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인
삭전(朔奠)에 조전(朝奠)을 겸행하였다.
신석우(申錫愚)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남병길(南秉吉)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2일 기묘
함경 감사 이인고(李寅皐)가 범월(犯越)한 죄인 김익수(金益壽)를 종성부(鍾城府)로 압송(押送)하여 효수(梟首)해 군중들을 경고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11월 5일 임오
홍우길(洪祐吉)을 이조 참의로, 정건조(鄭健朝)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1월 7일 갑신
조전(朝奠)에 동지 다례(冬至茶禮)를 겸행(兼行)하였는데, 친히 향(香)을 올렸다. 친히 향을 올린 글에 이르기를,
"아! 애통합니다. 자성(慈聖)께서는 어떻게 차마 소자(小子)를 버리시고 조금도 돌보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소자가 차마 자성의 얼굴을 영원히 이별하고 완명(頑冥)한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해야만 하겠습니까? 고생하며 보살펴 길렀으니 누군들 자모(慈母)의 은혜가 없겠습니까만, 어찌 자성께서 소자에게와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한없는 은혜를 보답하려는 것은 인자(人子)로서 다 같은 마음이겠으나, 그 누구가 소자가 자성에게와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아! 소자는 가정의 다난(多難)함을 만나 골고루 불행함을 겪었는데, 진실로 자성께서 재조(再造)하신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날을 보유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기유년117) 에 대책(大策)을 자성의 심중으로 결단하시어 갑자기 어렵고도 큰 왕업(王業)을 오랫동안 노고(勞苦)했던 저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한없이 위태로워 임금의 자리에 올라 일을 행함에 있어 두려워하며 저절로 놀랐는데, 다행히 우리 자성께서 염유(簾帷)를 드리우고 이에 임하시어 몸소 서정(庶政)을 도와주심을 힘입어 철류(綴旒)와 같은 위태로움을 전환시키고, 태산(泰山)·반석(盤石)과 같은 평안함을 조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물을 대우하는 가르침과 원대함을 이룰 계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스럽게 늘 ‘조선(祖先)을 본받고 어진 이를 친근하게 함은 우리 왕가(王家)의 아름다운 법규였다.’고 하교하셨으니, 진실로 경전(經傳)으로 날[縱絲]을 삼고 사책(史策)으로 씨[構絲]를 삼지 않으면 이를 이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언제나 책을 읽고 이치를 밝힘으로써 힘쓰도록 하셨습니다.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폐지하는 날에는 소자를 앞으로 나아오라 하시어 말씀하시기를, ‘내가 돌아가 선왕을 배알할 때 치모(治謨)의 성공과 실패를 무어라고 우러러 고하면 좋겠는가?’ 하시므로, 소자가 분부를 받들어 움츠리고 조심하였었는데, 지금에 미쳐 뒤좇아 생각건대 깊은 연못과 낭떠러지에 임한 것같이 조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아! 소자를 큰 허물에서 면하게 하여 오늘의 아름다움을 이룩하게 한 것은 모두 자성의 은혜이십니다. 근래에는 장락궁(長樂宮)118) 에 고요히 기거(寄居)하시면서 나라와 백성에 대한 일에는 고달프다 하여 조금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므로, 크고 작은 일을 품재(稟裁)함에 있어서 다 조용한 조칙(詔勅)에 의뢰하였습니다. 소자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항상 믿고서 두려움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만이니,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 소자는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효도를 다하지 못한 사사로운 비통을 당하였습니다. 궁중에 들어온 지 9년 동안 치우치게 우리 자성께서 귀여워하며 노고를 아끼지 않은 무육(撫育)을 받았으니, 한 번 먹고 한 번 입으며 한 번 말하고 한 번 조용히 함과 춥고 더울 때 철을 따라 몸을 조심하게 하며 일어나고 잠자는 것을 적당히 알맞게 한 모든 것은 자성께서 비호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질병으로 걱정을 끼쳤을 때에는 반드시 약과 음식을 몸소 점검하시며 날마다 마음에 걱정이 되어 촛불을 켜고 밤을 지새웠으니,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보살피는 것같이 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자가 불초(不肖)하여 비록 자성의 뜻을 우러러 체념(體念)하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 작은 정성을 다하여 외전(外殿)에서 시사(視事)가 있지 아니하면 슬하(膝下)를 떠나지 아니하고 좌우에서 부축하며 마음 기쁘게 받들었으니, 생명을 타고난 후에 비로소 인륜(人倫)의 즐거운 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소자의 변변치 못한 사가(私家)에까지도 은혜로 보답하심을 다하시어 극진하게 하지 않으심이 없었으니, 이것 역시 우리 자성께서 내려 주신 은덕(恩德)이었습니다. 하늘과 같이 높고 땅과 같이 두꺼운 은혜를 소자가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평일 조용하게 비는 것은 오직 자성의 보령(寶齡)이 더 높아질수록 자성의 체후(體候)가 더욱 강녕하시어 천승(千乘)의 봉양을 오래 누리시고 삼조(三朝)119) 의 기쁨을 길이 받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작년 여름에 건강을 회복하신 것은 실로 상천(上天)의 은밀히 안정시킴을 힘입은 것이었으니, 소자가 즐겁고 기뻐서 손모아 축하함이 어찌 한이 있었겠습니까? 금년 봄 기쁨을 알릴 때에는 겸억(謙抑)하시는 자성의 뜻을 우러러 순종하여 성대한 의식을 꾸미지는 못하였으나, 명년에는 풍성하게 드릴 기대가 있어 삼가 스스로 손가락을 꼽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불초한 소자가 성의가 없어서 신명(神明)에 죄를 얻어 축강(祝岡)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종천(終天)의 한을 만들었으니, 아! 애통합니다. 이것이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아! 태임(太任)·태사(太姒)의 성궁(聖躬)과 요(堯) 순(舜)의 덕행으로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김은 자성의 덕(德)이요, 육궁(六宮)120) 에서는 규갈(樛葛)121) 의 덕화(德化)를 칭송하고 팔역(八域)에 우로(雨露)의 함양(涵養)이 뻗쳐 미쳤음은 자성의 은택이요, 의리를 해나 별보다 밝게 하고 선악(善惡)을 곤월(袞鉞)122) 로 엄하게 하였음은 자성의 마음가짐이요, 두번이나 수렴 청정에 임하시어 영고(寧考)123) 께서 끝마치지 못하신 뜻을 돕고 나라의 거의 끊어지게 된 왕통을 계승케 한 것은 자성의 공이 사직(社稷)에 있음이니, 명철하고 성스러운 후비(后妃)가 옛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사적(史籍)에 없었던 지극히 인자하고 거룩한 공렬(功烈)이었습니다. 연달아 상사(喪事)의 슬픔을 당하여 오면서 항상 실망한 듯 즐거움이 적었으며 오랫동안 정섭(靜攝)하는 가운데 계시다가 백세(百歲)의 수(壽)를 누리지 못하시고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하늘이 대덕(大德)에 반드시 주게 된 수(壽)를 어찌 그렇게 인색하게 하십니까? 아! 애통합니다. 이에 아름다운 칭호를 추상(追上)하는 것이 어찌 자성의 덕(德)에 있어 반분지일이라도 칭양(稱揚)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황고(皇考)를 공(功)에 의거 조(祖)로 더 높이고 시호(諡號)를 고쳐 올리는 것은 이것이 떳떳한 도리를 따른 것으로, 조금이나마 옛을 슬퍼하고 지금을 애통해 하는 사정(私情)을 펴게 되었으니, 생각건대 자성의 충심(衷心)이 거의 명명(冥冥)한 가운데에 위로될 것입니다.
아! 인릉(仁陵)을 면봉(緬奉)한 것은 자성께서 여러 해를 두고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시던 바였습니다. 다행히 일을 착수하자 늘 궁전(宮殿)에서 남쪽의 먼 산봉우리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시기를, ‘저기가 나의 만년지택(萬年之宅)이라’고 하셨었는데, 마침내 묘도(墓道)를 같이하게 된 것은 자성의 뜻이 있었음을 받들은 것으로, 하늘이 유도하고 운(運)이 화협하여 예(禮)에 의거 장차 합부(合祔)함에 있어 상석(象石)의 설치가 이미 같아 월혼(月魂)이 노니는 데 간격이 없을 것이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 거의 유감이 없겠습니까? 아! ‘경천법조근학애민(敬天法祖勤學愛民)’ 여덟 글자를 마음에 전수(傳授)한 부명(符命)은 이것을 소자가 한평생 마음에 아로새겼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자성의 교훈을 어느 곳에서 다시 받들겠으며 자성의 은혜를 어느 곳에서 다시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외로운 소자가 무엇을 믿고 살겠으며, 어디에 힘입어 국사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을 우러러보고 굽어본들 미칠 바가 없어, 말을 하려 하여도 소리가 막히고 글을 쓰려고 하니 창자가 억눌려, 피 섞인 눈물을 닦으면서 대략 지극히 애통한 속마음을 호소하오니, 혼령께서는 강림(降臨)하사 불쌍히 여기는 민휼(憫恤)을 드리우소서. 아! 슬픕니다. 아! 애통합니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大臣)과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공묵각(恭默閣)에서 소견(召見)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내년은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124) 의 보령(寶齡)이 51세가 되는 해입니다. 전하께서 천명(天命)을 아는 해의 기쁨과 신료들의 축강(祝岡)하는 정성을 어떻게 형용하여 주달할 수 있겠습니까? 전에부터 늘 자전(慈殿)이 51세가 되는 해를 당하면 미리 동짓날에 대신과 예조 당상이 내년의 경사를 치를 예(禮)를 앙청(仰請)하는 것이 문득 통상적인 준례가 되었으므로 신 등이 지금 이에 서로 거느리고 등대(登對)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명년은 대왕 대비전의 보령이 51세이시다. 마땅히 경사를 치르는 예가 있어야 하겠기에 내전에서 여러 번 앙청하였더니, ‘지금 한없이 애통하여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경사를 치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시면서 끝내 윤유(允兪)하심을 아끼시니, 나의 도리에 있어 또한 감히 승순(承順)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신 등이 봄·여름 이후로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오늘을 기다린 것은 진실로 중첩되는 경사가 세초(歲初)에 모여 있는 까닭에 장차 서로 인솔하고 등대하여 풍성(豐盛)하게 드리는 거사를 아울러 청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보건대 중첩되는 경사를 끌어당길 곳이 없이 되었으나, 자전의 보령이 51세가 되심은 만나기 드문 성대한 기회입니다. 옥책문(玉冊文)을 올리고 휘호(徽號)로 나타내어 알려 반포하고 갖추어 선양(宣揚)한 것은 우리 왕가(王家)에 고사(故事)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이 예강(預講)하는 의식을 장차 태세(太歲) 삼시(三始)125) 이후에 행하려 하는데, 이때의 상고(喪故) 때문에 고려(考慮)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습니다. 지금 성유(聖諭)를 받드니, ‘자전의 뜻이 끝내 윤허하심을 아낀다.’고 하교하시니, 다시 정성을 다하여 간곡히 기원하여 자전의 충심(衷心)을 힘써 만회하시기를 천만 바라옵니다."
하자, 임금은 눈물이 솟아 옷을 적시고 실성(失聲)하여 울부짖었으며, 군신(群臣)들은 감회와 슬픔이 합쳐져서 모두 울부짖었다. 한참 만에 임금이 눈물을 닦고 목이 메어 하교하기를,
"대행 자성(大行慈聖)의 보령이 70세 되는 해가 곧 명년에 있기에 마음속으로 축원하기를 동짓날에는 경사를 꾸미는 예를 의논하여 행하려 하였는데, 이제는 그만이니 어느 곳에 미치겠는가? 나 한 사람이 하늘에 죄를 얻어서 이런 재앙이 내린 것이니, 지금 이날을 당하여 또 어떻게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구구(區區)한 정리(情理)는 갈수록 애절하나, 애사(哀事)와 경사(慶事)는 예가 다르니, 비록 이번 망극(罔極)한 중일지라도 여러 번 간곡하게 진달하여 윤허를 받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전에서 이미 여러 번 진달하였으나, 끝내 윤허하는 하교를 받지 못하였다. 자전의 정리(情理)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떻게 한결같이 억지로 청할 수 있겠는가? 지금 할 수 있는 도리는 정문(情文)을 짐작하여 단지 표리(表裏)126) 만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지금 자전의 수(壽)를 경축하는 기회를 당하여 신 등의 마음도 역시 옛일을 슬퍼하고 지금을 애통해 하는 감회를 견디지 못하겠는데, 자전의 정리로써 어찌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애사와 경사는 예가 다르니, 신 등은 그에 대하여 힘써 만회할 것을 연달아 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자전의 분부가 지극히 간절하여 내가 감히 다시 번거롭게 주달하지 못하겠으나, 알리어 반포하는 절차는 마땅히 예조(禮曹)로 하여금 마련하게 하겠다."
하고, 분부하기를,
"명년은 대왕 대비전의 보령이 51세가 되시는 해이다. 마땅히 경사를 꾸미는 예를 거행하여 송축(頌祝)하는 정성을 펴야 되겠기에 내전에서 여러 번 앙청하였으나 이때가 한없이 애통하여 허둥지둥하는 중이라서 끝내 힘써 따른다는 윤음(綸音)을 아끼시니, 지금에 와서 할 도리는 승순(承順)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정월 초하룻날에 의당 단지 표리만 올릴 것이니, 알려서 반포하는 절차를 예조로 하여금 마련해 들이게 하라."
하였다.
11월 9일 병술
하교하기를,
"나 소자(小子)가 큰 상사(喪事)를 당한 이후 외롭고 애통한 마음이 그칠 바가 없었는데, 일전 빈전(殯殿)에 향(香)을 올리고는 더욱 원통하여 사모함이 간절하였으니, 우리 자성(慈聖)의 하늘에 계신 영혼께서도 또한 마땅히 권권(眷眷)하게 그리워하실 것이다. 그런데 지극히 애통한 가운데 놀라고 애통해 하며 슬퍼하는 것은 신(神)과 사람이 같은 이치일 것이기에,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127) 내외의 사판(祠版)에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여 나의 하찮은 사사로운 정리를 조금이나마 펴고자 한다. 제문(祭文)은 마땅히 내가 지어서 내릴 것이니, 졸곡(卒哭)을 지난 뒤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평안남도 암행 어사 이정현(李正鉉)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전(前) 중화 부사(中和府使) 조존천(趙存天), 전(前) 순천 군수(順天郡守) 박정하(朴貞夏), 영원 군수(寧遠郡守) 이긍래(李兢來), 함종 부사(咸從府使) 이공렴(李公濂), 전 성천 부사(成川府使) 윤병정(尹秉鼎), 전 증산 현령(甑山縣令) 김상현(金尙鉉), 전 은산 현감(殷山縣監) 김영수(金永秀), 전전(前前) 개천 군수(价川郡守) 이교승(李敎承), 전 용강 현령(龍岡縣令) 김면근(金勉根), 전전 현령(縣令) 이용직(李容直), 전 양덕 현감(陽德縣監) 심혜수(沈蕙秀), 전 대동 찰방(大同察訪) 윤돈(尹潡), 전전 병사(兵使) 김상우(金相宇), 전전 중군(中軍) 제안국(諸安國) 등을 죄주고, 맹산 현감(孟山縣監) 임오상(任五常)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이제달(李濟達)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0일 정해
이원하(李元夏)를 우변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11월 13일 경인
하교하기를,
"지난번 능원관(陵園官)을 처분함에 있어 신칙하는 법령을 이미 내렸는데, 참상(參上)을 수령(守令)에 의망(擬望)하지 말고 참하(參下)의 퇴사(退仕)를 모두 분간(分諫)하도록 하라. 관대하게 용서하는 이 은전(恩典)으로 인하여 만일 혹시라도 방심(放心)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조심해서 금호(禁護)하지 않았다가 또 귀에 들려오는 바가 있으면 결단코 형률에 의해 감처(勘處)할 것이니, 이를 자세하게 알아 두라."
하였다.
이공익(李公翼)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15일 임진
망전(望奠)에 조전(朝奠)을 겸행하였다.
이근우(李根友)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17일 갑오
홍재철(洪在喆)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18일 을미
경기 암행 어사(京畿暗行御史) 홍종운(洪鍾雲)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전(前) 장단 부사(長湍府使) 정제성(鄭濟成), 전 용인 현령(龍仁縣令) 김명근(金命根), 파주 목사(坡州牧使) 김선항(金善恒), 전 목사(牧使) 이주응(李周膺), 양근 군수(楊根郡守) 홍우현(洪祐賢), 전 죽산 부사(竹山府使) 박성수(朴性秀), 전전(前前) 부사(府使) 이종응(李鍾應),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원식(李源植), 전 안산 군수(安山郡守) 이규창(李圭昌), 전 음죽 현감(陰竹縣監) 이완(李浣), 전전(前前) 현감(縣監) 원강(元絳), 경안 찰방(慶安察訪) 정창휴(鄭昌休), 덕적 첨사(德積僉使) 정길철(鄭吉徹)을 죄줄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11월 19일 병신
송내희(宋來熙)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11월 20일 정유
함인정(涵仁亭)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우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식년(式年)마다 경전(經傳)에 밝고 조행(操行)이 독실한 이재(吏才)의 추천을 별도로 여러 도신(道臣)에게 신칙하여 널리 찾아내어 명성과 실상이 상부(相孚)한 사람을 반드시 추천에 오르게 하고, 전관(銓官)의 선임(選任)에 이르러서도 역시 한갓 문벌(門閥)과 분경(奔競)에 구애하지 말고 공평한 천거를 넓히는 데 힘쓸 뜻으로 분부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문벌과 분경하는 데 구애됨이 없게 하는 것은 어찌 유독 전관의 선임만 그러하겠는가? 먼저 도천(道薦)에서 반드시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뽑되, 먼 곳과 가까운 곳을 골고루 하고 명성과 실상이 서로 맞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칙사(飭使)의 행차 때 문례관(問禮官)128) 은 의주(儀註)를 가져다 전할 뿐입니다. 그런데 부질없이 갔다왔다하여 단지 주전(廚傳)129) 과 역체(驛遞)130) 의 폐단만 끼치고 있으니, 지금부터 해도(該道)에서 도내의 당하 수령(堂下守令)으로 예관의 직함(職銜)을 빌리도록 하여 달려가 거행하게 하고, 의주는 원접사(遠接使)가 가져가서 차함(借銜)한 예관에게 전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윤치수(尹致秀)가 아뢰기를,
"향실(香室)에 입직(入直)하는 국자감(國子監)131) ·운각(芸閣)132) 의 참하관(參下官)은 사람이 부족하여 늘 혼자 입직할 때가 많으므로, 반드시 임시로 대신할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운각의 참하관 이외의 사람으로 사일(仕日)을 계산하여 입직시키되, 먼저 1주년으로 한정하여 그들의 출사한 일수의 다소에 따라 겸사(兼仕)·수사(首仕)를 외방의 우역(郵驛)으로 차송(差送)하는 예에 의하여 참하관의 찰방(察訪)인 창락(昌樂)·경양(景陽)·오수(獒樹)의 세 자리 중에서 변통하는 내용으로 정식(定式)을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니, 대신에게 하순(下詢)하소서."
하자, 그대로 따랐다.
원세현(元世顯)을 충청도 병마 절도사로, 심의풍(沈宜豊)을 전라도 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1월 24일 신축
이경재(李景在)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11월 25일 임인
산릉(山陵)에 금정틀[金井機]을 놓고 광중(壙中)을 파내는 공역을 사시(巳時)로 정하였다.
산릉(山陵)에 나아갔던 대신(大臣) 이하를 공묵합(恭默閤)에서 불러 접견했는데 산릉의 금정(金井)을 판 뒤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영부사(領府事) 정원용(鄭元容)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지금 전석(前席)에 나아왔으니 우러러 진달할 일이 있습니다. 인산(因山)을 봉(封)하는 길일(吉日)이 멀지 않았는데 전하(殿下)께서 대여(大轝)를 수행(隨行)하시겠다는 명이 있으셨으므로 경외(京外)에서 지금 바야흐로 거행하고 있습니다. 성명(成命)이 있으심으로부터 신은 마음속으로 감격하여 칭송하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평일 자전(慈殿)께서 성덕(聖德)으로 성궁(聖躬)을 정성스럽게 돌보신 것은 신 등이 늘상 듣고 본 것입니다. 전하께서 자전의 은혜를 하늘보다도 넓고 크게 여기시는 정리로서 이 마지막을 섬기는 때를 당하였으리, 상례(喪禮)에 속한 모든 것은 반드시 마음을 하려 하실 것인데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있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 등이 우리 임금의 탁월한 효성(孝誠)을 보니 마음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근래 대소(大小) 관원들이 우려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실로 곧바로 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은 도리(道理)와 사세(事勢) 이 두 조항이 있을 뿐입니다. 도리에 의거한다면 전하께서 상요를 수행하시는 것이 진실로 정례(情禮)에도 합치되고 성효(誠孝)도 펼 수 있게 되니, 이는 전하의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추위를 범촉했다가 성궁(聖躬)에 손상을 받게 되는 것이 군정(群情)이 초조해 하고 걱정하는 것이어서 반드시 도로 중지할 것을 청하게 된 것이니, 이는 신 등이 해야 할 당연한 도리인 것입니다. 일에도 도리상 당연히 먼저 해야 할 것이 있고 사세상 당연히 먼저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사세에 의거한다면 예(禮)는 인산(因山)을 봉(封)하는 예(禮)보다 더 중한 것이 없는데 의문(儀文)과 품식(品式)이 이미 번거롭고도 중대하지만 반드시 성심껏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여 후회가 없게 하도록 대소 군공(群工)들이 정신(精神)을 모으고 심력(心力)을 한결같이 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빠뜨리는 것이 있지 않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여(大轝)133) 를 받들고 능소(陵所)에 갈 적에 성가(聖駕)가 수행하여 임어하신다면 분주하게 공봉(供奉)하느라 힘이 나뉘어지기 쉽게 됩니다. 그리고 배위(陪衛)하는 종관(從官)들부터 군졸(軍卒)·도례(徒隷)에 이르기까지 거주할 저사(邸舍)도 없고 식사를 할 전시(廛市)도 없는데 육주야(六晝夜)를 한데 거처하면서 굶주리고 떨게 되면 반드시 손상되는 사람이 많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갔다가 들은 여러 가지 의논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제 하속(下屬)들이 손상받는 것 때문에 임금의 가행(駕行)을 정지할 것을 청하는 것이 어찌 아랫사람의 도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상(聖上)께서 아랫사람을 몸처럼 여겨 진휼(軫恤)하는 정사에 있어서는 또한 선처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명철한 군주(君主)는 이를 수행했던 일이 없고 우리 열성(列聖)들의 하늘에 뿌리한 효성으로서도 이를 수행했던 일이 없는 것은 또한 사세에 연유되어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오직 우리 영묘(英廟)께서 정축년134) 에 수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능소(陵所)가 30리였고 계절은 7월이어서 사세가 수행해도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신(廷臣)들도 정지할 것을 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만 지금은 사세가 실로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진실로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신 등이 어찌 성상께서 예제(禮制)를 극진히 하려는 효성에 대해 누가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여(大轝)를 수행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관(下棺)할 때에는 어찌 나아가서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봄이 된 뒤 즉시 전성(展省)을 행하시면 성충(誠衷)도 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관할 때에도 나아가 참여하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눌 수 있겠는가? 이는 정(情)에서 발로된 것으로 전혀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성심(聖心)이 간절하고 지극하시어 누차 정리(情理)에 의거하여 하교하시니, 신 등이 받들어 듣건대 목이 메어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당일 동가(動駕)해도 제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찍 출발하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원용이 아뢰기를,
"하관할 때에 도착하면 성효(誠孝)를 펴는 것이 대여(大轝)를 수행한 것과 다름이 없으며 군정(群情)도 반드시 서로들 기뻐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음날 반우(返虞) 때 신여(神轝)를 따라 환궁(還宮)하도록 한다면 이는 낮에 다니는 것이니,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자, 정원용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대가(大駕)가 먼저 돌아온다면 마땅히 지영(祗迎)하는 예절(禮節)이 있어야 하는데 신여를 따라 환궁한다면 더욱 정례(情禮)에 있어 흠족한 일입니다."
하였다.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양전건(涼轉巾)은 신 등이 이미 반사(頒賜)받았습니다만 백관에 대해서는 아직 일정(一定)한 명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의장(儀章)이니 의당 귀일된 제도(制度)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정원용은 아뢰기를,
"이것은 추위를 막는 제구입니다. 착용하게 되어 있는 것은 본디 이엄(耳掩)인데 연전(年前)에는 또 하교를 인하여 풍차(風遮)를 착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이 양전건을 착용하게 하였으니 아울러 통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엄은 구제(舊制)이니 지금의 양전건과 통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대신(大臣)들의 간청이 이러하니, 대여(大轝)를 수행하는 절차는 버려두라. 17일 하관(下棺)할 때 나아가 참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26일 계묘
발인(發靷)할 때의 봉사(奉辭)는 을축년135) 의 전례에 의거하여 하관할 때 친림(親臨)할 것이니, 출궁(出宮)할 때의 복색(服色)은 최복(衰服)으로 마련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동래 부사(東萊府使) 남종순(南鍾順)의 장계(狀啓)를 인하여 도주(島主)의 아들이 승적(陞嫡)한 일로써 문위사(問慰使)를 바다를 건너게 해달라고 청하기 위해 온 재판 차왜(裁判差倭)에게 효유(曉諭)하여 환송(還送)시킬 것을 초기(草記)로 행회(行會)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해부사(該府使)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훈도(訓導) 별차(別差) 등의 수본(手本)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단건(單件)의 일 때문에 바다를 건너간 것은 일찍이 그런 전례가 없다는 것으로 엄한 책유(責諭)를 가하자 차왜 등이 다시 청하기를 「강희(康熙)무오년136) 에 도주(島主)가 환도(還島)하고 도주의 아들이 승적(陞嫡)했을 때 둘이 나란히 바다를 건넌 전례가 있는데 어찌하여 단건(單巾)은 전례가 없다하여 낙막(落莫)한 데로 귀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다시 엄히 계칙(戒飭)하여 돌려 보내도록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단건의 일로 바다를 건넌 것이 비록 수백 년에 겨우 한번 있었던 일이지마는 이미 이를 끌어 대어 전례로 내세운다면 지금 곧바로 전례가 없다는 것으로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유관(留館)한 재판 차왜를 허접(許接)하게 하고 단건의 일로 바다를 건넌 전례에 의거하여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역관(譯官)을 차임하여 봄이 되는 즉시 들여보내게 하고 서계(書契)·예단(禮單)·반전(盤纏) 등은 해조(該曹)·해도(該道)에 분부하여 전례를 살펴 거행하게 하며, 배도 만들 것을 신칙(申飭)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연전(年前)에 하마터면 경복(傾覆)될 뻔했던 것이 상기도 놀라운 일이었으니, 각별히 통제사(通制使)에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11월 28일 을사
강원도 암행 어사 이경호(李京鎬)를 불러서 접견하고 서계(書啓)에 의하여 간성(杆城)의 전 군수(郡守) 이용학(李容學), 통천 군수(通川郡守) 오치기(吳致箕), 평해 군수(平海郡守) 홍우석(洪祐錫) 전 군수(郡守) 오규환(吳奎煥), 울진 현감(蔚珍縣監) 서우순(徐瑀淳), 회양(淮陽)의 전 부사(府使) 유흥길(柳興吉), 양양(襄陽)의 전 부사(府使) 김상일(金商一), 영월(寧越)의 전 부사 김진우(金鎭右), 인제(麟蹄)의 전 현감 김현초(金顯初), 상운(祥雲)의 전 찰방(察訪) 김병주(金秉周) 등은 죄주고, 삼척 부사(三陟府使) 조병문(趙秉文)은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하였다.
11월 29일 병오
경기(京畿) 유생(儒生) 이연긍(李淵兢)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니, 비담(批答)하기를,
"충문(忠文)과 같은 경술(經術)·덕업(德業)·사공(事功)으로 이 서원에 추배하자는 의논이 나온 것은 오히려 늦은 것이다. 청한 대로 시행하겠으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學業)을 연마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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