놀랍고 분통 서러운 마음이 극도로 이르렀다.

그의 직책은 3품의 고관이고, 그의 임무는 서쪽 관문의 자물쇠이다. 그런데 중한 자리를 맡긴 뜻과 지위와 명망이 특별하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하늘이 의주 고을을 설치한 것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땅으로 삼으라는 것으로 보아 만족할 줄 모른 채 탐욕을 부려 한 고을이 결딴나게 하였고 원망과 비난이 한꺼번에 일어나 이웃 고을에까지 소문나게 하였다. 그러니 나라에 법이 있고 또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의 아비가 호서 지방에서 더러운 짓을 한 것만도 이미 요행으로 죄에서 벗어난 것 가운데서 큰 것인데, 그가 지금 또 임금의 은혜를 잊고 나라를 저버렸으니, 대대로 악한 짓을 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와 같은 자에 대해서 중한 형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서쪽 지방의 백성들에게 사과하겠으며, 어떻게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겠는가? 금오 당상이 큰 거리에서 개좌(開坐)하여 심이택을 엄하게 한 차례 형신(刑訊)한 다음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되, 가장 빠른 속도로 압송하라."

하였다.

 


3월 5일

 

양사(兩司)에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의 대략에, 【행 대사헌(行大司憲) 송근수(宋近洙), 대사간(大司諫) 강난형(姜蘭馨), 장령(掌令) 강진규(姜晉奎)·정의연(丁義衍), 지평(持平) 박창수(朴昌壽), 헌납(獻納) 이운필(李雲弼), 정언(正言) 공유동(孔有東)이다.】

"삼가 대왕대비께서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심이택(沈履澤)을 섬에 안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아! 탐오한 풍조가 비록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찌 심이택과 같이 불법을 저지른 자가 있겠습니까? 관직을 팔고 과거(科擧)를 팔며, 환곡을 억지로 꾸어 주고 강제로 징수하여 그 동안 범장(犯贓)한 것이 자그마치 27만 냥이 넘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중한 형벌에 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에 국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집안이 악행을 저지른 것은 그의 아비 때부터 그러하였습니다. 그의 아비는 일찍이 호서 지방을 안찰할 때 백성들에게 독을 끼쳐 그 더러운 냄새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는데 지금까지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 이것은 이미 형벌을 크게 잘못 쓴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일어난 집에 대한 일은 더욱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 인현 왕후(仁顯王后)께서 사시던 사저(私邸)입니다. 인현 왕후께서 그 당시에 사시던 집에 감고당(感古堂)이란 편액을 걸어 두고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거처하지 못한 채 자물쇠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서 마치 신령이 깃들여 있는 곳처럼 받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히 마음대로 뜯어고쳐 옛 모습을 바꾸어 하인배들이 뒤섞여 거처하는 방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할 수 있는 짓이겠습니까?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분의(分義)를 생각지 않았으니, 크게 불경스럽고 너무나 무엄합니다. 국법으로써 죄를 준다면 그 죄가 어디에 해당하겠습니까?

이는 대개 탐오한 마음이 오히려 만족할 줄을 모른 탓에 또다시 그의 아들을 부추겨서 그 못된 습관을 답습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골수를 뽑아낸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른 것입니다. 자전의 전교 가운데서 처음에는 군사를 일으켜서 화란을 불러들인 데에 비유하였고, 끝에서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것으로 단정하였으니, 하늘이 분명하게 굽어보고 단안(斷案)이 저절로 갖추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참작하여 조처하였다는 명이 갑자기 내려져 죄에 맞게 형벌을 시행하지 못한 탓에 왕법이 시원스럽게 펴지지 못하고 여정(輿情)의 울분이 조금이나마 씻길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왕대비전께 여쭈어 섬에 안치한다는 처분을 환수(還收)하고 다시 엄하게 형신하여 속히 합당한 형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서 대각(臺閣)에서 만약 일찌감치 논핵(論劾)하였다면 이런 죄를 짓기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처분한 뒤에 이처럼 소란스럽게 구는 것이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 자식 때문에 그 아비까지 논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게 떠벌리는 것이니,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두 번째로 올린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심이택(沈履澤) 부자에게 해당 형률을 시행하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법을 맡은 관사에서 감단(勘斷)한 것에 대해서는 의당 율례(律例)를 원용(援用)해야 한다. 그러나 특별 전교를 내려 처분한 것은 사체가 같지 않으니, 이처럼 누차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감고당(感古堂)을 차마 고친 것은 더할 수 없이 불경스러우니, 심의면(沈宜冕)을 영원히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방축향리(放逐鄕里)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죄가 찬배(竄配)에 이른 것은 원래 가벼운 형이 아니다. 그러니 당사자는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면서 들어박혀 몸을 숨기고서 숨을 죽인 채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도리 상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가 않아서 거처와 입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이 없으며, 심지어는 뇌물이 서로 잇달고 청탁이 성행하기까지 하니, 어찌 놀랍고 못된 짓이 아니겠는가? 장오죄를 저질러서 유배 중에 있는 자로서 마치 명절(名節)이나 세운 듯이 보아 그가 이르는 곳에 도리어 일대 폐단만을 더하고 있으니, 이것이 가장 통분 서럽다. 준 자와 받은 자를 같은 형률로 처단하되, 단연코 응당 죄가 드러나는 대로 그 즉시 처단하라고 말을 만들어서 도신(道臣)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라고 묘당에 분부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빈전도감(殯殿都監)의 물력이 전에 나누어 준 것은 이미 다 떨어져서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선혜청의 쌀 30석(石)과 어영청의 무명 3동(同)을 획급(劃給)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홍종운(洪鍾雲)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장령(掌令) 강진규(姜晋奎)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첫 번째는 성상의 기질을 수양하는 것입니다. 그 조목으로는 네 가지가 있는데, 근신(近臣)을 잘 선발하는 것과, 올바른 선비들을 가까이하는 것과, 혼자 있을 때 삼가는 것과, 충고하는 말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성품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고 기질은 자신에게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 기질이 맑으냐 탁하냐 순수하냐 잡스러우냐에 따라서 성품이 갖추어지기도 하고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품은 하는 것이 없는 것이고 기질은 정해진 바가 있는 것입니다. 하는 바가 없는 것은 수양하기가 어려우나 정해진 바가 있는 것은 힘써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질을 수양하는 것이 바로 성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기질은 아주 맑고 순수하여 본래 바로잡거나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반드시 밖으로는 곧고 참된 사람의 도움을 받고 안으로는 마음가짐을 엄밀하게 하여, 이것으로 덕을 닦고 도를 닦는 근본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하물며 임금은 억조창생이 떠받드는 주인으로서 지극히 존귀하여 하루에 세 번 신하들을 접견하는 것도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더없이 엄하고 중하여 구중궁궐이 깊숙하기가 하늘과 같으며 아침저녁으로 모시면서 좌우를 떠나지 않는 자는 오로지 궁첩들과 환관들뿐입니다. 이에 임금의 동정을 엿보아서 농간을 부리는 계책을 성사시키고 임금의 희로를 살펴서 자신들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대로 올리고 내려서, 임금의 덕을 손상시키고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일종의 이익만을 탐하고 염치라고는 전혀 없는 세간의 무리들이 혹 이들과 연줄을 맺어 서로 결탁하고는 이것으로 임금의 총애를 굳히고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를 도모하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지난 역사책에 모두 적혀 있어서 지난 일들을 소상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는 치밀하게 법제를 정하여 궁중과 관청이 일체가 되어 이런 무리들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기강이 해이되어 궁인과 내시들 사이에 방자하고 교활한 습성을 가지고 조정의 정사에 참견하는 경우도 이미 있어 왔습니다. 지금 새로 즉위하여 정사를 펴는 때를 당하여 이러한 폐단의 근원을 막지 않고 화란의 싹을 잘라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처음 즉위해서 정사를 바르게 하는 데 누를 끼치고 뒷날 치도의 해가 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이들 무리는 재주 있는 자치고 죄를 짓지 않는 경우가 드물고 능력 있는 자치고 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교묘한 자를 배척하고 속이는 자를 물리친다면 행동에 있어서 탐내거나 방자한 손해가 없고 충성스럽고 올바른 말이 들어오는 효과가 있어서, 수양을 쌓은 것이 두텁고 깊어져서 대성인의 기질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어렸을 적에 바른 도리로 기르는 것은 성인이 하는 공부이다.’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성상의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조목으로는 세 가지가 있는데, 기호와 욕심을 절제하고, 놀이와 구경거리를 멀리하며, 놀러 다니는 것을 때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형체가 있으면 감정이 있게 마련이고, 감정이 있으면 욕구가 있게 마련이라고 합니다. 사물에 감응하여 쉽사리 동하게 되는 것이 감정이고, 감정으로 인하여 쉽사리 흘러나오는 것이 욕심입니다. 무릇 조그마한 몸을 가지고 여러 가지 욕구가 들이쳐 공격하는 위치에 처해 있으니, 마음이 외물(外物)에 침해를 당하여 끌려가지 않을 자가 거의 드뭅니다. 하물며 임금은 숭고한 지위에 앉아 있고 뜻대로 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처해 있습니다. 진귀한 보배와 고운 궁첩들을 접하고 즐거운 연회와 재미있는 놀이는 모두 할 수가 있으니, 만일 참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결단을 내리고 한계를 정해 지켜 나가면서 절제하고 멀리하지 않는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때 저절로 감정이 야기되는 것을 어떻게 털어 버리고, 생각하는 가운데서 갑자기 욕구가 생겨나는 것을 어떻게 억누르겠습니까?

처음에는 그저 한번 시험 삼아 해 본다는 것이 중간에 이르러서는 차츰차츰 거기에 매이게 되고, 오래 지나서는 거기에 푹 빠져 들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에 정신이 흐리멍덩해지고 뜻이 완전히 없어져서 순환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어 마음의 병이 되고 맙니다. 일상생활 가운데서 마음을 유혹하는 외물(外物)들 치고 그 어느 것이 사람의 마음을 결딴내고 손상시키는 도구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술과 여색이 그 가운데서 심한 것이고, 놀러 다니는 것이 그 가운데서 큰 것입니다. 이것들은 가까이하기가 쉬우므로 막기가 어렵고, 다가가기가 편하므로 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들에 대해서 확고한 태도로 대응하고 훌쩍 털어 버려 누가 되지 못하게 하지 못한다면, 부딪히는 곳마다 방해를 받고 하는 일마다 막혀서 마음을 다잡아 법도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능히 고요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를 지켜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법도에 맞지 않으면 준행하지 않아 마음가짐을 높고 밝게 가지고 감정을 담박하고 한가하게 가져, 이것으로 하늘에서 지혜를 내리게 하고 역년(歷年)을 누리게 한다면, 우리나라 동방의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상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조목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전일하게 하고, 확고하게 하며, 장구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하의 일치고 뜻이 없는데도 능히 일을 이루는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무릇 활쏘기는 말단의 재주입니다마는 화살을 잡은 사람은 뜻이 적중시키는 데 있고, 바둑을 두는 것은 하찮은 재주입니다마는 내기를 하는 사람은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천 리나 되는 길이 멀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쉬임없이 걸으면서 멈추지 않는 것은 가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이고, 태산의 꼭대기가 높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서 쉬지 않는 것은 내려다보아야겠다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다스림을 펴는 큰일이겠습니까?

뜻을 세운 것의 크고 작음과 깊고 얕음에 따라서 각자 이루는 바가 다르지만, 이룬 것에 대한 시비와 득실은 오로지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세운 것이 전일하지 않으면 가졌다 말았다 하면서 다른 데 미혹될 수 있고, 확고하지 않으면 나갔다 물러갔다 하여 외부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으며, 장구하지 못하면 시작했다가 끝내지를 못하여 성과가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이제 막 즉위하여 하늘의 명이 바야흐로 새롭습니다. 그러니 바로 분발하고 가다듬어서 가장 뛰어난 임금의 자리를 예전의 현명한 임금들에게 양보하지 말고, 우뚝하게 스스로 지극히 선하고 어진 영역에 처해야만 할 때입니다. 처음을 삼가고 끝맺음을 잘하며,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 있게 한다면 큰 근본이 서게 되어 크게 세웠던 뜻을 크게 이룰 것입니다.

네 번째는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 조목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명유(名儒)를 잘 선발하는 것과, 경연에 자주 나가는 것과, 강관(講官)을 오래도록 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오로지 실제적인 것을 얻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아!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데 시속에 휩쓸리는 보통 사람을 뽑아 그 자리에 앉히며, 임금 곁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인데 식견과 견문이 얕은 사람을 뽑아 참여시킨단 말입니까? 그저 자급에 따르고 직급에 맞추어 아침에 갈았다가 저녁에 바꿔서 그 임무를 맡을 자들을 대부분 편함만을 따라 구차스럽게 채워 넣으니, 강연에 나아가서는 대충대충 말막음이나 하는 것을 일삼고, 당직에 나아가서는 희희덕거리면서 희롱판이나 벌이기를 힘쓰며, 조금이라도 옛 고사에 관계된 것이 있으면 지루하다고 말하고, 약간이나마 무슨 일을 진달하면 오활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임금의 마음도 역시 싫증이 생겨나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여겨 관심을 두지 않고, 이로 인하여 경연 자체를 정지하여 형식적인 것마저도 폐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름에 맞게 착실하게 실행하면 실제적인 효과를 볼 수가 있는 법이며 오늘날에 처해 있으면서 옛것을 본받으면 예전의 도를 회복시킬 수가 있는 법으로, 오로지 성실하게 행하느냐 불성실하게 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품성과 행실이 단정하여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고, 문장이 뛰어나서 옛날과 지금에 통달하며, 경학이 깊고 깊어서 오묘한 이치를 천명할 수 있는 자를 경연에 앉혀 두되, 그 직책에 오래 있게 하여 다른 일에 간여하게 하지 말고, 예절을 간소하게 해 불시에도 대면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하 간에 성심이 서로 통하고 안면이 익숙해지게 해,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고 말을 할 경우에는 다 말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역시 스스로 생각을 하여 한 자를 알면 한 자를 실천하고 한 구절을 알면 한 구절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들이 오랫동안 쌓여서 마음이 이치와 더불어서 함양되어 푹 젖어들어 무르익은 맛이 있게 하고, 습관이 성품과 더불어서 이루어져 거슬려서 어긋나는 걱정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이것으로 상황에 대응하고 사태의 근원을 파악하여 태평스러운 다스림을 오게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부열(傅說)이 말하기를, ‘종시토록 학문에 부지런하면 덕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닦여지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섯 번째는 급선무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 조목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변화시키며, 사치풍조를 금하고, 관작을 아끼며, 장오죄에 대해 엄하게 처벌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일을 일으키고 공을 거두는 것이 기강에 달려 있는데, 기강이 해이됨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점차 물들어서 습성을 이루는 것은 풍속에 달려 있는데, 풍속이 무너짐이 지금보다 더 심한 때가 없습니다. 이는 대개 위에서 행하는 것이 고식적으로 그날그날 보내기만 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본받는 것이 힘이 없고 산만하기만 해서 그런 것입니다.

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친소에 따라 달리하여 가볍게 하였다가 무겁게 하기도 하여 시행하는 것이 한결같지가 않고, 명령을 내림에 있어서는 일정치 않은 번거로움이 있어서 시행했다 안 했다 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합니다. 전조(銓曹)는 다른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는 관사인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감히 자신들의 주견대로 의망(擬望)하지 못하고, 대간이 어찌 남의 눈치나 살피는 자리이겠습니까마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하찮은 일에 대해서도 반드시 먼저 물어봅니다. 관찰사가 수령들의 치적(治績)을 고과(考課)함에 있어서는 세력의 강약에 따라 평가를 하고, 의금부에서 죄에 율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친분 관계를 보아 높이고 내리고 합니다. 요행수를 노리는 문이 열려 아부나 하는 비루한 무리들이 틈을 타고서 몰려들고, 이익을 꾀하는 길이 아주 많아져서 강포하고 교활 자들이 세력을 빙자하여 이익을 독점합니다.

이에 국가에 바치는 세금과 공공의 재화가 모두 다 장사꾼들의 밑천이 되고, 과거 시험을 치르는 장소가 마치 시장판처럼 되었습니다. 국가의 체모가 날로 낮아지고 백성들의 뜻이 날로 투박해져 염치가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예의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다시는 국법과 금령이 두려운 것인 줄을 모르고, 명분과 의리가 귀한 것인 줄을 모릅니다. 아! 국가이면서 법이 없으니 어떻게 나라 꼴을 이룰 수 있겠으며, 사람이면서 염치가 없으니 또한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재용(財用)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백성들이 먹고 생활하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정이 있는 재물을 가지고 한량이 없는 소비에 대고 있습니다. 높다랗고 큰 상에 차린 음식이 수저도 닿지 않은 채 종이나 말이 다 먹어치우고, 고대광실이 아무런 쓸모도 없이 산이나 강기슭에 즐비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다 곤궁한 백성들의 돈인데도 긁어 들여 백성들로 하여금 시래기죽도 못 먹고 누더기 옷도 못 입은 채 길거리에서 뒹굴게 하는 것입니다.

작록이란 임금이 세상 다스리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진지 어리석은지는 따지지 않은 채 사람을 위해 관직을 택하여, 제수하는 전지가 내리기도 전에 벌써 누구라는 말이 떠돕니다. 수령이란 한 지방의 휴척(休戚)을 맡고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뇌물의 많고 적음만을 보아서 임명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닭 울음소리나 내고 개 짖는 소리나 낼 줄 아는 재주를 가진 자나 남의 심부름꾼이나 하는 천한 자들도 역시 수령 자리를 얻어 나갑니다. 이 때문에 오로지 긁어 들이기만을 힘써 뇌물을 잇달아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그런 사실들이 낭자하게 드러나서 여러 사람들의 입을 막을 수 없게 됨에 이르러서는, 또 고신(告身)이나 몇 등급 빼앗기고 몇 달간 유배 보내는 형벌을 받는 데 그치며, 범장한 재물을 추징당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벼슬길에 나와 조금도 하자가 없는 양 좋은 청현직(淸顯職)이건 큰 고을의 수령이건 못 하는 벼슬이 없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무엇을 꺼려서 탐오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도를 말미암아서 오늘날 하고 있는 짓을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비록 산도(山濤)와 같이 강직한 사람으로 하여금 인사권을 맡게 하고, 황패(黃霸)와 같이 청렴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령 자리를 맡게 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시간을 아끼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시간이라는 것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며, 잃기는 쉽고 되찾기는 어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 정사를 펴는 때는 새로운 정사를 펼 수 있는 기회이고, 나이 어렸을 때는 미리 잘 수양할 수 있는 시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순수하게 함양하고 친절하게 강론하되, 1분 1초라도 아끼면서 날마다 새롭게 하여 두텁게 쌓고 깊게 파고드는 기반을 마련하여야 할 시기인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에 미쳐 다잡아서 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생각이 점차 복잡해지고 정사가 번거로워지는 시기에 이르게 되면, 성상의 마음이 오늘날처럼 맑고 깨끗하여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보전할 수 있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세월은 물과 같아서 한번 흘러가 버리면 되돌릴 수 없는 법이고, 본령(本領)은 보람이 없어서 한번 잃어버리면 보충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그때를 당해서는 아무리 충성스러운 말과 좋은 계책이 날마다 앞에 올라오고 따르고 싶은 의욕과 후회하는 탄식이 날마다 가슴속에 간절하다 하더라도 때는 이미 늦었으니, 어떻게 미칠 수가 있겠습니까?

송 나라의 신하 주희(朱熹)가 그 임금에게 고하기를, ‘오직 신만이 얼굴이 쭈글쭈글해지고 머리털이 하얗게 세어서 죽을 날이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가 폐하의 얼굴을 우러러 보니 지난날의 젊은 얼굴이 아님을 깨닫겠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매번 글을 읽다가 이 구절에 이르러서는 거듭거듭 탄식하다가 끝내는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우선 내일을 기다려서 해보자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우리 전하께서 길한 점괘가 나오는 데 응하고 상갑(上甲)의 운세를 만나 의탁할 곳이 없던 종묘 사직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고 살아갈 길이 없던 백성들이 살아날 길이 생기게 되어, 위태롭던 형세가 반전되어 태산반석처럼 튼튼해지고 눈물을 흘리던 슬픔이 노랫소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팔도의 백성들이 모두들 목을 길게 빼고 눈을 크게 뜨고서 새로운 교화가 펴지기를 바라다보고 있으니, 지금은 바로 인심이 흩어지고 모이는 시기이고 천명이 떠나가고 돌아오는 기회인 것입니다. 만약 경동시키거나 진작시키는 방도를 취하여 백성들의 뜻을 크게 감복시키지 못해, 잔뜩 기대를 걸고 바라보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쓸쓸히 돌아서게 하고 기세 좋게 일어서던 사람들로 하여금 맥없이 주저앉게 한다면, 신은 그럴 경우 아마도 민심을 수습하기가 평상시보다 더욱더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이 돌보아 주는 것을 항시 생각하고 대왕대비전께서 훈계하고 이끌어 주는 것을 잘 체득하여 모든 위세와 권한을 틀어잡고 신하들을 독려하소서. 녹봉과 품계가 높고 낮은 것으로 현부를 나누지 말고 오로지 재주와 능력만을 볼 것이며, 자기 개인의 기쁨과 슬픔을 가지고 형벌과 상을 내리지 말고 밝고 공평하게 할 것이며, 고식적으로 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지 말고 오랫동안 확고하게 밀고 나갈 계책을 세울 것이며, 형식적인 겉치레만을 하지 말고 서둘러서 사실을 따져 시행하는 정사를 펼 것이며, 긴급하지 않은 공사를 일으키지 말아서 백성들의 힘을 손상시키지 말 것이며, 근거도 없는 규례를 따라서 옛 법을 무너뜨리지 말 것이며, 물품을 바치는 문을 열어서 사사로운 청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유사(有司)의 일을 침해하여 임금의 마음대로 일을 시행하지 말 것이며, 한갓 소문만 먼저 내지 말고 참마음을 미루어서 실제적인 일을 할 것이며, 한갓 말단적인 일만 하지 말고 조정을 바로잡아서 백관을 바로잡도록 할 것이며, 관작을 가지고 사사로운 은혜를 베푸는 데 쓰지 말고 반드시 공이 있고 덕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 장려하는 뜻을 생각할 것이며, 자질구레한 행동으로 큰 덕에 누가 되게 하지 말고 예절과 의리로 억제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소서.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무궁한 기업을 넓히고 만대토록 영원할 태평성대의 기반을 연다면, 신은 비록 구렁텅이에 뒹굴고 산골짜기에서 말라 죽는다 하더라도 꿈틀거리는 벌레나 가녀린 풀들과 함께 임금의 은택을 온몸 가득 받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아주 좋으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3월 6일

 

원의 계사(院議啓辭)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정선(尹定善), 동부승지(同副承旨) 박도빈(朴道彬)이다.】

"심의면(沈宜冕)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방축향리(放逐鄕里)하라는 명을 속히 거두고 대간들의 청을 쾌히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이 있었다. 그것을 경하다 중하다 따지는 것은 승정원(承政院)의 직책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즉시 반포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려, 【응교(應敎) 이정로(李正魯), 부응교(副應敎) 오준영(吳俊泳), 교리(校理) 홍순학(洪淳學), 부교리(副校理) 이응하(李應夏)·채동술(蔡東述), 수찬(修撰) 홍헌종(洪軒鍾), 부수찬(副修撰) 조창화(趙昌和)이다.】

"심이택(沈履澤)의 부자에 대한 대간의 청을 빨리 윤허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간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처분을 내렸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장황하게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7일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통영(統營)은 남쪽 변경의 중진(重鎭)으로 관계되는 것이 작지 않은데, 근래에는 모든 일이 잔폐되는 것이 날로 심해진다고 하였으니, 폐단의 근원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수신(帥臣)이 된 자가 그 자신이 어떠한 책임을 맡고 있고 그 지역이 얼마나 요충지인지 생각하지 않은 채, 정신을 쏟는 것과 전곡(錢穀)을 낭비하는 것을 융무(戎務)에는 쓰지 않고 다른 곳에다 써서, 병선(兵船)과 군기(軍機)는 썩도록 내버려 두고 기용(器用)과 복식(服飾)은 아주 정교하게 해서 그런 것이다. 이에 그런 것들을 많이 만드느라 운반선이 줄을 잇고 있어서 마치 당초에 통영을 설치한 것이 오로지 그런 일들을 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처럼 되고 말았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동남 지방의 백성들이 환향(還餉)에 시달리고 있는데, 해영(該營)에서 작전(作錢)한 것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 갑자기 변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실로 화란에 대한 방비와 군영을 중하게 여겨서이다. 지금 민력을 다 털어서 곤수(閫帥)들의 뇌물 밑천을 대고 있는데, 이런 폐단이 어느 해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심한 경우에는 가렴주구하며 긁어모으면서 못하는 짓이 없어서, 바닷가에 사는 곤궁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조차 없게 하고 있으니,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어찌 수령들이 탐학을 부리는 것에 비하겠는가?

지금 기강을 바로잡는 시기를 당하여 우선 지난 일을 따지지 않고 다만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만을 보려고 한다. 이와 같이 경책한 뒤에도 만일 종전의 버릇을 답습하는 자가 있다면 단연코 용서하지 않고 군율(軍律)을 시행하겠다. 하직하는 통제사(統制使) 이봉주(李鳳周)를 계판(啓板) 앞에다가 불러다 놓고 전교를 듣게 한 다음 이 전교를 새겨 해영에 게시해 놓고 항상 보게 하라."

하였다.

 

 

임백능(任百能)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홍병수(洪秉壽)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 정건조(鄭健朝)와 제주 전 목사(濟州前牧使) 정기원(鄭岐源)의 장계(狀啓)를 보니, ‘정의현(旌義縣) 법환포(法還浦)에 표류해 온 자 20명에게 문정(問情)하였더니, 바로 일본국 살주(薩州) 사람들로서 배가 부서졌는데, 모두 육로를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돌려보낼 방도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저들은 물에 익숙한 사람들로서 육로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풍파에 휩쓸렸다가 살아난 나머지 바다를 무서워하는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표류해 온 왜인들이 육로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항례(恒例)입니다. 동남쪽까지의 거리가 멀기는 하지만 뱃길로 서로 통하여 순조롭게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튼튼한 배를 내준 다음 부근 고을의 수령이나 혹은 변장을 차원(差員)으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차례차례 넘겨받아 동래부(東萊府)로 넘겨주게 하며, 배의 재목은 규례대로 불태워 버리고 짐은 각별히 신칙하여 실어다 주게 하라고 전라와 경상 양도의 도신과 동래 부사와 제주 목사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끝없는 탐학 행위가 오늘날 나라를 좀먹고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근본이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겠는가? 그런데도 입을 굳게 다문 채 탄핵하지 않고 있다가 죄가 더욱 쌓이고 백성들이 더욱 병들게 된 뒤에야 부득이 한 차례 처분을 내리면, 비로소 죄가 가볍다느니 무겁다느니 떠들어 대면서 한갓 번거롭게 수응(酬應)하게 하고 있다. 나라에서 대각(臺閣)을 설치한 것이 어찌 이렇게 하고자 한 것이겠는가?

그리고 심의면(沈宜冕)이 호서 지방에서 탐학을 저지른 것은 사면령이 내리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며, 이번 감고당(感古堂)의 일에 대해서는 경솔한 짓을 한 것으로 책망하면 충분하다. 무슨 엄하게 국문하여 캐낼 만한 실정이 있겠는가? 함부로 떠들어 대기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예사롭게 남을 공격하기를 일삼는 버릇이지, 탐학한 자를 징계하고 염치를 격려하는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양사의 대간들을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8일

 

조휘림(趙徽林)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부호군(副護軍) 조병덕(趙秉悳)이 상소하여 권면하고 이어 만장 제술관(輓章製述官)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9일

 

김병기(金炳冀)를 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로, 이경하(李景夏)를 총융사(總戎使)로, 이돈영(李敦榮)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유내준(柳來駿)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집의(執義) 이기호(李基鎬)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통탄스럽습니다. 심의면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타고난 천성이 잔인하고 마음가짐이 교만 방자하여, 권세 있는 집안에 대해서는 온갖 아첨을 다해 섬기고 가난하고 문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마구 능멸을 가하였습니다. 호서 지방을 안찰함에 미쳐서는 가렴주구를 능사로 여기고 긁어모으는 것을 장기로 여겼습니다. 이에 온 도가 모두 도탄에 빠졌으며 백성들이 모두 다 가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죄까지 요행히 면한 것만 해도 이미 크게 형벌을 잘못 쓴 것입니다.

집 문제로 말하면, 더욱더 통탄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 집은 인현 성모(仁顯聖母)께서 예전에 사시던 집으로, 위에는 감고당(感古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인현 왕후의 손때가 묻은 세간이 남아 있어서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감히 함부로 들어가 살지 않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거의 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신하로서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참으로 응당 공경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동안 세들어 사는 자로서 감히 묵은 자취를 모두 쓸어 없애고 옛 제도를 뜯어고쳐서, 당시에 인현 왕후께서 사시던 곳을 하인배들이 뒤섞여 사는 곳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마음이 있는 자가 차마 할 짓이겠습니까? 이것은 크게 불경스럽고 지극히 무엄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죄를 지었는데 어찌 잠시 동안이라도 천지간에 용서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자식 심이택(沈履澤)으로 말하면, 성상을 가까이서 모시던 자리에서 나와서 변방의 중요한 지역을 맡았으니, 의당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3년 동안에 범장(犯贓)한 것이 자그마치 27만 냥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사 장오죄를 저지른 것으로 처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전께서 전교하신 군사를 일으켜서 화란을 불러 왔으며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렸다고 한두 마디 말씀은 이들 부자의 죄를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신은 이번에 탐오죄를 징계하는 거조로 인하여 지난날의 대각이 한 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개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섬에 안치한 죄인 김시연(金始淵)은 바로 국조 이래로 없었던 큰 장리(贓吏)입니다. 그 당시에 암행어사의 서계에 오른 것을 근거로 보면, 그가 범장한 50만 냥이 전체의 4분의 1만을 거론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해독이 미치는 바에 백성들이 살아갈 수가 없어서 지난번의 민란(民亂)이 있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여정이 일제히 분노하는 것은 바로 다 같은 마음입니다.

처음에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섬에다 안치하였으니, 그가 풀려 나옴에 미쳐서는 의당 대각에서 이의를 제기하며 쟁집(爭執)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석방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용서해서는 안 되는 크나큰 죄를 지은 자로 하여금 태연히 섬에서 나오기를 마치 작은 죄를 짓고서 가벼운 벌을 받았다가 풀려 나오는 자처럼 하였으니, 나라 법이 비로 쓴 듯이 없어졌고 대간의 체통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지금까지 가슴속에서 통한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에 김시연을 응당 받아야 할 형률로 처형하여 왕법을 바루게 하였다면 아무리 심이택과 같이 천성이 패려한 자라도 반드시 감히 이처럼 극도에 이르도록 잔학한 짓을 자행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대각으로 있던 자들의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우러러 대왕대비전에 여쭈어, 심의면에 대해서는 속히 국청을 열어 실정을 캐내라는 명을 내리고, 심이택에 대해서는 장오률에 의거하여 시원스레 시행하며, 김시연에 대해서는 다시 응당 받아야 할 형률을 적용하되, 김시연이 유배에서 풀려날 때에 입 다문 채 바라보기만 한 대간들에 대해서는 모두 견파(譴罷)하는 형전을 시행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심의면 부자에 대해서는 연일 대간에서 논계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김시연의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참작하여 처리한 것인데, 그대가 어찌하여 상소에서 다시 말하는가? 지난번의 대간들로 말하면 그들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입을 다문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하다니, 어쩌면 그렇게도 말을 가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대는 파직하겠다."

하였다.

 

 

권강(勸講)하였다.

 

 

청(淸) 나라에 갔다가〗돌아온 사신(使臣) 【정사(正使) 조연창(趙然昌), 부사(副使) 민영위(閔泳緯)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10일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경기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본도의 저치미(儲置米)를 재감(裁減)한 몫을 도로 정지하는 한 조항에 대하여, 그대로 두라는 뜻으로 복계(覆啓)하고서 행회(行會)하였습니다. 방금 해당 감사 조재응(趙在應)의 보고를 보니, 배비(排比)하기에 부족한 상황을 다시 진달하면서 이어서 저치해 놓는 돈과 쌀을 4분의 1을 재감한 것을 전례에 의거하여 도로 정지시켜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흉년이 든 해에 재해의 정도를 살펴서 감해 주는 것이 본래 정해 놓은 규례입니다마는, 경기의 사세를 살펴보면, 이 인산(因山)의 역사를 당하여 계속해서 칙사를 지공하는 비용이 있어야 하니, 아무래도 변통할 길이 있어야만 할 듯합니다. 계해년(1863)에 재감한 몫에 대한 한 조항은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이병문(李秉文)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온 도 안에서 삼정(三政)이 폐단이 되고 있는데, 삼정 가운데서도 환곡의 폐단이 가장 심합니다. 재작년에 3분의 2를 탕감한 뒤에 그 당시에 보관하고 있는 실제의 수량을 계산해 보니, 임술년(1862) 여름과 겨울에 각곡(各穀)을 합한 절미(折米)가 22만 6,683석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숫자와 탕감한 숫자를 이정(釐整)하여야 하는데 너무나 아주 용이하지 않아서 작년 8월에 와서야 전 도신 유장환(兪章煥)이 비로소 비변사에 보고하였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본도의 각읍(各邑)에 남아 있는 곡식의 수량은 본래부터 고르지 않아서 탕감한 뒤에 남아 있는 숫자가 많은 곳은 1만여 석이 되고 적은 곳은 혹 1, 200석밖에 안 되니, 많은 곳을 덜어서 적은 곳을 보태 주어 총량을 고르게 하기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성책(成冊) 중에서는 비록 옮겨 가고 옮겨 온 숫자가 있기는 합니다만, 실은 모두 허류(虛留)이거나 유망(流亡)한 사람들의 포흠(逋欠)입니다. 해당 연도의 이자 곡식도 오히려 백징(白徵)하게 될까 걱정인데, 다른 고을로 이송하는 것을 더욱 어찌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에 탕감해 준 거조도 이미 전에 없던 은택을 베푼 것이니, 지금 와서 참으로 감히 다시 그런 조처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본 곳에 도로 기록하려고 하니 이미 마감된 서울과 지방의 장부 역시 마음대로 도로 정지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지금에 와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호서 한 도는 반드시 남아나는 고을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우러러 대왕대비전에 여쭙고 굽어 의정부에 하문한 다음 좋은 쪽으로 처분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