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5일 양력
【음력 신해년(辛亥年) 6월 초5일】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원본】 6책 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66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왕실-행행(行幸)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왕세자(王世子)가 학습원(學習院) 중등과(中等科) 제2학년 제1학기 시험에서 다섯 번째로 우등을 하여 상장을 받았다. 천황 폐하(天皇陛下)가 7종의 교어(交魚) 1절(折)을 하사하였다.
경성 도서관(京城圖書館)에서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 【농상업공업에서부터 산림, 광업, 어업, 통화, 금융, 교통, 운수에 이르기까지 각지(各地)의 사정을 조사하여 상·중·하 모두 30책(冊)으로 편집하였다.】 10부(部)를 올렸다.
영국인(英國人) 신학 박사(神學博士) 게일〔奇一 : Gale, James Scarth〕 【게일】 이 《한영 사전(韓英辭典)》 1부(部)를 진헌(進獻)하자 가납(嘉納)하고 나서 은제 화병(花甁) 1개(箇)를 내렸다.
7월 10일 양력
왕세자(王世子)에게 전보로 칙유(勅諭)하기를,
"시험 성적 발표에서 동급생 44인 중에 5등을 차지하였다는 전보를 어제 받았다. 네가 본토어(本土語)를 쓰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도 비교적 어린데도 성적이 이처럼 우수하니 매우 가상하다. 앞으로 더욱더 힘써 노력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7월 13일 양력
경성 도서관(京城圖書館)에 기부금 150원(圓)을 내렸다. 발전을 위해서이다.
7월 15일 양력
자작(子爵) 조중응(趙重應)에게 금(金) 500원(圓)을 특별히 내렸다. 그의 부친을 면례(緬禮) 할 때 장례 비용을 위해서이다.
7월 20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덕수궁(德壽宮)의 즉조당(卽祚堂)에서 인시(寅時)에 귀비(貴妃) 엄씨(嚴氏)가 훙(薨)하였다.
미시(未時)에 목욕을 시키고 신시(申時)에 습(襲)을 행하였다.
빈궁(殯宮)은 흥덕전(興德殿)으로 하고, 혼궁(魂宮)은 영복당(永福堂)으로 하며, 처음 명정(銘旌)을 쓰는 곳은 석어당(昔御堂)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자작(子爵) 이완용(李完鎔)·엄준원(嚴俊源)을 수원원(守園員)에 차하(差下)하고, 후작(侯爵) 이재완(李載完), 후작 이재각(李載覺) 후작, 이해승(李海昇), 후작 이해창(李海昌), 후작 박영효(朴泳孝),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 자작(子爵) 이기용(李埼鎔), 자작 이완용(李完鎔), 남작(男爵) 이재극(李載克)·윤용구(尹用求)·조정구(趙鼎九)·이준용(李埈鎔)·이달용(李達鎔)·이규용(李逵鎔)·이해충(李海忠)·이재윤(李載允)·이재구(李載九)·이재구(李載龜)·이재덕(李載德)·조한국(趙漢國), 남작(男爵) 조동윤(趙東潤)·민영찬(閔泳瓚)·조명구(趙命九)·조정식(趙鼎植)·민준식(閔俊植)·민홍식(閔弘植)·엄준원(嚴俊源)·엄주익(嚴柱益)·엄주승(嚴柱承)·엄충원(嚴忠源)·박창선(朴昌善)·이용복(李容復)·김영진(金永桭)·엄건영(嚴健永)·엄하영(嚴夏永)·엄두영(嚴斗永)·김택진(金宅鎭)·이명구(李明九)·김용진(金容鎭)·이병찬(李丙瓚)을 종척 집사(宗戚執事)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민병석(閔丙奭)이 계청(啓請)하여 초명정서사원(初銘旌書寫員)에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 개명정서사원(改銘旌 書寫員)에 자작(子爵) 박제순(朴齊純), 하현실 명정서사원(下玄室銘旌書寫員)에 후작(侯爵) 박영효(朴泳孝), 재실상면상자서사원(梓室上面上字書寫員)에 남작(男爵) 김종한(金宗漢), 여재실원(舁梓室員)에 김동욱(金東昱), 계찬실원(啓欑室員)에 이회구(李會九), 행장제술원(行狀製述員)에 남작(男爵) 김학진(金鶴鎭), 시책문제술원(諡冊文製述員)에 남작(男爵) 이용원(李容元), 서사원(書寫員)에 남작(男爵) 조동희(趙同熙), 애책문제술원(哀冊文製述員)에 남작(男爵) 남정철(南廷哲), 서사원(書寫員)에 윤용구(尹用求), 지문제술원(誌文製述員)에 자작(子爵) 김윤식(金允植), 서사원(書寫員)에 자작(子爵) 김성근(金聲根), 표석대자전문서사원(表石大字篆文書寫員)에 자작(子爵) 이근명(李根命), 시인전문서사원(諡印篆文書寫員)에 윤용구(尹用求)를 차출하였다.
또 ‘오늘 습(襲)을 할 때 모든 종척(宗戚) 및 당직(當職) 장관 이하는 관례에 따라 참석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소렴(小斂)과 대렴(大斂) 때도 동일하다.】 또 ‘이번 귀비(貴妃)의 훙서(薨逝)에 습전(襲奠) 소렴전(小斂奠) 대렴전(大斂奠) 성빈전(成殯奠) 성복전(成服奠) 및 조석전(朝夕奠) 상식삭망전(上食朔望奠)은 관례에 따라 거행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장사계(掌祀係)의 제의 주임(祭儀主任) 김규희(金奎熙)가 원소(園所)를 정하기 위해 상지원(相地員) 등을 거느리고 홍릉(洪陵) 국내(局內)를 간심(看審)하는 일로 내일 출발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빈소 주무(殯所主務)에 이달용(李達鎔)을, 조무(助務)에 엄주익(嚴柱益)·이철우(李哲宇)·유응렬(劉膺烈)·엄주승(嚴柱承)을, 원소 주무(園所主務)에 이용복(李容復)을 차하(差下)하였다. 이달용(李達鎔)은 곧 해임하고 엄주익(嚴柱益)을 임용하였다.
빈소(殯所)의 주무(主務)·조무(助務) 제원(諸員)등이 덕수궁(德壽宮) 안에 회동(會同)하여 상사계(喪事係)의 사무분장내규를 의정(議定)하였다. 【1. 상사계(喪事係)에 관련되는 사무소를 덕수궁(德壽宮) 안에 설치하고 예장소(禮葬所)라고 칭한다. 2. 모든 장례사무는 충분한 기간으로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한다. 3. 신구 의식을 참작하여 합당하게 처리한다. 4. 번거로운 장식과 예식은 생략하도록 하고 장례를 도모함에 신속히 집행한다. 5. 장례에 관계되는 일은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과 차관(次官)이 주관하고 그 지휘 하에 당직(當職) 당해(當該) 관리가 집행한다. 단 구식에 관계되는 사무는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위촉하며, 또 고용할 수 있다. 6. 무릇 장례일은 장관과 차관에게 자문을 하고 고문(顧問) 6인(人)을 둔다.】
【원본】 6책 2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6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백작(伯爵) 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 자작(子爵) 민영휘(閔泳徽)·조중응(趙重應)·이재곤(李載崐) 및 이달용(李達鎔)을 장례 때 고문(顧問)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7월 21일 양력
빈궁(殯宮)의 소렴(小斂)은 명정(銘旌)을 세워 전(奠)을 설치하고 의식대로 하였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는 단지 조상식(朝上食)과 석상식(夕上食)만 있는데 전에는 주다례(晝茶禮)도 병행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7월 23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빈궁(殯宮)의 대렴(大斂)은 그대로 성빈(成殯)하여 전(奠)을 설치하고 의식에 따랐다.
왕세자(王世子)가 토쿄〔東京〕에서 환차(還次)하여 귀비(貴妃)의 상(喪)에 달려갔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고문(顧問) 자작 조중응(趙重應)이 원소 주무(園所主務) 이용복(李容復)과 상지원(相地員) 등을 거느리고 홍릉(洪陵)에 나아가 국내(局內)를 간심(看審)한 후에 들어올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원소(園所)를 홍릉(洪陵) 국내(局內)로 정하고 재차 간심(看審)한 후에 그대로 봉표(封標) 하라고 명하였다.
7월 24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신이 고문(顧問) 조중응(趙重應), 원소 주무(園所主務) 이용복(李容復)과 함께 상지원(相地員)을 거느리고 오늘 홍릉(洪陵) 국내(局內)에 나아가 깊이 헤아린 후에 인좌신향(寅坐申向)으로 결정하고 정혈(正穴)은 규례대로 봉표(封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이번 원소에 관한 각항(各項)의 길일(吉日)은 고문과 당직(當職) 장관이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함께 날을 잡아 들일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택일 별단(擇日別單)
역사(役事)의 시작은 7월 25일 【음력 6월 30일】 에 하고, 풀을 베고 땅을 파는 것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하며,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 지내고 선릉(先陵)에 고하는 것은 같은 날 먼저 행한다. 옹가(甕家)를 짓는 것은 7월 27일 【음력 윤6월 2일】 , 금정(金井)을 여는 것은 7월 28일 【음력 윤6월 3일】 , 외재실(外梓室)을 모시고 나아가는 것은 7월 31일 【음력 윤6월 6일】 에 하고, 외재실을 내리는 것은 같은 달 같은 날에 하며, 찬실(欑室)을 여는 것은 같은 날에 한다. 발인(發引)은 8월 2일 【음력 윤6월 8일】 에 하고, 현실(玄室)을 내리는 것은 같은 날 미시(未時)에 한다.
7월 25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빈궁(殯宮)의 성복전(成服奠)을 행하였다. 종친(宗親) 및 이왕직 고등관(李王職高等官)이 참반(參班)하였다.
복제(服制)
태왕 전하(太王殿下)는 시마(緦麻)이고, 왕 전하(王殿下)는 시마이며, 왕비(王妃)와 왕세자(王世子)는 시마이며, 이강 공(李堈公)과 이강 공의 비는 시마이고, 내명부(內命婦)와 외명부(外命婦) 이하는 상복(上服)을 따르고, 상궁(尙宮) 이하는 상복을 따르며, 귀비궁(貴妃宮)의 상궁 이하는 자최 기년(齊衰朞年)이고, 수원관(守園官)은 자최 기년이다.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재실(梓室)의 은정(銀釘) 위에 칠하는 일을 이번 25일부터 시작하여 하루씩 걸려 10차례에 준하여 마련하도록 계하(啓下)받았는데, 발인 날짜가 다가와 규례대로 거행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내일부터 매일 3차에 걸쳐 옻칠을 하고 5차례에 준하여 마련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27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귀비(貴妃)의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는 순헌(純獻)이고, 궁호 망단자(宮號望單子)는 덕안(德安)이며, 원호 망단자(園號望單子)는 영휘(永徽)입니다. 종척(宗戚) 및 고문(顧問)과 상의하여 의정(議定)한 다음 써서 들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7월 28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이 아뢰기를,
"발인할 때 태왕 전하(太王殿下)와 왕 전하(王殿下)께서 곡송(哭送)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영성문(永成門) 안에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 전하께서 배사(拜辭)하는 절차 및 반우(返虞)할 때 지영(祗迎)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하는데 어디에서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발인할 때 영성문 안에서 배사하고 현실(玄室)을 내릴 때는 원소(園所)에 나아가 봉사(奉辭)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등록(謄錄)을 상고해보니, 반우하는 날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신백(神帛)을 혼궁(魂宮)의 정결한 곳에 매안(埋安)하였는데, 무인년(1878)에는 특교(特敎)로 인해 산릉(山陵)에 매안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무인년의 예대로 마련하라."
하였다. 또 ‘혼궁(魂宮)의 응당 행해야 할 제사(諸事)를 한결같이 전례대로 마련하여 별단(別單)에 써서 들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1. 초우제(初虞祭)부터 전례대로 육선(肉饍)을 올린다. 1. 혼궁(魂宮)에 입번(入番)하는 종척(宗戚)들은 전례대로 반우하는 날부터 시작하여 돌아가며 입직(入直)한다. 1. 우제(虞祭), 졸곡제(卒哭祭), 연제(練祭), 상제(祥祭), 담제(禫祭), 사시납향제(四時臘享祭)에는 전례대로 준뢰(尊罍)와 찬작(瓚爵)을 쓴다. 1. 혼궁과 원소에서 3년 동안 초하루와 보름, 유명일(有名日), 사시납향의 제사에는 통용되는 축문을 식례(式例)대로 제술한다. 1. 초우제부터 졸곡제까지의 향축(香祝)은 전례대로 혼궁(魂宮)의 전사보(典祀補)가 봉진(奉進)한다.】
【원본】 6책 2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56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7월 29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알현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 나아갔다. 이어 빈궁(殯宮)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태왕 전하(太王殿下)는 따로 전작례를 행하고 왕세자(王世子)가 배참(陪參)하고, 이어 진향(進香)을 친히 행하였다.
7월 30일 양력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친히 재실(梓室)에 ‘상(上)’ 자(字)를 썼다.
7월 31일 양력
빈궁(殯宮)에게 증시(贈諡)를 행하고 명정(銘旌)을 고쳐 쓰고 나서 찬실(欑室)에 나아갔다.
전 총독부 농상공부 장관(總督府農商工部長官) 기노우치 주시로〔木內重四郞〕에게 은병(銀甁) 1개(箇)를 하사하였다. 그가 사임하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4년 1911년 9월 (0) | 2025.02.07 |
---|---|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4년 1911년 8월 (0) | 2025.02.07 |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4년 1911년 6월 (0) | 2025.02.07 |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4년 1911년 5월 (0) | 2025.02.07 |
순종실록부록2권, 순종4년 1911년 4월 (1) | 2025.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