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5월 1일 을유
이유수(李惟秀)를 총융사(摠戎使)로, 허계(許棨)를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윤5월 2일 병술
홍학연(洪學淵)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오치현(吳致賢)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이경달(李敬達)을 황해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윤5월 6일 경인
하교하기를,
"순종(純宗)·익종(翼宗) 양조(兩朝)의 어진(御眞)은 진전(眞殿)에 들여 봉안해야 할 것이니, 증수(增修)하는 절차를 해조(該曹)로 하여금 택일(擇日)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윤5월 11일 을미
임금이 수릉(綏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백포 융복(白布戎服)을 갖추고 현궁(玄宮)에서 내어 정자각(丁字閣)에 봉안하였다.
환궁(還宮)하였다.
윤5월 12일 병신
약원(藥院)에서 구계(口啓)하여 상선(常膳)을 들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윤5월 13일 정유
약원에서 다시 아뢰니, 비답하기를,
"두 자전(慈殿)께 드시기를 권하는 데 급하였고, 또 여러 번 자교(慈敎)를 받았으므로, 마지못하여 경(卿)들의 청을 애써 따른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17일에 계빈전(啓殯奠)을 친히 행하고, 18일에 여(轝)를 수종(隨從)하고, 20일에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환궁(還宮)할 것이니, 이에 따라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14일 무술
하교하기를,
"상선(常膳)을 회복하라는 청은 이미 애써 따랐으나, 망일(望日)과 18일·20일에는 소선(素膳)을 봉진(封進)하라고 해원(該院)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15일 기해
임금이 수릉(綏陵)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서 망전(望奠)과 친진향(親進香)을 행하였다. 친진향문(親進香文)에 이르기를,
"아! 소자(小子)가 태어날 때에 부명(賦命)이 매우 기이하여 나이 겨우 네 살로 젖을 떼기 전에 우리 황고(皇考)께서 이미 승하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영구히 천안(天顔)을 기억하고 옥음(玉音)을 들을 수 없으니 이미 천하에서 지극히 슬픈 사람이 되었으나, 오히려 우리 황조(皇祖) 순종 대왕(純宗大王)께서 조손(祖孫)을 부자(父子)처럼 친애하셔서 유치(幼稚)한데도 종묘(宗廟)의 중임을 부탁하시고는 돌보고 깨우쳐서 세월이 감에 따라 성취하기를 바라시는 데에 힘입었으니, 이때에 황조의 마음이 어떠하셨겠습니까? 은혜가 더할 수 없이 두텁고 덕이 더할 수 없이 커서 소자가 이를 의지하여 또한 지극한 아픔이 자기에게 절실한 것을 몰랐습니다. 하늘에 죄를 얻어 남은 재앙이 그치지 않다가, 갑오년027) 겨울에 거듭된 화변(禍變)이 극도에 이르렀으나, 소자의 그때 나이가 또한 여덟 살에 지나지 않아서 상복을 입었을 뿐이니, 또한 어찌 그 자리에 오르고 그 예(禮)를 행하는 것이 몹시 원통하고 매우 절박한 줄 알았겠습니까? 다행히 우리 태모 전하(太母殿下)께서 황조의 마음으로 어루만져 돌보시고 우리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 황고의 마음으로 길러 주셨습니다. 외롭고 괴로워서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그대로 의지하여 살 수 있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소자가 처음에 희망했던 바가 미친 것이겠습니까? 무릇 한 번 마시고 한 번 먹는 것과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물건까지도 모두 우리 황고께서 묵묵히 돕고 남모르게 안정시켜 주신 것이니, 그 덕을 보답하려 하여도 하늘처럼 한없이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아! 애통합니다. 그러나 소자의 나이가 조금 들어 생각이 조금 나아져서 그 무궁한 슬픔이 하늘에 사무치고 땅에 사무치는 것을 더욱 깨닫게 되니, 먹다가 그만두고 자다가 일어나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막혀 말하려 하여도 말하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아! 일찍이 듣건대,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자리를 얻고 반드시 그 녹(祿)을 얻고 반드시 그 이름을 얻고 반드시 그 수(壽)를 얻는다 하였는데, 우리 황고의 타고나신 대덕으로서도 이처럼 인색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찌 천리(天理)에 믿을 수 없는 것이 있고 성인(聖人)의 말에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는 모두 소자가 재앙을 쌓고 재앙을 불러서 하늘이 돌보지 않은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소자가 듣건대, 우리 황고께서는 대청(代聽)하신 4년 동안에 우근(憂勤)하신 일념으로 천명(天命)을 스스로 헤아려 날이 밝기 전에 옷을 입고 해가 저물어서도 음식을 들지 않으셨는데, 성대한 덕이 만백성에게 두루 미치고 지극한 교화가 팔역(八域)에 차서 넘치니, 농부는 들에서 힘쓰고 장수는 저자에서 기뻐하고 공인(工人)은 그 일에 분주하고 선비는 그 학업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로 신기(神祇)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감응(感應)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아래로 경사(卿士)가 합치하여 칙려(飭勵)하지 않음이 없으며 궁위(宮闈) 안과 성채(城砦) 사이까지도 위혜(威惠)가 유행하여 모두 흠복(欽服)하고 송탄(頌歎)하였다 합니다. 이때에 모든 복이 모두 이르고 온갖 상서가 죄다 모여서 옥첩(玉牒)으로 어버이의 공렬(功烈)을 나타내고 요상(瑤觴)으로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셨으니, 화합한 기운과 기뻐하는 소리를 추상(追想)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자는 남면(南面)한 높은 자리에서 천승(千乘)의 부(富)를 누리고 있으나, 오늘날 성심(誠心)을 가지고 효도하려 한들 어떻게 효도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이제 중도에서 승하하시어 만사가 미치지 못하게 된 뒤에도 오히려 친밀하고 현명하고 화락하고 편리한 것을 끼치시어 세상이 다하여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황고를 닮은 데가 없는 소자의 자질로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황고의 성덕(聖德)을 잇기를 바라겠습니까마는, 이제 열성(列聖)의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받고 양전(兩殿)께서 사랑하여 보살펴 주신 은혜를 받아 아득하게 뭇 신하와 백성 위에 추대된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불안하여 성취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나, 우리 황고의 지극히 인자하신 마음과 갓난 아이를 보호하시는 생각이 어찌 어두운 가운데에서 우려하고 가엾이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마는, 뵐 길이 아득하여 아뢰어 하소연할 데가 없으니, 이것은 또한 소자가 평소에 정성과 공경이 모자라서 신명(神明)께 감통(感通)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황고의 존시(尊諡)인 ‘효명(孝明)’ 두 자는 우리 황조께서 내리신 것이니 백세(百世)의 증표는 진실로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마는, 융호(隆號)를 바치고 현책(顯冊)을 바치고 능(陵)을 쌓아 높이고 묘(廟)에 올려 모시어 다하지 않는 예(禮)가 없는 것은 실로 선왕(先王)의 법이고 우리 집안의 고사이니,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찬양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구릉(舊陵)의 풍수(風水)는 합당하지 않다고 흔히 말합니다. 형가(刑家)의 말은 군자가 믿지 않는다 하나, 정자(程子)·주자(朱子) 대유(大儒) 이래로 혹 폐기하여 행하여 왔으니, 소자의 한없는 정성에 놀랍고 근심되어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습니다마는,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므로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올해에 이르러 마음에 크게 정하여 두 자전(慈殿)께 우러러 아뢰고 뭇 신하에게 널리 물으니, 의논을 거북점에 붙일 것도 없이 대천(大遷)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상길(上吉)의 능역(陵域)을 이미 얻어 장차 성인(聖人)께서 영구히 몸담으실 곳으로 삼게 되었으니, 실로 우리 황고께서 분명히 위에 계신 까닭이며, 또한 두 자전과 소자의 하늘에 사무친 아픔과 일국 신민의 슬픈 생각을 조금 위로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현궁(玄宮)에 계시던 재궁(梓宮)이 다시 나와 취화(翠華)028) 가 다시 임하게 되면, 어렴풋하고 어리둥절하여 마치 천필(天蹕)029) 이 들리고 운기(雲旗)030) 가 보이는 듯하여도 짙은 밤의 먼 길에 선유(仙游)하신 지 이미 오래 되어 계시던 곳과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명(幽明)을 통하여 오르내리는 도리가 어찌 참으로 있겠습니까? 소자의 아픔을 장차 어떻게 누르겠습니까? 우리 황조와 황고의 수용(晬容)이 경모궁(景慕宮)의 재실(齋室)과 경우궁(景祐宮)의 성일헌(誠一軒)에 나뉘어 모셔진 것은 만세토록 멀리 경연하는 생각 때문입니다마는, 소자가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도리에 있어서 끝내 서운하여 금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바야흐로 전제(殿制)를 조금 늘려서 보정(寶幀)을 들여 모시어 위로 우리 삼조(三祖)의 어진(御眞)에 함께 따라 모시려 합니다.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이 서로 차이가 없다면 우리 황고의 성충(聖衷)도 양양(洋洋)히 오르내리실 즈음에 의지하여 위로하고 기쁘게 하실 바가 있을 것입니다. 슬픔이 지극하고 아픔이 극진하여 말이 분별되지 않습니다. 아! 비통합니다."
하였다.
윤5월 16일 경자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언서(諺書)로 빈청(賓廳)에 하교하기를,
"지금 대전(大殿)께서 여러 날 동안 애통하시는 중인데 또 여(轝)를 수종(隨從)하려 하시니, 이러한 한더위에 종일 최마(衰麻)를 입고 여를 수종하면 어찌 손상되는 일이 없겠는가? 국조(國朝)의 전례에 드문 일이므로, 내가 대내(大內)에서 뜻을 돌이키게 하려 하는데, 대신(大臣)들은 어찌하여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는가? 반드시 정성을 모아 간청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이처럼 하교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轝)를 수종하는 것은 전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심정이 매우 절박하므로 반드시 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 자전(慈殿)의 하교를 받은 것이 간절하고 측달(惻怛)하시며, 대신들로 하여금 함께 힘껏 뜻을 돌이키게 하셨으니, 이런 처지에 이르러 감히 지극하신 뜻을 우러러 받들지 않을 수 없다. 18일 노제(路祭) 뒤에 먼저 새 능소(陵所)에 나아가 맞이하여 곡(哭)하겠다."
하였다.
임신년031) 이후에 춘방(春坊)032) ·계방(桂坊)033) 의 벼슬을 지내고 살아 있는 사람은 모두 연조(年條)를 적어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윤5월 17일 신축
임금이 수릉(綏陵)의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석상식(夕上食)을 행하고 재실(齋室)에서 밤을 지냈다.
윤5월 18일 임인
임금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찬궁(欑宮)을 열고, 이어서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이유수(李惟秀)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석상식(夕上食)·석전(夕奠)을 행하고 재실(齋室)에서 밤을 지냈다.
윤5월 19일 계묘
임금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조상식(朝上食)·견전(遣奠)을 행하였다.
대여(大轝)가 떠났다. 임금이 노제소(路祭所)에 나아가 봉사례(奉辭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먼저 새 능(陵)의 재실(齋室)에 나아가 시복(緦服)으로 갈아 입고 비각(碑閣)에 나아가 봉심(奉審)하였다. 이어서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봉심하고 이어서 옹가(甕家)에 나아가 광중(壙中)의 흙빛을 봉심하고, 녹로(轆轤)의 습의(習儀)를 감독하고, 이어서 반월형(半月形)을 살피고 곡장(曲墻) 밖에 나아가 뇌상(腦上)까지 두루 살폈다.
대여(大轝)가 주정소(晝停所)034) 에서 떠날 때에 임금이 시복(緦服)을 갖추고 신련(神輦)·영여(靈轝)를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걸어서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갔다. 빈전(殯殿)에 나아가 성빈전(成殯殿)·석상식(夕上食)·석전(夕奠)을 행하고 재실(齋室)에서 밤을 지냈다.
윤5월 20일 갑진
임금이 빈전(殯殿)에 나아가 조전(朝奠)·조상식(朝上食)과 주다례(晝茶禮)·천전(遷奠)을 행하였다. 하현궁(下玄宮)하고 곡하며 따라서 봉사위(奉辭位)에 이르러 곡하여 애례(哀禮)를 극진히 하고, 정자각(丁字閣)에 나아가 우제(虞祭)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윤5월 21일 을사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약원(藥院)의 입진(入診)을 행하고,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과 각신(閣臣)을 소견(召見)하였다.
윤5월 23일 정미
하교하기를,
"대례(大禮)를 잘 거행하고 나니 슬픔과 다행한 마음이 함께 절실하다. 신릉(新陵)·구릉(舊陵)의 일이 컸으니, 이는 도감(都監)에서 거행하였다 하나, 반드시 경기 백성에게 끼친 폐단이 많이 있을 것인데, 더구나 양주(楊州) 고을에서 전담한 것이겠는가? 진념(軫念)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상례(常例)대로 하겠는가? 올해의 성향(城餉)은 고을에서 모조(耗條)를 받도록 하여 특별히 감면하고, 군수(軍需)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구획(區劃)하여 대가를 주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사군(轝士軍)으로서 이번에 힘쓴 것은 시민(市民)이 가장 많았다. 공인(貢人)으로서 대령(待令)하여 진배(進排)한 데에도 폐단이 있을 것이니, 모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묵은 유재(遺在)와 요역(徭役)을 적당히 구별하여 탕감하여 뜻을 보이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응식(李應植)을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윤5월 24일 무신
두 도감(都監)과 총호사(摠護使)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상주었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행 판돈녕(行判敦寧) 박기수(朴岐壽)·지사(知事) 조기영(趙冀永)·행대호군(行大護軍) 이가우(李嘉愚), 도청(都廳) 교리(校理) 서상교(徐相敎)·부사과(副司果) 김병규(金炳奎)를 모두 가자(加資)하고, 능소 잡무 차사원(陵所雜務差使員) 양주 목사(楊州牧使) 조석우(曹錫雨)를 가자하고, 천릉 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지돈녕(知敦寧) 서희순(徐憙淳)·공조 판서(工曹判書) 김좌근(金左根)·호조 판서(戶曹判書) 이목연(李穆淵), 도청 사복 정(司僕正) 김익문(金益文)·부사직(副司直) 김진우(金鎭右)를 모두 가자하고, 지방 서사관(紙牓書寫官) 행 호군(行護軍) 강시영(姜時永), 섭좌우통례(攝左右通禮) 부수찬(副修撰) 엄석정(嚴錫鼎)·장악 정(掌樂正) 이광재(李光載), 종척 집사(宗戚執事) 행 호군 조병준(趙秉駿)·부사과 박호수(朴鎬壽), 대전관(代奠官)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 분승지(分承旨) 김공현(金公鉉)·박용수(朴容壽)를 모두 가자하였다.
윤5월 25일 기유
하교하기를,
"춘방(春坊)·계방(桂坊)으로서 임신년035) 에 제배(除拜)된 자가 아직 두 사람 남아 있는데, 옛날을 추념하여 뜻을 보이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행 호군(行護軍) 이노병(李魯秉)·부호군(副護軍) 이희두(李羲斗)는 오늘 정사(政事) 때에 지사(知事)·동지사(同知事)의 벼슬자리를 만들어 의망(擬望)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26일 경술
임금이 진전(眞殿)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삼조(三朝)의 어진(御眞)을 이안각(移安閣)에 옮겨 봉안하였는데, 진전을 증수(增修)하기 때문이었다.
윤5월 27일 신해
김시연(金始淵)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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