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정해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담제(禫祭)를 삭제(朔祭)를 아울러 행하고, 이어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또 망전례(望殿禮)를 행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 판중추부사 조병세(趙秉世),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돈하(李敦夏)이다.】 하교하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하는 것은 의논하려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종묘(宗廟)에 부제(祔祭)를 지낸 후로 우러러보며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는데, 태묘(太廟)의 삭제(朔祭)와 망제(望祭)를 열성조(列聖朝)에서 직접 지낸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종묘에 부제를 지낸 후에 망제를 내가 장차 친히 행하여 조금이나마 인정과 예법을 펴고자 한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성상께서는 정성과 효성이 남달리 뛰어나다 보니 3년 거상(居喪)에서는 자신이 직접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이제 또 태묘의 망제를 직접 지내겠다는 하교를 받드니, 이것은 더욱 보기 드문 예로써 역사책을 빛나게 할 수 있으므로 신은 경모의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효도를 다하려는 성상의 끝없는 마음을 우러러 짐작할 수 있으며, 열성조에서 시행한 예식에 대해서 어느 것이나 다 따르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신은 그지없이 흠앙합니다."
하고, 김병시(金炳始)가 아뢰기를,
"이것은 또한 성상의 효성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종묘에 부제를 지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이어 친히 망제를 지내신다니, 아랫사람의 마음에 애가 탑니다."
하고,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들으니, 칭송하면서도 더욱 걱정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태종조(太宗朝), 세종조(世宗朝)에는 태묘의 삭제와 망제를 친히 지냈고, 영조조(英祖朝)에는 직접 지내지 않은 해가 없었으며, 기우제(祈雨祭)와 고유제(告由祭)도 반드시 친히 지냈다. 그 당시 대신(大臣)이, ‘큰 제사 이외에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상고할 만한 의식 절차가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상(上)이 하교하기를, ‘성종조(成宗朝)에 직접 기우제를 지낼 때 《태종 실록(太宗實錄)》을 상고하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때의 일이 틀림없이 옛 사적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어 규례로 삼았다. 정종조(正宗朝)에 와서 경모궁(景慕宮)에 지내는 삭제와 망제는 대체로 직접 지냈는데 월근문(月覲門) 또한 북장문(北牆門)을 본떠 건립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아! 세월이 빨리 흘러 담제(禫祭)가 이미 지나고 부제가 가까워오니 슬프고 허전한 마음 다함이 없다. 태묘의 삭제와 망제를 열성조에서 직접 지낸 전례가 많은데, 더구나 오늘날 나 소자(小子)의 형편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종묘에 지낼 이달 망제는 내가 직접 지냄으로써 다하지 못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풀어야 하겠으니, 예조(禮曹)로 하여금 규례대로 마련하게 하라."
하였다.
조병필(趙秉弼)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임희상(林羲相)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김규홍(金奎弘)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민형식(閔亨植)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효모전(孝慕殿)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찬례 이건하(李乾夏), 예방 승지(禮房承旨) 강찬(姜𧄽), 집례(執禮) 조길하(趙吉夏), 집준(執尊) 정면석(鄭冕錫), 대축(大祝) 윤승필(尹承弼), 예모관(禮貌官) 민병승(閔丙承), 상례(相禮) 홍종영(洪鍾榮)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전 예조 참의(前禮曹參議) 심기택(沈琦澤)을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영릉(寧陵)에 보토(補土)한 공로 때문이다.
6월 2일 무자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태묘(太廟) 부제(祔祭)의 서계(誓戒)를 받는 의식을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만교(李萬敎)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윤창섭(尹昌燮)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6월 3일 기축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가 상소하여 재상의 직책을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해 주었다.
정범조(鄭範朝)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김석근(金晳根)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남숙희(南肅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4일 경인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나서 흥청문(興淸門) 밖에 나아가 신련(神輦)을 받들고 나아가는 데 대한 습의(習儀)를 거행할 때 신련을 지영(祗迎)하였다.
조인승(曺寅承)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인철(李寅轍)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5일 신묘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천신(薦新)을 행하였다. 이어 재전(齋殿)에 나아가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효모전, 예고제(豫告祭)의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6월 6일 임진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재숙하였다.
김석근(金晳根)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남숙희(南肅熙)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7일 계사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예고제(豫告祭)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충청도 암행어사(忠淸道暗行御史) 이중하(李重夏)와 전라도 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 이면상(李冕相)을 소견(召見)하였다. 복명(復命) 하였기 때문이다. 서계(書啓)로 인하여 해미 전 현감(海美前縣監) 윤형대(尹亨大), 평택 전 현감(平澤前縣監) 조영원(趙榮元), 당진 전 현감(唐津前縣監) 황기인(黃䕫仁), 청안 전 현감(淸安前縣監) 오우선(吳友善), 성환 찰방(成歡察訪) 김필현(金弼鉉), 충주 전 영장(忠州前營將) 윤양대(尹養大), 평신 첨사(平薪僉使) 이민성(李敏性), 전 첨사(前僉使) 이상욱(李象郁), 장수 전전 현감(長水前前縣監) 이헌우(李憲愚), 여산 전전 부사(礪山前前府使) 김원식(金源植), 운봉 전전 현감(雲峯前前縣監) 오만선(吳萬善), 함평 전 현감(咸平前縣監) 이주필(李周弼), 만경 현령(萬頃縣令) 임찬호(任璨鎬), 남원 전 부사(南原前府使) 조남식(趙南軾), 곡성 전전 현감(谷城前前縣監) 이건응(李建膺), 옥과 전 현감(玉果前縣監) 오우선(吳友善), 용안 전 현감(龍安前縣監) 김명희(金明熙), 정읍 전전 현감(井邑前前縣監) 윤상구(尹相耉), 구례 전 현감(求禮前縣監) 이희구(李熙九), 청암 전 찰방(靑巖前察訪) 김인선(金麟善), 나주 전전 영장(羅州前前營將) 정동현(鄭東顯), 군산 전 첨사(群山前僉使) 이인정(李寅正) 등은 처벌하고 황간 전 현감(黃澗前縣監) 박현양(朴顯陽), 광주 목사(光州牧使) 민선호(閔璿鎬)는 표창하여 가자하였으며, 태안 부사(泰安府使) 이봉호(李鳳鎬), 능주 목사(綾州牧使) 김승집(金升集), 영광 전전 군수(靈光前前郡守) 송도순(宋道淳), 고부 전 군수(古阜前郡守) 서기보(徐綺輔), 장흥 전전 부사(長興前前府使) 민치준(閔致駿), 순창 군수(淳昌郡守) 윤병관(尹秉觀), 함열 전전 현감(咸悅前前縣監) 홍병도(洪秉燾), 공주 판관(公州判官) 송병종(宋秉琮), 온양 군수(溫陽郡守) 서만보(徐晩輔), 전 목천 현감(木川前縣監) 조성희(趙性憙), 곡성 전 현감(谷城前縣監) 이희하(李熙夏)는 차등 있게 포상(襃賞)하였다.
이용직(李容稙)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8일 갑오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종묘(宗廟)의 별대제(別大祭)와 효모전(孝慕殿)의 고동가제(告動駕祭)에 쓸 축문(祝文)에 친압(親押)하였다.
조경하(趙敬夏)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6월 9일 을미
효모전(孝慕殿)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고, 이어 신련(神輦)을 모시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핀 다음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재숙하였다.
전교하기를,
"오늘 신련(神輦)을 배봉(倍奉)할 때에 서울의 남녀들이 우러러 보며 그리워 한 것은 아! 바로 떳떳한 도리와 인정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와 같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우리 돌아간 왕후의 덕화 속에 똑같이 혜택을 입은 사람이니 또한 뜻을 표시하여 따뜻이 보살펴 주던 훌륭한 생각을 좇아야 마땅하겠다. 묘동(廟洞)의 입구에서 광화문(光化門) 밖까지 상언(上言)을 봉입하게 하라."
하였다.
6월 10일 병신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부묘례(祔廟禮)를 행하고, 이어 별대제(別大祭)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전교하기를,
"아! 3년의 상기(喪期)가 어느덧 지나가고 부묘(祔廟)하는 절차도 순조롭게 이루어지니, 그지없이 슬픈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생각건대, 돌아가신 우리 성후(聖后)께서 모후(母后)로 60년 가까이 계시면서 내내 염려하고 애쓰신 것은 실로 백성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었다. 그 뜻을 계술(繼述)해야 하는 나 소자(小子)의 의리에 있어, 어찌 백성을 사랑하던 생전의 훌륭한 뜻을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민(市民)의 요역(繇役)은 2개월에 한해서, 푸줏간의 속전(贖錢)은 10일에 한해서 특별히 감해 주도록 분부하라. 이 밖에 공시(貢市)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여야 할 것과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실례를 들어 병통을 지적하고 특별히 다시 충분한 토의를 거쳐 좋은 쪽으로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에 모신 것과 관련하여 하례(賀禮)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왕세자도 따라 나아가서 예를 행하였다. 교문(敎文)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암(諒闇)에 있으면서 대상(大祥), 소상(小祥)과 담제(禫祭)를 마치고 나서 더욱 허탈하고 애달픈 마음이 늘어만 가던 터에 예실(禰室)에 신주를 봉안하는 의식까지 마치게 되었으므로 이에 널리 온 나라에 알리는 대전(大典)을 거행하는 것이다. 삼년상(三年喪)의 예식이 그러한데도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 태모(太母)의 크신 덕과 지극히 인자하신 마음은 옛날의 어질고 명철했던 어떤 후비(后妃)보다 빼어나시다. 능히 황고(皇考)의 아름다운 명대로 잘 따르며 순(舜)처럼 섭정(攝政)하는 일을 도와 이바지한 것이 많으셨고, 마침내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훌륭한 명성을 이어 주남(周南), 소남(小南)의 교화를 이루었으며 오래도록 도(道)에 따라 실천하셨다. 60년 가까이 임하여 계시는 동안 왕후로서의 아름다움을 천양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셨으며, 육궁(六宮)의 사람들을 데리고 보불(黼黻)의 무늬를 놓은 어의(御衣)를 만들어 올려 선조를 받듦에 효성을 다하셨다. 한때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된 상황을 만나자 모친의 도리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여 나라의 큰 계책을 정하고 왕업의 기반을 다지셨으니 위대한 공렬(功烈)이 우뚝하여 견줄 이가 없고, 정도(正道)를 지키고 이교(異敎)를 물리치시니 보이지 않는 교화가 성대하게 유행하였다. 큰 은택과 깊은 어짊은 수많은 백성들을 배양하여 잘 살게 하였고, 성대한 덕성과 두터운 선심은 22권의 요첩(瑤牒)에도 이루 다 쓰지 못할 정도이다.
돌아보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외람되이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물려받고 자애롭게 돌보아 주시는 크나큰 은혜를 특별히 입었으므로 선왕의 제도를 거울삼아 옛 법을 따라야 하니, 이것이 바로 조종(祖宗)께서 나에게 나라를 맡겨 주신 까닭이다. 만나는 일마다 가르쳐 주시고 오직 나 소자가 병들까 근심하셨으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도 크고 끝이 없어서 갚을 길이 없도다. 상서가 발현됨이 장구하여 내가 경사롭게 대를 이을 아들을 보았고 큰 복을 받아 손자의 재롱을 즐기실 수 있게 하였으며, 장구한 복이 끝이 없어 자주 노(魯) 나라 궁실처럼 즐거운 잔치를 베풀고 대왕대비의 귀하신 몸이 되어 건강하고 편안하게 지내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풍상(馮相)이 요기(妖氣)가 있음을 알려옴에 문득 무녀성(婺女星)이 빛을 잃고 말았다. 저승으로 아득하게 떠나가시니 슬프게도 어찌하여 차마 이렇게 떠나셨는가? 태모께 매번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던 일을 영원히 하지 못하게 되니 들어가도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 같도다.
상례의 모든 절차는 진실로 예를 다하고 성의를 다하였으며, 늘 마음에 두고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으로 매번 더욱 공경과 효를 다하였다. 벌써 3년의 상기가 끝나 어느덧 담제하는 절차까지 끝나고 나니, 침전(寢殿)에서 궤전(饋奠)하던 의식을 거두고 신탑(神榻)에 머무르실 자리를 마련하였다. 선왕의 예제(禮制)에는 한정이 있으나 성후(聖后)의 지체가 무엇보다 존귀하니 성대한 제사를 베풀어 비로소 모두 차례로 제사하고 나라의 상전(常典)을 상고하여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예를 능히 갖추었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6월 10일에 종묘에 함께 신주를 모시어 황고(皇考)와 황비(皇妣)의 밝은 신령이 같은 종석(宗祏)에 나란히 임하시니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하늘에 사무친다. 청도(淸道)에 선왕의 의장(儀仗)이 엄연히 드러나니 성대하여 마치 곁에 계신 듯하고, 보감(寶龕)의 자리와 차례가 정연하니 엄숙하여 그 모습과 소리를 들을 듯하다. 의물(儀物)을 보니 갖추어 베풀어져 내용과 형식에 부족한 것이 없고 제기를 늘어놓은 것이 정연하여 제사하는 일이 매우 잘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울창주를 부어 강신을 하고 길게 주현(朱絃)을 연주하여 노래한다. 그지없이 애통하니, 곤복에 면류관을 갖추어 입은들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평소 자애로우시던 은혜를 우러러 생각하니, 혼령의 기운이 느껴져서 슬픔이 더해지도다.
우리 왕가(王家)가 예절을 따랐던 것을 본받아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거행하고, 지극한 덕화로 인을 베풀었던 것을 본받아 어찌 함께 즐거워하는 아름다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화기(和氣)가 온갖 사물을 소생시키어 만물을 기르기를 하늘의 때에 맞게 하고 성대한 은택을 온 세상이 고루 입도록 과실이 있는 자를 사면하고 죄인을 용서하노라.
이달 10일 새벽 이전에 지은 죄로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에 해당하는 자를 모두 용서하라. 아! 의문(儀文)이 아름답게 빛나고 형향(馨香)이 위로 상천에 이른다. 하례하는 대궐의 뜰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음은 진실로 옛날을 슬퍼하는 뜻에서이거니와 온 나라에 향기가 두루 퍼져 천명이 새로워지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교시하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돈하(李敦夏)가 지었다.】
【원본】 33책 29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421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할 때의 종헌관(終獻官) 이하,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 신련(神輦)을 시위한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이하, 왕세자(王世子)가 아헌례(亞獻禮)할 때의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이하, 영녕전(永寧殿)에 섭행(攝行)할 때의 헌관(獻官) 이하, 진하(陳賀)할 때 및 대청에 앉아서 하례(賀禮)를 받을 때의 각 차비(差備)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提調) 조경하(趙敬夏)·박정양(朴定陽)·이순익(李淳翼)·김규홍(金奎弘), 도청(都廳) 홍가유(洪嘉裕)·정한모(鄭翰謨), 도승지(都承旨) 이재순(李載純), 우승지(右承旨) 윤길구(尹吉求),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원하(鄭元夏), 선교관(宣敎官) 김인식(金寅植), 전사관(典祀官) 이최영(李㝡榮), 대축(大祝) 조병건(趙秉健), 좌통례(左通禮) 윤영수(尹英秀), 우통례(右通禮) 홍우정(洪祐禎), 예모관(禮貌官) 김승규(金昇圭), 상례(相禮) 김상덕(金商悳)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홍종영(洪鍾榮)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심상황(沈相璜)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오정근(吳正根)을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으로 삼았다. 심상황은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부묘(祔廟) 후의 경과(慶科)를 별시(別試)로 마련하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하였기 때문이다.
6월 12일 무술
정기회(鄭基會)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김성근(金聲根)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6월 13일 기해
이규영(李珪永)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영두(朴永斗)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14일 경자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 등 제물(祭物)을 간심(看審)하고, 이어 재숙(齋宿)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고 재숙하였다.
6월 15일 신축
종묘(宗廟)의 망제(望祭)를 친히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6월 16일 임인
왕세자(王世子)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올해는 삼가 우리 성상의 보령이 41세가 되고 왕위에 오르신 지 30년이 되는 경사를 만나게 되었으니, 실로 우리 열성조(列聖朝) 이래로 보기 드문 일로서 이 두 가지 경사가 한 해에 모인 것은 또 아직까지 없었던 일입니다. 하늘의 돌보심이 더욱 융숭하여 나라의 상서로움이 모두 이름에 해마다 거듭 경사가 나고 하늘이 국운을 융성하게 하여 우리에게 태평만세의 무궁한 터전을 열어 주었으니, 태평성대의 덕화 속에서 성대하게 길러지는 것은 신민(臣民)들이 손뼉 치며 춤추는 심정을 통해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성상의 보령을 언제나 기억하고 날을 아끼며 섬기는 신의 심정으로서야 그 기쁨과 축원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응당 거행했어야 할 전례(典禮)를 경인년(1890) 겨울에 삼가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고, 지난해에도 올해 경축할 일을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또 승낙을 받지 못하여 진작 연초에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중대한 경사가 거듭 되는데 작은 정성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의 답답하고 절박한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온 나라 신민들이 신이 성상의 경사를 크게 장식하고 공덕을 천양하는 데에서 직분을 다 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두려워하고 머뭇거리며 오늘에 이른 것은 또한 겸양하는 우리 성상의 뜻을 따른 것이지만, 우리 성상의 자애로운 생각으로는 아마 또한 신의 안타까운 사정(私情)을 헤아려 주심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큰 덕과 높은 공적이 삼대(三代)를 뛰어넘어 문(文)으로써 나라를 화목하게 하고 무(武)로써 온갖 화란을 평정하셨습니다. 효도에 대한 생각은 하늘에 근원하였기에 정성과 예를 다하셨으니, 요(堯) 순(舜)과 같은 성왕(聖王)의 지위에 있으면서 증자(曾子)와 민자(閔子)의 효행를 행하셨습니다. 태실(太室)에 존호(尊號)를 올려 공을 세운 선왕을 추모하고, 공신과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세월이 지난 뒤에도 공훈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였으며, 백성들의 일을 진념하여 빈궁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었고,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과거 규정을 엄하게 밝히셨니다. 그리하여 억만년 무궁할 나라의 터전이 거듭 공고해지고, 자혜(慈惠)롭고 지극한 교화가 더욱 빛나니, 그 공은 너무도 높고 넓어서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 중궁 전하(中宮殿下)는 땅처럼 만물을 받아들이는 후한 덕을 지니고 하늘처럼 강건한 성상의 배필이 되어 지극한 덕으로 널리 포용하고 너그러운 덕화로 두루 화목하게 하시니, 정사와 교화가 실로 내조(內助)를 통하여 깊어지고 만물이 음공(陰功)을 입었으니, 태임(太姙)과 태사(太姒)의 성스러움과 앞뒤로 헤아려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아! 양성(兩聖) 전하의 성대한 공덕은 하늘과 같이 크기 때문에 그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하려 한다면 사관(史官)의 붓으로도 다 감당할 수 없고, 옥검(玉檢)의 서첩으로도 다 실을 수 없을 것이니, 해마다 책보(冊寶)를 받들고 날마다 공덕을 칭송하더라도 어찌 신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칠 수 있겠습니까? 경사를 맞아 공덕을 표현하려는 것이 신자(臣子)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신은 외람되게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길러주고 훈도하는 은혜를 남달리 입었으니, 천지처럼 높고 두터워서 끝이 없건만 지금까지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이 성대한 때를 당하였는데도 또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하늘이 내린 경사에 사례하고 군친(君親)을 빛내지 못한다면 신이 장차 무슨 말로써 조정 신료를 대하며 백성들에게 대답하겠습니까? 이에 감히 송구함을 무릅쓰고 다시 예전의 호소를 거듭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신의 청을 허락하여 양성 전하께 존호을 올리게 하시고, 이어서 장수를 축원하는 술잔을 드리도록 허락하시어 떳떳한 법을 빛내고 군정(群情)을 따르소서. 이 또한 삼가 돌보아 주는 하늘의 뜻을 따라서 나라가 영원토록 이어 나가게 하는 것이고, 나라의 운수가 더욱 길어져서 경사와 상서가 모이게 하는 길입니다. 신은 몹시 기쁜 마음과 큰 기대에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해마다 이 일로 간청하는데, 내가 어찌 그대의 정성을 헤아리지 않겠느냐. 그러나 때가 적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곧 내 마음이 원하지 않는 바이다. 혹 금년에 경사가 거듭되었기에 응당 칭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것은 물론 사리로 보아 당연하지만, 내가 무슨 덕이 있어서 그것을 감당하겠느냐.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렇게 급하지 않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학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장차 성취하는 성과를 거두는 데에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어버이의 뜻을 잘 받드는 효성이라 할 것이니, 그대는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저하가 해마다 전례(典禮)를 청하는 것은 큰 경사를 아름답게 꾸며서 하늘의 아름다움을 선양하려는 것인데, 우리 전하께서는 매양 겸손한 마음을 가져서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니, 신들 또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경사 중에 어찌 금년과 같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전하의 보령이 41세가 되고 나라를 다스린 지 30년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모두 한 해에 모여 있으니, 사첩(史牒)에도 없는 바로서 실로 종사(宗社)가 억만년토록 무궁할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 전하를 돌보아 복록으로 편안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전하의 깊고 두터운 인택(仁澤)과 크고 높은 공렬(功烈)이 하늘을 감동시켜서 그러한 것이니, 아! 아름답고 성대합니다.
또한 우리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는 두터운 곤덕(坤德)으로 성상을 받들고, 교화는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 바탕하였으니, 태임(太姙)과 태사(太姒) 이래로 더 성대한 이가 없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로부터 보우(保佑)를 받아 복록이 냇물처럼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 양성(兩聖) 전하의 형용할 수 없는 덕업(德業)을 일에 따라 천양하고 아름다운 존호를 더하는 것은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저하가 이와 같은 경사를 맞이하여 이렇게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그만둘 수 없는 찬양하는 일과 헌수(獻壽)의 전례를 행하지 않고 마침내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자애로운 마음에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신다면 절로 애써 윤허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삼가 세자의 가르침을 받들건대, 장차 또 간청하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소서."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보령이 망오가 되고 보위에 오른 지 30년이 되는 큰 경사가 모두 금년에 있게 되니, 이는 진실로 삼대(三代)의 융성한 시대에도 드물게 있는 경사스러운 때입니다. 동궁 저하가 어버이의 연세를 기억하고 효양(孝養)할 날을 아끼는 정성으로 무릇 아름다움을 천양하거나 헌수하는 일에 반드시 예(禮)를 다하고자 해마다 거듭 청하였으나 아직까지 윤허를 미루고 계시니, 신들은 기뻐서 손뼉을 치며 경하하는 가운데에 어찌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대저 큰 덕을 지닌 분이 장수를 누리고 이름을 얻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지금 우리 양성 전하께서는 공덕이 융성하고 복록이 창대합니다.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끝내 그러한 이름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속히 동궁의 청을 윤허하시어 하늘의 아름다움에 응답하고 뭇사람의 정성에 부응하소서. 매우 간절히 바라나이다."
하고, 판중추부사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금년에 함께 이르게 된 큰 경사는 실로 성상께서 반드시 받아야 할 복록에서 나온 것으로 더욱이 지나간 사첩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니,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기뻐서 송축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우리 동궁 저하는 하늘에 근본한 효성으로 우러러 경사를 장식할 전례를 청하였으나 성상께서는 비답에서 윤허를 미루고 계시니,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제 막 내일 거듭 호소하겠다는 동궁 저하의 영을 받들었으니, 삼가 바라건대, 흔쾌히 유음을 내려 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동궁이 해마다 간청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바이지만 금년의 경사를 가지고 말하자면 이는 때마침 그러한 것일 뿐이니, 나에게 무슨 덕이 있어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지금 백성과 나라의 일에 지극히 절박한 문제가 매우 많아 내가 바야흐로 한 마음으로 근심하고 애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이 급하지 않은 일을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진심으로 겸손한 뜻을 굳게 지키시는 것은 우러러 칭송치 않는바 아니지만 우리 동궁 저하의 타고난 효성과 봉양할 날을 아끼는 정성이 성대하게 상소한 내용에 넘쳐흘러서 자연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온 나라 신민들이 다투어 보고 귀 기울여 듣고는 함께 찬송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이 경사를 맞이하여 이 의례(儀禮)는 이미 응당 행해야 할 일이 되었으니, 전하께서 어찌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재삼 생각하소서."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겸손하게 사양하는 하교를 내리시니, 신은 진실로 매우 흠앙(欽仰)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건대, 동궁의 효성이 이처럼 간절하고 돈독하니, 우리 성상의 자애로운 생각에 어찌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온 나라의 신민들이 한 목소리로 원하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원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주는 어진 마음에 또 어찌 깊이 헤아려 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동궁의 이 소청은 3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힘써 성의를 쌓아 해 온 것입니다. 지금 이 겸손하게 사양하는 성덕(聖德)에 대해서는 흠앙하지 않는 바가 아니지만 가만히 동궁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삼가 보건대,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삼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유음을 내려 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동궁의 효성은 가상하고 기쁜 일이지만 무릇 그러한 실상이 있고 난 뒤에 그러한 이름이 있게 되는 법인데, 나에게 이미 그러한 실상이 없으니, 어찌 그러한 이름을 받을 수 있겠는가. 방금 동궁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있었거니와 이 일은 끝내 문식(文飾)만 더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니, 실상에 힘쓰는 것이 유익함이 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종묘(宗廟)의 망제(望祭)를 친히 행할 도제조(都提調) 이하 및 각 차비(差備)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6월 17일 계묘
왕세자(王世子)가 재차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매년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원을 정성을 다해 우러러 호소하는 것은 어찌 신이 신하와 자식 된 도리로서 임금과 어버이의 아름다움을 천양하여 그 뜻과 소원을 이루고자 할 뿐이겠습니까? 이는 곧 위로 하늘의 뜻에 응답하고 아래로 신민의 기대를 따르려는 것이기에 아마 성상께서는 애써 마음을 돌려서 분명히 윤허하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답을 받들어 보니, 유음을 내리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겸양함이 더욱 진지하고 겸손함이 너무 지나치시니, 신은 서성이며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천지처럼 도량이 크신 성상께 서운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 양성(兩聖) 전하께서는 덕업의 융성함과 공렬의 위대함은 지난날에 짝할 이가 없고, 또한 명성이 길이 전할 것입니다. 이미 많은 복을 받고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복록이 끊이지 않고 밀려오니, 무릇 우리 백성들은 모두 인수(仁壽)의 지경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상의 무위(無爲)의 다스림은 오래도록 정도(正道)를 준행하여 온 나라가 교화되고 아름다운 풍속이 이루어졌으니, 문물이 완비되고 만물이 번성한 것이 이때에 가장 성대하게 되었습니다. 위기를 전환하여 나라를 거듭 반석에 편안히 안정시키고, 경박한 풍속을 교화하여 순후(淳厚)한 기풍을 회복한 것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짝할 만하고, 주(周) 나라나 한(漢) 나라보다 훨씬 나은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중궁 전하(中宮殿下)의 교화가 궁중에서 시작되어 그 은혜가 궁벽한 시골까지 미치고, 주남(周南), 소남(召南)에 근본하여 만백성을 편안히 보살펴 준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지치(至治)의 형상을 대저 어찌 비슷하게나마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경사스러운 때를 인연하여 위대한 공적을 크게 드러내는 일은 한갓 신의 지극한 심정에 이와 같이 간절히 바라는 것일 뿐 아니라, 지금 해마다 거듭되는 경사가 계속되어 그치지 않아서 신하된 사람으로서 이 성대한 시대를 만나는 것은 천년에 드물게 있는 일이니, 신이 장수를 축원하고 은덕에 보답하려는 정성에 있어 손뼉치고 춤추는 기쁨이 진실로 어떠하겠습니까? 온 나라의 신민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밤낮 나라가 성대한 전례(典禮)를 아름답게 장식하여 우러러 우리 성상께서 태평성대 속에서 아름답게 길러주는 은혜에 보답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거리의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도 다 함께 손뼉을 치고 목을 빼고서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 온 것입니다.
지금 신의 말은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고,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같은 심정이고 한목소리이므로 신 또한 감히 스스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에 감히 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이전의 간절한 심정을 거듭 드러내어 윤허를 얻어내지 못하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유음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는 오직 어버이의 아름다움을 빛내는 것이 효도인 줄만 알고, 어찌 어버이의 뜻을 따르는 것이 효도임은 생각하지 않는가? 내 마음은 원하지 않는데 너는 간청해 마지않으니, 비록 경사가 실로 보기 드문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일컬을 만한 무슨 덕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혀 그럴 만한 말이 없으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실심(實心)을 체찰(體察)하여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덕을 기리고 공을 표현하여 영광과 아름다움을 천양하고 경사를 만남에 기쁨을 장식하여 인정과 예의를 다하는 것은 자식의 직분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는 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일 뿐만 아니라 곧 온 나라의 억조 신민(億兆臣民)들이 한목소리로 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정성이 얕고 말이 졸렬하여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하였으니, 뭇사람의 답답한 심정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태황(泰皇)이 천하를 물려받음에 천지를 헤아려서 법을 만들었고, 큰 성인이 나라를 차지함에 음양을 본받아서 교화를 펼쳤기 때문에 온 세상을 덮어 감싸서 만백성을 길러 냈고 나라의 운수를 만세토록 무궁하게 하여 큰 이름을 백왕 가운데 높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부왕(父王) 전하께서는 지극한 효(孝)를 실천하였고 마음으로 성왕(聖王)의 심법(心法)을 전하여 선왕의 예법을 행하고 후손을 위한 계책을 드리우고 계십니다. 사방의 말을 두루 듣고 언로(言路)를 막지 않았으며, 여러 업무를 친히 총괄하며 밤늦도록 부지런히 일하셨습니다. 믿음을 보이고 화목을 닦아서 사방 이웃을 동호인으로 품으시고, 내탕전(內帑錢)을 내어 기근을 구제하여 만백성을 화락하고 태평하게 하였습니다. 성스럽고 신묘하시며 문무(文武)를 겸비하신 것을 이름 붙여 형용할 수 없고, 정령(政令)과 교화를 펴지 않은 것이 없어서 성명(聲明)의 치적이 드러나고 교화는 더욱 천양되었으니, 시서(詩書)에 칭송하는 바와 역사에 실린 바가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 모비(母妃) 전하께서는 정정(貞靜)하고 유한(幽閒)하고 포용하고 너그러우며 빛나고 성대한 덕을 지니셨고, 가까이로는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덕행을 이어받고 멀리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름다운 법도를 따랐습니다. 왕비의 일을 잘 처리하여 밝은 은택이 두루 흘렀고, 궁중의 일을 기록하여 아름다운 계책이 멀리 퍼졌습니다. 여러 첩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복을 주어 편안하게 한 것은 주(周) 나라의 왕도가 일어나게 된 까닭이고, 누인 명주로 지은 옷을 입어 검소함을 드러낸 것은 한(漢) 나라의 곤의(壼儀)가 바르게 된 까닭이니, 남모르는 공이 시행되어 종사(宗社)가 이에 힘입어 편안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의 아름다움은 날마다 더 많이 이르고 나라의 경사가 해마다 거듭 모여서 보위에 오른 지 30년이 되었고 성수(聖壽)가 망오(望五)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천년에 한 번 있는 성대한 시기입니다.
삼가《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내편(內篇)을 상고하건대, 30은 양수(陽數)가 일어나는 바이니 합벽(闔闢)의 계제(階梯)가 되고, 50은 대연(大衍)의 모수(母數)이니 곧 천지의 중추로서 옥환(玉環)처럼 순환이 무궁한 것입니다. 대개 건곤(乾坤)의 두 계책을 어루만져서 이리저리 종합한다면 억만년의 무궁함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니, 천도(天道)의 역수(曆數)가 오늘보다 더 성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지난해에 곤성(坤聖)의 보령에 대해 미처 행하지 못했던 성전(盛典)을 오늘의 아름다운 일과 나란히 거행하신다면 어찌 일상적인 경사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고루 성상의 은택을 입고 크게 자애로우신 성상을 우러러 받들었기에 존호를 올려서 두텁고 아름다운 덕을 빛내고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빛나는 공적을 천양하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진실로 천리와 인정에 있어 오래도록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에게 존호를 올리는 표문(表文)에 이르기를, ‘큰 도를 지닌 사람은 남에게 요구함이 없으나 남이 나를 높이면 사양하지 않고, 지극히 공평한 사람은 명예를 원하지는 않으나 명예가 이르면 사양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양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과 덕이 합치하고, 사양하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인심이 돌아오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다는 것입니다.《춘추좌전(春秋左傳)》에 이르기를, ‘나라의 임금은 문덕(文德)이 드러낼 만하고, 무력이 두려워할 만해야 그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대접하여 덕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였는데,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올리는 것은 본래부터 우리 왕가의 예법이 있고, 안으로는 풍성한 준비를 하고 밖으로는 백성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 또한 역대에서 시행한 바가 있으니, 열성조(列聖朝)에서 그 의문(儀文)을 참작한다면 이어받을 만한 것이 많을 것입니다.
신이 이처럼 예전에 드문 경사스런 해를 만나 어버이를 빛내려는 정성이 간절하지만 당연히 행해야 할 전례(典禮)를 행할 수 없으니, 마음과 뜻을 펼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전례에 마땅함을 잃게 됨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겸손하게 사양하시는 성상의 덕은 천만번 흠앙치 않는 바가 아니지만, 하늘이 돌보아 주는 뜻을 선양하지 않을 수 없고 조정의 의논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 때문에 외람됨을 무릅쓰고서 삼가 백관을 거느리고 모두 대궐 뜰에 이르렀으니,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감히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속히 유음(兪音)을 내리시어 떳떳한 전례를 거행하도록 하여 뭇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가 이미 여러 번 간청하였고 나도 여러 번 하유(下諭)하였거늘, 또 어찌 일을 크게 벌여 대궐 뜰에 와서 호소하기까지 하는가? 대체로 경사를 만나서 경사를 장식하려는 것은 그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하더라도, 덕이 없는데 덕을 칭송하는 일은 나의 처지에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필시 따를 이치가 없으니, 다시 거론하지 말라."
하였다.
민영준(閔泳駿)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6월 18일 갑진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재차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듣건대, 예로부터 현성(賢聖)한 임금이 보위에 올라 길이 천수를 누리게 되면 반드시 그 사실을 모으고 그 아름다움을 기술하여 천양하고 빛내는 것은 대개 자연스런 인정(人情)에서 나온 것이고 본연의 천리에 부합하는 것이기에 옥책(玉冊)으로 존호(尊號)를 천양하는 것이 반드시 일을 크게 벌이는 것은 아니고 옥 술잔으로 상수(上壽)하는 것이 반드시 성대한 잔치가 되지는 않으니, 어찌 큰 성인의 겸양하는 덕이 있겠습니까? 지금 신이 삼가 백관을 거느리고 목욕재계하고서 호소하였으나 거친 말이 졸렬하여 성상의 마음에 닿지 못하여 신(神)과 같은 공적을 거두어 시행하지 않으시니, 신은 진실로 불안하고 울적하여 다시 더욱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부왕(父王) 전하는 천지(天地)처럼 덮어 감싸주고 일월(日月)처럼 임해 비추시는데, 높은 공훈과 빛나는 문장은 백왕과 비교하더라도 짝할 이가 드물고 만세에 드리워져서 명성이 있을 것입니다. 태실(太室)에 추존(追尊)하는 전례(典禮)를 여러 번 거행하여 아름다운 공렬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상중에 효사(孝思)가 끝이 없어서 인정과 예를 반드시 다하였으니, 왕통을 계승한 임금으로서 효성이 컸습니다. 재이(災異)를 경계하여 일상의 음식을 줄였고, 곤궁한 이를 구휼하여 내탕전(內帑錢)을 나누어 주었으니, 하늘을 공경하는 정성과 백성을 사랑하는 실상이 지극하고 극진하였습니다. 유학을 높이고 도리를 중시하며, 공명하게 등용하고 공정하게 선발하였으니, 인재를 양성하는 교화가 성대하였습니다. 밤낮으로 국사를 근심하고 부지런히 일하며, 백성들이 더위에 잘 지내고 있는지까지도 물어보았으니, 다스리는 도가 지극하였습니다. 기무(機務)가 번잡하였으나 만상을 명찰하여 처리하였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웠으나 누란의 위기를 전환하여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으니, 성스러움이 우리 부왕 전하보다 더한 이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는 두터운 곤덕(坤德)으로 성상을 받들어 중궁전의 자리에 오른 뒤에 비색(否塞)한 운을 태평으로 되돌려 나라의 운수가 영원히 이어지게 하였습니다. 부드러운 교화가 궁중에 온화하게 펼쳐졌고, 드러나지 않은 공덕이 궁벽한 시골까지 크게 미쳤습니다. 여러 첩들에게 은덕을 베풀고 복을 주어 편안하게 한 것은 주(周) 나라의 교화가 일어나게 된 까닭이고, 누인 명주로 지은 옷을 입어 검소함을 드러낸 것은 한(漢) 나라의 탁룡궁(濯龍宮)이 화미(華美)하지 않게 된 까닭입니다. 정치와 교화에 도움을 준 것이 깊어 여사(女史)가 다 기록하지 못하겠으니, 우리 모비(母妃) 전하보다 더 융성한 덕을 지닌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하늘이 보우하여 끝없는 복록을 거듭 내려서 여러 가지 복과 상서(祥瑞)가 해마다 거듭 이르렀는데, 금년은 바로 우리 성상의 수(壽)가 망오(望五)가 되는 해이고 보위에 오른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두 가지 경사가 한 해에 모두 이른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성대한 때로, 지나간 사첩(史牒)에도 드물고 열성조(列聖朝)에도 보지 못한 바입니다. 우리 양성(兩聖) 전하의 공덕을 천양하고 높이 드러내는 전례는 참으로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법도이고 우리 왕가의 성헌(成憲)인 것이니, 위로는 하늘이 아름답게 하여 돌보아 주신 것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신민이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리는 성인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을 것이고 후손에 남겨주어도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겸손하게 사양하시는 성상의 덕을 흠앙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응당 행해야 할 전례를 오늘에 행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전례가 잘못되고 자식의 직분이 이지러질 것이니, 신의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에 있어 더욱 응당 어떠하겠습니까?
인정을 참작하고 의리를 헤아려 단정하더라도 진실로 전례와 법칙에 합치하는 것이니, 이치에 밝고 자애로운 생각을 지닌 우리 전하로서는 반드시 여러 가지 말을 기다린 뒤에 억지로 따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전례를 마땅히 행해야 함을 깊이 진념하시고 조정의 의논을 막을 수 없음을 곡진히 헤아리시어 속히 윤허의 말씀을 내려 주소서.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나는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가? 내가 윤허를 미루는 것이 또한 어찌 참작함이 없이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대는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세 번째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이 상소와 계사(啓辭)로써 아뢴 것이 두 번, 세 번에 이른 것은 감히 부모에 대한 사사로운 정이 있기 때문에 문득 감히 번거롭게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법을 상고해보면 실로 우리 왕가에서 이미 실행한 전례이고, 그 말을 돌아보면 바로 온 백성의 여론이니, 인정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일이고 천리에 맞는 당연한 일입니다. 대저 성왕(聖王)의 큰 덕은 반드시 수를 얻고 반드시 이름을 얻는 것이라면 신자(臣子)의 큰 소원으로는 어찌 지극히 높이고 지극히 봉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필부(匹夫)가 입신(立身)하면 능히 어버이를 빛내는 영광을 극진히 하고, 지방 장관이 관직에 있더라도 오히려 노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많으니, 지금 신이 외람되이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다행히 대성인(大聖人)이 이러한 덕을 지니고 이러한 복을 누리시는 때를 만났는데, 일찍이 높이고 봉양하는 소원을 이룰 수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러러 바라는 뭇사람의 심정은 막을수록 더욱 격동되어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을 것이기에 또 감히 서로 이끌고 거듭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크게 중흥의 운세에 순응하여 30년간을 빛나게 다스리심에 훌륭한 덕과 큰 공업이 삼대(三代)보다 탁월하고 깊은 사랑과 두터운 은택이 팔방에 넓게 미쳐서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고, 구렁텅이에 빠진 백성을 편안하게 안정시켰으며,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오고, 풍아(風雅)와 전모(典謨)가 환하게 문장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백성을 화합시키는 정치는 실로 영원한 복을 비는 근본이 되어 온화한 기운이 넘쳐흐르고 큰 복이 두루 미쳐 큰 풍년에 태평할 상서가 이르고 온 세상이 인수(仁壽)의 영역에 오르게 되었으니, 아! 성대합니다.
또한 우리 중궁 전하께서는 덕이 태임(太姙), 태사(太姒)와 같고 칭송이 요(堯) 순(舜)처럼 높습니다. 충정(忠貞)과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익숙하게 익히고 효경(孝敬)과 근검을 근본으로 하여 닭이 울면 일어나서 경계하였고, 또 훌륭한 자손이 번성하고 상서로우니, 남모르는 공로가 종묘사직에 있고 자애로운 혜택이 백성에까지 미쳤습니다.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교화를 오래도록 정도를 준행하여 이루었고, 길상(吉祥)을 맞아들여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함에 냇물이 흘러들듯이 바야흐로 이르러 오직 날이 부족하였으니, 이는 모두 양성(兩聖)의 큰 덕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아름다움입니다.
보령이 망오가 되고 나라의 운수가 만년토록 영원할 토대를 쌓았으니, 이 더할 수 없는 경사를 만나 모두 끝없이 송축하는 것은 공경하는 바가 같고 사랑하는 바가 같아서입니다. 어버이의 연세를 기억하는 기쁨이 이미 마찬가지이고 은택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더욱 간절하기에 지난번 정청하여 예물을 바치는 의식을 조금 펼치려 하였는데, 지금 윤허를 받는다면 아름답게 장식한 예물을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렬이 역사에 견줄 이 드물고 덕은 하늘의 해처럼 찬란하여 형용할 수 없으니, 금니(金泥)와 옥검(玉檢)만이 형용할 만한 아름다움이 될 것이고, 옥 술잔과 좋은 음식도 필시 성대한 잔치의 도구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명(大命)을 맞이하여 큰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것이 오직 여기에 달렸으며, 아름다움을 펼치는 것도 오직 여기에 달렸고, 드러난 공을 천양하는 것 또한 여기에 달렸습니다. 더구나 우리 성조(聖祖)의 떳떳한 전례와 성후(聖后)의 성대한 공적이 진실로 마땅히 오늘날 본보기로 삼을 바이고, 또한 의당 소자가 찬미하여 기릴 바이니, 온 세상의 은덕에 감격한 무리라면 누군들 애태우며 예전에 없던 성대한 일을 보기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신다면 끝내 겸양하여 굳이 거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애써 깊은 생각을 돌리시어 속히 신이 존호를 올리고 헌수(獻壽)하려는 청을 윤허하소서. 천만번 지극한 마음으로 간절히 빕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대는 이 보기 드문 경사에 빛나게 장식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여 날마다 굳이 청하여 반드시 윤허를 받아야 그만두고자 하니, 이는 간절한 마음이 돈독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날씨가 이처럼 뜨거운데도 정청을 그치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의 같은 여론 또한 응당 생각해야 할 바이므로 부득이 그대의 뜻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끝내 마음에 편안하지 않은 바가 있다. 어찬(御饌)을 올리는 것으로 말하면 그대의 정황에 있어서는 또한 혹 마땅히 그러할 것이지만 이렇게 어려운 때를 당하였기에 갑자기 의논하기 어려우니, 가을걷이 때까지 미루어 두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이다. 그대는 이를 헤아리라."
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조병세(趙秉世), 예조 판서(禮曹判書) 민영준(閔泳駿), 참판(參判) 민병승(閔丙承), 참의(參議) 정한모(鄭翰謨)이다.】 하교하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한 것은 전례(典禮)의 일을 의논할 것이 있어서이다. 생각건대, 우리 영고(寧考)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성대한 덕은 높고 커서 무어라 이름하기 어려우니, 교화는 백성에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공훈과 업적은 후세에 영원히 전해지는 명성이 있을 것이다. 우리 성모(聖母)께서는 우리 종사(宗社)를 안정시키고 우리의 만백성을 품어 보살펴 주었으며 우리 자손을 극진히 사랑하셨으니, 이러한 공과 덕은 하늘의 해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경사스러운 때를 당하여 그지없는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니, 아름다운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인정과 예의의 만 분의 일이라도 풀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를 듣고서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슬픈 나머지 너무도 칭송하는 바입니다. 익종(翼宗)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행(善行), 신정 성모(神貞聖母)의 빛나는 업적과 높은 공훈은 비록 백대 후에도 오히려 드러낼 마음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오늘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잊지 못하고 그리워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제 존호를 추상하여 성상의 지극한 효성을 펴려는 것은 인정과 예의에 모두 맞으니, 삼가 바라건대, 곧 명을 내려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고,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익종 대왕(翼宗大王)과 우리 신정 성모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행은 후세에 남겨 준 좋은 계책은 금궤(金匱)와 옥간(玉簡)에 이루 다 기재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타고난 널리 알려진 효성으로 전에 없던 경사스러운 때를 당하여 살아계실 때 섬기던 것과 같은 예로 섬기려고 먼저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고자 하니, 하교를 듣고서 슬픈 생각과 기쁜 마음이 함께 간절합니다."
하고,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익종(翼宗)과 우리 신정 성모의 풍성한 공덕과 성대한 업적은 백대를 내려가도 잊지 못할 것이고 우리 전하의 바다와 같은 큰 효성은 그지없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더욱 간절하여 곧 이렇게 존호를 올리는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게 되니, 신들은 찬탄하고 칭송하는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궁(東宮)이 경사를 나타내려는 정성으로 해마다 간청하기에 하는 수 없이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나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오직 선대 임금에게만 존호를 올려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슬프고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저하가 연이어 상소와 계사로 호소한 것이 이미 여러 날째 되었으나, 겸손하고 빛나는 덕을 지닌 전하께서는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고 그때마다 윤허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갈수록 더욱더 우러러 빌던 끝에 전하가 힘써 마음을 돌리시어 떳떳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임금과 왕후 전하 두 분의 어질고 높은 덕과 큰 업적과 고마운 명령과 아름다운 모범을 이제야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에 새겨 찬양할 수 있게 되었고, 장수를 빌어 술잔을 올리는 일은 가을걷이를 기다리면 이룰 수 있으니, 기뻐하는 소리와 화기로운 기운이 온 나라에 차고 넘쳐흐릅니다. 종묘(宗廟)에 존호를 추증하는 의식은 전하의 효성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니, 신은 기쁜 마음과 경사를 칭송하고 싶은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지금 우리 동궁 저하가 경사를 만나 부모를 높이 모시려는 정성으로 여러 날 간절히 호소하던 끝에 이제야 다행히도 겸손히 사양하던 전하의 마음을 겨우 돌렸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전하의 높고 성대한 공렬과 우리 중궁 전하의 후한 덕과 유순한 덕화를 비로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수를 축하하는 예식도 가을에 거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신들이 훌륭한 때를 만나서 성대한 의식을 즐겁게 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진실로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우리 전하의 큰 덕과 높은 공덕과 우리 중궁 전하의 아름다운 덕행과 유순한 교화는 하늘의 해로도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자 저하는 이 더없이 큰 경사를 당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날마다 호소하던 끝에 전하의 마음을 돌려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니, 신들은 칭송하고 싶은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궁의 청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고, 조정의 의논이 한결같은 것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사실 덕이 없으니, 무슨 칭송할 만한 일이 있겠는가? 마음에 내내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성인이면서 성인으로 자처하지 않는 이것이 실로 훌륭한 덕행입니다. 그리고 오늘 높고 낮은 모든 사람의 마음은 더욱 더 찬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생각건대, 우리 영고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운 덕과 풍성한 업적이 당요(唐堯)와 우(禹) 순(舜)과 짝할 만 하고 그 높이와 크기는 이름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 성모(聖母)께서는 60년 가까이 왕비로 있으면서 만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였고 우리 종묘와 사직을 튼튼히 하여 우리 자손들을 길이 보호하였으니, 추모하는 나의 정성으로 그의 만분의 일이라도 그리려는 생각을 어찌 조금이라도 게을리 한 적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정성을 다하지 못한 슬픈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의논하였더니, 여러 사람의 의견이 하나같이 일치하여 인정과 예의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게 되었다. 익종 대왕과 신정 왕후에 대한 추상존호도감(追上尊號都監)은 합설(合設)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마침 경사스러운 때를 만났고 또한 우리 왕가(王家)에 이미 시행한 규례가 있으므로 장차 왕대비전(王大妃殿)에게 존호를 올리려고 한다. 이것은 인정과 예의에 있어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왕대비전에게 존호를 가상하는 것은 전하의 충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이것은 마땅히 거행해야 할 떳떳한 의식 절차입니다. 이 경사스러운 때를 당하여 옥책문(玉冊文)을 같이 올리게 되었으니, 신은 더없이 기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홍집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를 받았는데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하여 온 떳떳한 의식 절차입니다. 존호를 같이 올리는 것은 인정과 예의를 갖추는 것이므로 칭송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할 뿐입니다."
하고,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것은 떳떳한 의식 절차이고 마땅히 거행해야 할 규례인데, 이제 이렇게 찬양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니, 더욱 전하의 두터운 정성을 우러러 경모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우리 왕가에 거행한 의식 절차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오늘날 인정이나 예의로 보아 그만 둘 수 없는 일이다. 왕대비전에 대한 가상존호도감(加上尊號都監)을 추상존호도감에 합설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추상존호도감과 가상존호도감을 일찍이 합설한 전례가 있으니 이번에도 합설하여 거행하는 것이 인정과 예의에 맞을 듯하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니, 삼가 응당 하교한 대로 거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추상존호도감과 가상존호도감을 합설하여 거행한다면 그 명칭을 상호도감(上號都監)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정기회(鄭基會)를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이건하(李乾夏)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문형 회권(文衡會圈)을 행하였다. 〖권점(圈點)을 받은 사람은〗 김영수(金永壽), 한장석(韓章錫)이다.
심순택(沈舜澤)을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로, 정기회(鄭基會), 민영준(閔泳駿), 박정양(朴定陽)을 제조(提調)로, 김영수(金永壽)를 대제학(大提學)으로, 민형식(閔亨植)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심상진(沈相璡)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6월 20일 병오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영수(金永壽)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이번에 추천한 것이 번거롭고 잘못되어 은혜로운 비준이 갑자기 내려 신을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으로 삼으니, 신은 진실로 놀랍고 황송하며 부끄러워 땅을 뚫고 들어가 숨고 담장을 돌며 몸을 숨기려 해도 오히려 비유가 안 됩니다. 신은 곧 일개 재주도 없는 평민일 뿐인데, 다행히 어진 임금을 만나 이름이 문적(文籍)에 올라 높고 훌륭한 벼슬을 지내며 호화롭게 지내고 있으나 순차를 밟지 않고 갑자기 뛰어 올라 마침내 높은 품계의 윗 벼슬에 올랐으니, 전하가 키워주고 이끌어 준 덕분이며 요행을 타고난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조그마한 장점이나 능력도 전혀 없는데 지금 어느덧 늙어서 백발이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두렵기가 마치 쌓아놓은 나무 위에 올라선 듯합니다. 생각건대, 혹 은덕을 더 베풀어 준다면 그에 보답할 날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신의 가문은 근년에 번성하여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과 칭송을 받고 있으니, 복이 지나치면 넘친다는 경계가 있어 항상 마음을 두렵게 합니다. 오직 재앙을 막고 허물이 없도록 하여 만물을 따뜻이 보살펴 주고 길러 주는 전하의 지극한 정성과 두터운 혜택을 바랄 뿐입니다. 돌아보건대, 이렇게 새로 임명하심은 곧 화를 초래케 하는 처지에 놓이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랑으로 살려주시는 은혜라 하겠습니까?
신은 어려서는 배우지 못했고 자라서는 방탕하게 지내면서 글공부와는 담벽을 쌓았으며, 외우고 읽은 것도 비질하는 것처럼 천한 일로 여겨 속이 텅 비어 있다보니 까막눈이 되었습니다. ‘시(豕)’와 ‘해(亥)’, ‘제(帝)’와 ‘호(虎)’의 글자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니 아름다운 문장을 수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보통 편지글도 걸핏하면 틀리게 써서 진부한 글재주와 누추한 결함이 드러나므로 동료들의 비웃음을 받고 있으며 전하께서도 환히 살펴보고 있는 바입니다. 만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책을 맡겨 한 나라의 대제학(大提學)이라고 이름 한다면 신의 몸이 기롱과 비방을 받는 것은 애당초 돌아볼 것도 없지만 아마 사방에서 듣고서 훌륭한 조정에 인재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 직무에 임명한 것은 존호(尊號)를 추상하고 가상(加上)하는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려는 것입니다. 선대 임금의 업적을 크게 밝히고 성상의 훌륭한 덕을 드러내는 그 의례가 더없이 존엄하고, 그 일은 더없이 중합니다. 그 형용을 지극하게 잘 해야 임금들의 지위를 더욱 높이고 나타내어 복록이 더 많이 이르도록 할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신에게서 어떤 점을 취하셨기에 일을 맡기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는지 감히 알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만일 사람을 벼슬자리에 채워서 한갓 일신의 영광이 되게 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재능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성가(聲價)는 정해져 있으니, 이것은 흙탕물을 구슬잔에 부어 넣고 흙이나 나무에 수를 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몹시 자질에 맞게 벼슬을 주는 뜻에 어긋나고 또한 신중히 선발하는 정치가 아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중대한 임무를 함부로 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지극한 신의 간청이 거짓으로 꾸미지 않았다는 것을 헤아려 속히 신을 대제학 벼슬에서 체직시켜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제수하여 관직 제도에 흠이 없게 하고 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은 이 임무에 성가가 정해져 있고 평소에 기대한 지 오래되었으니, 사양하지 말고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6월 21일 정미
조정희(趙定熙)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윤창섭(尹昌燮)을 참의(參議)로 삼았다.
6월 22일 무신
임정교(任正敎)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삼았다. 중비(中批)로 제수한 것이다.
6월 23일 기유
박정양(朴定陽)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재순(李載純)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6월 24일 경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 관각(館閣)의 당상(堂上),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종묘(宗廟)에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선양하려는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니, 슬프고 사모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요즈음 우리 왕조에서 존호를 올린 전례를 상고하여 보니, 대왕(大王)에게는 여덟 글자, 왕후(王后)에게는 두 글자로 하여 원래 일정한 규례가 없었다. 옛날 정희 왕후(貞熹王后)에게 존호를 더하여 올릴 때에는 혹은 열 자, 혹은 네 자인 때도 있었으며 명(明) 나라 옛 관례에도 인용할 만한 전례가 있었다. 생각건대, 우리 돌아가신 왕후의 공덕을 어떻게 그 만분의 일인이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의 심정은 비록 날마다 존호를 올리더라도 날이 부족할 것 같다. 이렇게 훌륭한 업적을 나타내는 때를 만났고 또한 원용할 만한 훌륭한 전거가 있으니, 이번에 신정 왕후(神貞王后)에게 올리는 존호는 네 글자를 의논하여 결정하려고 한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는 하늘에서 타고난 바다와 같은 효성으로 할 수 있는 바를 다 하고 있습니다. 이제 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때에 효성을 다하지 못한 슬픈 생각이 더욱 간절하여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아름다운 규례를 인용하여 이렇게 훌륭한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대개 그 형용을 만분의 일이라도 그려내려는 것으로 인정과 예의에 부합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니, 신들은 우러러 칭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고,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정희 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할 때를 상고할 것 같으면 네 글자의 존호를 올리는 것은 실로 우리 왕조에서 한 번 있는 예식입니다.명나라 영종(英宗)이 태후(太后)에게 처음으로 네 글자의 존호를 올렸으나 이것도 정상적으로 거행하는 규례는 아니고, 무종(武宗)때 태황 태후(太皇太后)의 호(號)를 네 글자로 올린 것도 평소 거행하던 예식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끝없는 효성으로 선대 임금의 법을 본받아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거행하고자 하시니, 그 말씀을 듣고 오직 우러러 경모할 뿐입니다."
하고,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지금 받은 하교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일 뿐 아니라 근거할 수 있는 전례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전하의 지극한 효성과 더욱 간절히 추모하는 생각에서 반드시 그 마음과 공덕을 지극히 나타내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기에 신들은 더욱 송축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희 왕후에게 네 글자의 존호를 올린 것은 수렴(垂簾)한 후에 있은 일이고, 명나라의 의식 절차는 대궐 안에서도 이미 상고하여 보았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이것은 진실로 비상한 예식입니다. 그러므로 정희 왕후 이후에는 다시 더 시행한 적이 없었고 명나라 300년 동안에도 단지 두 번 있었을 뿐입니다. 송(宋) 나라 제도에서 황후에게는 모두 두 글자의 시호(諡號)를 올렸는데 오직 장헌 명숙 황후(章獻明肅皇后)만은 황제의 일을 대행하였기 때문에 네 글자의 시호를 올렸다고 하였으니, 마침내 이를 규례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실로 그렇다. 정희 왕후에게 만년에 올린 존호는 도로 두 글자로 하였던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효성이 탁월하여 무릇 인정과 예의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비록 전에 시행하지 못한 것도 반드시 시행하시니, 이것은 바로 효성이 극진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의상 마땅히 거행해야 할 것도 거행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마음에 둔 일을 더욱 이루지 못한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전하의 효성은 하늘이 내시어 자연 인심을 감동시키는 것이 있기에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항상 칭송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신들은 물러가서 문형(文衡), 관각(館閣)의 당상들과 함께 이대로 거행하라."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문형과 관각의 당상이 모두 연석(筵席)에 참가하여 들었으나 의식 절차는 더없이 중대하니 전교(傳敎)를 내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일 전교가 있다면 더욱 훗날의 상고할 증빙 문건으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옛날 정조(正祖) 때에 이러한 의식 절차가 있었으나 전교는 내리지 않고 다만 연석에서 문답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대체로 아름다운 공적을 널리 나타내는 예식은 실로 전하의 효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존호를 의논하는 데 공론(公論)을 따르는 뜻을 조금 깃들였으니, 대성인(大聖人)의 정미한 뜻이 어디 있는가를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오늘 연설(筵說)을 의정부(議政府)와 예조(禮曹)의 등록(謄錄)에 싣는다면 또한 후에 상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망단자(望單子)를〗 서계(書啓)하였다. 익종 대왕(翼宗大王)의 추상존호 망단자(追上尊號望單子)를 강수 경목 준혜 연지(剛粹景穆峻惠衍祉)으로,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추상존호 망단자를 예헌 돈장(睿憲敦章)으로, 대전(大殿)의 가상존호 망단자(加上尊號望單子)를 응명 입기 지화 신열(應命立紀至化神烈)로, 왕대비전(王大妃殿)의 가상존호 망단자를 의헌(懿獻)으로, 중궁전(中宮殿)의 가상존호 망단자를 합천(合天)으로 서계하였다.
하였다.
상호도감(上號都監)에서 계청(啓請)하여 익종 대왕 옥책문제술관(翼宗大王玉冊文製述官)에 송근수(宋近洙), 서사관(書寫官)에 조동면(趙東冕), 악장문제술관(樂章文製述官)에 민영상(閔泳商), 금보전문서사관(金寶篆文書寫官)에 김홍집(金弘集), 신정 왕후 옥책문제술관(神貞王后玉冊文製述官)에 정범조(鄭範朝), 서사관(書寫官)에 김규홍(金奎弘), 악장문제술관에 이순익(李淳翼), 금보전문서사관에 조경하(趙敬夏), 대전 옥책문제술관(大殿玉冊文製述官)에 김병시(金炳始), 서사관에 조병호(趙秉鎬), 악장문제술관에 민영준(閔泳駿), 옥보전문서사관(玉寶篆文書寫官)에 조병세(趙秉世), 왕대비전 옥책문제술관(王大妃殿玉冊文製述官)에 한장석(韓章錫), 서사관에 홍순형(洪淳馨), 악장문제술관에 민종묵(閔種默), 옥보전문서사관에 이명응(李明應), 중궁전 옥책문제술관(中宮殿玉冊文製述官) 김영수(金永壽), 서사관에 이헌직(李憲稙), 악장문제술관에 민영소(閔泳韶), 옥보전문서사관에 김수현(金壽鉉) 차출하였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올리는 전문(箋文)을 받고, 이어 백관(百官)의 전문을 받았다. 추상(追上)하고 가상(加上)하는 존호(尊號)를 의정(議定)하였기 때문이다.
6월 25일 신해
상호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체차(遞差)해 줄 것을 청하니 체차하시키고 김홍집(金弘集)을 임명하였다. 이순익(李淳翼)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한광수(韓光洙)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이면상(李冕相)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6월 27일 계축
전교하기를,
"아! 슬프고 허전하여 의지할 데가 없는 것 같고 더할 나위 없이 그리운 마음은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다. 옛날 우리 태종조(太宗朝)에는 종묘(宗廟)의 북쪽 담장에 문 하나를 만들어 놓고 초하룻날과 보름날마다 의장(儀章)과 호위(扈衛)를 간소하게 하고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는데, 끝없는 효성을 항상 칭송하고 있으니, 오늘날 나로서도 어찌 선대의 법을 본받고 떳떳한 규례를 따르는 일을 하지 않겠는가? 오는 초하룻날에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함으로써 다하지 못한 정성을 조금이나마 풀어야 하겠다. 출궁과 환궁할 때의 문로(門路)는 신무문(神武門)과 북장문(北墻門)으로 하고, 시위(侍衛)와 입직(入直)을 마련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병세(趙秉世)를 제배(除拜)하여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에게 하유하기를,
"경이 중추부(中樞府)에서 한가하게 지낸 지도 이미 세월이 지났으니, 그 휴양(休養)하는 일에 있어서는 물론 스스로는 좋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맺혀 있는 생각이야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는가? 이번에 다시 제수하는 명을 내린 것은 단지 여러 사람들의 기대가 쏠리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실로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나라 일이 지금처럼 어려운 때가 없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마 경은 밤중이라도 뛰쳐 일어날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니, 형식을 차려서 사양하지 말고 속히 명에 응하여 옆에 자리를 비워두고 고대하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6월 28일 갑인
이위(李暐)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윤횡선(尹宖善)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6월 29일 을묘
민영준(閔泳駿)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왕세자(王世子)가 정청(庭請)할 때의 시강원(侍講院)의 사(師) 이하와 시위(侍衛)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별군직(別軍職) 남명선(南命善)과 영관(領官) 이근풍(李根豐)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가 상소하여 재상의 직임을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내가 경을 알아주고 경이 나를 알아주며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은 진실로 말이나 글자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니, 경은 반드시 이해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홀연히 이렇게 사양하는 글이 갑자기 올라와 나도 모르게 아연실색하였다. 지난번 경이 이 임무를 맡고 있을 때에 심력을 기울여 단정하게 홀(笏)을 잡고 의정부(議政府)에 엄숙하게 앉아 있었고 수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그 사이 백성과 나라에 나타난 업적과 공적은 절로 덮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경이 이른바 그 임무가 중하고 그 책임이 크다고 한 것은 대체(大體)를 아주 깊이 터득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내가 경에게 기대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또 현재 나라의 어려운 형편은 점점 고질로 되어 더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반드시 경과 같은 중요한 인재를 얻어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 이렇게 경에 대해 구하기를 급하게 하고 바라기를 간절히 하는 것이다. 경은 머뭇거리며 사양하지 말고 다시는 이렇게 아뢰지도 말며 즉시 명에 응하여 몹시 고대하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김사철(金思轍)의 별단(別單)을 보니, ‘첫째는, 각읍(各邑)과 진영(鎭營)의 별포군(別砲軍)과 경상도(慶尙道) 감영(監營)에 새로 설치한 군사를 진실로 평소에 양성한다면 외적 방어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수령(守令)들이 대부분 살피지 않고 심지어 본래의 정원수를 줄여서 급료로 줄 돈을 유용하는 폐단이 있기까지 합니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행회(行會)하여 열읍(列邑)과 진영을 단속하게 하고 각별히 규찰하여 정원수가 모자라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근래에 고을의 수령과 진영의 장수들이 편안히 지내는 버릇이 되어 군사를 훈련시킬 방도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저도 모르게 한심(寒心)하여 집니다. 모든 요미(料米)로 쓸 물자와 고무 장려하는 방도에 감영(監營)과 병사(兵使)가 고을과 진영을 단속하여 혹시라도 정지하거나 줄이는 일이 없게 하여 실효를 내도록 기필코 독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둘째는, 민고(民庫)의 필요치 않는 잡비와 아전들이 축낸 부당한 돈을 걸핏하면 향회(鄕會)라 핑계하고 결가(結價)에 넘기며 예목(禮木)과 필채(筆債) 등을 혼합하여 기록한 장부를 만들어 규정 외에 거두어들이는 것이 정공(正供)보다 도리어 많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고통과 크게 관계되므로 합당하게 실시하고 엄하게 막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근년에 홍수가 유달리 심하여 전답이 사태(沙汰)에 뒤덮이거나 포락(浦落)된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런데 백지(白地)의 조세를 받아내고 심지어 이웃이나 친족에게까지 징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을 만약 완전한 재해지나 사고지로 설정하여 결세(結稅)를 면제해 주지 않는다면 다만 백성들의 사정이 가긍할 뿐 아니라 조세 대장이 허술하게 되기 쉽습니다. 모두가 조세의 정사에 관계되는 것이니 옛 규정을 거듭 밝혀 정공으로서 응당 납부 할 것 외에 잘못된 규례로 더 배정하는 것은 일체 금지하며 냇물에 떠내려간 토지의 결세는 허물어져 내린 면적의 사실에 따라 처리하고 진흙땅으로 된 곳은 일일이 답사하여 세액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토지에 대한 부세 규정은 본래부터 엄밀하므로 비록 털끝만한 것이라도 감히 제멋대로 토지면적에 더 부과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함부로 거두어들이는 일이 늘어나서 한정이 없으니, 이러고도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한결같이 바치게 되어 있는 조세 규정대로 시행하고 이른바 보태어 배정하는 명목은 모두 철저히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다시 계속 잘못을 답습한다면 해당 수령에게는 장오죄(贓汚罪)에 관한 법을 시행하고 잘 살피지 못한 감사(監司)는 엄중한 추궁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대저 시내나 포구가 무너져 내린 땅에 억울하게 조세를 징수하도록 하고 진흙땅에 농간을 부렸으면 이것은 특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에게 공문으로 신칙하여 엄하게 밝히고 샅샅이 조사하여 속히 바로잡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셋째는, 환곡(還穀)의 원총(元摠)은 72만여 석(石)인데 10여 고을에서의 여러 해 동안 쌓인 포흠(逋欠)이 거의 그 절반이 넘고 모곡(耗穀) 위에 다시 모곡을 첨부하니 장부를 청산할 방책이 없습니다. 경사(京司)와 각영(各營)에서 지출하는 모곡으로는 배획(排劃)할 길이 없어 필경은 초실읍(稍實邑)에서 본곡(本穀)을 잘라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보충한다는 것은 도리어 더 혼란을 조성하여 수많은 곡식이 모두 횡령하는 자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 곡의 이자는 곤궁한 민간에게 백징(白徵)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환곡을 탕감하고 토지면적에 따라 부담시키자는 논의가 전후하여 여러 번 나오게 된 것입니다. 각 읍에 다 같이 통지하여 현재 기경(起耕)하고 있는 총 면적에 환곡의 이자와 응당 써야 할 전곡(錢穀)을 골고루 배정하는 정책을 쓴다면 균일하게 하는 정사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환란에 대비하기 위한 명목 역시 모두 정지하거나 없앨 수 없으니, 탕감할 것은 탕감해 주고받아야 할 것은 받아들여 곡식을 만들어 입본(立本)하고 이자를 제외하고는 햇곡식으로 바꾸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경상도에서 포흠난 것을 탕감하고 환곡을 균등하게 배정한 것이 거의 30년쯤에 불과한데 규율이 점차 해이되고 협잡이 점점 늘어나 십여 개의 고을에서 여러 해 동안 포흠이 쌓였기 때문에 온 도(道)의 토지에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생각건대, 저 환곡이 적은 고을에 대저 무슨 죄가 있어서 분담하여 징수하는 부담을 함께 지는 것입니까? 암행어사가 별단에서 진술한 것은 적절하게 헤아린 것이 없지 않을 것이나 도신으로 하여금 열읍과 충분히 토의하여, 탕감해야 할 것이 얼마이고 찾아내야 할 것이 얼마이며 돈으로 채워 넣을 것이 얼마인지 규정을 세워 뒤처리를 잘 할 수 있는 조목을 만들고 철저히 조사하여 밝혀서 보고하게 한 다음에 다시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넷째는, 역참(驛站)이 피폐하기가 요즘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역참 일에 응하여 목숨을 의탁하고 살아 나가는 것은 오직 위토(位土)일 뿐이니, 비록 종전대로 경작하게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근래에 와서 급속히 냇물에 의해 모래밭으로 변한 것이 거의 절반이 넘으니 곤궁한 정상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사자(使者)들이 공물을 요구하는 것과 중앙의 포교들이 침해하여 포악하게 구는 것과 각영(各營)의 신구관 행차의 영접과 전송으로 대단히 많은 물자를 낭비하는 일입니다. 위토가 냇물에 의해 모래에 묻히면 인부들을 주어 차례로 파헤쳐 내게 할 것이며, 명령을 받고 나갈 때에는 특별히 단속하여 종전의 잘못을 철저히 없앨 것입니다. 각 영에서는 신구의 관리를 영접하고 전송할 때에 불법적으로 말을 타거나 규정 외에 강제로 물건을 요구하는 것과 각 하인들에게 전례(前例)의 명목으로 물건을 주는 것은 일체 금지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대체로 규정 외에 속하는 것을 강제로 요구하거나 불법적으로 말을 타는 등의 여러 가지 명목은 일체 엄격히 금지하고, 드러나는 대로 큰 것은 계문(啓聞)하여 처분할 것을 청하고 작은 것은 본도(本道)에서 조사하여 다스릴 것입니다. 중앙의 포교들이 침해하며 포악하게 구는 것은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에 엄하게 신칙하여 특별히 단속하게 할 것입니다. 냇물에 의해 모래에 묻힌 땅은 감영과 고을에서 파헤쳐 내도록 감독하고 살펴 식량이 넉넉하고 생계를 이어나가는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다섯째는, 수령을 영접하고 전송하는 비용을 감당하는 것은 대부분 밀가루도 없이 수제비를 만들도록 독책하는 꼴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임기가 만료되면, 이때에 이르러 그가 빚진 쌀을 처리하는 비용이 도리어 많아 상납할 것을 유용하고 추가 지출로 기록하므로 백성들과 고을의 근심은 수령을 영송하는 것보다 심하니, 수령을 자주 교체하는 것이 고을 폐단의 근원이 됩니다. 이제부터는 문관(文官)과 음관(蔭官)과 무관(武官) 출신을 막론하고 수령과 찰방(察訪)과 변방 장수는 모두 임기를 채우게 하여 실효를 거두게 할 것이며, 전 관리가 진 빚은 옛 규정을 강조하고 그에게 변상시켜 해당 고을에 보낼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지방관을 자주 교체하지 말자는 것은 진실로 이조(吏曹)나 병조(兵曹)의 관리들이 진심으로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규정을 확고히 지키는 데 있으니, 암행어사가 올린 글대로 이조와 병조에 신칙하고 전관의 부채를 다시 징수하는 것은 정한 규례이니, 거듭 강조하여 시행하도록 감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섯째는, 각 읍관이 상정한 명목의 각종 쓰임새를 볼 때 지금과 옛날을 견주어 보니 곱절이나 될 뿐만 아니라서 관청에서 쓰는 것은 회감(會減)하고, 그 일을 맡은 관리는 시가대로 사서 바치고, 민고(民庫)에서는 추가로 지출하니, 아전들이 소비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폐단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일체 관청에서 쓰는 물건을 다 시가대로 시행한다면 상정(詳定) 한 조목은 영원히 폐지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이른바 상정이라는 명목은 비록 물건이 풍부한 때에도 오히려 합당하지 않거늘, 더구나 지금 시세가 점점 올라가는 때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해당 고을에서 포흠되는 폐단도 여기에서 원인되고 있으며 친족에게 징수하고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폐단도 여기에서 원인되고 있으니 이것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감영과 고을에서 형편을 참작하여 폐단을 바로잡을 절목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곱째는, 각 관청에서 예목과 필채를 따로 배정하는 것은 실로 지방 고을의 폐단이 됩니다. 옛 규례에 따라 바치게 되어 있는 것 외에 새로 정한 조건들은 모두 혁파(革罷)하고 별도로 나누어 각종 종이나 산과 바다에서 나는 물건을 배정해야 합니다. 만일 의정부에서 공문을 보낸 것이 아니면 배정하는 일이 없도록 규례를 정하여 시행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근래에 중앙 관청에서 임시로 소용되는 물자를 걸핏하면 군결(軍結)에 추가하여 배정하는데 이것은 진실로 무슨 근거로 그러는 것입니까? 예목이나 필채라는 명목은 방금 본부(本府)에서 바로잡아서 결국에는 공포하여 시행할 것이지만 갖가지 항목의 물산을 나누어 배정하는 것은 각 관청에 공문을 보내 영원히 금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덟째는, 안동(安東), 금산(金山), 봉화(奉化), 함양(咸陽) 등지는 화적(火賊)들이 잠복하여 밤이면 서로 모이고 낮이면 흩어졌다가 시장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약탈을 한다고 합니다. 체포하는 일은 굳이 조급히 서둘러서는 안 되지만 또한 늦출 수도 없으니, 십호 작통(十戶作統)으로 하고 통(統)에는 반드시 통장(統長)을 두며 동(洞)마다 푯말을 세우고 푯말 겉면에 방을 써 붙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약탈하는 폐단이 있을 경우에는 다만 해당 통 뿐만 아니라 이웃 동에도 일제히 모이게 하고 상과 벌을 통장(統長)과 동임(洞任)에게 균등하게 적용한다면 장차 나타나는 대로 체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결정하여 공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작통(作統)하는 규례는 옛날에만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재 경계하고 막는 방책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모두 이대로 시행하도록 영장(營將)과 수령에게 공문을 보내 그들의 근태와 능력 여하를 잘 살펴서 실적을 조사하여 논계(論啓)하여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홉째는, 상납하는 것 외에 파견된 관리들에게 떼어주는 것은 실로 막대한 폐단이 됩니다. 미(米), 전(錢), 목(木), 포(布)는 원래 제한되어 있는 것인데 이른바 파견된 관리가 감히 간교한 계책으로 혹은 먼저 상납하라 이르고 혹은 별용정(別用情)이라 하고, 혹은 무슨 물건과 교환하는 데에 주는 것이라 하고, 혹은 어느 관청에 보낸다고 하며 여러 모로 핑계를 대어 수량을 더욱 늘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심(推尋)한 후에는 엽전(葉錢)을 당백전(當百錢)으로 환산해서 낮은 편을 따라 수량을 계산하니, 위로는 조금의 이익도 없고 아래로는 무한한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상납하는 것 이외에 파견되는 관리에게 주는 이 조목은 영원히 시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상납하는 것 외에 파견된 관리에게 떼어 주는 것은 크게는 법에도 없고 암행어사가 폐단이 있다 하는 말도 그와 같이 자세하고 적실하니, 이제부터 상납하는 것 외에 파견된 관리에게 획급(劃給)하는 이 조목은 일체 논의하지 말도록 재정 관계 관청에 공문으로 신칙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열째는, 도내(道內) 열읍(列邑) 중에 인동(仁同), 영일(迎日), 창녕(昌寧), 사천(泗川)이 가장 폐단이 많은 곳입니다. 여러 해 동안 상납할 것이 모두 나라 재산을 횡령하는 자에게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으니, 받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심지어 인동과 영일 두 고을의 경우에는 목에 대한 이자를 돈으로 계산하여 받기까지 하고, 창녕과 사천에서는 미와 태(太) 비록 이미 마감 지었으나 전과 목은 아직도 바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경인년(1890) 이전에 받지 못한 목은 모두 70동(同) 8필(疋)인데 대전(代錢)하게 하고, 전으로 내는 이자를 마감하여 바치는 것도 인동과 영일의 예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모두 암행어사의 논의대로 시행하게 함으로써 속히 마감 짓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열한째는, 우병영(右兵營)의 환곡은 해마다 이자만을 받게 한 후부터 매 석당 9냥씩의 이자를 전으로 받아 본 영의 지출 비용으로 삼도록 이미 규례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영에 속한 각 하인들이 받는 미를 환곡의 여러 가지 폐단을 바로잡는다고 하여 이자를 매 석에 3냥씩만 전으로 만들어 바치게 하고 모자라는 것은 백성에게 줄 환곡 중에서 원량을 덜어내서 더 만들어 원 지출 비용에 보충하고, 남는 것은 상정가로 쳐서 민간에 도로 나누어 주니, 비록 원량을 덜어낸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장부에만 실려 있는 이자입니다. 받은 곡식에 대해 이자를 내는 것도 오히려 모진 고통인데 하물며 이것은 장부에만 올라있는 이자곡을 내는 것이 이처럼 많아서야 되겠습니까? 대장에 오른 환곡은 지금 이미 총량에 의하여 장부를 조사하였는데 그 중 여러 가지 환곡에 바치는 양을 줄여준 몫을 백성들에게 줄 환곡에서 받는 것은 마땅히 없애야 할 것입니다. 각 지출 비용 중에서 수량을 나누어 적당히 줄이고, 다시는 본 곡을 늘리는 일이 없도록 영구히 규정을 정하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라고 한 일입니다. 환곡을 내주고받아들이고 하는 법이 문란한 것이 이미 놀랄 만큼 굳어졌고 백성들의 원망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이럭저럭 여러 해를 보낸다면 앞으로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도신과 수신이 토의하고 절목을 만들어 본부에 보고하고 회답을 받아 시행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엄하게 규정을 세운 후에 혹시나 조금이라도 규정을 어기게 되면 도신과 수신들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서정순(徐正淳)의 계본(啓本)을 보니, ‘덕원 전 부사(德源前府使) 김문제(金文濟)의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고, 소란을 일으킨 여러 놈들은 엄하게 조사하여 분등(分等)하였으니,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대개 관리로 있으면서 정사에 허물이 있거나 백성들에게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감사는 반드시 그 일에 따라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하고 조정에서는 마땅히 법에 의하여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에 와서 한두 놈의 괴이한 자들이 주도면밀한 계획 꾸며서 나쁜 일을 제창하고 많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악행을 다하며 걸핏하면 소란을 일으키는데도 보통의 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고금 천하에 나라를 유지하고 백성을 진압하는 기강과 명분이 마침내 없어지게 되는데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전 부사(前府使) 김문제(金文濟)가 강제로 거두어들인 재물이 관용(官用)이라 하더라도 이미 떳떳치 못하게 억지로 걷어 들인 것이니, 스스로 백성들의 원망을 초래하여 마침내 변명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온 고을을 서로 동용하여 극도의 소요를 일으키게 하였고 해변의 관문에 몰래 피신하여 수치를 크게 끼쳤으니 의금부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소서. 엄익조(嚴益祚)는 그가 비록 나라를 배반한 무리이지만 이미 조정의 관리 대장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조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고약한 짓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겉으로는 백성들의 폐단을 바로잡는다는 핑계를 대고 속으로는 사사로운 분풀이를 할 생각을 품고 수령을 협박하고 민가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협박하고 지시한 사실을 모든 사람이 보았고 맨 먼저 제창한 죄를 한 마디로 자백하였습니다. 세 차례 엄히 형신(刑訊)한 다음 종신토록 원악도 정배(遠惡島定配)하여 물간사전(勿揀赦前)하소서. 홍명조(洪命祚)는 현재 장의(掌議)의 임무를 띠고 있는데, 엄익조의 말을 달게 듣고 백성을 모집하여 고을 관청에 들어갔으니 그의 심사가 어떠한 것입니까? 그리고도 집을 허물고 포악한 짓을 도와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습니다. 엄기태(嚴基泰)는 바로 소란을 일으킨 수괴의 종손으로 실은 나라를 배반한 무리와 단짝은 아니지만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버릇이 이미 드러났고 소란을 일으키기를 즐기는 사실이 이미 드러났으니, 모두 엄히 형신한 뒤에 원악지 정배하소서. 강창호(姜昌浩)와 조기섭(趙基燮)은 항상 억울하게 조세를 낸 원한을 품고 있다가 마침 소란이 일어나는 기회를 타서 앞장서서 날뛰며 제멋대로 치고 빼앗았으니, 아울러 엄히 형신한 뒤에 원배(遠配)하소서. 조석준(趙石俊)이 집을 허문 죄목은 애초에 증인의 공술이 있으니, 억지로 변명하는 말을 어찌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형배(刑配)하소서. 이도근(李道根)은 안팎으로 호응하고 전후로 참가하였으니, 진실로 그의 죄를 따진다면 마땅히 두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할 것입니다. 조영달(趙永達)과 차남원(車南元)은 소란을 일으킨 사실이 명백하고, 여러 사람의 공초(供招)가 자세하고 정확하며, 이무송(李茂松)과 김여득(金汝得)은 모두 포교(捕校)로서 관청의 아전과 종들과 결탁하여 요호(饒戶)를 수색하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니, 이번에 소란을 일으킨 단서가 이 무리가 아니고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이상에도 도망 중에 있는 여러 놈들은 모두 도신으로 하여금 엄하게 신칙하여 수색 체포하게 한 다음 각기 해당하는 죄에 따라 처벌한 뒤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게 하소서.
박도연(朴道淵) 등 여섯 놈은 신분이 관청 하인으로 상관의 위엄을 빌어 농간을 부렸으니, 모두 형배하소서. 윤응주(尹應周)와 박용석(朴用錫) 두 놈은 특별히 단속하고 잡아서 일체 감죄(勘罪)하소서. 좌수(座首) 김기호(金基灝)는 현재의 직임이 다른 사람과 다른데 행패를 부리는 것을 금지시키지 못하였고, 수교(首校) 이계조(李啓祚)와 이방(吏房) 김경순(金京順)은 불량배들을 그 자리에서 막아내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논할 것도 없고 일에 앞서 미리 도망쳐 숨었으니,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모두 본영(本營)에서 죄의 경중을 구분하여 참작 처리하도록 하소서. 그 밖에 박윤석(朴允錫) 이하의 7명의 죄수는 별로 죄를 줄만한 단서가 없으니 모두 방송(放送)하소서. 겸인(傔人) 김재식(金載植)은 상전의 귀와 눈을 가리는 짓만 일삼으면서 간사한 소인들과 가까이 지내며 화단을 빚어내고 변란을 격발시켜 여론이 들끓게 되었으니, 그가 범한 죄를 논한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형조(刑曹)에 분부하여 기한을 정하여 잡아다가 엄하게 형신한 뒤에 원악지 정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강원 감사(江原監司) 윤영신(尹榮信)의 계본을 보니, ‘전전 낭천 현감(前前狼川縣監) 신용(申榕)과 전 현감(前縣監) 이석진(李奭鎭)의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고, 소란을 일으킨 여러 놈들은 엄하게 조사하여 분등하였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농사와 누에치기에 힘써 일찍이 산골 풍속이 옛날과 같이 순박하다고 들었는데 아전과 백성이 서로 헐뜯는다고 하니, 투박해진 인심은 통탄할 노릇입니다. 더없이 중한 환곡으로 교활한 아전들의 모리 행위가 점점 심해지고, 호구에 따르는 부역이 고르지 못하여 백성들의 의심이 더욱 깊어져 쌓인 불평이 격발하여 마침내 많은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전전 현감 신용과 전 현감 이석진에 대해서는 도신의 계사(啓辭)에서 이미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의금부에서 마땅히 법률에 따라 감처(勘處)해야 할 것입니다. 정태영(程泰英)은 바로 자기 형이 하던 직무를 대신 맡았으니 마땅히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데, 또 여러 백성들의 신소(申訴)를 받았으니 그 폐단을 알만 합니다. 장팔달(張八達)은 여러 해 동안 창고 담당 아전으로 있으면서 훔쳐내고 농간을 부리는 것이 습관을 이루었으니 지난해에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킨 것도 그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모두 엄히 형신한 다음 도배(島配)하소서. 기신영(奇莘永)과 이학신(李學信)은 똑같이 나쁜 짓을 하고 서로 도와주며 점점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고 스스로 선구가 되어 백성들을 선동하며 치밀하게 준비한 행적을 가릴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사람을 죽이는 변고를 내었으니, 아뢴 내용대로 특별히 신칙하여 잡아다가 속히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한 뒤에 등문(登聞)하게 하소서. 길주호(吉周鎬)는 이미 무죄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본영에서 징계하거나 책려하게 할 것입니다. 최정선(崔正先)은 아비가 모함을 당하여 죽었으니 어찌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벼슬에서 교체되어 돌아가자 권세 있는 지위의 사람에게 행패를 부렸습니다. 명분과 의리로 보아 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니 엄히 형신한 다음 원배하소서. 최재붕(崔在鵬)은 형을 위하여 분한 마음을 씻으려고 조카와 함께 갔으니 비록 범한 죄는 없다 하더라도 경하게 처분하여 형추(刑推)하여 방송하소서.
송익(宋釴)과 지흥창(池興昌)과 정태현(程泰鉉)은 모두 아전과 향청(鄕廳)의 우두머리로서 소란을 일으킨 놈들을 잡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 감영과 고을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지극히 놀랍고 통분한 일로 모두 형배하소서. 나수명(羅守明)과 최재학(崔在鶴)은 전혀 추궁할 만한 흔적이 없으니, 모두 특별히 방송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6월 30일 병진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座)한 상태에서 부묘(祔廟)할 때에 신련(神輦)을 시위한 각영(各營)의 군사들에게 시사(試射)를 행하고 입격자들에게 상을 나누어 주었다.
우의정(右議政) 조병세(趙秉世)에게 채자 하유(下諭)하였다.
평양부(平壤府)의 화재를 당한 집에 휼전(恤典)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