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7권 순조5년 1805년 9월

싸라리리 2025. 6. 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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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술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삭제(朔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9월 2일 신해

주강(晝講)하였다.

 

석강(夕講)하였다.

 

9월 3일 임자

주강하였다.

 

9월 4일 계축

주강하였다.

 

효안전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9월 6일 을묘

증광 문무과(增廣文武科)의 초시(初試)를 설행하였다.

 

9월 7일 병진

이조 판서(吏曹判書) 황승원(黃昇源)이 또 소장을 진달하고 스스로 인책(引責)하였다. 지난번 임업(任㸁)이 피혐한 것 때문이었는데, 비답을 내려 허락하였다.

 

9월 8일 정사

윤익렬(尹益烈)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김재창(金在昌)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9일 무오

효안전에 나아가 주다례를 행하였다.

 

9월 10일 기미

문안 정사(問安正使) 이병모(李秉模)가 심양(瀋陽)에서 출발했다는 것으로 치계(馳啓)하기를,
"8월 22일 황제(皇帝)가 소릉(昭陵)에 제사지낸 뒤 상녕사(常寧寺)·실승사(實勝寺)에 나아가 향(香)을 올렸으며 외양문(外攘門)을 거쳐 성경(盛京)의 궁궐로 나아갔습니다. 26일부터 황제가 대정전(大政殿)에 올라 연회를 베풀었는데 조선(朝鮮) 사신(使臣)도 또한 입참(入參)하게 하라는 황지(皇旨)가 있었습니다만 본국(本國)의 예제(禮制)에 있어 연회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을 임역(任譯)으로 시켜 예부(禮部)에 가서 고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시랑(侍郞) 다경(多慶)이 즉시 들어가서 주달한 뒤 김간(金簡)의 아들인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온포(金縕布)와 궐내(闕內)에서 나와서 임역(任譯) 등을 불러 황지(皇旨)를 전달하기를 ‘조선(朝鮮)은 예제(禮制)에 익숙하니 도리상 당연히 그럴 것이다. 특별히 연회에 들어오는 것을 면제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당일 연회(宴會)가 파한 뒤 이어 상(賞)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신 등이 정관(正官)을 인솔하고 대청문(大淸門) 밖으로 나아가 상을 수령(收領)하였습니다. 예부 시랑 다경(多慶)이 황필(皇筆)을 받들어 전하였기 때문에 신이 지수(祗受)하여 열어보았더니, 황색 견지(絹紙)에 예교 수번(禮敎綏藩)이라는 네 글자를 대자(大字)로 썼고 위에는 가경 어필지보(嘉慶御筆之寶)를 찍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통개(筒介) 1부(部)와 활 1개, 화살 9개를 갖추어 주었으며 그 다음에 장단(粧緞) 4필(疋), 용란단(龍襴緞) 4필, 대단(大緞) 5필, 방주(紡紬) 5필, 초피(貂皮) 1백 장(張)을 받았으며, 영롱 안구마(玲瓏鞍具馬) 1필(匹)을 주기에 차례로 영수(領授)하였습니다. 신 등과 정관(正官) 등도 모두 상을 받았습니다. 비록 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만 원상(元賞) 이외에 더 받은 상과 반하한 조지(詔旨)는 행재 예부(行在禮部)에서 황지(皇旨)를 받들어 성경(盛京)의 예부에 공문(公文)을 보내어 순부(順付)하게 하였습니다.
황제가 회정(回程)하는 날짜는 앞당겨서 28일로 정하였고 환경(還京)하는 날짜는 9월 23일로 정하였습니다. 예부의 지회(知會)로 인하여 28일 5고(鼓)에 신 등이 정관(正官)을 이끌고 방사둔(方士屯) 20리(里) 되는 지점에 나아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평명(平明)에 황제가 말을 타고 왔습니다. 시랑 다경(多慶)이 임역(任譯)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반하한 조서(詔書)를 순부(順付)하게 한 것은 바로 특은(特恩)에 관계된 것이니, 의당 고두 사례(叩頭謝禮)를 행해야 한다.’ 하였으므로, 황제가 지나갈 적에 일행이 길가에서 고두례(叩頭禮)를 행하였습니다. 반하한 조서는 성경(盛京)에 순부하여 예부에서 거행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9월 11일 경신

동래부 안핵사(東萊府按覈使) 윤명렬(尹命烈)이 나라를 속인 죄인 최경(崔)·최국정(崔國禎)과 서계(書契)를 위조한 죄인 박윤한(朴潤漢)과 도서(圖署)를 위조한 죄인 김한모(金漢謨) 등을 효수(梟首)했다고 아뢰었다.

 

9월 12일 신유

황승원(黃昇源)을 형조 판서로, 신대겸(申大謙)을 좌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9월 13일 임술

이익모(李翊謨)를 이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5일 갑자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망제(望祭)를 행하고 이어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감찰 다시(監察茶時)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근래 온갖 관료들이 태만한데, 양사(兩司)도 또한 다시 그런 습성이 굳어져 제수(除授)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번번이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대청(臺廳)이 장기간 문을 잠그고 있는 탓으로 전계(傳啓)가 언제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대각(臺閣)이 이와 같으니 백례(百隷)들이야 논할 것이 뭐 있겠는가? 이와 같고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신칙(申飭)시킨 뒤에도 승정원(承政院)에서 만일 다시 패초(牌招)를 어겼다는 것으로 전지(傳旨)를 받들 경우에는 승지는 의당 신칙시키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대신(臺臣)이 비록 궁하다고 하지만 또한 의당 엄중한 처분(處分)을 내릴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알고 있으라. 다시 패초하고 이 계사(啓辭)는 놓아 두라."
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으로, 조윤대(曹允大)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9월 16일 을축

윤서동(尹序東)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가 곧이어 송전(宋銓)으로 대신하였다.

 

9월 17일 병인

양사(兩司) 【사간 정노영(鄭魯榮), 정언 김처암(金處巖), 장령 조수민(趙秀民)이다.】 에서 합계(合啓)한 김이익(金履翼)·김이재(金履載)·이재학(李在學) 등의 일과 부계(府啓)인 신기(申耆)의 일을 모두 정지하였다.

 

9월 18일 정묘

규장각(奎章閣)에서 선조(先朝)의 어정(御定)인 《대학유의(大學類義)》를 인출(印出)하여 올렸다.

 

9월 19일 무진

고(故) 전한(典翰) 유옥(柳沃)에게 증시(贈諡)하라고 명하였는데, 이조의 회계(回啓)와 대신(大臣)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유옥은 중종(中宗) 때 사람인데,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이 상소하여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복위(復位)를 청할 때 함께 의논했기 때문이었다.

 

9월 20일 기사

반궁(泮宮)에서 칠석 제술(七夕製述)을 설행하였다.

 

9월 22일 신미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차대(次對)하였다.

 

해서 암행 어사(海西暗行御史) 이면구(李勉求)가 서계(書啓)로 신계(新溪)의 전 현감 김세순(金世淳), 신천 군수(信川郡守) 서유증(徐有曾), 장단 부사(長湍府使) 성범진(成範鎭) 등이 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였는데, 경중(輕重)을 나누어 감처(勘處)하게 하였다. 별단(別單)에는 균곡(均穀)에 대한 일, 양전(量田)에 대한 일, 연안(延安), 배천(白川)의 재결(災結)의 탕감(蕩減)과 신포(身布)의 양감(量減)에 대한 일, 장산 북부(長山北部)의 향보(餉保)를 돈으로 대신하게 하는 일, 금천(金川) 저탄(猪灘)의 교량(橋梁)을 수개(修改)하기 위한 돈을 획급(劃給)하는 일, 장연(長淵)의 선재(船材)를 예운(曳運)하는 것을 바루어 고치는 데 대한 일, 백치(白峙)의 향환(餉還) 가운데 배천에 있는 것을 이혁(釐革)하는 데 대한 일이 기재되어 있었는데,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좋은 의견을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9월 23일 임신

효안전(孝安殿)에 나아가 아침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9월 24일 계유

인정전(仁政殿)에 나가서 추도기(秋到記) 유생(儒生)들을 시험보였다. 강경(講經)의 수석을 차지한 이기준(李麒峻)이고 그 다음은 김종문(金鍾文)이며, 제술(製述)의 수석을 차지한 이유상(李儒象)이고 그 다음은 윤석영(尹錫永)인데,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9월 25일 갑술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서총대 시예(瑞蔥臺試藝)를 행하였다.

 

9월 26일 을해

효안전에 나아가 저녁 상식(上食)을 행하였다.

 

9월 28일 정축

순부(順付)하여 온 사칙(赦勅)에 의거 인정전(仁政殿)에서 반교(頒敎)하고 반사(頒赦)했는데, 권정례(權停例)로 하였다.

 

9월 29일 무인

주강(晝講)하였다.

 

황승원(黃昇源)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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