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철종실록13권 철종12년 1861년 1월

싸라리리 2025. 5. 1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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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일 신묘

신석희(申錫禧)를 도총관(都總管)으로, 이휘령(李彙寧)을 부총관(副摠管)으로 삼았으니, 모두 중비(中批)001)  에 의한 것이었다.

 

조헌영(趙獻永)을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박제소(朴齊韶)를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1월 5일 갑오

종묘(宗廟)에 나아가 재숙(齋宿)하였다.

 

1월 6일 을미

종묘(宗廟) 춘향(春享)을 행하고, 순조 대왕(純祖大王)과 순원 왕후(純元王后)를 추상(追上)하는 존호(尊號)와 책보(冊寶)002)  를 올렸다.

 

1월 7일 병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김병연(金炳淵)을 이조 참의로 삼았으니, 중비(中批)에 의한 것이었다.

 

하교하기를,
"책보(冊寶)를 올릴 때의 예방 승지(禮房承旨) 김보현(金輔鉉)과 대거 승지(對擧承旨) 정건조(鄭健朝)·조귀하(趙龜夏), 그리고 진하(陳賀)할 때의 좌통례(左通禮) 백종걸(白宗杰)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게 하라."
하였다.

 

명하여 기로과(耆老科)003)  에 급제한 사람에게 모두 한 자급씩 특별히 더하였다.

 

1월 8일 정유

반궁(泮宮)004)  에서 인일제(人日製)005)  를 행하여, 부(賦)에 진사(進士) 심상한(沈相漢)·유학(幼學) 이심재(李心宰)를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상호 도감 도제조(上號都監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고, 제조(提調) 행 이조 판서(行吏曹判書) 김학성(金學性), 예조 판서 이유원(李裕元)과 도청(都廳)인 부사과(副司果) 서상익(徐相翊)·이근필(李根弼)과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인 대호군(大護軍) 이종우(李鍾愚), 독옥책관(讀玉冊官)인 호군(護軍) 임백수(任百秀)·이조 참판 이의익(李宜翼), 독금보관(讀金寶官)인 행 호군(行護軍) 이진익(李晉翼), 예조 참판 황호민(黃浩民)은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친제(親祭) 때의 아헌관(亞獻官)과 종묘 도제조(宗廟都提調)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황호민(黃浩民)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김영기(金永基)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용은(李容殷)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윤자승(尹滋承)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월 10일 기해

경모궁(景慕宮)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는 인하여 경우궁(景祐宮)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사우(祠宇)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은언군(恩彦君)의 사우에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조득림(趙得林)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경행(經行)이 현저한 사람인 전(前) 정(正) 임헌회(任憲晦)와 가감역(假監役) 이민덕(李敏德)을 초선(抄選)하여 경연관(經筵官)으로 삼았다.

 

1월 11일 경자

김학성(金學性)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삼았다.

 

1월 12일 신축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인하여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신관호(申觀浩)를 삼도 수군 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이명학(李明學)을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월 13일 임인

심순택(沈舜澤)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이승오(李承五)를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정범조(鄭範朝)를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로 삼으니, 전망(前望)에 의한 것이었다. 이종우(李鍾愚)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명하여 충민공(忠愍公) 김제겸(金濟謙)에게 부조(不祧)의 전(典)006)  을 베풀게 하니, 묘당(廟堂)에서 유소(儒疏)로 인하여 품복(稟復)한 데 따른 것이었다.

 

1월 15일 갑진

인시(寅時)에 귀인(貴人) 조씨(趙氏)가 생남(生男)하였다.

 

1월 16일 을사

좌의정 조두순(趙斗淳)이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니, 비답을 내려 면부(勉副)하였다.

 

판부사(判府事) 박회수(朴晦壽)를 상직(相職)에 다시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김기만(金箕晩)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정(李珽)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18일 정미

열하사(熱河使) 【정사(正使) 조휘림(趙徽林), 부사(副使) 박규수(朴珪壽), 서장관(書狀官) 신철구(申轍求)이다.】 를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1월 21일 경술

좌의정 박회수(朴晦壽)가 진소(陳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2일 신해

하교하기를,
"대비(大比)007)  가 멀지 않았다. 작년 가을에 신칙한 하교가 이미 엄중하고도 간절하였으니, 무릇 그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반드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대양(對揚)008)  할 줄로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혹시 이를 배반하면 그 어찌 인신(人臣)의 의(義)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사자(士子)로 말하더라도 공령(功令)에 힘쓰지 않고 한갓 부정만을 일삼음이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도도(滔滔)하게 그러하니, 조금이라도 스스로 잘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어찌 그들과 대오(隊伍)를 즐겨 하겠는가? 이런데도 구습(舊習)을 통렬하게 고치지 않으면 강기(綱紀)를 펼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시험을 주관하는 자의 공정하고 공정하지 않는 데 있으니, 경시관(京試官)이 차출(差出)되기를 기다려 묘당(廟堂)에서 대면해 신칙하여 보내고, 또한 이런 뜻을 각도의 도신(道臣)과 평사(評事)가 있는 곳에 행회(行會)009)  하게 하라."
하였다.

 

홍석종(洪奭鍾)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1월 24일 계축

좌의정 박회수(朴晦壽)가 재소(再疏)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관록(館錄)을 행하여, 한치용(韓致容)·기경현(奇慶鉉)·이돈우(李敦禹)·정현덕(鄭顯德)·유도휘(柳道彙)·이운익(李雲翼)·홍순학(洪淳學)·김익현(金翼鉉)·조병식(趙秉式)·임승준(任承準)·이인명(李寅命)·정기회(鄭基會)·이정로(李正魯)·신단(申檀)·윤우석(尹宇錫)·윤태건(尹泰健)·조성교(趙性敎)·김원성(金元性)·박이도(朴履道)·홍철주(洪澈周)·송철만(宋徹萬)·이기정(李基正)·강건(姜鍵)·임희진(林喜鎭)·이응진(李應辰)·김민수(金民秀)·민희식(閔羲軾)을 뽑았다.

 

1월 25일 갑인

함경 감사 조연창(趙然昌)을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1월 26일 을묘

강원 감사 김병지(金炳地)를 소견(召見)하였으니, 사폐(辭陛)한 때문이었다.

 

1월 29일 무오

흥정당(興政堂)에서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포저(苞苴)010)  의 유행이 지금도 과연 있는가? 포저가 성행하면 그 피해가 백성에게 돌아가지 않고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임영수(任永洙)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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