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2권 순조1년 1801년 3월

싸라리리 2025. 6. 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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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정축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이승훈(李承薰)은 이미 복법(伏法)시킨 후이지만, 사서(邪書)를 가지고 왔었을 때의 세 사신과 수역(首譯) 및 의주 부윤(義州府尹)도 죄가 없을 수는 없다. 이 뜻을 대신들에게 전하고 현고(現告)를 받아 초기(草記)에 논열(論列)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광익(李光益)을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으로 삼았다.

 

송문로(宋文輅)를 흥양현(興陽縣) 녹도(鹿島)에, 유기주(兪杞柱)를 진도군(珍島郡) 금갑도(金甲島)에 정배(定配)하였다.

 

3월 2일 무인

권강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년은 현황제(顯皇帝)125)  께서 붕어(崩御)하신 지 회갑(回甲)이 되는 해이다. 이 제독(李提督)126)  의 사우(祠宇)인 선무사(宣武祠)에 장신(將臣)을 보내어 유제(侑祭)하도록 하라. 그리고 제독의 봉사손(奉祀孫) 이효승(李孝承)에게 부총관(副摠管)을 제수하고, 충무공(忠武公)의 봉사손도 또한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고, 기성(箕城)127)  의 무열사(武烈祠)의 석 상서(石尙書) 등 여러 사람들을 제사하는 곳에 일체로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3월 3일 기묘

권강하였다.

 

효원전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승훈이 그 아비를 따라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사서(邪書)를 구입(購入)해 왔었을 때에 정사와 부사가 모두 금단(禁斷)하지 아니하여 행낭(行囊)에 넣어 가지고 올 수 있었습니다. 만윤(彎尹)128)  은 변금(邊禁)을 엄중하게 하지 아니하여 사서를 몰래 가지고 우리 나라의 지경 안에 들어오게 하였으니, 소홀히 여겨 각찰(覺察)하지 않은 것입니다. 서장관(書狀官)은 행대(行臺)로서 연경에 들어갔기 때문에 일행의 상하 가운데 불법한 일이 있을 경우 규찰하여 바로잡고 논죄하여 감단(勘斷)하는 것이 바로 그 직임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아들로 하여금 이류(異類)와 교통하여 사서를 구입해 가지고 돌아오게 하였으니, 그 죄상을 논하면 다른 사람의 10배가 되는 것입니다. 정사 황인점(黃仁點)은 진실로 살피지 않은 과실이 있으나, 이는 숭품(崇品)의 의빈(儀賓)에 관계되므로 곧바로 논죄하여 감단한다면 조정의 체모를 손상시킬 듯합니다. 부사 이형원(李亨元)과 의주 부윤 유의양(柳義養) 및 그 당시의 수역 홍택헌(洪宅憲)은 진실로 논죄(論罪)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모두 이미 죽었으니, 논죄할 만한 명목(名目)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동욱(李東郁)은 추삭(追削)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묘당(廟堂)의 초기(草記)에, ‘격례(格例)에 구애받아 논단(論斷)할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 당시 사신으로서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창성위(昌盛尉) 황인점(黃仁點)을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경진

권강하였다.

 

3월 5일 신사

권강하였다.

 

3월 6일 임오

권강하였다.

 

동지 회환사(冬至回還使) 이득신(李得臣)·임시철(林蓍喆)을 성정각(誠正閣)에서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피중(彼中)에서 무슨 소문이 있었는가?"
하였는데, 이득신이 말하기를,
"듣건대, 병란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 백련교(白蓮敎)의 교도(敎徒)와 교지(交趾)의 묘만(苗蠻)이 합세하여 도적이 되어 귀화관(歸化關)을 점령하여 웅거하고 있으므로, 관동(關東)의 군사 3천여 인이 이를 공토(攻討)하였으나, 패배를 당해 겨우 2백여 인만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길에서 관동 사람들을 만났는데 상복(喪服)을 입은 자가 많으므로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출전하였다가 패몰(敗沒)한 사람들의 자제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임시철이 말하기를,
"황제의 심양(瀋陽) 거둥도 또한 이 때문에 정지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수역(首譯) 조명회(趙明會)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별단(別單)을 올리기를,
"교비(敎匪)에 대한 수역(戍役)으로 아직도 군사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5천 명의 군사를 조발(調發)했는데, 창(槍)을 맞아 상처를 입은 자와 그 지방의 물과 풍토(風土)가 맞지 않아서 병들어 죽은 자가 3천여 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또 길림 선창(吉林船廠)과 관동(關東)의 군사 각각 1천 명과 색륜 달자(索倫㺚子)의 군사 2천 명을 조발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비(敎匪)는 본래 중국인이 아니라 죄를 짓고 도망하여 망명한 자들이 모두 모여들어 당류(黨類)가 되었는데, 묘비(苗匪)의 반란이 사천성(四川省) 성도군(成都郡)에서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묘만(苗蠻)과 합세하여 사천성·섬초성(陜楚省)·호북성(湖北省) 등지에서 난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7, 8장 되는 고죽(苦竹)의 끝을 날카롭게 깎아서 사람을 찌른다고 하며, 그들이 타는 말을 천마(川馬)라고 하는데, 체구는 작지만 민첩해서 가파른 비탈을 오르내리고 험한 길을 마치 평지를 걷듯이 달린다고 합니다. 사는 곳은 몹시 험준한 곳으로 산은 높고 길은 좁아서 말을 타고 줄을 지어 늘어설 수가 없는데, 관병(官兵)과 서로 만나면, 5색의 기치(旗幟)를 세우고 산 위에 줄을 지어 늘어서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인마(人馬)는 산길에서 달리는 데 익숙하지 못하지만, 적병은 산 위를 마치 새가 날 듯이 말을 몰아 달리다가 쥐처럼 숨습니다. 승리를 얻을 경우에는 물러가서 숨고 이롭지 못하면 산골짜기에 흩어져 들어가니, 관병(官兵)이 뒤쫓아 산중(山中)에 이르러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으므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48만 명의 군사로써 산골짜기의 출입하는 72군데에 나누어 둔치고 있으며 또 인접한 주현(州縣)의 48성에서도 모두 엄중하게 경계하여 수어(守禦)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도(賊徒)는 때때로 몰래 나와서 촌락을 노략질하면서 노인과 여인들을 죄다 죽이고 단지 장정만 남겨 두되, 위협해서 그들을 따르면 데리고 가고 따르지 않으면 또한 죽이기 때문에 그 당류가 무성하게 번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관병들이 승리하여 노략질을 또한 많이 하자 남아 있는 교비(敎匪)의 수가 만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호군(護軍) 홍의영(洪義榮)이 상소하여 의모(義謨)라고 개명(改名)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홍국영(洪國榮)과 족성(族姓)을 구별하려는 까닭이었는데, 윤허하였다.

 

추국하였으니, 사학 죄인을 국문한 것이었다.

 

3월 7일 계미

조강·주강·석강의 세 차례 강을 행하였다.

 

조득영(趙得永)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대사간 이상황(李相璜)이 상소하여 홍낙임(洪樂任)이 부범(負犯)한 단서들을 논열(論列)하고, 우러러 자전(慈殿)에게 계품하여 대간(臺諫)의 청을 흔쾌히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이어서 면계(勉戒)하는 말을 진달하기를,
"전하께서 우리 선왕을 계술(繼述)하는 것은 오로지 선왕의 규모를 준수하시는 것인데, 준수하시는 방도는 또한 학문을 부지런히 익히고 현사(賢士)를 가까이 하며 환첩(宦妾)을 멀리하고 수령을 잘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좋다."
하였다.

 

상주(尙州)의 유학(儒學) 성병렬(成丙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조부(祖父) 지중추부사 신 성이연(成爾演)은 무신년129)  에 이미 나이 96세가 되어 깊이 병든 가운데에 있었는데, 조덕린(趙德隣)이 복관(復官)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마음속에 우분(憂憤)이 가득 차서 살고 싶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는 반드시 가마를 타고 조정에 달려가서 통렬하게 분변(分辨)해서 극론(極論)하고자 하였으나, 기동할 도리가 없어서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자나 깨나 가슴에 맺혀 죽기에 이르도록 더욱 간절하였는데, 마침내 기유년130)   3월에 한 소장을 구두(口頭)로 불러 조덕린이 저지른 역절(逆節)의 개략을 말하고, 인하여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곧 죽게 되었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몸소 선사(繕寫)하여 우리 임금께 이를 바침으로써 장차 죽어가는 노신(老臣)의 말이 상달(上達)되도록 할 것이며, 이 소장이 등철(登徹)되기 전에는 나의 유해(遺骸)를 엄토(掩土)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틀 후에 신의 조부는 죽었습니다. 신은 유계(遺戒)를 좇아 염습(殮襲)한 후에 곧 신의 조카 성재원(成在元)과 상복(喪服)을 입고 소장을 가지고 궐하(闕下)에 가서 부복(俯伏)하였지만, 그 당시 채제공(蔡濟恭)이 권병(權柄)을 제멋대로 천단(擅斷)하고 있었으므로, 후원(喉院)의 여러 신하들이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봉납(捧納)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언간 1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밝은 해가 중천(中天)에 빛나는 날을 당하여 조덕린이 영묘(英廟)를 무멸한 죄와 채제공이 난역(亂逆)을 부호(扶護)한 죄가 대간(臺諫)의 계사(啓辭)에서 이미 드러났으니, 선조(先朝) 때 등철(登徹)되지 못했던 신의 조부의 유소(遺疏)를 또한 우러러 전하께 등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유소에 이르기를, ‘조덕린은 역적이 되어 무신년131)  의 흉도(凶徒)와 똑같은 심장을 가진 자인데, 선조의 처분이 해와 달처럼 밝았으니, 다시 천지 사이에 용납됨은 마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는 선조의 악역이었는데도 곧 관대하게 용서받았으니, 돌아보건대, 이 노물(老物)이 선조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찌 궐문을 두드려 소장을 올림으로써 흉역(凶逆)의 죄상을 밝히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 나이 이제 97세가 되었으므로 길을 떠나 상경(上京)할 도리가 없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서 지하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선대왕을 다시 알현(謁見)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조덕린의 역절(逆節)을 길 가는 사람들이 알 뿐만이 아니라, 고 승지 나학천(羅學川)의 절교하는 글에 모두 소상히 말하였습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인신(人臣)으로서 그 임금에게 진언(進言)할 경우 일찍이 형제 간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별건(別件)의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 갑자기 차마 말하지 못할 자리에 미치게 되었는가? 그리고 끝에 가서 은연중에 공자(孔子)가 말한 명분을 바로잡는다[正名]는 것을 가지고 백 년 이전이나 천 년 이후에도 반드시 정명(正明)으로 실상을 책구(責求)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은 것은 무슨 말인가? 위(衛)나라 출공(出公) 첩(輒)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항거한 자였으니, 공자의 명분을 바로잡는다는 훈계는 대개 이 때문이었다. 그전에 네가 바로잡고자 하는 것은 무슨 명분이며, 책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실상이라는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충역(忠逆)을 구분하고 사정(邪正)을 분변하는 것은 붕당(朋黨)을 가지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학천은 바로 역적 조덕린이 평생 동안 사귀던 친우인데, 그 흉소(凶疏)를 보고는 오히려 이렇게 절교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조덕린의 단안(斷案)을 공증(公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본래 지식이 없고 언책(言責)을 띤 임무도 없습니다마는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사람들이 모두 주벌(誅罰)할 수 있는 것이니, 신이 비록 백 세의 죽어가는 날을 당했더라도 어떻게 끝내 함묵(含默)함으로써 우리 전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의 삼종형(三從兄) 고 현감 성이홍(成爾鴻)은 일찍이 무신년 4월 10일 이전에 창의(倡義)하여 역적을 공토(攻討)하려고 하였으나, 거창(居昌) 등의 세 고을 의병(義兵)들이 이미 역적들을 죄다 섬멸했다는 소식을 듣게 됨에 따라 창의의 논의는 중지됨을 면하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 이름이 영좌(嶺左)의 《창의록(倡義錄)》에 들어있어 회갑(回甲)이 된 해에 처음 발견되었다는 것은 단지 조덕린을 신설(伸雪)하기 위한 계책일 따름이니, 통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였으니, 신의 조부의 고심(苦心)과 혈침(血忱)은 죽음에 임해서도 변함이 없어서 맹세코 이 역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전하께서 한 번 예람(睿覽)하시고 특별히 처분을 내리신다면, 신의 조부는 감지 못한 눈을 지하에서 감을 수 있을 것이고, 얕은 땅에 뭍힌 신의 조부 유해는 구원(九原)에서 편안히 쉴 수 있게 될 것이며, 신이 13년 동안 실추되어 이루지 못했던 사정(私情)도 또한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본 일은 알았다."
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8일 갑신

권강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9일 을유

소대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10일 병술

차대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사학(邪學)의 무리를 이루 다 주벌(誅罰)할 수가 없으니, 진실로 혹 조금이나마 관대히 용서할 단서가 있다면 어찌 한결같이 대벽(大辟)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애매함을 알았으면 너그럽게 용서하는 도리가 있어야 합당합니다."
하자,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죄인 이기양(李基讓)은 인친(姻親)과 척당(戚黨) 가운데 사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에 결단을 내려 극력 성토(聲討)하지 못한 까닭에 여러 번 반힐(盤詰)하며 잇따라 형신(刑訊)을 가하였지만, 아직 적발된 진장이 없었고, ‘사서(邪書)의 면목(面目)은 애초에 보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그 아들 이총억(李寵億)도 추조(秋曹)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그의 집에서 쫓겨났다.’ 하였으니, 이기양의 초사와 한결같이 서로 어긋난 부분이 없습니다. 또 말을 듣고 면모를 헤아려 보는 과정에서 저절로 드러난 진정(眞情)이 없지 않은데 이제 만약 한결같이 형신(刑訊)을 가한다면 반드시 경폐(徑斃)132)  되고야 말 것이니, 이는 흠휼(欽恤)하는 도리에 있어서 성덕(聖德)에 허물이 될 듯하므로, 신 등은 이것이 두려워서 감히 진달(陳達)하는 바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경들이 아뢴 바가 과연 옳다."
하였다. 또 자교(慈敎)를 받들어 이기양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도록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이기양은 사학에 물들었다고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오래 되었는데, 갑자기 완전히 석방하는 데로 돌아간다면 무릇 사당(邪黨)의 무리가 모두 요행의 계책을 품게 될 것이니, 정배(定配)의 율을 시행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죄인 오석충(吳錫忠)은 그 집안이 사학에 물들었다는 실상을 또한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흉얼(凶孼)과 교통한 데에 이르러서는 이가환(李家煥)의 증초(證招)가 있었는데도 오로지 체결(締結)한 실상과 주무(綢繆)한 계모(計謀)를 끝내 죄다 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지극히 패악(悖惡)한 자입니다. 그러나 중형(重刑)을 베푼 후에 경폐(徑斃)될 것이 염려스러우니, 도배(島配)를 논하는 것이 실형(失刑)하는 데 이르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래서 신 등이 서로 상의(商議)한 후에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지금 국세(國勢)가 고단하고 위태로우며 인심이 함닉(陷溺)된 때를 당하여 일찍이 조상(朝象)을 안정시키고 세도(世道)를 진정시키고자 하였으니, 마음속으로 항상 두려워하였었다. 또 전고(前古)에 없던 일을 당하여 정학(正學)을 밝혀서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가 없었고, 또 이른바 교주(敎主)를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만약 법이 있다면,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이병모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같은 무리끼리 서로 왕래하여 상종하며 문득 소굴을 이루었는데 자취가 섬홀(閃忽)하여 숨어 있으면 수색해서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미 드러난 단서가 없는데도 집안에 들어가 사람을 수색하게 되면 도리어 백성들을 소란하게 할 듯하니, 이 때문에 수색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한 달이 넘도록 옥사(獄事)를 다스리고 있으면서 죄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데, 오랜 세월을 끌어가며 발포(發捕)하게 하면 민간이 소요(騷擾)스럽다고 하니, 이것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겠는가?"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대저 흉역(凶逆)의 소굴은 두 죄인이 바로 그들인데, 아직도 처분을 내리지 않았으므로, 요사(妖邪)한 무리가 서로 의탁하여 점차 포도수(逋逃藪)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데도 내버려 둔다면, 국세(國勢)는 위태롭고 두려운 지경에 이르게 될 염려가 있고, 백성들의 뜻은 안정될 기약이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가지고 빨리 처분을 내리셔서 역적의 와굴을 흔쾌히 소탕하게 하소서."
하고, 이병모가 말하기를,
"역괴(逆魁)는 그대로 있고 왕장(王章)은 시행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렇게 사학의 무리가 화응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셔서 화란(禍亂)의 근본을 뿌리 뽑도록 하소서."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본말(本末)이 있는 것입니다.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일은 더욱 중대한 데에 관계되는 것인데,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은 까닭에 온갖 요괴(妖怪)가 겹쳐 발생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학을 물리치는 날을 당하여 요사하고 흉악함의 근본이 되는 우두머리는 더욱 주벌(誅罰)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근래에 작처(酌處)한 처분은 오로지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의(德意)에서 나왔는데, 이 일에 이르러서는 만약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여러 신하들이 어찌 이와 같이 진주(陳奏)하겠습니까?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으면 국세(國勢)가 점차 위태로워져서 그 근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판의금 서정수(徐鼎修)는 말하기를,
"이 옥사에 있어서 주무하고 체결(締結)한 것은 단서가 있는 듯한데, 마침내 끝까지 사핵(査覈)하여 실정을 알아내지 못한 것은 진실로 근본이 되는 와주가 아직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약 역적의 와굴을 타파하고 간사한 조짐을 두절시킨다면, 예컨대, 근원이 없는 시냇물과 같고,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후에 하늘에 사무칠 듯한 화란(禍亂)이 어떠한 지경에 이르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하고, 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신은 평소 사학의 이면(裏面)에 대해 알지 못했었는데, 이제 안핵(按覈)하고 추국(推鞫)하는 책임을 맡고, 그 정절(情節)을 자세히 깨닫고 보니, 사대부(士大夫)의 부녀들도 속여 미혹하는 데 많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정적(情跡)과 단서는 무슨 양식에 속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 내용도 알 수가 없는데, 저뢰(抵賴)하여 불복하는 것은 반드시 흉악한 우두머리와 요사한 근인(根因)이 있어서 선동하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지엽(枝葉)을 구핵(究覈)하는 것이 어찌 그 근본을 통렬하게 다스리는 것만 하겠습니까? 한결같이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아뢴 바에 의거하여 밝은 결단을 널리 발휘하실 것을 천만 번 삼가 바랍니다."
하였으며, 수원 유수 이만수(李晩秀)는 말하기를,
"흉역의 와굴을 만약 소탕하지 않는다면, 윤리와 기강은 장차 폐절되고 의리는 거의 없어지는 데 이를 것입니다. 지금 이 사학은 진실로 그 근원을 구명해 보면 와굴로부터 말미암아 나온 것이니, 지금 와굴을 흔쾌하게 소탕해서 이륜(彛倫)을 밝힌다면 간사한 무리와 요사스러운 당류는 제거하기를 기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한용귀(韓用龜)는 말하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아뢴 바는 곧 온 나라에서 모두 분개해 하고 있는 것이니, 그 근본을 다스리지 않은 채 그 말단을 다스린다는 것을 신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통렬히 서치(鋤治)를 가하되, 풀을 베면서 뿌리까지 제거하듯이 함으로써 만세(萬世)의 태평한 시대를 여는 기본을 삼으소서."
하였으며, 이조 판서 윤행임(尹行恁)은 말하기를,
"지금 이 흉역의 와굴은 곧 천지간에 용납할 수 없으며 신인(神人)이 함께 분개하고 있는데, 아직도 왕장(王章)에서 벗어나서 의젓이 목숨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요사한 무리가 어지럽게 일어나 천만 갈래로 화응하면서 의지하여 붙따르니, 진실로 어떤 모양의 변란이 어떤 곳에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셔서 흔쾌하게 천토(天討)를 행하소서."
하고, 도승지 남공철(南公轍)은 말하기를,
"역괴(逆魁)의 죄가 위로 하늘에 통하였는데, 그것을 통렬하게 다스림에 있어서 어떻게 사옥(邪獄)을 기다리겠습니까? 이미 일찍 서치(鋤治)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간사한 무리가 교통하게 되었는데, 단지 그 지엽(枝葉)만 다스리고 와주를 추문하지 않으니, 인심이 불복하고 형정(刑政)은 마땅함을 잃게 된 것입니다. 한결같이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아뢴 것에 의거하여 빨리 윤종(允從)을 내리소서."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소리를 합하여 함께 아뢰었는데, 이는 진실로 온 나라에서 똑같이 느끼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니 그르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왕조(先王朝)에서 30년 가까이 고심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보호하셨는데, 내가 비록 지식이 없을망정 어찌 징토하는 의리를 알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선왕조에서 뜻을 기울여 용서해 덮어준 일을 또한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행하게도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국사(國事)를 생각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근심되는 것은 혹시라도 나라를 그르칠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인데, 근본을 다스리는 것과 지엽을 다스리는 것을 물론하고 크고 작은 모든 일들에 대해 오로지 경들을 믿을 뿐이다. 내가 이러한 시기에 경들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겠는가? 주상이 어린 나이에 모든 일을 어떻게 죄다 통촉할 수 있겠는가? 경들은 모쪼록 협력하여 서로 도와가며 국사를 편안하게 구제함으로써 주상의 춘추가 정성(鼎盛)해질 때를 기다릴 것이며, 사책(史冊)에 기록하여 후세에 이를 보임으로써 나라를 그르친 허물을 면할 수 있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경들에게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자세하게 뜻을 피력하신 자교(慈敎)는 지극한 정성으로 죄인들을 몹시 가엾게 여기고 계시지만, 단지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의 시기는 전과 다르니 선조에서 덮어주며 비호하시던 정사를 오늘날에 시행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선대왕께서는 온갖 사리에 밝고 경법(經法)과 권도(權道)가 중도(中道)를 얻어 태산(泰山)·반석(磐石) 같이 안정된 국세(國勢)를 이룩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신 등은 오로지 명(命)을 받들면서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신 등이 복록(福祿)도 없이 갑자기 이러한 시기를 당했겠습니까? 자전(慈殿)께서 수렴 청정하시고 전하께서 어린 나이에 등극하시어 국세가 다시 안정되고 의리가 더욱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형세를 논해 보면 어찌 전의 시기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자성 전하(慈聖殿下)께서는 특별히 선조의 유의(遺意)를 본받아 아직껏 죄인들을 포용하고 계신데, 국세는 점차 위태해지고 적세(賊勢)는 점차 치열해지는 데에야 어찌하겠습니까? 하루가 지나 이틀이 되고 1년이 지나 2년이 되어 점차 어그러지는 데에 이르고 있어서 염려스러움이 한정 없으니, 이는 오로지 두 죄인이 아직도 왕장(王章)에서 벗어난 때문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건단(乾斷)을 널리 발휘하셔서 엄중히 주토(誅討)하게 하소서."
하고, 이병모는 말하기를,
"자교(慈敎)가 지극한 정성으로 죄인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뜻에서 나왔음을 신 등이 어찌 감히 모르겠습니까마는, 단지 생각하건대, 성인(聖人)의 도리는 스스로 때에 따라 조치하는 바가 있어야 하므로, 수십 년 후에 처분한 일이 수십 년 전에 처분한 일과 혹 같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한 성인의 일인데도 전후에 처분이 다른 것은 진실로 사세(事勢)가 제각기 같지 않은 까닭입니다. 선대왕께서 비록 일찍이 온전한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여 비호하셨다 하나, 만약 이러한 시기를 당하였다면 반드시 처분을 합당하게 하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러한 의리를 깊이 살피셔서 반드시 마땅함을 얻을 도리를 생각하소서."
하였으며, 이시수는 말하기를,
"‘때에 따라 조처한다.[時措]’는 두 글자는 고금의 통의(通義)입니다. 사의(事宜)는 어렵고 쉬운 구분이 있고 국세(國勢)는 안정되고 위태함의 다름이 있는 것이니, 삼가 원하건대, 때에 따라 조처를 마땅하게 해야 한다는 데 대해 깊이 생각하심으로써 점점 위태해지는 국세를 안정시키고 어려운 일을 쉬운 일로 돌이키는 방도를 삼으소서. 지금 이 흉역의 와굴을 하루 동안 보존하면 하루의 근심이 있을 것이고, 이틀 동안 용서하면 이틀의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역당(逆黨)과 사류(邪類)를 물론하고 그 단서를 구핵하면 모두 흉화로 돌아갈 것이니, 이러한데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떤 모양의 변란이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때에 따라 조처한다.[時措]’는 두 글자의 마땅함을 깊이 체득(體得)하여 흔쾌히 처분을 내리소서."
하고, 서용보는 말하기를,
"이와 같은 흉역의 와굴을 만약 지금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그 형세는 장차 나라에 화란을 끼치는 데 이르고 말 것입니다. 성인도 이르기를, ‘사람을 살리기 위한 도리로서 악인을 죽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군정(群情)을 굽어 좇아 빨리 화란의 근본을 다스리소서."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부수찬 이상겸(李象謙)이 상소하여 책자를 집성(輯成)해서 영구히 변하지 않을 금석(金石)의 글을 만들 것을 청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의 성덕(盛德)과 홍공(洪功)은 진실로 이륜(彝倫)을 바로잡고 의리를 밝히는 데 있었습니다. 대리 청정(代理聽政)하셨을 때에 영묘(英廟)께 올린 소장과, 즉위하신 초기에 내린 전교(傳敎)와, 임자년133)  ·갑인년134)  에 이르러 재전(齋殿)135)  에서 내린 윤음(綸音)과, 지난해 경신년136)   5월 그믐과 6월 10일에 이르러 재삼 연석(筵席)에서 내린 하교는 이전 삼모(二典三謨)137)  와 더불어 천하에 교훈을 줄 수 있는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자성 전하께서는 수렴 청정하신 이후 언문(諺文)의 사륜(絲綸)을 반포하셨는데, 수천 자의 말씀이 모두 선왕께서 지키시던 것을 밝히고 선왕의 뜻과 사업을 천명(闡明)한 것이었습니다. 한 편의 책자를 모아 만들어 일대의 이목(耳目)에 밝게 반포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윤행임이 말하기를,
"고 유생 임창(任敞)은 숙종조(肅宗朝) 신사년138)  의 화변(禍變)을 당하여 성모(聖母)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역적을 성토하는 척소(尺疏)를 손수 받들어 대궐문을 두드림으로써 일세에 풍성(風聲)을 수립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또한 천추(千秋)에 할 말이 있는 것인데, 신축년139)  에 이르러 흉도에게 무함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영조조 초원(初元)에 헌신(憲臣) 이의천(李倚天)의 말로 인하여 특별히 대간(臺諫)의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또 치제(致祭)하게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선고(先考)께서 말씀하시기를, 「아주 강개(慷慨)한 선비이다.」 하셨다.’라고 하니 이에서 우리 양조(兩朝)에서 포장하신 성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 정미년140)  에 진퇴(進退)하였을 때를 당하여 도로 죄안(罪案)에 두었으므로 선비들이 지금까지 이를 슬프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진달(陳達)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에 의거하여 증직(贈職)하도록 하라."
하였다. 한용귀가 말하기를,
"《선원보략(璿源譜略)》의 개정해야 할 부분에 대해 하교에 의거하여 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와 근거가 될 만한 문적(文蹟)을 상고해 보았으나, 별로 틀린 부분이 없었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신중하게 수개(修改)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건릉(健陵)에 나무를 심는 역사를 마치니,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이기양(李基讓)을 단천부(端川府)에, 오석충(吳錫忠)을 영광군(靈光郡) 임자도(荏子島)에 정배(定配)하였다.

 

3월 11일 정해

소대(召對)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장령 홍광일(洪光一)이 아뢰기를,
"아! 저 김백순(金伯淳)은 그와 같은 처지로 사교(邪敎)에 투입(投入)하여 점차 물들어 빠져든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 구핵(究覈)하는 날에 이르러서는 이리 저리 꾸며대고 스스로 성대하게 과장하여 자랑하며 온갖 요사스럽고도 간사한 태도를 얼굴에 드러내었습니다. 마지막에 가서는 윤기(倫紀)를 손상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멸(敗滅)시키는 말을 방자하게 발설하여 스스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경에 들어가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이는 지난날의 사첩(史牒)에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죄악을 구명해 보면, 이승훈(李承薰)·정약종(丁若鍾)의 무리와 함께 대벽(大辟)으로 처치함이 마땅하나, 갑자기 추조(秋曹)에 내렸으니 경폐될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의 죄인 김백순은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히 신문하여 자복을 받아 흔쾌하게 전형(典刑)을 바로잡게 하소서. 죄인 황사영(黃嗣永)은 아직도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당초에 금오랑(金吾郞)으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염탐해서 체포하게 한 것이 얼마나 엄중한 일입니까? 그런데 도사(都事)가 장단(長湍)을 지날 때에 해당 부사는 마패(馬牌)가 없다 하여 공궤(供饋)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굶주려 고생하는 즈음에 끼니를 이을 대책이 없어서 다른 곳에 가서 헤매었는데, 이는 구축(驅逐)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니, 이를 들은 사람들이 해연(駭然)하게 여겼습니다.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청컨대, 장단 부사 구종(具綜)을 나문(拿問)하여 엄중한 처분을 내리소서. 지난날 대계(臺啓) 가운데 있던 이조원(李祖源)·심기태(沈基泰)에 대한 일은 대신이 연석(筵席)에서 주달(奏達)한 것으로 인하여 비록 작처(酌處)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당초에 흉소(凶疏)를 주장했던 자는 본래 그 사람이 있을 것이니, 어제의 죄를 추후에 바로잡는 날에 그 사람이 죽었다 하여 결단코 내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고 판서 정창순(鄭昌順)에게 관작을 추탈하는 율을 빨리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김백순과 정창순에 대한 일은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구종의 일은 아뢴 바에 의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오정원(吳鼎源)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정언 이의채(李毅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이벽(李檗)이라는 자는 사당(邪黨)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괴(巨魁)가 되는 자로서 여러 역적들의 초사(招辭)에서 남김없이 낭자하게 드러났는데, 먼저 귀신의 주벌(誅罰)이 가해진 까닭에 비록 이가환(李家煥)과 같은 율에서 벗어났으나, 그 형 이격(李格)은 사괴(邪魁)의 동기(同氣)로서 아직도 숙위(宿衛)하는 반열에 있으므로, 주려(周盧)141)  의 군사 가운데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엄숙한 대궐에 이처럼 추악한 무리가 뒤섞여 있으니, 국가의 기강(紀綱)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몹시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사괴(邪魁) 이벽의 형 이격에게 먼저 방축(放逐)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작년에 호서(湖西)에서 사당(邪黨) 방백동(方百同)을 잡아들이고 그 비감(秘龕) 가운데 기록된 바를 수색해 보니 제일 먼저 이가환이 기록되어 있고 다음에 이일운(李日運)이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의 말이 낭자하게 전파되었다고 합니다. 또 홍주(洪州)는 사학(邪學)에 가장 심하게 물든 지역이니, 이때에 주목(州牧)에 임용한다면 더욱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홍주 목사 이일운을 붙잡아다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격·이일운에 대한 일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경기 감사 이익운(李益運)이 도내의 사학 죄인(邪學罪人)으로 여주(驪州)에서 11인, 양근(楊根)에서 7인을 취초(取招)하고 사문(査問)한 후에 율(律)에 의거하여 감단(勘斷)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이에 이중배(李中培)·임희영(任喜永)·유한숙(兪汗淑)은 신주(神主)를 세우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여 사람의 윤리를 폐절(廢絶)하고 형륙(刑戮)도 마음속으로 달갑게 여긴 것으로 결안(結案)을 받아 부대시참(不待時斬)하도록 명하였다. 원경도(元景道)·정종호(鄭宗浩)·최창주(崔昌周)·윤유오(尹有五)는 윤리를 멸절(滅絶)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敗沒)시켜 인심을 현혹시켰으므로 일률(一律)에 관계되지만, 모두 의정부로 하여금 상세하게 복심(覆審)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조운형(趙運亨)·장지의(張志義)는 형신에 임하여 장찬(粧撰)하였으나 준거하여 믿을 수 없으니, 아울러 도신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형신하여 취초(取招)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원경신(元景信)·정종순(鄭宗淳)·정종하(鄭宗河)·정원상(鄭元相)·정형상(鄭亨相)·이무(李茂)·조해(趙海)·장지인(張志仁)·김원숭(金源崇)은 모두 본읍(本邑)에 가두어 다시 구핵(究覈)한 후에 감처(勘處)하도록 명하였다.

 

3월 12일 무자

소대하였다.

 

증광 문과 초시(增廣文科初試)와 증광 무과 초시(增廣武科初試)를 설행하였다.

 

3월 13일 기축

권강하였다.

 

정언 유현장(兪鉉章)이 아뢰기를,
"아! 임자년142)  에 남학(南學)에서 올린 소장은 또한 흉참(凶慘)하였습니다. 역적 조재한(趙載翰)의 여당(餘黨)과 체결하고 역적 이덕사(李德師)의 흉론(凶論)을 전습(傳襲)하여 이에 이우(李瑀)가 천양(闡揚)을 가탁하여 몰래 흉계를 이루고자 하였을 때에는 틈탈 만한 기회라고 여겨 불령한 무리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박하원(朴夏源)은 흉소(凶疏)를 올려 감히 방자하게 군부(君父)를 협지(脅持)할 계책을 품었고, 이조원(李祖源)은 터무니없는 괴론(怪論)을 주장하여 음모를 주무하였으니, 평생의 기량은 반드시 의리를 무너뜨려 어지럽히려는 것이었고 밤낮으로 경영한 것은 선류(善類)를 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심기태(沈基泰)에 이르러서는 더욱 흉악하고 모질어서 동서에 섬홀(閃忽)하며 소두(疏頭)를 얻으려고 밤낮으로 출몰하였는데, 초본(草本)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자 흉역의 와굴과 합세하여 공모하고 괴류(怪類)와 마음을 연접(連接)하여 협력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비등(沸騰)한 지 또한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 대료(大僚)가 품처(稟處)한 것은 마침내 가벼운 데에 관계되니, 청컨대 방축(放逐)한 죄인 이조원·심기태에게 아울러 도배(島配)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조원·심기태에 대한 일은 이미 대신이 품처한 바가 있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함경도 암행 어사 민기현(閔耆顯)이 서계(書啓)하여 길주 목사(吉州牧使) 이징만(李澄萬)·안변 부사(安邊府使) 유범휴(柳範休)·문천 군수(文川郡守) 김양척(金良倜)·명천 부사(明川府使) 김헌주(金憲柱)·경흥 부사(慶興府使) 정신달(鄭信達)·북청 부사(北靑府使) 김사석(金思䄷)·덕원 부사(德原府使) 신협(申協)·회령 부사(會寧府使) 정충달(鄭忠達)이 잘 다스리지 못한 실상을 논박하니, 경중(輕重)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게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별군직(別軍職) 이격(李格)은 사괴(邪魁)의 동기(同氣)인데도 진실로 허물을 깨끗이 씻고 벗어나 스스로 달라진 자취가 없어서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에 드러나 있으니 엄숙한 청금(淸禁)에 이러한 추악한 무리를 출입하게 할 수 없습니다. 대간(臺諫)의 소장에 의거하여 방축(放逐)의 율을 시행하소서. 이일운(李日運)은 대간의 평론이 참된 증거가 있는지 풍문인지를 물론하고 일찍이 법종(法從)과 근시(近侍)를 역임했던 사람이니, 사람과 귀신의 애매한 처지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해서 핵실(覈實)하여 정죄(定罪)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교리 윤우열(尹羽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저 홍낙임(洪樂任)은 역적 홍인한(洪麟漢)의 친조카로서, 요사한 홍상간(洪相簡)의 사당(死黨)이 된 역절(逆節)이 이미 심상운(沈翔雲)의 초사(招辭)에서 드러났으니, 흉심(凶心)을 의리의 필단(筆端)에서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천지 사이에서 편안히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이는 크게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그러고도 감히 교경(郊坰)에 출입하며 당여(黨與)를 불러 모아 놓고 밤낮으로 경영하는 것은 반드시 의리를 무너뜨려 깨뜨리고 인심을 속여 현혹시키는 것이었고, 오로지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기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붙좇아 종용(慫慂)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니, 그 무리가 한 번 변하여 서유린(徐有隣)·김이익(金履翼)이 되었고 두 번 변하여 채제공(蔡濟恭)·박종악(朴宗岳)이 되어 느닷없이 임자년143)  에 흉소(凶疏)를 올려 서로 성기(聲氣)를 연결하였고 조덕린(趙德隣)의 패소(悖疏)를 영호(營護)하여 몰래 정적(情迹)을 통하였으니, 대의(大義)를 배신하고 화심(禍心)을 포장한 것이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 근본을 궁구해 보면 홍낙임이 효시(嚆矢)가 되었으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대신(臺臣)의 청을 따라서 홍낙임은 우선 국청을 설치해서 실정을 알아내게 하소서. 역적의 혈당(血黨)이 되어 나라에 화란(禍亂)을 끼치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서도 아직 방헌(邦憲)에서 누락된 자가 있는데, 곧 정민시(鄭民始)·이명식(李命植)이 바로 그들입니다. 정민시는 본래 요사스러운 성품을 지닌 자로서 참독(慘毒)한 수단을 부려 처음부터 이미 역적 홍국영(洪國榮)과 주무하였고, 나중에는 역적 정동준(鄭東浚)에게 부합(附合)하여, 몰래 화심(禍心)을 길러 의리를 원수처럼 여겼습니다. 심노숭(沈魯崇)을 재랑(齋郞)에 추천하기에 이르러서는 어찌 한결같이 이토록 무엄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제방을 무너뜨리고 시비(是非)를 현혹시켜 어지럽히는 등 그 일을 행한 자취를 보면, 분의를 범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이명식은 이명빈(李命彬)의 동기로서 역적 홍인한의 사우(死友)가 되어 청의(淸議)에서 갈라지고 역적의 소굴에 출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낙수(沈樂洙)를 전랑(銓郞)의 선발에 통하게 한 것에 이르러서는 몰래 당류를 비호하는 습성을 부렸고, 승부를 겨루는 계획을 뚜렷이 드러내었습니다. 아들에게 지시해 주어 문득 가법(家法)을 이루었으며 세도(世道)를 무너뜨려 어지럽히고 공의(公議)를 멸절시켰으니, 비록 그 몸은 죽었으나, 그 죄는 반드시 징토(懲討)해야 합니다. 신은 정민시·이명식에게 추탈(追奪)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전 승지 이우진(李羽晋)에 이르러서는 성품이 본래 교활하고 처신이 또 섬홀해서 권문(權門)을 이처럼 붙좇고 당로(當路)에 여우처럼 아첨하였는데, 전령(傳令)을 잘하여 조시위(趙時偉)의 압객(押客)이 되었고, 기꺼이 세도(勢道)가 있는 사람을 붙좇아 서유린의 가인(家人)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는 동서로 쑤시고 다니며 환득 환득 환실(患得患失)144)  하였으니, 신은 이우진에게 먼저 변방(邊方)에 내쫓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3월 14일 경인

권강하였다.

 

3월 15일 신묘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이달 12일에 사학(邪學)으로서 금오(金吾)에 자수한 자가 있었는데, 먼저 포청(捕廳)에서 반문(盤問)하였더니, 바로 국초에 나왔던 사학의 괴수 주문모(周文謨)였습니다. 주문모는 본래 우리 나라 사람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많이 있어서 문자(文字)를 써서 공초를 바치게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자수하였다고 하는가?"
하니, 이병모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지금 수탐하라는 명이 있었고, 그의 당류가 거의 모두 서치(鋤治)되었으므로 발붙이기가 매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또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고 행지(行止)가 불편하였으며, 만약 붙잡히게 되면 그 또한 용서받기 어려운 줄 알았기 때문에 자수하여 요행히 만에 하나라도 면할 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용모가 어떻던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신도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듣건대, 그 용모는 구레나룻이 자못 길고, 말쑥한 얼굴이 온화하고 관대해 보여 마치 문사(文士) 같은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대개 그는 소주(蘇州)사람으로 7세에 어미를 잃고 8세에 아비를 잃고는 그 고모에게 양육되었는데, 고모가 낮에는 수(繡)를 놓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고 밤에는 그에게 문자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20세에 아내를 얻었는데, 3년 만에 그 아내가 죽으니 드디어 다시 장가들지 않았으며, 어린 시절부터 서양의 학문에 종사(從事)하다가 인하여 북경(北京)의 천주관(天主館)에 전입(轉入)했다고 합니다. 이승훈(李承薰)이 사서(邪書)를 구입(購入)해 온 이후 정약종(丁若鍾)의 무리와 사사로이 서로 양인(洋人)과 왕래하여 교주(敎主)를 얻기를 요구하였는데, 천주관에 와서 머물고 있는 양인은 정해진 액수가 있어서 한 사람이라도 다른 곳에 가게 되면 피인(彼人)들이 반드시 알게 되므로, 마침내 중국(中國) 사람으로서 와서 수업(受業)하던 자를 우리 나라에 내보내기로 하고, 갑인년145)   동지사(冬至使)가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그 변문(邊門)이 열리는 시기를 틈타 몰래 국경을 넘어 들어왔다고 하였으니, 그 정절(情節)이 지극히 망측합니다."
하니, 본부에서 추국하라고 명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교리 윤우열(尹羽烈)이 상소하여 고 판서 정민시(鄭民始)와 이명식(李命植)에게 아울러 추삭(追削)하는 율을 시행하고, 전 승지 이우진(李羽晋)에게 변방에 내쫓는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옥당(玉堂)에서 상소하여 두 사람에 대해 논열(論列)한 것이 비록 이와 같으나, 죽은 후에 곧바로 극률(極律)을 적용하는 것은 형전(刑典)을 신중하게 적용하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더욱이 성조(聖朝)가 새로 사복(嗣服)하였으니, 세신(世臣)을 충후(忠厚)하게 보전하는 것으로서 초원(初元)에 출치(出治)하는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정민시·이명식은 내버려두고, 이우진을 이[蝨]처럼 권문(權門)을 붙좇고 여우처럼 당로(當路)에 아첨하였다고 옥당에서 상소하여 논한 것은 대개 당세(當世)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니, 청컨대 그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전 승지 이우진을 삭주부(朔州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집의 유경(柳畊)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만약 사학(邪學)의 거괴(巨魁)를 논한다면 이벽(李檗)이 바로 그 사람인데, 이벽의 형 이격(李格)은 아직도 조적(朝籍)에 끼여서 도성 안에 편안히 거처하고 있습니다. 만약 조금이나마 굳게 이륜(彛倫)을 지키려는 성품이 있었다면 진실로 통렬히 배척하고 엄중히 금지시키는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권문(權門)과 몰래 결탁하고 은밀한 경로(徑路)로 교통하여 사서(邪書)를 전하며 그 법을 수호하고 있으니, 이에 그 무리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그 죄범(罪犯)을 논하면 방축(放逐)하는 데 그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방축 향리(放逐鄕里)한 죄인 이격에게 빨리 원방(遠方)에 찬배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석충(吳錫忠)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도로 흉참합니다. 그 집안이 점차 사학에 물든 실상은 아무런 이의 없이 자복(自服)하였고, 그 흉얼(凶孼)과 교통하고 암지(暗地)에서 화응(和應)한 정상은 이가환이 증인(證引)한 초사(招辭)가 정녕(丁寧)하며, 여러 차례 왕래한 자취는 그의 공초에서 사실을 자백한 것이 명백하니, 차율(次律)로 감단(勘斷)하는 것은 도리어 가벼운 죄를 따른 데 관계됩니다. 신은 도배(島配)한 죄인 오석충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국문을 가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어 흔쾌하게 전형(典刑)을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사대부의 언행은 진실로 경근(敬謹)해야 하며, 연소한 신진들은 더욱 삼가며 신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 윤치영(尹致永)이라는 자는 어떤 인물인데, 처신이 섬홀(閃忽)하고 발언하는 것이 간사스럽고도 망령되단 말입니까? 동서에 출몰하면서 남의 세력을 의뢰하여 기세 부리는 일을 능사로 삼고, 밤낮으로 주무하여 헛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기량으로 삼고 있으니, 이러한 간사한 소인배는 미관(微官)이라 하여 버려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승문원 부정자 윤치영에게 원방(遠方)에 내쫓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3월 16일 임진

권강하였다.

 

함경도 암행 어사 민기현(閔耆顯)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함흥(咸興)과 영흥(永興)의 두 본궁(本宮)은 노비(奴婢)를 혁파한 후 급대(給代)하는 법이 있어야 마땅하니,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여 조치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두 본궁의 노비에 대해 급대하는 일은 경사(京司)에서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진상(進上)하는 녹용(鹿茸)의 수를 참작해서 줄이고, 그것으로 대신 보충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영흥(永興)의 효자 고 사인(士人) 박두휘(朴斗輝)에게 증직(贈職)하고, 그 증손 박형춘(朴亨春)의 처 최씨(崔氏)와 덕원(德源)의 열녀 고 학생 남일명(南一明)의 처 이씨(李氏)에게 아울러 정려(旌閭)하며, 효자 이원(利原)의 무인(武人) 최재선(崔載璇)에게 급복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어사(御史)의 별단(別單)으로 인한 것이었다.

 

추국 죄인 주문모(周文謨)가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므로 글을 써서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몸은 대대로 소주(蘇州) 땅에서 살다가 장년(壯年)이 되어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와서 머물러 살았습니다. 갑인년146)   봄에 조선인(朝鮮人)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였으므로 비로소 책문(柵門)을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서양인 양동재(梁棟材)가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권성(權姓)·최성(崔姓)의 사람과 서로 서찰을 통하였는데, 처음에 상봉했던 지황은 을묘년147)  에 포청(捕廳)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의주(義州)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학습하기를 원하는 여러 사람들의 집을 옮아가며 머물러 거주하였습니다."
라고 공술하였다. 그런데 그 말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대개 국옥 가운데 감죄(勘罪)받은 자가 많이 있었다. 또 섬에 천극한 죄인 이인(李䄄)의 처 송씨(宋氏)와 인의 아들 이담(李湛)의 처 신씨(申氏)에 이르러서는 영세(領洗)까지 받았는데, 영세란 곧 사학에서 교육받는 법이었다.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서로 거느리고 구대(求對)한 다음 인의 처와 담의 처에게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祖)께서는 이 죄인들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권속(眷屬)들이 이번에 부범(負犯)한 것에 이르러서는 크게 풍화(風化)에 관계되니, 단지 그 죄를 죄주어 다른 사람들을 징계함이 마땅하다. 그 집안이 이미 국가의 의친(懿親)에 관계되지만, 먼저 이 무리로부터 법을 적용한 후에야 여항(閭巷)의 필서(匹庶)들이 방헌(邦憲)이 있음을 알고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경들이 청한 것을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전지(傳旨)하기를,
"강화부(江華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의 처 송성(宋姓) 등은 고부(姑婦)가 모두 사학에 빠져서 외인(外人)의 흉추(凶醜)와 왕래하여 서로 만났으며, 방금(邦禁)이 엄중함을 두려워함이 없이 방자하게 그 집안에 숨겨 주었으니, 그 부범(負犯)한 죄를 논하면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가 없다. 이에 아울러 사사(賜死)한다. 또 주문모의 공사(供辭) 가운데 김건순(金建淳)·강이천(姜彛天)·김여(金鑢)·김이백(金履白) 등 여러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전법(傳法)했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울러 발포(發捕)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7일 계사

효원전(孝元殿)에 나아가 주다례(晝茶禮)를 행하고, 겸하여 자전(慈殿)께서 두 죄인을 작처(酌處)한 까닭을 고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18일 갑오

권강하였다.

 

삼사(三司) 【대사간 오정원(吳鼎源), 집의 유경(柳畊), 장령 홍광일(洪光一), 부교리 이기헌(李基憲), 정언 유현장(兪鉉章)·이의채(李毅采), 부수찬 이상겸(李象謙)이다.】 에서 합계(合啓)하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인(李䄄)은 곧 역적 이찬(李禶)의 형이고 역적 이담(李湛)의 아비입니다. 찬과 담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인은 아직도 주벌(誅罰)되지 않았으니, 화란(禍亂)의 근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화란의 근본을 제거하지 않았으니 인심이 의심하여 두려워하고 국세(國勢)가 위태로운 것이 어찌 하루인들 조금이나마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전후에 극도로 흉악한 역적들이 기화(奇貨)로 여기고 우두머리를 삼아 의뢰하였으니 윤리와 기강이 이미 멸절되고 근심이 더욱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종사(宗社)의 대죄인에게 차마 경전(磬甸)148)  의 상형(常刑)을 시행하지 못하고, 목숨을 보존시켜 아직도 심도(沁都)의 좋은 곳에 두고 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속을 썩이며 뼈에 사무쳐서 맹세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이번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지난날의 사첩(史牒)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이는 진실로 만고에 없던 큰 변고로서 더욱 극도로 흉참한 일이었습니다. 역적 인의 처와 역적 담의 처는 규달(閨闥)149)  에 깊이 거처하여 비류(匪類)와 교통하고, 자주 요비(妖婢)를 내보내어 먼저 소개(紹介)를 한 다음 밤마다 왕래하게 하여 흉추(凶醜)와 체결하고 죄를 짓고 도망한 자들은 숨겨 줌으로써 그 무리가 모여드는 소굴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배포(排鋪)하여 모략(謀略)한 것은 도당을 불러 모아 성세(聲勢)를 확장시키는 일이 아님이 없었고, 주무하여 설계한 것은 오로지 심복(心腹)을 배포하여 벌여서 화란(禍亂)의 계제(階梯)를 양성하는 일이 아님이 없었으니, 녹림(綠林)의 화변(禍變)과 황건적(黃巾賊)의 변란(變亂)이 아침이 아니라면 저녁에 박두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한두 부녀(婦女)가 홀로 판비(辦備)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음모를 창시한 것은 진실로 인이 주장한 것이었고, 흉계가 난만한 것 또한 인이 지휘한 것이었으니, 안팎으로 화응하여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였겠습니까? 그 마음의 소재가 밝게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위기가 순간에 임박해 있어서 장차 어느 때에 몰래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 이를 말하면 두렵기만 하고 이를 생각하면 등골이 싸늘합니다. 만약 인을 한 시각이라도 천지 사이에 용납해 둔다면, 적의 형세가 옛날과 다름이 없어서 화기(禍機)가 날로 급박해질 것이니, 국가가 장차 편안한 날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강화부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은 빨리 방형(邦刑)을 바로잡고, 그 나머지 여러 아들들도 아울러 율(律)에 의거하여 처단(處斷)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헌부(憲府) 【집의 유경·장령 홍광일이다.】 에서 아뢰기를,
"근일에 요사스럽고도 흉패(凶悖)한 사학(邪學)이 열화(烈火)같이 치열해져서 형세의 위급함이 하늘을 뒤덮고 있으니, 진실로 국가의 화급한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자성 전하께서 특별히 밝은 전지(傳旨)를 내리셔서 빨리 엄중하게 핵실(覈實)하도록 하셨으므로, 요요 난령(妖腰亂領)150)  들이 차례로 형륙(刑戮)에 나아감에 따라 거의 근저가 뽑히고 소굴이 소탕되었습니다. 그런데 아! 저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는 정약종(丁若鍾)의 동기(同氣)로서, 몰래 이승훈(李承薰)에게 요서(妖書)를 받아 밤낮으로 탐혹(耽惑)하여 명교(名敎)를 어지럽히고 윤리(倫理)를 멸절시켰으니,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지금 엄중하게 추국하는 아래에서 처음에는 미혹되었으나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는 말은 모두 꾸며대어 항거한 것이며, 통렬하게 만회한 자취는 끝내 이를 증명할 수 없었으니, 깊이 빠져들어 옛날과 다름이 없음을 미루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죄를 감하여 살려주어 정배(定配)하는 데 불과하였습니다. 대저 김백순(金伯淳)은 그 같은 처지(處地)로서 사경(邪逕)에 투입(投入)하여 온갖 요사스럽고도 간사한 짓을 저지르며 점차 물들어 고혹되었는데, 구핵(究覈)하던 날에는 장황하게 과장하였고, 마침내 윤리를 훼상(毁傷)시키고 상도(常道)를 패몰(敗沒)시키는 흉설(凶說)을 방자하게 발설함으로써 스스로 이적(夷賊)·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는 것을 달갑게 여겼습니다. 그 죄악을 논하면 홍낙민(洪樂敏)의 무리와 아울러 대벽(大辟)으로 처치하는 것이 마땅한데, 갑자기 추조(秋曹)에 옮겨 놓고 아직 방헌(邦憲)을 바로잡지 않고 있으니, 여정(輿情)의 울분함이 오래 될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오석충(吳錫忠)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도로 흉참합니다. 본래 흉추(凶醜)의 유종(遺種)으로서, 그 집안이 점차 사학(邪學)에 물든 실상은 아무런 이의 없이 자복(自服)하였으니 이미 이것이 그의 용서받지 못할 단안(斷案)인 것입니다. 몰래 음도(陰圖)를 품고 흉얼(凶孼)과 교통하며 암지(暗地)에서 주무한 실상이 이가환(李家煥)의 초사(招辭)에서 정녕하게 증명되었으며, 여러 차례 왕래한 자취는 그가 공초(供招)하여 사실을 자백한 데에서 밝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만환(漫漶)한 계책을 내어 혹 말하기를, ‘그 힘이 없지 않았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형용할 수 없다.’ 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실정을 말하였다가 숨겼다가 하면서 한결같이 저뢰(抵賴)하였으니, 그 정절(情節)을 구명해 보면 만 번 죽여도 오히려 벌이 가벼울 것인데, 어떻게 차율(次律)로 감단(勘斷)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이기양(李基讓)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더라도 아들로는 깊이 빠져든 이총억(李寵億)이 있고, 복법(伏法)한 삼흉(三凶)과 사돈을 맺으니 사괴(邪魁)라는 지목이 온 세상에 왁자하게 전해졌으며, 속여서 유혹하는 말로 여주(驪州)·이천(利川)에서 선동하여 감히 흉악하고도 완패(頑悖)한 버릇을 자행하였으나, 끝내 죄상을 자복하는 공초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여정(輿情)의 울분함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지도(薪智島)에 정배한 죄인 정약전, 장기현(長鬐縣)에 정배된 죄인 정약용, 추조의 죄인 김백순, 임자도(荏子島)에 도배(島配)된 죄인 오석충, 단천부(端天府)에 정배된 죄인 이기양은 다시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중하게 국문을 가하여 기필코 실정을 알아내게 한 다음 흔쾌히 방형(邦刑)을 바로잡게 하소서. 예로부터 난역(亂逆)이 화심(禍心)을 포장하고 의리를 현혹시켜 음계(陰計)를 몰래 이루려 한 것이 어찌 남학(南學)에서 상소하여 거론한 것과 같이 지극히 흉참(凶慘)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아! 저 정창순(鄭昌順)은 본래 보잘것 없는 소인배로서 음흉한 성품을 지닌 자인데, 밤낮으로 경영하는 것은 오로지 공의(公議)를 배신하여 사의(私意)를 이루는 것이었고, 평생 동안의 기량은 모두 선류(善類)를 살해(殺害)하여 패몰(敗沒)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임자년151)   여름에 미쳐서는 틈탈 만한 기회라고 여겨 역적 정동준(鄭東浚)을 붙좇으며 그 뜻을 받고 그 지시를 따랐으며, 인하여 이조원(李祖源)·심기태(沈基泰)의 무리와 주무하고 화응(和應)하면서 그가 우두머리가 되고 저 사람들은 부곡(部曲)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하원(朴夏源)을 뽑아 소두(疏頭)를 삼고, 유협기(柳協基)가 그 뜻을 따라 소장(疏章)을 짓고는 많은 무리를 불러 모아 놓고 느닷없이 소장을 올렸는데, 겉으로는 천양(闡揚)을 칭탁하면서 속으로는 선류(善類)를 장해하여 음계(陰計)를 터무니없이 주장하고 은밀하게 기틀을 배포하려 하였으나, 정적을 숨길 수가 없었으므로 공의가 점차 비등(沸騰)해졌던 것입니다. 지금 의리를 크게 밝히고 국시(國是)를 크게 바로잡는 날을 당하여 결단코 버려두고 논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고 판서 정창순에게 관작을 추탈하는 율을 빨리 시행하시고, 전 승지 유협기에게 찬배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
하였다.

 

비국에서 아뢰기를,
"집의 유경(柳畊)이 상소하여 방축(放逐)한 죄인 이격(李格)을 멀리 찬배하고, 도배(島配)한 죄인 오석충(吳錫忠)에게 다시 엄중한 추국을 가하며, 승문원 부정자 윤치영(尹致永)에게 마땅히 원방에 내쫓는 율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격은 스스로 사학(邪學)을 하였으나, 대개 드러난 자취가 없는데 이미 방축하는 법을 시행하였으니, 율(律)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석충이 사학의 서책(書冊)을 부호(扶護)하고 흉얼(凶孼)과 교통한 자취는 이미 드러난 단서가 있다고는 하나, 갑자기 극률(極律)에 의논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우선 차율(次律)로 감단(勘斷)하는 것이 거의 형벌을 신중하게 시행하는 정사에 유익할 것이니, 아울러 내버려 두게 하소서. 윤치영은 연소한 신진(新進)인데, 어떻게 대각(臺閣)의 사이에 이러한 제목을 얻게 되었단 말입니까? 자신을 돌이켜보아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일에 따라 분발하여,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허물이 없으면 더욱 힘쓸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진실로 옥(玉)을 다듬듯이 훌륭하게 만드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 청컨대, 우선 삭출(削黜)의 율을 시행하여 글을 읽고 처신을 삼가게 함으로써 개과 천선(改過遷善)할 길을 열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추국하였다.

 

3월 19일 을미

권강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사학(邪學)의 여러 죄인들을 도배(島配)로 작처(酌處)하는 것은 네 가지 불가한 점이 있다. 대개 흩어 놓으면 일을 모의(謀議)하기가 어렵지만, 모아 놓으면 쉽게 힘이 되는 법이다. 섬 가운데의 관장(官長)은 변장(邊將)에 지나지 않고, 방군(防軍)도 많지 않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리가 마음과 힘을 합친다면 장차 연해(沿海)의 무궁한 근심이 될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 불가한 점이다. 먼 지방의 해도(海島)는 곧 헛소문이 발생되는 곳인데, 저 무리가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근거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이 반드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어서 장차 민지(民志)가 안정될 날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불가한 점이다. 해도 사이에는 다른 나라의 상선(商船)이 표류하여 이르는 때가 많이 있었는데, 이미 지나간 자취를 가지고 미루어 보건대, 반드시 외국(外國)과 교통할 염려가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가한 점이다.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한 군데에 함께 두면, 생산(生産)이 점차 번성한 데에 이르는 법이다. 따라서 끊임 없이 생산하여 퍼진다면, 이는 나라를 원망하는 종자를 뿌리는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 불가한 점이다. 그러한 네 가지 근심이 있는데 나에게 한 가지 도리가 있다. 비록 옥수(獄囚)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설령 체포되는 자가 점점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수백 수천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각 고을에 각각 1명씩 찬배하되, 도리(道里)의 멀고 가까운 것을 가지고 죄악(罪惡)의 경중(輕重)에 따라 곧바로 읍옥(邑獄)에 가두고, 옥중에 따로 한 곳을 설치하여 다른 죄인들과 거처를 다르게 구분하고, 각 해당 수령으로 하여금 그 의식(衣食)을 잇대어 주어 경폐되지 않게 하며, 비록 옥리(獄吏)·옥졸(獄卒)이라 하더라도 상대하여 말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고, 만약 도망하는 폐단이 있거나 혹은 외인(外人)과 서로 통하여 훈염(薰染)되는 일이 있으면 해당 수령은 마땅히 사학을 다스리는 율로 다스리되, 이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작처(酌處)하도록 하라. 그리고 때로 비국으로 하여금 팔도(八道)에 행회(行會)하게 하는 것이 옳다. 이러한 뜻을 대신들에게 전유(傳諭)하여 의논해 아뢰게 하라."
하였다.

 

3월 20일 병신

권강하였다.

 

3월 21일 정유

권강하였다.

 

주강(晝講)하였다.

 

윤대(輪對)하였다.

 

3월 22일 무술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선전관(宣傳官)·별군직(別軍職)·내승(內乘)·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 및 장용영(壯勇營)·무예청(武藝廳)의 시사(試射)를 행하고, 하교하기를,
"이번의 시사는 곧 초원(初元)에 친림(親臨)하여 시행한 것이니, 수위를 차지한 별부료 5인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당한 관직을 주의(注擬)해 들여서 원방(遠方)의 사람을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승(李祖承)을 공조 판서로, 이득신(李得臣)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3월 23일 기해

추국하였다.

 

3월 24일 경자

권강하였다.

 

반궁(泮宮)에서 삼일제(三日製)를 설행(設行)하고, 서울과 팔도 및 사도(四都)에서 나누어 뽑은 우등인(優等人) 20인에게 모두 직부 회시(直赴會試)하게 하였다.

 

3월 25일 신축

권강하였다.

 

3월 26일 임인

권강하였다.

 

소대(召對)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종 대왕(正宗大王)의 연주(練主)를 조성할 곳은 미리 정탈(定奪)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작년에 우주(虞主)를 조성했을 때에는 처소(處所)를 경희궁(慶熙宮)의 숭정전(崇政殿)으로 삼았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전(殿)에서 조성하여 봉안(奉安)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숭정전에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김달순(金達淳)이 장계(狀啓)하기를,
"다경포 진장(多慶浦鎭將)이 수영(水營)에 나아가 조련하던 중에 전선(戰船)이 나주(羅州)의 압해도(押海島) 뒤 해양(海洋)에 도착하였을 때 우연히 불이 나서 전선 전체가 모두 타버렸으며, 배에 실었던 군기(軍器)·집물(汁物)·군향미(軍餉米)도 거의 남김없이 타버렸습니다. 그리고 배에 타고 있던 장졸(將卒)이 본래 2백 46인이었는데, 진장(鎭將)과 교리(校吏)·군졸 가운데 불에 타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백 7인이나 되며, 진장이 차고 있던 인신(印信)·병부(兵符)도 또한 물에 가라앉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비록 이미 8명의 시체를 건져내었다고 하나 그 나머지는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였고, 진장의 시체도 아직 간 곳을 모른다고 하니 더욱 극도로 참혹하고도 민망스러운 일입니다. 물에 익숙한 선인(船人)을 많이 뽑아서 특별히 수색을 가하여 건져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중류(中流)에서 실화(失火)하여 불에 타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많다고 하니, 그 놀랍고도 참혹함이 마땅히 어떠하였겠는가? 연읍(沿邑)에 분부하여 뜻을 기울여 시체를 건져내게 하고, 불에 타서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여러 사람들은 신역(身役)과 환상(還上)을 아울러 탕감해 주도록 하라. 그리고 수사(水使)로 하여금 주병(洒餠)을 가지고 바다 위에서 제사지내게 하라. 그리고 해당 변장(邊將)을 가려서 차임(差任)해야 마땅하니, 선전관(宣傳官)과 비국 낭청(備局郞廳) 가운데 상격(常格)에 구애받지 말고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하고 개정(開政)하여 차출(差出)해서 당일로 내려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27일 계묘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옥사(獄事)가 지금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번에 다스린 옥사는 두 가지 단락(段落)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학(邪學)의 당류(黨類)에 대한 것이었고, 끝에 가서는 요언(妖言)을 한 무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문모(周文謨)의 국초가 나온 후 처음부터 끝까지의 옥정(獄情)이 혼합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정사년152)  의 강이천(姜彝天)·김여(金鑢)의 무리에 대한 옥안(獄案)이 반드시 추조(秋曹)에 있을 것인데, 이것을 가져다 보면 반드시 근거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경들은 과연 낱낱이 보았는가?"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정사년에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뜻으로 번거롭게 반문(盤問)하지 않은 채 곧 발배(發配)하게 하셨으므로, 그 당시의 문안은 매우 간략하여 고증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강이천은 김건순(金建淳)이 지벌(地閥)과 재화(才華)가 월등하고 여주(驪州)에 살면서 산업(産業)이 풍족한 까닭에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여 세 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당시에는 글을 논하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김이백(金履白) 또한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서 항상 김건순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사령(使令)이 되어 강이천과 김여의 사이에 왕래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이백 또한 강이천·김건순의 모임에 참여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이때가 어떠한 시기인가?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겹쳐서 발생하고 있다. 편안한 때를 당해서도 위태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한만(汗漫)하게 모여 이야기나 하고 있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그 후 강이천이 천안(天安)의 전장(田庄)에 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김이백의 처가가 그 근처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서로 왕래하게 됨에 따라 교계(交契)가 더욱 긴밀해져서 못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김신국(金信國)이라는 자는 향리(鄕里)에 살면서 산업을 다스려 부유하다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흉언 패설(凶言悖說)을 강이천에게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강이천이 뜬 소문을 펴뜨려 그를 공갈해서 동요시킴으로써 그 재산을 흩고 곡식을 나누어 주기를 도모하였으니, 강이천이 계획적으로 간사한 꾀를 부린 것은 오로지 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신국이 강이천의 흉패한 말을 그 종형(從兄)인 전 첨지 김정국(金鼎國)에게 전하자, 김정국이 경해(驚駭)함을 금하지 못하여 친한 재신(宰臣) 김달순(金達淳)을 방문하여 일의 실상을 죄다 진술하여 그로 하여금 이를 위에 아뢰게 하니, 김달순이 밀서(密書)를 봉하여 올렸습니다. 선조(先朝)께서는 가혹하게 적발하지 않고자 힘써 평윤(平允)한 데에 돌려서 강이천·김건순의 무리를 형조(刑曹)에 회부하여 대략 원배(遠配)의 율(律)만을 시행하게 하셨습니다. 대저 강이천과 김건순이 범한 죄는 조금 같지 않은 점이 있었지만, 헛소문을 전파하여 소란을 피운 것은 강이천의 사죄(死罪)이며,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사학에 물들게 한 것은 김건순의 사죄에 해당됩니다. 더구나 김건순은 곧 고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의 봉사손(奉祀孫)이고, 또 의리를 굳게 지키고 경술(經術)을 지닌 김양행(金亮行)은 그의 생가(生家)의 조부(祖父)가 되니,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관대한 법을 좇아 내버려 두고 묻지 말라고 하신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김건순이 비록 명조(名祖)의 후손이라고 하나, 그의 죄범(罪犯)이 이와 같다면, 또한 장차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처지로 이러한 죄범(罪犯)을 끼쳤으니 더욱 통분스러운 일이며, 더욱 죽일 만한 일이다. 그리고 주문모에 대해서 경들을 장차 어떻게 처분하려 하는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그 근각(根脚)153)  을 받아 그 문적(文跡)을 남겨 두어 훗날의 근심을 끼칠 필요가 없으니, 곧바로 군법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심환지는 말하기를,
"그가 이미 우리 나라에서 머리를 기르고, 또 언어와 의관도 다른 자취가 없으니, 그 근본이 어느 곳의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 흉악하고 모진 짓을 행한 것으로써, 속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일률(一律)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그가 이미 범월(犯越)한 지 오래 되었고, 무릇 여러 사당(邪黨)들이 아비처럼 섬긴 까닭에 우리 나라의 국사(國事)와 민속(民俗)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이자(移咨)하여 입송(入送)한다면, 예측하지 못할 근심이 도리어 입송하지 않은 것보다 더하여 갈등을 초래할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비록 법률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종적이 궤비(詭秘)해서 도적과 다름이 없으니, 이제 도적을 다스리는 율로 군문(軍門)에서 거행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군법을 쓴다면 함부로 죽였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또 그가 피국(彼國)의 사람이라는 실상이 옥안(獄案)에 밝게 실려 있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한다면 후환이 없겠는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김건순이 주가(周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장차 거함(巨艦)을 건조하고 갑병(甲兵)을 양성해서 대해(大海) 가운데 도성(都城)이나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곳에 들어가, 곧바로 피국을 공격해서 옛날의 수치를 씻겠다.……’ 하였는데, 옛날의 수치란 것은 곧 병자년154)  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가가 답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전수할 만한 정술(正術)이 있으니, 우선 너의 경영하는 것을 버리고 나의 학(學)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작(酬酌)한 것이 이미 주가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이제 만약 이자(移咨)한다면 피국(彼國)의 지나가는 곳의 각 아문(衙門)에서 장차 반드시 그 곡절을 반힐(盤詰)할 것이고, 만약 갑병을 양성해서 피국을 공격하겠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면 혹시라도 피국에게 트집 잡힐까 두려우니, 그 염려스러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설사 피국에서 반드시 알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먼 훗날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범월(犯越)한 죄인의 소행이 망측하여 화변(禍變)이 조석(朝夕)에 임박해 있으므로 부대시참(不待時斬)할 뜻으로 한편으로는 이자(移咨)하고 한편으로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한가지 방도가 있다. 죄인이 부범(負犯)한 죄는 용서할 수가 없고 장차 예측하지 못할 근심이 있기 때문에 급급하게 주멸(誅滅)했다 하고, 혹은 주멸당한 사람이 대국(大國)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과연 그러한가?’라는 뜻으로 주문(奏文)에 올리는 것도 또한 정성을 다하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소국(小國)에서 대국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도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매우 불가한 일이다. 오늘날의 계책은 여러 가지로 상량(商量)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만분의 일이라도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는데, 심환지가 말하기를,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에 의거하여 군법을 시행하는 것이 한 방책이고, 그가 피인(彼人)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범한 죄가 극도로 무겁기 때문에 부대시참(不待時斬)으로 처단하였다는 뜻으로 이자하여 보고하는 것도 또한 한 방책입니다. 이 두 가지 방책에 대해서는 신 등이 연석(筵席)에서 물러가 다시 난만(爛漫)하게 상의한 후에 우러러 주달(奏達)하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주가(周哥)는 결단코 입송(入送)시킬 수 없다. 우선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가 끝난 후에 처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병모 등이 말하기를,
"일전에 자교(慈敎)로 사학 죄인(邪學罪人)들은 각 고을의 옥중에 흩어 정배(定配)한 다음 한 장소를 따로 설치하여 구류(拘留)하는 일에 대해 신 등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셨는데, 삼가 자교에 의거하여 사학 죄인들을 경중(輕重)을 나누어 각 고을에 산배(散配)하기로 정하였으나, 죄의 대소(大小)를 물론하고 일체 옥중의 다른 곳에 구류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아닌 듯합니다. 일체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읍리(邑里)에 보수(保授)하게 하되, 그 방수(防守)를 엄중하게 하고 그 행사(行事)를 자세히 살펴서 점차 오염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무릇 비상한 일이 있으면 또한 비상한 거조가 있는 법이다. 이번의 사옥(邪獄)은 곧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므로 이를 처분함에 있어 법례(法例)의 있고 없는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따로 한 옥(獄)을 설치하는 것이 과연 십분 온당하지 못하다면, 다시 더 상의(商議)하여 형정(刑政)에 적당하도록 힘써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다스리는 도리는 마땅한 인재를 기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기용할 만한 인재가 음로(蔭路)에 막혀 있지만, 특이한 간국(幹局)을 선발하여 좌이(佐貳)·방악(方岳)155)  에 두루 시험해 보면, 인재를 기용하는 정사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 목사(牧使) 임육(任焴), 목사 윤문동(尹文東)·이소(李素), 전 군수 신대우(申大羽)는 모두 발탁해서 임용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순문하니, 모두 의논하기를,
"대계(臺啓) 가운데 고 판서 정창순(鄭昌順), 고 첨지 유협기(柳協基)의 관작을 추탈하는 일에 대해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계에서 논한 것은 대개 악을 징계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그 사람이 죽은 후에 극률(極律)을 갑자기 시행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탈은 곧 극률인데, 어떻게 가볍게 죽은 사람에게 가할 수 있겠는가? 대계는 속히 정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고 참의 이택징(李澤徵), 고 정언 이유백(李有白)은 이미 특별히 은전을 입어 신원되고 복관(復官)되었습니다. 그 당시 고 부사(府使) 임관주(任觀周)가 이택징을 찾아가 만나 보고 명소(名疏)라고 창찬한 까닭에 대계로 인하여 원배(遠配)되었었습니다. 고 승지 이유철(李有喆)은 이유백의 형이 되는 까닭에 체포되었다가 미처 국문하지 아니하여 특교(特敎)로 인해 도배(島配)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모두 사전(赦典)을 입었으나, 직첩(職牒)을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택징·이유백에 대한 일은 이제 이미 소설(昭雪)되었으니, 임관주·이유철도 또한 마땅히 일례로 복관(復官)시키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주강(晝講)하였다.

 

한림 권점(翰林圈點)을 행하여 4점을 받은 여동식(呂東植)·김매순(金邁淳)·오연상(吳淵常)을 뽑았는데, 전 한림(翰林)의 인원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해 특별히 도당(都堂) 【영춘추(領春秋) 심환지(沈煥之), 감춘추(監春秋)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 대제학 윤행임(尹行恁), 지춘추 이의필(李義弼)이다.】 으로 하여금 회권(會圈)하게 한 것이었다.

 

추국하였다.

 

 

 

증광 감시 복시(增廣監試覆試)·정시 무과 초시(庭試武科初試)를 설행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계후 사손(繼後祀孫) 김건순(金建淳)을 파양(罷養)하였는데, 사학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3월 28일 갑진

권강하였다.

 

추국하였다.

 

3월 29일 을사

하교하기를,
"신대우(申大羽)·임육(任焴)은 곧 내가 주연(胄筵)에서 강독(講讀)하던 때의 구료(舊僚)들이다. 더욱이 신대우는 요속(僚屬)에서 계방(桂坊)156)  에 이르기까지 도움받은 것이 매우 많았었다. 승지의 자리에 결원이 생기면 아울러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한림 소시(翰林召試)를 행하였는데, 오연상·여동식·김매순이 선발되었다.

 

추국하여 사학 죄인을 작처(酌處)하였다. 죄인 김백순(金伯淳)이 공초(供招)하기를,
"어려서부터 주서(朱書)를 읽고 흐릿하게나마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었으므로 이단에 현혹되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서양의 서책을 보고서 통렬하게 이를 배척하고자 하여 비로소 펼쳐 보았더니, 전에 듣던 것과 아주 다를 뿐만 아니라 진실로 크게 올바르고 지극히 공변된 도(道)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종사(從事)하게 되었지만,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었습니다. 야소(耶蘇)께서 강생(降生)한 후 제사를 폐지하게 된 것은 스스로 의의(意義)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에는 형벌을 면해 목숨을 구할 계책으로 잠시 뉘우치는 말을 일컬었으나, 다시 형신(刑訊)하기에 이르러 공초하기를,
"오로지 사학에만 뜻을 기울였으니,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
하였으므로, 요서(妖書)·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지만(遲晩)을 받아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이희영(李喜英)은 본래 김건순의 가객(家客)으로서 김건순과 더불어 주문모를 찾아가서 만나 보았으며, 옛날부터 처신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김건순의 아비와 형에게 쫓겨났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학에 오염되어 서울에 출입하여 도당(徒黨)과 체결하였으며 다달이 네 번씩 재계하고 소식(素食)하면서 양서(洋書)를 암송해 익혔다. 화법(畵法)을 조금 알고 있었으므로, 야소상(耶蘇像) 3본을 본떠서 만들어 이를 황사영(黃嗣永)에게 보냈었다. 이에 진장(眞贓)이 드러나서 국청에서 자복 하였으니, 요서·요언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지만을 받아 정법(正法)하였다.

 

 

 

3월 30일 병오

권강하였다.
소대하였다.


 

 

 

우선 추국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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