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2월 1일 병인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조식당(朝食堂)을 설행하였다. 이어서 춘도기(春到記)로서 유생들을 시험하고, 내금위(內禁衛)·서북 별부료(西北別付料)·군관(軍官) 등에게 춘등 시사 도기(春等試射到記)를 설행했는데, 강경(講經)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한 유영오(柳榮五)와 제술(製述)에서 수위를 차지한 서정보(徐鼎輔)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윤2월 2일 정묘
서매수(徐邁修)를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윤2월 3일 무진
진강하였다.
윤2월 4일 기사
진강하였다.
윤2월 5일 경오
차대(次對)하였다.
이만수(李晩秀)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윤2월 6일 신미
진강하였다.
윤2월 7일 임신
헌부(憲府) 【지평 정언인(鄭彦仁)이다.】 에서 전계(前啓)한 이익회(李益恢)의 일을 정계(停啓)하였다.
윤2월 9일 갑술
진강하였다.
윤2월 10일 을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임금이 등극한 후 처음 행한 것이었다. 명하여 제1실의 대축(大祝) 장석윤(張錫胤)과 집례(執禮) 박종경(朴宗京)에게 아울러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고, 인하여 저경궁(儲慶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윤2월 11일 병자
오태현(吳泰賢)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민태혁(閔台爀)을 한성부 판윤으로 삼았다.
윤2월 12일 정축
진강하였다. 《시전(詩傳)》 기욱장(淇奧章)을 강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학(大學)》에 이르기를, ‘깎은 듯 다듬은 듯하다는 것은 배우는 것을 말하고, 쪼은 듯 간 듯하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다.’ 하였다. 그 차서(次序)를 말할 것 같으면, 깎고 쫀다는 것은 다듬고 간다는 것의 시작이고, 다듬고 간다는 것은 깎고 쪼는 것의 끝이며, 배운다는 것은 이를 시작하는 일이고, 스스로 몸을 닦는다는 것은 그것을 끝맺는 일인데, 깎고 다듬고 쪼고 가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몸을 닦는 공부에 대해 혼동(混同)하여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영사(領事) 김관주(金觀柱)가 말하기를,
"배우고 스스로 몸을 닦는 가운데에 저절로 끝과 시작이 있으나, 다스리기를 말지 않으면 더욱 정밀함을 이룩하기 때문에, 글의 형세가 이와 같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2월 13일 무인
진강하였다.
윤2월 14일 기묘
진강하였다.
윤2월 15일 경진
진강하였다.
돌아온 주청 정사(奏請正使) 심능건(沈能建)과 부사 한만유(韓晩裕)를 소견(召見)하였다.
임시철(林蓍喆)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2월 16일 신사
진강하였다.
윤광보(尹光普)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함경 감사 이의필(李義弼)이 신삼(信蔘)의 원가를 1전중(錢重)에 6냥으로 준하여 마련할 일로 논보(論報)하였습니다. 신삼의 본값은 원래 정해져 있어 별무(別貿)의 전례를 끌어대는 것은 종전에 허락하지 않았었으나, 지난번에 강민(江民)들의 뼈에 사무친 폐막(弊瘼)을 불쌍히 여겨 이미 첨획(添劃)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으니, 아마도 한쪽은 준허(準許)해 주고 한쪽은 준허하지 않는 것은 어려울 듯합니다. 청컨대, 논보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윤2월 17일 임오
진강하였다.
증광 문과 초시(增廣文科初試)와 증광 무과 초시(增廣武科初試)를 설행하였다.
윤2월 18일 계미
주청 서장관(奏請書狀官) 민명혁(閔命爀)을 소견(召見)하였다. 민명혁이 문견 별단(聞見別單)을 바쳤는데, 이르기를,
"1. 지난해 겨울 들어가는 길에 돌아오는 관동(關東)의 병정들이 1백 명이나 10명씩 무리를 이루어 수레가 줄을 이어 끊이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물어 보았더니, 말하기를, ‘교비(敎匪)046) 의 여당(餘黨)이 산골짜기에 몰래 숨어 있으므로 군사를 머물러 두고 둔(屯)을 쳐 지키고 있는데, 대세(大勢)는 점차 평정되고 있으나 여당(餘黨)이 아직 많다.’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23일에 교비(敎匪)를 평정한 첩서(捷書)가 북경(北京)에 이르렀는데, 황제(皇帝)가 유시하기를, ‘액륵등보(額勒登保) 등이 역비(逆匪)를 초멸(剿滅)하고 체포한 다음 대공(大功)을 감정(勘定)함에 의거하여, 짐은 천하의 신민(臣民)과 함께 깊이 기뻐하여 위로하는 바이다. 사교(邪敎)가 처음에는 간사한 백성들이 거짓으로 향화(香火)를 피우며 병(病)을 치료한다는 명분을 삼고 뭇사람들을 현혹시켜 돈[錢]을 거둠으로 말미암아, 무지(無知)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선유(煽誘)를 당하여 당여(黨與)가 이미 많아지게 되었다. 이에 더욱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따르게 하고는 호북(湖北)에서 일어나 예성(豫省)에 난입(闌入)하여 섬서성(陝西省)을 경유하여 사천성(四川省)에 들어가니, 세 성(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수년 동안 참수(斬首)하고 포획(捕獲)한 수역(首逆)이 1백여 인이 되고 두목(頭目)이 수백 명이 되었는데, 이에 죄를 뉘우치고 투항해 온 자가 수만여 인이 되었다. 이에 세 성(省)의 남은 교비(敎匪)를 한결같이 진멸(殄滅)해 없애고 첩서(捷書)를 나는 듯이 달려서 알렸으니, 이는 내지(內地)의 난민(亂民)을 초멸(剿滅)하고 포획한 것에 관계된 것이었다. 비록 외적(外賊)을 평정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한 것에 견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판리(辦理)한 지 이미 7년에 이르러 군사를 통솔했던 대신들이 비바람을 무릅쓰고 온갖 간고(艱苦)를 겪었으며, 아울러 조정에 있으면서 그 기략(機略)에 참여하여 이를 도모했던 대신들도 각기 마음과 힘을 다 기울여 큰 공(功)을 이루었으니, 두루 은륜(恩綸)에 젖게 하고 성대한 상(賞)을 내려 그 공에 보답함이 진실로 마땅할 것이다. 안으로는 성친왕(成親王) 이하로부터 밖으로는 액륵등보(額勒登保) 이하 각 성(省)의 독무 총병(督撫總兵) 및 군교(軍校) 등에 이르기까지 각기 상급(賞給)을 더하고, 중외에 통유(洞諭)하여 모두 이를 알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 유지(諭旨)로써 살펴보건대, 교비(敎匪)의 전역(戰役)은 이제 7년 만에 이미 소탕되어 평정된 듯합니다.
1. 상칙(上勅) 산질 대신(散秩大臣) 성덕(成德)은 대대로 후작(侯爵)을 물려받고 품계(品階)에 따라 천전(遷轉)하였는데, 성품이 비루하고 잗달아 검속(檢束)함이 없으며, 사무(事務)도 익숙하게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칙(副勅) 내각 학사(內閣學士)겸 예부 시랑(兼禮部侍郞) 명지(明志)는 처음에 홍려시 명찬(鴻臚寺鳴贊)에 임명되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소경(少卿) 부윤(府尹)을 역임하고, 작년 가을에 특별히 내각 학사에 제배(除拜)되었으며, 태상시(太常寺)의 사무도 겸하여 살피고 있는데, 공정하게 봉직(奉職)하기 때문에 지위가 경이(卿貳)에 이르러 바야흐로 위임받아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승지 홍희운(洪羲運)을 경주부(慶州府)에 정배(定配)하였다. 종묘서 영(宗廟署令)의 망통(望筒)047) 에 대해 미처 낙점(落點)을 내리지 않았는데, 갑자기 외방에 있다고 하면서 변통하기를 입품(入稟)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배소(配所)에 도착한 후에 석방하였다.
윤2월 19일 갑신
책봉 주청 정사(冊封奏請正使)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은 아들과 사위 가운데 한 사람을 초사(初仕)에 조용(調用)하게 하고, 부사 한만유(韓晩裕)는 자헌 대부(資憲大夫)를 가자(加資)하게 하며, 서장관(書狀官) 민명혁(閔命爀)은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하라고 명하였으며, 노비(奴婢)와 전결(田結)을 각기 차등 있게 주도록 하였다.
소대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윤2월 20일 을유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평안 병사 신대영(申大偀)의 보장(報狀)에 이르기를, ‘고성진(古城鎭)은 전에 가산군(嘉山郡) 방수장(防守將)에 소속시켜 매년 주진(主鎭)의 고을에 나아가 조련(操鍊)했었는데, 장용영(壯勇營)에 이속(移屬)한 후 독진(獨鎭)으로 마련하여 12월과 1월의 조련을 해당 진에서 설행하였습니다. 장용영을 철파(撤罷)한 후에는 그전같이 방수장에게 도로 소속시키거나, 혹은 인하여 독진으로 만들던지간에 빨리 처분(處分)을 내려 주소서.’ 하였습니다. 장용영에 이속한 후 독진의 제도를 만든 것은 옥계령(玉雞嶺)의 지름길이 곧바로 본진(本鎭)과 통하기 때문인데, 효성(曉星)과 옥계 두 영(嶺)은 모두 가산의 땅이니, 옛사람이 독진을 설치하지 않고 가산의 방수장에게 소속시켰던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청컨대 옛 제도대로 방수장에게 도로 소속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정읍(井邑)에 있는 정휘 옹주방(貞徽翁主房)의 면세전(免稅田)을 타량(打量)하였을 때 민폐의 유무(有無)에 대해서 도신(道臣)이 조사하여 보고한 것을 보았더니, 그것이 절수(折受)한 땅이 된다는 것은 근거할 바가 없지 않았으나, 처음에는 잠매(潛賣)로 인하고 마침내 전매(轉買)를 이루게 되었으며,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자기의 물건으로 인정(認定)해 온 지 이미 1백여 년이나 오래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만약 그 근원을 구명하여 추징(推徵)한다면 계제(階梯)가 여러 번 바뀌어 빙핵(憑覈)할 길이 없으며, 또 도매(盜買)의 법으로 의율(擬律)하고자 한다면 허다한 소민(小民)들이 먹을 것을 잃어 소요(騷擾)를 일으킬 것이니, 더욱 민망스러운 일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도신의 계사(啓辭)에 의거하여 묻지 말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궁방(宮房)·아문(衙門)을 물론하고 경외(京外)의 무뢰배들이 혹 주인 없는 광토(曠土)라고 일컫거나 혹은 해가 오래된 철폐한 전장(田庄)이라고 일컬어 다투어 와서 거짓으로 고한다면, 관문(關文)을 보내어 타량(打量)할 즈음에 미쳐 민정(民情)이 소요를 일으켜 하지 않는 짓이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도 이 폐단에 대해 깊이 진념(軫念)하여, 각 궁방 및 각 아문과 이와 같이 진고(陳告)하는 무리는 반드시 엄중하게 형신(刑訊)하여 원배(遠配)하게 해서 그 습관을 통렬하게 징계하셨으니, 민은(民隱)을 곡진하게 살피신 성덕(聖德)을 누군들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이후에 혹시라도 광토(曠土)나 철폐한 전장(田庄)이라 일컫고, 이를 빙자하여 진고(陳告)함으로써 민읍(民邑)의 폐해를 초래할 경우 즉시 붙잡아 한결같이 선조의 수교(受敎)에 의거하여 한편으로는 장문(狀聞)하고 한편으로는 형배(刑配)하라는 뜻으로 제도(諸道)의 도신(道臣)들에게 신칙하소서."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도지(賭地)나 매매(賣買)를 물론하고 민전(民田)이 된 지 오래 되었다고 하였으니, 비록 당초에 사패(賜牌)048) 한 땅이라 하더라도 지금 와서 어떻게 백성들을 소요스럽게 하여 환추(還推)할 수 있겠는가? 아뢴 바에 의거하여 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아뢰기를,
"지금 지극히 크고도 급한 일은 성학(聖學)을 힘써 진취하는 것만함이 없는데, 사림(士林)의 여러 사람들을 여러 번 힘써 돈독하게 불렀는데 아직도 마음을 돌릴 뜻이 없으니,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불러서 반드시 오게 할 것을 기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무릇 문학(文學)이 단아하고 정제하여 시강(侍講)을 감당할 만한 자는 반드시 오직 옥서(玉署)049) 의 신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음관(蔭官) 가운데에서도 합당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성조(聖朝)에서 인재를 거두어 널리 의뢰하여 도움을 입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게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음도(蔭途)에 국한(局限)되어 스스로 충성을 다하여 가르침을 전하려는 마음을 펼 길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음사(蔭仕) 가운데 시강을 감당할 만한 자는 많이 구할 필요 없이 힘써 정밀하게 뽑은 다음 그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강연(講筵)에 들어와 참석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좌상에게 물으니, 좌상이 말하기를,
"음관(蔭官) 가운데에서 경연관(經筵官)을 초선(抄選)하는 것이 곧 이 뜻인데, 경연관의 초선은 그 직임(職任)이 지극히 중대하므로, 선발된 자도 겸양(謙讓)하여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나아가 명에 응하는 자가 매우 적으니,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음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만약 초선으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진출하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관주가 또 아뢰기를,
"생민(生民)의 휴척(休戚)은 진실로 감사와 수령에게 매어 있는데, 만약 백성과 아주 친근(親近)한 벼슬을 논한다면, 수령만한 벼슬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수령의 선발은 진실로 충분히 주의를 더하여 적임자를 얻는 데 힘써야 합당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조에 분부하여 무릇 수령 가운데 수의(繡衣)050) 의 포계(褒啓)에 두 번 이상 든 자와 십고 십상(十考十上)051) 이상에 든 자를 초출(抄出)하여 기록하게 하고, 또 수의의 폄계(貶啓)에 한 번 이상 든 자와 십고(十考) 가운데 한 번 하고(下考) 이상에 든 자를 또한 초출하여 기록하게 할 것이며, 또 포폄(褒貶)한 내용은 사람마다 이름 아래에 요점을 추려서 주(註)를 달도록 할 것이며, 위의 두 건의 안(案)을 와내(臥內)에 두고 자주 고열(考閱)함으로써 총명(聰明)을 넓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대소의 정사(政事)에서 수령을 주의(注擬)해 들일 때에 성상께서 친히 두 안(案)을 열람하시고, 만약 혹시라도 폄안(貶案) 가운데 있는 명자(名字)가 의망(擬望)에 들어있을 경우에는 해당 전관(銓官)을 각별히 논감(論勘)하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성감(聖鑑)은 점차 현부(賢否)를 구별하는 데 익숙해지실 것이며, 해조(該曹)에서도 또한 반드시 척념(惕念)하여 거행하는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만유(韓晩裕)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삼았다.
윤2월 22일 정해
소대하였다.
심상규(沈象奎)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윤2월 23일 무자
소대하였다.
한만유(韓晩裕)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윤2월 25일 경인
훈련 대장 김조순(金祖淳)이 아뢰기를,
"군정(軍政)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것은 마정(馬政)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전에는 삼영(三營)052) 에 모두 관마(官馬)가 있었고, 본국(本局)에는 자그마치 4백여 필에 이르렀는데, 나누어 기르도록 하여 혁파한 후에 미쳐서는 본국과 두 영문(營門)의 관마(官馬)의 법은 폐기(廢棄)하기를 기필하지 않고도 저절로 폐기되었으므로, 마병(馬兵)을 지탱하기 어려워져서 기사(騎士)의 조폐(凋弊)함이 진실로 매우 민망스럽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말의 액수(額數)도 지금은 이미 감축하였으니, 전과 같이 회복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논할 수 없다 하나, 단지 편의(便宜)함에 따라 변통할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다.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지 않았을 때 제주(濟州)의 공마(貢馬)를 해마다 몇 필씩 덜어내어 내외(內外)의 영(營)에 돌려가며 주었었는데, 이제 만약 이 예에 의거하여 그 해의 공마(貢馬) 가운데 식년(式年)에는 1백 50필을 한정하고 상년(常年)에는 70필을 한정해서 본시(本寺)에서 직접 덜어내어 2분은 훈국에 소속시키고 1분은 두 영에 소속시키게 한다면, 지금은 비록 부족한 듯하나 세계(歲計)는 반드시 넉넉해질 것입니다. 청컨대, 올해부터 정식(定式)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2월 27일 임진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다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조칙(詔勅)과 고명(誥命)을 받들고, 의식대로 행례(行禮)하였다. 조칙에 이르기를,
"황제(皇帝)는 조선 국왕(朝鮮國王)에게 칙유(勅諭)하노라. 왕이 아뢴 글을 보니 외람되게 번복(藩服)을 이어받았는데, 곤직(壼職)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종사(宗社)의 중대함을 생각하여 신료(臣僚)들의 청에 따라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을 맞이하여 정실(正室)을 삼고, 진주(陳奏)하여 책봉(冊封)해 주기를 청하였다. 짐이 생각하건대, 왕은 대대로 충정(忠貞)이 독실하였고 천성이 영민하였다. 이미 어진 배필을 얻어 삼가 은장(恩章)을 청하였는데, 전례(典禮)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특별히 청하는 바를 윤허한다. 이에 정사(正使) 위서(委署) 산질 대신(散秩大臣) 1등 봉의후(一等奉義侯) 성덕(成德), 부사(副使) 내각 학사(內閣學士) 겸 예부 시랑(兼禮部寺郞) 명지(明志)를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어 가지고 가서 김씨(金氏)를 봉하여 국왕비(國王妃)로 삼아 왕을 도와 내치(內治)를 다스리게 하며, 아울러 채폐(綵幣) 등의 물품을 내려 준다. 오로지 왕과 왕비는 처음부터 복서(福緖)를 누리고 함께 아름다운 본보기를 계승하였다. 나라의 터전에 밝은 전당(殿堂)을 열었고, 부인(婦人)의 법도에 따라 궁녀(宮女)들을 통솔하였다. 번방(藩邦)의 법조(法條)를 펴서 왕화(王化)를 입혔으니 그 모유(謨猷)를 실천하였고, 고상한 규범(閨範)은 의례(儀禮)를 준수하였으니 덕(德)을 부지런히 닦았도다. 병한(屛翰)에서 나라의 방어(防禦)를 독실하게 하였으니 인민(人民)을 근본으로 삼았고, 본종(本宗)과 지파(支派)는 면면히 이어지는 상서(祥瑞)를 차지하였으니 자손(子孫)에게 베풀었노라. 더욱 공순(恭順)함을 밝혀서, 진실로 포숭(褒崇)하는 뜻에 부응하되, 공경하여 변함이 없도록 하라. 짐이 명하여 특별히 고명(誥命)을 하유(下諭)하라고 명하노라."
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가 제(制)하기를,
"번방(藩邦)에서는 대대로 선대로부터 공순한 정성을 이어받았고, 빈(嬪)은 부지런하여 대내(大內)에서 충정(忠貞)의 규모를 바로잡았다. 그 예물(禮物)을 닦아 후비(后妃)의 책봉(冊封)에 혜훈(惠訓)을 밝혔고, 그대 군자의 배필에 마땅했으니 규문(閨門)에 순박한 풍속이 감돌았도다. 국가의 의식(儀式)을 선양하여 아름다운 모유(謨猷)를 협찬(協贊)하였고, 여사(女史)가 향기로움을 드러내었으니, 이에 의호(懿號)를 반사(頒賜)하노라. 그대 조선 국왕의 처 김씨(金氏)는 훌륭한 가문(家門)에 태어나, 아늑한 규중(閨中)에서 덕을 길렀다. 잠도(箴圖)에서 숙성(淑性)을 본받았고, 부보(傅保)에서 어진 계모(計謨)를 익혔다. 상서의 점을 쳐서 후비에 간택되어 마침내 금슬(琴瑟)이 화합하였고, 계명(雞鳴)053) 의 경계를 힘써 지켜 비단을 짜는 데에 본을 보였노라. 정성을 다해 제사를 주관하였으니 나물 캐는 노래는 멀리 남국(南國)에서 들려왔고, 은택(恩澤)을 구하여 글에 올렸으니 충성으로 정삭(正朔)의 역서(曆書)를 받들었다. 더욱이 한가한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자전(慈殿)을 기쁘게 모셨고, 용안(龍顔)에 화기(和氣)가 넘쳤으니 영화와 명예가 빛났도다. 그대를 특별히 봉하여 조선국(朝鮮國)의 왕비(王妃)로 삼는다. 단륜(丹綸)으로써 크게 장려하니 적불(翟茀)054) 의 영화가 더하였고, 동관(彤管)055) 으로서 어진 규모를 썼으니 작소(鵲巢)056) 의 감흥(感興)을 읊었노라. 여러 신하가 임금을 옹호했으니 궁중(宮中)의 일을 엄숙히 다스렸고, 아름다운 배필이 곁에 있으니 나라의 기업(其業)을 도와 밝게 빛났도다. 아! 아름다운 의장(儀章)을 넉넉히 내렸으니 곤위(壼闈)에 예의의 풍속이 포양(褒揚)되었고, 길조(吉祚)가 상서를 맞이했으니 대려(帶礪)057) 의 맹세는 번창한 복록을 누릴 것이로다. 더욱 영범(令範)을 숭상하여 진실로 풍성한 은혜를 받게 할지니, 공경하라."
하였다. 총계는 다음과 같다. 대망단(大蟒緞) 2필, 장단(粧緞) 2필, 금단(錦緞) 2필, 왜단(倭緞) 2필, 섬단(閃緞) 2필, 모단(帽緞) 2필, 의소단(衣素緞) 2필, 대단(大緞) 3필, 팽단(彭緞) 3필, 석청단(石靑緞) 2필, 방사주(紡紗紬) 4필, 사(紗) 4필이었다. 조칙을 선포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상칙(上勅)과 부칙(副勅)을 접견하고, 인하여 연례(宴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전내(殿內)로 들어가서 석단(席端)에 나아가 동쪽으로 향하여 섰다. 어전 통사(御前通事)가 두 번 배례(拜禮)하기를 청하였는데, 칙사(勅使)가,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며 사양하자, "예(禮)이니 감히 명(命)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칙사가 또 사양하자, "손님과 주인이 처음 상견(相見)하는 예는 폐할 수 없으며, 더욱이 대인(大人)은 황명(皇命)을 받들고 먼 길을 왕림하였으니, 예의(禮儀)대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칙사가 또 사양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읍례(揖禮)로 행하게 하소서." 하자, 답하기를, "대인께서 명을 하셨으니, 마땅히 읍례를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 번의 배례(拜禮)에는 교배(交拜)하는 예가 없으니, 읍례 또한 서로 읍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먼저 대인에게 읍하면 대인께서 답례로 읍하는 것인데, 일시에 두 대인에게 아울러 읍하는 것은 또한 공경함을 잃는 데 관계되니, 먼저 상칙 대인에게 읍한 다음 부칙 대인에게 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먼저 읍하시면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흠차(欽差)는 사체가 중대하니, 주인이 먼저 읍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여러 차례 하교가 이에 이르니, 어떻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읍례를 행하기를 마친 다음 말을 전하기를, "황상(皇上)께서는 기후(氣候)가 어떠하십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평안 하십니다." 하였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들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인하여 어전 통사에게 명하여 말을 전하게 하기를, "제왕 패륵(諸王貝勒)께서는 안부가 어떠하십니까?" 하자, 칙사가 답하기를, "모두 평안하십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봄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았고, 길이 멀고 험한데, 여러 대인들께서 달려온 나머지에 기력(氣力)이 어떠하십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길에서 무사(無事)하였고, 접대가 매우 융숭하였으니 도리어 미안합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소방(小邦)에서 앞뒤에 받은 황은(皇恩)이 천지와 더불어 한정이 없으며 공고(控告)할 때마다 번번이 준거하여 시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가례(嘉禮)를 행함에 있어 사신을 보내어 주청하였는데, 사신이 돌아오자마자 고칙(誥勅)을 뒤따라 반포하였으니, 온 나라가 영광(榮光)을 입어, 감대(感戴)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황상의 특은(特恩)이니, 우리들에게 치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마땅히 이러한 뜻을 돌아가서 황상께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여러 대인께서 해외(海外)에 광림(光臨)하신 것은 오로지 소방의 책례(冊禮)를 위해서이니, 무릇 접대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방은 사력(事力)이 미치지 못하여 일로(一路)의 범절(凡節)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주인의 도리에 있어서 겸연쩍어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강을 건넌 후 접대하는 절차가 지극히 관곡(款曲)하여 한 물건도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여러 대인들께서 황상의 소방을 무애(撫愛)하시는 덕을 본받아 소방의 조잔하고 피폐된 실상을 굽어살펴 연로(沿路)의 연향(宴享) 등 응당 행해야 할 일들을 아울러 견면(蠲免)하도록 허락하셨으니, 그 후의(厚意)는 비록 매우 감사하지만, 공대(供待)가 너무 소홀한데 관계되어 주인의 마음이 진실로 매우 불안합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곡진하게 성념(盛念)을 입고 바야흐로 면대하여 사례하려 하는 즈음에 지나치게 겸손하신 말씀을 하시니, 더욱 불안합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차[茶]를 올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삼가 명을 듣겠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다례(茶禮)를 행하였는데, 공인(工人)·가자(歌者) 및 무동(舞童)이 뜰에 올라와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차를 올리기를 마치자, 말을 전하게 하기를, "통관(通官) 이하에게 차를 내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차를 내리시겠다는 하교가 성의(盛意)에서 나왔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인하여 통관 5인에게 기둥 밖에서 차를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진찬(進饌)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이미 배가 부르고 차도 내리셨는데, 어찌 거듭 진찬을 베풀겠습니까? 날이 저물어가니, 속히 관소(館所)에 돌아가면 다행스럽겠습니다." 하였다. 답하기를, "변변치 못한 물건을 이미 갖추어 놓고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지나치게 사양하십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 음식을 배불리 먹었는데, 또 이와 같이 강청(强請)하시니, 마땅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연례(宴禮)를 행하도록 명하고, 말을 전하게 하기를, "여러 대인들께서 오늘날 행차하신 것은 소방에 영감(榮感)이 지극합니다. 물건이 비록 변변치 못하지만 뜻은 간절하니, 억지로 드셔서 이 구구한 정성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마땅히 마음껏 들겠습니다." 하였다. 술잔을 세 번 돌린 후 말을 전하게 하기를, "통관 이하에게 찬물(饌物)을 내려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날이 이미 늦었으니, 관소로 보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말을 전하게 하기를, "술잔을 한 번 주고 한 번 받는 것이 손님과 주인의 예인데, 돌아보건대, 주량(洒量)이 크지 못하여 많이 들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대인들께서는 다행히 정상을 살펴 이해하시고, 다시 몇 잔을 더 들어 오늘의 기쁨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저희들도 주량(洒量)이 적어서 양껏 모두 마셨습니다." 하였다. 다섯 잔을 올린 후 칙사가 말하기를, "또한 이미 실컷 마셔 취하였고, 날이 또 저물었습니다. 아침부터 옥체(玉體)가 노동(勞動)하셨으므로, 매우 민망스러우며, 저희들도 피곤하니, 잔치를 마치고 물러가면 좋겠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주례(洒禮)는 미처 이루지 못하였으나, 지나치게 사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성념(盛念)이 이에 이르니, 마땅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찬(大饌)을 올리고 완배례(完杯禮)를 행하고 나서 말을 전하게 하기를, "상을 물리기를 청합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술잔을 건넨 수가 많아서 이미 취하고 배부르게 먹었으나, 바야흐로 옥체의 노동이 너무 많았던 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이제 하교를 받았으니, 마땅히 파하고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하였다. 음식을 거두어 치운 후 말을 전하게 하기를, "여러 대인들께서 발섭(跋涉)하신 나머지 많이 피곤하실 것입니다. 이곳에서 서회(敍懷)하시는 것이 비록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지만, 장시간 만류하는 것도 또한 불안한 바가 있습니다. 명일 마땅히 관소(館所)에 나아가 몸소 기거(起居)를 묻겠습니다. 구치(驅馳)하신 나머지이니, 사관(舍館)이 누추하겠지만, 오로지 조식(調息)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하자, 칙사가 말하기를, "실컷 마셔 취하고 돌아가니 이미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내일 임어하시면 조용히 배례(拜禮)하기를 기필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읍례를 행하고 칙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임금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기를, "장차 문 밖에 나아가 전송하겠습니다." 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성의가 이와 같으나, 의절은 초솔(草率)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칙사가 말하기를, "종일 노동(勞動)하셨으니, 멀리 임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즉시 궐내(闕內)로 돌아가시기만 바랍니다." 하자, 답하기를, "주인의 예는 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층계 위에 이르러 읍례를 행하고, 인정문(仁政門) 밖에 이르러 통관(通官)들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위문하게 하기를, "그대들은 무사히 나왔는가?" 하자, 통관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잘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輿)를 타자 칙사 또한 교자(轎子)를 타고 나갔다. 인하여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돈화문(敦化門)에서 문안하게 하고, 인하여 협양문(協暘門)을 경유하여 궐내(闕內)로 돌아왔다.】 칙사가 관소로 돌아가니, 승지를 보내어 위문하게 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고, 반교(頒敎)하고 반사(頒赦)하였는데, 권정례(權停例)058) 로 하였다.
이서구(李書九)를 반송사(伴送使)로 차출하였다.
윤2월 28일 계사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칙사를 접견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재신(宰臣)을 보내어 칙사를 위문하게 하였다.
헌납 송응규(宋應圭)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중신 이병정(李秉鼎)은 원래 있었던 탐탁(貪濁)한 습성이 늙음에 들어 더욱 횡포(橫暴)하여 내직(內職)에 있거나 외직(外職)에 있거나 귀신같이 징렴(徵斂)하여 조금이라도 뇌물에 속하면 하찮은 것도 남김이 없어 가혹하게 재물을 이루었으므로 전신(錢神)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염치(廉恥)를 모두 상실한 채 탄핵(彈劾)을 견디는 것이 거의 탄력성(彈力性)이 있는 솜보다 심하고, 의욕을 내달아 영리(榮利)에 다다르는 것이 마치 매[鷙]와 같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리저리 패합(捭闔)하며 늘어 놓는 담변(談辯)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고 좌우로 영합(迎合)하는 수단이 매우 익숙하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문병(文柄)을 도둑질하여 때로 거듭 과시(科試)를 주관하였으므로, 청금(靑衿)059) 의 무리는 모두 물러갈 마음을 품었고 홍분방(紅粉榜)060) 이라고 장차 손가락질하여 비웃는 지목을 이룰 것이니, 이것은 곧 온나라 공공(公共)의 의논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멀리에서 온 신하를 살피자면, 반드시 가까이 있는 신하부터 시작하여 살핀다.’고 하였습니다. 오로지 전하께서는 이를 생각하셔서 빨리 처분(處分)을 내리심으로써 여정(輿情)을 흔쾌하게 하소서. 전 승지 이경운(李庚運)이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있을 때에, 비루하고 잗달다는 비방은 낱낱이 들추어내기가 어렵지만, 가장 큰 것으로는 소나무를 베어 이익을 탐한 정상인데 남쪽에서 온 사람으로 침을 뱉아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또 수리(水利)의 역사를 일으켜 농무(農務)를 권장하라는 조정의 칙령(飭令)이 얼마나 거듭 내려졌습니까? 무릇 수령이 된 자는 백성들이 방죽을 쌓는 역사를 일으킨 것을 들었으면, 마땅히 양식을 빌려 주고 정역(丁役)을 도와 주어 기꺼이 참여하여 이를 이루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자기의 이익만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이에 참착(參錯)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경운은 고을 백성들이 보[洑]를 쌓은 곳에 연정(煙丁)을 조발(調發)하여 겉으로는 공역을 동독한다고 말하나 노명(奴名)을 헤아려 실려 속으로는 자기의 사복(私腹)을 차려 고을 사람들이 경조(京兆)061) 에 정변(呈辨)하기에 이르렀으니 진신(搢紳)의 수치(羞恥)가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데도 장오(贓汚)의 율(律)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탐묵(貪墨)한 수령의 불법(不法)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경운에게 병예(屛裔)의 율을 빨리 시행하는 일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의 일에 대한 그대의 논척(論斥)이 어찌 그리도 몹시 심한가? 이경운에 대한 일이 참으로 그러하다면 조정에 치욕을 끼쳤다고 할 수 있으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본도에 사문(査問)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교리 이동면(李東冕)이 상소하여 권면(權勉)하는 말을 진달하였다. 선대왕(先大王)의 학문을 좋아하고[好學], 하늘을 공경하며[敬天], 백성을 보살피고[恤民], 정사에 부지런하며[勤政], 간언을 받아들이고[納諫], 검소함을 숭상한[崇儉] 성덕을 두루 진달하고, 그 뜻과 사업을 잘 이어받아 좇을 것을 우러러 청하니,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윤2월 29일 갑오
승지를 보내어 칙사를 위문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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