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헌종실록14권 헌종13년 1847년 8월

싸라리리 2025. 6. 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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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정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사직(社稷)의 추향(秋享)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8월 3일 기유

임금이 인정전의 월대에 나아가 경모궁(景慕宮)의 추향에 쓸 향축을 친히 전하였다.

 

이용현(李容鉉)을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4일 경술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저들의 서봉(書封)을 이제 겨우 베껴 왔으므로 등본(謄本)을 입계(入啓)합니다마는, 그 서사(書辭)는 양식과 배를 바라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보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지난해의 글과 같은 예(例)로 볼 수 없으니, 감사의 답서(答書)에 양식과 배는 바라는 대로 각별히 베풀겠다는 뜻으로 좋은 말로 답을 하면 사면(事面)이 온편할 것입니다. 글 가운데 이미 회문(回文)을 받겠다는 말이 있으므로 또한 결정이 없어서는 안되니, 괴원(槐院)을 시켜 지어 내게 하여 내려보내서 문정관(問情官)을 시켜 임역(任譯)과 함께 사리에 따라 타이르게 하고, 감사의 답서도 마친가지로 지어 내어 완백(完伯)에게 내려 보내어 전해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6일 임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나아가 남단제(南壇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8월 8일 갑인

이가우(李嘉愚)를 함경도 관찰사로, 구신희(具信喜)를 함경북도 병마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8월 9일 을묘

임금이 진전(眞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북사(北査) 중에서 송삭불이(宋朔不伊)에게는 차율(次律)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방원진(防垣鎭)의 군졸 송득철(宋得哲)·김광운(金光云)이 저들 땅에 범하여 넘어가서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여 돌아왔으므로, 저들이 드디어 강을 넘어와 덮쳐 두 사람을 죽이고 갔다. 성년(成年)이 못된 송득철의 아들이 당초에 아버지를 따라 몰래 넘어간 일을 북백(北伯)이 사계(査啓)함에 따라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기를, ‘정상을 살펴서 논하면 죄를 혹 용서할 수도 있겠으나 형적(形跡)을 가지고 보건대 법으로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으니, 율문(律文)대로 처단하소서.’ 하였는데, 차율을 시행하라고 하교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성근묵(成近默)이 현도(縣道) 편에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듣자옵건대, 지난해에 홍주(洪州)에 온 이양선(異樣船)033)  이 이미 흉서(凶書)를 보내어 몰래 국경을 넘어온 양인(洋人)으로서 사옥(邪獄) 때에 주살(誅殺)된 자를 우리가 죽였다고 하였다 하니 그 사연은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마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적(賊)의 와주(窩主)034)  가 된 자는 형적(形跡)이 이미 드러나서 하루도 용서할 수 없으므로 정상을 궁극히 핵사(覈査)해야 할 것인데도 조정(朝廷)에서 관대하였던 것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하고 불치(不治)로 다스린 것이니, 만리 밖에서 밝게 보고 70일 만에 와서 귀화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적모(賊謀)가 남몰래 점점 더하고 화란(禍亂)을 교결(交結)하여 빚어내어 이번에 고군산(古群山)에 양선(洋船)이 온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과연 표류하여 온 배이겠습니까? 해적(海賊)이겠습니까? 표류하여 온 배로 대우하여 마치 먼데서 온 자처럼 회유한 것이 어찌 반드시 응변(應變)하는 기책(奇策)이 있어서 이른바 심복(心腹)을 드러내고 정실(情實)을 드러내어 본연(本然)의 약한 것을 보인다는 것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적이 온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고 머무르는 데에는 반드시 믿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사당(邪黨)으로서 와주가 된 자 중에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것인데, 불문에 붙인다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노사(虜使)를 베기를 청한 것과 같이 청할 사람이 오늘날에 어찌 없겠으며, 강홍립(姜弘立)이 향도(嚮導)한 것과 같은 일을 오늘날에 다시 보겠습니까마는, 양적(洋賊)이 노사와 같지는 않더라도 저 사당은 강홍립과 비슷하다는 것을 모르는 듯합니다. 우리가 적을 헤아리는 것이 도리어 적이 우리 나라를 엿보는 것만 못한데, 한갓 사술(邪術)에 속고 사적(邪賊)에 깔보이며 오직 요사(妖邪)를 보양(保養)하는 것을 화란을 늦추는 장책(長策)으로 여긴다면, 장차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온 고장이 함께 멸망하여 요수(妖獸)·괴조(怪鳥)가 되어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융적(戎狄)의 화(禍)에 어찌 선악을 가릴 만한 것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적으로 말하면 방자하게 의리를 말하고 전에 없던 이단을 새로 만들어 성인(聖人)의 도(道)를 위협하니, 이것은 화이(華夷)·인수(人獸)가 갈라지는 큰 요점입니다. 양주(楊朱) 묵적(墨翟)035)  의 도는 자신이 난신(亂臣)·적자(賊子)가 되는 일이 아니나,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인의(仁義)가 막히면 짐승을 이끌어 사람을 먹게 한다.’ 하고 또 ‘능히 양주·묵적을 물리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 하였습니다. 저 사선(使船)이 말[馬]처럼 바다를 마구 다니면 이는 거의 범에 날개가 달린 듯하여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을 듯하나, 요사를 부리고 제 힘을 믿는데도 천하에 적이 없다는 것은 신이 전에 듣지 못한 것입니다. 대개 요(妖)가 덕(德)을 이기지 못하고 사(邪)가 정(正)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지를 세운 상리(常理)이니, 이제 천지가 무너지고 인류가 다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요(堯)·순(舜)·주공(周孔)의 도가 해외(海外)의 요사한 적에게 욕을 보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지(聖志)가 근학(勤學)에 있고 성학(聖學)이 주경(主敬)에 있는 것은 의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궐유(闕遺)의 유무는 오직 예념(睿念)의 반성에 달려 있으니, 허물이 있으면 일식(日蝕)·월식(月蝕)처럼 숨기지 않고 고치며 착한 것을 보면 바람·천둥처럼 신속히 옮겨서 성지가 그칠 데를 알고 성학이 매우 밝아 정론(正論)이 크게 행해지고 정기(正氣)가 성장(盛壯)하여 대명(大明)이 중천(中天)하여 만물이 다 보듯이 하신다면 저 음사(陰邪)한 자가 감히 그 사이를 범하겠습니까? 또한 어찌 양학(洋學)이 근심스럽고 사당이 두렵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양선이 해마다 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사(邪)를 물리치는 말이 매우 절실하고 명쾌하니, 비류(匪類)가 들으면 마음을 고치고 자취를 감출 만하다. 나머지 진면(陳勉)한 여러 가지가 수천 마디에 가까운데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마지않는 뜻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마음에 간직하지 않겠는가? 가을의 선선한 기운이 점점 생기니, 그대는 되도록 빨리 조정에 나와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우라. 내가 바야흐로 측석(側席)하여 기다린다."
하였다.

 

불란서 사람으로서 표류하여 온 자와 떠난 자가 7백 인쯤 된다. 두 배가 다 깨졌으므로 한 종선(從船)을 따로 보내어 강남성(江南省) 상해현(上海縣)에 가서 큰 배 셋을 삯내어 왔는데, 그 왕래를 셈하면 15일이 된다. 그들이 이른바 회문(回文)을 받겠다는 것은 지난해 홍주(洪州) 외연도(外烟島)에 와서 정박한 슬서이(瑟西耳)가 우리 보상(輔相)에게 보낸 글의 답을 말하는 것이다. 임금이 소·돼지와 양식 쌀과 채소를 넉넉히 보내어 먼데서 온 사람을 회유하라고 명하였다. 그들이 떠날 때에 전라도 도신(道臣)에게 보내는 글이 있었다.

 

8월 10일 병진

이계조(李啓朝)를 이조 참판으로, 정최조(鄭㝡朝)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시흥현(始興縣)의 불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11일 정사

김대근(金大根)을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으로 삼았다.

 

광주부(廣州府)의 떠내려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홍희석(洪羲錫)의 장계(狀啓)를 보니, 고군산(古群山)에 왔던 이양선(異樣船)은 이미 떠났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서봉(書封)이라는 것은 사의(辭意)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미 떠났고 미처 물리치지 못하였고 보면,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곧 뜯어 본 뒤에 글을 베껴서 본사(本司)에 올려보내고 원본(原本)과 물건들은 우선 그 진장(鎭將)한테 봉류(封留)하고 두 막(幕)을 봉폐(封閉)하고 또한 유의하여 지키게 하고, 섬 백성이 한 달에 걸쳐 물건을 대어 주느라 폐단이 많았을 것이니, 본도(本道)에서 각별히 조치하여 있을 곳을 잃고 흩어지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갑자기 응변(應變)하느라 혹 잘못된 것이 많을 것입니다. 답서(答書)를 써서 보이는 일도 늦어서 미치지 못하여 저들이 돛을 올리고 헛되이 돌아가며 물건을 남겨 두었으니, 뒷날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의 글 가운데에 이미 대청국(大淸國)과 화친(和親)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반드시 오문(澳門)에 살도록 허가된 자들 가운데의 일종(一種)일 것입니다. 일찍이 임진년(壬辰年)036)  ·을사년037)   영선(船)이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도 다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은 두 해에 비하여 더욱 정상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전후 불란서의 사실과 기해년038)   양인(洋人)에게 용률(用律)한 일을 괴원(槐院)을 시켜 연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부쳐 보내고 이어서 황지(皇旨)로 양광 총독(兩廣總督)에게 칙유(飭諭)하여 다시 오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불란서 배에서 보낸 글에 이르기를〉,
"대불란서국(大佛蘭西國) 수사 총병관(水師總兵官) 납별이(拉別耳)는 조회(照會)할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전 수사 제독(水師提督) 슬서이(瑟西耳)는 본국(本國)에서 보내어 이 바다에 온 각전선(各戰船)을 거느리는 원수(元帥)이었는데 지난해에 이 곳에 와서 귀국의 보상 대인(輔相大人)에게 공문을 바치고 이듬해에 배를 보내어 와서 회문(回文)을 받기로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총병(本總兵)이 이 임무를 맡게 되어서는 불란서국과 대청국(大淸國)이 이미 만년(萬年)의 화호(和好)를 정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본총병이 배 두 척이 곧 영광스럽게 개선할 때에 호의(好意)로 와서 회문을 받아 본국에 복명하려고 전 수사 제독이 갔던 곳으로 가다가 뜻밖에 어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이 사나운 바람에 부수어졌으므로, 본총병이 어쩔 수 없이 이 곳 가까운 섬의 민가에서 떨어진 곳의 바닷가에 잠시 수수(水手)·사졸(仕卒)과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인원을 두고서 구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람은 많고 물은 모자라며 양식은 태반이 죄다 바닷물에 침괴(浸壞)되었는데, 귀국에서 늘 너그러이 예대(禮待)하여 먼 나라의 파괴된 배에 탄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고 물과 양식을 도와 주기를 절실히 바라서 살펴 주시기를 거듭 빕니다. 배 두 척을 삯내어 본총병의 차원(差員)을 시켜 곧 대청국 상해(上海)에 가서 다른 배를 삯내어 와서 이 곳의 부수어진 배들에 탔던 인원들을 싣고 일찍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고마운 은덕이 그지없을 것이고, 삯낸 배와 도와 준 먹을 것의 값은 절로 공도(公道)로 보내어 갚을 것입니다. 혹 귀국에서 지금 배를 많이 삯내어 이 어려움을 당한 뭇사람을 싣고 일제히 상해로 간다면 더욱 편리하겠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삯낼 수 있으면 하루라도 덜 머물러 귀국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불란서 황제가 반드시 귀국에서 그 나라의 인원을 환난 가운데에서 구조한 은혜를 생각할 것이고, 본총병도 귀국과 영구한 화호를 맺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 때문에 귀도사(貴道使)에게 조회하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이 고려국(高麗國) 전라도사 대인(全羅道使大人)에게 조회합니다. 구세(救世) 1천 8백 47년 8월 13일, 도광(道光) 27년 7월 3일."
하였다.

 

8월 16일 임술

월식(月蝕)이 있었다.

 

8월 17일 계해

윤치영(尹致英)을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으로, 김병덕(金炳德)을 대교(待敎)로, 신소(申紹)를 충청도 수군 절도사로, 서유훈(徐有薰)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부평(富平) 등 고을의 떠내려가고 무너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22일 무진

이헌구(李憲球)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강기(姜𣹡)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8월 25일 신미

하교하기를,
"이승헌(李承憲)의 소(疏)는 무엇 때문에 이르렀는가? 의약(醫藥)을 의논한 것은 본디 마땅하나, 어구(語句)에 잘 모를 것이 매우 많고 또 약을 의논하지 않았다 하여 조신(朝臣)에게 허물을 돌린 것은 그것이 협잡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을 말한 것이라 하여 참작하여 용서할 수 없으니, 우선 삭직(削職)하는 법을 시행하고 원소(原疏)는 반포하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이승헌(李承憲)이 상소하기를,
"신(臣)은 이른바 소원(疏遠)한 신하이어서 임금이 어떠한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는 자인데 게다가 한산(閒散)이 되고 병들어 궁벽한 시골에 있으므로 무릇 조정(朝廷)의 대소사(大小事)를 한번도 보고 듣지 못한 지 오래 되었습니다마는, 한 조각 이성(彝性)은 아직 아주 없어지지 않아서 분수에 넘치는 근심에 잊혀지지 않고 밤낮으로 빌며 다만 왕실의 자손이 많아지는 경사를 빨리 보고 만대에 변함 없는 기초를 길이 굳히기를 바랐을 뿐인데, 갑자기 지난달 그믐께에 자성(慈聖)의 언교(諺敎)가 빈청(賓廳)에 내려진 것을 보옵건대, 곤전(坤殿)의 깊어진 빌미를 민망히 여기고 종사(宗社)를 위하여 깊고 멀리 염려하시는 것이 슬프고 간절하여 신명(神明)을 움직이고 목석(木石)을 느끼게 할 만하였으니, 신이 받들어 반도 읽기 전에 절로 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왔습니다. 중궁 전하(中宮殿下)의 증후가 무슨 빌미에 근본하여 이처럼 긴중(緊重)하여 자손에 대한 희망이 끊어지기에 이르렀는지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이제 약으로 고치기를 바랄 수 없다는 하교로 보면 일조일석의 까닭이 아니고 놀라움이 절박한 것을 알 수 있으니, 더욱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한낱 서민의 집 부인(婦人)도 자궁(子宮)이 허하고 경도(經道)가 어그려져서 생육(生育)에 방해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 맥(脈)을 보고 빌미를 살펴 종옥탕(種玉湯)·임자환(壬子丸)을 쓰고, 또 보혈(補血)·도기(導氣)에 관계되는 의약(醫藥)을 널리 구하여 때때로 쓰면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허한 것이 실해지고 어그러진 것이 조화되어 효험이 있어 잉태하는 자가 열 가운데에서 늘 아홉은 됩니다. 우리 곤성(坤聖)께서는 춘추가 이미 성장(盛壯)하시니, 조화를 잃은 조짐이 있더라도 증세에 맞추어 약제를 써서 영험을 얻기를 바란다면, 어찌 믿는 것만을 고집하여 보답을 요구하는 것만 못할는지 알겠습니까? 또 더구나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어두운 가운데에 오르내리시니, 천리(天理)에 미루어 보고 인사(人事)로 참작하면 어찌 끝내 탄생의 경사가 없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의 분수로 말하면 자교(慈敎)를 받기 전에는 일이 분명하지 않은 것에 관계되므로 워낙 말할 만하지 못하겠으나, 이미 자교를 받은 뒤에는 황급히 분주하여 그날로 시약(侍藥)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도리인데, 40일이 되어 가도 아직 고요한 것은 무슨 도리이며 무슨 사체(事體)입니까? 뒷날 국사(國史)에 쓰기를, ‘국모(國母)에게 병이 있어도 조정의 신하가 약을 의논하지 않았다.’ 한다면, 후세에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면 참으로 한심함을 깨닫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약원(藥院)에 분부하여 맥리(脈理)를 아는 여의(女醫)를 극진히 선택하여 곤전의 증세의 원인을 상세히 진찰하고 합당한 약제를 빨리 써서 보호(保護)하는 방도를 다하게 하여 신민(臣民)의 타는 속을 위로하소서. 신이 분수에 벗어나서 상소하는 것이 외람된 줄 잘 압니다마는, 생각하면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데, 부모에게 병이 있으면 아들인 자가 병을 고치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본디 사람의 도리로서 떳떳한 것이니, 이제 신이 국모에게 충성하기를 바라는 것을 부모에 비하는 것은 혹 사리가 조금 다른 꼬투리는 있을지라도 정리(情理)가 절박한 것은 어찌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상규(常規)를 어기고 무릅써 작은 정성을 아뢰니, 혹 성명(聖明)께서 어리석은 것을 가엾이 여기고 마음을 헤아리어 사람이 하치않다 하여 말을 버리지 말고 특별히 의약의 일에 유의하신다면, 실로 동방(東方)의 만세(萬世)의 행복이겠습니다."
하였다.

 

8월 26일 임신

부수찬(副修撰) 윤경선(尹景善)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교(傳敎)가 내려진 것을 지금 보옵건대, 이승헌(李承憲)을 삭직(削職)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 원소(原疏)를 보니 조사(措辭)에 과연 잘 모를 어구(語句)가 많아서 매우 어지러웠습니다. 겉으로는 언사(言事)를 핑계하여 속으로는 협잡을 부렸으니, 연감(淵鑑)이 살피시는 데에서 정상이 숨겨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곤전(坤殿)을 의약(醫藥)으로 보호하는 일은 신하의 직분으로서 끊임없이 염려하는 것이니, 어찌 조금이라도 늦추고 소홀히 하겠습니까? 그날 청대(請對)한 대신(大臣)이 의약을 쓰기를 청한 것이 전석(前席)에 간절하였으니, 이 소(疏)에서 넌지시 조신(朝臣)에게 허물을 돌린 것은 매우 경솔하거니와, 또한 감히 속에 감춘 뜻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말을 빙자하였더라도, 그 마음은 불령(不逞)한 버릇임을 엄폐할 수 없습니다.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뜻에서도 결코 가벼이 벌주고 말 수 없으니, 신은 빨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여 선악의 구별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간선(揀選)을 명하신 것은 열성(列聖)께서 이미 행하신 의절(儀節)이고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것은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이니, 무릇 조정에 있는 자가 누구인들 함께 바라지 않겠습니까?
임금의 가법(家法)은 반드시 집안을 바루는 것을 먼저 하는데, 이것이 이남(二南)039)  에 곤내(壼內)040)  로부터 시작하여 천하를 교화하는 것을 읊은 까닭입니다. 이제 숙원(淑媛)을 맞이할 것이므로 국가에서 경사를 기다리니 이것은 참으로 그지없는 복입니다마는, 궁위(宮闈) 안은 예절을 엄하게 해야 하므로 엄숙하고 공경하는 공부를 더욱 힘쓰고 화목한 덕을 나타내어 종고(鐘鼓)041)  의 즐거움을 맞추고 인지(麟趾)042)  의 경사를 기르는 것이 바로 국가 억만년의 복이 될 것이니, 전하께서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는 춘추가 점점 성장(盛壯)하여 가시므로 조야(朝野)에서 바라는 것은 오직 자손이 번창하는 데에 있었는데 옥체가 편찮으시다는 하교를 받자오니 온 국민의 안타까운 염려가 갈수록 더욱 절박합니다. 신은 병환의 빌미가 어떠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증후(症候)가 오래 잘못되지는 않았으면 방기(方技)에 반드시 합당한 약제가 있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빨리 진찰을 허가하여 반드시 주효(奏效)를 얻어서 중외(中外)의 희망에 부응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승헌의 일은 의약을 핑계하여 괴란(乖亂)을 시험해 보는 버릇이 매우 밉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우선 너그러이 용서하여 모두 공의(公議)에 붙였으니, 청한 것은 윤허하지 않는다. 진면(陳勉)한 것은 마땅하다 하겠다. 내가 유념해야 할 것인데 네가 능히 말하였다. 이것은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 이처럼 분별하였으므로 충성스러운 참마음을 알 수 있으니 매우 가상하다. 조치(調治)하는 방도는 궁중에서 뜻을 다하니, 네가 말한 것은 지나친 염려이다."
하였다.

 

대사헌 이헌구(李憲球)가 상소하여 이승헌(李承憲)을 나국(拿鞫)하여 정상을 알아내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렸다.

 

8월 27일 계유

삼사(三司)가 연명으로 상차(上箚)하여 이승헌을 나국하여 정상을 알아내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렸다.

 

임백수(任百秀)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홍천현(洪川縣)의 떠내려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8월 28일 갑술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들이 연명으로 상차(上箚)하여 이승헌(李承憲)에 대한 뭇 신하의 청을 빨리 윤허하기를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이번의 도리에 어그러진 상소는 또한 하나의 세변(世變)인데 그 속에 감춘 것을 밝히자면 정상이 아주 참혹하다. 약원(藥院)을 핑계대어 현저하게 일망타진할 계책을 부렸고, 또 더구나 자교(慈敎)에 없는 어구도 감히 방자하게 입에 내었으니, 통탄스러울 뿐더러 어찌 놀라움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으랴? 이는 내가 조정의 믿음을 받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차라리 말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경(卿)들이 청하는 것이 이처럼 준엄하니 어찌 곧 따르기 어려우랴마는, 크게 벌이는 일은 마침내 어렵게 여기고 삼가야 하니, 이승헌에게는 특별히 도치(島置)하는 법을 시행한다. 경들은 양지(諒知)하라."
하였다.

 

양사(兩司)가 합계(合啓)하여 이승헌을 나국(拿鞫)하여 정상을 알아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순천부(順天府)의 떠내려간 집에 휼전(恤典)을 내렸다.

 

중비(中批)로 윤경선(尹景善)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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