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정묘
《선원보략(璿源譜略)》의 증수(增修)를 완성하였다.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施賞)하고, 종부시 정 정만석(鄭晩錫)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다.
노인들에게 별세찬(別歲饌)을 반사(頒賜)하고, 인하여 존문(存問)하도록 명하였는데, 해마다 하는 규례(規例)이었다.
1월 1일 정묘
행 호군 이한풍(李漢豐)이 졸(卒)하였다. 이한풍은 덕수(德水) 사람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이다. 지위가 원융(元戎)에 이르렀는데, 청렴하고 검소하여 법(法)을 받들었으며, 한사(寒士)와 같이 옷차림이 소연(蕭然)하고 수신(帥臣)들 가운데 가장 조수(操守)가 있었다고 한다.
1월 2일 무진
응자 노인(應資老人)들에게 하비(下批)하였는데, 1백 세가 된 사람이 39인이었다.
1월 4일 경오
진강(進講)할 때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001) 과 대신들에게 차례로 돌아가며 입참(入參)하도록 명하였다.
1월 9일 을해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여 【이조 판서 정대용(鄭大容), 병조 판서 이조승(李祖承)이다.】 김달순(金達淳)을 이조 참판으로, 김이양(金履陽)을 참의로, 백동운(白東運)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1월 10일 병자
승지 홍희운(洪羲運)이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용감 부봉사(濟用監副奉事) 신혜연(申惠淵)은 곧 재작년 국청(鞫廳)에서 참작하여 처리했던 죄인 신여권(申與權)의 친숙부입니다. 재작년 봄 사옥(邪獄)이 처음 일어났을 때 신여권이 제일 먼저 붙잡혀 추조(秋曹)002) 에서 정배(定配)하였었습니다. 그리고 재작년 가을에 역적 조사기(趙嗣基)가 체포되기에 이르러서는 신여권의 흉장(凶贓)·사호(邪號)가 문서(文書)에 난만하게 드러났고, 맥락(脈絡)과 혜경(蹊逕)이 역적의 초사(招辭)에서 긴요하게 나왔는데, 어찌 이 역적의 친숙부로 하여금 양양하게 의관(衣冠)의 반열에 거듭 끼어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혜연을 군함(軍銜)에 붙이고 미처 구처(區處)하지 않은 지 이제 3년이 되었는데, 몇 번의 대정(大政)을 거치면서도 거론하지 않은 것이 어찌 이전의 정관(政官)들이 대부분 잊어버리고 버려 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만하나 철안(鐵案)이 그에게 달려 있으므로, 일찍이 그사이에 재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전신(銓臣)이 갑자기 제출하여 마치 엄체된 것을 떨쳐 일으키듯이 하고 있는데, 어찌 혹시라도 본일에 대해 전혀 몰라서 이러한 차오(差誤)가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바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혜연의 일은 전관이 어찌 혹시라도 사옥(邪獄)에 대해 엄중하지 않아서 그러하였겠는가? 그대의 직위에 벗어난 말이 또한 지나치다."
하였다.
1월 11일 정축
윤대(輪對)하였다.
성균관에서 아뢰기를,
"지난해 12월에 태학(太學)에서 역적 조덕린(趙德隣)을 징토(懲討)하는 일로써 장차 소장(疏章)을 올리려 하였는데, 마침 장의(掌議)가 외방(外方)에 있었으므로, 그를 맞이해 오기 위해 노복과 말을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통화문(通化門) 밖에 이르렀을 때 한 궁노(宮奴)가 길을 가로질러 와서 말을 빼앗은 다음 한 자수(紫袖)003) 를 태워 가버렸으니, 도로에서 이를 본 사람들이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기강이 있는 바에 지난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해 내어 엄중히 처분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추조(秋曹)로 하여금 용동궁(龍洞宮)의 궁노를 조사해 알아내어,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1월 12일 무인
이조 판서 정대용(鄭大容)이 상소하여 신혜연(申惠淵)의 일을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무심(無心)함을 내가 이미 살펴서 죄다 알고 있다."
하였다.
1월 14일 경진
집의 윤우열(尹羽烈)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조덕린(趙德隣)의 소어(疏語)가 지극히 흉패(凶悖)하였음은 이미 대간(臺諫)의 장계와 정원의 소장에서 다 드러났으니, 신이 어찌 거듭 일을 나열하겠습니까? 대개 우리 선대왕께서 무신년004) 에 내리신 처분은 역적 조덕린이 무죄(無罪)라고 여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군공(軍功)을 추가로 기록함에 있어 역신(逆臣) 채제공(蔡濟恭)이 감히 역적 조덕린의 소모(召募)한 이름을 빙자하여 충의(忠義)를 용동(聳動)시켰다는 말을 지어내어 성총(聖聰)을 현혹시킴으로써 이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후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여러 번 사교(辭敎)를 드러내시는 즈음에 항소(抗疏)했던 사람들에 대해 권주(眷注)가 매우 돈독했었으니, 한때의 처분이 선조(先朝)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우러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대소(臺疏)가 다행히 10년 동안 잠잠하던 가운데 나왔는데, 일률(一律)의 법을 이 역적에게 시행하지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자성(慈聖)께 우러러 품지(稟旨)하여 빨리 대신(臺臣)에게 비답을 내리시고, 흔쾌히 엄중하게 처분하라는 명을 내리소서. 비록 그 당시 승선(承宣)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금령(禁令)을 핑계대어 대소(臺疏)를 물리친 것은 출납(出納)을 정성껏 하는 사체를 크게 잃었고 한창 일어나고 있는 공론을 한만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착인(錯認)했다.’고 말한다면 받아들여 혹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겠으나, 당소(堂疏)가 준엄하게 일어났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관서(關西)에 무릅쓰고 부임한 것은 비록 외방에 보직하라는 엄명으로 인한 것이라 하겠으나, 염치와 예방(禮防)을 모두 상실하였으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해괴(駭怪)하게 여깁니다. 신은 서유구(徐有榘)에게 파직(罷職)의 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혜연(申惠淵)의 일은 그가 사괴(邪魁)의 친숙부로서, 요행히 왕장(王章)에서 벗어나 방자하게 음직(蔭職)에 견복(甄復)되매, 여러 번 의망(擬望)에 배비(排比)되어 거의 차서(次序)에 따라 승진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관(銓官)은 무엇 때문에 사얼(邪孼)을 돌보아 이와 같이 급급하게 끌어서 발탁하는 것입니까? 또 역적 조시위(趙時偉)의 지친(至親)의 천얼(賤孼)을 영장(營將)에 제수하고, 선정(先正)을 오욕(汚辱)한 패악한 무변(武弁)을 또 부사로 승진시켰습니다. 정동간(鄭東幹)에 이르러서는 전부터 역적 정동준(鄭東浚)의 친족이고, 또 적당에 붙좇았던 혈당(血黨)이었습니다. 그리고 병든데다가 또 미쳤으므로 오랫동안 정망(政望)에 지색(枳塞)당해 왔었는데, 지금 갑자기 곧바로 관직(館職)에 주의(注擬)하여, 돌아보아 꺼리는 바가 없었습니다. 무릇 흔얼(釁孼)의 자취를 널리 찾아 구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니, 대개 그 뜻은 사옥(邪獄)의 의리에 대해 불평(不平)을 품었기 때문에 그 당류에 편들고, 소굴(巢窟)을 그리워하여 조시위·정동준에 대해 성기(聲氣)를 서로 연접하여 문관(文官)·무관(武官) 양쪽의 친속(親屬)들을 취(取)한 것입니다. 또 저 선정을 미워하여 모욕한 것은 비록 이것이 본래의 습관이라 하나, 진실로 공의(公議)를 돌아보았다면, 이와 같이 완악(頑惡)한 무리를 맨 먼저 승천(陞遷)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밝은 처단을 내리셔서 신혜연의 제용감 부봉사, 이해승(李海昇)의 해미 현감, 유성태(柳聖台)의 하동 부사, 정동간의 관함(館銜)을 아울러 시행하지 말도록 하고, 이조 판서 정대용(鄭大容)에게 간삭(刊削)의 법을 먼저 시행하여 사당(邪黨)을 비호하고 나라를 저버린 죄를 징치(懲治)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덕린에 대한 일은 마땅히 동조(東朝)께 우러러 품지하겠다. 이조 판서의 일에 대해 논단(論斷)한 것은 곧바로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몰았으니, 본일의 어떠함을 막론(莫論)하고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공평(公平)하고 충후(忠厚)한 기풍을 크게 잃은 것이니,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윤허하지 않겠다."
하였다.
부수찬 이기헌(李基憲)이 상소하여 조덕린(趙德隣)을 징토(懲討)하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끝에 전관(銓官)이 도정(都政)을 잘못한 것에 대해 진달하기를,
"이영로(李永老)는 이미 국가에 죄를 범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영구히 폐기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염의와 예방(禮防)을 무너뜨렸으니 청의(淸議)에 지색(枳塞) 당한 것은 또한 면하지 못할 형세이었습니다. 설사 이영로에게 발탁할 만한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서서히 해야 마땅하니, 불식(拂拭)하고 세척(洗滌)함을 어찌 점차로 하는 기회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급급하게 청선(淸選)에 주의(注擬)하여 거의 공의(公議)와 승부를 겨루듯이 하고 있으니, 이에 따라 사유(四維)005) 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창피(猖披)하고 방자한 무리가 대부분 이러한 마음을 먹어 기탄(忌憚)하는 바가 없을까 그윽이 두렵습니다. 신은 원하건대, 이영로에 대한 삼사(三司)의 천망(薦望)을 우선 먼저 삭제하여 공의를 기다리게 하고, 해당 전관도 또한 견삭(譴削)의 율을 시행하소서. 또 이번의 대정(大政)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조카가 사옥(邪獄)의 죄를 범하였는데도 어려워함이 없이 검의(檢擬)하였습니다. 그 친숙부는 비록 승진될 차례의 자리라고 핑계대고 있지만, 마침내 엄중하게 징토하는 의리를 잃었으니, 이것이 어찌 의리를 굳게 잡아 지킬 자가 할 바이겠습니까? 대각(臺閣)이 어떠한 중망(重望)인데 어렵사리 의리에 죄를 범한 자를 구하여 주의(注擬)하는 것이며, 영관(瀛館)이 어떠한 청선(淸選)인데 청의(淸議)에 버림받은 자들을 모아서 주의하는 것입니까? 이는 고의로 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요원(僚員)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도 혼자 정석(政席)을 담당하여 삼사에서 발거(拔去)한 사람을 제멋대로 중망(重望)에 소통시켰으니, 이와 같은 정격(政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이번의 정사에서 주의한 수령(守令)의 초사자(初仕者)들은 인척(姻戚)의 집안에서 겨우 상피(相避)를 모면한 자가 많다고 합니다. 그 가까이 아는 사람을 천거하는 의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나, 단지 성조(聖朝)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방도가 아마도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조정(調停)해서 마땅함을 얻고자 하시지만, 전지(銓地)에서는 공의를 저버린 채 사의(私意)를 행하며 날뛰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작은 근심이겠습니까?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수(自首)하게 해서 일일이 개차(改差)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덕린에 대한 일은 자성(慈聖)의 처분(處分)을 나 또한 공손히 기다리고 있다. 이영로에 대한 일은 지난번에 대신(大臣)의 복계(覆啓)에, 이미 지색(枳塞)하는 의논이 없었으니, 어찌 영구히 폐기할 이치가 있겠는가? 이판(吏判)에 대한 일은 겨우 한 번 정사를 행하자마자 문득 탄박(彈駁)을 받았으니, 누가 다시 전지에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그대가 의망(擬望)에 따라 논척(論斥)함은 너무 가혹하니, 윤허하지 않겠다. 초사(初仕)의 수령들에게 자수하게 하여 개차(改差)하라는 청은 그대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막히고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것인가? 〈인척의 집안에는〉 상피(相避)가 없더라도 주의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이 법전(法典)인가? 전부터 전관이 한 번도 이와 비슷한 데에 관계된 적은 없었는가? 그대의 말은 극도로 그릇된 것이다."
하였다.
사간 박서원(朴瑞源)이 상소하여 조덕린(趙德隣)을 징토(懲討)하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끝에 전관(銓官)이 도정(都政)을 잘못한 것에 대해 진달하기를,
"이영로(李永老)·정동간(鄭東幹)·심달한(沈達漢)과 같은 무리를 뜻을 다해 찾아 모아 앞뒤로 발탁하여 등용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대저 그 허물을 숨기고 벼슬에 천거하는 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일입니까? 더욱이 본 일은 애초에 아주 흐리멍덩한 일이 아니었으니, 무릇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다면 진실로 통렬하게 단절하는 데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에 다시 경악(經幄)의 직임(職任)에 임명하였습니다. 어진 이와 바른 이들을 장해(狀害)하여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하려 하였고, 역적을 비호하며 당파에 골몰하여 대론(大論)에 참여하지 않은 데 이르러서는 괴귀(怪鬼)같은 불령(不逞)한 무리가 아님이 없었습니다. 덕으로 여길 것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어려워함이 없이, 차례로 배비(排比)하여 주의(注擬)하는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신혜연(申惠淵)과 같은 자는 전해진 삭수(朔數)를 기다려 옮겨 주의(注擬)하라는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기한이 차지 않아서 차제(差除)한 것은 또한 밝힐 만한 단서가 있는 것입니까? 사면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는 계책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숨기기 어려웠고, 교활한 습관은 몇 가지의 일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선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하는 것을 결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장지면(張至冕)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1월 15일 신사
종묘(宗廟)와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영의정 이시수(李時秀)가 두 번 상소하여 견책(譴責)할 것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돈면(敦勉)하였다.
김근순(金近淳)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으로 삼았다.
서울의 각사(各司)와 각영(各營)에서 임술년006) 의 회계부(會計簿)를 바쳤다. 【현재 있는 황금(黃金)이 2백 47냥 영(零)이고, 은자(銀子)가 38만 6천 3백 80냥 영이며, 전(錢)이 60만 6천 5백 냥 영이고, 면주(綿紬)가 1백 21동(同) 20필 영이며, 면포(綿布)가 6천 8백 27동 20필이고, 마포(麻布)가 14동 20필이며, 쌀[米]이 43만 1천 5백 76석 영이며, 전미(田米)가 8천 4백 44석영이고, 황두(黃豆)가 3만 3천 5백 13석 영이며, 피곡(皮穀)·잡곡(雜穀)이 1만 2천 1백 2석 영이었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7책 447면
【분류】재정-국용(國用)
[註 006] 임술년 : 1802 순조 2년.
1월 16일 임오
영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정사(呈辭)하였으나, 봉환(封還)하였다.
1월 17일 계미
진강(進講)하였다. 영사(領事)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이번의 이비(吏批)007) 에 대한 도정(都政)은 과연 물정(物情)이 억울하게 여기는 바가 있었는데, 언자(言者)를 곧바로 사당(邪黨)에 몰았으니, 크게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공평한 의논이 아니다."
하였다.
죄가 가벼운 죄인들을 석방하였다.
헌부(憲府) 【지평 정언인(鄭彦仁)이다.】 에서 계청(啓請)하기를,
"물고(物故)된 죄인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총억(李寵億)에게 찬배(竄配)의 율을 베푸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신귀조(申龜朝)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덕린(趙德隣)의 흉패(凶悖)한 정상은 이미 삼사(三司)의 소장에서 다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역신(逆臣) 채제공(蔡濟恭)은 세월이 오래 되고 일이 결판(決判)된 후에 감히 반안(反案)008) 할 계책을 품고 방자하게 《창의록(倡義錄)》에 섞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불령(不逞)하고 추악한 무리를 불러 모으고 무식하고 패려(悖戾)한 유신들을 꾀어서 부탁하여 찬동(贊同)의 연명서(連名書)를 도득(圖得)하고 느닷없이 한 소장을 올렸으니, 마침내 복관(復官)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채제공이 역적을 위해 기치(旗幟)를 세우고 그 음도(陰圖)를 자행한 것은 진실로 이미 천지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만약 역적 조덕린을 복관시킨 채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는다면, 난역(亂逆)의 무리가 두려워함이 없어져서 1부의 《인경(麟經)》009) 도 읽어 볼 만한 땅이 없어질 것입니다. 간신(諫臣)의 원소(原疏)를 겨우 들이도록 허락하셨으나, 아직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으셨으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소서. 그 날 간신이 피혐(避嫌)하였을 때 직임이 삼사(三司)에 있는 자는 잇따라 일어나 성토해야 마땅한데,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었습니다. 신은 그 당시 말하지 않은 삼사의 신하는 현고(現告)를 받아 견파(譴罷)의 율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도목(都目)은 큰 정사이고 친림(親臨)은 성대한 일입니다. 따라서 전관(銓官)이 된 자는 이 뜻을 마땅히 본받아 마음을 깨끗이 씻고 사의(私意)를 단절하여 공평하게 처리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대양(對揚)해야 할 것인데, 정대용(鄭大容)이 한 바는 공평한 것이었습니까, 사사로운 것이었습니까? 스스로 일세(一世)의 공의(公議)가 있고 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바입니다. 단지 생각하건대, 대정(大政)은 산정(散政)과 자별한 것이므로, 아당(亞堂)010) 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수전(首銓)이 혼자 담당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니, 한편으로는 전단(專擅)의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염치(廉恥)를 배양하기 위한 도리입니다. 선조(先朝) 무오년011) 의 도정(都政) 때 중신 김재찬(金載瓚)이 장전(長銓)012) 이 되고 고 참의 어용겸(魚用謙)이 삼전(三銓)013) 이 되었었는데, 곧 들어오지 않으니, 성상께서 칙교(飭敎)하시기를, ‘만약 들어오지 않으면 지금부터 장차 도목정(都目政)은 독정(獨政)하는 그릇된 전례가 생기게 될 것이니, 곧 속히 들어도록 하라.’ 하자, 마침내 명을 받들어 함께 참여했었습니다. 이로써 상고해 보건대, 도정을 혼자 담당할 수 없음은 고규(故規)가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비록 한편으로 개정(開政)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마땅히 머뭇거리며 굳게 청하여 조금이나마 염치와 예방(禮防)을 보존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편안하게 수석(首席)에 앉아 마치 주머니 속의 물건을 탐색하듯이 하며 시기를 틈타고 없는 때를 엿보아 홀로 자기의 뜻대로 하였으니, 곧 이러한 기상(氣像)은 진실로 이미 불손(不遜)하고도 불미(不美)한 일인 것입니다. 배비(排比)하여 의망한 자는 잗단 인아(姻婭)가 아님이 없었고, 통의(通擬)한 자는 대부분 의리에 배치되는 사람들이었으니, 혹 옛 습속(習俗)이 오히려 남아 있고 소굴(巢窟)을 잊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초사(初仕)하는 수령 가운데에는 피혐(避嫌)하지 않은 사람이 많은데, 이는 기갈(飢渴)이 해를 입은 데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족히 책망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이 청명(淸明)한 시기에 의리의 제방(隄防)을 반드시 파괴하려는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유독 무슨 마음입니까? 무릇 이렇게 창궐(猖獗)하게 된 것이 비록 자초한 것이지만, 또한 독정(獨政)의 폐단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제부터 구전(舊典)을 거듭 밝혀서 도정 때에는 비록 장전(長銓)이 있더라도 아전(亞銓)·삼전(三銓)이 모두 참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개정(開政)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나게 영식(令式)을 삼고, 그 당시의 정색리(政色吏)를 유사(攸司)로 하여금 과치(科治)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삼가 법을 준수하지 않은 죄를 징치(懲治)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덕린에 대한 일은 마땅히 자전(慈殿)께 우러러 품지(稟旨)하겠다. 장전에 대한 일은 잇따라 발언하는 것이 날로 위험함을 깨닫고 있는데, 장전이 기꺼이 충심으로 복종하겠는가?"
하였다.
1월 18일 갑신
진강하였다.
봉모당(奉謨堂)의 봉심(奉審)은 매양 맹월(孟月)의 망일(望日)로서 원정일(元定日)로 삼아 거행하도록 명하였으니, 직제학 김근순(金近淳)의 주청(奏請)을 따른 것이었다.
1월 19일 을유
진강하였다. 영사 서용보(徐龍輔)가 말하기를,
"이번에 동전(東銓)이 행한 정사는 심신(審愼)함이 너무 부족하였고, 또한 전착(顚錯)된 것이 많았으니, 물정(物情)이 불평(不平)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탄핵하는 소장이 잇따라 나오고 여론이 점차 격렬하니 한결같이 벼슬에 얽매어 두는 것은 한갓 사체(事體)만 손상할 뿐입니다. 이조 판서 정대용(鄭大容)에게 빨리 견파(譴罷)의 율을 시행하소서. 관리들이 서로 규정(規正)하는 것은 어찌 밝은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오직 일에 따라 일을 논할 뿐이며 공평 정대하고 절실한 후에야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가지 대소(臺疏) 가운데, ‘사옥(邪獄)에 대해 불평(不平)하게 여기고, 사면을 돌아보며 눈치를 살피는 계책을 숨기기 어렵다.’는 등의 말을 어떻게 남에게 쉽사리 가할 수 있겠습니까? 청조(淸朝)의 충후(忠厚)한 기풍이 이와 같음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집의 윤우열(尹羽烈)과 사간 박서원(朴瑞源)에게 또한 파직의 율을 시행하소서. 당소(堂疏) 가운데 자수하게 해서 개차(改差)하라는 청에 이르러서는 성비(聖批)에 하유(下諭)한 바 막혔다고 하신 하교를 신이 진실로 흠앙(欽仰)하였습니다. 청컨대, 전 수찬 이기헌(李期憲), 전 교리 신귀조(申龜朝)를 아울러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월 20일 병술
진강(進講)하였다.
대사간 장지면(張至冕)이 상소하여 조덕린(趙德隣)을 징토하는 의리를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호군 최중규(崔重圭)는 신유년014) 봄에 한번 상소하여 스스로 충분(忠憤)에 붙여 두루 뭇 흉추(凶醜)들을 토죄(討罪)하였는데, 조덕린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더욱 간절하게 청하였으니,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한 정성은 또한 기록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말을 조심하지 않았다 하여 죄가 발배(發配)하는 데 이르렀는데, 남쪽의 황량한 땅으로 찬배되는 도중에 죽었으니, 진실로 불쌍하게 여길 만합니다. 당일로 사유(赦宥) 받은 것은 또한 은전(恩典)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일월(日月) 같은 밝음으로 이미 굽어 통촉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대저 시기(時期)는 밝고 어둠이 있으며, 일은 끝과 시작이 있는 법입니다. 신직(申)의 말은 곧 최중규의 말인데, 신직의 소장은 이미 등철(登徹)되었으니, 최중규의 소장을 민몰(泯沒)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최중규가 지난해에 진달한 여러 조목은 아울러 채납(採納)하심으로써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이심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상주(尙州)의 고 지사(知事) 성이연(成爾演)은 먼 지방의 강개(慷慨)한 선비로서, 여러 조정에서 세상에 드문 은혜를 받았습니다. 대저 기유년015) 장차 죽을 즈음에 갑자기 조덕린이 복관(復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부축을 받으며 유소(遺疏)를 입으로 불러 그 죄를 통렬하게 진달하여 성명(成命)을 정지할 것을 원하고, 그 손자에게 부탁하기를, ‘이 소장이 등철되지 않으면 나의 유해(遺骸)를 묻지 말라.’ 하였는데, 소장이 이루어진 지 이틀 만에 죽었습니다. 이에 그 손자가 소장을 가지고 궐문을 두드리며 울부짖었는데, 성상(聖上)께서 사복(嗣服)하신 초두에 당하여 비로소 등정(登呈)되어 은혜로운 비답(批答)을 받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저 영남[嶺表]의 1백 세 가까이 된 노인이 역적 조덕린의 본말(本末)을 알고 있었던 것이 더할 수 없이 상세하였으므로, 그 밝은 눈에 피눈물을 흘린 정성이 죽음에 임하여 더욱 격렬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역적 조덕린의 죄는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고, 성이연의 충성 또한 족히 숭상할 만하니,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덕린에 대한 일은 다시 우러러 품달하겠다. 최중규·성이연 두 사람의 소장에 대한 일은 유중(留中)하여 두고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마는, 포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1월 21일 정해
진강(進講)하였다.
평안 감사 김문순(金文淳)이 아뢰기를,
"의주 부윤(義州府尹) 서유구(徐有榘)는 영하(營下)에 이르러 대론(臺論)이 있었음을 말하고 임소(任所)에 나아갈 뜻이 없으니,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견보(譴補)는 천적(遷謫)과 똑같은 것인데, 어떻게 감히 거듭 ‘처의(處義)’ 두 글자를 등문(登聞)할 수 있겠는가? 이는 초망(草莽)016) 에 목숨을 맡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분의(分義)와 기강(紀綱)에 있어 모두 몹시 해연(駭然)하다. 엄중히 신칙하여 발송하게 하되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부임(赴任)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2일 무자
진강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하교하기를,
"엄중하게 징토(懲討)하여 의리(義理)를 밝히는 것은 곧 나라의 큰 정사(政事)이니, 무릇 조정에서 북면(北面)하고 있는 자는 진실로 눈을 똑바로 뜨고 용기를 내어 일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징토의 명분을 빌어 사의(私意)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간사한 소인의 무리들이 시기를 틈타 간사한 계책을 부리는 것이니, 내가 어찌 그들의 마음에 맡겨 둔 채 명백하게 엄중한 처분을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상(領相)이 조덕린(趙德隣)의 일에 대해 처음부터 엄중하게 징토한 것은 곧 상하가 아는 바이며, 지난번의 연주(筵奏)도 또한 후원(喉院)에서 받아들이지 않은 까닭을 아뢴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상하가 환히 알고 있는 바이다. 비록 옛사람의 처의(處義)로서 말하더라도, 이에 의거하여 거취(去就)의 절박(節拍)을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전에 윤우열(尹羽烈)이 상소하여 갑자기 만윤(灣尹)017) 의 일을 제기하여 심지어는, 대신으로 하여금 편안한 뜻으로 행공(行公)할 수 없게 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대소(臺疏)로 말미암아 이러한 갈등을 초래했던 것이니, 이러한데도 내버려 둔다면, 어찌 국강(國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전 집의 윤우열에게 견삭(譴削)의 율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영의정 이시수(李時秀)에게 입시하라고 하유하였다. 이시수가 상소하여 감히 무릅쓰고 나갈 수 없는 까닭을 진달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진심을 펴 보이고 이미 할 말을 다하였다.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변동하지 않는다면, 어찌 상하가 서로 믿지 못하는 소치가 아니겠는가?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끄러워서 깨우쳐 타이를 말이 없다. 그러나 한갓 돈박(敦迫)만 일삼는 것은 신하를 예로 대우하여 부리는 뜻에 결흠이 있고,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도 또한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다. 영의정 직임은 이제 우선 사면하도록 허락하겠다."
하였다.
1월 22일 무자
우찬성 송환기(宋煥箕), 대사헌 이직보(李直輔), 장령 송치규(宋穉圭)·김일주(金日柱)를 돈소(敦召)하였는데, 대사간 장지면(張至冕)의 소청(疏請)에 따른 것이었다.
1월 23일 기축
소대(召對)하였다.
1월 25일 신묘
진강하였다.
민태혁(閔台爀)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6일 임진
진강하였다.
지평 심달한(沈達漢)을 방축(放逐)하였다. 처음 신유년018) 에 삼사(三司)에서 채제공(蔡濟恭)을 성토하였는데, 당시에 심달한은 사헌부 지평으로서 대론(大論)을 규피(規避)하고, 인하여 상제(祥祭)의 곡반(哭班)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오랫동안 정망(政望)에 지색(枳塞)당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니, 대각(臺閣)과 옥당(玉堂)019) 에서 차례로 준엄한 소장을 올렸는데, 심달한이 진소(陳疏)하여 대변(對辨)하면서 말미에 징토(懲討)의 의리에 대해 진달함에 있어 단지, ‘오늘날 삼사에서 앙청(仰請)하는 것은 의리의 명맥(命脈)이다.…’ 하고, 끝내 조덕린(趙德隣)·채제공의 성명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대사간 장지면(張至冕)이 상소하여 배척하기를,
"심달한은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적당(賊黨)입니다. 채제공을 성토하던 날 대각(臺閣)에 있는 몸으로서 대론(大論)에 참여 하지 않았고 매일 패초(牌招)를 어겼으며, 또 까닭 없이 곡반(哭班)에 참여하지 않았음은 온 세상에서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구기(拘忌)’를 핑계대었으니, 그가 누구를 속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스스로 변명하는 소장이라고 일컫는다면, 마땅히 손을 떼어버리고 더럽힘을 입은 것같다는 말이 있었어야 할 것인데, 전편의 구어(句語)는 애초에 조금도 채제공과 조덕린의 일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이에서 역적을 비호하여 당류를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더욱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여러 역적들을 영호(營護)하는 방자하고 무엄한 습성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변방에 정배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저도 또한 오늘날의 신자(臣子)인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그대의 말은 너무 각박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심달한이 두 번째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였고 끝에 정신(廷臣)들의 붕당(朋黨)에 대한 폐단을 논하였는데, 장황하게 분박(噴薄)하니, 임금이 그 소장을 돌려주도록 명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곡반(哭班)에 참여하지 않은 것과 패초를 어긴 데 대하여는 모두 스스로 변명할 단서가 있으니, 사람들의 헐뜯는 말은 비록 억지로 가했다고 해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일전에 올린 소장 가운데, ‘오늘날 삼사에서 청한 바 운운.’이라고 한 것은, 그가 비록 자신을 변명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 어찌 이와 같이 숨길 수 있겠는가? 그때에 처분(處分)하지 않은 것은 대개 깊이 책망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었는데, 지금 두 번째 변명한 것은 몹시 놀랍고도 망령된 말들이었다. 한결같이 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지평 심달한에게 방축(放逐)의 율을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 정최성(鄭最成)이다.】 에서 새로 아뢰기를,
"아! 저 심달한(沈達漢)은 옛부터 채제공(蔡濟恭)에게 양육된 추류(醜類)입니다. 지나간 해에 삼사(三司)에서 채제공을 성토하였을 때 그가 헌부(憲府)에 있어 온갖 방법을 다해 규피(規避)하고, 연달아 패초를 어겼으니, 단지 사당(死黨)의 의리만 안 것이었습니다. 효원전(孝元殿) 상기(祥朞)의 저녁에 구기(拘忌)를 가탁(假託)하여 입림(入臨)하는 정반(庭班)에 참여하지 않았었으니, 이는 오로지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지색(枳塞)당하다가 갑자기 대각(臺閣)에 들어왔는데 사람들의 준열한 말이 일어나자, 감히 스스로 변명하는 한 소장을 올려 거짓을 꾸미고 허물을 감추고는 의기 양양하게 마구 지껄였습니다. 그러나 역적 채제공의 죄악에 대해서는 애초에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고, 또 그 명자(名字)를 드러내지 않은 채 범연히 대론(大論)이라느니 연계(連啓)라느니 하고 일컬었는데, 그가 이른바 대론이라느니 연계라느니 한 것은 과연 어떤 역적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겠습니까? 더욱이 오늘날 정신(廷臣)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토죄(討罪)하고 있는 자는 곧 조덕린(趙德隣)인데, 그는 또한 애초에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역적을 비호한 마음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가 또 근래에 연달아 소장을 정원(政院)에 올렸다고 하니, 진실로 하나의 큰 변괴(變怪)입니다. 청컨대, 지평 심달한에게 절도 정배(絶島定配)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처분이 있었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1월 27일 계사
진강하였다.
서유화(徐有和)를 황해도 병마 절도사로 삼았다.
1월 28일 갑오
소대하였다.
조진관(趙鎭寬)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1월 29일 을미
반궁(泮宮)020) 에서 인일제(人日製)를 설행하였다.
1월 29일 을미
차대(次對)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우리 나라를 도우셔서 양전(兩殿)의 진후(疹候)가 동시에 평복되었으니, 내 마음의 기쁨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는가? 내가 이 기쁜 마음을 드러내어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행함으로써 하늘에 영명(永命)의 근본을 기원하려 한다. 그래서 지난해 방미방(放未放)021) 의 책자(冊子)를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으니, 대개 짐작하여 헤아린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전의 성책(成冊) 가운데 극역(極逆) 및 사학(邪學)에 관계되지 않은 여러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고자 하여 이미 모두 부첨(付籤)해 놓고, 장차 경들에게 문의하여 참작하여 처리하려고 하였다. 경들은 함께 상량(商量)하여 거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방미방의 성책을 내려 주어 보이고 말하기를,
"금부(禁府)의 죄인 외에 전옥(典獄)과 포청(捕廳)의 죄인도 또한 석방할 만한 자는 함께 품달(稟達)하여 석방하는 것이 옳다. 또 지난번 사전(赦典)에서 이미 석방된 자가 그 가운데 섞여 있으면, 또 구별해서 석방할 만한 무리는 아울러 초출(抄出)하여 방(放) 자를 써서 행회(行會)하도록 하고, 이 책자는 휴지를 만드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는데, 좌의정 서용보(徐龍輔)·우의정 김관주(金觀柱)가 함께 보기를 마치고 서용보가 말하기를,
"자성 전하께서 막대한 나라의 경사를 당하여 광탕의 은전을 행하시고자 하는데, 이는 진실로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뭇 신하의 우러러 본받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게 감히 다른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책자 가운데 부첨하신 여러 부분을 보건대, 중대한 데 관계되는 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비록 전에 없던 큰 경사를 만났다 하나, 이러한 사람들을 만약 석방한다면, 장차 제방(隄防)이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제방이 무너지면 의리가 회색(晦塞)되고, 의리가 회색되면 장차 사람은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는 나라답지 못한 데에 이를 것이니, 훗날의 근심이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또 혹은 이름이 대계(臺啓) 가운데 있는 죄인도 있는데, 대저 대계는 사체가 중대하여 성상께서도 갑자기 석방하실 수 없는 것이니, 금오(金吾)와 추조(秋曹)에서 더욱 어떻게 감히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관주는 말하기를,
"사(赦)라는 것은, 소인(小人)은 다행스럽게 여기고 군자(君子)는 불행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대개 소인은 죄를 짓고 사유(赦宥)를 받아 요행히 면하면, 마침내 스스로 징계하지 않은 채 진실로 취리(取利)할 일이 있을 경우 번번이 다시 범법(犯法)하며, 또 득의(得意)하면 선류(善類)를 원수처럼 보고 반드시 보복할 계책을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소인은 다행스럽게 여기고 군자는 불행하게 여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전에 없던 경사를 만나서 크게 미치는 은전(恩典)을 베풀고자 하시니, 신은 진실로 흠앙(欽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각별하게 짐작하여 혹 석방하거나 혹은 그대로 두어 각각 마땅함을 얻은 연후에야 훗날의 근심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하겠는가? 이 무리들로 하여금 함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은 충곤(忠悃)을 면려(勉勵)하고 다시 기용(起用)하여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이와 같으므로, 경들의 의논을 채택하려는 것이다. 또 이 무리들이 만약 개전(改悛)할 줄을 모른다면, 오늘 석방하였다가 내일 다시 찬배(竄配)한들 무슨 불가(不可)할 것이 있겠는가? 또 근래에 대계(臺啓)가 어지러운 일이 많은데, 이로 인하여 이정(釐正)하는 것이 또한 좋을 것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경들은 삼사(三司)·추조·금오의 당상들과 함께 부첨(付籤)한 부분에 따라 조목조목 품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안치(安置)한 죄인 조정철(趙貞喆)인데, 그는 바로 고 상신 조태채(趙泰采)의 증손입니다. 고 상신의 충절(忠節)은 비록 10대를 용서하더라도 또한 가(可)할 것이니, 신 등이 어찌 혹시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버티는 바가 있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거운 것이 《명의록(明義錄)》 가운데 환히 드러나 있으니, 상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선조(先朝) 때 그가 국정(鞫庭)에 들어오니, 선조께서 특별히 그의 선조(先祖)를 생각하셔서 형(刑)을 가하지 않으시고 안치(安置)의 율을 베푸셨으니, 이 또한 관전(寬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게 석방하여 용서하는 것으로 의의(擬議)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조영순(趙榮順)은 어찌하여 복관(復官)시키지 않았는가?"
하자, 서용보가 말하기를,
"선조 때에 복관(復官)시키라는 명이 있었으나, 정신(廷臣)이 끝내 봉승(奉承)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죄인 조시준(趙時俊)입니다. 그가 작년에 찬배(竄配)된 것은 곧 도성에 출입한 죄인데, 비록 혹 석방하더라도 어찌 반드시 다투어 고집하겠습니까? 다만 그가 옛날부터 부범(負犯)하고서도 지금까지 서울의 가까운 곳에서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은, 관대한 은전을 베푼 것인데, 어떻게 감히 경련(京輦)에 출입하여 스스로 죄가 없는 사람과 똑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이는 단지 무식(無識)한 소치이다."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지금 이미 찬배하였으니, 석방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도배(島配)한 죄인 이도겸(李度謙)과 송문로(宋文輅)입니다. 이도겸은 역적 이율(李瑮)의 조카인데, 출계(出繼)하여 강등(降等)하였기 때문에 연좌(緣坐)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백도(白徒)와 다르다 하여 마침내 도배하기에 이르렀으나 마지막에 가서는 또 양이(量移)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별로 범죄한 사실이 없고 법(法)에 비추어 마땅히 연좌에서 모면하므로서 특별히 사전(赦典)에 둔다면 혹 의거할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신중하게 다루어야 마땅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만약 직접 범한 죄가 있다면 어떻게 석방할 수 있겠는가? 또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법인데, 그의 연좌가 법에 없는 일이라면 이는 석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김관주가 말하기를,
"이 때문에 석방한다면, 또한 감히 힘껏 쟁론(爭論)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고, 동의금(同義禁) 김달순(金達淳)은 말하기를,
"여러 죄인들은 결단코 석방할 것을 경솔히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이 이미 죄다 아뢰었으므로, 신 또한 이견(異見)이 없습니다마는 이도겸의 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국가에서 역적을 다스릴 때에는 본래 상법(常法)이 있으나, 역적도 또한 분수가 없지 않으므로, 이에 앞서 법을 적용함에 있어 간혹 처분이 상례(常例)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극도로 악한 역적 이율과 같은 자에게 어떻게 상법에 따라서 그 조카로 하여금 아주 무사(無事)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송문로는 홍낙임(洪樂任)의 친사돈이고, 송형중(宋瑩中)의 조카인데, 대소(臺疏)에서 또, ‘강서(江墅)와 도성에서 출몰(出沒)함이 섬홀(閃忽)하였다.’고 하였으니, 또한 심상한 가벼운 죄인이 아닙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친사돈도 연좌시키는 법이 있는가?"
하니, 서용보가 말하기를,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적이 궤비(詭秘)해서 이미 대론(臺論)에 올랐으니,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이근(李漌)·송문술(宋文述)입니다. 이근이 방자하게 도망하였다가 돌아온 것이 비록 통분스럽지만, 저 서캐같이 하찮은 자에 대해 어찌 말을 허비하여 쟁론(爭論)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야흐로 대계(臺啓)가 올라왔으며, 송문술 또한 대계가 있었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대계가 진실로 어지러운데, 이렇게 함께 경사스러워하는 때를 인하여 경들이 대신(臺臣)들과 상의하여 범죄한 바가 지극히 무겁지 않은 경우에는 아울러 정계(停啓)하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서용보가 말하기를,
"대계는 사체(事體)가 중대한 것입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사체가 중대한 까닭에 아직 누구를 지적하여 그로 하여금 정계하도록 하지 않았으니, 이는 곧 대각(臺閣)의 뜻을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공론(公論)에 따라 남겨 두거나 뽑아 버리는 것이 또한 어찌 대체(臺體)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대각에서 비록 대신(大臣)과 가부(可否)를 상의한다고 말하지마는 대계는 사체가 자별(自別)하므로, 신들도 남겨 두거나 뽑아 버릴 즈음에 감히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멀리 내쫓은 죄인 심노숭(沈魯崇)이니 그는 바로 심낙수(沈樂洙)의 아들로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대개 심낙수는 사류(士類)를 원수처럼 보고 천만 가지로 형체를 탈바꿈하였으니, 그 평생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진실로 한 세상의 변고였습니다. 그 사람됨이 사갈(蛇蝎)과 다름이 없었는데, 심노숭 또한 사람됨이 그 아비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지금 대소(臺疏)를 가지고 살펴보건대, 복제중(服制中)에 있을 때에 권간(權奸)의 집에 출몰하며 밤낮으로 주무(綢繆)한 정상이 온 세상에 왁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만약 석방한다면 도리어 세도(世道)의 무궁한 해(害)가 될 것이니, 엄중하게 방색(防塞)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죄인 이윤행(李允行)인데, 또한 대계 가운데 나와 있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이것은 단지 한때에 문자(文字)를 신중하게 살피지 못한 죄이니, 그 실정을 구명(究明)해 보면, 어찌 이것이 큰 죄이겠는가? ‘권섭(權攝)’ 두 자는 진실로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것이다. 나의 오늘의 일도 이미 평소 있었던 일이 아니었으니, 권도(權道)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이르기를, ‘소장 위에 어찌 반드시 이 두 글자를 썼겠는가?’ 한다면 혹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행한 벌도 또한 족히 속죄가 될 것인데, 만약 이것을 대죄(大罪)라고 한다면, 매우 불가(不可)한 것이다. 또 이윤행의 일은 내가 친히 본 것이므로, 내가 그 이면(裏面)을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에서 벗어난 여러 죄인들은 내가 본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 때문에 경들에게 순문(詢問)하는 것이니, 대개 공의(公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이면응(李冕膺)·이우진(李羽晉)입니다. 이면응은 그 아비의 이름이 바야흐로 대계 가운데 있고, 이우진은 서캐같이 하찮은 자라는 지목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자전(慈殿)의 뜻은 광탕(曠蕩)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고자 하시는데, 신들이 일일이 쟁집(爭執)한다면, 대양(對揚)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우진 같은 자는 어떻게 반드시 부범(負犯)한 것이 지극히 무거운 자와 똑같이 논하겠습니까?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죄인 이인행(李仁行)·조항진(趙恒鎭)·이유수(李儒修)·이진택(李鎭宅)입니다. 이인행·이유수 같은 무리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 것은 아니니,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히 힘껏 다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조항진은 지난번에 상소하였을 때 그 마음이 불측(不測)한 자로서, 비록 이상의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여러 죄인들과 똑같지는 않다 하나, 발배(發配)한 지 오래 되지 않았으니, 또한 쉽사리 가볍게 석방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는데, 김달순이 말하기를,
"신이 호남에서 옥사(獄事)를 안찰(按察)하였을 때 이인행이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있었으므로, 참핵관(參覈官)에 차정(差定)하였는데, 이인행이 감히 죄인의 문서(文書) 가운데 서울의 역적과 교통한 긴요하게 관계되는 것을 문득 삭제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추후에 들어서 알게 되었으므로, 비록 논감(論勘)하지는 않았으나, 그 자취가 극도로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유수는 또한 사도(邪徒)에 가까우니, 이러한 무리를 용서하여 석방하는 은전에 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그 당시 대론(臺論)에서도 정약종(丁若鐘)의 무리와 서로 관계되는 바가 있다고 말하였었습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유(流) 3천 리에 처했던 죄인 임장원(任長源)·이익회(李益恢)입니다. 임장원의 죄는 곧 탐오(貪汚)인데, 탐오는 중대한 죄가 아님이 아니나, 이 큰 경사를 당하여 비록 석방한다 하더라도 혹 가(可)할 것입니다. 이익회의 일은 그것을 말하면 부끄러운 것이나, 또한 관계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석방할 수 없는 데 이르겠습니까? 다만 대계가 있었으므로, 거론(擧論)할 수가 없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지금 이렇게 하문(下問)하는 것은 대개 공의를 채택하여 힘써 광탕의 은전을 시행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와 같이 이름마다 쟁집한다면, 이는 장차 석방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어찌 광탕의 본뜻이겠는가? 그 가운데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여 결단코 석방할 수 없는 무리는 나 또한 공의를 어길 필요는 없다. 경들은 책자를 보고 그 가운데 방(放) 자의 부첨을 떼어서 버린 다음, 만약 용서할 만한 자가 있으면, 그 방 자의 부첨을 그대로 붙여서 도로 들여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지금 이 글 아래의 방 자 가운데 신이 감히 쟁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그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이 진달하는 것에 대해 신 또한 그 하나하나가 사리에 맞을지 감히 자신(自信)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의 형정(刑政)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한 것인데, 어떻게 신의 한 마디 말로써 갑자기 그대로 두거나 석방하는 사이에서 단정(斷定)할 수 있겠습니까? 글 아래 부첨하여 표지(標識)한 것에 이르러서는 사체가 자별(自別)한 것인데, 더욱 어떻게 감히 방자하게 떼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 등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신 등의 우견(愚見)으로 이름마다 우러러 아뢰면, 다시 여러 대신들과 삼사(三司)·금오(金吾)·추조(秋曹)의 당상들에게 널리 하문하신 후 성상께서 재량하여 가려서 처분하시는 것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으로 여깁니다. 만약 그 이름이 대계 가운데 있었던 자는 중죄(重罪)·경죄(輕罪)를 물론하고, 대계는 사체가 무거우니, 모두 석방하도록 청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찬배(竄配)한 죄인 신기(申耆)인데, 바야흐로 대계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정윤교(鄭允僑)·백성일(白成一)·피재길(皮載吉)인데, 이 일은 신이 말하려 해도 가슴이 막힘을 금할 수 없습니다. 죄명(罪名)이 막중한 데 관계되는데, 당시의 일은 자성 전하께서 이미 이를 통촉(洞燭)하셨으므로, 신이 감히 장황하게 우러러 아뢸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정상우(鄭尙愚)인데, 그의 숙부(叔父)의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겁고, 그도 대각(臺閣)의 성토가 매우 엄중하니,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자,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금부 당상, 삼사 및 우상(右相)도 각각 말하도록 하라."
하니, 정언 정최성(鄭最成)이 말하기를,
"이상의 여러 죄인들은 대신이 아뢴 데에서 죄다 알았는데, 대신이 쟁집(爭執)하지 않으니, 신의 뜻도 또한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계 가운데 있는 자는 계체(啓體)가 막중하므로, 거론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 원재명(元在明)은 말하기를,
"만약 《명의록(明義錄)》과 대계 가운데 있다면 결단코 석방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김관주도 말하기를,
"이도겸이 법외(法外)에 연좌되었다고 하신 하교는 성의(聖意)에 오히려 의거하는 바가 있으나, 이윤행(李允行)과 같은 자는 단지 일이 성궁에 관계되는 것이라 하여 잇따라 용서하라는 교지(敎旨)를 내리셨는데, 아래에서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어떻게 감히 석방하도록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내가 일이 내 몸에 관계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곡진하게 용서한 것이 아니니, 진실로 그 실정을 추구해 보면 참으로 또한 무죄(無罪)한 것이다."
하였다. 김관주가 말하기를,
"심노숭(沈魯崇)은 그의 아비 심낙수(沈樂洙)가 권간(權奸)이 〈국정(國政)을〉 탁란(濁亂)시켰을 때에 선류(善類)를 장해(戕害)하여, 공(功)을 세워 스스로 정성을 다할 계책으로 앞장서서 담당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심노숭은 그 악(惡)을 대대로 물려받아 심지어는 상중(喪中)의 몸으로서 출몰하며 날뛴 정상은 진실로 이미 통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됨이 원래 간특하여 세상에서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면응(李冕膺)은 비록 형적이 드러난 큰 죄가 없으나, 그의 아비 이명식(李命植)은 권간이 〈국정을〉 탁란(濁亂)시킬 때를 당하여 붙좇아 주무(綢繆)하였으니, 사류(士類)를 일망 타진(一網打盡)하려는 계책은 모두 이면응이 종용(慫慂)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비가 죽은 후에 이르러서는 언의(言議)와 행사(行事)가 한결같이 의리를 배반하여 선류(善類)를 장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왔으므로, 이 또한 세상에서 지목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대저 이러한 무리가 세도(世道)의 해가 되는 것은 도리어 현재 무거운 죄를 범한 자보다 심하니, 먼 훗날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결단코 갑자기 석방을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이와 같을 리가 또한 혹시라도 없지 않겠지만, 나의 뜻은 단지 널리 경축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였다. 김관주가 말하기를,
"임장원·이익회의 일은 신의 뜻도 좌상과 똑같습니다. 이번의 대사령(大赦令)에 사유(赦宥)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신기는 바야흐로 대계 가운데 있으므로 감히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외람되고 교활하며 음험(陰險)한 인물로서 흉사(凶邪)한 무리가 세상을 탁란시켰을 때를 당하여 그 위세를 빌어 흉론(凶論)을 주장하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았으며 팔뚝을 걷어붙이고 스스로 떠맡았으므로, 그의 도당(徒黨)이 다투어 서로 추증하고 칭찬하여 제수된 관작(官爵)이 모두 외람되었으니, 공의(公議)가 분개하여 답답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난번 영백(嶺伯)이 되기에 이르러서는 감히 방자하게 김이재(金履載)를 품질(稟秩)에 두었었습니다. 이는 선왕을 잊어버리고 사당(私黨)에 충성하는 마음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 결단코 석방할 수 없습니다. 의관(醫官)의 무리에 대한 일은 가슴이 막혀서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고 있다가 말하기를,
"저 무리가 불행한 때를 당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저 무리의 죄이겠는가? 죄는 오로지 심인(沈鏔)에게 있었다. 저 무리는 애초에 한 번도 첩약(貼藥)에 대해 함께 의논하지 않았고, 단지 의관의 반열에 함께 참여했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당시 일을 간섭했던 자에 대해 어찌 돌아보아 애석하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이제만(李濟萬)·박성태(朴聖泰)인데, 이 두 사람은 세상에서 지목받은 지 오래 되었으니, 투찬(投竄)의 율에서 어찌 감히 도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위에서 논열(論列)한 바 관계가 매우 중대한 자에 견주어 오히려 하찮은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고, 김관주가 말하기를,
"이제만·박성태 두 사람은 뭇 간사한 무리를 위해 응견(鷹犬)·조아(爪牙)가 되어 지주(指嗾)하고 사환(使喚)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므로, 온 세상에서 모두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을 가지고 말하면, 박성태는 본래 깊이 근심할 것이 못되지만, 이제만은 본래 사당(邪黨)의 모사(謀士)로 일컬어져 선조(先朝)의 말년에 이르러 간흉(奸凶)의 무리가, ‘이제만이 아니면 일을 이룰 사람이 없다.’ 하고 연곡(輦轂)의 아래에 불러들여 난만하게 주무(綢繆)하여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조께서 그 간사한 정상을 통촉하셔서 마침내 외군(外郡)에 쫓아 보내기에 이르렀었습니다. 그가 비록 미천한 무리라 하더라도 이제 만약 석방한다면, 장래의 근심이 적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조규진(趙圭鎭)인데, 전후로 저지른 죄목(罪目)이 모두 가볍지 않은 데 속하므로, 비록 나이가 늙었다 하더라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채홍원(蔡弘遠)인데, 지금 채제공(蔡濟恭)의 역절(逆節)이 갈수록 더욱 드러나는 때를 당하여 더욱 어떻게 소방(疏放)으로 의의(擬議)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논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부첨한 것은 권유(權𥙿)인데, 찬적(竄謫)된 본래의 일로 논하면 스스로 쟁집(爭執)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됨이 본래 몹시 패악스러움이 많은데다가 또 대계(臺啓)가 있으니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그 본죄(本罪)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시행하였다."
하자, 김관주가 말하기를,
"조규진·채홍원의 죄에 대해서는 신의 뜻도 또한 좌상과 똑같습니다. 채홍원을 이러한 방전(放典)으로 의의(擬議)한 것은 신이 뜻한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본래 흉험(凶險)하고 추패(麤悖)하다고 일컬어졌는데, 그의 아비가 꾀했던 흉모(凶謀)·역절(逆節)을 그 아들이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비가 죽은 후부터 그 당(黨)의 한 패거리가 은연중에 영수(領袖)로 간주(看做)하여 날뛰며 소란을 일으켰으므로, 온 세상에서 두려하게 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만약 예에 따라 방환(放還)한다면, 종국(宗國)에 수치를 끼치는 것이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부첨을 붙였으나, 지금 뭇 신하에게 묻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말을 듣고자 한 것이었다. 내가 만약 단정(斷定)하여 의심하는 바가 없었다면 어찌 경들에게 다시 물었겠는가?"
하였다. 김관주가 말하기를,
"권유는 본래 지각(知覺)이 없는 사람이고, 또 비루하여 잗단 일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연전에 수립한 공이 있었기 때문에 선조께서 특별히 의중(倚重)하는 뜻을 보이고, 사류(士類)들도 또한 칭찬하였었습니다. 지난번 혼전(魂殿)에 감공(減供)한 일에 이르러서는 막중한 곳에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찬배(竄配)로 이목을 집중시켰으니, 우선 거론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김한동(金翰東)인데, 곡반(哭班)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이미 가증스럽지만, 이것은 그래도 무슨 연고가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죄가 만약 이에 그친다면 어찌 반드시 쟁집하겠습니까마는, 그는 정희량(鄭希亮)의 처조카인 까닭에 애초에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둘 수가 없었으므로, 그가 등장한 때부터 나라 안에 말이 진실로 이미 떠들썩하게 전파되었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렸던 한 소장 또한 극도로 흉악하고 참람하였으니, 곧 한 역적 이잠(李潛)의 후신(後身)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결단코 거론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서용보가 말하기를,
"여기에 부첨한 것은 곧 홍탁연(洪卓然)·홍순해(洪順海)·박제가(朴齊家)입니다. 홍탁연·홍순해는 비록 미천한 자라 하나, 모두 극역(劇逆)에 간련(干連)되었기 때문에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며, 박제가는 이름이 대계 가운데 있으므로, 모두 거론할 수 없습니다. 방귀(放歸)한 죄인 이조원(李祖源)·심기태(沈基泰)의 임자년022) 일은 진실로 의리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며, 또 이름이 대계 가운데에 있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말하기를,
"나의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대신과 대신(臺臣)은 모름지기 물러가서 각자 서로 의논하되, 진실로 극역(劇逆)과 사학(邪學)의 무리가 아니면, 아울러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 책자(冊子)는 사관으로 하여금 영부사와 판부사에게 보내어 보여 주도록 하고, 그들로 하여금 조목별로 복계(覆啓)하게 하라. 대계 또한 속히 이정(釐正)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민태혁(閔台爀)이 말하기를,
"신이 책자를 미처 보지 못하여 허다한 죄인들의 죄에 대한 심천(深淺)과 경중(輕重)을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혹 《명의록(明義錄)》 가운데 있거나 혹은 대계 가운데 있어 죄명(罪名)이 중대하니, 오늘날 신자(臣子)들이 거론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짐량(斟量)을 더하소서."
하고, 호조 판서 이서구(李書九)는 말하기를,
"비록 대신이 우러러 아뢴 것을 가지고 살펴보더라도 이름이 《명의록》에 들어 있는 경우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는데, 오늘 정신(廷臣)이 손을 쓴 것은 곧 일부의 《명의록》이었으니, 이에 대하여 한 글자라도 동요되는 바가 있으면, 나라는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의리의 제방(隄防)에 대해 다시 어떻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심노숭·채홍원과 같이 흉패하고 추악한 무리는 애초에 의의(擬議)하는 것도 마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죄인들은 비록 죄의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의 구분이 없지 않다 하나, 또한 죄범(罪犯)이 지극히 중하고 관계됨이 가볍지 않은 무리가 많습니다. 자전께서 비록, ‘극역(劇逆)과 사학(邪學) 외에는 광탕(曠蕩)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교하셨으나, 성인(聖人)이 말하기를, ‘간악한 자는 멀리해야 한다. 예로부터 소인(小人)은 흉악한 마음을 간직하여 국가에 화란(禍亂)을 끼치게 된다.’ 하였으니, 그 말이 두려워할 만하며, 또 쉽사리 간과(看過)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만약 혹시라도 갑자기 모두 용서하는 과목에 둔다면, 마침내 반드시 세도(世道)의 근심이 될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유념하소서."
하였다.
봄철의 습조(習操)를 정지하였는데, 증광시(增廣試)와 서로 날짜가 겹쳤기 때문이었다.
1월 30일 병신
진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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