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권 철종즉위년 1849년 10월

싸라리리 2025. 4. 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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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축

빈전(殯殿)에 나아가 삭전(朔奠) 겸 진향(進香)을 행하였다.

 

대간(臺諫)이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현탈(懸頉)059)                                             하는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10월 2일 병인

전교하기를,
"금년 10월은 현륭원(顯隆園)060)                                             을 천봉(遷奉)한 구갑(舊甲)이 되는 해이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추모해 마지않아 봄 사이에 전성(殿省)하려 했었으나 옥후(玉候)가 미령(未寧)하여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소자(小子)가 사위(嗣位)하였으니 마땅히 그 뜻을 받들어야 했지만, 예제(禮制)의 제약을 받아 행하지 못했으니 사심(私心)의 비통함을 비유할 데 없다. 초7일에는 각신(閣臣)을 보내어 건릉(健陵)을 봉심케 하고 화령전(華寧殿)도 아울러 봉심케 하려 한다."
하였다.

 

소대하였다.

 

10월 3일 정묘

시책보(諡冊寶)를 빈전(殯殿)에 올렸다.

 

친히 시책을 올린 뒤에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고, 명정(銘旌)을 고친 뒤에 별다례도 행하였다.

 

10월 4일 무진

진강(進講)하였다.

 

소대하였다.

 

10월 5일 기사

희정당(熙政堂)에서 약원(藥院)의 입진과 진강(進講)을 행하였다.

 

소대하였다.

 

이노병(李魯秉)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종병(李宗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6일 경오

진강하였다.

 

10월 7일 신미

진강하였다.

 

전 경상 감사                     김대근(金大根)을 소견(召見)하였다.

 

10월 11일 을해

이종혁(李鍾赫)을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0월 12일 병자

성원묵(成原默)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4일 무인

소대하였다.

 

10월 15일 기묘

빈전에 나아가 망전(望奠)을 행하였다.

 

10월 19일 계미

서좌보(徐左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현서(李玄緖)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0월 20일 갑신

세 사신을 소견하였으니,                        【정사                           이계조(李啓朝), 부사                           한정교(韓正敎), 서장관                           심응태(沈膺泰)이다.】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10월 21일 을유

찬궁(欑宮)을 열라고 명한 뒤에 별전(別奠)을 친히 행하였다.

 

10월 23일 정해

판부사                     권돈인(權敦仁)이 진소(陳疏)하여 인책(引責)하니, 비답하기를, "참으로 경의 말대로라면 누구인들 애타게 의원(醫員)을 천거할 마음이 없었겠는가? 하물며 대행 대왕께서 만나 보고 싶어 하신 하교까지 있었지 않았는가? 형판(刑判)의 상소에 속셈은 잘 몰랐다 하니 떳떳한 경로가 아니었다는 말을 드림은 조금도 괴이한 일이 아니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는가? 일전의 자교(慈敎)에서 시원스레 개석(開釋)하였으니 경의 마음에 난처하고 미안하다 할지라도 이 일로 번거롭게 하여 나의 슬픈 마음을 더하게 하지 말고, 즉일로 마음 편하게 집으로 돌아가 조석의 곡반(哭班)에 출입토록 하라."
하였다.

 

빈전에 나아가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10월 24일 무자

빈전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예조에서 반우(返虞) 후의 효정전(孝定殿)과 산릉(山陵)의 축식(祝式)에 대하여 수의(收議)한 바를 아뢰었는데, 영부사                     조인영(趙寅永)은 헌의하기를,
"우주(虞主)061)                                             에 묘호(廟號)를 쓰지 않는 것은 연제(練祭) 전에만 받들기 때문이고 연주(練主)062)                                             에 묘호를 아울러 쓰는 것은 그대로 받들고 입묘(入廟)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두 축문은 우주에 쓴 바대로 써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을 듯합니다. 효성전(孝成殿)의 축식에 있어서는 비록 향실(香室)에 받들은 축문이 있기는 하나 우제와 연제의 분별이 없는 것이니, 확실히 근거할 만하다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은 헌의하기를,
"우주(虞主)에 다만 누구라는 칭호만 쓰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있는 바입니다. 입묘(入廟)하기 전에는 묘호(廟號)를 쓸 수 없고 연제 때에 이르러서야 묘호를 아울러 쓸 수 있는 것입니다. 향실(香室)에 있는 효성전의 축식에는 묘호를 다 썼으므로 예조에서 이것 때문에 의심을 품는 듯하나 축식에 연전(練前)과 연후(練後)의 분별이 당초에 없었으니, 연전에 묘호까지 다 써도 된다는 것도 역시 질정(質定)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상례(常禮)로 말하자면 제주(題主)에 써 있는 대로 축식에 쓰는 것이 의절(儀節)에 합당할 듯하오나, 축식은 엄중한 것이니만치 감히 억견(臆見)으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으며, 판부사                     권돈인(權敦仁)은 병으로 헌의치 못했고, 좌의정                     김도희(金道喜)의 헌의는 거의 비슷하니, 헌의한 대로 시행하라 명하였다.

 

10월 25일 기축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 주다례(晝茶禮), 석상식(夕上食), 조전(祖奠), 석전(夕奠)을 행하였다.

 

10월 26일 경인

대행 대왕의 영가(靈駕)가 계발(啓發)하니 홍화문(弘化門) 밖에서 하직하였다.

 

10월 28일 임진

하현궁(下玄宮) 때에 선정전(宣政殿)의 뜰에서 망곡(望哭)하였다.

 

보제원(普濟院)에 나아가 반우(返虞)를 맞아 신련(神輦) 뒤를 수행하여 재전(齋殿)으로 들어왔다.

 

효정전(孝定殿)에 나아가 초우제(初虞祭)를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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