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9권, 고종29년 1892년 4월

싸라리리 2025. 1. 23. 15:39
반응형

4월 1일 기축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서정순(徐正淳)을 소견(召見)하였다. 사폐(辭陛)하였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낭천(狼川)은 조그마한 산골 읍(邑)인데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지 여러 해가 지나가도록 그치지 않고 있고, 심지어는 간악하고 교활한 향리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진실로 그 원인을 따진다면 고을의 정사가 애초에 잘못되었고 백성들에게 미친 폐단은 점점 그들로 하여금 보존하기 어렵게 만들어 그런 것이니, 매우 놀랍고 통분한 일이라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자자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전후하여 도신(道臣)으로 있던 자들이 아직 장문(狀聞)하거나 징계도 하지 않았으니 사체(事體)에 있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의 형전을 시행하되, 소란을 일으킨 사건의 단서와 소란을 일으킨 백성 중에서 주모자와 추종자를 엄하게 구핵(鉤覈)하는 동시에 그 당시 수령(守令)을 지낸 자의 정상을 함께 열거하여 등문(登聞)하게 함으로써 품처(稟處)하게 할 것입니다. 읍의 여러 가지 폐단도 자세히 조사한 뒤에 바로잡게 하여 백성들이 고장을 떠나거나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폐단이 없게 하고, 관(官)에는 기강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바로잡는 정사를 하도록 도신에게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고을의 정사가 잘못하고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켰으면 응당 등문하여야 할 것인데 아직도 이렇게 잠잠하니, 그것은 혹 심상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은 아닌가? 참으로 지극히 놀라운 일이니, 그 전말을 자세히 조사하여 치계(馳啓)하도록 엄격한 말로 관문(關文)을 보내 신칙하라."
하였다.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도목 정사(都目政事) 때에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 죄인 안우정(安禹鼎), 안태정(安泰鼎), 김두형(金斗亨)등을 잡아다가 구핵(鉤覈)한 결과 안우정의 공초(供招)에, ‘지난달 27일 도목 정사 때 담당 서리(書吏)로 일하였는데 그 이튿날 진시(辰時) 경에 일을 끝내고 망통(望筒)을 입계(入啓)한 후 전조(銓曹)의 관리가 하직(下直)할 때 이어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이렇게 정목(政目)을 위조한 사실이 있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자신은 담당 서리로서 평소에 조심하고 삼가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막상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사리에 어둡다고 지레 물러감으로써 이렇게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으며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안태정의 공초에, ‘도목 대정(都目大政) 때에는 이조(吏曹)의 서리가 으레 정청(政廳)에서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담당 서리 안우정으로 말하면 바로 저의 6촌(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일을 살피며 검사할 때에 망녕스럽게 헛된 욕심을 품어 가짜 직함을 쓴 정목을 위조하여 그것으로 남의 눈을 가려서 재물을 낚을 계책으로 삼으면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성상께서 환히 통찰하시어 결국 관리 명단을 반포하지 못하였으나 이조에서 사핵(査覈)하고 이미 정배(定配)의 형률을 받았고 죄안(罪案)에 이미 드러났으니 지금 사핵하는 마당에서 수범(首犯)이라는 지목을 어찌 감히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황송하여 자백합니다.’ 하였습니다. 김두형의 공초에, ‘도목 정사를 하는 날 이조의 대령 서리(待令書吏)로서 기별청(奇別廳)에서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밤낮 쓰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하여 그저 이조 서리(吏曹書吏)가 보내 온 것만 믿고 써서 공포했을 뿐 횟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목이 끝났는지 끝나지 않았는지도 몰랐고, 또 문 밖에서 들여보낸 것이 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써냈는데 그것은 바로 안태정이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스스로 서로 호응한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전조에서 죄를 다스려 형배(刑配)될 처지가 되었으니 지금 엄하게 조사하는 마당에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공초 내용을 놓고 보면 안태정이 수범이라는 것은 그가 이미 자복하였으니, 설사 죄를 남김없이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 죄가 어찌 중벽(重辟)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김두형이 기꺼이 서로 호응하고 손이 가는 대로 써서 넘긴 것은 협종(脅從)의 형률에 합당합니다. 삼가 《대명률(大明律)》의 〈사위제서조(詐僞制書條)〉를 보면, ‘모든 제서(制書)를 위조한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고, 추종한 자는 장일백(杖一百)에 3,000리(里) 밖에 귀양을 보내며, 아직 시행하지 않은 자는 1등(等)을 감하고, 만약 제서에 글을 덧붙이거나 줄인 자도 죄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두 죄인이 정목을 속하여 덧붙였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법으로 헤아려 보건대, 극률(極律)을 시행해야 하지만 곧바로 시행하지 않았으니 1등을 감하는 형률에 합당할 듯합니다. 안우정은 담당 서리로서 사리를 모르고 지레 물러감으로써 이렇게 정목을 위조하여 덧붙이게 만들었으니, 설사 누구의 책임인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죄는 응당 정배의 형전을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의 법은 더없이 엄한 것이므로 본조(本曹)에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상(上)께서 재결(裁決)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일 경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3일 신묘

김성근(金聲根)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삼았다.

 

4월 4일 임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부묘(祔廟)를 할 때에 도감(都監)을 설치하는 것은 상제(祥祭)를 지낸 후에 거행하겠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대로 거행하되,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郎廳)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라."
하였다.

 

4월 5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4월 7일 을미

전교하기를,
"평안도(平安道) 군영(軍營)의 병정(兵丁) 3개 초(哨)를 병방(兵房)이 대신 거느리고 올라와서 대기하도록 평안 감사(平安監司)에게 하유(下諭)하라."
하였다.

 

김선근(金善根)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호익(李鎬翼)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이정규(李廷珪)를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형조(刑曹)에서, ‘이근보(李根輔)의 옥사(獄事)에 대하여 1차, 2차 검사를 진행하게 한 결과 시체의 상흔은 구타가 분명하니, 틀림없이 그렇게 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근보의 공초(供招)를 보면 묶어서 무릎을 꿇어앉혔다고 스스로 자백하고 있지만 제멋대로 구타한 부분에 대해서는 줄곧 도망 중에 있는 자기 집 종인 고학동(高學同)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생명을 중히 하는 도리로 보아 그가 변명한 것을 가지고 대번에 결정지울 수 없으므로 본조(本曹) 낭청(郎廳)을 보내 3차 검사를 설행하고 다시 엄하게 조사하되 옥사는 나라의 형정(刑政)에 크게 관계되는 만큼 철저히 심리하고 매우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지 죽은 원인이 구타인 것은 단연코 의심할 바가 없으니 도망 중에 있는 고학동을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에 분부하여 기한을 정하고 체포하게 하고, 이근보는 회추(會推)하여 다시 조사할 동안 전옥서(典獄署)에 엄히 가두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순천부(順天府)의 화재를 당한 집에 휼전(恤典)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4월 8일 병신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하향 대제(夏享大祭),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친히 봉심(奉審)하였다.

 

전교하기를,
"여러 가지 계(契)를 하는 것을 금단하는 것에 대하여 그동안 얼마나 엄하게 신칙하였는가? 그런데도 계속 여기저기서 나타난다고 하니, 어찌 그와 같은 도리가 있단 말인가?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양사(兩司),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으로 하여금 각별히 엄하게 금지하게 하되, 만일 다시 그런 일이 보고 된다면 해당 당상(堂上)과 포장(捕將)을 단연코 엄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4월 9일 정유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석상식(夕上食)을 행하고 직접 봉심(奉審)하였다.

 

〖청(淸)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세 사신(使臣)을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호익(李鎬翼), 부사(副使) 심기택(沈琦澤), 서장관(書狀官) 정한모(鄭翰謨)이다.】  소견(召見)하였다.

 

4월 9일 정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응제(應製)에서 직부전시(直赴殿試)한 홍정희(洪正憙)는 죄인 권응기(權應䕫)의 외손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람되게 과거에 응시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우선 방목(榜目)에서 빼 버리고 추조(秋曹)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10일 무술

이순익(李淳翼)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4월 12일 경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송도순(宋道淳)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4월 13일 신축

효모전(孝慕殿)의 재전(齋殿)에 나아가 수릉(綏陵)과 산릉(山陵)에 지낼 망제(望祭)와 고유제(告由祭)의 제문(祭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이돈하(李敦夏)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주영(李胄榮)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박제관(朴齊寬)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4월 14일 임인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홍정희(洪正憙)를 배천군(白川郡)의 수군(水軍)으로 충정(充定)하라고 명하였다. 병조(兵曹)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4월 15일 계묘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재전(齋殿)에서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 김홍집(金弘集),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 판중추부사            조병세(趙秉世),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이다.】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오늘 효모전(孝慕殿)에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셨으니, 삼가 이런 때 성상의 그리운 생각은 더욱더 새로우시리라 생각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느덧 이 때를 맞이하고 보니 끝없는 슬픔이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3년상을 마친 뒤 영조(英祖)는 백피화(白皮靴)를 신었고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른 첫 해에도 이 제도를 따르다가 계축년(1793) 행행(幸行) 때에 이르러 흑피화(黑皮靴)로 고쳤는데 그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다. 3년상을 마친 뒤의 옷차림새에 흑피화를 신는 것이 옛 제도가 아닌 이상 이번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는 백피화를 신으려고 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백피화를 신는 것은 본래 옛 제도인데 지금 받은 하교는 실로 예절을 극진히 차리려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옛 제도에는 보통 때에 다 백피화를 신었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희전(永禧殿)에 모신 어진(御眞)도 회색신을 신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종묘(宗廟)의 책보(冊寶)를 봉심(奉審)할 때에는 종전대로 흑피화를 신고 효모전에서 예식을 거행할 때와 시사(視事)할 때에는 백피화로 바꾸어 신는 것이 마땅하다. 조정의 신하들이 소상(小祥) 제사 후에 이미 흑피화를 신은 만큼 이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슬픔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는데 예는 반드시 옛 법을 따르시니 정의(情義)가 있는 곳을 우러러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조(禮曹)의 의주(儀注)에 상(上)의 옷차림은 백피화를 신는 것으로 고쳐 부표(付標)를 붙여서 들여오는 것이 좋겠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삼가 고쳐 가지고 부표하여 들이겠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조(英祖) 기묘년(1759)에 검푸른 빛깔의 갓을 썼는데 그것을 그대로 규례로 밝히도록 하였지만, 그 후에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검푸르다는 것은 과연 어떤 빛깔일까?"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검푸르다는 것은 아주 검은 빛깔입니다. 양반이나 일반 사람들의 집에서 담복(禫服)에 검은 갓이나 혹은 빛이 바랜 옻칠을 한 갓을 쓴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는 포과흑립(布裹黑笠)001)                  을 쓰려고 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흑색포립을 쓰는 것이 과연 예절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수릉(綏陵)과 산릉(山陵)에 직접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물이 같지 않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수릉의 제물은 각릉(各陵)의 규례대로 쓰고 산릉에는 본래 3년 안에 쓰는 제물이 있으나 위패(位牌)를 모신 이후의 제물에 대해서는 서로 차이가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직접 지내는 제사는 고안제(告安祭)를 겸하는 것이니, 모두 산릉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삼가 하교대로 봉상시(奉常寺)에 분부하여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원일(李源逸)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규홍(金奎弘)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이순익(李淳翼)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돈하(李敦夏)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4월 16일 갑진

월식(月食)이 있었다.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재전(齋殿)에 나아가 효모전(孝慕殿) 대 상제(祥祭)와 수릉(綏陵)에 친히 제사지내면서 겸해서 행하는 고안제(告安祭)와 건원릉(健元陵), 목릉(穆陵), 원릉(元陵)에 친히 지내는 제사와 산릉(山陵) 별다례(別茶禮)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재숙하였다.

 

오늘밤에는 금령(禁令)을 해제하라고 명하였다.

 

4월 17일 을사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상제(祥祭)를 행하고, 이어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수릉(綏陵)과 산릉(山陵)에 나아가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친히 제사지내면서 겸해서 고안제(告安祭)를 행하였다. 이어 건원릉(健元陵), 목릉(穆陵), 원릉(元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도로 산릉(山陵)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환궁(還宮)할 때에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전교하기를,
"어느덧 이 날을 당하고 보니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경릉(景陵)에 지내는 제사는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라."
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내가 어느덧 이 때를 당하니 슬픈 생각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옛일을 회상하니 감회가 더욱 깊어진다. 풍은 부원군(豐恩府院君) 내외(內外)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양주(楊州) 백성들을 돌보아 주려는 나의 한 마음은 원래 범상치 않은데 과연 아래에 그 혜택이 미치고 있는가? 다리를 수리하고 건물을 짓고 물건을 바치는 등의 일 때문에 수년 이래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으니, 영락한 읍(邑)과 가난한 백성들로서 어찌 폐단이 더해지지 않겠는가? 지난번에 부역(賦役)을 줄여주고 조세를 감면해 주었는데 실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읍의 일과 백성들의 사정으로 보아 폐단을 바로잡고 부담을 줄여주어야 할 것이 또 있다면 감영(監營)과 고을에서 충분히 토의하여 대책을 강구하고 조목별로 열거하여 등문(登聞)하도록 경기 감영(京畿監營)에 분부하라."
하였다.

 

심순택(沈舜澤)을 부묘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로, 박정양(朴定陽), 김규홍(金奎弘), 이순익(李淳翼), 조경하(趙敬夏)를 제조(提調)로 삼았다.

 

혼전(魂殿)의 향관(享官) 이하와 산릉(山陵)의 수릉관(守陵官) 이하, 두 위패(位牌)를 친히 봉안(奉安)할 때의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하와 건원릉(健元陵), 목릉(穆陵), 원릉(元陵), 수릉(綏陵), 산릉(山陵)에 가서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향관 김석진(金奭鎭)·윤용구(尹用求)·조동면(趙東冕)·이승순(李承純) 김윤현(金胤鉉)과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종규(金宗圭), 집례(執禮) 송병학(宋秉學), 대축(大祝) 정규섭(鄭圭燮)은 가자(加資)하였다.

 

4월 18일 병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문안을 드렸기 때문이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 판중추부사 조병세(趙秉世),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앞으로 나아갔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어제는 날씨가 맑고 온화하여 저녁녘에 행차가 아주 편안히 돌아왔으므로 모두 몹시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효성이 남달리 뛰어나다 보니 3년 동안 너무 엄하게 예법을 지킨 관계로 건강에 자연 많은 손상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몸을 스스로 보호하는 도리에 대하여 유념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효모전(孝慕殿) 상제(祥祭)가 어느덧 지나갔으니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잘 깨달았다. 나 소자(小子)의 슬픈 심정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예절은 비록 한정이 있지만 정은 실로 끝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성상의 효성은 끝이 없는데 대하여 신들은 언제나 흠모하는 바입니다. 옛 글에 이르기를, ‘지극한 효성은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라고 하였는데 우(禹) 순(舜)과 같은 효성을 지닌 분을 오늘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자전(慈殿)의 은덕은 하늘땅과 같이 높고 두텁지만, 나는 그의 만 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매우 한스러운데 어떻게 자기의 몸을 살필 생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평범한 사람들의 효성으로도 응당 자기 몸을 아껴야 하는데 더구나 전하의 한 몸은 나라와 백성이 의탁하고 있으니 얼마나 중합니까? 자전이 살아 계실 때 지극히 사랑하였으니 저승에서도 틀림없이 사랑하며 돌볼 것이니 오늘 몸을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바로 자전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됩니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전하는 상사(喪事)를 당한 후부터 장사를 마칠 때까지의 모든 제사와 의식과 예의 절차에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조심하였으며 한껏 슬퍼하고 공경스럽게 하며 3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의 효성이 하늘에서 타고난 것에서 기인한 것이니 신들은 언제나 경모하는 바입니다. 이제는 3년상도 어느덧 지나갔으니 슬픈 생각이 더욱더 새로워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요즘 지나치게 슬퍼하고 과도하게 움직이는 관계로 또 많은 경우 쉬이 건강에 손상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아랫사람들은 큰 근심과 걱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3년 동안 제사를 드리면서 나는 정성을 다하려고 하였지만 간혹 조심하는 일 때문에 직접 거행하지 못한 때가 있었으므로 늘 송구하기 그지없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3년 동안 정성을 다하고 예절을 다하셨으니 이것은 실로 임금의 집안에서 보기 드문 거룩한 효성이므로 언제나 경모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예절은 감히 선대 임금의 제도를 어기지 못하는 만큼 전하께서 아무리 효도를 다할 생각이 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아랫사람들의 의견에 굽혀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구구한 정성에서 감히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전하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나서 3년 동안 예절을 다하였고 일체 상사에 속하는 절차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다 같이 간절히 우러러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제도 어느덧 지나갔는데 계속 슬퍼하며 과도하게 움직인다면 또 건강에 많은 손상을 끼칠 것 같아 염려됩니다. 신은 임금을 보호하는 직책에 있는 만큼 남들보다 근심과 걱정스러운 생각이 곱절 더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어느덧 3년상도 마치고 보니 슬픈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그런데 아직도 마음에 만족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섭섭한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상제를 지낸 후의 복색(服色)은 시사(視事)를 할 때에는 흑립(黑笠)을 쓰고, 한가히 있을 때에는 백립(白笠)을 쓰는데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대상(大祥)을 지낸 후에 영조(英祖)께서는 일찍이 백립을 쓰고 조정 신하들을 만났다. 그러므로 나도 백립을 썼으며 전(殿)에 나갈 때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입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어제는 백피화(白皮靴)를 신도록 하겠다는 처분을 받았고 오늘은 또 백립을 쓰고 연석(筵席)에 나오겠다는 하교를 받았으니 경모의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개인 집의 예절에 관한 말을 번거롭게 올릴 필요는 없지만 감히 이 하교로 인하여 송구함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백립에 흰 선을 두른 것은 대상 후에 쓰는 갓이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상복을 벗고서는 가는 검은 실을 날실로, 흰실을 씨실로 하여 짠 갓을 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양반들과 일반 사람들이 대상을 지낸 후에 백립을 쓰고 상복을 벗은 후에 흑립을 쓰는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대상조(大祥條)〉에는 오래된 연한 빛깔의 상복을 입는다고 한 글이 있는데 예법에 정통한 사람들은 대개 의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문정공(文正公) 이재(李縡)가 지은 《사례편람(四禮便覽)》에서는 대상조에 대하여 오래된 대상의 상복을 입는다고 바로잡았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3년상을 치르는 것은 천자로부터 보통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가지인데 어찌 개인 집 예법이라고 다를 수 있겠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하교하신 이 말씀은 만대를 두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백립에 포포(布袍)를 입고 백사대(白絲帶)를 쓰는데 나는 이제 포대(布帶)를 쓸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지금 양반이나 일반 사람도 백립을 쓰고 또한 포대를 씁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대상을 지낸 후 능을 전알할 때면 곡(哭)하지 않았는데 정조(正祖) 때부터 시행하기 시작하여 그대로 의주(儀注)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나도 그대로 시행해 왔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 효모전에 나아가 곡하고 절하겠다. 담제(禫祭) 전까지는 날마다 하려고 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개인 집들에서는 대상을 지내고 신주(神主)를 사당에 모신 다음 담제 지내기까지는 더는 곡하지 않고 참배하는 의식을 많이 거행하는데 지금 이렇게 효모전에 가서 곡하고 절하겠다는 것은 하늘에서 타고난 전하의 거룩한 효성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에 없는 일이니 날마다 전배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삭제(朔祭), 망제(望祭), 별다례(別茶禮) 때에는 모두 곡하는데 전배할 때에 곡하는 것이 무슨 안될 것이 있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일정한 때가 없이 전배하는 것과 제사 예식은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삭제와 망제 때에는 곡하고 절하는 의식이 있다고 하였으니, 삭제나 망제 외에는 일정한 때가 없이 곡하고 울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하교하는 것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려는 끝없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지만 옛날 어진 임금들의 제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니 또한 깊이 유념하소서."
하니, 정범조가 아뢰기를,
"예의 제도는 거기에 더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어찌 날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슬피 곡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순조(純祖) 때에는 혼전(魂殿)에 대상을 지낸 후 전알할 때에도 곡하고 절하는 의식이 있었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것은 날마다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거룩한 효성을 지닌 전하는 기어코 예절을 다하려고 하지만 신이 그것이 예절에 벗어난다는 것을 아는 이상 또한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벌써 거행하였는데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는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내일부터는 전배만 하시기를 구구하게 바랍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3년상 안에 진전에 다례를 지낼 때에는 흉배(胸背)가 없는 흑단령포(黑團領袍)를 입고, 일정한 때가 없이 전배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었다. 그러므로 담제 전에 혹 전배하는 경우에는 흑단령포를 입으려고 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참으로 점차 보통 옷으로 바꾸어 나가는 뜻에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듣건대 민간에서는 백립 밑에 혹 두건을 쓰기도 한다는데 그런가?"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두건은 본래 예복이 아니고 단지 갓을 벗었을 때에만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한두 집들에서 백립 밑에 두건을 쓰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조가 무덤 곁에 초막을 치고 있을 때 늘 상복을 입고 두건은 쓰지 않았는데 바로 몹시 더운 때여서 어떤 관리가 두건을 쓸 것을 아뢰었으나 곧 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세속에서 굴건(屈巾)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름도 있고 끈도 달려 있는 것으로써 바로 옛날의 갓 제도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조는 인원 왕후를 효성으로 섬기면서 늘 여느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관계와는 다르다고 하교하였고 상사에 관한 예법을 지키면서 예절을 다하였으며 또한 새롭게 만들어 시행한 제도도 많았다. 어리석은 내가 어찌 훌륭한 선대 임금을 감히 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3년상의 예절은 그대로 따랐다고 생각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그저께 위패를 모시고 지낸 차례도 숙종(肅宗) 때의 옛 제도를 따랐으므로 신은 우러러 칭송하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인원 왕후는 공덕이 아주 훌륭하여 대궐 안에는 아직도 칭송하는 옛 사적이 많고 평상시의 옷차림새도 아직 진전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다. 인원 왕후 때부터 숙종의 신위(神位)를 모신 실(室)에 상식(上食)을 올렸는데 그 후 이어 진전에 상식을 올리는 의식이 있게 되었다. 전각 안에 달아 놓은 구슬 등은 바로 왕후가 손수 꾸며 만든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것은 다 신이 지난 날 들은 일입니다."
하였다.

 

오준영(吳俊泳)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명규(金明圭)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병수(金炳秀)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4월 19일 정미

왕세자(王世子)가 경무대(景武臺)에 나아가 종묘(宗廟) 별대제(別大祭)의 서계(誓戒)를 받는 의식을 섭행(攝行)하였다.

 

김명규(金明圭)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남숙희(南肅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4월 20일 무신

전교하기를,
"각 도의 무사(武士)들이 먼 길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와서 달이 지나도록 체류하고 있으니, 반드시 고생이 많을 것이다. 응당 뜻을 표시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니, 성책(成冊)을 작성하여 들이고, 돌려보낼 때에 돌아가는 길 식량은 친군영(親軍營)으로 하여금 넉넉하게 주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민후식(閔厚植)을 시강원 겸설서(侍講院兼說書)로 삼았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가 상소하여 호위대장(護衛大將)의 직책을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4월 21일 기유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민병석(閔丙奭)의 장계(狀啓)를 보니, ‘도내(道內)의 보산진(保山鎭)은 바로 바다 어귀의 중요한 요해지로써 윤선(輪船)이 정박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방비에 관한 중요한 일을 반드시 치밀하게 한 다음에 방어를 튼튼히 할 방책을 세울 수 있으니, 그 진(鎭)의 별장(別將)을 자체로 임명하게 하고 교사(敎師) 중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부터 천전(遷轉)하도록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평안도(平安道) 군영(軍營)을 처음 설치한 후에 초관(哨官), 초장(哨長)은 모두 세운 공로에 대한 은전을 입었으나 유독 교사(敎師)만은 은전을 받지 못하여 한탄이 없지 않습니다. 특별히 장계의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되, 별장의 임기가 차는 때를 기다려서 후임자를 차임(差任)하여 교대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4월 23일 신해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다.

 

이승순(李承純)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4월 25일 계축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선조 대왕(宣祖大王), 의인 왕후(懿仁王后), 인목 왕후(仁穆王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데에 따른 책보(冊寶)를 대신 올리고 나서 경숙(經宿)하였다.

 

전교하기를,
"태묘(太廟)에 와서 전알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을 조금 폈다. 동궁(東宮)은 책보(冊寶)를 대신 올린 후에 잠깐 창덕궁(昌德宮)에 머물렀다가 막차를 나갈 것이다."
하였다.

 

4월 26일 갑인

왕세자(王世子)가 종묘(宗廟)의 별대제(別大祭)를 섭행(攝行)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심순택(沈舜澤)을 제배(除拜)하여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삼았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중추부(中樞府)에서 한가롭게 지낸 지도 여러 달이 지났으니, 보양함에 여유로운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물론 스스로 좋게 여겼겠지만 나는 양쪽 팔을 다 잃은 듯하였기에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나의 마음은 경을 잠깐 만나지 못한 것도 마치 오랜 세월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서로 잘 아는 만큼 마땅히 이해하여야 할 것이니, 벼슬을 사양하지 말고 당일로 조정에 나옴으로써 자리를 비워놓고 기다리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4월 29일 정사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에게 재차 하유(下諭)하였다.

 

이근명(李根命)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병수(金炳秀)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학수(金鶴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