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1일 갑자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5월 2일 을축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김상현(金尙鉉)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蘷)의 보고를 보건대, ‘각 진보(鎭堡)의 돈대(墩臺)ㆍ군기고(軍器庫)와 진장(鎭將)의 공관 대부분이 퇴락하였고, 성첩(城堞)ㆍ행궁(行宮)ㆍ관사(官舍)들도 수선해야 할 곳이 많습니다. 여기에 들어갈 물력(物力)의 조달과 관련하여, 호고전(戶庫錢) 중에서 3,000냥을 추이(推移)하여 공사를 돕도록 한 뒤에, 분표전(分俵錢) 1만 냥의 기한을 전례에 따라 다시 2년에 한하여 연장해 준다면, 그 이조(利條) 3,000냥으로 즉시 채워 갚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요청한 대로 다시 2년에 한하여 기한을 연장해 주어 추이(推移)하여 공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귀양 보낸 죄인 이세보(李世輔)를 석방하라."
하였다.
행 부호군(行副護軍) 임헌회(任憲晦)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자성전하(慈聖殿下)께서 전교하시면서, 대보단(大報壇)과 만동묘(萬東廟)가 중첩되어 설치되어 있으니 만동묘의 제향(祭享)을 정지하도록 명하시고 어필(御筆)로 내린 편액(扁額)을 옮겨 보관하라고 하셨다 합니다. 신이 물론 자성전하께서 그렇게 분부하신 데에는 정밀한 의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참으로 어리석기만 한 신의 생각으로는 의혹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옛적에 문원공(文元公) 신(臣) 송명흠(宋明欽)이 한 번도 자기 지위를 벗어나서 일을 논한 적이 없었습니다만, 유독 대보단의 일에 대해서만은 ‘옛 임금을 잊지 못하는 마음을 백성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사양하지 않은 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 역시 나름대로 이 의리에 부쳐 성상께서 생각하실 계기를 마련해 드리고자 합니다.
대체로 대보단과 만동묘를 설치한 것은 모두 옛 임금을 잊지 못하는 생각과《춘추(春秋)》의 일통(一統)의 의리에 입각하여 나온 것입니다. 만동묘는 선정(先正) 문정공(文正公) 신 송시열(宋時烈)이 초가집에서 초(楚) 나라의 유민(遺民)들이 초 소왕(楚昭王)을 제사 지낸 의리를 적용하여 문인(門人)인 선정 문순공(文純公) 신 권상하(權尙夏)에게 부탁해서 이루게 한 것이고 보면 사민(士民)이 사적(私的)으로 정성을 바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정묘(正廟)께서 친히 글을 지어 화양서원(華陽書院)에 제문(祭文)을 내리셨고, 또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써 주시어 표장(表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故) 좌상 신 이여(李畬)와 고 판서 신 민진후(閔鎭厚)가 모두 ‘사민이 자기네들의 정성을 드러내려고 한 것인 만큼 안심하고 제사를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진달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본다 하더라도 무단히 중복되게 설치했다고 여겨 그 하나를 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동조(東朝)에 여쭈시어 만동묘의 제향을 정지하라는 명을 환수하시는 동시에 걸어 놓은 편액을 옛날 그대로 놔두게 함으로써 사민의 소망을 위무(慰撫)해 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이 다시 덧붙여 여쭐 일이 있습니다. 화양(華陽)의 원유(院儒)들이 존엄한 자리라는 것을 빙자하고 아랫백성들을 침탈하는 등 그 폐단이 한없이 늘어가고 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걱정하며 탄식해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원유에게 있는 것입니다만, 조정에서도 엄히 단속하여 금지시키지 않으면 안 될 듯합니다.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이 점도 아울러 재처(裁處)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연영각(延英閣)에 떨어지는 물시계 소리가 더디게만 느껴지는 가운데 텅 빈 골짜기에 혹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데, 사직하는 소장만 올라오고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있으니, 슬픈 마음이 들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성의가 부족하고 예우가 박해서 그러리라고 여겨져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지금 진달한 것은 혹 두루 생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닌가? 예(禮)란 덜거나 늘릴 수 있는 것으로서 오직 시대 상황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번 유현(儒賢)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봉복(奉復)한 바가 있으니, 그대 또한 이에 대해서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원유가 빙자해서 침탈한다고 했는데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는 잘 이해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3일 병인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제주목(濟州牧)의 수재를 당해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윤5월 4일 정묘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의주부(義州府)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통제사(統制使) 이봉주(李鳳周)가 장계(狀啓)를 올려, ‘신의 군영(軍營)은 농사가 안 되는 바닷가에 처하여 손바닥만한 땅에도 경작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군영 아래에 있는 5, 6천 호(戶)는 모두 여러 해에 걸쳐 모아놓은 백성·군교(軍校)·아전(衙前)·군사(軍士), 공장(工匠)들로서 순전히 군영에서 내주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며, 오로지 의뢰하는 것은 지방(支放)입니다. 군영에서 1년치 지방으로 내주는 곡식을 통틀어 절피(折皮)로 계산하여 3만여 포(包)나 되며 해를 건너 윤달이 드는 해에 내주는 한 달 분도 2,000여 석(石) 아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산간 고을과 해변 고을에 널려 있는 통영(統營)의 곡식은 산간 고을에서는 작전(作錢)하여 받아오고 해변 고을에서는 본색(本色)으로 가져다 바치게 하는 것이 움직일 수 없는 규례였습니다. 지금 산간 고을이건 해변 고을이건 관계없이 전부 매 석당 5냥(兩)씩 작전하도록 한 것은, 사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렇게 작전하여 받은 다음에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곡식을 사들여야 할 형편인데 산간 고을에서 산 곡식은 사람이 져서 가져와야 하고 해변 고을에서 산 곡식은 배로 실어와야 하니, 지고 오거나 실어오거나 간에 비용이 낭비되는 폐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옛날 요새지에 곡식을 쌓아놓은 것이나 군사들을 시켜 농사를 짓게 한 것은 모두 요새를 강화하여 변경 방어를 튼튼히 하기 위한 좋은 계책입니다. 그런데 온 군영(軍營)의 군사와 백성들이 산골이나 해변 할 것 없이 전부 5냥이라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질 마음 밖에 없으니, 2백여 년 동안 모아 겨우 모양을 갖춰놓은 것이 이제 하루아침에 그만 다 흩어져버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산골과 연해(沿海) 고을의 곡식을 한결같이 5냥씩 돈으로 받아들이도록 한 일을 특별히 정지시켜 주소서. 그리고 연해 고을은 본색으로 수운(輸運)하는 것을 전례대로 시행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번 전(前) 영백(嶺伯)이 돌아와 아뢸 적에 통영(統營)의 향곡(餉穀) 가운데 연해 고을에 있는 것은 돈으로 대봉(代俸)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에, 묘당에서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임시 변통해 주어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안 될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방금 통제사의 계본을 보건대, ‘본영(本營)이 산과 바다 사이의 한 구석에 위치해 있어 이미 곡식을 생산할 땅이 없는 데다가 미곡을 무역할 방법도 적습니다. 그런데 교리(校吏)와 군민(軍民)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오직 창고의 곡식뿐인데, 지금 만약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한다면 대부분 식량이 결핍되어 뿔뿔이 흩어질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세상 필연적인 일이다. 이처럼 막중한 관방(關防)이 그토록 소홀해질 염려가 있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어찌 자꾸 바꾼다는 혐의 때문에 방편을 강구해 줄 도리를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다시 본곡(本穀)을 수납(輸納)하는 일을 예전대로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윤5월 5일 무진
권강(勸講)하였다.
윤5월 6일 기사
권강(勸講)하였다.
좌승지(左承旨) 이세보(李世輔)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아, 신이 아무리 형편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역시 근종(近宗)의 반열에 몸담고 있는 사람입니다. 선대왕(先大王)께서 재위하고 계시던 날 가까이 출입하면서 근실히 교도(敎導)를 받고 융성한 은총을 받은 것이 남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저 자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털끝만한 보답도 해 드리지 못한 채 죄만 산처럼 중해져 유배 가는 길만 돌아다니게 되었으니, 이젠 죽는다 해도 속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 선대왕께서 승하(昇遐)하고 나신 마당에 어찌 차마 당초의 사단을 거론하며 감히 조금이라도 자신을 변호하려는 계책을 삼으려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한 마디 꼭 밝혀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묘소에 불길이 치솟은 것이야말로 예로부터 이 세상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일대 변괴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런 재앙을 만들어 냈다고 덮어씌우고는 잡아들이라는 명이 계속 내려졌습니다. 그러한 때를 당하여 신이 비록 가슴을 쪼개어 낱낱이 보여 준다 하더라도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직 교릉(喬陵)만을 바라보며 매번 부여잡을 수 없는 비통함만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비록 하늘처럼 큰 성은을 베풀어 주시어 신의 오명을 깨끗이 씻어 주신다 하더라도, 다시 어떻게 감히 신과 같은 처지로 보통 사람의 대열에 스스로 끼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옥중(獄中)에서 상서(上書)했던 옛사람의 의리를 본받아 송구함을 무릅쓰고 호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동조(東朝)에 여쭈신 뒤 은혜를 저버리고 명에 태만한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동안의 일로 말하면 입을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 시대가 완전히 바뀐 뒤에 와서 어찌 다시 그 일을 제기하겠는가? 만약 계속해서 그 일만 끌어대며 주저한다면 실로 분의상 행할 도리가 아닐 것이다. 경은 즉시 명에 숙배하고 조심하며 일해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방금 의금부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동래(東萊) 지역의 곤수(梱帥)를 역임한 5인(人)의 쇄환조(刷還條)와 관련하여 지금 모두 준봉(準捧)하기로 했다고 하였다. 이들이 명령을 들은 즉시 납부하기로 한 것은 또한 공을 세워 속죄하려는 뜻과 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지난번에 부산(釜山)의 책징(責徵)이 있었고 지금 또 동래 군영의 독쇄(督刷)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무인(武人)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서 범한 내용이 사소한 것에 가까운 것들까지도 이처럼 끝까지 파헤쳐 냈다.
그런데 감사나 유수 및 문관 출신 수령들은 과연 모두들 청렴결백하기 때문에 범한 사실이 없어 이런 걱정을 면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해당되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쉬쉬하면서 덮어 주려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모영(某營) 모 수령이 저지른 범죄 사실이 귀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우선 지적해서 말을 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혹 작전(作錢)한 것에 대해 범법 행위를 저지르고는 미봉할 길이 없게 되자 해영(該營)의 유포자(流逋者)에게 책임을 전가한 경우도 있고, 혹은 공금을 횡령하고는 완전히 보충할 수가 없게 되자 아전배들을 꼬드기어 축내게 한 경우도 있다. 이것이 과연 대리(大吏)로서 관직에 몸을 담고 공무를 집행하는 도리라고 하겠는가.
그들은 모두 대대로 녹봉을 받아온 명문 거족 출신들이다. 그런데도 감히 세력을 믿고서 생판으로 법을 무시하고 있으니, 만약 이런 식이 된다면 나라가 어떻게 나라답게 되겠는가? 정말 한심하기 그지없는 일로서 참으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지금 만약 무인들에게 시행한 것을 문관 출신 수령들에게 시행하지 못한다면 위로는 명령이 행해질 수가 없고 아래로는 단속할 줄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이렇게 제칙(提飭)하는 바이니, 다시 별도로 엄히 처분하는 방도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모두 이 점을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7일 경오
권강(勸講)하였다.
조연창(趙然昌)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윤5월 8일 신미
권강(勸講)하였다.
윤5월 9일 임신
권강(勸講)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영변부(寧邊府)의 소호(燒戶)에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윤5월 10일 계유
전라 감사(全羅監司) 조재응(趙在應)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국가에서 각공(各貢)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도성 백성들을 애오라지 살려 보려는 은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듣건대 각 공인(貢人)과 각전(各廛)에서 진배(進排)하는 물종(物種) 모두가 숫자에 미달되는 관계로 그야말로 예산을 세우기가 어렵다고 한다. 돌아보건대, 지금은 경비가 모두 고갈되었고 또 엄청난 궁궐 공사를 벌이고 있는 때인데, 만약 계산하여 제하지 않고 준획(準畫)한다면 사세상 불가능할 뿐만이 아니요 계속 누락되어 적체되어 있는 가운데 그 값만 더 지급해야 할 것이니 도대체 이런 의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 번 경장(更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이른바 옛날에 누락된 것들 중 3분의 1에 대해서는 차라리 법 규정을 위배한다는 뜻에 따라 특별히 탕감(蕩減)해 주고, 3분의 2에 대해서는 요즘 미곡 값이 비싸 본미(本米)로 제거(除去)하기는 과연 어려울 테니 10년을 기한으로 호조의 상정례(詳定例)에 따라 분배하여 바치게 함으로써 공인(貢人)들이 조금 힘을 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진배하는 각 물종은 어디에서 쓰는 것인지를 막론하고 매월의 수요대로 일체 호조의 감합식(勘合式)에 따라 지출토록 하고, 이를 금석과 같은 정식(定式)으로 삼아 영구히 준행토록 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처분은 한편으로는 국가의 재정을 조금 여유 있게 하고 한편으로는 공상(貢上)에 따른 폐단을 영원히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도 만약 각 해당 공인들이 단지 목전에 불리한 것만을 생각하고 혹시라도 영을 어길 경우에는 일률(一律)을 적용해 시행할 것이니, 정부에서 이런 내용으로 각사(各司)에 엄히 신칙토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복식(服飾)과 기용(器用)을 각각 신분에 따라 제한한 것은 바로 귀천(貴賤)을 구별하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치 풍조가 날로 성(盛)해지고 달로 불어나고 있다. 그중 사문(私門)에서 붉은 줄로 말〔馬〕을 장식하는 것이나 붉은 보자기로 물건을 싸는 것만 해도 무척 눈에 거슬리는 일들이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주구(酒具)와 시저(匙箸) 등 물건들을 모두 은(銀)으로 만들어 예사로 쓰면서 외람된 일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도 사치 풍조가 극심해졌단 말이냐? 이 모두가 나라를 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근본으로서 정말 작은 일이 아니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지금 이후로는 일체 통렬하게 금지시켜 감히 예전대로 답습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이 뒤에 만약 이를 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별도로 엄히 조처할 것이니, 이를 모두 잘 알도록 하라."
하였다.
장수(長水)에서 포흠(逋欠)한 죄인 김시용(金始鎔)은 해도(該道) 감영(監營)에서 효수(梟首)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에서 계사(啓辭)를 올렸기 때문이다.
윤5월 11일 갑술
권강(勸講)하였다.
강로(姜㳣)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윤5월 12일 을해
권강(勸講)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강로(姜㳣)를 지금 내직(內職)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해부(該府)에 그동안 폐단이 계속 쌓여 오다가 이 수신(守臣)이 마음을 온통 기울여 바로잡은 덕택에 두서가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체차하여 바꾸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한 번의 임기에 한하여 잉임(仍任)시킴으로써 오래 근무한 효과가 나타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방금 의정부의 초기(草記)로 인하여 동래 부사를 잉임시키도록 하였는데, 이어서 삼가 자전(慈殿)의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해부(該府)로 말하면 변방의 관문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할 것인데 요즘 피폐해졌다가 이 수령이 부임하고 나서부터 많이 수리하여 거의 완전하게 복구되었다. 그러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정사에 있어 특별히 뜻을 보이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해당 부사 강로에게 특별히 한 등급을 가자(加資)하는 일을 임기가 만료되어 체직될 때까지 기다려 하비(下批)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태호(鄭泰好)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규수(朴珪壽)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윤5월 13일 병자
권강(勸講)하였다.
윤5월 14일 정축
권강(勸講)하였다.
전교하기를,
"복령군(福寧君)은 바로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자(嗣子)이다. 그런데 지금 이미 친진(親盡)되어 장차 날을 가려서 사판(祠板)을 매안(埋安)하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추모하며 처창(悽愴)해지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내외(內外)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유석(李裕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윤5월 15일 무인
권강(勸講)하였다.
이시원(李是遠)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각공(各貢)의 유재(遺在)에 대한 일로 삼가 자성 전하(慈聖殿下)의 분부를 받들건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엄히 신칙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계제(計除)하라고 처분을 내리시면서 연한(年限)을 정하고 대전(代錢)을 허락하셨으니, 그 은혜는 지극히 우악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그동안의 유재는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것으로서 오늘날의 공인(貢人)들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만약 10년을 배정하여 납부하게 할 경우 당년(當年)의 수가(受價)로는 납부할 수량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납부할 물품에 대한 가격을 제대로 책정해 주기 전에는 진배(進排)할 물종(物種)을 매년 생판으로 마련케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이런 사세(事勢)를 또한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재와 관련하여 3분의 1을 탕감해 주도록 한 것을 다시 관대하게 3분의 2로 해 주고, 계제(計除)하는 연한을 10년으로 연장한 것을 다시 30년으로 늘려 주어 각자 힘을 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죄 없는 백성을 죽이느니 차라리 법을 시행하지 않겠다’고 한 뜻에 진정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매월 진배할 때에 호조에서 매월 감합(勘合)하여 지급하는 것을 일체 자전의 분부대로 준행한다면 지금 이후로 유재의 명색(名色)은 자연히 따질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다시 각사(各司)에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동조(東朝)의 처분이 계실 것이다."
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전교하기를,
"방금 의정부의 초기(草記)를 보건대, 각공(各貢)의 유재와 관련하여 3분의 2를 탕감해 주고, 기한을 30년으로 물려 배정하라고 하였다. 국가의 재정을 관장하는 사람으로 말하면, 안으로는 호조와 선혜청 당상이 있고 밖으로는 감사ㆍ유수ㆍ수령이 이들이다. 나라가 부유하면 백성도 여유가 있게 되고 백성이 야위면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필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근래 호조와 선혜청에서는 국가 재정이 어떻게 되어 갈지는 생각지도 않고 그저 목전(目前)의 사정(私情)을 봐 주려고만 생각하고 있다.
계속 적체되어 온 유재에 대해서 규례대로 준급(準給)해 준다면 명실(名實)이 타당하지 못할 것이 사실인데, 비단 이 정도로 그치는 것만이 아니다. 미리 경차인(京差人)에게 내줄 때 도장(䆃掌)의 명색으로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전수(典守)의 법이 못 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를 말하더라도 환곡(還穀)에 대해서 하나도 완적(完糴)한 것이 없어 온갖 폐단이 겹쳐서 일어나며 갈수록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들고 있다. 중외(中外)의 사세를 생각하면 정말 애통할 따름이다.
이번에 유재와 관련하여 3분의 1을 탕감하여 10년에 걸쳐 배정해 주기로 한 것도 차라리 법을 어기고서 은혜를 베풀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아뢴 내용을 살펴보고 현실을 참작해 보건대, 그동안 적체된 유재의 책임을 물어 오늘날의 공인(貢人)에게 납부하게 한다면 원통한 일이 될 뿐만이 아니요, 감당하기 어려운 형세도 또한 생각해 주어야만 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 어린 왕께서 위에 계시니, 내가 어찌 이런 것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이른바 각공의 유재는 모조리 탕감해 줌으로써 조정의 보기 드문 큰 뜻을 보이도록 하라. 지금 이후로는 국가 재정이 여유가 있든 궁핍하게 되든 일체 중외의 유사(有司)에게 맡길 것이다. 모두 대대로 녹을 받는 거족(巨族)의 후예들인 만큼 나라와 백성의 안위(安危)에 대해 각별히 관심을 쏟아야만 할 것이다.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겠다."
하였다.
홍설모(洪說謨)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윤5월 16일 기묘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이 완성되었다.
윤5월 16일 기묘
실록 총재관(實錄總裁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도청(都廳)인 이기정(李基正)·이계로(李啓魯)·조병세(趙秉世)·장세용(張世容)과 낭청(郎廳)인 윤성진(尹成鎭)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실록청(實錄廳)에서, ‘《순조대왕실록(純祖大王實錄)》의 부록 속편(附錄續編)과 《철종대왕실록(哲宗大王實錄)》의 부록 등 각각 인본(印本) 1건(件)씩을 전례대로 봉진(封進)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실록을 지금 이미 춘추관(春秋館)에 봉안(奉安)하였기에, 본청(本廳)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감하(減下)하는 한편, 의궤(儀軌) 당상과 낭청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홍종서(洪鍾序)와 부사과(副司果) 김규홍(金奎弘)ㆍ조정섭(趙定燮)을 차하(差下)하여 전례에 따라 수정(修正)토록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서헌순(徐憲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윤5월 18일 신사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통편(通編)》 문제와 관련하여, 이후의 수교(受敎) 및 품주(稟奏)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은 것을 국(局)을 열어 계속 찬집(纂輯)할 것을 여쭈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실록이 이제 마무리를 고했으니 그대로 교서관(校書館)을 처소로 삼아 ‘교식 찬집소(敎式纂輯所)’라 명명하고, 당상 원역의 수는 대략 《통편》의 예에 따라 차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5월 19일 임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기우제(祈雨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전(親傳)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완백(完伯)의 장본(狀本)에 대해서 계하(啓下)한 것을 보니, ‘영암(靈巖) 소안도(所安島)에 지금 이미 진(鎭)을 설치하도록 한 이상 본도(本島)를 우수영(右水營)에 소속시킨 뒤 그 군사 263명(名)을 해진(該鎭)에 이부(移付)하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진을 설치한 뒤에는 졸오(卒伍)가 있어야 하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시행하되, 조련(操鍊)하고 절제(節制)하여 불의의 사변에 대처하는 방도를 갖추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김병학(金炳學)을 교식 찬집 총재관(敎式纂輯總裁官)으로, 김학성(金學性)·정기세(鄭基世)·남병길(南秉吉)·홍종서(洪鍾序)·박규수(朴珪壽)를 당상(堂上)으로, 김영작(金永爵)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윤5월 21일 갑신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대역사(大役事)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이때에 이처럼 혹독하게 가뭄의 재앙을 당하게 되었으니,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다. 재앙을 당해 자신을 책망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주상이 직접 기도해야 마땅하겠지만, 현재 나이가 어리시니 제사를 받들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종묘(宗廟)의 별기우제(別祈雨祭)에 대신을 보내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하여 내일 향축(香祝)을 받게 하고, 제문(祭文)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할 것이며, 집사(執事)들 역시 신중하게 가리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전 전라 감사(前全羅監司) 정건조(鄭健朝)를 소견(召見)하였다.
이용직(李容直)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윤5월 22일 을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의 별기우제(別祈雨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전(親傳)하였다.
윤5월 23일 병술
이승보(李承輔)를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
윤5월 24일 정해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각공(各貢)의 유재(遺在)를 전량 탕감(蕩減)해 주도록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각 항목의 물종(物種)을 하나도 비축하지 않는 것은 결코 예비하는 방도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듣건대, 탁지(度支)의 사세상 더 써야 할 물종의 수가 심히 적지 않다고 합니다. 또 응당 받아야 할 것들을 일단 탕감해 준 마당에 뒤따라 급가(給價)한다는 것도 은혜를 고갈시킬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유재 가운데에서 원공(元貢) 1년조(年條)만큼은 늘 머물러 두게 하고, 기타의 것은 전량 탕감해 주도록 호조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5월 27일 경인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윤5월 28일 신묘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윤5월 29일 임진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윤5월 30일 계사
사시(巳時)에 태백성(太白星)이 미지(未地)에 나타났다.
전교하기를,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 남녕위(南寧尉) 윤의선(尹宜善), 직제학(直提學) 이승보(李承輔)를 영건 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에 추가하여 차하(差下)하고, 검교 대교(檢校待敎) 정범조(鄭範朝), 좌승지(左承旨) 송희정(宋熙正)을 부제조(副提調)에 추가하여 차하하라."
하였다.
남병사(南兵使) 허습(許熠)의 장계에, ‘군기(軍器)를 수보(修補)할 때의 감동(監董) 등 수고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권장해 주어야 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작금 2년 동안 성해(城廨)를 수축하고 군기(軍器)를 개비(改備)한 것 모두가 방비책을 더욱 굳건히 한 일에 관계되는데, 이 장수가 늠고(廩庫)를 덜어내어 경영하면서 순서대로 마무리를 지은 것을 보면 옛 폐단을 개혁하고 새롭게 도모하려 한 그 실적(實績)을 징험할 수가 있으니, 어찌 더더욱 가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방금 전 전라 감사(前全羅監司) 정건조(鄭健朝)가 아뢴 내용을 보건대 ‘본도(本道)의 적정(糴政)은 매번 적곡(糴穀)을 받아들인 뒤에 순영(巡營)에서 탐지하여 적발하되, 만약 새로 포흠(逋欠)하는 자가 나올 경우에는 장문(狀聞)하여 시포율(始逋律)을 적용토록 해야겠습니다. 세 조창(漕倉)에 소속된 고을 외에 곧장 상납하는 고을의 경우는 재차 조운(漕運)하는 것으로 마련해 놓고 있기 때문에 매번 시기가 늦어져 취재(臭載)되는 사태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칠산(七山) 이남 18개 읍진(邑鎭) 역시 모두 초운선(初運船)으로 일제히 실어서 내려보내게 한다면, 출발 시기를 어기지 않게 되어 축나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흥양(興陽) 절이도(折爾島)는 바로 봉산(封山)입니다. 본래는 녹도진(鹿島鎭)에 소속되어 좌수영(左水營)에서 관장하고 있었는데, 섬 백성들이 어업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게 되자, 목장(牧場)에 이속(移屬)시킨 뒤 순영에서 관할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순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봉산의 나무를〗마구 찍어 내는 것을 살펴 단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예전대로 녹도와 수영에 도로 소속시킨 뒤, 영(營)과 진(鎭)에서 어업을 침탈당하는 폐단을 조목별로 열거하여 엄히 단속토록 해야겠습니다. 이 일들을 모두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적곡을 받아들인 뒤에 규찰하고 적발하여 시포율을 적용할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하라고 행회(行會)하되 세곡선(稅穀船)을 초운(初運)과 재운(再運)으로 나눈 것은 주사(舟司)의 선박 숫자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사를 신칙하여 많이 만들어 실어 보낼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절이도 봉산의 일로 말하면, 우선 좌수영과 녹도진에서 벌채를 금하는 일을 주관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