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10권 헌종9년 1843년 8월

싸라리리 2025. 5. 29. 10:27
반응형

8월 2일 임인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장진부(長津府)를 장진진(長津鎭)으로 고치고 부사(府使)를 첨사(僉使)로 고쳤으며, 여러 가지 포곡(逋穀) 1만 4천 석 영을 탕감하였다. 장진은 본디 진보(鎭堡)이었는데, 고을을 설치한 이래로 요역(徭役)이 많아서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지므로, 이때에 이르러 도계(道啓)와 묘주(廟奏)에 따라 이 명이 있었다.

 

8월 3일 계묘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경모궁(景慕宮)의 추향(秋享)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하였다.

 

김난순(金蘭淳)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삼았다.

 

8월 9일 기유

임금이 수릉(綏陵)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이날은 익종(翼宗)의 탄신(誕辰)이다. 지난밤부터 비가 크게 내리고 그치지 않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도로와 수세(水勢)를 알아보게 하였더니, 물에 빠져 말이 건널 수 없었다. 대신(大臣)·정원(政院)·옥당(玉堂)이 번갈아 글을 올려 그만두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신시(申時)가 되어 비가 조금 그치니, 임금이 드디어 출궁(出宮)하여 능소(陵所)에 가서 예(禮)를 행하였다. 환궁(還宮)하였을 때에는 날이 이미 어둑어둑하였다.

 

8월 11일 신해

수릉(綬陵)에 친제(親祭)하였을 때의 집례(執禮)인 부사과(副司果) 김덕희(金德喜), 대축(大祝)인 부사과 이우(李㘾),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계조(李啓朝)에게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8월 16일 병진

인정전(仁政殿)에서 일차 유생 전강(日次儒生殿講)을 행하였다.

 

8월 20일 경신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召對)하였다.

 

이규현(李奎鉉)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으니, 가망(加望)025)  이다.

 

지경연(知經筵) 박기수(朴綺壽)가 다섯 번째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이목연(李穆淵)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8월 24일 갑자

중궁전(中宮殿)에 환후가 있으므로, 약원(藥院)에 명하여 번갈아 입직(入直)하게 하였다.

 

영흥 부원군(永興府院君)에게 명하여 특별히 입직하게 하였다.

 

민치성(閔致成)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삼았다.

 

8월 25일 을축

약원(藥院)에 명하여 모두 입직하게 하였다.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중비(中批)로 김흥근(金興根)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삼았다.

 

중궁전(中宮殿)이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궁성(宮城)을 호위(扈衛)하라고 명하였다.

 

8월 26일 병인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행 왕비(大行王妃)의 상(喪)에 대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의 복제(服制)는 삼가 국조상례보편의 수교(補編受敎)에 따라 시마 삼월(緦麻三月)로 마련하였습니다."
하였다.

 

심의승(沈宜升)을 고부사(告訃使)로, 서상교(徐相敎)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