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41권, 고종38년 1901년 9월

싸라리리 2025. 1. 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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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양력

【음력 신축년(辛丑年) 7월 20일】  동지돈녕원사(同知敦寧院事) 민찬호(閔贊鎬)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김갑규(金甲圭)를 동지돈녕원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원본】 45책 41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2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동지돈녕원사(同知敦寧院事) 민찬호(閔贊鎬)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 김갑규(金甲圭)를 동지돈녕원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3일 양력

정2품 이헌영(李𨯶永)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特進官) 민찬호(閔贊鎬)를 사직서 제조(社稷署提調)에, 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오정근(吳正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9월 4일 양력

종1품 조병호(趙秉鎬)와 엄세영(嚴世永), 정2품 이근명(李根命)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1품 서상우(徐相雨)와 이유승(李裕承)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서상조(徐相祖)와 이원일(李源逸), 종2품 정세원(鄭世源)과 권응선(權膺善)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종2품 정인승(鄭寅昇)·정은조(鄭誾朝)·이원규(李源珪)·정인학(鄭寅學)·이경하(李敬夏)·신태관(申泰寬)·이교영(李敎榮)·조병익(趙秉翊)·조용하(趙用夏)·김학수(金鶴洙)·김한제(金翰濟)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9월 5일 양력

정2품 김석근(金晳根)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종2품 조신희(趙臣熙)·이승우(李勝宇)·윤조영(尹祖榮)·윤종영(尹鍾永)·강우형(姜友馨)·이면상(李冕相)·송병찬(宋秉瓚)을 궁내부 특진관에, 종2품 장봉환(張鳳煥)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이 해 8월 3일에 서훈(敍勳)에 합당한 칙임관(勅任官)들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하였는데, 민병석(閔丙奭)은 평가할 만한 공로가 있으니 특별히 훈(勳) 2등에 서훈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밖의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서정순(徐正淳),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규홍(金奎弘), 궁내부 특진관 이종건(李鍾健),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정구(尹定求),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윤웅렬(尹雄烈),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홍순형(洪淳馨), 양지아문 부총재(量地衙門副總裁) 고영희(高永喜)에게 모두 법에 의거하여 각각 훈 3등에 서훈하도록 하였는데, 이상 10원(員)에게 하사할 훈장의 명목에 대해서 결재를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각각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하라."
하였다.

 

9월 6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 나아가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 민영환(閔泳煥)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어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병석(閔丙奭) 등 16명에게 훈기(勳記)를 수여하였다.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홍순형(洪淳馨),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규홍(金奎弘), 특진관(特進官) 서정순(徐正淳)과 이종건(李鍾健),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정구(尹定求), 양지아문 부총재(量地衙門副總裁) 고영희(高永喜), 종2품 민형식(閔衡植)과 김중현(金中鉉), 정2품 이봉의(李鳳儀), 참령(參領) 이창구(李昌九), 정위(正尉) 이용구(李容九), 영평 군수(永平郡守) 홍태윤(洪泰潤), 상원 군수(祥原郡守) 현흥택(玄興澤), 흡곡 군수(歙谷郡守) 서재순(徐在淳)이다.】 민영환이 아뢰기를,
"서훈(敍勳)을 받을 인원 중 평안북도 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이도재(李道宰)와 전라남도 관찰사(全羅南道觀察使) 윤웅렬(尹雄烈)은 모두 임소(任所)에 있는데 훈기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원에서 가져다 전하라."
하였다.

 

정1품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서상린(徐相隣)과 이보영(李輔榮)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정2품 이교창(李敎昌), 종2품 박규희(朴珪熙)·오순영(吳順泳)·허진(許璡)·이봉래(李鳳來)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윤영규(尹泳奎)·이규승(李圭承)·서형순(徐珩淳)·조경준(趙慶濬)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조종필(趙鍾弼)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우리나라에서 기사(耆社)를 설치한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으며, 우리 열성조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가 있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는 성수(聖壽) 60세에 기사에 들어가 어휘(御諱)를 올렸고 숙종 대왕(肅宗大王)은 성수 59세에 기사에 들어가 영수각(靈壽閣)을 세웠으며 영조 대왕(英祖大王)은 성수 51세에 기사에 들어가 축수연(祝壽宴)을 받았다는 것이 역사책에 실려 있으며, 노래와 시들에 담겨 전해져 지금도 훌륭한 시대의 대단한 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50세나 60세면 연회를 차려 그 경사를 축하해야 하지만, 일찍이 성수가 얼마 되어야 그렇게 한다는 일정한 규례를 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전례를 끌어다 이어나가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가건대, 황상 폐하는 즉위하신 지 38년 동안 오랜 세월 다스려 교화를 이룩하고 전장(典章)을 닦고 밝히셨으니, 그 큰 공로와 훌륭한 업적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복을 내려 큰 덕이 있는 사람이라야 얻는 장수를 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경사스러운 해에 이미 이룩된 법을 이어 떳떳한 규례를 시행하는 것은 응당 앞세워야 하며,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이것은 신 혼자의 소원만이 아니라 조정의 모든 관리들의 일치한 말이고 온 나라 백성들의 한결같은 소원입니다. 또한 조정의 모든 관리들과 온 나라 백성들의 일치한 말과 한결같은 소원 만이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고 장수를 축원하는 황태자 전하의 정성으로 이런 경사를 만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려는 것은 더욱 간절한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지난 때 황태자 전하가 전후하여 세 번 상소를 올려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을 만들자는 요청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기울일 만한 축원한 것을 보니, 말로 표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예절은 모두 규례에 부합되었으므로 더없이 우러러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비답(批答)을 받아보니 겸손한 덕이 더더욱 높아서 태자의 효성을 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허락하는 처분을 내려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계(啓)는 지금 진술하기에 알맞은 때가 아니다. 경은 번거롭게 하지 마라."
하였다.

 

9월 7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았다. 황태자가 치사(致詞)를 올렸는데, 황제의 생일〔萬壽聖節〕이었기 때문이다.

 

정2품 정한조(鄭漢朝)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종2품 조명교(趙命敎)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이런 경사를 만났으니 기념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칙임관(勅任官), 주임관(奏任官), 사관(史官), 각신(閣臣), 옥당(玉堂), 춘방(春坊), 계방(桂坊)으로서 진하(陳賀)하는 반열에 참가할 사람들과 진연(進宴)을 거행할 인원, 그리고 외국인 신사(紳士)로서 당일 대궐에 들어올 인원들에게 모두 기장(記章)을 하사하여 차게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미심스러운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처리하고 옥(獄)에 지체시키지 않는 것은 옛날에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던 것이었다.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제때에 재판하지 않은 결과 언제 판결할지 모른 채 옥에 갇혀있게 되니 이것이 어찌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러 미결 죄수들을 법부(法部)와 원수부 검사국(元帥府檢査局)에서 분명하게 처결하게 함으로써 공정하게 되도록 하라.
더구나 경사를 맞아 특전을 시행해야 할 것이니, 죄수들 중 70세 이상 15세 이하는 모두 석방하라. 육범(六犯)에 드는가 들지 않는가를 막론하고 정상을 참작해서, 석방할 사람은 석방하고 등급을 감해 줄 사람은 등급을 감해주며 미결 죄수들에게도 판결이 난 다음 모두 시행함으로써 경사를 함께 즐기는 조정의 뜻을 보여 주어라."
하였다.

 

진하(進賀)드릴 때와 황태자가 치사(致詞)를 올릴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겸장례 비서원 승(兼掌禮祕書院丞) 윤충구(尹忠求), 예모관(禮貌官) 민형식(閔衡植), 상례(相禮) 신헌균(申憲均)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9월 8일 양력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외진연(外進宴)을 행하였다.  【상(上)이 익선관(翼善冠)에 황포(黃袍)를 입고 자리에 오르자, 음악이 연주되고, 황태자 이하 종친(宗親)들과 칙임관(勅任官) 이상의 문무 관리들이 국궁 사배(鞠躬四拜)를 하자 음악이 멎었다. 큰 상을 올리고 찬안(饌案)을 올린 다음 화반(花盤)을 올리자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만년 황락장(萬年歡樂章)〉을 연주하였다. 그것이 끝난 다음 황태자가 첫 번째 술잔을 올리고, 이어 치사를 올리자 제칙(制勅)을 선포하기를, "술잔을 올리는 때이니 황태자와 경사를 함께 즐길 것이다." 하였다. 등가(登歌)가 〈수요남극지곡(壽曜南極之曲)〉을 노래하고, 무동이 들어와 〈헌선도(獻仙桃)〉를 추었다. 탕을 올리고 두어 가지 안주를 올리고 만두를 올리자 음악이 연주되었다. 반열의 우두머리인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이 두 번째 술잔을 올리고, 이어 치사를 올리니, 제칙을 선포하기를, "경(卿)들의 술잔을 삼가 들라." 하였다. 등가는 〈풍운경회지악(風雲慶會之樂)〉을 노래하고 황태자 이하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국궁하고 3번 춤추는 동작을 하였다. 찬의(贊議)가 만세를 외치니 황태자 이하가 "만세"를 부르고, 다시 만세를 외치니 "만만세"를 부르니 음악이 연주되었다. 황태자가 자리에 나아가고 종친들과 문무 관리들도 각각 자리에 간 다음 전선(典膳)이 황태자 전하에게 위와 같은 절차대로 음식상을 올리자 등가가 〈일중광지곡(日重光之曲)〉을 노래하고, 화반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다. 집사(執事)가 종친들, 연회에 참가하게 된 문무 관리들의 음식상을 차린 다음 꽃을 뿌렸으며 또 모든 관리들에게도 꽃을 뿌리니 음악이 연주되었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세 번째 술잔을,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네 번째 술잔을,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이 다섯 번째 술잔을, 특진관(特進官) 민영휘(閔泳徽)가 여섯 번째 술잔을,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김규홍(金奎弘)이 일곱 번째 술잔을,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이 여덟 번째 술잔을,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가 아홉 번째 술잔을 올리자 음악이 멎었다. 찬안을 물리자 헌가(軒架)가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니, 황태자 이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국궁 사배를 하였다.】  치사문(致詞文)에,
"성수(聖壽)가 50세가 된 것은 《주역(周易)》의 ‘희연(羲衍)’의 수(數)와 맞아서 천만 년 장수하는 것이 이 해부터 시작되며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성으로 드문 경사를 맞이했으니 성대한 의식을 가져 만년 장수를 축원합니다. 높고 낮은 모든 관리들이 공경스럽게 절하고 춤추니 기쁨의 환성은 온 나라에 넘칩니다. 더없는 경사스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천년 만년 장수하기를 삼가 빕니다."
하였다. 악장문(樂章文)에,
"상서로운 날 금 누각 위에,
화려한 연회를 벌였어라.
이 달에 경사를 맞이했거니
옛 임금의 음악을 연주한다네.
오운각과 봉래관(蓬萊關)엔
빛나는 왕업과 크나큰 공이로니
50세 그 나이에 어울리도다.
하늘이 만물을 내려줬기에
모든 관리들 절하며 인사드리며
황제에게 장수의 술잔 올리고,
조정에 차고 넘친 모든 신하들
거룩한 황제와 마주했도다.
저 밝게 빛나는 곳을 보니,
남극성(南極星)이 떴도다.
봉황새 날아오고 기린이 춤추며,
훌륭한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네.
기이한 상서러움으로 대화주 빚어내고,
북두성 국자로 천만 년 장수를 따랐으니,
흡사 만년환이 겹친 듯하도다."
하였다.

 

9월 9일 양력

함녕전(咸寧殿)에서 나아가 내진연(內進宴)을 행하였다. 【첫번째 술잔은 황태자가, 두 번째 술잔은 황태자비가, 세 번째 술잔은 영왕(英王) 이은(李垠)이, 네 번째 술잔은 군부인(郡夫人) 김씨(金氏)가, 다섯 번째 술잔은 좌명부(左命婦) 반열의 우두머리인 정경 부인(貞敬夫人) 서씨(徐氏)가, 여섯 번째 술잔은 우명부(右命婦) 반열의 우두머리인 정경 부인 곽씨(郭氏)가, 일곱 번째 술잔은 종친 반열의 우두머리인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이 올렸다. 이 밖의 의식 절차는 외진연(外進宴)의 의식대로 하였다.】  이어 야진연(夜進宴)을 행하였다.

 

외진연(外進宴) 날 예제시(睿製詩)에,
"황제의 50세를 경사로 즐기니,
천만 년 장수의 길 여기서 펼쳐지네.
조정의 모든 신하 장수를 축원하니,
무궁한 해와 달처럼 만복(萬福)이 새로우리."
하였다. 내진연(內進宴) 날 예제시에,
"나이는 높고 왕업(王業)은 빛나니
좋은 때 연회 벌여 끝없이 축하하네.
오늘처럼 천만 년을 길이 장수하시라,
색동옷 차림으로 춤추며 술을 올리네."
하였다. 내진연(內進宴) 연회와 외진연(外進宴) 연회 때에 술잔을 올린 대신(大臣), 재상(宰相), 참정(參政), 찬정(贊政), 부(府)와 부(部)의 협판(協辦) 이상, 의장(議長), 판윤(判尹), 규장각(奎章閣), 시강원(侍講院), 익위사(翊衛司)의 관리들,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홍문관(弘文館) 관리들에게 운보검(雲寶劍)을 하사하였다. 갱진(賡進)하였기 때문이다.

 

9월 10일 양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심상훈(沈相薰)을 철도원 총재(鐵道院總裁)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11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내진연(內進宴) 때에 세 번째 술잔을 올린 영왕(英王) 이은(李垠)에게는 사복시(司僕寺)의 말 1마리를 면급(面給)하고, 네 번째 술잔을 올린 군부인(郡夫人) 김씨(金氏)와 다섯 번째 술잔을 올린 정경 부인(貞敬夫人) 서씨(徐氏), 여섯 번째 술잔을 올린 정경 부인 곽씨(郭氏)에게는 각각 백주(白紬) 3필(匹)과 백목(白木) 5필을 궁내부(宮內府)에서 실어 보내게 하며, 일곱 번째 술잔을 올린 종친 반열의 우두머리인 완평군(完平君) 이승응(李昇應)에게는 내하 대표피(內下大豹皮) 1영(令)을 사급(賜給)하라."
하였다. 이어 진연청(進宴廳)의 당상(堂上) 이하, 헌관(獻官) 재상(宰相) 이하, 승지(承旨)와 사관(史官), 시강원(侍講院)과 익위사(翊衛司) 관리 이하, 배위(陪衛)한 장수와 군사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며, 전선사 검거제조(典膳司檢擧提調) 윤정구(尹定求), 육군 참령(陸軍參領) 양성환(梁性煥), 원수부 군무국 부장(元帥府軍務局副長) 장화식(張華植)에게 가자(歌資)할 것을 명하였다.

 

9월 12일 양력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전대의 전례(典禮)를 두루 상고하여 보았는데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있으니, 바로 경우궁(景祐宮) 수빈(綏嬪)의 위호(位號)를 존봉(尊封)하는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옛날에는 천자(天子)의 후궁(後宮)을 비빈(妃嬪)으로 통칭하고 따로 구별한 적이 없었습니다. 당(唐) 나라와 송(宋) 나라 이후부터 점점 차등을 두다가 명(明)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비(妃)를 책봉하고 빈(嬪)을 책봉하는 예법이 각각 달라서 보(寶)를 쓰기도 하고 규(圭)를 쓰기도 하였으며 물건에도 차이가 있게 되어, 비와 빈의 존비(尊卑)의 구분이 여기에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래서 천자의 후궁이라야 비라고 불리고 제후왕(諸侯王) 이하의 후궁은 빈이라고만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 왕조의 후궁들이 빈을 넘지 못하는 것은 대체로 그 예(禮)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황제 폐하께서 타고난 성인의 자질로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하는 날을 당하여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에 순응하여 황제라 칭하고 추숭(追崇)하는 전례를 종묘(宗廟)에 고한 만큼 경우궁은 바로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빈으로서 대체로 천자의 후궁을 비로 부르는 예(例)를 적용한다면 응당 그를 비의 칭호로 높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를 낳음으로써 억만 년 무궁할 터전을 마련하는 업적을 이룩하였으니, 황제의 생모를 태후(太后)로 높인 명나라의 일에 비추어보고 당시 순조의 효성으로 미루어본다면 높여 모시려는 그 뜻으로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에 대해 선뜻 의논할 수 없다고 해서 빈의 칭호를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 어찌 미처 시행하지 못한 전례가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예라는 것은 하늘의 이치에 의해서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높여야 할 것을 높이고 높이지 말아야 할 것을 높이지 않는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입니다. 전에 천자의 예를 행하기 전에는 비록 임금의 어머니로 높였더라도 일단 선왕(先王)의 후궁인 이상 그 지위가 빈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이미 천자의 예를 행하였으니 천자의 후궁은 응당 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옛 법을 상고해도 근거가 있고 가까운 예를 참고해도 의심할 바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 수빈에게 비의 칭호를 빨리 올림으로써 정조의 덕을 빛내고 순조의 효성을 드러낸다면 여기에서 선대의 공로와 업적을 계술(繼述)하는 폐하의 훌륭한 뜻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원래 식견이 없어서 단지 옛 전례만 가지고 나라의 크나큰 예를 논하였으니, 참으로 더없이 황송합니다. 신의 이 글에 대하여 정부의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중론(衆論)을 널리 받아들여 재처(裁處)해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노성(老成)하고 숙덕(宿德)이 있으며 박식하고 예를 아는 경(卿)으로서 남들이 감히 하지 못하는 말을 이렇게 하였으니, 절절한 충성과 사랑의 뜻이 말에 그대로 넘쳐 짐(朕)은 이에 흠탄(欽歎)한다.
경우궁을 비로 존봉하자고 진달한 문제는 과연 미처 시행하지 못한 전례로서 추모하며 감흥하는 짐의 성의로 보아 자연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확실한 근거로 명나라의 전례가 있는 이상 무슨 주저할 점이 있겠는가? 당장 조칙(詔勅)을 내리겠다."
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재순(李載純)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삼가 명(明) 나라의 제도를 상고하건대, 후궁의 지위에는 각각 차등이 있어 모두 비빈(妃嬪)에서 내려오는데 비(妃)가 높고 빈(嬪)이 그 다음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의 후궁이 아니면 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대개 역대로 그런 것입니다.
공경하는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성신(聖神)하고 문무(文武)를 겸비하시어 하늘의 보살핌으로 인하여 황제라고 칭하고 또 추숭(追崇)하는 예를 종묘(宗廟)에 행하였습니다. 수빈(綏嬪)은 곧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빈일 뿐만 아니라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를 낳으셨습니다. 일단 천자의 후궁으로 된 이상 옛 예를 끌어다 마땅히 비가 되어야 하는데, 더구나 천자의 어머니인데도 전날의 칭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어찌 미처 시행하지 못한 전례(典禮)가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예법을 금령(禁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란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을 뿐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 것 없으나, 어찌 감히 하지 말아야 할 예를 행하자고 숭엄하신 폐하 앞에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전례를 널리 상고하여 속히 수빈에게 비의 칭호를 거행함으로써 추모하는 폐하의 정성을 펴서 간절히 바라는 신민(臣民)의 마음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방금 대신(大臣)에게 비답을 내렸는데, 이것은 나라에서 미처 시행하지 못한 전례이다. 경(卿)의 말이 또 이와 같아 진실로 사체(事體)에 부합되니, 매우 가상히 여기고 감탄한다."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를 추존(追尊)한 이후에 경우궁(景祐宮)의 사체(事體)가 더욱 달라졌으니 마땅히 전례(典禮)를 거행해야 할 것이다. 수빈(綏嬪)을 비(妃)로 존봉(尊封)하는 제반 의절(儀節)을 장례원(掌禮院)에서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상소하여 의정(議政) 직임을 사직시켜 줄 것을 청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그의 뜻에 따라 체차(遞差)시켜 주었다.

 

정1품 심순택(沈舜澤)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13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에게 의정(議政)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9월 14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송도순(宋道淳)을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으며, 찬정(贊政) 이지용(李址鎔)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겸임시켰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천자의 후궁이 마땅히 비(妃)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대의 확고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전번에 올린 상소 가운데 갖추어 진달하였고 폐하께서도 옳게 여겼습니다. 그러니 이제 순빈(淳嬪)인 엄씨(嚴氏)가 비가 되는 일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만약 천자의 후궁으로는 비도 있고 빈(嬪)도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비가 되어야 하느냐고 한다면,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조정 관리들도 위에는 경(卿)이 있고 아래에는 대부(大夫)가 있는데, 이제 경을 가리켜, ‘하필 경이라고 하는가?’라고 시비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입니까?
비와 빈은 모두 후궁의 벼슬입니다. 낮은 데로부터 높이기도 하고 귀한 것으로 인하여 높이기도 하니, 이것은 조정에서 벼슬에 임명하는 원칙입니다. 귀인(貴人)으로부터 빈으로 되고 빈으로부터 비로 되는 것은 각기 때에 맞게 하는 바 이것이 낮은 데에서부터 높인다는 말입니다. 아들이 친왕(親王)이 되었는데 친왕의 어머니를 귀하게 하여 비로 하지 않는다면 장차 누가 비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귀한 것으로 인하여 높인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성신(聖神)하고 문무(文武)를 겸비한 우리 황제 폐하께서는 새롭게 하는 운수를 만나 훌륭한 정사를 이룩하고 천자의 예를 차례차례 갖추어 거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6궁(六宮)의 벼슬에만 비의 지위를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지금이야말로 경우궁(景祐宮)을 존봉(尊封)할 때라는 것을 넓고 깊게 생각하고 계속하여 순빈을 황비(皇妃)로 승봉(陞封)하는 전례(典禮)를 행함으로써 나라의 체통을 높이고 여망(輿望)에 부응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이 옛 전례에 근거해서 논하여 아뢴 것은 진실로 마땅히 행해야 할 예이다. 그러나 급한 일이 아니니, 비록 천천히 시행한다 하더라도 무슨 안 될 것이 있겠는가? 경은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7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이 해는 바로 우리 숙묘(肅廟)가 탄신(誕辰)하신 구갑(舊甲)으로 옛날을 더듬고 오늘을 미루어보면 슬프고 그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번 음력 15일 명릉(明陵 : 숙종과 계비(繼妃) 인현 왕후(仁顯王后) 및 인원 왕후(仁元王后)의 능) 작헌례(酌獻禮)에 대신(大臣)을 보내어 섭행(攝行)하게 하되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 내려 보내겠다. 일을 받든 후에 곧 능에 가서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경우궁(景祐宮)에 대한 전례(典禮)는 이미 명하였는데 사친(私親)을 존봉(尊封)하는 것 역시 근거할 만한 바가 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을 왕(王)으로 존봉하는 의절(儀節)을 역대의 전례(前例)에서 상고하여 장례원(掌禮院)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원임(原任) 직제학(直提學) 김규홍(金奎弘), 원임 직학사(直學士) 민영철(閔泳喆)·이용선(李容善), 원임 직각(直閣) 남규희(南奎熙), 원임 대교(待敎) 정인승(鄭寅昇)에게 《윤발(綸綍)》과 《일성록(日省錄)》을 보충하는 일을 감동(監董)하라고 명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태의원 경(太醫院卿) 송도순(宋道淳)을 장례원 경에, 특진관(特進官) 조병호(趙秉鎬)를 태의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20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민영휘(閔泳徽), 찬정 김성근(金聲根)·윤정구(尹定求)·이지용(李址鎔)을 모두 진연 의궤청(進宴儀軌廳)의 당상(堂上)에 차하(差下)하라고 명하였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이 다시 상소를 올려, 순빈(淳嬪)을 황비(皇妃)로 승봉(陞封)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일전에 내린 비답에서 이미 짐(朕)의 뜻을 다 말했는데도 경(卿)이 거듭 상소를 올리니, 이것은 번거롭게 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경이 나라의 체통을 존중하는 뜻에서 이처럼 간절히 청한 만큼 예우(禮遇)하는 입장에서 역시 줄곧 버티기만 할 수는 없다. 마땅히 행해야 할 예에 대하여 처분(處分)이 있을 것이니, 경은 헤아리도록 하라."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순빈(淳嬪) 엄씨(嚴氏)를 비(妃)로 봉하는 제반 의식 절차를 장례원(掌禮院)에서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식(趙秉式)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지나간 사첩(史牒)을 상고하건대, 천자(天子)가 후궁의 벼슬을 세웠는데 그 직위는 후(后), 부인(夫人), 빈(嬪), 세부(世婦), 여어(女御)입니다. 이 다섯이 서로 어울려 천하의 내치(內治)를 세움으로써 여자들이 순종할 것을 밝혔기 때문에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집안이 잘 꾸려졌던 것입니다. 또한 옛 제도를 상고하여 보건대 부인은 당(唐) 나라 이후부터 비라고 하였으며, 또 상고하건대 위(魏) 나라 이후부터는 여러 임금의 어머니를 비로 삼았습니다.
지금 순빈(淳嬪) 엄씨(嚴氏)는 오랫동안 빈어(嬪御)의 반열에 있으면서 일찍부터 여자의 도리를 밝힌 명성이 드러났으며 또 황자(皇子)를 낳은 귀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낮은 벼슬에 있는 것은 아들로 인해 부모가 귀하게 되는 법에 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비로 봉하여 그 칭호를 정해서 의절(儀節)에 부합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大臣)이 거듭 청하였기 때문에 방금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경의 건의(建議)는 실로 가상하다."
하였다.

 

9월 21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경부철도 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가 남부행 철도 기공식(起工式)을 부산(釜山)의 초량(草梁)에서 행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인 육군 참장(陸軍參將) 권재형(權在衡)에게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9월 22일 양력

학부 협판(學部協辦) 민영찬(閔泳瓚)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사철(金思轍)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순빈(淳嬪) 엄씨(嚴氏)는 좋은 명성이 미치는바 천성이 온화하고 자애로우며 규범(閨範)이 정숙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높은 사람을 넘어서지 않고 새 사람으로서 오랜 사람들보다 앞에 나서지 않아서, 얌전하고 겸손하다는 소문이 나게 된 까닭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께서는 굽어 살피고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에서 정1품으로 봉작(封爵)한 의례(儀禮)를 두루 상고하며 선왕(先王) 때에 책명(冊命)으로 비(妃)로 높인 전례(典禮)를 본받아 오늘날 행함으로써 내직(內職)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이 이런 논의를 한 지가 오래되는데, 요즘 대신(大臣)이 연달아 청한 것으로 인하여 방금 명을 내렸다."
하였다.

 

9월 23일 양력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윤용선(尹容善)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영돈녕원사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 김영목(金永穆)을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칙유(勅諭)하기를,
"경(卿)이 한가히 쉬면서 몸을 보양한 지도 벌써 달포가 되었다. 경을 생각하는 짐(朕)의 마음은 하루가 급하거니와 경도 연거(燕居)하는 가운데 백성들의 일과 나라 형편에 대한 걱정으로 한밤중에도 뒤척였을 것이니 짐은 물론 경의 간절한 심정을 알고 있다. 이번에 다시 경에게 제수(除授)한 것을 반드시 헤아리도록 하라. 경은 당일로 등대(登對)하여 좌불안석하며 애타게 기다리는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기 바란다."
하였다.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 김태제(金台濟)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삼가 광무(光武) 3년 4월 27일자로 내린 조지(詔旨)를 보니, 성인(聖人)을 존중하고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거듭 간곡히 언급하였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하가 문명(文明)해질 하나의 기회입니다. 신은 조지를 받은 후로 해가 오래될수록 더욱 찬송(讚頌)하여 왔는데 아직 그 뜻을 받들어 시행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적이 개탄스러운 마음을 품고 감히 하찮은 생각을 아뢰니, 성명(聖明)께서는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전장(典章)과 법도(法度)에서 멀리로는 주(周) 나라 예를 상고하고 가까이로는 명(明) 나라 제도를 취해서 학교(學校)에 관한 정사에 더욱 힘을 쏟았으니, 안으로는 태학(太學), 밖으로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들에서 모든 숭봉(崇奉)하는 절차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성(先聖)의 위호(位號)와 그 후손들의 봉작(封爵)에는 미비한 점이 있습니다. 신이 그것을 조목별로 아뢰려고 합니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의례(儀禮)》에서는 자(字)만 부르고 관(官)은 부르지 않았으며 《논어(論語)》에서는 이름만 부르고 직(職)은 부르지 않았으니, 주공(周公)이나 공자(孔子)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당(唐) 나라의 현종(玄宗) 때에야 비로소 공자에게 시호를 주어 문선왕(文宣王)이라고 하였으며, 안자(顔子) 이하는 공(公), 후(侯), 백(伯)으로 불렀습니다. 송(宋) 나라에서는 지성(至聖)이라는 말을 더하고 원(元) 나라 때에는 대성(大成)이라는 말을 더하였습니다. 대체로 관직(官職)이라는 것은 신하에게 주는 것이지 스승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명나라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 정론(正論)이 비로소 일어나서 신주(神主)를 고쳐 공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고 썼고 안자 이하에게는 모두 작호(爵號)를 없앴으니, 이에 대해서는 백세(百世)에 물어보아도 이의(異議)가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묘조(宣廟祖)에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중국에 들어가 그 내용을 처음으로 듣고는 옳게 여겨 우리나라에 돌아온 날로 상소를 올려 그것을 따르자고 청하였습니다. 그 후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5현(五賢)을 종사(從祀)할 때 또 명나라 제도를 따르자고 청하였으며, 숙묘(肅廟) 신유년(1681)에 이판(吏判) 김석주(金錫胄)도 이에 근거해서 청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이상진(李尙眞)과 집의(執義) 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들이 일치한 목소리로 호응하였다는 것이 《국조보감(國朝寶鑑)》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첫째로 개탄할 일입니다.
한(漢) 나라 이래로 선성의 후손들이 작호를 세습하였는데, 소가공(紹嘉公), 문선공(文宣公)과 종성후(宗聖侯), 봉성후(奉聖侯), 숭성후(崇聖侯), 포성후(褒聖侯) 등과 같은 것이 이것입니다. 당(唐) 나라에서 처음으로 연성(衍聖)이라는 호(號)를 정하고 지금까지 그대로 따라 시행하여왔으며, 그 밖에 오경 박사(五經博士), 학정(學正), 교수(敎授) 같은 것은 이루 다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청하여 시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둘째로 개탄할 일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성인으로서 우리나라에 나와 8조(條)의 교화를 펴서 구이(九夷)의 누추한 풍속을 변화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있는 풍속을 이루게 한 것은 오직 기자(箕子)입니다. 그래서 영묘(英廟)께서는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은 모두 기자가 남긴 혜택이다.’라고 하였으니, 위대한 성훈(聖訓)입니다. 그리하여 이미 숭인전(崇仁殿)을 세웠고 또한 묘(墓)를 능(陵)으로 봉하였으며 전후하여 융숭하게 보답했으니, 유감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손에 대해서만은 아직 봉하자고 청한 적이 없으니, 이것이 셋째로 개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는 옛 성현들의 위호를 개정하고 두 성인의 후손들 중에서 어질고 효성스러운 사람을 골라서 작호를 봉한다면 아마도 모든 제왕들 중에서 빛나고 천추 만대(千秋萬代)에 말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선왕이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두어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은 오직 오경(五經) 뿐으로써, 오경은 황왕(皇王)의 모훈(謀訓)으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대경(大經)이고 대법(大法)입니다. 불행하게도 진(秦) 나라와 초(楚) 나라 때 불타버렸지만 한 나라가 일어나서 협서(挾書)의 율(律)006)  을 폐지하고 책을 바치는 길을 열어 놓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경서(經書) 관계의 학자들이 많이 쏟아져나와 고거(攷据)하고 훈고(訓詁)하는 일들을 서로 내세웠으며 수사(洙泗)의 학안(學案)007)  을 거의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나, 부회(傅會)하고 천착(穿鑿)하는 폐단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송 나라의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 등 여러 학자들이 성리학(性理學)을 처음 밝혀 공자와 안자의 심법(心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결과 한 나라 학자들의 구설(舊說)은 저절로 뜸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왕왕 일설(一說)만 들고 나서면서 완전히 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근래에 우리나라 유학자들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처음부터 따지지도 않은 채 모두 말살하고 13경(十三經)까지 포함하여 무슨 책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씨(許氏)의 《설문해자(說文解字)》와 《이아(爾雅)》는 모두 소학가(小學家) 일문(一門)에서 함께 점유하는 만큼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마땅히 먼저 익혀야 하는데도 지금 묶어서 시렁 위에 올려놓고 보지 않습니다. 아! 구설과 《설문해자》는 주자(朱子)도 많이 인용하였으니, 선현들이 폐하지 않은 것을 후유(後儒)들이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한유(漢儒)가 주소(註疏)를 지었기 때문에 비록 주자처럼 대단히 지혜로운 분도 그 중에서 절충하여 여러 책들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에게 편지를 보내어 《십삼경주소(十三經註疏)》를 구해 보려고 하였으니, 선정신도 폐하지 않은 것을 후생(後生)들이 폐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건대, 태학 안에 교경당(校經堂)을 따로 세우고 해박한 선비들을 널리 선발해서 우선 정자와 주자의 경훈(經訓)을 교정하여 종지(宗旨)를 세워놓고, 다음에 한유의 주소를 취해서 고의(古義)를 상고하며, 또 《설문해자》를 통하여 육서(六書)를 전습(傳習)함으로써 출발을 바로 한 다음에야, 정자와 주자가 취하고 버린 뜻을 밝힐 수 있고 주소의 득실의 실제를 가려낼 수 있으며 나라의 풍속의 고루한 폐단을 제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전(傳 :《맹자(孟子)》〈진심(盡心)〉하(下))에 이르기를, ‘경서에 관한 학문이 바르면 백성들이 흥하고 백성들이 흥하면 사특(邪慝)한 것이 없어진다.’라고 하였으니, 성왕(聖王)들이 교화를 이룩하는 데에서 이보다 큰 것이 없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하찮은 사람이라고 해서 말까지 폐하지 말고 속히 받아들여 시행함으로써 천년만년을 내려갈 종교(宗敎)를 심을 수 있게 한다면 더없이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내용은 근거가 명확하지만 신중한 문제에 속하는 만큼 반드시 널리 의견을 모으고 물어보아야 하겠다. 끝에 첨부한 것도 매우 정당한 논의이므로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9월 24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명릉(明陵)의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뒤에 헌관(獻官)은 이어 익릉(翼陵)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오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송도순(宋道淳)이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전례(典禮)를 상고하여 보건대, 만일 빈(嬪)으로부터 비(妃)로 올려 봉하는 경우 원래 봉한 칭호가 있으면 따로 의망(擬望)하지 않는다는 조문이 있습니다. 이번에 경우궁(景祐宮)을 존봉(尊封)하고 순빈(淳嬪)을 비로 책봉(冊封)할 때 모두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두 번째로 칙유(勅諭)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세 번째로 칙유(勅諭)하였다.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동희(趙同熙)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特進官) 이재극(李載克)을 비서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칙령(勅令) 제17호, 〈국내 우체 규칙 개정할 일에 관한 안건〔國內郵遞規則改正件〕〉을 재가하여 반포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의 청으로 인하여 단천군(端川郡)에서 물에 떠내려간 토지 7결(結) 5부(負)에 대하여 3년 동안만 정세(停稅)하는 문제에 관해 의정부에서 회의를 거친 결과 찬성표가 7이고 반대표가 1인데, 삼가 성재(聖裁)를 기다립니다.’라고 상주(上奏)하니, 제칙을 내리기를,
"표제(標題)가 많은 쪽으로 시행하라."
하였다.

 

9월 2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심순택(沈舜澤)을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에, 정1품 조병세(趙秉世)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9월 26일 양력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소견(召見)하였다.

 

정2품 신석희(申奭熙)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종2품 이봉래(李鳳來)를 내부 협판(內部協辦)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特進官) 강우형(姜友馨)을 봉상사 제조(奉常司提調)에, 정3품 장석신(張錫藎)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으며, 중추원 의관 엄주원(嚴柱源)을 농상공부 회계국장(農商工部會計局長)에 임용하고 주임관(奏任官) 5등에 서임하였다.

 

9월 27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를 행하고 이어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도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조병세(趙秉世)를 소견(召見)하였다. 명릉(明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섭행(攝行)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연로(沿路)의 농사 형편이 과연 어떻던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농사 형편이 흉년이 심하여 보기에 참혹하였습니다. 지금 경기(京畿), 충청(忠淸), 전라(全羅), 황해(黃海) 등지는 주민들이 유리(流離)하여 열 집 중 아홉 집은 비어 있습니다. 설사 명년(明年)에 비가 적당히 오고 바람이 알맞게 불어준다 하더라도 사람과 곡식이 다같이 부족하니 농사를 지으리라고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무휼(撫恤)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아직 구제의 헌책(獻策)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는 의정부(議政府)에서 마땅히 시행하는 규례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시급한 정사는 관찰사(觀察使)와 수령(守令)을 잘 선발하는 일입니다. 관찰사가 정사를 잘하는가 못하는가를 성상께서 어찌 모를 리 있겠습니까? 잘하지 못하는 자는 즉시 개차(改差)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충주부(忠州府)로 말하면 오랫동안 결원된 채 있으니 역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속히 차송(差送)하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전주(全州)에서는 관찰사 조한국(趙漢國)이 민심을 크게 얻고도 혹시 민심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말미를 받고 돌아온 뒤로 도로 부임시켜줄 것을 청하는 글이 날마다 의정부에 올라온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부모의 병 때문에 상소하여 교체되고자 하기에 상소문을 머물러두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으며 재삼 면유(面諭)하여 기어이 도로 부임하게 하려 하였건만 줄곧 사임을 청하니 민망한 노릇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런 때에 이처럼 정사를 잘하는 사람을 결코 놓칠 수 없습니다. 그에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을 물어서 하나하나 시행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관찰사와 수령들이 변통한 후에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익 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시행하도록 해야 하겠지만 만약 한 도(道)가 불안해지면 각 도들이 덩달아 동요할 걱정이 없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더없이 두려운 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두려워할 만한 것은 백성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재해(災害)에 관한 정사에서 실지대로 탈급(頉給)한 다음에야 백성들이 안착할 수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록 아무런 근거도 없이 세금을 징수하려고 하더라도 어디에서 받아낼 수 있겠습니까? 구제해주는 데 대해서는 위에서 응당 처분이 있겠지만 백성들 중에서 구제하는 데 보태준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초사(初仕)와 수령 자리를 주어 시상(施賞)한 전례도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벼슬로 시상하는 것은 타당한 점이 없지 않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구제하는 일을 벌인 후에 어사(御史)를 뽑아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절대로 조정에서 모르는 사람을 시찰하러 보내지 말고 반드시 조신(朝臣)들 중에서 재주와 덕망을 겸비한 사람을 뽑아 보낸 연후에야 백성들이 모두 전날의 어사처럼 여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사를 의정부에서 뽑아 보낸 전례도 있는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아뢰기를,
"지금 의정(議政)이 새로 연석(筵席)에 나왔는데 틀림없이 좋은 계책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정은 줄곧 사양하면서 결코 맡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미 의정으로 있는 만큼 반드시 의정의 권한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정부에서는 반드시 회의를 열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요즘 의정부 관리들이 서로 공경하고 돕지 못하며 나라가 있어야 가정도 있다는 원칙을 모르니, 어찌 생민(生民)을 구제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칙(詔勅)을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구제하는 일이 기어이 실제 혜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요즘 조칙을 내린 것 중에 비록 명목 없는 잡세(雜稅)를 혁파(革罷)하라는 것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서 여전히 세금을 징수하고 있으니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여 실제로 시행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제(官制)가 전보다 더욱 번잡하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지금의 법사(法司)에서는 한갓 청탁만을 들어주어 사면해야 할 사람을 사면하지 않고 형벌을 가해야 할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으며 무거운 죄이건 가벼운 죄이건 오랫동안 지체하면서 처결하지 않고 있는데, 그들도 사람인 이상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대관(大官)이라고 하더라도 민사(民事)에 구애되어 임의로 잡아들이는데,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제 그 사유를 따져보면 재화 한 가지 문제에 불과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체(事體)이겠습니까?"
하니,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오천(鰲川) 문제를 가지고 이미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진달하였는데, 그림을 본 후에 달리 읍을 설치하도록 처분한 것을 받고는 더없이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수령이 내부(內部)에 다시 보고한 것을 듣건대, 횡설수설하는 말로써 기어이 성 안에 고을을 설치하려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관리들이 부동(符同)하였기 때문으로, 처분이 내렸는데도 기어이 명령에 맞서려고 하니, 어찌 너무나 무엄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부에 다시 보고하였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올해 사충사(四忠祠)에 치제(致祭)하고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한 성전(盛典)에 대해서는 더없이 감격한 일로서 종손(宗孫)을 수용(收用)한 것은 격례를 훨씬 뛰어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축년(1901) 신하들 중에는 사의를 보여주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세 장신(將臣)과 다섯 절도사(節度使), 세 재신(宰臣) 및 달성군(達城君)의 집에서는 신축년(1901)에 은혜를 입지 못하였으니, 실로 흠전(欠典)인 것입니다. 갑진년(1784)으로 말하면 영묘(英廟)가 왕위에 오른 구갑(舊甲)으로서 여덟 곤수(閫帥)에게 일체 치제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축년(1901)은 왕사(王事)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구갑인데도 8가(家)에 치제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사체에 흠이 됩니다. 갑진년(1784)에 충성을 포상하는 윤음(綸音)을 한 예에 따라 이 해에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임금 때의 갑진년(甲辰年)인가?"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정묘(正廟) 때의 갑진년(1784)이었습니다."
하니, 이어서 아뢰기를,
"여러 사람을 갑자기 일일이 진달하기는 어려운데, 의정부에 물으면 자연히 소상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건하(李乾夏)에게 임시로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으며, 종2품 김규희(金奎熙)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28일 양력

경부 경무국장(警部警務局長) 유한익(劉漢翼)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육군 참장(陸軍參將) 이지용(李址鎔)에게 임시로 원수부 기록국 총장(元帥府記錄局總長)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올해 6월 20일 사전(赦典)과 관련한 조칙(詔勅)을 삼가 받들어보니, 각 재판소 소관의 죄수 중 석방해야 할 부류인 최일봉(崔一奉) 등 4명과 등급을 감해주어야 할 부류인 박태진(朴泰鎭) 등 19명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윤허하였다.

 

9월 29일 양력

조령을 내리기를,
"고금에 어찌 올해와 같은 한재(旱災)가 있었겠는가? 각도(各道)에 가뭄과 비의 정도가 같지 않은데 비가 내려 어느 정도 수확을 기대할 만한 곳이 간혹 있지만 애당초 이앙(移秧)하지 못한 데가 많아서 들판이 황무지로 되었고 경색(景色)이 스산하여 어디라 할 것 없이 흉년이 들 것이 이미 명백하여졌다. 아직 가을도 되기 전인데 백성들이 굶주림을 당할 걱정을 하고 떠돌며 먹을 것을 바라는 참상은 듣기에 더없이 참혹하다. 그것이 만 리 밖에 떨어져 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두렵고 걱정스러워 금의 옥식(錦衣玉食)도 편안하지 않다.
옛날 부 정공(富鄭公)은 유민(流民)을 안집(安集)시키는 데에서 법을 오히려 간편하게 하였고 이 도전(李道傳)은 마을들을 두루 살피는 데서 직접 눈바람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찌 오늘날의 수령과 재신(宰臣)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정 백자(程伯子)가 말하기를, ‘아무리 보잘것없는 관리라 하더라도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백성들을 구제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각 해당 도들에서 재해 형편을 자세히 조사하여 즉시 의정부(議政府)에 보고하게 하고 의정부에서는 해당 도의 보고를 기다린 다음 구제하기에 편리한 대책을 충분히 상의해서 조목별로 진술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봉심(奉審)한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농상공부 대신 서리(農商工部大臣署理) 이건하(李乾夏), 궁내부 협판(宮內府協辦) 성기운(成岐運),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송종억(宋鍾億), 영선사 장(營繕司長) 민강호(閔康鎬)이다.】 홍릉(洪陵)의 병풍석(屛風石)을 고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연전에 육상궁(毓祥宮)에 화재가 난 뒤로 책인(冊印)이 모두 타버렸는데 아직 미처 새로 만들지 못하였다. 삼가 《춘관통고(春官通攷)》를 상고하여 보건대, 태묘(太廟)에 금보(金寶)를 새로 만들어 봉안(奉安)한 전례는 있지만 옥책(玉冊)을 새로 만들어 넣은 전례는 없다. 그러므로 임진년(1892)에 올린 은인(銀印)을 모방해서 새로 만든 다음 사유를 고하고 봉안하려고 하는데, 대신들과 예조(禮曹) 당상(堂上官)의 생각은 어떤가?"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가지고 우리나라 가례(家禮)를 상고하여 이처럼 물으시니, 신은 더없이 우러르게 됩니다. 즉시 만들어 봉안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송종억이 아뢰기를,
"삼가 하교(下敎)를 받았는데, 우리나라 가례가 그러합니다. 즉시 새로 만들어 봉안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은인을 만드는 것은 이번 경우궁(景祐宮)의 전례(典禮) 때에 함께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예조 당상이 지금 이미 연석(筵席)에 나왔으니,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명릉(明陵)에 작헌례(酌獻禮)를 지낼 때의 헌관(獻官)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대축(大祝) 신철희(申喆熙)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정3품 이교석(李敎奭)을 경부 경무국장(警部警務局長)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9월 30일 양력

종2품 구종서(具鍾書)를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관(議官) 이봉래(李鳳來)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명(明) 나라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 천만리(千萬里)는 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로서 철기(鐵騎) 2만 명과 아들 천상(千祥)을 거느리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싸움을 하여 이긴 다음 평양(平壤)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습니다. 제독이 천만리와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勝勢)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습니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東萊)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습니다.
정유년(1597)에는 또 중사마(中司馬)로서 와서 일본 군사와 직산(稷山)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蔚山)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겼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아서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묘(宣廟)는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토지 30결을 주었으며, 숙묘(肅廟)는 대보단(大報壇)에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였고, 순묘(純廟)는 정해년(1827)에 신주(神主)를 부조(不祧)008)  하도록 하였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예우(禮遇)한 은전(恩典)이 극진하였다고 이를 만하지만 아직 역명(易名 : 賜諡)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영목(金永穆)이 시장(諡狀)을 장례원(掌禮院)에 올렸건만 방치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절혜(節惠)를 베풀어 풍속을 바로 세우고 공로를 장려하는 수단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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