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0권 철종9년 1858년 2월

싸라리리 2025. 5. 7. 08:49
반응형

2월 1일 정미

일식(日食)이 있었다.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뢰기를,
"중국의 칙사(勅使)가 감기 때문에 머물러 조섭(調攝)하여 노정(路程)을 다시 마련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청컨대 예(例)에 의하여 문위사(問慰使)를 차송(差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정최조(鄭㝡朝)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2월 3일 기유

함경도 암행 어사(咸鏡道暗行御史) 홍승유(洪承𥙿)를 소견(召見)하였으니,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관연(李觀淵), 전전(前前) 목사(牧使) 심의풍(沈宜豐), 전(前) 안변 부사(安邊府使) 심돈영(沈敦永), 전 경원 부사(慶源府使) 백낙찬(白樂贊), 전 후주 부사(厚州府使) 조용하(趙用夏), 전전 문천 군수(文川郡守) 윤만선(尹萬善),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규용(李圭容), 갑산 부사(甲山府使) 조문현(趙文顯), 전 경흥 부사(慶興府使) 이희영(李熙永), 전 덕원 부사(德源府使) 오택선(吳宅善), 전 무산 부사(茂山府使) 원계(元棨), 전 정평 부사(定平府使) 이석(李鉐), 전 홍원 현감(洪原縣監) 구열(具冽) 등을 죄주고, 함흥 판관(咸興判官) 김병연(金炳淵)을 포장(褒奬)하여 승서(陞敍)할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칙사(勅使)의 행차가 중도에서 그대로 머문 것이 이미 여러 참(站)입니다. 문위 예랑(問慰禮郞)이 이미 내려갔더라도 별도로 위로의 말이 없을 수 없습니다. 좌승지 박내만(朴來萬)을 별문위사(別問慰使)로 차하(差下)하여 어첩(御帖)을 받들고, 만나는 곳에까지 한정하고 달려가서 격식 외의 뜻을 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문위사(問慰使)를 차하(差下)하였지마는 또 별도의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니, 곧바로 어의(御醫)로 하여금 삼료(蔘料)를 가지고 내려가게 하라."
하였다.

 

2월 5일 신해

약원(藥院)에서 희정당(熙政堂)에 입진(入診)하였다.

 

2월 6일 임자

인정전(仁政殿)에서 춘도기(春到記)를 행하여, 강(講)에 유학(幼學) 이상수(李尙壽)·신명화(申命和)를, 부(賦)에 진사(進士) 신단(申檀), 유학(幼學) 이승오(李承五)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도록 하였다.

 

2월 7일 계축

김정집(金鼎集)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2월 9일 을묘

심낙신(沈樂臣)을 좌변 포도 대장(左邊捕盜大將)으로 삼았다.

 

2월 10일 병진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영접하였다.

 

칙사(勅使)가 혼전(魂殿)에게 제사를 행하였다.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다.

 

2월 11일 정사

관소(館所)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접견하였다.

 

김병국(金炳國)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조병기(趙秉夔)를 총융사(摠戎使)로, 남병철(南秉哲)을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삼았으니, 조병기·남병철은 모두 중비(中批)였다.

 

2월 12일 무오

하교하기를,
"칙사(勅使)의 병이 비록 이미 나아간다 하더라도, 어의(御醫)는 해당하는 약물(藥物)을 가지고 호송(護送)하라."
하였다.

 

2월 13일 기미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를 전송하였다.

 

2월 15일 신유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2월 16일 임술

김보현(金輔鉉)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백낙신(白樂莘)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삼았다.

 

2월 18일 갑자

홍낙순(洪樂純)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2월 20일 병인

희정당(熙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북평사(北評事)의 육진 순력(六鎭巡歷)을 파하여 민폐(民弊)를 제거하였으니, 대신(大臣)의 주청(奏請)으로 인한 것이었다. 호군(護軍) 이공익(李公翼)·신석우(申錫愚), 도승지(都承旨) 이종우(李鍾愚)를 발탁하여 정경(正卿)으로 삼았다.

 

오취선(吳取善)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이흥민(李興敏)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신석희(申錫禧)를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

 

소대(召對)하였다.

 

2월 21일 정묘

소대(召對)하였다.

 

유장환(兪章煥)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홍순목(洪淳穆)을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박제헌(朴齊憲)을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삼았다.

 

2월 22일 무진

소대(召對)하였다.

 

심경택(沈敬澤)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이종우(李鍾愚)를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조휘림(趙徽林)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23일 기사

효정전(孝正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2월 24일 경오

소대(召對)하였다.

 

유광로(柳光魯)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로, 이원희(李元熙)를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로, 이제도(李濟道)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삼았다.

 

청북 암행 어사(淸北暗行御史) 이건필(李建弼)을 소견(召見)하였으니, 감사(監司) 서염순(徐念淳), 전(前) 의주 부윤(義州府尹) 한경원(韓敬源), 전전(前前) 부윤(府尹) 이풍익(李豐翼), 전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재학(李在鶴), 전전 정주 목사(定州牧使) 홍익섭(洪翼燮), 곽산 군수(郭山郡守) 최승조(崔承祖)를 죄줄 것을 서계(書啓)한 때문이었다.

 

2월 25일 신미

소대(召對)하였다.

 

황해 감사(黃海監司) 남병길(南秉吉)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2월 26일 임신

소대(召對)하였다.

 

2월 27일 계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헌구(李憲球)를 소견(召見)하고 이르기를,
"경은 3조(三朝)013)  를 두루 섬기면서 지위가 삼공(三公)에 올랐고, 나이가 70을 넘어 회혼(回婚)에 가까웠으니, 경의 복록(福祿)은 세상에서 희귀(稀貴)하며, 진실로 국가의 아름다운 상서(祥瑞)이다. 때문에 궤장(几杖)을 내려주어 조금이나마 노인(老人)을 우대하는 뜻을 표한다."
하였다. 특별히 약료(藥料)를 하사(下賜)하고 말하기를,
"이것으로 병을 조섭하는 자료로 삼으라."
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평양부(平壤府)의 표류(漂流)한 민호(民戶)에게 휼전(恤典)을 주었다.

 

2월 29일 을해

소대(召對)하였다.

 

2월 30일 병자

소대(召對)하였다.

 

윤치수(尹致秀)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담양(潭陽)·진안(鎭安)·용담(龍潭) 등 읍(邑)의 소실(燒失)된 민호(民戶)에 휼전(恤典)을 주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