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정미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어제의 처분은 국체(國體)를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중신(重臣)의 지위 또한 한 번 염의(廉義)를 펴기에 족하니, 전 병조 판서 서정수(徐鼎修)를 분간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곧 패초(牌招)해서 부신(符信)069) 을 받게 하였다.
사간 박서원(朴瑞源)이 상소하여 고 봉조하(奉朝賀) 김종수(金鍾秀)를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배향에 대한 일은 대신(臺臣)이 청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2월 2일 무신
부호군 최광태(崔光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고 참의 이택징(李澤徵)과 고 정언 이유백(李有白)을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있어났으며, 이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 두 신하는 곤전(坤殿)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지절(志節)을 다 바쳤으니,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벽혈(碧血)을 오랫동안 지녀오며 단서(丹書)를 바꾸고자 하였는데, 구천지하(九泉之下)에 있는 이에 대해서 위충(危忠)을 살피시고 20년의 세월이 흘러간 후에 유원(幽冤)을 씻어 주었으니, 충신(忠臣)·의사(義士)로서 누군들 격앙하여 기개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마는, 신은 더욱 감개하여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 임인년070) 에 반유(泮儒)들이 두 신하에 대해 토죄(討罪)하기를 청하였으나, 신은 명의(名義)를 돌아보고 애석하게 여겨 이론을 세우고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한편의 흉도들에게 미움을 받아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발계(發啓)한 때문에 8년 동안 해도(海島)에 유배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선대왕의 재조(再造)의 은혜를 받아 죄적(罪籍)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곧 총광(寵光)을 받게 되었지만, 평소 본뜻을 드러내지 못하여 양신(兩臣)이 받은 굴욕을 은연중에 통분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저녁에 죽더라도 남는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 당시의 일을 오히려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한 번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흉언을 창도(倡導)하여 간계를 이루고자 한 때로부터 국세(國勢)가 위태해지고 민이(民彝)가 퇴폐해졌으니, 받들어 보필하는 직임에 있는 자는 오로지 정성과 힘을 다해 일에 따라 조호(調護)함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약원(藥院)의 문안(問安)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이를 철폐(撤廢)하여, 궁부(宮府)의 안팎에서 곤전(坤殿)의 기거(起居)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무릇 몇 년이었습니까? 흉적에게 부화 뇌동(附和雷同)하여 국모(國母)를 능멸한 죄를 진실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분개해 하였는데, 특별히 양신의 입을 빌어 발론(發論)이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종팽(宗祊)이 묵묵히 도와 나라의 운세가 태평을 회복하게 되고 천지가 화합하여 만물이 무성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그런데 선조께서는 산택(山澤)과 같은 넓은 도량으로서 우선 또 함유(涵囿)하여 비록 명의(名義)와 분수를 범한 무리들이라도 일체 버려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존봉(尊奉)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더할 수 없이 엄중한 지위에 관계되는 바가 있으니, 이미 지난 일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이 소장(疏章)을 묘당에 내려서 그 당시 수범(首犯)이 되는 상신(相臣)을 상고해 내어 그 죄를 밝혀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하문하겠다."
하였다.
신대현(申大顯)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3일 기유
처음으로 《서전(書傳)》을 강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서전》을 권강(勸講)하여 전일하게 공부하도록 하고, 법강(法講)의 책자 또한 《서전》으로 하기로 정하였다.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아뢰기를,
"행 부호군 오재소(吳載紹)는 선왕조(先王朝)에서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셨을 때에 이미 비옥(緋玉)071) 으로 승진하였었고, 또 문학(文學)이 뛰어났으며, 행 부호군 박장설(朴長卨)은 지나간 해에 한 소장(疏章)으로서 맨 먼저 사학(邪學)을 공박(攻駁)하여 도를 호위한 공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아경(亞卿)072) 에 승탁(陞擢)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면주(金勉柱)를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4일 경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춘도기(春到記)073) 에 의하여 유생을 시험하고, 제술에서 수위를 차지한 원재명(元在明)과 강경에서 수위를 차지한 박종황(朴宗璜)에게 아울러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이익운(李益運)을 경기 관찰사로, 이조승(李祖承)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지돈녕 송환기(宋煥箕)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고 가주서(假注書) 강응일(姜應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고, 인하여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강응일이 가서 전유한 후에 죽었으므로, 장수(葬需)를 넉넉하게 지급하고 홍문관 수찬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2월 5일 신해
차대(次對)하였다. 형조 판서 이의필(李義弼)이 아뢰기를,
"신이 형관(刑官)으로 재직하면서 구구한 소회(所懷)가 있어서 감히 이를 앙달합니다. 이른바 사학(邪學)이 윤리(倫理)를 멸절시키고 도리를 어그러뜨림은 도교와 불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보다 심한데, 그 전해 내려오는 해독이 장차 어느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자성 전하께서는 일월(日月) 같은 명철(明哲)로 도깨비 같은 무리의 정상을 굽어 통촉하시고 거듭 엄금하셔서 심지어는 역률(逆律)로 감단(勘斷)하겠다고 하교하셨으며, 유사(有司)의 신하는 지금 바야흐로 마음을 다해 봉행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추악한 무리 가운데 최필공(崔必恭)과 같은 자는 진실로 이들의 거괴(巨魁)로서 돼지나 물고기보다 더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끝내 감화되지 않고 있으니, 결단코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감단(勘斷)하면 징계하는 도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사학이 세도(世道)에 대해 깊고도 오랜 근심이 되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는 논리이니, 도리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힌 일은 손꼽아 이루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성덕(盛德)으로 반드시 그들을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 감화시키고자 하셨으니, 이는 진실로 대성인(大聖人)의 함용(含容)하시는 성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무리는 끝내 감화될 줄 모른 채 갈수록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최필공과 호서(湖西)의 이존창(李存昌)에 이르러서는 저들이 선조(先朝)께 영구히 사학을 버리겠다고 공초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또 사학을 하고 있으니, 그들은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감화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죽이는 것을 어찌 어렵게 여겨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 무리는 만약 일률(一律)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징계하여 면려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좌상·우상과 상세히 의논하여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사학에서 거괴로 알려진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상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포청(捕廳)에 잡힌 자들 가운데 대개 사족(士族)이 많았는데, 또한 단서가 드러난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대개 사족으로서 사학을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이 더욱 쉽사리 미혹된다고 합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듣건대, 미혹됨이 심한 자는 결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어도 오히려 후회함이 없다고 하는데, 만약 협종(脅從)하는 무리는 스스로 마땅히 그 주벽(誅辟)을 보고서야 그칠 줄 알게 될 것이다. 또 그 이야기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 책이 있을 것이니, 경외(京外)에 엄중하게 신칙해서 특별히 수색하여 거두어 불태우게 하고, 붙잡힌 간사하고 추악한 자들은 경중에 따라 율(律)을 적용한다면, 어찌 금지할 도리가 없겠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그 괴수를 다스리고 책을 불태우라고 하신 하교는 진실로 지극히 마땅합니다. 듣건대 저 무리가 설법(說法)하는 서책(書冊)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금단(錦緞)으로 장식해서 이를 소중히 여겨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금장(錦帳)·염주(念珠) 따위가 있는데 모두 설법하는 데 쓰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물건을 또한 한결같이 아울러 수색해서 불태우게 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최필공·이존창은 지난해 갇혔을 때 명백하게 사학을 버리겠다고 공초를 바쳤었는데, 지금 또 사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는 사학 이외에 또 임금을 속인 죄를 첨가시켜야 할 것이다. 임금을 속이는 것은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률(一律)로 감단하더라도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최중(李最中)은 귀양을 가게 되어 죽은 후에 이미 죄명(罪名)을 효주(爻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지금 두 대신(臺臣)을 신설(伸雪)할 때를 당하여 조정에서 은졸(隱卒)의 은전을 해가 오래 되었다 하여 치제(致祭)를 시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前例)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고 지평 유성한(柳星漢)이 임자년074) 에 한 번 상소한 후 사단(事端)이 겹쳐 발생되었으나, 그 성토한 바는 본정(本情) 밖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에 고 상신 유언호(兪彦鎬)가 진소(陳疏)하여 이런 사실을 폭백(暴白)하니, 선조께서 가납(嘉納)한다는 하교를 받기에 이르렀었습니다. 지금 몸이 죽은 후에 대간(臺諫)의 예부(例賻)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고 지평 김정묵(金正默)은 경술(經術)과 행의(行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는데, 불행하게도 가까운 친족에서 흉역이 나왔으므로, 심지어 유일(遺逸)을 삭제하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번 선조께서는 연석(筵席)에서 하교하실 때마다 김정묵의 유일을 회복시키는 일에 대해 여러 번 성념(聖念)이 미쳤으며, 또한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하문하셨습니다. 그 친속(親屬)의 촌수를 계산하건대 이미 연좌에서 모면하게 되었는데 죄 없이 벌을 받았으니 많은 선비들이 이를 슬퍼하였습니다. 또 경연관 송치규(宋稚圭)는 그의 문인으로서 이로 인해 사진(仕進)하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선조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많은 선비들의 희망을 위로하시고, 유신(儒臣)이 사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오로지 우리 성상께서 널리 하문하셔서 재처(裁處)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정묵은 유일을 회복시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우승지 최헌중(崔獻重)이 말하기를,
"이른바 사학(邪學)은 생민(生民)이 있었던 이래로 들어 보지 못한 요술(妖術)로서, 인기(人紀)를 멸절시키는 것이 불문(佛門)의 화변(禍變)보다 급하고, 천도(天道)를 더럽히는 것이 무속(巫俗)의 주술(呪術)보다 심합니다. 양주(楊朱)·묵적(墨翟)의, ‘아버지가 없고 임금이 없다.’는 것은 전해 내려온 폐습이 해롭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지금 이 사학은 전해 내려온 폐습을 기다리지 않고도 먼저 그 자신으로부터 이미 부모도 없고 군신도 없다고 여기니, 오로지 그 자신만 빠져들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현혹시키고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그 도당(徒黨)을 만들고는 그 요술로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하는 것이므로, 이는 곧바로 한결같이 성세(聖世)의 요얼(妖孼)들이고 오도(吾道)의 난적(亂賊)들인 것입니다. 밤중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도적을 만들고 역적을 만들고 있으니, 장차 하지 못하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듣건대, 법부(法府)에 붙잡힌 자들이 한둘이 아니고, 단서가 낭자하여 거의 요원의 불길과 같다고 하니, 박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고질이 된 자는 진실로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지만, 이에 오염되지 않은 자는 오히려 징려(懲勵)하여 이에 빠져드는 데 이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진실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방도에 근거하여 죄인을 죽이는 지극히 어진 성덕(盛德)인 것입니다. 최필공·이존창과 같이 끝내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한결같이 저뢰(抵賴)하는 자는 감화를 받아 따르려는 뜻이 없는 자들이니, 아울러 역률(逆律)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밖에 면모만 바꾸고 마음을 바꾸지 않는 무리는 비록 사람마다 모두 주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사대부로서 깊이 빠진 자는 율(律)을 갑절 더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비록 묵형(墨刑)이 없다 하나, 지금 만약 경면(鯨面)의 형을 베풀어 그 무리를 구별함으로써 은연중 자취를 숨겨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한다면 이를 본 사람들이 장차 저절로 그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척연히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니, 금법(禁法)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소멸되기에 이를 것입니다. 남몰래 살펴서 적발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근래에 듣건대 경외(京外)에서 조령(朝令)에 의거하여 차례로 거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연곡(輦轂)은 곧 교화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경조(京兆)075) 에서 오부(五部)에 신칙(申飭)하여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우고 절목(節目)을 만든 다음 방곡(坊曲)에 효유함으로써 도깨비 같은 무리로 하여금 그 형세를 도피할 수 없게 한다면, 거의 착하게 되어 악한 것을 멀리하게 하는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육형(肉刑)은 시행할 수 없다. 그 나머지 여러 조목은 묘당에 내려 품처하게 해서 영구히 종식시키는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기하겠다."
하였다.
김관주(金觀柱)를 비변사 제조로 차임하였다.
이득제(李得濟)를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삼사(三司) 【대사간 오성원(吳晟源), 집의 민명혁(閔命爀), 장령 윤행직(尹行直)·조태영(趙台榮), 헌납 안정선(安廷善), 교리 정노영(鄭魯榮), 정언 유전(柳烇), 부수찬 오한원(吳翰源)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효경(梟獍)의 심장을 가진 무리가 분의(分義)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어지럽히는 일이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습니까마는, 어찌 지나간 해에 문후(問候)를 철폐한 상신(相臣)처럼 더할 수 없는 엄중한 죄를 간범(干犯)하여 지극히 흉참(凶慘)했던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아! 우리 왕대비 전하께서 곤위(坤位)에 임어하여 어진 덕행(德行)이 정묘(正廟)의 배필(配匹)이 되셨는데, 대저 어떻게 난역(亂逆)의 무리가 홍낙임(洪樂任)의 흉모(凶謀)에 규결(糾結)하고 홍국영(洪國榮)의 지시를 받아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하였고, 목내선(睦來善)·권대운(權大運)도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한단 말입니까? 약원에서 기거(起居)하는 예(禮)는 곧 보호하여 분의를 다하는 자리인데, 몰래 흉도(凶圖)를 품고 방자한 뜻으로 문후를 철폐하였으니, 윤리와 기강이 퇴폐해져 막히고 신하의 분의가 멸절됨이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로부터 상선(常膳)이나 절헌(節獻)을 일체 폐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위핍(危逼)과 무멸(誣衊)이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나라 안에 소문이 자자하게 전파되니, 이에 여정(輿情)이 분개하여 답답해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사람들은 마음이 아파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일인데, 함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온 지 거의 몇 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억울함을 풀어 주고 죄악을 징토(懲討)하여 의리가 밝고 환한 날을 당하여 성토하는 척소(尺疏)를 겨우 올리자 흉역의 정절(情節)이 죄다 드러났으니, 그 부범(負犯)한 바를 결단코 일각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 당시 수범(首犯)이 되는 상신을 빨리 조사해 내게 하여 흔쾌하게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6일 임자
권강(勸講)하였다.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정사(呈辭)하니, 이를 봉환(封還)하고 교지를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2월 7일 계축
권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경모궁(景慕宮)의 헌관(獻官)은 당품(當品)의 사람이 없어서 이조에서 초기(草記)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지금 1품은 구간(苟簡)하여 판금오(判金吾)는 의망(擬望)할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막중한 향관(享官)을 채울 도리가 없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병조 판서 서정수(徐鼎修)는 이미 이조 판서를 거쳤고, 또 오랫동안 유임하며 승진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종1품으로 승탁(陞擢)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성학(聖學)을 보도(輔導)하는 책임은 오로지 경연(經筵)에서 계옥(啓沃)하는 직임에 달려 있습니다. 전 부제학 김근순(金近淳)은 문식(文識)이 박아(博雅)하여 선조(先朝)에서 제일 가장(嘉奬)을 받았는데, 은대(銀臺)076) 에 출입한 까닭에 옥서(玉署)에서 구임(久任)077) 할 수 없었으니, 매우 애석하게 여길 만합니다. 다른 관직을 가지고 부제학을 겸대(兼帶)한 것은 옛날에도 명망이 높은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전례가 많이 있습니다. 청컨대 전조(銓曹)에 분부하여 부제학으로 차출(差出)하되, 다른 관직을 겸임하는 것으로 계하(啓下)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관주(金觀柱)를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가 곧 체차(遞差)하고, 김근순(金近淳)으로 대신하였다.
2월 8일 갑인
권강(勸講)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이득신(李得臣) 등이 연경(燕京)에서 출발하였다고 치계(馳啓)하였다.
2월 9일 을묘
권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건릉(健陵)의 국내(局內)에 다섯 고을에서 장차 식목(植木)의 역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농사철에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 민망스럽다. 고가(雇價)는 마땅히 궐내에서 내려 줄 것이니, 수원 유수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이 또한 선조께서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신 성의(盛意)를 우러러 본받는 것이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금 바야흐로 사학(邪學)을 다스리고 있는 때인데, 형조 판서가 늙고 병들었다 하니, 체직을 허락한다."
하였다. 행 상호군 김재찬(金載瓚)에게 형조 판서를 제수했었는데, 당시에 김재찬이 병들었기 때문에 향리에 돌아가서 조섭하며 병을 치료하기를 원한다고 상소하였으므로, 마침내 이렇게 하교한 것이었다.
삼사(三司) 【대사간 오정원(吳鼎源), 집의 민명혁(閔命爀), 장령 윤행직(尹行直)·조태영(趙台榮), 부교리 이기헌(李基憲), 헌납 안정선(安廷善), 정언 유전(柳烇), 수찬 장석윤(張錫胤)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채제공(蔡濟恭)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본래 역적 집안에서 양육된 자로서, 양조(兩朝)에서 불식(拂拭)하는 은혜를 치우치게 받아 명위(名位)가 삼사(三事)078) 에 이르렀고, 총우(寵遇)가 일세에 융숭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갚을 도리는 생각지 않은 채 한갓 흉화(凶禍)의 계책만 품었습니다. 조덕린(趙德隣)의 패소(悖疏)는 진실로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비격(飛檄)이 되었으니, 방법을 전해 받아 몰래 계책을 이루고자 하여 힘써 주장하고 부호했었습니다. 그리고 이만식(李萬軾)의 죄악은 진실로 이덕사(李德師)·조재한(趙載翰)의 앞잡이가 되었으니, 국안(鞠案)에 밝게 실려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감히 방자하게 당류를 비호하며 무뢰한 흉도를 불러 모아 재차 궐문에 호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곧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은 저들을 용서할 수 없는 단안(斷案)이 되는 것들입니다. 더욱이 세력을 잃고 물러가서 집에 틀어박혀 있는 날을 당해서도 역적 홍낙임(洪樂任)의 인근의 땅을 점유해 살면서 밤낮으로 주무하고 마음을 연결하여 모의한 것은 의리(義理)를 변환시키고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는 것이었으며, 지획(指劃)하는 것은 흉도(凶圖)를 포장(包藏)하여 은밀하게 역종(逆宗)을 붙좇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한종찬(韓宗纘)의 소장(疏章)을 장출(粧出)한 데에서 수각(手脚)이 이미 드러났고, 신기현(申驥顯)을 현저하게 비호한 흉심에서 마음의 자취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네 글자의 흉패(凶悖)한 말을 감히 장주(章奏)에 올린 것은 심장(心腸)이 정후겸(鄭厚謙)과 똑같았고, 세 글자의 무핍(誣逼)하는 말을 방자하게 연석(筵席)에서 발설한 것은 죄악이 조사기(趙嗣基)보다 백 배나 되었습니다. 전후로 수십 년 동안 역적 홍낙임과 한 패거리가 되어 안팎으로 화응(和應)하며 설치한 기관이 음참(陰慘)하고 배포한 흉계가 비밀스러웠습니다. 이와 같은 흉역의 거괴를 이미 집안에서 편안히 죽었다 하여 너그럽게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고 영부사 채제공에게 관작을 추탈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임자년079) 재궁(齋宮)에서 거처하시던 날에 윤음(綸音)을 내리셨고, 선조(先朝)께서 금령(禁令)을 정원(政院)과 대청(臺廳)의 벽에 붙이게 하신 일을 일찍이 우러러 들었을 것이다. 삼사(三司)의 합계(合啓) 가운데 비록 임자(壬子)라는 두 글자는 없지만, 촉범한 구절이 많이 있었다. 지난번에 채 판부사에 대한 일은 소장(疏章) 가운데 거론할 수 없다는 것을 삼사에 분부했었다. 만약 금령을 환수하기를 청한다면 혹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겠지만, 삼사에서 먼저 금령을 범했으니 어찌 사리에 맞는 것이겠는가? 이 계사(啓辭)는 비답을 내릴 수가 없으니, 도로 내주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한용탁(韓用鐸)·최광태(崔光泰) 등이 아뢰기를,
"대각(臺閣)의 계사는 사체(事體)가 막중하므로 비록 심상한 일을 논한다 하더라도 무릇 대간의 계사에 속한 것은 일찍이 비답 없이 이렇게 도로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 나라 4 백 년 동안의 가법(家法)으로서 하루라도 파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삼사의 합계를 빨리 도로 들여오도록 명하시고, 인하여 비답을 내리소서."
하니, 도로 받아들이도록 명하고, 인하여 대간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내리기를,
"금령에 관계되는 말이 많이 있었으나, 마땅히 대신들에게 물어 보겠다."
하였다.
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사학(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국가를 흉화(凶禍)의 지경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재물과 여색(女色)으로 속여서 유혹하여 그 도당을 불러 모으고는 밥 먹듯이 형헌(刑憲)을 범하여 도거(刀鉅)를 보고도 즐거운 일로 여기고 있는데, 그 형세의 위급함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경향(京鄕)에 가득하니, 황건적(黃巾賊)080) ·녹림당(綠林黨)081) 의 근심이 순간에 박두해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이 무리가 소굴(巢窟)이 된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가환은 흉악한 무리의 여얼(餘孼)로서, 화심(禍心)을 포장하여 원망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유혹하고는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구입(購入)해 온 요서(妖書)를 그 아비에게 전하고, 그 법을 수호하기를 달갑게 여겨 가계(家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본래 두 추악한 무리와 마음을 서로 연결하여 한패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종적이 이미 드러나자, 진소(陳疏)하여 사실을 자백한 다음 온갖 말로 실언(失言)하였는데, 아무도 몰래 요악한 짓을 꾀함이 도리어 전보다 심하여 천청(天聽)을 속였으니 사리에 어둡고 완악하여 두려워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번에 법부(法府)에 붙잡힌 자들에 이르러서는 저들의 형제·숙질(叔姪) 사이에 왕복했던 서찰이 낭자하게 드러났으므로, 그 요사하고 흉악한 정절(情節)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가 어려웠으니, 대개 이들 세 흉인은 모두 사학의 근저(根柢)가 되었습니다. 청컨대 전 판서 이가환, 전 현감 이승훈, 전 승지 정약용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추국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흔쾌하게 방형(邦刑)을 바로잡으소서. 지금 사학을 금지하는 정사(政事)는 자성(慈聖)께서 내리신 칙교(飭敎)가 간곡하고 엄중하시니, 마땅히 더욱 자별하게 봉행해야 할 것인데, 포청(捕廳)에서 추핵(推覈)함에 있어 오로지 완게(玩愒)만 일삼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후로 느슨하게 다스린 해당 포장은 드러나는 대로 고발을 받아들여서 아울러 견삭(譴削)의 법을 베푸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가환의 일은 자교(慈敎)로 처분하신 것이 있다. 포장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포장 신대현(申大顯)과 전 포장 이유경(李儒敬)을 현고(現告)로 인하여 감죄(勘罪)하였다. 대왕 대비가 신대현은 제배(除拜)한 지 오래 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분간하도록 명하였다.
양사(兩司)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추삭(追削)한 죄인 심이지(沈頤之)·오재문(吳在文)에게 추탈(追奪)의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추탈이 추삭보다 무겁다는 것이 무슨 법문(法文)에 있는가? 너희들을 모두 파직(罷職)하겠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사학(邪學)에 대한 일을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 하교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는 진실로 나의 뜻에 부합된다. 엄중히 추핵(推覈)하는 방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으니, 대간의 계사 가운데 들어 있는 사람들을 금오(金吾)로 하여금 오늘 안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판의금부사는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그 대신 병조 판서 서정수(徐鼎修)를 제수한 다음 패초(牌招)하여 국청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위관(委官)은 영부사로 삼았다.
2월 10일 병진
권강하였다.
수원 유수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베옷을 입고 낮은 궁실(宮室)에 거처하여 검소함을 보이신 성덕은 백왕(百王)보다 탁월하셨습니다. 화령전(華寧殿)은 선대 의관(衣冠)을 월유(月游)하던 곳인데, 무릇 용마루·기둥·섬돌·지도리 등에 관계된 제도를 한결같이 견고하고 소박함을 위주로 함으로써 옛날의 성덕을 본받았으니, 전내(殿內)의 배설(排設)도 당가(唐家)를 설치하지 않고 앞에 합자(閤子)를 설치하되, 한결같이 주합루(宙合樓)의 예에 의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건릉(健陵)에 봄, 가을로 봉심(奉審)하는 것 또한 현륭원(顯隆園)의 예에 의거하여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의(便宜)할 것이므로, 감히 진달(陳達)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교리 이기헌(李基憲)·수찬 장석윤(張錫胤)이 연명 차자를 올려 채제공(蔡濟恭)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하고, 인하여 비지(批旨) 가운데 ‘금령에 관계된다.[涉禁]’는 두 글자는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다. 끝으로 말하기를,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파직하라는 명은 적이 생각하건대, 중도에 지나치니 성명(成命)을 거두심으로써 대간의 풍도(風度)를 진작시키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금령을 어떻게 환수할 수 있는가? 추삭(追削)과 추탈(追奪)에 대한 경중(輕重)은 율문(律文)이 없는데, 율은 의논함에 있어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도 오히려 죄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율에 없는 일을 가지고 법을 집행하는 곳에서 어려워함이 없이 말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하였다.
김관주(金觀柱)를 이조 참판으로, 신봉조(申鳳朝)를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근순(金近淳)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삼았다.
추국하였으니, 【위관(委官)은 영부사 이병모(李秉模), 판의금부사 서정수(徐鼎修), 지의금부사 이서구(李書九), 동의금부사 윤동만(尹東晩)·한용탁(韓用鐸)이었다.】 사학 죄인(邪學罪人)을 국문한 것이었다.
임율(任嵂)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11일 정사
권강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2월 12일 무오
이조 판서 윤행임(尹行恁)이 아뢰기를,
"충절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태평한 세상의 영전(令典)입니다. 고 병조 좌랑 이사규(李士珪)는 숭정(崇禎)082) 병자년083) 의 호란(胡亂)을 당하여 장령 한백형(韓百亨) 등과 강도(江都)에서 함께 죽었는데, 충절이 뛰어나서 남루(南樓)의 여러 신하들에게 견주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지난 선조(先朝) 경술년084) 3월에 황단(皇檀)085) 의 망배례(望拜禮)를 거행하였을 때 이사규의 자손을 찾아 보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자손이 영체(零替)하여 스스로 현관(縣官)에 진달하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습니다. 마침 언단(言端)으로 인하여 우러러 진달(陳達)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증직(贈職)함이 옳다."
하였다.
사은 정사(謝恩正使) 조상진(趙尙鎭), 부사 신헌조(申獻朝), 서장관 신현(申絢)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사폐(辭陛)086) 한 때문이었다.
추국하였다.
죄인 정약종(丁若鍾)의 문서(文書)와 일기(日記) 가운데 그 아비를 향해 망측한 말과 나라를 향해 부도한 말이 있었으므로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원임 대신과 금오 당상이 서로 뒤좇아 청대(請對)하고 말하기를,
"정약종은 결단코 잠시도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제 이미 사실대로 자백하였으니, 부대시(不待時)087) 의 율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그의 정절이 이미 탄로되었으니, 잠시도 천지 사이에 목숨을 붙여 둘 수가 없겠지만, 단지 지금 옥사를 다스리는 것이 소홀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포졸(捕卒)을 내보내어 체포하게 하였으나,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자들이 있고, 체포된 자들도 구핵(究覈)하는 것이 미진하니, 그 소굴을 타파하는 도리에 있어서 앞질러 먼저 법을 적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우선 다른 죄인들이 바친 공초를 살펴보고 법을 적용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진실로 지극히 마땅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극도로 흉패한 말을 들었으니, 일각이라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므로, 구대(求對)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개 그 문서 가운데 그 아비가 사학(邪學)을 금하였기 때문에 원수같이 보기에 이르렀다고 하였고 그 아래에 성상에 대한 부도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였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신들이 신해년088) 무렵에 형관(刑官)으로서 옥사를 다스렸었는데, 그 당시 저 무리가 스스로,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사학에 빠져들지 않겠다.’고 말하였으므로 모두 살려 주고자 하시는 성의(聖意)로 특별히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시고, 최필공(崔必恭)과 같은 자는 심약(審藥)으로 차임(差任)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진실로 우두머리를 모두 모른다고 하여 단서를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놈은 결단코 부대시(不待時)의 율을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교주(敎主)와 소굴을 알아내지 못한 채 단지 이 놈에게만 법을 적용한다면, 교주와 소굴을 위하는 다른 놈들은 반드시 이 놈에게 전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체(獄體)에 있어서 결단코 경솔하게 앞질러 법을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단지 엄중히 추핵(推覈)하여 기필코 그 소굴을 알아낸 후에 정법(正法)함이 옳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발포(發捕)하게 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미처 체포하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국가의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다. 만약 수일 안에 죄다 체포하지 못한다면, 금오 당상과 좌포장·우포장을 마땅히 각별히 논죄(論罪)할 것이니, 이로써 신칙하도록 하라. 이러한 때에 국청을 설치한 것은 만부득이한 일이다. 사학을 기어코 소탕하여 다시는 ‘사학’이라는 두 글자를 입문(入聞)하는 일은 없은 후에야 경들은 대양(對揚)하는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되니, 각별히 엄중하게 추핵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3일 기미
대사간 신봉조(申鳳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채제공(蔡濟恭)에 대한 일은 준엄한 공의(公議)가 일어나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주벌(誅罰)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일전에 처음 발계(發啓)하였을 때 지평 유원명(柳遠鳴)은 이미 조방(朝房)089) 에 나아가 이기기를 다투는 뜻을 뚜렷이 보이고는 감히 오만하게 뜻을 어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전계(傳啓)하였을 때에 미쳐서는 한결같이 강퍅하게 굴며 끝내 따라서 참여하지 않았으니, 교만하여 조정(朝廷)도 안중에 두지 않고 사당(死黨)을 달갑게 여기는 버릇이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피혐(避嫌)하고는 스스로 진술하였는데, ‘부범(負犯)’이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간략히 말한 데에 지나지 않았으니, 반복할 계책을 이루고자 하여 이렇게 군색한 말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영호(營護)하는 데에서 나왔으나, 나중에 가서는 도리어 벗어나려는 데에서 졸렬해지고 말았으니, 수각(手脚)이 황란(慌亂)하고 정태(情態)가 섬홀(閃忽)하였습니다. 신은 전 지평 유원명에게 빨리 찬배의 율(律)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원명에 대한 일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추국하였다.
2월 14일 경신
권강하였다.
대사간 신봉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국좌(鞫坐)에서 직접 이가환·정약용·이승훈의 무리를 보았는데 모두 어그러진 기운이 모여서 마귀(魔鬼)의 빌미를 가지고 습성(習性)을 이루었으므로 항양(桁楊)을 마치 초개(草介)처럼 보고 형륙(刑戮)을 마치 낙지(樂地)에 나가는 것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 단서가 이미 드러났는데도 장형(杖刑)을 참으며 자복하지 않고 사찰(私札)이 적발되었는데도 죽기를 작정하고 저항하며 실토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흉패한 무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저 도당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자는 곧 오석충(吳錫忠)·유이환(兪理煥)·이학규(李學逵)·홍헌영(洪獻榮) 등이라고 합니다. 무릇 이 여러 적들은 모두 삼흉(三凶)을 위해 법을 전수하여 신(神)을 보호하면서 안팎으로 화응하여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였으니 세상에서 지목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붙잡아다 국문해서 엄중히 신문(訊問)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한 내용은 국청에 내려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부교리 이기헌(李基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적이 생각하건대, 몹시 놀랍고도 분개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학(邪學)의 옥사(獄事)에 대한 단서는 오로지 문서가 적발된 것에 관계되니, 엄중하고도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서 진실로 십분 신중하게 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경조(京兆)에서 적발해서 얻은 사서(邪書)를 여러 당상(堂上)들이 경솔하게 앞질러 여러 낭관(郞官)들에게 돌려가며 보이고는 묘당(廟堂)을 거치지 않은 채 제멋대로 포청(捕廳)에 차례를 건너뛰어 보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포청에서도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옥정(獄情)이 먼저 누설되어 서로 잇따라 도피하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오랫동안 핵실(覈實)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신은 경조의 여러 당상들에게 아울러 찬배의 율을 시행하고 해당 포장에게도 멀리 찬배하는 법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자전께서 처분하신 바가 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옥당(玉堂)의 상소를 보건대, 경조의 당상에 대한 일은 어찌 놀랍고도 분개할 일이 아니겠는가? 사학(邪學)의 문서를 적발하였으면, 청대(請對)하여 추국하기를 청했어야 옳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신에게 보이고 각별히 엄중하고도 비밀스럽게 강론(講論)해서 처치했어야 마땅한데, 이렇게 하지 않고 경솔하게 앞질러 포청에 이송(移送)하였으며, 그 당시 포장은 이를 허술히 취급하였으니, 내가 지금까지 한심하게 여기고 있다. 대저 경조와 포청에서는 신중하게 살피며 비밀스럽게 하지 않음으로써 죄인이 도피하는 폐단을 초래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기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 경조의 당상과 포장은 현고(現告)를 받아들여 일체 찬배하고, 경조의 당상인 전 판윤 이집두(李集斗)·좌윤 윤동만(尹東晩)·우윤 윤장렬(尹長烈)·전 포장 이유경(李儒敬)은 감죄(勘罪)하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죄인 홍헌영(洪獻榮)·유이환(兪理煥)·이학규(李學逵)가 사정을 하소연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특별히 석방하도록 판부(判付)하고, 하교하기를,
"추안(推案)을 살펴보건대, 대간의 소장은 당초에 상세히 살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풍문을 탄핵하도록 허여(許與)하였으나 이는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다. 대사간 신봉조(申鳳朝)를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5일 신유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권강하였다.
추국하였다.
이경일(李敬一)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평안도 가도사(平安道假都事) 김회빈(金晦彬)이 평양부(平壤府)의 민가 6백 10호가 불탔다고 치계(馳啓)하니, 하교하기를,
"이 장본(狀本)을 보건대, 나도 모르게 슬퍼진다. 관서(關西)의 백성들은 왕래하는 사신(使臣)의 행차로 인해 고달픈데, 또 이렇게 6백 10호가 불타서 봄을 당해 살 곳을 잃게 되었으니, 몹시 불쌍해서 마음이 아프다. 신역(身役)과 받아들일 신구(新舊)의 환자(還子)를 일체 탕감해 주고, 영읍(營邑)에서는 더욱 특별히 돌보아 주어서 며칠 안에 기필코 전접(奠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장용영(壯勇營)에서는 구관(句管)하는 곡식 가운데 좁쌀 2천 석을 특별히 획급하여 집을 축조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 그리고 선전관(宣傳官)을 빨리 내려 보내어 위유(慰諭)하게 하되, 그 민가를 축조하는 공역이 시작된 후에 올라오도록 하라. 이러한 때에 도백(道伯)이 내려가지 않는 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겠는가? 궐문(闕門)을 유문(留門)090) 하게 하고, 평안 감사는 즉각 사조(辭朝)한 다음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6일 임술
권강하였다.
부제학 김근순(金近淳)에게 명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정부 서계(政府書啓) 10조 가운데 제1조를 써서 바치게 하였는데, 내전(內殿)의 벽에 걸어 두고 성람(省覽)하려는 것이었다.
추국할 때에 죄인 이가환(李家煥)이 공초(供招)하기를,
"사학(邪學)을 하는 여러 사람에 대해 목만중(睦萬重)은 반드시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니, 국청에서 아뢰기를,
"비록 시기를 틈타 원한을 갚으려는 뜻에서 연유한 듯하나, 추국의 체모에 있어서 발포(發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목만중은 이미 사학을 배척한 사람이니, 여러 죄수들과 일례로 발포하게 할 수는 없다. 또 근본이 되는 원인을 구핵(究覈)하는 데 유익하니, 어떻게 상례(常例)를 따르겠는가? 대사간을 제수하고 패초(牌招)하여 국청에 참여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부수찬 이상겸(李象謙)이 상소하기를,
"전 승지 이기양(李基讓)이 사학(邪學)을 비호한 죄는 요행히 벗어났다 하여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아들 이총억(李寵億)은 이미 포청(捕廳)에 붙잡혀 단서가 탄로되었으니, 청컨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국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흔쾌하게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몇 해 전에 김여(金鑢)·강이천(姜彝天)·김이백(金履白)·강신(姜信) 등은 사학의 무리와 체결하여 경향(京鄕)에 나뉘어 살면서 안팎으로 화응하며 몰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는 간계를 이루고자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사학의 일종인 것입니다. 반드시 음흉한 계모를 내는 우두머리가 있어서 이를 설시(設施)하고 배포하여, 의란(疑亂)시키고 현혹시킬 계책을 이루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추조(秋曹)에서 허둥지둥 마무리하여 끝까지 핵실하지 못하였으므로 인심이 지금까지 의혹하고 있으니, 그 근심은 진실로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근원을 캐서 사학을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엄중히 추핵(推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아울러 붙잡아 국문해서 엄중히 형신(刑訊)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의 내용은 마땅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2월 17일 계해
권강하였다.
추국하였다.
호남(湖南)의 수군 조련을 정지하였다.
2월 18일 갑자
권강하였다.
장령 이인채(李寅采)가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기양의 죄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先朝)에서 불식(拂拭)하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은 채 사학(邪學)의 무리가 도망하여 모이는 소굴을 달갑게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권일신(權日身)을 집에서 양육하여 교주(敎主)의 명호를 자처하고 이존창(李存昌)이 있는 감옥으로 찾아가 음식물을 보내 준 등의 일이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떠들썩하게 전해졌으니, 많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권철신(權哲身)의 집안과 혼인을 맺고는 삼흉(三凶)과 의기가 투합하여 요언으로 선동하고 이익으로 속여 유혹하자, 많은 간사한 무리가 그림자처럼 따랐으니, 근년 이래로 사학이 날로 치열해진 것은 이 역적들이 작용(作俑)091) 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더욱이 그 아들 이총억이 전에 권일신의 옥초(獄招)에 나왔고, 지금 포청(捕廳)의 기포(譏捕)에서 붙잡혔으니 마음으로나 자취에 있어서나 어떻게 요행히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연명(聯名)으로 상소할 계책을 삼고는 동요시켜 벗어나려는 버릇을 부리고자 하였으니 더욱 기탄함이 없어서 지극히 영악하고도 완패합니다. 청컨대, 전 승지 이기양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국해서 실정을 알아낸 다음 흔쾌히 전형(典刑)을 바루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지사 권엄(權𧟓) 등 63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이른바 서양학(西洋學)이라는 것이 과연 어찌 요사한 마귀(魔鬼)의 술수를 허락하겠습니까마는 천륜을 멸절시키고 인류를 함닉시켜 사람들을 모두 금수(禽獸)와 이적(夷狄)의 지경으로 급속하게 몰아넣고 있습니다. 부모를 제사지내지 않고 신주(神主)도 받들지 않으니 이것이 과연 천지에 용납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 이러한 술수에 빠져 들었다고 세상에서 지목받고 있는 자가 불행하게도 신 등의 지구(知舊) 사이에서 많이 나왔으니, 지금 죄수 가운데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과 정약용(丁若鏞)의 형제가 바로 이들입니다. 이는 신 등이 몹시 증오하며 지극히 분개하여 더욱 손수 도륙(刀戮)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 저 역적 정약종(丁若鍾)은 한낱 간사한 요괴로서 천륜을 끊고 자취를 감추어 따로 살면서 밝은 세상을 등지고 그늘진 어두운 소굴에 들어갔으니, 처음부터 이 세상에 군신과 부자의 윤리가 있음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씀은 사학을 신봉하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것보다 심하고, 사학을 지키는 것이 고절(苦節)을 지키는 것보다 심하였습니다. 행적이 음비(陰祕)하여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암지(暗地)에서 작법(作法)하는 것이 어떤 모양의 사물(事物)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강퍅한 성품이 감화되기 어려워졌으며, 효음(梟音)이 더욱 방자해져서 이번에 극도로 흉악하고 몹시 패려하며 부도한 말들이 문서에서 적발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진실로 전고(前古)에 없었던 변괴이었습니다. 아! 정약종의 형이 되고 아우가 되는 정약전과 정약용이 감히 말하기를, ‘알지 못한다.’ 하고, 또한 감히 말하기를, ‘나는 사학을 하지 않았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정약용은, ‘요설(妖說)에 차츰 빠져들어 거의 어진 성품을 잃게 되었다.’는 말로써 이미 자백하였고, 군부(君父)의 앞에서, ‘사학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는데. 먹 자국이 변하기도 전에 또 이러한 변괴가 동기(同氣)에게서 나왔으니, 이것이 곧 저들의 단안(斷案)인 것입니다. 이가환에 이르러서는 세상에 드문 은혜를 치우치게 입어 지위가 상대부(上大夫)에까지 올랐으니, 더욱 자별하게 보효(報效)하기를 도모했어야 마땅할 것인데, 사서(邪書)를 탐음(貪淫)하여 점점 깊이 고질(痼疾)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서를 보았다는 말은 그도 사실대로 자백하였으니, 처음 요서(妖書)를 본 초기에 진실로 엄중하게 분변(分辨)하여 통렬하게 배척하고 이를 단절하여 멀리하였더라면, 그 해독을 끼침이 어찌 이와 같이 널리 퍼졌겠습니까? 그러나 통렬하게 단절한 자취가 없었고, 전후에 물들었던 무리가 또 그와 친밀하여 연결된 사이였으니, 소굴의 지목을 그가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승훈은 스스로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사서(邪書)를 구득해 왔으니, 이것이 탐닉하여 즐긴 것이 아니고 무엇이며, 또한 숭상하여 믿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여항(閭巷)의 사이에 매우 번다하게 전습(傳習)하여 더욱 심하게 물들었으니 전후에 속임에 미혹된 사람이 무릇 몇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서 때문에 스스로 사학에 빠져들고 다시 다른 사람까지 빠져들게 하였으니 오늘날 화란(禍亂)의 근본을 논한다면, 첫째도 이승훈이고 둘째도 이승훈입니다. 수악(首惡)의 율(律)을 그가 어떻게 감히 사피(辭避)할 수 있겠습니까? 아! 무리가 지금까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성세(聖世)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은혜가 아님이 없었으니, 저 무리가 상소하여 아뢰면서 자수하였고, 문자(文字)로서 스스로 변명하여 그 질언(質言)한 바가 그럴 듯한 말로 남을 속일 수 있으므로 신 등도 진정(眞情)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 혹시라도 거의 스스로 새로워질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살펴보건대, 마음과 뼛속까지 써늘합니다. 처음에는 천총(天聰)을 속였고, 마침내는 순종하지 않았으니 정절이 탄로나고 문적(文跡)이 적발되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목도한 것이 낭자하여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 죄가 만 번 죽인다 하더라도 그 죄를 대속(代贖)하고 신 등의 공분(公憤)을 풀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권철신(權哲身)은 곧 사적(邪賊) 권일신(權日身)의 형입니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나마 이성(彝性)이 있었다면, 권일신이 죽은 후 마땅히 슬피 울며 자신을 몹시 책망하고, 한결같이 옛날 사학에 물들었던 간사한 마음을 고쳤어야 할 것인데, 거듭 완악하여 개전(改悛)할 줄을 모르고 강퍅하여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아들에게 사학을 가르치며 요설(妖說)로 세상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전에 이미 포청에 붙잡혔었고 후에 다시 군옥(郡獄)에 체수(滯囚)되었으니 흉악하고 모질어서 하여 끝내 뉘우칠 줄 모르고 죄를 범한 정상은 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홍교만(洪敎萬)이라는 자는 본래 권철신의 지친(至親)으로서 겸하여 정약종의 친사돈이 되는데, 권철신을 스승으로 섬기고 정약종을 감싸주며 본받다가, 마침내 근본을 캐서 다스리는 날을 당하여 마침내 저절로 드러났으니, 두 역적과 한 꿰미에 꿴 듯한 자입니다. 홍낙민(洪樂敏)은 다른 사람들의 지목을 받아 온 지 오래 되었는데, 지난번에 스스로 밝혔다는 것은 몇 줄의 문자(文字)에서 허둥지둥 책임만 면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체포당한 데 대해 살펴보건대, 도깨비 같은 자가 우정(禹鼎)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천하의 악덕(惡德) 가운데 불충·불효보다 큰 것은 없는데, 지금 이 사학은 아버지와 어머니도 부인하고 임금과 신하도 부인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반성하여 깨달은 자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천(貴賤)이나 부유(婦孺)를 가리지 않고 서로 뒤좇아 빠져들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는 상리(常理)로써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침내 간사한 빌미에서 싹터서 악역(惡逆)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대신과 삼사에서 하고 있는 말은 곧 온 나라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니, 이에 신 등은 놀랍고도 통분하여 한 하늘 아래에서 저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밝은 명을 내리셔서 부도한 죄인 정 약종에게 대역(大逆)의 율을 시행하시고, 그 나머지 여러 흉적들도 흔쾌하게 방형(邦刑)을 바루어 민이(民彛)가 밝아지고 천토(天討)가 시행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들이 연명 소장(聯名疏章)을 올려 사학 죄인을 징토하자는 뜻은 오히려 늦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 명찰을 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경상도 유생 강낙(姜樂) 등 4백 90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장시경(張時景)의 무리가 잠깐 일어났다가 곧 멸절(滅絶)되어 칼날에 피를 묻이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어떻게 그 근본이 깊고도 견고하며 소굴(巢窟)이 잠복(潛伏)해 있었음을 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짐을 온양(醞釀)하여 쌓아 온 것은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연고가 아니니 신 등은 이에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서 규명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년092) 의 역괴(逆魁)는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이 아니고 바로 심유현(沈維賢)이었으며, 오늘날의 역괴는 장시경(張時景)·장시호(張時皡)가 아니고 바로 채홍원(蔡弘遠)입니다. 지난번에 심유현의 흉언이 아니었으면 이인좌·정희량이 무슨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 있었겠으며, 오늘날 채홍원의 속이고 미혹함이 없었다면 장시경·장시호가 어떻게 주장하여 변란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채홍원이란 자는 단지 상신(相臣) 집안의 한낱 어리석은 자식에 지나지 않으니, 그 기세를 주합(湊合)하고 위권(威權)을 몰래 구사한 것은 기인하는 바가 따로 있었습니다. 대개 그 아비 채제공(蔡濟恭)은 본래 우람(愚濫)한 성품으로서 몰래 역적 홍낙임(洪樂任)의 사주를 받으면서 맥락이 관통하고 성기(聲氣)가 서로 연결되었으며, 무릇 역적 홍낙임의 작용과 지휘를 분주하게 받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학(邪學)을 주장하고 흉론(凶論)을 고창하였으니, 나라 사라들의 절반이 저자에 나가듯이 붙좇아 따랐고, 영남(嶺南)은 온 도의 사람들이 죄다 소굴에 모여들었습니다. 서울에서 심복이 된 자는 홍시부(洪時溥)·최헌중(崔獻重) 등이었고, 향리(鄕里)에서 노비와 같이 사환(使喚)한 자는 김한동(金翰東)·성언즙(成彦楫) 등이었으며, 역적 장시경의 온 가족은 곧 그의 양육한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금중(禁中)에서 수작한 말을 어려움 없이 전파하였고, 향곡(鄕曲)의 자질구레한 일도 모두 진주(陳奏)하였으며, 혹 연교(筵敎)를 위조해서 다른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위협하였고 혹은 건백(建白)을 사칭하여 폐족(廢族)에게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천리 길에 말을 달려 김한동에게 간찰(簡札)을 전하였고 천금(千金)의 재화를 흩어 주어 이우(李瑀)에게 소장을 올리는 밑천을 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순일(旬日)이 되기 전에 1만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으니, 장황히 세력을 떨치고 위세를 빌려 위협하고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계축년093) 에 이르러 다시 의정(議政)의 자리에 들어옴에 미쳐서는 또 감히 시기를 틈타 흉소(凶疏)를 올려 네 글자의 흉언을 발설하기까지 함으로써 더욱 방자하게 위협할 것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성상을 무함하는 말이 양호(兩湖)의 사이에 왁자하게 전파되었으니, 그 심장을 구명해 보면 무신년의 역적들보다 백 배나 흉패할 뿐만이 아닙니다.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붕어(崩御)하시기에 이르러서는 시기를 틈탈 만하다고 여기고 채홍원의 혈소(血疏) 내용을 대령(大嶺)의 밖에 널리 전파하고, 역적 장시경의 계획이 이에 비로소 결정되었고, 김한동이 향리(鄕里)를 찾아가는 행역(行役)이 인산(因山) 전에 시급히 떠났는데 역적 장시경의 변란이 바야흐로 일어났으니 그 심장이 서로 연걸되고 정상이 서로 내통했음은 두 사람을 서로 면질(面質)시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열 손가락이 지적함을 숨길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장시경(張時景)·장시욱(張時昱)이 경폐되고 장현경(張玄慶)이 법망에서 빠졌으니 단서를 찾을 수 없어, 옥사(獄事)의 실정을 미처 구핵(究覈)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채홍원의 혈소(血疏)에 대한 말이 또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에서 긴요하게 나왔습니다. 혈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신 등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질언(質言)할 수가 없지만, 이미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고 또 대신(臺臣)의 소장에서 나왔으며 더군다나 맨 먼저 상소하여 성토(聲討)한 자가 곧 그 아비의 혈당(血黨)이었으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사(疑似)한 데에 관계되는 것이겠으며, 십분 애석하게 여기는 자리에 차마 발설하였겠습니까? 이는 그 혈소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 논할 것 없이 평일에 속이고 미혹시키던 버릇이 흉도들에게 신임을 얻었음을 밝게 볼 수 있어서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왕부(王府)에 명하여 여러 역적 가운데 가벼운 죄를 따라 처벌했던 자들을 붙잡아다 국문하게 하고, 포청(捕廳)에 엄중하게 신칙해서 도망한 역얼(逆孼)들을 뒤좇아 붙잡아 명백하게 구핵함으로써 그 소굴을 깨뜨리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너희들은 물러가서 학업을 닦도록 하라. 영남의 습속(習俗)은 바뀌어서 화평을 누리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의주 부윤 김기상(金箕象)이 장계(狀啓)하기를,
"성경(盛京)의 예부(禮部) 자문(咨文) 가운데, 풍랑을 만난 난민(亂民) 이동주(李東柱)를 해당 국가에 보내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으므로, 이동주를 추문하였더니, 이동주가 말하기를, ‘저는 본명은 이현택(李顯宅)이며 경상도 남해현(南海縣)에 살던 백성입니다. 떠돌아 다니며 걸식하다가 이름을 이동주라고 바꾸고, 함경도 무산부(茂山府)에 흘러 들어갔는데, 갑자기 삼(蔘)을 채취해야겠다는 계책이 생각나서 얕은 여울을 따라 몰래 국경을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어 깊이 들어가 이른바 해란지(海卵地)라는 곳에서 끼니를 굶고 노숙(露宿)하며 1백여 리를 갔는데, 그 곳에서 삼을 채취하는 사람 12명을 만났습니다.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으나, 제가 문자를 조금 알고 있으므로 성명을 써서 보였더니, 피인(彼人)들이 함께 동행하며 삼을 채취하자고 하였습니다. 인하여 머리를 깎아 줄 것을 청하였더니, 기꺼이 제 말을 들어 깎아 주었으며, 또 피인의 의복을 주므로 이를 입고 그들과 함께 삼을 채취하며 다섯 달의 오랜 동안을 함께 지냈습니다. 9월에 동반했던 피인들이 일제히 산을 내려와서 각각 그들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저는 떨어져 유랑하며 의뢰할 곳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걸식하다가 위원보(威遠堡)에 이르러 붙잡혀 요양(遼陽)에 이송(移送)되었습니다. 인하여 봉황성(鳳凰城)에 압송되어 통관(通官)을 정해 내보내므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해조(該曹)에 붙잡아들여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2월 19일 을축
권강하였다.
추국하였다.
이한풍(李漢豐)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2월 20일 병인
권강하였다.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초시(初試)를 설행(設行)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국청의 일은 장차 보름 가까이 되어가는데도 수습될 기약이 없고, 매우 연로한 영상과 병을 조섭하고 있는 영부사가 매일 국좌에 나오고 있으니, 기력을 손상시킴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 염려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약원(藥院)으로 하여금 기거(起居)를 물어 보고, 인하여 삼제(蔘劑)를 가지고 가서 전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추국하였다.
2월 21일 정묘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른바 사학(邪學)은 곧 이적(夷狄)의 요법(妖法)이니,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치고 인륜을 멸절시키는 바는 천하 만국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 매양 은연중에 근심하고 깊이 염려하여, 의형(劓刑)으로 그들을 진멸하여 양민들이 물들지 않게 할 뜻으로서 조정에 들어가 전석(前席)에서 부주(敷奏)하였고, 나와서는 친척들에게 경계를 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학에 물든 무리가 신을 사사로운 원수처럼 미워하여 국청을 설시한 처음에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의 혈당(血黨) 가운데 법망에서 벗어난 자들은 신이 그 무리들의 일을 적발해 냈다고 하여 심지어는 신의 집을 끌어들여 무함함으로써 저희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하고자 했다고 하였었습니다. 비록 신이 강건하지 못하나, 어찌 혹시라도 저 무리의 흉언에 꺾여서 동요되어 한 번 밝게 변명할 것을 생각지 않겠습니까? 대저 이 무리들은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끼리도 성기가 상통하고 천리 밖에서도 마음이 일치되어 그 무리를 사랑함이 골육보다 더하고, 거짓을 꾸며 은밀히 숨기는 것이 귀역(鬼蜮)과 같았으며, 형신(刑訊)의 아래에서도 혀를 깨물며 실토하지 않고, 백 사람이 한 동아리가 되어 마치 소리가 메아리치고 그림자가 따르는 듯하였습니다. 만약 흉사한 무리가 규결(糾結)하여 무리를 불러 모으면 국가의 근심이 어찌 백련교(白蓮敎)094) ·황건적(黃巾賊)에 그치겠습니까? 서울에서 기전(畿甸)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호미를 잡은 농부로부터 비천한 여인들까지 점차 물들지 않은 이가 없는데, 그 우두머리를 구명해 보면 권일신(權日身)이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권일신이 죄를 받아 죽은 후에도 그의 동당(同黨)은 오히려 개전(改悛)할 줄 모른 채 옛날처럼 난만하게 끊임없이 왕래하였으니, 권철신(權哲身)의 온 집안이 악에 물든 실정은 자백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밝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승훈(李承薰)은 천금을 가지고 서책을 구입하여 널리 경외(京外)에 배포하였으니, 그가 한 번 연경(燕京)에 다녀온 후에 허다한 백성을 그르쳤습니다. 조그만 불을 끄지 않으면 온 벌판을 불사를 것이며, 졸졸 흐르는 물을 막지 않으면 하늘에 사무칠 것이니, 이는 그 죄가 비록 천만 번 죽인다 하더라도 어떻게 대속죄(代贖罪)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부도한 정약종과 처남·매부의 관계를 맺었으니, 정약종의 사서(邪書) 또한 이승훈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가환(李家煥)은 그의 전후 좌우에 있는 사람 가운데 사학에 물들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는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의 생질이 서책을 사 가지고 온 이래로 만약 오훼(烏喙)같이 보고 오염되는 것처럼 여겨 물리치고 논박(論駁)하였다면, 그의 인척(姻戚)들이 어찌 혹시라도 이와 같이 고혹되어 훈염(薰染)될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확고하게 단절하지 못하고 똑같은 무리가 되어 함께 오염되었음이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으니, 교주(敎主)의 지목은 그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와 같은 흉괴(凶魁)는 율(律)을 갑절 가해야 마땅합니다.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러서는 역적 정약종의 아우가 될 뿐만 아니라 윤지충(尹持忠)은 곧 그의 내종 사촌(內從四寸)이니, 윤지충이 복법(伏法)된 후에 저 무리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요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낙민(洪樂敏)은 호서(湖西)에 있을 때부터 이존창(李存昌)과 친숙하다는 말이 멀고 가까운 지역에 두루 전파되었으니, 당여(黨與)의 주벌(誅罰)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오석충(吳錫忠)은 권일신의 가까운 인척인데, 권일신의 아들과 조카가 도성(都城)에 출입할 적마다 그가 받아들여 그의 집에 머물게 하였으니, 진실로 이른바 포도수(逋逃藪)095) 입니다. 홍교만(洪敎萬)은 사술(邪術)을 철저하게 믿어 정약종의 무리와 주무하고 체결(締結)하였음을 세상에서 지목받고 있으며, 그의 당내(堂內) 지친(至親)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떠들썩하게 전해지고 있어 귀가 있는 사람은 모두 들었습니다. 이러한 흉사(凶邪)한 무리는 단연코 일률(一律)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으니, 대신에게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추국하였다.
2월 23일 기사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서명선(徐命善)은 일찍이 문후(問候)를 철폐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대간(臺諫)의 말은 진실로 지나친 것이었다."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사가(私家)의 문적(文蹟)에는 간혹 그런 말이 있다고 하나, 상세히 알 수 없습니다. 또 그 당시에 상신(相臣)은 또한 누구인지 적실히 알지 못하며, 대계(臺啓) 가운데에서도 성명을 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그렇다면 대간이 논한 바는 서명선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 아니였는가?"
하니, 심환지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만약 일차 문안(日次問安)을 하지 않았다면 의리가 막대하여 법으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지만 일차 문안을 이미 예에 따라 하였으니, 진실로 문안을 철폐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교리 김회연(金會淵)이 상소하여 고 집의 박치륭(朴致隆)에게 가증(加贈)하기를 청하였습니다. 박치륭은 당년에 한 번 상소하여 분의와 기강을 범한 난적을 징토할 것을 맨 먼저 청하며 사기(辭氣)가 격렬하고 의리가 삼엄하여 사방에서 이를 듣고 본 이들로 하여금 용동(聳動)시켜 백세(百世)의 풍성(風聲)을 수립하였습니다. 옛날 선조(先朝)께서 그 충절을 포장하여 간장(諫長)으로 추증(追贈)하고 그 손자를 녹용(錄用)하였으니, 지금 대구 판관 박수형(朴壽亨)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상(堂上)이 상소하여 이미 가증(加贈)하기를 청하였는데, 만약 한 품계를 또 올린다면 도헌(都憲)이나 아전(亞銓)이 추증하는 데 마땅한 벼슬이 될 것이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곧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부수찬 이상겸(李象謙)과 관학 유생(館學儒生) 김이호(金履祜) 등이 상소하여 심의지(沈儀之)를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한유와 심의지는 초야(草野)의 일개 서생(書生)으로서 소를 올려 역적을 징토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진신(搢紳)과 장보(章甫)들이 그 뜻을 슬퍼하며 그 충절을 숭상해 온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으나, 공의(公議)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당시 두 사람이 수립한 절의(節義)는 영세토록 할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추증의 은전이 한유에게는 이미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심의지는 신과 유복친(有服親)으로서의 혐의로움이 있으므로, 감히 헌의(獻議)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여러 대신들에게 하문(下問)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일체로 포증하는 것이 진실로 공의에 합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심노숭(沈魯崇)을 절도 정배(絶島定配)하소서.’ 하였고,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홍대협(洪大協)은 먼 지방에 내치고, 심기태(沈基泰)·박하원(朴夏源)은 도배(島配)하며, 이조원(李祖源)·홍지섭(洪志燮)은 찬배하소서.’ 하니, 마땅히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겠다고 하신 하교가 있었습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심노숭은 상복을 입은 몸으로 권간(權奸)의 집에 출입하여 밤낮으로 주무한 일은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고 의리를 배신하려는 계책이 아님이 없었으니,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왁자하게 전파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청컨대 절도 정배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심노숭이 자취를 감추고 권문(權門)에 숨어서 몰래 간사한 계획을 이루고자 한 것은 당세(當世)에서 지목받아 숨길 수가 없으니, 성인은 간사한 자와 나라의 안에서 함께 살게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 변방에 내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간원에서 아뢰어 홍대협에 대해 논하기를, ‘역적 정동준(鄭東浚)에게 양육되어 요행히 과거에 급제해서 외람되게 청현직(淸顯職)에 올랐는데 종처럼 굽실거리는 비굴한 얼굴과 태도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으며, 재물을 통해 뇌물을 바치고는 비류(匪類)의 이목(耳目)이 되고 역적의 조아(爪牙)가 되었으니, 역적 정동준이 패몰(敗沒)한 후 똑같이 저죄(抵罪)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적 정동준의 여당(餘黨)과 성기(聲氣)를 서로 연결하고 세력을 서로 두둔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인류 가운데 끼어 주지 않았으니, 기양(技癢)하는 것은 의리를 배반하는 것이요, 세상에서 모두 흘겨 보았으니, 경영하는 것은 사류(士流)를 모해(謀害)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의리와 세교(世敎)를 천명(闡明)하는 날을 당하여 일각이라도 도성(都城) 안에 둘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홍대협이 재물을 가지고 발신(發身)하여 권간(權奸)에게 아첨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목받은 지 또한 오래 되었으니, 마땅히 대계(臺啓)를 윤허하여 먼 변방에 내치는 율을 시행하소서. 박하원·홍지섭에 대해 사간원에서 논하기를, ‘혹은 스스로 소두(疏頭)가 되기를 구하고, 혹은 상회(庠會)에서 거짓으로 곡(哭)한 것은 그 계획한 것이 반드시 의리를 뒤집어 어지럽히고 진신을 살해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박하원·홍지섭은 흉론을 전습(傳襲)하여 혼란시킬 기회를 엿보고 감히 국가에 흉화(凶禍)를 끼칠 계책을 낸 자이니, 아! 또한 참혹합니다. 박하원을 도배하고 홍지섭을 찬배할 것을 대간이 계청(啓請)한 것은 또한 일세의 공론(公論)이니, 윤종(允從)하는 명을 내리심이 마땅합니다. 이조원·심기태는 논소(論疏)하는 일에 참여하여 연소한 무리를 지휘했다는 말이 왁자하게 전해지는 바가 없지 않은데, 만약, ‘주장해서 창도(倡導)한 사람이 본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이조원·심기태는 혹 스스로 변명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조원은 선조(先朝) 때 한 번 정배의 벌을 받은 적이 있었고 심기태는 장차 나이 80이 되어가니, 모두 참작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여 방귀 전리(放歸田里)하는 벌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부수찬 오한원(吳翰源)이 상소하여 고 유신(儒臣) 박재원(朴在源)에게 가증(加贈)하는 일에 대해 논하니, 대신에게 복주(覆奏)하게 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박재원이 당시에 한 번 올린 소장은 성모(聖母)를 위한 순일(純一)한 충성으로 맑은 조정에 인기(人紀)를 부식(扶植)할 수 있었고, 후세에 풍성(風聲)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당상이 상소하여 청한 것은 진실로 공론(公論)에 걸맞으니, 특별히 한 품계를 가증하여, 흉악한 무리를 징계하는 즈음에 선행(善行)을 드러낼 수 있게 하고, 세교(世敎)를 바로잡는 뜻으로서 해조(該曹)에 분부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대사간 유악주(兪岳柱)가 상소하여 전 참봉 김재익(金載翼)을 찬배하는 일에 대해 논하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김재익은 역적 집안의 혈당(血黨)으로서 흉론을 고창(鼓倡)하고 의리를 배신하였으며, 부인(婦人)의 교자(轎子)를 타고 양호(兩湖) 사이를 왕래하면서 요언(妖言)을 선동하여 전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지난해부터 이미 온 세상에 왁자하게 전해지고 있으니, 한 간신(諫臣)의 말 뿐만이 아니라 이와 같이 불령한 무리는 그 벼슬이 낮다 하여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 참봉 김재익은 원배(遠配)의 율을 시행하는 것 외에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심노숭·홍대협·박하원·홍지섭·심기태에 대한 일은 영의정이 아뢴 바가 모두 공론(公論)에서 나온 것이니, 신은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조원에 대한 일은 신이 그 당시 진실로 주장한 자가 있었다고 들었으나 이조원이 지휘했는지 그 여부는 속사정을 상세히 알지 못하므로, 감히 억측하여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고 유신 박재원에게 가증(加贈)하는 일은 선행을 드러내는 정사(政事)에 있어서 진실로 작은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김재익에 대한 일은 공의(公議)가 있는 바이므로 이를 막을 수가 없으니, 빨리 대간의 청을 윤허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고,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고 유신 박재원에게 가증하는 일은 진실로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도리에 합당하니,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심노숭·홍대협·박하원·홍지섭·김재익에 대한 일은 두 대신들이 이미 아뢴 바가 있었으니 신 또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조원은 곧 신의 재종숙(再從叔)이고, 심기태 또한 가까운 친척이므로 사의(私義)로 헤아려 보건대, 감히 참여하여 논할 수가 없으니 황공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며,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고 유신 박재원에게 가증하는 일은 진실로 성조(聖朝)에서 풍성(風聲)을 수립하는 정사에 빛남이 있으니,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그 나머지 여러 조목은 대각에서 상소하면서 이미 준렬하게 발론(發論)하였고, 수상(首相)이 아뢴 것은 모두 공의(公議)에서 나왔으니, 신은 이에 대해 또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하니,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고 영부사 채제공(蔡濟恭)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청하니, 비지(批旨)에 말단의 일은 법금(法禁)에 관계되는 말이 많이 있으니, 마땅히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저 삼사에서 채제공을 논할 경우 그 죄가 있으면 그 죄를 논하면 그만입니다. 만약 금조(禁條)가 있음으로 인하여 감히 그 죄를 논할 수 없다면, 이는 위로 신총(宸聰)이 막히고 아래로 공론(公論)이 폐절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는 온갖 이치의 근원을 통찰하시고 온갖 일의 기미를 환히 살펴보시고는 옥형(玉衡)과 금추(金錘)의 사이에서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를 번갈아 행하시되, 일이 부득이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비록 한때의 금령(禁令)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이는 후세에 물려 줄 수 있는 대경(大經)·비모(丕謨)가 아니니, 치규(治規)가 이루어지고 세도(世道)가 안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장차 권의(權宜)의 정사를 죄다 제외시킬 것이니,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옥음(玉音)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여 들리는 듯하니 신이 어떻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 한결같이 초원(初元)의 계술(繼述)하는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하나의 ‘금(禁)’ 자를 언로에 베푸시고 스스로 구류(九旒)의 총명을 가려서 사방의 정지(情志)를 통하지 못하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하건대 뭇 신하가 모년(某年)에 간범(干犯)한 죄를 감히 가볍게 논할 수 없는 것은 대개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차마 들을 수 없고 신 등도 차마 말하지 못하던 것이었으나, 의리를 일성(日星)보다 더 밝게 게시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눈으로 우러러볼 수 있게 해야 털끝만큼이라도 은미(隱微)하여 드러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전하의 조정에 이르러서는 선대왕께서 차마 들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전하께 감히 말할 수 없다면 신은 적이 의리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난적(亂賊)은 두려워하여 꺼리는 바가 없어질까 두려우니, 어찌 종사(宗社)의 안위에 크게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오로지 채제공의 죄를 의논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 하문하시되, 다시는 금조(禁條)를 가지고 하교하시지 말고, 인하여 삼사의 합계를 윤허하심으로써 공의(公議)를 따르고 민지(民志)를 안정시키소서."
하였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대저 우리 선대왕의 살피기를 좋아하신 성덕과 흡수(翕受)하시는 도량으로써 어찌 언로에 금조(禁條)를 베푸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그 일이 혹 감히 제기하여 말할 수 없는 데 관계되거나 혹은 차마 들을 수 없는 데에 관계된다면, 성인(聖人)의 화변(禍變)에 대처하는 권도로써 한때 편의(便宜)함을 따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이 매양 조용하고 한가한 자리에 시종(侍從)하였을 즈음에 삼가 성교(聖敎)를 받들었는데, 이르시기를, ‘언로에 금조를 베푸는 것이 비록 부득이한 일에서 나왔으나, 이는 마침내 성인의 경법(經法)이 아니니, 치적이 이루어지고 제도가 정해지는 날을 기다렸다가, 언관(言官)과 후설(喉舌)의 지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밝게 유시함으로써 후세에서 끌어대어 전례를 삼을 수 없게 해야 한다.’ 하셨으니, 신이 들어가서 받들어 듣고는 물러나와 엄숙하게 외면서 대성인의 먼 훗날을 염려하고 경법(經法)을 지키시는 크고 훌륭하신 덕과 지극하신 뜻을 앙모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선왕의 큰 기업(基業)을 이어받으셨는데 선왕의 뜻을 천명하고 선왕의 일을 계술하는 일이 바로 이러한 부분에 달려 있으니, 이제부터 다시는 ‘금령(禁令)’ 두 글자를 가지고 하교하지 마소서. 이것이 신의 구구한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이 좋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대사간 신봉조(申鳳朝)가 상소하여 유원명(柳遠鳴)을 찬배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유원명은 대각(臺閣)에 몸담고 있으면서 삼사(三司)에서 발계(發啓)할 때를 당하여 처음에는 이론(異論)을 세운 자취가 드러났는데 마침내는 그 당파와 생사를 같이한 정상을 숨기려 하였습니다. 당파를 두둔하던지 당파에서 벗어나던지 양단간에 그 본심을 논해보면 차라리 불쌍하게 여길망정 어찌 깊이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선 가벼운 죄를 좇아 감단(勘斷)하여 삭직(削職)의 법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종부시 제조 한용귀가 아뢰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초본(草本)을 겨우 수정(修正)하여 진헌(進獻)하였으나, 삼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하고 《선원보략》의 원편(原編)을 참고해 보았더니 의례(義例)와 연조(年條)가 잘못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두 막중한 데 관계되므로 한 번 품지(稟旨)한 후에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덕 왕후(顯德王后)·장순 왕후(章順王后)·단의 왕후(端懿王后)는 왕후로 추후에 책봉되기 이전에 모두 시호를 내린 적이 있었으나, 애초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재위한 기간이 3년이었는데 2년으로 쓰여 있었으며, 상왕위(上王位)에 2년 동안 있었는데 3년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도 재위한 기간이 13년이었는데, 14년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정희 왕후(貞熹王后)는 경인년096) 에 존호를 더 올렸었는데, 신묘년097) 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예종 대왕(睿宗大王)께서는 정축년098) 에 입학(入學)하셨었는데, 병술년099) 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장순 왕후는 성종(成宗) 3년인 임진년100) 에 왕후에 추존되었는데, ‘임진’ 두 글자가 빠지고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안순 왕후(安順王后)는 성종 원년인 경인년101) 에 존호를 올렸는데, 2년 신묘년(辛卯年)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연산군(燕山君)정사년102) 에 존호를 더 추상(追上)하였는데 ‘정사(丁巳)’ 두 글자가 또한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즉위하신 날이 《실록(實錄)》에는 계해년103) 3월 13일 계묘(癸卯)로 되어 있는데,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에는 12일 계묘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징험하여 믿을 수 있는 문자(文字)는 실록만한 것이 없으며, 또 13일에 서궁(西宮)에 나아가 서별당(西別堂)에서 즉위하셨다는 것을 야사(野史)에서 여러 번 보았으니, 13일에 즉위하셨음은 의심할 것이 없을 듯한데 보첩(譜牒)에는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12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보첩에는 존호를 추상한 것을 왕(王)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서 덕종 대왕(德宗大王)·진종 대왕(眞宗大王) 양조(兩朝)의 보첩에 기록한 예와 같지 않았습니다.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휘호(徽號)는 바로 부묘(附廟) 때 휘호를 올렸으니, 대주(大註) 가운데의 기록은 다른 예와 어긋남이 있습니다. 진종 대왕의 시호 가운데 ‘효장(孝章)’ 두 글자와 효순 왕후(孝純王后)의 휘호 가운데 ‘효순(孝純)’ 두 글자는 모두 겹쳐서 기록되었으며, 시호를 받고 승통(承統)한 아래에 ‘세자빈(世子嬪)’ 세 글자가 또한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선원보략》을 수개(修改)할 때를 당하여 만약 개정하지 않는다면, 성대(聖代)의 문헌이 후대에 전해져 신뢰받지 못할 듯하므로 감히 진달(陳達)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용귀가 말하기를,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휘호인 ‘선소 의숙(宣昭懿淑)’ 네 글자는 분명히 부묘 때 올린 것인데, 보첩의 대주(大註)에는 또 ‘숙신 명혜(淑愼明惠)’ 네 글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소주(小註)에는, ‘숙(淑) 자가 겹쳐서 나왔으므로 어첩(御牒)에는 기록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휘호를 올릴 때 한 글자를 겹쳐 올리는 것은 마땅히 이럴 리가 없으니, 이는 실록에서 상고해 내어 이제 이정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용귀가 말하기를,
"인순 왕후(仁順王后)께서는 가정(嘉靖)104) 임진년105) 에 탄강(誕降)하셨는데, 보첩 가운데 월(月)·일(日)은 애초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근일에 고 부제학 유순선(柳順善)이 손수 기록한 두 첩자(帖子)를 얻어 보았는데, 대개 선세(先世)의 생년(生年)·기일(忌日)과 국기(國忌)·탄신(誕辰)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한 첩자는 명묘조(明廟朝)에 기록한 것이었는데, 인순 왕후께서 중호(中壼)에 임어하셨을 때 기록하였으므로 중궁전(中宮殿)의 탄일(誕日)이 5월 25일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한 첩자는 선묘조(宣廟朝)에 기록한 것이므로 왕대비전(王大妃殿)의 탄일은 5월 25일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유순선은 양조(兩朝)를 두루 섬기고 지위가 현달한 반열(班列)에 이르렀었으니, 두 첩자의 기록이 비록 간행한 문자는 아니지만 족히 징신(徵信)할 만한 고적(古蹟)이 됩니다. 병란(兵亂)에 불타지 않고 지금까지 유전된 것도 진실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관계되는 바가 막중해서 보첩의 대주 가운데에 갑자기 입록(入錄)하기는 어려울 듯한데, 임진년 아래의 소주(小註)에 말을 얽어 기록해서 하나의 설(說)을 깆추는 것이 좋을 듯하므로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가 말하기를,
"방금 종부시 제조 한용귀가 《선원보략》 가운데 소홀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는 뜻을 전달하여 윤허받았습니다. 이는 신의 선조 낭원군(朗原君) 이간(李侃)이 찬진(撰進)한 것인데, 열조(列朝)의 사실을 기재한 것이 비록 이동(異同)이 있지만, 공사(公私) 간의 문자를 널리 채집하고 현주(懸註)를 상고하여 정하는 등 모두 의거한 바가 있으니, 다른 서책(書冊)에 착잡(錯雜)하게 나온 것과 간혹 서로 어긋났다 하더라도 경솔하게 개정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거듭 널리 상고하여 힘써 신중함을 따르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사 간에 널리 서적을 상고하고 그 이동(異同)을 추려 다시 상확(商確)하되, 치우치게 한 가지 설을 주장하지 말고 존엄한 체모를 보존시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난만하게 상고한 후에 다시 아뢰도록 할 것이며, 호판도 또한 함께 상세히 상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유경(柳畊)이 소회(所懷)를 말하기를,
"아! 수십 년 이래로 간흉의 무리가 권병(權柄)을 농락하며 마음대로 날뛰어 의리가 장차 없어지고 국세(國勢)는 거의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아! 저 서유방(徐有防)은 본래 간사한 성품으로 교묘하게 아첨하는 처신을 이루어 선류(善類)를 살해한 까닭에 소인배라는 지목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며 공론(公論)을 배반하고 사사로움을 경영한 것은 권력을 움켜쥐려는 계책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역적 정동준(鄭東浚)의 기염(氣焰)이 한창 대단하였을 때를 당하여 오로지 아첨하여 붙좇기만을 일삼아 무슨 말이든 따라서 하였습니다. 대저 역절(逆節)이 죄다 드러난 후에 이르러서는 말이 자못 모호하였고 또한 엄중히 배척하지도 않았으니, 세상에서 버림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추삭(追削)할 것을 청하면서, ‘역적 정동준과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입니다.’라고 한 데에서 논열(論列)한 바가 갖추 지극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준렬하게 일어났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료(大僚)가 품처(稟處)한 의논은 도리어 가벼운 죄로서 처리하는 데 관계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서유방에게 빨리 추삭(追削)의 율을 시행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대신이 아뢴 바가 있다."
하였다. 또 소회를 말하기를,
"신이 달포 전에 이면응(李冕膺)의 일에 대해 논계(論啓)한 것이 있었는데,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는 비답을 삼가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버려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 공언(空言)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청컨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는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의논이 이미 공의(公議)에서 나왔는데, 신이 어찌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였고, 영의정 심환지는 말하기를,
"대계(臺啓)는 체모가 중대하니, 진실로 공의가 아니면 어떻게 감히 가볍게 발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면응에 이르러서는 신이 인척(姻戚) 간의 정의(情誼)가 서로 가깝고 일이 징토(懲討)하는 것과 달라서 감단(勘斷)하여 맑은 조정의 순후(純厚)한 풍성(風聲)을 손상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는 말하기를,
"대간의 말이 공의에서 나왔는데 신은 세상에서 모두 알고 있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의논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서용보는 말하기를,
"영상과 좌상은 비록 인척(姻戚)의 혐의와 세혐(世嫌) 때문에 감단(勘斷)할 수 없다고 아뢰었는데, 대간(臺諫)의 말이 공의에서 나왔으니, 신은 다시 덧붙여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신들이 아뢴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의지하여 믿는 바가 자별한데 강학(講學)에 참여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내가 몹시 민망스럽게 여기고 있다. 듣건대, 그 병세(病勢)에 차도가 있다고 하니, 총융사 신대겸(申大謙)은 체차(遞差)하고 전 판서 김조순(金祖淳)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간 목만중(睦萬中)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사옥(邪獄)에 대해 서치(鋤治)할 방도를 진달하였으며,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정약용(丁若鏞) 형제·홍낙민(洪樂敏)·이기양(李基讓)·권철신(權哲身) 등 여러 죄인들을 성토(聲討)한 다음 이어서 말하기를,
"한재렴(韓在濂)이란 자는 곧 송도(松都)의 한낱 천인인데, 사술(邪術)에 대해 익히고는 재화가 넉넉한 것을 가지고 뜬소문으로 선동하며 어리석고 속된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있습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자라 할지라도, 버려두고 추문(推問)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김여(金鑢)·강이천(姜彛天)·김이백(金履白) 등 여러 죄인들이 있는데, 장소(章疏)에 오른 그들의 죄명을 살펴보면, 이는 사학(邪學)의 종류들임이 분명합니다. 이밖에 또 얼마나 되는 흉패하고 추악한 무리가 어디에 숨어서 어떠한 화변(禍變)을 어떠한 곳에서 일으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빨리 숨어 있는 무리들을 수색하고 그 모여드는 소굴을 파헤쳐서 사당(邪黨)으로 하여금 용은(容隱)할 곳이 없게 하는 일을 결단코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4일 경오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한식제(寒食祭)를 행하였다.
전 참판 이면응(李冕膺)을 창성부(昌城府)에 찬배하였다.
2월 25일 신미
시임 대신·원임 대신·금오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국문의 일을 지체시키고 있으니, 진실로 민망스럽다."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번의 옥사(獄事)는 도당(徒黨)이 진실로 번다하여 경외(京外)에 있는 자들이 만천(萬千)을 헤아릴 정도입니다. 당초에 성의(聖意)는 대체로 그들 가운데 우심한 자를 극형으로 다스려 풍성(風聲)이 미치는 바에 따라 한 사람을 징토하여 만 사람을 면려(勉勵)하는 도리에서 나왔으므로 신 등이 삼가 덕의(德義)를 본받아 단지 갇혀 있는 자들만 경중(輕重)을 나누어 아뢰었습니다. 이가환(李家煥)은 그들 가운데 본래 문명(文名)이 드러났으니, 당초에 사학(邪學)의 책자를 중국에서 가지고 왔을 때에 그가 만약 이를 짐독(鴆毒)과 같이 보고 사갈(蛇蝎)처럼 여겨 피하였더라면, 후생(後生)의 무리가 반드시 점차 물들어 그릇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수창(首倡)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 말이 점차 번지게 되어 경외에서 이를 붙좇아 따라 물이 하늘에 사무치고 불이 벌판에 번지듯이 화변(禍變)이 만연되었으니, 그 근본은 모두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법을 적용하기 전에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가해졌으니, 마땅히 지만(遲晩)106) 한 후에 물고(物故)된 것으로 조지(朝紙)107) 에 반포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훈(李承薰)은 당초에 사서(邪書)를 구입해 가지고 와서 온 세상에 전하여 배포하였으니 인심(人心)이 함닉(陷溺)되고 세도(世道)가 어그러진 것은 진실로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가 작용(作俑)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문서에 적발된 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신부(神父) 등의 말은 명호(名號)를 만든 것인데 신(神)과 같이 앙모(仰慕)하는 자를 신부라고 일컬으니 신(神)을 대신(代身)할 수 있다는 말이요, 아비를 대부(代父)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양인(洋人)들과 난만(爛漫)하게 왕래하고 있는데 그 실정을 구명해 보면 지극히 흉참(凶慘)하였으니, 이 또한 일률(一律)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정약종(丁若鍾)은 국정(鞠庭)에서 엄중하게 추문(推問)하는 아래에서도 죽어도 후회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요망하고 영악함은 전고(前古)에 없던 것이지만,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여사(餘事)에 속하는 것입니다. 효경(梟獍) 같은 심장(心腸)은 임금과 어버이를 향해 방자하게 흉언을 발설하기에 이르렀으니, 단지 요언(妖言)으로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율(律)만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결안(結案)해서 정법(正法)해야 할 것입니다. 홍교만(洪敎萬)은 터무니없는 요설(妖說)을 주장하여 인심을 그르친 것이 진실로 이미 남김없이 드러났는데, 국정에 이르러서는 후회하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하늘을 지척(指斥)하며 그 서학(西學)을 과장하여 ‘사(邪)’ 자를 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차례 엄중히 형신(刑訊)하였으나, 시종 완강하게 거역하였으니, 이와 같은 흉패(凶悖)한 무리는 또한 일률(一律)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창현(崔昌顯)은 회상(繪像)을 장식하여 주장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붙잡혀 포청(捕廳)에 갇히자, 감히 살 방도를 구할 계책을 내어 거짓으로 후회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정에서 형신받기에 이르러서는 진장(眞贓)이 죄다 드러나자 또 도리어 전의 초사(招辭)를 번복하고 심지어는 야소(耶蘇)를 위해 한 번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필공(崔必恭)은 전후의 죄악이 몹시 통분스러운 바가 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반드시 사람을 사람답게 대우하고자 하신 덕의(德意)가 하늘과 같이 커서 간곡하게 그 목숨을 보존시켜 주고,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하여 항산(恒産)을 얻게 하였으므로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게 되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기에 이르렀으니 비록 돼지와 물고기나 목석(木石) 같이 완악한 무리라 하더라도 감화될 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완악하고 강퍅하여 도리어 당초에 뉘우친다고 말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이 흉패하고도 완악한 무리는 하루라도 천지(天地) 사이에 둘 수가 없습니다. 이 자는 즉각 법을 적용함이 마땅합니다. 이존창(李存昌)은 사학에 오염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실로 호서(湖西) 한 도의 거괴(巨魁)가 되는 자입니다.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데다가 변사(變詐)가 무상(無常)하였으니, 중외(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가 됨을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이 자가 만약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팔방(八方)의 청문(聽聞)에 손상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당(邪黨)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존창도 살았으니, 다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 할 것이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철신(權哲身)은 흉악하고 간특한 정절(情節)이 별로 다를 것이 없으나 이미 물고(物故)되었으니 이제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당초에 사학에 오염되고 미혹되어 빠져 들었을 때에 죄범(罪犯)을 논하였어도 애석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사학을 버리고 정도(正道)에 돌아가겠다고 스스로 그의 입으로 발명(發明)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약종의 적발된 문서 가운데 사당(邪黨)의 서찰(書札)에, ‘너의 아우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 있었고, 정약종이 스스로 쓴 문적(文蹟) 가운데 또, ‘형제와 함께 서학(西學)을 익힐 수 없으니, 자기의 죄가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여러 죄수들과 구별됨이 있으니,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관대한 은전에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홍낙민(洪樂敏)은 호중(湖中)에 있을 때부터 사학(邪學)을 하였다는 명목이 있었으나, 단지 그 공초(供招)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였습니다.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일컬은 강거능파(姜巨能巴)라는 자는 곧 반족(班族)의 여인으로 사학(邪學)에 깊이 빠졌는데, 정약종이 곧바로 아뢰지 않은 것을 홍낙임이 곧 지명하여 고하였으니, 바로 홍필주(洪弼周)의 어미였습니다. 그가 이미 당류(黨類)를 지명하여 공초를 바친 것은 또한 족히 가상하게 여길 만하니, 추국의 체모로 헤아려 차율(次律)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조동섬(趙東暹)은 양근(楊根) 사람인데, 양근(楊根)과 여주(驪州) 사이가 점차 더욱 심하게 오염되었고, 조동섬이 여러 초사(招辭) 가운데 아울러 그 이름이 나왔으니, 이 자는 더욱 엄중하게 형신을 가한 다음 추조(秋曹)에 보내어 다시 엄중하게 형신한 후에 차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김백순(金伯淳)은 한 번 미혹된 다음 끝내 변개할 줄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에게 노모(老母)가 있다고 하므로 그 어미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온교 절거(溫嶠絶裾)108) ’에 대한 일을 인용하여, 이미 대부모(大父母)가 있으니, 어찌 부모에게 근심을 끼칠 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미혹되어 마음을 돌이키지 않음이 이와 같았는데 여러 번 신문(訊問)하며 여러 가지로 효유(曉諭)하였더니, 마지막에 가서 조금 뉘우쳐 깨닫는 뜻을 보였습니다. 당초에는 비록 극도로 깊이 오염되었었으나 이미 뉘우쳐 깨닫는 빛이 있으니, 일률(一律)은 참작할 점이 있습니다마는, 이 자는 다시 형신을 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석충(吳錫忠)은 그가 비록 처음부터 끝까지 발명(發明)하고 있으나 점차 오염된 자취가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우니, 사학의 종락(種落)임이 분명합니다, 또 흉역(凶逆)과 서로 내통한 자취가 있으니, 경솔하게 앞질러 작처(酌處)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형신(刑訊)을 가하여 구핵(究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기양(李基讓)은 그 집안의 선조(先祖) 가운데 국가에 크게 훈로(勳勞)를 세운 사람이 있으니 그에게 어떻게 차마 형장(刑杖)으로 엄중하게 신문(訊問)하겠습니까마는, 당상(堂上)이 상소하여 논한 외방(外方)의 물론(物論)을 가지고 살펴보건대, 전부터 지목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으므로 의계(議啓)하는 가운데 형신(刑訊)을 가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으니, 판하하기를 기다려 거행하게 함이 마땅합니다. 대저 이 서학(西學)이 중국에 유입된 것은 대개 만력(萬曆)109) 연간인데, 전하는 말을 듣건대, 안남국(安南國)에서는 크게 소탕을 가하여 자그마치 1만여 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홍낙민이 일컬은 거능파(巨能巴)는 곧 양국(洋國)에서 존칭하는 명호인데, 그 사람은 곧 강가(姜哥)의 여인으로서 글 내용 가운데 정약종에 대해 언급한 것이 지극히 간악하고 지극히 요사스러우며 성명도 또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자는 비록 부녀자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신 등이 이미 발포(發捕)하라는 뜻으로 포청에 분부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시수(李時秀)가 말하기를,
"강 여인의 지극히 간악하고 요사스러움은 이미 논할 것조차 없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족(士族)과 여항(閭巷)을 논할 것 없이 무릇 부녀로서 이 사학을 하는 자들은 문서에서 적발된 진장이 많이 있으니 남김없이 죄다 소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점차 물들어 만연되는 근심이 없을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릅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옥당(玉堂)에서 이미 진소(陳疏)하였으므로 이미 발포(發捕)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이미 적발된 진장이 없었으니, 이기양은 특별히 백방(白放)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이기양은 곧 고 상신(相臣) 이덕형(李德馨)의 후손입니다. 고 상신은 국가에 대해 큰 훈로가 있었으니 신들도 또한 어찌 곡진하게 용서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자들이 모두 사학(邪學)의 괴수들이고, 또한 일찍이 이존창을 집안에서 양육하며 문필을 가르쳤으며, 또 전에 최창현과 친숙했었습니다. 비록 적발된 진장은 없다 하더라도 갑자기 백방하는 것은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이기양을 다시 위엄(威嚴)을 갖추어 엄중하게 추문해서 의계(議啓)할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대간이 논계(論啓)한 가운데 대신을 감죄(勘罪)하는 일에 대한 논의는 미처 품처(稟處)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였는데, 심환지가 말하기를,
"있었습니다마는 대관(大官)은 체모가 중대하여 한두 사람의 소견을 가지고 갑자기 논단(論斷)할 수는 없으며, 반드시 삼사(三司)의 공의(公議)를 기다려야 합니다. 서유방(徐有防)의 일에 이르러서는 소장(疏章)이 이미 계사(啓辭)와 다른데, 또 추탈(追奪)하는 것은 지나친 듯합니다. 김치묵(金峙默)에 대한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여 대계(臺啓)가 발론된 후에 여정(輿情)이 매우 흡족해 하였습니다. 채제공(蔡濟恭)은 계축년110) 의 상소에 감히 해서는 안될 일을 말하였고, 또 더욱이 임자년111) 의 흉소(凶疏)에서 죄상이 모두 드러났는데, 그에게만 어떻게 유독 죄벌(罪罰)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추국하여 정법(正法)할 경우에는 으레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만, 지난해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의 무리는 신주(神主)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기하였다 하여 모두 부대시(不待時)의 율(律)을 시행했었습니다. 이번의 여러 죄수들도 부대시의 율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그 가운데 이존창은 본도(本道)에 내려 보내어 백성들을 모아 놓은 후에 정법(正法)하여,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두려워하는 바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수찬 장석윤(張錫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역적 홍낙임(洪樂任)과 같은 요악(妖惡)한 자가 아직도 당률(當律)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자취가 척완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그 악역(惡逆)은 스스로 그 가정에서 전습(傳襲)한 것이었으니, 지극히 흉악한 정절(情節)은 《명의록(明義錄)》의 일부에 소상히 실려 있는 바입니다. 성궁(聖躬)을 위핍(危逼)하고 몰래 전례(典禮)를 도모하는 것이 어떠한 흉역이겠습니까? 바야흐로 사학(邪學)을 통렬하게 다스리는 날을 당하여 국수의 초사(招辭)에서 이름이 긴절하게 나와 진장을 숨길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잠시도 용서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굽어 여정(輿情)에 따르셔서 빨리 대간(臺諫)의 청을 윤허함으로써 공법(公法)을 펴고 화란(禍亂)의 근본이 제거될 수 있게 하소서. 신이 지난해 가을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에 마침 장시경(張時景)의 변란(變亂)이 인접한 지경에서 일어난 것을 보았으므로 상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아! 저 장시경 등 여러 역적들은 본래 효경 같은 성품으로 평소 불궤(不軌)한 계획을 쌓아 두었다가 한 번 멋대로 날뛰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이 이루지 못했던 일을 성취시키려고 하였으니 일은 반야(半夜)에 일어났으나 대개 하루아침에 온양한 것이 아니었으며, 모의는 백 사람에게 미쳤으나 거의 영남(嶺南) 전체에 배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저 영남의 습속은 그릇된 지 오래 되었는데 한 번 변해서 무신년112) 의 역변(逆變)이 되었고, 두 번 변해서 을해년113) 의 역변이 되었다가, 이번에 장시경이 창궐(猖獗)하기에 이르러서는 역변이 갈수록 더욱 기괴해졌으니 이는 모두 선입견이 주(主)가 되어 폐습(弊習)이 이미 고질(痼疾)이 된 데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정인홍(鄭仁弘)·이현일(李玄逸)의 무리는 아직도 별호(別號)를 전하였고, 채제공(蔡濟恭) 부자에 이르러서는 영수(領袖)로 추대하여 이를 시귀(蓍龜) 같이 믿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한 패거리가 되어 이를 구제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충역의 구분과 의리의 한계가 망매(茫昧)한 데에 이르렀으므로 종신토록 미혹되어 시기를 틈타 절발(竊發)하였으니, 통분스럽고도 비탄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에 영남(嶺南)의 유생 강낙(姜樂)이라는 자가 통렬하게 그 원위(源委)를 벽파(劈破)하고는 발을 싸매고 먼 길을 걸어 올라와서 대궐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무신년의 《감란록(勘亂錄)》을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역적들의 실정을 알아낼 수 있으며, 을해년의 《천의소감(闡義昭鑑)》을 살펴보건대 오늘날 주토(誅討)를 엄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무신년의 역적 괴수는 이인좌·정희량이 아니라 바로 역적 심수현(沈壽賢)이며, 오늘날의 역적 괴수는 장시경·장시호(張時皡)가 아니라 바로 채홍원(蔡弘遠)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절절이 근거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대개 혈소(血疏)에 대한 말은 이미 역적의 초사에서 나왔고 한 목소리로 징토해야 한다는 것은 또 대간의 소장에서 나왔으니, 채제공의 죄범은 진실로 이미 탄로된 것입니다. 함께 악행을 저질렀던 사당(邪黨)들이 대략 처단되었는데 많은 장보(章甫)들의 공공(公共)의 의논이 또 이러한 때에 발단되었으니, 이와 같은 흉적을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채홍원은 국청을 베풀어 실정을 알아낸 다음 전형(典刑)을 흔쾌하게 바로잡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갖추 자세히 알았다."
하였다.
2월 26일 임신
장령 이인채(李寅采)가 아뢰기를,
"아!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져서 흉도(凶徒)가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간사한 소인배로서 요행히 왕장(王章)에서 벗어난 자가 있었으니, 곧 홍낙유(洪樂游)입니다. 홍낙유는 본래 마음이 바르지 못한 간사한 무리로서, 은밀히 유음(幽陰)한 지름길을 의탁하였다고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5월 그믐날 연교(筵敎)에서 충신과 역적의 구분에 대해 명시하셨고, 공제(公除)114) 전에 자교(慈敎)에서 복종과 배반의 길에 대해 밝게 게시하셨으니,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 누군들 금석(金石)과 같이 여겨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당류(黨類)를 두둔하고 승부를 겨룬단 말입니까? 삼전(三銓)115) 이 독정(獨政)하던 날 역얼(逆孼) 홍서영(洪緖榮)을 앞장서서 침랑(寢郞)의 수망(首望)에 주의(注擬)하여 평범한 사람과 같이 보았으니, 이와 같이 의리를 배신하여 역적을 비호하는 무리는 결단코 도성(都城) 안에 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전 참의 홍낙유에게 빨리 원방(遠方)에 내치는 율을 시행하소서. 아! 심낙수(沈樂洙)의 극도로 흉악하고 몹시 패려한 죄악은 천지에 용납받기 어려운 것인데, 왕장(王章)이 미처 시행되지 아니하여 귀신의 주벌(誅罰)이 먼저 가해졌으니 여정(輿情)의 분개함이 오랠수록 더욱 간절해지고 있습니다. 그 아들 심노숭(沈魯崇)은 성품이 본래 흉악하고도 간휼하여 대대로 그 흉악을 물려받았으며, 처신(處身)이 섬홀(閃忽)하여 동서에서 함부로 날뛰었습니다. 복제(服制) 중인 몸으로서 권간(權奸)의 문하에 출입하며 밤낮으로 주무하는 것은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고 의리를 배반하는 계책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라 안에 말이 왁자하게 전파된 지 오래 되었으니 원방에 내치는 가벼운 벌을 시행하는 데 그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원방에 내치는 죄인 심노숭에게 빨리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율을 시행하소서. 아! 저 서유방(徐有防)은 본래 간사한 성품에 아첨을 잘하는 자로서 선류(善類)를 장해하였으니 간사한 소인배라는 지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으며, 공의(公議)를 배반하고 사리(私利)를 경영하였으니 권력을 움켜쥘 계책 아님이 없었습니다. 역적 홍국영(洪國榮)이 권병(權柄)을 제멋대로 농락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붙좇기만 일삼았고, 역적 정동준(鄭東浚)이 속여서 현혹시키던 날에는 한 목소리로 화응(和應)하였습니다. 무릇 사설(邪說)을 장황히 늘어 놓아 윤리를 해치는 일에 대하여 앞장서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분통하게 여겨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추탈하기를 청하며 자세히 논열(論列)하였으니, 공의가 준렬히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지금 대료(大僚)가 품처(稟處)한 의논은 도리어 가벼운 데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고 판서 서유방에게 빨리 관작을 추탈하는 법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홍낙유에 대한 일은 이미 승전(承傳)하여 거행하였는데 이로써 성토(聲討)한다면, 그에게 있어서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심노숭에 대한 일과 서유방에 대한 일은 이미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아뢰었다."
하고, 아울러 윤허하지 않았다.
전 승지 홍대협(洪大協)을 해남현(海南縣)에, 전 참봉 심노숭(沈魯崇)을 기장현(機張縣)에, 전 참봉 김재익(金載翼)을 갑산부(甲山府)에, 유생 박하원(朴夏源)을 거제부(巨濟府)에, 홍지섭(洪志燮)을 흥양현(興陽縣)에 찬배하고, 전 판서 이조원(李祖源), 전 참판 심기태(沈基泰)는 모두 삭거 사판(削去仕版)하고 방귀 전리(放歸田里)로 추방하였으니, 모두 대계(臺啓)를 따른 것이었다.
사학 죄인(邪學罪人)들을 추국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이가환(李家煥)이 공초하기를,
"일찍이 생질(甥姪) 이승훈(李承薰)의 집에서 사학의 서책을 빌려 왔는데, 거기에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으므로 칼로 긁어서 지워 버리고, 다시는 가져다 보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국정(鞠庭)에서 반핵(盤覈)하는 즈음에, ‘흉얼(凶孼)과 체결하여 성세(聲勢)로서 서로 의지한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사학의 무리와 서로 체결한 것을 말한 것인데, 갑자기 공초하기를,
"홍낙임(洪樂任)의 하늘에 사무친 죄악을 일찍이 통분스럽게 여겨 왔는데, 어찌 체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며, ‘낙임(樂任)’ 두 자를 문목(問目) 외에서 털어 놓았고, 또 말하기를,
"남간(南間)에 갇혀 있었을 때 문밖에서 전호(傳呼)하는 소리를 듣고 홍낙임이 이미 행형(行刑)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고, 끝에 가서 오석충(吳錫忠)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일찍이 홍가의 집에 출입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는 진실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오석충과 면질시키기에 이르니, 오석충이 말하기를,
"과연 일찍이 홍낙임의 아우와 서로 잘 아는 사이이다."
하였다. 그가 사학에 물든 자취를 한결같이 곧바로 발명(發明)하다가, 여러 번 형신을 받은 후에야 마침내 사학의 괴수로서 지목된 것을 자백한 것으로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獄中)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권철신(權哲身)은 곧 권일신(權日身)의 형인데, 그 아우와 함께 사서(邪書)를 흠숭(欽崇)하여 삼혼 사행(三魂四行)에 대한 말을 매우 신봉하였다. 권일신이 벌을 받아 죽은 후에도 사학에 미혹되어 변개(變改)할 줄을 몰랐는데, 양근(楊根) 한 지경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미혹시켜 그릇되게 만드니, 그 무리가 진실로 번다하였다. 지만(遲晩)을 받았는데 옥중에서 물고(物故)되었다. 죄인 이승훈(李承薰)은 서장관(書狀官)인 그 아비 이동욱(李東郁)을 따라 중국에 간 다음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가서 구경하다가, 서양인(西洋人)과 교유를 맺고 그가 증여한 서책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사학(邪學)을 널리 배포하여 전염시켰는데, 조정에서 금령(禁令)을 내린 후에 이르러서는 분서(焚書)의 시와 이단을 배척하는 글을 지어 겉으로는 혁면(革面)을 보였으나, 속으로는 실제로 고혹되어 항상 서양인과 서찰을 통하니, 인아(姻婭)와 족당(族黨)이 모두 그 해독을 받았다. 문서가 적발되고 죄악이 죄다 드러났는데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정약종(丁若鍾)은 한결같이 곧바로 사학을 정도(正道)라고 하며 천주(天主)의 화상(畵像)을 만들어 놓고 7일마다 첨례(瞻禮)하며 이르기를, ‘천주는 대군(大君)이고 대부(大父)이다. 하늘을 섬길 줄 모르면 살아 있어도 죽는 것만 못하다.’ 하고 선조(先祖)에게 제사지내고 분묘(墳墓)에 배알(拜謁)하는 것은 모두 죄과(罪過)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 아비를 원수처럼 여기고 군상(君上)을 향해서도 망측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윤리를 멸절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었으므로, 범상 부도(犯上不道)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필공(崔必恭)은 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된 후에 곧 전염되었는데, 추조(秋曹)에서 추핵(推覈)하는 가운데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살 길을 구하는 계책을 내어 다시는 학습(學習)하지 않겠다고 공초를 바쳤으므로, 조정의 사람을 올바른 사람으로 만든다는 은택을 받아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어, 아내가 없었는데 아내를 얻었고 집이 없었는데 집을 마련하였으나 오히려 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추국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공초하기를, ‘이제 죽기로 결심하였다. 천주학은 식견이 있고 지각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를 해야 하니, 나는 결단코 개혁(改革)할 마음이 없다.’ 하였다. 그래서 요서(妖書)와 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이존창(李存昌)은 본래 호서(湖西)의 관교(官校)로서 사학에 오염되었는데,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영옥(營獄)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공초를 바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포도수(逋逃藪)를 만들어 전혀 오염된 데 대해 개철(改轍)하지 않은 채 무리를 불러 모아 반결(盤結)하고 호서의 거괴(巨魁)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押送)하여 정법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죄인 홍교만(洪敎萬)은 사학의 서책과 야소(耶蘇)의 도상(圖像) 및 첨례 장구(瞻禮帳具) 등을 모두 그 집에 모아 놓고 망령되게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겉만 그럴 듯하게 꾸며 서학(西學)은 요사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형륙(刑戮)에 나아가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홍낙민(洪樂敏)은 벼슬이 법종(法從)에 이르렀는데도 사교(邪敎)에 물들었다. 처음에는 사학을 배척하는 글을 올렸으나, 마침내는 옛 소굴을 연모(戀慕)하는 마음이 있어서 깊이 현혹시키고 교유(敎誘)하여 호남 백성들을 그릇되게 하였다. 그리고 야소(耶蘇)는 감히 꾸짖어 욕할 수 없다고 하고, 오늘날 형벌을 받는 것도 일찍이 전에 배교(背敎)했던 죄 때문이라고 하였으며, 미혹되어 뉘우칠 줄을 모르고 한 번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므로, 요서과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써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최창현(崔昌顯)은 본래 위항(委巷)의 천인으로서 사학의 서책에 고혹되어 정약종·권철신 등을 대부(代父)로 존숭(尊崇)하고 이승훈·강노파를 교주(敎主)로 일컬었습니다. 마귀의 화상을 그려서 몰래 서로 선사하고 장구(帳具)를 꾸며서 암지(暗地)에서 열심히 일하였으며, 이단의 무리들을 숨겨 주고 간계(奸計)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형륙(刑戮)에 나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겨 결안(結案)을 써서 바쳤으므로, 요서와 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혹시킨 것으로서 지만을 받아 정법하였다. 죄인 정약전(丁若銓)과 정약용(丁若鏞)은 바로 정약종의 형과 아우인데, 당초에 사서(邪書)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을 때에는 일찍이 보고서 찬미하였으나 중간에 스스로 뉘우치고 다시는 오염되지 않겠다는 뜻을 소장에 질언(質言)하였었다. 국청에 나아가기에 이르러서는 차마 형을 증인(證引)하지 못하였는데, 정약종의 문서 가운데 그 무리가 서로 왕복하는 즈음에 정약용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한 것과 평일(平日) 그 집안 사이에 금계(禁戒)한 것을 증험할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단지 최초로 물든 것으로 인해 세상에서 지목한 바 되었으므로, 정약전·정약용은 차율(次律)로 감사(減死)하여 정약전은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에, 정약용은 장기현(長鬐縣)에 정배하였다. 죄인 강녀 완숙(姜女完淑)은 곧 덕산(德山)의 사인(士人) 홍지영(洪志榮)의 처인데, 요서를 학습하여 사학의 여인 가운데 가장 간특한 자였으므로, 추조(秋曹)에 출부(出付)하여 구핵한 후에 작처(酌處)하게 하였다.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여러 번 이름이 국초에 나왔으나, 기미를 알고 도피하였으므로, 포청으로 하여금 염탐해서 체포하게 하였다.
추국을 우선 파하도록 명하였다.
2월 27일 계유
정언 신광식(申光軾)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홍낙임(洪樂任)은 죄가 하늘에 통하고 악(惡)이 산처럼 쌓여서 역적질을 모의한 소굴(巢窟)과 나라에 흉화(凶禍)를 끼친 근저가 되었는데, 그 복심(腹心)이 되고 조아(爪牙)가 된 자는 곧 전 헌납 송문로(宋文輅)와 유생 유기주(兪杞柱)가 바로 그들입니다. 송문로는 송영중(宋瑩中)의 조카로서, 을사년116) 과 병오년117) 의 여얼(餘孼)인데, 옛날의 허물을 씻어 개과 천선(改過遷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홍낙임과 친사돈의 관계를 맺고 더불어 상종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있으니, 온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오래 되었고, 몸이 향곡(鄕曲)에 머물러 있는 까닭에 다른 사람들에게 적발된 적이 없어서 지금까지 요행히 죄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작년 대상(大喪) 이후에 급히 서둘어 제택(第宅)을 경영하고는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 남문(南門)의 가까운 곳에 살 곳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저녁 무시로 성문(城門)을 출입하면서 난보(爛報)와 소장 등을 온갖 계책을 내어 구해 보았으며 상인(相人)·담명(談命)의 무리를 가는 곳마다 심방하고 있으니,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럽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말이 왁자하게 전파되자 그도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강가의 농막(農幕)으로 이주하였는데, 정상이 숙홀(倐忽)하고 수각(手脚)이 황란하니 식자(識者)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유기주는 재산을 탐내어 홍낙임의 데릴사위가 되기를 구하였는데, 고운 옷을 입고 기름진 말을 타게 되자 뽐내어 거들먹거리니,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개나 돼지처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의젓이 서울에 살면서 문호를 널리 개방하고, 무릇 홍낙임의 자질(子姪)과 친속에 관련되는 자로서 출몰하며 모여드는 자들을 그 집에서 용접(容接)하였으니 은연중에 역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허황된 말을 퍼뜨리면서 평인(平人)을 빙자하여 팔고, 본래 평생 알지 못하는 진신 대부(搢紳大夫)를 혹 많은 사람들이 빽빽이 모인 가운데에서 거짓으로 서로 친숙한 척하여 사학(邪學)에 물들일 계책을 삼았으니, 이를 들은 사람 가운데 몹시 분개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적의 위세를 의뢰하여 믿고 안연(晏燃)히 제멋대로 행하였으며, 날마다 송문로의 무리와 왕래하며 주무하고 사방의 소식(消息)을 번갈아 전해 주었습니다. 이에 나라 안의 말이 마치 물이 끓듯 하여 입이 있는 자는 모두 이를 전하고 있으니, 김종건(金鍾健)·이의용(李義用)에 견주어 자못 심한 바가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성덕(聖德)을 속여 무함하는 흉언과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는 음모가 이 무리들이 조성한 데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사학(邪學)이 치성하여 10일이 넘도록 국청에서 형신(刑訊)하고 있는데 많은 무리들이 중외(中外)에 가득히 널려 있고, 요악(妖惡)한 죄상(罪狀)이 법조(法曹)에 낭자하니, 백련교(白蓮敎)·황건적(黃巾賊)의 근심이 목전에 다가온 듯하여 등골이 서늘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송문로·유기주에게 우선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율을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신이 원통하고 울분함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 김기은(金箕殷)의 일에 대해 외면(外面)으로 언뜻 본다면 신진(新進)이 망령된 일을 한 데에 지나지 않는 듯하였으나,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월(日月) 같은 명찰로 그 올바르지 못한 데에 붙좇는 자취와 간사하고도 가증스러운 태도를 깊이 통촉하셨습니다. 그래서 6월에 정섭(靜攝)하시는 가운데 연충(淵衷)이 몹시 번뇌하시기에 이르러 거듭 엄절(嚴截)한 하교를 내리셨으나, 일찍이 얼마 안되어 붕어(崩御)하셨습니다. 적이 생각하건대, 당일에 받들었던 성교(聖敎)는 연본(筵本)에 기록된 것이 한림(翰林)·주서(注書)의 여러 신하들이 기록한 것보다 상세할 수는 없을 것인데, 몇 달이 지난 후에 갑자기 당후(堂后)118) 의 임시 관원에 의망(擬望)하였으니,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어찌 이토록 극도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옛 소굴을 돌아보며 사당(私黨)을 두둔하여 차마 선대왕의 밝은 유음(遺音)을 망각하였으니 이러한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할 수가 없겠습니까? 그래서 지난해에 헌신(憲臣)이 상소하여 비로소 김기은의 일을 거론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의 뜻보다는 조금이나마 강경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단지 제관을 차출(差出)했던 전조(銓曹)의 당상만을 논박하고, 의망(擬望)했던 실제 관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김기은에 대해서도 감률(勘律)하자는 청이 없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조의 당상은 이미 찬적의 벌을 받았으나, 실제 관원은 영도(榮塗)에 그대로 있으며, 김기은은 다른 사람의 논핵(論劾)을 받은 후에 이것을 문득 감률한 것과 같이 여겨 다시는 제기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어찌 매우 어긋난 형정(刑政)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김기은과 의망했던 해당 실제 관원은 아울러 변방에 내쫓는 법을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2월 28일 갑술
하교하기를,
"이번의 사옥(邪獄)은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는데,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아 크게 주토(誅討)를 행했으니, 이것은 바로 선대왕의 인기(人紀)를 바루고 정학(正學)을 밝히는 유의(遺意)를 계술(繼述)하는 것이다. 이에 자교(慈敎)를 받들어 장차 효원전(孝元殿)에 고하려 하니, 명일의 주다례(晝茶禮)는 마땅히 친히 행하겠다."
하였다.
2월 29일 을해
효원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행하였다.
2월 30일 병자
서미수(徐美修)를 이조 참의로, 이상황(李相璜)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고, 박치륭(朴致隆)에게 사헌부 대사헌을, 박재원(朴在源)에게 이조 참판을, 심의지(沈儀之)에게 사헌부 집의를 추증(追贈)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정언 신광식(申光軾)의 상소에 대해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송문로(宋文輅)·유기주(兪杞柱)는 아울러 대간(臺諫)이 상소하여 청한 것에 의거함이 진실로 공의(公議)에 합당합니다. 김기은(金箕殷)은 선정신(先正臣)의 후예로서 비류(匪類)가 권유하는 것에 대해 들어주기를 달갑게 여겨 신축년119) ·임인년120) 의 의리를 빙자하여 을사년121) ·병오년122) 의 난적(亂賊)들을 숨겨 주려고 하였습니다. 김기은이 연소한데다가 배우지 못하여 옛 교훈에 어두운 까닭에 오로지 속론(俗論)만 믿었으니, 그 실정을 추구해 보면 오히려 불쌍합니다. 해당되는 실제 관원은 일찍이 성은(聖恩)을 입고 강경(講經)을 통해 등제(登第)하여 붓을 잡고 경연석(經筵席)에 올랐으니, 진실로 넉넉하고 고상한 문예(文藝)가 있었습니다마는, 독서가 정미(精微)하지 못하였고 처신함이 분명하지 못하여 혹 의리의 원두(源頭)에 막(膜)이 가로 막혀 있는 듯하고, 혹은 음양(陰陽)의 한계와 구분에 대해 결단하여 행하는 것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 갈수록 학식(學識)은 진취하는 법이고 부지런히 배우면 이치에 밝아지는 법이니 이는 밝은 시대를 위해 소용이 되는 신하입니다. 어찌 한 가지 허물을 가지고 그 전체의 재주를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은 양성할 만한 치양(稚陽)123) 과 같고 한창 자라는 가목(佳木)과 같으니, 상설(霜雪)로써 꺾어버리고 부근(斧斤)124) 으로써 손상시키는 것은 성인이 만물을 생성(生成)시키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김기은과 해당되는 실제 관원 홍석주(洪奭周)는 우선 그 관직을 삭탈하고, 인하여 문을 닫고 독서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치를 탐구하게 함으로써 잘못을 각성하여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를 기다림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만약 김기은이 부끄러워하고 마음 아파하며 개과 천선해서 선대왕께서 천지를 아울러 양육하는 교화를 받들지 않을 경우에는 갑절의 율(律)을 시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화성(華城) 유여택(維與宅)의 어진(御眞) 표제(標題)를,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의 춘추 40세 때 어진(御眞)으로 즉위한 지 15년 되는 신해년 가을에 그렸다.[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春秋四十歲 眞 卽阼十五年辛亥秋 圖寫]’는 28자의 표제를 받들었다. 【서사관(書寫官)은 화성 유수(華城留守) 이만수(李晩秀)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47책 37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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