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2권, 고종22년 1885년 5월

싸라리리 2025. 1. 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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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기해

전교하기를,
"지금 어려운 때를 만났으니 임금과 신하,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다같이 힘을 다하고 생각을 가다듬어 정사를 잘할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각기 편하게 지낼 것을 꾀하여 시골에서 지내면서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분의(分義)와 도리(道理)라 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의 처분이 있었던 것이지만 또한 참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여러 신하들의 찬배(竄配)는 특별히 분간(分揀)하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경계하고 신칙한 뒤에 또다시 핑계대고 이전과 같이 시골로 간다면 스스로 나라를 저버린 죄과를 범하는 것으로 될 것이니,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각기 잘 알고 큰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과거를 보여서 선비를 뽑는 것은 장차 인재를 선발하여 원기(元氣)를 부지하기 위한 것이다. 공정한 마음을 넓히느냐 사정(私情)을 따르느냐에 따라서 정사가 잘되고 못되며 인심이 쏠리고 달아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인데, 근래에 와서 간사한 폐단이 자꾸 생겨나서 매번 과거를 한 번 보이고 나면 물의(物議)가 일어나니, 이것은 대체로 유사(有司)가 군주의 뜻을 정확하게 대양(對揚)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뿐 아니라 권세 있는 관리의 집에 드나드는 행위가 점점 더 심해져서 공부에 힘쓰지 않고 오직 청탁질을 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의 도리이겠는가? 이것 역시 시관(試官)의 마음이 얼마나 확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번의 이 경사를 넓히기 위한 과거는 특히 다른 과거와 다른 만큼 응당 간사한 폐단을 힘껏 제거해버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공정한 것을 넓혀서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만약에 또 혹 끝내 명심하지 않고 전철(前轍)을 답습(踏襲)하면서 조령(朝令)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며 시험 규정을 쉽게 어긴다면 결코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큰 권한이 수중에 쥐어져 있으니, 결코 관대하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방목(榜目)을 낸 뒤에 자연히 아뢰는 것이 있을 것이니, 나는 기다릴 것이다.
시험 날짜가 멀지 않은 만큼 경시관(京試官)이 떠나기 전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면유(面諭)하여 예사로이 신칙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함으로써 감히 스스로 임금을 기만하는 죄과에 빠지지 않게 하라. 그리고 주시관(主試官)인 도신(道臣)에게도 일체로 글을 지어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민경호(閔敬鎬)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

 

5월 2일 경자

전교하기를,
"기영(箕營)의 병정(兵丁)들이 오늘 올라온다고 하니, 그들을 생민동(生民洞) 신영(新營)에 머물게 하라. 그리고 중군(中軍)을 대리하는 주장(主將)인 평안 감사(平安監司)는 입시(入侍)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응식(閔應植)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새로 조직한 병정(兵丁)들이 숙련되어 있는 듯한데, 경병(京兵)과 어떠한가?"
하니, 민응식이 아뢰기를,
"기예와 복장은 경병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수 물자를 새로 준비할 때 의연금을 내서 넉넉히 도와준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매우 가상하다."
하니, 민응식이 아뢰기를,
"본도(本道)의 사민(士民)들은 평소에 충성심과 의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군사를 조직하는 것에 대하여 나라를 방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군수를 넉넉하게 도운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병영(兵營) 및 만부(灣府)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직하지 못했으니 물론 재정(財政)에 기인하지만 역시 시급한 일이다."
하니, 민응식이 아뢰기를,
"군수를 들여온 다음에 타산해서 차례로 조직할 것입니다."
하였다.

 

5월 3일 신축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막 특지(特旨)로 인하여 올라왔는데 증광시(增廣試)를 보일 날짜가 점차 박두했으니, 변통하는 거조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용강 현령(龍岡縣令) 윤익(尹瀷)을 장시 도사(掌試都事)로 차하(差下)하여 제때에 시취(試取)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병정(尹秉鼎)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충희(趙忠熙)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5월 5일 계묘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변란을 방비하는 것은 경외(京外)가 마찬가지인데 해방 아문(海防衙門)을 이설(移設)한 뒤에 경기(京畿) 연해 각읍(各邑)은 소홀함이 없지 않으니 향병(鄕兵)을 모두 우선 해산시켜 돌려보내고 다시 포액(砲額)을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만약 새로 날랜 사람들을 초모(招募)해다가 기예(技藝)를 연습시킨다면 물론 하루 이틀에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주둔시키는 일이 중요하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친군 별영(親軍別營)으로 이미 병정(兵丁)을 초모(招募)한 이상 모두 영솔해다가 해당 아문(衙門)에 이속(移屬)시키고 해당 총관(總管)을 시켜 통솔하고 훈련시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별영(別營)에 대해서는 원액(原額)의 표하군(標下軍)이 있어서 위급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만큼 역시 해영(該營)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통제하고 거듭 단속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5월 6일 갑진

한성부(漢城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남부 도사(南部都事) 조총희(趙寵熙)가 올린 보고를 보니, ‘백성들의 신소(伸訴)로 인하여 조사하고 신문할 일로 전주(全州)에 사는 백영술(白永述)을 본부에 잡아가두고 조사하여 처리하고자 하였는데, 그날 밤에 명동(明洞)에 사는 전 판관(前判官) 이재영(李載永)이 건장한 종 5명(名)을 보내서 부중(部中)으로 뛰어들어 뇌간(牢間)을 부수고 백가(白哥) 놈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수직 사령(守直使令) 1명을 붙잡아다가 그 집에 묶어놓고 마구 때려서 온몸에 상처를 입혀 생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부속(部屬)들이 장차 뿔뿔이 흩어질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부(部)의 관속을 마음대로 신문하고 다스리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특교(特敎)로 정식(定式)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반가(班家)에서 부의 관속을 거리낌 없이 잡아다가 자기 집 뜰에서 중하게 형장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이미 법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체로 볼 때 놀라운 일입니다. 전 판관 이재영이 해괴망측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전교하기를,
"명색이 조관(朝官)으로서 이런 행패를 부렸으니 참으로 아주 통탄할 일이다. 이처럼 법을 업신여기는 부류들은 보통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엄하게 한 차례 형신(刑訊)하여 원지정배(遠地定配)하라."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상주(尙州)의 생원(生員) 정좌묵(鄭佐默)이 자신의 형인 전 정언(正言) 정우묵(鄭佑默)의 살옥(殺獄) 사건이 원통하다고 한 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여러 번 검열하여도 단안(斷案)이 성립되지 않으니 오랜 옥살이에 간사한 짓을 할 우려가 없지 않다. 그뿐 아니라 조관(朝官)에 관계되는 일이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가 엄하게 신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여주(驪州) 양인(良人) 윤칠룡(尹七龍)이, 그의 아비 윤보길(尹甫吉)이 본읍(本邑) 백성들의 소요 사건과 관련하여 지금 양주옥(楊州獄)에 갇혀 있는데 즉시 감영(監營)으로 하여금 잡아 올려다가 명백히 다스리고 조사하게 해달라는 일로 아뢰니, 전교하기를,
"윤보길이 저지른 범죄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하고 신문하게 하되 만약 잡혀온 여러 범인들이 있으면 일체로 신문해서 등문(登聞)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지평(持平) 김만제(金萬濟)가 상소하여 시무(時務)에 대해서 진술하였는데, 첫째로 신의를 세울 것, 둘째로 재물을 다스릴 것, 셋째로 국도(國都)를 굳건히 지킬 것, 넷째로 근본적인 것을 중하게 여기고 말단적인 것을 억누를 것, 다섯째로 재능 있고 덕망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쓰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진술한 다섯 가지 조항들은 모두 시기에 적절한 것이니,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유학(幼學) 임경수(林璟洙) 등이 상소하여 문효공(文孝公) 노진(盧稹)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들은 전날의 비답을 보지 못했는가? 이 문제는 지극히 신중하고 중대한 문제이므로 대번에 허락하기 곤란하다. 너희들은 번거롭게 상소하지 말고 물러가서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유학(幼學) 정재경(鄭在慶) 등이 상소하여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높이고 공경하는 것은 도(道)를 보위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이것은 구태여 그대들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가 지극히 중대한 것이므로 대번에 허락할 수 없다. 모두 그리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5월 7일 을사

특별히 김창수(金昌秀)를 발탁하여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함경북도 안무사(咸鏡北道按撫使) 조병직(趙秉稷)이 아뢰기를,
"혼춘(琿春)의 승판(承辦)이 조회(照會)한 것으로 인하여 경계를 확정하기 전에는 경작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는 내용을 전후의 문건에 여지없이 상세히 적어 보냈는데, 조사하고 심리하기 전에 갑자기 먼저 경작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농막(農幕)을 불태우며 백성들을 내쫓았습니다. 신이 안무사(按撫使)의 직책에 있으면서 경계를 확정하고 백성들을 안착시키지 못하여 이렇게 분분하게 만들었으니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5월 8일 병오

건청궁(乾淸宮)에 나아가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를 접견하였다.

 

김만식(金晩植)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윤병정(尹秉鼎)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조석여(曺錫輿)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이면영(李冕榮)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고, 특별히 변원규(卞元圭)를 제수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5월 9일 정미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친군 서영사(親軍西營使) 민응식(閔應植)을 소견(召見)하고, 뒤이어 친군 서영(親軍西營)의 병정(兵丁)들에게 조련(操練)을 행하였다.

 

5월 10일 무신

북원(北苑)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는데, 왕세자(王世子)도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다. 뒤이어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반열에 참가한 유생(儒生)과 무관(武官)에게 응제(應製)와 시사(試射)를 행하였다.

 

5월 11일 기유

전교하기를,
"가뭄이 갈수록 혹심하여 모내기철이 이미 지났는데도 아직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있다. 농사에 대하여 생각하면 몹시 답답하니, 기우제(祈雨祭)를 날을 가릴 것 없이 정성스럽게 지내도록 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응식(閔應植)이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새로 조직한 병정(兵丁)들의 군사 훈련을 금방 진행하였는데 여러 장교들의 거행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중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기고관(旗鼓官) 및 파총(把摠)은 조용(調用)되지 않고 있어, 소외되었다는 한탄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교사(敎師)들도 진심으로 노력하여 참으로 매우 가상합니다. 응당 등용하는 방도를 시행하여야 할 것이니, 도내의 병장 중에서 유원(柔院), 위곡(委曲), 보산(保山)의 세 자리는 특별히 자벽(自辟)을 허락하되, 두 자리는 기고관과 파총에게 주고 한 자리는 병정의 교사(敎師)에게 주어 길이 수고에 보답하는 은전(恩典)이 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서쪽 변경의 중요한 지대에서 군사를 증강하고 무예를 연습시키느라고 수고한 여러 장교들에게 응당 고무하고 장려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근(久勤)인 많은 자리를 한꺼번에 모두 주는 것은 또한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그러니 유원과 위곡 두 자리는 자벽하도록 허락하고 돌아가며 차송(差送)하라고 해조(該曹)와 해도(該道)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 민응식이 올린 장계를 보니, 중군(中軍) 이택영(李澤永)의 첩정(牒呈)을 낱낱이 들면서, ‘토산(兎山) 등지의 명화적(明火賊) 최경화(崔敬化)와 한패거리 일곱 사람을 차례로 체포하고 나머지 잔당들도 기찰하여 기어이 소멸할 작정이니, 그놈들을 체포한 여러 포교들을 포상하는 일을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도적 무리들이 횡행하며 노략질을 하는 것은 조정의 큰 근심거리로 특별히 신칙한 일이었는데, 기찰 포교를 단속하여 도적의 괴수를 체포해서 백성들이 받는 피해를 제거하였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들이 기찰하여 체포한 일은 물론 직무에 속하는 일이지만 별도로 성의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중군 이택영은 방어사(防禦使)의 이력을 허용하고, 여러 장교들이 마음을 다하여 노력한 것도 모두 다 고무하고 격려하는 데 합당하니, 이진항(李珍恒)은 도내에서 임기가 끝나가는 변장의 자리를 마련해서 차송하도록 하며, 그 밖의 김기황(金基璜) 등 8인(人)은 모두 상을 주도록 전조(銓曹)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윤병정(尹秉鼎)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삼았다.

 

5월 12일 경술

증광시(增廣試) 감시(監試) 초시(初試)의 시관(試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일소(一所)는 이용원(李容元)·홍승헌(洪承憲)·이희원(李喜元)이고, 이소(二所)는 서정순(徐正淳)·김학수(金學洙)·이승우(李勝宇)이다.】 하교하기를,
"지난번 신칙한 하교와 경시관(京試官)들이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신칙한 것을 경들은 보았을 것이다. 과거를 보이는 법의(法意)가 지극히 중대한 것은 어느 때나 매일반이지만 이번에 보이는 과거는 더욱 특별하다. 그뿐 아니라 선비들의 마음의 향배가 전적으로 명백하게 대양(對揚)하는 데에 달려 있다. 구중궁궐이 깊다고는 하지만 자연히 아뢰는 방법이 있을 것이니, 스스로 잘 헤아려 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의 이 선발은 전적으로 공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만약 털끝만치라도 사정(私情)을 쓴다면 조정의 체모가 손상될 뿐 아니라 또한 상하가 서로 믿는 도리에 흠이 있게 될 것이니, 충분히 신중하게 하여 기어이 실제 성과가 나타나게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친군 서영(親軍西營)이 이미 설치되었으니 영사(營使)는 수원 유수(水原留守)가 장용영 외사(壯勇營外使)를 겸하는 옛 규례를 본받아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이 예겸(例兼)하도록 하비(下批)하고, 군사 편제는 일체 경영(京營)의 규례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근래에 와서 정원(政院)의 일처리가 매번 소홀한 점이 많은데,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앞으로 일처리를 또다시 이전과 같이 하게 되면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병문(李秉文)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이호준(李鎬俊)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재완(李載完)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응하(李應夏)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5월 13일 신해

첫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지냈다.

 

5월 14일 임자

윤자승(尹滋承)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다.

 

5월 15일 계축

김종한(金宗漢)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5월 16일 갑인

두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서 지냈다.

 

친림(親臨)하여 연조(演操)할 때 친군 서영(親軍西營)의 장졸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민영위(閔泳緯)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김재현(金在顯)을 시강원 좌빈객(侍講院左賓客)으로 삼았다.

 

친군 서영(親軍西營)의 군수(軍需)에 자원하여 원조한 전 중군(前中軍) 장호민(張好民) 등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5월 17일 을묘

흥복전(興福殿)에 나아가 독일 공사(公使)【돔케】를 접견하였다.

 

5월 18일 병진

동래 부사(東萊府使) 김학진(金鶴鎭)을 소견(召見)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동래부(東萊府)는 본래 변경 관문(關門)의 중요한 지대인데다 요즘에는 외교 업무와 교섭하는 일을 겸해서 맡아 처리하는 곳이 되다 보니, 일이 이전에 비해 복잡하고 바쁘다. 그대가 외서(外署)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특별히 가려 차임하는 것이니 마음을 다하여 대양(對揚)하도록 하라. 또한 항구의 사무뿐만 아니라 저쪽 나라에 도망쳐간 여러 역적들의 동태를 염탐한 것이 있으면 비밀리에 급보를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5월 19일 정사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서영(西營) 병정에게 친히 상을 내렸다.

 

세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남단(南壇)과 우사단(雩祀壇)에서 지냈다.

 

전교하기를,
"친군 서영(親軍西營)의 병정(兵丁)들을 해당 병방(兵房)을 시켜 대신 인솔하고 해영(該營)에 도로 내려 보내게 하고 다시 더 연습하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이재원(李載元)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이응진(李應辰)을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조희철(趙熙哲)을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충청도(忠淸道) 유생(儒生) 황익희(黃翼熙)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文忠公) 김종직(金宗直), 문민공(文敏公) 김일손(金馹孫),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 등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어진 이를 사모하고 도를 높이는 일인데 어찌 그대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는 사체(事體)가 매우 신중하고도 중대하므로 갑자기 토의할 수 없다. 그대들은 그리 알고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0일 무오

전교하기를,
"전 주진 대원(前駐津大員) 남정철(南廷哲)을 전직(前職)에 잉임(仍任)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1일 기미

서정순(徐正淳)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5월 22일 경신

네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북쪽 교외에서 지냈다.

 

임상준(任商準)을 친군 전영사(親軍前營使)로 삼았다.

 

5월 23일 신유

이봉구(李鳳九)를 해방 총관(海防總管)으로, 이규석(李奎奭)을 친군 후영사(親軍後營使)로, 민응식(閔應植)을 친군 좌영사(親軍左營使)로, 이종건(李鍾健)을 우변포도대장(右邊捕盜大將)으로, 원우상(元禹常)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5월 24일 임술

증광 별시(增廣別試)의 문과(文科) 초시(初試) 시관(試官)들을 소견(召見)하였다. 【일소(一所)의 시관(試官)은 홍종헌(洪鍾軒)·이원일(李源逸)·조종필(趙鍾弼)·김필수(金弼洙)이고 이소(二所)의 시관(試官)은 이세재(李世宰)·김기수(金綺秀)·엄주한(嚴柱漢)·윤상연(尹相衍)이다.】 하교하기를,
"과거와 관련한 폐단이 어느 때인들 없었겠는가마는 근래에 와서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번 과거는 다른 때와는 다르므로 특별히 정경(正卿)을 차출하였으니, 경들은 반드시 삼가고 대양(對揚)하여 오로지 공정하게 하도록 하라. 이렇게 직접 대면해서 신칙한 뒤에 만약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운 짓을 용납하는 경우에는 왕법(王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니, 스스로 잘 헤아려 하라."
하였다.

 

홍종헌(洪鍾軒)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이세재(李世宰)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5월 25일 계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개의 아문(衙門)을 대궐 안에 설치하려 하였는데, 요즘 하는 일이 매번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경은 반드시 나의 뜻을 체득해서 특별히 요량하여 잘 도모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세울 아문의 규모는 삼가 성상의 재량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요즘 일에 끝이 없는 것은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아서 신도 우려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더욱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막중한 일이니 처음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오직 경이 어떻게 잘 처리하는가에 달렸을 뿐이다. 마땅히 전교(傳敎)를 내리겠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거문도(巨文島)를 다른 나라 사람이 제멋대로 차지하고 아직 철수하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니, 【요즘 영국(英國)과 러시아〔俄國〕가 아프가니스탄〔阿富汗〕 경계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러시아 군함이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 집결되자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홍콩〔香港〕을 침략할까봐 동양 함대(東洋艦隊)를 파견하여 3월 초하루에 거문도를 검거한 다음 포대를 쌓고 그들이 오는 길을 막았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서로 버티다 보니 그렇다고 들었는데, 아직 언제 철수할지 알 수가 없어 매우 걱정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 군대가 이미 철수했는데, 주둔하여 방위하던 청(淸)나라 군대도 철수한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어찌 허술하게 되지 않겠는가? 만약 머물러 있게 할 방도가 있다면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니 힘을 다해서 각별히 도모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4년 동안 믿고 의지해오다 보니 허술하게 됨이 막심합니다. 만일 철수하지 않게 된다면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천진(天津)주재 대원(駐在大員)이 길을 떠났으니 오래지 않아 확실한 보고가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러시아 사람들이 이미 담판하고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만약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중국과 일본이 군대를 철수하고 미국(美國)의 교사(敎師)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그 틈을 타서 일본주재 참찬관(參贊官) 스페예르〔士貝耶 : Speyer, Alexei de〕를 파견하여 교사를 보내서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을 할 것을 청하였다.】


【원본】 26책 2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198면
【분류】외교-영국(英) / 왕실-국왕(國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외교-일본(日本) / 외교-러시아[露] / 외교-미국(美)

 

다섯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종묘(宗廟)에서 지냈다.

 

전교하기를,
"지금 군국(軍國)의 일반 사무가 매우 많고 총괄하여 살피는 일이 매우 중요하니, 대궐 안에 1개의 국(局)을 따로 설치하고 궁중 안의 사무를 겸하여 맡아보게 하되 아문(衙門)의 칭호는 내무부(內務府)로 하고 관직을 설치하는 문제와 일체 규정을 제정하는 일은 의정부(議政府)로 하여금 헤아려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정철(南廷哲)을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서주순(徐胄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5월 26일 갑자

전교하기를,
"어제 단비가 오기 시작하다가 곧 멎어서 또다시 가뭄을 걱정하게 되었으니, 농사일을 생각하면 더욱 애가 타고 안타깝다. 6차 기우제(祈雨祭)는 날을 가리지 말고 내일 향(香)을 받도록 하며, 헌관(獻官)은 숭품(崇品)으로 채워 차임하고 여러 집사들도 특별히 택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5월 27일 을축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응제(應製)를 설행하였다. 부(賦)에서 유학(幼學) 김윤성(金允聲)을 직부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뒤이어 대신(大臣) 및 이조(吏曹)의 세 당상(堂上)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행 이조 판서(行吏曹判書) 이병문(李秉文), 참판(參判) 서정순(徐正淳), 참의(參議) 서주순(徐胄淳), 병조 판서(兵曹判書) 윤자승(尹滋承)이다.】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이 일로 한번 하교하려고 했었는데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전교(傳敎)가 있겠지만, 세자(世子)를 보좌하고 인도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엇보다 먼저 하여야 할 일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게 달려 있다. 더구나 지금 동궁(東宮)이 한창 자라는 나이이니, 그를 보좌하고 가르쳐 인도하는 방도로 볼 때 어찌 경에게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빈료(賓僚)를 엄선하는 것이 세자를 보필하고 교도(敎導)하는 방법이다. 옛날 숙묘(肅廟)와 정묘(正廟)께서 세자(世子)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에도 이런 하교가 있었다. 요즘 빈료를 엄선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관제(官制)를 조금 고쳐서 극히 청현직(淸顯職)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이 일이 어떤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춘궁(春宮)을 보익하는 일보다 먼저 할 것이 없으니, 동궁의 신료를 극선(極選)과 청현으로 하시겠다는 성상의 하교는 참으로 지당합니다. 이 일을 조지(朝紙)에 내게 되면 누가 칭송하고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관제(官制)를 청현직으로 만드는 것이 적임자를 얻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적임자를 얻는 것이 제일이지만, 또한 역시 임기를 길게 하여 성과를 보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임기를 제한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그렇게 되면 전후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사람이나 다 바른 사람일 것인데 옛날의 이른바 세자를 분명하게 깨우치는 일도 이보다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제의 변통을 어떻게 해야 가장 청현직이 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이 연석(筵席)에서 감히 경솔하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만 선발에 대한 새 제도는 오직 성상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빈객은 문형(文衡) 및 문임(文任)에 통망된 사람, 보덕(輔德)과 겸보덕(兼輔德)은 직제학(直提學)과 부제학(副提學)에 통망(通望)된 사람으로 하되, 장망(長望)으로 낙점(落點) 받을 것이며, 필선(弼善) 이하는 한림권점(翰林圈點)을 받은 사람으로 주의(注擬)하라. 보덕과 겸보덕은 삼전(三銓)을 거치지 못한 사람은 곧장 삼전에 의망하고, 이미 삼전과 아경(亞卿)을 지낸 뒤이면 곧장 아전(亞銓)에 의망하라. 참상(參上)은 가자(加資)한 뒤에 곧바로 반장(泮長)으로 추천하고, 참하(參下)는 승륙(陞六)한 뒤에 곧장 동벽(東壁)에 의망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청현직이 되어 오늘날 조정에서 견줄 만한 것이 드물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춘방(春坊)의 관제를 이미 변통하였으니, 계방(桂坊)도 변통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사부와 대신에게 문의한 뒤에 주의하되 처음 제수하는 수령(守令)은 품계(品階)와 자급(資級)에 구애하지 말고 의망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똑같은 동궁의 관직이므로 응당 처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계방은 예로부터 지극한 청환(淸宦)으로 일컬어져 왔기 때문에 집안의 선조 가운데 만약 이미 계방의 관리를 지낸 사람이 있으면 매번 계방의 관리를 지낸 몇 대(代)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음관(蔭官) 가운데 지극한 청현직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병문이 아뢰기를,
"계방에 대하여 처분이 있어야 하겠으나, 아문에서 6삭(朔)을 보내거나 사송(詞訟)을 처리하는 관부에서 6삭을 보내야 한다는 규정에 다같이 구애하지 않는 것은 특별한 은전(恩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 제수하는 수령을 품계와 자급에 구애하지 않는 것은 관제에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사송을 처리하는 관부에서 6삭을 보내야 한다는 규정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구애하지 않았다. 관제를 변통하는 문제는 대신들에게 문의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이어 하교하기를,
"보덕을 옛날에 아경(亞卿)으로 임명한 때도 있었으니, 다만 적임자를 얻기에 힘쓰고 품계에 구애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이병문이 아뢰기를,
"옛날에 낭관(郞官)으로 임명한 때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보덕 이하는 모두 실직(實職)으로 하든가 겸직(兼職)으로 하든가 정식(定式)을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보덕 이하가 실직이 있을 경우 다 겸직으로 하비(下批)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 내용대로 하라."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보덕이 아경으로 낙점을 받으면 행 보덕(行輔德)으로 하비하여야 하겠습니까, 겸보덕으로 하비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겸보덕으로 하비하라. 관제 및 시행 절목은 대신에게 문의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사부(師傅)가 세자(世子)를 보익(輔翼)할 적에는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이 바탕이 되니, 그들을 숭상하고 공경하는 것이 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빈객(賓客)을 사부처럼 보는 것은 세자의 예의(禮儀)를 도와주며 경서(經書)를 가르쳐서 깨우쳐주고 인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충직하고 박학하고 식견이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하는 만큼 선발하는 것을 신중히 해야 한다. 동궁(東宮)의 신료들은 고관(高官)이기에 관계가 자별하며 침착하게 고문(顧問)에 응하므로 가장 청현(淸顯)한 관직이다. 그리고 세자를 분명하게 깨우치고 잘 보필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직책은 응당 한 시대의 뛰어난 사람으로 잘 선발하여 삼선(三善)의 교화를 돕도록 해야 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특별히 훌륭한 집안의 인재를 선발하여 그 반열과 품계를 달리함으로써 춘위(春闈)를 중시하고 사우(師友)를 높이는 뜻을 보일 것이다. 관제(官制)와 주의(注擬)에서 행할 규정에 관한 것들은 옛날 것과 오늘날의 것을 참작하여 앞으로 계하(啓下)할 것이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지금부터 시작하여 춘방의 전도패(前導牌)를 청옥패(靑玉牌)로 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5월 28일 병인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호두(虎頭)를 담그고 여섯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기연해방아문(畿沿海防衙門)에서 아뢰기를,
"본 아문(衙門)이 지금 이미 용산(龍山)에 옮겨와서 방어하고 있으니,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겸대(兼帶)하고 있는 육군 별장(陸軍別將)을 감하(減下)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의수호조약속약(朝義修好條約續約)을 체결하였다.          【병술년(1886) 6월 23일에 기한을 연장하는 약조를 서로 교환하였다.】


【원본】 26책 2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99면
【분류】외교-이탈리아[伊]

 

5월 29일 정묘

이조 당상(吏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행 이조 판서(行吏曹判書) 이병문(李秉文), 참판(參判) 서정순(徐正淳), 참의(參議) 서주순(徐胄淳)이다.】 하교하기를,
"일전에 춘방(春坊)의 문제와 관련해서 하교하였는데 미처 하교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이제 또 불러들여 만나는 것이다. 설서(說書)와 겸설서(兼說書)는 낙점(落點)을 받은 뒤에도 그대로 홍문 정자(弘文正字)를 겸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교(待敎)가 겸하던 정자(正字)를 설서가 겸하게 되면 대교(待敎)도 겸직(兼職)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례(古例)에 박사(博士)와 정자의 두 자리가 있으니 합하여 세 자리로 만들어 서로 승차(陞次)하여 박사에 단부(單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문(李秉文)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전교를 반포(頒布)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열성조(列聖朝)에서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하교를 내리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으니, 반포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신들이 구두로 전교를 반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에게 문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전랑(銓郞)을 앞으로 복구(復舊)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전랑을 몇 자리나 차출(差出)하시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전랑 두 자리를 차출하되 이것은 춘방 가운데서 주의(注擬)하도록 하라. 계방(桂坊)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외임(外任)을 제배(除拜)한 뒤에 고과(考課) 기한을 계산하지 말고 구애함이 없이 천전(遷轉)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외임은 5고(五考) 뒤에 승진시켜 옮기는 것이 전해 내려오는 규례인데 전하의 하교가 간절하시니, 설사 한두 번의 고과를 채우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구애함이 없이 승진시켜 옮겨야 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대로 하되, 재임(在任) 중에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였거나 낙사(落仕)한 사람도 상례(常例)에 구애하지 말고 즉시 견복(甄復)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병문이 아뢰기를,
"설서를 이미 정자로 하비하였으니, 대교는 박사로 하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옥당에서 문안하는 것을 승사(承史)와 각신(閣臣)의 규례대로 승전색(承傳色)을 통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랑(銓郞)은 구례(舊例)를 회복하여 차출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사(貳師)·빈객(賓客) 등 춘방(春坊)에서 숙배(肅拜)할 때 인의(引儀)가 호창(呼唱)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미 원용(援用)한 규례가 있으니 이사와 빈객 등 춘방에서는 합문(閤門)에서 숙배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아뢰기를,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홍순학(洪淳學)이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제배(除拜)되었습니다. 부산항(釜山港)과 원산항(元山港)의 전례대로 그로 하여금 본항(本港)의 감리 사무(監理事務)를 겸하여 보게 하는 것에 대하여 해조(該曹)로 하여금 하비(下批)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조병호(趙秉浩)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서형순(徐衡淳)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어제 단비가 이미 1촌(寸) 넘게 내렸고 지금은 비구름이 사방에 퍼져 있는 데다가 때때로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이 기세를 이어 큰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중인데, 연이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번독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기우제(祈雨祭)는 우선 형세를 관망한 뒤에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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