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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13권, 고종13년 1876년 2월

싸라리리 2025. 1. 1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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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3일 을축

접견 대관(接見大官)이 아뢰기를,
"오늘 3일 진시(辰時)에 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特命副全權辨理大臣)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수호조관(修好條款) 2책(冊)에 상호간에 서명 날인하고 이어서 영하(營下)의 연무당(鍊武堂)에서 연회를 차렸으며 수원(隨員)도 참여하였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오시(午時)에 그들 일행(一行)이 출발하여 배로 돌아갔으며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이하 및 남은 병사 70여 명(名)은 잠시 이전에 주둔하고 있던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수호 조규(修好條規)의 한문(漢文)과 일본문(日本文) 역본(譯本) 각각 1책, 비준(比準)한 원본 1책,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이 의안(擬案)하여 비준한 것 1책, 조규 원본 1책, 일본 사신이 준 편지 1본(本),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의 수록(手錄) 1본을 의정부(議政府)에 올립니다."
하였다.
〈수호조규〉          【한문으로 번역한 원본에 준거(準據)한다.】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에서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陸軍中將兼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국 강화부(江華府)에 와서 조선국 정부에서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尹滋承)과 함께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조관(條款)을 의정(議定)한 것으로서 아래에 열거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관 이후 양국 간에 오가는 공문(公文)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本)을 별도로 구비한다.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관 조선국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 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 바람을 만나거나 땔나무와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곳에 따라 연안의 지항(支港)에 들어가 위험을 피하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선구(船具)를 수리하고 땔나무와 숯을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고 비용은 반드시 선주(船主)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련히 여기고 구원하여 보충해 주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감히 아끼고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양국의 배가 큰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탄 사람들이 표류하여 이르면 곳에 따라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휼하여 생명을 보전해주고 지방관에게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교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토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의 백성들은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 팔거나 대차료(貸借料)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 양국 관리는 포탈한 해당 상인을 엄히 잡아서 부채를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는 대신 상환하지 못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관원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章程)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또 현재 논의하여 제정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세목(細目)을 보충해서 적용 조건에 편리하게 한다. 지금부터 6개월 안에 양국은 따로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 모여 상의하여 결정한다. 제12관 이상 11관 의정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준행하는 시작으로 삼는다. 양국 정부는 다시 고치지 못하고 영원히 성실하게 준수해서 화호(和好)를 두텁게 한다. 이를 위하여 조약서 2본(本)을 작성하여 양국 위임 대신이 각각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신임을 명백히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 2월 2일 대관(大官)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국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2월 2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 〈본국 비준책(批準冊)〉 병자년(1876) 2월 1일 판중추부사        신헌,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이 상주하기를, ‘금년 2월 2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신(臣) 신헌, 신 윤자승이 강화부(江華府)에 회동하여서 조약문 1통을 서로 교환하려 합니다.’ 하였다. 조항마다 타당하므로 내가 비준하니 오래도록 시행하여 친목을 더욱 두터이 할 것이며, 이 조약 안에 있는 행해야 할 각각의 일은 그대들 모든 관리와 백성이 이 뜻을 받들고 일체 조약에 따라 처리하라. 대조선국 주상(主上) 〈일본사신이 의안(擬案)한 비준책〉 보유천우 천만세일계지제조(保有天佑踐萬世一系之帝祚) 대일본국 황제는 이 글을 그대들 여러 신하들에게 선시(宣示)한다. 짐의 좋은 벗인 대조선국 군왕은 본디 이웃 나라와 교제를 두터이 하여 왔다. 이번에 흠명(欽命) 전권 대신(全權大臣) 아무개가 대조선국에 가서 전권 대신 아무개와 체결한 조관을 짐이 열람하니 조항마다 타당하므로 비준하였다. 그대들 모든 관리들은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일체 조약에 비추어 처리하라.  신무 천황(神武天皇)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월 일 동경(東京) 황궁(皇宮)에서 친히 국새(國璽)를 찍는다. 대일본국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든 외무경(外務卿) 아무개 외무대승(外務大丞) 아무개 외무 권대승(外務權大丞) 아무개 이상은 초안이다. 〈일본국 변리 대신에게 보낸 의정부(議政府) 조회(照會) 〉 의정부는 조회를 보냅니다. 양국이 화목하게 지낸 지 300년이나 됩니다. 사신과 예물이 오가고 정은 형제와 같아 각각 인민들을 편안하게 하여 서로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무진년(1868) 이래 귀국이 혁신한 사정을 살피지 못한 때문에 갖가지 의심의 단서가 있었으며, 귀국에서 여러 번 사신과 서계(書契)를 보냈으나 선뜻 받아들이지 않아 마침내는 이웃 나라와 우의가 막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귀국 기선(汽船)이 강화도(江華島)에 왔을 때에도 소동이 있었는데 이번에 귀 대신이 사신으로 경내(境內)에 이르러 폐국(弊國) 사절과 서로 만나보고 두터운 뜻을 알게 되면서 종전의 의심이 하루아침에 풀렸으니 어찌 기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체결할 조약의 각 조항을 받아보고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폐국 사절에게 위임하여 모여서 토론하게 하였습니다. 무진년 이래 양국 사이에 오간 공문들은 다 폐지하여 휴지로 만들고, 영원토록 친목을 유지하고 함께 양국의 경사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역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려는 우리나라의 선린(善隣)의 우의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이 바친 글〉 우리나라와 귀국은 아세아주(亞細亞洲) 동양(東洋)에 있어 강토가 가까이 이웃하고 해안이 맞서 있어 사신과 예물이 오간 지 300년이나 됩니다. 다만 중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정의(情意)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번에 우리 대신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귀국에 와서 귀 대신과 함께 모여 옛날의 우의를 중수(重修)하고 새로운 조약을 맺어 양국이 함께 지킬 신위(信威)를 밝히고 만대를 두고 변하지 않을 전범을 마련하였으니 참으로 국가의 끝없는 복이며, 본 대신들도 영예가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귀국의 군왕 및 여러 유사(有司)들의 강녕을 축원하며, 아울러 귀 대신들이 진심으로 합심하여 우리 대신들이 사명(使命)을 다하게 한 두터운 우의에 감사드립니다.  명치(明治) 9년 2월 27일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의 수록(手錄)〉 "대체로 일본국 상선(商船)이 무역 등의 일로 다른 나라에 갈 때에는 정부에서 발부한 선패(船牌)와 항해공증(航海公證)을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항구에 도착해서는 24시간          【귀국의 24시간】        안에 해당 선주(船主)는 선패와 항해 공증을 해당 지방에 주재(駐在)하는 일본 영사관(日本領事官)에 제출하여 확인을 받은 다음 지방관에게 보고서를 바치되 그 보고서 안에는 반드시 영사관의 도장과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국 배라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또 배마다 반드시 국기를 달아야 하는데 국기는 지극히 귀중한 물건으로서 갑국(甲國)의 배가 을국(乙國)의 국기를 도용(盜用)한 경우 해적(海賊)과 동일하게 보아 을국의 군함이 잡아 징벌할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아편(鴉片)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일본의 인민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사람이 예수교〔耶蘇敎〕를 믿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인민이 혹시라도 조선 인민들에게 예수교를 전파하려는 것을 금지하려는 사항에 대하여 일본 정부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 인민들이 조선국의 통상 각 항구에서 일본 사람의 이름을 빌어 거주하며 무역하는 일에 대해 일본 정부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의 각 문건은 신 대관(申大官)의 질문을 받았기에 저의 의견을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외무 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원본】 17책 1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20면
【분류】무역(貿易) / 외교-일본(日本) / 상업-상품(商品) / 역사-전사(前史) / 풍속-연회(宴會) / 사법-법제(法制) / 어문학-어학(語學) / 건설-건축(建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수운(水運) / 과학-지학(地學) / 물가-임대(賃貸) / 사법-재판(裁判) / 정론-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 / 어문학-문학(文學)
대일본국은 대조선국과 본디 우의(友誼)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정의(情意)가 미흡한 것을 보고 다시 옛날의 우호 관계를 닦아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에서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陸軍中將兼參議開拓長官) 구로다 기요타카와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국 강화부(江華府)에 와서 조선국 정부에서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申櫶)과 부총관        윤자승(尹滋承)과 함께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조관(條款)을 의정(議定)한 것으로서 아래에 열거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후 양국은 화친의 실상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종전의 교제의 정을 막을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혁파하여 없애고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법을 열고 넓히는 데 힘써 영구히 서로 편안하기를 기약한다.
제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京城)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該使臣)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東京)에 가서 직접 외무경(外務卿)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사신이 주재하는 기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관
이후 양국 간에 오가는 공문(公文)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한문으로 번역한 것 1본(本)을 별도로 구비한다.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관
조선국 부산(釜山) 초량항(草梁項)에는 오래 전에 일본 공관(公館)이 세워져 있어 두 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지금은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歲遣船) 등의 일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또 조선국 정부는 제5관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별도로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하며, 해당 지역에서 임차한 터에 가옥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각각 그 편의에 따르게 한다.
제5관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경상(慶尙), 함경(咸鏡)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
제6관
이후 일본국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큰 바람을 만나거나 땔나무와 식량이 떨어져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곳에 따라 연안의 지항(支港)에 들어가 위험을 피하고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며, 선구(船具)를 수리하고 땔나무와 숯을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고 비용은 반드시 선주(船主)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가련히 여기고 구원하여 보충해 주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감히 아끼고 인색해서는 안 된다. 혹시 양국의 배가 큰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탄 사람들이 표류하여 이르면 곳에 따라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휼하여 생명을 보전해주고 지방관에게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원에게 교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는 종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지(圖志)를 제작하여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관
이후 일본국 정부는 조선국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토의하여 처리한다.
제9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의 백성들은 각자 임의로 무역하며 양국 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 팔거나 대차료(貸借料)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 양국 관리는 포탈한 해당 상인을 엄히 잡아서 부채를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는 대신 상환하지 못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관원이 심리하여 판결하고, 조선국 인민이 죄를 범한 것이 일본국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 조사 판결하되 각각 그 나라의 법률에 근거하여 심문하고 판결하며, 조금이라도 엄호하거나 비호함이 없이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관
양국이 우호 관계를 맺은 이상 별도로 통상 장정(章程)을 제정하여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한다. 또 현재 논의하여 제정한 각 조관 가운데 다시 세목(細目)을 보충해서 적용 조건에 편리하게 한다. 지금부터 6개월 안에 양국은 따로 위원(委員)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 모여 상의하여 결정한다.
제12관
이상 11관 의정 조약은 이날부터 양국이 성실히 준수하고 준행하는 시작으로 삼는다. 양국 정부는 다시 고치지 못하고 영원히 성실하게 준수해서 화호(和好)를 두텁게 한다. 이를 위하여 조약서 2본(本)을 작성하여 양국 위임 대신이 각각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신임을 명백히 한다.
대조선국 개국(開國) 485년 병자년(1876) 2월 2일
대관(大官)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국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2월 2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議官) 이노우에 가오루
〈본국 비준책(批準冊)〉
병자년(1876) 2월 1일 판중추부사        신헌,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이 상주하기를, ‘금년 2월 2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이노우에 가오루와 신(臣) 신헌, 신 윤자승이 강화부(江華府)에 회동하여서 조약문 1통을 서로 교환하려 합니다.’ 하였다. 조항마다 타당하므로 내가 비준하니 오래도록 시행하여 친목을 더욱 두터이 할 것이며, 이 조약 안에 있는 행해야 할 각각의 일은 그대들 모든 관리와 백성이 이 뜻을 받들고 일체 조약에 따라 처리하라.
대조선국 주상(主上)
〈일본사신이 의안(擬案)한 비준책〉
보유천우 천만세일계지제조(保有天佑踐萬世一系之帝祚) 대일본국 황제는 이 글을 그대들 여러 신하들에게 선시(宣示)한다.
짐의 좋은 벗인 대조선국 군왕은 본디 이웃 나라와 교제를 두터이 하여 왔다. 이번에 흠명(欽命) 전권 대신(全權大臣) 아무개가 대조선국에 가서 전권 대신 아무개와 체결한 조관을 짐이 열람하니 조항마다 타당하므로 비준하였다. 그대들 모든 관리들은 짐의 이 뜻을 받들어 일체 조약에 비추어 처리하라.
신무 천황(神武天皇) 기원 2536년 명치(明治) 9년 월 일 동경(東京) 황궁(皇宮)에서 친히 국새(國璽)를 찍는다.
대일본국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든
외무경(外務卿) 아무개
외무대승(外務大丞) 아무개
외무 권대승(外務權大丞) 아무개
이상은 초안이다.
〈일본국 변리 대신에게 보낸 의정부(議政府) 조회(照會) 〉
의정부는 조회를 보냅니다.
양국이 화목하게 지낸 지 300년이나 됩니다. 사신과 예물이 오가고 정은 형제와 같아 각각 인민들을 편안하게 하여 서로 다툰 적이 없었습니다.
무진년(1868) 이래 귀국이 혁신한 사정을 살피지 못한 때문에 갖가지 의심의 단서가 있었으며, 귀국에서 여러 번 사신과 서계(書契)를 보냈으나 선뜻 받아들이지 않아 마침내는 이웃 나라와 우의가 막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작년 가을에 귀국 기선(汽船)이 강화도(江華島)에 왔을 때에도 소동이 있었는데 이번에 귀 대신이 사신으로 경내(境內)에 이르러 폐국(弊國) 사절과 서로 만나보고 두터운 뜻을 알게 되면서 종전의 의심이 하루아침에 풀렸으니 어찌 기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체결할 조약의 각 조항을 받아보고 우리 조정에서는 이미 폐국 사절에게 위임하여 모여서 토론하게 하였습니다.
무진년 이래 양국 사이에 오간 공문들은 다 폐지하여 휴지로 만들고, 영원토록 친목을 유지하고 함께 양국의 경사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역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려는 우리나라의 선린(善隣)의 우의를 밝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이 바친 글〉
우리나라와 귀국은 아세아주(亞細亞洲) 동양(東洋)에 있어 강토가 가까이 이웃하고 해안이 맞서 있어 사신과 예물이 오간 지 300년이나 됩니다. 다만 중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정의(情意)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이번에 우리 대신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귀국에 와서 귀 대신과 함께 모여 옛날의 우의를 중수(重修)하고 새로운 조약을 맺어 양국이 함께 지킬 신위(信威)를 밝히고 만대를 두고 변하지 않을 전범을 마련하였으니 참으로 국가의 끝없는 복이며, 본 대신들도 영예가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귀국의 군왕 및 여러 유사(有司)들의 강녕을 축원하며, 아울러 귀 대신들이 진심으로 합심하여 우리 대신들이 사명(使命)을 다하게 한 두터운 우의에 감사드립니다.
명치(明治) 9년 2월 27일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의 수록(手錄)〉
"대체로 일본국 상선(商船)이 무역 등의 일로 다른 나라에 갈 때에는 정부에서 발부한 선패(船牌)와 항해공증(航海公證)을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항구에 도착해서는 24시간          【귀국의 24시간】        안에 해당 선주(船主)는 선패와 항해 공증을 해당 지방에 주재(駐在)하는 일본 영사관(日本領事官)에 제출하여 확인을 받은 다음 지방관에게 보고서를 바치되 그 보고서 안에는 반드시 영사관의 도장과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국 배라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됩니다.
또 배마다 반드시 국기를 달아야 하는데 국기는 지극히 귀중한 물건으로서 갑국(甲國)의 배가 을국(乙國)의 국기를 도용(盜用)한 경우 해적(海賊)과 동일하게 보아 을국의 군함이 잡아 징벌할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아편(鴉片)의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일본의 인민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일본 사람이 예수교〔耶蘇敎〕를 믿는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 인민이 혹시라도 조선 인민들에게 예수교를 전파하려는 것을 금지하려는 사항에 대하여 일본 정부로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나라 인민들이 조선국의 통상 각 항구에서 일본 사람의 이름을 빌어 거주하며 무역하는 일에 대해 일본 정부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의 각 문건은 신 대관(申大官)의 질문을 받았기에 저의 의견을 이렇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외무 대승(外務大丞)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


【원본】 17책 1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20면
【분류】무역(貿易) / 외교-일본(日本) / 상업-상품(商品) / 역사-전사(前史) / 풍속-연회(宴會) / 사법-법제(法制) / 어문학-어학(語學) / 건설-건축(建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수운(水運) / 과학-지학(地學) / 물가-임대(賃貸) / 사법-재판(裁전교하기를,
"오늘은 부대부인(府大夫人)의 생신이니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문후(問候)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判) / 정론-정론(政論) / 사상-서학(西學) / 어문학-문학(文學)

 

홍철주(洪澈周)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2월 4일 병인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장계(狀啓)에,
"일본 사신이 바친 물건이 접견 대관(接見大官) 신헌(申櫶)으로부터 본영(本營)에 전해져 왔기에 우선 영고(營庫)에 봉류(封留)해 두고 물품 목록은 아래에 개록합니다.
회선포(回旋砲) 1문(門), 탄약(彈藥) 2,000발(發), 전차(前車) 1량(輛), 육연단총(六連短銃) 1정(挺), 탄약 100발, 칠연총(七連銃) 2정, 탄약 200발, 비추(緋縐) 2필(疋), 추(縐) 2필, 수진장금시진표(袖珍裝金時辰表) 1개, 금련(金鍊) 1조(條), 청우침(晴雨鍼) 1개(箇), 자침(磁鍼) 1개입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일본국 전권 대신(日本國全權大臣)이 이미 진헌(進獻)한 물종(物種)이 있으니, 증급(贈給)하는 절차가 없을 수 없습니다.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장만하여 내려 보내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접견 대관(接見大官)이, ‘대내(大內)에서 일본 전권 대신(日本全權大臣)에게 사급(賜給)한 사서(四書) 각각 1질(袟), 시전지(詩箋紙) 5권(卷), 색필(色筆) 100병(柄), 채묵(彩墨) 50정(丁), 백세저(白細苧) 10필(疋), 백면주(白綿紬) 10필을 훈도(訓導) 현석운(玄昔運)으로 하여금 전송(傳送)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5일 정묘

전교하기를,
"의정부(議政府)의 회좌(會坐)를 철파(撤罷)하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원(李裕元),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박규수(朴珪壽),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 우의정(右議政) 김병국(金炳國)을 소견(召見)하였는데 모두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일본(日本) 사람들이 와서 수호(修好)를 칭하니 우리나라도 수호로써 대하면 그만입니다. 조정의 의논 역시 먼저 범하지 말고 말썽의 꼬투리를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니, 역시 우리의 도리를 다한 것뿐인데, 어찌 도리에 어긋나는 상소가 번갈아 나와 갑자기 ‘화의(和議)를 주장하고 서양과 통한다.’는 말로 거짓을 날조하여 조정 관리들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하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그런데 화의를 주장한다는 것은 본래 근사하지도 않으니 도리에 어긋난 상소의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서양과 통한다는 것은 더욱이 근거가 없으니 도리에 어긋난 상소로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신은 자격 없는 사람으로서 감히 이 직무에 있으면서 평소에도 신뢰를 받지 못했고 일에 임해서도 감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저들이 상소로 현혹하고 무함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이 비록 편안히 자리에 있으면서 백관들을 신칙하려고 한들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본배는 이미 물러갔고 의정부의 모임도 막 철폐하였는데 전하 앞에서의 인견(引見)을 받게 되었으므로 외람됨을 무릅쓰고 감히 아룁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들의 위축된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빨리 물리쳐 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번의 일은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경들의 조처가 마땅하였으므로, 지금 무사하게 타결되었다. 지금 협잡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상소를 가지고 세상의 공론이라고 하면서 인책할 단서로 삼는다면, 어찌 만만번 뜻밖의 일이 아니겠으며 또 어찌 도리어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는 이 때문에 서로 말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였다.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일본 배가 지금 이미 물러갔습니다. 양화진(楊花津)·행주항(幸州港)·영등포(永登浦)를 방수(防守)하던 장수와 군사들을 모두 표신(標信) 없이 해산하며 각 고을의 방수도 일체 해산하도록 경기 감영(京畿監營)과 강화영(江華營)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서승보(徐承輔)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2월 6일 무진

대관(大官) 신헌(申櫶), 부관(副官) 윤자승(尹滋承)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수고가 많았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왕사(王事)가 편안치 못한데 신들이 어떻게 감히 노고를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문답 장계(問答狀啓)를 보니 과연 말을 잘하였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다행히 전하의 위엄에 의지하고 묘당의 계책에 힘입어 전하의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은 면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노고를 내가 알고 있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따뜻한 말씀이 이러하시니 황송하고 감격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계(狀啓)한 것 외에도 또 접견하여 수작(酬酌)한 것 가운데서 아뢸 만한 것이 있는가? 자세히 아뢰도록 하라."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금은 천하의 각국(各國)에서 무력을 사용하고 있는 때인데 귀국(貴國)은 산과 강이 험하여 싸우고 지키기에 유리한 점이 있지만 군비(軍備)가 매우 허술합니다.’라고 하면서 부국 강병(富國强兵)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 말은 교린(交隣)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 같다. 우리나라는 군사 수효가 매우 부족하다."
하니, 신헌이 아뢰기를,
"신은 지금 어영청(御營廳)을 맡고 있는데 정병(正兵)이 많지 못합니다. 금위영(禁衛營)도 마찬가지이며 훈련 도감(訓練都監)은 비록 좀 크기는 하지만 정병을 낸다면 역시 얼마 되지 않고 외방(外方)은 또 절제(節制)하는 군사가 없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군사를 쓴다면 비록 지혜 있는 사람일지라도 어떻게 장수 노릇을 하겠습니까? 병력을 떨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오랑캐들이 알고 있는데, 신이 무장(武將)으로서 이미 걱정스러운 것을 보고도 사실대로 진달하지 않는다면 신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건대 각 국에서 병력을 사용하여, 전후로 수모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차례이거니와, 병력이 이러한 것이 만일 각 국에 전파되기라도 하면 그들의 멸시가 앞으로 어떠할는지 모르겠으니, 신은 정말 몹시 걱정됩니다.
병지(兵志)에, ‘공격하기엔 부족하나 지키기에는 여유가 있다.〔攻則不足 守則有餘〕’라고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자기 나라를 가지고 자기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등(滕) 나라나 설(辥) 나라 같은 작은 나라들도 한편으로는 큰 나라를 섬기면서 교린하고 또 한편으로는 방어를 갖추고 나라를 지켜 전국(戰國) 시대에서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삼천리 강토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지켜낼 좋은 방도가 없겠습니까? 이것은 이른바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분발하여 빨리 변란에 대비하도록 처분을 내리신다면 군국(軍國)의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이미 늙었고 또 어두워서 군사를 거느리는 반열에 있기에는 부족하나, 몸소 눈으로 보아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이처럼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마땅하다."
하였다.

 

2월 8일 경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을 소견(召見)하였다. 동궁(東宮)의 탄신(誕辰)으로 문안하였기 때문이다.

 

전교하기를,
"오늘은 우러러 희열(喜悅)을 바치며 굽어 영명(永命)을 비는 날이다. 함께 경축하는 뜻에서 마땅히 혜택을 베푸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다. 경외(京外)의 100세 이상 되는 노인에게 쌀과 고기를 세찬(歲饌)의 규례에 따라 제급(題給)하고 일찍이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으로서 나이가 8, 9십이 되는 사람과 사서(士庶) 가운데 나이가 90이 되는 사람에게도 세찬(歲饌)의 규례에 따라 제급(題給)하라.
경재(卿宰)·시종(侍從), 문음무 조관(文蔭武朝官)은 도류(徒流) 및 파삭(罷削) 이하의 죄명(罪名)을 모두 탕척(蕩滌)하고 사서는 도류의 경죄수(輕罪囚)를 모두 석방하며 유생(儒生)은 정거(停擧)를 용서하라."
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성균관(成均館)에서 설행하였는데, 부(賦)에서는 생원(生員) 김유성(金裕成), 유학(幼學) 이병위(李秉緯)를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9일 신미

전라 감사(全羅監司) 정범조(鄭範朝)를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광화문(光化門) 밖에 나아가 출진(出陣)한 각영(各營)의 장수와 군졸, 각도(各道)에서 뽑아올린 포군(砲軍)에게 호궤(犒饋)하였다. 각 영의 장신(將臣)들이 군례(軍禮)로 알현하였다. 하교하기를,
"각 도, 각읍(各邑)의 두령(頭領)들은 전정(殿庭)에서 호궤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각 영으로 하여금 호궤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내하(內下)의 백목(白木)도 각 영을 시켜 나누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근래에 과시(科試)가 과연 공정한가, 공정하지 못한가? 전후에 신칙한 하교를 과연 똑똑히 들었는가, 똑똑히 듣지 못했는가? 만일 공정치 못한 것이 있으면 내 말을 똑똑히 듣지 않은 것이며, 내 말을 똑똑히 듣지 않았다면 임금의 기강이 장차 떨치지 못할 것이고, 신하의 절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오늘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은 상경(上卿)이고 근신(近臣)이니, 명백하게 대양(對揚)하는 데 있어 어찌 혹시라도 이 도리를 소홀히 하는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공정하다는 것은 여러 말 할 것 없이 오직 시험 답안지의 공졸(工拙)로 그 고하(高下)를 정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만약 털끝만치라도 그 사이에 사심(私心)이 개입된다면 사람을 고르는 논의가 일어나서 결국은 자리를 나누어 가지는 데로 돌아가게 되며, 한쪽에 치우치는 생각이 생겨나서 사이가 가깝고 먼 데에 따라 고르지 않게 될 것이니, 겉으로는 비록 이름을 덮고 채점하더라도 안으로는 실로 공정치가 않아 마침내 10년 동안 반딧불을 모아놓고 공부한 사람과 사방에서 〈녹명장(鹿鳴章)〉을 노래하던 선비들이 원한을 품고 굴욕을 안고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는 위로 하늘의 화기를 상하게 할 만 한 것이니, 시관(試官)이 된 사람들이 어찌 두려워서 속을 끓이고 무서워서 땀이 나지 않겠는가? 내가 믿는 것은 시관이고, 바라는 것은 공정하게 하는 것이다. 선비들로 말하더라도 입신할 때에 하나라도 부정이 있으면 훗날 어떻게 임금을 섬기겠는가? 감히 부정하게 벼슬길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오직 과시의 규정된 글에 모든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이 전교(傳敎)를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회위(會圍)에 걸어 두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일본국(日本國)과 다시 우호를 맺는 조약에 관하여 팔도(八道)의 감사(監司)와 사도(四都)의 유수(留守), 동래 부사(東萊府使)에게 발송한 공문(公文)에,
"이번에 일본 사신이 강화도(江華島)에 온 것은 사실 이웃 나라와 다시 우호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그들과 우리가 의논하여 정한 비준 책자(比準冊子)와 조규 책자(條規冊子) 및 그들의 수록 책자(手錄冊子) 각 1건(件)을 내려 보내니 비치해두고 증거 문건으로 삼도록 하라.
이제부터 그들의 배가 지나간다든가 혹은 와서 정박하게 되면 깃발 표식을 자세히 살피고 만약 흰 바탕에 붉은 것으로 가운데 표시하였으면 분명 일본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통행 증서가 있어 항해 공증(航海公證)으로 삼으니 비록 화륜선(火輪船)인 경우에도 꼭 깃발의 표식을 기준으로 삼아 절대로 경솔하게 범하지 말며 서로 좋게 지내는 도리에 힘쓸 것에 대하여 연해(沿海)의 각읍(各邑)에 관문을 띄워 관할 지역에 통지하며 세 가지 책자를 다 베껴서 공포함으로써 모두 잘 알게 하라."
하였다.

 

2월 11일 계유

김석진(金奭鎭)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이교헌(李敎獻)을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2월 13일 을해

북도(北道)의 도과(道科)를 문과(文科)는 도신(道臣)이 시험을 보아서 선발하고 무과(武科)는 남도와 북도의 수신(帥臣)이 시험을 보아서 선발하라고 명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2월 14일 병자

전교하기를,
"방금 포도청(捕盜廳)이 합좌(合坐)한 문안을 보니, 전 병사(兵使) 신철균(申哲均)이 화적(火賊)을 만나고서도 그냥 두었다는 것이 이미 도적의 공초에서 나왔다고 한다. 우선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나수(拿囚)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6일 무인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여 김문제(金文濟), 오익영(吳益泳), 윤상만(尹相萬), 이재완(李載完)을 뽑았다.

 

2월 17일 기묘

이재원(李載元)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삼았다.

 

직각 권점(直閣圈點)을 행하였다. 〖권점을 받은 사람은〗 김흥균(金興均)·정인성(鄭寅性)·조신희(趙臣熙)인데, 김흥균(金興均)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정완묵(鄭完默)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정운성(鄭雲星)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2월 19일 신사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포도청(捕盜廳)에서 합좌(合坐)하여 죄인을 구핵(鉤覈)할 때 전 학관(前學官) 정선교(丁善敎)가 화적(火賊)의 공초(供招)에 나왔습니다. 사적(仕籍)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고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일체 엄하게 구핵하여 실정을 캐내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1일 계미

특별히 발탁하여 조영하(趙寧夏)를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삼았다.

 

삼군부(三軍府)에서, ‘각도(各道)에서 뽑아 올린 포수(砲手) 4,034명(名)과 뒤따라 올려 보내온 포수 784명 등에게 돌아갈 때의 식량과 돈을 그 도리(道里)를 헤아려 10리(里)당 1전(錢)씩 쳐서 도합 2만 6,860냥 4전(錢) 6분(分)을 나누어 주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22일 갑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에 일본 사신의 배가 온 것은 전적으로 우호를 맺기 위한 것이었으니 선린(善隣)하려는 우리의 뜻에서도 마땅히 이제 전권 사신(全權使臣)을 파견하여 신의를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사신의 칭호는 수신사(修信使)라고 할 것이며 응교(應敎) 김기수(金綺秀)를 특별히 가자(加資)하여 차하(差下)하되 따라가는 인원은 일에 밝은 사람으로 적당히 선택하여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호를 맺은 뒤 처음 있는 일이니, 이번에는 특별히 당상(堂上)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들어가도록 하고, 이후부터는 서계를 종전대로 동래부(東萊府)에 내려 보내어 강호(江戶)에 전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수신사(修信使)는 지금 이미 차하(差下)하였습니다. 예조(禮曹)에서 외무성(外務省)에 보내는 서계(書契)는 임금의 명을 받은 사신이 옛날의 우호를 회복하기 위하여 간다는 뜻으로 문임(文任)을 시켜 문건을 만들어내게 하고, 출발 날짜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가려 정한 뒤에 동래부(東萊府)에서 그들의 관소(館所)에 통지하게 하고, 그 밖의 일들은 미리 잘 준비하고 대기하라는 뜻을 해당 부사(府使)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4일 병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수신사(修信使)는 지금 막 차출(差出)하였습니다. 일본에 증정할 물건과 예단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참작하여 준비하도록 하며, 사신 일행의 노자도 함께 마련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5일 정해

전교하기를,
"이 두 집안에서 동시에 참방(參榜)하였다는 소식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청연 군주(淸衍郡主)의 종손(宗孫) 김희수(金喜洙)에게 사악(賜樂)하고 청선 군주(淸璿郡主)의 사손(祀孫) 정이원(鄭履源)에게도 사악하라. 그리고 임기가 거의 찬 초사(初仕) 자리를 만들어 해조(該曹)로 하여금 의망(擬望)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조석여(曺錫輿)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근필(李根弼)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김상현(金尙鉉)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서당보(徐堂輔)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후선(李後善)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수정전(修政殿)에 나아가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다.

 

2월 26일 무자

조영하(趙寧夏)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원명(李源命)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가운데서 나이가 80세 이상 되는 사람은 모두 해조(該曹)로 하여금 오위장(五衛將)을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하라고 명하였다.

 

2월 27일 기축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상피법(相避法)은 옛 규례에 근거해서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이 하교(下敎)로 전조(銓曹)에 잘 신칙하여서 바로잡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연설(筵說)은 조지(朝紙)에 반포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나라의 재용은 전적으로 공세(供稅)에 의거하는데, 지금의 사세(事勢)로는 비록 제때에 기준대로 받아들이고 절약하며 남용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지탱하기에 늘 모자랄까 걱정됩니다. 더구나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 및 여러 군문(軍門)에 보관해 둔 것이 도처에서 고갈되었다고 하는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공납(公納)은 적체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조정의 명령은 한갓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리는데, 수령된 사람에게 만일 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으로 하여금 전혀 바치지 않아 가장 심한 자를 뽑아내어 빨리 파직시켜 감처하도록 청하게 하고, 평상시 잘 신칙하지 못한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堂上),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각 영의 장신 및 미납한 제도(諸道)의 도신(道臣)들은 현고(現告)를 받아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나라의 정공(正供)을 반드시 바치라고 독촉하고서야 바치는가? 바칠 것을 독촉하여도 바치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은 작년에 세곡(稅穀)의 납기를 지연시킨 선주(船主)와 공전(公錢)을 포흠(逋欠)한 아전(衙前)들을 구핵(鉤覈)하여 법을 적용할 뜻을 연석(筵席)에서 문의하고 신칙하였습니다. 시일이 지나 한 해가 지나갔으나 시행하였다는 등문(登聞)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마지않는다면 법과 기강을 시행할 데가 없을 것이고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징계될 날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뜻을 미납한 제도에 통지하여 그로 하여금 기일을 정하고 엄격히 조사해서는 곧장 효시(梟示)하여 경계하고 다시는 감히 시일을 지연시키는 일이 없어서 중한 죄를 면하도록 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 일을 가지고 전후로 신칙한 것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줄곧 시일을 지체시키니 이것이 어찌 기강이란 말인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공납(公納)이 지체되는 일을 가지고 계속 아뢰었는데, 최근 지방 고을에서 이자돈이 급속히 쌓여 가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경차(京差)를 내주는 것이 이 폐단의 원인입니다. 이른바 경차라는 사람들은 공납의 중요성은 생각지 않고 자기를 살찌울 궁리만 품고 온갖 방법으로 청탁하여 몇 천 몇 만의 돈을 얻어서는 물건을 사들여 제멋대로 이속을 채우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서 소비하여 도리어 저축이 텅 비기에 이르니, 이러고서도 나라에 금지하는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앞으로 경차를 내주는 그릇된 악습은 일체 엄금하며 다시 발견되어 보고가 들어오는 경우에는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과 각 영의 장신 및 제도의 도신을 모두 특별히 논죄하여 징계한다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각 사와 각 영으로 하여금 경차가 미납한 것을 일일이 사핵(査覈)하여 형장(刑杖)을 쳐서 가두어 독촉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지연시키는 폐단에 이르지 않도록 일체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 폐단은 금지하지 않을 수 없다. 특별히 더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이 일본의 서계(書契)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계품(啓稟)하고 행회(行會)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또 지난겨울에는 연석(筵席)에서 아뢰고 윤허를 받아 관문(關文)을 만들어 신칙하였습니다. 변경 신하의 도리로서는 마땅히 조정의 명령을 집행하고 처분을 기다리면 그만이지 무슨 말썽이 생길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오로지 사태를 관망하기만 하면서 시일을 미룬 결과 이웃 나라의 사신이 와서 시끄럽게 굴도록 만들고 변경의 일을 잘 처리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니 앞뒤로 일을 그르친 잘못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동래 부사(東萊府使) 홍우창(洪祐昌)에게 파출(罷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용서해 주라고 하교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나라를 방어하는 방도로서는 사실 병기만 한 것이 없습니다만 이것이 만약 녹슬고 무디어 예리하지 못하다면 비록 산같이 쌓여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여 년 동안 조정에서 변란에 대비하기 위한 정사에 거의 모든 것을 다하여 재정을 떼어 내어 나눠주고 상을 주어 장려하였습니다만, 병기를 수리하였다는 계문(啓聞)는 헛되이 떠벌린 말이 됨을 면치 못하여 수량은 줄곧 사실과 맞지 않고 병기는 전혀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앉아서 은전(恩典)을 바라면서 태연하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있으니 임금과 나라를 속이는 죄치고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무릇 군사에 관한 물건을 보수한 상황을 등문(登聞)한 뒤 본부(本府)에서 따로 사람을 파견하여 끝까지 따져보고 만약 겨우 명색이나 갖추고 거짓으로 장부를 기록한 폐단이 있으면 감사(監司), 유수(留守), 곤수(梱帥) 및 해당 수령은 곧장 그 죄의 곱절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변란에 대비하는 데에 병기를 수리해 두는 것만 한 것이 없는데 이와 같이 사실과 맞지 않는다니 참으로 놀랍고 개탄할 일이다. 아뢴 대로 하여 꼭 성과가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안변(安邊)의 학포(鶴浦)를 흡곡(歙谷)에 다시 이속(移屬)시키는 것은 지난 번 연석(筵席)에서 아뢰었으니 응당 행회(行會)하여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창 봄을 맞아 일이 방대하여 백성들의 형편상 지장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속시키는 문제는 다시 통지를 기다리라는 뜻을 두 도(道)의 도신(道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규호(閔奎鎬)는 자질과 이력이 모두 훌륭하고 소문과 명망이 높은 만큼 정1품의 품계로 올려야 할 것이며, 행 호군(行護軍) 윤자승(尹滋承), 충청 감사(忠淸監司) 심순택(沈舜澤), 호군(護軍) 서승보(徐承輔)는 모두 정경(正卿)으로 발탁하여 승급시켜야 할 것입니다. 부호군(副護軍) 김익정(金益鼎)의 세 아들과 두 손자가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은 대단히 희귀한 일로서 네 아들과 한 손자가 합격한 경우와 별로 차이가 없으니 특별히 가자(加資)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경재(李景在)의 사손(祀孫)은 조용(調用)하라는 은전을 입었으나, 듣자니 아직 연한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구애받지 말고 조용(調用)하라는 뜻으로 전조(銓曹)에 분부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전교하기를,
"지금의 명경과(明經科)는 비록 옛날의 명경과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생들이 총명을 다하고 정력을 다 바치는 것이 도리어 시골에서 글공부하는 것보다 더하므로, 식년시(式年試)에 이로써 인재를 뽑으니 그 뜻이 중하지 않겠는가? 시관(試官)이 된 사람들이 만일 공정하게 하지 못한다면 가난을 견디며 장막이 그을도록 글을 읽고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한 것이 마침내 또한 보탬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니, 시관의 마음은 반드시 가시가 등에 있듯 조심해야 할 것이다.
궁궐이 비록 깊기는 해도 제비를 뽑거나 합격시키고 불합격시키는 것이 공정하였는지 불공정하였는지를 당일로 듣고 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사정(私情)을 따른 흔적이 있으면 이는 곧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속이는 것에 이르게 될 것이니, 정밀하고 결백하게 거행하여 내가 근심하는 마음에 부합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선비로 말한다면 협잡하고 청탁하는 사람이 있다하니, 법이 지엄한데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이 전교를 식년 문과(式年文科)의 일소(一所)와 이소(二所)의 과장(科場)에 걸어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방금 포도청(捕盜廳)에서 합좌(合坐)한 문안(文案)을 보니, 신철균(申哲均)이 화적(火賊)들의 와주(窩主)였다는 것이 남김없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도둑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나라를 어지럽힐 생각을 하고 화를 일으키기를 좋아하였다 하니 엄하게 신문하여 죄를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나수(拿囚)한 죄인 신철균은 격식을 갖추어 남간(南間)에 옮겨다 가두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추국(推鞫)을 하고, 위관(委官)은 홍 판부사(洪判府事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로 하라."
하였다.

 

김세균(金世均)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진산군(珍山郡)의 찬배 죄인(竄配罪人) 이승보(李承輔), 중화부(中和府)의 정배 죄인(定配罪人) 김세호(金世鎬), 고금도(古今島)의 도배 죄인(島配罪人) 이재만(李載晩)을 향리로 방축(放逐)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훈련 도감(訓練都監)의 새 남영(南營)을 북영(北營)에 옮겨 설치하고, 총융청(總戎廳)의 책응소(策應所)를 선인문(宣仁門) 밖의 무위소(武衛所) 직방(直房)에 옮겨 설치하고 훈련 도감의 파총(把總)이 영솔하는 작지군(綽持軍)도 또한 광화문(光化門) 밖 무위소의 직방으로 옮겨서 수직(守直)하게 하라."
하였다.

 

성균관(成均館)에서 인일제(人日製)를 행하였다.

 

2월 28일 경인

의금부(義禁府)에서, ‘포도청(捕盜廳)에 있는 죄인 정선교(丁善敎), 장동근(張東根)을 반핵(盤覈) 신문(訊問)이 있어서 모두 형구를 채워 잡아 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2월 30일 임진

사역원(司譯院)에서, ‘한학 당상 역관(漢學堂上譯官) 이용숙(李容肅), 왜학 당상 역관(倭學堂上譯官) 현석운(玄昔運)을 수신사(修信使)의 행차에 특별히 파견하여 보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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