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11권 순조8년 1808년 윤5월

싸라리리 2025. 6. 1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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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5월 2일 정묘

별강하였다.

 

이원식(李元植)을 함경북도 절도사로 삼았다.

 

윤5월 3일 무진

별강하였다.

 

윤5월 5일 경오

차대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사헌                     이직보(李直輔)가 상소하여 유일(遺逸)을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유현이 소장 가운데 독서하는 선비를 불러들이기를 청하였는데, 그 뜻은 먼저 음직(蔭職)을 시험하여 사진(仕進)하기 편하게 해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조 때 혹 경연관을 단부(單付)047)                                             하거나 혹은 부른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거나 하였었는데, 지금 초선(抄選)하는 일은 무슨 전례를 따라서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이조 판서                     남공철(南公轍)이 말하기를,
"영묘(英廟)정묘년048)                                             의 수교(受敎)에 정부와 이조에서 빈청(賓廳)에 모여서 상의하여 초선하게 하였는데, 남대(南臺)049)                                             와 자의(諮議)는 모두 초선하는 가운데에서 비의(備擬)하는 일로 정식(定式)을 삼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초선하는 일은 반드시 널리 의논하여 사진하는 길을 쉽게 해주어야 한다."
하자,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이 말하기를,
"혹 음직(蔭職)을 제수하면, 이 또한 하나의 방도가 될 것입니다. 유현이 있는 곳에 사관(史官)이나 혹은 예관(禮官)을 보내 물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남공철은 말하기를,
"문정공(文貞公) 조식(曹植) 같은 분들은 모두 초사(初仕)로 주부(主簿)·별좌(別坐)를 부직(付職)하였으나, 또한 모두 하였습니다."
하였다.

 

복상(卜相)050)                                             하도록 명하자, 빈청에서 이시수(李時秀)·서용보(徐龍輔)·이경일(李敬一)·한용귀(韓用龜)·김사목(金思穆)을 봉입(封入)하니, 김사목으로 비답을 내렸다. 김재찬을 의정부 좌의정으로, 김사목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한만유(韓晩裕)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윤5월 6일 신미

대사헌                     이직보(李直輔)에게 유시하기를,
"유일(遺逸)을 불러들이는 일을 빈청과 연석에서 대신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이판은 모두 좋다고 말하였다고 하였다.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선비를 경은 별도로 기록해서 아뢰도록 하라. 이 또한 경이 나를 보도(輔導)하는 한 부분이다."
하니, 이직보가 부주(附奏)하기를,
"선조(先朝) 때의 고 상신 윤시동(尹蓍東)이 송계간(宋啓榦)·김직순(金直淳)을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였는데, 고 유신의 손자로서 가학(家學)을 계술(繼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고(聖考)께서는 이들을 불러 접견하시고 길사(吉士)로 권장하셨으니, 이 사람들은 곧 사적(士籍) 가운데에서 뽑힌 사람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밖에 이름을 아는 선비들은 본래 빈청의 회의가 있었으니, 신이 제멋대로 아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송계간은 고 찬선                     송명흠(宋明欽)의 손자이고, 김직순은 고 찬선                     김양행(金亮行)의 손자인데, 모두 어진 조선(祖先)을 닮은 손자로서 일찍부터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김직순은 그 아우 김건순(金建淳)이 사학(邪學)에 물든 허물 때문에 오랫동안 사망(仕望)에 지색(枳塞)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직보가 김직순을 천거한 것이었다.

 

윤5월 7일 임신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에게 유시하기를,
"경은 교목 세가(喬木世家)의 사람으로서 충성스럽고 삼가고 성실함을 겸비하여 공경(公卿)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성후(聖后)의 집안 사람으로 세 조정을 섬긴 구신(舊臣)이다. 경상(卿相)과 재상, 번곤(藩閫)과 융원(戎垣)을 역임하며 공적이 이미 드러났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기대하고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가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 더하니, 곧 일어나 들어와서 공경히 명을 받들고 좌상과 도를 논하며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윤5월 10일 을해

북원(北苑)에 나아가 황단 망배례(皇壇望拜禮)를 행하고, 반열에 참여한 유신과 무신을 시험하였다.

 

윤5월 12일 정축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봄에 행행(幸行)하였을 때 진산(珍山)의 유학(幼學) 조진억(趙鎭億)이 상언하여, 그의 선조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을 여러 대에 걸쳐 서로 이어받아 온 계통을 다시 받들게 하고, 조석복(趙錫福)이 지손(支孫)으로서 종통(宗統)을 빼앗은 죄에서 감히 요행히 도피할 수 없게 할 것을 청하였었습니다. 문렬공의 종통에 대한 일은 여러 번 쟁단(爭端)이 일어났었는데, 문득 조정에서 바른 데로 귀착시켰으나, 지금 사판(祠版)이 조석복의 임소(任所)에 있으므로, 사손(祀孫)이 그 주사(主祀)051)                                             가 옮아간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이렇게 진계하여 호소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양편에서 옛날부터 분운(紛紜)했던 것은 모두 근거할 말이 있습니다. 조석복은 스스로 그 자신이 파장(派長)이고 조진억은 차파(次派)라고 하고, 조진억은 스스로 그 자신이 파량(派良)이고 조석복은 천파(賤派)라고 하고 있는데, 그 장차(長次)에 있어서는 조진억이 주사(主祀)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고, 그 양천(良賤)의 구별에 있어서는 조석복이 감히 다툴 수가 없습니다. 주사하는데 이르러서는 양(良)이 중대한 데 돌아가므로, 서장(庶長)은 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기억하여 말하기를, ‘조완도(趙完堵)는 정주(定州)의 기생의 소생이고 조완제(趙完堤)는 양첩(良妾)의 아들인 까닭에 조완제를 봉사(奉祀)하도록 정하였다고 하였다.’ 하였으니, 조완도가 비록 연장(年長)이지만 봉사할 수 없었던 것은 옛날부터 이미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선정신 송시열이 말하기를,
‘조명봉(趙鳴鳳)이 죽고 그 아비가 폐질(廢疾)이 있자, 사당은 잡초가 우거져 덮여도 다스리지 않았다.’ 하였는데, 조명봉은 바로 조완제의 손자이니, 그 사판(祠版)이 본래 조완제의 집에 있었던 것을 이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조명봉이 죽고 또 아들이 없으니, 진실로 봉사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 판서 신 민진후(閔鎭厚)가 이것을 연석(筵席)에서 계품(啓稟)하자, 형이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아우가 계통을 잇는 예(禮)를 써서 조빈(趙鑌)의 아우인 조순(趙錞)의 아들 조서봉(趙瑞鳳)을 적자(嫡子)로 삼아 적통(嫡統)을 이어받게 하여 조진억에 이르렀으니, 이 일의 전말(顚末)이 이와 같이 상세합니다. 조완도가 장자이지만, 천첩(賤妾)의 소생인 때문에 예율(禮律)에 허락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조석복은 조중국(趙重國)의 아들이고 조혁(趙㷜)의 손자인데, 조혁은 또 조완도의 차손(次孫)이고 조광한(趙匡漢)의 두 번째 손자이니, 지파(支派) 가운데 지파인 것입니다. 비록 조완도의 계파로 하여금 문렬공의 사당을 받들도록 한다 하더라도 조석복은 반드시 마땅한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이 송사(訟事)가 처음 영묘(英廟)무인년052)                                             에 일어났을 때에는 조혁을 무주(茂朱)에 찬배(竄配)하고, 조진억의 할아비 조종수(趙宗秀)로 하여금 도로 주사할 수 있게 하였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갑오년053)                                             에는 조중국을 신녕(新寧)에 찬배하고, 조진억의 아비 조주달(趙周達)에게 또 사판(祠版)을 받들게 하였었습니다. 당일에 격고(擊鼓)했던 과부(寡婦)가 아직도 있고, 영묘조 전후의 처분이 일월(日月)처럼 명백하고 부월(鈇鉞)보다 엄중하였으므로, 왕직(枉直)이 베껴서 준 문권(文券)에 모두 실려 있고, 또 사실이 사유(賜侑)하신 제문에 올라 있으니, 피차의 곡직(曲直)을 변파(辨破)하기는 매우 어렵지 않습니다. 위로 영묘조의 처분과 아래로 두 선정의 입론(立論)은 이미 금석(金石) 같아 변역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백세(百世)에 준거(遵據)할 수 있는데, 또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그 집안의 변괴(變怪)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문(斯文)·종사(宗事)의 중대함에 관계됩니다. 설령 조석복이 조금이나마 말할 만한 단서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양쪽이 자처(自處)하게 하는 것은 단지 옛날과 똑같이 하는 것이 마땅할 따름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분운하도록 하였으니, 진실로 매우 놀랍습니다. 마땅히 논의하여 감단(勘斷)할 경우, 지나간 해에 처분하셨던 엄중함을 받들어 후일의 의혹(疑惑)될 염려를 막아야 한다고 여기는데, 선현(先賢)의 막중한 집안 일을 신의 조(曹)에서는 제멋대로 결단하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의 의논 또한 똑같으니, 옳게 여겼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을 소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초선(抄選)은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니, 김재찬이 말하기를,
"유신이 천거한 송계간(宋啓榦)·김직순(金直淳) 두 사람이 모두 지극히 좋습니다."
하였다. 김재찬이 또 말하기를,
"접위관(接慰官)은 마땅히 사조(辭朝)해야 하겠지만,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강호(江戶)에 도해(渡海)의 행차를 보내어 그 집정(執政)과 면의(面議)한 후에 따를는지의 여부를 강정(講定)할 수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저 나라에서 사신을 청한 것은 과연 어느 해인가?"
하니, 김재찬이 말하기를,
"명년(明年)으로 청해 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년이 바로 당차(當次)인가?"
하니, 김재찬이 말하기를,
"관백(關白)이 승습(承襲)하면 으레 통신(通信)하는데, 지금 20년에 이르렀으나 국력이 조잔(凋殘)하다 하여 사신을 청하지 못하였으니, 연한(年限)은 지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통신사는 어떤 사람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니, 김재찬이 말하기를,
"상사(上使)는 당상으로 차출하고, 서장관(書狀官)과 종사관(從事官)은 당하관으로 차출하되, 모두 각별하게 가려야 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상소하여 상직(相職)을 사직하니, 비답을 내려 돈독하게 권면하였다.

 

윤5월 13일 무인

장령                     신광식(申光軾)이 상소하여 10조(十條)를 아뢰기를,
"성학(聖學)에 힘쓰셔서 실정(實政)을 의뢰하고, 사치를 억제하셔서 습상(習尙)을 바로잡고, 수령을 가려서 임용하여 이치(吏治)를 거두고, 환자(還子)054)                                             의 폐단을 이정(釐正)하셔서 백성들의 재산을 보호하고, 군역(軍役)을 밝혀서 백성들의 목숨을 소생시키고, 무비(武備)를 신칙해서 변경을 견고하게 하고, 호적법(戶籍法)을 엄중히 하셔서 전사(轉徙)를 막고, 백성들의 창고를 돌보아 주셔서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곡량(斛量)을 균등하게 하셔서 간사하고 외람됨을 제거하고, 인재를 수용(收用)하셔서 수용(需用)을 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목마다 절실하고 말마다 충직(忠直)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윤5월 15일 경진

지중추부사                     조진관(趙鎭寬)이 졸(卒)하였다.

 

윤5월 16일 신사

별강하였다.

 

홍석주(洪奭周)를 이조 참의로, 조홍진(趙弘鎭)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5월 17일 임오

별강하였다.

 

윤5월 19일 갑신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두 번째 상소하여 사면(辭免)하니, 비답을 내려 돈독하게 권면하였다.

 

윤5월 21일 병술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윤5월 22일 정해

한치응(韓致應)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삼았다.

 

윤5월 24일 기축

용산강(龍山江)·저자도(楮子島)에서 두 번째 기우제(祈雨祭)를 행하였다.

 

윤5월 25일 경인

비가 3촌(寸) 2분(分) 내렸으므로 기우제를 정지하고, 제관(祭官)에게 시상(施賞)하였다.

 

영릉(英陵)의 정자각(丁字閣)을 수개(修改)하는 역사(役事)를 마쳤다고 알리자, 감동관(監蕫官) 예조 판서 이하에게 시상하였다.

 

차대하였다.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내시사(內試射)·내호궤(內犒饋)·내관무(內觀武)·내열무(內閱武)는 반드시 후원(後苑)에서 행하는 것이 곧 국조(國朝)의 성헌(成憲)입니다. 그러나 사냥[蒐狩]은 반드시 사시(四時)에 나누어 하고, 유예(遊豫)는 제후(諸侯)에게 있어서 법도를 삼아야 할 것이므로,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일찍이 유관(遊觀)을 이바지하는 것 때문에 혹시라도 빈번하게 거행했던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춘당대(春塘臺)와 영화당(暎花堂)의 사이는 지역이 현관(賢關)055)                                             과 가까워 선비를 양성하고 선비를 책려(策勵)하는 것은 곧 ‘많은 선비들이 있으니 문왕(文王)께서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는 곳이고, 백성의 간난(艱難)함을 알고서 농사를 살펴보아 풍년이 든 광경을 본다는 것은 곧 ‘날씨가 개어 별이 나오면 일찌감치 수레를 내어 뽕나무 밭에 나가 머물러 쉬며 농사를 살핀다.’는 지역이며, 전쟁에 나아가고 군비(軍備)를 다스리는 데 이르러서도 또한 ‘〈출정(出征)하여 돌아와서는〉 귀를 벤 자의 수를 근궁(芹宮)056)                                             에 제사를 올리며 고유(告由)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근래에 삼가 듣건대, 명분이 없는 때에도 번번이 임관(臨觀)하시는 일이 많고 그만두어야 할 일을 또한 친히 행하시어, 간혹 승지·사관이 알지 못하고 의위(儀衛)가 갖추어지지 않은데도 군사들이 대궐[禁門] 안까지 출입하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사냥이 시기가 있어야 하고 유예는 법도를 삼아야 하는 뜻입니다. 더욱이 봄날이 조금씩 길어지면 이날을 아껴야 하는데, 경연(經筵)은 번번이 탈품(頉稟)을 받아들이고 원좌(苑座)는 간혹 오랫동안 정지하지 않으시니, 시사(試射)는 덕(德)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인데, 쓸데없는 놀이를 즐기는 것은 도리어 덕을 잃고 있습니다. 위후(衛侯)가 진(陣)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배우지 않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성상께서는 깊이 유의하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납(嘉納)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습(近習)을 억제함에 있어 궁중(宮中)과 관부(官府)가 일체인 것은 곧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입니다. 다만 근일에 각궁의 수본(手本)으로 묘당에 계하(啓下)한 것에 대해 해도(該道)에 조사를 행하게 한즉 번번이 모두 상반(相反)되는데, 억지로 빼앗지 않은 토전(土田)을 제외해도 필시 하민(下民)을 구허 날무(構虛捏無)한 것이니, 이는 소민(小民)과 이익을 다툴 뿐만 아니라, 무릇 가렴 주구(苛斂誅求)를 각궁에서 앞장서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수본이 도(道)에서 조사한 것과 상반되는 것은 바로 속여서 숨기기 때문이며, 양탈(攘奪)이 향리에 두루 미치고 있으니, 바로 침학(侵虐)하는 것입니다. 가령 해궁(該宮)에서 마땅히 추쇄(推刷)할 물건을 백성에게 잃어버림을 당했을 경우 이는 이른바 차라리 잃어버릴망정 오히려 서로 다투어 이익을 얻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더구나 구차하게 작은 이익을 보고 백지로 마구 빼앗는 것이겠습니까? 신 또한 이제까지 한두 번 쟁집(爭執)하여 아뢴 적이 있었지만, 혹 의언(議讞)하는 시초에 반드시 따라서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혹은 배소(配所)에 도착한 후 곧바로 석방하여 용서하셨습니다. 따라서 형정(刑政)이 너무 구차스러운 데 관계되니, 이 무리들이 어디에서 징계하고 꺼려하겠습니까? 이후로 만약 먼저 아뢴 수본이 해도(該道)의 사안(査案)과 상반되면, 각 해궁(該宮)과 내사(內司)의 차지 중관(次知中官)을, 청컨대 묘당에서 초기(草記)하여 곧바로 속여서 숨기고 침학한 율(律)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봄에 행행(幸行)하셨을 때 삼가 어전(御前)의 전배(前排)057)                                             를 삼가 보았더니, 전에 견주어 너무 많았습니다. 옛날 영묘조(英廟朝) 때에는 전배가 수십 쌍(雙)에 지나지 않았었는데, 선조(先朝) 때 그 제도를 조금 증가하여 일정한 수를 정하고 증감시켜서 꼭 알맞게 하니, 의위(儀衛)가 크게 갖추어졌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또 수십 쌍을 더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도극(刀戟)은 격자(擊刺)를 갖추는 것이고 기치(旗幟)는 방색(方色)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전배에 이르러서는 호령(號令)을 전하여 절제(節制)를 소통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척계광(戚繼光)058)                                             의 《기효신서(紀效新書)》로부터 비로소 명목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남(指南)059)                                             에 실은 청도도(淸道圖)에는 곧 원융(元戎) 10승(乘)이 진행하는데, 순령기(巡令旗)는 단지 약간의 짝을 이루고 있을 따름이며, 대가(大駕)가 거둥할 때 난거(鑾車)는 앞에 있고 속거(屬車)는 뒤에 있으므로, 무릇 삼군(三軍)으로서 진행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모두 어가(御駕)를 호위하는 친병(親兵)들인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전배를 많이 따로 설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어가 앞에 진열하는 까닭에 기계(器械)와 복색(服色)은 화려하고 선명하여야 하므로, 한번 조치하여 준비하려면 쓸데없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듭니다. 지금 각영(各營)이 텅 빈 때를 당하여 말류(末流)의 폐해(弊害)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외에 군용(軍容)에 이르러서도 또한 힘써 사치스럽고 화려함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효묘조(孝廟朝) 때에는 전사(戰士)가 비단으로 두건(頭巾)을 만든 것 때문에 연신(筵臣)이 그것의 불가(不可)함을 대단히 말했었습니다.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군중(軍中)의 복식(服飾)을 선명하게 만들게 하여 한때 적을 위협하는 계책을 삼았었는데, 영구히 제도를 정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또 총융청(摠戎廳)을 반드시 수가(隨駕)하게 하는 것 또한 구제(舊制)가 아니니, 대개 총융청은 원래 단속하고 입대(立待)할 군사가 없고, 표하군(標下軍)·잡색군(雜色軍) 또한 봉료(俸料)를 받는 군사가 아니므로, 이전부터 일찍이 영문(營門)으로 책임을 지우지 않았었습니다. 근래에 보건대, 도성 안에서 동가(動駕)할 때에도 또한 모두 삼영문(三營門)과 함께 참여하게 하므로 복용(服用)·기장(器仗)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차대(借貸)하고 있으며, 표하군들을 날짜를 계산하여 고립(雇立)하고 있으므로, 장차 책응(策應)하여 지탱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신은, 어전의 전배는 한결같이 선조(先朝)에서 정한 제도를 준수하여 더 설치하지 말고, 기타 군용(軍容)의 수용(需用)도 한결같이 검약(儉約)함을 따라서 총융청에서 다른 영문과 수가(隨駕)하는 데 함께 참여하는 것을 회복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병판에게 하문하자, 병판                     김이익(金履翼)이 말하기를,
"전배가 지나치게 많다는 대신의 주달이 마땅하니, 이제부터 한결같이 선조에서 정한 제도에 의거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면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가, 곧 정경(正卿)을 보내어 별유(別諭)를 가지고 가서 돈독히 권면하게 하였다.

 

윤5월 28일 계사

차대(次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우상 이 출사(出仕)하여 국사(國事)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였는데,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말하기를,
"신이 젊어서 학문을 익히지 못하여 곧 음직(蔭職)에 처음 벼슬살이하였으나, 이미 지식이 없었으니 어찌 재기(才器)가 있겠습니까? 또 신의 나이가 이미 70세로 치사(致仕)할 때가 되었으니, 더욱 어찌 조금이나마 감당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지나치다. 선조(先朝) 때에도 또한 이미 치사를 허락하였다가 거듭 매복(枚卜)에 응한 자가 있었다. 듣건대, 경이 내년에 70세가 된다고 하는데, 진실로 70세에 반드시 모두 치사하게 한다면, 조정의 위에 어찌 원로로서 숙덕(宿德)을 지닌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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