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양력
【음력 기미년(己未年) 정월 29일】 천황(天皇)과 황후(皇后)가 시종(侍從) 히네노 요타로〔日根野要太郞〕와 황후궁 주사(皇后宮主事) 미무로토 노리미쓰〔三室戶敬光〕을 보내어 뇌사(誄詞)와 폐백(幣帛)을 보내왔다.
궁내성(宮內省) 고시(告示) 제5호로 ‘대훈위(大勳位) 이 태왕 전하(李太王殿下)의 훙거(薨去)에 따라 장의(葬儀)를 행하는 당일(當日)에 폐조(廢朝)를 앙출(仰出)한다.’라고 하였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덕홍전(德弘殿)에서 육군 대장(陸軍大將)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이하를 접견하였다.
3월 2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찬궁(欑宮)을 열었다. 이어서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 주다례 겸 계빈전(晝茶禮啓殯奠), 조전(祖奠),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3월 3일 양력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과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진시(辰時)에 영여(靈轝)가 출발하여 훈련원(訓練院)에 이르러 국장식(國葬式)을 행하였다. 이어 금곡(金谷)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대가(大駕)와 왕세자(王世子)가 영여(靈轝)를 따라갔다.
해시(亥時)에 영여(靈轝)가 금곡(金谷)의 빈소(殯所)에 도착하였다. 성빈전(成殯奠)을 행하였다.
3월 4일 양력
빈소(殯所)에서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해시(亥時)에 현궁(玄宮)을 내리고 이어 입주전(立主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애책문(哀冊文)에,
"황고(皇考)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 문헌 무장 인익 정효 대왕(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大王)께서 경운궁(慶運宮)에 있는 함녕전(咸寧殿)에서 승하(昇遐)하셨습니다. 이에 명년(明年) 기미년(1919) 2월 계축(癸丑) 삭(朔) 초 3일 을묘(乙卯)에 홍릉(洪陵)으로 영천(永遷)하니, 예에 따른 것입니다.
어김없이 정해진 날이 닥치니 상여가 장차 움직이려 하네. 술을 담은 옥잔(醴斝)이 길제사에서 거두어지고 회색빛 말이 앞장서서 길을 떠나네. 아름다운 궁궐은 뒤로 하고 그윽하고 어두운 무덤으로 향하네. 집집마다 우레 같은 울음소리 일어나고 숲의 신령들은 한숨이 비로 뿌려지네.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는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원통함이 하늘까지 미치며 슬프게도 밤은 길고 날은 빨리 새지 않네. 다시 뵐 날이 어느 때일까? 그 아름다운 행적이 묻힐까 두렵네. 이에 소리 높여 부르고 아름다운 옥에 새기니 글은 다음과 같네. 내가 남을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하늘이 낳은 덕이라네. 경성(庚星)이 빗겨 떠서 상서로운 조짐에 부합하니.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네.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중외(中外)에 젖어 들었으니 저 백성들이 기쁘게 받들지 않겠는가? 효제(孝弟)를 근본으로 하고 학문에서도 화락하게 선조의 덕을 집대성하였네. 모두 다 올바르지 않음이 없었고, 조석으로 귀신과 대하며 신과 하늘을 공손히 섬겼다네. 법도에서 밝게 굽어 살피고 종묘에서는 화락한 모습으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제사를 지내니 향기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에 따른 복을 받도다. 수모(壽母)를 지성으로 봉양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께서 즐거워 하시도다. 제사를 검소하게 지내며 법도에 맞지 않으면 거행하지 않았으며, 백성을 가르치고 농사짓는 일은 후손에게 크게 교훈을 남기시니 이를 말하여 연익(燕翼)이라 하겠네. 검소를 숭상하고 화려함을 물리침에 몸소 솔선하여, 바르게 하며 교화(敎化)를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였네. 대련복(大練服)은 검은 비단으로 하였고, 술을 강력하게 억제함은 우(禹)임금이 맛있는 술은 싫어한 것과 짝이 될 만 하네. 하물며 저 성색(聲色)은 탕(湯)임금과 비슷하였네. 예의(禮儀)와 위의(威儀) 삼천 삼백의 규구(規矩) 중에서 주선하니 질서 정연하고, 엄숙하였네. 이에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확실하게 실행하니 옳음과 그름의 사이에서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네. 만기의 업무를 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였네. 조종(祖宗)을 요 순처럼 받들고 간언을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네. 관원에서 모든 재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젖어들게 하였네. 관원에서 모든 재능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젖어들게 하였네. 사람들을 고무하니 도(道)가 오래되니 교화가 이루어지네. 성인(聖人)이 나라를 여심에 그것이 어렵도다. 삼영(三英)을 참작하고 온 나라 사람을 감싸주시네. 선조를 빛내고 후손을 훈계하니 치세에 가깝게 되었다. 임금의 업무는 총람한 지 48년에 공경하고 삼가하여 영수각(靈壽閣)에 드니 삼조(三祖)의 옛일과 짝하니 옥장(玉杖)과 보궤(寶几)가 찬란하게 법도가 있었네. 중간에 정무에 싫증나서 조용히 왕위를 물려주고 편안하고 한가롭게 보양하며 노년(老年)을 유유하게 누리셨네. 어찌 하늘이 화란을 고하여 갑자기 말명(末命)이 이미 드리워질 줄을 알았으리오. 돌아가신 분을 따르지 못하고 흰구름을 바라보며 방황하네. 오호라 슬프도다. 임금의 장막은 정원에 있고 임금께서 타시던 수레(鸞車)는 문 앞에 있는데, 옥으로 만든 상여에는 이슬이 차고 비단 병풍에는 먼지가 묻어 있네. 우러러 응시하노니 저 깃발은 어디로 향하는가? 멀리 푸른 구의산(九疑山)으로 간다네. 슬프고 슬프구나. 대화(大化)의 세계로 가셨네. 멀고도 멀구나 선향(仙鄕)으로 가는 길이여 오호 슬프도다. 하늘이 길지(吉地)를 아껴두셨으니 실로 금곡(金谷)이 이 곳이라네. 길지로 정해졌는데 이전부터 수릉(壽陵)으로 정해 놓았다네. 봉분이 우뚝 솟았고, 성토(星土)가 진실로 부합되네. 상여줄을 잡고 걸음을 옮김이여 도성문을 나서는데 걸음이 머뭇거려지네 냇물도 느릿느릿 흐르고 개울물도 서글퍼하네. 천지가 비통해 하니 해와 달과 별도 빛을 잃었네. 슬퍼서 우두커니 서서 주저하며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네. 오호 슬프도다. 한 기운이 펴졌다가 막히면서 만물이 순환하니 살아있는 것은 반드시 끝이 있다네. 밤과 낮은 한 가지 이치이며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이 똑같이 저 세상으로 돌아가니 수명의 장단을 어찌 비교하리오. 오직 찬란하게 빛나는 융성한 덕은 천지간에 끝이 없다네. 감히 행적을 약간 형용하여 단단한 돌에 새겨 밝게 드러내니,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며 찬란한 공덕 후세에 남겨지리. 오호 슬프도다.
하였다. 【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 민영휘(閔泳徽)가 지었다.】
행장(行狀)에,
"오호 통재라. 높은 하늘이 슬픔을 주시어 우리 수강 대왕(壽康大王)께서 무오년(1918) 12월 20일 묘시(卯時)에 경운궁(慶運宮)의 함녕전(咸寧殿)에서 돌아가시니 나이 67세에 7일이 넘으셨다. 대소 신하와 인척들이 그 공덕을 살피고 행적을 드러내어 의논하여 시호를 올리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고종(高宗)’이라 하였다.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신(臣) 이재완(李載完)이 궁궐을 출입한 지 50여 년으로 공덕을 가장 깊이 알고 있다 하여 신께 명하여 훌륭하신 덕을 글로 형상화하라고 명하시니 신이 깜짝 놀라고 두려워했으나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아첨하는 말이 지나쳐서 사실과 다르게 하지 못하고 감히 피눈물을 닦으며 이를 서술합니다.
삼가 살피건대,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희(熙), 자(字)는 성림(聖臨)인데, 처음의 휘(諱)는 재황(載晃)이고 자(字)는 명부(明夫), 호(號)는 주연(珠淵)이었다. 장조(莊祖)의 별자(別子)인 은신군(恩信君) 충헌공(忠獻公) 휘(諱) 진(禛)께서 후사(後嗣)가 없어, 순조(純祖)께서 명하여 인조(仁祖)의 별자(別子) 인평 대군(麟坪大君) 충경공(忠敬公) 휘(諱) 요(㴭)의 5세손 진사(進士) 증 영의정(贈領議政) 휘(諱) 병원(秉源)의 둘째 아들 구(球)를 후사로 삼고 작위를 봉하여 남연군(南延君)이라 하고 시호(諡號)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 흥선 대원왕(興宣大院王) 휘(諱) 하응(昰應)께서는 여흥(驪興) 민씨(閔氏) 판돈녕(判敦寧) 효헌공(孝獻公) 치구(致久)의 따님을 취하여 임자년(1852) 7월 25일 왕께서 청니방(靑泥坊)의 사저(私邸)에서 탄신하였다. 왕께서는 어려서부터 모습이 비범하여 멋대로 놀지 아니하였다. 관상을 보는 자가 한 번 보고 놀라 뜰아래로 내려가 엎드려 아뢰기를, ‘다른 날에 나라의 주인이 되시리라’고 하였다. 총명과 지혜가 절륜하여 문장에는 배워서 능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해년(1863)에 철종(哲宗)이 돌아가시고 후사(後嗣)가 없자 신정 왕후(神貞王后)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모셔오게 하여 익성군(翼成君)에 봉하고 익종(翼宗)의 양자로 삼아 종통(宗統)을 잇게 하였다. 이때 신정 왕후(神貞王后)께서는 왕이 어리시기 때문에 국가의 법에 따라 주렴을 드리우고 정사(政事)에 참여하였는데, 크고 작은 일은 반드시 여쭈어 결정하였다. 왕대비(王大妃)를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으로 높이고, 대비(大妃)를 왕대비전(王大妃殿)으로 하였으며, 중궁(中宮)은 대비전(大妃殿)으로 하였다.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諡號)를 올리기를, ‘문현 무성 헌인 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라 하였고, 묘호(廟號)는 ‘철종(哲宗)’이라 하였다. 다음 해인 갑자년(1864)에 예릉(睿陵)에 크게 장례지냈다.
왕께서는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혹시 잘못 읽는 것이 있으면 서산(書算)에 계산하지 말라.’ 하였다. 이 때 대왕대비께서 도와서 인도하고 부지런히 이끌며, 경연의 신하들이 정성을 다하여 바르게 힘쓰니 성학(聖學)이 날로 고명해졌다. 비둘기 조롱을 뜰에 두었는데 강관 김학성(金學性)이 그 조각 장식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여쭙자 버리도록 명하였다. ‘희문과(喜聞過)’ 3자를 쓰니 대왕대비께서 경성전(慶成殿)의 문설주에 편액을 만들어 달도록 하셨다. 뇌물을 엄하게 금하고 탐학을 징계하는 법을 펴서 서정(庶政)을 일신하였다.
병인(丙寅) 2월 철종(哲宗)을 태묘(太廟)에 모시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려 ‘순화(純化)’라 하였고,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려 ‘홍성(弘聖)’이라 하였고, 대비전 존호는 ‘휘성(徽聖)’이라 하였다. 이 달에 대왕대비전에서 수렴을 거두니 왕께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대신들을 예당(禮堂)에 불러 보시고 교시(敎示)하여 이르기를, ‘익종(翼宗), 헌종(憲宗), 철종(哲宗)의 융성한 덕과 큰 업적은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텁다. 나 소자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아직도 대왕대비의 크나큰 공렬(功烈)을 현양(顯揚)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마땅히 옥에 새겨 첩문(牒文)을 만들어 받들어 해와 같은 공렬을 묘사하고 아울러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고자 한다.’ 하였다.
익종께 존호를 추상(追上)하기를 ‘융덕 순공 독휴 홍경(隆德純功篤休弘慶)’이라 하였고,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加上)하기를 ‘문광(文光)’이라 하였다. 헌종께 존호를 추상하기를 ‘지성 광덕 홍운 창화(至聖廣德弘運彰化)’라 하였고, 효현 왕후(孝顯王后)께는 ‘수원(粹元)’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왕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는 ‘장순(章純)’이라 하였고, 철종께 추상하는 존호는 ‘흠명 광도 돈원 창화(欽明光道敦元彰化)’라 하였고, 대비전에 가상하는 존호는 ‘정원(正元)’이라 하여 각전(各殿)에 임하여 축하를 드렸다.
3월. 여흥(驪興) 민씨(閔氏)를 왕비로 책봉하니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순간공(純簡公)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이다. 그리고 승지(承旨)를 보내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내외와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내외의 사판(祠版)에 치유(致侑)하였다.
7월. 관서(關西) 지방에 외국 배가 내양(內洋)에 들어오니 도신(道臣) 박규수(朴珪壽)가 쳐서 무찔렀는데, 경외(京外)에 군무(軍務)를 명하고 잘 거행하도록 강조하였다. 사교(邪敎)와 이학(異學)을 엄히 배척하여 모두 없앴다.
8월. 삼반 예식(三班禮式)을 반포하여 위의와 계급의 구별을 정하였다. 부호군(副護軍) 기정진(奇正鎭)이 척사소(斥邪疏)를 올리니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이달에 서양의 선박이 와서 강화부(江華府)를 범하였다. 지키던 신하 이인기(李寅夔)가 막지 못하자 명하여 파출시켰다.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여 이경하(李景夏)를 순무사(巡撫使)를 삼고 이용희(李容熙)로 중군(中軍)을 삼아 한 달 넘게 지키게 하였다.
9월. 천총(千總) 양헌수(梁憲洙)가 정족 산성(鼎足山城)에서 대파하니 적이 돛을 올리고 달아났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항로(李恒老)를 성정각(誠正閣)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이항로가 좋은 계책과 대의(大義)를 아뢰니 이를 즐겁게 받아들이고 경연에 출입하라고 명하였다.
11월. 다음 해는 대왕대비의 나이 육순(六旬)이 되므로, 대신들과 예당(禮堂)이 의논하여 익종께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고, 대왕대비전에는 ‘원성(元成)’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묘년(1867)에 고려(高麗) 왕릉을 보수하도록 명하였다. 사창법(社倉法)을 행하고 토호(土豪)가 무단(武斷)을 행하는 것을 금하였다.
11월. 경복궁을 중건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나가 축하를 받았다.
무진년(1868) 정월 초하룻날 대왕대비의 나이 61세가 되었다. 인정전(仁政殿)에 나가 친히 치사(致詞)와 전문(篆文)과 표리(表裏)를 올리고 축하하는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조정(朝廷)의 신하 가운데 61세되는 사람들은 각각 1등급씩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3월. 건릉(建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7월.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고 종친부(宗親府)와 정부(政府), 삼군부(三軍府)에 선온(宣醞)하였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직(李稷), 심덕부(沈德符)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8월. 건원릉(建元陵), 숭릉(崇陵), 수릉(綏陵), 경릉(景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올렸다.
9월. 대왕대비전의 나이가 주갑(周甲)001) 이 되었으므로 ‘숙렬(肅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1월. 다음 해가 익종이 탄신한 지 주갑(周甲)이 되는 해이므로 추상 존호를 ‘요흠 순공 우근 탕정 대왕(堯欽舜恭禹勤湯正大王)’이라고 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명수(明粹)’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12월 6일. 근정전에 납시어 옥책문(玉冊文)과 금보(金寶)를 바치고 진하(陳賀)를 받았다. 이어 강녕전(康寧殿)에 음식을 올리고 대신 이하에게도 음식을 하사하였다.
기사년(1869)에 문묘(文廟)의 중건을 마쳤다. 친히 전배(展拜)를 행하고 비천당(丕闡堂)에 나가서 선비들에게 응제시(應製試)를 보였다.
8월, 수릉(綏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드렸다. 익종의 묘호(廟號)를 추증한 일로 문관(文官)은 시종, 음관(陰官)은 목사(牧使), 무관(武官)은 선전관(宣傳官) 이상으로 61세가 된 사람에게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였다.
경오년(1870) 3월. 건릉, 현륭원에 나가 친히 제사를 행하고,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서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8월. 경주(慶州) 숭덕전(崇德殿)과 신라(新羅) 10왕을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보수하고 관청을 세워 수호하도록 하였다.
9월. 궁문에 쇠북을 달았다. 옛 법을 거듭 밝혀 사족(士族)들의 묘지의 한계를 정하여 소민(小民)을 편하게 하였다.
신미년(1871) 3월. 친히 적전(籍田)을 갈고 특별히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내렸다. 그리고 선비들에게 알성시(謁聖試)를 보게 하였다.
4월. 서양(西洋) 선박이 또 강화부(江華府)를 범하여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죽었다. 얼마 되지 않아 적이 물러갔다.
11월. 대신(大臣)과 예조당상을 소견하고, 내년이 태조(太祖)가 개국한 지 8번째 회갑이 되는 해여서 태조께 ‘응천 조통 광훈 영명(應天肇統光勳永命)’이라는 존호를, 태종(太宗)께는 ‘건천 체극 대정 계우(建天體極大正啓佑)’라는 존호를 올렸다.
임신년(1872) 정월에 대신 한치규(韓緻奎)가 성학(聖學)을 열심히 할 것을 아뢰니 충간(忠諫)이라고 칭찬하고 특별히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3월. 제릉(齊陵), 후릉(厚陵)에 나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도중에 개성부(開城府)에서 머무르면서 고려의 현릉(顯陵)에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개성(開城) 문묘(文廟)에 나가 전배(展拜)하고 정시(庭試)를 열어 선비를 취하였다. 이 행차에서 큰 비로 진흙탕이 되어 군오(軍伍)가 법도를 잃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영솔한 장수를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문제삼지 말라고 명하였다.
11월에 조정의 신하들이 왕께서 9년 동안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덕과 공훈이 높으시니 의당 간책(簡冊)을 만들어 찬양해야 한다는 빈계(賓啓)와 정계(庭啓)가 그치지 않았다. 이에 ‘통천 융운 조극 돈륜(統天隆運肇極敦倫)’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대왕대비전에는 ‘협천(協天)’이라는 존호를, 왕대비전에는 ‘정휘(貞徽)’이라는 존호를, 대비전에는 ‘수령(粹寧)’이라는 존호를, 중궁전(中宮殿)에는 ‘효자(孝慈)’라는 존호를 올렸다.
계유년(1873) 4월에 대왕대비전에 진작례(進爵禮)를 행하였다.
10월. 도성(都城)의 문세(門稅)를 없애고 또 원납전(願納錢)과 결렴(結斂)을 없앴다. 모두 경복궁을 지을 때 만들어진 것이었다. 광해군(光海君) 때의 죄인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689)의 죄인 목래선(睦來善)과 이현일(李玄逸)의 관작을 추탈하도록 명하였는데, 호조 참판(戶曹參判) 최익현(崔益鉉)이 소(疏)를 올려 청하였기 때문이다. 최익현의 상소가 글이 심히 고지식하여 여러 아래 사람들이 죄줄 것을 청하였으나 왕께서 끝내 너그럽게 용납하시고 장려하는 뜻으로 발탁하시니 사람들이 더욱 임금의 아량에 복종하였다.
12월. 자경전(慈慶殿)이 불타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어하였다.
갑술년(1874) 2월.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이달에 만동묘(萬東廟)를 복설하도록 명하고 문묘(文廟)에 나가 전배(展拜)하였다. 막혔던 서류(庶類)의 벼슬길을 소통(疏通)시켰다.
을해년(1875). 원자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하였다.
5월.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1월. 익종의 세실(世室)을 미리 정하고 ‘계천 건통 신훈 숙묘(啓天建統神勳肅謨)’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전에는 ‘융목(隆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병자년(1876) 정월. 일본국(日本國)에서 파견한 사신(使臣)이 강화부(江華府)에 도착하여 통상조약(通商條約)을 개정할 것을 청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신헌(申櫶)과 부총관(副總管) 윤자승(尹滋承)을 보내어 접견한다는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그 후 서방의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가 다투어 와서 조약을 정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에 많은 일이 생겼다. 여름에 큰 한발이 발생하였는데, 윤 5월. 사직단(社稷壇)에서 친히 기도를 드리자 단비가 많이 내렸다.
10월. 농사가 흉년이 되니 경외(京外)에 술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11월. 교태전(交泰殿)에 불이 났다. 다음 해가 대왕대비전의 보령(寶齡)이 7순(七旬)이 되므로, 익종께 ‘건대 곤후 광업 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대왕대비전에는 ‘수령(壽寧)’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축년(1877) 정월. 여러 도(道)에 진휼(賑恤)을 하도록 명령하고 어사(御使)를 파견하여 진휼을 감독하게 하였다.
2월. 송병선(宋秉璿)을 경연관(經筵官)으로 선발하였다.
11월. 대왕대비전이 명년에 보령(寶齡)이 71세〔望八〕가 되므로 ‘희강(禧康)’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무인년(1878) 정월. 대비전이 승하(昇遐)하여 ‘철인(哲仁)’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9월에 예릉(睿陵)에 합장하였다.
11월. 명년이 익종께서 혼인한 지 61년이 되는 해〔舟梁回甲〕이므로 순조(純祖)께 ‘계통 수력 건공 유범(啓統垂曆建功裕範)’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순원 왕후(純元王后)께는 ‘수목(粹穆)’이라는 존호를, 익종께는 ‘장의 창륜 행건 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대왕대비전께는 ‘현정(顯定)’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기묘년(1879) 8월. 경외에 괴질이 크게 성행하니 특별히 여제(厲祭)를 거행하여 병이 물러가기를 기원하였다.
12월. 세자(世子)가 천연두를 앓다가 회복이 되어 종묘(宗廟)에 고하고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하였다.
경진년(1880) 9월. 경연관으로 김낙현(金洛鉉), 박성양(朴性陽), 이상수(李象秀)를 선발하였다.
임오년(1882) 2월 세자의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여흥 민씨 좌찬성(左贊成) 민태호(閔台鎬)의 따님을 맞아들였다.
6월. 훈련도감(訓練都監)의 군인들이 군향(軍餉) 문제를 구실삼아 난을 일으켰다. 중궁전이 충주(忠州)지방으로 피하였다가 난이 진정된 후 돌아왔다.
11월. 익종께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전에는 ‘휘안(徽安)’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겨울에 감생청(減省廳)을 설치하여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들을 헤아려 혁파하였다.
계미년(1883) 10월.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을 문묘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11월. 치적이 좋은 수령(守令)들을 표창하라고 명하였다.
갑신년(1884) 윤5월. 의제(衣制)를 변통해서 간편하게 하도록 명하였다.
10월. 적도(賊徒)들이 우정국(郵政局)에서 민영익(閔泳翊)을 저격하고, 임금에게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길 것을 권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병력을 끌고 호위하려 왔는데 실은 임금은 포위하여 핍박하기 위해서이다. 다음날, 청(淸)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 등이 입궐하여 격투를 벌였다. 왕께서 하도감(下都監)에 있던 청 나라 군진(軍鎭)으로 피난하였다가 난이 끝나자 돌아왔다.
을유년(1885) 정월. 관북(關北) 10읍에 진휼(賑恤)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경복궁으로 이어하셨다.
7월. 강 연안의 명목 없는 세금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8월. 대원왕(大院王)께서 천진(天津)에서 돌아왔다.
9월. 각 궁방(宮房)에서 새로 만든 경외의 잡세(雜稅)를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11월. 내년이 대왕대비전의 보령(寶齡)이 장차 8순(八旬)에 오르기 때문에 ‘흠륜(欽倫)’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12월. 내탕전(內帑錢) 2만 냥을 하사하여 영남(嶺南) 지방을 진휼하는 데 보태도록 하였다.
병술년(1886) 2월. 공사 노비(公私奴婢)의 신분이 대대로 전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명하여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래의 나쁜 관습을 단번에 씻어버렸다.
7월. 육영 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조신(朝紳) 중 총명하고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각 국의 언어를 가르쳤다.
12월. 내년이 익종이 대리 청정(代理聽政)한 지 61년이 되고, 대왕대비의 보령이 팔순이 되므로 익종께 ‘입경 형도 선헌 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대왕대비께 ‘홍경(洪慶)’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정해년(1887) 11월. 내년이 대왕대비의 연세가 81세 되는 해이므로 ‘태운(泰運)’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무자년(1888) 정월. 세자가 상소하여 임금의 공덕을 높이는 ‘정성 광의 명공 대덕(正聖光義明功大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계유년(1873)의 예에 의거하여 각전(各殿)에 모두 존호를 올렸다. 대왕대비전에는 ‘창복(昌福)’, 왕대비전에는 ‘장소(莊昭)’, 중궁전에는 ‘원성(元聖)’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기축년(1889) 정월. 삼남(三南) 지방의 작년 농사가 흉년이므로 진휼(賑恤)을 베풀어 구제하였다.
8월. 지평현(砥平縣)의 패유(悖儒) 한용석(韓容奭)을 섬으로 귀양 보냈는데, 충현(忠賢)을 모욕한 죄를 바로잡기 위해서이다.
11월. 봉조하(奉朝賀) 김상현(金尙鉉)이 소(疏)를 올려 청하니 영종(英宗)의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바꾸고, 시호(諡號)를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라 하고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이라는 존호(尊號)를 추상하였다. 정성 왕후(貞聖王后)께는 ‘원열(元烈)’, 정순 왕후(貞純王后)께는 ‘정현(正顯)’이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12월. 문묘(文廟)에 나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단희(端禧)’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내년이 중전(中殿)의 보령(寶齡)이 40이 된다고 하여 존호를 올릴 것을 소청하고 정계(庭啓)까지 하니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임금께 가상하는 존호(尊號)는 ‘요준 순휘 우모 탕경(堯峻舜徽禹謨湯敬)’이었고,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에는 ‘희상(熙祥)’, 왕대비전(王大妃殿)에는 ‘수현(粹顯)’, 중궁전(中宮殿)에는 ‘정화(正化)’라는 존호를 올렸다.
경인년(1890) 4월. 대왕대비전이 승하(昇遐)하였다. 왕께서 붙잡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하므로 좌우가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빈청(賓廳)에서 의논하여 시호를 ‘신정(神貞)’이라 하였고, 휘호(徽號)는 ‘경훈 철범(景勳哲範)’이라 하였다. 8월에 수릉(綏陵)에 부장(祔葬)하였다.
10월 익종(翼宗)에게 ‘치중 달화 계력 협기(致中達化繼曆協紀)’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신정 왕후(神貞王后)에게는 ‘익모(翼謨)’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임진년(1892) 6월. 세자(世子)가 왕의 나이 41세〔望五〕가 되었다 하여 상소를 올려 존호 올리기를 청하여 ‘응명 입기 지화 신열(應命立紀至化神烈)’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익종에게 ‘강수 경목 준혜 연지(剛粹景穆峻惠衍祉)’라는 존호를, 신정 왕후에게는 ‘예헌 돈장(睿憲敦章)’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왕대비전에는 ‘의헌(懿獻)’, 중궁전에는 ‘합천(合天)’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계사년(1893) 8월. 문묘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정심 공부(正心工夫)’라는 네 글자를 써서 유생(儒生)들에게 보였다.
10월. 선조(宣祖)가 환궁(還宮)한 지 9갑(甲)이 되므로 경운궁(慶運宮)에 나가 즉조당(卽祚堂)에 전배(展拜)하고, 대신(大臣)을 보내 목릉(穆陵)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갑오년(1894) 2월.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으로 인하여 소요를 일으키자 근처 읍 사람들이 향응(響應)하였다. 이에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고 괴수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6월. 정부(政府)에 명하여 폐정(弊政)을 혁파하도록 명하였으나 난민(亂民)이 잠깐 잠잠해졌다가 얼마 후에 일어나니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하여 신정희(申正熙)를 영사(營使)로 삼아 이를 토평하게 하였다. 이 때에 청(淸) 일(日)전쟁이 시작되어 시사(時事)가 크게 변하였다.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여 관제(官制)를 변화시키고 전날의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를 폐지하고 다만 의정부(議政府)와 6부(六部)를 설치하여 이목(耳目)을 쇄신하였다.
을미년(1895) 정월. 현명하고 능력 있으며 재예와 덕행이 방정한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2월.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라고 명하였다.
8월. 적신(賊臣) 우범선(禹範善) 등이 변을 일으켜 중궁전이 승하(昇遐)하였다.
10월. 발상(發喪)하였다.
11월. 내각(內閣)의 의논으로 인하여 대군주 폐하(大君主陛下)라 호칭하게 되었다. 왕대비전은 왕태후 폐하(王太后陛下), 왕비는 왕후 폐하(王后陛下), 왕세자는 왕태자(王太子), 왕세자빈은 왕태자비(王太子妃)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年號)를 쓰고 체발령(剃髮令)을 내리고 태양력(太陽曆)을 사용하였다.
12월.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임시로 옮겼다.
정유년(1897) 정월.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대행 왕후(大行王后)의 시호를 ‘명성(明成)’으로 올렸다.
7월.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개정하였다.
9월. 여러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원구단(圜丘壇)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으로 고쳤다. 왕태후(王太后)를 높여 명헌 태후(明憲太后)라 하고, 명성 왕후(明成王后)를 황후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를 황태자(皇太子), 왕태자비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하였다. 이달에 귀인 엄씨(貴人嚴氏)가 우리 동궁(東宮)을 낳았다. 처음에는 영왕(英王)으로 봉하였다.
10월. 명성 황후(明成皇后)를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기해년(1899) 6월. 국조(國祖)인 사공공(司空公)의 묘소가 있는 봉산(封山)이 전주(全州) 건지산(乾止山)에 있는데 재신(宰臣) 이재곤(李載崐)을 보내어 봉심(奉審)하도록 하였다. 조경단(肇慶壇)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국조(國祖)인 장군공(將軍公)의 묘는 삼척(三陟)의 노동(蘆洞)에 있고 배위(配位) 이씨(李氏)의 묘는 그 옆 동산(東山)에 있었는데 재신 이중하(李重夏)를 보내어 봉심하고 무덤을 쌓게 한 후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라 칭하고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모두가 선조(先祖)들이 하지 못했던 일인데 왕의 신념에 의해 결단한 것이다. 장헌 세자(莊獻世子)를 장종(莊宗)으로, 혜빈(惠嬪)을 헌경 왕후(獻敬王后)로 추숭(追崇)하고, 정종(正宗)에게 ‘경천 명도 홍덕 현모(敬天明道洪德顯謨)’, 효의 왕후(孝懿王后)에게는 ‘장휘(莊徽)’라는 존호를 추상하였다.
11월.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신의(神懿), 신덕(神德) 두 왕후를 고황후(高皇后)로 추존하였다. 장종(莊宗)을 장조 의황제(莊祖懿皇帝), 헌경 왕후(獻敬王后)를 의황후(懿皇后), 정종(正宗)을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 효의 왕후(孝懿王后)를 선황후(宣皇后), 순조(純祖)를 숙황제(肅皇帝), 순원 왕후(純元王后)를 숙황후(肅皇后), 익종을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 신정 왕후(神貞王后)를 익황후(翼皇后)로 추존하여 원구단(圜丘壇)에서 태조에 배향(配享)하는 제사를 지냈다.
12월. 대신과 예조 당상을 소견하여 인조(仁祖)에게 ‘개천 조운 정기 선덕(開天肇運正紀宣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존호는 ‘정유(正裕)’,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존호는 ‘숙목(淑穆)’, 효종(孝宗)의 존호는 ‘흠천 달도 광의 홍렬(欽天達道光毅弘烈)’,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존호는 ‘홍범(弘範)’이라 하였다.
경자년(1900) 정월. 황태자(皇太子)가 상소하여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보령이 칠순이 되고, 성수(聖壽)가 오순이 되니 존호를 가상할 것을 청하였다. 왕의 존호는 ‘외훈 홍업 계기 선력(巍勳洪業啓基宣曆)’, 명헌 태후(明憲太后)의 존호는 ‘강유(康裕)’라 하였고, 명성 황후(明成皇后)에게 추상한 존호는 ‘홍공(洪功)’이라 하였다.
윤 8월. 선원전(璿源殿)에 화재가 났다. 소복(素服)을 입고 가서 곡(哭)을 하는 예를 거행하였다.
신축년(1901) 11월. 내년이 성수(聖壽) 51세가 되므로 동궁(東宮)이 여러 번 상소하여 존호를 가상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건행 곤정 영의 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라는 존호를 올렸다. 문조(文祖)에게 ‘굉유 신휘 수서 우복(宏猷愼徽綏緖佑福)’이라는 존호를 추상하고, 익황후의 존호는 ‘계지(啓祉)’로 하였다. 명헌 태후에게 ‘유녕(裕寧)’이라는 존호를 가상하고, 명성 황후(明成皇后)에게는 ‘성덕(誠德)’이라는 존호(尊號)를 추상하였다.
임인년(1902) 3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영조(英祖) 이후 처음있는 성대한 일이었다.
계묘년(1903) 정월. 호남(湖南)의 사환미(社還米) 2만 석을 관북(關北)으로 옮겨 흉년을 당한 백성을 구하도록 하였다.
11월. 명헌 태후가 승하하였다. ‘효정(孝定)’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휘호는 ‘자온 공안(慈溫恭安)’이라 하였다. 정부(政府)에 명하여 업무가 없는 관청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갑진년(1904) 정월. 효정 황후(孝定皇后)를 경릉(景陵)에 합장하였다.
4월. 학교(學校)를 증설하여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도록 명하였다.
8월. 잡세를 엄금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9월. 태자비(太子妃) 민씨(閔氏)가 죽었다. 시호를 ‘순명(純明)’이라 하고 11월에 유강원(裕康園)에 장사지냈다.
12월.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에게 승지(承旨)를 보내 올라오도록 하니, 좋은 계책을 아뢰었다.
을사년(1905) 11월. 일본(日本)과 새로운 조약(條約)이 이루어졌다. 상신(相臣) 조병세(趙秉世), 재신(宰臣) 민영환(閔泳煥),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이 이 때문에 죽었다.
병오년(1906) 12월. 해풍 부원군(海豐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따님을 태자비로 책봉하였다.
정미년(1907) 6월 9일. 황태자에게 국정(國政)을 대리하도록 명하고, 11일에 태종(太宗)의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왕위를 전하였다.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에 책봉하였다.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이 왕위를 전한다는 성지(聖旨)를 받들었다. 호칭을 의논하여 이르기를 ‘수강 태황제(壽康太皇帝)’라 정하였다. 이때로부터 양생(養生)하고 유유자적하게 지낸 지 12년이 지났다. 지난 10월 큰 별이 동방에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고, 섬광이 번쩍이다가 얼마 후에 그쳤다. 나라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두 달이지나 옥궤(玉几)의 명을 받을 줄 어찌 예상했겠는가? 승하하신 날 도성(都城)의 인사와 여인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대궐 앞으로 달려와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렸는데, 그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며 온 나라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문상(聞喪)하는 날에는 모두가 어린 아들이 죽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 같았다. 해를 넘겨 다음 해 2월 3일 을묘(乙卯)에 양주(楊州) 금곡리(金谷里) 부을원(負乙原)에 있는 홍릉(洪陵)에 크게 장사지냈다. 대개 왕이 평소에 묘소로 예정해 놓은 곳이며, 명성 황후를 지난 10월 8일 이곳에 옮겨 모셔졌는데 지금 합봉(合封)한 것이다.
명성 황후에게서 4남 1녀가 탄생하였는데, 전하(殿下)의 서열은 두 번째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완왕(完王) 이선(李墡)은 귀인 이씨(貴人李氏)에게서 태어났는데 결혼 전에 돌아가셨다. 1녀(女)는 요절하였다. 의왕(義王) 이강(李堈)은 귀인(貴人) 장씨(張氏)에게서 태어났다. 1녀(女)가 이씨(李氏)에게서 태어났으나 요절하였다. 귀비 엄씨(貴人嚴氏)는 1남을 낳았으니, 즉 동궁 전하(東宮殿下)이다. 양씨(梁氏)가 1녀를 낳았는데 어리고, 또 2남은 이씨(李氏), 정씨(鄭氏)에게서 태어났는데 요절하였다. 왕은 기우(氣宇)가 영명하여 덕성이 인후하여 어려서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대왕대비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르고 한 마음으로 효도하고 받드는 데 몸과 마음은 다하였다. 대왕대비께서 일찍이 이르시기를, ‘나는 어렵고 험한 세상을 살았는데 뜻하지 않게 늙어서 이런 즐거움을 받으니 이제부터는 걱정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수렴청정을 그만 둔 뒤에도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여쭈어 본 후에 결정하였고, 아주 미세한 것도 거스르지 않았으며, 28년을 하루같이 어른의 뜻을 밝게 살피고 해이하지 않았다. 경인년(1890)에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장례 절차를 반드시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하여 털끝만큼도 유감이 없었다. 임진년(1892)에 종묘(宗廟)에 모신 이후, 한 여름이나 심한 추위에도 반드시 매달 전배(展拜)를 행하였고, 기일(忌日)에는 해마다 능(陵)에 가서 알현하면서 영원히 사모하는 뜻을 폈다.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종묘(宗廟)에 올리기 전에는 진어(進御)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찍이 누워있을 때, 중관(中官)이 진전(眞殿)을 봉심하고 들어와 여쭈니 왕이 벌떡 일어나 책망하여 말하기를, ‘어찌 나를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부터 중관(中官)은 반드시 왕이 일어나 앉았는지를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실 계파의 책자를 살펴볼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르기를, ‘받들어 오라.’고 하여 손을 씻고 열어 보았다.
백성을 불쌍히 여겨 물건을 구휼하였고 수재나 화재의 재난을 만나면 반드시 내탕금을 내려서 구제하고, 수령과 신하들을 각별히 신칙하여 집을 지어서 정착할 살만한 곳을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대대로 벼슬한 신하들을 온전하게 보호하여 비록 모함에 빠지더라도 형벌을 주지 않고 반드시 곡절을 살펴 죄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경연에 임하여서는 신채(神彩)가 장중하여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용모를 지녔고, 여러 신하들의 여쭙는 말씀을 대할 때는 안색이 온화하여 화락하니 각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바를 다 말하였다. 때문에 한 번 나가 만나본 사람들은 반드시 취한 것같이 진실로 감복하니 마치 봄바람의 온화한 기운 안에 들어있는 것 같았다.
여러 번 변란(變亂)을 겪으면서도 분노의 기색이 없었으며, 조용히 생각하고 깊이 계산하여 시기나 형편에 잘 맞게 처신하였다. 역대의 전장(典章)과 국조(國朝)의 정식(程式)을 자선의 말처럼 외우며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같이 분명히 알았고, 한 가지 일에 닥치거나 의문 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자세한 전례를 검토한 후 결정하니 여러 신하들이 미치지 못하였다. 근일에는 해외 각국의 산천과 도리, 인물, 습속 등과 같은 것을 모두 잘 알고 법률(法律)과 장정(章程)을 정밀하고 상세하게 하였다.
곤복과 면류관 이외에는 무늬있는 비단을 쓰지 않았고, 평상복은 두세 번씩 빨아 입었으며, 모든 완상품과 기호품에는 욕심이 없었다. 하늘을 대하여 엄숙하고 공경하며 삼가고 하늘 빛이 비치는 곳에서는 드러누운 적이 없었다. 재이(災異)를 만나면 지성으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반찬을 줄이고 구언(求言)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하였다. 상을 내릴 때는 신중하게 하였고, 절의(節義)를 표창할 때는 자세히 살피니, 현명함이나 정절과 충성을 드러 내거나, 절개를 위해 생명을 버린 사람들, 선유(先儒)나 큰 신하로 세상에서 공경을 받는 자들 중에 관작(官爵), 시호(諡號)나, 은총(恩寵)을 받지 못한 자가 없었으며, 제사를 지내서 이를 표창하였다. 옥사(獄事)를 살필 때는 반드시 신중하게 심의하여 가벼운 처벌에서 판결이 잘못될지언정 보전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초야(草野)에서 독서하는 선비에게는 반드시 교지를 내려 돈독히 권면하여 표창하여 추켜세워서 비록 조정으로 맞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선비들의 기풍이 일어나는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왕이 예전에 경연에 임하여 《논어(論語)》를 강하였는데, 효제(孝弟)가 인(仁)의 근본이라 하는데 이르러, 강관(講官)이 글의 뜻을 설명하자 왕이 이르기를, ‘요(堯) 순(舜)의 도(道)는 효제뿐이니 인(仁)의 근본이 효제(孝弟)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다스림의 근본 또한 효제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요 순을 본받고자 하면 먼저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규례, 훌륭한 말씀과 선행은 역사에 다 쓰지 못할 정도로 천고에 빛나는 것이니 마땅히 이어받아 행하여야 하며, 반드시 먼 옛날의 일만을 추종할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르고, 중국(中國)이 오랑캐와 다른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윤리가 바르면 백성들이 교화되니 경사스러운 조짐과 평화로운 기운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넘쳐 기근이나 질병의 재앙이 없어지고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국가의 근본은 세자를 보양(輔養)하는 데 있다.’라고 하시고는, 신 이재완에게 명하여 삼대(三代) 이래 세자를 가르치는 법을 뽑아서 서술하도록 하였다. 신이 삼가 가의(賈誼)의 보부편(保傅編)과 선유(先儒)의 바른 논설을 모아서 바치니, 왕께서 보시고 좋다고 하시며 책상머리에 두었다.
왕께서는 경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문장을 여사(餘事)로 여겼다. 임금의 윤음에서 드러난 것과 임금의 말씀에서 발하는 것이 모두 법도에 맞고 단아하였는데, 비각의 신하가 일찍이 주연집(珠淵輯) 10권으로 모아서 두었다. 오호라, 왕께서는 임금의 도리와 임금의 덕을 실로 갖추었도다. 그리고 부지런히 힘써 치세(治世)를 구하여 한가하게 식사하거나 주무실 겨를도 없이 40여 년을 지냈다. 감히 모르겠거니와 한 번 치세(治世) 오는 것은 아마도 천도(天道)의 기수(氣數)가 다가옴이 주야 한서(晝夜寒暑)의 순환처럼 어쩔 수 없는 형세가 있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만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황극(黃極)의 가르침을 세우고 아울러 양(陽)을 부추기고 음(陰)을 억누르는 뜻을 잡는 것에서는,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말솜씨로도 능히 다 말할 수 없고,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힘으로도 능히 빼앗을 수 없도다.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도(覇道)를 물리치며, 중화(中華)를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백성을 교화하여 인의 예악(仁義禮樂)의 가운데에 차차 스며들게 하였으니, 백대를 지나도 영원히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공열(公烈)이 어찌 적겠는가? 오호, 슬프도다. 신이 4년 간 기이한 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모진 목숨 죽지 못하여 차마 행장(行狀)을 서술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도다. 가만히 생각하니 일월(日月)의 밝음과 하해(河海)처럼 넓은 경지를 나의 좁은 식견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단지 간략하게 하여 과장하지 않는 뜻을 따를 뿐이다. 그러나 울음을 삼키며 흐르는 눈물을 참는 말을 면하지 못하니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막을 길이 없으니, 오호 슬프도다."
하였다.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이 지었다.】
3월 4일 양력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오호 슬프도다. 우리 고종 통천 융운 조극 돈륜 정성 광의 명공 대덕 요준 순휘 우모 탕경 응명 입기 지화 신열 외훈 홍업 계기 선력 건행 곤정 영의 홍휴 수강(高宗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대왕의 총명하고 예지로운 모습과, 따뜻하고 선량하며 공손하고 검소한 덕으로 그 나라를 오랫동안 다스리고, 정사에 힘쓰며 훌륭한 계책이 때를 타니, 우리나라의 백성들 중에서 깊고 두터운 은혜에 젖어 윤택하게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윽한 향기가 하늘에 알려져 순수한 축복이 내린 것이다.
지난해 영수각(靈壽閣)에 제첩(提帖)한 일은 우리 왕가에서 5백 년간에 겨우 네 번 있었던 예식이었는데, 요(堯)임금이 왕위를 물려준 것과 같고,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근심이 없는 것과 같으니, 물러나서 몸을 보양함에 추앙하며 축복함이 끝이 없었다. 오호라. 높은 하늘이 화를 내려서 무오년(1918) 12월 19일 임금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20일 계유(癸酉)에 경운궁(慶運宮)의 함녕전(咸寧殿)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춘추 67세였다. 온 나라 사람 모두가 크게 놀라 성안부터 궁벽한 산골의 벽촌에 이르기까지 노인, 젊은이 할 것 없이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통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이로써 어진 사람을 친히 여기고 이로움을 즐거워하는 생각은 강제로 권면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전하께서는 매우 애통해 하시며 조정(朝廷)에 묻고 옛 제도를 살폈으므로 삼가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문헌 무장 인익 정효(文獻武章仁翼貞孝)’라 하였고, 묘호(廟號)를 ‘고종(高宗)’이라 하였다. 그 다음 해인 기미년(1919) 2월 3일 을묘(乙卯)에 홍릉(洪陵)에 합장하였는데, 능은 양주(楊州)의 금곡(金谷)에 있으며 을좌향(乙座向)이다. 이 곳은 왕께서 미리 묘소로 정하신 곳으로 명성 황후(明成皇后)를 먼저 이곳에 이장(移葬)하였다.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신이 가장 오랫동안 임금의 은덕을 받았다고 하여 유궁(幽宮)의 지문(誌文)를 찬술하도록 명하였다. 신이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삼가 피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며 글을 바칩니다.
왕의 성(姓)은 이씨(李氏)요, 휘(諱)는 희(熙), 자(字)는 성림(聖臨)인데, 처음의 휘(諱)는 재황(載晃)이고 자(字)는 명부(明夫), 호(號)는 주연(珠淵)으로 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의 둘째 아들이다. 여흥순목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민씨(閔氏)에게서 임자년(1852) 7월 25일 계유(癸酉)에 정선방(貞善坊) 사저(私邸)에서 탄생하였다. 계해(癸亥) 12월 철종 장황제(哲宗莊皇帝)가 승하하시자 왕께서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의 명을 받들어 궁에 들어가 대통을 잇고,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양자가 되었다. 익황후(翼皇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하였는데 이때 왕의 나이 12세였다. 병인년(1866)에 여성 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閔致祿)의 따님을 얻어서 비(妃)로 삼았는데, 이분이 명성후(明成后)이다. 우리 전하(殿下)는 둘째 아들로 탄생하였는데, 1남인 원자(元子)와 삼남인 대군(大君), 사남인 대군, 1녀인 공주(公主)는 모두 요절하였다. 완왕(完王) 이선(李墡)과 의왕(義王) 이강(李堈)과 세 따님은 모두 귀인(貴人)에게서 태어났다. 황귀비 엄씨(皇貴妃嚴氏)는 우리 세자(世子)이신 휘(諱) 이은(李垠)을 낳으셨는데, 서열이 세 번째로 우리 태종(太宗)의 고사(古事)를 쫓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오호라 왕은 천품이 빼어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여 55년 동안 왕에 계셨는데, 융성한 덕과 커다란 업적은 역사에 다 쓰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지문(誌文)의 엄한 형식에 따라서 삼가 그 대략(大略)을 모아서 쓴다.
경연과 소대(召對)가 중단되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경사(經史)의 심오한 뜻을 질의하고 토론하면서, 지난 옛날의 득실을 의논하고 연구하였다. 이에 학문이 얕은 유신(儒臣)들은 경연장에 들어가기를 꺼릴 만큼 왕은 학문을 좋아하였다.
대왕대비(大王大妃)의 가르침을 받들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부드러운 안색과 유순하고 온화한 몸가짐으로 반드시 공경하고 근실하였다. 무릇 몸을 편안하게 하고 뜻을 기르는 일에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대왕대비가 돌아가심에 이르러 안색이 수척해지도록 곡(哭)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니 좌우가 모두 감동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춥고 더운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왕께서는 효성이 돈독하였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과 전궁(殿宮)에서 능침(陵寢)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절을 하는 것은 해마다 일상적인 규례였다. 희생과 술과 홀과 폐백을 놓는 등의 제사의 절차를 몸소 검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전례(典例)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니 왕께서는 조상을 받든 것이다.
보좌하는 재상(宰相)을 택할 때는 반드시 나이 많은 원로로 하며 그가 조정에 나오고 물러감에 예로서 대우하고, 한 때 도(道)를 지키며 은거해 있던 선비들을 예우하면서 성의를 다하여 초청하였으니, 왕께서는 현명한 사람을 가까이 한 것이다.
바르고 좋은 말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비록 실정에 맞지 않더라도 끝에는 반드시 너그럽게 용납하였으니 왕께서는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인 것이다.
몸소 문묘(文廟)에 제사를 지내고 선비를 기르는 데 필요한 물품을 넉넉히 내려 교육을 진흥하여 사문(斯文)을 부양하고 허물어진 풍속을 바르게 하는 대강을 세웠으니 왕께서는 유학(儒學)을 숭상한 것이다.
적전(籍田)을 경작하고 보리베는 것을 살피며 매년 정월에 권농 윤음(勸農綸音)을 반포하여, 촌야의 노부가 감격하고 권면함을 알게 되었으니, 왕께서는 근본에 힘쓰셨도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나, 물에 떠내려가거나 불타버린 집이 있으면 마음을 다하여 구제하여 하나도 죽거나 수척하지 않았으니, 왕께서는 재난을 구휼하였도다.
시대에 맞게 제도(制度)를 바로잡으며 여러 사람들의 뜻을 살펴 힘쓰고, 대호(大號)를 올리고 제도를 바꾸며, 원구(圜丘)에 배향(配享)하여 제사를 지내 왕을 추존(追尊)하는 예를 지내었다. 진전(眞殿)의 제 1실을 추증하여 받든다거나, 목청전(穆淸殿)을 고쳐 건축하며, 조경단(肇慶壇), 준경묘(濬慶墓), 영경묘(永慶墓)에 모두 차례대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은 왕이 의(義)를 일으키고 선대의 조상을 추모하며 근본에 보답한 것이다.
한가할 때에 행하신 말과 행동도 법도가 되었으니 외인이 감히 넘겨다 볼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왕께서는 하늘의 빛이 땅에 비치는 곳에서는 드러눕지 않았으며, 성인의 경(經)이나 현인의 전(傳), 조종(朝宗)의 보첩(譜牒)을 대할 때는 손을 모으고 존경을 표현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신이 환관에게서 들은 것이다. 오호 왕의 덕은 지극하도다.
어려운 시절을 만나서 여러 번 어려운 일을 겪었으나 왕께서는 매번 묵묵히 신묘하게 기미를 살펴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전환시켰다. 정치를 구하는데 부지런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사에 쉴 틈이 없었다. 예식에 쓰는 물건이나 전장(典章)의 세밀한 것과 같은 일도 또한 모두 살펴보고 지도하니 여러 유사(有司)들이 따르고 받들어 어김이 없었다. 관명(官名)을 경장(更張)하고 군사 제도를 변화시키고 정리하는 등의 일은 모두 정밀하고 옛 법식(法式)에 따랐으며 왕조의 수명이 영원히 존속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잊지 않았다.
왕은 예전에 경연(經筵)하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인군(人君)인 나로부터 명이 만들어지니 진실로 명이라 말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
또 이르기를,
"사람으로 누가 잘못이 없겠는가. 고치면 선하게 된다."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오호라 왕의 덕을 숭상함과 지극한 선(善)은 삼황(三皇)에 추가하여 넷으로 되고, 오제(五帝)에 더하여 여섯이 될 정도이다. 그러나 치세(治世)는 뜻대로 되지 않고 마침내 쇠퇴하는 큰 물결을 돌리지 못하니 이른바 기수(氣數)가 있는 것인가. 신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통곡하며, 죽고자 했으나 죽지도 못하였다.
명성후(明成后)께서 대궐 안에서 행하신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은 이미 임금께서 지으신 지문(誌文)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신이 부질없이 쓸 필요가 없다. 【전 의정(議政) 민영규(閔泳奎)가 썼다.】
3월 5일 양력
덕수궁(德壽宮)의 효덕전(孝德殿)에서 반우(返虞)를 행하였다.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겸 안신제(安神祭)를 행하였다.
3월 6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두 번째 우제(虞祭)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8일 양력
왕세자(王世子)에게 효덕전(孝德殿)에서 세 번째 우제(虞祭)를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3월 10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네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토쿄〔東京〕의 별저(別邸)로 출발하였다.
3월 11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2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다섯 번째 우제(虞祭)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3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특별히 찬시(贊侍) 이성묵(李聖默)에게 일금 100원을 하사하였다. 모친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3월 14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여섯 번째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그리고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인산(因山)과 천봉(遷封)할 때 국장 위원(國葬委員)이었던 식부 차장(式部次長) 공작(公爵) 이토 히로쿠니〔伊藤博邦〕 이하와 총독(總督)인 백작(伯爵)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이하에게 위로품을 차등 있게 하사하고, 삼주감 총호원(三主監總護員)이하 이왕직 장관(李王職長官) 자작(子爵) 민병석(閔丙奭)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3월 15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일곱 번째 우제(虞祭)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6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망제(望祭)와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7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8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19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0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1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2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3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4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지내고 석상식(夕上食)을 올렸다.
3월 26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27일 양력
특별히 자작(子爵) 이완용(李完鎔)에게 일금 200원을 하사하였다. 그의 어머니인 정부인(貞夫人) 서씨 【덕안군(德安君) 이재덕(李載悳)의 처이다.】 의 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3월 28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경성 상업 회의소(京城商業會議所)에 일금 1,000원을 하사하였다. 공회당 건축비를 보조한 것이다.
3월 29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30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3월 31일 양력
효덕전(孝德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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