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진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의 추향(秋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친히 전하였다.
7월 2일 정사
김보근(金輔根)을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조병기(趙秉夔)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으니, 모두 중비(中批)이었다. 윤치정(尹致定)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정기세(鄭基世)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7월 3일 무오
공주목(公州牧)의 무너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에게 휼전(恤典)을 주었다.
7월 4일 기미
우의정 박회수(朴晦壽)가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7월 6일 신유
한정교(韓正敎)를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삼았다.
7월 8일 계해
초차(初次)의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7월 9일 갑자
정익조(鄭翊朝)를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삼았다.
7월 10일 을축
판부사(判府事) 서준보(徐俊輔)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下敎)하기를,
"사조(四朝)에 걸쳐 섬겨 과궁(寡躬)에까지 미쳐 나이 높고 덕(德)도 높았으니, 인서(人瑞)라 이를 만하겠도다. 지금 장서(長逝)하니, 상심(傷心)됨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졸한 판부사 서준보의 집에는 부의(賻儀)를 보내는 이외에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건을 후하게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7월 14일 기사
이종우(李鍾愚)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신소(申紹)를 삼도 수군 통어사(三道水軍統禦使)로 삼았다.
7월 15일 경오
우의정(右議政) 박회수(朴晦壽)가 재차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7월 18일 계유
이경재(李景在)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7월 21일 병자
윤치수(尹致秀)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7월 25일 경진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서상오(徐相五)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7월 26일 신사
임태영(任泰瑛)을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서대순(徐戴淳)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승휘(朴承輝)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삼았다.
7월 27일 임오
종묘(宗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니, 추알(秋謁)이었다.
7월 28일 계미
이희경(李熙絅)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7월 29일 갑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남(嶺南)의 수령(守令)으로서 그 소임을 감내하지 못하는 자는 파직시켜 보내고, 북도(北道)의 재호(災戶)를 연조(捐助)한 사람은 초사(初仕)로 차의(差擬)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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