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권 순조즉위년 1800년 12월

싸라리리 2025. 6. 4.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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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유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이조원(李祖源)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2일 경술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운관(芸館)으로 하여금 인간(印刊)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정종조(正宗朝)에서 주자(朱子)의 글과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유집(遺集)에서 초출(招出)하여 어정(御定)으로 휘편(彙編)한 것이다.

 

정대용(鄭大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병모(李秉模)를 실록청 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 홍양호(洪良浩)·김재찬(金載瓚)·이조원(李祖源)·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한용귀(韓用龜)·조진관(趙鎭寬)·정범조(丁範祖)·권유(權𥙿)·이의필(李義弼)·이서구(李書九)를 지실록사(知實錄事)로, 윤행임(尹行恁)·정대용(鄭大容)·남공철(南公轍)·이익모(李翊模)를 동지실록사(同知實錄事)로, 김근순(金近淳)을 실록 수찬관(實錄修撰官)으로, 이만수(李晩秀)·김조순(金祖淳)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으로, 윤행임(尹行恁)·남공철(南公轍)을 직제학(直提學)으로, 이존수(李存秀)를 대교(待敎)로 삼았다.

 

12월 3일 신해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세실(世室)로 정한 고유제(告由祭)를 행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교문(敎文)을 반하하고 나서 이어 효원전으로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교문(敎文)을 반하(頒下)하기를,
"교산(喬山)에 궁검(弓劍)이 영원히 감추어지니, 여막(廬幕)에서 지극한 슬픔을 안게 되었고, 법정(法庭)에 윤음(綸音)을 비로소 반하하니, 태실(太室)에 높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차례에 두게 되었다. 우리 선왕(先王)의 아름다움을 찬미하여 팔방(八方)의 백성들에게 전파하노니, 비록 양음(亮陰) 중에 있을 때라도 그 대언(代言)하게 한 전례가 있어 왔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께서는 사도(師道)로 위에 계시고 심법(心法)을 중도(中道)에 맞게 행하였으며, 온량(溫良)하고 공검(恭儉)하심은 오직 성성(聖性)에서 체득하였고 강건(剛健)하고 순수(純粹)하심은 외외(巍巍)한 임금이 되는데 정일(精一)하였다. 혐의를 분별하고 은미한 일을 밝힘에 있어서는 근본을 둘로 해서는 안 된다는 초원(初元) 때의 하유(下諭)가 있었고, 내세(來世)의 학도에게 길을 열어주고 전대(前代)의 성인(聖人)의 법통을 이으심에 있어서는 사문(斯文) 대일통(大一統)의 권병(權柄)을 자임(自任)하였다. 천하의 뜻을 통달케 하고 천하의 업(業)을 안정시키며 천하의 의혹을 결단함에 있어서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의 도(道)를 몸받아 행했으며, 만세(萬世)의 마음을 합치시키고 만세의 말을 전하고 만세의 이치를 부연함에 있어서는 《시경》·《서경》·《주역》·《예기》·《춘추》의 수사법(修辭法)을 본받았다. 거동하는 것이 편안하므로 이용하는 것이 깊게 되어 마치 강하(江河)를 터 놓은 것과 같았으며, 인(仁)을 베풂이 정일하고 의(義)를 행함이 완숙하므로 천지와 함께 유행(流行)하게 되었다. 박후(博厚)하고 유구(悠久)한 교화를 완성하였고 서질(敍秩)과 명토(命討)가 고루 갖추어졌다. 조화(造化)는 태극(太極)의 이치와 신묘하게 계합(契合)하였으니, 비유하자면 밝은 달이 만천(萬川)을 비추는 것과 같았고 척도(尺度)는 한결같이 고정(考亭)194)                  을 기준으로 삼았는지라, 요약하여 《자양백선(紫陽百選)》195)                  을 만들었다. 학문(學文)·사변(思辨)은 독실하게 행하고 굳게 지켰으며, 계속 밝혀 나가는 성학(聖學)은 말에는 가르침이 있었고 행동에는 본받을 것이 있었다. 종묘(宗廟)와 조정(朝廷)에서는 반드시 경건하였으며, 깊숙이 한가하게 있을 때에도 반드시 근신하였다. 한결같이 이 엄숙하고 공정하여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 할 때가 적었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들과 친근히 할 때가 많았는데도, 오히려 소략함이 많았다고 말하였다. 소리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듯이 자연스런 교화를 지닌 것은 신비하였고, 구름이 퍼져 비가 내리듯 하는 은택은 말하지 않아도 깨우칠 정도였다. 찬란히 빛나는 그 문장(文章)은 저 뚜렷한 은하수 같고 소리도 냄새도 없는 고요한 가운데로 그 신공(神功)을 거두어 갔도다. 아! 《명의록(明義錄)》 1부(部)는 진실로 천추 만세에 전해갈 법인 것이다. 아! 화(禍)를 빚어낸 것이 신축년196)                  ·임인년197)                  보다 더하였으므로 주토(誅討)를 행함에 있어 무신년198)                  ·기유년199)                  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바람이 불면서 천둥 번개가 치듯이 거세게 푸른 하늘에서 부월(鈇鉞)이 떨어지니 아득히 산이 높고 물은 맑아져 사나운 무리들이 감화되어 적자(赤子)가 되었다. 말명(末命)에 이르러서는 그 높이 게시함이 이륜의 상도[彝常]와 같아서 하정(夏鼎)200)                  의 나열된 물상(物象)이 삼엄하매 백성으로 하여금 좋지 못한 일을 만나지 않게 하였으며, 노사(魯史)의 판단(判斷)한 예(例)가 은미하고도 완곡함이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엄하였다. 희운(熙運)은 1천 5백 년을 열었고, 지치(至治)는 24년 동안을 어루만져 다스렸다. 은주(銀籒)가 이루어져 성유(聖諭)가 반포되니 천인(天人)이 모두 귀의하였고, 금등(金縢)을 열어 예휘(睿徽)를 드날리니 귀신(鬼神)도 눈물을 흘렸다. 상제(上帝)를 대함에 있어서는 마치 침문(寢門)에 하루 세 번 문안하듯이 하였고, 우리 하민(下民)을 편안히 함에 있어서는 천리(千里) 밖을 뜰앞처럼 환하게 알았다. 큰 호칭과 위대한 업적은 역사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지라 하늘에 빛나는 태양의 빛을 그림으로 그 뜻을 다할 수 없으며, 교화의 그 정치 후세에서 모범받아 평안하고 태평함이 끝이 없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용릉(舂陵)201)                  에 제사 지낸 것은 성인(聖人)을 기다려 질정해 보아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으며, 주(周)나라가 난수(灤水)로 인하여 천장(遷葬)한 것은 국명(國命)이 새로워질 것을 점친 것이다. 재령(齋令)을 엄숙히 하여 제사(祭祀)를 받들고 어버이의 마음에 승순하여 전궁(殿宮)을 섬겼으니 정치를 함에 있어서는 효도를 제일로 삼는 것이며, 선비의 추향(趨向)을 단정하게 하여 간사하고 음란한 것은 물리쳤고 사람들의 의지(意志)를 선하게 하여 풍속(風俗)을 정화시켰으니, 대덕(大德)이란 반드시 아름다운 이름을 얻게 되는 법이다. 인성(仁聲)과 영문(令聞)이 환히 선양(宣揚)되는 곳에 태화(太和)의 원기(元氣)가 깊고도 넓게 넘치나니, 군신(君臣)·부자(父子)·부부(夫婦)·장유(長幼)의 윤서(倫序)가 모두 그 당연함을 따랐고, 구맹(區萌)202)                  ·초연(肖蝡)203)                  ·비잠(蜚潛)204)                  ·동식(動植)의 무리들도 각기 제 곳을 얻게 되었다. 어찌 반드시 육형(肉刑)·봉건(封建)을 한 뒤에야 삼대(三代)의 풍교가 있다고 하겠는가? 비로소 통서(統序)와 종통(宗統)이 원손(元孫)에게 모아진 것을 알았으니, 잘 다스려질 운(運)을 당한 소이이다. 아! 그러나 황천(皇天)이 도와주지 않아서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뒤따를 수 없기에 전영인(前寧人)205)                  의 의도한 공을 마치는 바에 보좌(黼座)206)                  에 임어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나 소자(小子)는 많은 어려운 일들을 감당할 수 없어 철의(綴衣)207)                  를 돌아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명산(名山)에 검옥(檢玉)208)                  의 편(篇)이 없으니 깊은 마음으로 겸손하고 낮추시던 충정을 창연히 회상하고, 청묘(淸廟)에서 연주하는 악장(樂章)에 싣는 송(頌)이 있으나 누가 성덕(聖德)의 광휘(光輝)를 모사(摹寫)해 내랴? 이에 즈음한 징사(徵士)209)                  의 말은 모두가 선정(先正)의 훈교(訓敎)로서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사체를 역력히 가리켜 진달하면서 백세(百世)토록 조천(祧遷)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계속 심혈을 기울여 간청(懇請)하였다. 이어 서경(西京)의 아름다운 법전(法典)을 행할 것을 우러러 동조(東朝)께 성재(聖裁)를 청하였더니, 염유(簾帷)에서 옥음(玉音)을 선하(宣下)하시어, 성대한 예전(禮典)을 묘실(廟室)에서 거행하게 되었다. 열두 위 열성(列聖)의 위대하고도 순수한 공덕(功德)을 크게 이어, 억만년토록 아름다운 제향(祭享)을 받들게 됨을 천명하는 바이다. 돌아보건대, 과궁(寡窮)의 영원히 미칠 수 없는 아픈 슬픔이야 어찌 잠시인들 폈다고 이를 수 있으랴마는, 만백성이 영원히 잊지 못해 하는 심사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순(虞舜)은 문조(文祖)·예조(藝祖)210)                  의 덕을 일컬었는데 선왕(先王)의 아름다운 덕도 그와 짝할 만하며, 은(殷)나라에서도 중종(中宗)·고종(高宗)211)                  을 높였으니 오늘날 이를 본받았다. 이에 금년 12월 초3일에 정종 대왕(正宗大王)을 높여 세실(世室)로 할 것을 친히 효원전(孝元殿)에 고하였으며, 또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경모궁(景慕宮)에 고하였다. 이미 상하(上下)에 경건히 고한지라, 이에 중외(中外)에 널리 선파(宣播)하는 바이다. 이달 이날에 덕(德)이 같으신 영령이 모였다고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스스로 의혹하고 사모함이 울부짖으면서 통곡하던 그 때보다 갑절 더 간절하다. 여기에나 저기에나 오르내리시기에 매우 가깝게 되었고, 선(善)함을 다하였고, 아름다움을 다하였으니 진실로 정문(情文)에 맞게 되었다. 일월(日月)이 광림(光臨)하니 초연(愀然)히 만나본 것 같은 감회를 느끼게 하고, 뇌우(雷雨)가 깨끗이 개이니 의당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해야 하는 은혜를 미루어 파급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달 초3일 매상(昧爽)212)                   이전의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유(赦宥)시킨다. 아! 백성 보호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처음 시작을 잘해야 하는 것이므로 전열(前烈)을 생각함에 두려운 마음이 증폭되며, 많은 복을 받고 끝내 영세(永世)토록 할말이 있게 해야 하나니, 성헌(成憲)을 받들어 잘 지켜가야 한다. 때문에 이렇게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의당 알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윤행임(尹行恁)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34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어문학(語文學)


[註 194]          고정(考亭) : 주자(朱子)를 가리킴.[註 195]          《자양백선(紫陽百選)》 : 주서백선(朱書百選).[註 196]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97]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198]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99]          기유년 : 1729 영조 5년.[註 200]          하정(夏鼎) : 하(夏)나라 우(禹)가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솥[鼎]을 주조(鑄造)했는데, 온갖 물형을 갖추어서 백성으로 하여금 산도깨비나 물도깨비를 알도록 했기 때문에, 백성이 산림(山林)이나 천택(川澤)에 들어가도 좋지 못한 일을 만나지 않게 하였다는 고사.[註 201]          용릉(舂陵) : 유매(劉買)의 봉호(封號). 한 무제(漢武帝)가 장사 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아들인 유매를 용릉 절후(舂陵節侯)로 봉한 데서 유래된 말인데, 후한(後漢)의 광무 황제(光武皇帝)가 이유매의 후손이므로 태묘(太廟)에 모시고 제사지냈음. 여기서는 정조(正祖)가 그의 아버지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장헌 세자(莊獻世子)로 추존(追尊)한 것을 가리킴.[註 202]          구맹(區萌) : 초목의 굽은 것과 싹이 트는 것.[註 203]          초연(肖蝡) : 미세한 생물과 꿈틀거리는 벌레.[註 204]          비잠(蜚潛) : 나는 짐승과 물에 잠긴 고기.[註 205]          전영인(前寧人) : 정조(正祖)를 가리킴.[註 206]          보좌(黼座) : 임금이 앉는 자리.[註 207]          철의(綴衣) : 휘장.[註 208]          검옥(檢玉) : 공적을 옥첩(玉牒)에 기록하여 담는 함[檢]을 말함. 남북 송조(南北宋朝) 때 태조(太祖)가 원가(元嘉) 연간에 대대적으로 북벌(北伐)할 때 원숙(袁淑)이 "이제 조(趙)·위(魏)를 석권(席捲)하고 대종산(岱宗山)에서 옥첩에 공을 기록하여 함에다 넣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게 될 것이니, 신이 봉선서(封禪書) 1편(篇)을 올리겠습니다."한 데서 온 말임.[註 209]          징사(徵士) : 덕이 높은 선비.[註 210]          문조(文祖)·예조(藝祖) : 모두 문덕(文德)이 극진한 조선(祖先)이란 뜻으로, 요(堯)임금 시조(始祖)의 묘당(廟堂)을 가리키는 말임.[註 211]          중종(中宗)·고종(高宗) : 모두 은(殷)나라 임금인데, 중종은 9대 임금이고 고종은 22대 임금으로, 모두 훌륭한 덕정(德政)를 행한 중흥(中興)의 임금임.[註 212]          매상(昧爽) : 어둑 새벽.

 

세실(世室)로 정한 고유제(告由祭) 때의 아헌관(亞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대축(大祝)인 윤익렬(尹益烈)에게는 통정(通政)을 가자(加資)하고 예방 승지                     오태현(吳泰賢)에게는 가선(嘉善)을 가자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승지를 보내어 고(故) 영상(領相)                     서명선(徐命善)과 고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홍문록(弘文錄)213)                                             을 행하였다.                        【부제학                           남공철(南公轍), 응교                           김선(金銑), 교리                           한흥유(韓興裕), 부교리                           홍수호(洪受浩), 수찬                           윤익렬(尹益烈)·이정병(李鼎秉)이다.】                      5점을 받은 사람은 박명섭(朴命燮)·이인채(李寅采)·장석윤(張錫胤)·신서(申溆)·이동면(李東冕)·안정선(安廷善)·송지렴(宋知濂)·임후상(任厚常)·신귀조(申龜朝)·유태좌(柳台佐)·이상겸(李象謙)·이경삼(李敬參)·이기헌(李基憲)·김계렴(金啓濂)·김회연(金會淵)이다.

 

12월 4일 임자

능성위(綾城尉) 구민화(具敏和)가 졸(卒)하였다. 은졸(隱卒)214)                                             의 법전을 전례대로 시행하고, 그의 아들은 복상(服喪)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강화(江華) 덕적진(德積鎭)에 표류(漂流)한 중국의 등주부(登州府) 사람 6명을 육로(陸路)로 호송(護送)하라고 명하였다.

 

12월 6일 갑인

선조(先朝)의 어진(御眞) 1본(本)을 주합루(宙合樓)에 봉안(奉安)하고, 1본(本)은 화성(華城) 행궁(行宮)으로 받들고 가도록 명하였다.                        【때가 되매 시임(時任)·원임(原任) 각신(閣臣)과 표제관(標題官)·서사관(書寫官)이 들어와 서향각(書香閣) 앞뜰로 나아가 행례(行禮)하였다. 행례가 끝난 다음 올라가 각내(閣內)로 나아가 궤(櫃)를 받들어 내려 보자기를 풀고 어진(御眞) 대소(大小) 2본(本)을 받들어 폈는데 대본(大本)은 신해년(1791)에 도사(圖寫)한 것이고 소본(小本)은 병진년(1796)에 도사한 것이다. 시임·원임 각신과 서사관이 한복판에서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아서 어진 대본에다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춘추(春秋) 40세 어진으로, 즉조(卽阼) 15년 신해년 가을에 도사(圖寫)했다.’는 내용의 한자(漢字)를 썼으며, 어진(御眞) 소본(小本)에는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의 춘추 45세 때의 어진으로, 즉조 20년 병진년 봄에 도사했다.’는 내용의 한자 29자를 썼다. 서사(書寫)를 끝내고 나서 어진을 도로 받들어서 보자기에 말아 궤에 넣고 나서 탑(榻)에 봉안하였다. 시임·원임 각신이 주합루(宙合樓) 앞뜰에 나아가 행례하고 나서 각신 1원(員)이 올라가 각(閣)을 열고 내려와 제자리에 다시 돌아오니, 시임·원임 각신들이 도로 서향각(書香閣)으로 나아가 산선(繖扇)으로 시위(侍衞)하고 진열(陳列)하기를 의식(儀式)대로 하였다. 각신이 올라가 각내(閣內)로 나아가서 소본(小本) 어진이 들어 있는 궤를 받들고 정계(正階)를 경유하여 나아와서 주합루에 이르러 정계를 경유하여 누(樓)로 올라가 탑(榻) 위에 봉안(奉安)하고 휘장을 내리고 문을 닫았다. 시임·원임 각신들이 내려와서 제자리로 돌아왔다가 곧이어 서향각으로 나아갔다. 대축이 올라가 각내(閣內)로 나아가 대본 어진이 든 궤를 받들고 나아와 여(轝)에 봉안한 다음 영숙문(永肅門)으로 나아왔다. 대축이 어진이 들어 있는 궤를 받들어 여에서 내려와 연(輦)에 올려놓고 나서 장위(仗衞)의 진설을 상의(常儀)와 같게 하고 돈화문(敦化門)으로 나아와 출발하였다.】                      임금이 돈화문(敦化門) 밖에 나아가 지송(祗送)하였다.

 

12월 11일 기미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납향제(臘享祭)를 행하였다.

 

정언                     강준흠(姜浚欽)이 상소하여 면려하니, 비답을 내려 가상하다고 권장하였다.

 

수찬                     이정병(李鼎秉)이 상소하여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유집(遺集)을 가져다 열람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고 가납(嘉納)하였다.

 

12월 12일 경신

권강(勸講)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평일 매양 탁지(度支)의 경비가 부족하다는 것과 양서(兩西)215)                                             의 민고(民庫)가 탕갈(蕩竭)된 데 대하여 진념(軫念)하시어 기필코 복구(復舊)시키려 했던 고심(苦心)과 지의(至意)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대저 당초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신 성의(聖意)는 의도한 바가 있었으니, 그것은 첫째도 백성을 위하는 것이었고 둘째도 백성을 위하는 것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이번 삼도감(三都監)의 물력(物力)을 모두 장영(壯營)에서 담당하게 했던 것이다. 또 칙사(勅使)의 사행(使行)과 우리의 사행이 왕래한 것이 여러 번이었으므로 호조와 양서의 경비가 응당 반드시 적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유년216)                                              정월부터 12월까지 호조에서 1년 동안 쓸 경비를 장용영으로 하여금 호조로 획송(劃送)하게 하라. 그리고 세입(歲入)은 본조(本曹)에 저치(儲置)하고 양서에 소재한 장영곡(壯營穀)의 대전(代錢)은 일체 아울러 해도(該道)의 민고(民庫)에 붙이게 하라. 이렇게 하면 일푼이나마 우리 선왕(先王)의 지극한 뜻과 괴로워하던 마음을 우러러 몸받는 것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인산(因山) 때 협여(挾轝)하고 수여(隨轝)했던 장졸(將卒)들에게 사방(射放)의 시험을 보여 등급을 나누어 시상(施賞)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12월 13일 신유

조상진(趙尙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12월 14일 임술

권강(勸講)하였다.

 

양서(兩西)의 민인(民人)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나 소자(小子)가 외로운 몸으로 상(喪)을 당한 지 여러 달이 지나고 이해도 저물어가고 있다. 진유(眞遊)의 길이 점점 멀리 가시니, 나의 사모하는 마음 미쳐 갈 길이 없다. 제물을 올려 제사하면 어렴풋이 뵐 수 있는 것만 같으나, 임금의 자리[扆宁]를 당하면 걱정스런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주야로 다져먹는 한마음은 오직 선왕(先王)의 성헌(成憲)을 봉승(奉承)하고 계술(繼述)하여 나의 억만년토록 이어 갈 크나큰 기업(基業)을 보전해 가려는 것뿐이다. 아! 나의 대소 신공(大小臣工)들은 오히려 또한 이훈(彛訓)을 잘 따라서 나의 선왕(先王)을 섬기던 마음으로 나 소자(小子)를 섬기면, 나 소자가 감히 선왕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수시로 기미를 살펴 길이 천명(天命)과 합치되게 할 것을 생각하여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경계하고 삼가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가에서도 감통(感通)하게 하신 것은 선왕께서 하늘을 공경한 소이였으며, 은혜롭게 무육(撫育)하고 의롭게 부려서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사지(四肢)가 불인한 사람들도 생을 누릴 수 있게 하고 늙은 홀아비와 과부, 부모 없는 어린아이와 자식 없는 늙은이들도 모두 부양(扶養)을 받을 수 있게 한 것은 선왕께서 백성들의 일에 부지런히 힘쓰시던 소이였던 것이다. 이미 또 ‘아! 백성과 하늘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다.’고 하고 나서는 드디어 백성들을 화합하게 하는 것으로 하늘에다 비는 근본으로 삼았는데, 화합하게 한다는 것은 민심을 화협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따뜻하게 사랑한 연후에야 화협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기를 미치지 못할 것같이 두려워하시며, 25년 동안 빛나게 임어하시면서 옷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고 집은 서까래를 고치지 않았으며 음식은 좋은 그릇을 쓰지 않았고 거처함에는 좋은 방석을 깔지 않았으며 널리 온갖 일을 거행함에 있어 하나도 그 근본을 바루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많은 백성들을 거론하면 하나라도 그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 멧돼지와 사슴의 공상(供上)을 견감하니 산골 백성들이 이를 힘입어 편안하였고, 어물과 미역의 세금을 이정(釐整)하니 바닷가 어민(漁民)들의 생활이 넉넉해졌고, 제언(堤堰)을 보수하여 관개(灌漑)에 도움을 주니 농부(農夫)들이 흥기(興起)되었다. 향음례(鄕飮禮)217)                  에 대한 윤음(綸音)을 반포하여 화발(華髮)218)                  이 봉양을 받게 되니 늙은 백성들이 편안한 여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돌보고 구제하는 데 대한 법칙이 이루어져 담모(髧毛)219)                  가 거처할 곳을 잃지 않게 되니 어린 백성들이 보호를 받게 되었고, 군적(軍籍)의 모순된 부분을 이정(釐整)하여 유아(幼兒)와 백골(白骨)에게 군포(軍布) 징수하는 억울함이 없게 한 것은 군사도 또한 백성이기 때문이며, 번전(番錢)의 반을 내게 되어 있는 것을 방지하여 치곤(緇髡)220)                  을 동요하지 않게 한 것은 승인(僧人)도 또한 백성이기 때문이며, 공천(公賤)·사천(私賤)에 이르러서도 추쇄(推刷)하는 폐단을 개혁하여 실가(室家)의 즐거움을 보전하게 한 것은 노비(奴婢)도 또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비록 어리석어 아무것도 모르는 백성이어서 일월(日月)처럼 조림(照臨)하고 풍우(風雨)처럼 은택에 젖게 함을 몰라도 길에서 시장에서 기뻐서 노래하게 되어 인성(仁聲)·인문(仁聞)이 우리 강역(疆域)을 온통 뒤덮게 되었다. 그러나 요(堯)·순(舜) 같은 성인(聖人)도 오히려 널리 베푸는 데 대해서는 어렵게 여겼으므로, 이에 만물을 창조하는 지혜에 의거 묵묵히 신(神)스러운 계획을 세워 6, 7년 동안 경영(經營)하면서도 밖으로 확 드러내지 않은 채 엄연(儼然)히 하나의 장용영(壯勇營) 제도를 만들었는데 용기(龍旂)와 조장(鳥章)을 드날리게 한 것은 무위(武威)를 빛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전대와 자루에 군량(軍糧)을 가득히 채울 수 있게 한 것은 재화(財貨)를 좋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첫 번째도 백성을 위하고 두 번째도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내탕(內帑)의 돈을 내어 곡식을 사서 제도(諸道)에 저치(儲置)하게 하였고 내장(內庄)의 과다한 징렴(徵斂)을 개혁하여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박하게 해주었다. 양서(兩西)에서 둔전(屯田)을 경영하여 내사(內司)의 급대(給代), 액례(掖隷)의 태용(汰冗), 혜국(惠局)의 갑주가(甲冑價), 진헌(進獻)의 첨보(添補)에 드는 수요(需要), 경상(慶賞)과 기타 비용에 드는 자재(資財)에 이르기까지 경비(經費)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많은 축적을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장용영을 설치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군오(軍伍)를 편성하여 징병(徵兵)의 노고를 덜게 하였고 재회(財賄)를 저축하여 균역법(均役法)을 혁파하는 것에 대해 오직 성지(聖志)가 혁연(赫然)히 이미 정하여졌으므로, 직위(職位)에 있는 모든 관원들이 목을 길게 빼고 두 손을 모아잡고서 명령이 행해지고 법이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황천(皇天)이 우리 국가를 돌보지 않은 탓으로 말명(末命)이 갑자기 나오게 되었으니, 아! 하늘이여, 백성들이 복이 없음이 어찌하여 차마 이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자성 대왕 대비 전하(慈聖大王大妃殿下)께서는 여중 요순(女中堯舜)으로서 수렴(垂簾)하고 정무를 보시면서 선왕(先王)의 유지(遺旨)를 추념하고 대농(大農)의 저축이 궤핍(匱乏)됨을 진념(軫念)하여 빈전(賓殿)과 국장(國葬)에서부터 산릉(山陵)의 지용(支用)에 이르기까지 장용영에서 계속 잇대게 하도록 명하였고, 또 십행(十行)의 은혜로운 윤음(綸音)을 내려 자상하고도 간곡한 말로 장용영의 저축을 모두 내어놓으면 쌀이 수만 석(石)이고 돈이 10만 양이나 되는데 이는 탁지(度支)의 1년 경비를 충당하게 하라 하시고, 또 이른바 양서(兩西)의 민고(民庫)에 있는 자모 이식전(子母利殖錢)은 수입이 지출을 감당하지 못하여 백성의 고혈(膏血)를 짜내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떠돌아 흩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선왕(先王)께서 항상 마음을 써서 대대적으로 경장(更張)하려고 생각했던 것인데, 더구나 지금은 사성(使星)221)                  이 빈번하게 왕래하여 민력(民力)이 고갈되어 있다. 이들을 위로하고 잘 무마해서 편안한 삶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이때에 해야 할 일이고, 샘을 파고 농사지어 우리 조정을 가깝게 여기도록 회유(懷柔)시키는 것도 바로 이때에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장용영 양서곡(兩西穀)의 각년조(各年條)를 돈으로 만든 관서(關西)의 14만 1천여 냥과 해서(海西)의 4만 4천여 냥을 특별히 해도(該道)의 민고(民庫)에 붙일 것을 허락하니, 영원히 민간(民間)에게 더 징수하지 말아서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살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아! 성대하도다. 자성(慈聖)의 뜻은 곧 선왕(先王)의 뜻이며 자성의 하교는 곧 선왕의 하교인 것이다. 바라건대 지금 이후로는 관하(關河) 수천 리 60여 고을에 관해서는 추호(推呼)로 급박하게 하는 일이 끊기고 마을에서는 가혹하게 착취하는 시달림을 면하게 되어,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차고 베짜는 소리가 끊기지 않아서 혈기(血氣)를 지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처 자식과 함께 지내고 자신의 전리(田里)에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서 자성(慈聖)의 하늘 같은 공을 송축하고 선왕(先王)의 큰 은혜에 감동되어 아비는 자식에게 말하여 주고 형은 아우에게 고하여 주어 모두가 윗사람을 친근히 하고 어른을 섬기는 대의를 알 수 있게 된다면, 나 소자(小子)도 여기서 또한 어찌 함께하는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방백(方伯)과 장리(長吏)들은 옛날의 성덕(盛德)을 생각하고 몸받아서 오늘날의 포유(布諭)를 소홀히 함이 없어야 할 것이며, 사부(士夫)와 서인(庶人)도 오늘의 포유를 듣고 우러러 지난날의 성덕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니, 이것이 나 소자(小子)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윤행임(尹行恁)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45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어문학(語文學) / 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재정(財政) / 농업(農業) / 신분(身分)


[註 217]          향음례(鄕飮禮) : 양풍(良風)과 미속(美俗)을 교도(敎導)하는 의식임. 고을의 유생(儒生)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예의(禮儀)를 지키기 위해 서약하는 술을 마시는 예식임.[註 218]          화발(華髮) : 노인(老人).[註 219]          담모(髧毛) : 어린아이.[註 220]          치곤(緇髡) : 중을 말함.[註 221]          사성(使星) : 사신.

 

12월 15일 계해

황해도 암행 어사                     민명혁(閔命爀)의 서계(書啓)에서 해주 판관(海州判官)                     정술인(鄭述仁), 수안 군수(遂安郡守)                     홍달삼(洪達三),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광수(尹光垂), 문화 현령(文化縣令)                     임희구(任希耉),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양회(李良會), 강령 현감(康翎縣監)                     최상악(崔祥岳), 병사(兵使)                     안숙(安橚), 수사(水使)                     이장철(李長喆)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여 경중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고, 별단(別單)에 논한 통호(統戶) 환곡의 폐단과 해주(海州)의 염세(鹽稅), 장연(長淵)의 어전(漁箭)과 첨정(簽丁)에 관한 여러 조항들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책에 따라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조원(李祖源)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12월 16일 갑자

권강(勸講)하였다.

 

12월 17일 을축

권강하였다.

 

12월 18일 병인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차대를 오늘로 정한 것은 장차 통유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경 등은 상세히 듣고 일심(一心)으로 대양(對揚)하여 우리의 외롭고 위태로운 국세를 부지(扶持)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언교(諺敎) 1통(通)을 내리기를,
"아! 세월이 물처럼 흘러 대행왕(大行王)의 인산(因山)이 벌써 지나가고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이 이미 끝났으니, 만사가 그만이다. 어떻게 체급(逮及)하겠는가? 아 곧 마음으로 생각건대, 대행왕께서 20여 년 동안 임어하시면서 늘 슬픔을 머금고 걱정에 싸여 외로운 사람이 귀의할 데가 없는 것처럼 하면서 일찍이 하루도 임금 노릇하는 것을 즐겁게 여긴 적이 없었으니, 이런 정사(情事)가 어찌 옛 사첩(史牒)의 제왕(帝王)들 가운데 있었겠는가? 그러나 대행왕께서 인륜(人倫)의 상도(常道)와 변도(變道)에 대처함에 있어 각각 그 분수를 극진히 하여 저울의 눈금처럼 분명하게 하였다. 이미 은정(恩情) 때문에 의리를 폐기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의리 때문에 은정을 폐기하지도 않았다. 슬퍼하는 마음이 매양 엄정(嚴正)한 가운데 행해졌고 확고하게 지켜 행하면서 지극히 어려운 경우를 당하여서도 동요하지 않았으니, 인심의 편안함과 천리의 올바름에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진실로 백왕(百王)들의 덕보다 월등히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아! 대행왕의 성대한 덕(德)과 지극한 선(善)이 이미 이러한데, 어찌하여 모년(某年)의 의리를 간범(干犯)한 자들이 처음 나쁜 선례(先例)를 만들더니 일종(一種)의 흉악한 무리들이 뒤에서 그 논의를 조술(祖述)하여 이에 감히 은밀하게 불만스런 마음을 품고 성궁(聖躬)을 헐뜯고 무함하여 다시 여지가 없게 한단 말인가? 그들은 복수(復讐)의 뜻으로 자처하면서 선왕(先王)께서 이를 쓸모 없는 물건처럼 여겼다고 하고 그들은 스스로 근본을 높이는 예(禮)임을 가탁하면서 선왕께서는 이에 대해 지난(持難)했다고 함으로써 성덕(盛德)을 속여 무함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죄과(罪科)로 귀결시켰으니, 아! 통분스러운 일이다. 이들의 하늘에까지 닿을 죄를 어찌 이루 다 벨 수 있겠는가? 선왕께서 이들의 정상(情狀)을 통촉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지만 일단(一段)의 고심(苦心)이 진실로 안전하게 보존하고 편안하게 진정시키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임자년222)                   여름 허다한 윤음(綸音)과 연설(筵說)을 반하하여 완악하고 어리석은 무리들로 하여금 조금이나마 그 의혹을 풀게 하여 스스로 그 악행을 멈추리라 바랐던 것이니, 이는 대개 무위(武威)를 거두고 문덕(文德)을 닦아서 사나운 무리[龍蛇]를 변화시켜 적자(赤子)로 만들려는 성의(聖意)인 것이었다. 오직 이 성은(聖恩)이 그들에게는 천지(天地)와 하해(河海) 같은 덕의(德意)일 뿐만이 아닌데도 오히려 감동하여 멈출 줄을 모르고 한결같이 배치(背馳)하여, 선왕께서 굳게 지켜 행했던 의리에 대해 각승(角勝)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과장하고 속이고 미혹시켰기 때문에 그 무리들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 이후 7, 8년 사이 인심의 함닉(陷溺)됨이 날로 극심하여지고 세도의 경박하고 기만함이 점점 더하여져 국세가 더욱 위태로워졌으니,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대저 선왕의 총명하심으로 또한 이를 통촉하지 못했겠는가마는 매양 진정시키고 휴식시키는 것을 하나의 규모(規模)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또 감히 차마 경솔하게 법을 적용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금년 5월 그믐날 또 만여언의 연교(筵敎)를 내려 근원에서부터 의리를 벽파(劈破)하고 충역을 부석(剖析)했는데, 그 가운데 ‘한 번 반전하여 모년(某年)의 대의리(大義理)를 간범하였고 두 번 반전하여 을미년223)                  의 일을 저질렀고 세 번 반전하여 병신년224)                  의 일을 저질렀고 네 번 반전하여 정유년225)                  의 일을 저질렀다.’ 하신 하교는 곧 근원에서부터 의리를 벽파한 것이다. 또 ‘여기로 들어 온 자는 국편(國遍)이요 충(忠)이요 군자(君子)이고, 여기에서 나간 자는 적편(賊遍)이요 불충이요 소인이라고 한다.’한 하교는 곧 충역을 부석한 것이다. 끝에 ‘스스로 밝힐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한 하교는 곧 구악(舊惡)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선왕께서 저들에게 대해 온전히 보존하고 편안히 진정시키기 위한 고심과 혈성이 과연 어떠하였는가? 그렇지만 선왕께서는 이에 대해 차마 철저히 따져 말함으로써 스스로 슬퍼하는 마음에 손상을 첨가하게 할 수 없는 점이 삼고 있었기 때문에 또 ‘지금의 이 하교는 참고 또 참으면서 조용히 말하고 또 조용히 말하는 것이다.’ 했으니, 그들이 비록 매우 완악하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일푼이나마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이 연교를 보고 차마 다 말하지 못한 이유를 우러러 생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감히 두려워하여 이마에 땀이 흐르고 번연히 마음을 돌려 의리를 배치하여 적편에 함닉된 죄과를 면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참고 또 참기만 한다면 흉도들의 전후 정절(情節)을 소연히 선포(宣布)할 길이 없게 되어 선왕(先王)의 지사(志事)가 회색(晦塞)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조용히 말하고 또 조용히만 말한다면 의리의 정미(精微)한 곡절(曲折)을 시원하게 분변할 길이 없어 인심의 광혹을 끝내 개유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참고 조용히 말한다.[忍之平說]는 네 개의 글자는 이것이 선왕께서 자신의 정사(情事)가 슬퍼서 차마 말하지 못하였던 이유인 것이다. 그러나 후왕이 선왕의 뜻을 천양하는 도리로 헤아려보면 또 어떻게 일절 입을 다물고 참으면서 한 번 시원하게 이야기하여 세상의 완악한 무리들을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 주상(主上)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무엇을 연유하여 다 밝힐 수가 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미망인이 부득이 눈물을 닦으면서 고하노니, 아! 그대 대소 신공(大小臣工)들은 경건한 자세로 상세히 듣도록 하라. 대저 영묘조(英廟朝)의 모년(某年)의 처분은 만부득이한 거조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신하가 된 사람이 이에 감히 이를 간범했다면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한유를 신백(伸白)시킨 처분에서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미 간범한 것이 있고 또 번복할 계책을 내어 멋대로 흉언을 발설하면서 심지어 우리 국본(國本)을 동요시키려 하였으니, 그들이 감추고 있는 마음이 또한 과연 어떠한가? 이것은 바로 첫 번째도 간범한 것이고 두 번째도 간범한 것으로서, 바로 연고(筵敎)에 이른바 한 번 반전(反轉)하여 모년(某年)의 대의리(大義理)를 간범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오직 그 원래 화(禍)를 빚어 낸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을미년·병신년 사이에 이르러 그 말류(末流)가 한없이 치성하여 대리 청정하라는 명을 저지하여 이극(貳極)226)                  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복망(覆亡)될 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양조(兩朝)의 자애와 효성이 매우 돈독함을 힘입어 그들의 흉측한 계책이 끝내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종사가 편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실로 황천(皇天)이 묵묵히 도와주신 덕분인 것이다. 이로부터 그들이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로 여기는 마음이 날로 더욱 깊어져 서로 체결하고 배포(排布)하기를 은밀하고도 난만하게 했으므로 몇 달 만에 역변(逆變)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선왕(先王)께서 영명(英明)하고도 건강(乾剛)227)                  하여 기미에 밝아 토죄(討罪)하여 난역의 싹을 꺾어 버리고 국세를 안정케 하였으니, 이는 또 연교(筵敎)에 이른바 두 번, 세 번, 네 번 반전하여 을미년·병신년·정유년의 일이 있게 되었다고 한 그것이다. 정유년 이후에 이르러서는 연교(筵敎) 가운데 ‘회(繪) 이하는 비난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이는 실로 선왕(先王)이 세도(世道)를 위하여 애통해한 하교인 것이다. 그러나 한 번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온 나라의 백성들이 무슨 연유로 그 애통해 하는 까닭을 알 수 있겠는가? 을미년·병신년·정유년 사이에 약간명의 흉당(凶黨)들에게 간략히 주찬(誅竄)하는 율법을 시행하였으니, 징토(懲討)를 시행하지 않았다고 이를 수는 없다. 그러나 오직 그 와굴(萵窟)은 그대로 있는데 명분을 바루어 토죄하지 못하고 당여(黨與)만을 대략 다스렸던 탓으로 그들로 하여금 도리어 원독(怨毒)을 품고 난을 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그런 때문에 정유년 이후 7, 8년 사이에 그들의 한조각 정신(精神)이 주야로 거짓말을 과장하여 인심을 광혹(狂惑)케 한 것이 오로지 ‘성궁 무함[構誣聖躬]’이란 네 글자에 있었으므로 간사하고 패려스러운 논설(論說)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분했는데, 갑진년228)                   가을에 이르러 역적 김하재(金夏材)의 흉서(凶書)가 나오게 된 것이다. 대저 역적 김하재의 흉서는 곧 그들의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원수로 여긴 사실을 자수한 단안(斷案)인 것이니, 이때를 당하여 국시(國是)를 바루고 명분(名分)을 바루어 간사한 자들을 서치(鋤治)하고 세상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큰 기회였다. 그런데 당시 역적을 다스린 정사도 또 고식적인 것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이 무리들이 의기가 양양하여 두려움이 없이 기세가 갈수록 강건하여 전보다 배나 더하게 되었다. 또 병오년229)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르러서는 만고에 없던 참독(慘毒)한 변을 빚어 내었고, 임자년230)                   여름에 이르러서는 또 당류(黨類)들을 불러모아 은밀히 경영(經營)하여 전례(典禮)에 관한 한가지 일을 가지고 서로 창화(唱和)하면서 반드시 이룩하고야 말려고 기약했었으나, 선왕(先王)께서 굳게 지켜 행하는 신념이 확고하여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이들은 이에 감히 근본도 잊고 원수도 잊었다는 더없이 흉패(凶悖)스런 이야기를 가지고 성덕(聖德)에 비난을 가하여 조절(操切)하고 협지(脅持)할 계책으로 삼았는데, 그들이 경모궁(景慕宮)에 대해 무슨 지성(至誠)과 혈성(血誠)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이는 모년(某年)의 대의를 간범(干犯)한 역적이 청의(淸議)의 공척(攻斥)을 받게 되자 사세가 양립(兩立)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기필코 목숨을 걸고 전례(典禮)에 대한 거조를 도모해 완성시킴으로써 스스로 죄명(罪名)을 벗고 사류(士類)에게 화(禍)를 전가시키려는 계책에 불과했던 것이었으니, 그들 마음의 소재를 그 누구인들 간폐(肝肺)를 보듯이 환히 알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이미 복수(復讐)하는 것을 대의(大義)로 삼고 있다면 마땅히 갚을 원수가 모년(某年)의 대의를 간범한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도 이에 함께 난만히 논의하여 의견을 같이하고는 도리어 간범한 자를 공척한 청의(淸議)를 주장한 사람들을 피맺힌 원수처럼 여겨 기필코 온갖 계책으로 무함하여 해치려는 것은 그것이 무슨 연고인가? 만일 선왕의 영명(英明)이 아니였다면 사류(士類)들이 하나인들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어찌 기가 막히고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수십 년 이래 충역(忠逆)과 시비(是非)에 대한 논쟁이 비록 사단(事端)이 많기는 하였으나, 그 근원의 시초를 논한다면 모년(某年)의 대의리(大義理)에 근본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척리(戚里)와 외정(外廷)을 막론하고 만약 모년(某年)의 대의리를 간범한 자를 충신이라고 하고 옳다고 한다면 간범한 자를 공척한 사람이 진실로 마땅히 역적이 되고 그른 것이 되어야 하며, 만약 간범한 자를 공척한 사람을 충신이라고 하고 옳다고 한다면 간범한 자도 또한 역적이 되고 그른 것이 될 것이다. 예로부터 음양(陰陽)과 선악(善惡)을 분별함에 있어 어찌 일찍이 둘 다 옳은 것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어찌 둘 다 그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바로 고금 천하에 바뀔 수 없는 상리(常理)인 것으로 삼척 동자(三尺童子)도 마땅히 알 일인 것이다. 의리의 분명함이 이와 같은데, 저 일종(一種)의 교활한 무리들이 이에 또 말하기를, ‘《춘추(春秋)》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고 하면서 힘써 양쪽을 공척함으로써 일세(一世)에 기치(旗幟)를 세우고 있으니, 이는 저쪽도 아니고 이쪽도 아닌 둘의 중간에 서서 어인(漁人)의 큰 이익을 가로채려는 계교인 것이다. 더구나 예로부터 충(忠)·역(逆)이 당(黨)을 나눌 즈음에 중립(中立)으로 이름한 자들 치고 적편[賊邊]이 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 국가에 화를 끼치지 않은 자가 있는가? 그 또한 두려운 일이다. 연교(筵敎)에 또 ‘아무아무가 의리를 부식(扶植)시킨 것이 또한 어찌 반드시 모두 척리(戚里)와 친한 사람들이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성의(誠意)가 실로 청의(淸議)를 밝혀 의리를 부식시킨 사람들이 척리와 친부(親附)하기 위한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척리의 사람들이 쟁론한 것이 의리의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은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저절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일변인(一邊人)이 이에 감히 어구(語句)를 날조하고 본의를 변환(變幻)시켜 국편[國邊]의 사람들을 배척하여 밀어내는 패병(欛柄)으로 삼고 있으니, 그들의 먹은 마음과 품은 뜻이 더더욱 통분스럽다 하겠다.
아! 선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효성으로 불행히도 전고의 제왕(帝王)들에게는 없었던 정경(情境)을 당하였으므로 그 대처함에 있어 저토록 지성스럽게 분의를 극진히 하여 대중 지정(大中至正)하게 하였으니, 비록 요(堯)·순(舜) 같은 성인이 이런 처지를 당하였다 하더라도 대처하는 방법이 또 어찌 이에서 더할 수 있겠는가? 신하된 사람이 진실로 군부(君父)의 정사(情事)를 우러러 몸받는다면 다만 마땅히 오열을 억제하고서 흠앙하고 송축할 따름이지 또 어떻게 감히 그 사이에 부리를 놀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무리들이 이에 감히 전례(典禮)에 관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이를 기화(奇貨)로 삼아 서로 패려스러운 말로 선동하여 군부를 능멸하고 무함함으로써 선왕(先王)이 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일을 장차 백세(百世)에 회색(晦塞)시키려 하였으니, 그 마음속을 궁구하여 보건대, 이것이 과연 일푼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의거 논하여 본다면 그들은 비록 천도막 만도막이 나는 형벌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한마디라도 슬퍼하고 원통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정유년 이후에 대해서는 곧 연교(筵敎)에서 ‘회(繪) 이하는 비난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그 전말과 내력을 궁구하여 본다면 정유년에 네 번째 반전(反轉)한 뒤를 이어 또 다섯 번째 반전하여 갑진년의 일이 있게 되었고, 여섯 번째 반전하여 병오년의 일이 있게 되었고, 일곱 번째 반전하여 임자년의 일이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이들이 시종 구실로 삼아 군상(君上)을 무함하고 세도(世道)를 무너뜨린 근본에 대해 논한다면 모두 전례(典禮)에 관한 한 조항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심장은 실로 모년(某年)의 의리를 간범한 역적으로부터 같은 맥락으로 일관되었다는 것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우리 조종(祖宗)들께서 4백 년 동안 이어온 인후(仁厚)한 은택이 저들을 저버린 것이 무엇이기에 저들의 괴란(壞亂)함이 곧 이와 같단 말인가? 생각하면 통분스럽고 괴로워서 차라리 죽고만 싶은 심정이다. 을묘년231)                   이후에 이르러서는 곧 선왕(先王)께서 다시 한 번 유신(維新)의 정치를 행한 시초였으므로 연교(筵敎)에 ‘을묘년 이후 내가 세도(世道)를 위하여 깊고도 먼 장래를 위하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교속(矯俗)이라는 두 글자를 점출(玷出)해 내었다.’ 했는데, 이는 대개 힘써 관후(寬厚)한 쪽을 따르고 뒤져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속(俗)자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실상 모년(某年)의 의리를 간범(干犯)한 것도 바로 이 한 속(俗)자인 것이고 을미년·병신년·정유년에 관계된 것도 또한 바로 한 속자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세상에 살면서 오늘날 신하가 된 사람은 그 누구인들 교속(矯俗)이라는 두 글자가 부월(鈇鉞)보다 엄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김이재(金履載)의 일에 대해 논하면서 말하기를, ‘외면(外面)만 갑자기 보면 궁구해도 알 수 없어 말을 할 수 없다고 해도 옳겠지만 또한 다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가운데 음종(陰瘇)이 즉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곪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자도 있지 않겠는가?’ 하였고, 또 끝으로 ‘오늘 이 하교를 듣는 사람은 반드시 강개(慷慨)하고 격앙(激仰)하여 천명(闡明)할 방도를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반드시 두려워하여 스스로 해명할 방도를 생각할 사람도 있게 될 것이다.’ 하였고, 또 ‘천명(闡明)과 자명(自明)은 단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이 한 뒤에도 만약 또 효험이 없다면 난들 또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 연교(筵敎)의 수미(首尾)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성인(聖人)이 세도를 위하여 슬퍼하고 노심하며 심장(深長)한 우려를 한 것에 대해 귀신(鬼神)도 눈물을 흘리고 돈어(豚魚)232)                  도 감복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 이른바 척연(剔然)히 송구스런 마음을 느껴 스스로 밝힐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고 한 하교는 또 선왕께서 십분 어리석고 완악한 자들을 각성시켜 유신(維新)에 참여하도록 도모하신 성의(聖意)인 것이다. 이런 때문에 비록 당시 병환(病患)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으면서도 이에 기일을 한정하여 각자 상소하여 스스로 해명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뒤 단지 한 사람의 재신(宰臣)이 천명하는 소장을 올렸을 뿐 그 이외에는 다시 한 사람도 스스로 해명한 사람이 없었다. 이때 성후(聖候)가 비록 점차 침중해져 가고 있었으나 오히려 매우 개연(慨然)스러움을 느껴 이에 6월 12일 연석(筵席)에서 또 하교하기를, ‘그들이 끝까지 자명(自明)하거나 자수(自首)하지 않는다면 내가 처분(處分)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성교(聖敎)가 간측(懇惻)하고도 엄절(嚴截)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그들이 끝까지 자명하거나 자수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선왕의 대처분(大處分)이 과연 끝내 말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자명하고 자수하게 한 거조는 선왕의 말명(末命)이니 곧 그만둘 수 없는 지사(志事)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리에 관계됨이 어떠하며 사체의 엄중함이 어떠한가? 따라서 대전(大殿)의 정사(情事)와 나의 처지에서 어떻게 감히 선왕이 이미 승하(昇遐)했다고 하여 끝내 대양(對揚)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오늘날 이 거조가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인데도 그만두지 않는 것이겠는가? 나라가 나라답게 되는 것과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의리(義理)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의리가 회색(晦塞)되면 나라는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은 금수(禽獸)가 되는 것인데, 이적과 금수가 되어 가지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선왕(先王)께서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으로 의리를 잡기를 부월(鈇鉞)과 같이 하여 완악하고 미열한 자를 어린아이처럼 교유(敎牖)하여 기필코 함께 대도(大道)에 도달하게 하려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이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저들의 입장에서는 실로 귀신을 변화시켜 사람으로 만들고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되살아나게 하는 큰 기회이며, 적편이 변화하여 충(忠)이 되고 소인이 변화하여 국편이 되고 불충(不忠)이 변화하여 군자가 되는 것은 문이 문지도리에 돌아가는 것과 같은 데 불과한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속마음을 고함이 이처럼 간절했는데도 아직도 감히 사납게 완악함을 믿고서 변동(變動)할 줄을 모른다면, 이는 그들의 마음이 스스로 선왕의 성명(成命)을 능멸하는 것을 달게 여겨 끝내 교화를 저해하는 흉류(凶類)가 되고 말 것이다. 왕부(王府)의 관석(關石)233)                  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니, 이 시기를 지난 뒤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일을 지체하지 않고 살 길을 찾아주려 한다. 아!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알고 있으라."
하였는데, 이를 승지에게 명하여 독주(讀奏)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 이 언교(諺敎)는 곧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끝마치지 못한 지사(志事)를 천명한 것이다. 우리 선왕께서 보위(寶位)에 임어하신 지 20여 년이었는데, 의리를 굳게 잡고 시행함에 있어 지극히 정미롭게 하였다. 5월 그믐의 연교(筵敎)에 이르러서는 엄정(嚴正)하고도 간측(懇惻)하여 남김없이 부석(剖析)하였는데, 끝내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게 한 것은 오로지 한 가닥 세도(世道)를 위한 지성과 고심에서 나온 거조였는데, 불행하게도 미처 처분(處分)을 내리지 못하시어 드디어 그것이 말명(末命)이 되고 말았지만, 만일 당시 자명하고 자수한 사람이 끝내 없었다면 선왕께서 한 번 큰 처분(處分)을 내리는 일을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선왕의 하교를 추념(追念)하는 도리에 있어 어찌 감히 선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서 선왕의 마치지 못한 뜻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상(主上)이 방금 어린 나이여서 전후 사실을 미처 다 통촉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미망인(未亡人)은 애통한 가운데 질병(疾病)이 계속되어 정신이 흐릿하여 진작(振作)할 수 없었던 탓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월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대신(大臣)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선조(先朝)의 권우(眷遇)를 받은 신하들로서 혹은 원보(元輔)의 직임에 있는 사람도 있고 혹은 참조(參助)의 지위에 있는 이도 있으며, 오직 한두 명의 각신(閣臣)으로 말하더라도 선조의 특별한 사은(私恩)을 치우치게 받았고 또 선조의 의리에 대해 들은 것이 다른 사람에 견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6월 이후 이미 반 년이 지났건만 아직껏 한 가지 일도 추념(追念)하여 천명한 거조가 없었으니, 어찌 너무도 개연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영상(領相)에 이르러서는 선왕 때부터 의리에 관한 일을 부탁하였는데도 근일 제반 일에 대해 살펴보면 항상 세월만 보내고 고식적인 뜻이 많아서 용기 있게 나가 담당하는 기색과 국사를 진작시켜 거행하는 책임감이 전혀 없으니, 장차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는가? 미망인이 천만 번 생각하고 헤아린 끝에 부득이하여 이런 거조가 있게 된 것이니, 경 등은 모쪼록 내가 오늘날 이런 거조가 있게 된 뜻을 알아서 모두가 참여하여 듣고서 서로들 고유(告諭)하여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선왕의 유의(遺意)인 것이므로 다시 시일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대신(大臣) 이하는 이 하교를 듣고나서 각기 소견을 진달하라."
하니, 영부사(領府事)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수만언(數萬言)에 달하는 언교(諺敎)가 정녕(丁寧)하게 부석(剖析)하여 선왕의 정사(情事)를 천명하고 선왕의 의리를 발휘하였으며, 우리 선왕께서 뜻을 지닌 채 끝마치지 못한 일과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말하지 못한 뜻을 환히 밝혀서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의 일부(一副) 고심(苦心)은 막중하고 막대한 의리와 지정(至精)하고 지미(至微)한 병집(秉執)이었는데, 이를 분명하게 변석(辨析)하고 굳게 지키기를 20여 년을 하루처럼 하시더니 5월에 말명(末命)이 있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남김없이 다 말하였습니다만, 선대왕께서 어찌 5월의 연교(筵敎)가 말명이 될 줄 미리 알고 이처럼 자상하게 말씀했겠습니까? 하늘이 이미 막중한 의리를 선왕에게 맡겼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고 말하지 않는 사이에 묵묵히 간직했던 속마음을 열어놓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궤석(几席) 앞에서 널리 하유하신 것은 마치 홍범 구주(洪範九疇)234)                  를 신우(神禹)에게 내려 준 것과 너무도 같습니다. 아무리 흉악스럽고 완악한 무리라고 하더라도 이 언교(諺敎)를 봉람(奉覽)하면 그 누군들 통렬히 구습(舊習)을 고쳐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르는 사람들은 자명하고 자수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지만, 함께 대도(大道)에 이르러 잘못을 면하는 데 무슨 부끄러워해야 할 단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상헌(常憲)이 있으니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심환지(沈煥之)는 말하기를,
"우리 선왕의 일부(一副) 굳게 지켜온 의리는 밝기가 일월(日月) 같고 엄하기가 부월과 같았는데, 지금 이 하교에서 남김없이 부석(剖析)하였습니다. 성상(聖上)께서 비록 어린 나이에 계시지만 한 번 봉람(奉覽)하신다면 의리의 근원과 두서를 절로 환히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어찌 종사(宗社)의 끝없는 아름다움이 아니겠습니까? 선대왕의 5월 연교(筵敎)가 있으신 뒤에는 목석(木石)과 돈어(豚魚)라 할지라도 누군들 믿어 감복하지 않겠으며, 또 오늘의 이 자교(慈敎)를 받들고서는 비록 미혹(迷惑)하여 변화할 줄 모르는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어찌 척연히 두려워할 줄 알아서 구습(舊習)을 고치고 유신(維新)에 참여를 도모하려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월 12일의 하교는 신이 연석에 참여하지 않았었으므로 비록 직접 받들지는 못했습니다만, 또한 일찍이 한 번 연신(筵臣)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3일로 기한을 정하여 자명(自明)하게 했다가 곧이어 또 기한을 정하게 한 하교를 정지시키셨습니다. 16일에 이르러 신이 요상(僚相)과 함께 같이 진연(診筵)에 들어가 우러러 성교(聖敎)를 받들었는데, 그 내용에 ‘비류(匪類)들이 은밀히 통하는 길이 백가닥 천가닥이겠지만, 그들이 부당한 방법으로 나의 마음을 엿보고 있는 정상을 내가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이 만약 스스로 현고(現告)하지 않고서 나의 입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들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겠는가?’ 했는데, 그때의 옥음(玉音)이 분명히 귀에 남아 있어 지금 돌이켜 생각하여도 터져나오는 오열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선대왕께서 의리를 위하고 세도를 위하여 더없이 근간(懃懇)하게 고심하신 것을 신 등이 어찌 모르고 있겠습니까? 근일에 이르러 근원을 벽파(劈破)하여 속폐(俗弊)를 통렬히 바로잡으라고 하신 하교를 신이 연석에서 받들어 들은 것도 한두 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만언에 달하는 자교(慈敎)가 정녕하고 간절하여 선왕께서 성취시키지 못한 뜻을 추념(追念)하여 일세(一世)의 미혹하고 완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함께 대도(大道)로 나와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하게 하시었으니, 이 하교를 듣고 나면 누군들 감히 환히 각성하여 전일의 나쁜 습관을 크게 변혁시킬 것을 기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다시 5월의 연교(筵敎) 가운데 자수(自首)할 것을 허락한 하교로 말하면, 우리 선대왕의 일월(日月) 같은 총명함으로 어찌 화(禍)를 빚어내고 거짓말을 과장한 사람이 본래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않고 단지 그 자수하도록 허락한 것은 참으로 천지와 같은 인자함으로, 갑자기 위형(威刑)을 가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한 가닥 살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일푼이나마 병이(秉彛)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자리에서 사실대로 자수하여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도모해야 되는데, 시랑이 같은 사나운 성품은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어서 한결같이 버티면서 끝내 선대왕께서 임어하고 계시던 날 자복(自服)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제 자전의 하교가 이와 같이 자상하고도 간곡한데 만약 이런 하교를 보고도 또 한결같이 교화를 저해한다면, 이는 참으로 효경(梟獍)의 심장을 가진 무리들인 것입니다. 신 등이 매우 변변치 못하기는 합니다만, 어찌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한다는 의리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은 말하기를,
"여러 대신(大臣)들이 이미 모두 우러러 진달하였으므로 신은 다시 진달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교한 뒤에 또 어찌 하교대로 따르지 않을 부류들이 있겠습니까?"
하고, 행 대호군(行大護軍)        김문순(金文淳)은 말하기를,
"대행조(大行朝)께서 굳게 지키신 대의리(大義理)는 엄정하고도 확고하여 20여 년을 하루처럼 하였습니다. 5월 그믐날의 연교(筵敎)에 이르러서는 미혹된 자들을 유도(牖導)하기 위해 부석(剖析)한 의리와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덕음(德音)이 애연히 넘쳐흘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망극한 일을 당하여 곧 말명(末命)이 되고 말았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더더욱 하교를 따르지 않을 완악한 무리가 어찌 있겠습니까?"
하고, 형조 판서        조상진(趙尙鎭)은 말하기를,
"선대왕께서 25년 동안 굳게 지켜 온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의리를 오늘날 정신(廷臣)이 누가 감히 일심(一心)으로 굳게 지키지 않겠습니까? 설사 한두 명의 교화를 따르지 않는 무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늘의 자교(慈敎)를 본 뒤에는 또 누가 감히 환히 깨달아 다함께 유신(維新)의 영역으로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수원 유수(水原留守)        이만수(李晩秀)는 말하기를,
"선대왕의 대의리(大義理)는 흠앙하기를 일월(日月)같이 하고 믿기를 사시(四時)같이 하였는데 오늘 수천언에 달하는 자교(慈敎)가 더없이 근간(懃懇)하시어 선왕의 성덕(聖德)을 천명하고 선왕의 지사(志事)를 발휘하여 남긴 것이 없습니다. 5월 그믐날의 연교(筵敎)에 이르러서는 곧 의리를 부석(剖析)하여 미속(迷俗)을 효유(曉牖)하기 위한 지인(至仁)하고 지성(至誠)하신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때의 사단(事端)은 소신(小臣)이 정섭(靜攝) 중에 계신 성의(聖意)에 염려를 끼쳐드린 데 연유된 것이어서, 지금 추념(追念)하니, 가슴이 무너지고 황공스러워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도움을 받아 임금을 섬기고 있는 것은 곧 우리 선대왕께서 25년 동안 굳게 지켜온 의리인 것입니다. 더구나 선대왕의 5월 그믐의 말명(末命)은 엄정하고도 딱하게 여기는 마음을 함축하고 있어 돈어(豚魚)도 믿게 하여 감복시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껏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내리신 자교(慈敎)를 삼가 받드니, 오로지 의리를 밝히고 세속을 바로잡기 위한 데에서 나온 성덕(盛德)이요 지인(至仁)인 것이어서, 신은 흠앙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는 말하기를,
"신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기는 합니다만, 5월의 연교(筵敎)에서 교속(矯俗)이라는 두 글자를 끄집어내어 충신이 되고 역적이 되는 분의에 대해 통변(洞卞)하였는데, 비록 혹 미혹하여 교화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마음을 고치고 얼굴을 고쳐 모두 유신(維新)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만, 지사(志事)를 마치지 못한 채 갑자기 말명(末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자교(慈敎)를 받드니, 비록 돈어(豚魚)와 목석(木石)같이 미열하고 완악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척연히 각성하여 모두 기질(氣質)을 변화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호군(大護軍)        서유대(徐有大)는 말하기를,
"누누이 말씀하신 자교(慈敎)가 명백하고도 간곡하여 선왕의 유의(遺意)를 거의 더욱 잘 천양(闡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흠송(欽頌)한 끝에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판윤(判尹)        이조승(李祖承)은 말하기를,
"오늘의 자교는 엄정하고도 간곡하여 선대왕의 성덕(聖德)과 고심(苦心)을 충분히 발휘하였습니다. 만약 다시 교화를 따르지 않는 무리가 있어 미혹한 채 감동하여 깨닫지 못한다면, 단연코 법에 의거하여 다스린 연후에야 세도가 안정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 언교(諺敎)를 연석에서 물러간 뒤 상세히 돌려가면서 본다면, 반드시 천양할 방도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는 일은 반드시 시일(時日)을 지체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일 주상(主上)이 어리고 여군(女君)이 임조(臨朝)했다고 해서 일푼이라도 경홀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방헌(邦憲)이 본시 있으니, 내가 일개 부인(婦人)이긴 하지만 어찌 조처할 방도가 없겠는가? 모쪼록 각기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조신(朝臣)들의 본말(本末)과 장단(長短)에 대해 일찍이 우리 선왕께 우러러 들은 적이 있는데, 이서구(李書九)의 재능은 호조나 선혜청의 당상(堂上)을 감당할 만하다는 유음(遺音)을 내가 지금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지난번 호판의 자리가 비어 있을 적에 특별히 제수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사양하는 상소 가운데의 구어(句語)를 본건대, ‘이는 반드시 불초(不肖)의 성명이 잘못 위에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라 했는데, 내가 누구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였다고 여기는가? 나의 좌우에는 여시(女侍) 두어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누가 그의 성명을 알겠는가? 이들 이외에는 곧 나의 본제(本第)235)                                             의 사람들인 것이다. 나는 조정의 정령(政令) 사이의 일을 가지고 사친(私親)에게 묻고 싶어하지 않는데, 그의 상소 가운데의 말은 마치 누군가가 은밀한 길을 통하여 그의 성명을 나에게 고하여 준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정령에 누가 되는 것은 우선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조정에서 성신(聖神)하신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온 이후로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그가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아름다운 이름을 낚아서 뒷날을 관망하며 완전히 의리를 배치(背馳)하려 하니, 이런 소인(小人)을 엄히 조처하지 않는다면 군군 신신(君君臣臣)의 윤강(倫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호판                     이서구를 삭직(削職)시키고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토록 하라."
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 분간하라고 명하고 나서 도로 본직(本職)을 제수(除授)하였다.

 

도당록(都堂錄)을 행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 좌참찬                           이치중(李致中),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 홍문관 제학                           윤행임(尹行恁), 이조 참의                           심상규(沈象奎)가 나아갔다.】                      5점(點)을 받은 사람은 오한원(吳翰源)·박명섭(朴命燮)·이인채(李寅采)·심주(沈銖)·장석윤(張錫胤)·윤인기(尹寅基)·신서(申溆)·이동면(李東冕)·안정선(安廷善)·이중련(李重蓮)·정노영(鄭魯榮)·엄사언(嚴思彦)·임후상(任厚常)·신귀조(申龜朝)·이동만(李東萬)·유태좌(柳台佐)·이상겸(李象謙)·이경삼(李敬參)·이기헌(李基憲)·김회연(金會淵)이다.

 

12월 19일 정묘

권강(勸講)하였다.

 

이집두(李集斗)를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12월 20일 무진

권강하였다.

 

평안도 암행 어사                     오한원(吳翰源)이 서계(書啓)하여 안주 목사(安州牧使)                     김효건(金孝建), 운산 군수(雲山郡守)                     홍용건(洪龍健)이 잘못 다스린 정상을 논하여 경중을 나누어 감죄(勘罪)하였고, 별단(別單)에 각 고을의 칙사(勅使)의 지공(支供)에 대한 잘못된 예와 청북(淸北)236)                                             의 누호(漏戶)와 허결(虛結), 평양과 안주 등 고을의 환폐(還弊), 만부(彎府)의 융정(戎政)이 허술함과 정전(井田) 기지(基址)의 범경(犯耕)에 대한 일을 논하였으므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방책에 따라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영춘현(永春縣)의 전세(田稅)와 대동 군향(大同軍餉)을 모두 돈으로 대신 상납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해현감(該縣監)                     홍낙안(洪樂安)이 상소하여 배[船]로 운반하기 어려운 점을 진달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12월 21일 기사

권강(勸講)하였다.

 

고(故)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의 대상(大祥) 때 제수(祭需)를 넉넉히 수송(輸送)하여 주고 그의 아들은 복(服)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는데, 그가 보도(輔導)한 공로가 있은 것을 생각해서이다.

 

12월 22일 경오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와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을 소견(召見)하였다.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 참판                           조윤대(曹允大), 참의                           심상규(沈象奎), 병조 판서                           이조원(李祖源)이다.】 김문순(金文淳)을 판의금부사로, 조명즙(曹命楫)을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반궁(泮宮)에서 감제(柑製)를 설행하여 으뜸을 차지한 홍우섭(洪遇燮)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2월 23일 신미

곤수(閫帥)·수령(守令)·변장(邊將)·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12월 24일 임신

권강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중비(中批)는 과연 아름다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있은 것이다. 세도와 인심이 이러할 때를 당하여 어찌 선왕(先王)께서 의지하여 마음을 부탁했던 신하를 발탁 기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조 판서                     서매수(徐邁修)는 체직을 허락하고 전 참판                     윤행임(尹行恁)을 제수하라."
하였다.

 

12월 25일 계유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에서 김이재(金履載)에게 내린 처분은 곧 의리를 밝히고 세도를 부지시키기 위한 지극한 성의(聖意)인 것이니, 그 관계되는 것이 얼마나 엄중하며 우려하신 것이 얼마나 깊고도 원대한 것이겠는가? 당초 김이재가 상소할 때 권유하고 사주한 정상(情狀)을 선조(先朝)에서 이미 그 간사한 정상을 살펴 통촉한 바의 사람이 그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5월 그믐의 연교(筵敎)가 있는 뒤에 기필코 그로 하여금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게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성후(聖候)가 참중하다 하여 완연(頑然)히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사실을 자수할 뜻이 없었던 것은 이미 임금을 무시하고 당여를 위하여 죽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며 성후가 점점 침중해진 것도 또한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또한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가슴이 무너지고 뼈가 아픈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더구나 일전의 언교(諺敎)는 실로 선왕의 지사(志事)를 추명(追明)하여 오늘날의 세도를 바루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무릇 그 당여들은 진실로 마땅히 척연히 죄를 뉘우치고 번연(飜然)히 마음을 고쳐 즉시 자수(自首)함으로써 음(陰)을 등지고 양(陽)을 향하며 귀신이 변하여 사람이 될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통유(洞諭)한 지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적막한 채 들리는 말이 없으니, 이는 배치(背馳)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각승(角勝)하기 위해 혈전(血戰)하려는 뜻이 분명하다. 이런데도 버려 두어 태아(太阿)237)                                             로 하여금 시행될 곳이 없게 한다면 국세를 떨칠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예조 참판                     김이익(金履翼)에게 우선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을미년238)                                              겨울에 그가 서종하(徐宗廈)가 다시 나왔다는 흉언(凶言)을 멋대로 발설하였고 또 사람들을 사주하여 청정(聽政)을 진하하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천지 사이에 목숨을 부지하면서 형전(刑典)을 피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큰 흠을 씻어 주고 발탁하여 높은 품질(品秩)에 앉혔으니, 선조(先祖)에서 다시 도와준 은혜가 그에게 있어 어떠하였는가? 그런데도 지금껏 마음을 고쳐 보답을 도모할 길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패퇴한 뒤로 그가 이에 방자하게 국가의 요직을 담당하고 나서서 조정의 권한을 움켜쥐고는 불령한 무리가 포도(逋逃)239)                                             해 있는 늪속의 무리가 되어 남모르게 거짓말을 과장하면서 경영(經營)한 것이 의리와 배치되고 적편[賊邊]을 부식시키고 선류(善類)를 무함하여 역적을 위하여 복수하기 위한 일들을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수십 년을 지나는 사이에 인심을 함닉(陷溺)시키고 세도를 궤란하여 나라의 형세가 점점 위태롭고 혼란스런 지경으로 달려 들어간 지 오래이다. 때문에 지난날 선조(先朝)께서는 깊게 살핌이 매우 밝으시어 그의 죄악이 저촉되는 곳마다 통찰하시고는 비록 즉시 형주(刑誅)를 가하지는 않으셨으나 매양 외관(外官)으로 내어 보냄으로써 조정 의논에 간여하지 못하게 한 것은 곧 성인(聖人)께서 깊이 증오하고 통렬히 끊어서 나라 중앙에 더불어 함께하지 않으려는 뜻인 것이다. 이제 선왕(先王)의 지사(志事)를 추모하여 의리를 천명하는 때를 당하여 저와 같은 흉괴(凶魁)를 어떻게 서울에다 둘 수 있겠는가? 전 유수(留守)                     서유린(徐有隣)을 우선 극변(極邊)토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나의 오늘 이 거조는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조처이다. 만약 선왕의 도를 계술(繼述)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그대로 덮어 두어 천양하고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겠는가? 정신(廷臣)들 가운데서 만약 과연 사력(死力)을 다하여 판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또한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게 이런 거조를 하겠는가? 지난번 언교(諺敎)를 반하(頒下)한 것이 이제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전연 자명(自明)하고 자수(自首)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데도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한마디 말이 없이 적막하기만 하니, 지금의 모양으로 살펴본다면 설혹 안위(安危)와 완급(緩急)에 관계되는 일이 있다 해도 그 장차 팔짱낀 채 앉아서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이런데도 대신과 삼사를 설치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신(大臣)들이 모두 당여(黨與)를 서치(鋤治)할 것과 소굴을 타파(打破)할 것을 우러러 아뢰고 물러갔다. 이어 거듭 책망하는 하교를 받들었다는 이유로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렸고 계속하여 연명 차자를 올려 홍낙임(洪樂任)을 토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원 차자는 봉환(封還)하였다.

김이익(金履翼)을 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에 안치(安置)시키고 서유린(徐有隣)을 경흥부(慶興府)로 멀리 찬배하였다.

 

12월 26일 갑술

권강(勸講)하였다.

 

양사(兩司)          【대사헌            이교일(李敎一), 집의            고택겸(高宅謙), 장령            강문회(姜文會)·민경세(閔慶世). 지평            안정선(安廷善)·조항존(趙恒存), 사간            박서원(朴瑞源), 헌납            김효수(金孝秀), 정언            이상겸(李象謙)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김이익(金履翼)의 하늘에 닿은 죄는 이루 다 벨 수 없을 정도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께서 지켜온 대의리(大義理)는 밝기가 일성(日星)과 같고 엄하기가 부월과 같은데도 아직도 일종(一種)의 불령스런 무리들이 각승(角勝)을 부릴 계교를 드러내어 의리를 배치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을 달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에 교화를 따르지 않는 김이재(金履載) 같은 자가 나와서 한 소장을 갑자기 올렸으니 그 계교는 임금의 뜻을 시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더없이 중하고 엄한 의리를 감히 흐릿하게 만들고 훼손시켰으니, 그 배포(排布)와 설시(設施)를 누가 주장하여 했겠습니까? 이는 은밀히 종용하고 용의 주도하게 사주한 사람이 첫 번째도 김이익이고 두 번째도 김이익인 것입니다. 아! 저 김이익은 본래 음휼(陰譎)한 성품으로 항상 불만스런 마음을 품고 기필코 청의(淸議)와 길을 달리하여 선류(善類)들을 해치고야 말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남모르게 키워온 계책이 김이재의 상소를 꾸며내게 하였고 따라서 어두운 밤에 왕복(往復)했던 진짜 장물(贓物)은 저절로 탄로되는 것이 있었는지라 그의 속마음이 이미 임금의 깊이 살피는 속에 들어오니 도깨비의 무리가 하정(夏鼎)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5월 30일 만여언(萬餘言)에 달하는 연교(筵敎)에서 교속(矯俗)이라는 두 글자를 끄집어 내셨고 또 자명(自明)하여 자수(自首)함으로써 다함께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됨을 고칠 줄을 모른채 시일(時日)을 끌고 오다가 6월 16일 이후에 상하(上下)의 군정(群情)이 초조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던 때에 이르러서도 그가 감히 차마 못하고 감히 못할 마음을 품고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함이 없이 끝내 실정을 자수하지 않음으로써 연충(淵衷)에 번뇌를 일으키게 하여 점점 옥후(玉候)가 침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자성(慈聖) 전하께서 선왕의 의리를 천명하고 선왕의 지사(志事)를 추념하여 크게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자수하게 하였으니 그는 의당 곧 실정을 토로하고 부월 아래 와 엎드려 처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하여 효경(梟獍) 같은 심성(心性)을 고치지도 않고 시랑이 같은 마음으로 두려워함이 없이 통유(洞諭)한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여전히 완악하고 잔인하여 그의 임금을 무시하고 당여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으니 그의 더없이 흉측한 정절(情節)을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갑도(金甲島)에 안치시킨 죄인 김이익을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신문(訊問)하여 쾌히 방형(邦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아! 예로부터 권간(權奸)들이 세도(世道)를 괴란시키고 국가에 화(禍)를 끼친 경우가 한없이 많았었습니다만, 어찌 서유린(徐有隣)처럼 말할 수 없이 요망스럽고 흉측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저 흉도(凶徒)들이 모년의 대의리를 간범한 것이 한 번 반전(反轉)되고 두 번 반전되고 하였으나 맥락이 서로 관통되어 있었습니다. 아! 저 서유린이 이에 을미년240)                   겨울 고(故) 상신(相臣) 서명선(徐命善)이 상소했을 때에 서종하(徐宗廈)가 다시 나왔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윤상후(尹象厚)와 더불어 난만하게 수작하고서 도당들을 지사(持使)하여 청정(聽政)에 대한 진하(陳賀)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가 대리 청정의 막대한 경사(慶事)에 대해 현저하게 불만스러운 뜻이 있었던 것은 너무도 환하여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성덕(聖德)과 대도(大度)로 허물을 씻어 주고 포용하여 순서에 따라 추천하고 승진시키기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사람과 같이 하였으니 죽은 사람을 살려 주고 고골(枯骨)에 살이 돋게 한 은혜가 그에게 있어 어떠하였습니까? 그런데도 이에 감히 도리어 의구심을 품고 은밀히 벗어날 계교를 품었었습니다. 무릇 경자년241)                   이후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권병(權柄)을 잡고 오직 그 뜻에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역적들이 모이는 곳을 만들어 그 도당들이 번성하게 되자 의리는 기어이 배치(背馳)하고 선류(善類)는 기어이 죄에 얽어 넣었으니, 그의 이러한 설심(設心)과 용의(用意)는 오로지 의리를 간범한 자들을 비호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으로서 모년(某年) 이후로 원래의 흉역(凶逆)들이 손을 희롱하여 농간을 부리고 몸을 솟구쳐 원수를 갚기 위한 계책인 것입니다. 무릇 임자년242)                   사이에 이르러서는 이류(異類)들과 교결하여 면대해서는 아첨하고, 돌아서서는 헐뜯기를 못할 짓이 없이 하여 심지어는 더없이 중하고, 더없이 험한 전례(典禮)에 관한 일을 패병(欛柄)으로 삼아서 혹은 창도하여 말하면서 선동하기도 하고 혹은 무리들을 꾀어 위협하기도 하는 등 꾸며낸 거짓말들이 그 사이에 멋대로 행하였으니, 진실로 그 원인을 궁구하여 보면 그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이제 다행히 자전(慈殿)의 처분이 신인(神人)이 오랫동안 분노를 축적하고 있던 끝에 나왔는데, 저런 흉역이 범한 죄에 대해 다만 멀리 찬배하는 가벼운 감죄(勘罪)를 시행한다면 형정(刑政)의 실책은 오히려 작은 사고에 속하는 것입니다. 도사리고 웅거하여 있는 소굴을 어떻게 타파하며 그 체결하고 있는 도당들을 어떻게 서치(鋤治)하겠습니까? 청컨대, 경흥부(慶興府)에 멀리 찬배한 죄인 서유린을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쾌히 전형(典刑)을 바루도록 하소서. 아! 저 김이재(金履載)는 곧 하나의 지극히 간사하고 요망스런 자입니다. 은밀히 김이익(金履翼)의 사주를 받아 밖으로는 관사(官師)가 서로 규계(規戒)하는 뜻을 가탁하여 돌연히 한 소장을 올렸는데, 그 지의(指意)가 변화 무쌍하여 주도 면밀하게 배포(排布)한 것은 기필코 의리와 혈전(血戰)을 감행하여 배치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사류(士類)들을 원수처럼 여겨 청의(淸議)와 각승(角勝)하려 한 것이니, 을미년243)                  ·병신년244)                   이래의 여러 불령한 무리들과 한 꿰미에 꿰어온 심장(心腸)임이 환하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기미를 밝게 살피시는 그 총명하심으로 그의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였으나 대성인(大聖人)께서 세상을 걱정하고 환란을 우려하는 일념에서 정녕하게 교속(矯俗)의 하교에 성의를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성후(聖候)가 더 침중하게 되었고, 곧 이것이 궤석(几席)에 의지한 말명(末命)이 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어찌 가슴이 무너지고 뼈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김이익이 지휘한 정절(情節)이 탄로난 뒤이니, 김이재도 또한 버려 두고 국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양현(彦陽縣)에 귀양보낸 죄인 김이재를 속히 왕부(王府)로 하여금 국청을 설치하고 엄히 국문하여 기어이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 가운데에서 ‘신기(申耆)의 일은 전혀 보통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이니, 아래로 이렇게 당여들을 서치(鋤治)하는 때를 당하여 이들 공의(公議)를 등지고 당여를 위하여 사력(死力)을 다한 부류들에 대해 가까운 바닷가로 잠깐 귀양보내는 데 그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태안군(泰安郡)에 귀양보낸 죄인 신기에게 속히 절도(絶島)로 정배(定配)시키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였던 내용을 다시 고쳐서, 새로이 아뢰기를,
"아! 역적을 다스림에 있어 먼저 당여를 다스리는 것은 춘추(春秋)의 법인 것입니다. 서유린(徐有隣)이 같은 무리를 모아 당을 세운 것이 모두 몇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 이제만(李濟萬)·박성태(朴聖泰)보다 심한 자가 어찌 있겠습니까? 모두 서캐 같은 부류들로서 스스로 왕성한 세력에 의탁하여 머리를 흔들고 눈을 끔벅거리면서 감히 할 수 없는 거짓말을 번갈아 창도하여서 없는 일을 날조하여 극력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선류(善類)들을 밀어내었으니, 의리와 배치되는 속이고 미혹하는 습성은 소인(小人)으로서 기탄하는 것이 없는 자들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서유문(徐有聞)에 이르러서는 곧 김이재의 사당(死黨)입니다. 그가 그때 마침 승지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깊숙하고도 엄한 곳을 출입하면서 허무한 말을 만들어서 혹은 기미(幾微)를 보이기도 하고 혹은 성기(聲氣)를 통하기도 하여 김이익과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쳐 김이재의 패려스러운 소장을 꾸며냈으니, 그 의도는 장차 김이재를 기화(奇貨)로 삼아 사류(士類)를 무함하여 죄에 얽어 넣고 의리와 각승(角勝)하려는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악을 편드는 부류들은 도성(都城)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전 목사(牧使)                     이제만과 부호군(副護軍)                     박성태·서유문에게 아울러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법전을 시행토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대사간                     김계락(金啓洛)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김이익(金履翼)·서유린(徐有隣)·김이재(金履載)에게는 아울러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고 홍낙임(洪樂任)도 역시 국청을 설치하여 그 실정을 알아냄으로써 그 소굴의 근원을 타파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동조(東朝)의 처분이 있었다."
하였다.

 

옥당(玉堂)                        【응교                           김선(金銑), 부응교                           민명혁(閔命爀), 교리                           한흥유(韓興裕)·이중련(李重蓮), 부교리                           홍수호(洪受浩)·이기헌(李基憲), 수찬                           이경삼(李敬參)·장석윤(張錫胤), 부수찬                           이동면(李東冕)·임후상(任厚常)이다.】                     에서 연명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김이익·서유린·홍낙임은 국청을 설치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고, 서유문은 속히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동조(東朝)께서 이미 처분을 내리셨다. 서유문에 대한 일은 풍문에 전한 것이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2월 27일 을해

권강(勸講)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아! 나의 오늘 이 거조가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인데도 그만두지 않은 것이겠는가? 국세가 위태롭게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고 인심이 흩어진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대행 대왕의 수십 년 동안의 지사(志事)가 말명(末命)에 붙여져 있는 그 부득이한 것을 추념하여 의리를 천명하고 종사(宗社)를 부지시킬 계책을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같은 목소리로 청하는 말을 들으니 모두들 소굴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화근(禍根)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다. 나 또한 어찌 이 말이 십분 온당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더구나 선조(先朝) 때부터 소굴이 여기에 있음을 모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여러 해 동안 헤아려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며 죄를 가하지 않은 것은 선조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청하는 것이 비록 먼 앞날을 걱정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 줄 알고는 있으나 내가 따르지 않은 것 또한 혹 이치에 합치할 수도 있으니, 모쪼록 이러한 뜻을 알고 다시는 번거롭게 하지 말라. 이렇게 온전한 은혜를 베푼 뒤에도 두려워할 줄 아는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만에 하나 다시 일호(一毫)라도 마구 날뛰는 습관이 행동에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면, 어찌 조정 신하들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오늘날에 이르러 북면(北面)하고 섬기는 신하들로서 이렇게 온전히 보전시키는 명을 받들고서도 소굴이 그대로 있다고 여겨 역도(逆徒)들의 소굴에 의지하려는 행위를 한다면 결단코 《춘추(春秋)》의 당여를 먼저 다스린다는 율(律)에 의거하여 시행하겠으니,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은 아울러 알고 있으라."
하였다.

 

유악주(兪岳柱)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조원(李祖源)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삼았다.

 

양사(兩司)에서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낙임(洪樂任)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의 조카로서 요행히 응당 좌죄(坐罪) 되어야 할 율(律)을 도피하여 천지 사이에 편안히 살면서 화단(禍端)을 빚어냈는데 그의 천만 가지 요악(妖惡)스러운 일은 이미 《명의록(明義錄)》 가운데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아! 더없이 정미(精微)하게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의의에 삼가함을 다하였으며 더없이 엄중하게 경도(經道)와 권도(權道)의 중정(中正)을 지수(持守)한 것이 바로 선대왕(先大王)께서 굳게 지켜온 대의리(大義理)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저들의 죄루(罪累)의 종적(蹤跡)이 스스로 죄가 용서할 수 없는데 관계됨을 알고는 감히 번복(飜覆)할 뜻을 품고 현저히 배치할 계책을 세워 은밀히 이류(異類)들과 통하여 사당(死黨)을 만들고 속류(俗流)들을 종용함에 있어 이해(利害)로 유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감히 막중한 전례(典禮)를 빙자하여 감히 할 수 없는 훼방(毁謗)을 창출(創出)하는 등 위협하고 무함하는 데 못할 말이 없었고, 종자(種子)가 또 종자를 낳아 그의 무리가 계속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을묘년245)                                              이후에는 사람들이 바야흐로 청명(淸明)한 정치를 눈을 닦고 기대하였는데도 인심이 함닉되고 세도가 괴란되어 가는데 이르러서는 전일과 다름이 없었던 것은 대개 본래의 소굴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자성 전하의 처분 아래 그 징토(懲討)가 비록 당여(黨與)에게 미치기는 했으나 역적의 소굴에게는 엄한 주벌(誅罰)이 가해지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분명한 명을 내리시어 통쾌히 왕법(王法)을 바룸으로써 여정(輿情)의 분노를 풀게 하여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제 이미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12월 28일 병자

권강(勸講)하였다.

 

지평                     조항존(趙恒存)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 여름에 김기은(金箕殷)의 일을 가지고 말하면 이것이 곧 교화를 따르지 않은 것의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그가 하찮은 신진(新進)으로서 이미 추부(趨赴)의 부정함이 드러났는데도 갑자기 부당한 논의를 제기하여 각승(角勝)하려는 계책을 현저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선대왕께서는 포용하는 덕(德)으로 조제(調劑)하고 통유(洞諭)하셨으며 심지어는 전시(殿試)에 친림(親臨)하여 누차 사교(辭敎)를 내리셨는데도 저들은 교활하고 사나운 품성을 지녀 오히려 두려워할 줄 모르고 아직도 뉘우쳐 고치는 일을 늦추고 있었기 때문에 6월의 정섭(靜攝) 중에 있으면서도 은근히 연충(淵衷)의 번뇌를 빚어냈고 거듭 엄절한 연교(筵敎)가 있었으며 당시의 근신(近臣)이 직접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지금 만사가 내치지 못하게 된 뒤에 그 누군들 김기은의 한 가지 일로 유한(遺恨)의 단서를 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번 정조(正朝)의 향관(享官)을 전차(塡差)함에 있어 아무 탈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여겨 방자하게 김기은을 순릉(順陵)의 대축관(大祝官)에 차출했습니다. 비록 당여를 사랑하고 은혜를 팔기에 급급했다고 하더라도 유독 선대왕께서 하신 옥음(玉音)이 어제의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임금을 잊고 당여를 비호하는 무리들은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를 제관에 차임한 해당 당상에게는 현고(現告)를 받고 속히 찬배하는 법전을 시행해야 된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찬배하는 것은 과하다. 삭직(削職)시키라."
하였다.

 

부응교                     민명혁(閔命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소굴의 거괴(巨魁)에 대한 천만 가지 죄악은 죽간(竹簡)을 다 가져다 써도 기록하기에 모자랄 것입니다. 모년(某年)의 의리를 간범(干犯)한 것에 대해서는 곧 천경(天經)과 지기(地紀)에 있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영묘조(英廟朝) 때 대각(臺閣)과 초야(草野)의 신하들이 의리에 분발하여 대궐에서 부르짖어 흉역(凶逆)의 정상(情狀)을 타파하여야 한다고 함이 있었으며 또한 선조(先朝)께서 사복(嗣服)하신 벽두에도 재신(宰臣)이 상소하여 효경 같은 무리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파헤친 적이 있었는데도 특히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가지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하였고 남모르게 치밀하게 준비하여 공교한 방법으로 살 길을 도모한 끝에 천지 사이에 목숨을 보전하여 방안에서 편안히 누워 죽었습니다. 그의 몸이 이미 죽었으니 의당 국시(國是)가 이로부터 하나로 정해지고 세도(世道)도 이로부터 편안하게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임금의 마음을 엿보는 구습(舊習)과 백성의 마음을 속여 미혹시키는 사설(邪說)이 갈수록 더욱 극심한 것은 또한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그의 아들 홍낙임(洪樂任)은 곧 한결같이 그의 아비의 정신을 전해 받은 자입니다. 하늘이 요물(妖物)을 낳아 대대로 흉론(凶論)을 이루어주게 한 탓으로 그의 집안이 스스로 흉역을 저질렀는데도 이에 감히 국가를 원수처럼 보아왔고 그들이 청의(淸議)를 용납하지 않고는 이에 도리어 선류(善類)들을 모함한 그 수각(手脚)이 필경 모두 다 드러나서 그 정태(情態)를 숨길 수 없게 되었는지라 그의 성명이 국초에 누차 튀어 나왔고 간범한 죄가 역안(逆案)에 지극히 무겁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대왕께서는 일월(日月) 같은 총명으로 그의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시었으나 특별히 하해(河海) 같은 은혜로 비록 목숨을 살리는 쪽으로 조처했습니다만, 그의 죄범(罪犯)을 추구한다면 곧 머리를 가대(假貸)한 한 역적의 괴수일 뿐입니다. 거짓된 흉언(凶言)으로 임금을 무함하고 비류(匪類)들의 성기(聲氣)를 밖에서 불러 모으고는 곧 죽음 속에서 살길을 도모하기 위한 계책으로, 전례(典禮)를 빙자하여 의리를 변란(變亂)시켜 위협하고 농간을 부렸으니, 이는 단지 전하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곧 선조(先朝)의 죄인이며 또한 선조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자궁(慈宮)의 죄인인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국청을 설치하여 쾌히 전형(典刑)을 바루어 홍낙임의 머리를 서울안 네 거리에 높이 매닮으로써 천강(天綱)을 엄숙히 하고 민지(民志)를 안정시키소서. 아! 홍 낙임 부자의 죄가 이토록 낭자하여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배어 있는지라 비록 사세를 관망하면서 은밀히 비호하려는 무리들도 오히려 돌아보고 꺼리면서 감히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김희(金憙)에 이르러는 곧 많은 사람이 모인 좌중(座中)에서 다방면으로 변명하면서 감히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으니 그 성기(聲氣)가 서로 통하고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으며 그 밖에 근거없는 말로 선동하여 성덕(聖德)을 무함한 죄 또한 하나의 단안(斷案)인 것입니다. 그가 일찍이 대관(大官)의 지위에 있었다는 것 때문에 비록 곧바로 감단(勘斷)할 것을 청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제 만약 그가 이미 죽었다는 이유로 징토(懲討)하는 형전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세도와 민심이 장차 안정될 날이 없을 것이니, 또한 원컨대 엄한 처분을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하였다."
하였다.

 

12월 29일 정축

전 지평                     채지영(蔡趾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재학(李在學)은 본래 음흉하고 간사한 성품으로 패려스런 소장을 올린 저 이우(李瑀)·김하재(金夏材)와 교결하여 흉론을 과장함으로써 선류(善類)들을 살해(殺害)하였으며, 김시위(金時偉)·홍상간(洪相簡)의 간계(奸計)를 이어받아 공의(公議)와 혈전(血戰)을 벌이고 국시(國是)를 무너뜨려 농락하며 역괴(逆魁)와 화응하였다는 물론(物論)이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김이도(金履度)가 5월 그믐날 연교(筵敎)가 있을 즈음을 당하여 무릇 그의 동류들 가운데 간혹 얼굴을 고치고 정론으로 귀의하려는 사람이 없지 않았습니다만, 그가 감히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라리면서 미친듯이 소리치며 유혹하고 협박하며 기필코 저지시킨 뒤에야 그만두었으므로 그의 많은 무리들이 그를 맹주(盟主)로 추대하게 된 것입니다. 심상규(沈象奎)는 본래 부박(浮薄)한 자질과 간사한 성품으로 인친(姻親)에 오염(汚染)되고 역괴(逆魁)에게 아첨하여 주야의 경영이 청론(淸論)과 배치(背馳)하였으며 같은 무리들과 손을 잡고 이(利)로 달래고 권세로 꾀어 오로지 악역(惡逆)을 편드는 것을 스스로의 능사로 여겼습니다. 신의 의견은 이재학·김이도·심상규에게 유찬(流竄)의 형전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대저 이들이 품고 있는 마음과 세운 계책은 곧 심낙수(沈樂洙)의 신축년246)                                              상소가 바로 그것입니다. 심낙수가 은밀히 서유린(徐有隣)·홍상간(洪相簡)의 사주를 받아 모름지기 적편[賊邊]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필코 사류(士類)들을 일망 타진하려고 했으니, 적도(賊徒)들이 치성해지고 세도(世道)가 함닉된 것은 첫째도 심낙수 때문이고 둘째도 심낙수 때문입니다. 심낙수에게 추삭(追削)하는 율(律)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문의하여 조처하겠다."
하였다.

 

 

 

시임·원임 대신, 금오 당상(金吾堂上)과 이조 판서, 여러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대신들이 홍낙임(洪樂任)의 처분에 관한 일 때문에 번갈아 앙주(仰奏)하기 때문이었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주상(主上)이 바야흐로 어린 나이에 있으니 어떻게 그 일의 본말을 죄다 통촉할 수 있겠는가? 내가 선대왕의 성심(聖心)을 나의 마음으로 삼아 기필코 시종 곡진히 보호하려 하나 경 등의 말이 모두들 소굴이 타파되지 않은 것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데, 나 또한 어찌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들에게 빌붙어 거짓말을 전파하면서 악역(惡逆)들과 뜻을 함께하여 일을 이루려 한 지엽적인 자들을 만약 차례로 서치(鋤治)한다면 저 이른바 소굴이라는 것도 그 형세가 절로 외로워서 또한 걱정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끝내 마음을 고칠줄 모르고 다시 무리를 불러 모아 엿보는 조짐이 있으면 비록 은혜를 온전히 해주고 싶은 나의 마음일지라도 또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경 등은 다만 우선 기다리라. 그리고 선대왕의 성심(聖心)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 흩어진 인심으로 하여금 보합(保合)되는 효험이 있게 하는 것이 내가 경 등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끊임없이 간곡하시니 신 등이 어떻게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왕(先王)의 엄정하고도 딱하게 여기는 마음에서 내린 처분은 스스로 의도가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법을 굽혀 은혜를 펴게 한 것이었습니다. 홍낙임(洪樂任)에 이르러서는 한(漢)나라 때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의당 결단하여 조처해야 합니다. 어찌 결단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고,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좌의정                     이시수(李時秀),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아뢴 것도 대략 같았다. 이조 판서                     윤행임(尹行恁)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의 고제(高帝)와 효문제(孝文帝)는 곧 국가를 흥기시킨 서경(西京)의 임금이지만 한신(韓信)·팽월(彭越)·박소(薄昭)247)                                             의 일에 대해서는 선왕께서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김우진(金宇鎭)의 경우에는 한 대의 형장(刑杖)도 가하지 않았고 정동준(鄭東浚)에게는 은전(恩典)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홍국영(洪國榮)의 천만 가지 죄악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것으로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하고 국조(國祚)를 옮기려 도모했으니, 이는 곧 하나의 왕망(王莾)·조조(曹操)·환온(桓溫)·사마의(司馬懿)인 것입니다. 노륙(孥戮)시키자는 계사(啓辭)에 대해 끝내 윤허를 아끼신 것은 대개 성인(聖人)의 권도(權度)에 본래 정미(精微)한 뜻이 부쳐져 있는 것이어서 사람마다 우러러 헤아릴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후세에서 이를 인하여 혹시라도 징토(懲討)하는 큰 의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등등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처분이 옛날과 지금에 있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말꼬리가 나왔으니 감히 그에 관한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적 홍국영(洪國榮)의 직명(職名)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어리석고 무식한 부류들이 극악한 대역 죄인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내년은 곧 우리 성상(聖上)께서 보위(寶位)에 오르신 원년(元年)이 되는 해이니, 선왕의 지사(志事)를 계술(繼述)하고 구장(舊章)을 수명(修明)하는 일들을 이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홍국영 같은 자의 직명을 추탈(追奪)하는 것도 서둘러 먼저 거행해야 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중신(重臣)이 아뢴 바 역적 홍국영의 관작이 그대로 있다고 한 것은 듣기에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승지는 그에 대한 말을 상세히 듣고 부안(府案)을 상고하여 보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근일 장주(章奏)에서 논한 사람들은 이미 일이 발단된 첫머리에 거론된 것이나, 그들이 흉도들 가운데 더욱 극심한 자들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의논이 공분(公憤)에서 나온 것임을 볼 수 있다. 내가 선왕(先王)이 미쳐 끝마치지 못한 지사(志事)와 종사(宗社)·세도(世道)를 부지시키기 위해 이미 이런 거조가 있었으니, 어떻게 공의(公議)를 거스르면서 그 사이에 망설일 수 있겠는가? 여러 상소(上疏)와 계사(啓辭)에서 논한 사람들은 아울러 찬배시키는 형전을 시행토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언양현(彦陽縣)에 귀양보낸 죄인 김이재(金履載)는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김이교(金履喬)가 어찌 제 아우인 김이재가 상소한 일을 몰랐겠는가? 정배(定配)시키는 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또 신기(申耆)는 멀리 찬배시키고, 김이재(金履載)는 강진현(康津縣) 고금도(古今島)의 절도(絶島)에 안치시키고, 김이교(金履喬)는 명천부(明川府)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신기를 흥양현(興陽縣)으로 이배(移配)하게 하고, 이제만(李濟萬)을 광양현(光陽縣)으로, 박성태(朴聖泰)를 사천현(泗川縣)으로, 서유문(徐有聞)을 위원군(渭原郡)으로 찬배시켰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전 지평                     채지영(蔡趾永)의 소장에서 아뢴 세 사람에 대해서는 이것이 풍문에 전한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실상이 없다면 반드시 거론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세도(世道)가 언자(言者)에 의해 거론된 것은 그것이 애석(愛惜)한 것에 관계된 것이 아니니, 아울러 찬배하는 형전을 적용하라. 심낙수(沈樂洙)에 대한 일은 여러 대신(大臣)들이 아뢴 말이 심낙수의 단안(斷案)을 잘 말한 것이니, 채지영이 청한 율(律)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전 지평                     이동만(李東萬)의 상소는 비록 이미 도로 내주었지만 이번 소장에 거론된 사람들에게 이미 찬배시키는 형전을 적용하도록 유시하였으니, 그의 상소에서 거론된 사람에 대해서도 똑같이 시행하라."
하였다. 이동만의 상소에 ‘이희갑(李羲甲)이 그의 아비를 위해 은밀히 서번(西藩)으로 나아가기를 도모하여 흉도(凶徒)들과 은밀히 빌붙게 하였고, 한편으로 정상우(鄭尙愚)는 자신의 숙부(叔父)를 종용하여 임자년248)                                              여름에 패려스러운 소장을 올려 사류(士類)들을 모해하면서 기꺼이 심낙수(沈樂洙)의 혈당(血黨)이 되었으며, 김이도(金履度)는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사람을 원수처럼 여겨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달갑게 여겼습니다. 청컨대 이들에게 아울러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전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그 원소(原疏)를 도로 내어주었다가, 다시 도로 들여오라고 한 다음 이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고 참판(參判)                     김귀주(金龜柱)의 임진년(壬辰年)249)                                              상소는 모년(某年)의 의리를 간범한 역적을 토죄한 것으로서 바야흐로 위태로운 종사(宗社)를 호위하였고 장차 실추될 윤기(綸紀)를 부지시킨 것입니다. 전에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그가 조정에 있는 것을 꺼린 나머지 여러 가지 사단(事端)으로 무함하여 죄에 얽어 결국 남쪽 변방에서 지쳐서 죽게 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청의(淸議)가 다같이 가련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흉역의 소굴을 쳐부수고 의리를 천명하는 때를 당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충심을 포장(褒奬)하여 구원(九原)의 깊은 혈침(血忱)을 위로하는 것이 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의 뜻을 하문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고(故) 재신(宰臣)이 굳게 잡고 지킨 대의(大義)는 평소 사류(士類)들의 추후(推詡)를 받아왔는데, 불행하게도 중간에 권간(權奸)의 무함을 받았으나 우리 선대왕의 일월(日月) 같으신 총명으로 어찌 통촉하지 못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제사를 지내 주자고 청한 것은 실로 선왕의 뜻을 추술(追述)하는 정사인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처분이 있은 뒤 윤음(綸音)을 내리는 사이에 소석(昭晰)시킨 하교는 있지 않았습니다만,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사류(士類)를 부지시키고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라는 성교(聖敎)를 받든 적이 있었습니다. 수상(首相)이 아뢴 것이 이와 같으니, 어찌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병신년250)                                              처분에 세 가지 단안(斷案)이 있었는데, 근년 이래로 혹 연석(筵席)에서 성어(聖語)를 우러러 받드니 이 세 가지 단안에 대해서도 모두 소석(昭淅)하는 하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이 들은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여러 대신(大臣)들이 아뢴 말에 대해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또 말하기를,
"고(故) 유생(儒生) 한유(韓鍮)가 팔뚝에 먹물을 넣어 맹세하면서 역적을 토죄하고 죽음에 이르러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옛날의 열사(烈士)라 한들 어찌 이보다 훌륭하겠습니까? 신이 전일 선왕조(先王朝) 때 증직(贈職)하여 표창하고 후손을 녹용(錄用)해야 한다는 뜻으로 우러러 진달하여 이를 요상(僚相)에게 하순하니, 마땅히 아헌(亞憲)에 추증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답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그때 거조(擧措)를 비록 반하(頒下)하지는 않았었지만 오늘날 난적을 토죄하고 의리를 천명하는 즈음을 당하여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고증해서 해조(該曹)에 거행하도록 분부함으로써 풍화를 확립시키고 풍속을 면려시키는 방도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들에게 하문한 뒤에 따랐다.


 

 

 

이의봉(李義鳳)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등극(登極)을 진하(陳賀)하기 위한 대차왜(大差倭)가 나아왔으므로 김희채(金熙采)를 접위관(接慰官)에 차임했다.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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