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양력
【음력 갑인년(甲寅年) 6월 10일】 덕수궁(德壽宮)의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왕자를 낳으니, 이씨에게 당호(堂號)를 내려 광화당(光華堂)이라 하였다.
【원본】 6책 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81면
【분류】왕실-사급(賜給)
덕수궁(德壽宮)의 궁인(宮人) 이씨(李氏)가 왕자를 낳으니, 이씨에게 당호(堂號)를 내려 광화당(光華堂)이라 하였다.
7월 4일 양력
후작(侯爵) 윤택영(尹澤榮)과 백작(伯爵) 이지용(李址鎔)의 채무정리 및 후작(侯爵) 이해창(李海昌)의 가옥 중건의 구조비로써 예비금(豫備金) 중에서 11만 7,000원을 지출하고 각인(各人)이 소유한 부동산 및 은행 주권(銀行株券)을 매수하였다. 【윤택영(尹澤榮)이 소유한 개성(開城)의 제석산(帝釋山) 산림 7,514정(町)과 주권(株券) 152주, 이지용(李址鎔)이 소유한 경성(京城)의 제택(第宅) 및 용산(龍山)의 별저와 주권(株券) 616주, 이해창(李海昌)이 소유한 주권(株券) 715주이다.】
【원본】 6책 5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581면
【분류】왕실(王室) / 재정-재정일반(財政一般)
7월 7일 양력
기사(技師) 김윤구(金倫求)를 보내어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에 가서 수리공사를 검사하였다. 이어서 조경단(肇慶壇)의 아직 수리하지 못한 곳을 간심하였다.
7월 8일 양력
치과의(齒科醫) 요코야마 시게루〔橫山茂〕에게 금시계(金時計) 1개(箇)를 내렸다. 입진(入診)하여 수고하였기 때문이다.
7월 9일 양력
왕세자(王世子)가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의 시험을 마쳤다. 천황 폐하와 황후 폐하가 특별히 불러 인견하고 이어서 은제용형화병(銀製龍形花甁) 1개, 상아조각 치물(象牙雕刻置物) 1개를 내렸다. 양궁(兩宮)에서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인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총독 관저(官邸)에 보내어 후례에 감사함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7월 10일 양력
왕세자(王世子)가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 본과(本科) 제2학년에 진급하였다.
총독부 총무국장(總督府總務局長) 백작(伯爵)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가 대만(臺灣) 산(産) 식물 4분(盆)을 진헌(進獻)하였다.
화산(花山) 삼림(森林) 보전비 6만 6,113원을 경상부(經常部) 세출 중에서 예산을 정하였다. 해당 삼림 면적 약 1,300정보(町步)인데, 100정보(町步)는 융릉(隆陵)과 건릉(健陵) 및 소속 사원(寺院) 주위의 금벌림(禁伐林)으로 획정하였다. 그 외의 나머지는 80년을 주기로 매년 번갈아 벌목하고 순차적으로 보식(補植)하였다. 식목에 들어가는 경비는 판매 수입으로 하고 지출은 예산을 정하여 쓰도록 명하였다.
7월 11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에 나아가 근알(覲謁)하였다. 왕비(王妃)도 따라갔다.
7월 12일 양력
왕세자(王世子)가 휴가를 미시마〔三島〕의 별저에서 피서하였다.
7월 13일 양력
이왕직(李王職) 대정(大正) 2년도(二年度) 세비수지 결산서(歲費收支決算書)를 총독부(總督府)에 제출하였다.
7월 14일 양력
자작(子爵) 이용직(李容稙)을 소견(召見)하였다. 소헌 황태후(昭憲皇太后)의 백일제(百日祭)를 위하여 토쿄〔東京〕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7월 17일 양력
강이노미야〔閑院宮〕 고토히토친왕〔載仁親王〕에게 조전(弔電)을 보냈다. 계자여왕(季子女王)이 훙(薨)하였기 때문이다. 또 부무관(附武官) 김응선(金應善)을 보내어 동궁(東宮)의 저택에 조문 가도록 하였다.
7월 18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총독 관저(官邸)에 보내어 강이노미야〔閑院宮〕의 계자여왕(季子女王)의 훙거(薨去)에 위로 문후를 아뢰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사무관(事務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熊彦〕를 토쿄〔東京〕과 교토〔京都〕 두 도시에 파견하여 제실 박물관(帝室博物館)에 있는 송치품의 보관 및 진열 등의 방법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대정 박람회(大正博覽會)에 출품한 물건을 거두어 오도록 하였다.
7월 19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인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경성 신사(京城神社)에 보내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찬시(贊侍)인 남작(男爵) 김춘희(金春熙)를 보내어 소헌 황태후(昭憲皇太后)의 백일제(百日祭)를 행할 때 참례케 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토쿄〔東京〕에 돌아와 소헌 황태후(昭憲皇太后)의 권전(權殿)에 참배(參拜)하였다.
7월 20일 양력
부무관(附武官) 김응선(金應善)에게 강이노미야〔閑院宮〕의 계자여왕(季子女王)의 장의소(葬儀所)에 나아가 양궁(兩宮)부터 왕세자(王世子)의 이름으로 대신 참렬(參列)하라고 명하였다.
전사(典祀) 이원승(李源昇)에게 선원전 전사(璿源殿典祀)를 겸무(兼務)하라고 명하였다.
7월 22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총독 관저(官邸)에 보내어 여름 문후를 아뢰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7월 23일 양력
이왕직 차관(李王職次官)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에게 명하여 사무를 타의(妥議)하기 위하여 토쿄〔東京〕에 출장가라고 명하였다.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의 대정(大正) 3년도 상반기 이익배당금 1,668원을 경리실로부터 수령하였다.
7월 24일 양력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새로 태어난 왕자의 이름을 명하여 이육(李堉)이라 하였다.
태왕 전하(太王殿下)가 돈덕전(惇德殿)에서 다과회를 베풀었다. 종척(宗戚) 및 고등관(高等官) 등이 배참(陪參)하여 새로 태어난 왕자의 삼칠일을 축하하였다.
인원을 파견하여 의릉(懿陵) 및 경빈묘(慶嬪墓)의 수리 공사를 검사하도록 명하였다.
7월 25일 양력
특별히 무카이 카마노리〔向鎌儀〕에게 일금 100원을 내렸다. 어진을 모사한 공로 때문이다.
속원(屬員)을 보내어 동구릉(東九陵) 및 금곡 봉릉소(金谷封陵所)에 나아가 수리 공사를 감독하라고 명하였다.
7월 27일 양력
속원(屬員)을 보내어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에 나아가 수리 공사를 검사하라고 명하였다.
7월 30일 양력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인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을 남산 대신궁(南山大神宮)에 보내고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찬시(贊侍)인 남작(男爵) 김춘희(金春熙)를 보내어 명치 천황(明治天皇) 제사의 요배식(遙拜式)을 행할 때 참례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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