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38권, 고종41년 1901년 6월

싸라리리 2025. 1. 31.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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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양력

【음력 신축년(辛丑年) 4월 15일】  경운당(慶運堂)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지냈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원본】 45책 41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13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경운당(慶運堂)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지냈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칙령(勅令) 제11호, 〈충청남도 관하 오천군 신설에 관한 안건〔忠淸南道管下鰲川郡新設件〕〉, 칙령 제12호, 〈육군 헌병 증액 편제에 관한 안건〔陸軍憲兵增額編制件〕〉, 칙령 제13호, 〈전보사 관제 중 개정에 관한 안건〔電報司官制中改正件〕〉 【2등사(二等司) 대구(大邱)를 1등사(一等司)로 하고, 총사(總司) 아래의 15인은 20인으로이다.】 , 칙령 제14호, 〈국내 우체 규칙 중 개정에 관한 안건〔國內郵遞規則中改正件〕〉, 칙령 제15호 〈철도국 관제 폐지에 관한 안건〔鐵道局官制廢止件〕〉을 모두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6월 2일 양력

제주목(濟州牧)의 유배 죄인들을 모두 다른 섬으로 옮겨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내장원 종목과장(內藏院種牧課長) 엄준원(嚴俊源)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6월 3일 양력

러시아 공사 파블로프〔巴禹路厚〕를 접견(接見)하였다. 국서(國書)를 봉정(奉呈)하였기 때문이다.

 

6월 4일 양력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윤태흥(尹泰興)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비서원 경(祕書院卿) 조중목(趙重穆)을 경기 관찰사에,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를 비서원 경에, 특진관 민영규(閔泳奎)를 장례원 경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6월 5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안핵사(按覈使)를 비록 이미 차하(差下)하였지만, 방금 순초 중대장(巡哨中隊長)이 원수부(元帥府)에 치보한 것을 보니, 제주(濟州)의 백성들이 아직도 무리로 모여 떠들썩하면서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건대 이 백성들은 필경 어쩔 수 없어서 그럴 것이다.
안핵사 박용원(朴用元)을 감하(減下)하고, 특진관(特進官) 황기연(黃耆淵)을 찰리사(察理使)로 차하하여 당일로 내려가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고질적인 폐단을 철저히 사찰하게 하고, 바로잡고 조처할 방도를 편의에 따라 강구하여 백성들을 안주시켜 조정에서 보살피고 돌보아주는 지극한 뜻을 보이도록 하고 그 실태를 제때에 등문(登聞)하게 하라."
하였다.

 

정2품 이정로(李正魯)를 태의원 경(太醫院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6월 6일 양력

의양군(義陽君) 이재각(李載覺)과 종2품 윤달영(尹達榮)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6월 7일 양력

법부 대신서리(法部大臣署理) 이재곤(李載崐)이 아뢰기를,
"삼가 조칙(詔勅)을 받았습니다. 제주목(濟州牧)에 있는 종신(終身) 유배 죄인 김윤식(金允植)은 지도군(智島郡) 지도(智島)로, 종신 유배 죄인 정병조(鄭丙朝)는 위도(蝟島)로, 10년 유배 죄인 김사찬(金思燦)은 임자도(荏子島)로, 종신 유배 죄인 서주보(徐周輔)는 돌산군(突山郡) 여도(呂島)로, 종신 유배 죄인 이태황(李台璜)은 사도(蛇島)로, 종신 유배 죄인 김경하(金經夏)는 녹도(鹿島)로, 10년 유배 죄인 이범주(李範疇)는 완도군(莞島郡) 신지도(薪智島)로, 10년 유배 죄인 한선회(韓善會)는 추자도(楸子島)로, 7년 유배 죄인 이용호(李容鎬)는 신지도로, 종신 유배 죄인 최형순(崔亨順)과 7년 유배 죄인 장윤선(張允善)은 모두 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로 이배(移配)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프랑스인 살타렐〔薩泰來 : Saltarel, P.M.〕  【쌀달앨】 에게 평안북도(平安北道) 창성군(昌城郡)의 금광 채굴권(金礦採掘權)을 허락하여 주었다.

 

6월 9일 양력

궁내부 내대신(宮內府內大臣)인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 육군 부장(陸軍副將) 심상훈(沈相薰), 이종건(李鍾健), 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규(閔泳奎), 중추원 의장(中樞院議長) 김가진(金嘉鎭)에게 표훈원 의정관(表勳院議定官)을 겸임하라고 하였다. 육군 부장(陸軍副將) 신기선(申箕善)을 법부 대신(法部大臣)에, 장례원 경 민영규를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 김석진(金奭鎭)을 장례원 경에, 함경북도 관찰사(咸鏡北道觀察使) 이근택(李根澤)을 경부 협판(警部協辦)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다.

 

6월 12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심상훈(沈相薰)을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경부 협판(警部協辦) 이근택(李根澤)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였다.

 

6월 13일 양력

회극문(會極門)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 각실(各室)의 영정을 공경히 맞이하고, 이어 배봉(陪奉)하여 진전(眞殿)에 나아가 봉안한 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6월 15일 양력

특진관(特進官) 윤용선(尹容善)을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칙유(勅諭)하기를,
"전날 마지못해 윤허한 것은 단지 경이 오랫동안 수고한 것을 생각하여 잠시 한가히 지내면서 몸 보양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이미 몇 달이 되었다.
눈에 뜨이는 것마다 간고(艱苦)한 형편이 하루하루 더 심해가니 경에 대한 나의 생각도 또한 하루가 급하다. 대체로 경이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한 마음은 편안히 쉬면서 깊이 생각하는 때에도 나에 대하여 속으로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래 위가 서로 믿는 데서는 응당 이러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벼슬을 주는 데 대하여 여러 말 하지 않더라도 필히 이해할 것이다. 사양하지 말고 당일로 나와 목마르게 기다리는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지금 제주 찰리사(濟州察理使)가 정부(政府)에 보고한 것을 보니, 그 괴수는 이미 붙잡았고 떼 지어 모였던 사람들도 모두 해산하였다고 하였다. 밤낮없이 불안하던 끝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백성들을〗 돌보고 무마시키는 방도는 오직 찰리사가 어떻게 바로잡고 조처하는가에 달려있다. 끝까지 효유(曉諭)하여 모두 안도하게 하며 잡은 죄인은 우선 사핵하되 위협에 의해 추종한 자는 다스리지 말고,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억울하게 걸리는 걱정이 없게 함으로써 널리 용서하여 주는 나라의 은혜를 보여 주어라. 이미 반역한 진상이 없어졌는데도 군사를 파병하여 걱정거리가 없는 곳에 많은 인원을 주둔시킬 필요는 없으니 원수부(元帥府)에서 적당히 철수하게 하라.
대체로 소란이 생기는 것은 반드시 백성들의 마음을 거슬린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제멋대로 탐욕을 부리고 학정(虐政)을 한 것은 예사로이 처리할 수 없는 만큼 하나같이 엄히 조사하여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진(金奭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비서원 경(祕書院卿) 이근수(李根秀)를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 3등에 서임하였으며, 판리공사(辦理公使) 민형식(閔衡植)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에게 장례원 경을 겸임하게 하고, 원수부 검사국 총장(元帥府檢査局總長) 민영철(閔泳喆)에게 비서원 경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6월 16일 양력

황태자가 올린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작년에는 우리 부황 폐하(父皇陛下)의 성수(聖壽)가 50세를 앞둔 경사로운 해였고, 올해는 우리 부황 폐하의 성수가 50세가 된 경사로운 해입니다. 연년이 경사가 거듭 이르면 해마다 응당 전례(典禮)를 행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의 금석(金石)같이 바꿀 수 없는 규례입니다. 소자(小子)의 간절한 심정으로 해마다 연이어 상소를 올려 무려 수 천 마디나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이 소자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일치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단지 올해 설날에 치사(致詞)를 올리고 진하 의식만 거행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연회를 베풀어 큰 경사를 경축함으로써 자식 된 정리와 예절을 조금이나마 표시하는 데 충분한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하늘이 돕고 보살펴 많은 복을 내리고 기나긴 운수를 마련하여 줌으로써 억만년 무궁한 경사를 열어주는 것은 반드시 성인이 임금 자리에 올라 많은 일을 하여 천하에 공로와 덕을 크게 떨친 다음에야 있는 일로서 지나간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이는 세상에 만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부황 폐하께서 중도에 나라를 일으켜 세울 운수를 타고 나서 큰 위업을 세운 결과 높고 성대한 업적이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셨으므로, 참으로 왕조를 세우고 물려준 임금들보다 멀리 뛰어나며, 삼대(三代) 이후를 소급하여 상고해 보아도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이렇게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솟는 해와 같고 뜨는 달과 같으며 강물처럼 풍만하여 기이한 상서(祥瑞)와 여러 가지 복이 마구 밀려드니 신하들의 축하하는 간절한 기쁨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일 연회를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면 역시 축하하는 기쁜 심정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연회를 베풀고 노래 불러 표현하고 춤을 추며 표시하려는 것입니다. 높고 낮은 신하들에게 풍성한 음식을 배불리 먹이고 많은 술로 취하게 하여 북소리와 관현악(管絃樂)에 맞추어 기쁨의 춤을 추게 하고, 천하에 환성이 차 넘쳐 아래 위에 이르게 함으로써 위로는 하늘에 있는 조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고, 아래로는 온 나라 모든 백성들을 즐겁게 하여 화합을 불러 오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회를 차리는 예식이 시작된 까닭이고 그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서 귀중하게 된 이유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일찍이 경사를 만나고도 예식을 폐지한 적은 없었는데 가까이로 우리 집안의 의식에서도 역력히 고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황제 폐하는 비록 굳이 사양하시려고 하지만 떳떳한 전례는 어길 수 없고 하늘의 의사도 어길 수 없으며 신하와 백성들의 소원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마다 경사가 있어도 아직 경축하지 못하였는데, 올해의 성절(聖節)은 경사로운 해 중에서도 경사로운 명절로써 경사가 밀려드는 것 치고 올해 같은 적이 없어,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소자의 정성이 그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는 데 있으니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황제 폐하는 효성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사가 대단하여 모든 만물이 각각 그 본성을 따르지 않음이 없도록 하여 하였는데, 소자의 오늘의 지극한 소원도 응당 체찰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여러 해 간절히 바라던 나머지 그 전의 청을 또다시 말씀드리니 삼가 바라건대, 황제 폐하는 널리 재삼 생각해서 부디 겸손한 마음을 억지로라도 돌려 생일날에 내외 진연(內外進宴)의 의식을 차리도록 빨리 명하여 전례에 흠결이 없도록 여러 사람들의 소원을 풀어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네가 해마다 간절히 청한 지가 이미 여러 번이 되지만, 짐이 타이른 것도 역시 여러 차례이다. 짐의 의사를 순순히 따라서 우선 그만두리라고 여겼는데, 어찌하여 또 이렇게 거듭 제기하는가? 네가 이같이 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고 짐도 도모하는 바가 아니다.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는 편안하고 한가한 때에도 지나친 일인데, 하물며 이러한 때에 의의(擬議)할 겨를이 있겠는가? 여러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다시는 이 문제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황태자가 올린 두 번째 상소에,
"삼가 아룁니다. 변변치 못한 소자(小子)가 성의가 부족해서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했고, 문장이 형편없이 보잘것없어서 의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습니다. 해마다 여러 번 간절히 청하던 끝에 또다시 번거로움을 무릅썼지만 비답에서는 줄곧 허락하지 않으니, 어찌 한갓 소자만이 기가 막혀 서성거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할 뿐이겠습니까?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끝없이 실망하고 억울해 하는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경사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은 공로와 덕망, 상서로운 반응과 좋은 징조로써 그 명칭은 같지 않으나 경사치고 임금의 장수를 경축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하늘과 조종(祖宗)이 어진 역대의 임금들 중 국가와 자손을 위한 만대의 위업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을 돌보고 도와주기 위하여 반드시 오랜 운수와 복록과 장수를 내려주며 신하들이 위에 바라는 것도 역시 이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열성조(列聖祖)는 성수(聖壽)의 전례(典禮)를 더욱 소중히 여겨 혹 이런 경우를 만나면 경축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는 올해 성수가 《주역》의 ‘대연(大衍)’의 숫자에 부합되니 천만년 무궁한 나이는 사실 올해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올해의 경사는 경사 중에서도 가장 큰 경사입니다. 이처럼 천년 동안에 보기 드물고 만년 장수의 길을 시작하는 경사로운 해를 당하여 열성조가 서로 이어가며 이미 시행해 온 의전을 꼭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황(父皇) 폐하의 검박하고 겸양한 덕은 참으로 칭송하고 찬탄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거북점도 따르고 시초점도 따르며 높고 낮은 관리들도 따르고 일반 백성들도 따라야 하니, 이것을 일치한 것〔大同〕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임금도 자기 마음대로 독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소자가 청하는 것은 모두의 일치된 소원으로 부황 폐하도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며, 소자도 감히 명령을 순순히 따른다는 핑계 아래 번거롭게 굴기를 꺼려하면서 그만 그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백성들이 장차 ‘소자가 어째서 빨리 청하여 황제의 마음을 돌려 세우지 않았는가?’라고 한다면, 소자는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자의 안타까운 사사로운 마음은 또한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번거롭게 구는 것을 무릅쓰고 절박한 마음을 말씀드리니 삼가 원하건대 부황 폐하는 소자의 청을 받아들여 속히 유음(兪音)을 내림으로써 위로는 하늘의 경사에 대답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을 따르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전후하여 내린 비답이 어찌 가식으로 겸손한 데서 나온 것이겠는가? 그런데도 이런 장황한 상소를 다시 올려 굳이 청하면서 그치지 않을 듯이 하니 너무나 이해할 수 없다. 조종(祖宗)의 규례는 곧 3대 때의 예절로써 시행해야 할 때도 있고 꼭 시행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으니 이것도 역시 변통하는 원칙이다. 짐이 그 성의를 가상히 여기지 않는 것이 아니며 아뢴 말도 혹 그럴 수 있지만, 시기로 말하면 적당한 때라고 할 수 없다. 계속 간절한 말로 청하여 번거롭게 대답하게 한다면 그렇게 양지(養志)하는 도리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그대는 이해하고 다시 제기하지 말라."
하였다.

 

의정 대신(議政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의정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성근(金聲根), 소경(少卿) 박제빈(朴齊斌), 겸장례(兼掌禮) 김영직(金永直)이다.】  청대(請對)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무슨 일로 청대하였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동궁 전하(東宮殿下)는 황제 폐하의 성수(聖壽)가 50세가 되는 생신날이 몇 달밖에 남지 않아 진연(進宴)할 것을 청하면서 상소를 올려 호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우리 왕조에 드문 경사로서 온 나라의 억만 백성들이 사랑을 받고 오래 사는 강토 안에서 기쁨에 겨워 고무(鼓舞)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동궁 전하는 뛰어난 효성과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성이 차고 넘쳐 원래 그만둘 수 없는 심정이 있으니 능히 폐하를 감동시킬 만합니다. 폐하의 지극히 인자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 차마 기뻐하면서 따르지 않겠습니까? 위로는 선대의 훌륭한 예법을 따라서 하지 않을 수 없고, 아래로는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동궁 전하의 효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신들의 간절한 말과 바라는 정성에 대해서는 감히 곱씹어 번거롭게 굴 수 없습니다마는 삼가 바라건대, 폐하가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면 필경 신들이 말을 다하지 않아도 허락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기는 빨리 마음을 돌려 쾌히 유음(兪音)을 내림으로써 동궁 전하의 효성을 빛내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짐의 진정은 이미 상소의 비답에서 다 말하였으니, 경들도 응당 보았을 것이다. 지금의 백성들과 나라의 형편에는 온갖 걱정거리가 있으니 어찌 풍성한 연회를 논의할 때이겠는가? 절대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동궁이 봉장(封章)을 올릴 때 신들은 그 훌륭한 일을 보았습니다만, 동궁의 간절한 효성은 말마디마다 나타났으므로 신들은 더없이 칭송하였습니다. 빨리 유음을 내린 다음에야 폐하가 속으로 기뻐하는 본의가 드러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의 지극한 성의를 짐이라고 왜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이런 때를 즈음해서는 속으로 사실 부끄러운 점이 있으므로 들어줄 수 없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아까 동궁을 입대(入對)할 때, 이제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서 청하겠다는 간절한 지취를 듣고서 신들은 접견을 요구하여 극력 간청하겠다는 의사를 직접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폐하 앞에서도 허락을 받지 못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우며 억울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의 효심(孝心)으로 반드시 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것이다."
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백관(白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자가 이번에 간절한 상소를 올린 것도 이미 두 번씩이나 되고, 거듭 아뢰는 말로 애타는 심정을 털어놓으면서 감히 숨기지 않았건만, 폐하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보잘것없는 정성이 폐하에게 이르지 못하였으니, 소자는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하늘이 부여하는 것은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으로서도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폐하는 요(堯)와 순(舜)을 능가하는 공로가 있는 만큼 하늘이 보답하는 것도 응당 창대(昌大)하고 유구(悠久)해야 하며, 천년만년 내려갈 다함없는 복록과 장수에 대하여 부황 폐하는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올해의 경사는 부황 폐하가 모두 받아서 누려야 할 것입니다. 나라에서 응당 시행해야 할 떳떳한 전례와 신하와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지극한 소원도 사양하지 말아야 할 것들입니다.
삼대 때에는 주(周) 나라의 예악(禮樂)이 가장 빛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장수를 바라는 연향(燕饗)의 예식은 더욱 한껏 갖추어져 있었는데, 《모시(毛詩)》 〈행위장(行葦章)〉에서, ‘자리를 깔고 연회를 벌렸네.〔肆筵設席〕’, 〈기취장(旣醉章)〉에서, ‘음식 그릇이 아름다웠네〔籩豆靜嘉〕’, 〈빈풍장(豳風章)〉에서, ‘대청에 올라서 술잔을 올렸네〔蹄彼公堂,稱彼兕觥〕’라고 한 것들이 이것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오래 살기를 송도(頌禱)하는 것은 모두 미래의 복이 장래에 미치기를 바라는 것으로 임금이 사양하면서 받지 않은 적이라곤 없었습니다.
올해의 예식은 우리 부황 폐하가 이미 누리고 있는 복록과 장수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장래에 산울림이 메아리치고 그림자가 몸에 따라다니듯이 반드시 오게 될 복록과 장수를 축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전에는 없던 예식입니다. 그러니 신하로서 이렇게 맞이한 경사를 크게 축하하고 무궁한 복록과 장수를 축원하려는 마음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소자가 밤낮 조심하면서 은혜에 보답하려는 간절한 마음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많은 신하와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소원은 아무도 막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백관을 거느리고 또 이렇게 청하면서 기어이 허락을 받고 말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부황 폐하는 굽어 살펴 빨리 유음(兪音)을 내림으로써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부합되게 하기를 천만번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사가 있는 이상 축하하지 않더라도 경사는 원래 그대로 있는 법이며, 지금은 할 때가 아니니 또한 어찌 할만한 때가 없겠는가? 이것이 짐이 너의 청을 여러 번 윤허하지 않은 까닭이다. 반드시 마음속으로 이해하여 주는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이처럼 크게 벌이는 데 이르고 더욱 그만둘 줄 모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너의 효성은 매우 가상스럽지만 짐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요청을 윤허하지 않으니, 너는 그리 알라."
하였다.

 

종1품 서정순(徐正淳)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6월 17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 안의 내창합(內閶闔)의 제도에 온당치 않은 점이 있으니 중건도감(重建都監)에서 적당히 개수(改修)하도록 분부(分付)하라."
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정청(庭請)하여 두 번째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이 소자(小子)가 근년에 여러 번 간청한 것은 모두 올해의 경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난 때에는 대뜸 윤허하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기를 아직 내년이 있으니 성의를 다하여 간청하면 아마도 성심(聖心)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성절(聖節)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정황이 급박하기 때문에 말이 절절했고, 초조한 나머지 조정의 모든 관료들과 함께 일치한 말로 청하였건만, 역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소자는 이에 당황스러워 실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삼가 생각건대 이 소자와 조정의 모든 관리들의 말을 폐하가 막아 버리려는 데 대하여 누가 감히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마는, 소자와 조정의 신하들이 믿고서 거듭 아뢰는 것은 우리 부황 폐하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조종(祖宗)의 법전(法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황 폐하가 만일 겸양하여 겨를이 없으면 누가 감히 잘못이라고 하겠습니까마는 법전이란 만세토록 고칠 수 없는 떳떳한 전장(典章)으로써 다만 전대를 그대로 따라야 할 뿐 아니라 후대에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응당 시행하고 결코 빠지게 해서는 안 될 것으로 하여금 한 번이라도 시행되지 않게 한다면 앞으로 구실로 삼아 후대들이 보나마나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조종의 전헌(典憲)은 그만 허물어지게 될 것입니다. 부황 폐하가 혹시 여기에 생각을 돌렸다면 틀림없이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고 이 소자가 거듭 아뢰기를 기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항(閭巷)의 보통 사람들도 모두 자기 부모를 위해 장수를 경축하고 연회를 차리고 친척들과 벗들을 청하여 즐기며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항간에서도 이러한데 더구나 나라의 큰 경사를 끝내 경축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 소자가 어찌 감히 아들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하며, 장차 어떻게 백관과 만 백성들에게 사죄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부황 폐하는 굽어 보살피고 이 소자의 청을 윤허하여 빨리 명을 내리기를 천만번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짐이 어찌 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어찌 조종의 전헌을 생각지 않겠는가마는 꼭 그렇게 하지 않을 사정도 있다. 조정에 있는 노숙한 신하들의 소견으로는 응당 말없이 이해해야 할 것인데, 또다시 이렇게 번거롭게 구니 참으로 할 일이 못 된다. 그리고 날씨가 한창 더운 때에 대궐 뜰에 서있는 것이 민망스러우니 속히 그치도록 하여 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 아뢰기를,
"삼가 아룁니다. 소자(小子)가 진소(陳疏)와 상주(上奏)로 이미 여러 번 번거롭게 하였으나, 정성이 다다르지 못하여 유음(兪音)을 아직도 내리지 않으니 황송하여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자가 자식 된 도리를 언제 한 번 조금이나마 다하였겠습니까마는 세월이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정성은 날이 갈수록 더하고 부모가 장수함을 아는 기쁨은 해가 갈수록 더합니다. 부모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오직 폐하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아! 우리 부황 폐하의 높고 훌륭한 덕은 이 소자가 감히 찬양할 바가 아니지만, 이전 시대를 두루 보건대 영특하고 명철한 임금들이 사책(史策)에 꼬리를 물고 나오기는 하나 체통을 이어 선대를 훌륭하게 계승하는 임금으로서 왕조를 세워 후대에 물려줄 터전을 굳건히 한 분은 오직 부황 폐하뿐 입니다. 하늘이 성덕(聖德)과 귀중한 나이를 보살펴 주는 것이 더욱 더하여 올해의 경사에 이르렀으니 이야말로 우리 왕조에 드문 일입니다.
설사 달마다 풍성한 연회를 차려 올리고 날마다 만세를 부르더라도 보잘 것 없는 정성을 펴기에는 부족할 것인데, 의례상 응당 해야 할 의전마저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이 소자의 답답하고 실망하는 마음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밤낮으로 고대하는 것은 성절(聖節)에나마 축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시하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이 명절도 박두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경사가 있으면 기쁨을 표시하는 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심정입니다. 보통 사람도 연회를 차려 대접하는데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이 소자로서 이 해 이 날의 경사를 만나고도 나라의 빛나는 영전(令典)을 거행하지 못하여 감히 빠뜨릴 수 없는 일을 빠뜨리고 감히 그르칠 수 없는 일을 그르친다면 자식 된 도리로 보아 어떠하고, 온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하며, 또한 나라의 규례로 보아 어떠하겠습니까?
삼가 보건대 부황 폐하는 하나의 정령(政令)과 하나의 조치(措置)에도 언제나 선대의 법을 따랐습니다. 이번의 성대한 의식은 바로 우리 조종(祖宗)이 이미 시행하여 오던 예법이니 또한 어찌 폐하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더욱 격해져서 황송함을 무릅쓰고 거듭 하소연하니 삼가 바라건대, 부황 폐하는 깊이 재삼 생각하고 억지로라도 겸손한 마음을 돌려 진연(進宴)의 의식을 빨리 허락함으로써 더없는 소원을 풀어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연회를 차리는 것은 한가한 놀음이다. 지금 걱정거리가 차서 넘치고 재물이 더욱 군색하며 백성들이 갈수록 곤궁에 빠져 짐이 밤낮으로 애쓰고 있는 형편에서 무슨 겨를에 이런 것까지 논의하겠는가? 하지만 네가 줄곧 극력 간청하여 마지않으니 착실한 정성에 대해서 고려할 것이다. 그리고 온 조정이 이 일을 이런 때에 급한 것으로 여기는데 대해서는 심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여러 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부득이 마지못해 허락하니 제반 의식 물건을 되도록 간단히 하여 비용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할 것이다. 너는 그리 알도록 해라."
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특진관 민영휘(閔泳徽),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김성근(金聲根), 이지용(李址鎔)을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에 삼으라."
하였다.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이헌경(李軒卿)과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 박제빈(朴齊斌)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종2품 홍승헌(洪承憲)을 경효전 제조에, 특진관 송종억(宋鍾億)을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특진관 민영휘(閔泳徽) 에게 교방사 제조(兼任敎坊司提調)를,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윤정구(尹定求)에게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를 겸임하도록 하였으며,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한영(李漢英)에게 대신(大臣)의 사무를 서리(署理)하라고 명하고, 의정부 찬정 이지용(李址鎔)에게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의 사무를 임시로 서리하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양력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 홍승헌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특진관 박제빈(朴齊斌)을 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권재형(權在衡)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안동부(安東府)에 있는 태사묘(太師廟)의 위차(位次)에 대한 일로 매번 김문(金門)에서 먼저 싸움의 사단을 일으켜 걸핏하면 상소를 올리는 일을 당하고 하는 통에 부득이 맞서서 해명해온 지가 이제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숙종 기사년(1689)에 예조에서 회계(回啓)를 올리기를, 7, 8백년 동안 지내오던 제사를 선뜻 고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우니 이제부터는 제향(祭享)할 때 권태사(權太師)부터 먼저 술잔을 올리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시행하자고 하였는데, 영조 정해년(1767)에 3명의 태사에게 동시에 전헌(奠獻)하도록 특별히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실로 분쟁을 없애기 위한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또 정조 때에 전교하기를, ‘전전번 임술년(1742)과 기사년(1749)에 김씨 가문과 권씨 가문에서 서로 상소를 올려 해명한 데 대하여 각각 처분이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조(先朝) 정해년(1767)에 또 이 문제로 김씨 가문이 상소를 올려 하소연하자, 특명으로 세 신주에 전헌을 동시에 하되 두 가문 사람들은 명령을 받들어 준수하여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어 이후에는 이 문제로 해명하는 글을 감히 올리지 말라는 내용으로 일체 엄하게 신칙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신들은 오직 두 성조(聖祖)의 처분을 준수했을 뿐인데, 뜻밖에도 김씨 가문에서 또 읍지(邑誌)의 하찮은 문제 때문에 선왕(先王)의 교령(敎令)을 어기고 대뜸 이렇게 상소를 올리는 행동을 하였으니 신들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그 소본(疏本)을 보았더니 장황하게 벌여놓고 복선(伏線)이 매우 많아서 뒷날에 또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모르겠기에 결코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김씨의 상소문은 글귀마다 함축되고 마디마다 뒤집어 놓은 것이어서 그것을 모두 해명하자면 복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 태사에게 술잔을 붓는 데서 이미 감히 선후의 차례를 둘 수 없으면, 오늘날 준봉(遵奉)하는 데서는 성주(城主)건 고을 백성이건 분별할 필요가 없고, 공덕(功德)이 많고 적은 것을 따질 필요가 없으며, 벼슬이 높고 낮은 것을 헤아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읍지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아직 간행되지 않은 만큼 다시 논할 것이 없고 설사 출간 배포했더라도 두 가문 사이에 협의하여 타당하게 처리할 방도가 없다고 걱정할 게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주스럽게 폐하에게 하소하며 어떻게 그 글을 가져다 순서를 고치려는 것입니까? 권씨 가문을 억지로 눌러놓으려는 꿍꿍이로부터 지레 서두르는 잘못과 외람되게 행동하는 송구스러움을 스스로 모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의 말은 그저 해명하려는 것으로 순전히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皇上)은 굽어 살피고 신의 상소문을 해사(該司)에 내려 보냄으로써 두 가문의 시비가 명료해지고 품처(稟處)하는 데서 잘못이 없게 한다면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 내용을 장례원(掌禮院)에서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6월 19일 양력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 구영조(具永祖)의 보고를 받아 보니, ‘피고 강찬(姜籫)의 안건을 심리하니, 최영무(崔永武) 등의 청원으로 인하여 관가의 묵인 하에 돈을 주조하는 일을 주선하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습니다. 대관(大官)으로서 잡된 무리들과 체결하여 불법적으로 관가의 묵인 하에 돈을 주조하는 일을 빚어냈으니 엄한 감율(勘聿)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대명률(大明律)》 〈사위편(詐僞編)〉에 사위(詐僞)로 임금의 명령을 시행하지 않은 자로서 추종한 자에게 적용하는 율문(律文)에 따라 태 100대를 쳐서 징역 3년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해당 범인 강찬은 원래 의율(擬律)대로 분간하여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유배로 바꾸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0일 양력

경효전(景孝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겸 별다례(茶禮)를 지냈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 몹시 가물고 무더워서 보리가 말라들고 논판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므로 백성들의 일이 걱정되어 좋은 옷과 음식도 마음이 편안치 않다. 더구나 답답한 것은 옥중에 노약자와 병자들 및 정리로 보아 돌봐주어야 할 자들이 혹시 오래 갇혀 있으면서 신원(伸寃)을 못하고 이 때문에 화기가 손상되는 것이다.
몹시 춥거나 무더운 때에 소결(疏決)하는 형정(刑政)은 원래 국법에 나와 있는데, 더구나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므로 법부에서 상세하게 심리하여 석방할 사람들은 석방하고 감등(減等)해 줄 자들은 감해줌으로써 조정의 은혜를 보여주며, 또한 혹시라도 형벌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6월 21일 양력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수릉(綏陵)의 기신제(忌辰祭)와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6월 22일 양력

종1품 민영규(閔泳奎)를 양지아문 총재관(量地衙門總裁官)에 삼았다.

 

6월 23일 양력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추숭(追崇)한 일곱 능의 비석을 개수(改竪)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미 명을 내렸었다. 비각, 정자각(丁字閣), 재실 등 여러 곳의 수리도 똑같이 거행하도록 추숭의궤도감(追崇儀軌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6월 25일 양력

삼각산(三角山), 목멱산(木覓山), 한강(漢江)에 첫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규벽(奎璧)005)  을 이미 올렸으나 하늘의 감응은 막연하다. 백성들의 일을 생각하면 하루가 급하니 두 번째 기우제는 복일(卜日)하지 말고 지내되 내일 수향(受香)하고 헌관(獻官) 이하 여러 집사(執事)를 각별히 선택해서 임명하라."
하였다.

 

종1품 이종건(李鍾健)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다.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병석(閔丙奭)이 아뢰기를,
"진주군(晋州郡)에서 갑오년(1894)에 천포결(川浦結) 500결(結)의 조세를 중복 감면받은 문제에 대하여 본 부의 해당 전후 국장과 과장들이 이전에 논경(論警)을 상주하여 삼가 받은 판부(判付)의 내용에는 중복 보고한 해당 군수에 대해서도 각별히 조사하여 징계 처분하라고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법부에서 징계 처분하게 하였고, 신의 부(府)에서 경상남도 관찰사(慶尙南道觀察使)에게 신칙하여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관찰사 김영덕(金永悳)의 조사 보고를 보니, ‘천포결 500결은 전부터 감영에서 기한에 구애됨이 없이 계사년(1893)에 토지대장에 넣어 조세를 받은 결과 민심이 소란하게 되자, 그 해의 재결(災結) 중에서 500결의 조세를 감면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기한 전에 조세를 받았고, 무슨 이유로 재결 중에서 떼어내 조세를 감면했던 간에, 그 면적을 경자년(1900)부터 규정대로 총면적으로 올리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면적은 해당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에 의하여 기축년(1889)부터 계사년까지 5년을 기한으로 조세를 면제한 것인데, 계사년에 명령하여 조세를 받게 하였으니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치고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전정(田政)의 법규는 더없이 신중한 것인데 기한도 차기 전에 조세를 거둠으로써 민심이 들끓게 되었고, 결국 재결 중에서 떼어내어 옮겨다 조세를 감해 주었습니다. 전부(田賦)를 이렇게 농간질한 것을 법으로 따지면 그대로 덮어둘 수 없습니다. 당시의 경상 감사 이용직(李容直)을 법부에서 붙잡아다 징계 처분하게 하며 기한 전에 미리 거둔 것과 재결 중에서 불법으로 감해준 것은 며칠 안으로 독촉하여 받아들이고, 갑오년(1894) 이후 7년 동안 은닉한 것도 모두 사핵(査覈)하여 징봉(徵捧)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상남도 전 관찰사(慶尙南道前觀察使) 조시영(曺始永)은 해도(該道) 각군(各郡)의 공전(公錢)을 무려 34만여 냥(兩)을 유용하고는 기한을 한 번 두 번 끌면서 제때에 물어넣지 않았습니다. 법의 기강으로 따져보면 통탄할 노릇인 데다가 더구나 숨바꼭질을 하면서 숨기고 회피하기만 일삼으니 더없이 해괴합니다.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잠시도 늦출 수 없으니 법부에서 나수(拿囚)하고 기한을 정하여 독촉하여 받아냄으로써 공납(公納)을 청산하며 법에 따라 징계 처분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6월 26일 양력

진전(眞殿)에 나아가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안(移安)하는 데에 따른 고유 별다례(告由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대안문(大安門)안에 나아가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와 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의 조련을 행하였다.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소견(召見)하였다. 영희전(永禧殿)의 어진(御眞)을 이안(移安)할 때 봉심(奉審)한 뒤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이어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 【민영휘(閔泳徽), 김성근(金聲根), 이지용(李址鎔)이다.】 과 전선사 제조(典膳司提調)  【윤정구(尹定求)】 를 소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회동(會同)을 언제 하겠는가?"
하였다. 민영휘가 아뢰기를,
"연석에서 물러간 후 즉시 회동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아뢰기를,
"내외 진연(內外進宴) 장소를 어디에 마련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당 조칙(詔勅)을 내리겠다."
하였다. 이지용이 아뢰기를,
"중화전(中和殿)에 보계(補階)를 설치하는 일은 영선사(營繕司)에서 거행하며, 월대(月臺)에 평보계(平補階)를 설치하면 손님을 맞을 만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궁(東宮)에게 진달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영휘가 아뢰기를,
"진연 의절(儀節)을 이습(肄習)하는 장소는 어디로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례원(掌禮院)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영휘가 아뢰기를,
"회동은 장례원에서 하고 제반 의절은 주본(奏本)으로 품정(稟定)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절 중에서 주본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만 들여와 아뢰고, 그 밖의 여러 일들은 동궁에게 진달하여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어 조령을 내리기를,
"외연 장소는 중화전으로 하고, 내연 장소는 함녕전(咸寧殿)으로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이번 진연은 동궁이 간절히 청하여 마지않고 성의가 대단한 것을 기특하게 여겨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지만, 제반 의절을 되도록 간소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형편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는 짐의 지극한 뜻을 체현하도록 하라."
하였다.

 

포달(布達) 제75호, 〈궁내부 관제 중 상의사 제조 1인을 칙임관 증치하는 일에 관한 안건〔宮內府官制中尙衣司提調一人 勅任增置件〕〉을          【연향(宴享), 관례, 가례(嘉禮)시 차출한다.】         재가(裁可)하여 반포(頒布)하였다.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이지용(李址鎔)을 상의사 제조(尙衣司提調)에 겸임시켰다.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의 교정 당상(校正堂上)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였다.
국조어첩 서사관(國朝御牒書寫官) 이재곤(李載崐), 찬수감인 당상(籫修監印堂上) 이면상(李冕相), 낭청(郎廳) 이세응(李世應), 이병민(李秉民), 별감(別監) 이강하(李康夏), 홍순찬(洪淳瓚)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6월 27일 양력

순초(巡哨)를 위해 불러 올린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와 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의 장수와 군사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고 중대장 홍순명(洪淳明)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용산강(龍山江)과 저자도(楮子島)에 두 번째 우제(雩祭)를 지냈다.

 

특진관 조병세(趙秉世)를 봉상사 도제조(奉常司都提調)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하였으며,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을 태의원 도제조(太醫院都提調)에 겸임시켰다.

 

6월 28일 양력

경운당(慶運堂)에 나아가 명헌 태후(明憲太后)에게 진찬(進饌)을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임금은 익선관(翼善冠)에 황포(黃袍) 차림, 황태자는 익선관에 곤룡포(袞龍袍) 차림, 황태자비는 적의(翟衣)에 머리꾸밈 차림을 갖추고 배위(拜位)에 들어갔다. 상의(尙儀)가 명헌 태후에게 적의를 갖추고 임시처소에서 나올 것을 청하고 앞에서 인도하여 보좌에 올라갔는데, 이 때 음악이 연주되었다. 임금과 황태자가 사배(四拜)의 예를 올리고, 군부인(郡夫人), 좌우 명부(左右命婦), 종친(宗親), 척신(戚臣), 진찬소 당상(進饌所堂上)과 낭관(郎官)이 사배의 예를 마치자 음악이 멎었다. 찬안(饌案)과 시접(匙楪)을 올릴 때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여집사(女執事)가 임금과 황태자에게, 여관(女官)은 황태자비에게 꽃을 올리고, 전식(典飾)은 군부인 이하에게 꽃을 나누어 주자 음악이 멎었다. 임금이 무릎을 꿇고 첫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음악이 연주되고, 안주를 몇 가지 올리자 음악이 멎었으며, 황태자가 무릎을 꿇고 두 번째 술잔을 올릴 때 음악이 연주되고, 안주를 몇 가지 올리자 음악이 멎었으며, 황태자비가 무릎을 꿇고 세 번째 술잔을 올리고 군부인이 무릎을 꿇고 네 번째 술잔을 올리자 그 때 음악이 연주되었으며, 치사(致詞)를 대신 올리는 여관이 앞에 나서서 그것을 읽은 다음 좌우 명부, 종친 반수(班首), 척신 반수가 차례로 진작(進爵)하자 음악이 멎었다. 여집사가 임금과 황태자를, 여관은 황태자비를 인도하여 자리로 가고, 전빈은 군부인, 좌우 명부, 종친·척신, 진찬소의 당상과 낭관을 인도하여 각각 제자리로 갈 때 음악이 연주되고, 찬안을 올리고 여집사가 술을 따르자 명헌 태후가 그 술잔을 받아서 상식(尙食)에게 건네주었으며, 상식은 무릎을 꿇고 임금에게 올린 다음 이어 안주 몇 가지를 올렸으며, 여집사가 황태자와 황태자비에게도 위와 같은 의절대로 진작하자 음악이 멎었다. 전찬(典饌)이 군부인 이하에게 술을 돌릴 때 음악이 연주되고, 상식이 명헌 태후의 찬안을 물리자 음악이 멎었다.】


【원본】 45책 41권 42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1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의생활-예복(禮服) / 식생활-주부식(主副食) / 왕실-국왕(國王) / 예술-음악(音樂)

 

6월 29일 양력

법부(法部)에서 아뢰기를,
"올해 2월 19일자 사전 조칙(赦典詔勅)을 삼가 받들어 보았습니다. 평리원(平理院)과 각 재판소 관하의 죄인 중 육범(六犯) 외에 방송(放送)해 주어야 할 부류 신병균(申炳均) 등 26명과 감등(減等)해 주어야 할 부류 박영준(朴英俊) 등 28명을 개록(開錄)하여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이승순(李承純)을 시종원 경(侍從院卿)에, 특진관 김석진(金奭鎭)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임용하고 모두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정2품 이동응(李東膺)을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6월 30일 양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진(金奭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2등에 서임하였으며 법부 대신(法部大臣) 신기선(申箕善)을 장례원 경(掌禮院卿)에 겸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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